칼빈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는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세르베투스가 정죄 받게 된 그의 저서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신화 속의 괴물(Cerberus)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고 1546년에서 1548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가게 된다. 그 편지 중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징계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 밖에 없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저서

이 당시 칼빈은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완성하였다. 세르베투스는 그것을 누르기 위해 “기독교의 회복”(Restitutio Christianismi)를 썼다 (사진 참조).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 그리고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이 훗날 재판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빈에게 보냈다. 그는 그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 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 책이 출판 된 이후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단 번에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책임을 알았다.

비엔나에서 로마교회로 부터 사형 선고를 받음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귀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라 불리는 프랑스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Lyon)에 아르네(Arneys)로 불리는 친척이 있었다. 아르네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트리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아르네의 편지에 대해 트리는 반대하며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된다. 솔직한 내 심정은 이렇다 —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는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아르네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트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여기에 칼빈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리는 칼빈을 간신히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트리는 그것을 아르네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었다: “이 편지들을 칼빈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빌라노바누스(Villanovan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는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거기서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가 자리를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의 사진을 놓고 “산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 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중세 로마교회는 이단자들에 대해서 긍휼이 없었다. 세르베투스가 도망치고 얼마 되지 않아 칼빈이 있던 제네바와 또 로잔에서 공부하여 프랑스에서 복음을 전하려던 다섯 명의 학생들이 리용에서 붙잡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이 시대는 칼빈이 제 멋대로 자기를 주장하던 시절이 아니다. 칼빈 자신 조차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던 시대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네바에서 가톨릭 교도가 죽임을 당한 일은 없었다.

탈출 후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나타난 세르베투스

이처럼 이미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에 나타났고 거기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르베투스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애초에 숨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엔나 또는 툴루즈(Toulouse)에서는 그레노블(Grenoble), 모단(Modane), 그리고 투린(Turin)을 거쳐가도록 되어 있지, 제네바까지 멀리 돌아 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미 1546년 당시 칼빈은 그의 친구 파렐(Farel)에게 편지를 쓰며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면, 제게 영향력이 있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도록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런 단호함을 당시 편지를 주고 받던 당사자들인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더욱 잘 알았다. 그런 세르베투스가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갔다면 그 이유로 추정되는 것은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자유당(Libertine)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칼빈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칼빈은 그들 때문에 많은 곤란을 당하였다.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은 제네바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로마를 은혜의 복음 전파를 위한 기점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달은 것 처럼, 칼빈은 제네바를 그 기점으로 생각하였던듯 하다. 개신교회를 저해하려는 것은 로마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주장을 무너뜨리려 했던 세르베투스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칼빈이 “교만하고 악마적인 세르베투스를 무너뜨릴 망치”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재판을 열었다. 이것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재판과는 다르다. 이단자들에 대해 무자비했던 로마교회 앞에서 세르베투스는 울면서 자기를 숨겼을지 모르나 제네바 시의회라면 다르다. 거기서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주권을 제거하려는 아미 페랑(Ami Perri)n, 베르텔리에(Berthelier), 그리고 방델(Vandel) 같은 사람들의 당파가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라면 세르베투스는 승산이 있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는 그의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빈에게 던진 그의 공격에서 묻어난다: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장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개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들을 갖고 그를 너무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모습 속에서 세르베투스가 얼마나 자신만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특유의 차분함으로,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는 등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하나씩 지적해 나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모든 물질이, 심지어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시의회 주관이었던 재판

칼빈은 제네바에 거주하는 이방민이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이 그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하나, 그는 시민권이 없었고 고로 투표권도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빈은 거기서 목회를 하였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뿐이었는데,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도 없었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신학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힘들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최후의 단계에서 삼일에 걸친 논의 끝에 가장 고통스런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칼빈은 의회 쪽에 그의 형벌을 감해 달라고 구하게 된다.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시의원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칼빈이 1553년 10월 26일에 파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Opera, XIV, pp. 590, 613-657).

더 자세한 사건의 흐름은 적지 않겠다. (Emanuel Stickelberger의 “Calvin – An Authentic Account of the Life & Ministry of John Calvin”이 좋은 참조 문헌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내거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다. 그 시대에는 오늘 우리 사회가 일부 죄에 대해 사형을 행하는 것처럼 신성모독에 대해 사형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사형 제도의 옳고 그름을 지금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칼빈이 세르베투스 사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 우리로서는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칼빈은 오류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첩을 두었던 사람이다. 그 시대의 사회 제도에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통념들을 고려하지 않고, 칼빈을 자기 의견과 다르면 마구잡이로 사형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왜곡하는 것은 부당하다.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칼빈인가? 아니면 세르베투스는 시대의 현실 아래서 사형이라는 형벌을 당한 것인가?

칼빈의 전한 말이 어떤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는 제쳐두고 그에 대한 인신공격 아래 그러한 칼빈이 한 주장들은 틀렸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칼빈이 싫은 것이 아니라 칼빈 뿐만이 아니라 루터 등 개혁자들이 한목소리로 전한 바 죄인은 자유의지로 구원의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복음이 못 마땅한 것을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표현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