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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은 어디에 있는가?

 

 

 

 

  

-라우즈 산의 성서적 의의

  

운곡(雲谷) 강훈기(康勳基) 지음

 

 

   

순 서

  

I.       서 : 사실을 기록한 하나님의 이야기

II.      출애굽 연대

III.     홍해를 건넌 시기 장소

IV.      출애굽 경로

V.      시내 찾기의 역사

VI.     고대 미디안의 위치

VII.    시내 산의 위치

VIII.     

 

 * 이 자료는 “시내산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 강훈기, 출판사: 교보문고 퍼플, 2014; www.kyobobook.co.kr)”를 요약해서 저자가 정리한 자료로, 이 자료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거나 보충설명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연락처: E-mail: [email protected] ,  Phone: +966-50-522-8137

 

 

  

 

  1. 출애굽 연대

 

출애굽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밝혀 줄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아직까지도 출애굽 연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출애굽 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이집트의 고대 역사연대기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연대기도 그 정확성에 많은 의문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의 기록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때가 첫 번째의 유월절을 끝낸 다음 날, 그러니까 첫 번째 무교절의 첫째 날인, 히브리력으로 제 1년 1월 15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력으로 제 1년이 과연 언제이냐?” 하는 것이다.

 

1. 전기설 (전통설): 주전 1446년

열왕기 상 6장 1절에 의하면 솔로몬 왕이 출애굽 한 지 480년이 되는 해인, 재위 4년째인 주전 966년에 예루살렘 제 1성전건축을 시작한다. 그래서 주전 966년에서 48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1446년이 출애굽 한 해가 된다.

 

2. 축소설: 주전 1446년

이집트의 고대 역사연대기 중 불분명한 왕조에 해당하는 기간인250~350 년 정도 삭감하면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출애굽을 연상케 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전통설의 출애굽 연대와 맞아 떨어져 주전 1446년의 출애굽을 뒷받침 해준다고 주장한다.

 

3. 후기설: 주전 1270~125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다(출 1:11). 이를 근거로 파라오 람세스 II세 때 출애굽을 한 것으로 본다. 나아가 영국의 이집트 학자인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1896년에 이집트의 테베(Thebes)에서 “메르넵타의 승전비”를 발굴했는데 이 승전비에 가나안을 정벌하는 기사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승전비가 주전 121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져 후기설을 뒷받침 해준다.

 

4. 이스라엘 역사 연대표

 

       분

아브라함의

가나안 입성

출 애 굽

솔로몬의

1성전 건축

세더올람 주타서

BC 2073

BC 1440

BC 960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BC 1987

BC 1552

BC 960

현 이스라엘 정부

BC 1600년대

BC 1200년대

BC 960

         

             각종의 성경관련 서적들에서 솔로몬 왕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시작 이전의 연대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면 각기 서로 다른 연대표들로 인해 혼란을 주고 있다. 그것은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성경의 기록이 없기 때문인데, 유일하게 열왕기 상 6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되는 해인, 솔로몬 왕 재위 4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연대표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종의 성경관련 서적들에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전의 연대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자들이 고대의 유적들에 대한 탐사와 발굴 작업을 통해, 찾아낸 유물이나 유적들에 기록되어 있는 고대의 문자들을 해독하여 부분적으로나마 밝혀낸 역사 연대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고대의 성경 연대기가 나왔다.

 

 

5. 역사적 사실을 밝힌 성서고고학에 의한 연대기

출애굽 사건은 후기청동기시대(BC 1550~BC 1200)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에,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가 있어, 이미 철기시대 (BC 1200~BC 586)가 시작되었음을 성서는 입증해주고 있다.

 

5.1 역사적으로 본 이집트의 전성시대( BC 1550~BC 1400)

이집트의 전성기는 신왕조(BC 1550~BC 1069) 때로 이집트에서 외래 민족인 힉소스를 추방하면서 시작된다. 아모 I(BC 1550~BC 1525) 비롯하여 투트모세 I세(Thutmose I: BC1504~BC1492), 투트모세 III (Thutmose III: BC1479~BC1425), 아멘호II(Amenhotep II: BC1427~BC1400) 차례 걸쳐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5.2 역사적으로 본 이집트와 히타이트(헷)의 대립 시대(BC 1400~BC 1250)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융성하기 시작한 히타이트(헷)가 철기문명을 일으키면서 주전 1400년경에는 남진하여 미탄니를 복속시키고, 당시 이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이집트를 시리아까지 밀어내고 대립한다. 그리하여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II세(BC 1279~BC 1213)가 영토의 회복을 위해 주전 1275년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강력한 철병기를 가지고 있던 히타이트를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대치상태에 있다가 주전 1259년에 세계 역사상 최초의 평화조약을 맺는다. 

 

 

 

5.3 역사적으로 본 해양민족의 출현 및 침투경로(BC 1250~BC 1150)

주전 13세기 중반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해양민족의 발호로 지중해 주변 국가들이 혼란기에 빠져들어 패권을 다투고 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가나안 지방에서 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치 못한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해양민족들과 함께 가나안에 유입해 들어온 블레셋 족속은 지중해 연안의 5개 지역을 차지하고 정착한다. 그리고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의 승전비에는 주전 1209년에 나일 강 삼각주로 쳐들어 온 해양민족(바다사람) 6,000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5.4 성경 상의 철에 대한 기록 검토

  •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금, 은, 놋 등을 바치게 한다. 그런데 철제품이 봉헌 품목에서 빠졌다(출 25:2-7).
  •   (철)으로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못하게 하다(출 20:25).
  •   에발 산에 제단을 만들 때 철제 연장으로 다듬은 돌로 단을 쌓지 못하게 하다(수 8:31).
  •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철병거가 있었다(수 17:16).
  •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골짜기의 주민들은 쫓아내지 못하다(삿 1:19).
  •   야빈 왕이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심히 학대하다(삿 4:3-13).
  •   주전 1018년에 믹마스에서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 백성의 손에는 철로 만든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다(삼상 13:19-22).

 

히타이트가 주전 1400년경에 강력한 철병기를 앞세워 가나안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또한 해양민족들도 주전 1250년경부터 철병기를 앞세워 가나안 지방을 혼란에 빠뜨리며 이집트와 히타이트를 무력화 시켰다. 그러나 철병기가 없던 이스라엘은 강력한 철병기를 가지고 있던 가나안 지방의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주로 산악지대에서 오랜 기간을 머물러야 했다. 더욱이 가나안 지방 지중해 변의 5개 지역에 정착한 블레셋과 사울 왕이 주전 1018년에 믹마스에서 전투를 벌일 때에도 이스라엘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고, 사울 왕과 아들 요나단만 철병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성서를 통해서도 출애굽 당시에는 철기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듯이 출애굽은 철기 시대가 시작되는 주전 1200년경의 바로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5.5 성서고고학에 의한 연대기 분석결과 (현 이스라엘 정부의 역사 연대표를 기준 작성)

 

   대

   대

사 건 내 용

후기 청동기 시대

BC 1550~BC 1400

이집트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다.

BC 1400~BC 1250

가나안 지방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대립하다.

BC 1275~BC 1259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오론테스 강에서 전투를 벌리다.

BC 1250~BC 1150

해양민족의 출현으로 가나안 지방이 혼란에 빠지다.

BC 1270~BC 1220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다(광야 40년 포함)

BC 1220~BC 1200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을 정복하다.

철기 시대

BC 1200~BC 1020

사사들을 세워 통치하는 사사 시대를 갖다.

BC 1020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왕위에 오르다.

BC 1004

다윗이 왕위에 올라 가나안 정복사업을 거의 완성하다.

BC 965~BC 930

솔로몬 왕이 영토를 확장하여 이스라엘의 전성시대가 되다.

BC 960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제1성전 건축시작을 시작하다.

 

 

 

  1. 홍해를 건넌 시기 및 장소

 

  1. 홍해를 건넌 시기

 

  •   유대전승에 의하면 파라오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사실을 4일째 되는 날에 알았고, 그의 군대를 이끌어 믹돌의 비하히롯 곁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곳까지 3일 만에 추격해 왔고, 7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모세가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이 건넜으며, 파라오의 군대는 모두가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 날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고, 이를 절기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출 13:6).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아빕월 14일 저녁)과, 무교절(아빕월 15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7일간)을 지키고 있다.
  •   오늘날에도 무교절 마지막 날에 유대회당에서는 바다를 갈라 건넌 감격의 노래인 바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1. 홍해를 건넌 장소

홍해를 갈라 건넜다고 주장하고 있는 장소들로는 전통적으로 믿어온 수에즈 만의 상단부, 수에즈 만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여러 호수들, 아카바 만의 누웨이바 앞바다, 그리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티란 해협 등으로 8 이상이 바다를 갈라 건넌 장소로 주장되고 있다.

 

홍해를 갈라 건넜다고 주장하는 주요 장소들

  

2.1 전통설: 수에즈 만의 상단부를 갈라서 건넜다는 주장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얌숩(ים-סוף) 홍해라고 번역되면서 전통적으로 홍해의 수에즈 상단부를 갈라서 건넌 것으로 믿어왔.

 

  

2.2 아카바 만의 누웨이바 앞바다를 갈라서 건넜다는 주장

와이엇(Ron Wyatt)측이 아카바 만의 누웨이바 바닷가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과 바다 속에서 발견부서진 전차의 바퀴들인데, 돌기둥은 솔로몬 왕이 홍해를 갈라 건넌 것을 기념하여 세운 기둥이고, 부서진 전차의 바퀴들은 바다를 건널 , 바다 속으로 뒤쫓아 들어오다가 몰사 당한 이집트 전차부대의 잔해들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2.3 비터 호수를 갈라서 건넜다는 주장

히브 원전성경에 홍해 얌숩(ים-סוף)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일반적인 의미의 갈대바다(Sea of Reeds)라고 해석하여 갈대가 살 수 있는 호수를 이스라엘이 건넌 장소로 보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홍해의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은 바다를 갈라 건넌 장소가 아니다. 갈대는 소금기가 있는 바다에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하히롯이 “운하의 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에담, 수르(에담) 광야, 비하히롯, 믹돌 등의 위치가 비터 호수의 부근인 점을 감안하여 비터 호수를 갈라서 건넜다고 주장한다.

 

 

 2.4 발라 호수를 갈라서 건넜다는 주장

히브리어로 “슈(שוב)  “되돌아가다(Turn back)” “방향을 바꾸다 (Turn aside)” 뜻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되돌아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되돌아가 지중 가까이 (Lake of Ballah)를 갈라 건넜다고 주장하고 있다.

 

 

 

2.5 구약 성경에 얌숩이 기록된 구절 및 가리키는 장소

구약 성경에는 얌숩(ים-סוף) 24 개의 구절에 사용되었는데, 4개의 구절은 수에즈 만을 가리키고, 8개의 구절은 아카바 만을, 그리고 12개의 구절은 장소가 불분명한 바다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갈대의 바다”라는 뜻이 무의미 해진다.

 

   분

수에즈 만

아카바 만

장소가 불분명한 바다

히브리 성경의

얌숩(ים-סוף)

10:19,

13:18,

33:10,

33:11

23:31, 민14:25

21:4, 1:40,

2:1, 11:16,

왕상9:26, 렘49:21

15:4, 출15:22, 신 11:4,

2:10, 수 4:23, 24:6,

9:9,  106:7, 시 106:9,

106:22, 시 136:13, 136:15

24

4

8

12

  

 2.6 아카바 만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에 대한 검토

          성경의 어느 구절에도 홍해를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으로 구분해서 기록해 놓은 곳이 없다. 다만 이사야서 11장 15절에 “애굽 해만”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와서 미국의 아마추어 탐험가였던 론 와이엇(Ron Wyatt) 등이 홍해를 갈라 건넌 장소가 아카바 만의 누웨이바 앞바다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 주장은 누웨이바 앞 바닷가에서 발견된 기둥과 바다 속에서 발견된 부서진 전차바퀴와 사람의 뼈 등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뒤쫓아 들어온 이집트 병사들의 뼈와 타고 있던 전차의 부서진 바퀴라고 단정해버린 것이다.

이 주장은 단지 하나의 가정일 뿐이고, 어떤 가능성에 대해 필히 수반되어야 하는 과학적인 검증 등의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기록들과도 상충되는 부분이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나아가 아카바 만의 존재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도 다음의 지도들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70인역 성경번역 당시 보다 약 200년 이상이 지난

AD 15년의 스트라보 지도에 아카바 만이 누락되어있다.

 

 

AD 1711년에 제작된 지도에도 시나이 반도와 아카바 만이 빠져 있다.

 

 

  AD 1782년에 제작된  칼스텐 니부르의 지도에 처음으로 아카바만이 등장한다.

 

2.7 홍해를 갈라 건넌 장소 찾기의 진보된 이론들 검토

 

2.7.1 나일 델타에서의 동풍실험

이 실험은 바닷물이 성서의 기록처럼 강한 동풍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쪽은 육지를 끼고 바닷물이 있는 다른 쪽만 갈라지도록 하는 실험의 결과이다. 쪽만 갈라서 건넜다면 굳이 바다를 가를 필요 없이 바닷물이 없는 육지 쪽으로 통과하면 되는 것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63mph의 풍속으로 바닷물이 갈라지는 것을 입증한 사실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 나일델타에서의 실시한 과학자들의 동풍실험(풍속: 63 mph)

 

2.7.2 지각 판의 변동 및 지구의 온난화

이 이론은 출애굽 당시에는 수에즈 만 끝에서 팀사 호수까지의 저지대가 바다였고 와디 투밀랏을 통해 나일 강과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지구의 지속적인 지각 판 변동 및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의해 바다가 말라갔고, 오늘날의 수에즈 운하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이사야서 11장 15절의 말씀을 성취한 것으로 본다.

 

  •   이집트 나일델타해안에 쌓인 퇴적층(堆積層)에 대한 한 연구는 나일 델타 북동쪽이 지난 7500년 동안 40년에 30cm씩 침몰되었음을 밝혀냈다(내셔널 지오그래픽 1992년  2월, 과학 뉴스 1993년 8 월 7 일).
  •   지중해의 수면이 25년 마다 2.54cm씩 상승하고 있다.
  •   2005년 9월에 에티오피아의 아파르 사막에 발생한 지진으로 8m의 폭으로 60km나 길게 갈라졌다.
  •  

  • 에티오피아의 아파르 사막에 발생한 지진으로 생긴 균열로 홍해의 3중 접합 점에서 가까운 곳이다.

 

  •   판구조론에 의하면 아라비아 판은 매년 1.9cm씩 갈라지므로 3,000년 전보다는 약 57m나 균열이 생겼고, 아프리카 판은 매년 0.6cm씩 북쪽으로 움직이므로 3,000년 전보다는 약 18m나 이동했다. 이처럼 지각 판들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홍해의 융기대도 조금씩 솟아올라 지형이 바뀌었다는 이론인 것이다.
  •  

  •  

  

3. 홍해를 갈라 건넌 장소에 대한 검토 결과

 

  • 전통적으로 70인 역에 의존해 수에즈 만의 상단부를 갈라 건넌 장소로 믿어왔다.
  • 히브리 원전성경의 “얌숩”의 뜻이 “갈대바다”이므로 갈대가 살 수 있는 바다를 갈라 건넌 것으로 주장되었으나, 수에즈만과 아카바만을 가리킬 때에도 “얌숩”이라고 표현했다.
  • 출애굽 당시에는 팀사 호수와 수에즈만 사이가 바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와디 투밀랏을 통해 나일 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구조론의 지각변동 현상 및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의해 바닷물이 조금씩 말라간 탓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지형으로 바뀌었다.
  • 유대 전승에 의해 홍해를 건넌 시기가 7일 째 되는 밤이었던 점을 감안하고, 지구의 지각변동 및 온난화 현상에 의한 지형의 변화가 생겼다는 이론이 보다 더 타당성이 있다. 또한 수에즈 만과 팀사 호수 사이의 바다를 갈라서 건넜다는 이론은 이사야서 11장 15절의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라고 한 말씀도 성취하고 있다.

 

 

 

  1.           출애굽 경로

 

1. 성경 기록을 통해 본 출애굽 일정

 

  •   1년 1월 15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다 (출 13:18).
  •   1년 1월 21일: 모세가 홍해를 갈라 그의 백성이 바다를 건너게 하다 (출 14:21-30).
  •   1년 2월 15일: 신 광야 도착하다 (출 16:1).
  •   1년 3월 15일: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산 앞에 장막을 치다 (출 19:1-2).
  •   2년 2월 20일: 시내 산에서 10개월 5일간을 머물다 떠나다 (민 10:11-12).
  •   기브롯 핫다와에서 30일 간을 머물다 (민 11:18-20).
  •   하세롯에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으로 벌을 준 사건으로 7일 간을 머물다 (민 12:1-15).
  •   하세롯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20 군데에 진을 치다 (민 33:18-36).
  •   바란광야가데스에서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 쳐서 차지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나, 이를 두려워하여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낸다. 그러나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반대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사건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하게 되고, 갈렙과 여호수아 이외의 출애굽 1세대는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신 1:20-46).
  •   40년 첫째 달에 신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미리암이 죽다 (민 20:1).
  •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의 므리바에서 물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로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는다(민 20:2-13).
  •   모세가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이 에돔의 가운데로 통과하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다(민 20:14-21).
  •   40년 5월 1일: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 호르 산에 도착, 아론이 죽다; 30일간 애도 (민 20:22-29, 33:37-38).
  •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여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이 걸리다 (신 2:14-15).
  •   41년 1월 10일: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편 길갈에 진을 치다 (수 4:19).

 

 

2. 출애굽 경로별로 본 광야 40년

 

  •   라암셋 → 신 광야: 30일
  •   신 광야 → 시내 산: 30일
  •   시내 산에서 머문 기간: 11개월 5일
  •   시내 산 → 가데스 바네아: 최소한 55일 이상
  •   가데스 바네아 → 세렛 시내: 38년 간

 

 

3. 출애굽 경로라고 주장하는 주요 경로들

 

▲ 출애굽 경로라고 주장하는 주요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3.1 전통적으로 믿어온 경로

 

▲ 전통적으로 믿어온 출애굽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3.2 론 와이엇(Ron Wyatt)측이 주장하는 경로

 

 누웨이바 앞 바다를 건넌 출애굽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3.3 매나쉬 할-엘 교수가 주장하는 경로

 

3일길에 있는 신-비셔 산을 거치는 출애굽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3.4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는 경로

 

▲ 알-라우즈 산을 시내 산으로 본 출애굽 경로의 지도이다.

 

 

 4.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에 대한 검토

 

▲ 와디 무사의 전경이다. 멀리 보이는 산들 중에서 왼쪽으로 (Jabal Harun)이다.

와디 무사에 모세 있고, 사진 오른 너머로 페트라 자리잡고 있다.

 

4.1 전통적으로 믿어온 가데스 바네아: 페트라

 ·   1세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페트라 인근 지역이 가데스이다”라고 기록했다..

  •   4세기 유세비우스 가이사라의 성경백과 사전(Onomasticon)에도 “페트라가 가데스이고, 호르 산은 페트라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아론이 죽은 산이다”라고 기록했다.
  •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자발 하룬에 기념사원을 세웠는데, 무슬림이 점령한 후 부터는 회교사원으로 바뀌었다.

 

4.2 성경의 기록으로 살펴 본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

 ·   엘람왕 그돌라 오멜의 연합군이 엔미스밧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을 쳤다(창 17:4).

  •   하세롯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치고(민 12:16)
  •   하세롯을 떠나 릿마에 진을 치고(민 33:18)
  •   에시온 게벨을 떠나 신 광야가데스에 진을 치고(민 33:36)
  •   바란 광야가데스에서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 쳐서 차지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신 1:20-21).
  •   정탐꾼을 먼저 보내어 염탐하고, 어느 길과 성읍으로 가야 할지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고 주장한다(신 1:22).
  •   모세가 바란 광야가데스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낸다(민 13:3).
  •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바란 광야가데스에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다(민 13:25-26).
  •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가서 치라고 하신 명령을 거역하다(신 1:26-32).
  •   이스라엘 백성이 결과 보고를 듣고 불평하자, 찬성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악평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케 한 10명을 재앙으로 죽인다(민 14:1-38).
  •   너희는 내일 방향을 돌이켜 홍해 을 따라 광야(바란)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다(민 14:25).
  •   뒤늦게 후회하고 모세의 말리는 것도 무릅쓰고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가 싸웠으나 패하고 호르마까지 쫓겨 온다(민 14:40-45).
  •   이스라엘에게 명령을 거역한 죄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하고, 1세대의 자손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한다(신 1:34-39, 민 14:27-35).
  •   광야생활 40년이 되는 해의 첫째 달에 이스라엘이 신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물이 부족하여 불평하는 백성에게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나오게 할 때 여호와의 거룩함을 가린 죄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를 신 광야므리바 물이라고 하다(민 20:12-13).
  •   신 광야 에돔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당신의 땅 가운데를 지나는 왕의 대로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민 20:14-21).
  •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에돔 땅 변경에 있는 호르 산에 이르렀을 때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에서 거역한 죄로 아론이 40년 5월 1일에 호르 산 정상에 올라가 죽는다. (민 20:22-24, 민 27:14, 민 33:38-39)
  •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인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쳐서 그중 몇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는 통에, 이스라엘이 보복으로 아랏 왕을 쳐서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고, 그곳을 호르마라 하다(민 21:1-3).
  •   에돔 땅 변경의 호르 산에서 에돔 땅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것을 거절당하고, 호르 산에서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다시 돌아서 가야한다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상한다(민 21:4).
  •   홍해 길바란 광야로 들어가서 세일 산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방향을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다.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다투지 말라고 하다(신 2:1-5).
  •   세일 산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고 엘랏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돌아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나가다. 모압 땅도 기업으로 준 곳이니 다투지 말라고 하다(신 2;8-9).
  •   에돔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살았다(옵 1:1-3).
  •   솔로몬 왕이 홍해물가 엘롯 근처 에세온게벨에서 배들을 짓다(왕상 9:26).
  •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여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 동안이었다. 모든 군인들을 쳐서 진영 중에서 멸하시어 다 죽는다(신 2:14-15).

 

 4.3 성경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를 분석한 결과

  가데스 바네아는 바란 광야와 광야에 걸쳐있으며, 돔의 경계에 있다.

  신 광야는 네겝 광야와 인접해 있고, 에돔의 경계가 야에 인접해 있다.

  에돔에 왕의대로가 있고, 길로 지나가면 에돔의 가운데를 통과한다.

  아론이 죽은 호르 산은 네겝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고, 돔의 경계에 있다.

  네겝 광야에는 아랏과 호르마가 있고, 가나안 지방이었음  수가 있다.

  므리바의 물은 광야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있다.

  호르 산에서 돌이켜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가면 세일  이른다.

  세일 산에서 돌이켜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을 지나 북으 나아간다.

  하나님께서 세일 산은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다투 말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남쪽경계가 사해남쪽 끝에서 서편에는 에돔 경계에 인접한다.

  에돔 자손은 세일 산지의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산악지역에 살았다.

  에돔의 북동쪽 경계는 세렛 시내까지이고, 남쪽은 아카바 만까지이다.

 

4.4 성경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를 분석한 결론

①   에돔 영역 북동쪽 시내까지이고, 남쪽 카바 만까지였다.

        그리고 서쪽의 경계는 가데스 바네아가 걸쳐있는 바란 광야와 신 광야에 인접해 있었다.

  •   페트라는 에돔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세일산지에 위치해 있다. 험준한 산악 지역이어서 200만이 넘는 인구가 오랜 기간을 머물 있는 지역이 아니다.

  아론 에돔 심장부 에돔경계지역에 있어야 하고, 네겝 광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④  이스라엘이 지나가고자 했던 왕의대로는 에돔의 영역 안에 있고, 이 도로를 지나가려면 에돔의 가운데를 통과하여야 한다.

  모세 반석 쏟아지 가데 므리바의 물은 페트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가데스에 있다.

   페트라의 남서쪽 4~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자발 하룬이 호르 산이라면, 이스라엘이 에돔 통과를 거절당했으므로, 자발 하룬에서 돌이켜, 가나안을 향해 북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호르 산에서 돌이켜 홍해 길로 산에 돌아다니다 엘랏 에시 벨 곁을 지나 광야 길로 북상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성서의 기록과 맞지가 않는다.

   페트라 가데 바네아이고, 하룬 산이라면, 페트라에서 자발 하룬으로 가려면 남서쪽 방향이다. 이는 네겝의 아랏 왕이 거주하고 있는 북서쪽 방향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놀래게 해서 사건을 일으키게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 에돔의 경계가 광야에 인접해 있어 페트라와 자발 하룬이 에돔 영역 안에 있다는 사실을 묵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일 산을 에서(에돔)에게 기업으로 주셨고, 이스라엘에 다투 말라 하셨으므로, 출애굽 당시 분명히 에돔의 영토였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은 에돔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돔 영역 (內) 세일 산지에 있는 페트라는 가데스 바네아가 아니고, 자발 하룬은 호르 산이 아니다.

 

    1. 페트라의 주거환경에 대한 검토

· 에돔이 세일 산지에 정착했고, 바위틈에 거주했다.(신 2:5)

  •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는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라고 그들의 저서에 기록했다.
  • 주로 붉은 사암층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지이다.
  • 페트라의 계곡 내(와디 무사)에는 2~3개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적어 많은 사람이 살기에는 부족했다.
  • 나바티아 왕국(BC 312~AD 106) 당시에 페트라를 수도로 정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물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페트라 계곡 밖의 오른 편에 있는 와디 무사 지역 등에서 바위를 파고 깎아 수로를 만들어 끌어들인 물을 수많은 저수조에 저장하여 사용했다.
  • 로마제국이 나바티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페트라를 차지한 후 원형경기장 등 많은 시설물들을 만들었고, 수로 및 저장 시스템을 확장하여 약 10만 명의 인구가 살 수 있는 급수시스템을 구축하였다.
  • 페트라 지역의 강우량에 대한 조사는 요르단 정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실시했는데 연중 강우량이 가장 많은 시기는 1~2월이고, 평균 강우량은 350mm정도였다.
  • 페트라 밖의 물을 끌어들이는데 이용된 오아시스들은  약 5~6 군데 였다.

 

오아시스 명

위치

시간당 생산량

1일 생산량

아인 시야그(Ain Siyagh)

북서쪽

1.0 m³

24 m³

아인 벱드베(Ain Bebdbeh)

북쪽

2.5 m³

60 m³

아인 브락(Ain Braq)

남쪽

0.8 m³

19.2 m³

아인 암몬(Ain Ammon)

남쪽

1.0 m³

24 m³

아인 무사(Ain Musa)

동쪽

20~40 m³

480~960 m³

   

 

25.3~45.3 m³

607.2~1,087 m³

 

  •   한 사람이 필요한 하루의 물의 양을 40리터(0.04m³)로 보았을 때,  250만 정도가 필요한 하루의 물의 양이 10만 m³나 되므로 턱없이 부족하다.

 

4.6 가데스 바네아 찾기 전개

페트라 지역이 가데스 바네아라고 하는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 19세기에 들어와 많은 학자들이, 출애굽 경로상 위치적으로 가데스 네아일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들인, 시나이 반도 북동부를 중심으로 하여, 바란 광야, 광야, 네겝 광야와, 사해 남쪽의 아라바 광야를 대상으로, 오아시스들을 찾아 광범위한 탐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가데 바네아라 주장 장소들 살펴보 1831 라우머(Karl Von Raumer)가 아라 광야하습(Ain Hasb), 1838 에드워 로빈 (Edward Robinson)이 아인 웨이베(Ain Weibeh)를, 1842 로우랜즈(John Rowlands)가 광야 아인 카데이(Ain Qadeis), 1916 울리 (Woolley)와 로렌스 (Lawrence)가 풍부 쿠데이랏 (Ain Qudeirat)을 가데 바네아라 발표 한다.

 하지만 중에서도 시나이(Sinai) 반도의 북동부에 많은 오아시스들이 분포되어 있는 쿠세이마 (el-Quseimah) 지방의 무웨일레(Ain el-Muweilleh), 아인 쿠세이마(Ain Quseimah), 쿠데(Ain el-Qudeirat), 카데이스 (Ain el-Qadeis)를 통틀어 가데스 바네아라고 보는 공감대가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 성립되었고, 받아들여졌다.

 ▲ 가데스 바네아(빨강색)라고 주장하는 주요 장소들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4.7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 검토결과에 의한 출애굽 경로

 

지명이 확실하게 밝혀진 에시온 게벨에서 부터 검토 결과에 의해 밝혀진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를 만든 지도이다.

 

 

 

 

  1. 시내 산 찾기의 역사

 

전통적으로 시내 산이라 믿어오고, 성지순례를 다니는 산은 시나이 반도에 있는 모세 산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적인 탐사와 발굴과정에서 밝혀진 결과는 과연 시나이 반도있는 모세 산이 진짜 시내 산인가? 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탐사 팀들이 시나이 반도 내를 샅샅이 뒤지며 탐사활동을 벌였지만 불행히도 출애굽 시기에 해당하는 후기청동기시대의 물이나 흔적들을 별로 찾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탐사 작업에 참여했던 탐사 팀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산을 시내 산이라고 발표하다 보니 13 곳 이상이나 시내 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산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1.   기원 250년경 70인 헬라 성경(Septuagint LXX/OG) 미디 (Midian)을 마드(Madyam)이라고 기록하고,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양떼 근처 (near to the wilderness)” 몰고 호렙 (시내 산)에 와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기록했다(출 3:1).

 

역 본 명

번역 내용

 70인역본(LXX/OG)

광야 근처로(near to the wilderness)

 개역개정 한글판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킹 제임스 흠정역본 (KJV)

사막 뒷편으로(to the backside of the desert)

 표준영어성경 (ESV)

광야 서쪽으로 (to the west side of the wilderness)

 신 국제성경 (NIV)

광야 반대편으로 (to the far side of the wilderness)

 

이처럼 역본들마다 다르게 변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는 셈족계열의 언어(히브리어, 아랍어) 특성상 한 단어가 많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의 “아카르(achar: ﬡקﬢ)” 장소를 뜻할 경우에는 “저편에(Beyond)”, 뒷편에 (backside)”, 반대편에(far side)”, “서쪽에(west side)” 등으로 쓰인다. 그리고 시간을 나타낼 경우에는 “후에(after)”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 단어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번역이 나왔다. 이는 번역 주체들시내 산과 미디안의 위치를 어디로 보았느냐에 따라 역본마다 다르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2.    바울의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이스라엘 역사학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37~AD100)가 시내 산은 아라비아의 미디안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고 그의 역사서인 “유대고대사 (The Antiquity of the Jews)” 기록하였다.

 

4.    초기의 많은 학자 교부들은 시내 산이 홍해의 아카바 만(Gulf of Aqaba) 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는 미디안 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그들의 저서에서 기록 하였다.

 

Pseudo Philo of Alexandria (BC20~AD50)

Claudius Ptolemy (AD100~AD155)

Origen (AD185~AD254)

Eusebius Caesarea (AD270~AD340)

Jerome (AD340~AD420)

 

5.   3세기경부터 수도사(Monks)들이 출애굽 순례운동을 작하면 시나 반도 (Jeber Musa)을 시내 산으로 여기고, 순례를 행하였다.

 

6.   4세기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 황제 (Emperor Constantine: AD306~AD337)의 헬레나 제의 위임을 받아 시나이 반도에 있는 시내 산을 답사한 황제가 꿈에서 산과 가장 부합되는 산이라 하여 산을 성서에 기록된 시내 산이라고 하고 밑에 교회를 세운다(AD 330).

 

7.   6세기 (AD 550년경 )에 유스티아누 황제 (Emperor Justinian: AD527~AD565)가 헬레나 황비가 세웠던 캐더 사원(Monastery of Saint Catherine) 지었다.  

 

⑧   7세기(AD 650년경)에 아라비아 이슬람(Islam) 력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시내 산을 모세 (Jabal Musa)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9.  1967년 6월 5일에 발발된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반도 4일 점령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이집트에 다시 넘겨주기까지 15년간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출애굽사건에 대한 탐사작업으로 성서 고고학자 및 지질학자 등 관련 학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시나이 반도를 철저히 탐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 탐사에 참여하였던 학자인 아비람 페레볼로츠스키(Aviram Perevolotsky)와 이스라엘 핑켈스타인 (Israel Finkelstein)이 펴낸 저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 했다.

“출애굽시점인 후기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나 주거의 흔적을 발견치 못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출애굽경로 상의 진을 친 장소들과, 시내 산으로 믿어 온 모세 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친 흔적이나 다른 어떤 유물들도 찾지 못하였다.” (참: The Southern Sinai Exodus Route in Ecological Perspectiv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July-August, 1985, Vol. XI, No. 4)

 

10.  윌리엄 데버(William G. Dever)가 그의 저서인 “고고학과 정복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나이 반도에 대한 탐사활동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지질학자 등이 근래에 시나이 반도의 중남부 전 지역에 걸쳐 철저한 조사 및 탐사 활동을 벌였으나 중기 청동기 시대 및 후기 청동기 시대의 흔적을 발견치 못하였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출애굽 당시 150만 또는 그 이상의 인구(민 11:21)가 머나먼 적지(敵地)인 이곳이동하 40여 년간(신 2:7)을 머물렀다실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황무한 땅과 드물게 있는 오아시스가 흩어 소수 유목민들에게 공급 가능할지몰라 이상 아니었다.”(Vol.3, p.547, William G. Dever, “Israel History of Archaeology and  the Conquest.”,  New York,  1992)

 

11. 영국 이집트학자 로머(John Romer)가 서에서 시나이 반도를 답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력 한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대부분의 광야생활을 하였다고 믿고 있는 출애굽사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 비록 고대의 베두인과 5000년 된 광산인부들의 숙소 터가 있어 아주 작은 흔적을 보일지라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흔적은 하나도 없다.” (p. 58, “Genesis.” John Romer. Testament,  The Bible  and History.  New York. Henry Holt & Co. 1988. ISBN0-8050-0939-6)

 

12.  이스라핑켈스타인 실버만(Israel Finkel stein & Neil Asher Silberman)이 2001년에 공동으로 저술한 “출애굽은 일어났었는가?”라는 책에서 시나이 반도를 탐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시나이 반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약간의 고고학적 흔적이라도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나이 반도에서 북쪽의 해변을 따라 세워져 있는 이집트의 성채들을 제외하고파라람세 2 전·후임치시기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숙소 터나 머물렀던 흔적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믿고 있는 시내 산과 성 캐더린 사원을 포함하여 시나이 반도의 전 지역에 걸쳐 반복적인 조사활동을 하였으나 단 하나의 도자기 조각도 없었고, 구조물이나, 단 한 채의 집, 고대에 야영을 했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생활을 하던 이스라민족무언흔적남겼으리라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에 걸쳐 현대의 고고학 기술은 사냥꾼이나 수집가나 유목민들이 아주 미미하게 남긴 흔적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시나이 반도에서 기원전 3000 년이나 헬라 시대와 비잔틴 시대들에 대한 고고학적 기록으로 유목민들의 목축활동에 대한 증 들추 있지 출애 시기 추정되 기원13세기 증거 없다 간단   있다.” (pp. 62-63, “Did the Exodus Happen?” Israel Finkelstein & Neil Asher Silberman.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The Free Press. 2001. ISBN0-684-86912-8, pp.385)

 

13.   영국의 탐험 작가 찰스 (Charles Beke: 1800~1874) 박사가 미디안 지역을 답사하고, 1834년에 발간한 저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을 했던 미즈라임 (Mizraim) 지역은 이집트가 아니라 아라비아”이고, “홍해를 갈라 건넌 곳은 수에즈 만이 아니고 아카바 만”이라며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기록하였다. 1871 저서에서 화산폭발 일어났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있다 발표하였다. 사후(死後) 1878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엘랏(Elath)에서 북동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기르 (Mt. Baggir)을 , 이르토 (Mt. Erotowa)을 산이라고 주장하였다.

 

14.  영국 탐험 작 리차 (Sir Richard Francis Burton: 1821~1890)이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미디안 지역을 여행하고, 1878년에 발간한 “미디안의 황금 광산들(The Gold Mines of Midian)” 디안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15. 이탈리아의 유대출신 고고학자 임마누엘 아나티(Emannuel Anati) 교수가 시나이 반도 및 아라비아 반도를 탐사하고 1986 광야 카르 (Har Karkom)을 산이라 발표하였다. (참조: Har Kharkom, The Mountain of God: New York.  Rizzoli Press. 1986)

 

 16.  텔아비브 대학의 메나쉬 - 교수는 시나이 반도 북서쪽 위치 - (Mt. Sin Bisher)은 이름의 뜻이 “법의 산”이고, 타원 제의 바위들 있으며, 출애굽 8장 25~30절에 모세가 3일 길 광야로 가서 희생을 드린 장소라고 하여 산을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참조: Sinai Journeys, the Route of the Exodus. San Diego, California. Ridgefield Publishing  Company. 1983. First published in Hebrew by Am-Oved Publishing Ltd., Tel-Aviv, Israel. 1968

 

17.  시나이 반도에 있는 세라빗 -카딤(Mt. Serabit El-Khadim)에는 주로 터키옥을 채굴하는 광산이 있는  곳으로 수호신인 하토르(Hathor: 암소) 신전을 출애굽 훨씬 이전부터 건설했다. 일부 학자들은 광산지역에서 후기 청동기시대인 이집트 신왕국(BC 1550~BC 1069) 때의 많은 암각화 제의용 기구들이 발견사실을 가지고,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일어났던 아론의 금송아지 제작사건 등과 연관시켜 산을 시내 산이 라고 주장했다. (참조: Canaanites and  Egyptians At Serabit el-Khadim, Anson F. Rainey editor, Egypt, Israel, Sinai;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Relationships In The Biblical Period. Tel Aviv, Israel. Tel Aviv University, 1987)

 

18. 영국 탐험 작 도우티(Charles Doughty: 1843~1926)가 미디 지역 여행하고, 1888  발간한 “아라비아 사막의 여행(Travels in the Arabian Deserta: 1888)”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 위치한 알-바드(Al-Bad/Al-Bid)가 고대 미디안의 도시이었다고 기록하였다.

 

 19. 프라하 찰스 대학의 동양학 교수인 알로이스 무실(Alois Musil: 1868~1944)이 네겝 광야지역부터 미디안의 -바드(Al-Bad) 지역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답사를 하고, 1926년에 발간한 “북(北) 히자즈(The Northern Hegaz)” 에서 미디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 -라우즈 이라 했다

 

 20. 미국 하버드대 교수 프랭 크로스(Frank Moore Cross)가 논평(Bible Review)”에서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라우즈 산이 시내 산이라고 지지했다

 

21.  미국 아마추 탐험가  와이엇(Ron Wyatt)이 1978년에 시나이 반도를 답사하던 , 홍해 아카바 만의 누웨이 속에 파라오 수레바 발견하고, 시내 산이 반대편에 있을 것이라는 신념하에, 1984 년에 그의 아들들과 사우디에 밀입국하여, -라우즈 산을 답사한 귀국 길에 사우디 경찰에 체포되어 76일 만에 추방당하였다.

 

22. 1985 윌리암스(Larry Williams)와   (Bob Cornuke)이 -라우즈 산을 답사하고, 1991년에 래리 윌리암스가 “모세의 산(The Mountain of Moses)”, 2000년에 코눅이 “하나님의 산(The Mountain of God)” 발간하였다.

 

23. 1985 와이엇(Ron Wyatt)이 데이 페이솔(David Fasold)와 사우디를 2차로 방문하여 -라우즈 산을 답사하고, 1차로 1994년에 News Letter의 형식으로 -라우즈 산이 시내 산이라고 발표하고, 1998“출애굽 (EXODUS)”책과 Video Tape을 발간하였다.

 

24.  하워 블럼(Howard Blum)이 페이솔드(Fasold)의 진술을 토대로 1998년에 “출애굽의 황금(The Gold of Ex- odus)” 출간하였다.

 

25. 1995년에 미국의 캐빈 클루어츠(Kevin Kluetz)가 사우디 교육 박물관(Antiquities and Museums) 책임자에 -라우 사우 견해 문의하였다. 그러 사우 정부 답변서에-라우 모세의 시내 산과 관련된 어떠한 유사점도 조사결과 발견하지 못했고, 그가 쓴 시내 산의 발견이라는 책 및 래리 윌리암스 등 다른 이들이 제기한 내용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리 시나 반도 자발무사(Jabal Musa)가 모세 산이라고 답변하였다. 또한 주변에 철조망을 여러 곳에 쳐놓은 것은, 고고학 지역으로 지정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고고학 지역으로 지정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1.    고대 미디안의 위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살았던 고대 미디안의 유적지로 알-바드에 있다.

 

1. 성경에 기록된 미디안의 가계

  •     25:2; 아브라함(Abraham)과 후처인 그두라(Kedura) 사이에서 난  자손은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시므란(Zimran), 욕산(Jokshan), 므단(Medan), 미디안(Midian),  이스박 (Ishbak),  수아 (Shuah)이다.
  •     25:4; 미디안의 아들들은 5명으로 에바(Ephah), 에벨(Epher), 하녹(Hanoch), 아비다(Abida), 엘다아(Eldaah)이다.

 

2. 족장시대에 미디안과 관련된 성경의 기록들

  • 25:5-6; 아브라함이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으로 가서 살게 한다.
  • 36-35;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모압 왕이 되다.
  • 37:25-36; 길르앗에서 오는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들이 요셉을 그의 형제들로부터 사서, 이집트로 가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다.

 

3. 족장시대에 미디안과 형제들이 정착한 장소들

  •     시므란(Zimran)은 아라비아 반도 메카(Mecca/Makkah)의 서쪽 홍해 변 자브람 (Zabram)에 정착했다.
  •     욕산(Jokshan)은 아라비아 반도의 북부에 정착했다.  
  •     므단(Medan)은  아라비아 반도 타이마(Tayma) 남서쪽에 있는 마단(Madan)에 정착했다. 
  •     미디안(Midian)은 사해 동쪽 또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이스박(Ishbak)은 가나안의 요단 강 동쪽에 정착했다.
  •     수아(Shuah)는 갈그미스 남쪽, 유프라테스 강의 오른 편 강안(江岸)에 정착했다.
  •     에바(Ephah)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지방에 있는 타북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구와파(Ghuwafa) 지역에 정착을 한다. 에바는 이사야서 60장 6절과 기원 전 715년경에 만들어진 사르곤 (Sargon: BC722~BC705)  II세의 암각문에도 이름이 나온다.
  •     에벨(Epher)은 아라비아 반도의 메디나(Medina) 근처에 있는 기파르(Ghifar) 지역에 정착을 한다. 앗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BC668~BC662)왕의 비문에는 에벨의 후손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압파루 (Apparu)라 나오고, 아랍 명으로 우푸르(Ofr)라고 부른다.
  •     하녹(Hanoch)은 아카바 만의 에시온게벨 인근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는 금속세공과 대장장이로 유명한 겐 족속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 이름에 걸맞게 에시온 게벨에서 30 km 북쪽에 있는 아라바 광야의 팀나 지역은 고대로부터 구리광산으로 유명했고, 아라비아 반도의 미디안 지역도 구리 등 많은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알려졌다.
  •     아비다(Abida)는 오늘날의 예멘 땅 남서부에 정착을 한다. 기원전 9세기에 작성된 미네아의 암각문에는 아비야디 (Abiyadi)로 기록 되었다.
  •     엘다아(Eldaah) 역시 예멘 땅에 정착을 하였는데, 사바인들이 새겨놓은 암각문에 나오는 야다일(Yadail) 족속의 조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  

  • 앞의 자료를 근거로 만든 지도

 

4. 출애굽시대에 모세가 찾아간 미디안 땅

  •     3:1; 모세가 그의 장인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양떼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시내 산)에 이르다.
  •     19:1-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다 (90일이 아니고 60일 만에 도착).
  •     18:1;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모세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신 모든 일을 듣는다.
  •     18:7-12;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모든 일을 들은 이드로가 기뻐하고,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 그리고 여호와 제단에 번제물 및 희생제물을 드리고 모세이드로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떡을 떼다.
  •     18:13-26; 이드로모세에게 백성을 재판할 때에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두어 정도에 따라 나누어 재판하게 하다.
  •     18:27;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
  •     10:29-30; 모세가 그의 처남 호밥에게 “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하니 호밥이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라고 답변한다.

 

5. 출애굽시대에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 자손

  •     22-24장;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여 진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을 친 사실을 알고 두려운 나머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바알 브올 사건을 일으키는 일에 미디안의 12 장로와 점술가 발람을 끌어들인다.
  •     25:6-8; 시므온 지파 가문의 지도자인 시므리가 미디안왕 수르의 딸 고스비를 그의 막사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그들을 쫓아가 창으로 찔러 죽였고, 그와 동시에 염병이 멈춘다(2만 4천명 사망).
  •     25:16-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명령하신다.
  •     31장; 미디안 5 왕과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한 여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다 죽였고, 양떼와 재물을 다 빼앗고, 점술가 발람도 죽였다. (수 13:21-22)

 

6. 출애굽시대에 이스라엘에 협력한 미디안(겐) 자손

  •     24:21; 점술사 발람이 모압 평지의 산 위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축복할 때에 에돔, 아멜렉 등은 망한다고 했지만, 겐 족속을 바라보면서는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또 겐 족속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네 거처가 견고하고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 1: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대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 하니라”

: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겐 사람이라고도 했는데, 전통적으로 하녹이 겐 족속의 조상이라고 알려져 왔다. 겐은 구리세공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녹은 미디안의 셋째 아들이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르우엘이라고도 성경에 나오는데, 이드로는 직분을 의미하고, 르우엘은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시대에 이드로와 자손들에 대하여 밝혀진 사실들

  •     이드로미디안 자손이면서 겐 족속이다.
  •     시내 산 앞에서 “내 고향 내 친족에게 돌아가겠다”고 한 호밥그의 자손과 함께 이스라엘의 광야여정에 동행했다.
  •     이스라엘의 눈이 된 호밥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가장 앞서 나간 유다지파와 함께 했다.
  •     이드로자손이 유다지파와 함께 아랏 남방유다 황무지에 정착했다.
  •     이드로가 가지 않겠다고 거절한 호밥을 설득해서 이스라엘과 동행시켰다.
  •     점술사 발람이 겐 족속을 바라보며 축복한 대상은 호밥그의 자손이었다.
  •     모세가 대적한 미디안 족속을 진멸할 때, 이드로자손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의 진영에 함께 있었다.
  •     이방인 이드로호밥그의 자손 모두가 여호와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     미디안자손, 이스라엘에 대적한 자손은 미디안, 그리고 협력한 자손은 겐 자손이라고 구분해서 성경에 기록한 것으로 해석된다.

 

성경에서 미디안 자손이 거주했던 장소들

 

요단강 동쪽의 미디안은 모세와 기드온에 진멸당한 미디안 자손들이 살았던 지역이고, 사해 남서쪽의 미디안 겐 자손은 이스라엘과 동행한 호밥의 자손들(삿 1:16)이 유다지파(갈렙 자손)와 함께 정착한 장소이고, 알-바드 지역의 미디안 겐 자손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고향(갈 4:25 및 알-비드)으로 모세가 이집트에서 도망 나와 40년간 살았던 겐 자손들의 땅이었다. 그리고 이 지도는 시내 산을 알-라우즈 산으로 보고 만든 지도이다.

 

7.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협력한 미디안의 겐자손

  •     4: 11-24; 모세의 처남 호밥의 자손겐 사람 헤벨이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친다. 그 때 사사 드보라의 부름을 받은 군대장관 바락의 이스라엘 군사 만 명과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기손 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시스라가 하나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하여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친다. 야엘이 시스라를 영접하고 그가 곤히 잠든 틈을 타 그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방망이로 박아 죽인다.
  •     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사사 드보라의 예언)

 

8.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대적한 자손 (BC 1200~BC 1020)

  •     6-8장; 이스라엘이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넘겨주신다. 이에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당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자 사사 기드온을 보내어 미디안을 진멸시킨다.

 

9. 통일왕국시대에 겐 자손에게 협력한 이스라엘 (BC 1020~BC 930)

  •     삼상 15: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 이드로가 모세에게 재판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호밥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눈이 되어 광야의 여정에 도와준 사실들을 말한다.

 

10. 분열왕국시대에 북이스라엘을 도운 겐(레갑)자손 (BC 930~BC 722)

  •     대상 2-55;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
  •     왕하 10:15-17; 북 이스라엘의 열 번째 왕 예후(BC 841~BC 814)가 겐 자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 (요나답)의 도움을 받아 사마리아에서 바알 신을 숭배한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악한 아합 왕의 잔여세력을 진멸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

 

11. 유다왕국시대에 올곧은 신앙을 지킨 겐(레갑)자손 (BC 722~BC 586)

  •     35:5-11; 선지자 예레미야(BC 626~BC 586)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레갑 자손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불러 모아놓고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지만 그들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내가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     35:1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3: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아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지 말도록 경고했으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잠시 뿐이었고,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일들을 반복해왔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레미야(BC 626~BC 586) 선지자에게 레갑 자손(이드로의 겐 자손)들을 시험토록 명령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시험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끝내 마지막 경고(렘 35:14-17)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유다왕국)은 주전 586년에 곧바로 멸망당했다. 그러나 이드로의 자손들은 오랜 세월을 대대로 여호와 신앙을 굳건히 지켜,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12. 사도 바울의 시내 산에 대한 언급(?~AD 65)

  •     사도 바울이 “자유한 자”“율법에 매여 있는 자”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사용한 말씀이지만, “시내 산”“아라비아”에 있다고 언급하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4: 25)

 

성경 상 고대 미디안의 위치에 대한 종합정리

  •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적했던 미디안요단 강 사해 동쪽에 사는 미디안 족속이었고, 원수를 갚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에 의해 진멸 당했다.
  •     이드로의 자손인 겐 족속레갑 족속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며 살았다.
  •     사사시대에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사사 기드온에게 진멸당한 미디안 족속이드로의 자손인 겐 족속이 아니었다.
  •     사도 바울의 언급처럼 시내 산아라비아에 있으므로 미디안아라비아에 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받은 감동의 결과 및 교훈

  •     이드로가 비록 이방인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자신에게 주어진 동기에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내 산에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였다.
  •     이드로가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아들 호밥도 설득했고, 그 자손들도 함께 동행시킴으로서, 그의 자손 모두에게 하나님을 영접하도록 했다.
  •     광야 여정에서도 이드로겐 자손은 여호와 신앙을 잘 지켰기 때문에, 점술사 발람도 이들의 “거처가 견고하고 보금자리가 바위에 있다”고 예언했다.
  •     이드로“레갑 자손은 조상의 명령을 좇아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목축생활을 하며 대대로 광야에서 생활”했다.
  •     이드로“레갑 자손은 그들의 신앙이 바위처럼 견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도 이겨냈다(발람의 예언이 성취됨).
  •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경고로 “레갑 자손의 견고한 신앙”을 보여주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은 유다왕국은 곧바로 멸망했다.
  •     이드로의 자손들이 보여준 “올곧은 신앙”이 지금도 우리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3. 역사의 기록과 성서고고학으로 밝혀낸 고대 미디안의 위치

  •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AD37~AD100)가 쓴 유대고대사에 “시내산은 미디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이드로의 고향이며, 미디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기록했다.
  •     유세비우스(AD260~340)가  “미디안은 아라비아에 있고, 홍해 변(on the shore of the Red Sea)에 있는데, 이곳이 성서의 미디안이다”(Onomasticon 124:6). 그리고 “애굽 시내(Brook of Egypt: Wadi el-Arish)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계”라고 그의 “성경 백과사전(Onomasticon)”에 기록했다.
  •     사우디 정부에서 2002년에 발간한 “알-비드(Al- Bid)” 책에 “알-비드(알-바드)가 이드로의 고향”이었으며, “기원 전 2000~1000년대에 아카바 만의 동쪽이 미디안의 지역”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알-바드의 인근 마크나(Maqna)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아랍명: Mughair Shuaib)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던 샘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     영국의 고고학자 베노 로텐버그(Beno Rotenberg)가 1959년~1966년간에 탐사 및 발굴 작업을 하고 발표한 보고서에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일대”에서 발견한  도자기들이 “쿠라야에서 만들어진 미디안의 채색도자기”들이었음을 밝혀냈다.

 

14. 사우디 정부가 밝혀낸 고대 미디안의 위치

  •     1968년~2008년까지 사우디 정부의 고고학 팀 및 킹 사우드대학의 고고학 팀이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일대에 탐사 및 발굴 작업을 진행했는데, 히스마 지방에 있는 쿠라야, -바드, -울라타이마 지역미디안의 영역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미디안의 수도의 수도는 이드로의 고향인 -바드가 아닌 쿠라야였음도 아울러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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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안의 수도로 밝혀진 쿠라야의 사진이다.

 

  •     호주 시드니 대학의 중동학 교수인 팟스(D. T. Potts)가 2010년에 사우디정부에서 발간한 “아라비아의 길들(Roads of Arabia)”에 기고한 글 중 미디안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히자즈 지방에서 후기청동기시대의 기록을 찾을 수가 있다.
  •    미디안은 이집트의 통치를 받지않던 땅으로 모압 남쪽의 홍해 해안 근처에 있었다.
  •    고대 미디안의 중심은 오늘날의 타북 지방이었고, 그 영역은 아라비아 반도 북쪽의 와디 아라바 입구에서부터 남쪽의 알-와즈 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    1968년부터 사우디 고고학 팀이 실시한 쿠라야 지역의 표면조사에서 쿠라야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현장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거기에는 대규모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고지대 및 저지대의 도시 터를 비롯하여, 현장의 각종 부대시설들과 지면에서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방어벽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쿠라야 채색도자기로 알려진 독특한 스타일의 미디안 도자기를 만들어 내던 세라믹 가마터 등이 광범위하게 조성되었음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     킹 사우드 대학의 고고학 교수인 압둘아지즈 사우드 알-가지 (Abdulaziz Saud Al-Ghazi) 박사가 2010년에 사우디정부에서 발간한 “아라비아의 길들(Roads of Arabia)”에 기고한 글 “미디안 왕국” 중 쿠라야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율법(Torah)에는 미디안은 광물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금, 은, 구리, 납, 주석, 철 등이 채굴되었다. 또한 보석들로 유명했는데 터키옥, 수정, 부싯돌 등이 있었고, 동물을 주제로 정교하게 그려 만든 채색 도자기들도 유명했다. 도자기의 안과 밖에는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한 그림으로 공작, 거위, 낙타 등을 그려 넣었다.
  •    고고학적 탐사에 의해 쿠라야는 미디안의 수도로 확인되었다. 쿠라야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미디안의 지역 중에서 가장 큰 현장이다. 그리고 타이마, 드단, 알-바드 등의 여러 현장도 쿠라야와 같은 시대의 미디안 현장으로 밝혀졌다. 이 미디안 왕국에 대한 연구는 미디안의 수도인 쿠라야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    쿠라야 현장은 아주 광활한 지역에 퍼져있다. 도시의 중심에는 파괴된 건물들이 그룹을 지어 있고, 주거지역, 산 위의 요새, 북쪽의 농경지대를 들 수가 있다. 그 외에도 북쪽의 저수장 밖에 있는 건물들, 남서쪽으로 나있는 성채, 성벽, 댐, 묘지들,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던 가마 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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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우디 고고학 팀이 밝혀낸 고대 미디안왕국의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

 

 

 

  1. 시내 산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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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산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1. 전통적인 주장의 모세 산

 

  •     4세기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AD306~AD337)의 요청으로 모친 헬레나 황비가 예루살렘 등 성지순례 중 시나이 반도 중남부에 있는 모세 산(시내 산)을 답사하고 이 산이 황제가 꿈에서 본 산의 모습과 가장 가깝다고 하여 산 밑에 교회를 짓고 시내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다.
  •     6세기(AD 527)에 로마의 유스티아누스 황제 (AD527~AD565)가 헬레나 황비가 지은 교회 자리에 성 캐더린 사원을 지었고, 7세기 (AD 650년경)에 아라비아의 무슬림 (Muslim)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시내 산을 모세 산(Jabal Musa)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1.1 모세 산을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들

 ·     출애굽 당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의 영토가 아니었고, 이집트의 경계는 수에즈 운하까지였다.

  •     출애굽 당시 미디안 지역이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에 있다. 그것은 호밥이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간다고 모세에게 답변했기 때문이다(민 10:30).
  •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당시에는 시나이 반도가 아라비아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  모세 산이 시내 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들

 ·     출애굽 당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의 영토였다.

  •     1967년의 6일 전쟁 후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이 다시 이집트에 넘겨주기까지 15년간 수많은 학자 및 전문가들을 투입하여 출애굽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고 시나이 반도 내를 샅샅이 뒤졌으나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     모세 산 앞은 200만이 넘는 인구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     1882년과 1907년에 실시한 모세 산 주변의 인구조사에서도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2. 아라비아의 알-라우즈 산

  2.1 알-라우즈 산이 시내 산으로 각광을 받게 된 근거 및 현상들

·     주전 250년경에 번역된 헬라어 성경에는 “시내 산(호렙 산)이 미디안에서 가까운 광야에 있다”고 기록했다.

  •     바울의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AD 37-AD 106)의 유대고대사에 “시내 산은 미디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언급했다.
  •     신약초기의 학자 및 교부들의 저서들, 유대전승에도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전승되어 왔다.
  •     아랍전승에도 알-바드가 고대 미디안 이드로의 고향이고, 마크나에는 모세의 샘이 있다.
  •     시나이 반도의 모세 산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영토에 속해있다는 주장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알-라우즈 산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어 확실하게 이집트의 경계 밖에 있다.
  •     산 정상에는 검게 탄 자국이 남아 있다(출 19:18-19).
  •     산 주변에는 지경을 설치한 바위들, 돌기둥들, 번제단 등이 발견된다(출 24:4, etc.).
  •     -라우즈 산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호렙 산에 가서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동굴이 있다(왕상 19:8-9).
  •     모세를 숨겨준 바위틈과 70인의 장로들과 올라간 곳으로 보이는 장소가 있다.
  •     모세가 번제를 드리던 번제의 제단 흔적이 있다.
  •     산 주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던 당시 장막을 친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     산에서 멀지않은 곳에 여호와 닛시 제단이 있고, 모세가 바위를 쳐서 백성에게 물을 먹인 것으로 여겨지는 므리바의 갈라진 바위가 있다.

 

2.2 알-라우즈 산이 시내 산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주장들

 ·     -라우즈 산에서 밥 코눅과 래리 윌리암스가  가져온 검게 탄 돌의 견본(Sample)은 전문기관에서 검사하여 그 결과를 알아보아야 한다.

  •     -라우즈 산에서 발견된 바위에 새긴 소 등의 암각화들은 사우디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바드 (Al-Bad)에 있는 동굴을 이드로의 동굴이라고 주장하는데 탐사결과에 따르면 페트라에 수도를 정하고 있던 나바티아 왕국(BC312~AD106) 사람들의 무덤이다.
  •     -라우즈 산 앞에 모세의 번제단, 돌기둥들 그리고 숙소의 흔적들도 출애굽 당시의 유적들이 아니고 훨씬 오래전에 축제의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     -라우즈 산의 인근에 있는 갈라진 커다란 바위는 어느 한 시기에 이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나서 갈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위를 치라고 한 곳은 호렙이지 르비딤이 아니다.
  •     -라우즈 산의 한 골짜기를 가리켜 이곳이 황금송아지 가루를 뿌린 곳이라고 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임의로 만들어 낸 자기주장 (Self-Insistence)이라는 것이다.

 

 

3. 사도 바울의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에 대한 검토

 

3.1 사도 바울의 언급 및 비유

 

  •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에 의해 났다.
  •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종을 낳았고, 지금의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과 같으며,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한다.
  •     사라는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이다.

 

3.2 갈라디아서 작성의 동기

 

  •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 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교사들이 이방인도 율법의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 버리는 자들이 생겨났다.
  •     이에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로 돌아가 버린 자들 즉,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버린 자들을 상대로 갈라디아서를 보냈다(갈 4:9).

 

3.3 사도 바울의 변절자들에 대한 가르침(갈 2:16, 마 5:17)

 

  •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

 

3.4 사도 바울이 비유한 동일선상(갈 4:28-31)

 

  •     종 신분의 동일선상: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며,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한다; 시내 산은 구약의 율법을 처음 받은 곳이고, 지상의 예루살렘은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등 율법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율법을 쫓는 자들은 하갈의 자녀들과 같이 종의 신분으로 종속되어진다.
  •     자유자의 동일선상: 사라는 천국의 예루살렘인 자유자의 어머니로서 약속으로 이삭을 낳은 것처럼 그 자녀들 즉 예수님을 믿고 신약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새 언약 안에서 자유하게 된다.
  •     그러면서 사라가 여종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것 같이, 그들을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     우리는 새 언약으로 자유하게 되었으니, 두 번 다시 율법의 종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3.5 사도 바울의 영적인 동일선상 비유에 대한 검토

 ·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사역했기 때문에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분명히 방문 했을 것이다.(갈 1:17-19)

  •     사도 바울 당시의 아라비아는 나바티아(BC 312~AD 106) 왕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     사도 바울이 비유로 들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시내 산이 영적인 동일선상에  있다고 한 것은, 실제로 지리적으로도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언급한 것이다.
  •  

  • 기원전 60년경의 나바티아 왕국 지도

 

3.6 사도 바울의 비유처럼 실제로 동일선상에 있는 예루살렘과 알-라우즈 산

 

▲ 예루살렘과 알-라우즈 산이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4. 시내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하룻길

 

  •     2년 2월 20일에 시내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를 향하여 출발하다(민 10:11-12).
  •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 이었더라”(신 1:2)
  •     시내 산과 가데스 바네아 사이에 진을 친곳이 20 군데이다(민 33장).

시내 산→ 기브롯 핫다와(Kibroth-Hattaavah)→ 하세롯 (Hazeroth)→ 릿마 (Rithmah) → 림몬 베레스 (Rimmon-Perez)→ 립나(Libnah)→ 릿사(Rissah)→ 그헬라다 (Kehelathah)→ 세벨산 (Mt. Shepher)→ 하라다(Haradah)→ 막 헬롯(Makheloth)→ 다핫(Tahath)→ 데라(Tarah)→ 밋가(Mithcah)→ 하스모나 (Hashimonah)→ 모세롯 (Moseroth)→ 브네야아간(Bene-Jaakan)→ 홀 하깃갓(Hor-Haggidgad)→ 욧바다 (Jotbathah)→ 아브로나(Abronah)→ 에시온 게벨(Ezion-Geber)→ 가데스바네아 (Kadesh-Barnea)

  •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군대 2만 명이 실레에서 가자까지 약 240km를 가는데 10일이 걸렸다. 1일 평균 행군 거리; 24km
  •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이스라엘 포로 2천명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데 약 1440km의 거리를 110일 만에 도착하였으므로 1일 평균 약 13km를 행진했다.
  •     낙타를 타고 가는 대상들의 하루 평균거리는 약 25km~36km를 간다.
  •     200만이 넘는 인구가 행진 가능한 거리는 1일 평균 10~13km이다.

 

4.1 이스라엘의 행진거리로 해석한 열 하룻길

 

  •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1일 행진거리인 10~13km에 맞춘 열 하룻길에 해당하는 시내 산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10km~143km 안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     시나이 반도 북부지역에 있는 신-비셔 산, 할랄 산, 카르콤 산 등이 이 거리에 해당된다.
  •     이 주장에 대한 문제점으로는 오직 열 하룻길에만 집착하여 시내 산을 찾다 보니까 가데스 바네아와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세일 산의 위치, 에시온 게벨의 위치 및 신 광야의 위치 등이 민수기 33장의 출애굽 경로와 맞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     시내산과 가데스 바네아 사이에 실제로 이스라엘이 진을 친 곳도 20군데나 되어 열 하룻길에 부합되지 않는다.

 

4.2 대상이나 여행자의 행진거리로 해석한 열 하룻길

 

  •     일반적으로 대상 및 여행자가 하루에 갈 수 있는 행진거리를 25~30km로 보면, 열 하룻길에 해당하는 거리인 275km~330km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산들도 열 하룻길에 해당된다. 따라서 모세 산과 알-라우즈 산도 열 하룻길의 범주에 들어온다.

       ⊙ 모세산: 약 260km   ⊙ 알-라우즈산: 약 240km

 

 

5. 알-라우즈 산이 시내 산으로 각광을 받게 된 현상들

 

2013년 재차 방문 시에 가보니 알-라우즈 산으로 올라가는 왼쪽 입구에 담을 쌓았고, 산 앞에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세우는 등 여러 건물을 세워 놓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베두인과 나눈 대화에서 받은 느낌은 사우디 정부가 이 산을 고고학 지역으로 지정하고 철조망과 경비초소를 세워 이곳의 유물을 지키는 것 외에도 이 산이 모세 산이라고 하여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호를 하고 있었다. 또한 광야에서 아주 중요한 물의 확보 문제를 질문했는데 약 20m정도만 파면 물이 나온다고 한다. 현재는 이곳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물의 확보가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

 

95년에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모스크를 알-라우즈 산 앞에 세워 놓았다.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하나님께서 속히 역사 하셔서 하나님의 산 앞에 세운 저 모스크를 하루 속히 없애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달라는 기도가 튀어나왔다.

 

 

 

VII. 결

 1. 출애굽 연도

      성경의 기록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때가 첫 번째의 유월절을 끝낸 다음 날, 그러니까 첫 번째 무교절의 첫째 날인, 히브리력으로 제 1년 1월 15일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시기를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부 소수의 주장을 빼고는 고고학적으로 후기청동기시대(BC 1550~BC 1200)에 출애굽이 이루어 졌다고 믿는다.

     아직까지도 학자들 간에는 이집트 왕조의 연대기 문제를 포함하여 출애굽 시기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장을 대두시키고 있고, 향후 재정립되어야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근래 와서 출애 연대 고찰하 같이 출애굽의 시기를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전기설인 원 전 1446년 보다는 이집트 19왕조 람세스 II세의 통치시기에 해당하는 후기설인 기원전 1270~1250년경출애굽을 하였다는 설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탐사와 발굴을 통해 밝혀진 중에 이집트 역사 최전성기 구가하 신 왕시대 18왕조(BC 1550~BC 1295) 때에 이집트 영토를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을 했다. 그리고 전기설(BC 1446 )에 해당하는 기원전 15세기에는 벳샨, 가자, 아펙, 욥바 등에 성채 세우 이집트 가나안 통치하였다 역사사실들이-아마르나의 편지 등을 통해서 밝혀져, 전기설에 대한 이론이 다소 퇴색하게 것이다.

 

나아가 “성서고고학 연대기와 성서상의 기록들에 의한 출애굽 연대 고찰”에서 출애굽시기를 검토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 정복전쟁을 벌이는 시기에는 철기시대의 도래를 알려주는 사실로 가나안의 일부 족속들은 이미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다(수 17:16). 또한 기원전 13세기 중반부터 해양민족 등의 득세로 지중해의 주변 국가들이 일대 혼란에 빠졌고, 기원전 13세기 말경에는 블레셋 족속이 지중해변의 비옥 차지하 가나안 정착 했다. 여파로 이 지역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세력이 쇠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직까지도 정확한 출애굽 연대를 알려주는 증거자료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200년의 이전, 어느 시기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 것이다.

 

아울러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스라 역사연대기에 문헌들 나오 성서 연대기를 채택 않았음 물론, 전기설 기원 13세기후기설을 채택하고 있어 성서 고고학에 의한 연대기를 들이고 있다.

 

 2. 홍해를 건넌 시기와 장소

 2.1 홍해를 건넌 시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히브리력으로 1월 15일 밤에 이집트 고센 지방의 라암셋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숙곳을 거쳐 믹돌의 비하히롯 바닷가에 진을 쳤고, 유대전승에 의하면7일째 되는 1월 21일 밤에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바다를 가르고  건넜다고 전해 내려온다.

 

전승 시간상으로 거리상으 따져 3밤에 건넜다는 주장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실을 4일째 되는 날에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제일 날쌘 전차부대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있는 믹돌의 비하히롯 , 홍 바닷가 까지 3일 만에 추격하여 왔다는 사실과도 부합된다.

 

나아가하나님께이스라이집트를 떠나는 1월 15일 저녁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고, 이를 절기로 지키라고 명령(출 13:6)하신 대로 홍해너는 1월 21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은 사실에서도 한층 더 이 설에 대한 신뢰를 주고 있으며 유대 회당에서는 지금도 무교절이 끝나는 7일째 날에 바다를 갈라 감격의 노래인 “바다의 노래” 부른다.

 2.2 홍해를 건넌 장소

        유대 원전성경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바다를 얌숩 (Yam-Suph)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얌숩의 숩이 일반적으로 갈대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점을 중시하여 얌숩을 바다 (Reed Sea)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유대원전성경 곳에도 홍해 (Red Sea)라는 말로 사용된 사실이 없음을 강조 한다. 그리하여 갈대는 소금기가 있는 바다에서는 살지 못하는 식물이므로 지중해와 오늘날의 수에즈 사이에 있는 호수를 갈라서 건넜다고 주장한다.

 그러 홍해 장소 얌숩이 쓰인 성경구절들을 가지고 분석해본 바와 같이 얌숩이 오늘날의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얌숩 일반적 의미상 해석으 갈대바다라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추 탐험가 와이엇(Ron Wyatt)과 학자들이 아카바 만의 누웨이바 바다를 건넜다고 주장한다. 이집트의 라암셋에서 시나이 반도 동쪽 아카바 만에 있는 누웨이바까지는 거리가 560km나 된다. 이처럼 거리를 노약자. 부녀자, 유아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200만이 넘는 인구 가축 (소, 염소, )까 거느리고, 하루10~13km를 행진할 , 50일 이상 걸린 후에나 누웨이바까 도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라암셋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한지 30일째인 째달 15일 (히브리력)에 광야 (Wilderness of Sin)에 도착했다 성서 기록과 않는다.

 나아가 창세기 네겝 (Negev)에 가데(Kadesh)와 술(Shur) 사이의 그랄 (Gerar)”(창 20:1)이라고 명히 위치가 명시되어 있는 술(수르) 광야를 누웨이바 앞바다 건너 아라비 반도 옮겨 설정하 모순 빚었다. 누웨이바에 건너 사우디아라비 까지 건너는 구간의 거리가 16km나 되고수심이 은 곳도 500m나 되며, 사우디아라비아 쪽의 바다 경사가 약 60%에 이른다는 탐사결과가 보고되어 있어 더욱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 더욱이 아카바 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18세기 중반이후인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더욱 떨어지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 원전 성경의 얌숩에 대한 해석도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는 갈대바다라고 하면 갈대가 자랄 있는 소금기가 없는 바다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금기가 있는 바다인 홍해를 가리킬 때에도 얌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하얌숩의 해석을 각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갈대바다, 해초 바, 또 바다의 등으로 하여 바다를 갈라 건넌 장소라주장들 발표되어 의미에 의한 해석 논란으로 정확 장소찾는데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출애굽 7 일째 되는 밤에 바다를 갈라 건넌 것과, 출애굽 이스라엘이 진을 장소들과 행진할 있는 거리를 감안하면 수에즈 운하가 나있는 일대가 유력시 되고 있다. 그리고 진보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이론으로 출애굽 당시의 수에즈 만이 오늘날과 같은 위치의 바다가 아니고 팀사 호수까지 위치가 확장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론을 살펴보기 위해, 동 아프리카 지구대의 지각변동에 의한 융기 침식작용을 검토해 보았다. 또한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있는 나일 델타의 조사보고서 오늘날 수에 사막 60m 해수면 위의 모래 속에서 발견된 조개화석들에 대한 관련 자료도 검토해보았다.

 결과 수에즈 위의 지표면이 지각변동에 의한 상승으로 바닷물이 말라 오늘날과 같은 모양으로 변했고, 지금도 조금씩 말라가고 있다는 이론이 보다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냐하 주장 하나님께 예언하 애굽 해만(Gulf of Egyptian Sea)을 말리시고”라고   이사야서 11장 15절 의 말씀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출애굽 경로

 출애굽 경로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동안의 여정 중에서 광야생활 대부분 보냈가데 바네아 위치 정확 밝혀지 자연스럽출애굽 경로를 밝혀낼 수가 있다. 그러나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에 대해, 이를 인정치 않고 아직까지도 페트라 가데 바네아라 주장하 학자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경로”에서 상세히 검토하여 바와 같이 페트라 지역이 가데스 바네아라고 하는 주장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근거들이 성서의 기록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확인된 것이다.

  • 가데 바네아 광야 광야 걸쳐있으며, 에돔의 경계에 있다.

   신광야는 네겝 광야와 인접해 있고, 에돔의 경계가 광야에 인접해 있다.

  •     에돔에 왕의 대로가 있고, 길로 지나가면 에돔의 가운데를 통과한다.

 아론 네겝에 멀지않 있고, 에돔의 경계에 있다.

   네겝 광야에는 아랏과 호르마가 있고, 가나안 지방이었음을  수가 있다.

   므리바의 물은  광야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있다.

   호르 산에서 돌이켜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가면 세일  이른다.

   세일 산에서 돌이켜 엘랏과 에시온게벨 곁을 지나 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 에서에 기업으 주었으 다투지 말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남쪽경계가 사해남쪽 끝에서 서편에는 에돔의 경계에 인접한다.

   에돔 자손은 세일산지의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산악 지역에 살았다.

   에돔의 북동쪽 경계는 세렛 시내까지이고, 남쪽은 아카바 만까지이다.

그러므로 페트라 지역이 가데스 바네아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앞의 근거들을 가지고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   에돔 영역 북동쪽 시내까지이고, 남쪽아카바 만까지였다. 그리고 서쪽의 경계는 가데스 바네아가 걸쳐있는 신 광야와 바란 광야에 인접해 있었다.

  페트라는 에돔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세일산지에 위치해 있다. 험준 지역이어 200 인구가 오랜 기간을 머물 있는 지역이 아니다.

  아론 에돔 심장부 에돔경계지역에 있어야 하고, 네겝 광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지나가고자 했던 왕의대로는 에돔의 영역 안에 있고, 도로를 지나가려면 에돔의 가운데를 통과하여야 한다.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쏟아지게 했던 가데스 므리바의 물은 페트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가데스에 있다.

  페트라 남서 4~5km 지점 위치 하룬이 호르 산이라면, 이스라엘이 에돔 통과를 거절당했으므로 자 하룬에 돌이켜, 가나안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호르 산에서 돌이켜 홍해 길로 가서 세일 산에서 돌아다니다가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을 지나 광야 길로 북상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성서의 기록과 맞지가 않는다.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이고, 자발 하룬이 호르 산이라면, 페트라에서 자발 하룬으로 가려면 남서쪽 방향이다. 이는 네겝의 아랏 왕이 거주하고 있는 북서쪽 방향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놀래게 해서 사건을 일으키게 없다. 그리 출애 에돔 경계 광야에 인접해 있어 페트라와 자발 하룬이 에돔 영역 안에 있다는 사실을 묵과했다.

  하나님께서 세일 산을 에서(에돔)에게 기업으로 주셨고, 이스라엘에 다투 말라 하셨으므로, 출애 분명 에돔 영토였다. 그리 가데바네아와 호르 산은 에돔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 ()의 산지 페트라는 이스라엘이 오랜 기간을 머물렀던 가데스 바네아가 아니고, 자발 하룬은 호르 산이 아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고, 물 때문에 다툰 사건들이 성서에 수차례나 기록된 사실들로 보아서도, 이스라엘이 장소를 옮겨 다른 곳으로 행진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전에 3일길 앞서 법궤와 함께 탐사자들을 보내어 광야에서 생명의 보존에 가장 필요한 물의 확보 가능성 여부 파악하 행진하였음 성서 기록 통하여 확인했다. 그런데 페트라 주변지역의 오아시스들에서 확보할 수 있는 하루의 물의 (약 1,087m³)과 하늘에서 내려주는 연평균 강우량(약 150mm)으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필요한 하루의 물의 양인 약 10m³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다. 따라 강우량 건조기후 지대에서 지하에 솟아나오 오아시스 전적으 의존 수밖 사실을 감안할 , 페트라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이 오랜 기간 머물 있었던 장소가 아니라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점보다 천년이나 지난 시대에 페트라를 수도로 삼고 수백 년 존재했던 나바티아 왕국과 나바티아 왕국을 멸망시킨 로마 제국에서 페트라에 건설해 놓은 급수용 수로시설물들도 10만 명 정도에게나 공급이 가능했던 사실도 고고학 팀의 탐사결과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가데스 바네아를 찾기 위해 시나이 반도의 북동쪽 및 사해 남쪽의 아라바 광야 일대를 답사한 결과 10 곳 이상이 가데스 바네아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탐사와 발굴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장소로 떠오른 시나이 반도 북동쪽의 쿠세이마 지방에 분포된 4개의 오아시스(아인 쿠데이랏, 아인 쿠세이마, 아인 카데이스, 아인 무웨일레) 지역을 통틀어 가데스 바네아로 인정한 것이다.

따라 민수 33 나오 이스라엘 장소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소들 대부분이 정확 경로 찾아낸다는 아직까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간 성서 고고학이 자리를 잡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베일에 감춰져 있던 많은 역사적 실들밝혀내수많사건들새롭정립되괄목만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 성서 고고학 관련 학문들에 의한 탐사와 발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밝혀질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들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4. 고대 미디안의 위치

“고대 미디안의 위치” 알아보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흩어져 살았던 장소들을 성서의 록과 성경사전, 그리고 고고학적인 탐사와 발굴과정에서 밝혀진 자료들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족장시대에는 미디안 자손들이 요단 동쪽인 땅과 길르앗 지방의 인근 성읍들에 살았음을 성서의 기록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각종 성경백과사전들과, 학자들의 연구 탐사 자료들을 통하여 그들이 트랜스 요르단 동편, 아카바 만 북쪽,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널리 흩어져 정착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출애 시대에 인근 성읍들에 살던 미디안 자손들이, 모압 발락의 회유에 빠져, 점술사 발람과 함께 바알 브올 사건을 일으켜 모세에게 진멸 당하였음을 성서의 기록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광야여정동행호밥자손들가나정복전쟁에 동참한 사해 남서쪽 아랏 남방의 유다 광야에 정착했음도 확인했다. 나아가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 자손들미디안으로, 이스라엘에 협력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후손들은 자손으로 구분하여 성서에 기록한 것도 확인 하였다.

그러므로 요단 동쪽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 대적한 미디안이 진멸당한 지역이고, 아랏 남방 유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이드로의 후예인 자손들이 유다 지파와 함께 정착한 곳이므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살았던 미디안 땅이 아니다. 따라서 그 미디 가운 이드로 고향으로, 출애 로 및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 등도 함께 고려해볼 , 또 다른 미디안의 후예인, 셋째 아들 하녹의 자손들이 살았던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일대가 가장 유력시 것이다.

민수 여호수아 , 곳곳에서 라엘의 남쪽 경계선을 “에돔 곁에 접근한 광야를 지나 가데스 바네아 남방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서는 물론이고, 여호수아가 12 지파에 땅을 분배할 때에 남방의 경계선에 접하는 나라들에 대한 언급에서도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어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경계는 홍해의 아카바 만 끝에 위치한 엘랏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 남방을 거쳐 애굽 시내를 경계로 지중해까지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청동 시대(BC1550~BC1200) 이집트 18왕조(BC1550~BC1295) 시대에는 이집트의 경계가 오늘 시리 지방까 확장되 역사 이집트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여서 가나안 지방은 이집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시기 시나 반도 광산 세라빗 엘-카딤 광산에서 존재하고 있던 미디안인을 포함하여, 말렉인, 네겝인 등은 이집트의 노예로 종사했던 기록이 밝혀진 점 등을 고려할 , 전기설의 출애굽 시기인 기원전 1446년경에미디안의 통치 영역시나반도까확장되있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다.

70인 역(譯) 헬라어 성경 (Septuagint LXX/OG: 기원 전 약 250년경), 유대전승 신약시대의 출발에 전후한 당시의 학자들과 교부들이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고향인 미디안은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 오늘날의 -바드에 있다고 믿었고 기록으로도 남겼다. 고고학적으로도 고대 이집트의 구리 광산들이 시나이 반도의 팀나, 세라빗 -카딤, 와디 마가라, 와디 나습 등에 존재해 있었고, 이집트가 하토르 신전까 세워놓 지키 있었음 탐사결 확인하였다. 나아가 유대 이슬람 전승과 신약초기 학자들의 저술서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인 “성경백과사전” 등에서도 아카바 동쪽,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이 미디안 땅이라는 것을 뒷받침 해주었다. 특히 베노 로덴버그의 탐사 발굴 작업에 의한 팀나 광산에서 출토된 유물들에는 출애굽 시기로 간주되고 있는 후기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사우디아라 타북에 북서쪽으 70km 떨어 쿠라 지역 미디안의 도자기 제조소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미디안의 영역이 확장되어간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출애굽 당시 고대 디안위치아라비반도북서쪽있었다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더욱이 사우디 정부와 사우드 대학의 고고학 팀이 1968년부터 2008년까지 아라비아 반도 북서쪽 히스마 (Hisma) 지방, 오늘날의 타북 지방에 있는 쿠라야, -바, 알-울라 및 타이마 지역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한 고고학적인 탐사 발굴 작업 과정에 밝혀 실들은, 그간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지방에 대한 탐사활동을 하고 발표한 내용들을 대부분 재확인 해주었다. 나아가 지방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고대 미디안 영역이었음을 입증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출토된 유물들 중에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은 미디안인들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목할 만점은 라야 지역의 발굴과정에서 밝혀진 것으로 이곳이 고대 미디안의 수도였다는 결론이었다.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에 걸쳐 도시를 건설하고 살았던 흔적과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방대지역에 축조된 건물들과 댐들과 저수장들은 물론, 높이가 6m 되는 성벽이 이를 입증하여 주었고, 특히 낮은 지대의 50,000m² 되는 주거지역은 고대에 많은 인구가 살았음을 확인해준 것이다.

오스트레일리 시드 대학 중동지 고고학자인 팟스(D. T. Potts) 교수 및 미디안 지역의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킹 사우드 대학의 고고학 교수인 압둘아지즈 알-가지(Abdulaziz S. Al-Ghazi) 박사의 언급에서도, 고대 미디안의 중심은 오늘날의 타북 지방이었고, 미디안의 영역은 북쪽의 와디 입구에서부 남쪽 -와즈(al-Wejh/Wajh: -라의 서편 홍해 변에 위치) 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확인 해주고 있다.

 

5. 시내 산의 위치

시내 산은 무엇보다도 성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믿음의 자손들이 찾고 있는 시내 산은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과 부합된 산이어야 한다.

3세기 수도사들 시나 남부 위치 산을 시내 산으로 여기고 순례하기 시작하였고,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인 헬레나가 산을 답사한 밑에 교회를 세우고 시내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에 무슬림들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산의 이름을 모세 산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산을 전통적으로 시내 산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1967년 이집트와 6일 전쟁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그들의 가장 관심사인 출애굽 사건들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15 년간을 분야별로 저명한 학자들을 동원하여 지역을 철저히 탐사 하였으나, 산임 입증 증거들확보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시나이 반도의 모세 산에서는 성서에서 시내 산에 대한 기록들과 부합되는 현상들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도 더욱더 신빙성이 떨어진다. 수없이 행해탐사단들 조사결 보고서 인구조 등에서 산에서 이스라엘이 오랜 기간을 머물 없었다는 부정적인 결론들만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나이 반도의 탐사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들 및 많은 학자들이 시내 산을 찾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고, 그 결과 주로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내 산이라고 여겨지는 13 곳 이상의 산들을 시내 산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알-라우즈 산에 대한 관련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기에는 시내 산이 미디안 땅에 위치하고 있다.

    70인 역 헬라어 성경(Septuagint LXX/OX)에 모세가 장인, 미디 제사 이드로 고향에 근처로 양떼를 몰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대전승에도 미디안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 고향이고, 가까 있다 전해져 내려왔다.

     바울 갈라디아서에 아라비아 있다기록되어 있다(갈 4:25).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시내 산이 미디안 도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기록하였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 황제 시나 반도 세 산을 시내 산이라고 명하기 신약초기 전후의 학자들 및 교부들의 저서에서도 미디안이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하였다.

    “고대 미디안의 위치에서 살펴 바와 같이 후기 청동기시대 시나 반도 이집트 영역이었음인정된다.

    신명기 1장 2절의시내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에 대해 검토하여 것처럼 대상이나 장정이 11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시내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가는 중간의 여정에서 이스라엘이 진을 곳만도 20군데나 되어 11일 만에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우즈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240 km 이므로 -라우즈 산도 신명기 1장 2절의 열 하룻길에 부합되는 것이다.

더욱이 “알-라우즈 산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과 성서 기록들의 비교”에서 바와 같이 -라우즈 산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학자들이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여타의 다른 산들에 비해 월등히 성서의 기록에 부합되는 부분들이 많으므로 -라우즈 산이 보다 유력한 후보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해 비유로 들은 갈라디아서 4장 21-26절의 말씀에서 지상의 예루살렘과 -라우즈(시내 산)의 관계가 영적 리적으 동일선상에 떨어지 있음 하나님께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사실성과 정확성에 한층 강한 믿음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말씀의 가치에 의해서 더욱더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열왕기 19장 8-9 엘리야 브엘세바에서 밤낮으로 40일을 가서 하나님의 호렙에 이르러 그 산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브엘세바에서 시내 산까지는 거리상으로 40 주야가 걸리는 장소에 위치 있어 하고, 산에 반드 동굴 있어 한다. 그런데 -라우즈 산은 거리상으로도 적합한 위치에 있고,  또한 산에 엘리야가 들어간 곳으로 보이는 동굴도 재 하고 있다. 그러므로 -라우즈 산이 시내 산으로서 강력한 후보지임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미디안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대 미디안의 위치”에서 자세히 검토하여 것처럼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일대가 미디안의 고유 영역이었음이 사우디 정부당국의 고고학 팀 사우드 대학의 고고학 팀에 의해 최근에 발표된 자료에서 밝혀졌다.

오늘날 아마추어 탐험가들이 -라우즈 산을 방문하고 사진들 토대 발간 취재 매체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므로 세인의 많은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단지 -라우즈 산을 하여 간단한 답사에 그친 상태에서 나온 주장들이었기 때문에 논란만 가중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입장에서 전문가들에 의한 체계적인 정밀조사와 발굴 작업 분석을 거쳐 -라우즈 산에발견되 나타나 현상들 지적 문제점들 저한 탐사가 이루어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어야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바와 같이 사안별로 많은 이론과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음을 조명하여 보았다. 결론적으로 사안별제기 주장들 부분적으로 일리 이론들었음 확인하였으 성서 기록 출애굽 내용모두에 합치되는 이론 주장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논란 대상 부정 없다. 그러므 이론이 주장이든 출애 과정에 벌어졌 건들에 대하여 성서의 기록들과 상충이 되지 않고 합치되어야 만 것이다.

       끝으로 출애굽사건을 가장 알고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절감하는 바이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류의 간절한 열망을 들어 주시어서 지금까지 조명하여 사건의 사안별로 명쾌한 진실과 해답을 우리들에게 하나하나 밝혀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빛낼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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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역사] 바벨론제국의 최후와 제7대 마지막왕이었던 벨사살의 죽음

    바벨론의 최후와 벨사살 2018. 5. 7. 15:20 기원전 562년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왕이 죽고 난 후, 키루스 대왕에게 함락되기까지 신바빌로니아는 21년동안 대혼란을 겪는다. 네브카드네자르 사 후,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순조롭게 왕 위를 승계하지만 2...
    Date2018.07.10 By갈렙 Views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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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No Image

    알미니안과 칼빈주의 논쟁

    알미니안과 칼빈주의 논쟁 울산북부교회 이석배목사 ●알미니안 논쟁 사랑하는 방송가족 여러분,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울산북부교회 이석배목사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종교개혁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당시의 유명한 <...
    Date2018.07.06 By갈렙 Views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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