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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특집①]

방언이란 무엇인가?

-‘이 보다 더 엉터리일 수 없는 정이철의 방언관’ 비판-

구요한 | [email protected]

정이철은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와 <뉴스M>(이전 미주뉴스앤조이)에 올린 글에서 방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글은 정이철의 잘못된 방언관을 비판하고 방언의 유익을 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게네 글로손)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헤르메네이아 글로손)을”(고전 12:10).


필자가 방언을 받고 방언 기도를 하게 된 지 어언 30년이 넘은 것 같다.
필자 또한 처음부터 방언을 긍정하고 수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거친 후 받은 방언의 영적 유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국 교계에도 초기에는 방언에 대한 찬반 논쟁이 많았지만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즈음은 순복음교회 교인은 물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의 구분 없이 방언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많으므로 적어도 방언만큼은 한국 교계에서 안착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 김우현의 『하늘의 언어』(2007)를 시작으로 방언을 지지하는 김동수의 『신약이 말하는 방언』을 통해 다시 한 번 방언 열풍이 일어났다.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방언을 비판하는 옥성호의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2012)를 시작으로 정이철 목사의 “소리 현상인가 성경의 방언인가”(『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및 “제3의 물결과 방언, 방언통역”(『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은 극단에 치우쳐서 현대의 방언을 인정하기는커녕 마귀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박영돈 교수의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이단 감별사 이인규 권사가 방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제 각각인 것 같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을 4가지로 분류했다.1)

적극적 부정: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방언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때로는 악마적이기까지 하다.
방언과 같은 기적적 은사는 사도의 표지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주어진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은사다.
방언은 있었으나 이제는 그쳤다.
방언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억울한 감정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이상한 형태의 하소연으로 나타난 것이다.

옥성호와 정이철이 이런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기적중지론이 성경과 상관없는 인간이 만든 논리의 산물이듯 이런 주장도 성경의 원래 의도와는 상관 없는 인간의 논리가 만든 엉터리 주장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먹혀 들어가는 이유는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을 지지하고, 방언 구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기적중지론을 철썩 같이 믿다가 자기가 한 번 기적을 경험해 보면 얼마나 엉터리 이론인가를 절감하듯, 이런 주장도 본인이 방언을 제대로 해보면 얼마나 엉터리 주장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방언을 하지 못하고, 방언으로 인해 교회가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경우, 대부분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이런 주장을 선호한다. 정이철의 말 같지 않은 방언관이 아직도 먹혀 들어가는 이유이다.

한국과 달리 미주(美洲)의 이민 교회는 토양이 척박하다.
교포 인구가 적고 교회 크기도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만일 방언이나 성령운동의 빗장이 풀어지면 교인 이탈 현상으로 인해 수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생존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기적중지론자들에게는 정이철 같이 막무가내로 성령운동을 비판하는 자가 자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는 것 같다. 미국의 이단감별사인 존 맥아더나 행크 헤너그라프처럼 믿는 구석이 있고 지지층이 있기 때문에 정이철은 마음 놓고 약발이 떨어진 기적중지론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방언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이철이 어떤 소설을 써도 먹혀 들어갈 것이다.
어차피 경험이 없으니 정이철의 요설도 수많은 설(說) 중의 하나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고 요설이든 말든 방언은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만 줄 수 있으면 상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정이철 지지자들은 방언을 못하는 것이고 방언 하지 않아도 착실하게(?)신앙생활 잘 한다는 거짓된 확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 인정:
방언은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있다. 하지만 방언이 신앙 생활에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방언은 성령의 열매(사랑)보다 덜 중요하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예언의 은사 보다 열등한 은사이므로 별 필요 없다.
방언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런 입장은, 1 달란트 받은 자가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놓았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님의 책망을 받은 자처럼 좋은 것 가지고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구석에 쳐 박아 놓는 자이다.

지나친 긍정:
방언의 은사는 신앙 수준의 척도다.
방언 은사를 받은 신자는 성숙한 신자이고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신자는 영적으로 초보 신자다.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런 주장은 방언이 좋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성경을 넘어서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다.

적극적 인정:
방언은 신앙 수준의 척도는 아니지만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은사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신앙의 침체에서 쉽게 회복되고 신앙 성장이 빠르다.
방언은 바울이 권장한 것이고 누가는 성령 세례(혹은 성령 충만)의 표지의 하나로 제시했다.

필자는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

 

필자도 마침내 방언을 하게 되다

“은사를 받았으면 무엇 하나? 바르게 행동을 해야지.”
“방언 받고 행동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방언 받지 않고 행동 그렇게 하지 않겠다.”
“교회에서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깨달은 말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방언은 못하지만 성경은 더 많이 안다.”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은근히 영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면서 “방언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말하면 필자가 으레 대꾸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면서 방언을 하지 못하거나 구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말썽 많은 방언’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는커녕 방언 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경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구하고 얻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렇구나. 방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들자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시고 방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께 방언 달라고 기도했더니 금방 방언 은사를 주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 다음날에도 재차 기도했더니 다음 주일 새벽기도회 즈음에 주실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다음 주일 새벽기도회.
너무나 피곤하여 30여분 정도의 예배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각자 기도 시간에 그만 깜박 졸아버렸다. 주일 새벽기도회에 방언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잠이 깼는데 “어이쿠 이게 웬일인가.”
나도 모르게 혀가 꼬이고 이상한 소리가 막 흘러나왔다.

“랄랄랄랄랄랄라라. . .”

“아 이게 방언이구나. 야 나도 드디어 방언을 하는구나”

이후 대부분의 개인기도는 방언으로 대체되었고 방언 기도를 통해 기도 시간도 길어지고 영적 체험도 더욱 깊어졌다.

 

방언에 대한 성경적 견해

방언을 하지 못하거나 방언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입장만 고수해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

고전 14장1절에서 성경은 모든 신자에게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것들은 물론 고전 12장에 기록된 9가지 기적행하는 은사(들)이다. 이 은사들을 어떻게 하라고?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모하다’는 그냥 ‘사모하다’는 말이 아니다. 한글 성경에는 밋밋하게 번역되었는데 헬라어 ‘젤로’의 뜻은 “탐하다, 질투하다, 열망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한다.

“Pursue love, yet desire earnestly spiritual (gifts), but rather that ye may prophesy.” -KJV.
“Pursue love, yet desire earnestly spiritual [gifts,] but especially that you may prophesy.”-NASB.
“Follow the way of love and eagerly desire spiritual gifts, especially the gift of prophecy.” -NIV .

즉 초자연적인 은사는 내가 구하고 싶으면 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시기하고 질투할 정도로 소원하라’고 성경은 명령한다. 그런데 J.I 패커는 ‘젤로’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면서 얼렁뚱땅 넘어간다. 2)

이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고전 12:30),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령하고(고전 14:1), 바울도 신자 모두가 방언하기를 원하고(고전 14:5), 또한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말한다(고전 14:13). 만일 방언이 성경 기록과 함께 끝나는 은사라면 왜 성경에서 간절히 구하라고 하겠는가?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주의시키는 것은 공중 예배 때에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방언을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때는 방언을 하면 통변을 하라는 것이지 방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통역이 가능하면 공중 예배 때에도 방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언과 통역 은사가 있는 조용기 목사가 공중 예배 때에 방언하고 통변하는 것은 하등 잘못된 일이 아니다.

 

말썽 많은 방언

방언처럼 많은 말썽을 부린 은사도 드물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회 내에서의 무질서한 방언 사용으로 말썽을 빚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사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기록했을까? 사도 바울은 공중예배에서는 통역 없이는 방언을 하지 말 것이며 통역이 있을 때라도 적당히 질서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방언은 또한 중세기에는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그때에는 “방언을 하는 자체가 귀신이 들린 증거”가 되어서 방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 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종교개혁, 웨슬레의 부흥운동, 미국의 제 1, 2차 대각성 운동 및 무디의 경건 운동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능력을 받는 능력성령세례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모르몬교 등의 사교 집단에서만 방언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을 부인하는 것은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 ‘유유상종 회합죄의 오류’라는 논리적 오류이다. 정이철은 이런 논리적 오류를 밥 먹듯이 저지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건전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이철은 ‘왜 하필이면 방언이 20세기에 나타났느냐?’고 비판하는데 이런 경험적, 역사적 비판은 논증 중에서 가장 취약한 논증이다. 정이철의 비판 대로라면 종교 개혁이 16세기에 일어나고, 선교운동이 윌리암 케리를 통해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것도 비판 받아야 한다.
(‘논리적 오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글로리아타임스/신학·목회/신학/논리적 오류를 보기 바란다)

20세기의 초기에 미국의 찰스 파함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흑인 목사 윌리암 세이무어가 불을 붙인 미국 L.A.의 방언 운동이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인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해 놓았으니 세속의 매스컴과 기존 교회들은 사정 없이 공격의 포탄을 퍼부었다.

당시 주류 교단과 매스컴은 이들을 혹독하게 매도했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 르우벤 토레이 신부도 오순절파를 ‘소돔의 영적 지도자들’, 방언을 ‘사탄의 마지막 토해낸 배설물’ 오순절의 예배를 ‘사탄 숭배’라고 공격했다.3)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저학력자나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방언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A 자매는 전통적인 장로교에서 배운 대로 방언은 수준 낮은 사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A 자매가 어느 은사적인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교인들의 대부분이 방언은 물론 여러 다른 신령한 은사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A 자매 보다 교육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복했고 신앙도 성숙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목격한 A 자매는 마음 문이 열려서 "그렇다면 나도 . . ."하면서 방언을 사모하여 쉽게 받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여태까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여러 가지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물론 방언은 구원의 신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마 초기에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마치 구원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령의 역동성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이전의 신앙생활은 인간적이고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실상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방언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등 신자는 더욱 아니다.
방언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오늘날에도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는듯하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방언 운동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성령 운동은 유럽, 인도, 러시아로 확장되어 갔고 남미에서 가장 많은 결실을 거두어서 오늘날 남미 개신교 신자의 거의 80%가 오순절 계통이다. 1907년 우리 나라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도 이러한 성령 운동의 한 연장이다. 비록 방언 현상은 없었지만, 심각한 회개와 반목하던 선교사들과의 화해로 이어지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한 부흥으로 인해 이후 기독교의 확장에 큰 몫을 했다.

비난과 경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던 성령운동―방언운동―은 거부, 핍박 및 관용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수용 및 적용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국에도 요즈음은 보수주의 목사들이나 신자들도 많이 방언을 하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언 하는 사람은 ‘개구리 귀신 소리’를 낸다고 배척했다. 그만큼 방언은 말썽 많은 은사였다.

그간 세월이 지나, 성령 세례의 초기의 실질적이고 유력한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던 고전적인 오순절주의자들도 이 주장을 어느 정도 수정하기에 이르렀고, 1960년대에 주류 교단에 퍼지기 시작한 은사운동은 방언을 성령 세례(체험)의 "여러 가지 표적 중의 한 가지 표적"으로만 인정하였고 이후 지속된 여러 성령 운동도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소한 영적인 현상이나 가르침이 일어나면 초기에는 이런 저런 신학으로 부정하다가 주변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주장하거나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선교단체에서 강조한 제자훈련만 해도 초기에는 비성경적이라고 부정하다가 그로 인해 성장한 교회들이 많으니까 이제는 "나도, 나도"하면서 따른다.
-10여 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 북치고 기타 치면 "무당굿"이니 "광란"이니 하면서 비판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교회 전체에 퍼져서 요즈음은 어디 가나 북치고 기타 치면서 찬양 예배를 드리고 있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개구리 소리, 귀신 소리라고 비판하더니 주변에 방언 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니 신학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상관이 없이 수용한다.

초기에는 그렇게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어느새 봄 눈 녹듯 소문도 없이 비판의 자취를 감춘다. 공적으로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전에 잘못되었다"고 공적으로 시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동안 방언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변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심지어 담임 목사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교회에서도 새벽기도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묵인하고 방관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한때 미국 C&MA(성결교) 교단의 입장과 비슷하게 ‘장려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대부분의 보수교회의 입장인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신학을 대변하는 박아론 박사가 교회에서 방언 사용을 인정하는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언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한 입장 또는 태도 천명 중에서 후대교회의 '방언의 은사'의 종식을 선언하고 방언 말하는 것을 교회적으로 전혀 금지하는 첫 번째 입장보다는 방언을 신자가 소유할 수 있는 성령의 고전압적 경험으로서 그것이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나누는 일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충만한 구현에 도움을 주는 한, 그리고 성령의 저전압적 경험에만 만족하고 기독교 교리의 이론적 전개에만 충실한 기성 교회의 대다수의 교역자들과 신도들에게 성령충만을 갈망하도록 하는 자극제요, 각성제가 되는 한, 공적 예배에서가 아니라 사사로운 모임의 장소와 시간에 하도록 허용함이 좋다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하며 그런 방향으로 우리의 태도를 표명해 나감이 현명한 일이라고 사료된다."4)

한편, 일부에서는 방언의 종류로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평가한다.
‘랄랄라’와 같은 단 음절 방언은 저급한 것이며 고급으로 올라갈수록 다음절 방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방언이 아마 제일 말썽을 많이 피운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 중에서 제일 뒤 순서에 배치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말썽 많은 방언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방언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언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다. 자신들이 못하기 때문에 좋은 점은 모르고 나쁜 점만 보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방언은 언제 끝나는가?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방언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방언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한다. 위의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방언 비판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것(10절)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이제는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방언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온전한 것으로 성경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드물다. ‘온전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다. 결론적으로 예언과 방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말이다.그런데 방언 비판자들은 명확한 성경 구절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논리에 의한 신학으로 방언을 포함한 초자연적 은사가 ‘없어졌다,’ ‘사라졌다’고 잘못 주장한다.

그외에도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가 교회 새대 전체를 통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많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은사가 부족함이 없기를 기도한다 (고전 1: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은사가 필요하다(고전 12:14-27).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한다(요 14:12).
-기적은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들이다(막 16:15-18).
-하나님의 변함없는 속성 때문에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기적이 일어난다.
-계시록이 기적의 지속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지금도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기적은 일어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글로리아타임스/신학?목회 > 신학>기적중지론의 허구를 밝힌다(1)(2)를 참조하기 바란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서로 다른 방언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한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7-8).

그렇지만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영적 언어라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의 방언은 ‘나라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사도행전 주석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방언하는 사람이 방언할 때 방언하는 본인이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여 그 외국어가 본국어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의 방언은 차이가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거하는 ‘표적 방언’이고 고전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표적 방언은 일회성이지만 은사 방언은 은사 받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로 오순절 계통에서 하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오순절의 방언은 비록 제자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했지만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방언 통역을 하여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한 나라 말만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이다.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7.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8).

오늘날 ‘나라 방언’을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기가 모르는 어느 한 외국어로 했다는 간증은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 말들"로 들었다는 간증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제자들의 방언을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하여 여러 다른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정리하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의 차이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가 된다.

첫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는 나라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은사 방언이다.
둘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초기의 성령 체험을 실질적으로 증거하는 표적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했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통변을 따로 해야 하는 은사 방언이다.

문제는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가이다.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구분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표적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나라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문제는 방언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다.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 본질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귀신론의 경우,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귀신의 기원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실제로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서로 물고 뜯는데 소진하는 것을 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귀신의 기원에 하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의 잘못을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축사나 영적 전쟁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귀신의 기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교인들이 귀신들려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정이철의 방언관 비판

정이철의 방언관은 자신이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서 인정하듯 상당 부분 팔머 로버트슨의 방언관에 기초하고 있다.5) 정이철의 방언관은 로버트슨의 붕어빵이다.

이들은,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서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고, ‘비밀’은 이미 드러난 복음인데 이제는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으므로 계시의 보조적 수단이었던 신약의 방언은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이 잘 모르고 체험하지 못한 초자연적 은사나 현상은 무조건 ‘사라졌다’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 그런 것들을 구하지 않고 받지 않은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방언은 외국어 인가?’와 몇 가지 관련된 주제를 살펴보고 다른 주제-방언은 ‘비밀’의 말 등-은 방언의 유익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인가?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고 우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방언의 특징은 무엇일까?

성경의 방언은 전혀 배우지 않는 외국어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즉시 구사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였다. 옹알거림을 옹호하는 어떤 사람은 “배우면 되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무슨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런 말은 교묘하게 본질을 왜곡하는 간교한 말이다. 전혀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어떤 필요한 상황에서 즉시로 완전하게 구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어디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래서 성경의 방언은 성령의 이적이었다.

성경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므로 그 나라에서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다. 이런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은 자를 살리고, 태어나면서 소경, 앉은뱅이였던 환자를 고치는 것과 같은 이적이다. 그래서 방언 이적이 나타나는 곳에 불신 유대인들의 회개가 많았다.

이와 같은 성경의 방언 속에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었다.

A. 십자가 구원계시를 증거
성경의 방언은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보내신 완전한 구원계시임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이적이었다.

B.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
사도행전의 방언이 실제 이방인들의 외국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C. 복음을 보충했던 계시의 보조수단
성경의 방언은 복음계시(성경)가 사도들을 통해 완성되어 교회에 주어지기 전에 복음계시를 보충하였던 임시적인 계시 은사였다. 그래서 성경의 방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활용되어야 했다.”
6)

정이철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각 자가 난 곳 방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행 2:7-8).

그러나 이런 주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오순절날 성령충만을 받아 방언을 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라 120명이었다. 그들이 다 성령충만을 받고 한꺼번에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행 2:4-7).

방언을 말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외국어로 말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이 한 외국어씩 순서대로 말했을까, 여러 외국어를 한꺼번에 말했을까? 정황적으로 볼 때 후자가 타당하다. 그렇다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큰 소리로 여러 다른 외국어 방언을 말했다면 소리가 섞여서 식별이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각자가 자기 나라 말만 쏙쏙 들을 수 있을까? 이것은 비슷한 상황을 상정하여 실험해 볼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설령 각자가 외국어 방언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말 뜻을 알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해야 할까?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13).

만일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면 술주정한다고 비아냥댈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자기 나라 말로 들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기 때문이다(행 2:11). 즉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방언 통변을 들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거 술주정뱅이가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었다는 의미이다.

영적으로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바울 이전의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사울은 빛도 보았고 음성도 들었다. 그러나 동행자들은 빛은 보았지만 음성은 듣지 못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 22:9).

 

-방언은 복음이 아니라 찬양이다

정이철은 “성경의 방언은 전혀 배우지 않는 외국어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즉시 구사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였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각국의 언어로 사람들이 들은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높임을 들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고넬료 집에 임한 방언도 같은 의미로 통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6).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자 찬송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아서 한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인 방언인데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통변을 하셔서 각자가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 높임”을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한 것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실제로 방언을 통역해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언젠가 어떤 초신자가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만일 유죄 판결이 나면 평생 쌓아 올린 명성이 하루 아침에 날라가 버릴 그런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의 스트레스와 불안은 대단했다. 하나님이 큰 위로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분에게 방언을 하게 한 후 통역을 해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분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찬양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필자 자신도 이런 경험이 더러 있다.

힘들고 고달플 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음성도 들어보고 방언 통변도 해보았다. 그랬더니 계속하여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라고만 통변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비록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죄로 인해 연약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내 문제나 눈 앞의 현실에만 관심을 갖지만 영의 사람-속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사실을!

(방언 통변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정이철 같은 방언 반대자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 가기 싫은 이유 77가지』처럼 본질은 놓치고 주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이 실제 이방인들의 외국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요설을 주장한다.

주석가인 사이몬 키스터메이커(Simon Kistemaker)도 사도행전 2장이 말하는 ‘다른 방언들’이 ‘다른 외국어들’이라고 말은 해놓고도 찜찜한 지 그 다음에 필자와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말했다면 왜 베드로는 그 다음에 한 가지 언어로만 설교했는가?(14절)

-만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베드로가 말한 것을 이해했다면 그 장소에 참석한 군중들은 헬라어나 아람어 또는 둘 다를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방언들(언어들)’은 유대 지방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9절), 그들은 아람어와 헬라어를 말했기 때문이다. 즉 유대지방 사람에게는 ‘다른 언어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언어들’이었다는 말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을 놀리면서 술주정한다고 말했을까?(13절)7)

사이몬 키스터메이커의 이런 의문은 ‘다른 방언들(언어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다른 언어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란 주장에 대한 예외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외가 많다는 말은 애초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해결은 간단하다. 120문도들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인 방언을 했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듣는 사람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 높임을 말함’을 듣게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고넬료 가정에 임한 방언이 하나님을 높이고(행 10:46), 바울도 방언으로 찬송하고(고전 14:15), 오늘날 방언하면서 방언 찬송도 하는 사람들의 간증과도 일치한다.

실제로 방언을 중시하는 하나님의 성회 교단은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영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정이철의 그릇된 확신과는 달리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신학자인 스탠리 호튼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목적은 달랐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8)

또한 정이철은 방언은 '복음을 잘 설명하는 계시 은사'이기 때문에 성경 기록과 함께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정이철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경 시대에 잠시 나타났다가 성경 기록 완성과 함께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자기들이 초자연적 은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구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정이철은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

“이와 같은 성경의 방언 속에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었다.
A. 십자가 구원계시를 증거
성경의 방언은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보내신 완전한 구원계시임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이적이었다.

B.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
사도행전의 방언이 실제 이방인들의 외국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C. 복음을 보충했던 계시의 보조수단
성경의 방언은 복음계시(성경)가 사도들을 통해 완성되어 교회에 주어지기 전에 복음계시를 보충하였던 임시적인 계시 은사였다. 그래서 성경의 방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활용되어야 했다………..

성경의 방언은 전혀 배우지 않는 외국어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즉시 구사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였다.” 9)

정이철은 성경에도 없는 방언의 기능을 조작하고 있다.
과연 ‘방언이 십자가 구원 계시를 증거하고 복음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인가?
방언자들이 “하나님 높임”을 말하는 것만 듣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는가?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찬양을 듣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 모인 유대인들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 높임을 각자 자기 나라 말로 듣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여겼을 뿐이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소리를 높여 이런 현상이 어떤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 풀이해 주고,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너희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니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행 2:14-41).

즉 방언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다는 증거이지만 그 자체로는 정이철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정이철은 방언이 영의 은사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잘못 주장한다,

사도행전의 방언이 실제 이방인들의 외국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달리 ‘영의 언어’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에 대해 설명한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바울은 구약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였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행 14:21,22)[고전 14:21,22].

이사야 선지자는 그 시대의 완악한 구약의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외국 말하는 이방인들을 동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내용은 훗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략함으로 성취되어진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할 때 바울이 이사야의 그 예언을 인용하였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예루살렘을 침략한 이방인들의 언어와 같은 실제 외국어였다는 것이다. 생소한 말을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구약의 교만한 유대인들을 회개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신약시대 초기에도 끝내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이 심판을 받아 꺾이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복하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배운 적 없는 외국어가 완전하게 구사되는 방언 이적으로 증거하신 것이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10)

정이철은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이므로 외국어가 틀림 없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고전 14:21, 22는 방언 비판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방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수많은 구절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구절에 유독 관심을 갖는 것은 반성령운동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사실 이 구절은 정이철이 강조하는 만큼 그렇게 크고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므로 공중 예배 때에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방언을 하면 방언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오해하고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세계적인 주석가인 고든 피(Gordon D. Fee)는,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치켜세우면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이라고 자만하던 그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불신자가 시험이 들게 하여 구원 얻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 대신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라고 권면한다고 해석한다. 11)

그랜드 종합주석도 이런 해석을 지지한다.

“바울의 가정 대로 모든 교인들이 전부 방언으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나 교회 밖 사람들은 방언하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행 2:13). 더욱이 그들은 방언하는 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교회는 배타적인 되게 되며, 사랑이 없는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된다.” 12)

이런 해석은 고린도 전서의 그 다음의 구절에서 증명된다.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3-25).

즉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이철은 정 반대로 해석한다.
정평 있는 주석들은,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불신자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이철은 외국어인 방언을 하는 이방인을 통해 방언은 교만한 유대인들을 회개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보다 더 정확하게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정이철)는 착각에 빠진다. 필자는 반대로 “이 보다 더 엉터리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기가 드물다”고 말하겠다.

 

방언의 유익

방언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인 유익은 모르고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나쁜 것만 보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면 합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는 입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죄인들이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지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거듭났지만 말썽 부리고 죄짓는 신자가 많다.
신자의 신분의 확실성,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보지 않고, 그의 현실적인 나쁜 행위만 보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군," "바른 교리를 입으로 고백은 잘하지만 고백한 대로 살지는 못하는군"이라면서 구원 받은 신분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불완전한 신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신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용서 받은 죄인,"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방언과 같은 영적 체험이나 영적 현상만은 완벽하기를 바라는가? 방언의 유익이 더 많지만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몇 가지 나쁜 것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얼핏 보면 말썽만 부리는 은사인 것 같지만 유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의 유익을 살펴보자.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가 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공중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고전 12:5). 방언이 통역 되면 예언의 효과를 가져와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역할을 한다(고전 14:4). 그러나 통역을 하지 않은 방언,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공중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다(고전 12:23).

남을 가르칠 때에는 알아듣는 말 다섯 마디가 통역이 없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 12:19). 여기서 “남을 가르칠 때”라는 말에 유의하기 바란다. 방언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남을 가르칠 때는 무익하다는 말이지 방언 자체가 무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역 없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다(고전 14:27-28). 또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또는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이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방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언하는 자체만을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4:23).

방언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방언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마음 문을 열어 구원 받을 기회를 놓치게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을 정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헬라어 ‘글로싸’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말’(language)을 의미하므로 ‘방언은 알아 듣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알아 듣지 못하는 말’(고전 14:2)이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죽은 믿음’도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언어란 절대적인 표현이 불가능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다.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성은 되지만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란 뜻이다.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돕는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므로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는 방언이 반드시 통역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혼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시간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할 것인가? 개인의 영성 개발 없는 단체의 덕은 있을 수 없다. 방언의 효능은 개인의 내적인 영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한다(고전 12:15).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비밀의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는 방언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병이 났을 경우 병원에 가서 의사가 수술하면 병이 낫는다. 그러면, 환자가 의사가 치르는 수술의 모든 과정을 모른다고 해서 수술 받는 것이 소용이 없는가? 환자는 '의사의 수술을 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그 사실만 알면 된다.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복잡한 수술 과정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방언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방언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의 말이기 때문이다(고전 12:2).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하면 심령에 평강이 임하고 기도의 응답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할 때 병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할 것인가?

필자는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만 고장이 나면 번번히 전문가에게 가서 수리한다. 복잡한 수학공식 같은 것이 딱 질색이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필자에게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필자는 컴퓨터의 스위치를 켜서 필자가 익숙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정도만 알면 되지 않는가?

방언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방언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기도응답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않지만 우리의 영은 분명히 열매를 맺는다(고전 12: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우리의 영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방언 기도를 하노라면 하나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임재 속에 쉽게 들어간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실질적으로, 체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하기 전의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깨끗이 가시고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꼭 방언 기도를 해야 이런 응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는 은사를 통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 진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레이몬드는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3) 대부분의 방언 비판자들이 ‘비밀’을 이렇게 이해한다.

정이철도 이렇게 잘못 주장한다.

“D.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2:2)
이 내용을 근거로 현대의 방언기도가 성경의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이 주장이 가장 옹알거림을 성경의 방언으로 미화하기 위한 가장 그럴싸한 논리적 근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은 말하는 ‘비밀’이란 무엇일까?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단어은[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 즉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 계시를 뜻하는 말이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바울에게 비밀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계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14)

성경은 ‘비밀’(mystery.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이전에는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드러난 복음의 의미로만 사용하는가? 물론 신약 성경에는 이런 의미로 ‘비밀’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즉 성경이 말하는 비밀이나 신비 즉 미스테리온은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지혜이며 이전에는 감추어 졌다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완전히 드러난 구원의 복음을 말한다(롬 16:25; 고전 2:7, 8상; 고전 4:1; 엡 1:9등).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 곧 계시의 복음 전파 사역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미스테리온은 이제 더 이상 신자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비밀이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이다(마 13:11; 막 4:11; 눅 8:10 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미스테리온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롬 11:25).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살후 2:7).
-보통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도 있다(고전 13:2).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신자의 몸이 홀연히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고전 15:51).

그렇다고 이런 비밀은 인간의 노력으로 소수만이 가지는 특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은사(고전 12:10; 14:24, 25), 신앙의 성숙으로 인해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닫는 것 등을 포함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초신자 보다 성경의 내용을 더 많이 알고 의미를 더 깊이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방언이 말하는 비밀이 과연 드러난 복음일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구절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다.
정이철이나 로버트슨의 주장 대로 ‘비밀’은 ‘이제는 드러난 복음’의 의미로만 사용된다면 왜 사람이 하나님께 드러난 복음을 말하는가? 하나님도 구원을 받으시라는 말인가?

성경에서 ‘비밀’이란 말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S. 모티어(S. Motier)는 성경 말하는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자세히 분석한 후 이렇게 결론 짓는다.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미스테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 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 11:33).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슨, 레이몬드 및 정이철 등은 이제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다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은 없다고 주장한다.16)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계시되었으므로 방언도 이제 더 이상 비밀의 말이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얼마나 주제 넘고 건방진 주장인가?
성경에는 분명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자기의 신학으로 성경의 명백한 구절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기적중지론에 사로 잡히다 보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조차 부정하는 기현상이 속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성경을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변호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2:45-46).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방언으로 찬송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필자는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글을 보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언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보통의 말로 하는 찬양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하물며 영으로 찬미하는 방언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언젠가 필자는 미국인이 인도하는 찬양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찬양 인도자가 가사 있는 찬양을 어느 정도 인도한 후에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허-밍 비슷하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응답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고 필자의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방언 찬송도 하고 신령한 노래도 불렀다. 그것은 마치 ‘허다한 무리의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겔 1:24).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 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자(겔 1;24), 예수님의 음성이며(계 1:15), 동시에 구원 받은 허다한 백성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다(계 19:6).

미국 암흑가의 깡패를 전도한 것으로 유명한 데이빗 윌커슨 목사와 공동으로 십자가와 칼』(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을 집필한 성공회 신자이자 신문기자인 존 셔릴(John Sherill)은 방언 찬송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음악이 시작됨에 따라 탁자주위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악보도 없는 즉흥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찬양인도자는 더 이상 노래를 인도하지 않고 음악이 흐르는 대로 맡겨두었다. 누구의 인도함도 없이 사분지 일 정도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한 가지 하모니와 또 다른 하모니가 들락날락하며 서로 영글어졌다.”17)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고전 14:15) ‘신령한 노래’(엡 5:19; 골 3:16), ‘성령 안에서 노래 부르기,’ 또는 ‘하나님의 존영’(the High Praised of God)(시 149:6)이라고 한다. 제임스 던(James Dunn)18)은 신령한 노래(엡 5:18)가 곧 방언 찬송이며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19)라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필자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체험했다. 어느 주말, 재학 중인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출발하여 북부 뉴저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섬기는 교회를 향해 약 2시간 동안 운전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감이 있는 찬양 테이프를 들으면서 얼마간 따라 부르고 있노라니 갑자기 심령 깊은 곳에서 생전에 듣지 못한 고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하면서도 하늘 보좌에 상달 되는 듯한 소리였다. 부르고 있노라니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듯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라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신령한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필자가 개인의 경건 시간에 매우 즐기는 것이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이다. 방언 기도보다는 방언 찬송이니 신령한 노래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특별한 경우 외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혀를 통제하므로 무한정 할 수 있다.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시간 상 한계가 있지만 방언 기도는 오토매틱 파일럿(automatic pilot 자동항법장치)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고전 12:18),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고전 12:39).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고전 12:30),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므로(고전 12:5),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 12:39).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는 사람은 그 내용을 모르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기도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기도가 곧 방언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기도 자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로가 자기의 체험이나 무체험을 증거하는 구절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방언 기도든 보통 기도든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방언 기도에도 해당이 되고 보통 기도에도 해당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20) 중요한 것은 때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깨달았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인 한 명이 뺑소니 교통사고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필자에게 법원에 가서 영어로 통역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필자는 판사 앞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통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판사는 필자에게 말하기를, “뺑소니 교통사고는 사안이 중요한 사건이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필자는 즉시 판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법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대하면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법을 전공한 사람들끼리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전문적인 지식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필자같이 법에 대한 일반인이 나설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어떤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가 많다. 이때 성령은 우리 사정을 잘 아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필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방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노라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때로는 성령께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신다. 필자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필자의 입장이 되어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존경하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훼케마는 전형적인 기적중지론자의 입장과 서신서를 역사서인 사도행전보다 우위에 놓은 잘못된 입장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전반적으로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1)

또한 그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주기도문 식으로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다고 한다.22) 글쎄? 필자는 훼케마와 같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주기도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때로는 도대체 내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방언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방언은 비상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 친구와 체스(chess. 서양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방언 기도가 나왔다. 그는 친구의 양해를 구한 후 잠시 다른 방으로 가서 방언 기도를 강하게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방언 기도가 저절로 멈추기에 나와서 다시 체스를 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미국과 월남 전쟁 중, 어떤 전투에 투입된 아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자기가 모월모일 모시 경에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그의 아버지가 긴급 방언 기도를 한 때였다.

어떤 자매가 시외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방언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운전자에게 지금 곧 내려달라고 했다. 운전자는 정거장이 아니므로 정차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운전하는 할 수 없이 그녀를 하차시켰다. 얼마 후 그 버스는 큰 사고를 당했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왜 타인들에게도 위험을 경고하지 않고 자기만 내렸는가?
그녀는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야 되겠다는 경고나 마음의 부담을 느꼈지만 그것이 버스 사고에 대한 경고인 줄은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만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경고를 하지 않으셨는가?
아마, 하나님이 동일하게 경고를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적 민감성이 떨어졌거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 경고하셨지만 신호를 몰랐거나 무시해서 위험을 당했다고 할 수도 있다.

 

-방언은 영적인 무기다

말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이 영적인 무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방언 기도와 방언 찬양은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인 무기다. 성령의 능력은 귀신의 세력을 물리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성령 안에서 하는 방언 기도와(엡 6:18; 유20) 방언 찬송(엡 5:18)은 사단을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인 무기이다.

방언은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심하게 귀신 들려 있었다. 필자는 그 사람을 눕혀 놓고 방언 기도를 얼마 동안 했더니 드디어 귀신이 참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귀신의 세력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방언 기도를 이기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귀신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세력이 한 풀 꺾여서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말이다(골 2:15).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쫓아내면 된다. 이때 축사를 받은 분은 지금 유명한 신학교 박사·교수님이시다!

언젠가 잠을 자다가 강력한 귀신의 공격을 당했다.
필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귀신이 워낙 강하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언 하라.”

억지로 힘을 방언을 했더니 귀신이 삽시간에 물러갔다.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된다

미국에서 방언하는 목회자와 그렇지 않은 목회자의 기도 시간을 조사해 본 결과, 전자가 후자 보다 대충 3배 정도 길게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도의 양과 질,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일반적으로 길게 하는 기도가 질도 좋다. 왜냐하면 기도하자 말자 본인이 원하는 잡념 없는 깊은 기도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 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제대로 기도의 맥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잡념과 영적 세력들이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기도 보다 방언 기도를 통해 기도를 오래 하고 또한 깊이 할 수 있다. 필자는 말로 하는 기도는 10분도 채 못한다. 그러나 방언 기도를 하면서 기도의 삼매경에 들어가면 서너 시간도 쉽게 할 수 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의 세계와 접속한 시간이 많다는 것이고 그 결과 그만큼 성령의 운행에 민감해 진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은사도 상대적으로 쉽게 받게 된다. 그런데 평소에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둔감하다 보니 초자연적 은사를 받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은사의 전이도 쉬워진다. 그만큼 그 사람의 영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영의 역사를 비판하고 반성령운동 대열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책이나 신학을 선호하고 상대적으로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의 사모들 중에서 목사가 영적으로 깨어지기를 바라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분들이 많다.

(보충 설명)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나누어주시는데 어떻게 방언이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되느냐?’고 질문한다?

방언이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성령은 그 뜻대로 은사(들)를 나누어 주신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0).

그러나 성령은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기도 하지만, 안수를 통해서나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은사(들)를 나누어 주신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5-17).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고전 14:1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에 대해서는 위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눅 11:13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누가복음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사건에 대해 기록하지 않는가?
물론 복음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체류 중이던 A.D. 61~63이다, 이때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지 30여 년이 지난 때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강조하는 누가가 누가 복음을 읽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성령을 구하라’고 권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존 놀란드(John Nolland)는 필자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오순절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성령이므로, 누가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선심은 (이미 주기도문에서 잘 보여진) 일상적인 필요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선물인 성령까지에도 미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석일 것이다.

(It will be best to see that, since from a post-Pentecost early church perspective, the greatest gift that God can bestow is the Spirit, Luke wants it to be seen that God’s parental bounty applies not just to everyday needs (already well represented in the text in Lord’s Prayer) but even reaches so far as to this his greatest possible gift) (Nolland,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5: Luke, Dallas, TX: Word Books, Publisher, 1998. CD 버전).

정리하면, 누가가 말하는 성령은, 바울 서신서의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과는 달리, 대부분이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이다. 즉 누가의 성령은 사역적인 능력-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는 능력 등-은 물론 초자연적 은사(들)를 주주는 능력이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들)는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지만 안수를 통해서나,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은, 물론 한두 번 기도해도 주시겠지만,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은사(들)를 주신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지만 방언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오래 하고 많이 한다. 그래서 방언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 보다 다른 초자연적 은사(들)를 더 잘 받는다. 그래서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된다, 또는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실제의 사역을 통해서도 검증된다.

안수 사역을 해보면 방언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초자연적 은사(들)를 더 잘 받는다. 오랜 기도를 통해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해 더 열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반문?
그렇다면 기도를 많이 한 조지 뮐러와 같은 사람은 왜 방언을 하지 않았는가?

첫째, 조지 뮐러가 ‘방언을 했다,’ ‘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는가?
조지 뮐러의 전기나 기록에 보면 방언 자체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그가 방언을 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

둘째, 다른 초자연적 은사가 나타나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꼭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의 사모인 도리스 와그너는 축사사역은 잘 하지만 방언은 하지 못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셋째, 어떤 은사나 기름부음은 특정한 때에 부어지는 경우가 많다.
방언은 주로 20세기의 오순절 성령운동 이후에 부어진 은사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만의 주권이자 비밀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거나 큰 영적 부흥이 임했어도 방언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또한 그런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방언을 사모하고 구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90년대 중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만 해도 ,미국인들 중에서는 많았지만 한국인 중에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에 한국에 외국의 많은 사역자들이 다녀가고 음성듣기에 대한 사모함이 보편화 되자 오늘날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음성을 듣는다. 즉 특정한 기름부음이 강하게 부어지는 때와 간절한 사모함이 합쳐질 때,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은사를 더욱 쉽게 받는 것 같다.

(보충설명 끝)

 

귀신 방언도 있는가?

'귀신 방언'(demonic tongue)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방언은, 기독교는 물론, 불교, 모르몬교 등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난 현상이다. 또한 말세에는 사탄의 활동이 심해지며(딤전 4:1),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므로(고후 11:14),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야 한다(요일 4:1).

필자는 ‘방언 귀신’(toungue demon)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체험한 것은 단 한 번이다. 언젠가 제랄드 맥그로(Jerald MacGraw) 박사23)가 미국 뉴욕 주 나약(Nyack)시(市)의 얼라이언스 신학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 에서『능력대결』(Power Encounter)강의를 할 때,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하면 믿음이 강한 신자들도 방언 귀신에 속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밝히며 영을 분별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필자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 방언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왠지 불안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 수없이 방언 기도를 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방언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가뿐하고 평강이 임했다. 그래서 필자는 즉시 방언 귀신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이름으로 쫓았다. 이후 방언 귀신이 더 이상 붙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방언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방언 하는 것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섬뜩해지거나 기분이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다. 아마 본인에게도 이런 기분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혹시 내가 귀신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점검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 방언 기도를 하든 마음에 평강이 임하지 않고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대부분이 귀신의 장난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결론 : 말썽은 있지만 유익한 방언

이처럼 방언은 말썽과 위험의 소지도 있지만 유익한 은사이다. 이 세상에서 유익한 것치고 말썽의 소지가 없는 것은 없다. 자동차는 너무나 유익하지만 위험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교통 사고로 죽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해서 자동차 타지 말고 자건거 타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 위험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유익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소정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고 각종 교통안전법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방언도 마찬가지다. 일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방언을 자랑하고 남용한다고 해서 은사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취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이 중요한 은사가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의 제일 마지막에 언급했다면서 방언 무용론을 주장한다.24)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 그렇게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방언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런데 훼케마는 자신이 성경을 넘어서는 판단자가 되어 비판한다.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연 훼케마가 주장하는 대로 방언이 마지막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은사인가? 근접 문맥에 있는 고전 13장은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훼케마의 논리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방언이 마지막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제일 중요한 은사이다.

또한 성경은 가장 작고 약한 은사가 가장 귀한 은사라고 기록한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물론 이 구절은 방언을 가장 귀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에게 한 말이지만 훼케마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방언이 가장 별 볼 일 없는 은사라면, 이 구절에 의할 때 말썽부리고 소용없다는 방언이 오히려 가장 요긴한 은사가 된다는 말이다.

방언이 마지막에 기록되었고 말썽 부리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는 은사라고 주장하는 훼케마의 논거 자체가 잘못된 억지라는 말이다.

방언이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다.

“나는 소속된 교단에서 인정하지 않으므로 거두어 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방언으로 인해 신자들이 영적으로 저질화되었다.”

“방언은 신비주의자나 환각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다.”

이런 주장들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을 모두 제대로 잘 사용하고 있는가?

이런 억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말썽 부리는 목사, 장로, 권사,집사가 많으니 모두 없애자는 주장은 왜 하지 않는가?

신약 신학자인 고든 피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하지만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비록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면서 방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비판한다.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 . .

많은 현대인들이 이 현상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즉, 생소한 것에 대한 두려움, 명백하게 합리적인 아닌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것, 은사주의자들로 인한 몇 가지 나쁜 경험들 등),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런 체험을 오랫동안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학적 견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 현상에 대해 오순절주의자들이 종종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이 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바울의 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기양양한 태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기도나 찬양은(고전 14:15-17), 기본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가치를 깎아내려 버린다. . . .

바울이 엄하게 꾸짖은 것은 공중 집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방언 말하는 것이었다. 그외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방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도 기도하고(즉 방언도 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다"라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 .

결론적으로, 바울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방언 말하는 것은 그의 모든 신학적 전망에 부합된다. 이제 우리는 방언을 통해 찬양, 감사, 기도 및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심령 깊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연약함 중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연약함 중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바울은 주장한다.”25)

성경은 신자들이 신령한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령한다(고전 14:1). 방언은 비록 말썽 많은 은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고전 1:4-7). 또한 유익한 점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방언 말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공중 앞에서 사용할 때는 교회의 덕을 위해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4-7).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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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 2010), 17-18.

2) J. I. Packer,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Fleming H Revell Co, 1987), ?

3) Vinson Synan, In the Latter Days―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in the Twentieth Century (Ann Arbor, MI: Servant Books, 1984), 77.

4) 박아론, "오순절주의의 폭발적 인기," 『보수신학연구』(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87-88.

5) 정이철,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85-129; 팔머 로버트슨,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부흥과 개혁사, 2009), 35-73.

6) 정이철, “이단이 시작한 옹알거림이 외국어로 영의 언어로 변천,”『뉴스M』(구 미주뉴스앤조이).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3930 2014년6월14일).

7) Simon J. Kistemaker, Exposi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Testament Commentary (Baker Book House, 1990), 77-79.

8) Stanley M. Horton, The Book of Acts: A Commentary (Springfield, MS.: Gospel Publishing House, 1981), 33 ; John R.W. Stott, The Message of Acts (IVP, 1990), 67에 인용됨.

9) 정이철, “이단이 시작한~”『뉴스M』(구 미주뉴스앤조이).

10) ibid.

11)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son Publishers, 2005), 238-42.

12) 제자원, 『고린도전서』, 그랜드 종합주석 17권 (성서아카데미, 1999), 616.

13) 레이몬드, 『신오순절 운동 비판』(개혁주의 신행협회, 1984), 24-25.

14) 정이철, “이단이 시작한~”『뉴스M』(구 미주뉴스앤조이).

15) "Mystery," in 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94), 740.

16) 레이몬드, 『신오순절운동 비판』, 18-25.

17) John Sherrill,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 (London, UK: Hodder and Stoughton), ?

18) James Dunn, Jesus and the Spirit (London: SCM, 1975), 238-39.

19) F. F. Bruce, Ephesians (NICNT, Eerdmans, 1984), 380에서 인용.

20)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차영배, “XII. 성령의 인격적 대도와 탄식,”『성령론―구원론 부교재』, 251-73 참조.

21) 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신망애출판사, 1982).

22) Ibid., 124.

23) Gerald MacGraw, Tongues--Devilish Snare and Heavenly Language (Westminster, SC: Shamaim Ministries, 1989), 12-25.

24) 훼케마, 『방언 연구』, 117, 119.

25) Gordon D. Fee, Listening to the Spirit in the Text (Eerdmans Pub, 2000),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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