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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칭의(稱義), 과연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가?(18:9~14)

[일시] 2017.02.19.() 주일낮예배

[찬송] 21장 다 찬양하여라,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PW: 칭의, MIW: 회개

T.S: 칭의를 얻으려면 속죄에 대한 믿음과 함께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 가운데 선입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선입관 혹은 선입견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견해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이것이야하고 한 번 마음에 확정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도무지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칭의구원그리고 천국이라는 단어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칭의를 얻는 것을 구원을 받은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정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옳은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칭의를 얻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완성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칭의와 구원과 천국은 같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시점으로 계산해보면 확실히 다른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통개념이란 전부다 믿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점으로 보면, 칭의와 천국은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칭의를 보겠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칭의는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얻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칭의는 사실 이 세상에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영혼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稱義)”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합니다. , 칭의란 무엇입니까? 칭의란 그 사람이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칭함받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의롭지 않은 대상은 죄인인 사람을 가리키며, 의롭다고 칭해주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용되는 법률적인 용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법률적인 용어로서 칭의가 무슨 뜻인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렇습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칭의는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그래서 율법 외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전가하는 하나님의 의 곧 비록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칭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하지만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칭의를 받을 수 있고, 그 칭의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율법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기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속죄를 구했던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없던 세리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규정대로 열심히 사는 자가 의롭다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인으로 판명되어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요? 그리고 의로운 행위들을 많이 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없었던 세리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을까요?

 

2)청중적 접근

오늘날 우리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칭해줄 것이니, 자신의 뒤를 돌아볼 때 의로운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내가 칭의를 받는 것에 대해서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요?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30년경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주시면서 말씀하신 비유로서, 유대 종교인을 대표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죄인을 대표하는 세리(세금징수원)의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나열한 바리새인의 기도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회개하고 있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시더니,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막 죄짓고 살아도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칭의를 위해서는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필요없다는 말입니까?

 

5)문제 심리묘사

칭의의 개념을 잘 모르면, 막 죄짓고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칭의의 개념을 잘 모르면, 의로운 행위가 칭의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의로운 행위가 없던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집에 돌아가게 된 것일까요?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칭의의 개념이 얼마나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칭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도 주님이 인정해주지 않는 칭의관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도 또한 바리새인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칭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 칭의는 어떻게 받는 것인가?

, 세리가 어떻게 해서 칭의를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런데 먼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칭의의 관념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칭의에 대한 개념은 2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이며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확고히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다 의롭다고 칭함받게 될 것이다는 관념입니다. 둘째, 이러한 칭의는 내가 믿어서라기 보다는 사실은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뜻에 따라 된 것이므로, 예수님을 믿게 되어 칭의를 받은 나는 결단코 구원에서 떨어지 않을 것이다라는 관념입니다.

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어서 이러한 칭의론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잘 공부했거나 그것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잘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첫 번째로, 이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비록 죄인이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말씀은 이것입니다.

8:30 미리 정하신(에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어서 칭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에 관한 성경구절의 말씀입니다.

8:32-3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를 보면,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된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고 있는 한, 자신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성경구절만을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무슨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받게 될 것이고, 칭의를 받은 나는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 확실하구나.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중간에 무엇인가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이러한 말씀은 그 시대적인 특별한 상황을 두고 나온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부득이하지만 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합동측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학대학원을 통합측인 장신대 신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신대원 2학년에 때에 여성안수 헌의안이 총회에 상정되었습니다. 여성도 안수를 받아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되게 하는 헌의안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 통합측 총회는 성경과 반대되는 것도 밀어붙이려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다들 이 문제에 대해서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는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런 일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고전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또한 디모데전세에 보면 이러한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딤전2:11-12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저는 그때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 우리교단은 성경을 어겨가면서 여자에게 기름부어 치리장로가 되게 하고, 목회자가 되게 시도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니, 이것이 더 큰 문제로구나. 더 큰 문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말씀으로서, 그 때에는 옳은 것이었지만, 후일에 어떤 시대나 어떤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절대적인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왜 사도바울이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간과한 채 그 말씀만을 가지고 판단하고, 그것으로 교리를 만들어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값을 다 치르셨음을 믿어서 된다고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겉으로 볼 때에는 율법의 조항들을 잘 지키고 있어 자기는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이라도 그들이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 세리는 과연 어떻게 되어서 칭의를 받을 수 있었는가?

주님은 이 비유에 한 명의 바리새인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전형적인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조항에 나오는 것이라고는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지 말라는 것을 다 하지 않고 있으며,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다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율법의 대표규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중에서 하지 말라고 규정들은 11절에 나오고, “하라고 하는 규정은 12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그는 율법 규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율법규정에 없는 것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자기를 향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렇습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토색하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으며, 간음을 행하지도 않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도 같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3:23에 보니, 그들은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십일조 외에도 회향과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율법을 잘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들은 금식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속죄일에만 금식하라는 율법규정도 지킬 뿐만 아니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추가로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바리새인의 내면을 잘 들여다 봅시다. 그가 이렇게 율법의 규정을 지킨 이유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사실 하나님께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 그곳에 왔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따로라는 말을 보십시오. 원문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의가 이 정도다라면서 자랑하기 위해 성전에 나온 것입니다. , 그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 겉으로 보기에 죄인이라고 칭함받는 들을 정죄하고 경멸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는 자기처럼 하고 있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고소했습니다. “나는 저들과 같이 아니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때에는 전혀 토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의하지도 않았고,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했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세리와는 다른 존재인 것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바리새인의 행위를 의로 여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동사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남성 단수구문으로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채 있다는 뜻입니다. 원문을 살려서 번역해봅니다.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고(의롭게 된 채 있으면서)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그렇습니다.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대체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칭의에 대해 인정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18:13 세리는 멀리 (떨여져서)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오히려) (자기의) 가슴을 치며(치고 있으면서)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속죄를 베풀어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죄인인 저를) 하였느니라

아무리 잘 번역하려고 해도 좀 이상하게 번역됩니다. 그래서 아예 원문의 순서에 따라, 뒷부분만 원문으로 직역해봅니다.

18:13 ... 하나님, 당신은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세리는 첫째, 자신이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소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멀치감찌 떨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도 감히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해 애통해하고 마음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토색한 것이 있었을 것이고, 불의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으로 간음을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로지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가 끝날 때까지 피멍이 들도록 그는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죄인인 나에게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싶으나, 내 직업이 나를 죄짓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해야 합니까? 동료가 다 그렇게 행하는데 나만 안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 노릇을 대체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저는 죄인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죄를 해결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주여,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러기에 그는 비록 죄가 있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공산이 크지만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날 한국교회의 칭의론은 어떠한가?

여기서 바리새인은 오늘날 자기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면서, 그래서 자기는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늘날의 개신교인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때에 이런 자들이 들이내미는 성경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칭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씀으로만 자신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오직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있으며, 자기는 이미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이기에 자기는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받은 것이라고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자신에게 유리한 말씀만을 자기에게 적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을 근거로 자신은 칭의를 받은 자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의롭다고 판단하고 있는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종을 울리십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은 칭의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성경말씀에 따라,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그것을 통해서 칭을 받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칭의를 확정하려고 그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주님은 자기가 원하는 잣대로 판단하고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그들의 의를 의라고 여겨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렇게 의로운 바리새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말씀을 잘 암송하고 있는 자를 의롭다하고 칭해주실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 눅18장의 이 비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만으로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절대주권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지 않는 자가 외치는 칭의는 가짜라고 말입니다. 칭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해 애통해하면서 예수님의 속죄를 믿어야 얻게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까? 모든 시대에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 속에 주어졌거나 중간에 어떤 내용이 생략된 말씀입니까?

 

 

4. 영적 법칙

칭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는 오직 주님의 속죄 없이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시인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

. 헌신자가 받는 복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세리가 칭의를 받은 것입니다.

 

2)결단

.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오늘날 자신은 주님 앞에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은 칭의를 얻을 것이라고 믿어도 괜찮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해 본 일이 없고, 자신의 범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으며, 내 죄를 오직 주님의 속죄로 해결받는다는 믿음이 부족한 자는 예수님을 믿어도 결코 칭의를 얻지 못합니다.

회개없는 칭의는 더 이상 칭의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으로는 칭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으면서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으려는 자는 칭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자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어느 시대와 상황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항상 통용되는 전능자의 말씀입니다.

 

. 결단의 축복

이제 우리도 회개없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으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철저히 회개가 동반된 믿음이라야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칭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어떻게 해야 진정한 칭의를 받게 되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지 아니한 믿음으로는 칭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자기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모든 판단과 교리의 기준은 절대주권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이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바리새인처럼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판단하는 잣대로 자기를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내가 죄인인 것을 시인하지 않고, 지은 죄를 애통해하지도 않으면서 칭의받은 자로 자처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내 기준대로 나를 판단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내 기준대로 남도 판단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를 판단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회개부터 시작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나를 자랑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주님만 자랑하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회개함이 없는 가짜 칭의를 진짜 칭의로 믿게 한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가 정한 기준대로 나를 판단하게 한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회개할지어다. 주님의 절대적인 속죄를 신뢰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잘못 들었던 칭의에 대한 선입견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참된 칭의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구나.

2.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칭의는 회개가 반드시 동반된 것이라야 하는구나.

3. 모든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구나.

4. 선한 행위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모든 것은 결국 아무 쓸모없는 것이로구나.

5. 칭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철저히 깨닫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구나.

6. 칭의는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고, 오직 주님의 속죄로만 해결된다는 것을 철저히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었구나.


[다운로드하기] 2017-02-19 칭의(稱義) 과연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가(눅18;9~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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