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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회복 변화 그리고 도전I

 

[제목] 회 복

[찬송] 135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말씀] 5:1~11(신약 95)

2012.3.1()

사람은 하늘의 천사들과 다른 존재입니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육체를 지닌 영적 존재이기에 자신의 육체의 체력을 다 소모하게 되면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쉬어주어야 합니다. 계속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음식을 먹어서 몸에 영양분을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일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만 계속 일하다 보면 결국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하루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밤에 일하고 낮에 쉬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고기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기잡이의 그물은 오늘날처럼 투명한 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대낮에 그물을 내리게 되면 고기들은 그물을 보고 다 도망쳐 버리기 때문에 그때 당시 어부들은 꼭 밤에 나가 그물을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날도 베드로는 자기의 동생 안드레와 같이 그리고 고기잡으러 함께 떠난 한 동네 사람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그리고 삯을 주고 고용한 몇몇의 사람들과 더불어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물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심히 그물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따라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가장(家長)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장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가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고기가 안 잡힌다고 해서 그물질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의 성질상 고기가 안 잡힌다고 포기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며, 자신의 장모와 처() 그리고 남동생 안드레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데리고 온 인부들에게도 뭔가 품삯을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고기 한 마리도 배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는 새벽시간까지 열심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한 번만 더 던져 보고 갈꺼야.’라고 속으로 몇 번을 다짐해 보았지만 또 한 번, 아니 또 한 번 하며 그물질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 멀리서 동녘에는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하고 허탈하던지. 내가 밤새껏 뭐한거야. 내가 과연 고기잡이 맞아? 이딴 놈의 그물질을 다시 한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야 그런 마음이 들 뿐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제 빈 그물을 싣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몹시 피곤했지만 다음을 위해 그물을 배에서 끌어내려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 유대 땅 요단강 근처 베다니에서 동생 때문에 억지로 따라가 만나보았던 그분이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하면서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오히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안드레는 그 예수님을 형에게 알려주고자, 곧장 요단강 베다니에서 갈릴리 호숫까지 그 머나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실 동생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더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분을 선뜻 메시야로 믿고 따라가기가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메시야인지 확실한 증거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러, 먹여 살려야할 가족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분을 따라 제자가 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른 아침 시간이었지만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그 해변가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분께서는 그물을 씻고 있는 그 해변가로 오시더니 자기의 배에 오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자신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의 말을 듣겠다고 찾아온 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당신의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주겠소.” 좁쌀영감이 아니었던 베드로는 뭐 그리 딱 거절할 이유도 없고 또한 저번에 그분을 만났었지만 그분의 말씀에 제대로 부응하지도 못한 것이 있고 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느 정도 말씀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한 번 나가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보십시오.” 베드로는 생각합니다. 저분의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사실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어젯밤에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다보니 매우 피곤에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그물도 다 씻어 놓아서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낮에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서는 결단코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이 명령한 고기잡이 방법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려면 자기 동료들까지 설득해야 하는데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고기를 잡으려고 밤새도록 수고를 했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한 번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순종을 보시고 배들이 가는 길을 따라 고기들이 몰려오게 했습니다. 그들은 소리칩니다. , 저기, 저것이 무엇이야? 아니, 저 시커먼 것이 정말 고기 맞아?” 그것은 고기떼였습니다. 자신들이 수 년 동안 그물을 던져보았지만 그런 시커멓게 몰려드는 고기떼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물을 던지자마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힙니다. 뚜둑, 뚜둑.” 그물이 찢어지려고 합니다. 그러자 멀리서 마지못해 따라오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손짓하여 도와달라고 합니다. 간신히 그물을 건져 올려 놓고 보니 두 배에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싸 안고 춤을 덩실덩실 춥니다. 내 평생에 이렇게 좋은 날도 있다니, 내가 죽지 않고 산 것은 오늘 이것을 보라고 그런 것 같아.”

하지만 베드로는 즉시 뭍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노를 저어갑니다. 그리고 배를 정박시키기도 전에 그는 배에서 뛰어 내려가 주님 앞에 달려가더니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립니다. 나이도 많은 어른이 젊은 청년에게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울먹이면서 말을 합니다. , 사랑하는 주님, 나로부터 떠나가십시오. 저는 메시야이신 주님을 그저 선생쯤으로 알고 떠나버렸던 죄인입니다. 어찌 당신이 내게로 오셔서 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엎드린 상태로 생각합니다. 나는 동생 때문에 억지로 저분을 찾아갔는데, 저분은 나를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셨구나. 저분은 나에게 뭔가 내게 도움을 주시려고 내 배를 일부러 빌려 타셨구나.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나는 저분을 몰라보았고 저분을 버렸지만 저분은 나를 버리지 않고 이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내가 어찌 저분의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저분과 같이 할 수 없는 죄인이야.”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님, 저를 버리십시오.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며 위로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후로 당신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한 것은 별로 없으며, 있어도 억지로 한 것 뿐인데, 주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의 촌구석까지 찾아가셨으며, 너무나도 크고 귀한 것을 거저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고도 더 주고 싶어서 이 새벽에 우리를 만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낮고 천하고 부족한 우리에게도 영적인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한 번 이 질문에 답을 해 봅시다. 예수님은 왜 그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굳이 그물을 씻고 있는 해변가로 가셨을까요? 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셨을까요? 그리고 왜 깊은 데로 가라 하셨을까요? 오직 베드로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행했지만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을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만나고 가십시오. 그분은 진정 여러분을 만나주시기 위해 이 새벽에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2012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회복 변화 그리고 도전I

 

[제목] 변 화

[찬송]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말씀] 18:21~31(신약 31)

2012.3.2()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이런 것이라고 혹은 저런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사실상 실패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실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했다면 그것을 거울삼아 똑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실수라는 단어는 조심하지 아니하여 잘못한 것 또는 그러한 행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패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실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이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실패자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얼핏 보기에 실패실수라는 말과 비슷한 단어처럼 보여도, 실패라는 말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운명적인 개념이나 좌절로 우리를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잘못을 연거푸 저지른다 해도 그 잘못을 실패로 보지 말고 재도전을 향한 실수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난 베드로, 그는 참으로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문도 별 볼이 없는 가문의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는 참으로 실수가 많고 무명한 자이며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수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하신 일이 없으셨으며, 그에게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기꺼이 천국열쇠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얼마나 허물투성이였던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의 능력보다도 환경의 힘을 더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14:30-31). 한 번은 베드로가 탄 배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에 함께 타고 있던 모든 제자들은 다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다른 제자의 말에 그분이 진정 주님이 맞다면 자기를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오라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정말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에 의해 파도가 베드로를 덮치려하자 베드로는 그것을 무서워했고 순간 그는 바다에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눈 앞에 계신데도 바람과 파도의 힘을 더 무서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주시면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둘째, 그는 열성적으로 살다보니 앞뒤를 잘 분간하지 못한 채 그냥 나오는 말을 내뱉기 일쑤였던 사람이었습니다(16:22-23). 어느 날은 주님께서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그리 마옵소서. 결코 이 일이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하신다는 사실을 누차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죽을 것이라고 하자 주님더러 죽지 말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뭐하고 대답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들을 생각하는도다(16:23)”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실수를 보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반석으로 보시고 그를 귀히 쓰셨습니다.

셋째, 그는 환상 중에 너무 황홀한 나머지 구약의 의인들을 주 예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17:4-5). 어느 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주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대표자였던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와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들을 위해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망각한 채, 주님을 피조된 인간과 동등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벼락을 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름으로 그 두 사람을 데려가시고는, 음성을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17:5).’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람의 가치판단은 온전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는 비록 열심이 특심이었지만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거짓말도 서슴없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26:69-75). 주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얼마 남겨두지 않던 어느 날, 나중에 되어질 일들을 미리 일러 주셨습니다. 당신의 12제자들마저 곧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혹시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의 예언처럼 닭이 울었지만 주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았으며 부활 후에는 그를 찾아 바닷가로 가셨습니다.

왜요? 사람은 혹시 실수할망정 주님 보시기에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디 베드로뿐일까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실수했으며, 첫 의인이었던 노아도 실수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실수했으며, 주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자라고 여겼던 다윗마저도 실수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 칭함을 받던 솔로몬도 실수하였으며, 하나님의 모습을 본 유일한 증거자이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받았던 모세도 실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부다 자신의 실수를 거울삼아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 성숙해졌으며, 자신의 실수를 통해 성공적인 인생, 성공적인 신앙생활로 탈바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실수를 허물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 그것을 결코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타락하여 하늘에서 우주로 내어쫓긴 천사들에게 있어서 실수는 정말 실패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한 번 타락은 영원한 타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다릅니다. 실수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참으로 실수를 많이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허물 많기로 유명한 자이지만, 그에게는 실패가 결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수를 통해 오히려 더욱 더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더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늘 넘어지기 쉽고 실수투성이인 우리들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첫째, 주님은 우리가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을 다 아시면서도, 기꺼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또한 한 번 선택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를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으로 가는 열쇠를 하나 더 확보한 셈입니다. 베드로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허물 많은 자를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버리셨습니까?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가 비록 실수한다 해도, 그 실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장비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쓰기 위해 3년 반을 기다리셨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다윗을 쓰기 위해서 15년을 기다리셨으며, 아브라함을 위해서는 25년을 기다리셨으며 그리고 모세를 위해서는 무려 40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린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반드시 기다려주십니다.

실수란 우리를 새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실수를 통해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실수를 통해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실수를 통해 주님의 온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주 실수한다고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았다면 그의 성공은 성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나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실수한 것 때문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실수가 오히려 우리의 미래를 더 밝게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붙드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이 새벽부터 주님 앞에 나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요청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제2의 베드로, 3의 베드로임에 틀림 없습니다.

2012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회복 변화 그리고 도전I

 

[제목] 도 전

[찬송] 263장 이 세상 험하고

 

[말씀] 21:1~17(신약 184)

2012.3.3()

오랜 만입니다. 정말 오랜 만에 베드로는 그물을 배에 싣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베드로가 배를 탄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한 출항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니기 위해서 그랬었습니다. 3년 반 전만 해도 그는 아침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을 살폈습니다. 오늘 밤에는 바람이 풀지 않고 잔잔하겠지? 그리고 비는 오지 않겠지?” 그는 다시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았습니다. 이 날 밤에도 바람은 불지 않았습니다. 바다는 고요합니다. 저 멀리 벌써 언제 떴는지 보름달처럼 둥근 달이 두둥실 떠서 바다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의 곁에는 예전의 고기잡이 동료였던 요한과 야보고 그리고 동생 야고보가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그물질을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베드로를 거들어줍니다. 하지만 그날 베드로를 따라온 쌍둥이 형제 도마는 마냥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일이 신나서인지 들 뜬 마음으로 배에 하고 오릅니다.

어느 정도 왔을까?’ 벌써 육지를 떠나온 지 한참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고기잡이에 안성맞춤이야. 딱 좋아!” 그는 고기잡이 동생들과 함께 그물을 힘껏 던져봅니다. 그런데 조용합니다. 조용할 리가 없는데, 그물도 가볍습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막상 건져 올린 그물에는 고기 한 마리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처음이라 그럴거야하면서 베드로는 다시 끌어올린 그물을 다른 방향으로 던져봅니다. 하지만 그날 밤도 처음 주님을 만나던 그 전날 저녁처럼 고기 한 마리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하다. 몇 년 쉬었다고 내가 고기잡는 실력이 줄어든 것은 아닐까? 아니야. 몇 년 쉬었다고 고기잡는 실력이 줄어들 리가 없어. 난 전문어부였잖아. 아마, 여기가 고기가 없어서 그럴꺼야.” 그리고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합니다. 얼마쯤 이동했을까? 또 그곳에 그물을 던져봅니다. 그런데도 그날 밤에는 이상하리만큼 고기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같이 따라간 도마도 처음에는 기대를 가지고 그물을 살펴보았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자,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형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오늘은 고기가 안 잡히는 날인가봐요. 더 이상 수고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아요. 힘만 팔립니다. 그만 가십시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고기잡으러 가자고 동생들을 데려왔기에 그냥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번만 또 한 번만 해 본다는 것이 벌써 밤이 기울어 새벽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기는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시작했던 그물질이 이제는 육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육지에서 한 200규빗(90m) 정도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날은 점점 밝아오고, 안개가 자욱한 해변 쪽에서는 희미하지만 닭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때였습니다. 뭍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보게들, 고기 좀 잡았소.” 그러자 아닙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지 않겠소! 그러면 잡힐 것이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요 또한 힘찬 목소리인지라 그들은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던져보고 가지하는 심정으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 순간입니다. 바다 깊은 곳에 있던 고깃떼가 그물을 던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물이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그만 고기들은 그물 속에 턱 들어와 안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놈들도 황당하고 어부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 고기다. 고기야, 고기. 고깃떼야. 고깃떼가 몰려왔어.” 어부가 아닌지라 피곤해서인지 벌써부터 지쳐 배 한 곁에서 졸고 있던 도마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도무지 그물을 들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어부일을 했었더라면 좀 나았을텐데, 3년 반 동안 녹슨 손들은 그물을 들어올리기에 턱없이 달립니다. 그때였습니다. 혼자 육지 쪽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요한이 외칩니다. 형님, 주님이십니다. 저기 서 있는 분이 바로 주님이세요. 그 옛날 밤을 기억해보세요. 그날도 우리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잖습니까? 그런데 그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너무나 고기가 많이 잡혀 형님도 놀랐고 저희들도 놀라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저기 서 있는 저분은 틀림없이 주님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시다는 말을 듣고 벗어둔 겉옷을 걸쳐입고는 즉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곳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2주전 성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6:31-32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그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숯불이 피어있던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오히려 자신을 저주하면서 주님을 부인했고,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때에도 천사들이 그녀에게 전해준 소식은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이며 거기서 주님을 볼 수 있을 것(28:5~6)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정말 갈릴리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편으로 주님을 볼 낯이 없었지만 비록 자기는 주님을 버렸어도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다시 만나러 오셨다는 것에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만 눈물이 막 나오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어, 정말 예수님은 나같이 못난 죄인을 버리지 않고 찾아오신거야. 어젯밤 우리가 고기를 못잡은 것도 다 우연이 아니었어.” 서둘러 100여 미터를 헤엄쳐 육지에 올라와 보니, 주님께서는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구워놓고, 떡도 그 위에 굽고 계셨습니다. 밤새 고기잡이에 지쳐있을 제자들을 위해 새벽의 싸늘한 공기에 식어있던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시려고 주님께서는 이미 조반을 준비해놓고 친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재회의 장소로서 디베랴 바닷가를 선택하셨을까요? 또한 그곳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먼저 그곳이 베드로와 대다수 제자들의 고향이자 처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 3년에 걸쳐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사역하던 추억이 서려 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베드로가 숯불이 피어있던 대제사장의 집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했기에 숯불이 피어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침식사가 끝나자 주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 그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지만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시절의 자신의 이름,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자신을 불러주시건만 베드로는 그 옛날처럼 선뜻 나서서 그러고 말고요.”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과거엔 그렇게 수차례 말했지만 번번이 그 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낮은 목소리로 주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어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님께서 제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이번에도 나즈막히 대답할 뿐입니다. , 주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세 번씩이나 똑같이 대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어린 양들을 먹이라.”

주님께서 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어 보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것을 용서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실수를 그렇게 많이 참아주시고 또 참아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가 너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참아주고 용서해 주었으니 너도 나의 어린 양들을 위해 기꺼이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참아줄 수 있겠니?”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질문을 던짐으로서 베드로의 개인적 지위를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한없는 용서의 은총을 통해 베드로를 용서하고, 또한 베드로가 다른 이들을 한없는 은총으로 품어주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신앙의 깊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없는 은총에 감사하면서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어린 양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를 만나주신 주님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사랑했던 그 한없는 사랑으로 이제는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이제는 받아들이십시오. 그 사랑을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찬양을 드리십시다. 허물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찬송가 1353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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