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0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9)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2)(시110: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dK6eZeWZvT4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 질문은 기독론의 중심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신약성경만 읽어서는 충분히 다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미리 보여 주셨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실 것을 보이셨고, 이삭을 통해서는 그 아들이 모리아산의 희생 제물처럼 죽으실 것을 보이셨으며, 야곱을 통해서는 이기는 자가 상속자가 되는 길을 보이셨다. 그리고 유다와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왕직과 통치와 구원의 부분적인 그림자를 보여 주셨다.
그러나 구약에서 참된 왕의 예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람은 다윗이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앉았지만 왕직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고, 자기 왕권을 지키기 위해 권세를 남용했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의 요구를 더 크게 여겼다. 반대로 다윗은 실수도 있었고 죄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알았고,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을 배우며, 장차 오실 메시아의 왕직을 예언한 사람이었다.
다윗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자신을 계시하셨다(계 22:16). 이는 다윗의 생애와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보여 준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그중에서도 시편 110편은 다윗이 본 하늘의 비밀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다. 이 시편은 메시아를 두 가지 직분으로 계시한다. 첫째, 그는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는 왕이시다(시 110:1). 둘째,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시다(시 110:4). 왕은 원수를 다스리고, 제사장은 죄인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이 두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고대 왕의 즉위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께서 경륜 가운데 아들로 오셔서 왕이자 제사장으로 사역하시는 비밀을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이 장차 왕 같은 제사장으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편 110편에 나타난 예수님의 왕직과 제사장직이 무엇이며, 성도는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다윗을 통해 참 왕을 배워야 하는가?
구약에는 많은 인물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며, 야곱은 이기는 자의 예표다. 요셉은 고난 후에 높임받은 통치자의 그림자이고,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지도자이며,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으로 백성을 인도한 장군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왕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왕”이라는 직분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의 통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신 인물은 다윗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첫 왕은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왕직의 실패를 보여 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해 보였지만, 왕권을 붙들고 나서는 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백성의 요구를 의식하여 좋은 양과 소를 남기고 아각을 살려 두었다(삼상 15:24). 이것은 왕이 누구 앞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그때 이후 다윗은 사울을 보며 배웠다. 왕은 백성의 눈치를 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자다. 왕은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 된다. 사울은 사람 앞에서 왕의 체면을 지키려다가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았다. 다윗은 이 실패를 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왕직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사울과 달랐다. 그는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스스로 왕좌를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으로 치지 않았다. 다윗은 왕직이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맡기시는 자리임을 알았다.
왕직은 사람의 야망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시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갈 때 맡겨지는 것이다. 다윗은 사명으로 보냄받은 자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며,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한 자였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은 후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크게 감동되었다(삼상 16:13). 여기서 “크게 감동되었다”는 히브리어는 ‘찰라흐’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강하게 임하고 돌진하듯 역사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다윗은 단순히 정치적 재능을 가진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무엘상하의 사건 속에서만 이해될 수 없고, 시편 속에서 더 깊이 이해되어야 한다. 사무엘상하는 다윗의 사건을 보여 주고, 시편은 다윗의 영을 보여 준다. 시편 안에는 다윗이 본 하늘 보좌, 시온산, 영광의 왕, 메시아의 고난과 승리, 왕직과 제사장직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다윗을 통하여 참 왕을 배워야 한다. 다윗을 모르면 왕직을 모른다. 왕직을 모르면 예수님의 왕 되심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왕 되심을 모르면, 성도가 장차 왕 노릇할 자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3. 왕직은 왜 사탄을 대적하는 권세인가?
왕직은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피조물만 있다면 철장 권세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 자원하여 순종한다면 심판과 다스림의 권세가 나타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반역이 일어났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이 생겼다. 그러므로 왕직은 본질적으로 반역한 악한 영의 질서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기 위한 직분이다.
시편 110편 1절은 이 왕직의 핵심을 보여 준다.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원수는 단지 인간적 원수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윗의 생애에서는 사울과 주변 이방 나라들이 원수처럼 나타났지만, 신약의 빛 안에서 보면 참된 원수는 혈과 육이 아니라 사탄과 악한 영들이다(시 110:1).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여기에 연결된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한다(요일 3:8).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왕직은 사람을 짓누르는 권세가 아니다. 왕직은 사람을 배후에서 묶고 속이고 죄짓게 만드는 사탄의 질서를 깨뜨리는 권세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만, 동시에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 끌고 가는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다.
다윗의 삶은 이것을 예표한다. 그는 골리앗을 무너뜨렸다. 골리앗은 단순한 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두려움으로 묶어 놓은 악한 권세의 그림자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장차 예수께서 사탄을 깨뜨리시고, 그 아래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내실 것을 미리 보여 준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먼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왕직의 실제다. 왕은 자기 백성을 억압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억압하는 악한 영의 권세를 깨뜨리는 자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와 사역자는 왕권을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목회적 권위, 영적 권세, 직분, 은사가 사람을 겁주고 복종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울식 왕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영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다.
왕직은 사탄을 대적하는 권세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권세는 군림이 되고, 직분은 자기 과시가 되며,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누르는 곳이 된다. 다윗이 보여 준 왕직, 그리고 예수께서 완성하신 왕직은 그와 다르다. 참 왕은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생명을 주고 자유를 주는 왕이다.
4. 제사장직은 왜 죄인을 살리는 직분인가?
왕직이 사탄의 반역 때문에 필요하다면, 제사장직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요하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속죄 제사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말을 듣고 죄를 지었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필요했다. 그 길이 제사장직이다.
제사장은 히브리어로 ‘코헨’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섬기며, 제물을 드리고,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백성이 하나님께 용서받고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직분이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은 매일 제사를 드렸고, 해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는 죄인이 그냥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피가 필요하고, 중보가 필요하며, 정결케 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편 110편은 놀라운 말을 한다. 메시아가 왕일 뿐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한다(시 110:4).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직분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원수를 깨뜨리신다.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죄인을 살리신다. 왕직만 있고 제사장직이 없다면 죄인은 심판 앞에서 설 수 없다. 제사장직만 있고 왕직이 없다면 사탄의 권세가 계속 사람을 묶어 둘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이 둘이 하나가 된다. 그분은 원수를 멸하는 왕이시며, 자기 피로 죄인을 속죄하는 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한다(히 5:7-9).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실제 순종의 길을 걸으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고난 없는 왕이 아니셨고, 피 없는 제사장이 아니셨다.
히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께서 제사장이시라는 것은 성도에게 큰 위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 4:15-16).
히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제사장직은 죄인을 살리는 직분이다. 예수님의 피는 심판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멸망시키는 근거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붙들어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악한 영을 깨뜨리시고,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죄인을 속죄하신다. 이 두 직분이 함께 있을 때 구원이 온전해진다.
5. 멜기세덱은 왜 왕이자 제사장인가?
시편 110편의 제사장직을 이해하려면 멜기세덱을 알아야 한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등장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성경은 그를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른다(창 14:18-20).
창 14:18-20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멜렉’과 ‘체데크’의 의미를 품고 있다. ‘멜렉’은 왕이고, ‘체데크’는 의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는 살렘 왕이다. 살렘은 평강과 연결되므로, 그는 “평강의 왕”으로도 설명된다(히 7:1-2).
히 7:1-2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멜기세덱이 왕이자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은 왕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왕과 제사장은 보통 분리되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이었다.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 율법대로라면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가. 그 답이 시편 110편 4절이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시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혈통을 따라 이어졌고 죽음 때문에 계속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죽지 아니하는 생명의 능력에 따라 세워졌고 영원하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육신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제사장이 되셨다(히 7:16-17).
히 7:16-17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두 직분을 동시에 보여 주는 인물이다. 그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다. 그분은 의로 다스리는 왕이시고, 평강을 주시는 왕이시며, 자기 피로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는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직은 죄인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제사장직의 궁극적 목적은 죄인이 속죄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제사가 필요하지만, 천국에서는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 죄가 완전히 처리된 나라에서 남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섬김과 통치다. 그러므로 제사장직은 왕직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을 연다. 멜기세덱은 바로 이 질서를 미리 보여 준다. 왕과 제사장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 안에서 결합될 때, 참된 구원과 통치가 나타난다. 그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다.
6. 철장 권세는 누구에게 사용해야 하는가?
시편 2편은 메시아 왕의 통치를 철장 권세로 묘사한다.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같이 부수리라”는 말씀이다(시 2:8-9).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권세와 연결된다.
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면서 이기는 자와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다(계 2:26-27).
계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여기서 “다스리다”와 관련된 헬라어 흐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은 단순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포이마이노’의 목양적 의미와 연결된다. 포이마이노는 양을 치다, 목양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철장 권세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권세가 아니다. 성도를 향해서는 목양의 권세로 나타나야 하고, 사탄과 악한 영을 향해서는 깨뜨리는 권세로 나타나야 한다.
이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 왕권을 받은 사람이 이 구분을 잃어버리면 성도를 향해 철장을 휘두른다. 직분을 가지고 사람을 저주하고, 영적 권위를 이용해 성도를 겁주고,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위협한다. 이것은 왕직의 남용이다. 철장 권세는 성도를 때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철장 권세는 악한 영을 깨뜨리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주님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귀신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다. 사람을 향해서는 긍휼과 회개를 베푸셨지만, 귀신을 향해서는 단호히 명령하셨다. 이것이 왕직의 바른 사용이다.
성도는 사람을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부모가 상처를 주었어도, 가족이 나를 버렸어도,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다윗도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다(시 27:10). 사람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어도, 하나님께 영접받으면 그것이 새 정체성이 된다.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한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 몰아가는 귀신의 역사는 끊어야 한다. 왕직은 사람을 죽이는 권세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탄의 역사를 깨뜨리는 권세다.
그래서 철장 권세는 분별이 필요하다. 성도에게는 지팡이를 들어 목양해야 하고, 악한 영에게는 철장을 들어 대적해야 한다. 목자가 양을 때리는 데 막대기를 쓰고, 사자와 곰 앞에서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목자의 직무를 거꾸로 쓰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이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권세는 성도를 억압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괴롭히는 악한 영을 깨뜨리는 데 써야 한다.
7. 왜 믿음은 열매와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가?
성경은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삶의 열매 없이 끝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시작이지만, 그 믿음이 참되다면 길과 열매와 행위로 드러난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길을 비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또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시 1:1-2).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시편 1편은 추상적인 믿음만 말하지 않는다. 따르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실제 삶을 말한다. 그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지속적인 태도를 말한다. 그 결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시 1:3).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을 말하면서 삶의 방향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신칭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귀한 진리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와 순종과 열매를 무시하는 방종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시작한 자는 반드시 그 믿음에 합당한 길을 걸어야 한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약 2:17).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번 설교의 흐름에서 이것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문제와 연결된다. 왕직은 아무에게나 맡겨지는 장난이 아니다. 사울처럼 능력과 정결함이 준비되지 않은 채 권세를 붙들면, 그 권세가 교만과 타락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각 사람을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처럼 다양한 용도로 쓰시되, 반드시 깨끗하게 된 그릇을 귀히 쓰신다(딤후 2:20-21).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여기서 핵심은 그릇의 종류보다 깨끗함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분량으로 쓰임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금그릇처럼, 어떤 사람은 은그릇처럼, 어떤 사람은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처럼 쓰임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든 더럽다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다. 반대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된다.
성도는 직분을 탐내기 전에 깨끗함을 구해야 한다. 왕직을 탐내기 전에 왕직에 합당한 마음과 삶을 배워야 한다. 제사장직을 말하기 전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김받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제사장적 마음을 품어야 한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시작되지만, 회개와 순종과 열매 속에서 검증된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성도는 날마다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있는가. 나는 죄인의 길에 서 있는가. 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나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될 수 있다.
8. 성도는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가?
예수님은 왕이자 제사장이시다. 그런데 성경은 그 예수님 안에서 성도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도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부른다(벧전 2:9).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왕의 제사장체계)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계시록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 우리를 나라(왕국)와 제사장들로 삼으셨다고 말한다(계 1:5-6). 이것은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보여 준다.
계 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왕국)와 제사장[들]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나 이 신분은 방종의 면허가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왕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가?
첫째, 회개와 순종과 충성으로 그 신분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들 중에서 이기는 자의 반열을 따라 보좌에 함께 앉게 하는 이가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그러므로 성도는 단지 믿었다는 사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길은 첫째, 회개다. 제사장직은 피와 정결과 연결된다. 회개 없이 제사장적 삶을 말할 수 없다. 죄를 품고 악한 영에게 통로를 열어 두면서 왕권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회개는 죄의 근거를 제거하고, 악한 영의 역사를 끊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길이다.
둘째,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 왕직은 사탄과 귀신을 대적하는 권세다. 성도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악한 영의 세력은 대적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의 권세 안에서 귀신의 역사를 끊고, 가족과 교회와 민족을 묶고 있는 악한 영의 진을 무너뜨려야 한다.
셋째, 목양할 줄 알아야 한다. 철장 권세를 성도에게 휘두르면 안 된다. 성도를 향해서는 포이마이노, 곧 목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양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다친 양을 싸매며, 길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넷째, 시온과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는 것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사랑했고, 시온을 하나님의 거처로 노래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고백했다(시 122:6).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서 있다고 말한다(계 14:1).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성도는 이 땅이 전부인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 성 안에서 주님 가까이 서고, 영광의 왕과 함께하는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 주님은 하늘 군대와 함께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 요한계시록 19장은 백마 타신 주님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보여 준다(계 19:11-16).
계 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이다. 자기 권세를 내려놓고, 주님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며, 성령의 은사와 권세를 받아 악한 영을 대적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다윗은 버려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붙들었고, 시온과 예루살렘을 사모했으며, 영광의 왕이신 여호와를 찬양했다. 성도도 이 길을 배워야 한다.
시편 110편 3절도 이 준비를 보여 준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며,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께 나온다고 말한다(시 110:3). 여기서 청년은 단순히 육체의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깨어 있고, 원수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자를 가리킨다. 왕 같은 제사장은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의 날에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다.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또한 성도는 한 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경륜 가운데 일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시편 110편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둘이라는 뜻이 아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아들로 오시고,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경륜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성도는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선지자나 왕으로만 보지 않고,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은 머리의 지식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안다면 악한 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예수님이 제사장이심을 안다면 날마다 그 피를 의지하여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안다면, 성도도 일시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삶은 오늘의 말과 선택과 관계와 섬김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자리와 일부터 충성해야 한다. 큰 왕권을 말하면서 작은 섬김을 멸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양보다 중심을 보시고, 오늘의 충성과 회개와 순종을 통해 장차 맡기실 영광을 준비하신다.
9. 나오며
예수님께서 왜 왕이자 제사장으로 오셨으며, 성도는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시편 110편은 메시아의 두 직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분은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시는 왕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왕직은 사탄과 악한 영을 대적하는 권세이고, 제사장직은 죄인을 살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직분이다.
성도는 이 두 직분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왕권을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철장 권세를 성도에게 휘두르는 방식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성도에게는 목양해야 하고, 귀신에게는 대적해야 한다.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며, 악한 영은 끊어 내야 할 대상이다. 이것이 왕직의 바른 사용이다.
또한 성도는 제사장적 정결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날마다 회개해야 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시작이며, 회개와 순종과 열매는 그 믿음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길이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신분을 자랑하기보다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준비해야 한다.
다윗은 시온을 사모했고, 예루살렘을 사랑했으며, 영광의 왕이신 여호와를 높였다. 그의 고백은 장차 어린양이 서실 하늘의 시온산과 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의 성공만을 자랑하지 말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주님 가까이 설 것을 사모해야 한다. 영광의 왕과 함께할 거룩한 군사로 준비되어야 하며, 회개와 충성과 영적 전투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에 함께 앉는 권세를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의 왕직과 제사장직을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직분의 생명과 정신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목양하고,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왕이자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따라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26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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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다른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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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0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09)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2)(시110: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dK6eZeWZvT4
1. 들어가며
다윗은 단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하늘의 비밀을 본 사람이었다. 목동으로 들판에서 양을 치던 사람,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떠돌던 사람, 왕이 된 뒤에도 자신의 죄 앞에서 침상을 눈물로 적셨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단순한 성공한 왕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그를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예언하게 하셨다(행13:22).
행13:22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며,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자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본 비밀 가운데 가장 깊고도 놀라운 본문은 시편 110편이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두 가지 직분으로 증언한다. 하나는 왕이시며, 다른 하나는 제사장이시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며,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속죄와 중보를 담당하는 자다. 그런데 다윗은 이 두 직분이 한 분에게서 동시에 성취될 것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왕직과 제사장직이다.
이 사실은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율법 체계 안에서 왕은 주로 유다 지파에서 나오고, 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에서 나왔다. 그런데 다윗은 유다 지파에서 오실 메시아가 제사장도 되실 것을 보았다. 더구나 그 제사장직은 레위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직이라고 예언하였다(시110:4).
시110:4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고 뜻을 바꾸지 아니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은 단순한 왕권 찬가가 아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성육신하실 그리스도, 고난을 통과하실 그리스도, 부활 승천 후 보좌에 앉으실 그리스도, 그리고 원수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예언이다.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약 천 년 전에 이 비밀을 성령 안에서 보았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며, 동시에 성령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인간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의 영역이다.
오늘 성도들이 이 본문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이 왕이자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교리적 지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긴 자로서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그분은 이기는 성도들에게도 보좌에 함께 앉는 은혜를 약속하셨다(계3:21).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1:6). 그러므로 예수님의 왕직과 제사장직을 아는 것은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아는 일이다.
계3:21 예수께서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이기는 자에게도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계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이 어떻게 시편 110편을 통하여 예수님이 왕이자 제사장이심을 예언했으며, 그 예언이 오늘 성도들의 부르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윗은 어떻게 예수님을 미리 알았는가?
다윗이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다윗의 시를 예수님에게 적용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메시아를 “내 주”라고 불렀음을 말씀하셨다(마22:43-44). 다윗은 자기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보면서도 그분을 단순한 후손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보았다.
마22:43-44 예수께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며,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은 “성령에 감동되어”이다. 다윗의 예언은 인간의 추론이나 정치적 기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령의 조명 안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았다. 이것이 하늘의 비밀이다. 하늘의 비밀은 인간이 배워서만 얻는 지식이 아니다. 배움은 필요하지만, 계시와 조명이 없으면 그 배움은 껍데기에 머무른다. 다윗은 배운 자이기 전에 하나님께 붙들린 자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를 여러 방식으로 보여 준다. 어떤 은사는 출생과 가문을 통해 나타나는 일반 은사처럼 보인다. 디모데의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이어진 거짓 없는 믿음의 흐름 속에 있었다(딤후1:5). 그러나 동시에 안수를 통해 다시 불일듯 일어나야 할 하나님의 은사도 있었다(딤후1:6).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타고난 그릇도 있고, 부르심 가운데 부어지는 특별한 은사도 있다.
딤후1:5 디모데 안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은 먼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안에 있었고, 바울은 그 믿음이 디모데 안에도 있음을 확신하였다.
딤후1:6 바울은 안수를 통하여 디모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어나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다윗에게는 특별히 영적인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시와 예언으로 풀어내는 은사가 탁월했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단지 용감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 전쟁이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다(삼상17:47).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으로 치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질서를 더 두려워했다.
삼상17:47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실 것을 선포하였다.
하늘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조급하지 않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면서도 왕권을 빼앗기 위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때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영적 질서가 다윗의 내면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통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의 길을 미리 몸으로 살아 내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다윗이 예수님을 미리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왕으로 이 땅에 보낸 자였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였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 자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속사의 흐름을 미리 보도록 허락받은 자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도 무겁게 다가온다. 하늘의 비밀을 전하려면 세상의 아는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회개로 깨끗해져야 하고, 성령의 조명 아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기 욕망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3. 왜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가 필요한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는 단지 행정 능력이나 전쟁 능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왕은 백성을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 땅의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늘의 뜻을 아는 영적 감각이다. 다윗은 이 점에서 사울과 달랐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고, 다윗은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었다.
성경에서 왕은 단지 권력자가 아니다.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자기 뜻대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스리는 자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완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죄를 지었다. 밧세바를 범했고,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인구 조사로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죄를 지적받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회개했다(시51:17).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는 회개와 분리될 수 없다. 죄가 쌓이면 영적 감각은 흐려진다. 귀신의 역사와 조상의 죄와 마음의 완고함이 사람의 영을 어둡게 만들면, 말씀을 들어도 껍데기만 듣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의 비밀을 깨닫는 일은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정결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윗이 깊은 예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상한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셋째 하늘과 낙원에 이끌려 간 경험을 말하면서, 사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고후12:2-4). 그는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약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시편 110편의 예언이 히브리서에서 깊이 해석될 수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바울에게 그 비밀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고후12:2-4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셋째 하늘과 낙원에 이끌려 가서 사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는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보좌 우편, 성령 강림, 교회의 시대, 회개와 축사, 재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시간표다. 이 시간표를 모르면 사람은 신앙을 자기 문제 해결의 도구로 축소한다. 돈을 잘 벌고, 병이 낫고, 세상 지위가 올라가는 것만 간증의 중심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참된 간증은 “내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면 성도는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알면 성도는 죄와 귀신의 억압 아래 머물지 않고 회개와 보혈의 능력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셨음을 알면 성도는 인생의 목적을 땅의 성공에 두지 않고 하늘의 상급과 왕권의 부르심에 둔다.
그러므로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는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다만 그 은사는 반드시 말씀의 팩트와 성령의 조명과 회개의 정결함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모두 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짓이 있다는 이유로 참된 성령의 조명까지 부정해서도 안 된다. 다윗은 성령 안에서 보았고, 바울은 환상과 계시 안에서 풀었으며, 성도는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조명 안에서 그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4. 시편 110편은 왜 왕과 제사장을 증언하는가?
시편 110편은 짧지만 매우 깊은 본문이다. 1절은 메시아의 왕직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장차 육신을 입고 오실 그리스도에게 왕권을 주시는 장면을 예언적으로 보여 준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의 주님 사이의 신비한 대화를 보았다. 이 말씀은 삼신론적 분열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구속 경륜 안에서 아들로 나타나실 신비를 보여 주는 예언적 언어다.
시110:1 여호와께서 다윗의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들이 발판이 되기까지 주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오른편에 앉으라”는 말은 단순히 위치를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통치와 심판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원수들이 발판이 될 때까지 보좌의 권세를 맡기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셨다는 뜻이다.
시편 110편 2절은 그 왕권이 시온에서부터 뻗어 나간다고 말한다. 시온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을 연결시킨 장소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시온을 하나님의 통치와 예배의 중심으로 세웠다. 훗날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계신 장면을 보여 준다(계14:1). 이는 다윗이 보았던 왕권의 중심이 마지막 때 어린양의 통치와 연결됨을 보여 준다.
계14:1 요한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시편 110편의 절정은 4절이다. 메시아는 단지 왕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표현은 창세기 14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14:18). 그는 왕과 제사장의 직분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창14:18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레위 제사장직은 혈통을 따라 계승되었고, 죽음 때문에 계속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직은 혈통적 계승에 매이지 않는 영원한 제사장직을 가리킨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해석한다(히7:17). 이것은 다윗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히7:1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증언한다.
왕은 원수를 굴복시키고, 제사장은 죄를 속한다. 예수님은 이 두 사역을 모두 이루셨다.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대제사장의 일을 이루셨고, 부활과 승천으로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꺾으심으로 왕의 권세를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은 예수님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메시아 예언이다. 다윗은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을 한 본문 안에 담아낸 것이다.
5. 멜기세덱의 반차는 무엇이 다른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해하려면 먼저 레위 제사장직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레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 질서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의식을 집행하며, 성소에서 섬겼다. 그러나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해 제사하기 전에 자기 죄를 위해 먼저 제사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죽기 때문에 영원히 직분을 계속할 수 없었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은 수효가 많았는데, 이는 죽음 때문에 항상 직분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직도 갈리지 않는다(히7:23-24). 이것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직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혈통적 계승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에 근거한다.
히7:23-24 레위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직분을 계속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직이 변하지 않는다.
또한 레위 제사장들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히9:12). 짐승의 피는 반복되어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반복의 제사장이 아니라 완성의 제사장직이다.
히9:12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었다. 살렘은 평강을 뜻하는 말과 연결된다. 그는 또한 의의 왕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해석된다(히7:2). 예수님은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분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단순한 고대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적 제사장직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다.
히7:2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의의 왕으로 해석되고, 살렘 왕이라는 칭호는 평강의 왕으로 해석된다.
다윗이 이 비밀을 시편 110편에서 붙든 것은 놀라운 일이다. 창세기 14장에 잠깐 등장하는 멜기세덱을 보고,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영원한 제사장직과 연결한다는 것은 인간적 해석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다윗에게 구속사의 깊은 줄기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줄기를 붙들어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해석한다.
여기에서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해 온 한 분 하나님 신앙의 관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하나님 밖의 제삼자가 중보하는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깊은 신비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는 단순한 교리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며, 그 피의 능력으로 죄와 귀신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성도는 이 대제사장을 붙들어야 한다. 죄를 숨기지 말고 회개해야 하며, 귀신의 억압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보혈과 이름의 권세 안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
6. 예수님은 어떻게 은혜의 보좌를 여셨는가?
시편 110편의 “오른편에 앉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보좌 등극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기까지의 길은 영광의 길이기 전에 고난의 길이었다. 그분은 육체로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히5:7-9). 이것은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피곤하셨고, 배고프셨고, 고통을 느끼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히5:7-9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심으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셨다. 원래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과 심판의 보좌다. 죄인은 그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심판받아야 할 죄인의 길을 대신 걸으셨다. 그 결과 믿고 회개하는 자는 이제 두려움만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4:16).
히4:16 성도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이 변화는 작지 않다. 심판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열렸다는 것은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허락장이 아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는 회개하는 자를 씻는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보혈은 지식이 될 수는 있어도 실제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는 회개하는 자에게 열린 보좌다.
예수님은 또한 하늘 성소를 정결하게 하셨다. 사탄은 본래 하늘의 영광 가운데 있었으나 교만으로 타락한 존재다. 에스겔 28장은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교만으로 인해 쫓겨나는 장면을 보여 준다(겔28:14-17). 하늘에서 시작된 반역은 땅에서도 죄와 귀신의 역사로 이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피로 이 더러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리하셨다.
겔28:14-17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아름다움과 지혜로 인해 교만해졌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축사는 복음의 주변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이었다(마12:28).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추격한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맡기셨다. 성도는 죄를 회개하고,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죄의 통로를 끊고, 예수 이름의 권세로 더러운 영을 몰아내야 한다.
마12:28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신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의 보좌는 예수님의 왕직과 제사장직이 만나는 자리다. 왕으로서 예수님은 원수를 굴복시키신다.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피로 죄를 씻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용서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의 권세도 회복해야 한다. 죄에게 지배받지 않아야 하고,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워야 한다.
7. 성도는 왜 왕 같은 제사장인가?
예수님이 왕이자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성도에게 직접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을 왕국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베드로도 성도들을 향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벧전2:9). 이 표현은 모든 성도가 똑같은 수준의 왕권을 이미 누린다는 가벼운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가 제사장적 정체성을 가지고 왕적 부르심을 향해 자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벧전2:9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부름받았다.
제사장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 그는 먼저 예배와 회개와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제사장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더러운지, 무엇이 거룩한지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귀신의 역사와 죄의 통로를 모른 채 세상 성공만을 복으로 여긴다면, 제사장적 정체성을 잃은 것이다.
왕은 다스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도의 왕권은 세상 권력처럼 남을 억압하는 힘이 아니다. 성도의 왕권은 먼저 자기 죄와 욕망과 귀신의 역사를 다스리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 열방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철장 권세를 약속하셨다(계2:26-27). 이기는 자는 단지 입으로 믿는다고 말한 자가 아니라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다.
계2:26-27 예수께서는 이기고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2편은 메시아가 철장으로 열방을 깨뜨리실 것을 예언한다(시2:8-9). 요한계시록은 이 권세가 이기는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다스리다”라는 의미는 목양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헬라어로 목양하다를 뜻하는 “포이마이노”는 단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양을 돌보고 인도하며 필요할 때 엄격하게 보호한다는 뜻을 가진다. 왕권은 목양과 분리되지 않는다.
시2:8-9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민족들을 기업으로 주시고, 땅끝까지 소유로 주시며,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왕권은 지금부터 훈련되어야 한다. 순종은 죽은 뒤 갑자기 생기는 성품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천국에서도 낮은 자리에서 순종을 배워야 한다. 새 예루살렘 성 안과 성 밖의 차이는 단순한 공간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께 얼마나 온전히 순종하는 존재로 준비되었는가의 차이와 연결된다. 성도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참된 주의 종의 가르침 앞에서 자기 의지를 꺾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부르심은 영적 특권이면서 동시에 책임이다. 지도자는 더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 다윗도 죄를 지었을 때 그 대가를 피하지 못했다. 회개했지만 칼이 집을 떠나지 않는 징계를 받았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세상 권세를 부러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더 높은 부르심에는 더 깊은 회개와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8.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단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다. 그래서 그는 시온을 사랑했고, 법궤를 모셔 오기를 원했으며,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비록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지만, 그 마음은 다윗에게서 먼저 나왔다.
다윗의 위대함은 회개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죄를 지었으나 죄를 합리화하지 않았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했다(삼하12:13).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특징이다.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지적받았을 때 즉시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는다.
삼하12:13 다윗은 나단의 책망 앞에서 자신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가 병들었을 때 그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뒤에는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께 구할 때와 하나님이 결정하신 뒤 순복해야 할 때를 알았다. 이것은 신앙의 깊은 성숙이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다윗은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닮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원수에게 쫓겼지만 원수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예수님도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셨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꺾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다윗은 시온을 왕권과 예배의 중심으로 세웠다. 예수님은 하늘 시온에서 어린양으로 서 계신다. 그러므로 다윗의 생애는 메시아의 그림자를 담고 있다.
오늘 성도도 다윗처럼 살아야 한다. 이는 다윗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마음의 방향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고, 죄 앞에서 회개했으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순복했고, 원수 갚는 일을 자기 손에 맡기지 않았다. 그는 하늘의 비밀을 알았기에 흔들림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다.
성도는 말씀을 깊이 배워야 한다. 그러나 말씀 공부는 성령의 조명과 함께 가야 한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의미도 소중하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라는 뜻과 연결되고, “살렘”은 평강과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히브리어 “마쉬아흐”와 같은 의미다. 이런 어원은 성경의 영적 팩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어원 지식도 회개와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생명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하늘의 비밀을 사모해야 한다. 둘째, 죄를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왕이자 제사장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넷째, 자신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음을 알고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시편 110편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오늘의 부르심으로 받는 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다윗이 시편 110편을 통하여 예수님이 왕이자 제사장이심을 어떻게 예언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보았고, 그분이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으실 왕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증언하였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으며,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분은 심판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여셨고, 회개하는 자들이 긍휼과 은혜를 얻도록 길을 만드셨다. 또한 왕으로서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꺾으셨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귀신을 쫓고 죄의 권세를 이기는 삶을 맡기셨다.
성도는 이 사실을 지식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의 다스림 아래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믿는다면 그분의 피 앞에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긴 자에게 보좌를 약속하셨다면 성도도 이기는 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의 부르심은 장식용 호칭이 아니라, 회개와 순종과 영적 전쟁과 중보의 삶으로 감당해야 할 실제 사명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땅의 성공을 복의 전부로 오해한다. 그러나 세상의 지위와 재물은 죽음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구원자이시며, 왕이자 대제사장이시며, 다시 오실 심판주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경륜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다윗은 하늘의 비밀을 알았기에 고난 중에도 길을 잃지 않았다. 그는 죄를 지었지만 회개했고,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지켰으며, 자기 왕권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크게 보았다. 성도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말씀을 배우되 성령의 조명 안에서 배워야 하고, 은사를 사모하되 정결한 회개 안에서 사모해야 하며, 왕권을 바라보되 먼저 제사장적 거룩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예수님을 단지 구원자로만 알고 있는가, 아니면 왕과 제사장으로 알고 있는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죄와 귀신의 묶임을 방치하고 있는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음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복만을 좇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성도는 다시 회개하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며, 다시 주님의 경륜 안에서 자기 부르심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왕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깊이 알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05-26 (화요일)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시편 110편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자 제사장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다윗의 영성을 탐구하며,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이기는 자의 자격을 역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진정한 왕의 모델로 다윗을 제시하며, 왕직은 사탄의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권세로, 제사장직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긍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나 그 결실은 행함과 열매를 통한 심판으로 완성됨을 강조하며, 성도들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비워 주님의 쓰임에 합당한 하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시온산과 예루살렘을 사모했듯, 신자들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장차 다가올 영광의 나라에서 왕 노릇 하는 상속자가 될 것을 독려하는 목회적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설교요지]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으로 오셨다. 왕직은 사탄과 악한 영의 반역을 다스리고 깨뜨리기 위한 직분이며, 제사장직은 죄에 빠진 인간을 속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기 위한 직분이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이 두 직분이 장차 메시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될 것을 보았다. 특히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인물로서, 예수께서 레위 계열이 아닌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실 것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왕직은 사람을 억압하는 권세가 아니라 사탄을 깨뜨리는 권세이며,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죄인을 용서하고 살리는 직분이다. 성도도 회개와 순종과 영적 전투를 통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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