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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27. (수)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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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O7qFXjZSbUA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0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0) 그는 예수께서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03)(시110: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O7qFXjZSbUA

 

1. 들어가며

  시편 110편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본 하늘 보좌의 장면을 기록한 말씀이다. 이 시는 단순히 이스라엘 왕의 즉위식 노래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주에게 말씀하시고, 그분을 오른쪽에 앉히시며, 원수들을 발판이 되게 하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시 110:1). 여기서 다윗의 주는 다윗보다 뒤에 오실 메시아이지만 동시에 다윗보다 높으신 주님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말씀 안에는 왕권과 제사장직이 함께 들어 있다. 시편 110편은 메시아가 원수들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말하면서도, 그 왕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선포한다(시 110:4). 그러므로 이 시편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동탄명성교회가 전해 온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는 동시에 성도가 장차 어떤 사람으로 빚어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가지신 구원의 경륜은 창조와 타락, 아브라함의 부르심, 이스라엘의 역사, 다윗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 교회 시대, 재림과 왕국,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그 경륜의 중심에는 왕이자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편 110편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왜 왕이자 제사장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성도가 어떻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시편 110편은 왜 왕 같은 제사장의 절정인가?

  시편 110편의 첫 번째 특징은 왕권이다.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오른쪽에 앉히신다는 것은 그분에게 통치권과 심판권과 승리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오른쪽은 권능과 영광의 자리다. 다윗은 자기 혈통에서 오실 분이 단지 후손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왕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러나 시편 110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네 번째 절에서 갑자기 제사장직이 들어온다. 전쟁과 통치와 심판의 시편 한가운데에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이 박혀 있다. 이것이 이 본문의 결정적 특징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최종 왕은 단순히 원수를 제압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담당하는 제사장 같은 왕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더 밝히 보여 준다. 어린양의 피로 사신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고, 끝내 왕 노릇 하는 자로 서게 된다(계 5:10). 성도의 최종 신분은 막연한 천국 입성이 아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속한 자는 구원을 받고, 이기는 자는 왕권에 참여한다.

계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은 뭉뚱그려 말할 수 없는 신분이다. 왕은 통치와 전쟁과 심판의 책임을 가진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백성을 위해 중보하고 축복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 둘이 한 인격 안에서 만날 때, 시편 110편의 메시아상이 드러난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이기는 성도에게 분깃으로 주어진다.

  성경의 종말론은 성도에게 막연한 위로만 주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말한다(계 2:26-27). 이 통치는 세상적 지배가 아니라 목자의 통치다. 헬라어로 ‘다스리다’에 쓰인 포이마이노는 본래 양을 치고 돌보는 목양의 뜻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왕권은 압제의 권력이 아니라 목양의 권세다.

계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시편 110편은 이 모든 흐름의 절정이다. 왕이신 예수님은 원수들을 발 아래 두시는 분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기 피로 백성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바로 읽으면 천국에서 성도의 마지막 신분, 곧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이 보인다.

  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창조 때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다. 그러나 타락으로 사람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아래 놓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율법과 성막과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 모든 과정은 장차 오실 왕이자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길이었다.

  다윗에게 와서 이 흐름은 왕권으로 집중되었다. 다윗 언약은 메시아 왕국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왕권만으로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왕이 아무리 강해도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그 왕국은 거룩할 수 없다. 그래서 시편 110편은 왕권 한가운데 제사장직을 놓는다. 이것이 성경의 정밀한 연결이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약속도 이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천국의 상급은 세상적 평등주의로 뭉뚱그릴 수 없다. 성경은 어린양의 보좌 가까이에 있는 자들, 왕권에 참여하는 자들, 섬기는 자들, 그리고 각자의 행위대로 상을 받는 질서를 말한다. 다만 그 모든 상급은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와 회개와 믿음과 충성 위에 주어진다.

  이처럼 시편 110편은 예언과 교리와 실천을 동시에 붙든다. 예언으로는 메시아의 보좌 우편과 원수의 굴복을 말한다. 교리로는 왕권과 제사장직의 결합을 말한다. 실천으로는 성도가 장차 누릴 영광에 합당하게 오늘의 삶을 준비해야 함을 말한다.


 

3. 다윗은 어떻게 예수님을 왕과 제사장으로 보았는가?

  다윗은 자신의 시대만 본 사람이 아니 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도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며 그리스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될 수 없음을 밝히셨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동시에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른 분이다(마 22:44).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기에는 한 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여러 분으로 나뉘어 각각 따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구원을 작정하시고, 아들의 신분으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 흘려 속죄를 이루시며,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셔서 회개와 거룩함과 이김의 길로 인도하신다. 다윗은 이 경륜의 중심에 서실 메시아를 미리 보았다.

  다윗의 영적 통찰은 우연한 상상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 되기 전부터 하나님을 목자로 알았고, 왕이 된 뒤에도 자기 권력을 자기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려 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자기 손으로 왕권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와 질서를 믿었다.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본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이며 동시에 영원한 제사장이다. 이것은 인간의 족보나 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왕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고, 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 계열에서 나오는 것이 율법의 일반 질서다. 그런데 다윗은 유다 지파에서 오실 왕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 되실 것을 보았다.

  이것이 성경 팩트다. 메시아의 왕권은 다윗 언약과 연결되고,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서열과 연결된다. 예수님은 아론 계열의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론 이전에 이미 등장한 더 근원적인 제사장직을 따라 오셨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시편 110편 4절을 붙들고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영원하다고 증언한다(히 7:17).

히 7: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왕직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왕은 권세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치의 뜻을 살아내는 자다. 왕은 백성을 자기 소유물로 삼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양 떼를 맡은 자다. 그리고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으로 백성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다.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사용하신 방식도 중요하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셨고,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 메시아가 아니라, 다윗보다 먼저 계시고 다윗보다 높으신 주님이심을 드러낸다.

  다윗은 자기보다 높으신 주님을 보면서도 그 주님이 자기 후손으로 오실 것을 알았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낮아지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왕권은 피조물이 얻은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구원 행위 안에서 나타난 왕권이다.

  또한 다윗은 제사장직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아론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직분을 감당했으나, 그들 자신도 죄인이었다. 그들은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고, 죽음 때문에 직분을 계속 이어 갈 수 없었다. 다윗이 본 메시아는 그런 한계 안에 갇힌 분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지고 영원히 계시는 제사장이었다.


 

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왜 목자 같은 왕인가?

  세상의 왕권은 자주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자기 자리가 불안한 왕은 백성을 압제하고, 반대자를 두려워하며, 권력으로 사람을 눌러 자기 자리를 지키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그렇게 서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자기 자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백성을 양 떼로 본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목자였다. 그는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웠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목자의 눈으로 배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다(시 23:1-3). 이것은 왕의 개념을 새롭게 쓰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의와 공의로 심판하시는 왕이시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시 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통찰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더 분명히 확인된다. 하나님은 장차 한 목자를 세워 양 떼를 먹이겠다고 하셨고, 그 목자를 ‘내 종 다윗’이라고 부르셨다(겔 34:23-24). 여기서 다윗은 이미 죽은 역사적 다윗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겔 34: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성취로 오셨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 10:11).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본질이다. 왕권의 정점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희생이다. 참된 왕은 백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자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러므로 시편 110편의 심판 언어를 세상적 폭력으로 읽으면 안 된다. ‘원수들을 발판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사탄과 귀신들과 악한 영들의 권세가 끝내 그리스도 아래 굴복한다는 뜻이다. 목자 같은 왕은 양 떼를 해치는 원수에게는 심판의 왕으로 나타나지만, 자기 양에게는 생명을 주는 목자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백성을 먹이고, 쉬게 하고, 소생시키며, 의의 길로 인도한다. 다윗은 이 왕의 모습을 미리 알았고, 자기 삶에서 그 길을 따라가고자 했다. 그래서 다윗의 왕권은 예수님의 왕권을 비추는 그림자가 되었다.

  이 점에서 다윗은 사울과 다르다. 사울은 사람의 평가와 왕위의 안전에 흔들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의 소리를 두려워했고, 다윗을 경쟁자로 보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도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으로 치지 않았다. 왕권을 자기 힘으로 움켜쥐려는 사람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목자라는 히브리어 라아는 먹이고 돌보며 길을 인도한다는 뜻을 가진다. 목자는 양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 양의 형편을 알고, 위험을 막고, 길 잃은 양을 찾으며, 약한 양을 품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도 이와 같다. 왕의 권위는 양 떼를 자기 뜻대로 부리기 위한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양 떼를 살리기 위한 책임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목양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목자가 이리와 도둑을 막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양을 해치는 원수에게는 물러서지 않는다. 시편 110편의 전쟁 언어는 양 떼를 구원하기 위한 목자의 거룩한 전쟁으로 읽어야 한다.


 

5. 예수님은 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가?

  시편 110편 4절의 핵심 단어는 ‘멜기세덱’이다. 멜기세덱은 히브리어 멜레크와 체데크가 결합된 이름으로, 뜻으로 풀면 ‘의의 왕’이다. 그는 또한 살렘 왕이었다. 살렘은 샬롬, 곧 평강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성경 안에서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전쟁에서 돌아올 때 등장한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을 축복했다(창 14:18-20). 레위도, 아론도, 시내산 율법도 있기 전의 일이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아론 계열보다 앞선다.

창 14:18-20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해석한다. 아론의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세워졌고, 죽음 때문에 직분이 계속 바뀌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진 제사장이시며,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직도 갈리지 않는다(히 7:20-24).

히 7:20-21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이 차이는 구원론의 핵심과 연결된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은 먼저 자기 죄를 위해 속죄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셨다. 그분의 피는 짐승의 피처럼 반복되는 제사가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완전한 속죄의 피다.

  따라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다는 말은 단지 제사장 계보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하나님의 맹세 위에 세워졌고, 아론 제사장직보다 앞서며, 죽음으로 중단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드리는 완전한 제사장직이라는 뜻이다.

  성도도 이 원리를 알아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은 직함을 얻는 것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삶의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 삶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길이다.

  여기서 ‘서열’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이것은 단지 순번이나 직급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질서와 방식에 속해 있는가를 묻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론의 방식, 곧 반복 제사와 죽음으로 끊기는 방식에 속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방식, 곧 의와 평강, 축복과 공급, 영원성과 하나님의 맹세의 방식에 속하신다.

  헬라어로 제사장은 히에류스라고 한다. 제사장은 거룩한 일을 맡은 자이며,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자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중간에서 절차를 수행하는 제사장이 아니시다. 그분은 제물이며 제사장이며 성전의 실체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모든 예표를 자기 안에서 완성한다.

  이 사실은 성도의 담대함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버림받지 않는다. 땅의 제사장은 죽고 바뀌지만, 하늘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신다(히 7:25).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또한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것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자기보다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인정했다는 표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근거로 레위적 제사장직보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더 큰 질서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바로 그 더 큰 질서의 완성이다.


 

6. 떡과 포도주는 왕의 헌신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가지고 나온 것은 떡과 포도주였다. 일반적인 제사장은 백성이 가져온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돌아온 아브람에게 자기 편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제사장 같은 왕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준다. 참된 제사장은 받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공급하는 자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다. 그는 승리했지만 지쳤을 것이다. 그때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이긴 자를 축복하고, 떡과 포도주로 힘을 공급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실 몸과 피의 그림자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다. 또 잔을 주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하셨다(마 26:26-28).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양식과 생명으로 내어 주셨다.

마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왕의 헌신이 드러난다. 세상 왕은 백성에게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자기 몸과 피를 주신다. 세상 왕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지만, 예수님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 이것이 목자 같은 왕이며 제사장 같은 왕의 길이다.

  다윗은 이 비밀을 알았기에 자기 왕권을 성전과 찬양과 헌신으로 사용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사모했고, 성전을 짓기 위해 자기 소유를 드렸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였고, 신약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연결된다. 다윗의 마음은 자기 궁궐보다 하나님의 집을 향해 있었다.

  예수님께서 주신 떡과 포도주는 구원의 길을 분명히 보여 준다. 죄인은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의 몸과 피, 곧 십자가의 속죄를 믿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회개와 천국복음의 중심이다. 회개 없는 왕권은 교만이 되고, 속죄 없는 제사장직은 종교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의 표다. 그 표를 받는 성도는 자신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드리는 사람으로 자라가야 한다.

  떡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양식이고, 포도주는 피와 언약과 기쁨을 상징한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장면은 단순한 환대가 아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자에게 생명과 회복을 공급하는 제사장적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 그림자를 마지막 만찬에서 완성하셨다.

  여기서 성도의 구원은 분명해진다. 사람은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만으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 죄 사함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 피를 값싼 은혜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피로 산 백성은 회개와 믿음으로 주께 돌아와야 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거룩한 삶을 배워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은 이 원리를 삶으로 배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만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맡겨진 시간, 물질, 은사, 마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린다. 다윗이 성전을 위해 준비한 마음은 바로 이러한 멜기세덱적 헌신과 연결된다. 그는 왕이었지만 제사장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했다.


 

7. 왕 같은 제사장은 누구를 축복하고 무엇과 싸우는가?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면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여기서 축복의 대상은 단순히 세상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 아니다. 전쟁에서 대적을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다. 영적 의미로 보면, 왕 같은 제사장은 악한 영의 권세와 싸워 이긴 자를 축복하고 세워 주는 사람이다.

  오늘의 교회가 붙들어야 할 영적 팩트가 여기에 있다.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누르는 싸움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싸움이라고 말한다(엡 6:12).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귀신과 악한 영들은 죄와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틈을 붙잡고 사람을 묶으려 한다. 그래서 회개는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회개는 어둠의 권세가 붙잡고 있던 근거를 제거하고, 예수님의 피 아래로 돌아오는 영적 전쟁이다. 왕 같은 제사장은 이 사실을 알고 영혼들을 회개와 믿음과 순종으로 이끌어야 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6:17).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대적을 손에 붙이시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이긴 자는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왕 같은 제사장은 세상 성공만을 축복하지 않는다. 돈을 벌었거나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참된 축복은 죄에서 돌이키고, 귀신의 압제에서 풀려나고, 예수 이름으로 원수를 이기며, 다른 영혼을 살리는 자리로 나아가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긴다고 말한다(계 12:11). 이것이 종말의 성도가 붙들어야 할 전쟁 방식이다. 어린양의 피는 속죄의 근거이고, 증언하는 말씀은 진리의 선포이며,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태도는 왕 같은 제사장의 헌신이다.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은 영혼을 향한다. 그 축복은 죄인을 회개로 이끌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전쟁에서 지친 자에게 떡과 포도주를 공급한다. 이 축복은 말만의 축복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축복이다.

  이 싸움의 출발점은 회개다. 악한 영은 죄의 근거를 붙잡고 역사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상숭배의 죄, 자신의 탐욕과 음란과 미움과 거짓의 죄, 말씀을 거역한 불순종의 죄가 회개되지 않을 때 어둠은 틈을 얻는다. 그러므로 귀신론은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회개와 거룩함과 직결된 영적 팩트다.

  하지만 영적 전쟁은 사람을 두려움으로 몰아넣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다. 귀신은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굴복한다. 성도는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어린양의 피와 말씀과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안전한 영적 전쟁의 길이다.

  왕 같은 제사장은 전쟁에서 돌아온 자를 정죄하지 않고 회복시킨다. 지친 자에게는 말씀의 떡을 주고, 죄책에 눌린 자에게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며, 두려움에 묶인 자에게는 주님의 왕권을 선포한다. 축복은 입술의 좋은 말에 그치지 않고 영혼을 실제로 살리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8. 다윗처럼 왕직을 준비하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윗은 한 말씀을 가볍게 흘려보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한 말씀을 붙들고 왕직의 의미를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주의 말씀은 그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었다(시 119:105). 하나님이 보여 주신 한 장면은 그의 왕권 전체를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다윗처럼 왕직을 준비하는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왕이시지만, 자기 백성을 살리기 원하시는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람을 정죄하는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도록 돕고, 살도록 먹이고, 의의 길로 인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성도는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향을 올리고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천국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제사장적 사명도 찬송과 섬김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으신 목적을 찬송에 두셨다(사 43:21).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다윗이 성가대를 세우고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왕은 자기 이름을 높이는 노래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송을 세워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은 자기 성공담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하게 하는 사람이다.

  성도는 교회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다윗의 마음은 성전을 향해 있었고, 오늘의 성도에게 성전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연결된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 장소가 아니라 회개와 말씀과 예배와 영적 전쟁과 찬송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경륜의 현장이다.

  또한 다윗처럼 왕직을 준비하는 성도는 사울의 길을 경계해야 한다. 사울은 사람의 시선과 자기 자리의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왕권은 빼앗아 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 맡겨지는 것이다. 천국의 왕권도 마찬가지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조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회개와 믿음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벧전 2:9). 이 말은 모든 성도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자동으로 왕권을 누린다는 뜻이 아니다. 선택받은 족속답게, 거룩한 나라답게,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답게 어둠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국 준비는 오늘의 삶에서 이루어진다.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말씀을 곱씹으며, 귀신과 악한 영의 권세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교회를 세우며, 지친 영혼에게 복음의 떡과 보혈의 포도주를 전하는 삶이 왕 같은 제사장의 준비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 준 길이며,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길을 따라가는 성도의 길이다.

  말씀을 곱씹는 태도도 중요하다. 정결한 짐승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영적으로 정결한 사람은 들은 말씀을 다시 묵상하고 삶에 적용한다. 다윗은 한 말씀을 붙들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았다. 오늘의 성도도 설교를 들은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의 가정과 교회와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동탄명성교회가 붙들어 온 회개와 천국복음도 이 준비의 실제적인 길이다. 회개는 구원의 문을 통과한 후에 버리는 초보가 아니라,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는 성도의 계속적인 호흡이다. 천국복음은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신분과 상급으로 설 것인지를 오늘 준비하게 하는 복음이다.

  또한 준비된 성도는 찬송의 사람이 된다. 시편은 단지 감정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신앙 고백이다.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찬송은 왕권과 제사장직의 만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은 귀신의 말과 세상의 원망을 끊고, 하늘의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거룩한 통로가 된다.


 

9. 나오며

  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목자 같은 왕이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 같은 왕인지를 살펴보았다. 시편 110편은 예수님을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으로 보여 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진 영원한 제사장으로 보여 준다. 이 두 신분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다.

  성도는 이 말씀을 관념으로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이름은 영광스러운 만큼 무겁다. 왕권을 사모한다면 목자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제사장직을 사모한다면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은 권세욕은 왕권이 아니라 교만이 되며, 영혼을 살리지 않는 제사장 의식은 종교적 형식이 된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구원 경륜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아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과 피를 내어 주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신다. 그분은 장차 다시 오셔서 원수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시고, 이기는 자들에게 왕권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의 작은 자리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하고, 회개와 천국복음을 붙들어야 하며, 귀신과 악한 영의 권세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또한 교회를 사랑하고, 영혼을 먹이며,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실수도 있었지만 그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왕을 원하시는지를 묵상했고, 자기의 왕직을 하나님의 집과 찬양과 백성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다. 성도 역시 넘어짐이 있더라도 회개로 다시 일어서야 하며,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자 같은 왕, 제사장 같은 왕의 성품을 이루어 가야 한다.

  시편 110편의 예언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고, 그 은혜는 오늘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의 길로 부르고 있다. 그 길은 압제의 길이 아니라 목양의 길이며, 자기 보존의 길이 아니라 자기 헌신의 길이고, 세상 자랑의 길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와 증언의 말씀으로 이기는 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왕이자 영원한 제사장으로 붙들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27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본 설교는 시편 110편을 바탕으로 다윗이 예언한 메시아의 통치적 특성과 성도가 지향해야 할 영적 지위를 고찰한 설교문입니다.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심판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목자 같은 왕이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이중적 직분을 완성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의 실상을 미리 보고 이를 자신의 삶에 투영함으로써, 희생과 헌신을 통해 백성을 먹이고 축복하는 참된 지도자의 본을 보였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이러한 다윗의 삶을 통해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미래의 상급인 이기는 자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며 각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듭나 천국에서 영원한 기업을 누리도록 준비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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