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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침묵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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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31)] 다윗의 아들 솔로몬(09)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3)(아가서1:14)_2026-06-24(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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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24T08:38:05+09:00</published>
		<updated>2026-06-24T09:15:25+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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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1)] 다윗의 아들 솔로몬(09)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3)(아가서1:1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RrwVaYWaQJY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 여호와, 회개, 기도, 믿음이라는 직접적인 신앙 용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은 유대 랍비들의 전통 안에서 정경으로 인정되...</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1)] 다윗의 아들 솔로몬(09)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3)(아가서1:14)&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RrwVaYWaQJY&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RrwVaYWaQJY?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Arial,sans-serif;font-size:16px;line-height:1.75;margin-left:0;margin-right:0;margin-top:0;margin-bottom:0;padding:0;color:#222;} main{margin:0;padding:0;} h1{font-size:20px;line-height:1.5;margin:0 0 1.4em 0;font-weight:700;color:#222;} h2{font-size:17px;font-weight:700;color:#38688c;margin:2.8em 0 0.8em 0;} p{margin:0 0 1em 0;} p.body{margin:0 0 1em 0;} p.verse{font-weight:700;color:#854ba0;margin:0 0 1em 0;} p.date{margin:1.8em 0 0.2em 0;} p.signature{margin:0 0 1em 0;} &lt;/style&gt; &lt;main&gt; &lt;h1&gt;&amp;nbsp;&lt;/h1&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 여호와, 회개, 기도, 믿음이라는 직접적인 신앙 용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은 유대 랍비들의 전통 안에서 정경으로 인정되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 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가서가 겉으로는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속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가장 짙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단순한 연애시로 읽으면 이 책의 영적 골격을 놓치게 된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남긴 지혜문학의 정수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평화의 왕이요 지혜의 왕이요 성전 건축자였다. 그는 성전을 건축했지만, 그 성전의 영적 의미를 열왕기상과 역대기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성전의 내적 의미, 곧 하나님이 거하실 인격적 처소인 교회가 어떻게 산출되는지는 오히려 아가서의 상징과 노래 속에 깊이 들어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에는 역사, 문학, 예표, 영적 실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솔로몬의 노래이고, 문학적으로는 신랑과 신부의 가극시이며, 예표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고, 영적으로는 신부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그러므로 아가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절은 한 송이 꽃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압축한 신학적 문장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본문은 아가서 1장 14절이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가리켜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라고 고백한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그 안에는 생명수의 근원, 포도원의 산출, 속전의 피, 무죄하신 그리스도, 천국의 영광, 복음의 향기, 신부 단장의 비밀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 1장 14절의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가 왜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어떻게 교회를 산출하고 신부를 단장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h2&gt;2. 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최고 작품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직접적인 신앙 용어가 거의 없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가장 친밀한 언어로 드러난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다가 &amp;ldquo;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amp;rdquo;고 했다(엡 5:31~32). 이 큰 비밀을 구약의 시적 언어로 가장 풍성하게 보여 주는 책이 바로 아가서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시편을 통해 그리스도를 왕, 제사장, 목자, 고난받는 종으로 예언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여 준다. 왕은 다스리는 분이고, 제사장은 중보하는 분이며, 목자는 돌보는 분이다. 그러나 신랑은 신부와 한 몸을 이루는 분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가장 내밀한 관계로 끌어올린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역사적으로 성전을 지은 왕이다. 그러나 물질적 성전은 그림자다.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는 &amp;ldquo;내 교회를 세우리라&amp;rdquo;고 말씀하셨다(마 16:18). 또한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신다고 했다(고전 3:16). 그러므로 성전의 최종 실체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성도들과 교회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솔로몬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윗은 전쟁으로 평화를 준비했고, 솔로몬은 그 평화 위에서 성전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 성전은 돌과 백향목과 금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 안에 세워지는 영적 집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남긴 가장 깊은 지혜는 성전 건축의 외형이 아니라, 성전의 실체인 교회가 신랑의 사랑 안에서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여 주는 아가서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바로 이 지점에서 아가서가 중요하다. 아가서는 교회가 어떻게 성전이 되고, 신부가 되며, 왕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는지를 노래한다. 술람미 여인은 처음에는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햇볕에 그을린 시골 처녀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랑을 만나고 그의 사랑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부름받는다. 이것은 죄와 수고와 악한 영의 억압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을 통해 신부로 준비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를 어떻게 산출하고, 어떻게 씻고, 어떻게 단장하며, 어떻게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는지를 보여 주는 지혜문학의 최고 작품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아가서가 신앙 용어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은 오히려 이 책의 깊이를 드러낸다. 노골적인 교리 문장 대신 신랑과 신부, 향기와 포도원, 꽃과 동산, 왕의 가마와 예루살렘의 딸들을 통해 영적 실재를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연애 노래로만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찾는 사람에게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열린다.&lt;/p&gt; &lt;h2&gt;3. 한 분 하나님 이해가 왜 속전 해석의 기초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를 속전이신 그리스도로 해석하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분이 단순한 피조물이라면 그분의 피는 온 인류의 속전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의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을 완전히 구속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창조주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하는 한 분 하나님 신앙은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약히드식으로 고립된 하나가 아니라 에하드식으로 하나이시다. 에하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구별을 가지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개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있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둘로 나뉜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점을 놓치면 두 가지 오류가 생긴다. 하나는 예수님을 창조된 존재로 낮추는 오류다. 다른 하나는 피조물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나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오류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피조물이다.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도 바로 이 차이를 품고 있다.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지만 신부와 같은 피조물의 부류가 아니다. 신랑은 신부를 살리러 찾아오신 창조주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께서는 &amp;ldquo;나와 아버지는 하나&amp;rdquo;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같이 성도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존재의 혼합이 아니라 구별 속의 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다른 분으로 나타나셨으나, 하나님 밖의 다른 피조물이 아니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분으로 증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오셨고 다시 아버지께로 가신다(요 16:28). 요한은 그분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요 1:1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이 속전 해석의 기초다. 속전은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지불하는 작은 값이 아니다. 속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값으로 내어 주신 사건이다. 고벨화가 신랑을 가리킨다면, 그 신랑은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는 온 인류를 속량하기에 충분하고, 그분의 생명은 교회를 산출하기에 충분하다.&lt;/p&gt; &lt;h2&gt;4. 아가서 1장 14절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을 해석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화자다.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가? 만약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한 말이라면 고벨화는 신부의 상징이 된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한 말이라면 고벨화는 신랑의 상징이 된다. 이번 설교의 핵심은 후자다. 곧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는 술람미 여인이 신랑 솔로몬을 향하여 고백한 말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 근거는 &amp;ldquo;나의 사랑하는 자&amp;rdquo;라는 표현이다. 아가서에서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는 히브리어 &amp;lsquo;도드&amp;rsquo;가 사용된다. 도드는 사랑하는 남자, 사랑하는 자, 신랑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는 &amp;lsquo;라야&amp;rsquo; 계열의 표현, 곧 &amp;ldquo;나의 사랑&amp;rdquo;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아가서 1장 14절의 &amp;ldquo;나의 사랑하는 자&amp;rdquo;는 남자를 가리킨다. 곧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문맥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1장 12절에서 왕이 식탁에 앉았을 때 술람미 여인의 나드 기름이 향기를 뿜어낸다. 이어서 13절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자를 몰약 향 주머니라고 부르고, 14절에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부른다. 왕의 식탁 앞에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향하여 연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흐름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1:12-13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점을 잘못 잡으면 전체 해석이 흔들린다. 고벨화를 신부의 상징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의미가 흐려진다. 그러나 고벨화를 신랑의 상징으로 보면, 술람미 여인이 첫눈에 알아본 신랑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남자를 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실 속전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누가 말하는지를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화자를 정할 때에는 단어, 성별 표시, 문맥, 앞뒤 대화 구조를 함께 보아야 한다. 도드와 라야의 구분은 이런 점에서 결정적인 열쇠다. 신랑과 신부의 대사를 바꾸어 읽으면 신학적 초점도 바뀐다. 그래서 본문 해석은 감상보다 먼저 정확한 언어 관찰에서 시작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 2장 3절에서도 여자는 &amp;ldquo;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amp;rdquo;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도 도드는 남자다. 그러므로 1장 14절과 2장 3절은 같은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고벨화 송이로도 보고, 사과나무로도 본다. 하나는 속전의 피를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의 생명을 강조한다.&lt;/p&gt; &lt;h2&gt;5. &amp;lsquo;고벨화&amp;rsquo;는 왜 속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는 아가서에 드물게 나오는 식물 이름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것을 헤나로 보기도 하고, 사막 장미 혹은 샤론의 장미 계열로 설명하기도 한다. 정확한 식물 동정은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의 핵심은 식물학 자체가 아니라, 아가서가 이 식물을 통해 신랑의 영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속전의 의미다. 히브리어의 속죄, 속량, 덮음과 관련된 어근은 &amp;lsquo;카파르&amp;rsquo;이다. 카파르는 덮다, 속죄하다, 값을 치르다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속전, 몸값, 대속의 개념이 나온다. 고벨화가 이러한 속량의 의미와 연결될 때, 아가서 1장 14절의 신랑은 신부를 위해 몸값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의 속전은 단순한 배상이 아니다. 죄로 팔린 자를 되사고,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해방하며, 마귀의 종 되었던 자를 하나님의 소유로 돌려놓는 값이다. 그러므로 속전에는 법적 의미와 생명적 의미가 함께 있다. 죄의 값을 지불하는 동시에, 그 값을 통해 새로운 소유권이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죄를 덮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옮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께서는 자신이 온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다(막 10:45). 여기서 대속물은 헬라어 &amp;lsquo;뤼트론&amp;rsquo; 계열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포로를 해방하거나 빚진 자를 풀어 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베드로도 성도가 은이나 금 같은 없어질 것으로 속량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되었다고 말한다(벧전 1:18~19).&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고벨화가 신랑을 가리킨다는 것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기 위해 값을 치르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 값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 그 값은 그분 자신의 피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바라보며 그가 단순히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 줄 속전이신 분임을 영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아가서가 연애시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세상의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준다. 세상의 신랑은 신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만, 아가서의 신랑은 신부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피를 준비한다. 그래서 고벨화는 속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더 나아가 속전이신 그리스도는 사탄 마귀의 권세까지 처리하신다.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마귀에게 속하게 되었고, 귀신들은 죄의 통로를 따라 사람 안에 들어와 성품과 몸과 생각을 더럽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의 기록을 처리하고, 십자가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했기 때문에, 성도는 회개와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악한 영을 내보낼 수 있다. 속전은 구원론만이 아니라 귀신론과도 연결된다.&lt;/p&gt; &lt;h2&gt;6. 고벨화의 세 색깔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로 추정되는 식물에는 세 가지 색이 눈에 띈다. 빨간색, 하얀색, 노란색이다. 이것은 단순한 색채 감상이 아니다. 아가서가 문학 작품이라면 색깔 하나도 의미 없이 쓰이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식물이라면, 그 색은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증언하는 표지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첫째, 빨간색은 피 흘려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사랑의 말을 하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피를 흘리신 분이다. 십자가에서 옆구리가 찔렸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요 19:34). 그 피는 속죄의 피요, 신부를 사기 위해 지불된 속전의 피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하얀색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 있는 자의 피는 다른 사람을 속량할 수 없다. 속전이 되려면 그분은 죄가 없으셔야 한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증언한다(히 4:1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 노란색 혹은 금빛은 천국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고, 그 성의 길도 순금이다(계 21:18, 21). 그러므로 금빛은 땅의 부귀가 아니라 하늘의 실재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기 위해 오셨지만, 그 피의 목적은 신부를 새 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이끄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계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따라서 고벨화의 세 색깔은 그리스도를 1:1로 증언한다. 빨간색은 십자가의 피다. 하얀색은 무죄하신 순결이다. 노란색은 천국의 영광이다. 속전이신 그리스도는 죄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교회를 사셔서 하늘의 영광으로 이끄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다. 먼저 죄 없으신 분이 계셔야 한다. 그다음 그분이 피를 흘려야 한다. 그리고 그 피의 결과가 하늘의 영광으로 이어져야 한다. 만약 죄 없는 흰색이 없다면 빨간색의 피는 대속의 피가 될 수 없다. 만약 빨간색의 피가 없다면 노란색의 영광은 죄인에게 열릴 수 없다. 만약 노란색의 영광이 없다면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사건으로만 끝난다. 고벨화의 색은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을 하나로 묶어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이 세 색깔을 함께 보아야 한다. 피만 보고 천국을 보지 못하면 구속의 목적을 놓친다. 천국만 보고 피를 보지 못하면 구속의 값을 놓친다. 흰색의 무죄성을 보지 못하면 대속의 자격을 놓친다. 고벨화는 이 세 가지를 하나의 꽃 안에 담아 그리스도를 증언한다.&lt;/p&gt; &lt;h2&gt;7. &amp;lsquo;엔게디 포도원&amp;rsquo;과 &amp;lsquo;송이&amp;rsquo;는 무엇을 뜻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은 단순히 &amp;ldquo;고벨화&amp;rdquo;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 단어를 따로 떼어 보아야 한다. 엔게디, 포도원, 송이다. 이 수식어들은 고벨화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첫째, 엔게디는 &amp;lsquo;염소의 샘&amp;rsquo;이라는 뜻을 가진다. 엔게디는 사해 근처의 광야 가운데 물이 흐르는 장소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 광야와 사해 주변의 메마른 땅 한가운데 생수가 솟는다는 점에서 엔게디는 생명수의 근원을 떠올리게 한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7:3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엔게디의 고벨화는 생명수의 근원에서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메마른 광야 가운데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염소 같은 자를 양으로 바꾸시는 분이다. 생명 없는 자를 생명 있는 자로 바꾸는 근원은 그리스도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라는 장소는 다윗의 피난처와도 연결된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엔게디의 요새에 머문 적이 있다. 이것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광야 같은 세상 속에 생명의 피난처가 되실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엔게디와 연결한 것은, 신랑 안에 생명과 피난과 회복의 의미가 함께 있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포도원은 산출의 장소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기도 하고, 더 넓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산출하는 터전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성도들을 가지라고 하셨다(요 15:1, 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포도원은 단지 포도를 재배하는 밭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번성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알의 밀알처럼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요 12:24). 고벨화가 포도원 안에 있다는 것은, 속전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많은 생명의 열매를 산출한다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 송이는 하나가 많은 것을 품는 이미지를 가진다. 포도송이는 낱알 하나가 아니라 많은 알이 한 송이 안에 맺힌 형태다. 그러므로 고벨화 송이라는 표현은 한 분 그리스도에게서 많은 생명의 열매가 산출될 것을 암시한다. 한 분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그 죽음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온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따라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는 생명수의 근원에서 오신 그리스도, 포도원에서 많은 생명을 산출하시는 그리스도, 한 송이 안에 많은 열매를 품으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보여 준다. 이것이 아가서의 압축된 지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표현은 또한 성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포도원은 돌보아야 할 장소이고, 송이는 맺혀야 할 열매다. 신부는 신랑의 생명을 받아 열매 없는 존재로 머물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산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야 하고, 그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산출이며, 이것이 속전의 목적이다.&lt;/p&gt; &lt;h2&gt;8. 고벨화의 향기와 염색은 신부를 어떻게 준비시키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가 헤나와 관련된다면, 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향기와 염색이다. 헤나의 향기는 멀리 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잎과 꽃은 염색 재료로 사용되어 신부를 꾸미는 데 쓰였다. 이것도 우연한 요소가 아니다. 속전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값을 치르실 뿐 아니라, 그 피와 생명으로 신부를 아름답게 단장하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먼저 향기는 복음의 확산을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나타내신다고 했다(고후 2:14~15). 그리스도의 향기는 한 지역에 갇혀 있지 않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은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향기는 온 세계로 퍼져 나간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후 2:14-15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음으로 염색은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셨다. 그 목적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엡 5:25~2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신부는 처음부터 완성된 왕비가 아니다. 그녀는 포도원에서 그을린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랑의 사랑을 받고, 그의 피와 향기에 접촉되며, 그의 부르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고, 말씀으로 단장되며, 성령의 역사로 거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신부 단장은 외적인 장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의 씻김, 마음의 정결, 악한 영의 축출, 말씀의 새김, 성령의 다스림을 포함한다. 신부가 향기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는다는 뜻이고, 신부가 염색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으로 자기 정체성이 바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부 단장은 구원 이후의 삶 전체와 관련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고 말한다(계 19:7~8). 신부는 그냥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 그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고벨화의 염색은 바로 이런 신부의 단장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고벨화의 향기와 염색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진다. 향기는 복음이 만방에 퍼지는 사역이고, 염색은 신부가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으로 단장되는 사역이다. 속전이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죄값을 치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자기 피로 사람을 사시고, 그 사람들을 교회로 세우시며, 그 교회를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하신다.&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아가서 1장 14절의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가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말씀은 짧지만, 그 안에는 아가서 전체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의 깊은 비밀이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 지혜문학의 최고 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나타나시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자리로 낮아지시며, 죄 없으신 분이 피를 흘려 신부를 사신 것이 아가서의 신랑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벨화를 단순한 꽃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고벨화는 속전의 피를 말하고, 무죄하신 순결을 말하며, 천국의 영광을 말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는 생명수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고, 포도원은 많은 생명의 산출을 생각하게 하며, 송이는 한 분 그리스도에게서 많은 열매가 나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벨화의 향기는 복음이 만방에 퍼져야 함을 보여 주고, 고벨화의 염색은 신부가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으로 단장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속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피로 씻김받고, 그 생명으로 새롭게 되며, 그 향기를 세상에 나타내고, 그분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한다. 또한 이미 들어온 악한 영과 죄의 흔적을 회개로 처리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 안에서 정결한 신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의 피는 객관적 속죄의 근거이고, 회개는 그 피를 내 삶에 적용하는 길이다. 죄를 자백하지 않고 신부의 정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말씀을 듣고도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서 향기로운 신부가 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속전이 지불되었으므로 이제 성도는 그 속전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향해 찾아오신 신랑을 고벨화 송이로 보았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분은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속전이시고, 죄 없으신 거룩한 분이시며, 천국의 영광으로 나를 이끄시는 신랑이시다. 그리하여 속전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과 향기를 알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합당한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6월 23일(화)&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main&gt; &lt;main&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아가서 1장 14절에 등장하는&amp;nbsp;&lt;strong&gt;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lt;/strong&gt;를 중심으로, 신랑이신&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구속사적 의미&lt;/strong&gt;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저자는 고벨화(헤나) 꽃이 지닌&amp;nbsp;&lt;strong&gt;빨간색, 하얀색, 노란색&lt;/strong&gt;의 상징성을 통해 피 흘려 죽으시고 죄가 없으시며 천국의 실제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연합으로서의 하나(에하드)로 규정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명확한 차이를 인식하는 겸손한 신앙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아가서는 단순한 연애 시가 아니라,&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와 교회의 풍성한 연합&lt;/strong&gt;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일깨우는 최고의 계시적 작품임을 역설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amp;nbsp;&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1)] 다윗의 아들 솔로몬(09)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3)(아가서1:14)&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main&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 { margin: 0; padding: 0; box-sizing: border-box;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기독론 강의는 이제 세 번째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앞선 두 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왕과 창조주에 대해 살펴보았다. 왕으로서 그분은 새 예루살렘 성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왕복과 왕관과 왕의 가마로 신부를 맞이하시는 분이다. 창조주로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피조물인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근원을 가지신 분이다. 이 두 신분이 아가서의 신학적 토대를 이룬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번째 신분인 속전으로 초점이 옮겨진다. 속전이란 몸값이라는 뜻이다.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건져 내기 위해 값을 치르고 사신 구속주, 이것이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의 놀라움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라는 권면이다.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귀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 앞에 서게 된다. 무심코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그분의 속전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인지를 깨닫게 된다. 동시에 그 귀한 속전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게 된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부터 19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허망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허망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리고 이 속전의 신분이 아가서 1장 14절이라는 단 한 구절 속에 놀라운 방식으로 농축되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절 안에는 엔게디, 포도원, 고벨화, 송이라는 네 가지 핵심 단어가 들어 있다. 이 단어들 각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되심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엔게디는 하나님의 생명이 솟아나는 원천을 가리키고, 포도원은 십자가의 피와 교회 산출을 상징하며, 고벨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색깔로 그분의 신분과 사역을 드러내고, 송이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시는 그분의 사역을 그린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가서의 독특한 성격을 알아야 한다. 아가서에는 하나님이나 여호와 같은 신앙의 언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이 어떻게 성경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 책 안에서 화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해석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하나님의 언어 없이도 성경이 된 이유에서 시작하여, 도드와 라야라는 두 히브리어 호칭의 차이, 타부아흐의 원어 의미, 엔게디와 고벨화의 상징, 그리고 고벨화 송이가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아가서에 하나님&amp;middot;여호와&amp;middot;기도가 단 한 번도 없는데도 성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독특한 언어 세계 때문이다. 창세기부터 시편에 이르기까지 구약 성경의 모든 책에는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제사가 있으며, 율법이 있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이 모든 신앙 언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기도도 없고, 찬양도 없고, 하나님이나 여호와라는 이름도 없다. 겉으로 보면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연애 편지처럼 읽힌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왜 이 책이 성경에 포함된 것인가? 유대 랍비들도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가서가 단순한 연애 시가였다면 성경으로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었다. 이미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시와 노래가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성경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하나님의 경륜을 담은 것만이 성경이 되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이 아가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가서가 그 기준을 충족한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안에는 다른 어떤 책도 이처럼 풍성하게 담아내지 못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에베소서 5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비밀을 가장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담아낸 책이 바로 아가서이다.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신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숙해 가는지를 문학의 언어로 담아낸 책이다. 신앙의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신앙의 실재를 가장 진하게 전달하는 책, 그것이 아가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가 성경이 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아가서가 가진 깊이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들, 즉 등장인물, 식물, 동물, 색깔, 숫자, 지명들이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고도로 계산된 상징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 왕이었다. 그 지혜로 성전을 짓고, 그 지혜로 이 책을 기록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이 지혜 문학의 정수가 아가서이다. 그 안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가 빠짐없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도 이 책은 가장 거룩한 성경이 될 수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아가서를 쓸 당시 아직 왕비가 60명, 후궁이 80명 정도였던 초창기였다고 추정된다. 말년에는 처첩이 천 명에 이르렀지만, 아가서의 배경은 그 이전이다. 그 시기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하고 지혜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 지혜로 기록한 아가서는 겉보기에는 연애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창조와 구속과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경륜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 이것이 아가서가 성경이 된 이유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이 진리를 담은 최고의 책, 그것이 아가서이다. 아가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게 되며, 자신이 어떤 존재로 불렸는지를 알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가 성경으로 확정되는 과정에서 유대의 위대한 랍비 아키바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온 세상이 거룩하지만 아가서는 지극히 거룩하다. 이 한 문장이 아가서의 위상을 말해 준다. 아가서가 단순한 연애 시라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진리의 깊이가 아가서를 성경의 정경으로 만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솔로몬이 아가서를 기록한 시기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성전을 완공한 직후, 지혜가 절정에 달해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열왕기상 4장 32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었다. 그 수천 편의 노래 가운데 성경에 포함된 것이 아가서이다. 수천 편 중에 하나만 성경이 되었다는 것은, 그 하나가 다른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계시이다. 솔로몬이 기록한 수천 편의 노래 가운데 오직 아가서만이 이 계시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아가서가 성경이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32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아가서에서 &amp;#39;나의 사랑하는 자(도드)&amp;#39;와 &amp;#39;나의 사랑(라야)&amp;#39;은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화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아가서에는 남자와 여자, 두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각각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 이 호칭의 차이를 히브리어 원문에서 확인하면 화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먼저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 도드(דּוֹד)이다. 아가서 1장 14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할 때 등장하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바로 이 도드이다. 도드는 일관되게 여자가 남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my beloved on, 즉 나의 사랑하는 분이라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10절에서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는 주어는 도드, 즉 남자이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 나의 사랑인데, 히브리어로는 라야(רַעְיָה)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정리하면,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는 도드(나의 사랑하는 자)이고,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는 라야(나의 사랑)이다. 이 구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화자를 혼동하면 본문 전체가 엉뚱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신학적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화자를 정확히 알 때 아가서의 각 구절이 드러내는 신학적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반대로 화자를 혼동하면 신학적 의미가 왜곡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벨화 송이에 비유한 것이 술람미 여인의 고백인지, 아니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한 말인지에 따라 그 신학적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1장 14절은 술람미 여인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드리는 고백이다.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고벨화 송이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서 1장 14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말하는 화자는 여자, 즉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분을 모르면 1장 14절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고벨화 송이라고 말했다고 잘못 해석하게 된다. 실제로 성지 순례를 인솔하는 유명한 목사도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의 도드라는 호칭을 확인하면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건네는 말임이 분명하다. 원문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한 구절이 잘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 2장 1절의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는 구절도 화자 문제가 있다. 이 나는이 누구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성경에서 1인칭 단수 나는이라는 표현은 나 여호와는, 나 예수는처럼 하나님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장 1절의 나는이 예수 그리스도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문맥과 앞뒤 절을 면밀히 검토하면, 이 구절은 여자가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말로 볼 수도 있다.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므로 원문을 면밀히 살피고 다양한 번역을 참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아가서는 화자가 끊임없이 바뀌며 대화를 주고받는 구조이다. 이 대화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아가서의 신학적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화자를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 아가서 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첫걸음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2절부터 14절의 문맥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화자 분별이 더욱 명확해진다. 12절은 왕이 식탁에 앉았을 때 나의 나드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의 나드 기름이라고 말하는 화자는 여인이다. 왕이 식탁에 앉은 상황에서 자신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다음 13절에서도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도드)는 내 품에 있는 몰약 향 주머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4절에서 동일한 화자인 여인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고백한다. 12절부터 14절까지 화자는 일관되게 술람미 여인이며, 그녀가 신랑 솔로몬,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고벨화 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12-14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드 기름이 향기를 발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있어 내 품에 누인 몰약 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있어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히브리어 타부아흐(사과나무)가 숨&amp;middot;호흡을 뜻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3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가리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고백한다. 앞선 강의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이 사과나무는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나 사과나무라는 단어 안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 깊이가 드러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어로 사과나무는 타부아흐(תַּפּוּחַ)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나파흐(נָפַח)라는 동사이다. 나파흐는 숨을 불어넣다, 호흡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타부아흐의 1차 의미는 단순한 식물 이름이 아니라 숨, 호흡, 생명의 기운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이때 불어넣다가 바로 나파흐이다.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산 영이 되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호흡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요 20:22). 그 숨 역시 나파흐이다. 창세기의 창조에서 코에 불어넣으신 그 숨과, 요한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그 숨이 같은 단어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숨,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에서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은 숨이고 호흡이다. 히브리어로 바람, 숨, 영은 모두 루아흐(רוּחַ)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이 단어 하나가 자연 현상으로서의 바람, 생명의 기운으로서의 숨, 그리고 하나님의 영 모두를 포괄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바람처럼 오시고 숨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현존을 느낄 수 있다. 사과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루아흐, 이 생명의 숨이 우리에게 흘러온다. 성령은 바람처럼 임하신다. 이 바람 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창세기 3장 8절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장면에서도 바람이 등장한다. 개역개정 번역에는 그날 바람이 불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영 안에서 혹은 영으로라는 표현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영으로, 바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된 증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모든 증거를 종합하면, 사과나무를 뜻하는 타부아흐가 숨과 호흡을 어근으로 가진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과나무는 생명나무를 닮은 나무라는 시각적 유사성뿐 아니라, 히브리어 어근을 통해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을 상징한다. 사과나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유는 그분이 생명나무처럼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분이 생명의 숨결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요 14:6). 타부아흐가 숨 호흡을 뜻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 성령의 바람이 함께 온다. 그 바람이 우리 속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구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성령은 바람이다. 그 바람처럼 오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사과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호흡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엔게디 포도원은 어디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되심을 어떻게 상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의 엔게디 포도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엔게디가 어떤 곳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엔게디(עֵין גֶּדִי)는 히브리어로 두 단어가 합쳐진 지명이다. 에인(עַיִן)은 눈, 혹은 샘을 뜻하고, 게디(גְּדִי)는 새끼 염소를 뜻한다. 합치면 새끼 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다. 엔게디는 사해 바다 서편 광야 절벽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에 생명수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동그랗게 샘이 있어 물이 솟아오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엔게디라는 지명 자체가 이미 깊은 상징을 담고 있다. 눈처럼 생긴 둥근 샘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묘사된다. 엔게디의 샘이 바로 그 생명수의 예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생명수가 솟아오르는 엔게디에 포도원이 있었다. 아가서 8장 11절에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었다고 나온다. 그 포도원은 엄청난 규모였다. 포도원 열매로 은 천 개를 받아야 하는 큰 포도원이었다. 이 포도원이 솔로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 개를 바치게 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포도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다가 신약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고(요 15:5), 포도주는 그분의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엔게디 포도원은 하나님의 생명수가 솟아오르는 곳에서 자라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 포도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되심을 상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속전이란 몸값이다. 구속이란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그곳, 엔게디의 샘에서 자라는 포도원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신 생명이신 분이다. 그 생명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포도원,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기 위해 자신의 피를 속전으로 치르셨다. 이것이 엔게디 포도원이라는 두 단어 안에 담긴 속전의 신학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 바로 속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라는 장소가 성경에서 다른 곳에도 등장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엔게디 광야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사울이 굴 속에 있는 다윗을 알지 못하고 그 굴 앞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베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엔게디는 다윗이 원수인 사울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장소이다.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분은 원수된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목숨을 속전으로 내어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가 생명수의 샘이며 포도원과 연결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 둘의 연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의 두 차원을 드러낸다. 하나는 그분이 하나님 보좌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명으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즉 포도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져오시는 것과 그 생명으로 열매 맺으시는 것, 이 두 사역이 엔게디 포도원이라는 두 단어 안에 담겨 있다. 이처럼 아가서의 단어 하나하나는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관한 깊은 신학이 담겨 있다. 이것이 성경 연구에서 아가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상 24:4 다윗의 부하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리니 당신의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더라&lt;/p&gt; &lt;p&gt;엔게디 포도원의 주인이신 그분이 그 포도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속전으로 내놓으셨다. 이것이 아가서 1장 14절이 선포하는 진리의 핵심이다.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분이시다. 그 속전 사역의 배경이 엔게디 포도원이며, 그 사역의 내용이 고벨화요, 그 사역의 열매가 송이이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모든 것이 아가서 1장 14절이라는 단 한 구절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 놀랍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고벨화의 세 가지 색깔(빨강&amp;middot;흰색&amp;middot;노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신분을 계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כֹּפֶר)는 아가서에만 등장하는 식물 이름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가서 1장 14절과 4장 13절, 단 두 번만 나온다. 다른 어떤 성경 책에도 이 식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벨화가 아가서에 특별히 배치된 상징임을 의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4:13-14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샤프란과 창포와 계수나무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고벨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는 헤나(Henna)이고, 다른 하나는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곧 사막 장미이다. 두 견해 모두 고벨화의 정확한 정체를 단정 짓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온 추정이다. 그러나 이 두 식물 사이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색깔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헤나와 샤론의 장미는 각각 세 가지 색깔을 공유한다. 빨간색, 흰색, 노란색이다. 샤론의 장미를 보면 꽃잎은 선명한 빨간색이고, 꽃받침 부분은 흰색이며, 꽃의 중심 수술 부분은 노란색을 띤다. 헤나도 마찬가지이다. 헤나 꽃은 포도송이처럼 작은 꽃들이 모여 피는데, 그 안에 빨간색, 흰색, 노란색의 세 가지 색이 어우러져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세 가지 색깔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계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빨간색은 피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분이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분의 붉은 피가 우리의 속전이다. 고벨화의 빨간색은 피흘려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흰색은 순결과 무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우리의 속전이 될 수 있다. 고벨화의 흰색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노란색은 황금색이며 천국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새 예루살렘은 정금으로 만들어졌다. 길도 금이고, 집도 금이며, 면류관도 금이다. 천국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 천국의 실제이신 분, 천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노란색으로 상징된다. 고벨화의 노란색은 천국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렇게 고벨화의 세 가지 색깔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 방향으로 계시한다. 이 세 색깔의 조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은, 고벨화의 정체가 헤나든 샤론의 장미든 상관없이 두 가지 모두에서 동일한 세 색깔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하나님은 이 식물을 아가서에 배치하실 때 이미 이 색깔의 상징을 의도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이 세 색깔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반영하기도 한다. 빨간색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흰색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순결, 노란색은 성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세 색깔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담겨 있다. 아가서의 지혜 문학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이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피흘려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천국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가서의 저자는 이 세 가지 색깔을 가진 식물을 고의적으로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다면적 신분을 드러냈다. 이것이 지혜 문학의 정수라 불리는 아가서의 정교함이다. 겉으로는 사랑 시로 읽히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가장 정밀한 신학이 숨겨져 있다. 독자는 그 아름다운 언어에 감동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진리의 깊이에 경외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방식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택된 이 세 가지 색깔 속에 복음의 핵심이 모두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고벨화(헤나)의 향기와 염색 용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의 상징성은 색깔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벨화가 헤나라고 본다면, 헤나라는 식물이 가진 두 가지 특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향기와 염색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먼저 향기이다. 헤나는 그 향기가 매우 강하고 멀리 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그루의 헤나 나무에서 나오는 향기가 최대 2킬로미터까지 퍼진다고 한다. 작은 한 그루가 넓은 반경에 향기를 가득 채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 만국을 향기로 채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우리를 통하여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복음은 향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이 그분의 향기를 세상에 전파한다. 작은 헤나 한 그루의 향기가 2킬로미터를 가득 채우듯,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온 세상을 채운다. 이것이 선교이고, 이것이 복음 전파이다. 고벨화의 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으로 퍼져 가야 한다는 사명을 담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헤나 향기의 특성 중에 흥미로운 것이 또 있다. 헤나의 향기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가장 강하게 퍼진다. 꽃봉오리 상태에서는 향기가 약하다. 이것은 성도의 성숙과 연결된다. 신앙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갈수록, 그 사람을 통해 퍼져 나가는 복음의 향기도 더욱 강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수록 세상에 전해지는 향기도 강해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음으로 염색이다. 헤나는 고대 중동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염색 재료였다. 특히 결혼식 때 신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중동의 전통 결혼 문화에서 신부는 결혼 전날 밤 헤나로 손발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이것은 신부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다. 그래서 헤나는 중동 지방에서 신부의 식물이라 불린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벨화는 신부를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시는 분이다. 에베소서 5장 25절부터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신 것은 교회로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한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신부인 교회를 씻으시고, 성령으로 아름답게 꾸미시며, 흠 없는 신부로 만들어 가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헤나의 빨간색 염료가 신부의 손발을 물들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우리 죄인들을 정결하게 물들인다. 이사야 1장 18절에서 하나님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빨간 죄가 흰 순결로 바뀌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고벨화의 염색이 그 복음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헤나 염색의 또 다른 특성이 있다. 헤나로 물들인 색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오래 지속된다. 이것도 의미심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받은 구원의 표식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한번 주어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인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다. 이것이 고벨화 염색이 담고 있는 또 다른 신학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에바브로디도가 가져온 선물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표현했다. 성도의 헌신과 섬김이 향기롭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도들의 삶 자체가 세상에 향기를 전하는 것이다. 고벨화의 향기가 멀리 퍼지듯,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들의 향기가 삶의 현장에서 퍼져 나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벨화는 향기와 염색이라는 두 특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렇게 드러낸다. 그분의 복음은 온 세상으로 향기롭게 퍼져 나가고, 그분의 피는 죄인인 신부를 아름답게 물들여 흠 없는 신부로 만든다. 이것이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과 교회 산출을 어떻게 통합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 전체를 이제 하나로 연결해 보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과 교회 산출의 경륜이 통합되어 있다. 이 짧은 구절이 구원 역사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다. 단 열 글자 남짓의 한 구절이 이처럼 광대한 신학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한다. 어떤 인간의 지혜도 이렇게 압축적으로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먼저 엔게디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엔게디는 사해 광야 한가운데에 있는 샘이다. 그 샘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예표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근원이 되는 곳, 그곳이 엔게디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엔게디로부터 오신 분이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에서 나오신 독생자,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건져 내기 위해서이다. 이 목적이 바로 속전이다. 엔게디의 생명수 샘처럼, 그분은 생명 자체이신데 그 생명으로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러 오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다음은 포도원이다. 포도원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상징한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나타낸다. 이사야 5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포도원이라고 부르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사 5:7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예수님도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교회를 포도원으로 표현하셨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으로 많은 열매, 즉 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시기 위해 오셨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포도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는 고벨화이다. 고벨화의 세 가지 색깔이 말하는 것이 바로 속전의 내용이다. 빨간색으로 피를 흘려 죽으시고, 흰색으로 상징되는 죄 없으신 몸으로 우리의 속전이 되시며, 노란색이 상징하는 천국의 실제이신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고벨화는 속전 사역의 핵심을 색깔로 압축한 상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송이이다. 송이는 하나가 아니라 많음을 의미한다. 포도송이처럼 한 줄기에서 수많은 알갱이가 달려 있는 것이 송이이다. 헤나 꽃이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한 송이를 이루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산출된다. 그 자녀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하나의 송이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네 단어를 하나로 연결하면 이런 서사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의 구속 서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기도 하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가서 1장 14절 한 절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에덴의 생명나무(엔게디), 출애굽기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고벨화의 빨간색), 레위기에서 흠 없는 제물의 순결(고벨화의 흰색), 계시록에서 황금 성읍 새 예루살렘(고벨화의 노란색), 그리고 교회라는 포도원과 많은 성도라는 송이가 이 한 문장 안에 통합된다. 이것이 솔로몬이 지혜 문학의 정수로 남긴 아가서의 깊이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구절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구속 서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겠지만, 네 단어를 풀어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에덴의 생명수 샘(엔게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고벨화의 빨간색), 죄 없으신 순결(고벨화의 흰색), 새 예루살렘 황금 성읍(고벨화의 노란색), 교회(포도원),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송이), 이 모든 것이 1장 14절 한 문장 안에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한 구절이 이처럼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다면, 아가서 전체는 얼마나 더 큰 보화를 감추고 있겠는가. 이것을 알게 될 때 아가서를 읽는 눈이 달라지고, 성경 전체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아가서 한 구절에서 이처럼 풍성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성경의 모든 구절 안에 그와 같은 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이 보화를 캐내는 기쁨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된다. 솔로몬이 지혜 왕이었다면, 아가서는 그 지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정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마 12:42). 솔로몬의 지혜가 아가서에 담겼다면, 솔로몬보다 더 크신 그분의 지혜는 얼마나 더 크겠는가. 그 지혜를 이 시간 배우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러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성령의 감동 아래 남긴 이 책을 깊이 연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엔게디)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생명으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산출하시기 위해(포도원), 피흘려 죽으시고 죄 없으심으로 우리의 속전이 되어 천국의 실제를 우리에게 주시며(고벨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송이를 열매 맺으신다(송이).&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라 불리며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한다. 첫 번째 아담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숨을 받아 산 영이 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그 생명을 흘려보내심으로 수많은 생령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키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 이 다섯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과 교회 산출의 경륜을 통합하는 방식이 이것이다. 아가서 1장 14절이라는 단 한 구절이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풍성한 계시를 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여기에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사역이 오롯이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 하나님이나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성경이 된 이유에서 시작하여, 도드와 라야라는 히브리어 호칭의 차이, 타부아흐의 원어 의미, 엔게디의 상징, 고벨화의 세 가지 색깔, 헤나의 향기와 염색, 그리고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가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속전의 경륜을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가 성경이 된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진리가 다른 어떤 책보다 더 풍성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책이 아가서이다. 도드와 라야의 차이를 통해 화자를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 아가서 해석의 출발점이다. 원문을 모르면 유명한 목사도 화자를 혼동하게 된다. 성경 연구에서 원어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한 구절이 잘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지 순례를 다니며 오랜 세월 아가서를 가르쳐 온 목사도 화자를 혼동할 수 있다. 그만큼 아가서의 화자 분별은 쉽지 않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 도드와 라야를 구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도드라고 하고,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라야라고 한다. 이 두 단어만 알아도 아가서의 수많은 구절에서 화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다. 원어 연구가 아가서 해석의 열쇠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과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타부아흐가 숨과 호흡을 어근으로 가진다는 사실은, 사과나무가 단순히 생명나무처럼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의 숨결 자체를 상징함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나무이시고, 생명의 숨이시며,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엔게디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생명수가 솟아오르는 샘이다. 그 샘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예표이며, 그 생명의 근원에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숨어든 광야의 오아시스가 엔게디였고, 거기서 그는 원수를 용서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이 엔게디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우리의 원수가 되어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 그분이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이시다. 고벨화의 빨강, 흰색, 노랑의 세 가지 색은 피흘리신 그리스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 천국의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각각 계시한다. 헤나의 향기는 복음이 만방으로 퍼져 나가는 선교를 상징하고, 헤나의 염색은 그리스도의 피로 신부인 교회가 아름답게 단장되는 구원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송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속전 사역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산출되는 교회 산출의 경륜을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구절 아가서 1장 14절 안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풍성하게 계시된다.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의 복음을 향기처럼 세상에 전하며, 그분의 피로 아름답게 단장된 신부로 그날을 준비하며,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더 깊이 경배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24일(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_2026-06-23(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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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23T21:35:37+09:00</published>
		<updated>2026-06-23T22:52:42+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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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e9f_TUkraVA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깊고도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다.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보면, 이 책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가장 친밀하고도 압축적으...</summary>
	<content type="html">&lt;p&gt;&amp;nbsp;&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e9f_TUkraVA&lt;/p&gt; &lt;div class=&quot;youtube-div dtmseditor-youtube-embed&quot;&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e9f_TUkraV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div&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039;utf-8&#039;&gt;&lt;meta name=&#039;viewport&#039; content=&#039;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039;&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Arial,sans-serif;font-size:16px;line-height:1.75;margin:0;padding:0;color:#222;background:#fff;} h2{font-size:17px;font-weight:700;color:#38688c;margin:3.5em 0 1em 0;padding:0;} p{margin:0 0 1em 0;padding:0;} p.bodypara{} p.verse{font-weight:700;color:#854ba0;} .date{margin-top:1.8em;} .wrap{margin:0;padding:0;} &lt;/style&gt; &lt;div class=&quot;wrap&quot;&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깊고도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다.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보면, 이 책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가장 친밀하고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시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아가서는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단지 남녀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피조물인 인간을 자신의 짝과 신부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9).&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말씀을 풀어 주셨다(눅 24:4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 역사나 도덕 교훈의 책이 아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와 그림자와 상징으로 미리 보여 주는 책이다. 유다와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 고난받는 왕, 예언자적 왕, 목자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아들 솔로몬은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솔로몬을 통한 그리스도의 예표는 역사서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솔로몬이 남긴 지혜문학, 특히 아가서는 그가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는 사실의 내적 의미를 보여 준다. 외형적인 성전은 돌과 나무와 금으로 지어졌지만, 신약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 곧 교회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성전이 어떻게 영적 신부로 산출되는지를 노래한다. 이 책에서 예수님은 1)왕이시며 2)창조주이시고, 3)속전이시며 4)목자이시고, 5)포도원의 주인이시며 6)동산지기이시고, 7)다시 오실 재림주이시며, 마지막으로 8)신랑이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번 말씀의 초점은 그중에서도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우리를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는 놀라운 신분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술람미 여인과 신랑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고, 그 생명 분배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는 신분으로 세워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h2&gt;2. 아가서는 예수님의 어떤 신분들을 보여 주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단순히 한 가지로만 말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이 여러 겹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중 핵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신분은 여덟 가지다. 첫째, 그분은 왕이시다. 둘째, 창조주이시다. 셋째, 속전이시다. 넷째, 목자이시다. 다섯째,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여섯째, 동산지기이시다. 일곱째, 재림주이시다. 여덟째, 신랑이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먼저 아가서의 솔로몬은 왕이다.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 속의 왕이 아니라, 장차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아가서 3장에는 왕의 가마와 왕관, 시온의 딸들과 예루살렘의 딸들이 등장한다. 왕은 사랑하는 여인을 데려오기 위해 가마를 보낸다. 그 가마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졌고, 기둥은 은이며, 바닥은 금이며, 자리는 자주색이다. 이는 왕의 영광과 신부를 향한 존귀한 초청을 보여 준다(아 3:9~1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3:9~11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왕은 단지 통치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신부를 부르시는 왕이다. 이것이 아가서의 특징이다. 시편은 예수님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보여 주고, 요한계시록은 그분을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러 가마를 보내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왕은 종말의 심판주이면서 동시에 혼인 잔치의 신랑 왕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예수님은 또한 창조주이시다. 이것은 이번 말씀의 핵심이다.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술람미 여인에게는 &amp;lsquo;내 어머니의 아들들&amp;rsquo;이 있으나, 신랑은 &amp;lsquo;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amp;rsquo;가 아니라고 말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의 근원이 같지 않음을 암시한다. 신부는 피조물로부터 시작하지만, 신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분은 속전이시기도 하다. 아가서 1장 14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amp;ls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squo;라고 부른다. &amp;lsquo;고벨화&amp;rsquo;는 히브리어 계열에서 &amp;lsquo;고페르&amp;rsquo;와 연결되고, 그 뿌리는 &amp;lsquo;카파르&amp;rsquo;, 곧 덮다, 속죄하다,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신랑은 피를 흘려 신부를 속량하실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아가서는 예수님의 신분을 단순히 교리적 명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꽃과 향기, 포도원과 동산, 왕의 가마와 신부의 고백, 오빠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감추어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는 자는 겉의 사랑 노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아야 한다.&lt;/p&gt; &lt;h2&gt;3. 왜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신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번 말씀의 중심 구절은 아가서 8장 1절이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amp;lsquo;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amp;rsquo;이라고 한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신랑이 실제로는 그녀의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라는 뜻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아 8: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술람미 여인에게는 오빠들이 있다. 아가서 1장 6절에서 그녀는 &amp;lsquo;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amp;rsquo;고 말한다. 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는 그녀를 &amp;lsquo;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amp;rsquo;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도 외동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계가 단순한 육신의 혈연관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영적인 가족 구조가 숨어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같은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물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랑은 그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신약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증언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고 말한다(요 16:27~2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6:27~28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으로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그분을 &amp;lsquo;독생하신 하나님&amp;rsquo;이라고 증언한다(요 1:1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아들 되심을 피조물의 아들 됨으로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신 분이다. 빌립보서 2장은 그분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한다(빌 2:6~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도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한다(히 1:3).&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lt;strong&gt; 아가서 8장 1절은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신랑과 신부의 근원적 차이가 감추어져 있다. 신부는 피조물이다. 오빠들도 피조물이다. 그러나 신랑은 피조물이 아니다. 신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다&lt;/strong&gt;. 이것이 회개와천국복음선교회가 이 시대에&amp;nbsp; 전하고 있는 한 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곧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lt;/p&gt; &lt;h2&gt;4. &amp;lsquo;출생&amp;rsquo;의 의미는 예수님과 우리에게 어떻게 다른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의 아들 됨은 다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언어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헬라어에는 출생을 말하는 중요한 동사들이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amp;lsquo;겐나오&amp;rsquo;가 사용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amp;lsquo;틱토&amp;rsquo;가 사용된다. 또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는 &amp;lsquo;모노게네스&amp;rsquo;다. &amp;lsquo;모노&amp;rsquo;는 유일함을, &amp;lsquo;게네스&amp;rsquo;는 출생 혹은 기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lt;strong&gt; 성도들은 본래 피조물이다. 우리는 창조되었고, 타락했으며, 죄와 사망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lt;/strong&gt;. 우리의 아들 됨은 은혜로 주어진 생명의 참여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 반면에 예수님의 아들 되심은 아버지의 본체에서 나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다.&amp;nbsp;요한복음 5장 26절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요 5:2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아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lt;strong&gt;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아버지의 생명을 본질적으로 가지신 분&lt;/strong&gt;이다. 그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골로새서 1장은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5~1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amp;lsquo;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amp;rsquo;라는 표현을 피조물의 첫 번째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기원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분은 피조물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있게 하신 창조주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예수님의 출생과 우리의 출생은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다시 그분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lt;/strong&gt;. 이 차이를 잃어버리면 올바른 기독론이 무너진다. 예수님을 피조물로 만들면 구원도 무너지고, 신부의 신분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께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속죄와 생명 분배와 신부의 산출이 가능하다.&lt;/p&gt; &lt;h2&gt;5. 술람미의 오빠들은 왜 타락한 천사를 상징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오빠들은 단순한 친오빠로만 볼 수 없다. 아가서 1장 6절에서 술람미는 &amp;lsquo;내 어머니의 아들들&amp;rsquo;이 자신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아 1: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는 그녀를 &amp;lsquo;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amp;rsquo;이라고 부른다(아 6:9).&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오빠들이 있는데 왜 외동딸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문학적 모순이 아니라 영적 구조를 암시한다. 오빠들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나, 신부와 같은 방식으로 신랑과 하나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설교의 관점에서 이 오빠들은 의붓오빠들이며, 영적으로는 먼저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 그중에서도 타락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 그녀는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을 죄와 수고와 억압 아래 두고, 인간이 자기 생명과 사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한 상황을 보여 준다. 창세기에서 뱀은 하와를 속였고,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다. 그 결과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 수고해야 하는 상태에 들어갔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술람미가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졌다는 말도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다. 죄와 수고와 억압 가운데 놓인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준다. 그녀는 원래 아름다운 존재이나, 오빠들의 지시 아래 포도원에서 수고하며 그을린 자가 되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신랑은 오빠들과 다르다. 오빠들은 신부를 부리고 억압하지만, 신랑은 그녀를 찾아와 데려간다. 오빠들은 포도원에서 수고하게 하지만, 신랑은 가마를 보내어 왕의 자리로 부른다. 오빠들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만, 신랑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타락한 천사들과 창조주 그리스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점에서 귀신론도 연결된다. 악한 영들은 사람을 억압하고, 상처와 죄와 수고의 구조 안에 묶어 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억압에서 해방하시고 자신의 생명 안으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신부가 되려는 성도는 오빠들의 지배, 곧 타락한 영들의 억압에서 벗어나 신랑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lt;/p&gt; &lt;h2&gt;6. 사과나무는 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신랑을 설명하는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사과나무다. 술람미는 남자들 중에 자기 사랑하는 자가 숲속의 사과나무 같다고 고백한다. 그 그늘에 앉아서 기뻐했고, 그 열매는 입에 달았다고 말한다(아 2:3).&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사과나무는 단순한 과일나무가 아니다. 설교의 흐름에서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를 두셨다. 인간은 원래 생명나무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 왕노릇하는 자로 자라가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으며,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서 쫓겨났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아가서에서는 신부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신랑을 만난다. 아가서 8장 5절은 &amp;lsquo;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amp;rsquo;고 말한다(아 8: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사과나무 아래는 생명과 출생과 깨움의 장소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으로 계시하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6:35, 11:25, 14: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의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숲속의 여러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가 특별한 것처럼, 많은 남자들 가운데 신랑은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 그늘은 안식이고, 그 열매는 생명이며, 그 아래에서 신부는 깨어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자신과 마주 볼 짝을 얻기를 원하셨다. 그 짝은 단지 피조물 상태로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존재다. 그래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산출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5절에서 신부는 건포도와 사과로 자신을 시원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건포도와 사과는 모두 생명의 공급과 사랑의 병을 치유하는 상징이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 때문에 병이 났고, 신랑의 생명 공급으로 회복된다.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 없이는 신부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보여 준다.&lt;/p&gt; &lt;h2&gt;7. 그리스도의 생명 분배는 신부를 어떻게 산출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속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속전이시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또 하나의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생명 분배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2:2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그 안에 있던 생명이 해방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명 분배다.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해방되어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분배된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5:4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생명 분배의 결과다. 신부는 원래 피조물이다. 그녀는 오빠들의 지배 아래 있었고, 포도원에서 수고했으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신랑이 그녀를 찾아오고, 사랑으로 부르고, 가마를 보내고, 결혼을 통해 신분을 바꾸신다. 그러면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포도원지기가 아니다. 그녀는 신부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4장 8절 이후 신부의 신분은 확연히 달라진다. 신랑은 그녀를 &amp;lsquo;내 신부&amp;rsquo;라고 부른다. 그리고 곧이어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고 부른다(아 4:8~9).&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아 4:8~9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squo;신부&amp;rsquo;는 혼인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amp;lsquo;누이&amp;rsquo;는 생명의 관계를 말한다. 신랑과 신부는 단순히 외적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같은 생명을 나누는 가족 관계로 들어간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다(고전 6:1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신부의 산출이다. 교회는 인간 조직으로 산출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 분배로 산출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분의 생명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신부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단순히 죄 사함만 받은 자로 멈추면 안 된다. 속죄를 받은 후에는 생명을 받아 자라야 한다. 그 생명이 자라면 신부의 인격이 형성된다. 신부의 인격이 형성되면 신랑의 뜻과 생각과 감정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신부의 길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속죄와 생명 분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죄는 죄값을 처리하는 것이고, 생명 분배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낳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룬다. 피 흘림으로 죄가 처리되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이 해방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로 씻김받아 정결하게 될 뿐 아니라, 생명으로 자라 신부의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아가서는 이 과정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랑의 관계와 혼인의 언어로 보여 준다.&lt;/p&gt; &lt;h2&gt;8. 신부는 왜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로 불리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가장 놀라운 표현 가운데 하나는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다. 신랑이 신부를 &amp;lsquo;누이&amp;rsquo;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관계를 말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천사는 섬기는 영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났다고 말하며, 그분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증언한다(히 2:1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인간의 존귀함을 보여 준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천사는 능력이 많고 영적 세계를 오가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로 불릴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처음부터 신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여인이다. 오빠들에게 눌려 있고, 햇볕에 그을렸으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신랑은 그녀를 다르게 본다. 신랑은 그녀 안에 장차 신부가 될 가능성을 본다. 그는 그녀를 부르고, 데려오고, 사랑하고, 신분을 바꾼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구원론의 깊은 흐름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신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속전이 되어 피를 흘리셨고,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우리를 자신의 생명을 가진 자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신부는 은혜로 시작하지만, 그 은혜 안에서 반드시 준비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고 말한다(계 19:7~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신부는 준비되어야 한다.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말만으로 혼인 잔치의 신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해야 하고,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명으로 빚어져야 한다. 또한 신랑이 하시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아가서 후반에서 신부는 신랑이 양떼를 치고 백합화를 꺾는 일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도 신랑의 일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는 표현은 성도의 신분 상승을 보여 준다. 피조물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가족이 되고, 신부가 되고,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놀라운 결론이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 신분은 장차 천국에서 실제로 드러난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천국에서의 신분과 영광은 이 땅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빚어졌는가와 연결된다. 신부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이며, 왕의 가마에 태워질 자이고, 왕의 일에 동참할 자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부론은 단순한 감상적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성도의 종말론적 준비와 직결된다. 오늘의 회개와 말씀 순종과 영적 전쟁은 장차 신부의 옷과 신분과 자리로 연결된다.&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으로 산출되는 신부의 비밀을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8장 1절은 신랑과 신부가 같은 피조물의 출생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님을 보여 준다. 신부에게는 어머니의 젖을 함께 먹은 오빠들이 있으나, 신랑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신랑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며, 사람 가운데 뛰어난 성인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본체에서 나오신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본래 피조물이며 죄와 사망과 악한 영들의 억압 아래 있던 자였음을 알아야 한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 의해 포도원지기로 세워지고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인간은 타락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존재였다. 그러나 신랑이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속전이 되셨고, 생명나무와 같은 분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으며, 피조물인 우리를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 부르실 만큼 존귀하게 세우셨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단지 구원자로만 좁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왕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속전이시며 생명나무이시고, 우리를 자신의 짝으로 세우시는 신랑이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우리를 신부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각과 감정과 뜻에 맞추어 자라가야 한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고, 말씀과 성령의 생명 공급 안에서 신부의 인격을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비밀은 성도의 미래를 밝힌다. 우리는 천사보다 연약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와 신부와 왕노릇할 자로 세워질 수 있다. 이 신분을 알 때 성도는 대강 살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은사와 물질과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경륜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창조주이신 신랑의 사랑 안에서 &amp;lsquo;내 누이, 내 신부&amp;rsquo;라 불릴 만큼 정결하게 준비되어 새 예루살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body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6월 23일(화)&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아가서에 나타난&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lt;/strong&gt;&amp;nbsp;중 특히&amp;nbsp;&lt;strong&gt;창조주&lt;/strong&gt;로서의 면모를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술람미 여인과 오라비들의 관계를 통해&amp;nbsp;&lt;strong&gt;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인 그리스도의 본질적 차이&lt;/strong&gt;를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를&amp;nbsp;&lt;strong&gt;신부이자 가족&lt;/strong&gt;으로 받아들이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아가서의&amp;nbsp;&lt;strong&gt;사과나무&lt;/strong&gt;를 생명나무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신&amp;nbsp;&lt;strong&gt;독생자 그리스도&lt;/strong&gt;가 어떻게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분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분배하셨는지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가 그리스도의&amp;nbsp;&lt;strong&gt;희생적인 사랑&lt;/strong&gt;을 깨달아 그분과 시선을 맞추고, 주님이 맡기신 사역에 동참하는&amp;nbsp;&lt;strong&gt;영적 연합&lt;/strong&gt;의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인포그래픽_아가서_속_창조주_예수_그리스도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2899f1925a3bfe00ec61140950866dc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da6f5759c1a4ff64a3423317d58689b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90383cc5e549a9f9353f0b8291fbd91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90eabc8207f03578cab261795a0d6d8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bc3ccb6997122d743850be9c5340c71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029a5d678f3299e847f7dc8107a7003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f4b80b43b295920e721da22b7038f50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337b984bca4a848b42ac657b644e62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07a073b67717e798b68973fa47b635c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1e04425118954cd18d7cb1003456bbe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1bbf2b2454d304cf0755f2e280e3e4b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3c2a0348f9037054e85b283ec821848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595fbcbb2d85dd8f5db2f7fa775597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Song_of_Songs_Deep_Revel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eab7e700ef74eaf5810f92570ff4eb5d.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p&gt; &lt;/div&gt; &lt;p&gt;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0)]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2)( 아가서 4:9~5:2 )&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 { margin: 0; padding: 0; box-sizing: border-box;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시가가 아니다.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관한 가장 심오한 계시가 문학의 형식으로 숨겨져 있다. 지난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 가운데 첫 번째인 새 예루살렘의 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신분인 창조주에 관하여 아가서 8장 1절의 오빠들과 솔로몬의 어머니 차이를 통해 그 서론을 열었다. 이 시간에는 그 신학적 탐구를 더 깊이 이어가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이다. 우리가 그분을 창조주로 알 때, 그분 앞에 진정한 경배가 가능하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신부로 취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것은 전적인 하강(下降)이며, 무한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깊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분은 단순히 탁월한 인간 스승이거나 선지자 중 하나가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그분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선언하고, 히브리서 1장 3절은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증언한다.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6절은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아가서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건네는 고백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 속에 숨겨진 상징들, 그리고 사과나무와 오빠들의 이미지 속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아가서는 한 편의 연애 시가로만 읽히고 만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빛으로 아가서를 읽을 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가 찬연히 빛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 8장 1절의 오빠들의 의미와 사과나무의 상징, 그리고 결혼 이후 신부를 향해 건네는 신랑의 호칭들을 통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아가 술람미라는 이름과 신랑의 깃발이 드러내는 신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아가서 8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어떻게 계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8장 1절은 아가서 전체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밀도 높은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은 신부가 신랑에게 건네는 말로, 겉으로는 친밀한 가족 관계를 소망하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1-2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의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포도주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부는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랑이 그녀의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는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존재들이 아니다. 오빠들은 그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았지만, 신랑은 그렇지 않다. 신랑의 근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 한 문장이 드러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8장 2절에서 신부는 계속해서 신랑을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한다. 나를 가르치셨던 내 어머니 집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집은 신부가 태어난 곳, 즉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생명의 기원을 가리킨다. 신부는 신랑에게 그 기원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신랑은 이미 그 어머니와는 다른 근원에서 나오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신랑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것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해명하는 핵심 질문이다. 요한복음 16장 27절부터 28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선언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으로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신 분, 이것이 그분의 근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6:27-28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느니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복음 1장 18절은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여기서 독생하신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인데, 모노는 오직 하나뿐인 것을 뜻하고 게네스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는 의미의 동사 겟나오에서 온 말이다. 즉 독생자란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출생한 자를 가리킨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다는 동사 틱테와 구분되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오신 유일한 분임을 강조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에 우리 인간과 천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아가서에서 어머니의 젖을 빤 오빠들은 바로 이 피조물, 특히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도 어머니인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이다. 술람미 여인도 같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신랑인 솔로몬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다. 그는 다른 근원을 가지신 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아가서 8장 1절이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오빠들은 피조물이고, 신랑은 창조주이시다. 이 차이가 아가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기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 신랑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아가서 8장 1절의 한 문장이, 수많은 신학적 오류를 방지하는 울타리가 된다는 것이 놀랍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가장 아름다운 문학 형식으로 보존하는 신학적 계시이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단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뛰어난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나오신 독생자이시다. 어떤 피조물도, 아무리 거룩하고 아무리 능력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창조주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6절은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선언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헬라어 &amp;#39;헤테로스&amp;#39;와 &amp;#39;알로스&amp;#39;의 차이로 보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약 헬라어에는 다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동사가 있다. 헤테로스와 알로스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의 차이를 뜻한다. 사과와 사과 사이의 차이처럼,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서로 다른 개체임을 나타낸다. 반면에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를 가리킨다. 사과와 자동차처럼, 범주 자체가 다른 이질적인 차이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의 차이는 알로스의 차이이다. 그들은 같은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며 서로 다를 뿐이다. 오빠들은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비유하자면, 같은 사과 품종 중에서도 홍옥과 부사가 다른 것처럼, 피조물 안에서의 다름이다. 이 알로스의 다름은 서로 연합할 수 있는 다름이다. 타락한 천사와 인간은 모두 피조물이지만,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피조물로서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자들이다. 아가서에서 오빠들이 여동생과 함께 같은 어머니의 품에 있었던 것처럼, 천사와 인간은 같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어머니의 젖을 빨았던, 즉 동일한 피조물의 범주에 속한 존재들이다. 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인간이다. 모두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같은 종류에 속하며, 그 안에서 서로 다를 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신랑과 신부의 차이는 헤테로스의 차이이다.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고, 신부인 우리는 피조물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이다. 어떤 피조물도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거룩해지고,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받아도 창조주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고, 그분은 영원히 창조주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분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 즉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선언했다. 빌립보서 2장 6절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조물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 성육신이 그분의 신성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어도 그분은 여전히 창조주이시다. 동시에 그분은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형제로, 자녀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이 아가서가 노래하는 복음의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신앙이 바로 선다.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모르면 우리는 그분을 단순히 위대한 인간으로만 보게 된다. 위대한 인간에게는 존경을 드릴 수 있지만, 절대적 경배는 드릴 수 없다. 절대적 경배는 오직 창조주에게만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 앞에 온전한 복종을 드릴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와 다른 종류의 분이심을, 헤테로스의 차이를 가진 분이심을 알 때, 비로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그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이 고백이 나온 것이다. 그것이 바른 신앙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난 선생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이 신학적 진리를 시의 언어로 표현한다. 신랑과 신부 사이의 근원의 차이,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오빠들과 신랑 사이의 차이로 드러낸다. 이 차이가 있기에 신랑의 사랑이 더욱 놀랍다. 아가서는 지혜 문학의 정수라 불릴 만하다. 이 책 한 권 안에 창조론, 구원론, 종말론, 기독론이 모두 담겨 있다.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가 성령의 감동과 만났을 때, 이처럼 심오하고 아름다운 책이 탄생한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신부로 취하신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고 가장 깊은 은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의미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창조주 되심의 신학적 근거이다. 그분은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 이 차이가 그분을 모든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구별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복음 5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 자체를 이어받아 나오신 존재임을 의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헬라어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고 할 때는 겟나오라는 동사를 쓰고,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다고 할 때는 틱테를 쓴다. 독생자를 뜻하는 모노게네스는 겟나오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낳아진 유일한 아들이시다. 어머니를 통한 출산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직접 나오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그대로 가진다. 손오공이 자신의 털 하나를 뽑아 변신시키면 똑같은 손오공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를 그대로 담고 계신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이것을 정확히 표현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은 아버지로부터의 직접적인 출생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새로운 탄생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며, 그분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선언한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그 생명이 흩어져서, 그 생명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게 된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 12:24),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산출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명을 산출하시고, 그 산출된 생명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그분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구속의 목적이며, 역사 전체의 목적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진리가 분명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다. 그분이 단순히 선한 인간이거나 뛰어난 선지자라면, 우리는 그분께 최고의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빌립보서 2장은 이것을 이렇게 선언한다. 결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다(빌 2: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분으로서 영원히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 아들로부터 생명을 분배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피조물이다. 이 출생의 차이, 이 근원의 차이가 영원히 유지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단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가족이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도 그 가문의 혈통을 가진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구별이 신앙의 겸손을 지켜 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별이 신앙의 경이로움을 보존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동등이 아니라, 창조주의 은혜로 주어진 가족 됨임을 알 때, 그 가족 됨의 놀라움이 더욱 커진다.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분은 영원히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이 창조주의 생명을 받아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신부로, 누이로,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찬양의 이유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급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은혜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히 2: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받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아가서의 사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어떻게 상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사과나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사과나무는 단순한 과수원의 나무가 아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사과나무가 처음 등장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장은 봄이 온 계절의 배경으로 시작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초청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이전 배경인 1장에서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던 처녀였다. 그 처녀가 왕을 만나 그 안에서 생명나무를 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3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이렇게 묘사한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신랑을 사과나무에 비유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3-5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이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나를 힘을 돋우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랑을 왜 사과나무에 비유했을까?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생명나무를 본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그 나무를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표현으로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창세기 2장에 따르면 에덴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에서 창조되었다. 아가서 8장 5절은 어머니가 술람미 여인을 사과나무 아래에서 낳았다고 말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냐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사과나무 아래는 곧 생명나무 아래이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우리가 탄생했다는 의미이다. 창세기의 동산에서 생명나무 아래 인간이 지어진 것처럼, 우리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3장 4절에는 신부가 신랑을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이끌어 가려 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잉태한 이의 방이 곧 생명나무 아래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3:4 그들을 순찰하는 자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의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생명임을 여러 번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다. 생명나무이신 그분이 아가서에서 사과나무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과나무의 열매는 내 입에 달았다는 신부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가 느끼는 영적 달콤함의 고백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 결과는 수치와 두려움과 죽음이었다. 그러나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먹을 때 그 결과는 생명이요 기쁨이요 달콤함이다. 아가서의 신부가 사과나무의 열매가 달았다고 고백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받은 자의 영적 체험의 고백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는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은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길이 다시 열렸다. 그분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선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 22장에도 등장한다. 새 예루살렘 성의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계 22:2). 아가서에서 신랑을 사과나무라고 표현한 것과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가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생명나무이시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그 나무의 열매로 우리가 살며, 마지막 날에도 그 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lt;/p&gt; &lt;p&gt;&amp;nbsp; 그러므로 그 열매를 먹은 자는 건포도로 힘을 얻고 사과로 시원하게 된다. 생명나무의 12가지 열매처럼(계 22:2), 그 생명이 우리 영혼의 온갖 필요를 채워 준다. 사과나무가 생명나무의 상징이고, 생명나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해할 때, 아가서의 이 아름다운 고백이 얼마나 깊은 신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오빠들과 술람미 여인은 누구를 상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 등장하는 오빠들의 정체는 아가서 해석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 이 오빠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술람미 여인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신랑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분명해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6절은 오빠들이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화를 내어 포도원지기로 삼았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다. 아버지가 다른 오빠들이라는 뜻이다. 아가서 6장 9절에서 신랑은 술람미 여인을 그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 어떻게 외동딸인가? 아버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오빠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가 따로 있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가 다른 아버지를 통해 낳은 외동딸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의 유일한 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오빠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들이고, 술람미 여인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오빠들의 아버지는 타락한 천사들의 아버지인 사탄의 무리이고, 술람미 여인의 아버지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차이가 오빠들을 의붓오빠로 만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빠들은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을 상징한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를 억압하고 종살이 시키는 자들이 되었다. 술람미 여인을 바알하몬의 포도원으로 보내어 땡볕에서 일하게 만든 것은, 귀신들이 인류를 죄와 고통 가운데 억압해 온 역사를 그린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8장 11절에서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포도원을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었다. 오빠들은 그 포도원지기를 계약한 것으로 보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 개를 바치게 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중요한 진실을 드러낸다.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솔로몬이다. 그러나 지키는 자들, 즉 오빠들이 그 포도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사탄과 귀신들이 세상 임금처럼 활동하며 사람들을 억압한다. 요한복음 12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표현으로 사탄을 가리키셨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 이 세상 임금의 권세는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러나 그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솔로몬이다. 마치 귀신들이 이 땅에서 일시적인 권세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오빠들은 잠시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들일 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 여인은 인류를 상징한다. 그녀는 피조물로서 오빠들인 타락한 천사들의 억압 아래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 고통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가 겪어 온 죄와 죽음의 종살이를 나타낸다.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땡볕에 타는 그 모습이 바로 타락 이후 인류의 현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왕이 그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가마를 보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이다. 귀신들의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창조주이신 그분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의 세계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오직 사랑 때문에.&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결혼 후 신부를 &amp;#39;나의 누이&amp;#39;라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4장 8절부터 신랑은 신부를 내 신부야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더 놀라운 호칭이 등장한다. 내 누이 내 신부야. 신랑이 신부를 누이라고 부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4: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왜 신부를 누이라고 부르는가? 이것은 단순한 친밀함의 표현이 아니다. 그 안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에게 한 번도 여동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빠들에게 그녀는 그냥 일꾼이었다. 그런데 왕인 신랑은 그녀를 내 누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가? 신랑이 그녀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같은 피를 나눈 자, 같은 생명을 가진 자를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제요 자매로 삼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에 타락한 천사들인 오빠들은 이 생명 분배에 참여하지 않는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여동생이라 부르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 2:11). 히브리서의 이 선언이 아가서의 내 누이라는 호칭과 정확히 일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신부의 이름 자체가 이 연합의 실체를 드러낸다. 아가서 6장 13절에서 신부는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이다. 솔로몬과 술람미, 두 이름의 어근은 동일하다. 모두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왔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히브리어 에하드, 즉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리라 너희가 마하나임 춤추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어찌하여 보려 하느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가 신부를 내 누이라 부르시는 것은 구원이 완성된 관계의 표현이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한 생명 안에 연합된 가족의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 가족이 됨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주의 가족이 된다는 것, 이것은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그분은 누구든지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다. 그분의 형제와 자매는 단순히 혈연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분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의 진정한 가족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신부가 신랑의 누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됨으로써 그분의 참된 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한 천사들은 이 가족에 들어올 수 없다. 히브리서 1장 14절은 천사들을 섬기는 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누이가 되는 놀라운 신분을 얻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한때 포도원에서 일하던 이름 없는 처녀가 왕의 신부가 되고, 왕의 형제가 되고, 왕의 이름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지이다. 죄로 인해 멀어졌던 그 관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신부와 누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로 완성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술람미라는 이름과 신랑의 깃발은 신부의 사명을 어떻게 드러내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잔치집, 깃발, 건포도, 사과 같은 소품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잔치집과 깃발은 신부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핵심 상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4절에서 신랑은 신부를 포도주의 집, 곧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라고 신부가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4 그가 나를 잔치집으로 이끌어 들이고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의 깃발은 사랑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가리켜 내 피라고 말씀하셨다. 잔치집으로 신부를 이끌어 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림이 이루어지는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로 신부를 인도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신부에게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깃발이라는 단어도 심오하다. 군대가 원수의 진영을 점령하면 거기에 깃발을 꽂는다. 신랑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원수의 진영에 깃발을 꽂는 승리의 사랑이다. 사탄이 지배하던 이 땅에 십자가를 세우심으로, 그 진영에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꽂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에 신부를 동참시키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라는 이름은 단순히 솔로몬의 여성형이 아니다. 솔로몬은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온 이름이다. 그리고 술람미도 같은 어근에서 온 이름이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의 뿌리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이다. 그분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이고, 그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라는 이름이 솔로몬의 여성형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말한다. 그분이 이루신 화평을 우리가 함께 나눈다. 신랑의 이름이 신부의 이름이 되는 것처럼, 그분의 화평이 우리의 화평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의 이름 그리스도를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포도주의 집이라는 표현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아가서의 맥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아가서 1장 2절에서 신부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으니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포도주와 같이 기쁨을 준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사랑이 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신부의 고백이다. 신랑이 신부를 포도주의 집으로 이끌어 들인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죽음과 피를 통해 신부에게 생명을 주실 것임을 미리 보여 주시는 행위이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신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도주처럼 쏟아 부으신다는 것, 이것이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의 절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2 그가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가 아가서의 마지막 장에서 신부는 변화한다. 처음에 그녀는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신랑의 사랑을 받고 함께 성장하면서, 마침내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변한다. 6장과 7장에서 신부는 신랑이 백합화 사이에서 양 떼를 먹이는 동산에 함께 있다. 신랑이 하는 일, 양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의 일을 신부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부의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분이 바라보시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5장에서 신부는 밤중에 신랑이 문 밖에 와서 두드리는데 문을 열지 않는 실수를 한다. 그리고 나중에 신랑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 장면은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영적 방황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신랑의 뜻보다 자신의 편안함을 택하는 신부가, 그 고통을 통해 성장하여 결국 신랑의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변화된다. 이 성화의 여정이 아가서 전체를 통해 그려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마지막에서 신부는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아 8:14). 이것이 성숙한 신부의 고백이다. 처음에는 신랑의 사랑을 받기만 하던 신부가, 이제는 신랑의 재림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의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라는 외침이 바로 이 아가서의 신부의 고백과 연결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루어질 때, 신부는 단순히 잔치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과 함께 백마를 타고 원수를 이기는 군대로 나타난다(계 19:14). 승리의 깃발을 꽂는 영적 군사가 된다. 이것이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이다. 신부가 신랑과 함께 왕 노릇 하고,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아가서의 신부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여정 전체를 담은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억압받던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을 받아 신부가 되고, 결국 그분과 함께 원수를 이기는 군대가 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술람미의 이름을 가진 신부들이여, 신랑이 오실 때를 준비하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8장 1절과 사과나무의 상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살펴보았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빤 피조물들, 특히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하고, 신랑은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은 자, 즉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신 분임을 확인하였다. 헤테로스와 알로스라는 헬라어의 구분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차이는 같은 종류 안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차이임을 배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 아래에서 우리가 탄생했음을 아가서 8장 5절이 선언한다.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친히 자신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형제, 자매가 된다. 결혼 후 신부를 내 누이라 부르시는 그분의 호칭이 이 생명 분배의 현실을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라는 이름이 솔로몬의 여성형임을 알 때, 신랑과 신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그분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결국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처음에는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수동적 존재였지만, 마침내 그분과 함께 원수의 진영에 깃발을 꽂는 영적 군사로 서게 된다. 이것이 신부가 받은 사명이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서로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랑은 함께 일어나 싸우는 사랑이다. 신랑의 사랑을 받은 신부는 신랑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신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의 확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가는 과정이다. 오늘 공부한 내용들이 단순히 머릿속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온전히 따르는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는 이 진리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할 때, 비로소 아가서의 신부처럼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는 간절한 고백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임을 알 때, 그 무한한 거리를 건너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의 사랑이 더욱 경이롭게 느껴진다. 포도원에서 억압받던 처녀를 왕이 친히 찾아와 신부로 데려가신다는 이 이야기 속에,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기 위해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이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모든 진리가 아가서라는 한 편의 사랑 시가 안에 숨겨져 있었다. 성경 전체를 꿰뚫는 시각으로 아가서를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과 그분의 사랑의 깊이가 찬연히 빛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취하시고, 누이라 부르시며, 함께 통치하는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는 이 놀라운 경륜을 마음 깊이 새길 때, 우리는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신앙은 사랑이다. 창조주의 사랑에 응답하는 피조물의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을 닮아 가고, 점점 더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가며, 마침내 그분의 신부로 완성된다. 아가서의 마지막 고백처럼,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는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 삶을 채울 때, 우리는 이미 그분과 깊이 연합된 신부가 된 것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이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함께 하며, 그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된다. 이것이 아가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본질이다. 솔로몬이 지혜 문학의 정수로 아가서를 남긴 것은, 이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 시로 읽는 자는 그 보화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빛으로 아가서를 읽는 자는, 그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경륜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부터 골로새서, 빌립보서, 히브리서가 말하는 신학이 아가서 안에 이미 담겨 있었다. 솔로몬이 아가서를 썼을 때,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모든 진리를 시적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인 우리를 신부로 취하시고, 누이라 부르시며, 함께 통치하는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는 이 놀라운 경륜을 마음 깊이 새길 때, 우리는 이 땅의 삶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며,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23일(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f60f6465f52da4f67c25cc8e4ebc2e4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b9881ce3cd7b72b1e874bd19885f83a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471a049a415514477b067288e5e9ec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a87f7a6551079cc9622916698fa94b9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7e5413afeade20b5825dbeac60b42c3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6af7723eacce4306966544b980151e9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9d7338a97448b3d1fd882d95be67b5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a6c141fda8593b34d91e0a931291b36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aee08b1a61062479834f2d621fe3418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0)] The_Divine_Descent.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59/260/2f72f0a8c34664ec8f26d663db67e674.webp&quot; /&gt;&lt;/p&gt; &lt;p&gt; &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_2026-06-22(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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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22T22:27:31+09:00</published>
		<updated>2026-06-23T08:41:24+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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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3iT_tPBgq-o 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구약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과 시와 예언을 모아 놓은 책인가, 아니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책인가?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이미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3iT_tPBgq-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3iT_tPBgq-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 0; padding: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NanumGothic&#039;, sans-serif; font-size: 16px; line-height: 1.7; color: #222; } h2 { margin: 2.8em 0 0.8em 0; padding: 0; font-size: 17px; font-weight: 700; color: #38688c; } h2:first-of-type { margin-top: 0; } p { margin: 0 0 1em 0; padding: 0; } p.bible { font-weight: 700; color: #854ba0; } p.date, p.author { margin: 0 0 0.2em 0; padding: 0; } p.date { margin-top: 1.2em; } &lt;/style&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구약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과 시와 예언을 모아 놓은 책인가, 아니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책인가?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이미 답하셨다. 주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구약의 기독론은 억지로 예수님을 끼워 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열어 주신 성경 읽기의 길이다. 창세기의 유다와 요셉, 출애굽 이후의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서와 시편의 다윗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유다는 왕권의 계보를, 요셉은 고난 후 영광을, 모세는 율법과 중보를, 여호수아는 전쟁과 안식을,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과 메시아 예언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제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렀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요 지혜의 왕이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장차 오실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예표는 다윗의 예표와 결이 다르다. 다윗이 원수를 치는 전쟁의 왕을 보여 준다면, 솔로몬은 평화의 시대에 성전을 짓고, 지혜문학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노래한 왕으로 나타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별히 아가서는 솔로몬의 지혜문학 가운데 가장 깊은 책이다.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가 될 교회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아가서가 어려운 까닭은 신앙 용어가 거의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숨겨짐 때문에 지혜를 가진 자만이 그 안에 담긴 영적 실재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여 주며, 특히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신부를 데려가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h2&gt;2. 왜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 것은 성도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신약은 예수님을 &amp;ldquo;다윗의 자손(아들)&amp;rdquo;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은 첫 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선포한다(마 1: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휘오스=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dquo;자손&amp;rdquo;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amp;ldquo;휘오스, huios&amp;rdquo;다. 기본 뜻은 &amp;ldquo;아들&amp;rdquo;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먼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잇는 아들이시다. 구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두 사실이 겹치는 지점에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다윗의 뿌리와 자손이라고 말씀하신다(계 22:16). &amp;ldquo;자손&amp;rdquo;이 다윗에게서 나온 분이라는 의미라면, &amp;ldquo;뿌리&amp;rdquo;는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의미다. 이 한 구절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나 동시에 다윗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일은 인물의 도덕성을 본받는 수준을 넘어선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죄가 있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지만 말년에 우상숭배의 길로 기울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단순한 모범으로만 읽으면 성경의 깊이를 놓치게 된다. 구약 인물은 자신이 가진 빛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자신의 실패로 &amp;ldquo;더 크신 이&amp;rdquo;가 필요함을 증언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처럼 구약 성경에는 &amp;ldquo;예표&amp;rdquo;와 &amp;ldquo;성취&amp;rdquo;의 구조가 있다. 예표는 실체가 오기 전에 먼저 보여 주신 그림자다. 그림자가 실체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실체가 어떤 모양으로 올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준다. 솔로몬도 그렇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과 성전 건축의 사명과 하나님께 받은 지혜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로 무너졌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되, 솔로몬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은 표지판이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원리를 붙들면 아가서가 열린다. 아가서의 솔로몬은 역사적 솔로몬이면서 동시에 장차 오실 신랑 왕의 그림자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 속에 머물지 않고, 장차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정결하게 될 교회의 그림자가 된다. 그래서 아가서를 그리스도 밖에서 읽으면 난해한 사랑 노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신부의 여정이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도 이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한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신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왕의 가마로 데려가는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시는 종말론적 그림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겉만 보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lt;/p&gt; &lt;h2&gt;3. 왜 아가서는 그리스도를 가장 친밀하게 보여 주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시편은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신분을 장엄하게 증언한다. 특히 시편 2편에서 다윗은 그분을 &amp;#39;하나님의 아들&amp;#39;이요 &amp;#39;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amp;#39;(메시아)로 보여 준다. 시편 22편은 &amp;#39;고난의 종&amp;#39;을 생생하게 예언한다. 시편 23편은 &amp;#39;목자&amp;#39;이신 주님을 노래한다. 시편 110편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amp;#39;왕&amp;#39;이자 철장권세를 가지신 왕이면서(시 2:8-9), 동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심을 보여 준다(시 110:4).&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더 친밀한 자리에서 보여 준다. 곧 그분은 &amp;#39;신랑&amp;#39;이시다. 신랑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는 왕이 아니다. 신랑은 신부와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는 존재다. 그는 신부를 찾아오고, 그녀의 허물을 덮고, 그녀를 자신의 처소로 이끌며, 마침내 혼인 잔치의 기쁨으로 데려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말하다가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큰 비밀이라고 밝혔다(엡 5:31-32).&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을 붙들고 보면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는 단순한 인간 사랑의 노래에 갇히지 않는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향하여 열린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고, 교회는 그 사랑으로 정결하게 되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사랑은 단지 감정의 언어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하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는 사랑이다(아 8:6-7).&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가장 강한 불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사랑은 신랑이 신부를 얻기 위해 감당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피 흘림을 전제하는 사랑이다. 아가서 1장 14절의 &amp;#39;고벨화&amp;#39;가 &amp;#39;속전&amp;#39;을 가리키고, 아가서 전체가 신부를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여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사랑은 감상적 낭만이 아니라 구속사적 사랑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신부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amp;ldquo;하나&amp;rdquo;를 말할 때 쓰는 &amp;ldquo;에하드&amp;rdquo;는 단순한 숫자 하나만이 아니라 연합된 하나를 말할 때 쓰인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도 에하드의 의미를 가진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에하드의 연합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노래한다. 신부는 자기 뜻만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신랑의 사랑을 받고 신랑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는 자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래서 아가서는 성도의 신분을 새롭게 보게 한다. 우리는 단순히 죄 사함만 받은 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며, 이기는 자가 되어 왕노릇할 자로 부름받았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는 존재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붙들고 현재의 삶을 방치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를 빚어 가장 아름다운 신부, 가장 가까운 동역자, 장차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세우기 원하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친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또한 신랑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읽는 성도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lt;/p&gt; &lt;h2&gt;4. 시편과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어떻게 다르게 보여 주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공적 신분을 많이 보여 준다. 시편 2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기름부음 받은 왕이다. 그분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예언된다(시 2:7-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시 2: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110편에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원수들을 발판 삼으실 왕으로 나타난다.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으로 나타난다(시 110:1, 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2편은 그분의 고난을, 시편 23편은 목자의 돌봄을 보여 준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 제사장, 목자, 고난받는 종이라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풍성하게 알려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아가서는 이 모든 신분을 사랑의 관계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가서에서 그리스도는 왕이시되 혼인의 왕이시다. 그분은 목자이시되 사랑하는 자를 찾아 양떼의 발자취로 이끄시는 목자이시다. 그분은 포도원의 주인이시되 신부를 산출하고 가꾸시는 주인이시다. 그분은 동산지기이시되 자신의 동산에 들어가 향품과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그분은 재림주이시되 신부가 &amp;ldquo;빨리 오라&amp;rdquo;고 사모하는 신랑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시편과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amp;ldquo;사역&amp;rdquo;을 보여 주는 방식도 다르다. 시편은 원수를 꺾고 의인을 건지며 고난 중에 부르짖는 왕을 보여 준다. 반면 아가서는 사랑하는 자를 찾아내고, 그녀를 포도원에서 불러내며, 왕의 가마를 보내어 혼인으로 이끄는 신랑을 보여 준다. 전자는 전쟁과 통치의 언어이고, 후자는 사랑과 단장의 언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원수를 이기시는 왕이기 때문에 신부를 안전하게 데려가실 수 있고, 신부를 사랑하시는 신랑이기 때문에 원수와 싸우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점에서 아가서의 왕은 다윗의 전쟁 왕권을 이어받되, 그 결과를 혼인과 안식으로 완성하는 왕이다. 다윗이 원수를 쳐서 평화의 길을 열었다면, 솔로몬은 평화 가운데 성전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사랑은 전쟁 없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왕이 신부를 데려가는 사랑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시편이 그리스도의 왕권과 고난과 제사장직을 비교적 공적으로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그분의 사랑과 혼인과 신부 산출의 비밀을 내밀하게 보여 준다. 시편이 왕의 보좌를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왕의 가마와 혼인 행렬을 보여 준다. 시편이 원수를 발판 삼는 왕을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신부를 호위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왕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차이를 알아야 아가서를 바르게 읽을 수 있다. 아가서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피 흘림과 속죄와 정결과 신부 준비를 포함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래서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lt;/p&gt; &lt;h2&gt;5. 아가서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여덟 신분은 무엇인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예수님의 신분을 여덟 방면으로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 &lt;strong&gt;첫째, 그분은 &amp;#39;왕&amp;#39;&lt;/strong&gt;이시다. 아가서에는 왕의 방, 왕의 식탁, 왕의 가마, 왕의 깔개, 왕관, 시온의 딸들, 예루살렘의 딸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솔로몬이 단순한 왕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뜻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그분은 &amp;#39;창조주&amp;#39;&lt;/strong&gt;이시다. 아가서의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amp;ldquo;어머니의 아들들&amp;rdquo;과 같은 피조물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신부와 연합하기 위해 낮아져 오지만, 본질상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gt;&amp;nbsp;&lt;strong&gt;&amp;nbsp;셋째, 그분은 &amp;#39;속전&amp;#39;&lt;/strong&gt;이시다. 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는 히브리어 &amp;ldquo;고페르&amp;rdquo;와 관련되고, 이는 &amp;ldquo;카파르&amp;rdquo; 곧 속죄하다, 덮다, 값을 지불하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고벨화는 피 흘려 신부를 사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7절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단서를 준다. 신부는 사랑하는 자에게 양 떼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묻는다(아 1:7).&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1: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는 장면이지만 동시에 목자를 찾는 장면이다. &lt;strong&gt;넷째, 그리스도는 신부의 신랑이실 뿐 아니라 &amp;#39;양들의 목자&amp;#39;&lt;/strong&gt;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양들을 어디서 먹이고 어디서 쉬게 하시는지 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참 신부는 자기 방식으로 방황하지 않고, 목자이신 신랑이 인도하는 길을 찾는다.&lt;/p&gt; &lt;p&gt;&amp;nbsp; &lt;strong&gt;다섯째, &amp;#39;포도원의 주인&amp;#39;&lt;/strong&gt;이라는 신분도 중요하다. 아가서 8장 11절은 솔로몬에게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었다고 말한다(아 8:1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8:11 솔로몬에게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포도원은 산출의 장소다. 신부는 포도원지기로 일했으나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과 사명을 지켜야 했으나, 타락한 영들의 억압과 여우 같은 방해로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준다. 그러나 포도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면, 잃어버린 포도원은 다시 회복되고, 신부는 주님의 산출에 동참하는 존재가 된다.&lt;/p&gt; &lt;p&gt;&amp;nbsp; &lt;strong&gt;여섯째, 그분은 &amp;#39;동산지기&amp;#39;이시다&lt;/strong&gt;. 신랑은 자신의 동산에 들어가 몰약과 향품을 거두고 꿀송이와 포도주와 젖을 먹는다고 말한다(아 5: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동산은 신부의 내면이며 주님이 거하실 처소다. 성전이 밖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라면, 신부의 동산은 안으로 열리는 하나님의 처소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부는 단순히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님이 거하실 동산과 성전으로 가꾸어져야 하는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일곱째, 그분은 &amp;#39;재림주&amp;#39;&lt;/strong&gt;이시다. 아가서 마지막은 사랑하는 자에게 빨리 오라고 말하는 기다림으로 끝난다. 이는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갈망과 연결된다(아 8: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여덟째, 그분은 &amp;#39;신랑&amp;#39;&lt;/strong&gt;이시다. 아가서의 모든 신분은 결국 신랑이라는 신분 안에서 완성된다. 왕도 신랑으로 오고, 속전도 신랑의 사랑으로 지불되며, 목자와 포도원의 주인과 동산지기도 신부를 얻기 위한 사역 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짝으로 삼기 위해 찾아오신 신랑 하나님이시다.&lt;/p&gt; &lt;h2&gt;6. 솔로몬 왕은 왜 새 예루살렘의 왕을 예표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 3장은 솔로몬 왕의 가마를 보여 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궁중 행렬이 아니다. 왕이 신부를 데리러 보내는 혼인 행렬이다. 솔로몬의 가마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졌고, 기둥은 은이며, 바닥은 금이고, 자리는 자주색 깔개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여 있다(아 3:9-10).&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3:9-10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amp;#39;왕&amp;#39;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온다. 신부는 왕이 자신을 &lt;strong&gt;그의 깊은 처소&lt;/strong&gt;로 이끌어 들였다고 말한다(아 1:4). 여기서 &amp;ldquo;방&amp;rdquo;은 단순한 침실의 의미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lt;strong&gt;영적으로는 왕의 가장 은밀한 처소, 곧 지성소적 친밀함&lt;/strong&gt;을 떠올리게 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 아가서 1장 12절은 왕이 앉아 있을 때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은&lt;strong&gt; &amp;ldquo;침상&amp;rdquo;&lt;/strong&gt;이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은 &lt;strong&gt;식탁이나 잔치 자리&lt;/strong&gt;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단순한 육체적 만남이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신부가 향유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1: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신약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여 향유를 부은 사건을 생각하면, 아가서의 향유와 몰약과 나도 기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이 연결된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만 받는 자가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위해 죽으실 분임을 알아보고 그 죽음에 향유를 붓는 자다.&lt;/p&gt; &lt;p&gt;&amp;nbsp;&amp;nbsp;레바논 나무는 향기와 견고함을 나타낸다. 은은 속전과 구속을 떠올리게 한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상징한다. 자주색은 왕권의 색이다. 그러므로 이 가마는 신부를 태우기 위한 단순한 탈것이 아니라, 왕의 사랑과 구속과 영광을 담은 도구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어서 시온의 딸들은 솔로몬 왕을 보라고 부름받는다. 그가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아 3:1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lt;strong&gt;솔로몬은 시온의 왕이며 예루살렘의 왕&lt;/strong&gt;이다. &lt;strong&gt;이는 장차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말하고, &lt;strong&gt;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lt;/strong&gt;로 보여 준다(계 19:7, 21: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lt;/strong&gt;&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의 솔로몬 왕은 역사 속의 이스라엘 왕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lt;strong&gt;신부를 데려가시는 새 예루살렘의 왕&lt;/strong&gt;을 예표한다. 성도는 그 왕을 단지 멀리서 경배하는 자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 왕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왕의 가마에 태워진다는 것은 왕이 인정하는 신분으로 부름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어떤 신분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인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lt;/p&gt; &lt;h2&gt;7. 왕의 가마와 60용사는 신부의 신분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가마 주변에는 이스라엘 용사 중 60명이 둘러서 있다. 그들은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밤의 두려움 때문에 허리에 칼을 찬다(아 3:7-8).&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3: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신부의 신분을 보여 준다. 왕이 아무에게나 이런 호위를 붙이지 않는다. &lt;strong&gt;가마는 왕이 보내는 것&lt;/strong&gt;이고,&lt;strong&gt; 60용사는 왕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붙인 호위&lt;/strong&gt;다. 그러므로 신부는 &lt;strong&gt;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lt;/strong&gt;이며, &lt;strong&gt;동시에 어둠의 세력 가운데서 왕의 보호를 받아 이동하는 존재&lt;/strong&gt;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숫자 60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아가서 6장에는 왕비 60명과 후궁 80명이 나온다. 그러나 신랑은 &amp;ldquo;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amp;rdquo;이라고 말한다. 숫자가 많아도 신랑이 찾는 완전한 자는 하나다. 그러므로&lt;strong&gt; 60용사는 신부를 둘러싼 왕적 호위의 충만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신부가 왕의 특별한 선택 안에 있음&lt;/strong&gt;을 증언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lt;strong&gt;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하다는 표현은 성도의 여정이 영적 전쟁과 무관하지 않음&lt;/strong&gt;을 보여 준다. 신부는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전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랑에게 속했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는 신부를 방해한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용사들을 보내어 신부를 지키신다. 오늘의 성도도 말씀의 검과 예수 이름의 권세를 붙들고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 보호자는 성도 자신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다.&lt;/p&gt; &lt;p&gt;&amp;nbsp;&amp;nbsp;&amp;ldquo;밤의 두려움&amp;rdquo;은 단순한 자연적 어둠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밤과 어둠은 종종 악한 세력의 때와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도 유다가 밖으로 나가니 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요 13:30). 또한 주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amp;ldquo;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amp;rdquo;라고 말씀하셨다(눅 22:5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눅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신부의 길에는 영적 방해가 있다.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가장 높은 신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어둠의 권세와 싸워야 하고, 회개를 통해 자기 안의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주님의 피와 이름의 권세로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왕이 보내는 60용사는 주께서 자신의 신부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천국의 실제도 이와 연결된다. 어떤 성도는 천사가 데려가지만, 어떤 성도는 왕의 마차와 같은 특별한 호위를 받는다. 이는 이 땅에서 어떤 믿음과 회개와 순종과 헌신으로 준비되었는가와 연결된다. 천국은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서는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며, 이기는 자에게 왕노릇의 권세를 주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래서 왕의 가마와 60용사는 성도에게 큰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 소망은 주님께서 신부를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이고, 두려움은 신부의 신분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부는 왕의 사랑만 기대하는 자가 아니라, 왕에게 합당하게 단장되는 자다.&lt;/p&gt; &lt;h2&gt;8. 술람미의 어머니와 오빠들은 창조주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표현들이 나온다. &lt;strong&gt;술람미 여인은 &amp;ldquo;내 어머니의 아들들&amp;rdquo;이 자신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lt;/strong&gt;고 말한다(아 1:6).&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lt;strong&gt;신랑은 그녀를 &amp;ldquo;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amp;rdquo;&lt;/strong&gt;이라고 부른다(아 6: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amp;ldquo;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amp;rdquo;이라고 말한다(아 8: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구조를 더 깊이 보면 &amp;ldquo;아들&amp;rdquo;이라는 말의 차이가 드러난다. &lt;strong&gt;구약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경우&lt;/strong&gt;가 있다. 그러나 &lt;strong&gt;그들은 피조된 아들들&lt;/strong&gt;이다. 반면 &lt;strong&gt;예수님은 피조된 아들이 아니다&lt;/strong&gt;. 그분은 &lt;strong&gt;하나님께서 낳았다고 표현되지만, 그것은 피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아들로 나타나셨다&lt;/strong&gt;는 뜻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혈과 육을 입고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랑을 술람미의 오빠들과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된다. 오빠들은 피조 세계 안에서 여인을 억압하는 자들로 읽힌다. 반면 &lt;strong&gt;신랑은 왕의 권세와 창조주의 근원을 가진 분&lt;/strong&gt;이다. &lt;strong&gt;그는 같은 피조물의 형제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의 모양을 입으신 창조주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lt;/strong&gt;다.&lt;/p&gt; &lt;p&gt;&amp;nbsp;&amp;nbsp;술람미 여인이 &amp;ldquo;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amp;rdquo;이라고 말한 것은, 신랑과 자신이 같은 피조물의 근원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만약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라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랑은 그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다른 근원에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피조물인 신부를 외면하지 않고 가까이 오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세 표현을 함께 보아야 한다. &lt;strong&gt;&amp;ldquo;내 어머니의 아들들&amp;rdquo;은 그녀와 관계가 있지만, 신랑과 같은 근원은 아니다.&lt;/strong&gt;&amp;nbsp;&lt;strong&gt;아가서의 흐름에서 이들은 의붓오빠들, 곧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lt;/strong&gt;한다. &lt;strong&gt;그들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고 억압한다.&lt;/strong&gt; 이것은 &lt;strong&gt;타락한 영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수고하게 만들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현실&lt;/strong&gt;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반면 &lt;strong&gt;신랑은 그녀와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는 &amp;#39;창조주&amp;#39;이시다&lt;/strong&gt;.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한다(요 1:1-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동탄명성교회가 전하는 한 분 하나님 신앙이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인간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리스도는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고 신부로 삼으시려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고 오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히브리서는 &lt;strong&gt;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난지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lt;/strong&gt;고 말한다(히 2:1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보여 준다. &lt;strong&gt;본질상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amp;#39;형제&amp;#39;라 부르시고, 더 나아가 신부로 맞아 주신다&lt;/strong&gt;.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놀라운 비밀이다. &lt;strong&gt;신랑과 신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분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lt;/strong&gt;. 그런데 &lt;strong&gt;그분은 피조물인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의붓오빠들 같은 악한 영들의 억압에서 건져 내어 왕의 가마에 태우고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신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아가서가 들려주는 기독론의 깊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하여 자신의 짝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가치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우리를 가시나무 가운데 버려진 존재로만 보지 않으시고, 자신의 피와 사랑으로 단장될 신부로 보신다.&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아가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여 주며, 특히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신부를 데려가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 지혜문학의 최고봉으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감추어 보여 주는 책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 없이 읽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 친히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솔로몬도 단순한 이스라엘 왕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는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또한 술람미 여인도 단순한 시골 처녀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정결하게 되어 신부로 준비될 교회를 예표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아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도 귀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설 것인가도 중요하다. 왕이 보낸 가마에 태워질 신부로 준비되려면,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고, 주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에 자신을 맞추어 가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로 맞아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존재를 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귀히 여기신 존재가 바로 성도다. 그 가치를 알고 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왕의 혼인날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가서의 가마와 60용사는 신부를 데리러 오시는 왕의 영광을 보여 준다.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그날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악한 영과 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정결하게 단장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마에 태워질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6월 22일(월)&lt;/p&gt; &lt;p class=&quot;author&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아가서_속_그리스도의_8가지_신분.pn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82c628e73a9e0575831e8179bc33a21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2722724e4fb2467a565b85a2d172086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17415ada7b100a0caa6b96e1e71cb8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83cdac6b786fb6e20f22e1dad70c142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9fd06efe153923f47e6f546ad7fb9d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8db34b5e962c131d091c0efabfde3e8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83b3c9b0aaba4a6e03a3ded85dbe928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1a8ad84f829d9e55dd407c1a46bcfce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315c0c1cfe6157218f8bc4b6227091d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c44f52af688a25f086ec39ddade64bc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48683d97c3e31acf523e71205ea8015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33ab54ea1882816cd3be59acf782133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2e09ba8118616278ed4892ae125fbd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965fcd83568d6e4544624608a2c2da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400e7694485d9bbd7ec7b6c03f32905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King_and_Creator_Revealed.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e612b984843bb520f0a0873dfe6cf56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 { margin: 0; padding: 0; box-sizing: border-box;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을 창세기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한 분을 향하여 수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 사실을 선언하셨다. 성경이 곧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라고 하셨고(요 5:39),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자신에 관한 것임을 열어 주셨다(눅 24:44).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즉 시가서의 모든 기록 속에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는 선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금 나누고 있는 구약의 기독론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찾아 배우는 여정이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제사,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 양, 광야의 성막, 다윗의 왕국과 시편, 솔로몬의 성전과 아가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모든 사건과 인물과 제도는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긴 여정 가운데 아가서에 도달하였다. 기독론 129번째 시간이며,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시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구약 성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친밀하게 묘사하는 책이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내밀하고 더 가깝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들려준다. 그분의 신분, 그분의 사역,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마음이 아가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가서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고 구원받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멈춰 버린다. 그러나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면, 우리가 어떤 존재로 빚어져 가야 하는지, 그분과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이 무엇이며, 그 신분들이 우리 구원과 소망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가서 3장 6절부터 11절을 중심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살피고, 나아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아가서 1장과 6장과 8장의 본문을 통해 들여다볼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왜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작업은 기독론 연구의 핵심이다. 그 가운데 아가서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율법서나 예언서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속의 역사를 다룬다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마음, 그리고 그분과 신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문학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한 마디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신부의 사랑 이야기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함&lt;/strong&gt;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까지는 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다. 구원받은 내가 어떤 존재로 변해 가야 하는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로 자라 가야 하는지, 천국에서 어떤 신분으로 서게 될지를 모른다. 그러니 신앙 생활이 의무처럼 느껴지고, 헌금이 아깝게 느껴지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다.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가서는 바로 그 이유를 알려 준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존재이다. 에베소서 5장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표한다고 선언한다(엡 5:32).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장 풍부하게 드러내는 구약의 책이 바로 아가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가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막연히 믿는 데서 멈추게 된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귀찮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고, 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장차 어떤 신분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신앙은 막연한 의무에서 구체적인 소망으로 바뀐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lt;strong&gt;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를 알아야&lt;/strong&gt; 한다.&lt;strong&gt; 첫째는 그분의 신분&lt;/strong&gt;이고, &lt;strong&gt;둘째는 그분의 사역&lt;/strong&gt;이다. 신분을 알아야 사역이 의미 있게 들린다. 왕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왕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만왕의 왕이신 분이 우리에게 가마를 보내신다는 것, 신랑이신 분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신다는 것, 이 모든 사실들이 그분의 신분을 알 때 비로소 그 무게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신분이신지를 알아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가서는 바로 그 신분을 여덟 가지로 압축하여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 준다. 신분은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이고, 사역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시고 계시고 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신학적으로는 &lt;strong&gt;그리스도의 인격(Person)&lt;/strong&gt;과 &lt;strong&gt;그리스도의 사역(Work)&lt;/strong&gt;이라고 부른다. 아가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으며, 특히 신분에 관하여 다른 어떤 성경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뿐만 아니라 아가서는 우리 존재의 미래를 알려 준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장차 어떤 존재로 빚어져야 하는지를 술람미 여인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 준다. 처음에는 시골의 포도원지기 처녀로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왕의 신부로 세워지는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여정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어디에 쓸 것인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인생을 어디를 향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아가서를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사역, 곧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왕이 시골 처녀를 찾아와서 가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종살이 가운데 있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이것을 알면 십자가가 다르게 보인다. 부활이 다르게 들린다. 성령의 역사가 다르게 느껴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 말씀이 날마다 축적되어야 신앙이 자란다. 지난 주에 들은 말씀, 그 전 주에 들은 말씀이 차곡차곡 쌓여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말씀이 쌓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면 말씀 하나하나가 내 안에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아가서는 그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가장 따뜻하게 보여 주는 책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에서 우리는 &lt;strong&gt;다윗이 증언하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여섯 가지 신분&lt;/strong&gt;을 이미 배웠다. 시편 2편에서 그분은 &amp;#39;하나님의 아&amp;#39;들이요 기름부음 받은 &amp;#39;메시아&amp;#39;이셨다. 시편 2편 8절과 9절에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amp;#39;왕&amp;#39;으로, 시편 110편 1절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왕으로, 시편 110편 4절에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amp;#39;제사장&amp;#39;으로, 시편 23편에서는 &amp;#39;목&amp;#39;자로, 시편 22편에서는 구체적인 고난을 미리 예고하신 &amp;#39;고난받는 종&amp;#39;으로 묘사되었다. 이렇게 시편을 통해 &lt;strong&gt;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 제사장, 목자, 고난받는 종&lt;/strong&gt;, 여섯 가지를 배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제 &lt;strong&gt;아가서에서&lt;/strong&gt;&amp;nbsp;솔로몬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lt;strong&gt;새로운 여덟 가지 신분&lt;/strong&gt;으로 나타난다. &lt;strong&gt;첫째, &amp;#39;새 예루살렘의 왕&amp;#39;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시편의 왕이 철장 권세로 만국을 다스리는 전사의 이미지라면, 아가서의 왕은 새 예루살렘 성의 영원한 주인이요 왕으로 묘사된다. 왕관, 왕복, 왕의 깔개, 왕의 가마가 구체적으로 등장하며 그분의 왕 되심이 선명하게 그려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어머니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근원이 다른 창조주임을 드러내는 복선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가서 8장 1절과 6장 9절 등의 본문을 통해 더 상세히 다루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속전은 몸값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엘(גָּאַל)의 개념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값을 치르고 사신 구속주이심을 가리킨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종살이하던 자였다. 그녀를 그 종살이에서 값을 치르고 자유케 하신 분이 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속전을 치르신 사실을 예표한다(막 10:4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넷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아가서에서 신랑은 백합화 사이에서 양 떼를 먹이는 목자로 묘사된다(아 2:16). 시편 23편의 목자가 아가서에서 신랑 목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양을 돌보는 그분의 세심한 사랑이 아가서 전체에 흐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섯째, 포도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게 붙들려 일하던 바알하몬의 포도원은 결국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아가서 8장 11절에서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명시된다. 타락한 천사들이 우리를 억압하며 일시적으로 지배했지만, 그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여섯째, 동산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아가서의 잠긴 동산(아 4:12)은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며, 그 동산을 가꾸고 돌보시는 분으로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 동산지기로 착각한 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그분은 진정한 동산지기, 에덴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일곱째, 재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이다. 아가서 8장의 끝에서 신부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외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마라나타 신앙과 동일한 맥락이다. 아가서는 이미 구약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신부의 고백으로 끝맺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여덟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lt;/strong&gt;도이다. 아가서 전체의 결론이자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다. 가장 친밀하고 가장 내밀한 이 관계가 아가서가 선포하는 복음의 절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여덟 가지 신분을 이 시간부터 차례로 공부해 나가게 된다. 시편에서 배운 여섯 가지와 아가서에서 배울 여덟 가지를 합치면,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얼마나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증언하는지가 드러난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편적 힌트가 아니라, 그분의 전체 신분과 사역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구약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눈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가운데 왕으로서의 신분과, 창조주로서의 신분의 서론을 다루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1장에서 2장까지는 왕이 처음 술람미 여인을 만나고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3장에서 4장까지는 왕이 가마를 보내어 신부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4장 8절부터 신부라는 호칭이 등장하면서 그녀가 왕의 신부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5장부터 8장까지는 신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처럼 아가서 전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처음 만남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본문은 그 여정의 한 중간에 있는 3장 6절부터 11절이다. 왕이 가마를 보내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이 장면은, 마치 천국에서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그날을 미리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자는 이 땅의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아가서에서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신분은 왕이다. 그러나 이 왕은 단순히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다. 아가서가 묘사하는 왕은 새 예루살렘 곧 시온 성의 왕이시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성, 진리의 성읍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4절에서 신부는 왕이 자신을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였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왕의 방은 단순한 침실이 아니라 지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가장 깊숙한 은밀한 곳,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지성소로 신부를 이끌어 들이시는 왕의 모습이다. 왕이 신부를 왕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은 그 관계의 친밀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우리가 너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네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리니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2절에서는 왕이 식탁에 앉았을 때 신부의 나드 기름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식탁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왕이 신부와 교제하는 친밀함을 나타낸다. 이 나드 기름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헌신과 연결된다. 신약의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하여 향유를 부었듯이,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도 나드 기름과 몰약 향 주머니를 품에 차고서 그 죽음을 미리 예비한다. 이것은 왕이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실 메시아이심을 알고 드리는 예배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의 신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본문은 아가서 3장 6절부터 11절이다. 여기에는 왕의 가마와 왕관과 왕의 화려한 행렬이 등장한다. 9절은 솔로몬 왕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가마를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그 가마는 기둥을 은으로, 바닥을 금으로, 깔개는 자주색으로 꾸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3:9-10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자주색 깔개는 왕의 상징이다. 기둥의 은은 속죄, 바닥의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 왕의 가마 안에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다는 것은, 이 가마가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영적 실재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금과 은으로 지어진 외적 화려함이 아니라,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직조되는 나라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11절은 클라이맥스이다. 시온의 딸들이 나와서 솔로몬 왕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그 왕의 머리에는 혼인날 어머니가 씌워 준 왕관이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즐거울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등장하는 시온의 딸들은 새 예루살렘 성, 시온 성에 거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다윗이 처음으로 하늘의 성을 시온이라 이름 짓고 예루살렘이라 불렀으며, 그 왕직을 솔로몬이 이어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성의 왕으로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신다. 왕관을 쓰고 신부를 맞이하는 혼인날의 왕, 이것이 아가서가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신분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의 신분은 아가서 1장 3절에서도 드러난다. 신부는 왕의 기름이 향기롭다고 고백한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 마쉬아흐(מָשִׁיחַ), 곧 메시아라고 한다. 아가서의 신랑은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이시다.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신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3 내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천국의 성을 시온이라 이름 짓고 예루살렘이라 불렀으며, 솔로몬이 그 왕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중에 우상 숭배와 많은 처첩으로 인해 왕직을 잃어버리게 된다(왕상 11:1-4). 솔로몬은 예표였을 뿐이다. 그 예표가 가리키는 진정한 예루살렘의 영원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왕권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눅 1:3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1:33 야곱의 집을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 7장 5절에서 신랑은 신부의 드리운 머리카락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한다. 왕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메이었다는 표현은,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 만왕의 왕이 그 신부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7: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줏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이 왕이 마지막 날에 백마를 타고 재림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계 19:16). 아가서가 선포하는 새 예루살렘의 왕은 곧 요한계시록이 선포하는 재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왕의 가마와 60명의 용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3장 7절과 8절은 왕의 가마를 호위하는 60명의 이스라엘 용사를 소개한다. 이 본문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천상의 실재를 계시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 본문은 아가서 3장 6절부터 시작하는 왕의 행렬 이야기와 연결된다. 6절은 몰약과 유향 연기 기둥 같은 것이 광야에서 올라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이 신부를 데리러 친히 광야를 지나 오시는 것이다. 그 오심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향기로운 연기 기둥처럼 피어오른다고 표현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3:6 연기 기둥 같이 황야에서 올라오는 것이 누구냐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 하고 오는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3: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60명이 그 주위에 있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의 가마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보내시는 천사들의 가마이다. 가마는 그 신부를 모시기 위해 왕이 특별히 보내는 것이다.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던 시골 처녀를 예루살렘 성으로 데려오기 위해 왕이 직접 자신의 가마를 보낸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명을 마칠 때 친히 천사의 가마를 보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가마에는 60명의 용사가 호위한다. 이 60명은 선별된 천사들이다. 이들이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하다고 한 것은, 이들이 단순한 의전 천사가 아니라 전투 천사임을 가리킨다. 왜 호위 천사들이 필요한가? 8절은 밤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답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과 그 수하 귀신들이 성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방해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가룟 유다가 나갈 때 요한은 그때가 밤이었다고 기록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그 무렵은 어둠의 세력이 역사하는 밤이었다. 영적으로 성도가 이 땅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도 어둠의 방해가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주님은 그 어둠에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선별된 60명의 천사를 보내신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순간에 빛의 천사들이 가마와 함께 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중요한 것은 천사의 수가 신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아가서에는 네 종류의 신분이 등장한다. 왕비, 후궁, 빈, 시녀이다. 이 신분의 차이가 천국에서의 위치와 영광의 차이를 반영한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영접이 달라진다. 이것이 아가서가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핵심이다. 어떤 신분으로 왕 앞에 서게 될지는 이 땅에서의 선택들이 결정한다. 그 선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쌓는 일이다. 아가서를 공부하고, 기독론을 배우며,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그분 앞에 준비된 신부로 서는 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6:8-9 왕비가 60명이요 후궁이 80명이요 시녀들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주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어떤 가마를 보내실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왕비처럼 모셔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간신히 들어가는 자도 있다. 신부를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기 위해 왕이 보내는 가마와 60명의 용사는, 그리스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로 살아가야 할 도전을 우리에게 던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가마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영접과 직결됨을 알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롬 14:10). 어떤 이는 금, 은, 보석으로 세운 삶이 되어 상을 받고, 어떤 이는 나무, 풀, 짚으로 세운 삶이 되어 손해를 볼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은 말한다(고전 3:12-15). 이것이 아가서에서 왕비, 후궁, 시녀의 신분 차이로 표현되는 영적 실재이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천국에서의 영접을 결정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수많은 왕비와 후궁 중에 술람미 여인 한 사람을 택하신 의미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6장 8절과 9절은 충격적인 대비를 제시한다. 왕에게는 왕비 60명, 후궁 80명, 무수한 시녀들이 있다. 그러나 왕은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 어머니가 낳은 자 중에 귀중히 여기는 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본문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배타적인가를 보여 준다. 교회는 수많은 성도로 이루어진 집합체이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우리 각자가 일대일의 관계로 존재한다. 그분은 우리를 군중의 한 명으로 보시지 않는다. 수천 명 수만 명 가운데 있어도, 그분은 나 한 사람을 유일한 사랑으로 보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건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비둘기라고 부르신다. 비둘기는 평생 단 한 짝과만 함께한다. 짝을 잃으면 다시 다른 짝을 찾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신부의 사랑을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직 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유일한 존재이다. 이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아가서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아가서 2장 16절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 이 상호 소속의 선언이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요약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다. 이 고백이 신앙의 핵심이다. 아가서는 이 고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왕비와 후궁들까지도 술람미 여인을 칭찬했다고 본문은 말한다. 이것은 왕이 오직 그녀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얻은 자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복된 자로 인정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다. 천사들도, 다른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된 영혼 앞에서 복된 자라 할 것이다. 여자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했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모의 칭찬이 아니다. 그녀가 왕의 마음을 얻은 자이기에, 다른 모든 이들도 그녀의 복된 신분을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자는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 앞에서 복된 자라는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신부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영광이다. 왕의 눈에 든 자, 왕의 마음을 얻은 자가 가장 복된 자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동시에 이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다. 왕비, 후궁, 시녀의 신분이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도 신분의 차이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말한다(고전 15:41). 부활의 영광도, 천국에서의 신분도 동일하지 않다.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섬겼는지가 천국에서의 영원한 신분을 결정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어떤 이는 왕비로, 어떤 이는 후궁으로, 어떤 이는 시녀로 들어간다. 이 차이는 이 땅에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에 우리가 얼마나 응답했느냐가 천국에서의 신분을 결정한다. 수많은 왕비와 후궁 중에 한 사람을 내 완전한 자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선언은, 그분이 우리 각자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를 알려 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합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이다. 솔로몬(שְׁלֹמֹה)과 술람미(שׁוּלַמִּית)는 어근이 같으며, 둘 다 평화, 샬롬(שָׁלוֹם)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에하드(אֶחָד), 곧 하나를 뜻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신부가 신랑의 이름을 받는 것의 의미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술람미 여인 및 그녀의 오빠들의 어머니와 솔로몬의 어머니는 어떻게 다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깊이 연구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amp;#39;어머니&amp;#39;이다. &lt;strong&gt;&amp;#39;솔로몬의 어머니&amp;#39;가 등장&lt;/strong&gt;하고,&lt;strong&gt; &amp;#39;술람미 여인의 어머니&amp;#39;가 등장&lt;/strong&gt;하고,&lt;strong&gt; &amp;#39;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의 어머니&amp;#39;가 등장&lt;/strong&gt;한다. 얼핏 보면 단순한 문학적 배경 인물 같지만, 이 어머니들의 차이가 아가서의 가장 심오한 신학적 비밀을 열어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6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이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오빠를 왜 내 오빠라 하지 않고 &lt;strong&gt;내 어머니의 아들들&lt;/strong&gt;이라고 했을까? 이것은 &lt;strong&gt;같은 어머니에게서 났지만 아버지가 다른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6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 신랑은 술람미 여인을 &lt;strong&gt;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lt;/strong&gt;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 어떻게 외동딸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의 아버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빠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가 따로 있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가 다른 아버지를 통해 낳은 외동딸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사들도 피조물이다. 구약 성경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은(욥 1:6),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들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히브리서 1장은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선언한다(히 1:3). 천사들은 창조된 존재이고, 그리스도는 창조하신 분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6절에서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이 인류를 억압하고 착취한 영적 역사를 보여 준다. 창세기 3장에서 뱀, 곧 사탄이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처럼, 타락한 천사들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통 속에 종살이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알하몬 포도원에서 일하는 술람미 여인의 이미지로 표현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가 아가서 8장 1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 입을 맞추어도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은 신랑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같은 피조물이지만, 신랑은 그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은 존재, 즉 근원이 다른 존재임을 드러낸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이고,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는 따로 있다. 그리고 오빠들의 아버지는 인간이지만, 신랑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이다. 밧세바는 이 땅에서 난 여인이다. 그러나 솔로몬을 상징으로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한다(요 1:1). 그분은 창조 이전, 시간 이전에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이것이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근본적 차이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선언한다(골 1:15). 여기서 먼저 나신 이는 첫 번째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시는 분, 창조의 주인이심을 뜻한다. 그분은 창조된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은 같은 피조물로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오빠들은 타락한 존재, 즉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술람미 여인을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며 괴롭히는 자들이다. 술람미 여인은 그 타락한 천사들의 종살이에서 고통받는 인류를 상징한다. 그리고 신랑 솔로몬은 창조주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 2장은 이 구별을 이렇게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녀들과 한 근원에서 나셨지만(히 2:11),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심과 다르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독생자이시고, 우리는 그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 근원이 다른 분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히 2:11). 창조주가 피조물을 형제라 부르시고, 신랑이 신부를 취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이 아가서의 신학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받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인간은 구원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앞 챕터에서 살펴본 어머니의 차이는 단순한 족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차이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움을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요 1:3).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오빠들이 타락한 천사를 상징한다는 사실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천사도 피조물이다. 인간도 피조물이다. 천사와 인간은 같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근원을 가진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 곧 귀신들은 그 피조물의 지위를 벗어나 인간을 노예로 삼고 억압한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게 붙들려 포도원지기로 일해야 했던 것처럼, 인류는 사탄과 귀신들의 억압 아래 종살이를 해 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억압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피조물의 세계로 내려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물의 세계로 직접 들어오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타락한 천사들의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갈 4:4).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기적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포도원에서 고통받는 신부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왕이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속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고베르, 곧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바로 그 속전이다. 그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귀신들의 종이 아니다. 창조주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구원의 놀라움은 단지 종살이에서의 해방에 있지 않다. 구원은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요 1:12).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의 변화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선언한다(계 3:21). 피조물이 창조주와 함께 보좌에 앉는다는 것,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약속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거리가 아무리 무한하더라도, 그 거리를 넘어서 우리를 신부로, 자녀로, 공동 통치자로 만드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바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구원의 차이이자 기적이다. 같은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은 우리를 억압했지만,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라 부르시며, 공동 통치자로 삼으신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알 때 우리는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피조물의 낮은 신분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로마서 8장 17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라고 선언한다(롬 8:17). 창조주의 독생자와 동급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 이것은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신분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구원 안에서 어떻게 역전되는지를 아는 자는 이 신분을 헛되이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세전부터 작정하신 이 놀라운 경륜 앞에서, 우리는 경외와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을 살펴보았다. 왕, 창조주, 속전, 목자, 포도원의 주인, 동산지기, 재림주, 신랑이라는 여덟 가지 신분은 각각 그리스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 준다. 이 시간에는 특별히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왕관을 쓰고 왕의 가마를 보내시며 시온의 딸들이 보는 가운데 신부를 맞이하시는 왕, 그리고 근원이 다른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로 취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의 가마에 딸린 60명의 용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보내시는 천사의 호위임을 알았다. 이 가마의 화려함과 호위의 규모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이는 왕비로, 어떤 이는 후궁으로, 어떤 이는 시녀로 들어간다. 이 차이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솔로몬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배웠다. 타락한 천사들도, 우리 인간도 모두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독생자이시다. 그 무한한 거리를 넘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라 부르시는 것이 구원의 놀라움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신부가 되며, 보좌에 함께 앉는 공동 통치자가 되는 것, 이것이 아가서가 선포하는 복음의 깊이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진리를 아는 자는 신앙이 막연한 의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구원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 가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걷는다. 그분을 알아 가는 만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술람미 여인이 처음에는 자신을 검다고 했지만, 왕의 사랑 안에서 점점 아름다워져 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 때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며 아름다워진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목적지는 그분의 신부, 그분과 하나 된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성장이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처럼, 처음에는 포도원에서 햇빛에 그을려 일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왕의 사랑을 받고 왕의 가마를 타고, 왕의 신부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 여정을 알고 걷는 자와 모르고 걷는 자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의 차이가 있다. 아는 자는 은사와 달란트를 어디에 쏟을지 안다. 물질을 어떻게 쓸지 안다. 시간을 어떻게 투자할지 안다. 모르는 자는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더 위대한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친히 가마를 보내어 모셔 갈 귀한 신부이다. 그 신부의 가치는 창조주께서 스스로 몸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실 만큼 귀하다. 동일한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이 억압하던 우리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속전을 치르고 사셨다. 이 사실을 깊이 새기면 우리는 스스로를 함부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그만큼 귀한 존재이다. 그 신부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날마다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쌓일수록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분의 오심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가장 위대한 준비이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투자이다. 아가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며, 그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부는 이렇게 외친다.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아 8:14). 이것이 신부의 최종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분이 그리워지고, 그분이 오시기를 사모하게 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우리를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신부로, 자녀로, 공동 통치자로 대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을 깊이 알아 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사랑이 신앙 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그 사랑이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시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22일(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629e34a20f783b99583667ac8466a3f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5c96db7ae1598fdd978184d011c45d6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e7cb8287fc0f6f4581e6db5af65e98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3ad8b612de0ea083750663834cc85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b569e27c08c41b655d952ec57711e7b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d7ccd3bbc0a97eaaeea01bbd95a0dd3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1c8eaec3c666e886333c2e1f02695d5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ab8ba2df4ab61e0d31bbfeda3e1d272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6ed20c40fc6e563d9fead56db4a268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019f71b2a4a37196e583e78049f04e2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98fbe67fe9e6f1d391cc655ea8e3717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644a33c50545e3ee9a61dd40c80dcdb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9)] The_Sovereign_King_Creator.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80/260/743d8071393e2f2b760852ae3e433792.webp&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아가서를 통해 계시된&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lt;/strong&gt;을 탐구하며, 성도가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지위를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을&amp;nbsp;&lt;strong&gt;새 예루살렘의 왕&lt;/strong&gt;으로 정의하며, 그가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을 위해&amp;nbsp;&lt;strong&gt;왕의 가마와 호위 천사&lt;/strong&gt;를 보내는 모습이 구원받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가서에 등장하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타락한 천사를&amp;nbsp;&lt;strong&gt;의붓오빠&lt;/strong&gt;에, 창조주이자 신랑이신 그리스도를&amp;nbsp;&lt;strong&gt;참된 생명의 근원&lt;/strong&gt;에 비유하며 그 독보적인 친밀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가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의 신부&lt;/strong&gt;라는 고귀한 정체성을 깨닫고, 주님과&amp;nbsp;&lt;strong&gt;영적인 일치&lt;/strong&gt;를 이루어 미래의 소망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7)] 다윗의 아들 솔로몬(05) 지혜의 3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고전1:18~31)_2026-06-19(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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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9T09:12:22+09:00</published>
		<updated>2026-06-20T09:38:49+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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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 요약입니다(투박한 요약). 제목: [기독론(127)] 다윗의 아들 솔로몬(05) 지혜의 3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고전1:18~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D6EOSr8i32o 1. 들어가며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은 과연 누구로 예표되었을까? 우리는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솔로몬과 관련지어서 예수님은 &quot;솔로몬보다 더 큰 이&quot;나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솔로몬은 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아...</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 요약입니다(투박한 요약).&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27)] 다윗의 아들 솔로몬(05) 지혜의 3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고전1:18~31)&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D6EOSr8i32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D6EOSr8i32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3Cmeta%20charset%3D%22UTF-8%22%3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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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가졌던 지혜의 세 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태평성대로 이끌었던 부분을 살펴보았다. 또 다윗이 예수님의 전사적 측면을 예표했다면, 솔로몬은 예수님의 평화의 왕으로서의 측면을 예표함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솔로몬의 지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리키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섭렵한 지혜의 왕이었다. 동방의 지혜, 애굽의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부어 주신 지혜를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그가 배웠던 세상의 지혜로는 결국 &amp;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전 1:2)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amp;quot;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amp;quot;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하였다. 솔로몬이 세상 지혜의 최고봉에 도달한 뒤 끝내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어 아가서를 기록한 것처럼, 이 시간에는 지혜의 세 가지 방면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어떻게 속죄와 생명 분배와 마귀 멸함을 동시에 이루었는지, 그리고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어떻게 담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가 드러나는 자리임을 깊이 새기며 말씀을 살펴보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섭렵한 세 가지 방면의 지혜는 각각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섭렵한 지혜에는 크게 세 가지 방면이 있다. &lt;strong&gt;첫째로, 그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를 가졌&lt;/strong&gt;다. 열왕기상 4장 29절에서 30절은 이렇게 기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29-30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quot;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amp;quot;는 욥기서에 나오는 지혜와 맥을 같이한다. 욥기는 동방 사람 욥의 이야기로서, 고난의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솔로몬은 이 동방의 지혜를 완전히 터득하였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붙들고 &amp;quot;내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아노라&amp;quot;고 고백했던 욥의 지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엘리후가 논하던 인생과 고난에 관한 지혜, 이 모든 것이 솔로몬의 그릇 안에 담겼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은 잠언 곳곳에서 동방의 지혜 전통에서 비롯된 비유와 격언들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지혜로 재해석하였다. 동방의 지혜는 인간의 경험과 자연 관찰로부터 쌓아 올린 삶의 지혜였지만, 그것 역시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결국 더 높은 지혜를 향한 발판에 불과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그는 애굽 사람의 지혜를 가졌다&lt;/strong&gt;. 당시 애굽은 고대 세계의 학문과 문명의 중심지였다. 천문학과 의학, 수학과 건축술, 철학과 제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 체계가 애굽의 지혜였다. 솔로몬은 애굽 왕 바로의 딸과 혼인하는 등 애굽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문화와 학문을 충분히 흡수하였다. 열왕기상 4장 30절은 솔로몬의 지혜가 이 애굽의 지혜보다도 뛰어났다고 증언한다. 잠언에는 애굽의 지혜 문서인 &amp;#39;아메넴오페의 교훈&amp;#39;과 유사한 구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솔로몬이 그 지혜를 단순히 차용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섭렵하여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창조하였음을 보여 준다. 애굽의 지혜는 당대 최고의 문명이 낳은 지적 유산이었으나, 그것도 솔로몬에게는 결국 세상 지혜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지혜까지 받았다&lt;/strong&gt;. 열왕기상 3장에서 하나님은 기브온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 &amp;quot;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amp;quot;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은 그때 부귀나 장수나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 않고 오직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 구함을 기쁘게 여기시어 지혜와 총명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풍성히 주셨다. 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솔로몬의 지혜를 세상의 모든 지혜보다 탁월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를 기록하였다. 잠언은 지혜로운 삶의 원리들을 담았고,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시험해 본 결과를 담았으며,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최고봉의 지혜문학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섭렵한 욥기서의 지혜는 동방 사람의 지혜요, 잠언과 전도서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포함한 구약 성경의 지혜요, 그리고 아가서는 그 모든 지혜의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최고의 지혜다. 이 세 가지 방면을 거쳐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전도서 1장 2절의 선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지혜를 탐구하는 방식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전도서 1장을 보면 그는 지식과 학문을 탐구하고, 웃음과 희락도 시험하고, 토목 사업도 크게 벌이고, 포도원도 만들고, 원림과 동산도 만들었다. 노비도 사고, 은금도 쌓고, 왕들이 즐기는 모든 음악도 즐겼다. 무엇 하나 눈이 원하는 것을 제하지 않았고, 무엇이든 즐기는 것을 마음에서 막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끝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지혜의 한계다. 세상 지혜는 그것이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하더라도, 인간 영혼의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없다. 솔로몬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이 없었고, 솔로몬보다 더 많이 알았던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헛됨이었다. 이 헛됨의 선언이야말로 솔로몬이 세상 지혜의 한계를 가장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며,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참 지혜를 향한 간절한 갈망의 표현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먹고 싶은 것을 다 먹어 보았고, 공부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공부해 보았으며,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려 보았지만, 세상의 지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천국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lt;strong&gt;아무리 뛰어난 학문과 지식을 쌓아도 우리의 영혼의 미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세상 지혜는 없다. 세상 지혜의 결론은 헛됨이다. 솔로몬은 이 결론에 도달한 뒤 비로소 참 지혜를 향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 곧 그리스도의 비밀&lt;/strong&gt;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골로새서 2장 3절이 말하는 &amp;quot;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amp;quot;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에서 3절에 이르는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amp;quot;하나님의 비밀&amp;quot;이라 부르며,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골 2:2-3 이는 그들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잠언 1장 7절과 9장 10절은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자 지혜의 근본&amp;quot;이라고 말한다. &lt;strong&gt;이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누구 안에 감추어져 있는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혜의 총체이시며, 지혜의 원천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는데, 여호와이신 그리스도가 곧 지혜 자체이신 것&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잠언 8장은 지혜가 의인화되어 말하는 놀라운 말씀이다. 특히 잠언 8장 22절의 &amp;quot;태초에 하나님이 나를 가지셨으며&amp;quot;라는 선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드러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amp;quot;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amp;quot;는 말씀과 동일한 진리다.&lt;strong&gt; 솔로몬은 잠언 8장을 통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와 지식의 보화의 창고이심을 증언한 것&lt;/strong&gt;이다. 솔로몬이 잠언 8장을 기록할 때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 진리를 담아냈다는 것은, 그가 단순한 세상 지혜를 넘어 하나님의 비밀을 향한 여정을 걷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잠언 8장의 지혜는 그냥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체,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비밀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다. 왜냐하면 그 밭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분을 발견하는 자는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이를 깨닫는 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께로 나아가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그리스도는 단순히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 아니시다. 그분 자신이 지혜&lt;/strong&gt;이시다. &lt;strong&gt;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amp;#39;일부&amp;#39; 받은 자였지만, 예수님은 지혜 자체이시다&lt;/strong&gt;. &lt;strong&gt;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이 지혜를 부어 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의 모든 보화가 충만히 거하신다&lt;/strong&gt;. 그분은 인간이 미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계시는 지혜 그 자체이시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amp;quot;내가 알고 있던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amp;quot;고 고백했다면,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놀라움으로 고백해야 하겠는가. 마태복음 12장 42절은 그래서 &amp;quot;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quot;고 증언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통한 지식도 필요하다. 공부하지 않고 지혜가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비밀은 탐구하는 자에게 열린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셨는데, 이는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더 풍성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이 감추어진 보화가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참된 지혜의 출발점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대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질수록 지혜는 오히려 부재하는 역설이 나타난다. 많은 것을 알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넘치는 정보 속에서도 영혼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 이것이 솔로몬이 말한 세상 지혜의 헛됨과 다르지 않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보화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방향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헬라인이 찾는 지혜가 왜 참 지혜가 될 수 없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1장 22절은 &lt;strong&gt;당시 세계의 두 가지 지혜&lt;/strong&gt;를 향한 열망을 간결하게 정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로,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은 참 지혜가 되지 못한다&lt;/strong&gt;.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증거로 기적과 이적을 요구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amp;quot;표적을 보여 달라&amp;quot;고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amp;quot;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amp;quot;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표적이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부활의 표적이었다. 기적을 쫓아다니고, 병 고침을 쫓아다니며, 축사만을 쫓아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론 병 고침과 축사와 이적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표적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으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는 아니다. 표적에만 의존하는 신앙은 표면적인 것에 머무를 위험이 있으며, 기적만 쫓아다니는 사람은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표적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 곧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헬라인이 찾는 지혜 역시 참 지혜가 되지 못한다&lt;/strong&gt;. &amp;#39;헬라인&amp;#39;이란 곧 &amp;#39;지혜를 찾는 자들&amp;#39;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헬라 철학은 고대 세계의 모든 지적 탐구를 집대성한 것으로서, 오늘날 서양 철학의 원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 했으며,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탐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그 이름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최고의 지혜였다. 그러나 그 위대한 지성들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끝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만물이 물에서 나왔느냐 불에서 나왔느냐, 공기에서 나왔느냐를 두고 평생 토론했지만,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끝내 이르지 못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레오바고 설교 때 바울이 &amp;quot;알지 못하는 신&amp;quot;의 제단을 언급한 것은, 헬라인들이 아무리 지혜를 탐구해도 참 하나님께 이르지 못했음을 잘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세상의 지혜는, 그것이 동방의 것이든 애굽의 것이든 헬라의 것이든, 결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인간의 영원한 미래는 세상의 지식 체계가 가르쳐 줄 수 없다.&lt;/strong&gt;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지혜로는 절대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amp;quot;모든 것이 헛되다&amp;quot;고 선언한 것이 바로 세상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증거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학위를 취득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알게 되어도, 우리의 영혼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세상 지혜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 &lt;/strong&gt;영원한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계획을 알아 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그 경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을 구원하고, 영생을 주며, 마귀를 멸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우는 영원한 능력이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도, 헬라인이 찾는 철학도 이 자리에는 이를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최첨단 과학과 철학이다. 이 시대의 지식과 정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방대하다. 그러나 그 방대한 지식이 사람에게 구원을 주었는가? 그 첨단 과학이 사람의 영혼을 안식에 이르게 하였는가? 그 고도화된 철학이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불안과 허무감은 더 깊어지고 있다. 정신건강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지혜의 본질이다. 솔로몬의 결론은 오늘도 유효하다. &amp;quot;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지혜를 상대화하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그리스도를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요, 아가서를 통해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사도 바울이 &amp;quot;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amp;quot;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24절은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다. 기적을 행하던 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그것은 신명기 21장 23절의 선언대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amp;quot;저는 기적을 베풀 수 있다면서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기적을 행하여 봐라&amp;quot;는 조롱이 그 대표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의 눈에, 죄인처럼 처형당한 이를 구원자라고 선포하는 것은 지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한다.&amp;nbsp;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전도 원칙을 밝힌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노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는 아름다운 말솜씨나 세상 지혜의 논리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다. 왜 그랬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세상 지혜의 수사로 복음을 포장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헛되게 될 위험이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2장 7절에서 8절은 이 지혜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2:7-8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동방 사람의 지혜도 아니고, 애굽의 지혜도 아니며, 헬라 철학도 아니다. 이것은 만세 전에 이미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은밀한 지혜다. 세상의 통치자들 중 아무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지혜다&lt;/strong&gt;. &lt;strong&gt;더욱이 이 비밀은 사탄 마귀조차 몰랐던 하나님의 경륜이었다&lt;/strong&gt;. 만일 사탄이 이 비밀을 알았더라면, 결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어 두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어떤 지혜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이유다. 세상의 지혜자들은 모두 드러내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 두셨다. 감추어 두셨기 때문에 원수가 알지 못하였고,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역이용당하였으며, 역이용당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인가! 우리는 이 십자가의 지혜 앞에 머리를 숙이고 경배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lt;strong&gt;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lt;/strong&gt;임을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은, 그것이 단순한 도덕적 모범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고 마귀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실현된 사건이기 때문&lt;/strong&gt;이다. &lt;strong&gt;사실 하나님의 지혜는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lt;/strong&gt;.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고, 그 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실현된 자리다. 인류를 구원하고 사탄 마귀를 멸하는 이 놀라운 방법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한 이유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표적 요구와 헬라인들의 지혜 추구를 모두 경험하였다. 그 환경 속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전하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amp;quot;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amp;quot;이었다. 세상의 눈에 미련하고 거리끼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그는 흔들림 없이 선포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하나님께서 사탄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성육신과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천사장 미가엘과 그 군대를 동원해서 사탄과 그 부하들을 즉시 제압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 몸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는가? 그 비밀은&amp;nbsp;에스겔서 28장 12절에서 15절에 기록된 말씀 곧 두로 왕을 빗대어 사탄 마귀의 본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겔 28: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사탄은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존재&lt;/strong&gt;였다. 에스겔서 28장 13절 하반절은 그를 위해 찬양하는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다고 기록한다. 그의 존재 목적 자체가 찬양이었다. &lt;strong&gt;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으며, 하와를 미혹하여 아담을 넘어뜨렸다. 그것은 사탄이 지혜의 이인자(二人者)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혜로운 자가 하와를 유혹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를 그릇된 방향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류를 넘어뜨렸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탄는 하와를 통해 아담이 범죄하게 함으로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amp;quot;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amp;quot;라고 말한 것은 이 사실을 반영한다. 베드로후서 2장 19절의 원리대로 &amp;quot;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amp;quot; 아담이 마귀에게 패하여 종이 되었고, 사탄은 이 세상 임금이 되어 온 인류를 사망 아래로 끌고 가는 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인간은 어미의 태에서 날 때부터 악한 영이 들어오는 상태가 되었고, 사탄은 온 세상 만국을 자기의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상황에서 &lt;strong&gt;하나님이 그냥 전능한 능력으로 사탄을 멸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신 데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lt;/strong&gt;.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여 하와가 먹는 것을 함께 먹었을 때, 사탄은 아담을 이긴 것이다. 그 결과 사탄이 아담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사탄을 이기려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이기신다면, 사탄은 &amp;quot;나는 하나님한테 졌지만 사람한테는 이겼다&amp;quot;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 레벨로 사탄과 싸워 이기신다면, 사탄은 하나님보다도 못하고 사람보다도 못한 존재로 영원히 확증되는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과 싸우면 그것은 하나님 레벨의 싸움이다. 그러나 사탄이 사람과 싸우면 그것은 사람 레벨의 싸움이다. &lt;strong&gt;하나님은 직접 사람이 되셔서, 사람 레벨로 사탄과 싸워 이기심으로써 사탄이 사람보다도 못한 존재임을 영원히 입증하신 것&lt;/strong&gt;이다.&lt;strong&gt; 이것이 성육신의 깊은 이유 중 하나였다&lt;/strong&gt;. 사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직접 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 수준으로 이겨서 사탄이 사람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영원히 확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존재로 지음받은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 2장 14절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되신 이유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만세 전에 하나님이 은밀하게 감추어 두신 플랜 B였다. 아무 천사도 이것을 알지 못했고, 사탄 마귀도 몰랐으며, 세상의 지배자들도 알지 못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시험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4:3-4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탄은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본 적도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보니, 예수님에게 &amp;quot;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amp;quot;이라고 물으며 시험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셨고, &lt;strong&gt;사탄은 3년 반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를 연구했다. 그리고 사탄이 마침내 내린 결론은 &amp;quot;그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일 수 있다&amp;quot;는 것&lt;/strong&gt;이었다. &lt;strong&gt;사탄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것이 사탄의 계략&lt;/strong&gt;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그러나 그 계략이 바로 사탄 자신의 패망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였다&lt;/strong&gt;. 사탄이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진 것이다. 에스겔서 28장에서 사탄은 원래 지혜가 충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원래 지혜의 이인자였던 사탄이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 앞에 완전히 패배한 것이다. 사탄의 지혜가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는 없다. 이것이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4절이 &amp;quot;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amp;quot;라고 고백하는 이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속죄와 생명 분배, 마귀 멸함을 동시에 이룬 방식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의 &lt;strong&gt;십자가 죽으심에는 두 차원의 목적&lt;/strong&gt;이 있었다. &lt;strong&gt;인간을 향한 차원&lt;/strong&gt;과 &lt;strong&gt;마귀를 향한 차원&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trong&gt;&amp;nbsp; 첫째, 인간을 향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신 것은 두 가지 일&lt;/strong&gt;을 이루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첫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속죄를 위한 죽음&lt;/strong&gt;이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이렇게 증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셨다. 이것이 속죄의 죽음이다. 인류는 죄로 인해 사망 아래 놓였고, 그 죄의 삯을 치러 줄 완전한 제물이 필요했다. 예수님이 그 제물이 되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모든 인간은 그 법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사탄에게 패한 것처럼, 예수님은 죄 없이 사탄의 손에 잡혀 죽으심으로써 사탄의 올무를 뒤집으셨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가장 거룩한 속죄의 행위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생명 분배를 위한 죽음&lt;/strong&gt;이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생명을 많은 사람에게 분배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amp;quot;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amp;quot;고 말씀하셨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amp;quot;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amp;quot;라고 증언한다. 예수님은 생명 주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로마서 8장 2절이 말하는 &amp;quot;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amp;quot;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 생명 분배의 결과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원래 하나님의 계획(플랜 A)은 아담에게 속죄없이 그냉 생명을 분배해주는 것이었다. 아담이 생명나무를 따 먹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귀의 미혹으로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속죄가 추가로 필요하게 되었다(플랜 B). &lt;strong&gt;하나님은 지혜가 무궁하시므로, 인류가 타락한 경우에 대비한 계획까지 만세 전에 이미 정해&lt;/strong&gt; 두셨다. 하나님의 경륜은 타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락하면 타락한 대로, 타락하지 않으면 타락하지 않은 대로,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경우의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 안에는 속죄와 생명 분배라는 두 가지 목적이 동시에 담겨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두 가지 목적이 동시에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lt;/strong&gt;이다. 완전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생명을 주실 수 있었고,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진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는 창세 이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 안에서 인간의 죄 문제와 사탄의 권세 문제, 그리고 생명 분배의 문제가 모두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24절이 말하는 바 &amp;quot;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amp;quot;라는 선언의 가장 구체적인 의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 마귀를 향한 차원에서는, 십자가는 사탄 마귀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한 사건&lt;/strong&gt;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력자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탄의 패망이었다. 죄 없는 자는 죽음의 법 아래 있지 않다. 죄의 삯이 사망이므로(롬 6:23),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인 사탄은 불법을 행한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의 권세를 상실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였다. 그러므로&amp;nbsp;요한일서 3장 8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 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17-18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이제 예수님이 가지셨다. 사탄이 쥐고 있던 죽음의 권세를 예수님이 빼앗아 오신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서 15절은 이 사실을 선명하게 증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무력화&amp;quot;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amp;#39;무장 해제시켰다&amp;#39;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십자가의 그날, 사탄과 그 모든 부하들의 계급장이 떨어졌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대적할 수 있다. 능력은 있으나 계급장이 없는 귀신들은 예수 이름으로 명하면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속죄와 생명 분배, 그리고 마귀 멸함을 동시에 이루어 낸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단순히 희생의 상징으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인류의 구원과 생명 분배, 그리고 마귀의 멸망이 단 하나의 사건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이 선언하는 &amp;quot;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amp;quot;라는 말씀의 가장 풍성한 의미다. 이 지혜를 아는 자는 복된 자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아가서가 지혜문학의 최고봉으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골로새서 2장 2절과 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lt;/strong&gt; 있다. 그런데 &lt;strong&gt;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층위의 비밀&lt;/strong&gt;이 있다. &lt;strong&gt;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lt;/strong&gt;이고(골 2:2), &lt;strong&gt;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lt;/strong&gt;다(엡 3:4). &lt;strong&gt;이 두 가지 관계를 가장 깊고 아름답게 담아낸 구약의 책이 바로 &amp;#39;아가서&amp;#39;다.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요, 성경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며, 하나님이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지를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노래요 연극 대본이요 가곡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모든 식물, 모든 색깔, 모든 의복, 심지어 모든 숫자까지 다 상징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성령의 감동과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탐구가 있는 자에게만 열리는 비밀이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탐구하고 그 결론이 헛됨이었음을 깨달은 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가서라는 노래와 연극으로 표현해 냈다. 솔로몬이 진정으로 지혜에 이르렀다는 것은 바로 이 아가서를 기록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지혜 탐구의 결론이요, 그 결론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에는 &lt;strong&gt;두 가지 대표적인 식물&lt;/strong&gt;이 등장한다. &lt;strong&gt;하나는 고벨화&lt;/strong&gt;요, 또 &lt;strong&gt;하나는 백합화&lt;/strong&gt;다. 먼저, 아가서 1장 14절은 신부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고백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amp;#39;엔게디&amp;#39;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숨었던 들염소의 바위, 곧 유대 광야의 오아시스다(삼상 24:1). 히브리어로 &amp;#39;엔(עֵין)&amp;#39;은 눈, 즉 샘을 뜻하고, &amp;#39;게디(גְּדִי)&amp;#39;는 염소를 뜻한다. 곧 &amp;#39;염소의 샘&amp;#39;이라는 의미다. &lt;strong&gt;광야 한복판에서 생명수가 솟아오르는 그 샘 곁의 포도원에 핀 고벨화. 고벨화는 적갈색의 꽃으로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lt;/strong&gt;한다.&lt;strong&gt;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은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을 상징&lt;/strong&gt;한다. 그 자리에 피어 있는 적갈색의 고벨화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다. 그냥 어디서나 피어날 수 있는 평범한 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솟아나는 바로 그 자리에 피어 있는 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나누게 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또한 아가서 2장 2절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이렇게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amp;#39;가시나무&amp;#39;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저주받은 세상&lt;/strong&gt;을 상징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 땅은 가시덤불을 내었고(창 3:18), 인간은 죄를 짓고 고통과 상처 속에 살아가는 가시나무 같은 환경 속에 있다. &lt;strong&gt;그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한 송이 백합화. 여기서 백합화는 흰색의 릴리가 아니라 빨간색의 아네모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세상 한복판에서 아름답게 피어 있는 성도, 곧 교회를 가리킨다. 아무리 어렵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존재,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정체&lt;/strong&gt;다. 이것도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공부하게 될 것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lt;strong&gt;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사랑 이야기로 담아낸 책&lt;/strong&gt;이다. 그 사랑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lt;strong&gt;그리스도의 피 흘린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lt;/strong&gt;을 만난다. 솔로몬은 수많은 여인들을 사랑한 왕이었으나, 아가서의 신랑은 단 한 명의 신부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다. 이 신랑이 그리스도요, 이 신부가 교회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자는, 그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아가서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신부다. 가시나무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백합화로 불림받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장 27절은 &amp;quot;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amp;quot;고 증언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그 사실이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우리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시나무 세상 속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아가서가 전하는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그 사랑의 비밀이 곧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비밀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세상의 지혜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도,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도, 이 세상이 자랑하는 어떤 지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이 비밀에는 미치지 못한다. 에베소서 3장 10절은 이 비밀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고 증언한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가 드러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아가서가 노래하는 바로 그 백합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시편 147편 5절의 고백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찬양의 응답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47: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지혜는 무궁하시다. 세상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 곧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시고 마귀를 멸하신 그 지혜는,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4절의 고백을 불러일으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롬 11:33-34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의 세 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동방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 곧 세상의 모든 지혜를 섭렵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바닷가의 모래 같은 총명과 지혜를 부어 주셨고, 그 결과 욥기의 지혜와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에 대한 솔로몬의 결론은 전도서 1장 2절의 &amp;quot;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였다. 세상의 지혜는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영생을 주지 못하며,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참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골로새서 2장 3절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도, 헬라인이 찾는 철학적 지혜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만세 전에 감추어 두셨던 은밀한 경륜, 곧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사탄 마귀를 멸하신 성육신과 십자가의 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을 향하여는 속죄와 생명 분배를 이루었고, 마귀를 향하여는 그 권세를 무장 해제시키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사탄은 스스로 함정에 빠져 죄 없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권세를 상실했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 7절과 8절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였다. 이 지혜가 만세 전에 감추어져 있었고,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났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그 모든 지혜의 탐구 끝에 아가서를 기록하였다.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으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책이다. 가시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처럼 이 땅에서 아름답게 피어 있는 성도,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아가서는 노래한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임을 깊이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혜의 여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쫓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야 한다. 시편 147편 5절의 고백처럼 &amp;quot;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amp;quot;라고 찬양하며 그 무궁한 지혜를 날마다 탐구해야 한다. 또한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4절의 고백처럼 &amp;quot;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amp;quot;라고 경탄하며, 그 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내가 세상 지혜를 찾아다니던 삶을 돌이켜 보라! 더 많이 알려고, 더 많이 쌓으려고, 더 많이 누리려고 달려온 삶의 끝에서 솔로몬처럼 &amp;quot;헛되도다&amp;quot;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제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이 지혜를 가진 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구원과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어떤 지혜도, 어떤 철학도, 어떤 과학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마귀를 이기는 복된 성도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지혜를 기억하며 그분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19일(금)&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 0; padding: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Arial, sans-serif; font-size: 16px; line-height:; color: #222; background: #fff; } p { margin: 0 0 1em 0; } .title {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font-size: 18px; margin-bottom: 1.2em; } .subtitle { font-size: 17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 } .bible {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margin: 0 0 1em 0; } .normal { margin: 0 0 1em 0; } .date { margin-top: 1.2em; } &lt;/style&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구약의 지혜자 솔로몬과 신약의&amp;nbsp;&lt;strong&gt;그리스도 예수를 대조&lt;/strong&gt;하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의 지혜&lt;/strong&gt;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세상 지혜를 섭렵했으나 결국 헛됨을 고백한 솔로몬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amp;nbsp;&lt;strong&gt;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실체&lt;/strong&gt;이자 지혜 그 자체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amp;nbsp;&lt;strong&gt;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lt;/strong&gt;을 마귀를 멸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고도의 전략이자 무궁한 지혜&lt;/strong&gt;로 풀이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몰아내고,&amp;nbsp;&lt;strong&gt;성령의 인도하심&lt;/strong&gt;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설계도를 발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인포그래픽_십자가의_지혜_인포그래픽2026-06-16.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c5f46754b7a19e2919802ab43bddab4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3bb482d386b2d358e0c3a53a9624708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ba377c5e3d4b76e9ca2324836824549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5bd6607d28561faf8cfc1e4f440312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396e6e10ae03fd3b412173ec3ae12cb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e855c6af444f9ae4b2fbbccbce5170c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95d0c0ad83578d9369daa2aef5a0811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bdbc3219bd0fa9e2a3bcf1010b7d860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bb3a4d4c77ecef05a0fe02dff9cfc33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65c23315f2019167988beddbae471c1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ebf427f4436cf63f1bd558f92b5eb21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eead02f8a60e87133b8630e9bb289cb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5b095c4a9646aca08d4a7c6a08ca2a2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5a10a4985f2a95aa595388a7ec95333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Wisdom_of_God.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48238d1a2a5d972c820869d6c07e3e5c.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또 다른 요약본입니다(정제된 요약)]&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27)] 다윗의 아들 솔로몬(05) 지혜의 3가지 방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고전1:18~31)&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구약 역사에서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았고, 평화의 시대를 누렸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백성을 재판하고 열방을 놀라게 한 왕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자체로 완전한 목적지가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의 사람이다. 구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지만, 신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살펴볼 때에는 반드시 솔로몬에게서 끝나지 말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다고 말씀하신 뒤, &amp;ldquo;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rdquo;고 선언하셨다(마 12:42). 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가 작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지혜가 매우 컸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의 지혜가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지혜란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지으셨으며, 인간을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며,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사람을 어떻게 세우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데서 열린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필자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필자가 뛰어난 IQ를 가진 것이 아니라 평범한 IQ를 가졌다는 것을 중학교 2학년 때에 IQ검사를 통하여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고 그 때 설교 중에 야고보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amp;quot;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amp;quot;고 하는 말씀이었다(약 1:5). 그래서 그때부터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성경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오는 그러한 지혜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자 하며, 성령께서 열어 주시는 계시의 빛 안에서 있을 때에 얻게 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분이시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고 지혜를 누렸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 자체로 오셨다&lt;/strong&gt;. 특히 &lt;strong&gt;사도 바울은 &amp;ldquo;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amp;rdquo;를 하나님의 지혜&lt;/strong&gt;라고 선포했다.&lt;strong&gt;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났다&lt;/strong&gt;는 뜻이다. 그래서 &lt;strong&gt;이 시간에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섭렵한 세 가지 지혜가 무엇이며, 그 지혜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완성되는지를 살펴보고자 &lt;/strong&gt;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2.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섭렵한 세 지혜는 무엇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지혜의 왕이었다는 말은 막연한 찬사가 아니다. 성경은 그가 어떤 지혜를 가졌는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열왕기상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주셨으며, 그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증언한다(왕상 4:29-30).&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왕상 4:29-30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솔로몬이 섭렵한 지혜는 세 가지 방면으로 정리된다. &lt;strong&gt;첫째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lt;/strong&gt;다. 이는 욥기서에 나타나는 지혜와 연결된다. 욥기서는 동방 사람 욥과 그의 친구들이 고난의 문제, 의인의 문제, 하나님의 섭리, 인간 지혜의 한계를 놓고 씨름하는 책이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만난 뒤 자신이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동방의 지혜는 인간의 의로움과 고난의 이유를 따지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인간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는 지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욥기서의 결론은 명확하다. 지혜는 인간이 자기 머리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이 말씀은 지혜의 본질을 단번에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욥 28: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애굽 사람들의 지혜&lt;/strong&gt;다. 애굽은 고대 세계에서 문명과 학문과 통치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애굽의 지혜는 생활상의 지혜, 통치의 지혜, 처세의 지혜, 문명의 지혜를 포함한다. 잠언에는 이러한 생활 지혜가 많이 나타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의 금 사과와 같으며, 게으름은 가난을 불러오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이 땅의 삶을 질서 있게 만드는 실제적 지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잠언의 생활 지혜는 단순한 세상 처세술로 끝나지 않는다. 잠언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을 여호와 경외에 둔다(잠 1:7, 9:10). 그러므로 잠언은 애굽식 생활 지혜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지혜로 올라간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lt;/strong&gt;다. 솔로몬은 동방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지혜를 받았다. 그 지혜로 그는 백성을 재판했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열방의 왕들이 찾아올 만큼 탁월한 통찰을 나타냈다. 그러나 솔로몬이 경험한 모든 지혜와 부귀와 사업과 쾌락의 마지막 결론은 전도서에서 드러난다. 그는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집을 지어 보고, 포도원을 만들어 보고, 정원을 꾸며 보고, 노비와 재물과 노래하는 남녀와 처첩과 학문과 사업을 다 경험했지만, 하나님 없는 인생의 결론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위대함은 세상 지혜를 많이 가졌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세상 지혜의 끝을 보고,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증언했다(전 12:13-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이 섭렵한 세 가지 방면의 지혜는 동방의 지혜, 애굽의 지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지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왕이지만,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3.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골로새서 2장 3절은 &lt;strong&gt;그리스도 안에 &amp;ldquo;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amp;rdquo;가 감추어져 있다&lt;/strong&gt;고 말한다. 여기서 지혜는 헬라어로 &amp;#39;소피아&amp;#39;, 지식은 &amp;#39;그노시스&amp;#39;, 보화는 &amp;#39;데사우로스&amp;#39;라는 말과 연결된다. 이는 단순한 정보나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셨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보이시는 구원의 비밀을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골 2:2-3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lt;strong&gt; &amp;ldquo;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amp;rdquo;&lt;/strong&gt;라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비밀은 어떤 철학 체계나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 안에서 창조와 구속과 심판과 왕국의 경륜이 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모르면 성경을 많이 읽어도 중심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로 연결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그리스도 안에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성경의 모든 핵심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된다는 뜻이다. 창세기의 생명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lt;/strong&gt;된다. 성막의 제사와 피 뿌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된다. 다윗의 왕권도, 솔로몬의 지혜도, 성전도,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도,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인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도 모든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단지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고, 성경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데 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 이는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열려야 한다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지혜의 중심&lt;/strong&gt;을 아는 것이다. &lt;strong&gt;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lt;/strong&gt;이고(골 2:2),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엡 3:4).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부로 교회를 준비하신다. 이 비밀은 아가서에서 구약적 상징과 사랑의 노래로 감추어져 있고,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로 드러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결국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리스도를 지혜의 창고로 제시한다. 이 세상 지혜는 어떤 분야에는 유익할 수 있으나, 사람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의 경륜을 열어 주지는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람이 왜 지음받았는지, 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생명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사탄 마귀가 어떻게 패배했는지, 교회가 어떤 신부로 준비되는지가 열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4. 표적과 헬라 지혜는 왜 참 지혜가 될 수 없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다(고전 1:22). 여기서 표적은 눈에 보이는 기적과 능력의 증거를 가리킨다. 지혜는 헬라 철학과 인간 이성의 탐구를 가리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 유대인의 표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결코 참 지혜가 될 수 없다&lt;/strong&gt;.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라면 눈에 보이는 강력한 표적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출애굽의 기적, 광야의 만나, 엘리야의 불, 모세와 같은 능력을 기대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계속 표적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요나의 표적은 죽음과 사흘 후의 살아남을 가리키며,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한다(마 12:39-40).&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마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표적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표적을 따라가는 신앙은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 있다. 사람이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을 수 있고, 병 고침을 받고도 그리스도를 모를 수 있으며,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경험하고도 십자가의 도를 붙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적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일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표적 자체가 목적이 되면 참 지혜가 되지 못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 이 세상 것에서 지혜를 찾았던 헬라인들이 찾은 지혜도 마찬가지로 참된 지혜가 될 수 없다&lt;/strong&gt;. 그들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세계가 물에서 나왔는지, 불에서 나왔는지, 공기에서 나왔는지, 인간과 진리와 윤리가 무엇인지 탐구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왜 세상의 지혜는 한계가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느 정도까지만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혜는 정작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악한 영들의 실제를 알려주지 못한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사람을 준비시켜주시도 못한다. 그러므로 헬라인의 지혜는 참 지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피조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지혜일 뿐,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을 여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다(고전 1:21).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오만한 지혜를 무너뜨리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유대인의 표적 추구와 헬라인의 지혜 추구는 모두 한계를 가진다. 하나는 감각과 능력 체험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성 안에 갇힌다.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계시의 절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5.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추상적인 원리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amp;ldquo;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amp;rdquo;고 말했다(고전 1:23).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amp;#39;하나님의 능력&amp;#39;이요 &amp;#39;하나님의 지혜&amp;#39;라고 선언했다(고전 1:2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인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들은 능력의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그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다. 또한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 철학적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 처형당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만세 전에 감추어 두신 지혜가 드러난 자리였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고린도전서 2장 7절은 &lt;strong&gt;이 지혜가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졌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lt;/strong&gt;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lt;strong&gt;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lt;/strong&gt;을 보아야 한다. &lt;strong&gt;하나님은 사람을 생명나무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와 왕노릇할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탄 마귀의 미혹을 받아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지혜를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amp;#39;성육신&amp;#39;과 &amp;#39;십자가 사건&amp;#39;&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이유는 그 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성취되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 했다(롬 6:23).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멸망시키는 대신,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 없는 사람으로 죽으셨다. 그리하여 죄에 대한 공의가 집행되었고, 죄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로, 십자가는 인간의 구속과 생명을 해방하여 분배해주는 자리&lt;/strong&gt;였다. 먼저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량하셨다(막 10:45).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속죄를 위한 행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가지신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요 12:24).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죄값을 치르는 사건만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부활 후 성도들에게 분배되는 사건임을 나타낸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로, 더 나아가 십자가는 사탄 마귀를 무너뜨린 자리&lt;/strong&gt;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이 지혜를 알지 못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죽음이 오히려 자신의 권세를 무장 해제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될 줄 몰랐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바울이 &amp;ldquo;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amp;rdquo;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고전 2:2). 십자가는 모든 지혜의 중심이다. 십자가를 알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죄의 무서움을 알게 되며, 생명의 길을 알게 되고, 사탄의 패배를 알게 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6. 왜 하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로 마귀를 멸하셨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를 당장 소멸시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힘의 방식으로 사탄을 처리하지 않으셨다. &lt;strong&gt;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지혜와 법적 질서에 합당한 방식으로 마귀를 멸하기로 하셨다. 그 방법이 바로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로, 성육신은 한 분 하나님께서 혈과 육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사건&lt;/strong&gt;이다. 이 일로 인하여 사탄마귀를 사람이신 예수님을 만만한 상대로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비밀을 알게 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장 14절은 성육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했으므로 그분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다(히 2: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 사탄은 지혜로운 피조물이었다. 에스겔 28장은 두로 왕을 빗대어 타락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말한다. 그는 지혜가 충족하고 온전히 아름다웠으나, 결국 교만과 불의로 타락했다(겔 28:12, 15).&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겔 28: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겔 28: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하나님은 그 타락한 지혜자를 더 높은 지혜로 꺾으셨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명령 한마디로 사탄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사람으로 이기는 방식을 택하셨다. 이는 사탄이 하나님과 맞서는 수준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앞에서도 패배하는 존재임을 드러내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amp;ldquo;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amp;rdquo;이라고 말했다(마 4:3). 이 말은 그가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알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비밀은 만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고, 사탄은 그 비밀을 알지 못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합법적으로 사탄마귀를 멸하는 사건이 되었다. 사탄은 예수님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므로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세와 군중을 움직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탄의 결정적 패배가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가 있는 사람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사탄은 죄 없는 분을 죽임으로 불법을 행했고, 그 결과 죽음의 권세를 빼앗기게 되었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자신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씀하셨다(계 1:17-18). 이는 사탄이 쥐고 있던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께 넘어갔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계 1:17-18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이 방식은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가 함께 작동한 방식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탄을 단순히 힘으로 없애셨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의 위치에서 사탄을 이기셨다. 이것은 사탄의 교만을 가장 깊이 꺾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이 인간보다 우월한 영적 존재라고 여겼으나,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앞에서 패배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낮아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지혜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더 높은 지혜였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육신은 인류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한 방법이었고, 사탄에게는 덫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하나님은 혈과 육을 입고 오심으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이 불법을 행하게 하셨으며, 부활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인 이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7. 십자가는 속죄와 생명 분배와 마귀 멸함을 어떻게 이루었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한 가지 의미만 가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는 죽음이며, 사탄 마귀를 멸하는 죽음이다. 이 세 가지를 분리하면 십자가의 지혜를 온전히 볼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첫째, 십자가는 속죄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막 10:45). 여기서 대속물은 헬라어 뤼트론과 연결되며, 값을 치르고 놓아 주는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죄 때문에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둘째, 십자가는 생명 분배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죄값을 처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해방되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사건임을 가리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으로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신다(고전 15:45).&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도 생명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주님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한다(요 10:10). 그러므로 성육신과 십자가의 목적은 단지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안에 넣어 주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와 왕노릇할 자로 세우는 데 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셋째, 십자가는 마귀를 멸하는 죽음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함이라고 말한다(요일 3:8). 마귀의 일은 죄를 짓게 하고, 죽음의 권세 아래 묶어 두며, 귀신들을 통해 사람의 몸과 삶을 더럽히고, 결국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마귀의 일을 깨뜨리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골로새서 2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무력화하시고 구경거리로 삼으셨다고 말한다(골 2:14-15). 여기서 무력화는 영적 권세의 무장 해제를 의미한다. 귀신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십자가 이후 법적 권세를 잃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내보낼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십자가는 인류 편에서는 속죄와 생명의 사건이고, 사탄 편에서는 패배와 무장 해제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죄를 처리하시고, 생명을 분배하시고, 마귀를 멸하셨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8. 아가서는 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은 최고봉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지혜문학 가운데 가장 깊이 감추어진 책이다. 욥기와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를 직접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에는 지혜라는 단어가 중심 주제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지혜를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의 최종 목적을 사랑의 노래와 상징 안에 감추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는 단순한 남녀의 연애시가 아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정경 전체의 빛에서 보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예표적으로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하시는 것은 단순히 죄 용서받은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교회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1장 14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amp;ldquo;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amp;rdquo;라고 부른다(아 1:14). 엔게디는 광야 가운데 샘이 있는 곳이며,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장소와도 연결된다. 고벨화는 히브리어 코페르와 관련되며, 식물로는 고벨화 혹은 헤나를 가리키지만, 같은 어근은 덮음과 속전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설교적 관점에서 이는 그리스도의 피와 대속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2장 2절에는 &amp;ldquo;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amp;rdquo;라는 표현이 나온다(아 2:2). 가시나무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저주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난 꽃은 죄와 고통과 저주의 세상 가운데 나타난 순결한 사랑과 생명의 표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춘 책이다. 특히 그 사랑은 피 흘림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는 단지 죄인을 용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어 교회를 신부로 준비시키신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에베소서 5장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다가,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5:31-32). 이 말씀은 아가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바라보게 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이때 아가서의 상징을 함부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 포도원은 열매 맺는 생명과 돌봄의 영역을 가리키고, 향품은 그리스도의 향기와 성도의 성숙을 생각하게 하며, 신랑의 찾아옴과 신부의 응답은 은혜와 믿음의 질서를 보여 준다. 아가서는 상징을 통해 감춘 책이지만, 감추었다는 말은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전체의 흐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피 흘림, 교회의 신부 됨이라는 큰 경륜 안에서 하나씩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결국 지혜의 끝은 처세가 아니다. 지혜의 끝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교회가 신부로 준비되는 것이다. 아가서가 지혜문학의 최고봉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언은 지혜의 길을 가르치고, 전도서는 해 아래 인생의 헛됨을 폭로하며, 욥기는 인간 지혜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 모든 지혜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준비에 있음을 노래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에는 단순한 연애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그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피, 사랑, 신부의 준비, 교회의 부르심,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고 말한다(계 19:7). 이것이 아가서가 향하는 최종 지점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섭렵한 세 가지 지혜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동방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 사람들의 지혜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두루 경험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예표였으며, 그 자체로 완성은 아니었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세상 지혜는 삶의 한 부분을 도울 수 있다. 동방의 지혜는 고난과 인간 한계를 생각하게 하고, 애굽의 지혜는 생활과 통치와 처세의 유익을 줄 수 있다. 헬라의 지혜는 이성의 탐구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지혜도 사람을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그 십자가에서 속죄가 이루어졌고, 생명이 분배되었으며,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가 멸망의 판결을 받았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이길 줄 알았으나,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도리어 자기 권세를 잃었다. 이것이 만세 전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이 지혜를 단순한 교리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지혜 안에서 회개해야 하고, 악한 영들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또한 장차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아가서가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의 준비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참 지혜자는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다. 참 지혜자는 표적만 좇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붙드는 사람이다. 참 지혜자는 철학적 사유만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성육신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아는 사람이다. 또한 참 지혜자는 자기 안의 죄와 악한 영의 문제를 처리하고, 성령의 생명 안에서 장차 왕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사람이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amp;nbsp;이제 우리는 솔로몬을 통하여 지혜를 보되, 솔로몬에게 머물지 않아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를 지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 잠언의 지혜를 지나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어야 한다. 전도서의 허무를 지나 영원한 생명을 보아야 한다. 아가서의 사랑을 지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서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normal date&quot;&gt;2026년 06월 19일(금)&lt;/p&gt; &lt;p class=&quot;normal&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c39ded33b8d18837d27490155572170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37dc38f01b4ebe6ead3fe6201143d2c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9694868830befadaeed778fa18493a4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c4f74e8b81a8ef3ca388a857aca92da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4f3338b203a4dd49d16935550bdc8fa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04f1bb13057b8d97c6ecffaa3384b9a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b5e11adf520daadda83224732128439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09146fb46c6a3fe2b2be80268a13d67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dc05b39c84d04bb2e586acd295bb063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fb6b02f645f93b6c4cb19d0a238cc91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a00e568714ea17d0051b75f61bb025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7)] The_Hidden_Cross_Masterpla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606/260/c6b53bdb31e7cbbd36f26e6a8109843e.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6)] 다윗의 아들 솔로몬(04)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2)(잠8:11~36)_2026-06-18(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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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8T08:36:13+09:00</published>
		<updated>2026-06-18T22:05:29+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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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6)] 다윗의 아들 솔로몬(04)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2)(잠8:11~3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lMu5KPPQsw 1. 들어가며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왕의 예표를 보여 주었다면, 솔로몬은 전쟁 이후의 평화와 지혜를 가진 왕의 예표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연구할 때에는 단순히 지혜로운 왕, 성전을 건축한 왕, 부귀영화를 누린...</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6)] 다윗의 아들 솔로몬(04)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2)(잠8:11~36)&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KlMu5KPPQsw &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KlMu5KPPQsw?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left: 0; margin-right: 0; padding-left: 0; padding-right: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sans-serif; font-size: 14pt; line-height: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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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bible&quot;&gt;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남긴 지혜문학은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과연 참 지혜란 무엇인가. 세상 학문과 처세술과 경험이 말하는 지혜가 전부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창조 전에 가지셨고, 때가 차매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 지혜가 있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의 지혜 추구와 지혜문학의 흐름을 따라, 참 지혜가 무엇이며 그 지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2. 왜 인생에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사람은 살아 보지 않은 길을 간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단순한 지식보다 앞길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식은 이미 정리된 내용을 많이 아는 능력이라면, 지혜는 그 지식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르게 쓰는 능력이다. 지식은 자료를 쌓지만, 지혜는 길을 찾는다. 지식은 머리를 채우지만, 지혜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히브리어로 지혜는 &amp;lsquo;호크마&amp;rsquo;다. 이 말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 장인이 재료를 다루는 능력, 통치자가 백성을 재판하는 능력,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혜는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율하는 능력이다. 솔로몬이 구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부귀나 장수나 원수의 생명을 먼저 구하지 않고,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왕상 3: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lt;/p&gt; &lt;p&gt;&amp;nbsp;&amp;nbsp;인생의 젊은 날에는 시간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젊음 전체가 헛된 수고로 소모될 수 있다. 전도서가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은 우리보다 먼저 인생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 본 사람처럼 말한다. 그는 해 아래에서 사람이 붙잡으려는 것들이 결국 무엇으로 끝나는지를 증언한다(전 1:2-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lt;/p&gt; &lt;p&gt;&amp;nbsp;&amp;nbsp;이 고백은 인생을 포기하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하는 경고다. 세상의 성취를 전부 얻어도 하나님을 모르면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는 은혜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직접 다 겪어 보고 나서야 허무를 깨닫는다. 그러나 지혜를 얻은 사람은 말씀을 통해 미리 알고 돌이킨다. 그러므로 지혜는 시간을 아끼게 하고, 인생을 보호하며, 장차 심판대 앞에 설 준비를 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3. 솔로몬은 세상 모든 것을 누려 보고 무엇을 깨달았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전도서는 솔로몬이 세상 모든 것을 실험해 본 뒤 남긴 결산서와 같다. 전도자는 자신을 &amp;ldquo;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amp;rdquo;이라고 소개한다(전 1:1). 이것은 단순한 신분 소개가 아니다. 그는 왕권과 부와 지혜와 기회를 가진 사람이었다. 일반 사람은 돈이 없어서 못 해 보고, 권력이 없어서 못 해 보고, 시간이 없어서 못 해 본다. 그러나 솔로몬은 거의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전도서 2장을 보면 솔로몬은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도 술과 쾌락과 사업을 실험했다. 그는 큰 사업을 벌였고, 집들을 지었고, 포도원을 만들었고, 동산과 과원을 만들었고, 물을 대기 위한 못을 팠다. 남녀 노비를 두었고, 소와 양 떼를 많이 소유했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를 쌓았다. 노래하는 남녀를 두었고, 인생들이 기뻐하는 여러 즐거움도 누렸다(전 2:4-8).&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2:4-8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들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은 단순한 사치의 기록이 아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해 아래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붙잡는 거의 모든 항목을 실험했다. 사업, 건축, 자연, 재물, 예술, 음악, 쾌락, 학문, 명성, 권력, 사랑의 경험까지 다 건드려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놀랍다. 그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전 2:10-1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2:10-11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증언을 정확히 들어야 한다. 그는 창조 세계 자체가 악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사업도 악한 것이 아니고, 예술도 악한 것이 아니며, 재물과 지식과 사랑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 없이 그것들을 붙잡을 때다. 하나님 없는 성취는 마지막에 영혼을 채우지 못한다. 하나님 없는 즐거움은 지나가고 나면 더 큰 공허를 남긴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세상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내는 책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도서의 결론은 허무가 아니다. 결론은 하나님 경외와 심판 준비다. 솔로몬은 모든 말을 다 들은 후에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 말한다(전 12:13-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이 전도서의 영적 팩트다. 해 아래 모든 수고는 심판대 앞에서 다시 평가된다. 사람은 죽으면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해 아래에서 무엇을 얼마나 누렸는가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준비되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4. 지혜문학은 왜 모두 &amp;lsquo;여호와 경외&amp;rsquo;로 귀결되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구약의 지혜문학을 보면 서로 다른 길을 지나 같은 결론으로 모인다. 욥기는 고난의 자리에서 지혜를 묻는다. 시편은 예배와 눈물과 전쟁과 회개의 자리에서 지혜를 노래한다. 잠언은 일상의 말과 돈과 분노와 게으름과 부지런함 속에서 지혜를 가르친다. 전도서는 부귀영화와 쾌락의 끝에서 지혜를 증언한다. 그리고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 속에 가장 깊은 지혜를 숨겨 둔다.&lt;/p&gt; &lt;p&gt;&amp;nbsp;&amp;nbsp;욥기는 동방 사람들의 지혜를 배경으로 한다. 욥과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한다. 친구들은 단순한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판단한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그들이 생각한 방식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욥기는 인간 지혜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람이 자기 경험과 논리로 하나님의 경륜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는 마지막에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께 돌린다(욥 28:28).&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욥 28: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squo;경외&amp;rsquo;는 히브리어 &amp;lsquo;이르아&amp;rsquo;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심을 알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amp;lsquo;악을 떠남&amp;rsquo;은 단순한 도덕 수양이 아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죄의 길, 사탄과 귀신들의 역사, 더러운 욕망과 교만의 길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것이다. 성경의 지혜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는 실제 능력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도 같은 결론을 말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노래한다(시 111:10).&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시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잠언도 동일하다. 잠언의 첫머리는 여호와 경외가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포한다(잠 1:7). 그리고 잠언 9장은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근본이며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말한다(잠 9:10).&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전도서 역시 마지막에 하나님 경외로 끝난다. 그러므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서로 다른 경험과 문학 형식을 가지고 있어도 한 가지 결론을 향한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은 크고 화려해도 마지막에는 심판을 준비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혜는 결국 자기 의와 자기 욕망을 섬기는 도구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신약의 빛에서 보면 이 하나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열렸다. 구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신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 이때 성도는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사도들의 권면도 귀하지만, 그 모든 권면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제자리를 얻는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모든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9).&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지혜문학의 결론은 단순히 &amp;ldquo;착하게 살자&amp;rdquo;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장차 심판대 앞에 설 영혼의 운명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문학 전체가 여호와 경외로 귀결되는 이유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5. 잠언의 지혜는 왜 단순한 생활 처세술이 아닌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잠언을 처음 읽으면 생활 처세술처럼 보이는 구절이 많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름답고,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되며, 부지런한 자는 풍족하게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을 세상의 격언집이나 성공학 책처럼 읽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잠언의 중심을 놓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잠언은 생활 지혜를 말하지만, 그 뿌리는 여호와 경외다.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을 떠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법이다. 말, 돈, 가정, 성, 권력, 분노, 친구, 게으름, 부지런함은 모두 영적 문제와 연결된다. 사람의 말은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고, 돈을 쓰는 방식은 그 사람이 무엇을 섬기는지를 드러내며, 성적 절제는 하나님 앞에서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드러낸다.&lt;/p&gt; &lt;p&gt;&amp;nbsp;&amp;nbsp;잠언 3장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솔로몬은 아들에게 자신의 법을 잊지 말고 명령을 마음으로 지키라고 권한다. 그러면 장수와 평강이 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인자와 진리를 목에 매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말한다(잠 3:1-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3:1-3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법과 명령과 연결된다. 지혜는 단순히 상황을 잘 넘기는 기술이 아니다. 지혜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생활 지혜는 결코 세속적 요령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이 생명과 평강을 얻게 된다는 성경적 현실 인식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잠언 3장은 다시 지혜의 가치를 말한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가 복이 있으며, 지혜는 은보다 낫고 정금보다 유익하며, 진주보다 귀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혜는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한다(잠 3:13-18).&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생명나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생명나무는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는 단순히 이 땅에서 잘사는 기술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지혜가 생명나무라면, 지혜의 궁극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께 연결된다. 이 흐름은 결국 그리스도에게로 간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이다(요 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잠언을 읽을 때에는 겉으로 보이는 생활 교훈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그 생활 교훈 속에 창조 질서와 심판의 원리와 생명의 길이 들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세상도 유순한 대답이 좋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왜 유순한 대답이 필요한지를 더 깊이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며, 말 한마디가 성령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악한 영에게 틈을 주는 통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말과 행동을 정렬하는 영적 지혜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6. 잠언 8장의 지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잠언 8장은 지혜를 인격화하여 말한다. &amp;ldquo;나 지혜는&amp;rdquo;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여, 지혜가 명철과 지식을 가지고 있고, 왕들이 지혜로 다스리며,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지혜의 사랑을 입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장의 가장 깊은 부분은 창조 이전의 지혜에 관한 말씀이다. 지혜는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가지셨고, 땅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받았으며, 바다와 산과 들이 생기기 전에 있었다고 말한다(잠 8:22-26).&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잠 8:22-26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잠언 8장의 지혜를 피조물로 만들어서 그리스도도 피조물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계시와 맞지 않는다. 잠언 8장은 문학적으로 지혜를 인격화하여 말하는 지혜시다. 그러나 신약의 빛으로 보면 이 인격화된 지혜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날 하나님의 지혜를 예표적으로 바라보게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한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요 1:1-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동탄명성교회가 붙들어 온 한 분 하나님 신앙의 중요한 흐름을 보게 된다. 구약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과 지혜와 영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때가 차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분리된 두 번째 신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증언한다(요 1: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lt;/p&gt; &lt;p&gt;&amp;nbsp;&amp;nbsp;바울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른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일 수 있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골로새서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골 2:3).&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잠언 8장의 지혜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드러날 구원의 비밀을 향한다. 하나님은 지혜 없이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다. 또한 구원도 우연히 이루지 않으셨다. 창조 전부터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교회와 신부 준비와 최후 심판의 타임라인이 들어 있었다. 그 경륜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참 지혜를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다. 잠언을 많이 암송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잠언의 지혜가 향하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지혜의 중심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의 지식은 머리를 넓힐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영혼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한다. 그때 성도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잠언 8장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방식이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7. 아가서는 왜 솔로몬 지혜의 최종 결산인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책들 가운데 아가서는 특별하다. 잠언과 전도서는 지혜를 직접 말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amp;lsquo;지혜&amp;rsquo;라는 단어를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노래한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 신랑과 신부의 사모함, 찾아감과 만남, 향기와 포도원과 동산의 언어가 가득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가서를 단순한 연애시나 결혼의 노래로만 읽는다. 물론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면 아가서의 깊이를 다 보지 못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첫 절은 이 책을 &amp;ldquo;솔로몬의 아가&amp;rdquo;라고 부른다(아 1:1).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amp;ldquo;노래들 중의 노래&amp;rdquo;라는 최상급의 의미가 들어 있다. 솔로몬은 많은 노래를 지은 사람이었다. 열왕기상은 그가 노래를 천다섯 편 지었다고 말한다(왕상 4:32). 그 많은 노래 가운데 아가서는 가장 뛰어난 노래로 제시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아 1:1 솔로몬의 아가라&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왕상 4:32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lt;/p&gt; &lt;p&gt;&amp;nbsp;&amp;nbsp;왜 아가서가 솔로몬 지혜의 최종 결산인가. 그는 전도서에서 해 아래 모든 수고가 헛됨을 보았다. 잠언에서는 여호와 경외와 생명의 길을 가르쳤다. 그러나 아가서에서는 그 지혜의 깊은 결론을 사랑의 언어로 풀어 놓았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밝아지며, 결국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의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는 읽기 어려운 책이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장면이 어디서 바뀌는지, 신랑과 신부와 예루살렘 딸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아가서는 단순한 산문이라기보다 노래로 구성된 가곡시이며,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드라마처럼 읽어야 한다. 등장인물의 위치와 의상과 호칭과 이동을 살피면,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지혜의 방식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찾고, 기다리고, 사모하고, 정결하게 준비하고, 신랑에게 속하는 사랑이다. 신부는 사랑하는 자를 찾고, 신랑은 신부를 부른다. 이 흐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서 더 분명해진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다가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엡 5:31-32).&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 8장은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인간 사랑의 깊이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가장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영적 팩트의 결정적 증거다(아 8:6-7).&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역사적 삶을 보면 아가서는 더욱 뼈아프다. 그는 사랑을 노래했지만 많은 여인으로 인해 마음이 돌아섰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했다고 말한다(왕상 11:1,4).&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왕상 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왕상 11: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하나는 아름다운 예표다. 왕인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보여 준다. 다른 하나는 대조의 예표다. 솔로몬은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자기 신부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한다(요 13:1).&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결국 아가서의 지혜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감상적 사랑이 아니라 피 흘림으로 신부를 사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아가서의 언어는 향기롭지만, 그 궁극의 빛은 십자가의 핏빛 안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그래서 아가서는 솔로몬 지혜의 최종 결산이다. 참 지혜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는 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8. 참 지혜자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무엇을 준비하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는가. 전도서의 결론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지혜는 이 땅의 성공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영혼의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신약에서 예수님은 솔로몬을 직접 언급하셨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지만,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2:42).&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솔로몬 예표론의 핵심이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지만,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지혜의 왕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예수님은 참 성전으로 오셨다. 솔로몬은 평화의 시대를 누렸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참 평화를 이루셨다. 솔로몬은 사랑을 노래했지만,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셨다. 솔로몬은 말년에 흔들렸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성도는 솔로몬의 지혜에서 멈추지 않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구원은 세상 지혜로 얻지 못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믿음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회개하고, 죄와 악한 영의 역사를 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구원론과 종말론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은 뒤 천국에 간다는 막연한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 흘려 죄를 속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주시며, 다시 오셔서 각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반드시 회개와 순종과 신부 준비로 이어져야 한다. 그 길에서 지혜는 성도에게 마지막까지 필요한 등불이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지혜자는 악을 떠난다. 욥기 28장 28절은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했다. 이 말은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를 줄이는 수준이 아니다. 죄를 짓게 하는 어둠의 통로를 차단하고, 귀신들이 틈타는 습관과 욕망과 상처와 우상숭배의 흔적을 회개로 처리하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엡 6:12).&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지혜자는 그리스도를 알아 간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니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며,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를 속하시고, 부활하여 생명을 주시며,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왕이심을 아는 것이다. 이 지식은 사람을 경외로 이끌고, 회개로 이끌며, 신부 준비로 이끈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의 경륜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강림과 교회 시대와 재림과 심판과 새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이 타임라인을 모르면 성도는 현재의 고난과 훈련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를 얻은 자는 지금의 삶이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오늘의 말과 행동과 마음의 선택이 행위책에 기록되고, 마지막 심판과 상급과 천국에서의 위치와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참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악을 떠나야 한다. 회개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세상 모든 것을 누려 보고도 &amp;ldquo;헛되다&amp;rdquo;고 증언했다면,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헛된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붙들어야 한다.&lt;/p&gt; &lt;div class=&quot;section-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p&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솔로몬이 남긴 지혜문학을 통하여 참 지혜가 무엇이며, 그 지혜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 태어나 평화의 시대를 누렸고,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잠언을 통하여 삶의 질서를 가르쳤고, 전도서를 통하여 해 아래 모든 수고의 허무를 증언했으며, 아가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예표적으로 남겼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솔로몬은 완성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혜를 받았지만 끝까지 지혜롭게 살지는 못했다. 성전을 건축했지만 말년에는 이방 여인들의 영향으로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다. 사랑을 노래했지만 사랑의 순결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다른 한편으로 솔로몬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가 왜 반드시 오셔야 하는지를 증언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구약의 여호와 경외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로 밝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창조와 구원과 심판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지혜를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세상 지혜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도 그리스도를 알고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참 지혜는 마지막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죄를 회개하며, 악한 영들이 틈타는 길을 끊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문학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결론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해 아래 모든 것을 누려 보고도 영혼의 참 만족은 거기 없다고 증언했다. 이제 우리는 솔로몬의 증언을 지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의 사랑 안에 신부의 길이 있으며, 그분의 재림 앞에 지혜자의 최종 준비가 있다. 그리하여 솔로몬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알고, 악을 떠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2026년 06월 18일(목)&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amp;nbsp;&lt;strong&gt;성경이 말하는 참된 지혜의 본질&lt;/strong&gt;을 탐구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로 이어지는&amp;nbsp;&lt;strong&gt;지혜 문학의 흐름&lt;/strong&gt;을 분석하여, 세상의 지식과 쾌락은 결국 바람을 잡는 것과 같으나&amp;nbsp;&lt;strong&gt;여호와를 경외하고 심판을 준비하는 것&lt;/strong&gt;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약의 지혜가 신약의&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lt;/strong&gt;으로 완성된다고 역설하며, 지혜의 결정체인 아가서를 통해&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lt;/strong&gt;을 발견하는 것이 지혜의 정점임을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세상의 헛된 지혜를 넘어&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의 말씀을 깊이 공부&lt;/strong&gt;함으로써 심판대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진정한 지혜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목적을 지닙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인포그래픽_솔로몬_평화와_지혜의_왕_인포그래픽2026-06-16.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fd42d48a280c044e3ea0aebf0abedc9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c9f0bf8160b5473b6b17b2fb40af2b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4743370ebd6b3ee5d8da6addb6bf9f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99f1c9416b3883b38a039e3f395630d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28dd3220f344ec7cbea76f69da5115a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fbfccee5f5a82856f363506761cd0ea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397b93a2bddc817b21c07d870fb9de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02ec63a8077192546bb7e43580f55a1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478ad6af0a54173cfb46f395250080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336af133f512a5df5964a1ea83f7053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cbaafe222967b5e427bc92cca32694f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Beyond_Solomon’s_Shadow.pdf_11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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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141ae52fba3a9feb18b690fd9093eb7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77c266ce185eee1b470784eebc48097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eb09924dc4ddcdcb864965a7a906926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84d3151c2b0fde03c04d6f330215db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3db3a4eb112560a5056a5a24a49d726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1a2cf58491ee74aaeb335593a717087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43f4d18ec0d5c5de4c42e0a236564d1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8801630a665236e8bb6aac3deaf68d5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05f4a28369e29f256ebaca2c67ded72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c60e6ec3d56dc21a3721e66725d843b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6)] The_Divine_Wisdom_Invit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44/260/af3173c97477d00104056f0a2b30088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5)] 다윗의 아들 솔로몬(03)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1)(왕상3:1~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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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7T09:15:27+09:00</published>
		<updated>2026-06-17T22:34:31+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5)] 다윗의 아들 솔로몬(03)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1)(왕상3:1~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Dp4JsG_SQhU 1. 들어가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살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다. 솔로몬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왕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다윗을 보아야 한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었...</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5)] 다윗의 아들 솔로몬(03)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1)(왕상3:1~15)&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Dp4JsG_SQhU&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Dp4JsG_SQhU?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color: #38688c; font-size: 1.2em; font-weight: bold; margin-bottom: 16px; } .sermon-body { line-height: 1.8; margin-bottom: 8px; } .sermon-verse { color: #854ba0; font-weight: bold; margin: 12px 0; padding-left: 12px; border-left: 3px solid #854b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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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그 전쟁의 열매 위에서 평화를 누렸다.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은 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 다윗이 없으면 솔로몬의 평화가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에 능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평화의 아들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론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그 승리 위에서 자기 백성에게 참 평강을 주신다.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라, 승리 뒤에 오는 평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또 다른 특징은 지혜다. 그는 &amp;#39;지혜의 왕&amp;#39;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단순한 천재성도 아니고 처세술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또한 배우고 연구했다. 열왕기상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다고 말하고, 동시에 그의 지혜가 동방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하지만,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을 쓰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구한 지혜의 중심은 &amp;ldquo;듣는 마음&amp;rdquo; 곧 &amp;#39;지혜&amp;#39;이었다(왕상 3:9, 11). 그는 자기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주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구했다. 여기서 솔로몬은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며, 모든 사람을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다. 따라서 &lt;strong&gt;참 지혜는 단지 세상을 잘 사는 기술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도록 오늘을 준비하는 능력&lt;/strong&gt;이다. 그래서 &lt;strong&gt;이 시간에는 다윗의 전쟁 뒤에 온 솔로몬의 평화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강과 심판 지혜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2. 다윗의 전쟁 뒤에 왜 솔로몬의 평화가 왔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은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아름답게 묘사한다(왕상 4:25). 이스라엘 백성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안정이 아니다. 백성이 두려움 없이 살고, 수고의 열매를 누리며, 원수의 압박에서 벗어난 상태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amp;ldquo;샬롬&amp;rdquo;이다. 샬롬은 전쟁이 잠시 멈춘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온전함, 안전, 회복, 질서, 생명의 풍성함을 포함한다. 솔로몬이라는 이름도 평강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름부터 평화의 왕의 성격을 가진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이 평화는 솔로몬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다윗이 먼저 싸웠다. 다윗은 블레셋과 아말렉과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아람과 싸웠고, 내부의 반역과 외부의 침략을 막아 냈다.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준비하면서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 때문에 성전을 짓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다. 아버지가 피 흘리며 싸웠기에 아들은 평화 가운데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왕상 5:3-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5:3-4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영적 세계에서도 동일하다. 악한 영이 그대로 있는데 평화만 말하면 그것은 성경적 평화가 아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그대로 있고, 귀신들이 합법적 근거를 붙들고 있는데 &amp;ldquo;나는 평안하다&amp;rdquo;고 말하는 것은 자기 위로일 뿐이다. 다윗의 전쟁은 밖으로는 블레셋과 주변 민족을 향했고, 안으로는 사울의 추격과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난을 통과했다. 이것은 성도의 영적 싸움도 안팎에 있음을 보여 준다. 밖으로는 세상의 유혹과 시대의 영이 있고, 안으로는 마음속의 죄성과 가문의 영과 귀신의 참소가 있다. 밖의 대적만 말하고 안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안의 문제만 말하고 밖의 악한 영의 공격을 모르면 싸움의 범위를 놓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의 싸움을 통해 자기 안의 대적과 자기 밖의 대적을 함께 분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이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솔로몬이 평화를 누렸듯이, 성도도 회개와 믿음과 말씀으로 악한 영들과 영적 전쟁을 치러야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영적 전쟁을 피하면 일시적으로 조용할 수는 있지만, 악한 영의 지배는 끝나지 않는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의 말씀도 이 원리를 보여 준다. 성도는 죄와 싸워야 한다(히 12:4).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는 책망은, 신앙생활이 단순한 위로와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싸움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전쟁은 솔로몬의 평화를 준비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도의 참 평강을 준비했다. 그리고 성도의 회개와 영적 전쟁은 천국의 기업과 안식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죄와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다윗의 전쟁 뒤에 솔로몬의 평화가 온 이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3. 솔로몬의 평화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강을 예표하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었지만 완전한 평화의 왕은 아니었다. 그의 평화는 제한적이었다&lt;/strong&gt;. 그의 시대에는 사방의 대적이 잠잠했으나, 그의 말년에는 우상숭배와 타락의 씨앗이 왕국 안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lt;strong&gt;솔로몬은 실체가 아니라 예표다. 그는 장차 오실 참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lt;/strong&gt;다.&lt;/p&gt; &lt;p&gt;&amp;nbsp;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예표 안에서도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희생 제물의 비밀을 보여 주었다면, 다윗과 솔로몬은 왕권과 평강의 비밀을 보여 준다.&lt;strong&gt; 다윗은 싸우는 왕이었고 솔로몬은 평화를 누리는 왕이었다. 그러나 구속사 안에서 이 둘은 서로 끊어진 두 이야기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이루실 구원의 경륜을 예표&lt;/strong&gt;한다.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피 흘려 싸우셨고, 그 피로 평강을 주셨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평화가 다윗의 전쟁 위에 세워졌듯이, 예수님의 평강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 위에 세워졌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조건이 좋아질 때 잠시 생기는 안정이다. 돈이 생기고,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안은 그보다 깊다. 죄 사함을 받은 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 악한 자에게서 건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평안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헬라어로 평화는 &amp;ldquo;에이레네&amp;rdquo;다.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한다(엡 2:14). 예수님은 단지 평화를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 자체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고, 원수 되었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은 감정의 안정이 아니라 구속의 결과다. 죄의 문제가 처리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탄의 참소가 무력해질 때 비로소 참 평강이 온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평화는 성전 건축과도 연결된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을 때 성전이 세워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교회를 예표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 하셨고, 부활 후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을 얻은 자들이 모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된 공동체다. 그 안에는 참 평강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마 5:9). 그러나 그 평강은 죄와 귀신과 거짓을 방치하는 평강이 아니라, 회개와 진리 위에 세워지는 평강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화평하게 하는 자는 싸움을 무조건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적 화평은 죄와 거짓과 악한 영을 그대로 둔 채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 그 다음 사람과 화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하고, 악한 영이 역사하는 통로를 닫아야 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은 성도에게 영적 전쟁과 회개와 정결의 길을 요구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4. 솔로몬은 왜 왕이 된 뒤 &amp;lsquo;듣는 마음&amp;rsquo;을 구했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마도 그는 20살에 왕위에 오른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다윗과 달리 오랜 전쟁터에서 단련된 왕이 아니었다. 다윗은 사자와 곰과 골리앗과 사울의 추격을 통과하며 왕으로 빚어졌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미 준비된 왕국을 물려받았다. 겉으로 보면 유리한 출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부담이었다. 많은 백성을 다스려야 했고, 아버지 다윗의 왕국을 이어야 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도 건축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다. 번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사다. 왕이 된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amp;ldquo;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amp;rdquo;라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장수도 부귀도 원수의 생명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왕상 3:7-9). 이 점이 중요하다. &lt;strong&gt;지혜의 출발은 자기 욕망이 아니라 사명에 대한 두려움&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3:7-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amp;ldquo;듣는 마음&amp;rdquo;은 히브리어로 &amp;ldquo;레브 쇼메아&amp;rdquo;라고 설명할 수 있다. &amp;ldquo;레브&amp;rdquo;는 마음이고, &amp;ldquo;쇼메아&amp;rdquo;는 듣는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순종한다는 뜻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은 백성의 사정만 듣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말 많은 마음이 아니라 듣는 마음이다. 지도자는 먼저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듣고, 말씀에 듣고,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이 구함을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자신을 위한 것을 먼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바르게 재판하기 위한 지혜를 구했다. 이때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더하여 주셨다(왕상 3:11-12).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들을 더하신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3:11-12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네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일천 번제도 거래의 수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많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번제의 본질은 자기 전부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데 있다. 왕이 된 솔로몬은 먼저 자기 왕권이 자기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 다윗의 왕국도 자기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 소유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청지기였다. 그래서 그는 &amp;ldquo;주의 백성&amp;rdquo;을 재판하게 해 달라고 구했다. 참된 지혜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데서 시작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기도는 오늘날 성도와 사역자에게도 적용된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인기가 아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기술도 아니다. 듣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는 마음,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마음, 영적 세계를 분별하는 마음, 양떼를 바르게 인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듣는 마음이 없으면 지식이 교만이 되고, 은사가 자기 자랑이 되며, 권세가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은 왕의 첫 번째 지혜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5. 참 지혜는 왜 은사와 학습이 함께 있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면 절반만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솔로몬이 배운 사람이며 연구한 사람이라고도 증언한다(왕상 4:29-30). 그는 동방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보다 뛰어났다. 그는 잠언 삼천 가지를 말했고, 노래 천다섯 편을 지었으며, 초목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까지 논했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어느 날 갑자기 지혜로운 문장을 말한 사람이 아니라, 폭넓은 배움과 관찰과 연구의 과정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4:29-30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동방과 애굽의 지혜보다 뛰어났다는 기록도 중요하다. 동방의 지혜는 욥기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고, 애굽의 지혜는 고대 세계의 학문과 행정과 격언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솔로몬은 그 모든 것을 알고도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근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지식을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되며, 세상 지식에 무릎 꿇어서도 안 된다. 세상 지식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생명의 길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식은 결국 사람을 자기 자랑과 허무로 이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사람이 배운 지혜는 서로 원수가 아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지만,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에게 깊은 말씀 사역을 맡기기는 어렵다. 기도만 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감동은 있을 수 있어도 분별이 약해진다. 반대로 공부만 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지식은 많아도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는 두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하나는 성령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과 역사와 원문을 배우는 수고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영적 전쟁에서도 같다. 무턱대고 귀신을 향해 소리만 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알아야 한다. 죄가 무엇인지, 귀신이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무엇인지, 회개와 예수의 피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영적 실제를 본다고 해도 말씀의 기준이 없으면 속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와 말씀의 기준은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하는 &amp;ldquo;영적 팩트 기반&amp;rdquo;의 길이다. 보고 들은 영적 세계도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말씀도 영적 실제 안에서 살아 있는 능력으로 경험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야고보서는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약 1:5). 이것은 지혜가 인간의 학문으로만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하는 지혜는 게으름의 핑계가 아니다. 구하는 자는 찾고, 찾는 자는 배운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말씀 앞에 앉고, 원문을 살피며, 성경 전체의 흐름을 추적한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어느 순간 깨닫게 하신다. 공부한 것들이 흩어진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경륜으로 연결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지혜는 겸손을 요구한다. 배운 사람이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이유는 배움이 자기 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이유는 은사가 자기 권세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반드시 여호와 경외와 결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배움을 자랑하지 않고,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깨달음과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받은 지혜와 배운 지혜를 함께 가진 왕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말한다. 은사만 구하지 말고 말씀을 배워야 한다. 지식만 자랑하지 말고 성령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하늘의 지혜와 땅에서의 준비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성도가 천국을 준비하려면, 기도하는 무릎과 공부하는 눈을 함께 가져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6. 솔로몬의 지혜는 어떻게 심판주 예수님을 보여 주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목적은 재판이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롭게 판단하고 선악을 분별하기 위해 듣는 마음을 구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는 단순한 지식의 지혜가 아니라 심판의 지혜다. 왕은 백성을 다스릴 뿐 아니라 판단해야 한다. 억울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해야 하고, 거짓과 진실을 분별해야 하며, 선과 악을 가려야 한다. 이 점에서 솔로몬은 장차 오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왕권은 보좌와 연결되고, 보좌는 통치와 심판을 뜻한다. 성경에서 왕은 단순히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왕은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도 단순히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누린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다스리고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왕 노릇한다. 이 땅에서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서 왕의 보좌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솔로몬이 먼저 재판의 지혜를 구한 것은 왕직의 본질을 붙든 기도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42). 남방 여왕, 곧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곳에서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을 눈앞에 두고도 듣지 않았다. 이것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거부할 때 심판을 받는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온 이방 여왕은 마지막 날에 말씀을 듣지 않은 세대를 정죄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분이다.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이는 예수님께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오신 그분은 사람의 사정을 아시고, 사람의 죄를 담당하셨으며, 사람을 심판하실 권세를 받으셨다(요 5:27).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지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심판주이시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심판을 잊어서는 안 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심판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성도가 죽은 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고후 5:10). 거기서 성도는 자신이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상급과 신분과 기업을 받는다. 또 하나는 마지막 백보좌 심판이다. 거기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는 오늘만 보지 않는다. 마지막 심판을 본다. 지금의 선택이 천국의 위치와 기업과 상급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지혜는 재판의 지혜였고, 예수님의 지혜는 최종 심판의 지혜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아이 문제를 판단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판단하신다. 솔로몬은 제한된 왕국의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에게서 멈추면 안 된다. 솔로몬의 지혜를 통해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 가야 한다. 참 지혜는 심판주 앞에 설 날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7. 잠언과 전도서는 왜 하나님 경외를 지혜의 결론으로 말하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남긴 지혜 문헌을 보면 지혜의 결론이 분명해진다. 잠언은 처음부터 여호와 경외를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 1:7). 이것은 성경의 지혜가 세상 지식과 다른 지점이다. 세상 지식은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활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서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학문은 결국 자기 이름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어로 지혜는 &amp;ldquo;호크마&amp;rdquo;다. 호크마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알고 그 질서 안에서 바르게 사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시고, 내 삶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내 생각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전도서는 솔로몬의 또 다른 결론을 보여 준다. 그는 많이 배우고, 많이 누리고, 많이 소유하고, 많은 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수고는 헛되다고 말한다. &amp;ldquo;헛되고 헛되다&amp;rdquo;는 말은 모든 공부와 수고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공부하는 것의 피곤함도 전도서는 숨기지 않는다(전 12:12). 하나님 없는 수고, 심판을 모르는 지식, 영원을 잃어버린 성공이 헛되다는 뜻이다. 세상 지식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경외로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전 12:12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전도서의 마지막 결론은 분명하다(전 12:13-14).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지혜와 심판이 연결된다. 지혜는 마지막 심판을 아는 것이다. 심판을 아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회개를 미루지 않는다. 생명책과 천국의 기업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지혜가 길가 높은 곳에서 부르고, 성문 어귀에서 소리를 높인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면서도, 그리스도론적으로는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증언한다(고전 1:24).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격언만 붙들고 그리스도를 놓치면 잠언의 중심을 놓치는 것이다. 인생의 허무만 말하고 하나님 경외와 심판을 놓치면 전도서의 결론을 놓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잠언과 전도서는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잠언은 지혜의 시작을 말하고, 전도서는 지혜의 결론을 말한다. 시작은 여호와 경외이고, 결론도 여호와 경외다. 그 사이에는 인생의 수고와 배움과 성공과 실패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섰느냐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 문헌은 성도에게 묻는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을 잘 사는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면 심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8. 성도는 어떻게 평화와 지혜의 왕을 따라 준비되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솔로몬의 평화를 부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앞에 다윗의 전쟁이 있었다. 성도는 천국의 안식을 원하지만,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피해서는 안 된다. 죄와 싸워야 하고, 귀신과 싸워야 하며, 자기 안의 교만과 불순종과 음란과 탐욕과 거짓과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는 성도는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것이다. 악한 영이 주는 가짜 평안은 결국 사람을 죄와 저주와 사망으로 끌고 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평화의 왕을 따르는 성도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전쟁의 시작이다. 회개할 때 예수의 피가 역사하고, 악한 영의 합법적 근거가 끊어진다. 회개하지 않고 축복만 구하는 것은 솔로몬의 평화만 원하고 다윗의 전쟁은 거부하는 태도와 같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천국에서 왕 노릇할 성도는 이 땅에서 싸워야 한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싸워야 하고,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가정 안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부모가 영적 전쟁을 하지 않으면 자녀는 싸울 법을 배우지 못한다. 부모가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자녀는 진리를 분별하는 귀를 얻기 어렵다. 부모가 회개하지 않으면 가문의 악한 영들이 계속 통로를 얻는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개인적 경건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회개는 가정의 문을 바꾸고, 한 사람의 영적 전쟁은 다음 세대의 길을 바꿀 수 있다. 다윗의 전쟁이 솔로몬의 평화를 준비했듯이, 오늘 한 성도의 회개와 전쟁이 자녀 세대의 평강을 준비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또한 지혜를 준비해야 한다. 지혜는 성령께 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말씀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모르는 열심은 위험하고, 성령 없는 지식은 교만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을 통전적으로 보아야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경륜을 보아야 하고,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길을 보아야 하며, 회개와 천국복음의 길을 보아야 한다. 말씀을 배운 사람은 영적 세계를 분별할 수 있고, 악한 영의 속임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듣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듣고, 책망하실 때 듣고, 회개하라고 하실 때 들어야 한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말씀도 들리지 않고 성령의 책망도 들리지 않는다. 솔로몬이 처음에 구한 것은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듣는 마음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필요하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종해야 평강을 누린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준비는 추상적인 결심이 아니다. 말이 달라져야 하고, 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하며,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구했듯이 성도도 먼저 들어야 한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천국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며, 영적 전쟁을 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지 않는 마음은 이미 교만에 붙들린 마음이다. 반대로 듣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더 깊은 지혜를 부어 주실 수 있는 그릇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마지막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 사는 지혜도 필요하지만, 천국 가는 지혜가 더 중요하다. 돈을 벌고 사람을 설득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혜가 하나님 경외로 이어지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준비하지 못한다. 참 지혜는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서도록 오늘의 말과 행동과 선택을 바꾸게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평화와 지혜를 함께 준비해야 한다. 평화만 원하면 싸움을 회피하게 되고, 지혜만 말하면 지식 자랑에 빠질 수 있다. 다윗의 전쟁과 솔로몬의 지혜가 함께 있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이 둘은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로서 사탄을 이기셨고, 평강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에게 평안을 주시며,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 싸우고,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예수님의 심판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어떻게 평화와 지혜의 왕으로 세워졌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이 전쟁에 능한 왕으로 사방의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솔로몬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 평화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실 참 평강을 예표한다. 성도는 악한 영과 죄의 문제를 방치한 채 평화를 말해서는 안 된다. 참 평강은 회개와 영적 전쟁과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서 누려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왕이었지만, 동시에 배우고 연구한 왕이었다. 성도도 성령께 지혜를 구해야 하며, 동시에 말씀을 깊이 배워야 한다. 말씀 없는 은사는 위험하고, 성령 없는 지식은 생명이 약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조명과 말씀의 연구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특히 사역자는 듣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말씀을 듣고, 양떼의 형편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장의 결론은 평화와 지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평화가 없는 지혜는 차가운 분석으로 끝나기 쉽고, 지혜가 없는 평화는 거짓 평안으로 흐르기 쉽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진리 위에 세워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평강의 열매를 낳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회개를 통해 정결해지며, 성령의 지혜로 오늘의 영적 상황을 분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하고, 마지막 심판을 기억하는 데서 완성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준비해야 한다. 오늘의 회개, 오늘의 순종, 오늘의 영적 전쟁, 오늘의 말씀 연구가 천국의 기업과 신분과 상급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주시는 평강 안에서 살고, 그분의 지혜로 오늘을 분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싸워야 하고,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하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영적 전쟁을 피하지 말아야 하고, 말씀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회개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영적 용사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정결함을 입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천국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전쟁 뒤의 참 평강을 누리고, 심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지혜로 천국의 기업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6월 17일(수)&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amp;nbsp;&lt;strong&gt;평화와 지혜의 왕&lt;/strong&gt;으로 조명하며, 그가 누린 영광이 부친 다윗의&amp;nbsp;&lt;strong&gt;영적 전쟁과 승리&lt;/strong&gt;라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음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참된 평화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amp;nbsp;&lt;strong&gt;피 흘리는 싸움&lt;/strong&gt;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듯, 성도 역시 영원한 평화를 위해&amp;nbsp;&lt;strong&gt;지혜를 갈구하며 치열한 영적 전투&lt;/strong&gt;를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솔로몬의 지혜는 유전적 요인이나 개인적 학습을 넘어 하나님께&amp;nbsp;&lt;strong&gt;일천번제&lt;/strong&gt;를 드림으로써 얻은 &amp;lsquo;듣는 마음&amp;rsquo;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이는 곧&amp;nbsp;&lt;strong&gt;하나님을 경외하는 심판의 지혜&lt;/strong&gt;로 귀결됩니다. 결국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지식에 머물지 않고&amp;nbsp;&lt;strong&gt;성령의 가르침과 성경 공부&lt;/strong&gt;를 병행하여, 장차 올&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의 심판대&lt;/strong&gt;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5)] 인포그래픽2026-06-16.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b1e9d3e6111274be5e67eec26a4c627e.webp&quot; /&gt;&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917f002ba744f10fdbb315d5080d547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2.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54db507d8208d83cd028de2b9ec2aa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3.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41ad4e85b34003c5c633fa0112ac149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4.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cc90079298712d70cfb01498356002f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5.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3ec6c4ad754765486d5032f559d747d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8.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62f5a060b804433b97d6abd12bbf095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9.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e4d722d1eeb7b783e4f7f424238aceb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0.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e54f562b89872eb56460d31970545de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4339ebcf0df142363f172661756c550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2.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620b3ae576f28184fad2471498eb1af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7.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e1fc236820647c2c32c0ec1f22f3fbd3.webp&quot; /&gt;&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 또 다른 요약입니다]&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5)] 다윗의 아들 솔로몬(03) 그는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다(01)(왕상3:1~15)&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Dp4JsG_SQhU&lt;/p&gt; &lt;div class=&quot;youtube-div dtmseditor-youtube-embed&quot;&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Dp4JsG_SQhU?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1. 들어가며&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긴 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다윗 한 사람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솔로몬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 마치 아브라함만으로는 성부를 다 알 수 없고 이삭과 야곱을 함께 공부해야 성부&amp;middot;성자&amp;middot;성령의 경륜을 알 수 있듯이,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의 짝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전모를 드러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사명을 선포한다. &amp;#39;솔로몬(שְׁלֹמֹה, 쉘로모)&amp;#39;은 &amp;#39;샬롬(שָׁלוֹם)&amp;#39;에서 온 이름으로, 평화를 뜻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이름을 예비하셨다. 다윗이 전쟁의 왕으로 부름 받았다면, 솔로몬은 평화의 왕으로 부름 받았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안에서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기도 하였으니, 그의 지혜는 동방의 모든 사람과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왕상 4:30). 그러나 그 지혜의 왕이 탄식한 말이 있으니 &amp;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전 1:2)라는 것이다. 이 두 극단, 곧 최고의 지혜와 최심(最深)의 탄식 사이에서 솔로몬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에서 솔로몬은 지혜 문학의 중심에 선다.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5권을 &amp;#39;지혜 문학&amp;#39;이라 부르는데, 이 가운데 솔로몬이 직접 저술한 책은 &amp;#39;잠언, 전도서, 아가서&amp;#39;다. 욥기는 동방의 지혜를 대표하고 시편은 다윗의 경건을 담고 있지만, 이 모든 지혜 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다.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amp;quot; 솔로몬은 이 진리를 삶으로 구현한 왕이었다. 비록 말년에 타락하였지만, 그의 전성기는 이 진리의 살아 있는 증거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 솔로몬을 공부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그것은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참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지혜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된다. 이 시간에는 &lt;strong&gt;다윗과 솔로몬의 관계가 그리스도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솔로몬의 지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솔로몬보다 크신 이유가 무엇인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2. 다윗은 전쟁의 왕이고 솔로몬은 평화의 왕인데, 이 두 왕은 어떤 관계인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을 &amp;#39;전쟁의 왕&amp;#39;이라 부르고 솔로몬을 &amp;#39;평화의 왕&amp;#39;이라 부를 때, 이 둘은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진리를 두 국면으로 드러내는 짝이다. 다윗이 싸워 이겼기 때문에 솔로몬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다윗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amp;quot;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amp;quot;(대상 22:8). 전쟁 없는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대상 22: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어 &amp;#39;에하드(אֶחָד)&amp;#39;는 &amp;#39;하나&amp;#39;를 뜻하지만, 그것은 고립된 단위의 하나가 아니라 연합 안에서의 하나다. 창세기가 &amp;quot;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בָּשָׂר אֶחָד, 바사르 에하드)이 될지로다&amp;quot;(창 2:24)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른 두 인격이지만 하나의 연합을 이룬다. 다윗과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둘은 구별되지만 하나의 경륜을 함께 이룬다. &amp;#39;약히드(יָחִיד)&amp;#39;가 홀로이며 외로운 단수의 하나라면, &amp;#39;에하드&amp;#39;는 연합 안에서의 하나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는 에하드다. 순서는 반드시 전쟁이 먼저이고 평화가 나중이다. 이 순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 평화를 먼저 말하고 전쟁을 생략하려는 것은 이 원리를 거스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땅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amp;quot;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고&amp;quot;(히 12:4)라고 하여 영적 싸움의 치열함을 요구한다. 이 싸움에서 이긴 자에게만 영원한 평화가 주어진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 성밖에는 평화가 없다. 지옥은 평화가 아니라 싸움과 다툼으로 가득한 곳이다. 참된 평화, 영원한 평화는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잘 치러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고&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윗이 전쟁에서 강했던 이유&lt;/strong&gt;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 &lt;strong&gt;첫째는 그에게 타고난 기질이 있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의 어머니는 전쟁에 능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이새의 본처에게서 나온 일곱 아들들 가운데 그런 기질을 가진 아들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예비하신 어떤 여인을 통해 다윗 하나를 낳게 하셨다. 그녀는 이새를 만나기 전에 이미 스루야와 아비가일을 낳았고, 스루야의 아들들인 요압, 아비새, 아사헬은 다윗의 군대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들이 되었고, 아비가일이 낳았던 아마사가 뛰어난 군장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어린 시절 사자와 곰과 싸워 이긴 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그 타고난 기질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 능한 여인을 이새에게 보내심으로 다윗을 준비하셨다.&lt;strong&gt; 둘째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셨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이 강성해진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amp;quot;다윗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라&amp;quot;(삼상 18:14).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타고난 기질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에 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함께하였기에, 다윗은 전쟁마다 이겼고, 그 결과로 솔로몬에게 평화를 유산으로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상 18:14 다윗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모든 전쟁에 능했던 이유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에 나타난 그의 고백을 보라. &amp;quot;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amp;quot;(시 23:4). 또한 &amp;quot;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amp;quot;(시 23:5)라고 하였다. 이 믿음이 사자 앞에서, 골리앗 앞에서, 수많은 전쟁터에서 다윗을 지탱하게 하였다. 기질과 믿음,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다윗은 전무후무한 전쟁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국가 간의 관계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협상과 대화만으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착각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의지로 다윗이 주변 민족들을 제압했기 때문에, 솔로몬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참된 평화는 힘에 의해 보장된다. 돈을 퍼줌으로써 혹은 선언문을 작성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악한 영을 제압하지 않고는 내 안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이 없으면 솔로몬도 없고, 전쟁의 승리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이 두 가지가 에하드를 이룬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3. 솔로몬의 지혜는 타고난 것인가, 배운 것인가, 아니면 받은 것인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지혜를 논할 때 흔히들 두 가지 극단에 빠진다. 하나는 &amp;quot;하나님이 주셨으니 그냥 얻은 것&amp;quot;이라는 극단이고, 다른 하나는 &amp;quot;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것&amp;quot;이라는 극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솔로몬의 지혜는 받은 것이기도 하고, 배운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비단 솔로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일반적인 방식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우선, 솔로몬에게는 지혜를 가지고 타고날 수 있는 혈통적인 유전자가 있었다&lt;/strong&gt;. 그의 어머니 밧세바의 집안에는 두 가지 탁월한 유전자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지혜의 유전자다. 밧세바의 조부는 아히도벨이었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국 최고의 모사(謀士)였으니, 그의 계략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 것 같았다. 성경이 &amp;quot;그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음같이 하였으니&amp;quot;(삼하 16:23)라고 기록할 만큼 탁월한 지략가였다. 중국의 제갈량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었다.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이 밧세바의 아버지였으니(삼하 11:3, 23:34 참조), 이 놀라운 지략의 피가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에게 흘러 내려온 것이다. 이런 집안의 후손으로서 솔로몬은 지혜를 향한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태어났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16: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음같이 하였으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그러하여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하였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lt;strong&gt;솔로몬에게는 또 다른 유전자로서 용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lt;/strong&gt;.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다윗의 용사 삼십 명 중 한 사람이었다(삼하 23:34). 장군의 기질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밧세바는 그 기질을 솔로몬에게 그대로 물려주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는 지혜의 씨앗과 용사의 기질이 함께 흘렀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가능성이 현실이 되려면 공부와 훈련이 필요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씨앗이 있다 해도 땅에 심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듯, 타고난 재질도 갈고닦지 않으면 발휘되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열왕기상 3장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다&lt;/strong&gt;고 기록한다(왕상 3:12). &lt;strong&gt;반면 솔로몬 자신은 잠언 서두에서 자신이 배우고 연구하였음을 선언&lt;/strong&gt;한다. 그런데 이 둘은 모순이 아니다. &lt;strong&gt;받은 지혜와 배운 지혜,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lt;/strong&gt; 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 이 두 가지를 어느 하나도 생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여 &amp;quot;하나님이 다 하신다&amp;quot;고 말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고,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여 &amp;quot;내가 공부하면 된다&amp;quot;고 자만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회개와 믿음이라는 인간의 응답이 요구된다. 지혜도 이와 같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설교자가 성령의 감동만을 내세우며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 보라.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지만, 신약성경을 13권이나 저술한 것은 바울이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가?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엄격하게 배운 자였다. &amp;quot;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amp;quot;(행 22:3). 충분한 공부가 성령의 역사를 담는 그릇이 된다. &lt;strong&gt;성령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일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공부를 통해 일하신다. 성령이 역사할 수 있도록 공부로 그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 언제라도 성령이 임하실 수 있도록 충분히 공부로 준비된 자가 더 깊은 지혜를 받을 수 있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받은 지혜와 배운 지혜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작용하듯, 은혜로 받는 지혜와 노력으로 배우는 지혜가 함께 있어야 한다. 칼빈주의의 극단은 &amp;quot;하나님이 다 하시니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amp;quot;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은 &amp;quot;부지런히 찾으라, 힘써 구하라, 두드리라&amp;quot;고 명한다. 갈매기가 먹이를 얻기 위해 열심히 날아다니듯, 지혜를 얻으려는 자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구해야 한다. 그 위에 하나님이 은혜로 지혜를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혜를 얻는 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4. 솔로몬은 얼마나 방대한 공부를 했으며, 그럼에도 결론이 &amp;quot;헛되다&amp;quot;인 이유는 무엇인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얼마나 많은한 공부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열왕기상 4장과 전도서가 함께 증언한다. 열왕기상 4장 30절은 &amp;quot;솔로몬의 지혜가 동방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amp;quot;고 선언한다. 이것은 단순히 선천적 재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 지혜가 뛰어나다는 평가는 솔로몬이 동방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를 실제로 습득하고 그것을 능가했음을 전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왕상 4:30 솔로몬의 지혜가 동방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39;동방 모든 사람의 지혜&amp;#39;는 욥기서가 대표하는 바로 그 지혜다. 욥은 동방 사람이었고(욥 1:3), 욥기서는 대표적인 지혜 문학이다. 욥과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사이의 논쟁은 물론이고, 엘리후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그 논증의 깊이와 수사적 세련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욥기의 그 논쟁을 오늘날 그대로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 있다. 솔로몬은 이 동방의 지혜 전통을 두루 섭렵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또한 솔로몬이 배웠던 &amp;#39;애굽의 모든 지혜&amp;#39;란 &amp;quot;무엇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이다&amp;quot;라는 식의 격언 문학이다. &amp;quot;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amp;quot;(잠 16:18)는 형식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스타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은 &amp;quot;~하라, ~하지 말라&amp;quot;는 명령 형식으로 말씀하시지, &amp;quot;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amp;quot;는 격언 형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 모든 지혜의 전통을 공부하고 능가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결과 솔로몬은 잠언을 3천 가지나 말하였고, 노래는 1005편이나 지었다(왕상 4:32).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잠언서가 대략 1천 절 남짓이니, 그것은 그가 말한 3천 잠언의 1/3수준이다. 나머지 2천 잠언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지었다는 1,005편의 노래들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아가서(8장)와 시편 72편, 127편이 전부이다. 또한 솔로몬은 동식물에 관하여도 논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많이 하였다. 그래서 그는 초목과 짐승,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자연계 전체를 논할 수 있었다(왕상 4:33). 한 마디로 솔로몬은 당시의 자연 과학에 해당하는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사람을 보냈고, 스바 여왕은 직접 땅끝에서 찾아왔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왕상 4:32-33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에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도서는 솔로몬의 학문적 성실함을 이렇게 증언한다. &amp;quot;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amp;quot;(전 12:9-10). 그리고 공부의 과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기록한다. &amp;quot;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amp;quot;(전 12:12). 공부는 몸을 피곤하게 한다. 오늘날에 대학원을 마칠 때에 논문을 쓰는 것 역시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전 12:9-10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전 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토록 방대한 공부를 했던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amp;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전 12:8). 그럼, 왜 세상 공부는 헛된 것인가? 왜냐하면 이 세상 지혜는, 아무리 깊고 넓다 해도, 천국에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지혜는 세상을 사는 데 유익하지만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그 지혜 자체가 구원이 되거나 영생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솔로몬의 탄식이요, 동시에 경고다. 세상 지혜를 아무리 쌓아도 죽는 날 그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는 천국의 지혜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전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전도서 결론부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선언한다. &amp;quot;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amp;quot;(전 12:13-14). 그가 내린 공부의 결론은 곧 &amp;quot;하나님을 경외하라&amp;quot;는 것이다.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천 가지 격언을 지어내고, 동방과 애굽의 모든 지혜를 섭렵한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전부다. 세상 공부의 끝에서 이 진리를 발견한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는 잠언 1장 7절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잠언 1장 2절부터 6절까지는 지혜를 배우는 방법과 목적을 기술한다. &amp;quot;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자원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라.&amp;quot; 이것은 세상 어느 지식인도 추구할 수 있는 목표다. 여기까지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좌우명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7절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amp;quot;(잠 1:7). 하나님의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lt;strong&gt;여호와 경외 없는 지식은 결국 헛되다&lt;/strong&gt;는 것이 솔로몬의 결론이다. 모든 지식의 시작점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이 선언이 솔로몬의 탄식과 깨달음의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5. 솔로몬은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으며, 어떻게 구했는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lt;strong&gt;왕위에 오른 나이는 대략 스무 살 전후&lt;/strong&gt;였다. 사울이 마흔 살에 왕이 되었고, 다윗이 서른 살에 왕이 되었으나(삼하 5:4), 솔로몬은 더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사울 40년, 다윗 40년, 솔로몬 40년의 각각의 통치가 이어진다. 그런데 솔로몬은 전쟁도 정치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가운데서, 갑작스럽게 왕이 된다. 형 아도니야가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러한 혼란함 속에서 다윗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삼하 5: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간 다스렸으되&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의 눈앞에는 아버지 다윗이 정복하여 복속시킨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고, 그 백성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스라엘 백성 외에도 주변 민족들이 들어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함으로써 다스려야 할 대상이 더욱 많아졌다. 다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많은 백성들을 공의롭게 다스려야 할 책임은 오롯이 어린 솔로몬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인간의 지혜로는 역부족임을 처음부터 인정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당시 법궤는 다윗 성에 있었고, 성막은 사울 왕 때 제사장들이 학살당한 뒤 법궤와 분리되어 기브온으로 옮겨져 있었다. 기브온은 번제단이 있는 큰 산당이었다. 솔로몬은 기브온으로 올라가 거기 있는 번제단에 무려 천 번제를 드렸다. 황소 천 마리를 잡아 드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목숨을 건 헌신이요, 왕국의 재물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대가 지불이었다. 왕이 드리는 번제이므로 당연히 황소였을 것이다. 그 천 마리의 황소가 타오르는 번제의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은 그 헌신에 감동하셨다. 밤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amp;quot;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amp;quot;고 하셨다(왕상 3: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왕상 3: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번제 일천 번을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이때 솔로몬이 구한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는 부도 영화도 장수도 구하지 않았다.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힘도 구하지 않았다. 어린 왕이 가장 구하고 싶을 법한 것들, 즉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나 풍요를 누리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그가 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amp;quot;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amp;quot;(왕상 3:7-9). 그가 구한 것은 &amp;#39;듣는 마음&amp;#39;, 곧 히브리어로 &amp;#39;레브 쇼메아(לֵב שֹׁמֵעַ)&amp;#39;였다. 백성의 소리를 잘 들어 선악을 분별하고 공의롭게 재판하는 마음이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을 구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간구를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셨다. &amp;quot;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amp;quot;(왕상 3:11-12).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 더하여 주셨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위해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왕상 3:11-13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내 앞에서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솔로몬의 기도 태도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amp;quot;작은 아이&amp;quot;라고 낮추었다. 왕위에 오른 자가 자신을 작은 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자신이 이 큰 사명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함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 구한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는 겸손에서 시작하여 사명으로 끝난다. &amp;quot;내가 부족하오니 주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amp;quot;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기도다.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맡겨진 사명을 위한 기도,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6. 솔로몬이 구한 &amp;quot;듣는 마음&amp;quot;은 무엇이며, 지혜의 참된 목적은 무엇인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39;듣는 마음&amp;#39;은 지혜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지혜(히브리어 호크마, חָכְמָה)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마음이요, 그 말씀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공의롭게 재판하기 위함이었다. 지혜의 열왕기상 기자가 정의한 지혜는 바로 이 듣는 마음이다. 즉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의 소리를 잘 듣고 그에 따라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의 목적이 재판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솔로몬이 지혜를 받자마자 보여 준 능력이 바로 두 창기 사이의 재판이었다(왕상 3:16-28).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 다투는 두 여인 앞에서 솔로몬은 &amp;quot;살아 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amp;quot;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진짜 어머니는 &amp;quot;차라리 이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 마소서&amp;quot;라고 호소하였다. 이로써 진짜 어머니가 가려졌다. 온 이스라엘이 이 재판을 보고 &amp;quot;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보았더라&amp;quot;(왕상 3:28)고 경탄하였다. 지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어려운 판단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왕상 3:28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판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의 목적이 재판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왕의 가장 핵심적인 직무가 재판임을 알아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은 단순히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최고 재판관이었다. 백성이 왕에게 나아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송사(訟事)였다. 왕이 공의롭지 않으면 백성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솔로몬이 재판을 잘하기 위한 마음을 구한 것은 왕으로서의 사명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사명의 핵심은 심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심판을 위한 것이요, 심판을 위한 준비가 바로 지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재판의 주제는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궁극적 목적은 그가 장차 심판을 잘 받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지혜로워야 하는 이유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amp;quot;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amp;quot;(고후 5:10)고 선포한다. 지금 이 순간 죽는 자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 죽은 후 무덤에 잠자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천년왕국이 진행되고 있으며 낙원에서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상급 심판을 받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받는 심판은 정죄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의 심판이다. 어떤 신분을 얻을 것인가, 어떤 처소에서 살 것인가, 어떤 면류관을 받을 것인가가 결정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0장의 백보좌 심판에서 온 인류의 최후 심판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심판주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아는 자다. 그날을 준비하는 자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것처럼,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때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지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amp;#39;듣는 마음&amp;#39;이라는 표현은 오늘의 성도에게도 중요한 도전을 준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사람은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자기 생각이 꽉 들어차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한 번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인다. 말씀 앞에서 &amp;quot;내가 30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몰랐구나, 구약 성경을 헛것으로 봤구나, 주님이 오시는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구나&amp;quot;라고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다. &amp;quot;한 번 영원히 구원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amp;quot;는 착각에서 벗어나, 상급 심판을 의식하며 날마다 준비하는 삶을 사는 자가 바로 &amp;#39;듣는 마음&amp;#39;을 가진 자다. 그런 깨달음이 없다면 아직 지혜가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7.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평화와 지혜의 왕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평화의 왕이요 지혜의 왕이라면,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베푸는 왕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이시다. 사도 바울은 &amp;quot;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amp;quot;(엡 2:14)라고 선포한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전쟁으로 이루어진 평화를 다스렸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피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고,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케 하신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의 평화와 예수님의 평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엡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amp;quot;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amp;quot;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로는 &amp;#39;샬롬(שָׁלוֹם)&amp;#39;이요, 헬라어로는 &amp;#39;에이레네(&amp;epsilon;ἰ&amp;rho;ή&amp;nu;&amp;eta;)&amp;#39;다. 예수님이 직접 요한복음 14장에서 선포하셨다. &amp;quot;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amp;quot;(요 14:2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무너지는 것이 세상의 평화다. 솔로몬이 다윗의 전쟁으로 얻은 평화도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왕국 분열로 이어졌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실재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된 자에게 임하는 평화는 환경이 어떻게 바뀌어도 빼앗길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예수님은 지혜에 있어서도 솔로몬보다 크시다. 예수님 자신이 이를 선언하셨다. &amp;quot;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quot;(마 12:42).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찾아온 스바 여왕이 있었다면,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직접 오셨음에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amp;quot;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amp;quot;(요 1:11). 말씀을 외면하고 귀를 막는 것은 솔로몬보다 크신 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심판 날에 스바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평화를 얻는 길에도 반드시 순서가 있다. &amp;quot;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amp;quot;(마 5:9)라고 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먼저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죄와 싸워 이기고, 그 후에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다. 전쟁을 생략하고 평화를 가져오려 하는 것은 착각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긴 자만이 진정한 화평을 누리고 또 전달할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히 아시고 성취하셨다는 것도 솔로몬보다 크심을 확인케 한다. 예수님은 열두 살 성인식 때에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셨고, 그들이 그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눅 2:46-47). 예수님도 공부하셨다. 율법을 공부하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계시를 받으심으로,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와 평화를 온전히 갖추셨다. 솔로몬은 나중에 타락하여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우상을 섬기다가 60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크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솔로몬보다 크신 평화와 지혜의 왕이심은 또한 그의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예수(יֵשׁוּעַ, 예슈아)는 &amp;#39;여호와는 구원이시다&amp;#39;를 뜻한다. 그는 단지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 자체를 주시는 분이다. 솔로몬의 이름이 샬롬에서 왔듯이,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를 다스렸다면,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가져다 주신다. 사도 바울이 &amp;quot;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amp;quot;(빌 4:7)고 한 것이 바로 이 평화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환경을 초월하는, 솔로몬도 완전히 누리지 못한 그 평화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크신 평화의 왕이요 지혜의 왕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8.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지혜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lt;/strong&gt;&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를 구하는 것은 예수를 믿은 성도의 첫 번째 과제다. 야고보서 1장 5절은 이를 명확하게 선언한다. &amp;quot;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amp;quot;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라.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신다. 자신이 지혜롭지 못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지혜를 얻는다. 솔로몬이 &amp;quot;종은 작은 아이라&amp;quot;고 고백한 것이 지혜를 받은 출발점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를 얻는 데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첫째는 공부다. 솔로몬처럼, 바울처럼,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공부해야 한다. 지혜는 지식을 활용하는 힘이다. 지식 없이 지혜가 활용될 그릇이 없다. 성경에 대한 지식, 구속사에 대한 이해, 신학적 훈련은 성령이 역사하실 통로가 된다. 오늘날 목회자의 경우에도 대학 교육과 신학대학원 과정, 인턴십, 목사 고시 등 십 년에 가까운 준비 과정이 요구되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충분히 공부하지 않으면 성도를 바르게 섬길 수 없다. 그러나 공부만으로 되지 않는다. 지식이 지혜가 되려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은 공부로 쌓아 놓은 지식의 그릇 위에서 역사하신다. 충분히 공부해 놓은 자에게 성령이 임할 때, 그것이 지혜가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는 기도와 헌신이다. 솔로몬은 천 번제를 드린 후에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대가 없는 기도, 헌신 없는 간구는 하나님의 감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솔로몬이 자신의 왕국 재물로 황소 천 마리를 드린 것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과 같다. 그 헌신 위에 꿈이 임하였고, 그 꿈 속에서 지혜가 허락되었다.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헌신은 값비싸야 하며, 구함은 분명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지혜를 구하는지 목적이 분명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재판을 위해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를 사용하는 목적도 분명하다. 지혜는 심판을 잘 받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솔로몬이 재판을 잘하기 위해 지혜를 구했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지혜를 구해야 한다. 지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 지혜를 구한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혜와 다를 것이 없다. 지혜로운 성도는 항상 심판주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오늘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amp;quot;이것이 그날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인가?&amp;quot;를 묻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구한 지혜, 즉 호크마는 욥기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amp;quot;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amp;quot;(욥 28:28).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심판을 두려워하여 악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려는 자다. 회개 기도문 앞에서 귀를 막지 않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아무리 회개를 촉구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지혜가 없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욥 28:28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 문학인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한결같이 이 진리를 선언한다.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amp;quot;(잠 9:10). 이 진리를 알고, 믿고, 삶으로 실천하는 자가 참된 지혜자다. 지혜로운 성도는 말씀 앞에서 &amp;quot;내가 틀렸구나, 내가 몰랐구나&amp;quot;라고 고백하며 돌이킨다. 배울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되 그 결론이 헛되다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모든 지식의 끝에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혜 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이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욥기의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 하였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응답을 받았다. 시편의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임을 노래하였다. 잠언의 솔로몬은 그 지혜를 격언과 잠언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 전도서의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됨을 고백한 끝에 &amp;quot;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amp;quot;(전 12:13)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혜 문학이 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최종 진리다. 모든 지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자가 참된 지혜자요, 그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자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lt;strong&gt;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상을 사는 지혜도 필요하다. 세상 공부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진리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이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처럼,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것까지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지혜의 길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솔로몬의 삶을 통해 구약에서 이미 증명되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span&gt;&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과 솔로몬의 관계가 전쟁과 평화의 에하드를 이루며, 솔로몬의 지혜가 타고난 가능성과 치열한 공부, 그리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솔로몬이 천 번제를 드리며 재판을 잘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을 때 하나님이 지혜를 허락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 그 자체이시며 솔로몬보다 크신 지혜의 주이심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지혜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심판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준비하는 힘임을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모든 성도는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지혜의 목적은 심판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함이다. 세상의 지식과 성령의 지혜를 함께 구해야 한다. 어느 하나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공부하지 않고 성령만을 구하는 것도 잘못이요, 성령의 도움 없이 공부만으로 되는 것처럼 자만하는 것도 잘못이다. 솔로몬처럼 치열하게 공부하되, 솔로몬처럼 하나님 앞에 값비싼 헌신으로 나아가 지혜를 구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영적 전쟁에서 도망쳐서는 아니 된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겼기에 솔로몬이 평화를 누렸듯이, 이 땅에서 죄와 싸워 이기는 자만이 장차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말씀을 들을 때 &amp;quot;내가 틀렸구나&amp;quot; 하고 돌이키는 듣는 마음,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 지혜로 심판주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날마다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셨듯이, 먼저 심판주 앞에 설 준비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도 풍성하게 채워 주신다. 세상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모두 구하되 순서를 바로 해야 한다. 하늘의 지혜가 먼저요, 세상 지혜는 그 도구다. 이 순서를 바로 잡고, 솔로몬처럼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지혜를 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보다 크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며, 마지막 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17일(수)&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5)] 인포그래픽_솔로몬_평화와_지혜의_예표.pn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3758906465f5c4f006e3bb7967ee5ed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e95036e5d12b5bf7f74f57962ec218c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2.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005426f7464782bff98aad30e07296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3.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8b20879a25f6d201508f96fa4163a8c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4.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aba92f501ac8fbac312b752c8fd06c8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5.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a4daa0baa840a8fa6cb73d3e21227c5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6.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4ef7e5079c904502e585b33fd712973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7.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91/260/98dd6dcb8737c8eb094e196a3f338c8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8.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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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_2026-06-16(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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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6T09:04:45+09:00</published>
		<updated>2026-06-16T14:58:08+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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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FkuAEFbJfc 1. 들어가며 다윗의 이야기는 결코 다윗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요, 전쟁에 능한 왕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아를 단지 “다윗”으로만 증언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amp;rdquo;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kFkuAEFbJfc&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kFkuAEFbJfc?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이야기는 결코 다윗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요, 전쟁에 능한 왕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아를 단지 &amp;ldquo;다윗&amp;rdquo;으로만 증언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을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다윗을 살핀 사람은 반드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살펴야 한다. 다윗이 메시아의 왕권과 고난과 전쟁을 예표한다면, 솔로몬은 메시아의 지혜와 평강과 성전 건축을 예표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다윗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 왕위를 계승한 아들이다. 성경에는 다윗의 아들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도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다윗 언약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지 못했다. 왕위의 계승자는 솔로몬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에서 &amp;ldquo;아들&amp;rdquo;은 혈육으로 난 자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amp;ldquo;벤&amp;rdquo;은 아들, 후손, 자손, 계승자, 상속자의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다. 헬라어 &amp;ldquo;휘오스&amp;rdquo;도 문맥에 따라 아들 혹은 자손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라는 이름도 중요하다. 솔로몬은 히브리어 &amp;ldquo;쉘로모&amp;rdquo;이며, 평강을 뜻하는 &amp;ldquo;샬롬&amp;rdquo;과 연결된다. 그는 이름부터 평강의 왕을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평화를 누렸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의 전통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훗날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의 문제로 무너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을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솔로몬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실체다. 솔로몬은 예표이고, 예수님은 성취다. 솔로몬은 부분적으로 보여 주었고, 예수님은 완전하게 이루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번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을 성공한 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왜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가 되는지, 그의 이름과 지혜와 평화와 성전 건축과 지혜 문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잠언은 참 지혜가 여호와 경외에 있음을 말하고, 전도서는 하나님 없는 세상 수고의 헛됨을 말하며,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의 지혜와 이름과 평화와 성전과 기록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2. 솔로몬은 왜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인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다윗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메시아가 다윗의 씨로 오실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amp;ldquo;네 몸에서 날 네 씨&amp;rdquo;를 세우겠다고 하셨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에게 먼저 적용된다. 솔로몬은 다윗의 몸에서 난 아들이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솔로몬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amp;ldquo;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amp;rdquo;는 말씀은 솔로몬 한 사람에게 다 담길 수 없다. 솔로몬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았고, 솔로몬 자신도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은 솔로몬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삼하 7:12-1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dquo;씨&amp;rdquo;는 히브리어 &amp;ldquo;제라&amp;rdquo;다. 이 말은 씨앗, 후손, 약속의 계보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세우신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집안에서 왕이 계속 나온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장차 영원한 왕을 보내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amp;ldquo;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amp;rdquo;이라고 부른다. 원문 흐름을 살리면 &amp;ldquo;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amp;rdquo;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바쳐질 희생의 아들을 예표했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지혜와 평강과 성전 건축의 왕을 예표했다. 이 두 줄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단지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상속자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이을 자는 솔로몬이었다. 이것은 천국의 왕직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왕 노릇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니다. 왕권은 준비된 자, 이기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에게 맡겨진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준다. 한편으로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다윗의 여러 아들 가운데 선택된 왕위 계승자로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원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왕 노릇하는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에 앉는 자는 이기는 자다. 솔로몬은 이 점에서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이라는 말의 영적 무게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처럼 다윗의 직계 아들이 아니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시다. 그는 다윗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볼 때 솔로몬에게 머물면 안 된다. 솔로몬을 지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3.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왜 사랑받는 아들을 드러내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여디디야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을 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솔로몬이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다(삼하 12:24-2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디디야는 &amp;ldquo;여호와께 사랑받는 자&amp;rdquo;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매우 깊다. 솔로몬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태어난 아들이다. 다윗은 큰 죄를 지었고, 첫 아이는 죽었다. 그러나 다윗이 회개한 뒤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베푸셨고,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주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출생은 단순한 왕자의 탄생이 아니다. 그것은 죄 이후에도 회개한 자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렇다고 해서 죄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다윗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간음과 살인의 죄는 그의 집안에 큰 고통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신다. 다윗이 철저히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 솔로몬이 태어났다. 그래서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 여디디야인 것이다. 그는 &amp;ldquo;여호와께 사랑받은 자&amp;rdquo;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참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amp;ldquo;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amp;rdquo;는 음성이었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사랑받은 아들로 불렸다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참 아들이시다(마 3:16-1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의 한 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이 말씀은 더 깊이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시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구원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구속의 경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사람의 아들 되심 안에서 심판권과 왕권을 행사하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여호와께 사랑받은 자였지만, 그는 완전한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훗날 마음이 나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에 끝까지 온전히 응답하지 못했다. 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사랑받는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우리를 솔로몬에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이름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 역시 이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는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사랑받은 자는 사랑하신 분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솔로몬은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말년에 그 이름의 무게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 은혜의 회복을 보되,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참 아들의 순종을 보아야 한다. 사랑받는 자의 길은 은혜에서 시작되지만 순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4. 솔로몬의 지혜는 어떻게 심판주 예수님을 예표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대표적인 특징은 지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는 능력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초기에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amp;ldquo;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amp;rdquo;라고 물으셨다. 솔로몬은 장수도, 원수의 생명도, 부귀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 곧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고, 그에게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지혜는 특히 재판에서 드러났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을 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명했다. 그러자 참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포기하려 했고, 거짓 어머니는 나누라고 했다. 솔로몬은 그 말에서 참 어머니를 분별했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판단과 심판의 지혜였음을 보여 준다. 왕은 판단하는 자다. 왕은 선악을 분별하고, 억울한 자를 건지고, 악한 자를 드러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바로 이 지점에서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주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권을 받으셨다는 뜻이다(요 5:22, 2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5:22, 27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과 구속 경륜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시지만,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그 아들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셨고,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심판하실 자격을 가지신다.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죄 없으신 아들로 사셨기 때문에 의롭게 심판하신다. 솔로몬의 재판 지혜는 바로 이 심판주 예수님의 그림자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도 솔로몬과 자신을 비교하셨다. 남방 여왕, 곧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크신 분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자였지만, 예수님은 지혜 자체이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었지만,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amp;ldquo;솔로몬보다 더 큰 이&amp;rdquo;라고 말씀하셨다(마 12:42).&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참 지혜는 무엇인가. 참 지혜는 마지막 심판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 지식을 많이 배우면 지혜로운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하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삶이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이 지혜를 구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그 지혜의 길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솔로몬은 우리에게 예표이면서 동시에 경고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지혜를 단순한 처세술로 이해하면 안 된다. 참 지혜는 예수님을 아는 지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심판주이심을 알고, 그분 앞에서 행위대로 갚으심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다. 솔로몬의 지혜가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말은, 성도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의 유익만 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지막 보좌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설 것인지를 생각하며 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5. 솔로몬의 평화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여 주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샬롬과 연결된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솔로몬 시대에 평화가 있었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었다. 그는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아람과 싸웠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 결과 솔로몬은 원수가 없는 시대를 누렸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열왕기상은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매우 아름답게 묘사한다. 솔로몬은 그 강 건너편 딥사에서 가사까지 다스렸고,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왕상 4:24-2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왕상 4:24-25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장면은 단순한 정치적 안정이 아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과 안전을 표현한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백성이 자기 땅에서 자기 열매를 누리는 상태다. 그러나 이 평화는 다윗의 전쟁 이후에 왔다. 이것은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참된 평화는 원수를 방치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화는 대적이 제압된 뒤에 온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9: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분 하나님 신앙을 보게 된다. 한 아기로 오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며, 평강의 왕이라 불린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심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나라가 풍요로웠고 백성이 평안을 누렸지만, 그의 말년 타락 이후 왕국은 분열의 길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강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사탄 마귀와 귀신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마지막에는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신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는 그림자다. 다윗의 전쟁 이후 솔로몬의 평화가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승리 이후 새 예루살렘의 평강이 있다. 이 땅의 성도도 마찬가지다. 회개하지 않고 귀신을 내보내지 않은 상태에서 참 평안을 누리기는 어렵다. 죄의 영이 그대로 있고, 조상의 죄로 들어온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마음과 몸과 가정에 공격이 계속되는데 어떻게 참된 평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는 평화를 말하기 전에 영적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참 평화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고 악한 영이 쫓겨난 곳에 임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6.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어떻게 교회를 예표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세 번째 중요한 예표는 성전 건축이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다윗은 전쟁을 많이 했고 피를 많이 흘린 왕이었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윗의 전쟁과 솔로몬의 평화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재료를 준비했고,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그 집은 솔로몬 성전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교회까지 바라본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헐라 하면 어떻게 삼 일 만에 일으키겠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2:19-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lt;/p&gt; &lt;p&gt;&amp;nbsp;&amp;nbsp;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전 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전의 의미가 더 깊어졌다.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시며,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amp;ldquo;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amp;rdquo;고 말했다(고전 3:1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드리시고, 부활 후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표한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듯이, 다윗의 아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이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귀신론도 함께 보아야 한다.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될 수도 있고, 귀신의 집이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 거하시면 그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만, 죄를 회개하지 않고 악한 영을 그대로 두면 그 몸은 귀신들이 합법적으로 자리 잡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론은 회개론과 분리되지 않는다. 교회가 참 성전으로 세워지려면, 먼저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하고,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훗날 우상숭배의 산당도 허용했다. 이것이 인간 예표의 한계다. 솔로몬은 참 성전을 예표했지만, 자신이 끝까지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고, 자신의 몸을 참 성전으로 드리셨고, 부활 후 교회를 성령의 전으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은 예수님의 교회 건축을 가리키는 그림자이며, 교회는 마지막 새 예루살렘의 예고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배당에 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한다. 죄와 귀신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에서 성전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읽을 때, 우리는 건물의 화려함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의 거룩함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뜻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7. 잠언과 전도서는 왜 참 지혜가 여호와 경외임을 말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을 알려면 열왕기상과 역대하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다윗을 알려면 사무엘상&amp;middot;하와 역대상만 볼 것이 아니라 시편을 함께 보아야 하듯이, 솔로몬을 알려면 역사서와 함께 그가 남긴 지혜 문헌을 보아야 한다.&lt;strong&gt; 솔로몬과 연결되는 기록은 잠언, 전도서, 아가서&lt;/strong&gt;이며, &lt;strong&gt;시편 72편과 127편도 솔로몬과 관련&lt;/strong&gt;된다. 이 기록들은 솔로몬의 내면과 지혜의 결론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 첫째로,&amp;nbsp;&lt;strong&gt;&amp;#39;잠언&amp;#39;(총 31장)&lt;/strong&gt;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잠언은 지혜를 말하지만, 그 지혜는 세상 처세술에 머물지 않는다. 잠언은 &amp;ldquo;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amp;rdquo;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잠 1:7, 9:10). 히브리어 지혜는 &amp;ldquo;호크마&amp;rdquo;다. 이 지혜는 단순한 정보나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하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실제적 분별력이다(잠 1: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p&gt; &lt;p&gt;&amp;nbsp; 그런데 잠언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잠언 1장 9장까지의 앞부분은 신학적인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잠언 10장 29장까지는 생활상의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추가로 아굴의 잠언(30장)과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잠언(31장)이 있다.&lt;/p&gt; &lt;p&gt;&amp;nbsp; 먼저, 잠언 1장부터 9장까지를 보자. 여기에서는 지혜를 거의 인격화하여 말한다. 지혜가 부르고, 지혜가 길에서 외치고, 지혜가 사람을 생명으로 초청한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지혜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잠언에는 잠언의 후반부(10-29장)는 생활상의 지혜를 말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 된다는 식의 격언들이 이어진다. 이런 표현들은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적 형식과 닮아 있다. 하지만 성경의 잠언은 단순한 인간 지혜 모음집이 아니다. 그 중심에 여호와 경외가 있기 때문에 성경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만이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한다.&lt;/p&gt; &lt;p&gt;&amp;nbsp; 둘째로,&amp;nbsp;&lt;strong&gt;&amp;#39;전도서&amp;#39;(총 12장)&lt;/strong&gt;는 또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에 이른다. 전도자는 세상 지식, 수고, 쾌락, 부귀, 업적을 다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수고는 헛되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amp;ldquo;헛되다&amp;rdquo;는 말은 모든 지식과 모든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없이 붙든 지식과 수고와 영광이 궁극적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도서는 마지막에 결론을 분명히 말한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1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를 심판과 연결한다. 지혜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마지막 심판을 알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잠언과 전도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론을 말한다. 잠언은 지혜의 출발이 여호와 경외라고 말하고, 전도서는 인생의 결론이 여호와 경외라고 말한다.&lt;/p&gt; &lt;p&gt;&amp;nbsp; &lt;strong&gt;셋째로, 아가서(총 8장)&lt;/strong&gt;가 있다. 이는 예루살렘 왕 솔로몬과 바알하몬에서 왕의 포도원을 치고 있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이다. 이것은 조금 뒤에 따로 살펴보기로 하자.&amp;nbsp;&lt;/p&gt; &lt;p&gt;&amp;nbsp; &lt;strong&gt;마지막으로 넷째로, 솔로몬이 쓴 시편 72편과 127편&lt;/strong&gt;도 이 흐름과 연결된다. 시편 72편은 왕에게 판단력과 공의를 달라고 구한다. 이것은 잠언의 지혜와 연결된다. 지혜로운 왕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해야 한다. 반면 시편 127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도서의 헛됨과 연결된다. 하나님 없이 쌓는 수고는 결국 헛되다(시 127:1-2).&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의 기록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세상 지식은 필요할 수 있지만, 구원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학문과 경험과 부귀와 업적은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완성된다. 성도는 지식 자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회개를 통해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솔로몬이 남긴 지혜의 핵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8. 아가서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남긴 기록 가운데 아가서는 매우 특별하다. 아가서는 표면적으로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 주는 깊은 예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면, 아가서는 그 성전의 실체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한 신부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술람미라는 이름도 의미가 깊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솔로몬이 평강의 왕이라면, 술람미는 그 평강의 왕에게 속한 신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 준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교회는 그분께 속한 신부다. 교회는 단지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분과 연합한 신부 공동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신약성경도 이 비밀을 말한다. 바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는 비밀을 말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엡 5:31-32).&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를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으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된다. 물론 아가서에는 사랑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책을 성경 안에 두신 이유는 더 깊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교회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순결하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셨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며,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고자 하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솔로몬은 건물 성전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성령으로 사람을 성전 되게 하신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노래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부 된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아가서는 성전론과 교회론과 신부론이 만나는 자리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동탄명성교회의 구원론과 종말론도 함께 연결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단지 죄 사함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의 전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신부는 더러운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정결의 부르심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신랑을 모른 채 신부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분이 왜 피 흘리셨는지,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왜 교회를 세우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분량만큼 교회는 신부로 준비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신앙은 종교 생활로 흐르기 쉽다.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은 사랑과 순종과 정결로 나아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는 또한 성도가 단지 자기만 구원받는 데 머물지 말아야 함을 보여 준다. 신부는 성숙해야 한다. 사랑받는 자는 다시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양육받은 자는 또 다른 영혼을 양육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공동체이므로, 다른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을 지은 솔로몬과 아가서를 남긴 솔로몬이 함께 보여 주는 영적 흐름이다. 성전은 신부 공동체를 향하고, 신부 공동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향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와 이름과 평화와 성전과 기록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였고, 여디디야라는 이름으로 여호와께 사랑받은 아들을 보여 주었으며, 지혜로운 심판자로서 마지막 심판주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다. 또한 그는 평화의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했고,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우실 교회를 미리 보여 주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솔로몬을 볼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큰 영광을 누렸지만, 말년에 마음이 나뉘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지혜이시고, 완전한 평강이시며, 완전한 성전이시고, 완전한 신랑이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잠언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 없는 수고의 헛됨을 깨달아야 한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지식 자랑이 아니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므로, 모든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성전 된 자기 몸과 교회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회개 없이 성전의 영광을 말할 수 없고, 악한 영을 내보내지 않고 참 평강을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의 피로 씻김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을 통해 보아야 할 영적 결론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의 성도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부러워하는 데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가리키는 예수님, 솔로몬의 평화가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나라, 솔로몬의 성전이 가리키는 교회, 솔로몬의 아가서가 가리키는 신부의 비밀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구하되 세상 지식의 자랑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평강을 구하되 악한 영과 타협하는 평안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성전을 말하되 건물의 영광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신부를 말하되 정결 없는 사랑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리되어야 하고, 모든 삶이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리하여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지혜와 평강과 거룩한 성전의 영광 안에서 어린양의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date-author&quot;&gt;2026년 06월 15일(월)&lt;br /&gt; 정보배 목사&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구약 성경의&amp;nbsp;&lt;strong&gt;솔로몬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적 인물&lt;/strong&gt;로 조명하며 그 영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다윗의 아들이자 상속자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넘어, 솔로몬이 보여준&amp;nbsp;&lt;strong&gt;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 건축가&lt;/strong&gt;로서의 세 가지 핵심 면모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품을 미리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이 저술한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각각&amp;nbsp;&lt;strong&gt;하나님 경외의 지혜, 세상 지식의 허무함,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lt;/strong&gt;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완전한 지혜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솔로몬이라는 거울을 통해&amp;nbsp;&lt;strong&gt;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참된 신부&lt;/strong&gt;로 준비될 것을 권면하는 목적을 지닙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인포그래픽_솔로몬의_직접기록_메시아_예표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3ab64efe269eb76c892855ac1308fb2d.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0.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c05576dd71a6b334f5491a0b4bac638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1.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1cde90f90bfee159dcba6c75d3afdcc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2.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2d91bd622e17f8eca64f767fbe7cab1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3.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18864cbc2247504dff1f4b5af8efece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4.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a6ed0a7d7af1b70c0a96ddb66638f39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5.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0aac3576159ecaf2580d7a86f748208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6.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5dbf5c67f4e31b4ac97454bd5eaf052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7.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79994e841bcacb72cc3129e4e7ff01c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8.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1846b6c40ff2cf3ef28f7c183d22f56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9.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d54353e3dfcddc48fb21716adea41d5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10.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8e6af5db748915d1c111912743f25c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11.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6fcd85d4dd5272e02e3ff9b1a26af8d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12.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0987445d4d3fce872eb1c4055b8f208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4)] The_Greater_Solomon_all_vora conv 13.jpe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40/260/50d575d83db24e88015f31f3e376f31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또 다른 요약입니다.]&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amp;rdquo;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kFkuAEFbJfc&lt;/p&gt; &lt;div class=&quot;youtube-div dtmseditor-youtube-embed&quot;&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kFkuAEFbJfc?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div&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margin:0; padding:0;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솔로몬은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자로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예표자이다. 다윗이 전쟁으로 주변의 모든 대적을 평정함으로써 아들 솔로몬에게 평화의 기반을 넘겨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권과 통치권을 위임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윗 강해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자료를 나란히 공부했다. 하나는 사무엘상하와 역대상처럼 제3자의 관점에서 다윗을 기록한 역사서요, 다른 하나는 다윗이 직접 남긴 시편이었다. 제3자의 기록과 당사자의 직접 기록은 관점이 다르다. 역사서는 다윗의 행적을 서술하고, 시편은 다윗의 내면과 영성과 기도를 보여 준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비로소 다윗이라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lt;strong&gt;솔로몬에 관한 제3자의 기록&lt;/strong&gt;은 &lt;strong&gt;열왕기상 1장부터 11장, 그리고 역대하 1장부터 9&lt;/strong&gt;장에 나온다. 그러나 &lt;strong&gt;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책이 세 권 플러스 알파&lt;/strong&gt;나 된다. &lt;strong&gt;잠언 31장, 전도서 12장, 아가서 8장, 그리고 시편에도 72편과 127편 두 편&lt;/strong&gt;이 있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을 통해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풍성하게 드러내는지, 이 시간에는 그 핵심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실 기독론 강해는 구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는 작업이다. 구약의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자였고, 그 가운데 솔로몬은 특별히 풍성한 예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솔로몬 강해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lt;strong&gt;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lt;/strong&gt;다.&lt;strong&gt;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lt;/strong&gt;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임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근거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다윗의 몇 번째 아들인가? 성경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추정하면,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쯤 되는 것으로 본다. 다윗에게는 총 19명 내외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역대상의 기록과 사무엘하를 통해 확인된다(대상 3:1-4, 삼하 3:2-5). 그런데 그 가운데 솔로몬은 결코 장자가 아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다. 밧세바는 다윗의 여러 아내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녀에게서 아들이 네 명 태어났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의 징계로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나님은 슬픔에 잠긴 다윗과 밧세바를 위로하시고 새 아들을 주셨다. 그가 바로 &amp;#39;솔로몬&amp;#39;이요 딴 이름으로 &amp;#39;여디디야&amp;#39;이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amp;quot;여디디야&amp;quot;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시몬(시므온)에게 게바(이는 아람어인데, 헬라어로는 &amp;#39;베드로&amp;#39;)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솔로몬에게 &amp;quot;여디디야&amp;quot;라는 이름을 주셨다. 원래 이름과 함께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이 솔로몬이 왜 다른 형들을 제치고 메시아의 예표가 되었는가? &lt;strong&gt;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lt;/strong&gt;이 그 답을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amp;quot;, 여기서 씨(히, 제라)는 단수다.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단 하나의 씨가 선택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 씨를 지목하셨고, 그것이 솔로몬이었다. 맏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를 욕보인 죄로 인해 스스로 그 자리를 잃었다. 셋째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넷째 아도니야는 다윗이 노쇠하자 요압과 아비아달과 손을 잡고 독단적으로 왕을 자처했다. 그러자 선지자 나단과 밧세바의 중재로 다윗은 마지막 힘을 내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다윗의 씨로 오실 메시아는 오직 한 분이었다. 수많은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언약의 최종 성취자이시다. 솔로몬이 다윗의 보좌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밧세바가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가운데 솔로몬이 마지막이었다. 죄로 인해 죽은 첫 번째 아이의 자리를 하나님이 솔로몬으로 채워 주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사람의 실수나 죄를 뛰어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윗과 밧세바의 죄에서 나온 관계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메시아의 예표자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패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lt;strong&gt;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lt;/strong&gt;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amp;#39;여디디야&amp;#39;라는 이름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여디디야(יְדִידְיָה)&amp;quot;는 &lt;strong&gt;히브리어로 &amp;quot;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amp;quot;&lt;/strong&gt;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고 사무엘하 12장 25절은 명시한다. 이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솔로몬 사이의 특별한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이름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두 개의 이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 시몬이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은 것, 이 모든 개명(改名)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사명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그러하다. &amp;quot;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amp;quot;라는 이 이름은 솔로몬이 단순히 왕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임을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제 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 궁극적인 예표인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내 사랑하는 아들&amp;quot; 이것이 바로 여디디야의 신약적 선언이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렸을 때,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오실 것을 예표하는 이름이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그 아들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실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amp;quot;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amp;quot;(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라는 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amp;quot;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amp;quot;(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amp;mdash;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의 말은 얼마든지 실수가 있고 불완전하다. 사도 바울도 틀릴 수 있고, 세상의 어떤 학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말씀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예수님 말씀의 권위는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와 문화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릴 때 그 이름 안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의 기준을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말씀&amp;mdash;그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권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솔로몬이 쓴 성경 세 권과 두 편의 시편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강해를 제대로 하려면 열왕기상(1-11장)과 역대하(1-9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된다. &lt;strong&gt;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lt;/strong&gt;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드러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은 세 권이다. &lt;strong&gt;잠언(31장), 전도서(12장), 아가서(8장)&lt;/strong&gt;다. 여기에 &lt;strong&gt;시편 72편과 127편&lt;/strong&gt;이 플러스 알파로 더해진다. 이 다섯 가지 기록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열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잠언 1장 1절을 보면 &amp;quot;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amp;quot;라고 시작한다. 전도서 1장 1절도 &amp;quot;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amp;quot;라고 서두를 연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두 책 모두 &amp;quot;다윗의 아들&amp;quot;로 시작한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임을 자신의 저술 서두에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저자 서명이 아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로 온다는 언약(삼하 7:12-14)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lt;strong&gt;이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lt;/strong&gt;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크게 보면 이렇다.&lt;strong&gt; 잠언의 주제는 시편 72편과 연결&lt;/strong&gt;된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공의로운 심판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다. &lt;strong&gt;전도서의 주제는 시편 127편과 연결&lt;/strong&gt;된다.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선언이 전도서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 시편 127편이다. &lt;strong&gt;아가서는 솔로몬의 세 번째 대명사, 곧 &amp;#39;성전을 지은 왕&amp;#39;과 연결&lt;/strong&gt;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교회를 상징하듯,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으로 예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조를 한눈에 정리하면 이렇다. &lt;strong&gt;잠언(시편 72편)은 지혜의 왕으로서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하고, &lt;strong&gt;전도서(시편 127편)는 세상의 헛됨을 선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lt;/strong&gt; 하고, &lt;strong&gt;아가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사랑을 노래&lt;/strong&gt;한다. 솔로몬이 남긴 다섯 가지 직접 기록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잠언이 말하는 참된 지혜의 근본은 무엇이며, 왜 세상 학문과 다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잠언(총 31장)은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31장에 걸쳐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데 잠언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lt;strong&gt;1장부터 9장까지는 신학적 지혜&lt;/strong&gt;를 다루고, &lt;strong&gt;10장부터 29장까지는 생활 속의 지혜&lt;/strong&gt;를 다룬다. 그리고 &lt;strong&gt;30장은 아굴의 잠언&lt;/strong&gt;, &lt;strong&gt;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훈계한 말씀&lt;/strong&gt;이 덧붙여져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잠언의 구조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1장부터 9장은 &amp;#39;신학적 지혜&amp;#39;를 다룬다. 지혜가 무엇인지, 왜 지혜를 구해야 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가르쳐 준다. 특히 이 부분에서 지혜가 인격화되어 등장하는 8장이 핵심이다. 반면 10장부터 29장은 &amp;#39;생활상의 지혜&amp;#39;를 담고 있다. 부지런함과 게으름, 말의 절제, 부모와 자녀 관계, 정직과 거짓, 교만과 겸손 등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지혜를 격언 형식으로 가르친다. 이 부분은 애굽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 형식을 많이 따른다. 솔로몬이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잠언 1장부터 9장의 신학적 지혜는 핵심 주제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이 잠언 1장 7절에 선명하게 드러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amp;quot;. 이것은 잠언 전체의 주제 선언이다. 이 주제는 잠언 9장 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강조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두 본문이 나란히 선언하는 것은 동일하다. 지혜의 근본, 지식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식과 지혜가 있다. 철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다. 이 모든 지식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들은 참된 지혜의 근본이 아니다. 지혜의 근본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잠언 10장 이후에 나오는 생활 상의 지혜들로서, &amp;quot;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amp;quot;(잠 16:18), &amp;quot;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게 하느니라&amp;quot;(잠 15:1)와 같은 격언들로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의 지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을 비롯한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 지혜들조차도 1장 7절의 대원칙 아래에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잠언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있다면 8장이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1인칭으로 등장하여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지혜가 의인화(擬人化)된 것이다. &amp;quot;나는 명철이라 내가 근신과 함께 있고&amp;quot;(잠 8:12), &amp;quot;나는 여호와께서 그 일을 시작하시기 전 그 옛날 태초에 창조를 받았으며&amp;quot;(잠 8:22)&amp;mdash;이 지혜의 인격적 서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말씀)가 바로 이 잠언 8장의 지혜의 신약적 계시다.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있었고,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 곁에 있었으며, 사람들을 기뻐하였다는 잠언 8장의 묘사는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의 선언과 정확히 일치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잠언은 세상의 생활 지혜를 담으면서도, 그 모든 지혜의 근원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궁극적으로는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잠언이 성경에 포함된 이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amp;quot;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amp;quot;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amp;quot;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amp;quot;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amp;quot;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quot;(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amp;quot;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amp;quot;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amp;quot;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amp;quot;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amp;quot;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quot;(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전도서가 &amp;quot;헛되고 헛되다&amp;quot;고 선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도서(총 12장)는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독특하다.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3,000가지 잠언을 말하였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으며(왕상 4:32), 식물과 동물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였다. 세상의 어떤 학자도 따라가기 어려운 방대한 지식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쾌락과 풍요도 경험했다. 그는 포도원도 만들고, 동산과 과수원도 만들고, 못도 파고, 남녀 종도 두고, 소와 양도 수없이 많이 가지고, 은금과 나라들의 보배를 쌓기도 하였다. 노래하는 남녀도 두었고 사람의 아들들이 기뻐하는 처첩도 많이 두었다(전 2:4-8).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다 누려 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백하는 &amp;quot;헛되도다&amp;quot;는 무게가 다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그 모든 공부와 탐구 끝에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amp;quot;. 이것은 세상 최고의 지식인이 모든 세상 학문을 섭렵한 뒤에 내린 최종 결론이다. 더 나아가 전도서 12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12 내 아들아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상의 학문은 끝이 없다. 아무리 공부해도 다음날 또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몸만 피곤하고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전 1:8). 이것이 세상 지식의 한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전도서의 결론은 무엇인가? 솔로몬은 공부를 포기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지식의 탐구 끝에 가장 본질적인 지혜에 도달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amp;quot;. 이것은 전도서의 최종 결론이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가? &amp;quot;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amp;quot;&amp;mdash;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심판 앞에 설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지혜다. 이것이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공부한 끝에 얻은 최고의 지혜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잠언이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amp;quot;이라고 출발점을 선언&lt;/strong&gt;한다면, &lt;strong&gt;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입증한 후에 동일한 결론에 도달&lt;/strong&gt;한다. &lt;strong&gt;잠언이 신학적 원리에서 출발하는 귀납&lt;/strong&gt;이라면, &lt;strong&gt;전도서는 세상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귀납&lt;/strong&gt;이다. 그러나 두 책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하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도서가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amp;quot;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amp;quot;헛되도다&amp;quot;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amp;quot;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amp;quot;(요 14:6).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amp;quot;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도서가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amp;quot;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amp;quot;헛되도다&amp;quot;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amp;quot;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amp;quot;(요 14:6)&amp;mdash;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amp;quot;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시편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amp;middot;전도서의 어떤 주제를 예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이 시편에 남긴 두 편의 시,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lt;/strong&gt;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두 시편은 솔로몬의 저술 세계를 관통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먼저 시편 72편&lt;/strong&gt;을 살펴보면, 이 시는 왕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72:1-2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왕이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한다. 이것은 시편 72편의 핵심이다. 왜 이것이 잠언과 연결되는가? 잠언 1장 7절과 9장 10절이 말하는 &amp;quot;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amp;quot;은 결국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14절이 &amp;quot;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amp;quot;고 결론 맺듯이, 심판주 앞에 설 것을 알기에 지금 경외하며 산다는 것이 잠언과 전도서가 공유하는 핵심 메시지다. 그래서 시편 72편은 바로 그 심판주 곧 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위임하신 메시아 왕을 노래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시편 72편이 잠언에게 주는 예표적 의미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음으로 시편 127편&lt;/strong&gt;을 살펴보면,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 없이는 헛됨을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amp;quot;. 이것이 전도서의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amp;quot;와 정확히 대응한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수고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전도서가 세상의 모든 공부와 경험이 헛되다고 결론 맺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시편 127편은 헛됨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amp;quot;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amp;quot;.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 있다. 이것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그리고 그 복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님은 &amp;quot;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amp;quot;(마 11:28)고 말씀하셨다. 시편 127편이 약속하는 참된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lt;strong&gt;시편 72편은 잠언의 주제인 &amp;#39;심판주 앞에서의 지혜&amp;#39;&lt;/strong&gt;를 예표하고, &lt;strong&gt;시편 127편은 전도서의 주제인 &amp;#39;세상 수고의 헛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amp;#39;을 예표&lt;/strong&gt;한다. 솔로몬의 두 시편이 그의 두 지혜서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솔로몬의 저술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증언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의 세 번째 책, 아가서(총 8장)는 그 성격이 잠언이나 전도서와 전혀 다르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lt;/strong&gt;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8장에 걸쳐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를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읽거나, 혹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기독론의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지혜의 왕이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요 2:21),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한다(고전 3:16). &lt;strong&gt;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한다. 그렇다면 솔로몬과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랑하시는 교회의 관계를 예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여주인공은 &amp;quot;술람미 여인&amp;quot;이다. &amp;quot;술람미(שׁוּלַמִּית)&amp;quot;는 솔로몬의 여성형 이름이다. 솔로몬이 히브리어로 &amp;#39;샬롬&amp;#39;에서 온 이름이듯, 술람미도 같은 어근에서 온 이름이다. 솔로몬(שְׁלֹמֹה)의 여성형이 술람미(שׁוּלַמִּית)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닌다. &lt;strong&gt;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짝이요 그의 신부&lt;/strong&gt;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서로 이름을 나누어 가진 한 몸이다. &lt;strong&gt;그리스도가 왕이시면 교회는 왕의 신부다.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 솔로몬이라면, 교회는 술람미 곧 평강 안에 거하는 신부&lt;/strong&gt;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 전체의 구조도 이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아가서에는 크게 세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신부), 그리고 더 넓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관계를 보여 준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고, 술람미가 솔로몬을 찾고, 함께 동산에서 기쁨을 누리는 이야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이야기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가 증언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신랑이시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아가서는 가장 풍성한 언어로 노래한다. &amp;quot;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amp;quot;(아 2:16).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다. 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듯, 솔로몬의 사랑하는 신부 술람미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신부 교회를 예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가 솔로몬의 평화의 왕국과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천국의 풍경을 미리 보여 준다. 솔로몬의 치세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열왕기상은 기록한다(왕상 4:25). 솔로몬의 궁전에서는 하루에 가는 밀가루 30고르(약 7,000리터), 굵은 밀가루 60고르, 살진 소 열 마리, 초장의 소 스물 마리, 양 백 마리,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 식탁에 올랐다(왕상 4:22-23). 14,000명이 먹고도 남을 분량이 매일 궁전에 넘쳤다. 이 풍요로운 식탁과 평안한 삶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풍성함을 예표한다. 천국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새 열매가 열리고, 생명수가 흐르며, 마귀가 없으므로 저주도 없고 눈물도 없다. 솔로몬 왕국의 풍요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원히 완성되는 것이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이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한다. 신랑 솔로몬이 신부를 왕궁 연회 자리에 이끌어 들이듯(아 2:4),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이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솔로몬의 태평성대와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그 영원한 잔치의 예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아버지 다윗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해 놓았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실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 놓으셨다. 창세 전부터 택하신 백성, 십자가의 구속, 성령의 강림.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린 성전 건축 재료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드려 교회라는 새 성전을 세우셨고,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성전이 되었다(마 16:1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약에서 &lt;strong&gt;에베소서 5장 25-27절&lt;/strong&gt;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amp;quot;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amp;quot;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lt;strong&gt;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lt;/strong&gt;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약에서 에베소서 5장 25-27절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amp;quot;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amp;quot;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lt;strong&gt;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들 곧 잠언, 전도서, 아가서, 시편 72편과 127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로 추정됨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 여디디야가 &amp;quot;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amp;quot;를 뜻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도 확인하였다. 또한 솔로몬의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잠언은 심판주 앞에서의 참된 지혜를, 전도서는 세상 학문의 한계와 하나님 경외의 결론을,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각각 예표함을 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 곧 시편 72편과 127편이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한다&lt;/strong&gt;는 사실도 중요하다. &lt;strong&gt;시편 72편이 공의로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노래&lt;/strong&gt;한다면, &lt;strong&gt;시편 127편은 여호와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됨을 선포&lt;/strong&gt;한다. 이 두 주제가 합쳐질 때,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날 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그분을 경외해야 하고,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무엇보다 솔로몬을 통해 배우는 핵심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을 다 섭렵한 최고의 지식인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amp;quot;헛되고 헛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amp;quot;이었다. 이것이 참된 지혜다.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된 지혜다. 앞으로 솔로몬의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으로서의 사역을 하나하나 더 깊이 공부해 가면서, 그 모든 예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알아 가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이야기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삶의 양식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잠언이 말하는 여호와 경외&lt;/strong&gt;, &lt;strong&gt;전도서가 선포하는 세상의 헛됨&lt;/strong&gt;, &lt;strong&gt;아가서가 노래하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 &lt;/strong&gt;곧 &lt;strong&gt;이 세 주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lt;/strong&gt;된다.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끝에 &amp;quot;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amp;quot;(전 12:13)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삶의 어떤 자리에서든 그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것을 제공해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다. 우리는 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것들이 헛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이 세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보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실천적 열매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탁월한 지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 지혜를 삶으로 실천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16일(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sans-serif; font-size: 16px; line-height: 1.85; } h1 { font-size: 1.1em; font-weight: bold; margin: 0 0 1.2em 0; padding: 0; color: #222; } h2 { font-size: 1.0625em;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0; padding: 0; } p { margin: 0 0 1em 0; padding: 0; } .verse {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margin: 0 0 1em 0; padding: 0; } .date-author { margin: 1.5em 0 0 0; padding: 0; } &lt;/style&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3)] 다윗의 아들 솔로몬(01) 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1)(삼하7:8~17)_2026-06-15(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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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5T08:55:03+09:00</published>
		<updated>2026-06-16T08:42:58+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3)] 다윗의 아들 솔로몬(01) 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1)(삼하7:8~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iSRdz_kLeHM 1. 들어가며 다윗을 오래 살핀 이유는 단순히 한 위대한 왕의 일대기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표본이며,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메시아의 고난과 승...</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3)] 다윗의 아들 솔로몬(01) 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1)(삼하7:8~17)&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iSRdz_kLeHM&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iSRdz_kLeHM?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0; padding:0; font-family:&#039;Nanum Gothic&#039;, NanumGothic, sans-ser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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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다윗 언약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씨를 세우시고, 그 나라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며, 그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삼하7:12~13).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에게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삼하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지혜로 재판했고, 평강의 시대를 누렸으며,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판권을 맡기신 아들이시며,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신 참 평강의 왕이시고, 자기 몸과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참 성전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lt;strong&gt;이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어떻게 지혜로운 심판자와 평강의 왕과 성전 건축자로서 메시아 예수님을 예표하며, 천국에서 왕 노릇할 이기는 자의 길을 보여 주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왜 다윗을 공부한 뒤 솔로몬을 살펴야 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다윗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서인 사무엘상&amp;middot;하와 역대상은 다윗의 사건을 보여 주지만, 시편은 다윗의 속마음과 영적 세계와 메시아 예언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윗은 전쟁의 현장에서 왕의 길을 걸었고, 시편 안에서 메시아의 고난과 승리와 왕권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다윗 연구는 자연스럽게 시편 연구로 이어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을 단순히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역사 속 인물로만 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시편에 나오는 솔로몬의 시와 솔로몬이 쓴 3권의 성경책 곧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중에서 시편 72편과 127편은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나와 있다. 특히 시편 72편은 왕의 판단력과 공의로운 재판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이것은 솔로몬 왕의 지혜를 말하는 동시에, 장차 공의로 심판하실 메시아의 왕권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시72:1~2).&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시72:1~2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amp;ldquo;왕&amp;rdquo;과 &amp;ldquo;왕의 아들&amp;rdquo;이다. &amp;#39;다윗&amp;#39;이 왕이라면 &amp;#39;솔로몬&amp;#39;은 왕의 아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역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며, 예수님은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시다. 솔로몬을 살피면 예수님의 왕권 가운데 다윗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 열린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의 예표&lt;/strong&gt;다. 그는 골리앗과 싸웠고, 블레셋과 아말렉과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소바와 아람을 굴복시켰다. 그는 악한 영과 원수를 제압하는 영적 왕직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lt;strong&gt;솔로몬은 전쟁 후에 오는 왕의 다른 모습&lt;/strong&gt;을 보여 준다. 그는 &lt;strong&gt;다윗이 정복한 터 위에서 평강을 누렸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으며, 백성의 송사를 판단&lt;/strong&gt;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은 서로 떨어진 두 인물이 아니라, &lt;strong&gt;메시아의 왕권을 양면으로 보여 주는 부자 관계의 예표&lt;/strong&gt;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아브라함과 이삭도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예표이고,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바쳐질 아들의 예표다. 다윗과 솔로몬도 그러하다. 다윗은 원수를 무찌르는 왕의 예표이고, 솔로몬은 평강 가운데 성전을 세우는 왕의 예표다. 이 둘을 함께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다윗의 아들로 오셨는지가 분명해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따라서 솔로몬을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지혜로운 왕의 이야기를 읽는 일이 아니다.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장차 아들로 오셔서 어떤 왕권을 행사하실 것인지, 어떤 심판을 하실 것인지, 어떤 평강을 이루실 것인지, 어떤 성전을 세우실 것인지를 보는 일이다. 이것이 다윗 이후에 솔로몬을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이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시편 안에서 자기의 고난과 원수와 전쟁을 노래했지만, 그 고백은 자기 개인의 감정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메시아가 받을 고난과 메시아가 얻을 승리가 들어 있었다. 솔로몬의 시편도 마찬가지다. 시편 72편은 솔로몬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솔로몬 한 사람에게 다 담기지 않는다. 땅끝까지 미치는 통치, 모든 왕들이 엎드리는 권세, 가난한 자를 건지는 정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안에서 완성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과 솔로몬은 한 세대의 왕조 이야기가 아니다. 다윗은 싸우는 왕을 보여 주고, 솔로몬은 싸움 이후에 세워지는 나라를 보여 준다. 다윗은 원수를 발아래 두는 왕의 예표이고, 솔로몬은 그 정복 위에 성전과 평강을 세우는 왕의 예표다. 이 두 예표를 함께 보아야 예수님이 왜 먼저 십자가에서 싸우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뒤,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는지가 보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솔로몬은 어떻게 지혜로운 심판자를 예표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지혜다. 그러나 성경에서 솔로몬의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나 재능이 아니다. 그의 지혜는 왕의 지혜이며, 왕의 지혜는 백성을 공의로 판단하는 지혜다. 솔로몬의 지혜는 두 여인의 아이 재판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왕상3장). 그는 겉으로 드러난 말만 듣지 않고, 모성의 진실을 드러내어 참 어머니를 밝혀냈다. 이것은 장차 사람의 말과 외모가 아니라 마음과 행위를 판단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예표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시편 72편이 &amp;ldquo;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amp;rdquo;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다. 왕은 심판자다. 백성들 사이의 억울함을 풀고, 악을 끊고, 의를 세우는 자가 왕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왕이란 재치 있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따라 판단할 줄 아는 왕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신약에 오면 이 심판권이 예수님에게 맡겨졌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5:22). 또한 예수님께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한을 받으셨음을 증언하고 있다(요5:27).&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lt;/strong&gt;&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요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의 경륜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시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amp;ldquo;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amp;rdquo;고 말씀하셨다(사 44:6, 45:5, 45:18, 21, 46:9, 47:8, 47:10). 그런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오신 구속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자되심으로 심판권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사람을 심판하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amp;nbsp;&lt;/strong&gt;&lt;/span&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사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amp;nbsp;&lt;/strong&gt;&lt;/span&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재판은 이 심판권의 그림자다. 솔로몬은 백성 사이에서 억울함을 판단했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의 행위와 마음과 믿음과 회개 여부를 판단하신다. 솔로몬은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두 여인을 판단했지만, 예수님은 생명책과 행위책을 열고 모든 사람을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을 향해 열려 있는 예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왕 노릇한다는 것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다. 왕 노릇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도 이 땅에서부터 말씀으로 판단력을 길러야 한다. 귀신을 분별해야 하고, 죄를 분별해야 하며, 사람과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는 성도에게 이 분별의 왕직을 미리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구한 것은 장수나 부귀나 원수의 생명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을 재판할 지혜를 구했다. 이것은 왕직의 본질을 보여 준다. 왕은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바른 길로 가도록 판단하고 세우는 자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의 구함을 기뻐하셨고, 그에게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도 주셨다. 그러나 그 지혜가 마지막까지 보존되려면 마음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어야 했다. 솔로몬의 후반부가 흔들린 것은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점은 오늘날 사역자와 성도에게 큰 경고가 된다. 은사와 지식과 판단력이 있어도 회개가 없고,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결국 분별이 흐려진다. 심판자의 지혜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함께 붙드는 마음에서 나온다.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악을 분별하되 영혼을 살리려는 목자의 마음을 가진 자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은 왜 예수님을 가리키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시작한다. &amp;ldquo;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amp;rdquo; 한국어 성경은 &amp;ldquo;자손&amp;rdquo;이라고 번역하지만, 원문의 흐름에서 이 표현은 &amp;ldquo;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amp;rdquo;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마1:1). 헬라어 &amp;ldquo;휘오스&amp;rdquo;는 아들을 뜻하며, 히브리어 &amp;ldquo;벤&amp;rdquo;도 아들, 후손, 계승자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은 단순히 다윗에게서 태어난 직계 아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속사적 호칭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역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다. 그러나 메시아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예수님이다. 이것이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핵심 이유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영원한 왕위를 계승하셨다. 솔로몬은 다윗의 왕국을 이어받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왕국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완성하신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에서 &amp;ldquo;아들&amp;rdquo;은 상속의 언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고, 이름을 받고, 기업을 받고, 사명을 받는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약속의 씨였다. 그는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려질 자리까지 갔다. 그 사건은 장차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 주실 십자가의 예표다. 그런데 모리아산은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장소와 연결된다(대하3:1).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다윗의 아들 솔로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한 구속사의 선 위에 놓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흐름을 놓치면 성경은 조각난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믿음 이야기로만 남고, 다윗 이야기는 왕 이야기로만 남고, 솔로몬 이야기는 지혜 이야기로만 남는다. 그러나 &lt;strong&gt;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요 5:39). 예수님께서 친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자신을 가리켜 기록되었다고 하셨다(눅 24:44). 그러므로 솔로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읽어야 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amp;nbsp;&lt;br /&gt;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amp;nbsp;&lt;/strong&gt;&lt;/span&gt;&lt;br /&gt; &amp;nbsp;&amp;nbsp;다윗의 아들 예수님은 맹인들이 부르짖던 호칭이기도 하다. 그들은 &amp;ldquo;다윗의 자손(아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amp;rdquo;라고 외쳤다(마 9:27, 15:22, 20:30). 이것은 단순한 혈통 고백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에게 약속된 왕, 곧 메시아이심을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왕권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미리 보여 주며, 예수님의 오심은 솔로몬의 예표를 완성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 사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첫째 암논도 있었고, 셋째 압살롬도 있었고, 넷째 아도니야도 있었다. 그러나 왕위를 잇는 상속자는 열째 솔로몬이었다. 이것은 천국 왕직에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lt;strong&gt;하나님은 모두를 부르시지만, 왕위를 잇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지는 자다. 혈통이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순종과 이김이 왕직의 길을 결정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은 성경의 큰 두 기둥이다. &lt;strong&gt;아브라함 언약은 씨와 복의 약속이며, 다윗 언약은 왕위와 나라(왕국)의 약속&lt;/strong&gt;이다.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희생 제물이 되셨고, 다윗의 씨로 오신 예수님은 영원히 왕 노릇하시는 메시아가 되셨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시작한다(마 1;1). 이는 예수님 안에서 희생 제물과 왕권이 함께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성경적 배열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은 이 가운데 다윗 언약의 첫 역사적 성취다. 그는 다윗의 몸에서 난 씨였고,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았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했다. 그러나 그의 왕위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는 예표였기 때문&lt;/strong&gt;이다. 영원한 왕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영광을 볼 때, &lt;strong&gt;성도는 솔로몬 자체에 머물지 않고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 곧 예수님을 보아야 &lt;/strong&gt;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한 분 하나님은 어떻게 아들로 오셔서 심판하시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을 통해 예수님의 심판권을 보려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홀로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아들로 오셨다(갈 4:4).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자리로 들어오신 경륜의 표현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복음 5장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아버지께서는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을 심판하신다. 사람이 죄를 지었고, 사람이 회개해야 하며, 사람이 믿음과 행위의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이 한 분 하나님의 보좌를 더 선명하게 보여 준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을 때, &amp;ldquo;그들이&amp;rdquo; 왕 노릇한다고 하지 않고 &amp;ldquo;그가&amp;rdquo;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계11:15).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가 구별되어 언급되지만, 통치의 주체는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단수로 드러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요한계시록 22장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말한다. 보좌들이 아니라 보좌다(계 22:1, 3).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긴다(계22:3).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어린양으로 구속을 이루시며, 보좌에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lt;strong&gt;솔로몬의 예표가 중요해진다. 다윗은 아버지 왕이고, 솔로몬은 아들 왕이다. 아버지 다윗이 왕 노릇했고, 아들 솔로몬도 왕 노릇했다&lt;/strong&gt;. 이것은 장차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셔서 왕 노릇하실 구속사의 그림자다.&lt;strong&gt; 다윗과 솔로몬은 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왕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완성되는지를 보여 준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이 &amp;#39;아들&amp;#39;이시라는 말은 결코 그분의 신성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다윗의 아들이시지만 다윗의 주이시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린양으로 죽임당하셨지만 보좌에 앉아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는 하나님이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이 심판자를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위로자만이 아니시다. 그분은 심판자이시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발은 빛난 주석 같다(계 2:18). 그분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신다(계 2:23).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회개와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dquo;보좌&amp;rdquo;라는 말도 중요하다. 보좌는 앉는 의자가 아니라 통치의 자리이며 심판의 자리다(계 9:4, 7).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하나라는 것은 구속을 이루신 어린양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성도는 하늘에 세 보좌가 있다고 상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한 보좌를 보아야 한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어린양으로 나타나신 주님이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한 분 하나님 신앙은 성경 전체를 뚫는 열쇠다.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을 갈라놓으면 메시아의 비밀이 흐려진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이름이 예수이며,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므로 심판자 예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야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무겁게 붙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솔로몬은 어떻게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amp;ldquo;쉘로모&amp;rdquo;이며, 평강을 뜻하는 &amp;ldquo;샬롬&amp;rdquo;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름 자체로 &amp;#39;평강의 왕&amp;#39;을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강은 아무 근거 없이 찾아온 평화가 아니었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를 정복한 뒤에 온 평강이었다. 전쟁에 능한 아버지가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아들은 평강의 왕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열왕기상은 솔로몬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솔로몬은 그 강 건너편에서부터 가사까지 다스렸고, 사방의 모든 민족과 평화를 누렸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왕상4:24~2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왕상4:24~25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예표한다. 예수님은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일을 멸하심으로 참 평강을 가져오시는 분이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부활은 단지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승리의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평강은 타협의 평화가 아니라 승리 뒤에 오는 평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장차 오실 아들을 &amp;ldquo;평강의 왕&amp;rdquo;이라고 예언했다. 그에게 정사가 있고, 그의 통치와 평강은 무궁하며, 다윗의 왕좌와 왕국 위에 굳게 세워진다(사9:6~7). 이 예언은 솔로몬에게서 그림자로 나타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된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평화를 노래했다. 이것은 솔로몬의 이름 안에 있던 샬롬의 실체가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들어왔다는 선언이다(눅2:14).&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이 평화는 사람의 구호나 제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lt;strong&gt;그리스도의 통치가 없으면 참 평화가 없다. 악한 영이 사람 속에 그대로 있고, 죄의 세력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붙잡고 있다면 평화라는 말은 껍데기가 된다. 먼저 다윗의 전쟁이 있어야 솔로몬의 평강이 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가 있어야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평강이 있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에게도 이 순서가 중요하다. 회개 없이 평강만 구하면 거짓 평안에 속는다. 귀신을 내보내지 않고 안심만 구하면 다시 죄의 공격을 받는다. 말씀과 회개와 영적 전쟁을 통해 악한 영의 합법적 근거를 제거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가정과 교회 가운데 임한다. 솔로몬의 평강은 바로 이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예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고, 죄의 막힘이 제거되며, 영혼과 육체와 삶이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충만한 평강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르다. 세상은 문제를 덮어 두고 평안하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시며 악한 영을 내보내어 참 평강을 주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시대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의 평안은 새 예루살렘의 예고편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눈물과 사망과 애통이 없다. 왜 그런가? 악한 자가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강을 말할 때 반드시 거룩을 함께 말해야 한다. 거룩 없는 평강은 오래가지 못하고, 회개 없는 평안은 악한 영이 다시 들어올 틈을 남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어떻게 교회를 예표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세 번째 중요한 예표는 &amp;#39;성전 건축&amp;#39;이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 일을 직접 감당하지 못했다(대상 28:3). 대신 그는 재료를 준비했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돌과 나무와 수많은 보석을 준비했고, 그 모든 것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겼다. 그리고&lt;strong&gt; 솔로몬은 평강의 시대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lt;/strong&gt;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전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는 건물이 아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임재를 나타내시는 처소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방식을 보여 준 예표다. 구약에서는 돌로 지은 성전이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몸과 성령을 받은 교회가 성전의 실체로 드러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는 &amp;ldquo;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amp;rdquo;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건물 성전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했다(요2:19~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성전의 중심이 건물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음을 보여 준다.&lt;strong&gt;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lt;/strong&gt;이시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이 흘러나왔고, 그 생명을 받은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바울도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했다(고전3:1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솔로몬 성전은 &amp;#39;교회&amp;#39;를 예표&lt;/strong&gt;한다. &lt;strong&gt;다윗이 전쟁으로 재료를 준비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원수를 이기시고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다&lt;/strong&gt;.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lt;strong&gt;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인격적 처소이며, 천국 백성을 준비시키는 훈련장이고, 이기는 자를 세우는 영적 성전&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동탄명성교회의 회개와 천국복음의 강조점이 중요하다. 성전은 깨끗해야 한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 귀신과 죄와 우상숭배의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안 된다. 예수의 피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며, 말씀과 기도와 영적 전쟁으로 성전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답게 서는 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왕이었다. 예수님은 참 성전을 세우신 왕&lt;/strong&gt;이시다. 그리고 &lt;strong&gt;오늘날 성도는 그 성전 안에서 지체로 세워져야&lt;/strong&gt; 한다(엡 2:22). 성도 한 사람의 몸도 성전이며, 성도들이 함께 이루는 교회도 성전이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의 예표는 오늘날 건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천국에 들어갈 백성을 세우는 문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전을 가리키는 말도 생각해야 한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거룩한 처소였고, 신약에서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로 확장된다. 헬라어로 성전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 &amp;ldquo;나오스&amp;rdquo;는 건물 전체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처소를 강조한다. 바울이 성도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성도 안에 실제로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영적 팩트를 말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건물만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lt;/strong&gt;이다. 귀신에게 눌린 사람을 회개와 예수의 피로 자유롭게 하고, 말씀을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천국에 들어갈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솔로몬이 성전의 돌과 금과 기구를 준비했다면, 오늘날 사역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정결한 산 돌로 준비시켜야 한다. 이것이 성전 건축의 신약적 성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왜 이기는 자이어야 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자는 그의 열째 아들인 &amp;#39;솔로몬&amp;#39;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르시지만, 왕위를 잇는 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워진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혈통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암논도 다윗의 아들이었고, 압살롬도 다윗의 아들이었고, 아도니야도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상속자는 솔로몬이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천국 왕직에도 적용된다. &lt;strong&gt;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왕 노릇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그 보좌에 앉는 자는 이기는 자&lt;/strong&gt;다. 요한계시록은 반복해서 &amp;ldquo;이기는 자&amp;rdquo;에게 약속을 준다. 특히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계3: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보좌&amp;#39;는 왕권과 심판권의 자리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단지 영광스럽게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판단하는 자리다. 아무나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lt;strong&gt;이기는 자가 앉는다. 무엇을 이겨야 하는가? 죄를 이겨야 한다. 귀신을 이겨야 한다. 세상을 이겨야 한다. 자기 속의 정욕과 교만과 불신앙을 이겨야 한다. 끝까지 회개하고 믿음을 지킨 자가 이기는 자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20장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계20:6). 여기에는 제사장직과 왕직이 함께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왕은 다스린다. 다윗은 찬양과 전쟁을 함께 보여 주었고, 솔로몬은 심판과 평강과 성전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것이 장차 성도가 받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22장도 &lt;strong&gt;그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lt;/strong&gt;이라고 말한다(계22:5). 여기서 왕 노릇하는 자들은 단지 명목상 성도가 아니다. &lt;strong&gt;그들은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며, 이마에 그의 이름이 있는 자들&lt;/strong&gt;이다. 이름은 소속을 말하고, 이마는 생각과 정체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왕 노릇할 자는 자기 생각을 세상의 영에게 내어 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침 받은 자다.&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lt;strong&gt;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왕위를 이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상속자의 자리에 들어갔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lt;strong&gt;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최고의 왕직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와 생명으로 시작되지만, 왕직은 이 땅에서의 회개와 충성과 이김과 준비를 통해 결정&lt;/strong&gt;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의 예표는 경고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경고는 왕의 아들이 많아도 상속자는 아무나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망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기는 자를 세우신다는 사실이다. 회개하고, 말씀을 붙들고,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교회를 세우며,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들어가는 자는 천국에서 왕 노릇할 상속자로 준비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요한계시록의 144,000&lt;/strong&gt;도 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숫자를 산술적으로 세는 문제가 아니라, &lt;strong&gt;하나님께 인침 받고 어린양을 따르는 이기는 자들의 표지로 보아야&lt;/strong&gt; 한다. &amp;#39;야곱&amp;#39;이 &amp;#39;이스라엘&amp;#39;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건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성도에게 영적 이김의 방향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혈통의 자랑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이기는 자들을 찾으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자랑하는 자가 아니다. 이기는 자는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기며,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다. 그러므로 이김은 교만의 훈장이 아니라 헌신의 열매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겼으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고,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야 할 왕으로 부름받았다. 성도도 이 땅에서 받은 은사와 물질과 시간과 생명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릴 때, 천국의 왕직을 향한 실제 준비가 이루어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어떻게 메시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을 살핀 뒤 &lt;strong&gt;솔로몬을 살펴야 하는 이유&lt;/strong&gt;는, &lt;strong&gt;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amp;ldquo;다윗의 아들&amp;rdquo;로 증언하기 때문&lt;/strong&gt;이다. 솔로몬은 역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며, 예수님은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와 평강과 성전 건축은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향해 열려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 그리고 &lt;strong&gt;솔로몬은 첫째로, 지혜로운 심판자의 예표&lt;/strong&gt;다. 그는 백성을 판단하는 지혜를 받았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심판권을 받으신 인자로 오셨다. 성도는 예수님을 단지 위로자와 구원자로만 아는 데 머물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음과 행위를 살피시는 심판자이심을 알아야 하며, 그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며 회개와 순종의 열매를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로, 솔로몬은 평강의 왕의 예표&lt;/strong&gt;다. 그의 평강은 다윗이 원수를 정복한 뒤에 왔다. 이와 같이 참 평강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제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온다. 성도는 거짓 평안에 머물지 말아야 하며,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참 평강을 누려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 &lt;strong&gt;셋째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왕의 예표&lt;/strong&gt;다.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죽음과 부활로 다시 세우셨고, 성령을 통해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셨다. 성도는 자기 몸이 성전임을 기억해야 하며,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예수의 피와 회개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정결하게 세워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lt;strong&gt;넷째로, 솔로몬은 왕노릇할 상속자의 예표&lt;/strong&gt;다. 다윗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자는 솔로몬이었다. 이 사실은 천국의 왕직이 아무에게나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분임을 보여 준다. 성도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며, 이기는 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믿음으로 시작한 삶은 회개와 순종과 영적 전쟁과 교회 세움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결국 &lt;strong&gt;솔로몬을 공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더 깊이 배우는 일&lt;/strong&gt;이다. 그분은 지혜로운 심판자이시며, 평강의 왕이시고, 참 성전을 세우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를 약속하신다. 성도는 이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오늘의 삶 속에서 죄를 이기고 악한 영을 대적하며 말씀 안에서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의 아들 솔로몬 안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과 평강과 성전의 비밀을 깨닫고, 이기는 자로 준비되어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2026년 06월 15일(월)&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구약의&amp;nbsp;&lt;strong&gt;솔로몬&lt;/strong&gt;을 신약의&amp;nbsp;&lt;strong&gt;예수 그리스도&lt;/strong&gt;를 예시하는 핵심적인&amp;nbsp;&lt;strong&gt;메시아적 예표&lt;/strong&gt;로 규정하며 그 영적 의미를 다각도로 고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이 다윗의 수많은 아들 중 유일하게 왕위를 계승한&amp;nbsp;&lt;strong&gt;상속자&lt;/strong&gt;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가 수행한&amp;nbsp;&lt;strong&gt;지혜로운 재판&lt;/strong&gt;과&amp;nbsp;&lt;strong&gt;성전 건축&lt;/strong&gt;이 장차 인류를 심판하고 교회를 세우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며&amp;nbsp;&lt;strong&gt;다윗의 아들&lt;/strong&gt;이라는 호칭 속에 담긴 신학적 권위를 강조하고,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가 장차 마귀가 없는&amp;nbsp;&lt;strong&gt;천국의 평화&lt;/strong&gt;를 미리 보여준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솔로몬처럼&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뜻을 실행&lt;/strong&gt;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진정한&amp;nbsp;&lt;strong&gt;상속자이자 이기는 자&lt;/strong&gt;가 되어야 한다는 영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3)] 인포그래픽_솔로몬_메시아_예표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0e8446911d69aef1c8d4c908760e89c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4d2956d89ce6d27c2b2b437a8351186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2.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826e85121ebdb1838177b2b24a3db8b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3.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cfbfc90f3b9304004d1a0e1968b7b2e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4.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a6b47c27d0ba370b9db7b3f8f2692f3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5.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7c01801f09e4ff1254a0542a40579de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6.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31798868c290dc2c4bb43ff66455468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7.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fac0d11abef8e8bfb7ee2abcae45853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8.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8b0d3d6c90696d94560caac46c06fc0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9.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2bdb9466d5355a399c9ed6e683c768e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0.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e6018d14a18ba2aba3fdc2cf67f1019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ba403f092d9c4ee9c93423182f6ed10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2.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ec73791e62560b66b8259e8858d657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슬라이드13.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73/260/aedb783ee786d0cfde3b75cd7218f906.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또 다른 요약입니다.&lt;br /&gt; &lt;br /&gt; &lt;span style=&quot;color: rgb(56, 104, 140);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quot;&gt;기독론(123) 다윗의 아들 솔로몬(01): 그는 메시아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1)&lt;/span&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lt;strong&gt;본문: 삼하 7:8-17&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 강해를 시작한 이래, 우리는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흐르고 있음을 거듭 확인해 왔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쳐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들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증인이었다. 그 긴 행렬의 중심부에 다윗이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회개를 알려 준 왕, 전쟁에 능한 왕,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가장 높은 예언을 남긴 왕&amp;mdash;다윗은 실로 구약 기독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사무엘상하와 역대상을 통해 다윗을 살폈고, 다윗이 직접 남긴 시편을 통해서도 메시아 예언의 깊이를 들여다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이른바 &amp;quot;준 시편 강해&amp;quot;를 하게 되었을 만큼, 시편이 얼마나 풍성한 기독론적 보고(寶庫)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의 시라고 표기된 것은 73편으로, 전체의 약 48퍼센트에 해당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 곧 마소라 사본을 기준으로 한 수치다. 그런데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LXX)을 살펴보면, 마소라 사본에는 없지만 70인역에는 다윗의 시로 표기된 편이 14편 더 있다. 이것까지 합산하면 총 87편, 전체의 약 58퍼센트가 다윗의 시로 분류된다. 그야말로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라 불릴 만하다. 이 다윗의 시편 안에 메시아의 예언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시편 22편, 시편 110편, 시편 2편&amp;mdash;이 시편들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의 노래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amp;quot;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amp;quot;고 말씀하셨다. 다윗의 시편이 메시아를 노래하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확인해 주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한편,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책과 시편을 함께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재발견했다. 역사책을 통해서 아는 다윗과 시편을 통해서 아는 다윗이 얼마나 풍성하고 입체적인 인물인지를 말이다. 역사는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시편은 그의 내면과 영성과 기도를 보여 준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다윗이 왜 메시아 예언의 핵심 인물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제 다윗 강해의 결론부에 이르러 우리 앞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일반적으로 &amp;#39;지혜의 왕&amp;#39;, 혹은 &amp;#39;평화의 왕&amp;#39;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독론의 관점에서 솔로몬을 바라볼 때, 그는 단순히 지혜롭고 평화로운 임금이 아니다.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예표자(豫表者)다.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amp;mdash;그 사실이 솔로몬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예표가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 시간에는 그 서론적 기초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우리가 기독론 강해에서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 강해에서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구약 성경을 기독론의 눈으로 읽어야 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부활 후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예수님은 같은 사실을 강조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amp;mdash;구약 성경의 세 구분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기독론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유일한 길이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의 말씀도 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는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첫 문장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원문 헬라어를 보면 &amp;#39;자손&amp;#39;이 아니라 &amp;#39;아들(휘오스, &amp;upsilon;ἱό&amp;sigmaf;)&amp;#39;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문의 뜻은 &amp;quot;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amp;quot;이다. 히브리어 &amp;#39;벤(בֵּן)&amp;#39;과 헬라어 &amp;#39;휘오스&amp;#39;는 문맥에 따라 아들, 자손, 후손을 모두 포괄하는 낱말이다. 히브리어는 동사가 없어 명사를 동사로 사용할 만큼 유동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다. 반면 헬라어는 논리적이고 정밀한 언어여서 의미를 분명히 구분한다. 70인역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 의미를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을 때, 마태복음 1장 1절의 핵심 주제가 더 분명하게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아들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다윗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가장 직접적인 역사적 모형이 바로 솔로몬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백성들이 &amp;quot;다윗의 자손이여!&amp;quot;라고 외쳤던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맹인 두 사람이 &amp;quot;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amp;quot;라고 외쳤고, 수로보니게 여인도 같은 말을 반복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도 무리는 &amp;quot;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amp;quot;라고 환호했다. 그 외침 안에는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에서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핵심은 두 가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 22:18)과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12-16)이다. 씨도 두 가지로 집약된다.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다, 다윗의 씨로 오신다&amp;mdash;이 두 줄기가 구약 전체를 관통한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언약과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로 수렴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또한 마태복음 1장 6절을 보면 계보를 기술하는 가운데 유독 &amp;quot;다윗 왕&amp;quot;이라고 왕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다윗에게서부터 왕의 계보가 시작된다는 표시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을 수의 값으로 환산하면 14가 되는데, 마태가 계보를 14대씩 셋으로 나눈 것도 바로 이 다윗의 수에 맞춘 것이다. 구약 성경의 핵심 언약의 성취자, 다윗의 씨&amp;mdash;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직접적인 예표자가 솔로몬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공부하는 것은 곧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이해하는 작업이다. 나아가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솔로몬에 대한 대명사들&amp;mdash;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amp;mdash;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재판, 완전한 평화, 하나님의 성전&amp;mdash;이 세 주제는 신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공부하지 않고는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시편 72편은 솔로몬을 어떻게 메시아의 예표로 제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편 안에, 솔로몬의 시가 두 편 들어 있다. 시편 72편과 127편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시편 72편은 솔로몬이 메시아의 예표임을 가장 정면으로 드러내는 본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72:1-2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두 절이 솔로몬의 시가 시편 안에 수록된 핵심 이유다. 시편 72편은 표면적으로는 솔로몬 왕의 즉위를 축원하는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이 시는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로 재판하시는 왕, 곧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amp;quot;왕에게 주시고&amp;quot;와 &amp;quot;왕의 아들에게 주소서&amp;quot;라는 표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아들 되시는 메시아의 관계를 동시에 함축한다.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가 아들에게 위임되는 것&amp;mdash;이것이 바로 시편 72편의 핵심 주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72편을 더 읽어 내려가면, 이 시가 역사 속의 솔로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지만 그 내용이 점점 솔로몬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되고(시 72:8), 그의 이름이 해와 달이 있는 동안 영구하며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고 노래한다(시 72:17). 이것은 솔로몬이 통치한 역사적 영역보다 훨씬 넓은 우주적 왕권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일차적인 예표였고, 그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시편 72편은 솔로몬의 왕권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메시아 왕의 통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주제는 신약에서 선명하게 성취된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amp;mdash;이것이 시편 72편 1절이 가리키는 예언의 성취다. 시편 72편을 쓴 솔로몬은 자신이 그 예언의 일차적인 예표임을 알았다. 지혜롭게 재판하는 왕 솔로몬의 모습은 장차 완전한 공의로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이처럼 시편 72편은 솔로몬을 통하여 메시아가 어떤 왕으로 오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 주는 예언의 노래다. 우리가 솔로몬을 공부할 때 시편 72편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솔로몬의 시가 메시아를 가리키는 예언이 되어 시편 안에 수록된 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였다. 더 나아가 시편 72편의 마지막 절은 &amp;quot;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amp;quot;(시 72:18-19)이라는 영광송으로 끝난다. 솔로몬의 시가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땅에 미칠 것이라는 예언이다. 시편 72편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 솔로몬을 예표로 삼아 온 세상을 다스리실 메시아 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심판권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주어진 근거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보좌에서 심판권이 아들에게 주어진 사실은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증언된다. 가장 핵심적인 본문은 요한복음 5장 26-27절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5:26-27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 표현은 &amp;quot;인자됨으로 말미암아&amp;quot;다. 심판권이 아들에게 주어진 근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로, 곧 인자(人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amp;mdash;성육신&amp;mdash;이 심판권 위임의 근거다. 아들이 인자로 오셨기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 홀로 보좌에 앉아 통치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amp;quot;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amp;quot;(사 45:5)고 선포한 것처럼, 구약 시대는 한 분 하나님이 홀로 왕 노릇 하시는 시대였다. 예수님은 그 시대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고, 직접 역사 속에 나타나시지 않으셨다. 대신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아들이 이 땅에 성육신하여 나타나셨고, 그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권을 위임받으셨다. 이것이 요한복음 5장 26-27절의 선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구약에서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를 통해 예표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 전쟁을 수행하며 왕권을 행사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사방에서 정복하고 나라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을 너무 많이 하여 피를 많이 흘렸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평화의 나라와 성전 건축을, 그리고 지혜로운 재판의 영광을 허락하셨다. 아버지 다윗이 싸워 이긴 것을 아들 솔로몬이 받아 누린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신 심판권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심판권의 위임은 종말론적 성취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은 일곱째 나팔 소리와 함께 이렇게 선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amp;quot;&amp;mdash;이 두 표현은 두 분이 각각 왕 노릇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amp;quot;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amp;quot;는 단수 표현으로 하나로 수렴된다.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아버지와 아들로 경륜적으로 구분되어 역사하시는 분이 세세토록 통치하신다는 선언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백보좌 심판을 비롯한 최후의 심판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일관된 증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가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 같이 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이기셔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셨듯이, 이기는 자들도 그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 보좌는 심판과 통치의 자리다. 이 보좌가 요한계시록 22장 1절과 3절에서는 &amp;quot;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amp;quot;로 단수로 표현된다. 하나의 보좌가 곧 아버지의 보좌이면서 동시에 어린 양의 보좌다. 이것이 한 분 하나님의 경륜적 역사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재판하는 왕으로 예표한 것이 바로 이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권이다. 그리고 그 심판이 이루어질 때, 이기는 자들도 그 보좌에 함께 앉아 왕 노릇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요한계시록 22장 3-5절은 그 최종적인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그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amp;quot;&amp;mdash;이 종들이 곧 요한계시록 7장의 14만 4천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amp;quot;이긴 자&amp;quot;의 영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amp;quot;이긴 자&amp;quot;의 영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각 지파에서 만 이천이라는 것은 상징적 숫자로, 완전수 12와 충만수 1000의 곱이다. 이들은 이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은 자들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로 왕의 보좌에 앉아 지혜롭게 재판한 것이, 이기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영광의 예표였음을 우리는 이렇게 확인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솔로몬이 &amp;#39;지혜의 왕&amp;#39;으로 불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을 가리키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명사가 &amp;#39;지혜의 왕&amp;#39;이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열왕기상에는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amp;quot;내 아이다&amp;quot;라고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두 여인이 함께 한 집에 살면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는데, 한 여인의 아이가 죽자 그 여인이 살아 있는 아이를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재판 자리에서도 두 여인 모두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다.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 살아 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각각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한 여인은 &amp;quot;그렇게 하소서, 어느 쪽에도 주지 마소서&amp;quot;라고 했고, 다른 여인은 &amp;quot;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인에게 주소서&amp;quot;라고 했다.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임을 솔로몬은 순식간에 간파했다. 생명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있는 쪽이 진짜 어머니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 재판의 소문이 퍼지자, 이스라엘 온 백성이 솔로몬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 속에 있어 재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왕상 3:28).&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소문은 멀리까지 퍼져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그 여왕은 많은 수행원과 예물을 가지고 와서 솔로몬에게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고, 솔로몬이 그 모든 물음에 막힘 없이 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의 궁전 건축과 음식 차림과 신하들의 행렬과 제사장들의 섬김을 보고 정신을 잃을 만큼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왕상 10:1-5). 여왕은 &amp;quot;내가 들은 말이 사실의 절반도 되지 못했도다&amp;quot;라고 고백했다. 그 지혜와 번영이 이토록 대단했기에, 솔로몬을 &amp;#39;지혜의 왕&amp;#39;이라 부르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솔로몬의 지혜가 예표하는 것은 단순한 총명함이나 학식이 아니다. 시편 72편 1-2절이 보여 주듯, 솔로몬의 지혜는 무엇보다 재판과 심판에서 발휘된다. 하나님의 판단력으로 공의롭게 재판하는 것&amp;mdash;그것이 솔로몬의 지혜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바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솔로몬의 지혜를 완전히 성취하시는 분이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amp;quot;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amp;quot;라고 부른다. 그분은 지혜 자체이시다. 마지막 날 그분이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은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지혜로 이루어질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완전한 지혜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 스스로도 솔로몬을 자신에 대한 예표로 언급하신 바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amp;quot;&amp;mdash;예수님은 솔로몬을 자신의 예표로 명시하셨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무한히 큰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말년에 이방 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돌아서는 비극을 낳았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혜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더불어 부와 영광도 더해 주셨다(왕상 3:12-13). 그러나 그 지혜가 솔로몬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인간 솔로몬의 한계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완전하고 영원하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완전한 지혜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에게는 숨겨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 있다(히 4:13). 솔로몬이 이스라엘 안에서 재판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과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솔로몬의 재판이 40년에 그쳤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솔로몬은 예표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예표의 완전한 성취자이시다. 우리가 오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야고보서 1장 5절은 &amp;quot;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amp;quot;고 말씀한다. 솔로몬이 구한 것이 지혜였고,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한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예표한 분,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야고보서 1장 5절은 &amp;quot;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amp;quot;고 말씀한다. 솔로몬이 구한 것이 지혜였고,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한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예표한 분,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솔로몬이 &amp;#39;평화의 왕&amp;#39;으로 불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을 예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두 번째 대명사는 &amp;#39;평화의 왕&amp;#39;이다. &amp;#39;솔로몬(שְׁלֹמֹה)&amp;#39;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 &amp;#39;샬롬(שָׁלוֹם)&amp;#39;, 곧 평화에서 유래한다. 예루살렘(יְרוּשָׁלַיִם)이라는 도시 이름도 &amp;#39;샬롬의 성읍&amp;#39;, &amp;#39;평화의 성읍&amp;#39;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종말에 임할 새 예루살렘이 평화의 성읍으로 불리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솔로몬이 평화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을 모두 정복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모압을 정복하고, 에돔과 아람과 암몬을 정복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장 골리앗을 소년의 몸으로 쓰러뜨린 것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대적을 평정함으로써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위한 평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래서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로웠다. 다윗이 전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했고, 그 성전 건축의 영광이 평화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도 이 이유에서다. 전쟁하는 아버지와 평화를 누리는 아들&amp;mdash;이 대비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예표하는 생생한 그림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열왕기상 4장 24-25절은 솔로몬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24-25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렸고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amp;quot;&amp;mdash;이보다 더 평화로운 장면이 어디 있겠는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북쪽 끝 단으로부터 남쪽 끝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외적의 침략 없이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앉아 쉬는 풍경이다. 이것이 솔로몬 시대 40년 동안의 태평성대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솔로몬의 평화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완전한 평화를 예표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예언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amp;quot;&amp;mdash;아들로 오신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로 평화의 왕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로 오시는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 9장 6절의 이름들 가운데 &amp;quot;평강의 왕&amp;quot;은 히브리어로 &amp;#39;샤르 샬롬(שַׂר שָׁלוֹם)&amp;#39;이다. 솔로몬의 이름에 담긴 샬롬이 이사야의 예언에서 &amp;#39;평강의 왕&amp;#39;으로 다시 선포된 것이다. 솔로몬은 일시적인 40년의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amp;quot;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한&amp;quot;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누가복음 2장은 이 예언의 성취를 이렇게 기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눅 2:11-14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amp;quot;&amp;mdash;헬라어로 &amp;#39;에이레네(&amp;epsilon;ἰ&amp;rho;ή&amp;nu;&amp;eta;)&amp;#39;, 곧 평화다. 수많은 천군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앞에 놓고 평화를 선포했다. 평강의 왕이 오셨다는 선포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는 40년에 그쳤고 그의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는 분열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다르다. 다윗이 골리앗과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솔로몬에게 평화를 넘겨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셨다. 그 정복의 결과로 오는 평화가 천국에서의 영원한 샬롬이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마귀가 없어지면 마귀가 가져온 모든 저주도 함께 사라진다. 그 완전한 샬롬의 세계가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영원한 왕국이다. 솔로몬의 시대에 백성들이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듯이,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계 22:2). 솔로몬의 평화가 40년의 아름다운 그림자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영원토록 계속되는 실체다.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도 그 평화의 맛을 누린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amp;quot;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amp;quot;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평강의 왕이 주시는 샬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다윗의 아들이 많았음에도 솔로몬만 메시아의 예표로 지목된 까닭은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맏아들 암논, 셋째 아들 압살롬, 넷째 아들 아도니야, 그리고 열째 아들 솔로몬이었다. 그런데도 &amp;#39;다윗의 아들&amp;#39;이라 하면 왜 솔로몬인가? 왜 암논이나 압살롬이나 아도니야가 아닌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야곱과의 대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자신의 열두 아들 모두를 상속자로 삼으려 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한 명만이 상속자였고, 이삭에게도 야곱 한 명만이 상속자였다. 그런데 야곱은 열두 아들 모두를 이스라엘의 지파로 세웠다. 그 강렬한 열망이 야곱에게 &amp;#39;이스라엘&amp;#39;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amp;quot;이스라엘&amp;quot;이 뜻하는 &amp;quot;이긴 자&amp;quot;&amp;mdash;그 이름 안에 야곱의 소원, 곧 모든 아들을 상속자로 만들겠다는 열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들의 수를 세는 장면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등장하는 것이다(계 7:3-4). 야곱은 하나님의 발원&amp;mdash;모든 자녀가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amp;mdash;을 가장 가까이 담아낸 인물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다윗은 달랐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암논은 이복 누이 다말을 욕보인 일로 인해 결국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기까지 했으나, 끝내 나무에 머리털이 걸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이 노쇠하자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과 손을 잡고 왕이 되려 했다. 아버지에게 먼저 여쭙거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에게 알렸고, 밧세바가 다윗 왕에게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다윗은 늙고 쇠한 몸에도 일어나,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솔로몬을 기혼 샘으로 데려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으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했다(왕상 1:38-39). &amp;quot;내 상속자는 솔로몬이다&amp;quot;&amp;mdash;이것이 다윗의 결정이었고, 그 결정 안에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렇게 약속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내가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amp;quot;&amp;mdash;하나님이 친히 이 아들을 지목하셨다. 이 언약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에게 성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된다.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솔로몬만이 택함을 받았듯이, 장차 오실 메시아는 오직 한 분&amp;mdash;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다윗의 아들이요, 그 언약의 최종 성취자이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은 이기는 자에 대한 진리와도 연결된다. 요한계시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amp;quot;이기는 자&amp;quot;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자는 이기는 자이지, 신앙을 고백한 모든 이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계 3:21). 하나님은 모든 자녀가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실제로 왕 노릇 하는 자리는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그 자리에 합당하지 않았다. 오직 솔로몬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다윗의 보좌에 앉았다. 이와 같이 영원한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자는 이기는 자, 곧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간 자들이다. 야곱처럼 모든 아들이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발원이지만, 다윗처럼 한 아들만이 보좌에 앉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을 따라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암논처럼 정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도 안 되고, 압살롬처럼 교만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해서도 안 되며, 아도니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앞서 나가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솔로몬처럼,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이기는 자의 길이다. 다윗이 그 마음으로 살았고, 그 마음을 이은 솔로몬이 왕의 보좌에 앉았다. 우리도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을 예표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세 번째 대명사는 &amp;#39;성전을 지은 왕&amp;#39;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지 4년 만에 예루살렘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다윗이 그토록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성전 건축을, 아들 솔로몬이 마침내 완수한 것이다. 이 성전 건축은 솔로몬 왕의 치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사역이었고, 역대하는 그 건축의 자리를 이렇게 기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것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지명이 &amp;quot;모리아 산&amp;quot;이다. 모리아 산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던 바로 그 산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드린 자리, 그 자리에 다윗이 성전 터를 정하고, 그 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이 한 자리에서 교차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이 &amp;quot;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amp;quot;라고 두 사람을 함께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드린 것과 다윗이 그 자리에 성전 터를 정한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성전이 예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 21절에서 친히 이것을 밝히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amp;quot;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amp;quot;(요 2:19)고 하신 말씀은 자기 몸 곧 성전된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성전이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마련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성전된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셨다. &amp;quot;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amp;quot;(요 1:14)&amp;mdash;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성전에 영광으로 임재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예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 생명을 받은 자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amp;mdash;교회&amp;mdash;가 새로운 성전이 된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언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quot;너희가 하나님의 성전&amp;quot;&amp;mdash;교회가 성전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돌과 백향목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성전&amp;mdash;교회를 세우셨다. 예수님은 &amp;quot;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amp;quot;(마 16:18)고 약속하셨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무너뜨릴 수 없다. 솔로몬의 성전이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듯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거룩한 공동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돌로 세운 성전에서 시작된 예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 자신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경륜의 흐름을 볼 때,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 전체를 꿰뚫는 예표의 사건이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듯이(왕상 8:10-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교회 안에도 성령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것,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는 것&amp;mdash;이것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데 7년을 쏟아부었듯이(왕상 6:38),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을 때, 제사장들이 그 영광 앞에 서지 못했다(왕상 8:11). 그처럼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할 때, 세상은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를 준비했고 솔로몬이 그것을 완성했듯이,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교회의 기초를 더욱 견고하게 쌓아 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123)에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어떤 점에서 메시아의 예표자인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시편 72편이 솔로몬을 통해 메시아를 어떻게 예표하는지, 심판권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위임된 근거, 지혜의 왕으로서 완전한 심판주를 예표하는 의미, 평화의 왕으로서 영원한 샬롬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의미,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오직 솔로몬만이 선택된 이유, 그리고 성전 건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세우심을 예표하는 의미에 이르기까지&amp;mdash;솔로몬의 삶과 치세 전체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향해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에게는 세 가지 대명사가 있다.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이다. 이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각각 예표한다.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심판주,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고 영원한 샬롬을 가져오실 평강의 왕,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성전 곧 교회를 세우실 분&amp;mdash;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이 보여 준 모든 예표를 완전하고 영원하게 성취하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강해를 통하여 우리는 솔로몬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지를 보았다. 지혜의 왕으로서 그는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평화의 왕으로서 그는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성전을 지은 왕으로서 그는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예표가 한 인물 솔로몬 안에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이 놀랍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구약에서 하나님이 맺으신 두 언약&amp;mdash;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amp;mdash;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성취되었다.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일차적 성취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자다. 다윗의 아들이 많았어도 왕의 보좌를 이은 자는 솔로몬 한 사람이었듯이, 하나님은 모든 자녀가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실제로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하는 자리는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솔로몬이 다윗의 마음을 이어받아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고 공의로운 재판을 행하며 하나님의 집을 세웠듯이,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삶으로 실천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온 마음을 쏟음으로써, 장차 하늘에서도 왕 노릇 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시간부터는 솔로몬의 각 예표들&amp;mdash;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amp;mdash;을 하나씩 더 깊이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그 예표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곧 예수님의 이야기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솔로몬 강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6월 15일(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 margin:0; padding:0; } .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_2026-06-12(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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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2T09:32:42+09:00</published>
		<updated>2026-06-12T15:31:55+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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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LH5-_yQy5EM 1. 들어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 능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능하다는 말은 성품이 거칠고 사람과 잘 다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전쟁이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2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6)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3)(시24:7~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LH5-_yQy5EM &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LH5-_yQy5EM?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Malgun Gothic&#039;, sans-serif; font-size: 11pt; line-height: ; color: #222; } .main-title {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0; padding: 0; } .subtitle {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0; padding: 0; } .paragraph { margin: 0; padding: 0; } .scripture { margin: 0; padding: 0;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class=&quot;main-title&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1. 들어가며&lt;/div&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 능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능하다는 말은 성품이 거칠고 사람과 잘 다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전쟁이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먼저 사랑할 대상과 대적할 대상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피아 식별이라고 부른다.&lt;/p&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번 메시지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선 말씀에서 왕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심정으로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고, 자신이 영적 전쟁을 위하여 부름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싸움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싸움을 잘하려면 먼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적을 잘못 정하면 사람을 미워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며, 가정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나 대적을 정확히 알면 사람은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는 악한 영은 대적과 축출의 대상이 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amp;ldquo;강하고 능한 여호와&amp;rdquo;,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라고 부른다(시24:8). 여기서 &amp;ldquo;능한&amp;rdquo;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amp;lsquo;깁보르&amp;rsquo;와 관련된다. 깁보르는 &amp;#39;강한 자&amp;#39;, &amp;#39;용사&amp;#39;, &amp;#39;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자&amp;#39;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막연히 선한 마음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할 수 있는 영적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동시에 이 말씀은 그리스도론의 중심을 열어 준다. 즉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구약의 여호와로,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로, 죽고 부활하신 구속주로, 다시 오실 영광의 왕으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시는 영광의 왕,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lt;strong&gt;성도는 그분의 구원을 받은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로 준비되어야&lt;/strong&gt;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전쟁에 능한 왕이 왜 대적을 정확히 식별해야 하며, 그 대적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전쟁에 능한 왕은 왜 &amp;lsquo;기보르&amp;rsquo;의 사람이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을 이해하려면 먼저 &amp;lsquo;깁보르&amp;rsquo;라는 단어를 붙잡아야 한다. 히브리어 &amp;lsquo;기보르&amp;rsquo;는 단순히 힘이 조금 센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강한 자, 용사, 싸움을 수행할 수 있는 자, 위기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시편 24편에서 여호와께 붙은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단지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원수를 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9장 6절에도 이 단어의 신학적 깊이가 나타난다. 장차 한 아기로 오실 메시아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amp;ldquo;전능하신 하나님&amp;rdquo;인데, 여기서 &amp;ldquo;전능하신&amp;rdquo;이라는 표현도 &amp;lsquo;엘 깁보르&amp;rsquo;,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사9:6). 다시 말해 메시아는 평강의 왕이실 뿐 아니라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평강은 전쟁을 피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적을 제압하시는 하나님의 승리 이후에 온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은 성도의 정체성을 바꾼다. 성도는 귀신을 두려워하며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사탄과 악한 영들은 실재하며, 그들에게도 질서와 계급과 활동 영역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은 악한 영의 존재를 알고도 뒤로 물러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대적하는 자다. 전쟁에 능한 왕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 그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위대함도 여기에 있다. 그는 왕이 되었어도 자기 출발점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장에서, 양을 따르던 자리에서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했다(삼하7:8). 그러므로 다윗의 강함은 교만한 강함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자의 강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안에 있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하 7:8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가 나온다. 전쟁에 능한 사람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원래의 자리를 알고,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셨음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은사가 주어져도 교만하지 않고, 무기가 주어져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영적 권세가 주어져도 자기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 그는 모든 능력과 은사와 무기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amp;lsquo;깁보르&amp;rsquo;의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한 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사탄의 계략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사탄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지도 않는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회개를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싸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하나님은 왜 원수를 멸하기 위해 왕을 세우시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이유는 단지 백성을 통치하게 하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인 동시에 백성 앞에 나가 싸움을 싸우는 자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원한 왕의 기능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amp;ldquo;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amp;rdquo;였고, 다른 하나는 &amp;ldquo;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amp;rdquo;이라는 요구였다(삼상8:19-20).&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상 8:20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왕직&amp;#39;과 &amp;#39;목자직&amp;#39;이 만난다. &amp;#39;목자&amp;#39;는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자이지만, 동시에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갈 때 싸워야 하는 자다. 양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자와 곰 앞에서 도망한다면 그는 참 목자가 아니다. 예수님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10:11). 그러므로 왕이 전쟁에 능해야 한다는 말은 백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이 원리를 몸으로 배운 사람이다. 그는 궁중에서 먼저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양을 지키며 훈련받았다.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 갈 때 그는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양을 건져 냈다. 그 경험이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다윗은 골리앗을 단지 키 큰 군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대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오는 골리앗 앞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삼상17:45).&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삼상 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왕은 원수를 멸하기 위하여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 원수는 자기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력이다. &lt;strong&gt;왕은 사람을 자기 원수로 정하여 복수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로 규정하신 대상을 정확히 알고 그 원수를 대적하는 자&lt;/strong&gt;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를 모르면 교회 안에서도 싸움의 방향이 틀어진다. 목회자는 성도를 원수로 여기고, 성도는 목회자를 원수로 여기며, 성도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면 사탄은 뒤에서 웃고, 교회는 자기 안에서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은 그 길로 가지 않는다. &lt;strong&gt;목자는 양떼를 사랑하고, 양떼를 해치는 영적 세력을 대적한다. 사람은 살릴 대상이고, 악한 영은 쫓아낼 대상&lt;/strong&gt;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천국의 왕직도 이와 연결된다. 천국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단지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신분&lt;/strong&gt;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허송세월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부터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의 실제가 시작된다.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서 갑자기 왕의 권세를 받을 수는 없다. 왕직은 은혜로 열린 길이지만,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자는 회개하고 순종하며 싸우는 자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다윗은 어떻게 &amp;lsquo;나의 원수&amp;rsquo;에서 &amp;lsquo;주의 원수&amp;rsquo;를 보게 되었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대적 이해는 단계적으로 깊어졌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로, 처음에는 자신을 까닭 없이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이 원수처럼 보였다&lt;/strong&gt;. 사울과 그를 따르는 자들, 십 사람들의 밀고, 이스보셋의 잔여 세력, 압살롬의 반역, 세바의 반란은 모두 다윗 안쪽(나라 안)에서 일어난 대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lt;strong&gt;둘째,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는 주변의 나라들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같은 주변 민족이 다윗에게 있어서 원수&lt;/strong&gt;였다. 이처럼 다윗에게 대적은 안에도 있었고 밖에도 있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69편은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았던 고통을 보여 준다(시69:4). 그는 자기 머리털보다 많은 자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부당하게 자기 원수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이 단계에서 대적은 &amp;ldquo;나를 미워하는 자&amp;rdquo;, &amp;ldquo;나의 원수&amp;rdquo;, &amp;ldquo;나의 대적&amp;rdquo;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실제 고난의 언어다. 다윗은 억울하게 쫓겼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으며, 가까운 사람에게도 버림받는 아픔을 겪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나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의 대적에 대한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점차 &amp;ldquo;나를 미워하는 자&amp;rdquo;를 넘어 &amp;ldquo;주를 미워하는 자&amp;rdquo;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편 68편은 &amp;ldquo;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한다&amp;rdquo;고 말한다(시68:1). 여기서 중심이 바뀐다. 문제는 단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를 미워하는 세력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68: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139편도 같은 전환을 보여 준다. 다윗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는 자들과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말한다(시139:20-21). 이것은 인간적 원한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분별의 언어다.&lt;strong&gt; 다윗은 자기 감정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인식을 옮겨 간다&lt;/strong&gt;. 다시 말해 그는 &amp;ldquo;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amp;rdquo;는 차원에서 &amp;ldquo;저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는 영이 역사한다&amp;rdquo;는 차원으로 깊어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39:20-21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이 전환이 없으면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면서도 육신의 싸움을 한다.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복수하고, 사람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전쟁이 아니다&lt;/strong&gt;. &lt;strong&gt;성경의 전쟁이란 사람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악한 영을 향한 대적&lt;/strong&gt;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처음에는 사울을 자기 원수로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과 왕권의 판단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오늘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정 안에도 대적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고, 교회 안에도 대적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사람 자체를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붙잡고 역사하는 죄와 악한 영을 보아야 한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나 부모, 목회자나 성도가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영적 세력이 대적의 대상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은 대적을 넓게 보았고, 깊게 보았다. 내부의 반역도 보았고 외부의 전쟁도 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의 원수를 보았다&lt;/strong&gt;.&lt;strong&gt; 이것이 전쟁에 능한 왕의 분별&lt;/strong&gt;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눈앞의 사람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배후의 영적 실상을 본다. 그러므로 그의 싸움은 혈기와 복수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회개와 권세의 싸움이 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예수님은 참된 대적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대적 이해는 시편 110편에서 절정&lt;/strong&gt;에 이른다. &amp;ldquo;여호와께서 내 주(아도나이)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amp;rdquo;는 말씀은 메시아의 승귀와 통치를 보여 준다(시110:1).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amp;ldquo;내 주&amp;rdquo;라고 불렀음을 밝히셨다(마 22:45). 그러므로 시편 110편의 &amp;ldquo;내 주&amp;rdquo;는 다윗 자신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예수님의 원수는 누구인가? 헤롯인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인가? 아니라면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인가인가? 빌라도인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십자가 앞에서 &amp;ldquo;십자가에 못 박으라&amp;rdquo;고 외친 군중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들은 모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최종 원수로 규정하지 않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amp;ldquo;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amp;rdquo;라고 기도하셨다(눅23:34). 사람은 무지와 죄와 악한 영에게 붙잡힌 구원의 대상이었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요 대적이요 원수요 악한 자는 누구였는가?&amp;nbsp;&lt;strong&gt;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참된 대적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 곧 악한 자다&lt;/strong&gt;.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amp;ldquo;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amp;rdquo;라고 가르치셨는데, 원문적 의미로는 악한 자에게서 건져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마6:13).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뒤에 악한 자에게서의 구원이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실체가 악한 자임을 보여 준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사역도 이 사실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마 4:23, 9:35).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셨다(막3:14-15). 이때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와 귀신 축출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사람을 죄와 질병과 우상숭배와 거짓에 묶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막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원수의 재정의가 완성된다. 예수님은 &amp;ldquo;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amp;rdquo;고 말씀하셨다(마5:44). 사람을 원수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귀는 대적해야 한다. 사랑할 대상과 대적할 대상을 혼동하면 복음이 무너진다. 사람은 사랑해야 하고, 사람 속에서 역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한 영은 미워하고 쫓아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lt;strong&gt;전쟁에 능한 왕의 중심 분별이다. 그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과 타협하지도 않는다.&lt;/strong&gt; 그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지만 죄와 귀신의 활동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을 품지만 그 사람을 묶은 어둠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한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쟁 방식은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권세가 함께 나타나는 방식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성도는 왜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성도가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혈과 육은 사람이다. 성도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싸움이다(엡6:12). 그러므로 성도가 사람을 원수로 삼는 순간, 그는 이미 싸움의 방향을 잃은 것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하지 못하면 가정이 무너진다. 배우자가 나를 힘들게 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면 싸움은 끝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고집의 영, 분노의 영, 음란의 영, 제사의 영, 무속의 영, 거짓의 영을 보면 마음이 달라진다.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 되고, 악한 영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출발점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파를 만들면, 그것은 성도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이 교회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목회자를 미워하고, 성도를 미워하고, 직분자를 미워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대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주적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과 뱀들이다. 이 사실이 분명해질 때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되고, 악한 영을 대적하는 군대가 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또한 성도 안팎에는 싸워야 할 영적 실상이 있다. 죄를 통해 들어온 악한 영들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가문과 세대를 통해 역사해 온 어둠의 세력들이 사람 주변에서 틈을 노린다. 출애굽기 20장 5절은 우상숭배의 죄가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른다고 말한다(출20:5). 이것은 죄가 개인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고 영적 영향력을 남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마음의 후회가 아니라 악한 영의 합법적 근거를 제거하는 영적 행위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아버지의 죄악을 자녀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고로 회개 없이 귀신을 다루려 하면 위험하다. 죄의 근거가 남아 있으면 악한 영은 다시 들어올 틈을 찾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마12:43-45). 그러므로 회개와 축사는 분리될 수 없다. 회개가 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권세를 나타내며, 성령의 능력이 악한 영을 내쫓는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하는 일은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그 안의 악한 영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정죄하지 않고 그를 묶은 어둠의 영을 끊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를 배척하지 않고 그를 흔드는 악한 영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목자의 심정이다. 목자는 양을 때려잡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물고 있는 사자와 곰을 치는 사람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왕은 사람을 향하여는 긍휼을 품고, 악한 영을 향하여는 단호함을 가진다. 그는 사람의 약함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의 죄를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고, 말씀으로 진리를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한다. 이런 분별이 있을 때 성도는 혈과 육의 싸움에서 벗어나 영적 전쟁의 실제 안으로 들어간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영적 전쟁에는 왜 말씀과 무기와 은사가 함께 필요한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은 열심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전쟁에는 무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장비다(엡6:13-17). 이 갑주가 약하면 악한 영의 공격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엡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여기서 &amp;#39;믿음의 방패&amp;#39;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는다. 악한 자는 의심과 정죄와 음란과 분노와 낙심의 불화살을 쏜다. 방패가 작으면 여기저기 맞는다. 말씀과 회개와 순종으로 믿음이 자라야 방패가 커진다. 그리고 &amp;#39;구원의 투구&amp;#39;는 생각을 지킨다. 그리고 &amp;#39;성령의 검&amp;#39;은 말씀으로 대적을 찌른다. 또한 &amp;#39;진리의 허리띠&amp;#39;가 없으면 체험이 있어도 중심을 잃고, &amp;#39;의의 호심경&amp;#39;이 없으면 죄책과 정죄에 가슴이 뚫린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7편도 하나님께서 전쟁의 무기를 준비하신다고 말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칼을 가시며 활을 당기시고 불화살을 예비하신다(시7:12-13).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실제를 보여 주는 상징도 있다. &amp;#39;칼&amp;#39;과 &amp;#39;활&amp;#39;과 &amp;#39;불화살&amp;#39;은 악을 치시는 하나님의 도구다. 성도는 하나님의 무기를 자기 욕심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7:12-13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리고 영적 전쟁의 무기 가운데 시편 2편에 나오는 &amp;#39;철장(쇠지팡이)&amp;#39;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며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게 하신다(시2:8-9). 요한계시록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철장 권세가 약속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왕권이 단지 다스림의 권세가 아니라 대적을 깨뜨리는 권세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영적 무기는 성경 밖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 안에 이미 계시된 전쟁의 언어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하지만 &lt;strong&gt;이런 무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영적 세계를 본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lt;/strong&gt;. 회개가 부족하고 말씀이 약하면 악한 영이 보여 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과 영적 전쟁을 감당할 사람은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의 큰 흐름, 곧 한 분 하나님의 경륜과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교회 시대와 종말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의 완성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영적 체험을 성경의 빛 아래에서 분별할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더불어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도 필요하다&lt;/strong&gt;. 영 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과 같은 &amp;#39;보는 은사(빛의 은사)&amp;#39;가 필요하며, 병 고침, 능력 행함, 믿음의 은사와 같은 &amp;#39;행함의 은사(불의 은사)&amp;#39;도 필요하다. 그리고 영의 &amp;#39;말의 은사&amp;#39;로서 방언, 방언 통역, 예언도 필요하다. 이러한 성령의 9가지 은사들은 성도가 영적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귀한 도구들이다(고전12:7-10). 그러나 은사는 회개와 말씀의 토대 위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회개하지 않은 입술로 예언하면 혼합이 생기고, 말씀 없는 능력 추구는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은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섬김의 도구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고전 12:7-10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나니&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렇지만 &lt;strong&gt;처음부터 큰 무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처음에는 다 믿음으로 싸운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며, 악한 영을 대적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필요한 무기와 은사와 담대함을 주신다&lt;/strong&gt;. 목자의 심정으로 양떼를 살리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싸울 도구를 주신다. 자기 명예를 위해 능력을 구하는 사람과 양떼를 살리기 위해 엎드리는 사람은 다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영적 전쟁에는 &amp;#39;말씀&amp;#39;과 영적 &amp;#39;무기&amp;#39;와 &amp;#39;은사&amp;#39;가 함께 필요하다. &amp;#39;말씀&amp;#39;은 기준이고, 영적 &amp;#39;무기&amp;#39;는 전투의 도구이며, &amp;#39;은사&amp;#39;는 성령께서 주시는 실제적 도움이다. 이 셋이 회개와 순종 안에서 함께 움직일 때 성도는 악한 영을 효과적으로 대적할 수 있다. 전쟁에 능한 왕은 체험만 붙드는 사람이 아니며, 지식만 쌓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말씀으로 분별하고, 회개로 합법적 근거를 제거하며, 성령의 은사와 무기로 악한 영을 제압하는 사람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어떻게 준비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의 주제는 종말론과 연결된다.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은 마지막 전쟁을 마치고 문들을 향하여 들어가시는 왕이다. &amp;ldquo;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amp;rdquo;라는 외침은 단지 과거 예루살렘 성문을 향한 노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에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시는 장면을 바라보게 한다. 그분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며, 백마를 타고 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왕이시다(계19:11).&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 19장은 하늘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분을 따른다고 말한다(계19:14).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와 하늘 군대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성도는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갑자기 영광의 행렬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악한 영을 대적하며, 가정과 교회를 지킨 자들이 그날의 영광에 합당하게 준비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시편 110편도 종말의 전쟁을 말한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신다(시110:5-6). 이것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상 왕들과 그 배후의 악한 세력들이 심판받는 마지막 전쟁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그 전쟁을 위해 영적 장군과 용사들을 준비시키신다. 어떤 사람은 장군으로, 어떤 사람은 용사로, 어떤 사람은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부름받는다. 역할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편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같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시 110:5-6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lt;strong&gt;그렇지만 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lt;/strong&gt; 그는&lt;strong&gt; 먼저 회개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lt;/strong&gt; 한다. 자신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해야 하며,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우상숭배와 무속과 음란과 폭력과 거짓의 죄를 끊어야 한다. &lt;strong&gt;그 다음 말씀을 배워야&lt;/strong&gt; 한다. 성경의 조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을 알아야 한다. 창조, 타락, 구속 약속, 이스라엘의 왕국, 여호와의 성육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교회 시대의 영적 전쟁,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알아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또한 영적 장군은 처음에는 가정에서부터 훈련된다. 큰 전쟁을 말하면서 자기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 안 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원수로 삼지 않고, 각 사람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분별하며, 회개와 중보와 대적 기도로 싸워야 한다. 한 가정이 살아나면 한 교회가 살아날 수 있고, 한 교회가 살아나면 한 지역이 깨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거대한 구호보다 실제로 악한 영과 싸워 사람을 살리는 자를 찾으신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그러므로 일선의 목회자도 새롭게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만 전하면 충분하고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 양떼는 불량품처럼 방치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문이 열리지만, 성도는 회개와 순종과 영적 전쟁을 통해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대적이 누구인지 가르쳐야 하고, 회개를 가르쳐야 하며, 악한 영을 대적하는 실제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 목자의 책임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 천국의 생명책 가운데 다윗의 생명책에는 사자의 깃발을 들고 있는 다윗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왜 그런가? 야곱은 자신의 넷째 아들 유다를 가리켜 사자의 새끼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궁극적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창 49:9-10; 계 5:5). 사자는 왕권과 전쟁의 상징이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전쟁에 능한 왕이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시지만 또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성도도 어린양의 피로 씻김받은 자로서, 사자의 왕권에 참여할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scripture&quot;&gt;&lt;strong&gt;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strong&gt;&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마지막 시대의 영적 장군은 사람을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분별하게 하는 자라야 한다&lt;/strong&gt;. 그는 분노를 키우지 않고 대적을 정확히 보게 한다. 그는 사람끼리 싸우게 하지 않고 악한 영을 대적하게 한다. 그는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군사로 세운다. 이런 자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마지막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가정은 천국 백성을 길러 내며, 성도는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며, 그 전쟁의 핵심이 대적 식별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전쟁에 능한 왕은 &amp;lsquo;기보르&amp;rsquo;의 성격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께서 원수를 멸하게 하시려고 세우신 자다. 그러나 그 원수는 사람 자체가 아니다. 다윗은 처음에 &amp;lsquo;나의 원수&amp;rsquo;를 보았으나 점차 &amp;lsquo;주의 원수&amp;rsquo;를 보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궁극적인 대적이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과 악한 자임이 분명히 드러났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사람과 악한 영을 구분해야 한다. 사람을 미워하면 혈과 육의 싸움에 빠지지만, 악한 영을 분별하면 회개와 사랑과 권세의 길이 열린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먼저 사람을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사람을 묶고 있는 죄와 귀신의 역사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계속해야 하고, 말씀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악한 영을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의 왕직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이 땅에서 준비된 만큼 하늘에서 맡겨진다.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로서 마지막 승리를 이루신다. 그분과 함께 설 자들은 오늘 이 땅에서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양떼를 살리기 위해 대적을 가르쳐야 하고, 성도는 자기 가정부터 악한 영의 역사를 끊어 내는 영적 용사가 되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왕직을 허황된 꿈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날마다 회개해야 하며, 말씀의 기준을 세워야 하며, 사람을 미워하는 싸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싸움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새 예루살렘까지 이루어 가시는 경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는 마지막 시대의 영적 군사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수를 정확히 대적하여 마지막 시대의 영적 용사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paragraph&quot;&gt;2026년 06월 12일(금)&lt;/div&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 시편 24편에 묘사된 &amp;ls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squo;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핵심 자질인&amp;nbsp;&lt;strong&gt;영적 분별력&lt;/strong&gt;과 그 사명을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진정한 승리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뒤에서 역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amp;nbsp;&lt;strong&gt;악한 영적 세력을 정확히 식별&lt;/strong&gt;하여 대적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를 넘어 하나님의 원수를 보는 단계로 성장했듯, 성도 또한&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와 말씀의 전신 갑주&lt;/strong&gt;, 그리고&amp;nbsp;&lt;strong&gt;성령의 은사&lt;/strong&gt;로 무장하여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amp;nbsp;&lt;strong&gt;목자의 심정&lt;/strong&gt;과 악을 멸하는&amp;nbsp;&lt;strong&gt;용사의 권세&lt;/strong&gt;를 동시에 갖추어, 영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amp;nbsp;&lt;strong&gt;영적 장군&lt;/strong&gt;으로 준비될 것을 촉구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전쟁에_능한_자_피아식별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24bc53d757dcd20298de5cb07eaf142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591ccb657336850b8a600a081d185de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a4419f6ce2818433f0ee464a7cd843b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4713e35def8d935d89ceda07ba3c417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f2dce77c2c6d139ed0ca555844c4a62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e4a38c0f2be4d6d793c20fc7a72aea1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2296c3963d203051fc6f8607fd509f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1784db02692a7bbf5cbae961fc99dd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88bac7c4d52bfeb8802db1c3fd5ed52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fcaecc4c016c1cdafc0ae57c38b9b1c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47f755f49005d13a3bad1f8b262e593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46fa95faeb1218ae8fd05934ab95bd8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2e953ddd34b2286dcb500a0c953669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564354d285c673181fbcaeef436bfc7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3844399e1f104e734bbd85d0285a79f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Combat_Manual.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e6960aa0cf5de6357244c7d0039bf21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1bfca08dadafef52bdf50334c285629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62004e12a4d1d495e356281780e706c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15c68688db4e1d007bac80022e4884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7ca3f3039cb6b622a1b398e7b86a7a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e283c030eb45f83664b9d29264e29a3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34457ff82cedd9fb0cacfd17cd2e0df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ec64f7fea88cfb21c4cce7724b78cbc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191466b002bec869ccde48dd51b0fd3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cf45576654267ddc2eeec8322cbceb0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4f6e9c9d3c446cfc02cb3c3f027df4f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dfbbc009430284c18c4520919e25073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20)] Spiritual_Target_Identific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41/255/1d1d53cd869fc6ba82d9742dca08d17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2026-06-11(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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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06-11T08:40:11+09:00</published>
		<updated>2026-06-12T10:04:42+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XxZNSynCtQA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작이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이제부터 회개와 순종과 영적 훈련의 길이 열린다. 믿음은 면허가 아니라 부르심이며,...</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19)]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5) 그는 전쟁에 능한 자였다(02)(시편24:7~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XxZNSynCtQA&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XxZNSynCtQ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 .sermon-title {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 .sermon-body { } .sermon-verse { color: #854ba0; font-weight: bold; } &lt;/style&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1. 들어가며&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작이며, 그 은혜 안으로 들어온 성도에게는 이제부터 회개와 순종과 영적 훈련의 길이 열린다. 믿음은 면허가 아니라 부르심이며, 은혜는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는 거룩한 능력이기 때문이&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성도를 단지 천국 변두리에 머무르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열어 두셨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리를 예비하셨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막연&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한 상상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말씀을 알고, 영적 세계의 실제를 분별하고, 악한 영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춘 자가 장차 그 자리를 감당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을 소개하면서 그분을 &amp;ldquo;강하고 능한 여호와&amp;rdquo;요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라고 선포한다(시24:7-8).&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amp;ldquo;전쟁에 능한&amp;rdquo;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전투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만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amp;ldquo;능한 자&amp;rdquo;에 해당하는 말은 &amp;lsquo;깁보르&amp;rsquo;로서 강한 용사, 능력 있는 전사를 가리킨다. &amp;ldquo;전쟁&amp;rdquo;은 &amp;lsquo;밀하마&amp;rsquo;로서 실제 대적과 맞서는 싸움을 뜻한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은 죄와 사망과 귀신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때가 차매 아들로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 예수님은 온유한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전쟁에 능한 왕이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며, 성도가 어떻게 회개와 말씀과 영적 무장으로 천국의 왕직을 준비해야 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2. 예수 믿은 후에도 왜 계속 회개해야 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되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속을 모르셔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과 뜻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amp;ldquo;나는 이미 믿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amp;rdquo;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다. 히브리어 &amp;lsquo;슈브&amp;rsquo;는 돌아서다, 되돌아가다는 뜻을 지닌다. 헬라어 &amp;lsquo;메타노이아&amp;rsquo;는 생각과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성경적 회개는 죄를 아프게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죄가 붙잡고 있던 권리를 끊어 내는 것이다. 영적 세&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계에서 죄는 악한 영들이 사람을 붙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감정 정리가 아니라 영적 법적 근거를 해체하는 일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lt;strong&gt;하나님이 매일 분노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칼과 활과 불화살을 예비하시는 분&lt;/strong&gt;이라고 고백한다(시7:11-1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7:11-13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죄로 다루신다는 뜻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시지만, 죄 자체와 타협하지는 않으신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보신 사건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은 죄가 결코 자동으로 덮이는 가벼운 문제가 아님을 증거한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의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환난과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신다(계2:21-2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본문은 &lt;strong&gt;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구약에서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다.&lt;/strong&gt; 한 분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나, 그분의 거룩함과 심판과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lt;/p&gt; &lt;p&gt;&amp;nbsp;&amp;nbsp;회개에는 개인의 죄만이 아니라 가계와 삶의 배경 속에서 반복되어 온 죄까지 포함된다. 무속을 찾고, 날을 받고, 점을 치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영에게 물었던 일들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 아닌 존재에게 문을 열어 준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amp;ldquo;나는 직접 하지 않았다&amp;rdquo;는 말로 끝내지 않고, 자기 삶에 흘러 들어온 우상숭배의 뿌리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해 온 회개의 실제이며, 귀신론과 구원론이 만나는 지점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믿은 후의 삶은 회개 없는 안심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정결의 길이어야 한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우상숭배와 무속의 죄, 자신의 입술과 생각과 행위로 지은 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한 죄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와야 한다. 회개가 깊어질수록 성도는 죄의 무게를 알게 되고, 죄가 악한 영에게 내어 준 권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영적 전쟁은 감정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으로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는 싸움이 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3. 천국의 왕직은 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의 왕직은 모든 성도가 막연히 꿈꿀 수 있는 장식품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섬기며 왕 노릇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왕 노릇은 이 땅의 게으른 신앙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lt;strong&gt;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의 문을 여시지만, 왕직과 상급과 기업은 이 땅에서 준비한 분량과 연결되어 &lt;/strong&gt;있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이마에 두며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고 말한다(계22:4-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4-5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하나님의 종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왕 노릇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관련된다. 성도는 모두 같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천국에서의 위치와 영광과 맡겨진 일은 같지 않다. 이 땅에서 회개하지 않고,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전쟁의 실제를 외면한 사람이 장차 왕의 일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며, 다스림은 분별과 권세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천국의 왕직을 말할 때에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amp;ldquo;구원받았으니 아무 준비도 필요 없다&amp;rdquo;는 태도이다. 다른 하나는 &amp;ldquo;나는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amp;rdquo;라는 예언이나 기대만 붙들고 실제 준비를 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회개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하고, 말씀의 기준이 세워져야 하며, 영적 전쟁을 감당할 담대함이 길러져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울은 왕으로 세움을 받았으나 불순종으로 버림받았다. 다윗은 큰 죄와 실패가 있었으나 통회하며 돌이켰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졌다. 여기에서 핵심은 완전한 과거가 아니라 회개하는 현재다. 하나님은 죄를 모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다시 빚으신다. 왕직은 허황된 꿈으로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자에게 맡겨지는 자리다.&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 왕직은 하나님의 경륜의 마지막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창조 때 사람에게 다스림의 목적을 주셨고, 타락 이후에는 구속의 길을 여셨으며,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를 통해 왕의 모형을 보이셨다.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지금 교회 시대에는 성도를 회개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준비시키신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시고, 준비된 성도는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준비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회개만 말하면서 말씀을 모르면 영적 현상을 분별할 수 없고, 말씀만 말하면서 회개가 없으면 그 말씀이 자기 의를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귀신을 쫓는 능력만 사모하면서 성품과 순종이 빠지면 왕직이 아니라 위험한 권세욕으로 흐를 수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왕은 은사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 회개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정확해지고, 전쟁으로 검증된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천국의 자리는 고정된 운명처럼 닫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에게 도전의 문을 열어 두신다. 그러나 열린 문은 준비 없이 통과되는 문이 아니다. 왕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도전할 수 있고, 자기 부족이 무엇인지 알아야 준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를 두렵게 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성도를 깨어나게 하고 장차 받을 영광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말씀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왕직을 사모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열어 두신 부르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모함은 반드시 준비로 증명되어야&lt;/strong&gt; 한다. 회개 없는 꿈은 환상에 머물고, 말씀 없는 열심은 미혹으로 흐르며, 전쟁 없는 왕권은 실제가 되지 못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4.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왜 전쟁에 능해야 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중요한 특징은 &lt;strong&gt;전쟁에 능하다&lt;/strong&gt;는 점이다. 왕은 백성을 지키고, 원수를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업을 보존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왕에게 전쟁은 부수적인 기능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싸움도 아니며, 세상 권력의 다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도 아니다. 성도의 전쟁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lt;/p&gt; &lt;p&gt;&amp;nbsp; 사도 바울은 성도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6:12).&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엡&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귀신론의 출발점이 된다. 성도는 사람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귀신은 단지 심리적 상징이 아니다. 성경은 악의 영들이 있고, 그들이 사람의 생각과 욕망과 두려움과 우상숭배를 통하여 역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귀신을 과장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영적 사실은 말씀의 기준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왕은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룬다. 왜냐하면 죄가 남아 있는 곳에 악한 영은 근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악한 영을 억지로 떼어 내면, 그 사람은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속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불쌍한 마음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회개와 말씀과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해야 하는 일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죄 사함의 권세를 드러내셨다. 그분은 긍휼의 목자이면서도 악한 영과 타협하지 않는 왕이셨다. 성도도 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야 하지만, 죄와 귀신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해서는 안 된다. 참된 사랑은 죄의 근거를 끊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랑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자에게는&lt;strong&gt; 세 가지 자세가 필요&lt;/strong&gt;하다. &lt;strong&gt;첫째, 목자의 심정&lt;/strong&gt;이 필요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마음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자랑거리로 변질된다. &lt;strong&gt;둘째,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믿음&lt;/strong&gt;이 필요하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설 때 자기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것처럼,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야 한다. &lt;strong&gt;셋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시대의 영적 전쟁을 감당하도록 보내셨다는 자의식&lt;/strong&gt;이 필요하다. 이 자의식이 없으면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고, 악한 영의 위협 앞에서 흔들린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lt;strong&gt;전쟁의 대상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lt;/strong&gt;이다. 성도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배우자, 자녀, 성도, 이웃을 대적으로 삼으면 이미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안팎에서 역사하는 죄의 습관과 귀신의 속임수는 분별해야 한다. 혈과 육을 향한 분노는 전쟁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지만, 악한 영을 향한 대적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속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전쟁에 능한 자는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의 고통을 통해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끄신다. 그 징계의 과정을 사람이 함부로 없애려 하면, 당장은 편안해 보여도 결국 죄의 무서움을 배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 사역자는 긍휼과 분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의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왕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원수를 제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영적 세계에서 평화는 타협으로 오지 않는다.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며, 말씀으로 대적할 때 참된 평화가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전쟁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5. 영적 전쟁에서 전신 갑주는 무엇을 뜻하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은 맨몸으로 감당할 수 없다. 성도는 자기 열심이나 감정만으로 귀신을 이길 수 없다. 바울이 말한 &lt;strong&gt;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전쟁 장비&lt;/strong&gt;이다. &lt;strong&gt;&amp;ldquo;전신 갑주&amp;rdquo;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파노플리아&amp;rsquo;는 완전한 무장, 곧 전투에 필요한 전체 장비&lt;/strong&gt;를 뜻한다. &lt;strong&gt;왕이 될 성도는 신분만 말해서는 안 되고 무장을 갖추어야&lt;/strong&gt; 한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바울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말한다(엡6:13-17).&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엡&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러한 6가지 항목을 갖춘 전신 갑주는 추상적인 덕목만이 아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 띠는 허리를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한다. 둘째, 의의 호심경은 마음과 양심을 보호한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은 성도가 복음의 길 위에서 이동하게 한다. 넷째,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는다. 다섯째, 구원의 투구는 생각을 지킨다. 여섯째,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없는 영적 전쟁은 칼 없는 전쟁이며, 믿음 없는 사역은 방패 없는 돌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히 불화살은 성도가 실제로 경험하는 공격과 연결된다. 의심, 음란, 혈기, 낙심, 교만, 두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마음에서만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한 자의 불화살일 수 있다. 믿음의 방패가 약하면 그 불화살이 생각과 감정에 박힌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이 왜 갑자기 흔들리는지 알지 못한 채 죄의 충동에 끌려간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각의 전쟁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7편은 하나님께서 &amp;#39;칼&amp;#3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과 &amp;#39;활&amp;#39;과 &amp;#39;불화살&amp;#39;이 있음을 말씀해준다. 이는 다윗이 영적 세계의 무기들을 이미 말씀 안에서 실제로 보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시7:12-13).&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7:12-13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amp;#39;철장(쇠지팡이)&amp;#39; 권세가 있음을 말한다. 철장은 악한 세력과 반역하는 나라들을 깨뜨리는 왕권의 상징이다(시2:8-9).&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lt;strong&gt;영적 무기는 성경 밖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확인되는 사실&lt;/strong&gt;이다. 다만 무기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와 말씀의 검증이 함께 있어야 한다. 회개가 없으면 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이 없으면 귀신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두 날개는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는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고, 말씀은 영적 현상을 판별하는 기준을 세운다.&lt;/p&gt; &lt;p&gt;&amp;nbsp; 그리고 &amp;#39;믿음의 방패&amp;#39;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튀레오스&amp;rsquo;는 큰 방패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작은 방패로는 온몸을 가릴 수 없듯이, 작은 믿음과 얕은 회개로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충분히 막기 어렵다. 방패는 하루아침에 커지지 않는다.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경험, 회개하고 다시 선 경험,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한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의 방패는 커진다.&lt;/p&gt; &lt;p&gt;&amp;nbsp; 또한 &amp;#39;성령의 검&amp;#39;에 해당하는 &amp;lsquo;마카이라&amp;rsquo;는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검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임을 보여 준다. 말씀을 많이 들은 것과 말씀의 검을 쓸 줄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죄의 유혹 앞에서 선포하며, 귀신의 거짓말을 말씀으로 끊어 낼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된다.&lt;/p&gt; &lt;p&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전신 갑주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도 연결된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그 일에 합당한 무장과 은사와 권세가 주어진다&lt;/strong&gt;. &lt;strong&gt;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싸우며 배우고 회개하며 정결케 될 때 방패가 커지고, 검이 예리해지고, 영적 분별력이 자란다. 왕이 될 자는 전쟁을 통해 훈련된다&lt;/strong&gt;. 훈련 없는 권세는 교만을 낳고, 회개 없는 능력은 미혹을 부른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6. 다윗은 어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 자세로 영적 전쟁의 본을 보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었지만, 성경은 그를 전쟁에 능한 왕으로도 분명히 보여&lt;/strong&gt; 준다. 다윗의 수금과 시편은 아름답지만, 그의 생애를 떠받친 &lt;strong&gt;또 하나의 기둥은 &amp;#39;목자의 전쟁&amp;#39;이었다. 그는 사자와 곰이 양떼를 물어 갈 때 도망하지 않았다. 양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것이 왕의 첫 번째 자격&lt;/strong&gt;이다. 왕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요10:1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요&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목자 정신은 예수님의 목자 정신을 미리 보여 준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양을 이용하지 않는다. 양의 고통을 자신의 부담으로 알고, 양을 삼키려는 악한 영과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자기 의협심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목자의 심정이 없으면 영적 전쟁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두 번째 자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amp;#39;믿음&amp;#39;&lt;/strong&gt;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삼상17:4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장면에서 다윗은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이름으로 서 있는지를 알았다. 영적 전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다. 성도는 자기 체험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고, 자기 은사의 이름으로 싸우지 않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싸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이름, 곧 예수의 이름 안에 권세가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다윗의 세 번째 자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amp;#39;자의식&amp;#39;&lt;/strong&gt;이다. 사울의 군대가 두려움 속에 머물 때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를 그냥 둘 수 없다는 의식으로 섰다. 이 자의식이 있어야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 계급이 낮고 무장이 약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믿음이 있&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으면 성도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창세기 49장은 유다를 사자의 새끼로 묘사하고,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한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서 나왔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다(창49:9-10).&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창&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예&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부른다. 이는 다윗의 전쟁성과 왕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 준다(계5:5).&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 사건은 그의 생애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숨기는 길로 끝까지 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엎드렸다. 전쟁에 능한 왕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줄 아는 사람이다. 회개하지 않는 강함은 사울의 강함이지만, 통회하는 강함은 다윗의 강함이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amp;nbsp;&amp;nbsp;다윗은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한다(시51:17).&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영적 전쟁의 사람은 승리의 간증만 가진 사람이 아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회개하고 다시 일어난 흔적도 가진 사람이다. 그 흔적이 목자의 긍휼을 만들고, 죄인을 대할 때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균형을 만든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을 단지 찬양의 모델로만 보면 부족하다. 다윗은 찬양자이면서 전사였고, 목자이면서 왕이었다. 오늘날 영적 지도자도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찬양과 예배가 있어야 하지만, 악한 영을 분별하고 대적하는 전쟁성이 없으면 양떼를 지킬 수 없다. 말씀을 알아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영적 실제를 성경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래야 다윗처럼 목자의 심정과 왕의 담대함을 함께 가진 자로 세워진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7. 전쟁에 능한 여호와는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의 &amp;ldquo;전쟁에 능한 여호와&amp;rdquo;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신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신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또는 예슈아와 연결되며, 그 뜻은 &amp;ldquo;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amp;rdquo;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의 구원이 인격으로 오신 분이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천사는 마리아에게 나실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마1:2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마&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첫째로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죄의 용서가 없으면 귀신의 권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사망의 권세도 끊어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전쟁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의 자리였다. 부활은 그 승리의 공개 선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린양이시면서 동시에 사자이시다.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속죄를 이루셨고, 유다 지파의 사자로 원수를 이기셨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시편 24편은 문들이 머리를 들고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장면을 두 번 반복한다. 그 왕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며, 만군의 여호와다(시24:9-10).&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시&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4:9-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종말론적 전망을 가진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를 심판하시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새 예루살렘의 문들이 열리고, 전쟁에서 승리하신 왕이 들어가시는 그림은 단지 시적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창세기의 왕권 약속, 다윗의 왕조, 예수님의 초림과 십자가, 교회 시대의 영적 전쟁, 재림과 심판, 새 예루살렘의 왕 노릇은 하나의 타임라인 안에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백마를 타신 분으로 묘사하며,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신다고 말한다(계19:11).&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계19:16).&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승리를 영적 권세의 패배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2:15).&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골&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십자가는 용서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승전지다. 예수님은 피 흘림으로 죄값을 담당하셨고,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며, 승천 이후에도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어 그 승리를 적용하게 하셨다. 지금 교회 시대는 성도가 그 승리를 실제 삶과 가정과 사역 현장에 적용하는 시간이다. 마지막 재림 때에는 이 승리가 온 우주 앞에 완전히 드러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단지 위로만 주시는 분으로 알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목자이시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와 악한 영의 권세를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시고, 왕의 권세로 원수를 밟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십자가의 은혜만 누리는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쟁에 참여하고, 그분의 승리를 따라가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는 것이다.&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8. 참된 평화와 기업은 왜 승리 뒤에 주어지는가?&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의 평화는 원수를 그대로 둔 채 얻는 안락이 아니다. 히브리어 &amp;lsquo;샬롬&amp;rsquo;은 단순한 전쟁 없음이 아니라 온전함, 질서, 충만, 회복을 뜻한다. 참된 샬롬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세워질 때 온다. 죄가 그대로 있고, 귀신의 권세가 그대로 있으며, 우상숭배와 타협이 남아 있는데도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성경적 평화가 아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이 누린 평화는 다윗의 전쟁 위에 세워졌다. 솔로몬은 다윗이 사방의 전쟁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고,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다고 고백한다. 그 후 하나님께서 사방의 태평을 주셨고, 원수도 재앙도 없게 하셨다(왕상5:3-4).&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왕상&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솔로몬의 성전과 영화와 평화는 다윗이 원수들과 싸운 결과 위에 놓여 있었다. 전쟁에 능한 아버지가 원수를 제압했기 때문에 아들이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평화의 근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는 주변 나라들과 정략적으로 연결되었고, 이방 여인들의 우상숭배를 허용했다. 전쟁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타협으로 흐를 수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신은 달래서 나가지 않는다. 죄의 근거가 남아 있는데 위로만 해 주면 더 깊은 속박이 생긴다. 악한 영은 타협의 언어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도는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회개로 문을 닫고, 말씀으로 분별하며, 믿음으로 대적할 때 악한 영의 권세는 무너진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기업도 승리 뒤에 주어진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게 이방 나라와 땅끝을 기업으로 주시며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를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말한다(계2:26-27).&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lt;strong&gt;계&amp;nbsp;&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에서 &amp;ldquo;이기는 자&amp;rdquo;라는 말이 핵심이다. 왕권은 싸우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장식이 아니다.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고, 죄와 세상과 귀신의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기업은 은혜와 무관하지 않지만,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은혜가 시작이고, 회개가 길이며, 전쟁이 훈련이고, 승리가 기업의 문을 연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천국의 기업을 땅끝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큰 기업을 원한다면 큰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에도 상을 주시지만, 큰 왕권을 맡길 자에게는 더 깊은 회개와 더 강한 무장과 더 넓은 목자의 마음을 요구하신다. 다윗이 양 몇 마리를 지키는 자리에서 사자와 곰과 싸웠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설 수 있었고, 골리앗 앞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왕의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전쟁을 피하는 자는 큰 기업을 감당하기 어렵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가정과 교회에도 적용된다. 겉으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가 아니다. 죄가 눌려 있고, 우상숭배의 뿌리가 남아 있고, 미움과 음란과 탐욕의 영이 계속 역사한다면 그것은 잠시 조용한 상태일 뿐이다. 참된 평화는 죄가 회개되고, 악한 영의 통로가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으로 세워질 때 온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화를 원할수록 먼저 영적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기업을 주신다고 하실 때, 그것은 욕심을 채우는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이 맡기실 통치의 범위와 책임을 말한다. 책임 없는 기업은 없다. 큰 기업에는 큰 섬김이 따르고, 큰 왕권에는 큰 전쟁이 따른다. 그래서 성도는 기업의 크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감당할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참된 평화는 원수가 사라진 뒤에 온다. 참된 기업은 승리한 뒤에 주어진다. 참된 왕직은 준비된 자에게 맡겨진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믿은 이후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매일의 회개, 매일의 말씀, 매일의 영적 전쟁은 장차 영원한 왕직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학교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br /&gt; &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왜 전쟁에 능한 자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회개는 구원받은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길이어야 한다. 천국의 왕직은 허황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실제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영적 전쟁은 혈과 육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향한 싸움이어야 한다. 이 싸움은 감정과 자존심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되고, 회개와 말씀과 예수의 이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성도의 실제 무장이며,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과 말씀은 왕이 될 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비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목자의 심정으로 양을 위해 싸웠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섰으며, 하나님께 보냄 받은 전사라는 자의식으로 살았다. 그 모습은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동시에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고, 마지막 날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분이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말씀을 모른 채 영적 체험만 좇지 않아야 하며,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서지도 않아야 한다. 죄의 근거를 회개로 끊고, 말씀의 검으로 분별하며, 믿음의 방패로 불화살을 막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스림의 목적을 두셨고, 타락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구원의 길을 여셨다. 구약의 왕들과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그림자의 실체였다. 지금 성도는 성령 안에서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을 통과하며 마지막 새 예루살렘의 삶을 준비한다. 이 타임라인을 알 때 신앙은 현재의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왕직을 향한 준비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성도는 자신이 장차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변두리에 머무르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평화는 승리 뒤에 오고, 기업은 싸움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며, 왕직은 회개와 말씀과 영적 전쟁으로 빚어진 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전쟁에 능한 영광의 왕 예수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왕직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26년 06월 11일(목)&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구원 이후에 걸어가야 할 실천적 신앙의 여정을&amp;nbsp;&lt;strong&gt;회개와 말씀&lt;/strong&gt;, 그리고&amp;nbsp;&lt;strong&gt;영적 전쟁&lt;/strong&gt;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으로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도를 장차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amp;nbsp;&lt;strong&gt;왕 같은 제사장&lt;/strong&gt;으로 정의하며, 이 직분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철저한&amp;nbsp;&lt;strong&gt;영적 훈련과 무장&lt;/strong&gt;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시편 24편에 계시된&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여호와&lt;/strong&gt;를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신자가 악한 영들의 권세를 분별하고 대적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성도가&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전신 갑주&lt;/strong&gt;를 입고 죄의 근거를 해체함으로써, 진정한&amp;nbsp;&lt;strong&gt;평화와 기업&lt;/strong&gt;을 쟁취하는 승리자로 성장할 것을 독려하는 목회적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전쟁에_능한_여호와_왕직_준비_인포그래픽.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c3024c564c8f1172813aa7d03e9da02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c75b6375777dcea2f36f508fc9e169c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3074919a5c5a9c1eb35a04061263fd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a14b78aeaceabd83459787d296aa87e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59962ff9cec5b7eecaadb95d6bf7732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e1b9a75ae190485b019d8f009118674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9d84f9983cfcfd7c8ff4bd3fe070bd6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667e9deea566942e18542757332c2e9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9b182e640ba4cef7c0e47c65de0ee1d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0d465a286d334ef28d116def51e22f1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23c42af6de0495508e11e86654ce298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caddcc9f4f77f0ea407703c770a9184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69d5bd3c80c7461a509c9da13063b1b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a9d35c7103f82bcce614f6e54ac4d83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3ca7a42adad765fece001c797e69a3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Warrior_King_Blueprint.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78735b49790b64f86b02759e1ebfc7c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또 다른 요약입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1. 들어가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탐구가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왕직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그 왕의 자리를 특정인에게만 고정해 두지 않으셨다. 이 시간에도 그 자리는 열려 있으며, 그것을 향해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왕이 어떤 자인지를 아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필수적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로, 그 자리를 향해 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lt;/strong&gt;이요, &lt;strong&gt;둘째로,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lt;/strong&gt;이다. 허황된 꿈만 꾸면서 실제 삶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흘러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평생 &amp;#39;나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amp;#39;라는 말만 하면서 정작 말씀도 모르고 회개도 없고 준비도 없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려면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려 해도 쓸 수가 없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다가는 버림 패로 끝나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울왕이 그러했다. 하나님이 처음에는 쓰셨지만, 불순종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결국 버림 패가 되고 말았다. 반면 다윗은 실수했어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마침내 하늘의 왕직을 담당하는 자가 되었다. 왕직을 수행할 사람이 위기의 단계에서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서부터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특징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의미를, 시편 24편의 말씀과 다윗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기독론 강의의 전체 흐름을 잠깐 정리해 보면, 우리는 지금 &amp;#39;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amp;#39;이라는 주제 아래 여섯 번째 특징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를 살펴보고 있다. 이 강의 시리즈는 단순히 다윗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14만 4천 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설교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들을수록 삶이 바뀌어야 한다.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시편 24편의 핵심 선포를 개관했다. 이번 시간에는 그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가 무엇을 선포하는지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을 깊이 이해하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2.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가? 이것은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다.&amp;nbsp;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고,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amp;quot;죽여도 천국, 살아도 천국&amp;quot;이라는 식의 값싼 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사랑이 크시니까 다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구원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후부터 진짜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시로 기록된 시편 7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날마다 분노하시는 분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이미 칼을 가시고 활을 당겨 놓고 계시며, 죽일 도구와 불화살을 예비해 두고 계신 분이시다 (시7:8-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7:8-13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겨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신다. 그러면서도 오늘까지 기다리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몰라서, 또는 내가 했던 것을 보지 못해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시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역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불꽃 같아서 모든 것을 다 살피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짓이기시려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계2:1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그분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폐부와 장부 곧 우리의&amp;nbsp; 마음의 깊은 곳의 생각까지 다 살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빛난 주석 같은 발이란 짓이겨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당시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음행과 우상 숭배하는 장면을 불꽃 같은 눈으로 낱낱이 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 심판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침상에 던지실 것이고,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며, 그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계2:21-2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밧세바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처럼, 하나님은 죄의 결과를 반드시 치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이 만약 이 때의 사건 후에 시편을 썼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보면서 &amp;quot;내가 죽었어야 되었는데, 네가 대신 죽었구나&amp;quot; 라고 하면서 통곡했을 것이다. 내 죄로 인해 아무 잘못이 없던 아이가 죽어 나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잘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한 지금 나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벌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죄악 가운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과거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운세를 묻고, 무당집을 찾아가서 날짜를 받아서 살았다. 그런 죄악의 역사 가운데 살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셨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려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고로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심판을 쌓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받기 이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성도의 본분인 것이다. 나 한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부모님,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아니 내 자녀들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이 회개의 삶이야말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채 우상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집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죄악의 역사였다. 그런 죄들이 우리 몸 안에 다 기록되어 있다. 죄는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몰라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신다. 이는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뜻을 알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부지런히 회개해야 한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회개란 영적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귀신을 쫓으려 한다면, 공격은 오히려 우리를 공격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일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다. 전신갑주를 입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힐 일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3.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지금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다양한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살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서는 24장로들이 있고, 그들 앞에는 14만 4천 석의 보좌에 앉아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왕 노릇 하는 자들도 있고 주인 노릇 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 너머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두리에 위치한 자들도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천국에서 이러한 신분은 다 이 땅에서의 삶으로만 결정되며, 한 번 정해지면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이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의 그 어떤 성도라도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 상으로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은 이 땅에서 다 장만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구약 시대 사람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들은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여섯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라는 사실이다. 다윗은 찬양을 잘했지만 그것이 왕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러나 진짜 왕의 조건은 전쟁에 능한 자인가 하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성경의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바로 &amp;#39;다윗&amp;#39;이다. 다윗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최고로 전쟁에 능한 자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얼마나 전쟁에 능한 자였는지에 관하서, 그의 아들은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왕상5:3-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5:3-4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셨으니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자기 시대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을 모조리 물리쳐주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방의 원수의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그가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게 된 이유이다.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장차 예수님을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서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성취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서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들을 발등상이 되게 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한 번 이겼다고 해서 전쟁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다. 원수가 다시 온다면 또 다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 신약성도들에게 싸움 곧 전쟁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럴려면 그는 다윗처럼 메시아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언을 쏟아낼 만큼 성령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들을 갖춘 자라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말씀으로 영적 실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영적 세계를 보고 있다고 해서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철저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영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이 보여준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결국 전쟁에 능한 왕이 되려면, 2가지가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영적 능력이다. 이 두 날개를 모두 갖추는 것이 전장에 능한 자가 되는 비결이 된다. 한쪽 날개가 없으면 아무리 엄청ㅊ난 새라도 날 수 없듯이, 말씀 없는 은사도, 은사 없는 말씀도 온전한 전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수많은 시편들에서처럼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을 쏟아내었다. 시편 22편, 시편 51편, 시편 110편, 시편 24편을 보라. 모두가 다 다윗이 쓴 시편들이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와 은사를 넘치도록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하는 자가 되려면 그는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어야 한다. 싸우되 말씀의 바탕 위에서 싸워야 하고, 말씀을 알되 그 말씀이 영적 실제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전쟁에 능한 자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는 여호수아의 예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전쟁에 능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호수아를 전쟁터레 보낸 자로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 그때 실제 전투는 여호수아가 감당했다. 고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여호수아였기에, 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땅 끝까지 이르는 기업을 차지하려면 그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 (시 2:9).&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내가 만약 전쟁에 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어떻게 하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 타협하게 된다. 솔로몬이 바로 그러했다. 전쟁이 두려우니까 정략 결혼으로 이웃 나라들과 싸우는 것을 대신하고, 공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전을 세워 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오늘날에 들어와 성도가 영적 전쟁을 회피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려고 할까? 그는 대부분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것이다. 예배를 빠지면서 세상 즐거움을 택하고, 헌신을 게을리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말씀을 모르는 채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신앙의 핵심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다는 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자가 전쟁에 능한 왕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악한 문화와 타협하게 되며, 결국 신앙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반면 전쟁에 능한 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원수와 협상하거나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씨가 마를 때까지 싸워 이기는 자이다. 이것이 천국에서 엄청난 기업을 차지하는 자의 특징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4.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란 무엇이며 천국의 무기고는 어떤 모습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전쟁 상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혈과 육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통치들과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적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6:10-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6:10-17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lt;strong&gt;하나님께서 전사에게 입혀주시는 전신갑주&lt;/strong&gt;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총 6가지다. &lt;strong&gt;첫째로 &amp;#39;진리의 허리띠&amp;#39;&lt;/strong&gt;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진리로 묶어 두는 것을 가리킨다. &lt;strong&gt;둘째로, &amp;#39;의의 호심경&amp;#39;&lt;/strong&gt;은 가슴, 곧 마음과 감정을 하나님의 의로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lt;strong&gt;셋째로, &amp;#39;평안의 복음의 신발&amp;#39;&lt;/strong&gt;은 발걸음마다 복음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lt;strong&gt;넷째로, &amp;#39;믿음의 방패&amp;#39;&lt;/strong&gt;는 날아오는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amp;nbsp;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불화살을 쏘기 때문이다. 의심의 불화살, 음란한 생각의 불화살, 혈기와 분노의 불화살을 쏜다. 그러면 이 때에 방패가 없는 자려면 그는 적의 불화살에 맞아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방패로는 적의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만약 방패가 30cm밖에 안 된다면 그는 적이 쏜 불화살을 다 막지 못해 어딘가를 맞고 말 것이다. 키를 넘기는 큰 방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방패란 곧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크면 클수록 방패가 만들어지고,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lt;strong&gt;다섯째로, &amp;#39;구원의 투구&amp;#39;&lt;/strong&gt;는 머리, 곧 생각을 보호한다. &lt;strong&gt;여섯째로, &amp;#39;성령의 검&amp;#39;&lt;/strong&gt;, 곧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레마의 말씀이 성경의 검이다. 그런데 이렇나 전신갑주 가운데 단 한 개 곧 성령의 검만이 공격용 무기가 된다. 그러므로 전쟁에 능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특히 공격용 무기인 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국에 가면 영적 전쟁을 수행위한 무기들이 실제로 보관된 공간이 따로 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로마 장군의 투구처럼 전쟁마다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투구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고, 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칼도있으며, 키를 넘는 큰 네모난 방패도 있다. 또한 전통에 담아서 쏘는 불화살이 있어 멀리서도 그것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미국에서 전화로 기도해도 불화살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불화살은 처음에는 그냥 화살로 주어지지만 영적 장군이 되면 어느날 그것은 불화살로 바뀐다. 그러면 상대방을 치는 도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태워 버릴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이것들 외에도 장수들에게만 주시는 철장(쇠지팡이)도 있다. 시편 2편에서 다윗은 이미 이러한 무기도 있다는 것을 노래했다 (시2:8-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토기장이의 그릇 같이 부수리로다 하시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영적 전쟁을 수행할 때에 이러한 전신갑주와 무기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면 영의 눈을 열고 보면, 우리가 들고 있는 방패와 칼과 투구 등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누가 과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에게는 최소한 나를 지키는 방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격할 칼이 정말 커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보호할 투구와 심장을 보호할 호심경이 튼튼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갖추고 있는 영적 무기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 그것은 어떻게 장만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받은 영적 훈련과 충성된 삶의 결과로 하나씩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무기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무기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장착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장비하는 것은 얼마나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영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가가 결정해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충성도를 따라 영적인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럼 왜 우리는 전신갑주를 온전히 입어야 하는가? 그것은 악한 날에 능히 악한 자들을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싸우다가 쓰러지기 위함이 아니라, 싸우고 난 후에도 서 있기 위함이다. 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자, 그가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춘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격을 받아도 쓰러지지 않고, 불화살을 맞아도 타지 않으며, 어떤 공격에도 믿음의 방패로 소멸하는 자. 바로 그러한 자가 전쟁에 능한 자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한편 전신갑주을 준비할 때에는 각 항목마다 단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허리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성령의 검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다. 방어로 시작해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로 자신을 묶고, 의의 호심경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복음의 신발를 신어 땅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공격을 막고, 구원의 투구로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마침내 성령의 검으로 적을 찔러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있다.&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5. 전쟁에 능한 자의 첫째 자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렇다면 다윗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첫째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lt;strong&gt;첫째로, 목자의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lt;/strong&gt;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이 나타나 자신이 처던 양 떼를 물어 갈 때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짐승들과 싸워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부터 되찾아 왔다. 특히 그가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에게 양 떼를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요10: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amp;quot;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amp;quot;라고 노래했을 때, 이 노래는 단순한 종교적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여호와가 바로 다윗을 지켜주었고 사자와 곰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여호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amp;quot;나는 선한 목자라&amp;quot;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윗은 비록 도망자였지만 바로 그 자세로 이미 광야에서부터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15세 되던 무렵에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용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양 떼를 지켜 온 오랜 훈련 덕분이었던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영적 지도자가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 목자의 심정을 먼저 가져야&lt;/strong&gt; 한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진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열망으로 영적 전쟁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혼이라도 그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 없이는 진정한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이익이 아닌, 맡겨진 양 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각오가 있는 자라야 전쟁의 자리에서 끝까지 설 수 있다. 목자적 사명감이 없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을 먼저 보호하려 하고, 결국 양 떼를 버리는 삯꾼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또한 신약의 성도들이 악한 영들과 싸워 그것들을 추방하려면 그는 언제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야&lt;/strong&gt; 한다.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우리가 강제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 행위는 불법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징계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을 거역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비록 죄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죄가 무서운 것인 줄 알아야 하는데, 고통만 없어지면 또다시 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목자의 심정은 그 영혼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단순히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만약 내가 합법적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 일을 반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계하고 계신 때에 내가 왜 그 징계를 없애려 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먼저해야 한다. 그리고 합법적인 회개를 거친 후에 합법적으로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싸우는 합법적인 자세이다. 불쌍한 마음에 무조건 귀신을 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올바른 과정을 밟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광야에서 양을 치던 시절을 상상해 보라.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에서,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다윗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그 무서운 사자와 싸웠다.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맡기신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충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amp;nbsp;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위험이 자신에게 불어 닥쳤을 때 나타난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도망가 버린다 (요10:12-13).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영적 전쟁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귀신이 나타나고 공격이 거세질 때, 뒤로 물러서는 자는 삯꾼이다. 하지만 맡겨진 양 떼를 살리겠다는 목자의 심정이 있는 자는, 두려워도 자리를 지킨다. 그 심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첫째 자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러므로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기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맡겨진 영혼들을 살려내기 위한 중보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의 무게감이 그를 전쟁에 능한 자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기도 없이는 전쟁에 능한 자가 될 수 기 때문이없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는 양 떼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가 바로 전쟁의 동력이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6. 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의 둘째 자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lt;/strong&gt;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 준 자세이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을 앞세웠지만, 다윗은 그것과 전혀 것을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삼상17:4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이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뛰어난 체력이나 뛰어난 무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얼마나 크고 강했는가? 그 사람 앞에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다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골리앗의 크기를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권위를 붙들고 나아갔던 것이다. 그 이름 앞에서는 어떤 적도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자세는 오늘날 영적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악한 영과 싸울 때 승리하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계급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계급이 낮을 때도 싸을 수 있어야 한다.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의탁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물론 자신의 계급보다 높은 악한 영과 싸우다 보면, 공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훈련의 과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도 사탄마귀로부터 두 번씩이나 크게 공격을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주님께서 영적인 무기들을 더해주셨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강제로 귀신을 쫓으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오히려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뱀은 물어뜯고, 귀신들은 공격해 들어온다. 그것도 다구리로 함께 하여 어마어마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쌓여야 그다음부터 합법적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해야만이 비로소 내 계급도 올라가고, 쓸 수 있는 무기도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사실 정상적이라면 20년, 30년 악한 영들과 싸울 때에 나의 계급도 올라가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의 계급이 껑충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점차 나에게 더 강력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이 이곳에 보내셨다는 확신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 이름의 영적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lt;strong&gt;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른 영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 내 능력은 부족하지만 주님이 하시리라고 의탁하는 마음&lt;/strong&gt;, &lt;strong&gt;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 둘째 자세의 핵심&lt;/strong&gt;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 가지 자세 중에서 둘째 자세인 &amp;#39;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amp;#39;는 것은 실제 전쟁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싸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이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강하고 능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실재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이름 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주문처럼 &amp;quot;예수의 이름으로!&amp;quot;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미 이기셨다는 믿음이 이름 뒤에 받쳐 주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없는 이름 선포는 공허한 말이 된다. 반대로, 그 믿음이 있는 이름 선포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때, 그 뒤에는 사자와 곰을 물리친 훈련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도 그런 역사를 쌓아 가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큰 전쟁을 위한 믿음을 만든다. 처음에는 두통을 위해 기도했는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그다음에는 더 큰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믿음의 역사가 쌓이면 골리앗 앞에서도 &amp;quot;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amp;quot;고 선포하면서 전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은 그 이름의 권위를 온전히 믿고 그 권위 위에 서는 것이다.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악한 영은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7. 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 자세: &amp;#39;보냄 받은 자&amp;#39;의 자의식은 어떻게 전쟁을 가능케 하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전쟁에 능한 자의 셋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amp;#39;자의식&amp;#39;&lt;/strong&gt;이다. &amp;#39;&lt;strong&gt;나야말로 하나님께서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신 자&amp;#39;라는 자의식을 반드시 가져야&lt;/strong&gt; 한다. 시편 24편이 이것을 선포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도록 보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시24:7-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시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무기가 작더라도, 방패가 조그맣더라도, 칼 하나밖에 없더라도 상관없다. &amp;#39;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amp;#39;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자의식 없이는 싸울 수 없다. 저가 계급이 높으면 나를 공격할 텐데,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믿음은 제5차원의 능력을 3차원의 현실로 끌어다 쓰는 통로이다. 처음에는 귀신을 능력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쫓는다. 아직 경험이 없고 능력이 미약해도,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amp;#39;는 믿음으로 선포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고 &amp;quot;주님, 제 손에 불을 주세요, 다 타 버려&amp;quot; 하고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결과를 주시고, 그 결과가 쌓여 계급이 올라가고 능력이 더해진다. 아침까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자세,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전쟁에 능한 자를 만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반대로, 영적 실제를 처음부터 눈으로 다 보면 오히려 두려워서 싸우지 못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영안이 열려 귀신의 실체를 눈으로 보게 되면 겁이 나서 싸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영안을 활짝 열어 두시지 않는 이유가 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훈련이 먼저 되어야, 나중에 영안이 열려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 방식이다. 겁이 없어야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안 보이니까 겁 없이 싸울 수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막9:23). 겨자씨 하나만 한 믿음이면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겨자씨만 한 믿음도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자의식 위에서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크게 쓰신다. &amp;#39;나는 하나님이 귀신을 쫓도록 보낸 자다, 나는 전쟁에 능한 자다&amp;#39;라는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훈련이 될수록 교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몇 번 성공했다고 &amp;#39;나는 이제 다 됐다&amp;#39;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들어와 전쟁에서 지게 된다. 끝까지 겸손하게, 끝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셋째 자세의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amp;#39;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쟁에 능한 자다&amp;#39;라는 자의식은 교만과 구별된다. 교만은 &amp;#39;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amp;#39;는 생각이지만, 올바른 자의식은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하신다&amp;#39;는 생각이다. 내 계급이 낮아도, 내 무기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족한 무기를 채워 주시고, 낮은 계급을 높여 주시며, 없던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이것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보냄 받은 자의 자의식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하도록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 결과가 하늘에서의 기업이 된다. 이 사명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다르게 산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amp;#39;오늘 나는 어떤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amp;#39;를 생각하게 된다. 사명이 있는 자와 사명 없는 자의 삶은 전혀 다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전쟁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두렵고 어색하고 확신이 없다. 그러나 &amp;#39;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amp;#39;는 자의식 위에서 한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담대해진다. 그 담대함이 쌓이면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나서 시작하려는 자는 결코 시작할 수 없다.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자가 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 &amp;quot;가라&amp;quot;고 하셨지, 다 배우고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8.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와 &amp;#39;전쟁에 능한 여호와&amp;#39;는 무엇을 선포하는가?&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국의 역사방에는 각 성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역사방에는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 벽에 새겨져 있고, 바라보면 동영상처럼 움직이며 그때의 소리까지 들린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다윗의 역사방에도 그의 일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장면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때, 수금을 타며 찬양하는 장면보다 골리앗과 싸운 장면이 더 유력하다. 이유가 있다. 다윗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흰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그 깃발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찬양을 잘한 것이 핵심이었다면 그 깃발에는 수금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자가 새겨져 있다. 이 사자는 어디서 온 것인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할 때 선포한 말씀이 그 근거이다 (창49:9-1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창 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찍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왕의 지팡이를 가진 지파이다. 그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다윗이 왔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셨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의 유다 지파 예언이 다윗에게서 성취되고, 다윗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 유다는 사자 새끼이며, 다윗은 그 사자 새끼의 후손이고, 예수님은 그 계보에서 오신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다. 이 연결 고리가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며, 그 사자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 사자의 자질을 이어받도록 부름 받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십사 장로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계5: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amp;nbsp;&amp;nbsp;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이기셨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 역사의 미래가 기록된 그 두루마리를 뗄 수 있는 분은 오직 유다 지파의 사자, 전쟁에 능한 어린양 예수님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깃발에 사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창세기의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되고, 그 중심에 다윗이 있으며, 그 다윗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것을 이 모든 성경이 함께 증언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을 잘한 것도, 수금을 아름답게 탄 것도 아니다. 전사(戰士)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찬양은 하늘에서도 계속될 것이지만,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생명책과 역사방에 핵심으로 기록되는 이유이다. 성가대 4천 명을 만들고 찬양을 조직하고 수금을 탄 것도 다윗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쟁에 능한 자였다는 사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이 사실은 신약에서도 확인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amp;quot;이기는 자&amp;quot;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철장으로 깨뜨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찬양만 잘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워 이기는 자에게 왕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것이 기독론 강의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열두 진주 문을 통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실 때, 천사들이 이렇게 선포한다. &amp;quot;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amp;quot; 그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이며, 이는 &amp;#39;여호와&amp;#39;와 &amp;#39;야샤(구원하다)&amp;#39;가 합쳐진 이름이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이다.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펄럭이며 퍼레이드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성도들을 향해 예정해 두신 영광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 영광의 광장, 유리바다로 된 영광의 광장에서 마지막 퍼레이드를 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갖추고 영적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다. 그 날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고, 그런 사람을 만들고 계신다. 우리가 그 영적 전쟁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마겟돈 전쟁은 예수님이 홀로 싸우시는 전쟁이 아니다. 백마 탄 예수님과 함께 천군도 따라오고, 이 땅에서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들도 함께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고 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이 이 강의 전체가 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목적지를 붙들고 있으면 포기할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루살렘의 히브리어 어원을 살펴보면 &amp;#39;예루&amp;#39;와 &amp;#39;살렘&amp;#39;, 곧 &amp;#39;평화의 터&amp;#3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솔로몬의 이름도 &amp;#39;샬롬(평화)&amp;#39;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화의 성읍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를 다 물리쳤기 때문에 솔로몬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진정한 평화가 임했다. 오늘날 영적 예루살렘,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들이 있어야 진정한 평화와 샬롬이 임한다. 그래서 전쟁에 능한 자가 왕이며, 그 왕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지금 이 세상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귀신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알코올, 음란, 폭력, 우울, 분노, 각종 중독 속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영혼들을 건져낼 자가 누구인가? 전쟁에 능한 자이다. 의사가 몸의 병을 고치듯이, 전쟁에 능한 자는 귀신을 쫓아내어 영혼을 자유케 한다. 이 땅에서 그런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늘의 왕직 수행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요, 유다 지파의 사자의 영적 후손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lt;strong&gt;9. 나오며&lt;/strong&gt;&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으로서 &amp;#39;전쟁에 능한 자&amp;#39;의 두 번째 시간을 가졌다.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으며 날마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편 7편과 요한계시록 2장을 통해 살펴보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윗의 삶과 솔로몬의 증언과 여호수아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천국의 무기고, 그리고 전쟁에 능한 자의 세 가지 자세인 목자의 심정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는 것, &amp;#39;보냄 받은 자&amp;#39;의 자의식으로 싸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다윗의 깃발에 새겨진 사자의 의미와 창세기 49장, 요한계시록 5장, 시편 24편이 함께 선포하는 &amp;#39;전쟁에 능한 여호와&amp;#39;의 의미도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런 준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시며,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날마다 부지런히 회개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임을 잊아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전쟁에 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을 살리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amp;#39;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전사이다&amp;#39;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훈련하는 삶이 필요하다. 계급이 낮아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합당한 무기를 더하여 주신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도 된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훈련이 쌓이면서 점점 전쟁에 능한 자로 빚어져 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원수가 씨가 마를 때까지 전쟁을 그치지 않은 다윗처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처럼 아버지가 닦아 놓은 평화 위에서 안주하다가 우상 숭배까지 이르는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 능하지 못하면 반드시 타협이 따라오고, 타협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신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 그 흰 말 위에서 사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하는 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준비시키고 계신 하늘의 왕직 수행자이다. 이 땅에서 전신갑주를 온전히 갖추고 전쟁에 능한 자로 훈련된 성도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음 시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강의를 이어 나갈 것이다. 오늘 이 강의를 통해 전쟁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훈련해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6월 11일(목)&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3d9a42f6f2a552812a25497cb90a2e5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3208bad2dcf6304b3e46a1b29f003b5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f58de21592c6e2059f082d1580d89c7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8d6f91b052a71cd262a96c61a7c3885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fa3ce0c5e55b0235643bfd3ab98553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43a79dfbbbd1d5319885679d1b7ac57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0781eb6140828dc36a202f1e4626899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e9e470bc8a391e7bdfc14743bb6d3b7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9643ad95b5b97d7b68079f052e0fa8c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079262e14ddf2a6c3abe42204d1807b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19)] Forging_the_Spiritual_King.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30/255/602f4a472fd03dd1f46997d6690ee282.webp&quot; /&gt;&lt;/p&gt;</content>			</entry></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