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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침묵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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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212)]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2)(욜2:30~32)_2026-10-14(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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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14T09:08:24+09:00</published>
		<updated>2026-10-14T20:37:43+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오늘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12)]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2)(욜2:30~3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3Xn8FrTcKm0 [설교핵심] 본 설교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을 성경적 관점에서 비교하며, 인간의 구원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과 전적 타락 교리가 하나님의 자비...</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오늘 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12)]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2)(욜2:30~3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3Xn8FrTcKm0&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3Xn8FrTcKm0?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amp;nbsp;&lt;strong&gt;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을 성경적 관점에서 비교&lt;/strong&gt;하며, 인간의 구원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칼빈주의의 &lt;strong&gt;이중 예정론과 전적 타락 교리&lt;/strong&gt;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왜곡하고 인간의 책임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인간을 &lt;strong&gt;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lt;/strong&gt;에 비유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lt;strong&gt;선행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lt;/strong&gt;가 구원에 중요하게 작용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신자들이 맹목적인 교리적 안주에서 벗어나, &lt;strong&gt;환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회개와 믿음을 지키는 삶&lt;/strong&gt;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것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장로교에서 배운 &lt;strong&gt;칼빈의 이중 예정론&lt;/strong&gt;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lt;br /&gt; 2. &lt;strong&gt;코른헤르트&lt;/strong&gt;와 &lt;strong&gt;아르미니우스&lt;/strong&gt;는 왜 칼빈의 예정론에 반기를 들었는가?&lt;br /&gt; 3. &lt;strong&gt;칼빈주의 5대 교리&lt;/strong&gt;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lt;br /&gt; 4.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lt;strong&gt;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lt;/strong&gt;인가?&lt;br /&gt; 5. 알미니안주의의 &lt;strong&gt;예지 예정&lt;/strong&gt;에 따른 &lt;strong&gt;조건적 선택&lt;/strong&gt;은 왜 성경적이지 않은가?&lt;br /&gt; 6. &lt;strong&gt;보편 속죄&lt;/strong&gt;와 &lt;strong&gt;저항할 수 있는 은혜&lt;/strong&gt;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되는가?&lt;br /&gt; 7. 구원은 &lt;strong&gt;무조건적 성도의 견인&lt;/strong&gt;인가,&lt;strong&gt;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조건적 견인&lt;/strong&gt;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12)&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9)&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02)&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30-32)&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두 번째로 살펴보고자 한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다. 좀 더 따지면 천국에 가기 위함이고, 더 정확히 따지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히 가르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문제를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문제가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도 될 문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정확하게 알기를 원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래서 필자는 2014년부터 이러한 구원론 문제를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7년에 이 문제를 담아 「회개와 천국복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 책은 시중 서점에서 누구나 살 수 있고, 인터넷 서점에서 &amp;quot;회개와 천국복음&amp;quot;이나 &amp;quot;정보배 목사&amp;quot;를 검색하면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필자는 구원론을 오래전부터 살폈기에 이 문제를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어찌 감히 필자가 위대한 신학자들을 넘어서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신약 성경을 신대원 때부터 헬라어 원문으로 보아 왔고, 처음 믿을 때부터 성경을 계속 읽어 왔으며,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는 성경 하나하나를 어마어마한 분량으로게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적인 공부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필자의 설교는 상당히 조직신학적인 설교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설교를 한 3년 정도 듣게 되면 성경을 잘 몰랐던 사람도 성경을 잘 논할 수 있게 된다. 특별히 필자가 전하는 말씀은 우리 교단에서 배운 틀에 갇혀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들어 보면 그 진가를 알 것이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는 자는 더더욱 잘 알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구원론을 공부하다 보면, 장로교에서는 존 칼빈을 알지 않을 수 없고, 다른 교단에서는 아르미니우스를 알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알미니안주의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웨슬리안주의라는 것이다. 웨슬리안주의는 알미니안주의와 비슷하지만 그 출발점은 알미니안주의였다. 혹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신학체계를 모른 채 살아왔을지라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공부하다 보면, 기존 교단들이 구원에 관하여 어떻게 말해 왔는지,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lt;strong&gt;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더 바른 것인지&lt;/strong&gt;를 정리하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장로교에서 배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렇게 들었다. &amp;quot;우리의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다. 네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라.&amp;quot; 항상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대표적인 구원론의 신학적 체계로서, 칼빈의 예정론은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칼빈은 27세 때인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처음 발행했다. 그때는 그 책에 예정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1539년 제2판을 내면서 예정 파트를 집어넣었다. 그 예정이 바로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다. 이때 칼빈은 차라리 이중 예정론을 말하지 않고 구원 예정만 말하고 끝냈더라면 아마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 구원 예정에다가 개인 멸망 예정까지 그 책에 말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칼빈의 주장은 이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세 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정은 절대 변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구원받아 예수를 믿게 되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너무나 좋다.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amp;quot;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부르셨구나&amp;quot; 하고 감사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그 반대편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시키기로, 영원히 저주 가운데 놓이게 하기로 작정하셨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저주와 멸망을 예정해 놓고는 &amp;quot;나는 선한 존재이니 내가 설령 어떤 사람을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저주로 예정해놓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감히 입을 놀리지 말라&amp;quot;고 하신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이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신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나 성경을 직접 살펴 보면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신 것을 금방 알 수 있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마다, 곧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 7:37).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네 거리에 있는 사람이든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만나는 대로 잔치 자리에 데려오라고 하셨다(마 22:9-10). 요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욜 2:32),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행 2:21), 그리고 바울은 로마교회 보낸 편지에서(롬 10:13) 이와 같은 말씀을 전했다. 그렇다.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칼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는가? 칼빈의 예정론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 잔인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장로교에서는 오직 칼빈주의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시냐 않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amp;quot;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다.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까지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교만이다.&amp;quot; 필자는 그렇게까지 들었다. 그래서 &amp;#39;내가 교만한 사람인가?&amp;#39;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물음에서 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코른헤르트와 아르미니우스는 왜 칼빈의 예정론에 반기를 들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계속 고쳐서 수정본을 내다가 50세가 이르자 1559년에 최종판을 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최종판에서 예정론의 분량을 어마어마하게 넓혀서 써 놓았다. 그런데 칼빈을 따르는 제자이자 후계자인 베자(1519-1605)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왜 그렇게 되고 말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원래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구원론의 분야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겠다고 계획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기 때문이다(엡 1:3-6; 3:6). 물론 나중에는 그 안에 구원을 포함시켰지만, 원래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고 원래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것을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이라는 구원론으로 끌어들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원론에서 출발하려고 하니 베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구원시키려면 사람이 반드시 사망과 저주 가운데 놓여 있어야 한다. 즉 사람이 타락해야 구원을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자 칼빈의 제자인 베자는 하나님은 타락 전부터 인류를 타락시키기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야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으며, 또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베자의 타락 전 예정론(墮落前豫定論, supralapsarianism)이라고 부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자 평신도였던 코른헤르트(1522-1590)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타락시키려고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타락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분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먹어서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른헤르트는 하나님이 인류를 타락하도록 조성하셔서 타락시켰고 결국 그러한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코른헤르트가 이러한 사실을 따지고 들자, 베자는 평신도가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며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교회의 요청으로, 베자의 제자였던 아르미니우스(1560-1609)는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는 일을 맡게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기독교 강요」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그동안은 그도 칼빈의 예정론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다니 너무 감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로서 다시 정확히 조사해 보니 칼빈이 잘못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타락까지 예정하셨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타락시키려고 일부러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이 잘못 말한 것 같다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레이던 대학의 동료 교수 고마루스(1563-1641)가 그에게 맞서서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래서 둘이 논쟁하였는데 얼마 후 160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말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아르미니우스도 예정론 자체가 처음부터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예정론 자체는 가정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2:3~6에 나오는 예정은 사람의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사람의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칼빈이 말했던 예정은 우리, 곧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서 1장을 읽어 보면 천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고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히 1:5, 13-14). 그리고 에베소서 3장을 보면 그것은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며(엡 3:9),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벧전 1:12). 그러므로 이것은 천사에 관한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칼빈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가지고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하기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고 판단하여 이론을 만들어 낸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지 예정이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아르미니우스가 죽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 이듬해인 1610년, 칼빈이 죽은 지 46년 만에 칼빈주의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관하여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항론서(抗論書, Remonstrance)를 네덜란드 의회에 제출한다. 그때는 국가와 신앙이 하나였기 때문에 국회에 제출하여 판단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것이 &amp;#39;알미니안주의의 5대 강령&amp;#39;이다.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은 칼빈주의의 반대로 나온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의 5대 강령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칼빈주의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칼빈주의의 5대 교리는 전적 타락(全的 墮落, 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 選擇, 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制限 贖罪,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 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聖徒의 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교리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렇게까지 정리된 교리를 만들지는 못했다. 칼빈은 단지 이중 예정론만 말했을 뿐이다. 그 이중 예정론을 더 확대하여 칼빈을 따르는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amp;#39;칼빈주의 5대 교리&amp;#39;이다. 이 교리는 1618-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항론서에 대한 답으로 정리되어 널리 전파되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했던 다섯 가지 칼빈주의 교리는 어떤 것인가?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둘째,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조건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셔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그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제한 속죄다. 그래서 넷째,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어떠 한 사람을 선택하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절대 거부할 수 없고 반드시 믿게 된다. 안 믿으려 하면 강제로 끌어서라도 믿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불가항력적 은혜다. 그리고 다섯째,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하신 것은 불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시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번 선택되어 구원받기로 되어 있는 성도의 신앙은 끝까지 보존되어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칼빈주의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도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앞에서 말한 과정을 거치면서 알미니안을 따르는 자들이 칼빈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 항목을 먼저 의회에 제출하여 바로 잡아달라고 부탁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의회에 제출했던 5대 강령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와 같은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선행적 은혜와 인간의 부분적 타락이요, 둘째는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이며, 셋째는 보편 속죄요, 넷째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이며, 다섯째는 조건적 견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의 첫째 강령은 선행적 은혜(先行的 恩惠, prevenient grace)와 인간의 부분적 타락이다. 사람은 타락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전적 타락을 넘어 전적 무능력(全的 無能力, total inability)까지 간다. 전적 타락도 문제이지만 전적 무능력까지 간 것은 더 큰 문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문제인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하다면 하나님은 절대 &amp;quot;주 예수를 믿으라&amp;quot;고 전도하실 수 없다. 믿을 수 있으니까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능한데 어떻게 회개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회개를 시켜 주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 둘째, 성경은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가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주님은 문밖에서 두드리시지만 강제로 열지 않으신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런데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한다. 고로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타락했다. 그래서 절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려고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구원으로 부르시면, 그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알미니안주의가 맞다. 알미니안주의도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인간의 타락이 전적 타락, 전적 무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복음을 전해 주시면 그 복음을 듣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는 놓여 있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아담부터 시작해 보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와가 뱀에게 속아 넘어가 열매를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고, 남편도 먹었다(창 3:6). 필자가 보기에 아담은 하와만 죽게 할 수 없어서 함께 먹은 것이다. 그렇게 자유의지를 선악과를 따 먹는 데 쓰자,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사망이 들어왔다(창 2:17). 그때부터 인류는 사망에 사로잡혀 죽게 되었고, 스스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을 희생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21). 짐승의 피로 우리를 살리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것을 점차 알려 주셨다. 십계명으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고, 그 죄를 용서받으려면 동물을 희생하여 피를 흘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속죄 제사를 드려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진짜 희생 제물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가 구원을 얻게 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인을 보면 뱀들이 들어가 죄된 본성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는 구원받으려 할 수도 없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천국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전해 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칼빈주의는 전적 타락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절대 반응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끌어서 신앙을 집어넣어 주지 않으면 절대 믿지 못한다. 전적 무능력까지 간 것이다. 루터는 1525년 에라스무스와 논쟁하며 쓴 「노예의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죄를 지을 자유만 있고,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 &amp;#39;그리스도인의 자유&amp;#39;를 다루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amp;#39;오직&amp;#39;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 곧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끌어오고, 사도 바울의 말씀까지 끌어와 교리를 만들었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은 죄만 지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선하게 산 사람이 많다. 도덕을 지키고 기부하며 산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보셨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인간론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마태는 이사야 42장 1-3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종, 이방에 심판을 알게 하실 분으로 소개한다(마 12:17-19, 21).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이렇게 말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인간은 상한 갈대이고 꺼져 가는 심지다. 상한 갈대를 보라. 꺾였지만 완전히 꺾여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붙어 있다. 완전히 꺾여 떨어져 버리면 끝이다. 꺼져 가는 심지도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꺼져 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 정확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본다.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붙여 주시면 살아날 수 있다. 꺼져 가는 등불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면 그 기름이 다시 타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스스로 있으면 꺾여 버리고 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닫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은 된다. 그런데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 무능력으로 간 칼빈주의는 전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고로 알미니안주의의 첫째 강령이 성경적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알미니안주의의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은 왜 성경적이지 않은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의 둘째 강령은 예지 예정(豫知豫定)에 따른 조건적 선택이다. 필자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먼저 칼빈주의의 입장을 보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그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에게만 주신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나 주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 은혜를 베풀어 예정하신 사람만이 그 은혜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무조건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도 결국 거의 같은 길을 따라갔다. 왜 그런가? 예정은 원래 구원론이 아니라 만세 전에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르미니우스도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칼빈도 몰랐다. 그래서 구원을 논하면서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에는 알미니안주의도 동의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만 알미니안주의는 그 예정이 만세 전에 누구는 멸망으로, 누구는 생명으로 정한 무조건적인 예정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이 장차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곧 예지하시고 그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베푸시니 그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 주면 이 사람이 구원받을 줄 하나님이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이다. 그러나 이것도 무조건적 선택과 비슷비슷하다. 여전히 개인 구원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성경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부터 모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리고 만세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예정을 구원론으로 끌고 들어간 순간, 칼빈주의든 알미니안주의든 개인 구원 예정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보편 속죄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의 셋째 강령은 보편 속죄(普遍 贖罪, universal atonement)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가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 속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넷째 강령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푸셔도 사람이 안 믿으려고 하면 계속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당연히 그렇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시는데도 끝까지 안 믿으려 하면 안 믿는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은 칼빈주의다. 성경은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네 곳에서 분명히 보여 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첫째, 요한복음 5장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했다. 그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데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요 5:3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님은 &amp;quot;너희가 원하지 아니한다&amp;quot;고 하셨다.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 주셔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반대로 그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은총을 받아들여 믿겠다고 할 수도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둘째, 마태복음 23장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마나 애를 쓰셨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거부했고 결국 멸망으로 갔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계속 죄짓기를 원하여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귀를 막아 놓으셨기 때문에 안 들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책임이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하지 않았다. 믿으라고 하셨는데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소리를 못 듣도록 막아 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심판하시겠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셋째,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했으나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다(마 22:2-3).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 오찬을 다 준비했으니 오라고 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마 22:4-6). 이것이 인간이다.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amp;#39;청한 사람들&amp;#39;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그들을 청하시고는 그 청함을 받을 때 절대 가지 말라고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넷째,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령이 역사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려고 선행적 은총을 베푸시는데 그들이 스스로 거슬렀다. 거부하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좋게 써야 한다. 고로 저항할 수 있는 은혜가 맞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저항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열 수도 있고 열지 않을 수도 있다(계 3:20). 불가항력적 은혜가 맞다면 이 주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빼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구원은 무조건적 성도의 견인인가,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조건적 견인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알미니안주의의 다섯째 강령은 조건적 견인(條件的 堅忍, conditional perseverance), 곧 은혜의 상실이다. 무슨 말인가?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계속 믿으려 하면 하나님이 계속 이끌어 가신다. 그러나 핍박 가운데 주님을 부정해 버린다면 그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내가 계속 회개하고 핍박이 와도 인내하며 가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신앙을 버려 버린다면 주님도 그 은혜를 상실시키신다는 것이다. 이것도 맞는 이야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 계속 거하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회개해야 한다. &amp;quot;나는 만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을 것이다. 걱정 없다.&amp;quot;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망하는 것이다. 계속 말씀을 듣고, 계속 회개하고, 계속 예배에 참석하고, 계속 믿음의 공동체에 나와야 한다. 성경은 인내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마 10:22). 하나님이 인내시켜 주셔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칼빈주의다. 성경은 우리가 인내해야 한다고 말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가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주님이 나를 인내하게 해 주시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필자는 이렇게 믿었다. &amp;quot;이 시기는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초대하여 부르셨으니, 내가 주님을 놓지 않는 한 주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amp;quot; 필자는 그 믿음을 지켰다. 그랬더니 회복되기까지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1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 시간이 캄캄한 어둠의 시간이다. 그 어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 종을 쓰실지 결정하신다. 연단과 고통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군대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을 뻔했다. 그것은 필자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다. 나 같은 못난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군대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핍박이 얼마나 험했는지 아무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필자가 교회에 가겠다고 하자, 선임이 필자를 눕혀 놓고 가슴 위에 군홧발을 올려놓은 채 짓누르며 &amp;quot;교회 갈래? 갈래?&amp;quot; 하고 위협했다. 필자는 가겠다고 했다. 그날 밤부터 밤 12시부터 1시까지 불려 나가 날마다 구타를 당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순간에 주님이 나타나 &amp;quot;아들아, 참아라&amp;quot; 하셨는가? 그렇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당장 죽을 것 같았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필자는 생각했다. &amp;quot;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데 내가 한 목숨 바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설령 여기서 죽는다 해도 내가 구원받았으니 감사하며 죽으리라.&amp;quot; 어느 날은 참나무 몽둥이로 맞아 허리를 다쳐 걸어 다니지 못하고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때도 주님이 나타나 참으라고 하신 적이 없다.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그래도 필자는 이렇게 고백하며 갔다. &amp;quot;주님이 나를 이 길로 부르신 것은 나를 폐인 만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지금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amp;quot;&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성도의 견인 교리와 이 문제가 맞닿는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면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그 근거로 로마서 8장을 든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주셨으면, 환난이나 박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5). 주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 우리가 놓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놓아 버린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우리가 놓아 버리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핍박이 원인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는 것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내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다.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고(딤후 4:7),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다(계 2:10).&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만약 필자가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다가 그런 핍박을 당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필자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셨기 때문에, 필자가 감지하지는 못했어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성령이 없었다면 그 위기 상황에서 다 부정하고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계셨기 때문에 두렵고 떨려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이다. 필자가 믿음을 지킬수록 성령께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셨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은 둘째인 예지 예정에 따른 조건적 선택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어떠한가? 다음 시간에 하나씩 말하겠지만, 전적 타락부터 단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심지어 그것을 증명하려고 성경 번역을 왜곡시켰다. 그 부분까지 들려줄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참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험하고 하나님을 너무나 잔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물론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어서 &amp;quot;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고, 나는 그 주님을 믿는다&amp;quot;고 하면 그대로 믿고 가도 된다. 칼빈주의 구원론을 믿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amp;quot;나의 구원은 안전하다, 영원하다&amp;quot;라고 하며 죄를 짓고도 나태하게 간다면 그 생각은 버려야 한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기는 자의 이름은 지우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는 자는 성도의 견인이 아니라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회개를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최소한 회개를 해야 턱걸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의 실상이 그렇다. 칼빈주의를 믿고 싶다 해도, 천국에 들어가면 비로소 &amp;#39;내가 왜 그랬을까&amp;#39; 하고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누군가가 그 실상을 들려주어야 한다. 이 실상을 들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필자가 실상을 들려주며 성경적 견해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귀를 막고 듣지 않을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알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가 다 헛될 수 있고, 성 밖으로 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 있다(마 22:13).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소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도 예수님과 똑같이 마음의 문 앞에서 두드릴 수밖에 없다. &amp;quot;이 말이 진짜이니 한번 들어 보라. 한 편만 말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말씀을 전했으니 좀 들어 보라. 듣고 싶은 것만 듣지 말고 좀 들어 보라. 언제까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쉽게 구원받으려 하는가? 구원이 그렇게 쉬운가? 주님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마 7:13-14).&amp;quot; 칼빈주의를 따라갔다 할지라도 다시 생각해 보라.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이다.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라.&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음 시간에는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구체적으로 낱낱이 말하겠다. 알미니안주의는 상당히 성경적이었다. 다만 예정을 하늘에서 인간이 어떤 지위와 신분으로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 구원 예정으로 보는 잘못된 방향에 함께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를 불러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자.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 내자.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고, 충성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갈 때 상 얻는 자,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자로 들어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14일(수)&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2026-10-13(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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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13T09:12:39+09:00</published>
		<updated>2026-10-13T21:07:27+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B7uBLSqNW5Y [설교핵심] 이 설교는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을 비교하며, 전통적인 교리가 성경의 원문과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정직하게 점검할 것을 촉구한다. 정보배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211)]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요엘 2:30~3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B7uBLSqNW5Y&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B7uBLSqNW5Y?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lt;strong&gt;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lt;/strong&gt;과&amp;nbsp;&lt;strong&gt;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lt;/strong&gt;을 비교하며, 전통적인 교리가 성경의 원문과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amp;nbsp;&lt;strong&gt;정직하게 점검&lt;/strong&gt;할 것을 촉구한다. 정보배 목사는&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lt;/strong&gt;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성경이 말하는 예정은 개인의 구원 여부가 아니라&amp;nbsp;&lt;strong&gt;천국에서 인간이 누릴 신분과 공동체적 구원의 순서&lt;/strong&gt;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amp;nbsp;&lt;strong&gt;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lt;/strong&gt;는 성경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lt;button aria-disabled=&quot;false&quot; aria-selected=&quot;false&quot; matchipaction=&quot;&quot; role=&quot;option&quot; tabindex=&quot;-1&quot; type=&quot;button&quot;&gt;&lt;/butto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br /&gt; 1. 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amp;#39;&lt;strong&gt;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lt;/strong&gt;&amp;#39;이라 말할 수 없는가?&lt;br /&gt; 2. 성경으로 &lt;strong&gt;구원의 교리&lt;/strong&gt;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lt;br /&gt; 3. 구원은 &lt;strong&gt;하나님의 은혜&lt;/strong&gt;와 &lt;strong&gt;인간의 믿음&lt;/strong&gt;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lt;br /&gt; 4. 요엘서의 &lt;strong&gt;&amp;#39;누구든지&amp;#39;&lt;/strong&gt;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lt;br /&gt; 5. &lt;strong&gt;칼빈의 이중 예정론&lt;/strong&gt;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lt;br /&gt; 6. &lt;strong&gt;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lt;/strong&gt;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lt;br /&gt; 7. 정해진 충만한 수와 &amp;#39;누구든지&amp;#39;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lt;strong&gt;알미니안주의&lt;/strong&gt;는 어떠한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11)&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30-32)&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 여덟 번째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칼빈주의라고 할 것이고,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 쪽으로 가면 알미니안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amp;middot;신학적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점검해야 한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잘 구원받도록 인도하려면 구원에 관한 교리부터 바르게 알고 또 잘못된 것을 교정할 줄 알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다(욜 2:32). 그렇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는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고(욜 2:12-13),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야 하며(욜 2:32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욜 2:32상). 구약에서는 구원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는다. 회개, 하나님의 부르심, 주의 이름을 부름. 이 세 가지가 구원의 핵심 사항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서에 나오는 기독론은 약 6가지다. 그중에 첫 번째는 누구든지 성령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이고, 두 번째는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게 하시는 그리스도다. 그래서 두 번째 측면을 공부하다가 구원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점검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와 그 반대편에 섰던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그리고 어느 쪽이 성경에 더 가까운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고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구원은 언제 완성되며 왜 &amp;#39;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amp;#39;이라 말할 수 없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救援, salvation)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원을 가지고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그것을 영원히 구원받았다고까지 말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받은 구원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끝난다. 그 전까지는 영원하지 않으며 변할 수 있으며,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amp;quot;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amp;quot;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성경에 없다. 이것도 일종의 교리다. 그렇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이 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맞으려니 하고 따라간다. 그러나 사실은 맞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의 뿌리는 이중 예정론에서 비롯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되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할 자도 아주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을 모른 채, 내가 받은 구원은 안전하다,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말에 안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다가 죽어서 보니 성 밖으로 가거나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면 그때 얼마나 후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론에 관한 바른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성경으로 구원의 교리를 바르게 교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구원론에 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3가지가 필요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첫째는 교회사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지, 만세 전에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말은 언제 생겨났는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해 왔는지 등등을 말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둘째, 구원에 관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수조사하는 것이다. 특히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으로 살펴보지 말고 원문 성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성경 구절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중에 원문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너무 놀라지 말라.&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셋째, 천국에 있는 실제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천국의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성경을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구원론의 문제, 개인 사역 예정의 문제, 천년왕국의 문제, 144,000명의 문제, 삼위일체론의 문제 등등은 교회사적인 회의와 성경으로 결판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천국의 실제를 모르면 자기가 성경을 배운 대로, 자기가 배운 신학대로 해석하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중에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정직하게 보기를 권면하고 싶다. 성경에서 아니라고 말했다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은 그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두루뭉술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는 자기가 믿어 왔던 것이 허물어질 것 같으니 억지로 우기는 것을 종종 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있는 것을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 있다. &amp;quot;이 사람은 천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구나, 천국 상황을 전혀 모르는구나&amp;quot;라고 말이다. 천국 상황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안이 열리고 주님과 친밀해지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더욱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원문 성경이 아닌 번역 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거나 교리를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글 성경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어서 참된 지도자가 되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알아야 한다. 특히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결정적인 성경 본문을 잘못 번역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사람들은 헬라어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번역본만을 가지고 끝까지 고집하지만, 헬라어를 제대로 번역한 것을 보면 자신의 주장이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어떤 것은 원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다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믿어 왔던 것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학자의 태도가 아니며 말씀을 증언하는 목회자의 태도도 아닌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함이다(딤후 3:15).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려면 성경을 4가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교훈은 가르침이고, 그다음은 책망이다. 세 번째 바르게 함은 교정을 뜻한다. 어긋난 것을 똑바로 맞추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의로 교육함, 곧 훈계로서 의 안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장비하게 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성경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교리와 신학을 교정받아야 한다.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길이 제대로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사를 읽어 보면 많은 변천이 있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변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도 있다. 그것을 성경으로 교정받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에 어떻게 함께 달려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1517년 종교개혁은 구원을 공로 사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이것은 루터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칼빈으로 넘어가면서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곧 신적 작정(神的 作定, divine decree)에 의한 구원을 확대시킨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럼, 왜 구원론이 예정론으로 흘러가게 되었는가?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믿음의 차원은 우리 인간이 믿는 것이고, 회개도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다. 곧 인간이 할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 보니 다시 예정론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개인 구원에 관한 예정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 예정론을 끌어온 것이다. 이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전적 타락, 全的 墮落, total depravity)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셔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물론 펠라기우스처럼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자력 구원은 불가능하다. 지나간 죄를 인간이 어떻게 무엇으로 해결하겠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천국 잔치로 우리를 초청하셔야 한다. 그러나 그 은혜와 더불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의 믿음도 역시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두 가지를 다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는 사람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고(엡 2:5; 딤후 1:9; 딛 2:11; 행 15:11),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다(행 16:31; 요 3: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다 구원의 요소로 제시하였다(엡 2:8).&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구원을 받았다&amp;#39;는 말은 구원받아서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본문은 현재형 동사와 완료분사가 결합하여 &amp;quot;구원을 받은 상태에 지금 있다&amp;quot;는 뜻이다. 이를 살려 번역하면 &amp;quot;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amp;quot;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엡 2:9). 고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인간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여기서 &amp;#39;은혜&amp;#39;라는 말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를 보자. 그때 왕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마 22:4). 그리고 그날에 왕은 종들을 시켜 초청받을 자를 부르러 보내신다. 그런데 이미 초청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지 않았다. 초청(부름)을 받고도 안 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칼빈주의는 절대 안 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갈 수밖에 없고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총(不可抗力的 恩寵, irresistible grace)이라는 교리다. 이는 비성경적이며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초청한다고 해도 안 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 7:37).&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구원의 우선순위에서 먼저 초청받은 유대인들이 오지 않자, 왕은 네거리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했다(마 22:9-10). 같은 잔치를 말씀하신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래도 자리가 남자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데려오게 했다(눅 14:21-23). 누구든지 다 오라고 했지만 그 잔치에 응하는 사람만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고 말해도 안 오겠다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잔치에 들어갈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잔치를 위하여 왕이 준비해 두신 겉옷이다. 이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에 그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마 22:11-13). 왕은 그를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얻게 되는 우리의 의로움을 가리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들 중에는 전도를 해도 끝까지 안 믿으려는 사람이 있고, 믿었다가 타락한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믿게 하시면 못 믿을 사람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한다. 그런데 칼빈주의는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진짜 믿은 것이 아니었다고 치부해 버린다.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면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서 천사 둘이 그를 따라붙는다. 그러면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었다가 타락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진짜 믿었지만 타락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믿고 성령 사역을 하다가 잘못해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 경우도 있다. 영적 실제를 잘 모르니 구원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도 직접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amp;quot;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다가 주님을 아주 심하게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에서 파선했습니다. 과거에는 엄청나게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신앙생활을 하려는데 예수님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amp;quot; 그랬다. 믿었지만 타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다시 믿기지 않아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믿다가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요엘서의 &amp;#39;누구든지&amp;#39;를 베드로와 바울은 어떻게 해석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 선지자는 할례받은 언약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외쳤다(욜 2:32).&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요엘이 말한 바 &amp;#39;누구든지&amp;#39;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유대인인가, 아니면 유대 지역에 들어와 사는 이방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방 지역에 사는 이방인까지 다 포함하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amp;#39;누구든지&amp;#39;를 어떻게 해석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첫째, 할례자의 사도였던 베드로는 이 말씀을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적용했다. 그는 A.D.30년 오순절날 설교에서 요엘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욜 2:32; 행 2:21) &amp;quot;이스라엘 사람들아&amp;quot;(행 2:22)라고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amp;quot;형제들아&amp;quot;(행 2:29)라고 말하여 구원받을 대상으로서 우선순위가 가장 먼저는 유대인인 것을 말했다. 그러나 이 설교의 끝머리에서 그는 요엘서의 약속에 대해서 &amp;quot;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amp;quot;이라고 설교했다(행 2:39). 이는 아무리 멀리 살고 있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랬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은 우선적으로 유대인과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적용되겠지만 이어서 먼 데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베드로는 원래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갈 2:8)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마리아에 파송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게 하시고(행 8:14-17)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먼 데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행 10장).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에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할례파 유대인이었던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요엘서 2장 32절을 다시 인용하면서, 구원받을 대상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도 해당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롬 10:12-13).&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랬다. 구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이방인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인데,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everyone)에는 이방인도 얼마든지 포함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바꾼 것이 바로 칼빈주의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받을 대상은 &amp;#39;누구든지&amp;#39;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하나님의 신실성이 깨어지고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그 사람이 어떻게 거부해도 그를 잡아 끌어서라도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처음 교회에 다닐 때에는 칼빈이 말했던 이중 예정론을 듣고 정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처음부터 쭉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들었던 것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셔서 내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처음 나간 교회가 합동 보수 측인 광주중앙교회였다. 거기서 세례를 받고 거기서 첫 신앙을 시작했다. 그때 &amp;quot;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불러 주시어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것도 하나님이 만세 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셔서 구원받게 하셨구나.&amp;quot;라고 깨닫고는 감사해서 펑펑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혹시 이것과 반대되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았는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만세 전에 선택받지 못한 자라고 한 번 자신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믿고 싶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실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벌써 천사가 하나 더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으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헤집어 놓는 것이다. 하나님을 횡포를 부리는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런 질문은 2013년에 와서 비로소 필자가 품게 된 물음이었다. 그때 필자는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고 있었다. 예전 생각으로는 주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가 회개를 전하고 있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셨겠는가? 그것은 회개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신 것이 아닌가? 회개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님께 와서 마시라고 하셨겠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했는가? 누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를 다 정해 놓으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권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믿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구원의 여부가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뜻대로 다 해 놓고는 우리에게 무슨 심판을 내리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하면서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폭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장로교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지 28년이 되었다. 그래서 장로교 목사인 필자를 통하여 칼빈주의의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로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문제로 타 교단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 있지 않나 싶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칼빈의 이중 예정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칼빈(A.D.1509-1564)은 27세 때 「기독교 강요」 초판을 냈다. 예정론은 30세 때 낸 제2판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때 그는 제2판에 제8장 &amp;#39;예정과 섭리&amp;#39;를 추가한 것이다. 초판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그 뒤 다음 판에서도 거의 같게 실렸다가 칼빈이 50살이 되었을 때인 1559년 최종판에서 예정을 섭리와 따로 분리하였고, 예정 부분만 제3권의 21-24장으로 확대하였다. 참고로 칼빈은 54세에 죽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제2판에 처음 등장한 예정과 섭리의 내용은 이렇다. &amp;quot;하나님은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과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amp;quot; 이것을 이중 예정론(二重豫定論, double predestination)이라 한다. &amp;quot;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신 영원한 뜻으로서 인간은 그 뜻을 거스르거나 바꿀 수 없다.&amp;quot; 즉 하나님이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구원받고,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영원히 멸망받으며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맞는 주장이라면 예수님은 &amp;quot;누구든지 내게로 오라&amp;quot;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오면 &amp;quot;너는 안 된다&amp;quot;고 하셨어야 했다. 그리고 요엘서에서도 &amp;#39;누구든지&amp;#39; 구원받는다는 말을 빼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1559년 최종판에 가면 더 나간다. &amp;quot;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본다.&amp;quot;(제3권 21장 5절)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라.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저주를 작정하시겠는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그분을 폭군으로 그리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물론 칼빈은 석학이다. 우리 믿음의 근간인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아주 잘 강해한 훌륭한 인물이다. 그런데 예정과 관련된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에도 어긋나며 성경에도 어긋난 주장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은 예정론을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웠다. 그런데 칼빈의 만행을 아는가? 그가 제네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 제네바는 그를 반대하는 자를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재판을 열어 처형하기도 하였다. 삶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고 했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개신교에서 중세 교회나 하던 종교재판을 열어 사람을 죽이는 일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되도록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있던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고스란히 그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 현장을 직접 본 사람들이 책을 써서 우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에베소서 1장과 로마서 9장의 예정은 원래 무엇에 관한 예정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해서 잘못된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첫째, 칼빈은 개인 사역 예정을 개인 구원 예정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개인 구원 예정과 개인 멸망 예정의 사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두 사람의 쓰임이자,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것이지, 에서는 멸망으로 예정하고 야곱은 구원으로 예정하지 않으셨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의 쓰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 예정을 개인에 대한 이중 예정으로 바꾸어서 사용한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개인에 대한 쓰임 예정, 곧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을 개인 구원의 예정으로 적용함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둘째,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예정은 인간의 최종적인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는데, 그것을 구원 예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예정을 그는 잘못 해석한 것이다. 에베소서 1장 3-6절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어떤 무리에게 주실 것을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무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엡 1:5), 더 나아가서는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엡 3:6). 여기서 우리는 믿는 우리로서(엡 1:19), 에베소서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함께 가리킨다. 이는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칼빈은 에베소서 1장 3-6절의 말씀에서 예정론을 가져왔지만, 여기에는 사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기업이 되게 하신다고 나올 뿐이다. 이는 천국에서 인간의 지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6절에 가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더 분명하게 나오는데,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비밀은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었고(엡 3:9),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벧전 1:12).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천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지위를 주지 아니하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에게만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히려 천사들은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히 1:14).&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우리는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아닌 우리 인간을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중 어떤 사람은 상속자까지 되게끔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최종적인 지위와 신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예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무리들, 즉 믿는 공동체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리는 바로 &amp;#39;믿는 사람들&amp;#39;인 &amp;#39;우리&amp;#39;이다(엡 1:19). 그리고 천사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던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로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다(엡 3:6, 9).&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있다면, 인간이라는 무리를 구원하시는데, 그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헬라인이라는 것이다(롬 1:16).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일을 유대인에게 먼저 적용하고 그다음 이방인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 그대로 나온다. 칼빈이 이것을 구원 예정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개인 예정이 아니라 천사가 아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예정이라고 했다면 정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원 예정과 개인 예정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로마서 9장의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고 하시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창 25:23; 롬 9:12). 장차 될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더 크다고 하셨다(눅 22:26-27). 그런데 그것을 야곱은 구원하고 에서는 멸하는 것처럼 바꾸어 버렸다. 구원 이야기가 아닌데 구원론으로 바꾼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눅 22:26-27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는 순서를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언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1:8).&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열두 제자를 내보내실 때는 처음에는 이렇게 명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에 나오는 &amp;#39;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amp;#39;은 유대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때 실제로 주께로 나아온 자들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귀신 들린 자, 나병 환자, 창녀처럼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이었다. 지식이 부유한 사람, 물질이 부유한 사람은 거의 주님을 믿지 않았다.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왔다가 천국 복음을 듣고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였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는 그 범위를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셨다(마 28:1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 복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다. 예수님도 요엘 선지자의 말처럼,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방인은 안 된다고 했다. 귀신 들린 자는 안 된다고 멀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도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돈이 없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필자도 말한다. 귀신 들린 자도, 신기가 있어도 오라. 무당도 회개만 하고 오라. 4대째 종손 집안이라 귀신이 머리에 꽉 차서 절대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믿겠다고 오면 필자가 다 받아 주고 있다. 누구든지 오라. 회비를 받고 그 사람만 가르치지 않는다. 다 와서 복음을 들으라.&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정해진 충만한 수와 &amp;#39;누구든지&amp;#39;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며 알미니안주의는 어떠한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정은, 정확히는 천국에서 우리의 지위와 상에 관한 예정인데,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숫자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롬 11:25).&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겠지만 다시 넘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넘어가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롬 11:26). 여기를 보더라도 구원의 순서는 먼저는 유대인이고 그다음은 헬라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인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을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숫자를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 충만한 숫자 안에는 14만 4천 명의 주의 종들도 있고, 대제사장&amp;middot;제사장&amp;middot;레위인, 그리고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 같은 신분과 지위도 있다. 어떤 개인을 그렇게 하겠다고 정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숫자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구원받을 숫자, 곧 지위와 신분에 관한 숫자를 예정하셨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어떤 숫자를 예정하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amp;#39;큰 잔치의 비유&amp;#39;에서 나온다(눅 14:15-24).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청하였던 자들을 초대했으나, 그들이 오지 않았다. 다 일치하게 핑계를 대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오히려 주인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눅 14:21). 그랬는데도 빈자리가 있었다. 빈 잔치 자리가 차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 주인은 종들을 시켜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라고 했다. 그 빈자리가 차야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눅 14: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숫자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계속해서 초대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을 숫자를 정해 놓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고 싶어도 오시지 못한다. 아버지가 그 자리를 얼마라고 그 숫자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숫자와 이방인의 숫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수가 덜 찬 상태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갔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차면, 마지막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올 때 두 증인처럼 어떤 유대인들이 일어나 남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여 마지막 부족한 숫자를 채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마지막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를 주도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amp;#39;하나님의 예정&amp;#39;이라고 말할 때에는 공동체인 인류에 대한 예정을 가리키며, 그것은 천국에서 인간이 차지할 지위와 신분에 대한 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에서 천사들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서도 정해 놓으셨으니,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다음은 이방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공동체의 전체 숫자, 즉 총량까지 정해 놓으셨으니, 그 숫자가 지금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amp;#39;너&amp;#39; 즉 어떤 개인을 정해 놓으셨다는 말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 숫자에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 자리를 누군가가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amp;#39;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amp;#39;(마 22:1-14)와 &amp;#39;어떤 주인의 큰 잔치의 비유&amp;#39;(눅 14:15-24)가 정확하다. 예수께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못 받을 자를 딱 정해 놓으시고 구원받을 자만 천국에 들어오게 하고 나머지는 막아 버리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도 귀신 들린 자도 그리고 이방인이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혼인 잔치에 누구든지 들어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하신다(눅 14:23). 그러나 믿어야 한다. 그래서 혼인 잔치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 만약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갈 백성의 총량에 나도 들어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제는 마지막으로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5대 교리와, 그 반대편에 있는 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인 알미니안의 5대 교리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자, 그다음 해인 1610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네덜란드 의회에 칼빈주의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항론서(抗論書, Remonstrance)를 제출한다. 칼빈이 죽고 46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배경은 지난번 말씀을 전하면서 이야기해 드렸다.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항론서에는 다섯 가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普遍 贖罪, universal atonement),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은혜의 상실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amp;#39;은혜의 상실&amp;#39;은 처음에는 강하게 말하지 않고 오직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정도로 했다가, 나중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매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항할 수 있는 은혜도 맞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믿기 싫으면 얼마든지 안 믿고 이에 저항할 수 있다. 부분적 타락도 맞는 편이다. 부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완전히 타락했다면 어떻게 믿으라고 할 것이며, 회개하라고 할 것인가? 믿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는 자에게 왜 이러한 명령을 하겠는가? 보편 속죄도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속죄의 영역을 좁혀서 말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가 훨씬 더 성경적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amp;#39;조건적 선택&amp;#39; 조항은 조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때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가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예지 예정(豫知豫定)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조금 곤란하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 구원 예정론이 하도 강하니까 예지 예정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개인을 구원하는 예정을 하기는 했지만, 무조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장차 복음을 들으면 믿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바로 그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예정론과 비슷하다. 믿을 자를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만세 전에 무조건 예정하셨다는 것이나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도 올바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칼빈주의는 괜찮은가?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는 거의 틀렸다. 한편 감리교 쪽에서 따르는 웨슬리안주의도 있는데, 이것도 많이 성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음 시간에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5대 주장과 칼빈주의자들의 5대 교리를 서로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더불어 칼빈주의자들이 헬라어 성경을 결정적으로 왜곡한 대목까지 들려주려고 한다. 너무 충격받을 말씀을 빨리 던지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따라오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가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다 들어 보고 기꺼이 버려도 된다. 그냥 만세 전 예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따라가도 된다. 그렇게 따라가도 구원을 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말씀을 일생에 한 번은 들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듣고 성경을 다 조사해 보라. 그래서 맞다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종을 보내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후대 사람들이 기록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겸손하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성경대로 말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오는 자가 복된 자가 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어느 자식이 자기 부모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가 쉽겠는가? 그것을 또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교정해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선한 일을 행할 채비를 해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딤후 3:16-17).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빌 2:12).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얼마나 바라시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주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믿으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빨리 회개하여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13일(화)&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알미니안주의] 알미니안주의 다섯 조항 인포그래픽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44506c0419967c7ce10852923c87f2a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웨슬리안주의] 웨슬리안주의_ 은혜에서 거룩함으로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bf0c70595767a80766b72dfe32d321ec.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요엘서의 구원 초청과 신학 비교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2abc24e994f7763ab5e84742fc91dcbc.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0a0dc6e945373f27907e4758121320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dbbf03699e3e7069b8e8a2f94c090d3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1b5f357c764ab883672dcc49ef06b61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83623ebe7e75ac87c93caa5f3ea1a4a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41387b66f9c1e8bc891c31d909d080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6950d52adc3bbd8bc530c922b6ba070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a71682c1b6f3c3e469c1591455f6aa0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c0b2f97769d4fb6966fa5b9dee73be7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1414e36524330e76c7c7952946ddf0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fa4bce87e8b3c07fdee3aead9b4ab21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94eb182c71edbf886a5a1fedc2bf76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e85d6f2e39d771acaf252005502cd6e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The_Divine_Blueprint_of_Salv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9a0806a34230a943a71ac2f5e5e8b1a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성경적_구원론과_칼빈주의_예정론_비교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f763ae4ee77aedbb287bc565b1e5e02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칼빈주의와_성경적_구원론_비교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97aed7a177e6a56a7b99bd174cdfd3a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96cc4f2d974642b4cd139ed55e85455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8330214137939f469d2c65b6c9204ee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32f5d697caa10c024075f2101a835b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faa20369fe451c7bde75036fc0b2ec1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3faa6d14e1d8bc7e02fa22bf97269bb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a5a6918a2c8647bc16ae8a5483e6579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b304c14f4b972b12e759ce21d3b75e1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f7feb8b6390c6a7ce3350126a90e474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3b81e1fe84961fbd6d3457bbf3d080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1059365626289d2568b458a27d8978e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5cea15112f5b5c1b86bdbdc0d54fd5f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362a80d8deeedd406c5a8492e918644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1db22a52fa43a6981d10109271595a6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d285202d130561267bb0f41e271cc25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11)] 영원의_청사진.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46/330/85bd925a22d9e84c2dd94ce37c0b7ca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사역자론(22) 최종회]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을 마칠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고전10:12)_2026-10-12(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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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11T23:20:13+09:00</published>
		<updated>2026-10-12T09:56:31+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역자론(22) 최종회]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을 마칠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고전10: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jyOeRyljSk4 [설교핵심] 이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평생을 살아가며 주의해야 할 핵심 요소를 다룬다. 본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빠지기 쉬운 &#039;교만&#039;을 경계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내면의 정화가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사역자론(22) 최종회]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을 마칠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고전10:1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jyOeRyljSk4&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jyOeRyljSk4?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하나님의&amp;nbsp;&lt;strong&gt;사역자로서 평생을 살아가며 주의해야 할 핵심 요소&lt;/strong&gt;를 다룬다. 본문은&amp;nbsp;&lt;strong&gt;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빠지기 쉬운 &amp;#39;교만&amp;#39;&lt;/strong&gt;을 경계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amp;nbsp;&lt;strong&gt;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내면의 정화&lt;/strong&gt;가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또한, 신앙의 여정 속에서&amp;nbsp;&lt;strong&gt;자신이 다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찾아오는 &amp;#39;영적 타락&amp;#39;&lt;/strong&gt;을 조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이&amp;nbsp;&lt;strong&gt;죽을 때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영적 지도와 점검을 받아들이며&lt;/strong&gt;&amp;nbsp;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참된 일꾼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lt;strong&gt;하나님의 사역자&lt;/strong&gt;는 누구이며 하나님의 어떤 뜻을 이루는 자인가?&lt;br /&gt; 2. 하나님은 왜 &lt;strong&gt;영의 나이가 높은 일꾼&lt;/strong&gt;과 여러 지체를 함께 세우시는가?&lt;br /&gt; 3.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lt;strong&gt;상속자의 신분과 상&lt;/strong&gt;이 저절로 주어지는가?&lt;br /&gt; 4. 사역자가 쓰임받기 시작할 때 &lt;strong&gt;사탄은 왜 교만&lt;/strong&gt;으로 넘어뜨리는가?&lt;br /&gt; 5. 악한 영을 내보낸 뒤에도 왜 &lt;strong&gt;죽을 때까지 회개를 멈추지 말아야&lt;/strong&gt; 하는가?&lt;br /&gt; 6. &lt;strong&gt;선 줄로 생각한 성경 인물들&lt;/strong&gt;은 어디에서 어떻게 넘어졌는가?&lt;br /&gt; 7. 교만의 표지는 무엇이며 &lt;strong&gt;끝까지 겸손히 쓰임받으려면 &lt;/strong&gt;어떻게 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사역자론(22) 최종회&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을 마칠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고전 10:12)&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은 사역자론의 마지막 시간이다. 이번 시간에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을 마칠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평신도이든 주의 종이든 누구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역자들은 천국에 갔을 때 기본적으로 충성의 면류관(冕旒冠, crown)을 쓸 수 있도록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번 잘했다는 것 때문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려면 자기 내면에 있는 &amp;#39;성품&amp;#39;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혈기와 분노, 원망과 불평이 있으면 안 된다. 귀신이 주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 줄 잘못 알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이 요즘에 얼마나 많은가! 남이 잘되는 것을 볼 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만한 합당한 삶이 있어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심었기 때문에 거두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 조상이 심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거두겠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남이 잘될 때는 시기할 때가 아니다. &amp;quot;우리 조상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를 못했구나. 우리 후손들도 딸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제 내가 심어야지.&amp;quot;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를 심고 물질을 심고 정성을 심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악한 영이 내려가지 않도록 깨끗이 제거하는 일도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후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은사를 받고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 일반 성도로 살아도 모든 일이 복이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전에는 이것을 잘 몰랐다. &amp;quot;저 사람은 나와 똑같이 달렸는데 왜 더 빨리 가는가?&amp;quot;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만한 합당한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사탄 마귀가 그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일부러 능력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씩 깨닫게 하신다. 이것을 느끼고 체험하고 알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역자가 사역을 마칠 때까지, 정말 죽을 때까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하나님의 사역자는 누구이며 하나님의 어떤 뜻을 이루는 자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일꾼이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며(엡 1:5),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상속자(相續者, heir)가 되는 것이다(엡 3:6). 쉽게 풀면 이 땅에 태어나서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천국에서 상을 얻는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이 하늘나라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전도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회개시키는 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서 누릴 지위와 상급, 곧 어떤 신분으로 들어가 어떤 상을 얻을 것인가를 준비시키는 일이다. 결국 이 문제에서 상속자가 되느냐가 결정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로마서 8장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상속자가 있다(롬 8:17). 먼저 자녀가 되는 문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자녀가 되는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 살려 주는 영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고전 15:45).&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때 주님은 속죄(贖罪, atonement)로 우리의 죄를 덮어 버리신다. 죄가 있지만 덮어 버리시고 생명을 넣어 주신다. 죄가 깨끗해진 상태에서 생명을 넣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 가득한 상태에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귀신을 보지 않으시고 덮어 버리신 뒤 생명을 넣어 주신다. 그렇지 않고서는 죄를 다 깨끗이 청소한 뒤에 구원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속죄의 은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야 한다. 깨끗하게 하는 삶을 살아 깨끗한 그릇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amp;quot;예수만 믿으면 끝이다. 나는 구원이 끝났다.&amp;quot; 이렇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손이 믿음만 있으면 끝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알린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엄청난 폐해다. 구원파식 믿음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원래는 이래야 했다. 그런데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를 구원해 주셨다. 그렇다면 그 구원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이 쓰실 그릇으로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야 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천국에 와서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 뜻을 이루는 자가 하나님의 사역자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하나님은 왜 영의 나이가 높은 일꾼과 여러 지체를 함께 세우시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람들은 이 뜻을 잘 모른다.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존재인지를 모른다. 이 땅에서 죽으면 무덤 하나 만들고 끝나는 줄 안다. 그래서 누군가가 가서 깨우쳐 주어야 한다. &amp;quot;너는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죽어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은 흙에서 온 육체와 하늘에서 온 영이 합쳐진 특별한 존재다. 이 영이 이 땅에서 거듭나고 영혼이 성장하여, 그 영의 나이로 천국에 가서 영원히 그 나이로 산다.&amp;quot; 모르니까 알려 주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어리석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말해 주어도 믿지 않을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 똑같이 우둔하면 다 같이 망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의 나이가 높은 사람, 보다 더 성숙한 자를 보내 주신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조금 하다가 힘들다고 그만두지 않는다. 초지일관 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amp;quot;그렇구나. 우리 인간은 여기에 있을 존재가 아니구나&amp;quot; 하고 깨닫는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 11장 14-16절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요약한다. 그들이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찾은 본향은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진짜 본향은 하늘에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걸어갔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가는 더 나은 본향은 이 땅의 부모가 있는 곳이 아니다. 하늘에 원래 계신 영적 부모인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하늘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사자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사자의 생명이 있어야 하고, 독수리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독수리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석가모니도 안 되고 무함마드도 안 되며 공자도 안 된다. 스스로 구원자라 칭하는 이단 교주들도 안 된다. 그들은 절대 인도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만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바람을 알고 그 뜻을 조금이나마 펼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하나님의 일꾼이 모두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각각 다르다(마 25:15).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주방 봉사를 한다.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이 다 청소할 수 없고 음식을 다 만들 수 없다. 혼자서 다 가르칠 수 없고, 찬양을 다 인도할 수 없고, 기도를 다 인도할 수 없고, 다 회개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체들을 통하여 함께 그 일을 하게 하신다. 그렇게 내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온몸의 지체가 유기체적으로 돌아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무 하나를 먹으려 해도 눈이 보아야 하고 손이 가야 하고 입이 열려야 한다.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되겠는가? 손이 가지 않거나 눈이 보지 않으면 되겠는가? 코가 냄새를 맡지 못하면 어떻게 알겠는가? 이 모든 지체가 각각 역할을 받아 그 역할을 감당한다. 그리고 복은 같이 받는다. 하나의 음식을 먹으면 온몸에 에너지가 되어 손에도 눈에도 다 들어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천국에서도 그렇다. 교회 청소를 했다고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도 면류관이 주어진다. 이 가치를 알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들어갈 때 그 신분을 높게 만들어 주며, 거기서 상을 얻는 자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상속자의 신분과 상이 저절로 주어지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기존의 전도는 무엇이었는가? &amp;quot;예수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끝.&amp;quot;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유보적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보라. 그는 빚을 탕감받았지만 합당하게 살지 않자 주인이 다시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다(마 18:23-35).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죽을 때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성 밖으로 갈 사람이 기독교인 중에 수두룩하다. 하나님은 건방지게 산 사람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amp;quot;네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냐?&amp;quot; 주님이 달아 보신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여 버리시는 것이다(단 5:25-27).&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가 계속 쭉정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알맹이 있는 자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것이다. 사탄을 핑계 대지 말아야 한다. &amp;quot;사탄이 나를 유혹해서 어쩔 수 없었다&amp;quot;가 아니다. 네 잘못이다. 우리는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만세 전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이 사람을 완전히 운명론자로 만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교리가 다 그렇게 만들었다. 특히 장로교가 그렇다. 물론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전적으로 주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셨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생명을 어떻게 얻으며 속죄를 어떻게 받겠는가? 속죄와 생명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신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갔을 때 너의 신분과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상은 네가 준비하라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신앙생활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많다. 헌신하지 않으려고 한다. 천국에서 무엇을 얻고 살려고 그러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이렇게 전해야 한다. &amp;quot;네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셨다. 그것을 믿으면 된다.&amp;quot; 그리고 이어서 알려 주어야 한다. &amp;quot;그러나 너의 신분과 네가 받을 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amp;quot; 지금부터 시작인 줄 알면 얼마나 열심히 살겠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믿었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고 가르친다. 필자가 천국을 실제로 가서 보니 상속자가 될 자가 있고 그냥 아들로만 들어갈 자가 있었다. 자동으로 되지 않는다. 왕 같은 제사장이 있고 섬기는 자가 있다. 전부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쳐 버리니 문제다. 또 깨닫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단순히 말씀만 전하는 종을 가리키지 않는다. 각자의 역할이 나뉘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함께 받는다(마 10:41).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자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사역자가 쓰임받기 시작할 때 사탄은 왜 교만으로 넘어뜨리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위험한 현상은 무엇인가? 교만(驕慢, pride)이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교만이 나타난다. 자유의지를 가진 자에게 가장 큰 위험이 교만이다. 천사도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교만은 자기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들어온다. 할 수 없는 자에게는 교만이 들어갈 수 없다. 사탄은 지혜가 뛰어나고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었다. 함부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교만하겠는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능력이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사탄은 그를 교만으로 넘어뜨린다. 이것이 제일 위험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두 가지다. 첫째는 귀신이 내 몸에서 나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상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빼내야 한다. 교만의 영, 음란의 영, 거짓의 영, 시기 질투의 영, 원망 불평의 영, 근심 걱정의 영, 중독의 영들이 나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타락한 천사들, 곧 무당의 영, 제사&amp;middot;조상의 영, 부처의 영, 미신&amp;middot;잡신도 나가야 한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남아 있으면 결국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둘째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곧 우쭐해지는 것이다. &amp;quot;내가 이 정도다.&amp;quot; &amp;quot;나 아니면 안 돼.&amp;quot; 이런 의식에 빠져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한다. 조금 무엇이 되면 그렇다. 그래서 목사는 대접받다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 일반 평신도는 잘 모르니까 두려움을 잃어버리고 막 휘젓고 다닌다.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런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내보내는 회개를 해야 하고, 자기가 높아지려는 강력한 영, 곧 자유의지를 가진 자의 가장 큰 특징인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게 막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타락시켜 새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나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쓴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amp;quot;이 정도면 됐겠지&amp;quot; 생각한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넘어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교만하여 넘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 있는 악한 영들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악한 영들은 미혹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악한 영을 내보낸 뒤에도 왜 죽을 때까지 회개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악한 영들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amp;quot;악한 영들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amp;quot;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책임 회피다. 그러나 영향은 당연히 준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딤전 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의 미혹하는 영은 우리가 회개기도문에서 고백하는 교만의 영, 음란의 영, 거짓의 영 같은 자범죄의 영들, 곧 뱀들이다. 귀신은 우상숭배의 영인 제사&amp;middot;부처&amp;middot;무당&amp;middot;미신&amp;middot;잡신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을 따라가면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는다. 그래서 외식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해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문제는 사탄 마귀가 회개하여 악한 영을 내보낸 사람에게도 다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이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으로 다시 넘어뜨리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끝까지 온전하려면 철저히 회개 생활을 해야 한다. 회개기도문으로 귀신과 뱀들을 쫓아내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몸은 온전하지 않다.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자기 집으로 삼는다(마 12:43-45).&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집이 바로 사람의 몸이다. 귀신은 계속 들어오려 한다. 그러므로 귀신의 집이 파괴되지 않는 한, 회개했어도 얼마든지 다시 넘어진다. 귀신의 집이 파괴되어도 다시 들어오려 한다. 물론 필자가 보니 귀신의 집이 파괴되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역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귀신의 집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다시 넘어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자로 끝까지 쓰임받으려면 죽을 때까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회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amp;quot;나는 천 번 했으니 이제부터 괜찮다.&amp;quot; 안 된다. &amp;quot;나는 회개기도문으로 3천 번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amp;quot; 그런 것이 아니다. 귀신은 지금도 다시 들어오려고 엿보고 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지켜보다가 바로 들어오려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게다가 영은 합법적으로 들어온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들어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 속에 있던 영이 자녀에게 쏙 들어온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다. 조상들이 죽을 때도, 자녀가 죽을 때도 영들이 옮겨 온다. 이 영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회개 생활을 끝까지 해야 한다. 이것이 주의해야 할 첫째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선 줄로 생각한 성경 인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넘어졌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둘째는 무엇인가? 자기가 이제 무엇을 좀 하게 되면 우쭐해진다는 것이다. 사탄은 그를 넘어뜨린다. 결국 자기 자유의지에서 나온 교만한 마음으로 넘어뜨린다. 선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어느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amp;quot;이 정도는 내가 되었다. 이 정도면 회개했다. 나는 쓸 만하다. 이 정도 능력을 받았고 이 정도는 영의 세계를 보고 있으니 나는 괜찮다.&amp;quot; 그러나 사람은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모세를 보라. 80년을 준비했어도 120세가 다 된 때에 혈기와 분노를 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10-12). 들어가야 했는데 들어가지 못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다(행 15:39). 혈기와 분노가 다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윗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30세에 왕이 되었다(삼하 5:4).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45세 무렵 밧세바와 간음하고,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를 죽여 살인죄를 지었다(삼하 11장). 60세에서 65세 무렵에는 인구조사를 하여 자기에게 얼마나 힘이 있는지 자랑하려 했다(삼하 24장).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지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 그러나 첩을 들여 이스마엘을 낳았다(창 16장). 그 일이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을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세우셨는데,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행했다. 전쟁이 나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물었다(삼상 28:7; 대상 10:13-14).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섰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위치에 들어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우쭐해져 넘어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속에 있는 영을 뽑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를 높이려는 이 마음이 나를 사탄 마귀에게 속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내가 넘어가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동의로 된다. 분명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알려 주신다. 그런데 &amp;quot;아니야, 그것은 아닐 거야&amp;quot; 하며 자기 생각과 논리를 계속 펼친다. &amp;quot;나는 합당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옳아.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잘못한 것이 없어.&amp;quot;&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교만의 표지는 무엇이며 끝까지 겸손히 쓰임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교만한 사람이 되어 결국 넘어지고, 사탄 마귀의 밥이 되어 지옥에 떨어질 사람은 무엇을 몰라서 그렇게 되는가?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지금 잘못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긴다. 둘째, 분명히 잘못하여 불순종했는데도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amp;quot;나는 합당하다&amp;quot;라며 계속 변명한다. 그럴 때 교만해진다. 셋째, 자기보다 뛰어난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거부한다. &amp;quot;내가 누군데 점검을 받아야 하느냐?&amp;quot; 생각하며 절대 점검을 받지 않으려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목사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목사만 되면 그다음부터 점검을 받지 않으려 한다. 은사가 조금 나타나면 교만해져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amp;quot;내가 지금 이렇게 쓰임받지만 내 속에 어떤 영이 역사하고 있는지 점검해 달라. 축사를 해 달라.&amp;quot; 이렇게 해야 한다. 어제도 어떤 목사가 다시 사역을 받으러 왔다. 몇십 년을 기도해 온 분인데 또 왔다.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개는 목사 타이틀을 한번 얻으면 끝이다. 그다음부터는 기고만장해진다. 목사라는 타이틀이 천국을 준비시켜 주는가? 나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에게 점검받기를 거부할 때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고 말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특히 책망을 들으면 화를 내는 것은 더 나아간 것이다. &amp;quot;당신이 그것을 잘못했다&amp;quot;라고 책망하면 화를 내 버린다.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니까 화를 낸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화를 내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자기 것만 고집하며 계속 간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레벨이 다르고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면 안다. 내가 저분의 지도를 받아야 할지 말지를 사람은 바로 안다. 나이와 상관없이 알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굴복하지 않는다. &amp;quot;나도 목사, 너도 목사다. 나도 은사가 있고 너도 은사가 있다.&amp;quot;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필자는 지금도 수시로 점검을 받으러 간다. &amp;quot;목사님, 저를 좀 점검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어디에 영이 다시 들어왔습니까?&amp;quot; 처음에 점검을 받으러 갔을 때는 또 있었다. 그래서 그 영도 뽑아냈다. 나중에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 성도들의 것을 불러와서 다 뽑아낸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감사하다. 성도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영적 부모로서 대신 하는 것이다. 그래도 또 점검받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역을 하다 보면 무당 계열의 센 사람들이 많이 오니 그런 영들이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물론 사역 중에 달라붙어 들어온 영과 혈통을 따라 내려온 영은 천지 차이다. 내려온 영은 정말 세고 끈질겨서 나가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달라붙어 들어온 영은 회개를 조금만 해도 금방 떨어져 나간다. 불법적으로 들어온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를 하지 않으니 계속 달라붙어 커져서 문제가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 항상 조심할 것은 &amp;quot;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amp;quot;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amp;quot;주님, 제가 이 정도 되었다고 또 까부는 것입니다.&amp;quot;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려 한다면, 군림하려 한다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남의 책망에 화가 나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영적 권위자에게 순복하지 않고 따지려 한다면 지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탄이 왜 사탄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날마다 회개 생활을 통하여 마귀가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타락은 혈기와 분노로 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불순종하는 것, 책망을 거부하는 것,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 내 판단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점검을 받지 않으려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려는 것, 영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모두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마귀가 귀신을 보내고 뱀들을 보내 들어와 버린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는 조금만 잘되어도 교만해진다. 사탄이 그 대표다. &amp;quot;나는 이제 어느 정도 되었다. 이제는 지도를 받지 않아도 된다.&amp;quot; 이것이 무서운 생각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울왕은 처음에는 나귀를 찾는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삼상 9장). 그런데 나중에 왕이 되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삼상 15:12) 자기 업적을 자랑했다. 하나님께서 다 바치라고,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죽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세우신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계속 죽이려 했다.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떠했는가? 다윗에게 &amp;quot;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amp;quot;이라 하고(삼상 23:17), 왕이 된 뒤에도 자기와 자기 집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삼상 20:14-15). 영적 질서를 빨리 알아본 것이다. 사울은 그것을 알면서도 왕권에 대한 욕심,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욕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 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은 겸손했다. &amp;quot;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나는 모든 것이 끝이다. 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amp;quot; 그것이 다윗의 마음이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인지라 다윗처럼 때로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부하 장수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 바로 권력 남용이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존경받고 누리고 군림하려는 생각이 들어온다. 그러나 다윗은 죽을 때까지 &amp;quot;나는 원래 목동이다.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다&amp;quot;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마음은 이러했다. &amp;quot;주님이 나를 만나시기 전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주님이 나를 만나 주셔서 내가 꽃이 되었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향기 없는 꽃이요 시들어 버릴 꽃이다. 주님이 계셔서 내게 향기가 나고 내 꽃이 아름다운 것이다. 주님이 없으면 시들어 쓰레기장에 들어갈 존재일 뿐이다.&amp;quot; 항상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끝까지 쓰임받을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나를 지도해 줄 사람이 있다면 정말 감사해야 한다. 자기 위에 지도해 줄 존재를 두지 않은 것이 바로 사탄이다. 그러므로 나를 지도해 줄 자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평생 그분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타락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겸손히 살아갈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일평생 온전하지 않다.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귀신이 들어올 수 있고, 얼마든지 뱀들이 역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려면 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더 깨끗한 그릇은 회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amp;quot;이제 됐다, 섰다&amp;quot; 생각하지 말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점검을 받고 또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묻고, 내가 또 잘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 땅에서 다 받으면 천국에서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섬기려는 마음의 자세를 놓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도 귀담아듣고, 아랫사람이 하는 말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당장 무엇을 하고 싶어도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순종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사탄 마귀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거꾸러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을 마칠 때까지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날마다 회개하여 악한 영을 드러내 내보내고, 내가 섰다고 생각하는 우쭐함을 버려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금도 우리는 부족하다. &amp;quot;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내가 끝까지 쓰임받을 수 있도록, 겸손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amp;quot; 이런 마음으로 살아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고, 맡겨진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한 자, 시간이 지날수록 &amp;quot;내 마음에 합한 자&amp;quot;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행 13:22).&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11일(일)&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2026-10-09(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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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9T10:02:00+09:00</published>
		<updated>2026-10-09T15:57:54+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BEdzVlyekY [설교핵심] 본 설교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예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교리와 참된 성경 말씀을 엄격히 구분해야 함을 주장한다. 정보배 목사는 전통적인 칼빈주의 예정론...</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08)]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얻는가?(요엘2:30~3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lt;/p&gt; &lt;p&gt;https://youtu.be/sBEdzVlyekY&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sBEdzVlyekY?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amp;nbsp;&lt;strong&gt;기독교의 구원론과 예정론&lt;/strong&gt;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만든 교리와 &lt;strong&gt;참된 성경 말씀&lt;/strong&gt;을 엄격히 구분해야 함을 주장한다. 정보배 목사는 전통적인 &lt;strong&gt;칼빈주의 예정론&lt;/strong&gt;이 성경을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안경 역할을 하며, 심지어 일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또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lt;strong&gt;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고백과 회개&lt;/strong&gt;를 통해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의 목적은 신자들이 교리적 편견에서 벗어나 &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lt;/strong&gt;을 중심으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른 구원의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lt;strong&gt;구원론&lt;/strong&gt;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lt;br /&gt; 2.&lt;strong&gt; 칼빈주의 5대 교리&lt;/strong&gt;와 &lt;strong&g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lt;/strong&gt;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lt;br /&gt; 3. &lt;strong&gt;&amp;#39;오직 믿음&amp;#39;&lt;/strong&gt;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lt;br /&gt; 4. &lt;strong&gt;성도의 견인 교리&lt;/strong&gt;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lt;br /&gt; 5. &lt;strong&gt;보혜사 성령&lt;/strong&gt;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lt;br /&gt; 6. 요엘의 &lt;strong&gt;&amp;#39;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amp;#39;&lt;/strong&gt;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lt;br /&gt; 7. &lt;strong&gt;하나님의 부르심&lt;/strong&gt;과 &lt;strong&gt;사람의 응답&amp;middot;회개&lt;/strong&gt;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8)&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5)&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얻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 얻는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30-32)&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가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맞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주의 이름을 불러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경에는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들었던 바를 가지고 종합해서 만든 것도 있다. 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몇 개만 추려 자기 것으로 취한 뒤 그것을 확대해서 말한 이도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을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 길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우리 모두는 지금 그들 중에 하나를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모두 어느 정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amp;ldquo;너는 틀렸다&amp;rdquo;고 백 퍼센트 말하기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반대쪽 말씀도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근접한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lt;strong&gt;요엘서 2장 32절이 말하는 구원을 중심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생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 왔는지&lt;/strong&gt; 정리해 보도록 하자.&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구원론을 읽을 때 왜 교단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들이 믿는 주장을 보통 칼빈주의(Calvinism)라고 한다. 장로교파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 가운데 칼빈을 따라가는 쪽은 대부분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을 믿고 따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였고 어떤 사람은 유기&lt;span style=&quot;line-height:120%&quot;&gt;&lt;span style=&quot;text-autospace:none&quot;&gt;&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apple-system&quot;&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0.5pt&quot;&gt;&lt;span style=&quot;color:#424242&quot;&gt;(&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apple-system&quot;&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0.5pt&quot;&gt;&lt;span style=&quot;color:#424242&quot;&gt;遺棄&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apple-system&quot;&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0.5pt&quot;&gt;&lt;span style=&quot;color:#424242&quot;&gt;)&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하기로 예정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맞는지는 조사해 보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출석한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출석한 교회의 신앙을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성경도 그렇게 보인다. 그때 어떤 안경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간 안경을 쓰면 그다음부터 성경이 빨갛게 보인다. 거기에는 조금 더 빨갛고 덜 빨간 차이가 있다. 그런데 장로교회 대신 감리교회에 가면 또한 다른 색, 곧 파란 안경이 씌워진다. 순복음교회에 가면 보랏빛 안경을 쓰게 되어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안경이 있고, 그 안경을 쓰고 보면 그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구원관을 가지려면 우선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놓아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래서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 사도가 말했든 다른 누가 말했든 그것은 귀담아 듣는다. 이것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든 판단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여기서 잠깐 생각해야 할 것은 상당수의 성도들이 자신이 들었던 교리(敎理, doctrine)를 성경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와 성경은 다르다. 장로교 교리와 웨슬리안 교리가 다르고, 곧 성결교와 순복음교회의 교리도 서로 다르다. 그런데 장로교회가 정통이라고 하면 감리교회나 성결교회, 순복음교회는 이단인가? 그렇지 않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와 순복음교회에 다녀도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공부했어야 했다. 그런데 교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교리가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단이 너무 많이 나오니 이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교리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최소한 이것은 알아야 한다고 만든 것이 교리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가다 보니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amp;ldquo;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amp;rdquo;(요 10:30)는 말씀만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교리는 성경에 없다. 그러니 나중에는 성경까지 뜯어고친다. 그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다.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요한일서 5장 7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고 되어 있는데(요일 5:7),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라는 말씀으로 후대에 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싶다고 해서 없는 것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성경을 찾아가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성경 66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아야 한다.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모형으로 보여 준 책으로 보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해석의 여지가 있는 성경 본문들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요엘서 2장 28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amp;lsquo;모든 육체 위에&amp;rsquo;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amp;lsquo;만민에게&amp;rsquo;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amp;#39;만민&amp;#39;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마 28:19).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이를 잘 번역한 것인가? 사실 요엘서 2장 28절만 떼어 놓고 보면 &amp;lsquo;너희 자녀들, 너희 늙은이, 너희 젊은이&amp;rsquo;가 나오므로, 이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모든 육체는 유대인들 가운데 성별과 나이와 남종과 여종이라는 신분의 차별 없이 성령이 부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이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적용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남녀노소와 신분에 관계없이 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고,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점차 바뀌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쪽으로 넓어지기 때문이다(벧전 1:1-2, 2:9). 사도 바울도 모든 육체를 모든 민족으로 보고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롬 10:12-13).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사도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고 믿겠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그분은 유대인 우선주의로 가게 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장로교에서만 자랐고 장로교에서 세례를 받고 장로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받은 지가 벌써 28년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필자는 칼빈주의를 들었고, 칼빈주의 사상을 물려받은 자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의 핵심 신학사상은 1618년에서 1619년에 열린 도르트회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채택함으로써 형성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칼빈이 살아생전에 그렇게 정형화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말했는가? 그러지는 않았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단지 칼빈주의 5대 교리만이 아니라 훨씬 더 크다. 칼빈은 국가론, 직업론, 성경론, 신론, 성령론 등을 다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원론이고, 그 구원론의 핵심이 칼빈주의 5대 교리다. 그러므로 5대 교리는 칼빈 사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인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1564년에 세상을 떠났고, 후대 사람들이 1618년 도르트 회의를 통해 칼빈이 이런 구원론을 주장했다고 교리로 만든 것이 &amp;#39;칼빈주의 5대 교리&amp;#39;인 것이다. 그것은 곧 &amp;#39;전적 타락&amp;#39;Total Depravity)&amp;#39;, &amp;#39;무조건적 선택&amp;#39;(Unconditional Election), &amp;#39;제한 속죄&amp;#39;(Limited Atonement), &amp;#39;불가항력적 은혜&amp;#39;(Irresistible Grace), 그리고 &amp;#39;성도의 견인&amp;#39;(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리고 이러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바탕으로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왔다. 이 신앙고백은 1640년대 중반에 작성되어 1648년에 승인되었다. 장로교에서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요약하여 성도에게 가르치려고 대요리문답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요리문답이 너무 많으니 핵심만 줄인 것이 소요리문답이다. 필자처럼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대부분 소요리문답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축소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구원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거기 나와 있는 구원론에는 칼빈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소요리문답대로 믿어 왔다. 이전까지 필자는 교리와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모른 채, 교리를 성경이라고 믿었고, 교리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amp;lsquo;오직 믿음&amp;rsquo;은 예수님의 말씀과 로마서 1장 앞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성경에는 &amp;#39;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amp;#39;는 말씀이 있다. &amp;ldquo;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amp;rdquo;(행 16:31)고 사도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나 회개하라는 말이 들어 있는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말씀은 누가 말했는가? 그것은 바울이다. 물론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바울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울은 &amp;lsquo;믿음으로만&amp;rsquo;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어느 날 &amp;#39;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amp;#39;는 교리가 생겨났다. 그것이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이었다. 종교개혁자 칼빈 이전에 루터가 있었는데, 그는 &amp;lsquo;오직 믿음&amp;rsquo;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칼빈주의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만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나온다. 그 각도에서 성경을 보면, 그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수용한 사람들은 성경을 번역할 때도 그러한 각도에서 번역한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amp;lsquo;오직 믿음&amp;rsquo;이라는 표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 구원 예정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 루터가 만든 교리이며 칼빈이 만든 교리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렇게 들었으니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우선 우리가 가진 구원론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7:21)&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필자를 가리켜, 행위 구원론자라고 말했다. 필자가 믿음과 회개를 주장하니 행위 구원론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먼저 행위 구원론자라고 말해야 옳다. 예수님을 이단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이단으로 확정되면 그다음에 필자를 언급해야 한다. 필자는 다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고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는 &amp;ldquo;회개하[고&amp;nbsp; 있어]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amp;rdquo;(마 4:17)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있어야 한다(미완료)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있다면 회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구원받을 자는 없기 때문이다(요 14:6, 행 4:12).&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왜 성경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가?(롬 1:16-17) 그것은 구원이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이 땅이 아니다. 장소적인 이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한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28). 그렇다. 이 땅에서부터 임하는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천국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구원이 완성될 시점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한 열매가 아무것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amp;quot;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인데, 어찌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겠느냐?&amp;quot;(약 2:17, 14)라고 말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관을 정확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으면 &amp;ldquo;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천국 간다&amp;rdquo;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얻는다고 했지 [장차]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이 초창기에 쓴 갈라디아서나 중반기에 쓴 로마서를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중세에는 고행이나 헌금 같은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므로, 그런 행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다 보니 &amp;lsquo;오직 믿음&amp;rsquo;이라는 교리가 나왔다. 이때 루터가 근거로 사용한 말씀들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인데, 그중 하나인 로마서 1장의 말씀을 살펴보자.&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의 &amp;lsquo;오직&amp;rsquo;은 헬라어로 &amp;lsquo;데&amp;rsquo;(de)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amp;lsquo;그런데&amp;rsquo;, 혹은 &amp;lsquo;그러나&amp;rsquo;라는 뜻이다. &amp;lsquo;오직&amp;rsquo;을 뜻하는 헬라어 &amp;lsquo;모노스&amp;rsquo;가 아니다. 그러므로 &amp;lsquo;그런데 의인은&amp;rsquo;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종교개혁자의 후손이다 보니 한글개역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그것을 &amp;#39;오직 믿음&amp;rsquo;이라고&amp;nbsp;번역한 것이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사상을 믿게 하려고 결정적인 구절들의 번역을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필자는 신약학을 전공하면서 깜짝 놀랐다. 멀쩡한 성경 말씀을 만세 전에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번역 자체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요 6:37, 39, 10:28-29).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러니 장로교에서만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로교회 목사가 된 필자는 얼마나 충격이 컸겠는가? 교리만 따라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성도의 견인 교리는 왜 회개 없는 구원의 안심을 낳을 수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구원론에 관한 신학적인 진술이다. 그런데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서 다섯 번째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는 매우 심각하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기로 결정하여 구원하셨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 주장에 빠져 있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새 예루살렘 성 밖으로 밀려날 뻔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교리를 가르치는 책은 말한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짤막한 표현은 바로 &amp;ldquo;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amp;rdquo;는 것이다. &amp;quot;사람이 한 번 믿으면 멸망할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다&amp;quot;라고 이 책은 말한다. &amp;quot;그리스도인은 한 번 믿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믿을 것이며, 그러므로 성도는 끝날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amp;quot;라고 말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딤전 1:19-20). 사도행전 5장에서 다 바쳤다고 했다가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과연 천국에 들어갔겠는가?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는 나중에 눈물로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히 12:16-17).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라도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히 6:4-6). 그렇다. 성도의 견인은 한쪽 말씀을 그것도 과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는 다 보아야 한다. 한쪽만 믿다가는 교리에 빠지고 만다. 교리와 성경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단의 시각에서 요약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안경을 쓰고 만든 것이 교리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필자는 2013년경부터 이 안경을 벗겨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때까지 필자가 쓰고 있던 안경이 빨간 안경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안경을 쓰고, 우리나라 장로교의 선배들과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까지 왜곡해 놓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필자는 장로교 사람이기 때문에 장로교가 잘하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오직 장로교에서만 신앙생활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장로교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한 영이 되는 것이므로, 사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짓고 있다가 마지막에 죽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열매가 그에게 없다면, 주님은 천국에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리실 것이다(계 3:5).&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한 자의 이름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구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므로 안전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교리에 빠져 있었던 필자는 죄를 짓고도 이렇게 생각했다. &amp;ldquo;만약 내가 지은 이 죄가 천국에 가지 못할 죄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실 날이 올 것이다. 강압적으로라도, 주권적으로 나를 회개시켜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회개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이런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구나.&amp;rdquo;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게 믿다가 죽었더라면 아마 필자도 역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서 성 밖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시 써야 한다. 이것을 필자는 바른 구원론이라고 부르고 싶다.&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보혜사 성령은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시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강림에는 부어 주시는 성령 강림과 내주하셔서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강림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만 계속 믿고 따라가면 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다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구원관도 마찬가지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서에서의 성령 강림은 사실 육체 위에 부어지는 쪽이다. 그때 성령이 부어지면 선물인 은사가 주어지는데, 그 은사가 머리에, 가슴에, 손과 발에 달라붙는다. 대부분 위에 달라붙는다. 그러므로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는 영어의 &amp;lsquo;온(on)&amp;rsquo;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말은 위를 위쪽으로만 생각하지만, 영어는 몸의 바깥에 닿아 있으면 다 &amp;lsquo;위&amp;rsquo;(on)인 것이다. 몸을 세워 놓고 보면 가슴은 옆이지만 영어로는 위(on)다. 발바닥도 위(on)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말씀은 부어 주시는 성령과 선물로 오는 은사를 강하게 강조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예언의 말씀이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 성취될 때에,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과 동시에 왔다고 보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죽기 하루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Paraclete)인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한 분 하나님의 신비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amp;ldquo;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amp;rdquo;(요 14:19)라고 하신 말씀대로 오순절에 그분은 성령으로 오셨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오시는 보혜사 성령은 믿는 자 속에 들어가시는 영이시다(요 14:16-17).&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의 &amp;lsquo;함께&amp;rsquo;는 원문으로 &amp;lsquo;곁에&amp;rsquo;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그들의 곁에 계시고 그들 속에 계시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는 예수님께서 이미 구속을 완성하시고 죄값을 지불하신 이후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하셨던 성령께서는 이제 생명을 주는 영으로 오셨다(고전 15:45).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다고 하셨다(요 3:5).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다(요 5:26). 원문으로 보면 아들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 5:1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고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성령을 받아 생명을 분배받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영이 바로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고전 15:45).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때 그분은 생명을 주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이전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속죄만 받으면 구원받은 줄 알았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받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처음에는 우리의 죄를 덮어 주고(속죄하고), 나중에는 씻어 주어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예수님을 믿어 속죄를 받은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지, 아직 내게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속죄를 받은 후에, 생명을 주는 영이 내 속에 분배되어 들어와야 우리 영이 살아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 영이 살아나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方言, tongues)이었다(행 2:1-4).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다. 그는 거듭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방언을 못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인가? 그건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분명 그의 영에 생명을 주는 영이 들어간 경우이지만, 생명을 주는 영이 그의 영 속에 들어간 자라도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표적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특히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강림하실 때 다 방언을 말했다. 사마리아 교회는 방언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고 나오는데,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자기들이 처음 믿었을 때에 받은 선물이 고 방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가 받은 선물도 방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순복음 교단은 정확히 교리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방언을 말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표현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방언을 말하면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방언은 성령 세례로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막 16:17). 필자는 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즉 누구든지 거듭난 자는 방언을 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을 만났고 한 번도 그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생명이 없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걸고 믿었겠는가? 다만 방언은 신령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장로교에서는 방언을 시시하게 여기거나 혹은 잘하지 않으니 그렇게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의 가장 기본은 방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부어졌는데도 방언을 말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방언은 생명을 주는 영이 내 영 속에 들어와야 나타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amp;ldquo;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amp;rdquo;(고전 6:16-17)는 말씀처럼, 속죄를 받고 생명주는 영을 받으면 영이신 주님과 아교풀처럼 붙어 버린다. 그러면 주님과 내가 한 영이 된다. 우리 영 속에 성령이 들어와 나와 한 영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성경을 집중적으로 약 10년간 공부하면서 &amp;lsquo;연합된 영&amp;rsquo;이라는 좋은 표현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성령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 거듭난 영인지 설명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성령이 들어와 계신 사람의 영은 주와 합한 한 영이므로 성령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사람의 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로마서 8장이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amp;lsquo;연합된 영&amp;rsquo;이라는 용어를 좋게 생각한다. 성령이 내 영 속에 들어와 생명을 주셨으므로 하나가 된 것이다. 고로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단계이고, 속죄(贖罪, atonement)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전 단계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사영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하면서도 왜 영접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명을 주는 영이 들어와야 거듭나 구원받는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만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큰 병폐다. 거듭남의 과정을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으니 내가 정말 거듭났는지 잘 모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내가 거듭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행전 2장 1-4절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고,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한다(롬 8:15-16).&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확실히 안다. 처음 믿었을 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는 불렀지만,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1년 후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께서 하나님은 이제 나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일부러 &amp;ldquo;아버지&amp;rdquo;라고 불러 보았다. 그때 알았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셨는데, 필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과 같은 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아들은 아들이지만 약속의 아들, 상속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필자는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새가족을 가르치면서 이것을 설명해 주었는데, 필자가 부목사 시절에 직접 수료증을 만들어 준 새가족이 800명이 넘었고 그 시간에 거의 다 감격하여 울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어떤 문화에서 자라느냐도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축사하는 교회이므로 요즘 아이들이 &amp;ldquo;결박, 결박, 결박, 예수 피, 예수 피&amp;rdquo; 하고, &amp;ldquo;예수 이름으로 결박해서 음부로 끌어갑니다&amp;rdquo; 하며 따라서 말한다. 엄마와 할머니가 맨날 그렇게 하니 귀신을 결박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잘 알고 외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고 하셨다(마 12:29).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필자를 가리켜 무당 목사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무당을 쫓아내는 목사이지, 무슨 무당 목사란 말인가? 어떤 이는 필자를 무속인이라고도 한다. 귀신을 따라가고 귀신을 섬기는 것이 무속이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어디 무속인인가? 말하려면 제대로 파악하고 말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요엘의 &amp;lsquo;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amp;rsquo;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어지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요엘서 기자는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는가? 놀랍다. 요엘서 2장 30-31절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amp;#39;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amp;#39;은&amp;nbsp;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이미 네 가지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이스라엘을 휩쓸었다(욜 1:4).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기에, 당시 남유다 나라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옴으로 모든 것이 다 먹혀 없어지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욜 2:32).&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구원자로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다만 칼빈주의자는 성경을 잘못 번역하여 그렇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이라고 해석했다(롬 10:12-13).&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0:12-1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때 사도 바울은 요엘서 2장 32절을 인용했는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대신하여 &amp;#39;주&amp;#39;(퀴리오스, Lord)라고 바꾸어서 말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전부 &amp;lsquo;주&amp;rsquo;로 바꾼 것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여호와께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도 &amp;quot;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amp;quot;고 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오신 것이 곧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이라는 뜻이다(마 1:23).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amp;lsquo;여호와&amp;rsquo;와 &amp;lsquo;구원하신다&amp;rsquo;는 뜻의 &amp;lsquo;야샤&amp;rsquo;가 합쳐진 것으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고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12-13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주(퀴리오스)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울은 앞에 있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amp;quot;만약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amp;quot;(롬 10:9-10). 그렇다. 사람이 믿어서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마지막 종착역이다. 여기서는 이 땅에서 지금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13절에 나오는 &amp;lsquo;주(여호와)&amp;rsquo;가 바로 9절의 예수님이라고 정확히 알려주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 예수님이 여호와시라는 것,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를 부르든 여호와를 부르든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응답&amp;middot;회개는 구원에서 어떻게 함께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서 2장 32절은 여기서 끝마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amp;ldquo;주여, 나를 구원하소서&amp;rdquo; 하고 부르짖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amp;ldquo;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amp;rdquo;이라고 한다. 이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그보다 먼저 여호와께서 부르신 부르심이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가 그를 구원하겠다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은 누군가를 통하여 전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누군가가 전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말한 대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는가(롬 10:14)? 그러므로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안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말을 듣고 내가 주님을 믿겠다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곧 믿는 것이 곧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전에도 몇몇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했던 1885년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몰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향한 부르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이전에는 복음을 듣지 못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우리도 복음을 듣고 믿겠다고 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요엘서의 구원론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욜 2:32).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다. 둘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곧 그분을 구원자로 믿겠다고 부르는 것이다(욜 2:32). 이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심판의 날이 자기에게 이르기 전에 &amp;ldquo;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amp;rdquo;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칼빈주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은혜(恩惠, grace)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고백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에다가 요엘서 2장 12-13절까지 포함하면, 사람은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amp;quot;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amp;quot;고 하셨다(욜 2:12-13). 이는 예수께서 &amp;quot;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amp;quot;고 했던 말씀과 같다. 이것을 합치면 이렇다. 주님께서 먼저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더러 &amp;ldquo;오라&amp;rdquo; 하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믿겠다고 결정한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우리의 의지도 들어간다. 그리고 믿을 때에는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데, 이러한 회심으로서의 회개도 우리의 의지가 들어간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거기에 응답하면 우리도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요엘서는 이것을 참 잘 말해 준다. 그래서 요엘서 2장 12-13절의 회개까지 함께 보면, 사람의 구원은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원론이 요엘서에 들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amp;#39;예정&amp;#39;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란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하셨다는 것인데,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을 만세 전에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부르심으로 부르는데, 그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헬라인 곧 이방인이 될 것이라고 예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이란 이런 순서에 대한 예정이요 민족에 대한 예정인 것이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성경 말씀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정론이 맞게 말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 주장한 것이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예정론이 성경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왜곡하여 잘못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어지는 시간에 낱낱이 살펴보겠다.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이해한 다섯 가지 방식도 그때 모두 다루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빨간 안경을 썼다면 빨리 안경을 벗어야 한다. 주님이 부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구원자라고 부르겠는가? 영원한 멸망에 빠진 우리를 주님이 먼저 부르셨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요 중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그분을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그분을 주로 고백하여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구주로 믿지 않겠다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 또한 그렇게 해서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을 살았던 자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그가 죽는 날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구원이 안전하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오려면 자기의 두루마기를 계속해서 빨아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계 22:14). 여기까지 정확히 정리해야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성도들은 대부분은 어떤 교단에 속한 선교사님들과 목사님, 그리고 선교단체를 통해 성경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기에서 배운 교리를 성경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인 것이지 교리가 아니다. 교리를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쪽 교단과 다른 쪽 교단도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데, 정반대의 교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 말씀은&amp;nbsp; 그것이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볼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구원관도 마찬가지다. 내가 배운 것이 그랬으니 그것이 맞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잘못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겨서도 안 된다. 우선 우리는 &amp;ldquo;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amp;rdquo;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리고 회개한 다음에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행위가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빨리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요일 1:9).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자기의 두루마기를 계속해서 빨고 있어야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한다(계 22:14).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라도 천국 안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자신을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잘못 알고 있었음을 회개하고, 범죄한 것을 회개함으로 자신이 이미 받은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구원론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9일(금)&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요엘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원 약속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5bff1d052f62b0b119aa12483f21f9c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2943ba4c09bf2b64afe8ed263387742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08d4355e8362147b93e61e0de9028ab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3ed64ee85dc77e3fd667ab6500f0b5a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5649d3ab4a7c12613e2c9f5feec881d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ec3dbdc4aaf0bccc4f665f9aed5b145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9e27dd277271428b1bd68810451d9ff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df61556198ce19f76c35cbe52bc2fa2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75610947143312b92406aa621cdb858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86259ff9cb4541297811ecd5a020db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d4489a7e4ef826f394b883cdaf486aa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1d61a1f310761f96fafc5740a50b1ae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a2583bc15be802f1403c9c7216ecd24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0f0eace6827dce35b525b7af302fa61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discovering_Biblical_Salvation.pdf_1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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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15522323535705913c248605e1e476a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b93531ea8b5a4e3ba6bcab7ed67ed49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7d7f51b12cc3f82ce07f0a9d0855edc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f25d6bf8c5bfe1ca4a0b8f6d0a63380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ec241aad8244facc91968aa7927f0ef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e0df0c40243c2141ec19ae8981d6d35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69838fc3fc551ea0118d449b4471d1f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5b7bce8bc2e20b26c86557b5a7b2cbf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a8c4f9d99cb0efc6557f34dff047f8c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c9b33e8b85ed9d6359e224ac0d5083a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e157d102f31c1f7a3de029ffda9a429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8) 요엘서(05)] Reconstructing_Salv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320/e4fc804ef48d3832acd26867aabba08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7)]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  오순절이후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엘2:28~29)_2026-10-08(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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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8T09:03:27+09:00</published>
		<updated>2026-10-08T23:05:17+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7)]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 오순절이후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엘2:28~2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wwjp83ZQchI [설교핵심] 구약 시대에는 소수의 특별한 직임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임했던 성령의 은사가 오순절 이후 요엘서의 예언 성취를 통해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신약 시대의 성령 강림은 단순한 은사의...</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07)]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 오순절이후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엘2:28~29)&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lt;/p&gt; &lt;p&gt;https://youtu.be/wwjp83ZQchI&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wwjp83ZQchI?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구약 시대에는&amp;nbsp;&lt;strong&gt;소수의 특별한 직임자&lt;/strong&gt;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임했던&amp;nbsp;&lt;strong&gt;성령의 은사&lt;/strong&gt;가 오순절 이후 요엘서의 예언 성취를 통해&amp;nbsp;&lt;strong&gt;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확대&lt;/strong&gt;되었다. 이러한 신약 시대의 성령 강림은 단순한 은사의 확장을 넘어&amp;nbsp;&lt;strong&gt;영적 내주와 생명의 분배&lt;/strong&gt;를 가져왔으며, 특히 구약에는 없었던&amp;nbsp;&lt;strong&gt;방언의 은사&lt;/strong&gt;와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한&amp;nbsp;&lt;strong&gt;축사(귀신 축출)의 은사&lt;/strong&gt;가 새롭게 주어졌다. 결국 이 설교는 신자들이&amp;nbsp;&lt;strong&gt;성령 세례와 은사&lt;/strong&gt;를 통해 영적으로 무장하고, 종말론적 영적 전쟁에서&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꾼&lt;/strong&gt;으로 온전히 쓰임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요엘이 예언한 &lt;strong&gt;보편적 성령 강림&lt;/strong&gt;은 왜 사역자의 보편화를 뜻하는가?&lt;br /&gt; 2. &lt;strong&gt;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lt;/strong&gt;는 어떻게 다르며 각각 어디서 오는가?&lt;br /&gt; 3. 에베소서 4장의 &lt;strong&gt;사도&amp;middot;선지자&amp;middot;전도자&amp;middot;목사와 교&lt;/strong&gt;사는 어떤 부르심인가?&lt;br /&gt; 4.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은 &lt;strong&gt;성령 세례와 방언&lt;/strong&gt;에 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lt;br /&gt; 5. &lt;strong&gt;내주하시는 성령&lt;/strong&gt;은 구약과 달리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시는가?&lt;br /&gt; 6. 오순절 이후에만 나타난 &lt;strong&gt;방언과 축사의 은사&lt;/strong&gt;는 왜 중요한가?&lt;br /&gt; 7. 마지막 시대에 성도는 어떻게 &lt;strong&gt;성령의 전사&lt;/strong&gt;로 준비되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7)&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4)&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오순절 이후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28-29)&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서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특히 성령 강림(聖靈降臨, descent of the Holy Spirit)에 관하여 요엘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내용은 대단하다. 구약 시대에는 몇몇 사람만 성령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이 죽어 버리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나라와 민족과 공동체 자체가 위험에 빠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을 부어 주지 않고, 남녀를 불문하고, 늙은이와 젊은이와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주인이든 종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약속은 B.C. 835년에서 830년경으로 추정되는 남유다 요아스 왕 때에 활동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A.D. 30년 성령이 강림하실 때까지 성취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뒤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그로부터 10일 뒤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때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에게, 각 사람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임하였고,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다. 이로써 요엘서 2장 28-29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의 예언은 특별 성령 강림에서 보편적인 성령 강림으로 바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번 시간에는 그 보편적인 성령 강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오순절 이후 성령의 내주와 은사들에는 구약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자.&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요엘이 예언한 보편적 성령 강림은 왜 사역자의 보편화를 뜻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왜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기로 결정하셨는가?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요아스 왕의 시대였다. 그 요아스 왕에서 4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여호사밧 왕이 있다. 여호사밧은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기 아들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켰다(왕하 8:18). 그 바람에 남유다가 바알 신앙, 곧 우상숭배(偶像崇拜, idolatry)로 넘어가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 죗값을 여호사밧에서 4대인 요아스 왕까지 물으셨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면 그 죗값을 묻는다는 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람, 곧 지도자가 없게 되면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난다. 한 시대가 망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시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시대에 일할 수 있게 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욜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보편적인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사역자의 보편화다. 구약 시대에 성령을 받은 몇몇 사람을 보면 일반 평민에게 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 직임(職任)에 따라 주신 것이다. 그 직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을 주셨다. 그런데 그 제한을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실 사람을 누구든지 감당할 수 있도록 다 열어 버리시겠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필자처럼 우상숭배에 찌들었던 사람도 주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쓰임받을 수 있다. 예전 같으면 대대로 좋은 집안, 성골과 진골 같은 사람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령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목회자가 아니어도 선교사로 간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가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6년 전부터 성령에 대해 확실하게 경험하고 천국의 상황까지 확인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에게는 직임에 따라 특별 은사가 부어진다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라. 특별 은사가 없는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면 그 직분을 감당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구약 시대를 보니 사사의 직임, 왕의 직임, 선지자의 직임, 제사장의 직임을 담당할 때 기름부음과 함께 성령의 특별 은사가 부어졌고, 그 은사로 그 직임을 감당하게 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제자들이 하게 하셨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 직임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직임을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은사가 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는 어떻게 다르며 각각 어디서 오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은사(恩賜, spiritual gift)는 보통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일반 은사라 하고, 성령께서 직임을 위해 더 특별하게 주실 때 특별 은사라고 한다. 일반 은사는 로마서 12장에 나오고, 특별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다. 딱 부러지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편적으로 이렇게 구분해서 말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특별히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특별 은사라 하고, 사람으로 태어날 때 보통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일반 은사라고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로마서 12장은 특별 은사와 일반 은사를 나누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은사를 보면 성령을 받지 않아도 나타나는 은사가 있다. 처음에 나오는 예언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서 여섯 번째로 나오는 특별 은사다. 그러나 그다음부터 보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나타나는 은사들이다. 섬기는 일을 잘하는 섬김의 은사가 있다. 가르치는 일을 잘하는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은사가 있다. 성실하게 구제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 다스리는 지도력의 은사가 있다.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성령의 특별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를 믿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노래 잘하는 은사, 건축하는 은사, 음식 잘하는 은사,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은사, 그림 잘 그리는 은사는 모두 일반 은사다. 일반 은사는 보통 부모로부터 내려온다. 부모가 어떤 부모였느냐가 중요하다. 이번에 우리나라 선수가 체조 도마에서 메달을 따는 것을 보니, 아버지가 도마 국가대표였는데 딸도 같은 종목에서 뛰어난 기록을 냈다. 그 유전자가 벌써 다른 것이다. 운동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음악 잘하는 사람이 다 그런 은사를 가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가 말을 해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조상들이 500년 동안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훈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손으로 태어나니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하는 은사가 있다. 좋은 은사다. 필자는 이 일반 은사를 세상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 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쓰고 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에베소서 4장의 사도&amp;middot;선지자&amp;middot;전도자&amp;middot;목사와 교사는 어떤 부르심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직분의 형태로도 표현된다. 에베소서 4장을 보자. 그리스도께서 땅 아래 낮은 곳, 음부로까지 내려가셨던 그분이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분이며,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4:9-10). 그렇다면 그분이 올라가셔서 무엇을 하셨는가?&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어떤 특별한 직임 때문에 사도적 직임을 가지고 이 땅에 온 사람이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영적으로 볼 때 천국의 14만 4천 명은 사도적인 직임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도는 예수님 때의 사도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사도적 직임이라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음은 선지자다. 선지자는 예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내는 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내려면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 구약과 같은 선지자는 끝났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시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다. 세례 요한은 율법이 예언한 바로 그분,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분이 오셨다고 증언한 마지막 주자다. 그러므로 구약적인 모든 특별 혜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결되었다. 지금은 그런 선지자가 없고, 그런 사도도 없다. 다만 그와 비슷한 부르심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가 틀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려 하셨고, 예수님 시대에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그들을 품으셨다(마 23:37). 그러나 그들은 따라오지 않았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면서 스스로 끝내 버렸다(마 27:25). 그러므로 이제 그 민족에게 특별 사역이 주어지지 않는다. 구원받을 남은 자들은 있으나(롬 11장),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들을 통해 교회사를 이끄신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도적 부르심과 선지자적 부르심이 있어야 그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을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다음은 복음 전하는 자다. 다른 말로 전도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복음 전하는 자도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복음을 잘 전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다. 전도에 탁월한 은사가 있는 사람은 전도를 많이 한다. 그런 사람은 진돗개 같아서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걸리면 교회에 나와야 한다. 교회로 끌고 와 버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은 목사와 교사다. 목사도 물론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목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고, 교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 모두 교회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주시는 것이다. 목사는 일종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이라고 하지만, 본래 목양하는 자다.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 목양이다. 이 단어는 원래 목자를 뜻하는 &amp;lsquo;포이멘&amp;rsquo;이다. 양을 치고 양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특별 은사가 없어도 양 떼를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는 마음이 충분한 사람이 목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시대다. 그 정도 수준으로 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더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은 성령 세례와 방언에 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주어진다. 그러나 일반 은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오는 것이고, 특별 은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 세례(聖靈洗禮, baptism of the Holy Spirit)가 함께 부어지면서 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성령 세례가 함께 부어지는 사람이 있고, 예수를 믿을 때는 특별한 은사가 부어지지 않았지만 믿은 뒤에 성령 세례를 받을 때 방언(方言, tongues)이 터지면서 성령의 은사가 오는 사람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행전 10장을 보자.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함께 간 할례받은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을 보고 놀랐다.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기 때문이다(행 10:44-46). 세례도 받지 않았고 안수도 받지 않았는데, 말씀을 듣다가 성령이 부어져 버린 것이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해 버린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원래 유대인은 이방인과 교제하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음식법을 확대 적용하여 더러운 것과 접촉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방인과 사마리아인과 접촉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과 천사를 통해 강제로 베드로와 고넬료를 연결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상황이었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탄생했다. 그 뒤 구제 문제로 안수 집사 격인 일곱 사람을 세웠고, 사도행전 15장의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회의를 주관한 사람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다. &amp;lsquo;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amp;rsquo;이라고 쓴 바로 그 사람이다. 야고보는 할례파의 수장이었고, 할례파의 사도는 베드로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이 한 사람도 없는, 할례받은 사람만 모인 교회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니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자기를 이상한 사람이나 이단으로 취급할까 봐 해명해야 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행 11:1). 형제들의 대표는 야고보이고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할례자들이 &amp;ldquo;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amp;rdquo;고 비난했다(행 11:2-3). 할례파를 의식하는 베드로의 이런 처지는 뒤에 안디옥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할례자들이 오자 자리를 피해 버렸다(갈 2:11-12).&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베드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혈통으로 구분하지 않으신다는 보자기 환상이 세 번 있었다고 보고하고(행 11:10), 성령의 명령으로 유대인 여섯 형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갔으며,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로 자기를 청했다고 전했다(행 11:12-14).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11:15-17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부어져 성령이 말하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그들에게도 임했다. 다만 우리는 기도하다가 받았고, 그들은 말씀을 듣다가 받았다. 그러므로 말씀만 잘 들어도 방언이 터질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교단은 방언을 신령한 사람만 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이 사건은 요엘서 2장 28-29절이 유대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는 할례받은 유대인에게, 8장에서는 사마리아에, 10장에서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부어졌다. 개역개정 번역자들은 원문의 &amp;lsquo;모든 육체 위에&amp;rsquo;를 &amp;lsquo;만민에게&amp;rsquo;라고 번역했다. 원문 그대로는 아니지만 신약의 해석을 넣은 것이다. 주님께서 &amp;lsquo;모든 육체&amp;rsquo;라고 하셨을 때 그 모든 육체가 유대인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사도행전을 통해 확실해졌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방언을 통해 감별할 수 있다. 방언 말고 다른 표적도 있겠지만, 방언이 기본적으로 터졌다는 사실을 통해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복음 교단은 교회에 나오면 반드시 방언을 하게 한다. 구역장이 한 달에서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기도하여 방언이 터지게 만든다. 순복음 교회의 아주 탁월한 점이다. 장로교에서는 믿기만 하면 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말도 틀렸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런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부어지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사로잡아 혀를 잡고 말하게 하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방언 세미나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방언은 누구든지 한다. 성령이 내 영 속에 들어오시면 내 영이 생명 주는 영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난 것이고, 방언은 그 표적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방언한다. 방언을 못 하면 나를 따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분은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분이 나중에 영상을 보며 따라 하다가 방언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필자에게 사역을 받으면서 방언을 하는데 영어 방언이 터졌다. 원래 영어를 못 하는 분이었다. 성령이 쇄도하시면 우리의 의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특별한 것이 내려온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1절부터의 사건은 성령 세례이며, 그 성령 세례에는 반드시 방언이 나타났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학교에서 사영리를 읽어 주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죄인이다, 주 예수를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를 따라 &amp;ldquo;주님, 제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amp;rdquo; 하고 기도했다. 그러자 친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으니 이제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필자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가 성경을 믿을 것이냐, 네 마음을 믿을 것이냐고 물었다. 성경은 잘 몰라도 권위가 있어 보여 성경이 맞겠다고 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님을 처음 본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흰옷이 발목까지 내려왔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빛이 나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필자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그것이 필자에게 주신 사명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필자 안에 영이 너무 많아 잘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은 꿈속에서도 예수의 피를 사용할 수 있다. 예전에는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만 알았지, 그 피로 귀신을 쫓는다는 것은 몰랐다. 배우니까 알게 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게 예수님이 구원자가 맞다고 믿었다. 1년이 지나 세례를 받았고, 2년이 지나 교회에서 교사를 맡겼다. 초등부 3-4학년 교사였는데 교사가 열두 명 정도 되었다. 아침에 교사들이 모여 기도할 때 한 집사님이 필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기도했다. 다른 젊은 교사에게 물었더니 방언이라고 했다. 신령한 사람이 되면 방언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신령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을 지켜보았다. 그분은 아이를 두세 명 받으면 매년 열 명 이상을 졸업시켰다. 필자는 네 명을 받으면 두 명은 떨어지고 두 명을 간신히 졸업시켰다. 그래서 저것이다,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군대에 갔을 때 일이다. 필자는 장로교에 있었는데,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religious pluralism) 신학을 가르치던 한 교수의 직제자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입대하여 필자 밑으로 왔다. 그는 예수만 구원자가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너무 놀랐다. 그 친구의 전도를 받은 날부터 단 한 번도 다른 데를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왔기 때문이다. 감리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고, 감리교는 훌륭한 교단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필자의 사수는 매일 방언으로 기도했는데 그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제대 5개월 전부터 기도했다. &amp;ldquo;주님, 세상에 나가면 나가자마자 저에게도 성령 세례의 표적이 있기를 원합니다.&amp;rdquo;&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제대하고 교회에 나갔더니 전단지가 나왔다. 한 목사님이 염주체육관에서 집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집회에 갔더니 그 목사님이 &amp;ldquo;우리 교회는 다섯 살짜리도 방언한다&amp;rdquo;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하겠다 싶어 따라 했더니 그날 방언이 터져 버렸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따로 받을 수도 있고, 믿어서 생명이 그 안에 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신령한 사람만 하는 줄 알았는데, 몰라서 못 했던 것이다. 성경은 신령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듣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시 사도행전 11장 17절을 보자. &amp;lsquo;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amp;rsquo;이라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생명을 주셨는가? 부활하신 뒤 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을 때(요 20:22) 내주하시는 성령이 들어갔을 것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 세례가 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는 순차적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동시에도 될 수 있다. 예수를 믿을 때 바로 방언이 터질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는 선물이고, 성령이 들어오시면 선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특별 은사가 오고, 그 특별 은사의 최초의 사건은 방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내주하시는 성령은 구약과 달리 어떻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시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방언의 은사는 왜 나타났는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육체 속에 머무시던 구약의 경륜(經綸)에서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시는 경륜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시는 내주의 성령은 주로 요한복음이 말하고, 요엘서에 근거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역사는 주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 시대에도 성령이 들어오신 경우가 있었다. 여호수아나 에스겔이나 요셉 같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들어가셨다. 물론 나가실 수도 있었지만 나가지는 않으셨다. 사울 왕에게는 위에 계시다가 떠나셨다. 보통은 다 사람 위에 계셨고, 안에 들어오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안에 들어오신 경우도 다 육체 속에 들어오신 것이지 영 속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아직 구속(救贖, redemption) 사역을 완성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언제부터 영 속에 들어오셨는가? 성령이 영 속에 들어오셔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부터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3:5-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영으로 난 것은 구약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물은 회개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집어넣어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이다.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은 계셨다. 그러나 그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지는 않으셨다. 경륜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성령을 고린도전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첫 사람 아담은 생령, 곧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마지막 아담이 되신 뒤 살려 주는 영,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는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올라가신 뒤에 생명 주는 영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생명 주는 영이 들어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오순절 성령 강림 때 이것이 확실히 일어났다. 위에 부어지는 성령과,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 내주하시는 성령이 동시에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그 전에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는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그 일이 일어났다. 그 120명 가운데는 사도가 아닌 사람도 있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내 영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내가 생명을 받는다. 이것을 생명 분배라고 한다. 우리 부모가 나를 낳은 것은 육체와 육체의 생명을 분배해 준 것이다. 그러나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사람의 영은 성령으로 나야 한다. 성령으로 나면 영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육체로 태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듯이, 성령으로 나면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방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성령의 은사가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임했지만 그 은사에는 방언이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로소 오순절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생명 주는 영이 들어와 거듭나는 일과, 성령이 부어져 쇄도하여 사로잡으실 때 방언이 터지고 은사가 나타나는 일이 같이 일어나기도 하고 따로 일어나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이 부어지면 방언을 말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오순절 이후에만 나타난 방언과 축사의 은사는 왜 중요한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제 고린도전서 12장의 특별 은사를 보자. 이것은 성령이 오셔야만, 성령이 부어질 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들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고전 12:8-10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원문에 입각하여 이 은사들을 다시 구분해 보았다. 특별 은사가 이 아홉 가지만은 아니지만 핵심은 여기에 있다. 먼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일반 은사이고,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특별 은사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다. 지식의 말씀은 환상을 통해 영적 세계를 보고 &amp;ldquo;아, 이것이 무엇이다&amp;rdquo; 하고 지식으로 알아 버리는 은사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음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다. 지금 내가 안수하면 이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간다는 그런 믿음이다. 다음은 치유의 은사들이다. 치유의 은사는 사람마다 종류가 다르다. 다음은 능력들의 역사들이다. 그 종류도 많다.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독을 해독하기도 한다. 그다음에 예언, 영들 분별, 각종 방언, 방언들 통역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가운데 예언과 능력들의 역사는 구약 시대부터 있었고, 영들 분별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계시, 지혜와 지식의 말씀, 지도력, 초자연적인 힘, 엘리야와 엘리사의 병 고침과 죽은 자를 살림과 비를 그치게 하는 기적, 사울과 다윗의 왕의 직무, 담대함의 은사가 있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없었다. 구약 성도는 단 한 사람도 방언을 한 일이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추가된 것이 있다. 각종 방언과 방언들 통역이다. 방언이 없을 때는 방언을 통역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핵심이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방언 말함은 성령이 부어지실 때 항상 보편적으로 나타난 은사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특별 은사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축사(逐邪, exorcism)의 은사, 곧 귀신을 쫓는 은사다. 구약에는 귀신을 정확히 쫓았다고 말할 만한 장면이 단 한 번도 없다. 다윗도 귀신을 쫓은 것이 아니라 연주만 했다(삼상 16:23). 다윗이 사울 속에 있는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구약 시대였다. 귀신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 수가 얼마 없었고, 귀신 쫓는 은사도 없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육체로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아직 성령을 주시지 않았을 때 무엇이라 하셨는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셨다(마 10:1, 8). 그런데 병을 고치는 일은 구약 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귀신을 쫓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축사의 은사는 신약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하늘나라의 기업을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구약 시대에는 축사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가 필요 없었는가? 그때는 귀신이 별로 없었다. 숫자가 적었고 약했으므로 그 영향을 덜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는 이미 사탄의 왕국이 있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말할 때 예수님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고 하셨다(마 12:26). 또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하셨다(요 12:31). 왕국이 있었다. 그놈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까지 하늘 보좌까지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그를 쫓아 버렸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의 말씀이다(계 12:7-9).&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곧 A.D. 30년 이후에 나타난 두 가지 특별 은사는 방언의 은사와 축사의 은사다. 신약 시대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반드시 받을 필요가 있다. 필자가 일부러 방언 세미나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언이 기본이 되어야 축사의 은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마지막 시대에 성도는 어떻게 성령의 전사로 준비되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약의 은사들은 구약의 은사들을 그대로 가져오되 더 풍성해졌다. 사역의 직임을 누구든지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어 사역자가 더 늘어나게 하려고 성령 세례가 부어졌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왜 축사의 은사가 필요한가? 마지막 때에 귀신이 창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 가운데서도 무당이 나온다. 옛날에는 청소년 때 신이 내렸는데, 지금은 신이 너무 많이 내려와 초등학교 때부터 신이 들어가 신을 받고 예언을 한다. 유튜브를 보라. 마지막 때가 되니 귀신들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축사의 은사 없이 이것을 이길 수 있겠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때 우리는 방언을 통해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방언은 내 영 속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본적으로 방언을 말하고, 그다음에 회개(悔改, repentance)를 하여 내 안의 귀신을 쫓아낸 뒤 축사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가 매주 금요일마다 귀신 이야기를 하고 전투 기도를 하며 방언 세미나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전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 곧 가나안 일곱 족속을 정복했지만 우리는 악한 영들을 정복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아직 방언을 모르는 분은 필자가 1차, 2차, 3차로 진행한 방언 세미나를 보고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서 방언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은사를 붙여 주시고, 축사의 은사도 붙여 주시며, 무기도 장착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요엘서 2장 28절 이하의 말씀을 성취하시면서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나타내셨다. 모든 사람은 영이 살아나 생명을 공급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알려 주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제 마지막 때다. 귀신이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 다섯째 나팔이 불리면 무저갱이 열리고 어마어마한 영들이 올라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계 9:1-3). 그러므로 회개를 많이 해야 한다. 귀신을 쫓는 은사, 귀신을 이길 수 있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시대에도 복음을 증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성령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8일(목)&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6)]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3) 구약시대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_2026-10-07(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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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7T08:31:04+09:00</published>
		<updated>2026-10-08T00:12:53+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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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6)]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3) 구약시대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5IgqrW5qgUQ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시대 성령의 내주와 은사들의 특징을 신약시대와 비교하며 영적 세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먼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천사, 인간이라는 세 가지 영적 존재...</summary>
	<content type="html">&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아침묵상입니다.&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제목: &lt;/span&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06)]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3) 구약시대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lt;/strong&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https://youtu.be/5IgqrW5qgUQ&lt;/span&gt;&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5IgqrW5qgUQ?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lt;strong&gt;구약시대 성령의 내주와 은사들의 특징&lt;/strong&gt;을 신약시대와 비교하며 영적 세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먼저 성경이 말하는&amp;nbsp;&lt;strong&gt;하나님, 천사, 인간이라는 세 가지 영적 존재&lt;/strong&gt;의 관계를 짚어보며, 구약의 예언자 요엘을 통해 약속된&amp;nbsp;&lt;strong&gt;성령의 부어짐이 오순절 사건으로 성취&lt;/strong&gt;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본론에서는 구약시대 성령이&amp;nbsp;&lt;strong&gt;일부 특별한 인물들에게 한시적으로 임하여 지도력, 예언, 초자연적 능력 등의 은사(선물)를 주었음&lt;/strong&gt;을 사사기와 왕들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성령은&amp;nbsp;&lt;strong&gt;죄를 지으면 떠날 수 있었고 주로 육체 위에 머물거나 드물게 육체 속에 들어갔던 반면&lt;/strong&gt;, 신약시대에는&amp;nbsp;&lt;strong&gt;더 항구적이고 풍성한 은사들이 주어진다&lt;/strong&gt;는 점을 대조하며 강의를 마무리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1. 요엘은 &lt;strong&gt;누가 언제 누구에게 성령을 부으리라&lt;/strong&gt;고 예언했는가?&lt;br /&gt; 2. 오순절에 &lt;strong&gt;성령과 함께 주어진 선물&lt;/strong&gt;은 무엇으로 드러났는가?&lt;br /&gt; 3. &lt;strong&gt;성령의 은사가 몸에 임하는 과정&lt;/strong&gt;에서 회개와 정결은 왜 중요한가?&lt;br /&gt; 4. 구약의 &lt;strong&gt;사사와 왕&lt;/strong&gt;은 성령을 받아 어떤 직임과 능력을 감당했는가?&lt;br /&gt; 5. 사울에게서 &lt;strong&gt;성령이 떠난 일&lt;/strong&gt;과 &lt;strong&gt;다윗의 회개&lt;/strong&gt;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lt;br /&gt; 6. 구약에 나타난 &lt;strong&gt;은사의 종류와 신약 이후의 특징&lt;/strong&gt;은 어떻게 다른가?&lt;br /&gt; 7. &lt;strong&gt;여호수아&amp;middot;요셉&amp;middot;에스겔에게 성령이 &amp;lsquo;속에&amp;rsquo; 들어오신 일&lt;/strong&gt;은 신약의 내주와 어떻게 다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6)&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3)&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구약시대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은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28-29)&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왜냐하면 내가 영적으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면 검사를 통해 상태를 확인하듯, 영적인 일도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지 않은 채 눈앞의 현상만 좇으면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무엇이 사람을 해치는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경험은 그들 한 사람의 이야기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간다면 그들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사실 성경은 하나님과 천사와 인간, 이 세 영적 존재의 활동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는 영이다(시 103:20-21; 히 1:1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도 심령(영)을 지으셨다(슥 12:1). 그러므로 천사를 지워 버리고 하나님만 막연하게 이야기해서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특별히 사람을 해치는 악한 영들과 예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복음서의 사건을 외면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구약에 특정한 사람에게 임하던 하나님의 영은 B.C.835-830년경 요엘을 통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라고 약속되었고, 비로소 A.D.30년 오순절에 실제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 약속을 기준으로 구약 시대의 사사들과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이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같은 성령이지만 경륜적으로 볼 때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몇몇 사람 위에 내려오셨다. 그러나 떠나기도 하셨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요셉과 에스겔의 경우에는 그들 &amp;lsquo;속에&amp;rsquo; 들어가시기도 했다. 그렇다면 &lt;strong&gt;구약 시대의 성령의 내주와 신약 시대의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lt;/strong&gt;&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요엘은 누가 언제 누구에게 성령을 부으리라고 예언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의 예언을 읽을 때 먼저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 요엘서 2장 18절부터 자기 백성에게 응답하시는 분은 바로 &amp;#39;여호와&amp;#39;이시다. 그러므로 28절의 &amp;lsquo;내가&amp;rsquo;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는 여호와이시며, &amp;lsquo;내 영&amp;rsquo;은 여호와의 영이다. 그분께서 당신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원문의 뜻을 따라 직역하면,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몇 사람만 쓰시던 때를 지나서 성령의 강림을 모든 사람에게로 더 넓히시겠다고 예고하신 것이다(욜 2:18-2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럼, 누구에게 성령을 부으시는가? 자녀들, 늙은이들, 젊은이들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에게도 부으실 것이라고 하셨다(욜 2:29). 그 결과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했다. 이 목록은 남녀와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성령을 부어 주실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amp;lsquo;부어 준다&amp;rsquo;는 말씀은 몇 방울만 건네는 듯한 표현이 아니다. 물이 쏟아지듯 넉넉하게 부으시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되,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직임을 따라 그것을 감당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이 활동한 시기는 대체 언제인가?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835년에서 830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보편적인 성령강림의 성취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오순절에 성취되었다. 그때는 A.D.30년경이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약 9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자 베드로가 바로 오순절 날에 마가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성령강림의 사건을 설명할 때에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때가 &amp;lsquo;말세&amp;rsquo;라고 선포했다(행 2:16-18). 그런데 요엘서를 보면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의 성취 시점은 &amp;lsquo;그 후에&amp;rsquo;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일이 자신들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 전에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잊지 아니하시고 약속하신 때에 성취하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성령 강림의 역사를 그리스도와 별개의 것으로 떼어 놓고 읽으면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성령 강림의 약속을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취는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난 &amp;#39;여호와&amp;#39;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지,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좁혀서 불러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신약 시대에 예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이 성령을 부으셨다는 것도 알게 된다. 특히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자, 그분은 자신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사람들에게 부어 주셨다고 증언한다(행 2:33). 구약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순절에 현실이 되었다고 말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오순절에 성령과 함께 주어진 선물은 무엇으로 드러났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오순절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집을 채웠다. 이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에게 보여 한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요엘이 모든 육체 위에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한 말씀이 눈앞의 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다. 불에 실제 혀가 달렸다는 말이 아니다. 보는 사람에게 불의 모양이 혀처럼 보였다는 뜻이다(행 2:1-3). 그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때 성령께서 임하셨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가? 눈앞에 보인 불의 모양과 입으로 나오는 말이 그 표적이었다. 성령께서 오실 때 그분의 선물도 함께 온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는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권한 뒤 성령의 선물을 말한다. 그 선물이 사역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은사(恩賜, spiritual gift)라고 한다. 성령을 받는 일과 그분께서 주시는 은사를 함께 살펴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행전을 따라가 보자.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의 전도를 듣고 믿은 이들이 사도들의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았다(행 8:14-20). 이 장면은 그들이 말한 은사의 종류를 일일이 적지 않는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고(행 10:44-46), 에베소의 제자들에게는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행 19:1-6). 바울이 성령을 받은 사건도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고, 그는 뒤에 자신이 방언을 말한다고 밝혔다(고전 14:18). 필자가 이 사건들에서 주목하는 공통점은 성령께서 사람의 입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고, 고넬료의 집은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였으며, 에베소 사람들은 방언하고 예언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방언은 성령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기본적인 말의 은사다. 오순절의 &amp;lsquo;다른 언어들&amp;rsquo;이라는 표현에서 &amp;lsquo;다른&amp;rsquo;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헤테로스&amp;rsquo;는 평소 하던 말과 다른 종류의 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누군가는 성령을 받았으면서도 아직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 필자가 사역 현장에서 살펴본 바로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혀를 막는 악한 영이 많아 입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혀를 풀도록 도우며 기도하도록 한다. 방언 한 가지를 자랑하기보다 왜 성령께서 그 입을 열어 주셨는지, 그 말로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말의 선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눈이 열리면 환상을 보고, 영의 머리에서 꿈을 꾸며, 손에 능력이 나타나면 병을 고치거나 악한 영을 내보내는 사역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축사 사역 중 손끝에 칼 같은 영적 무기가 장착되고 발에서도 불이 나가는 것을 체험했다. 요엘이 예언과 꿈과 이상을 말한 것은 성령이 가져오실 선물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 모든 은사를 한 사람의 장식으로 받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하려고 받을 것인가? 선물이 주어지는 목적을 잊으면 은사만 좇다가 정작 직임은 놓치게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성령의 은사가 몸에 임하는 과정에서 회개와 정결은 왜 중요한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령께서 선물을 주셔도 그 선물이 사람에게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할 수 있다. 필자가 영적 사역 가운데 본 바로는 은사와 능력이 머리와 가슴, 손과 발에 붙어 나타난다. 어떤 은사는 머리에서 지혜와 믿음으로, 어떤 은사는 입에서 말로, 어떤 은사는 눈에서 환상을 보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손에서 불이 나거나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나고 발에서도 사역을 위한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육체에 악한 영이 가득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내려와도 제대로 붙지 못하고 떨어지는 경우를 보았다. 성령께서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받은 선물이 그 몸에서 온전히 작동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은 먼저 회개해야 한다. 죄를 자백하여 사함을 받고, 자기 속을 깨끗하게 하여 악한 영이 떠나도록 해야 한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고 정죄받지 않는다고 선포하면서도 속의 죄와 악한 영을 그대로 두면, 은사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까닭을 모른 채 또 다른 선물만 구하게 된다. 원칙을 아는 것과 실제로 정결해지는 것은 다르다. 회개하여 속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거룩해지는 과정을 끝까지 가야 한다. 필자가 영적 사역에서 본 은사의 안착은 바로 이 정결함과 연결되어 있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한때 필자는 은사를 얻으려면 얼마나 기도해야 하는지 스승에게 물었다. 하루에 일곱 시간씩 기도하면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하루 일곱 시간을 기도해 보니 그 시간을 채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나머지 시간에는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때는 회개기도문의 내용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지금은 『평생 회개기도문』으로 다섯 시간, 쓴 뿌리를 다루는 기도로 두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무엇을 회개하고 기도할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깨달은 것은 시간을 채우는 행위보다 필자 안을 정결하게 하는 실제 회개가 먼저라는 사실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은사에 따라 사역의 모양도 다르다. 필자가 지치면 조경미 사모님이 안수하여 도울 때가 있다. 사모님의 손에서 뜨거운 불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불이 필자 안에 들어와 막힌 것을 풀어 주는 경험을 했다. 필자에게는 뚫고 나가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고 사모님에게는 풀어 주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다. 같은 &amp;lsquo;불&amp;rsquo;이라고 말해도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맡기신 직임과 작용이 서로 다른 것이다. 필자는 이 차이를 겪으며 배우자의 도움도 하나님의 사역 안에 있다고 감사했다. 은사의 모양만 보고 두 사람을 똑같은 일을 하는 사역자로 묶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어떤 은사를 원한다는 말만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회개와 정결을 통해 제대로 사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마다 필요한 직임이 다르므로 은사의 종류도 다르다. 사람을 이끄는 지도력, 손에서 나타나는 치유의 능력, 영의 세계를 보는 은사도 그 목적이 따로 있다. 악한 영이 사람 속에서 사역을 가로막는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선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은사가 붙는지 떨어지는지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받은 것을 통해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구약의 사사와 왕은 성령을 받아 어떤 직임과 능력을 감당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에서는 성령께서 모든 백성에게 똑같이 임하여 은사를 나누어 주시지 않았다. 특정한 사람을 세워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돌보게 하실 때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다. 그러므로 &amp;lsquo;성령이 임했다&amp;rsquo;는 말만 읽고 지나가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 임하셨고, 그 사람이 무슨 직임을 맡았으며, 임하신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 세 가지를 함께 보아야 구약의 은사를 이해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사 옷니엘의 경우를 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자로 그를 세우셨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사사가 되어 싸움에 나갔다. 그 결과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이겼다(삿 3:9-10). 영의 임하심은 자기 안의 기쁨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백성을 이끌고 적에게 맞서는 지도력과 승리로 드러났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그는 나팔을 불렀고 아비에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삿 6:34). 히브리어 본문은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amp;lsquo;입으셨다&amp;rsquo;는 표현을 쓴다. 영께서 그를 온전히 사로잡으셔서 사람들을 부르는 지도력을 주신 것이다. 이어 그는 삼백 명과 함께 미디안 사람들에게 맞섰다(삿 7장). 자신에게 사람이 따르게 할 힘이 원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맡기신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그를 사로잡으셨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삼손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자 손에 아무것도 없이 사자를 찢었다(삿 14:6). 나중에는 나귀 턱뼈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삿 15:14-16). 옷니엘에게서 지도력과 승리를 보았다면, 삼손에게서는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본다. 사사의 직임이 같다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똑같은 선물을 주신 것은 아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왕에게 임하신 영도 보라. 사울은 왕이 되기 전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 함께 예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실제로 예언했다(삼상 10:5-13). 그가 왕의 직임을 맡을 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신 것이다. 이후 암몬의 위협을 들었을 때도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여 그의 노가 일어났다(삼상 11:6). 한 사람이 한 번 임하심을 겪었다고 다시는 임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때 다른 일을 맡기실 때 다시 능력을 주실 수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한 사람에게 여러 은사가 나타나는 경우는 흔한 모습이 아니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윗에게도 사무엘이 기름을 붓자 그날 이후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셨다(삼상 16:13). 후에 그는 여호와의 영이 자신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고백했다(삼하 23:2). 왕이 백성을 다스릴 때는 군사의 힘만 있으면 되는가? 백성이 듣는 말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이끌어야 한다. 필자는 자신의 목회에서도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의 권세가 필요함을 경험했다. 왕에게, 사사에게, 선지자에게 각각 다른 능력이 임한 까닭은 각자가 맡은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사울에게서 성령이 떠난 일과 다윗의 회개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의 성령 역사를 말할 때 반드시 보아야 할 사건이 있다. 한때 영이 크게 임했던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셨다(삼상 16:14). 예언했고 왕이 되었으니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타락한 뒤 영이 떠나시자 그는 하나님께 응답을 구해도 응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묻는 자리까지 내려갔다(삼상 28:6-7). 은사를 받았던 이력이 현재의 순종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삶이 보여 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사울에게 일어난 일을 가까이서 보았다. 사울에게도 영이 강하게 임했고 자신에게도 영이 임했는데, 사울에게서 떠나시는 일을 보았다. 그래서 밧세바와 범죄한 뒤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성령이 거두어지는 일이었다. 시편 51편에서 그는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한 뒤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다(시 51:10-11).&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한다(시 51:17). 죄를 지었는데도 왕이라는 직함과 과거의 기름부음만 붙들겠는가? 다윗은 마음을 찢고 회개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한 사람이 붙들어야 했던 길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그가 맡았던 일을 바르게 감당하기 어렵다. 은사를 받는 것만큼이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약에서는 특정 사람에게 영이 임하여 직임을 맡기셨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갈 때 성령이 떠나실 수도 있었다. 신약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이 내주와 은사의 지속성은 구약의 임하심과 다르다. 신약의 내용을 여기서 모두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번 시간은 사울과 다윗을 통해 왜 성령이 머무시도록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구약에 나타난 은사의 종류와 신약 이후의 특징은 어떻게 다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에서 영이 임하신 뒤 나타난 선물들을 실제 인물에 따라 정리해 보자. 먼저 예언과 계시다. 모세가 백성의 짐을 나누어질 장로들을 세웠을 때 영을 받은 칠십 명이 예언했다. 진영에 머문 엘닷과 메닷도 그 칠십 명에 속한 채 예언했다(민 11:16-17, 24-29). 사울도 선지자들 가운데서 예언했고, 선지자 발람과 다른 예언자들도 장래 일을 전했다. 어떤 선지자에게는 앞으로 될 일을 말하는 데서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이 들려왔다. 필자는 귀에 임하는 계시의 은사까지 이 범주에서 살핀다.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지 들었으므로, 그것을 백성 앞에 선포할 수 있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음은 지혜와 지식, 분별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자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해졌다(신 34:9). 그는 모세 뒤를 이어 백성을 이끌 지도자가 되었다. 애굽의 바로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알아보았고,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나라가 겪을 풍년과 흉년을 대비하게 했다(창 41:25-38).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재주를 받아 성막 제작의 일을 맡았다(출 31:1-5). 요셉의 꿈 해석과 브살렐의 손기술은 모습이 다르지만, 모두 맡겨진 일을 위한 지혜의 선물이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도력과 통치의 은사도 있다. 옷니엘과 기드온이 사람들을 이끌어 대적과 싸웠고, 사울과 다윗은 왕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왕에게 기름을 붓는 일도 단순한 지위 표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직무를 맡기시고 필요한 말의 권세와 능력을 주신 사건이다. 삼손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이 나타났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는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다(왕상 17:17-24; 왕하 4:32-37). 같은 &amp;lsquo;은사&amp;rsquo;라고 해도 지도력이 필요한 자리와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가 서로 다른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선지자에게 주어진 담대함도 빠뜨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알리라고 보내셨다면 권력자와 백성의 얼굴을 두려워하며 침묵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어리다고 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서 명하시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다(렘 1:6-10). 미가와 여러 선지자가 죄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도 맡겨진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이 시대에 회개를 선포할 때 담대함이 없다면 그 일을 오래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정리하면 예언과 계시, 지혜와 지식, 지도력과 왕의 기름부음, 힘과 치유와 기적, 죄를 책망하는 담대함이 구약에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에게 그 직임에 맞는 능력을 주셨고, 한 사람에게 대개 한 가지 또는 몇 가지를 맡기셨다. 오순절 이후에는 이 선물들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구약의 은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약의 성도에게는 성령의 내주로 인한 새로운 역사가 더해진다. 고린도전서 12장이 여러 은사를 나누어 말하는 것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전 12:8-10). 바울에게서도 아홉 가지 은사가 모두 나타났다. 신약에서는 한 사람에게 여러 은사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구약보다 넓어졌다. 그 차이의 핵심은 다음 시간에 더 살피겠지만, 지금은 선물이 언제나 직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여호수아&amp;middot;요셉&amp;middot;에스겔에게 성령이 &amp;lsquo;속에&amp;rsquo; 들어오신 일은 신약의 내주와 어떻게 다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의 성령은 사람 위에만 계셨는가? 대부분은 위에 임하셨지만, &amp;lsquo;그 안에&amp;rsquo; 영이 있다고 말하는 사례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후계자를 세우라고 하실 때 여호수아를 가리켜 말씀하신 표현을 보라. 여호수아 안에 영이 머무신다고 하셨다(민 27:18). 이 말씀을 듣고 구약에도 신약과 꼭 같은 거듭남의 내주가 있었다고 바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과 이스라엘의 지도라는 무거운 직임을 감당하도록 영께서 그의 육체 안에까지 머무신 사건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민 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그에게 특별히 이런 임하심이 필요했는가? 모세의 뒤를 이어 온 회중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앞에 세우고 위탁하라고 하셨다(민 27:19-23). 모세가 안수하자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의 말을 들었다(신 34:9). 그 안에 영이 머무신다는 말씀과, 지혜를 받아 백성의 복종을 이끌어 낸 일이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직접 &amp;lsquo;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amp;rsquo;라고 말씀하신 이 사례는, 구약에서도 사람 속에 임하심을 말씀한 중요한 본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른 두 사례는 누가 &amp;lsquo;안에 있다&amp;rsquo;고 말했는지도 구별해야 한다. 바로는 요셉을 보며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신하들에게 말했다(창 41:38). 그 말의 원문은 요셉 속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판단을 말한 이는 바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 관해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신 경우와 같은 방식으로 인용할 수 없다. 그래도 요셉에게 주어진 꿈 해석과 지혜가 그 나라의 흉년을 대비하고 가족을 살리는 직임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에스겔은 자신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임하여 자신을 일으켜 세우셨다고 기록했다(겔 2:1-2). 개역개정판은 &amp;lsquo;내게 임하사&amp;rsquo;라고 번역하지만, 그 구절의 원문은 &amp;lsquo;내게 들어와서&amp;rsquo;라는 움직임을 담고 있다. 에스겔 3장 24절에서도 영이 그를 일으켜 세우시는 장면이 다시 나온다. 한편 에스겔 11장 5절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다고 말한다. &amp;lsquo;위에 임하심&amp;rsquo;과 &amp;lsquo;안에 들어오심&amp;rsquo;을 함께 살펴야 한다. 여호수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요셉을 본 바로의 판단, 에스겔 자신의 체험을 모두 한 문장으로 합쳐 버리면 세 본문의 차이를 놓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겔 2: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면 구약의 &amp;lsquo;속에&amp;rsquo;와 신약의 내주는 어떻게 다른가? 그 영이 어디에, 무엇을 위하여 들어오셨느냐가 핵심이다. 구약의 사례에서는 하나님께서 지도와 예언의 직임을 맡기시려고 사람의 육체 안에까지 임하셨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 말하는 성령의 내주는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 영과 연합하시는 일이다(요 14:16-17; 고전 6:17). 사람 위나 육체 안에 임하여 은사를 주시는 것과, 사람의 영 안에 생명의 영으로 거하시는 것을 같은 뜻으로 합쳐서는 안 된다. 구약의 특별한 세 사례를 살핀 까닭도 신약의 성도가 받은 이 변화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은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시겠다고 전했다. 그 약속에 이르기 전 구약의 사사와 왕과 선지자에게 일어난 일을 돌아보면, 성령의 은사가 언제나 맡겨진 직임과 관계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옷니엘은 백성을 이끌어 싸웠고, 기드온은 나팔을 불러 사람을 모았으며, 삼손은 강한 힘으로 싸웠다. 사울은 예언했고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에게서 영이 떠나신 일은 과거에 받은 능력만 믿고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경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에도 여호수아와 요셉과 에스겔처럼 영이 사람 속에 계시거나 들어오신 것으로 설명되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임하심은 특정 사명을 위한 것이었고, 필자는 이를 오순절 이후 성령이 사람의 영과 연합하시는 내주와 구별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들인가? 구약의 은사들이 끊어지지 않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주시는 더 큰 선물도 있다. 그 신약의 특징은 이어지는 시간에 살펴볼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금 우리가 붙들 일은 분명하다. 주신 은사를 자랑하기 전에 죄를 회개하여 정결해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임을 확인하여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성령의 선물을 사모하되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장식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주시는 지혜와 말과 능력을 받아 사람들을 섬기고, 끝까지 그 직임을 감당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7일(수)&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5)]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_2026-10-06(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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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6T09:17:31+09:00</published>
		<updated>2026-10-06T22:14:54+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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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5)]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Px32aRzuO6A [설교요약] 본 설교는 구약의 요엘서와 민수기 속 성령 강림 사건을 바탕으로, 성령의 은사와 구원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쾌하게 해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개인의 신비적 체험이나 과시용 수단이 아...</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05)]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_&lt;/strong&gt;&lt;/span&gt;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Px32aRzuO6A&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Px32aRzuO6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요약]&lt;/strong&gt;&lt;/span&gt;&lt;/p&gt; &lt;p&gt;본 설교는 구약의 &lt;strong&gt;요엘서와 민수기 속 성령 강림 사건&lt;/strong&gt;을 바탕으로, 성령의 은사와 구원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쾌하게 해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개인의 신비적 체험이나 과시용 수단이 아니라, &lt;strong&gt;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고 직무를 감당하기 위한 목적&lt;/strong&gt;으로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또한,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 시대에는 &lt;strong&gt;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보편성&lt;/strong&gt;을 지니지만, 영적 성숙을 이끄는 &amp;#39;내주하시는 성령&amp;#39;과 사역을 위한 &amp;#39;외적 은사&amp;#39;를 바르게 분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는 거짓 영과 무분별한 은사 추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lt;strong&gt;철저한 회개와 겸손한 태도로 공동체에 헌신하는 참된 신앙의 길&lt;/strong&gt;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왜 &lt;strong&gt;요엘의 성령 약속과 오순절&lt;/strong&gt;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가?&lt;br /&gt; 2. &lt;strong&gt;모세와 장로들, 엘닷과 메닷의 사건&lt;/strong&gt;은 성령의 임하심에 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lt;br /&gt; 3. 요엘의 약속이 &lt;strong&gt;오순절&lt;/strong&gt;에 이루어지면서 누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lt;br /&gt; 4. &lt;strong&gt;직임을 위한 성령의 임하심&lt;/strong&gt;과 &lt;strong&gt;거듭남을 위한 성령의 내주&lt;/strong&gt;는 어떻게 다른가?&lt;br /&gt; 5. 구약과 신약에서 &lt;strong&gt;성령의 은사와 그 지속성&lt;/strong&gt;은 어떻게 달라지는가?&lt;br /&gt; 6. &lt;strong&gt;은사&lt;/strong&gt;가 &lt;strong&gt;인격의 성숙&lt;/strong&gt;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분별하고 지도해야 하는가?&lt;br /&gt; 7. 성도는 &lt;strong&gt;어떤 목적과 자세로 은사&lt;/strong&gt;를 구하고 &lt;strong&gt;공동체를 위해 사용&lt;/strong&gt;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5)&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욜 2:28-29)&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를 살피는 두 번째 시간이다. B.C.835-830년경 요엘이 예언한 성령 강림(聖靈降臨)은 약 900년이 지난 후 A.D.30년 오순절날에 마가락방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이때는 과연 누구에게 성령이 부어지게 되었으며,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는가? 그리고 성령 받은 후에 성령의 은사(恩賜, spiritual gift)가 나타날 경우 사람은 곧 신령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가? 이런 질문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성령을 사모하면서도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교회를 어지럽힐 수가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은사를 올바르게 감당하는 일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와, 사람 위에 임하여 맡겨진 직임(職任)을 수행하게 하시는 능력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임함으로 사람들이 예언과 꿈과 환상을 말하며, 공동체를 섬기도록 능력이 부어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예언을 하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요엘의 약속이 오순절에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무엇을 분별하고 어떻게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왜 요엘의 성령 약속과 오순절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왜 읽은가? 그것은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레위기 23장의 절기만 보더라도 절기를 해석하려 할 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였고, 오순절 이후 탄생한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스라엘 중심으로만 읽으려 하면 절기의 성취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5:3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먼저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 가운데 봄철 절기인 유월절과 무교절과 첫 이삭을 드리는 초실절은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유월절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죄없으신 그리스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절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요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강림 예언이다. 그리고 가을에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다(레 23장). 일곱 절기를 일곱 등잔이 달린 등대에 비유하면, 가운데 등잔에 오순절이 놓이고 그 양쪽로 세 절기씩 있다. 그렇다면 가운데에 놓인 오순절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는 절기다. 절기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밝히 드러난 것이다(행 2:33).&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어떻게 오순절 절기가 성취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날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그러자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1-4).&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이때 베드로는 그 일이 사람들이 술 취한 것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때가 제삼시, 곧 아침 아홉 시였기 때문이다(행 2:15).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하지만, 성령 강림은 그날 아침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났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뒤, 그를 믿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넓어지는 전환을 보여 준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때 주님을 따르던 약 120명의 성도들은 함께 모여 오직 기도하며 회개하면서 약속을 기다렸다(행 1:12-14). 그러다가 오순절에 그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을 단순히 신비한 현상 하나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확장되는 시작이며,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능력을 입히시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그 은사를 누구를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모세와 장로들, 엘닷과 메닷의 사건은 성령의 임하심에 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요엘 2:28~29절에 예언된 요엘의 약속을 이해하려면 먼저 민수기 11장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짐을 홀로 지던 모세는 그 책임이 너무 무겁다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 칠십 명을 모아 회막 앞에 서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모세에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여 백성의 짐을 함께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민 11:14-17). 왜 영을 부어 주셨는가? 지도자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직임을 주실 때 그 일을 감당할 능력도 주시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장로들을 그들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웠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계속되지 않았다(민 11:24-25). 여기서 은사가 나타난 목적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거나 날마다 예언하며 사람을 모으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백성의 짐을 함께 맡기셨다는 표지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장로들 중에 엘닷과 메닷은 회막에 나오지 않고 진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도 영이 임하여 진에서 예언했다(민 11:26). 한 소년이 달려와 그 사실을 모세에게 알렸고, 모세를 섬기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들을 말리라고 청원했다. 정해진 자리에 나오지 않았는데 진영에서 예언하니 여호수아의 눈에는 질서에 어긋나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권위가 흔들린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더 많은 백성에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민 11:27-2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민 11:27-29&amp;nbsp;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에는 &lt;strong&gt;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아서 일하기를 바라는 모세의 마음&lt;/strong&gt;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만 백성의 모든 일을 감당하게 두지 않으시고 장로들에게 영을 주셨다면, 언젠가 더 많은 사람에게도 주셔야 하지지 않겠는가? 모세의 말은 곧 뒤에 요엘이 전할 약속을 생각하게 한다. 요엘이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835년에서 830년 무렵으로 추정되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이런 소원을 밝힌 때는 그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445년 무렵이다. 먼저 모세가 모든 백성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원했고, 훗날 요엘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 날을 선포한 것이다. 민수기의 사건은 직임과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보여 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지도자가 드물었다. 지도자가 없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남유다가 여호사밧 이후 요아스 무렵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와 바알 신앙으로 어지러워진 역사를 생각해 보라. 소수의 사람에게만 영의 역사가 집중되는 상태로는 공동체의 위기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단지 개인이 신비한 일을 체험한다는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분의 일을 맡고 감당하게 하신다는 소식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도 엘닷과 메닷을 막지 않은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라. 모세는 회막으로 나온 장로들이 자기 곁에서만 예언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영을 주신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예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차라리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바란 것은 자기에게 집중된 권한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다. 백성 모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이 여기에 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요엘의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면서 누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만민에게(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시겠다고 전했다.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된다. 남종과 여종도 그 약속에서 빠지지 않는다(욜 2:28-29).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남자냐 여자냐, 높은 지위에 있느냐 낮은 자리에 있느냐가 성령을 받는 경계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순절의 새로운 변화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베드로는 오순절에 나타난 일을 바로 이 요엘의 말씀으로 설명했다(행 2:16-18). 그날 한곳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는 모습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고 놀랐다(행 2:5-12). 오순절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방언이 나타났다. 방언은 성령을 받고 그 충만함을 경험하는 데 기본적으로 열려지는 은사다. 하지만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그 사람이 어떤 직임까지 온전히 감당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요엘의 약속은 &amp;quot;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amp;quot;는 선언으로 이어진다(욜 2:32; 행 2:21). 구원의 길을 특정 민족이나 소수의 예정된 사람에게만 묶어 놓을 수 없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성령의 약속이 당시 듣던 이들과 그 자녀들, 먼 데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선포했다(행 2:38-39). 요엘이 예언한 성령의 확대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열리는 구원의 길은 함께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여기서&lt;strong&gt; 조심해야 할 것&lt;/strong&gt;이 있다. &lt;strong&gt;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는 말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저마다 교회를 떠나 자기 뜻대로 예언하고 사역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lt;/strong&gt;. 예언과 꿈과 환상을 누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요엘은 많은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새 시대를 알렸지만, 그 은사의 목적이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이라는 사실은 똑같다. 문은 넓게 열렸지만, 받은 것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분별과 책임이 요구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여기서 &amp;ldquo;누구든지&amp;rdquo;라는 말을 듣고 두 방향으로 잘못 나아갈 수 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특정 지도자에게만 묶어 두려 한다. 다른 쪽에서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누구나 준비와 분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예언을 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둘 다 요엘의 약속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이 성령을 사모하되, 실제 은사를 사용하며 직임을 맡을 때에는 그 사람과 공동체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은사를 받은 사실보다 그 은사를 어디에 쓰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오늘 대한민국 교회에도 이 약속이 절실하다. 한 사람이 나라의 우상숭배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한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강이 되듯이 여러 사람이 함께 회개해야 한다. 필자는 이 시대에 회개와 천국 복음이 한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민족 가운데 증거되기를 원한다. 지금 이 나라가 영적으로 갈림길에 놓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깨우셔서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하게 하시기를 구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직임을 위한 성령의 임하심과 거듭남을 위한 성령의 내주는 어떻게 다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성령의 역사에는 두 방면&lt;/strong&gt;이 있다. &lt;strong&gt;하나는 구원과 관련된 측면&lt;/strong&gt;이 있고, &lt;strong&gt;또 하나는 직임을 위한 측면&lt;/strong&gt;이 있다. 즉 사람의 구원과 관련된 성령의 역사는 성령께서 사람 안에 들어가심으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 위에 내려오심으로&amp;nbsp;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맡겨 주신 직무를 수행할 은사와 능력을 얻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요엘서의 예언은 자녀들의 장래 일 말함과 꿈과 이상,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심을 앞세우므로 특히 직임을 위한 외적 역사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읽을 때에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와 새롭게 하심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렘31:31-34, 겔 36:26-27).&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두 방면이 있는 것이다. 먼저, 거듭남 곧 중생(重生, regeneration)은 성령께서 사람의 영&amp;nbsp;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연결된다. 반면 위에 부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 필요한 도구와 힘을 주는 일이다. 필자는 복음서를 함께 읽을 때 요한복음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위에서 능력을 주시는 역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본다. 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사람 안의 생명의 역사와 밖으로 나타나는 직임의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성령의 내적인 역사와 성령의 외적인 역사의 두 측면을 혼동하면 어떻게 되는가? 첫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그 사역자가 성숙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환상을 보거나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그 영혼의 성품이 성숙한 자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그 사람에게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다고 속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성품이 바뀌는 것과, 밖으로 보여지는 능력을 받아 특정 일을 수행하는 일은 함께 필요한 사역이기는 하지만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을 섞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 사역만으로 그 사람이 온전한 성령의 사역자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고 성령의 외적인 은사와 능력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귀신을 내보내는 직임을 맡은 사역자인데, 그가 축사의 능력을 받지도 않고 그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고 자신이 공격을 받아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성령의 은사는 매우 강한데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성품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amp;nbsp;그 사람을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필자가 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사람의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용하는 사역자가 되려면 먼저 회개를 통해 사람의 안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은사와 능력을 받아 사용하면 그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타락하여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은사를 사모하는 자인데 계속해 죄를 붙잡고 있다가 은사를 받으면 그는 반드시 내면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로 인하여 그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비참해질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가 성령의 사역자가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은 &lt;strong&gt;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신체의 네 부위에 달라붙는다&lt;/strong&gt;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은사가 머리와 가슴에 달라붙고, 그리고 손과 발에 달라붙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자기 안에 악한 영이 많이 있으면, 은사가 내려오다가 사람의 육체에 안착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은사는 사람의 육체에 내려올 때 스며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죄가 많은 상태에서는 은사가 들어갈 공간이 없기 때문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은사자는 쉽게 타락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은&amp;nbsp; 성령의 은사보다도 악한 영이 주는 은사에 매료되어 악한 영의 은사를 따라가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사역자가 되기 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회개하는 것&lt;/strong&gt;이다. 이때 회개하는 목적은 내가 남보다 대단한 은사를 얻어 자랑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는 죄를 끊고 정결해져서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먼저는 내주를 통한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것과 동시에 위에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의 방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거듭남과 그리고 사람의 성격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먼저 회개한 다음에 직임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죄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져서 성령의 내주를 통한 거듭남을 겪어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를 들어 여기에 영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악한 영을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떤 이에게는 보는 은사가 탁월하지만, 그에게 축사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 받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은사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양만 보고 무리하게 축사 사역에 내몰면 그 은사가 오히려 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사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은사가 더 강해졌는데 그것이 올무가 되어 타락의 길로 접어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의 필요와 맞물려 구하고 받는 것이 중요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역자는 자신이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설교 준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다.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그 시에 말씀을 주실 수 있다. 그러하면 성령께서 그 이전에 먼저 말씀을 주실 수는 없는가? 있다. 그러나 말씀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일반 은사들, 곧 지성과 감성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 중에서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여 전하라고 특별히 세워진 자이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와 자기 생각을 혼동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때그때 떠오러는 성령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예언일 뿐이다. 설교에는 예언적인 부분이 들어갈 수 있지만 예언이 설교의 전부일 수는 없다.&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의 은사와 그 지속성은 어떻게 달라지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사람 위에 내려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구약 시대에는 한 마디로 성령께서 아직 사람 속에 들어와서 연합하여 한 영이 되는 일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구약 시대에 성령은 대부분 외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 위에 내려가셔서 그로 하여금 왕과 선지자와 사사, 특별히 세우신 지도자의 직임을 감당하게 하셨다. 이때 쓰임받았던 사사로는 옷니엘과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 등이 있다. 그리고 왕으로는 사울과 다윗이 있었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여러 장로 등도 성령을 받아 사역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영이 임한 목적은 조금씩 달랐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한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또한 구약 시대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극히 소수였으며, 공동체 전체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예를 들어 보자. 구약 시대 사울에게도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여 예언을 하였다. 사무엘이 먼저 그것을 알려 주었고, 사울이 선지자 무리와 함께 예언할 때 사람들은 그가 어찌 예언할 수 있는가 하면서 매우 놀라워했다(삼상 10:5-13).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왕으로 쓰실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사건이 사울의 인격과 이후의 순종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어 그가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을 때 그가 보낸 사자들에게도 예언이 나타났고, 사울 자신에게도 다시 예언이 나타났다(삼상 19:20-24). 그러나 이렇듯 누구에게 은사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달라진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삼상 10:5-6&amp;nbsp;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amp;nbsp;&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가 세운 70명의 장로들도 예언을 하다가 그쳤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령의 은사가 특정 시기에 임하고 또한 멈추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께서 사람 안에 내주하기 시작하면서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역사도 함께 나타났다. 이것 때문에 은사가 한 번 사람에게 임하면 거의 대부분 소멸되지 않고 지속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받은 은사는 그에 따른 매우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은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언제나 올바르게 쓰임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사역자가 자신의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혀 타락을 한다고 할지라도 은사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리고 구약 시대에는 한 사람이 필요에 따라 특정한 능력을 받았지만 그가 그 일을 마치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성령의 역사가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민수기 11장에서 모세가 선택한 장로들에게서 예언이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사례가 좋은 예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나타난 은사와 능력은 그 사람이 행할 직무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은사가 나타났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도 있지만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한 사람에게 여러 은사를 부어 주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처럼 비록 사역자의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성령의 은사가 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어떤 은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가 인격이 성숙한 단계에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인격과 성품은 내적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의 지속성을 가지고, 그 사역자가 인격적으로 매우 성숙한 것이 아닌가 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성령을 받았던 사역자의 숫자와 대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요엘 선지자는 어느 때에 부어질 성령의 은사는 아들과 딸, 늙은이와 젊은이, 남종과 여종을 구분하지 않을 것임을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도 특별한 소수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두고 자신이 무슨 특별히 신령한 사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동일한 직임을 위해 동일한 특별한 은사를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필요와 맡기실 일을 아시고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런 점에서 자신에게 공동체의 필요를 따라 성령의 은사가 부어졌으면 그것으로 공동체를 잘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직임은 수행하지 않으면서 &amp;ldquo;나도 이런 은사와 능력이 있다&amp;rdquo;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은사와 능력이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잘못 파악하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받은 은사와 능력을 돈벌이나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돌릴 위험이 커진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교회와 공동체에 보내셨고, 또한 이 교회와 공동체에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주셨는지를 겸손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공동체를 잘 섬길 수 있어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은사가 인격의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분별하고 지도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은사가 뛰어난 사람이 곧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필자는 예언을 잘하고 환상을 본다는 이유로 한 남자 목회자와 여자 목회자가 함께 교회를 시작한 사례를 지켜 보았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여자 목회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자신의 예언이 맞지 않으면 교회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국 그 교회는 공중분해되었다. 환상과 예언이 그 사역자에게 나타났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악한 영이 주신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목회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은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채 사용하면 공동체 전체가 흔들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까닭을 개인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다는 말씀하고 있음을 본다(고전 12:7).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능력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의 은사자들은 항상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amp;quot;내가 받은 이 은사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며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amp;quot; &amp;quot;내가 받은 은사가 약한 자를 살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것인가?&amp;quot; 만약 그렇지 않고 어떤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려고 한다는 그것은 은사를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은사자는 자신의 은사가 사용되는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동탄의 목회 초기에 예언하는 사역자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말이 맞는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워낙 영적 지식이 없었고 그 방면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그 사역자의 예언은 약 95퍼센트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예언을 받으려고 쫓아다녔고 또한 돈을 바쳤다. 어떤 이는 자신이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나이 일흔이 되도록 목회자로서의 준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잘못된 예언을 분별하지 못하면 세월과 물질을 낭비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을 놓쳐버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묻고 돈을 바치며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는 일은 대체 무슨 일인가? 필자는 이런 모습을 보며 무당에게 묻고 복채를 주는 일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은사가 실제로 조금은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역자가 과연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그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느 공동체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은사를 남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예언을 한느 사역자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 제대로 된 예언 사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역자가 하는 말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한때 필자도 신사도 운동과 빈야드 운동에 속한, 많이 알려진 예언 사역자를 만나 본 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길게 예언하던 그 사역자가 필자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예언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건네주는 시기였는데, 집에 와서 들어 보니 테이프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사역자의 음성이 녹음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러 경험을 거치고 말씀과 은사에 대해 공부를 한 끝에, 예언이 얼마나 잘못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은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제대로 된 지도가 있어야 한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하자 귀신들이 나가고 병든 사람들이 나았으며 남녀가 세례를 받았다(행 8:5-12).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한 뒤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8:14-17). 이것은 사마리아의 새 신자들이 사도들로부터 성령을 받아 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으며, 또한 사마리아 교회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끊어진 채 있는 교회가 되지 않고, 사도들의 지도를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8:16 -17&amp;nbsp;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amp;nbsp;&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이 장면을 보며 은사에도 바른 지도와 계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 빌립이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떠나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기 때문이다. 다만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그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피고 잘못 사용할 때 그것을 바로잡아 줄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필자의 스승은 자신을 통해 전해진 은사를 누군가 잘못 사용할 때 주님께 구하여 그 은사가 닫히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필자가 들은 사역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을 통해 은사를 받고 지도를 받는 유익과, 혼자 능력을 좇다가 통제 없이 타락할 위험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오늘날에도 은사만 보고 따라갔다가 사역자의 거친 성품과 삶 때문에 실망한 사람이 적지 않다. 반대로 인격은 훌륭해 보이지만 고통받는 사람의 문제를 실제로 돕는 능력이 전혀 없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는 성숙한 인격과 직임을 감당할 은사가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신사도나 빈야드라는 이름, 화려한 예언이나 영적 분위기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사람의 삶과 은사의 열매, 공동체 안의 책임을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성도는 어떤 목적과 자세로 은사를 구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은사를 구하는가? 자기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인가? 먼저 일반적으로 주신 재능과 은사로 공동체를 섬길 수 있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직무가 주어졌다면 그 일에 맞는 은사를 구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 필자가 살피기 어려운 영역을 부목회자가 살피도록 영안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그 은사는 개인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에 쓰이도록 주어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회개와 천국 복음 전파는 이 시대에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주실 때에도 표적과 기적으로 사람을 모으셨다.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러 왔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와 능력도 보이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 회개하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 회개 없이 능력만 좇으면 은사가 드러나도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사람은 준비되지 않는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성령의 내적인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순간순간 들려주시는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어도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소욕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갈 5:16-17). 탐욕과 자기 자랑을 붙들고 있으면서 더 큰 은사만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다. 인격의 성숙은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는 자리에서 자라기 때문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 역시 주님 앞에서 인격이 성숙하고, 맡겨진 일을 감당할 은사도 합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영적 세계를 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넉넉하지 않다. 강한 은사를 얻었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돈벌이와 명예의 수단으로 삼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 그 결말이 얼마나 두려운지 영적 체험 가운데 살펴보았다. 생명책의 이름까지 지워질 수 있음을 보았기에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기 뜻대로 휘두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동체를 떠나 독립하는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도받을 것은 지도받고, 잘못 사용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직분을 맡았다가 교만하여 무너지면 그동안의 수고가 허사가 될 수 있다. &amp;ldquo;주님, 이 몸을 공동체의 필요에 드리겠습니다. 주신 은사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습니다.&amp;rdquo; 이런 마음으로 끝까지 섬기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엘의 성령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며 가져온 변화와, 그 은사를 감당하는 길을 살펴보았다. 모세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받기를 원했고, 요엘은 만민에게 영을 부어 주실 날을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신 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 약속이 실제 역사 가운데 나타났다. 이제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몇 사람의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직임을 위해 공동체 안에서 쓰여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일과, 위에서 능력을 주셔서 직무를 감당하게 하시는 일은 함께 살펴야 한다. 은사가 인격의 성숙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계속 회개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공부해야 하며, 예언을 받는 사람도 그 말을 성경과 삶의 열매로 분별해야 한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공동체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죄를 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를 모두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지도와 권면을 받아들이고, 받은 직임을 끝까지 겸손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6일(화)&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요엘서와 오순절의 성령강림 인포그래픽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2dcd805e8e48360fbc0e9b1bc25257f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c1ff0539eb8e40f2f67b6634061298d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bce5495ea8409dcd3e72bd10f98e009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57e43467fa5372068bad58bd563b82f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7fb7ef5d754b8275101b9ed3d92ff95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3de554bf6cab17168aac852328d36fe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04eaf5586063a77af9dc28cff2724ce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cc743eaffc09821412be3093d9aeb93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9d0c9a247847724dff5d8725dda1f09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ed9105f3f26a02a8812929c97c914f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65e92bb371fcaff52c178e26829b49e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17ac40eb6daf3fc93d0c0af85996c46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524ea705aa598f6f172603677929426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35276952967f798c3833f76422aa668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0b45012ae935a7b8d657c19ea8b5221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Spiritual_Gifts_and_Character_Maturity.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e835a93193f5917ef46dae322fcf1278.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요엘서_예표와_오순절_성령강림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8ec4d85c91b42e3290b3185eaa49398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요엘서_예언과_오순절_성령강림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f2e0be4971e3fe2bbf35b6dddb43b6d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e103de1701e89e3dba73b57bd0ac766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a3e4da954953d41510de50fc8a7728b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9f2144f013af1c80831ef0a7d52e1a7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5bf5e166f6904b7e80693c32b15bce0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a32ad4872df44d144ad09055a264c0d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5/293/10a5e2ef474862f5c4173b265f43561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5) 요엘서(02)] 성령_강림의_청사진.pdf_7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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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역자론(21)]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5)(계2:10)_2026-10-05(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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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5T22:51:11+09:00</published>
		<updated>2026-10-06T09:05:00+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역자론(21)]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5)(계2: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srd53Q3PBAg [설교핵심] 이 설교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의 종류와 의미를 설명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획득하기 어렵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충성, 의, 승리, 인내의 면류관을 거쳐 마지...</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사역자론(21)]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5)(계2:1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srd53Q3PBAg&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srd53Q3PBAg?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의 종류와 의미&lt;/strong&gt;를 설명하며, 그중에서도&amp;nbsp;&lt;strong&gt;가장 획득하기 어렵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lt;/strong&gt;이라고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충성, 의, 승리, 인내의 면류관을 거쳐 마지막으로&amp;nbsp;&lt;strong&gt;순교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사명을 완수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lt;/strong&gt;의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또한, 평신도라 할지라도&amp;nbsp;&lt;strong&gt;가정과 주의 종, 그리고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김으로써 섬김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lt;/strong&gt;는 실천적 메시지를 제시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성도들이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amp;nbsp;&lt;strong&gt;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섬김의 자세를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것&lt;/strong&gt;입니다.&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lt;strong&gt;충성&amp;middot;의&amp;middot;승리&amp;middot;인내의 면류관&lt;/strong&gt;은 각각 어떤 사역자에게 주어지는가?&lt;br /&gt; 2. 보리와 벼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경험은 &lt;strong&gt;인내의 면류관&lt;/strong&gt;을 어떻게 설명하는가?&lt;br /&gt; 3.&lt;strong&gt; 생명의 면류관&lt;/strong&gt;은 왜 가장 받기 어렵고,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가?&lt;br /&gt; 4. 하나님은 왜 &lt;strong&gt;세례 요한과 스데반&lt;/strong&gt; 같은 이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는가?&lt;br /&gt; 5. 실제로 순교하지 않아도 목&lt;strong&gt;숨을 내놓을 각오와 죽음의 위기를 겪은 사람&lt;/strong&gt;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가?&lt;br /&gt; 6.&lt;strong&gt;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lt;/strong&gt;을 따라 사역자는 환난과 영적 공격을 어떻게 견디며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가?&lt;br /&gt; 7.&lt;strong&gt; 평신도&lt;/strong&gt;는 가정과 주의 종과 교회를 어떻게 섬겨 &lt;strong&gt;섬김의 면류관&lt;/strong&gt;을 받을 수 있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사역자론(21)&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5)&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계 2:10)&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은 사역자론 스물한 번째 시간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을 살피는 마지막 시간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마지막에 주님께 받는 면류관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믿고 맡길 만한 종으로 기뻐하시며, 끝까지 걸어온 길을 기억하신 결과가 면류관으로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면류관은 한 번 잘했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다가 힘들어지자 그만두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賞)도 아니다. 변함없이 맡은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사람에게 주님이 친히 씌워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어떤 일을 맡을지만 묻지 말고, 끝에 가서 주님이 어떤 종으로 인정하실지를 물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에서 받을 상의 한 종류인 면류관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그중에 충성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인내의 면류관, 이렇게 4개의 면류관을 살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amp;#39;생명의 면류관&amp;#39;이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천국의 면류관에는 이 다섯 가지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이번 설교에서 특별히 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께 드릴 각오로 사명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이다. 그리고 그 길 앞에서 평신도가 자기 자리에서 얻을 섬김의 면류관도 함께 살피려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다섯 면류관이 드러내는 사역자의 모습과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충성&amp;middot;의&amp;middot;승리&amp;middot;인내의 면류관은 각각 어떤 사역자에게 주어지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하나님이 사역자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을 상으로서 면류관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는 충성의 면류관&lt;/strong&gt;이 있다. 충성(忠誠, faithfulness)은 변함없이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일을 맡기셨을 때 오늘도 그 자리에 있고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사람,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맡은 일을 감당할 사람이 충성된 종이다. 눈앞에서만 잘하는 모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역의 시작이 화려한가보다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주님이 종을 자랑하시고 그 종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것은 그의 삶과 일이 그만큼 한결같았다는 말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는 의의 면류관&lt;/strong&gt;이 있다(딤후 4:8). 의(義, righteousness)는 사람 앞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과 관계된다. 목회자 앞에서는 훌륭하게 행동하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주의 종이 보든 보지 않든, 다른 성도가 지켜보든 보지 않든, 주님 앞에서 같은 태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칭찬받을 자리에만 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상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받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다. 그 면류관을 주시는 분은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딤후 4:7-8). 사람의 눈은 겉에 드러난 성과만 볼 수 있어도 주님의 판단은 다르다. 그러므로 의의 면류관을 생각하는 사역자는 겉으로 보이는 사역과 실제 삶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는 승리의 면류관&lt;/strong&gt;이 있다. 맡겨진 사명(使命, mission)을 조금 수행하다가 어렵다고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 사역에는 영적 싸움도 들어 있다. 악한 영은 두려움을 주고 사건을 일으키며 사역자를 괴롭힐 수 있다. 그때 사역자는 두려움에 붙들리지 말고 자신이 주님의 소유임을 붙잡아야 한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계 1:18). 악한 영이 공격한다고 내 생명의 주권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이 믿음으로 싸움을 견디며 맡겨진 일을 끝마쳐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넷째는 인내의 면류관&lt;/strong&gt;이 있다. 인내(忍耐, perseverance)는 고난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다. 비바람과 추위, 뜨거운 햇볕이 실제로 닥쳐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직분을 받기까지 오래 준비했고, 직분을 감당하면서도 고통을 겪었지만, 주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며 그만두지 않은 사람을 주님이 기억하신다. 그 사람은 감사하며 감당할 힘과 믿음과 능력을 구했고 끝내 견뎠다. 모든 성도가 천국에 가면 자동으로 같은 면류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충성하고 의롭게 살며 사명을 완수하고 견딘 길을 주님께서 아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리고 다섯째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는데, 이것은 이번 시간에 함께 나눌 면류관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보리와 벼가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경험은 인내의 면류관을 어떻게 설명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보리를 심던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늦가을이나 초겨울 쯤에 보리씨를 논에 뿌린다. 때로는 그때 눈이 올 때도 있었다.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고 씨를 뿌린 뒤 두엄을 주고 흙으로 덮었다. 씨가 싹트면 어린 보리는 그 연한 잎을 내민 채 겨울을 맞았다. 봄이 되어야 처음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니다. 늦가을에 싹이 난 상태로 눈을 맞고 추위를 지나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눈이 쌓인 밭을 볼 때마다 어린 보리가 다 죽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렇게 연한 순이 어떻게 추위를 견딜 수 있느냐고. 아버지는 추위를 겪은 보리라야 실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를 다섯 차례쯤 겪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어린 마음에는 차가운 눈을 피하는 편이 보리에게 좋을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추위를 견디는 과정을 열매와 연결하여 가르쳐 주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고 봄철이 되었을 때 추운 겨울을 견딘 보리를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왔다 녹기를 반복하면 얼었다 풀리면, 땅이 들떠서 보리의 뿌리도 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보리밭에 들어가 발로 밟아 주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밟으면 오히려 보리가 죽지 않을까 싶었다. 아버지는 들뜬 땅을 다시 눌러 뿌리가 자리 잡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추위도 견디고 밟힘도 지나면서 보리는 봄의 성장을 준비했다. 어린 풀을 살리는 손길이 언제나 부드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봄철에 심는 벼도 마찬가지다. 여린 모를 논에 심어 모내기를 마친 후에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어린 벼가 타 죽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아버지는 섭씨 삼십도가 넘는 더위를 삼십 일가량 견뎌야 벼가 튼튼해지고 알곡이 충실해진다고 가르쳐 주셨다. 필자가 그때 배운 것은 추위와 더위를 모두 피하고 자란 곡식이 아니라 그 계절을 몸소 겪은 곡식에서 실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겨울의 보리와 여름의 벼는 서로 다른 때를 지나지만, 각자에게 필요한 시간을 견딘다는 점은 같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앙의 길에서도 이 사실을 생각한다. 주님이 오실 때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으로 서기를 원한다면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견뎌야 한다. 조금 어렵다고 그만두고, 조금 뜨겁다고 맡은 사명을 내려놓으면 견실한 알곡이 되기 어렵다. 힘이 모자랄 때에는 힘을 구하고,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믿음을 구하며, 감당할 능력이 필요할 때에는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인내는 자기 힘이 넉넉하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 매달려 끝까지 가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왜 주님이 인내의 면류관을 주시겠는가? 사역의 무게가 실제였기 때문이다. 그 직분을 수행하려고 준비한 시간과 고통 가운데 흘린 눈물을 주님이 모르시지 않는다.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힘들었지만 원망으로 일을 버리지 않았고 감사함으로 맡은 자리를 지켰다고 하신다면 얼마나 복되겠는가. 우리에게 닥친 추위와 더위를 무작정 반길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끝까지 사명을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생명의 면류관은 왜 가장 받기 어렵고,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제 다섯째 면류관으로서 &amp;#39;생명의 면류관&amp;#39;에 대해 살펴보자(계 2:10). 필자가 천국의 면류관을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면류관의 종류는 이 다섯 가지만은 아니다. 사랑의 면류관과 소망의 면류관,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전도와 영혼을 살려서 받는 전도의 면류관 등 여러 수고와 관계된 면류관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천국에서 살펴보면, 생명의 면류관은 받기 가장 어려운 면류관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쓰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왜 그런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길에서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일에 끝까지 나아갈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충성의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맡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생명의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그 일 때문에 주님이 목숨을 요구하셔도 드리겠다는 마음까지 나아가야 한다. 사역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는 것과 목숨을 드리는 것은 같은 무게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는 척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주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과 복음을 위해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말씀은 생명의 면류관을 누가 받는지를 분명하게 약속한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뒤, 옥에 갇히고 시험을 받고 환난을 지나는 일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없애 주겠다는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계 2:10).&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했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다. 베드로와 바울도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도들로 교회사는 전한다. 순교자(殉敎者, martyr)의 길은 누구나 스스로 정해서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길이다. 사람의 목숨은 주님께 달려 있다. 죽음이 두려워 피하는 마음만으로는 이 길을 걸을 수 없고, 자기가 순교자가 되겠다고 힘주어 말한다고 그 자리에 서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허락하실 때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생명의 면류관을 말할 때 실제로 죽임당한 사람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자기 목숨을 이미 주님께 드린 마음으로 죽음의 문턱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이 건져 주신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 그 순간에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살리시면 살아서 사명을 이어 가고, 목숨을 요구하시면 주님께 드리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면류관은 이렇게 자신의 생명보다 주님을 더 높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하나님은 왜 세례 요한과 스데반 같은 이들의 순교를 허락하시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순교를 생각하면 먼저 한 사람의 죽음이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 세례 요한은 한창 일할 나이에 죽임을 당했고, 스데반도 복음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붙들고 계셨다면 왜 그 죽음을 허락하셨는가? 주님께서 더 큰 일을 이루시기 위해 순교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사람을 사탄이 자기 권리로 죽일 수는 없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계 1:17-18). 순교의 자리에서 사탄은 불법적으로 죽음의 권세를 쓰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을 넘어설 수 없다. 원수는 그 사람만 없애면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주님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다음 사람을 일으키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증언을 마쳤다. 그가 목숨을 잃은 뒤에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었다. 스데반의 죽음 자리에는 사울이 있었다. 성경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증인들이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고 기록한다(행 7:58). 그리고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주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받으시기를 구했다. 그 죽음의 현장과 이후 사울에게 맡겨질 사명을 함께 생각하면, 원수가 한 증인을 꺾었다고 기뻐할 때 하나님은 더 넓은 복음의 길을 열고 계셨음을 보게 된다. 스데반을 통해 바울을 얻으셨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스데반의 순교가 쉬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돌에 맞는 고통은 한순간에 끝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 상황에서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치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행 7:60). 순교의 자리에서는 육신의 고통이 실제이며, 믿음은 그 고통을 못 느끼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맡기며 끝까지 증언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원수는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면 그의 사역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증언이 더 멀리 퍼질 수 있다. 사탄도 자기 나라가 더 크게 무너지는 일을 겪었기에 오늘날에는 함부로 사역자를 죽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 환난의 때에는 다시 거센 핍박과 순교가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다고 누구나 순교를 구하거나 위험을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기신 길과 때가 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순교를 허락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더 오래 사역하게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생사의 주권을 주님께 인정하고 오늘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실제로 순교하지 않아도 목숨을 내놓을 각오와 죽음의 위기를 겪은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한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lt;strong&gt;어느 날 목숨을 달라고 하시면 정말 드릴 수 있겠는가&lt;/strong&gt;?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힐링여행을 갔다가 높은 곳에서 번지점프를 할 기회가 왔다. 그때 필자는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위로 올라갔다. 그건 약 백 미터 높이에서 강 쪽으로 뛰어내리는 일이었다. 함께 올라간 목회자들이 발판 끝에서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높이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지 알았다. 필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발판 끝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발이 떨리지 않는 것을 보고 먼저 감사했다. 뛰어내리며 주님의 품으로 간다는 마음으로 내 자신을 맡겼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고 번지점프를 실제 순교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는 줄이 매여 있었고, 실제 죽음 앞에는 또 다른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그 경험을 통하여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후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스승에게 물었을 때, 그분은 필자가 순교자가 아니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순교도 자기 결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주님이 허락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만약 나에게 순교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맡겨진 길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걸으리라고 마음먹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뒤 &lt;strong&gt;회개(悔改, repentance)와 영적 훈련을 받으며 다시 큰 위기&lt;/strong&gt;를 겪었다. 군대 생활에서도 죽을 뻔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 공격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필자는 악한 영의 공격 때문에 여섯 달가량 아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웬만한 일에는 잘 떨지 않던 내 자신이 떨었고, 아내도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여러 사역자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내 안에 있는 큰 영을 보거나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필자는 자신에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영들이 있음을 절감했고, 결국 나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불의 사역자를 찾아갔다. 그 사역자는 내 속에 들어 있는 큰 영을 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필자의 영적 체험에 따르면, 그 후 약 일 년 사이에 나 자신 안에서 끌려나온 영들은 한 이조 개 이상은 된 것 같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일을 계기로, 한두 번 안수를 받고 귀신이 모두 나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회개한 뒤에도 죄를 계속 품거나 다시 짓는다면 또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기도문은 죄를 다시 지어도 된다는 허가장이 아니다. 음란과 혈기와 분노를 끊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죄를 살피고 회개해야 한다.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자신보다 강한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영을 보는 것과 쫓아내는 것은 다르고, 보아도 큰 영은 보지 못하거나 처리하지 못할 수 있다. 필자는 자신을 위험에서 건져 줄 지도자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큰 복으로 여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게 훈련을 받고 약 일 년이 지났을 때 필자는 천국에서 나 자신이 받을 면류관의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그때 필자에게 충성의 면류관과 승리의 면류관,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장면이었다. 생명의 면류관은 백금으로 장식된 것이었고, 승리의 면류관은 월계수 잎으로 만든 형상이었다. 필자는 실제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찌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스승에게 그때 물었다. 그때 들은 답으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주님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죽음의 위기를 지난 자는 그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환상은 필자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다. 그런데 그때 필자가 배운 것은 사람의 목숨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사명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경에도 목숨을 내놓고 믿음을 지켰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앞에서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혹시 하나님이 자기들을 건져 주시지 않아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했다(단 3:17-18). 그러자 그들의 몸은 풀무불의 죽음의 자리로 들어갔고, 하나님은 그들을 불 가운데서 살려 주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단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다니엘도 사자굴에 들어가 죽게 될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결코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단 6:10, 16).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을 상대하며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냈다(왕상 18:19, 22, 36-39). 그때 그에게는 생명을 보전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일이 앞에 있었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더라도 목숨을 맡긴 이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을 볼 때, 주님께 생명을 드릴 마음과 실제로 주님이 살리시는 결과를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 앞에 섰다. 만약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려거든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 달라고까지 말했다(출 32:31-32). 자기 안전보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먼저 구한 것이다. 이러한 모세의 간구에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주의 백성을 붙든 마음이 담겨 있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순교를 허락하시고 어떤 사람은 건져 내시지만, 두 경우 모두 사람이 자기 생명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을 보신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을 따라 사역자는 환난과 영적 공격을 어떻게 견디며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을 다시 보자. 주님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먼저 말씀하셨다.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고, 그들이 열흘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셨다(계 2:10). 고난이 오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알 때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안에 들어가서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전하신 말씀은 먼저 그 교회를 맡아 섬기는 사역자에게 닿는다. 그 사역자만 고난을 겪는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다. 필자는 사람과 환경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너무 강한 악한 영의 공격 앞에서 나 자신도 떨 수 있음을 겪었다. 그래서 사역자가 환난을 견딘다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 밀려와도 주님께 힘을 구해야 하고,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공격이라면 영적 지도자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악한 영이 다시 들어올 틈을 내주지 않도록 죄를 끊고 계속 회개해야 한다.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하거나, 혹은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사명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님이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신 열흘의 환난은 그들이 시험을 겪는 실제 말씀이다. 숫자에도 뜻이 있다. 일곱은 땅의 완전수로, 열둘은 하늘의 완전수로, 열은 충분함을 나타내는 수로 살펴볼 수 있다. 백과 천은 그 규모가 커지는 수이며, 천년왕국의 천 년도 그 완전함을 생각하게 한다. 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은 열두 지파에서 각 일만 이천씩 인 맞은 자의 수다(계 7:4-8). 곱셈으로 말하면 열둘 곱하기 열둘 곱하기 천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열흘을 보면 환난에도 주님이 아시는 한계가 있고, 성도가 끝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다. 요한계시록의 다섯째 나팔 장면에는 황충이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한다는 말씀도 있다(계 9:1-5). 성도는 환난이 있다는 사실과 그 기간에도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마지막 때 악한 영의 공격과 환난을 대비하여 귀신을 쫓는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회개하여 죄를 끊고, 영적 싸움에서 실제로 사람을 도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삼천 년, 오천 년, 일만 년 된 큰 영이라도 뽑아 내는 자리까지 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 길이 위험하다고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원수에게 붙들린 사람을 건져 내는 일이 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통하여 들어온 영을 다루는 일에는 회개가 먼저이며, 불법적으로 공격하는 영을 대적하는 일에는 영적 권세와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환난의 때가 오면 그때 갑자기 믿음을 마련하기 어렵다. 지금부터 죄를 끊고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준비해야 한다. 알곡 신자가 되려면 일상의 작은 어려움에서부터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명 때문에 큰 위기가 닥칠 때에는 주님께서 내 생명을 붙들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두려움 앞에서도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놓지 않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길은 그날 한 번의 결단만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순종의 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평신도는 가정과 주의 종과 교회를 어떻게 섬겨 섬김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일반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 것은 모든 사람이 순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천국에서 본 바에 따르면, 다른 면류관을 쓰지 않았어도 섬김의 면류관을 쓴 성도가 많았다. 이 면류관은 평신도에게도 열려 있는 귀한 상이다. 그런데 이때 섬김(奉仕, service)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몇 번 돕는 일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듯 자기 자리를 지키며 가정과 주의 종과 교회를 돌보는 삶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자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5-28). 주님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마 20:28). 섬김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주님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사건이 있다. 어떤 사람은 찬양과 가르침의 은사로, 어떤 사람은 청소와 식사 준비와 안내로 섬긴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는다. 크고 작은 자리의 모양은 달라도 주님을 향한 섬김은 이어져 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0:26-2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lt;strong&gt;평신도의 섬김을 세 자리&lt;/strong&gt;로 본다. &lt;strong&gt;첫째는 자기 가정&lt;/strong&gt;이다. 가정을 돌보며 가족을 천국으로 이끄는 수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lt;strong&gt;둘째는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종을 섬기는 일&lt;/strong&gt;이다. 주의 종을 하나님 섬기듯 정성껏 돕고 함께 짐을 지는 성도가 있다. &lt;strong&gt;셋째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lt;/strong&gt;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계속 감당한다. 이 세 자리가 따로 떨어진 경쟁의 자리가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돌보는 섬김의 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목회 현장에서 보면 중보기도로 교회를 받치는 성도가 있고, 예배당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며,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바깥에 서서 사람들을 안내하는 성도가 있다. 주님이 보실 때 그 수고가 작지 않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섬겼다면 주님은 아신다. 영적 나이나 계급이 높지 않다고 스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위치에서 끝까지 섬긴 사람을 주님은 인정하신다. 필자가 영적 세계에서 본 바로는 그런 평신도의 섬김의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과 견줄 만큼 귀하게 여겨졌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실제 목숨을 바친 성도들이 사는 곳으로 스데반 마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 문준경 전도사 같은 순교자가 있었다. 필자의 체험에서 순교의 자리와 위험한 선교지에 목숨을 내놓은 사역자의 상은 매우 크다. 선교사들이 복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 그들이 참 귀하다. 필자가 본 천국의 장면에서는 그러한 선교사들의 집도 남달리 컸다는 것이다. 위험한 곳에 자신을 내놓고 영혼을 섬긴 일을 주님이 귀히 보신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맡겨진 길은 다르지만, 그들이 바친 생명을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평신도에게 순교자의 길이 먼저 주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이유는 없다. 오늘 자기 가정과 주의 종과 교회를 섬기는 일을 시작하면 된다. 작은 섬김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충성의 길을 배우고, 주님이 더 큰 것을 요구하실 때 자기 생명까지 드릴 믿음으로 자랄 수 있다. 필자는 이 길을 섬김에서 충성으로, 충성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가는 길로 권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자리에서 끝까지 주님을 섬기라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섯 면류관이 드러내는 사역자의 모습과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걷는 길을 살펴보았다. 주님께 인정받는 종은 충성스럽고 의롭게 살며, 영적 싸움 가운데 사명을 완수하고, 추위와 더위 같은 고난을 견딘다.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실 때 자기 목숨도 드릴 마음으로 따른다. 생명의 면류관은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순교를 자기 뜻대로 만들 수도 없다. 내 생명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환난이 없다는 약속이 아니다.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명령이다. 필자도 두려움을 겪었고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계속 회개해야 함을 배웠다. 그러므로 강한 척하기보다 죄를 끊고 주님께 힘을 구하며, 필요할 때 믿음의 지도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맡은 자리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끝까지 갈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평신도도 자신의 가정과 주의 종과 교회를 섬기는 자리에서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한다. 중보기도와 청소와 식사와 안내, 사람을 가르치고 돌보는 수고가 쌓여 주님 앞에 이른다.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오늘도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주님이 어느 날 그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시며 면류관을 씌워 주실 때까지 섬김에서 충성으로 자라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 맡겨진 자리에서 끝까지 섬기며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5일(월)&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인포_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받을 5대 면류관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9085811d1f154d8d7450d23bd30f1e9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ce7e0a90b3b62e01eab6e6a3deb1912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e91f09f028e0576beaca3b945f4bca0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af0563be8f9b9ce246fd12e5c47aaae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ad5eef516218e8caa46e3be09ff3f9f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2cf56c8c7b16eac5af237190ef01850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834fb74402bc4ccdf344d7e9ad4fe2e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b8605c52dfc69bd328cea072670e249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2489bd9ae20ce25e7ae917bf356a749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b5ac81cd75e44c07f5f5f203aead7d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a6650ff1926026bfda6be183955fe71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16bd643e5da33d84c07176b6f231e9d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00b41dfb3813cf978291837cc9612e6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92e6721962b7e485be76abb5ccb7306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cb0239d63d8cc761ec56aea760eb2c3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b79e246805a00bc7570822e0b9e08fff.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천국_면류관과_영적_사역자의_자세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51b80fda10e81f715674476fde3c8ee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천국에서_받을_5대_면류관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5d18f5c232bfb19127ca4ab8894e864a.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856da7103acdf50a9847e5849dd7685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38d1e4e838574af137bf904758e4e8c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f830692e283d76fec0d03b062f8d4ea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1003472eb5c10707ac3348a82404ef6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98e195014d6f65575d9c020543272c5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9e919866cdf6a9011fff3de4d9c1866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d665f11db984ec8f3090ae862a4eaba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81fcccce127d014934e653100bf6e28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b2e6be468669614ee2a2f83dc6ff47a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21)] The_Five_Heavenly_Crowns (1).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43/288/a723b9be78d3fff57f28162b63227d16.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3)]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살려주시려 오신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님(호6:1~2,11:1,13:14 )_2026-10-02(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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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2T09:00:44+09:00</published>
		<updated>2026-10-02T09:00:44+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3)]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살려주시려 오신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님(호6:1~2,11:1,13:14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mJErjLKJmpM [설교핵심] 이 설교는 호세아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구속 사역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성도 들에게 영적 소망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첫째로 정보배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한 ...</summary>
	<content type="html">&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아침묵상입니다.&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제목:&lt;/span&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203)]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살려주시려 오신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님(호6:1~2,11:1,13:14 )&lt;/strong&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span&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000000;&quot;&gt;https://youtu.be/mJErjLKJmpM&lt;/span&gt;&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mJErjLKJmpM?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호세아서를 통해 &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구속 사역&lt;/strong&gt;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성도&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들에게 영적 소망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첫째로 정보배 목사는 &lt;strong&gt;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한 신분적 의미를 넘어 세상으로 파송받은 사명자&lt;/strong&gt;임을 강조하며, 결국 &lt;strong&gt;사망과 음부를 정복하고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구속자&lt;/strong&gt;임을 역설합니다. 둘째로 인간이 겪는 &lt;strong&gt;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징계이자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터널&lt;/strong&gt;과 같음을 설명합니다. 셋째로 성도들이 &lt;strong&gt;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굳건한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어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이자 왕으로 세워지기를&lt;/strong&gt; 독려합니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 호세아서는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예수님을 어떤 분&lt;/strong&gt;&lt;/span&gt;으로 보여 주며, 왜 그분이 누구신지 계속 물어야 하는가?&lt;br /&gt; 2. 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왜 치시고 찢으시며, 어떻게 다시 살리시는가&lt;/strong&gt;&lt;/span&gt;?&lt;br /&gt; 3. 예수님은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부활하심&lt;/strong&gt;&lt;/span&gt;으로 살리시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lt;br /&gt; 4. 호세아의 &amp;ldquo;내 아들&amp;rdquo;과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출애굽기의 &amp;ldquo;내 장자&amp;rdquo;&lt;/strong&gt;&lt;/span&gt;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lt;br /&gt; 5. 하나님의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자녀&lt;/strong&gt;&lt;/span&gt;는 어떤&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 사명&lt;/strong&gt;&lt;/span&gt;으로 세상에 보냄받았으며, 어떻게 상속자와 왕이 되는가?&lt;br /&gt; 6.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그 열쇠&lt;/strong&gt;&lt;/span&gt;를 가지셨는가?&lt;br /&gt; 7. &lt;span style=&quot;color:#2980b9;&quot;&gt;&lt;strong&gt;사망과 음부의 구속자&lt;/strong&gt;&lt;/span&gt;를 믿는 성도는 고난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이길 수 있는가?&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3)&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살려주시려 오신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님&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호 6:1-2; 11:1; 13:14)&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늘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무엇을 아시고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알수록 우리는 자신의 앞길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救贖, redemption)하신 분이며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조금 알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성경이 그분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분이 누구신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고,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려고 돕는 자이신 성령을 보내셨다. 회개(悔改, repentance) 가운데 악한 영이 떠나는 일을 통해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이 땅에서 행하신 일은 사복음서에서 살피고, 승천하신 뒤 이루신 일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지금 하늘에서 어떤 분으로 계시는지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서는 바로 이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왕이시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살폈다. 또 떠난 백성을 다시 사 오시는 남편이요 다시 오실 신랑이라는 것도 보았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정결하고 거룩해야 하며 음녀와 섞이지 말아야 한다. 열 처녀의 비유는 지혜롭게 준비하라고 하고, 달란트의 비유는 충성하라고 한다(마 25:1-30).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산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제 호세아서가 보여 주는 세 가지를 더 살필 차례다. 예수님은 다시 살려 주시는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망(死亡, death)과 음부(陰府, Sheol/Hades)의 권세에서 우리를 속량(贖良, ransom)하시는 분이다. 이 셋은 따로 떨어진 이름이 아니다. 사망을 이기셔야 우리를 살리실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으셨기에 그 사명을 이루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서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어떤 사명이 담겨 있으며, 사망과 음부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호세아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주며, 왜 그분이 누구신지 계속 물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거듭 물어야 하는가?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으로 생각하면 주님이 우리 삶을 책임지실 수 있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요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밝히신 말씀을 예수님도 자신에게 사용하신다(사 44:6; 계 1:17).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자신의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했다(요 20:28). 주님을 바로 알 때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신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도 그냥 익숙한 호칭으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마 16:16). 그리스도(基督, Christ)는 기름 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책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떠올리고, 아들이니 아버지보다 약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의 신분과 사명이 담겨 있다. 호세아서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함께 읽어야 이 뜻이 드러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밝히셨다(출 3:14-15).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요 8:24). 필자가 요한복음의 헬라어 말씀을 읽으며 놀란 것도 이 대목이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시러 오신 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사야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밝히신 말씀과 맞닿아 있다. 그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으로만 생각했던 이해는 이 말씀 앞에서 무너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도 달라진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은 함부로 손댈 수 없다고 한 레위기 27장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 주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주님의 보호를 의지한다. 믿기로 결단했다면 한쪽 발은 주님께, 다른 발은 세상 신에게 걸쳐 두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지조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묻는 물음은 지식만 쌓으려는 물음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누구에게 삶을 드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물음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믿음에는 두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바알도 찾아보고 무당도 찾아보면서 예수님께 우리 앞길을 책임져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자신을 주님께 바쳤다면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조금 맡기고 조금은 다른 힘을 붙잡는 삶에서 돌아서야 한다.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지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서는 돌아선 북이스라엘에게도 이 주님을 보여 준다. 다윗의 왕과 남편과 신랑으로만 그치지 않고, 맞고 찢긴 백성을 다시 살리시는 이, 애굽에서 아들을 부르시는 이, 음부와 사망에서 속량하시는 이로 보여 준다. 북이스라엘이 바알에게 향했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소망의 불을 끄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분이 누구신지를 계속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분의 이름과 행하신 일을 알면 지금 맞닥뜨린 어둠 속에서도 다시 주님께 돌아갈 길을 찾는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왜 치시고 찢으시며, 어떻게 다시 살리시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는 먼저 돌아가자고 외친다.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이다. 떠난 백성이 바알에게 제사하고 우상 앞에서 분향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호 11:1-2). 찢으시고 치시는 까닭은 멸망시키려는 데에 있지 않다. 다시 돌아와 살게 하려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마귀의 길을 따라 그에게 예비된 형벌에 참여하게 된다(마 25:41).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곳이 당신의 자녀가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호 6:1).&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의 순서를 보라. 돌아가자는 부름이 먼저 있고, 찢으심과 치심 뒤에는 낫게 하심과 싸매어 주심이 있다. 찢는다는 말은 사자가 먹이를 물어 찢는 모습이 떠오를 만큼 강하다. 치신다는 말씀도 가벼운 훈계가 아니다.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도 계속 바알을 따르는 백성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난 속에서 깨닫는다. 병과 가난과 어려운 환경을 겪고서야 주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아픔을 통해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살아나는 시작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심으로 고집을 꺾고 돌아오게 하신다. 왜 나만 치시느냐고 원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고집을 그대로 두면 끝내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고난이 올 때 그 까닭을 남과 비교하기보다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고 누구를 의지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바알과 함께 살다 바알의 마지막을 맞기를 원치 않으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치셨지만 도로 낫게 하신다. 낫게 하신다는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라파, 곧 치료한다는 뜻이다. 싸매어 주신다는 말씀은 상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묶어 감싸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주님이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시므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절망의 외침이 아니다. 사람이 맞고 찢긴 자리에만 머물지 않도록 주님이 치료의 길을 여신다. 그것도 겨우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그 앞에 서게 하신다(호 6:2).&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삼일에 일으키신다. 먼저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신 뒤 다시 살게 하시며, 마침내 일으켜 주신다. 여기서 일으킨다는 말은 부활(復活, resurrection)의 소망을 향한다. 초림(初臨, first coming)하신 주님은 죄에 매인 우리를 살려 주시고,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를 일으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약속은 잠시 상처만 덮어 두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주님 앞에서 살게 하겠다는 약속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부활하심으로 살리시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 6장의 말씀을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새인들이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주님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셨다. 오늘과 내일 하실 일과 제삼일에 이루실 일을 구분하여 말씀하신다(눅 13:31-33). 호세아서에서 이틀 뒤에 살리고 제삼일에 일으킨다고 한 말씀을 주님의 삶에서 보라(눅 13:32).&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어떻게 사람을 살리시는가?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심으로 사람을 살리셨다. 이어 제삼일에 완전하여지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따라 주님의 공생애를 보면 처음의 사역에서는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를 살리시고, 마침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살리시는 사명을 완성하신다. 첫해와 둘째 해의 치유와 축사(逐邪, deliverance), 셋째 해에 이르는 죽음과 부활의 길을 함께 보아야 한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그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가셨다(눅 13:33).&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림을 받는가? 죄와 악한 영의 문제를 외면한 채 겉의 고통만 덮어 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 돌아와 자신과 조상의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무당과 점쟁이를 의지했던 죄를 끊어야 한다. 무당의 영이 떠나야 귀신이 쫓겨나고, 조상의 영이 떠나야 병이 낫는다. 회개는 몇 마디 형식적인 말로 끝내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은 죄를 진실하게 자백하고, 반복해 쌓인 죄와 영의 문제를 끈기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때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삶에 나타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북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어도 바알에게 돌아가듯, 사람도 한 번 주님을 찾고서 다시 옛 의지처로 돌아가기 쉽다. 무당과 점쟁이를 섬긴 죄, 조상 제사에 마음을 내준 죄를 남겨 둔 채 악한 영에게 나가라고만 하면 문제의 뿌리가 그대로 남는다. 돌아가자는 호세아의 외침은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외침이다. 그래서 회개할 때는 무엇을 섬겼고 누구에게 도움을 구했는지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 진실한 자백과 계속되는 회개를 지나 주님께 온전히 돌아와야 한다. 치유를 바랄 때도 그분이 왜 먼저 돌아오라고 하시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삶이 너무 괴로워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그때 주님이 살리러 오셨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필자가 목회 현장에서 본 박카록 성도는 뇌에 큰 문제가 생기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실려 갔으나 다시 일어섰다. 이처럼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악한 영에 눌린 자를 놓아주시는 분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고난은 끝이 막힌 굴과 같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길은 지나가는 터널과 같다. 터널 안은 어둡지만 그 끝에는 다시 빛이 있다. 지금 겪는 괴로움이 마지막 장면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오늘 사람을 살리시며 마침내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둠 속에서도 살리러 오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호세아의 &amp;ldquo;내 아들&amp;rdquo;과 출애굽기의 &amp;ldquo;내 장자&amp;rdquo;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무엇을 떠올리는가?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말하면 이 이름에 담긴 사명을 놓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분이 아버지보다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그분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대사처럼 세상에 오신 분이다. 이를 알려면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부터 보아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그런데 그 아들은 부름을 받고도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바알에게 제사하고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했다(호 11:2).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나온 자가 다시 애굽의 신을 따라간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6장에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말씀과 11장에서 아들을 불러냈다는 말씀은 서로 연결된다. 아들이라고 불렸다는 자격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르신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을 섬겨야 한다(호 11:1).&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의 말씀은 출애굽 때 바로에게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 자신의 장자라고 정의하셨다. 이어 바로에게 그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명하시고, 보내기를 거절하면 바로의 장자를 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출 4:22-23). 애굽의 권세는 하나님의 아들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아들은 부름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자이며, 장자는 뒤에 기업을 이을 자다. 보내심과 불러내심을 함께 보라. 아버지는 목적을 가지고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고, 사명을 이루게 하신 뒤 다시 부르신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애굽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 세상에 갇힌 자를 살리시려는 것이다. 아들은 그곳에 영원히 갇혀 죽도록 보내진 자가 아니다. 맡은 사명을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자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이 말씀은 다시 울린다.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자 요셉은 주의 천사가 알려 준 대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했다. 헤롯이 죽은 뒤 다시 나오자 마태는 애굽에서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했다(마 2:13-15). 예수님은 애굽으로 가셨다가 다시 불러내심을 받으셨다. 그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뜻을 보아야 한다. 아들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다시 부르시는 분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왜 하필 애굽인가? 옛 이스라엘을 붙들어 두었던 애굽은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을 보여 주고, 예수님이 어린 시절 실제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알게 하시려는 뜻을 여기서 읽는다. 그분은 도망쳐 숨어만 계신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품고 계신다. 그곳을 떠나 돌아오실 때에는 아들의 길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실 사명이 계속된다. 그래서 호세아의 한 문장과 마태가 전한 어린 예수님의 길은 함께 읽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사명으로 세상에 보냄받았으며, 어떻게 상속자와 왕이 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주님은 제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이를 영접한다고 하셨다(마 10:40). 보내심을 받은 이는 보낸 분의 일을 들고 간다. 또 예수님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하셨다(요 8:42). 이 보내심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목적을 가지고 파송한다는 뜻을 지닌다. 아들이란 이름에 파송과 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저 신분을 얻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의 가정과 교회와 시대에 보내셨는가?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 집안에 먼저 회개의 길을 듣게 하셨다면 거기에는 맡기신 일이 있다. 애굽 같은 세상 가운데 주님의 소식을 전하고, 죄와 악한 영의 권세에서 사람을 건지는 일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돌아가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영원히 세상에 머물 자가 아니다. 주님은 당신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시려 한다. 우리의 몸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났지만, 영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끝날 존재가 아니라 돌아갈 본향이 있는 존재다. 지금의 삶에서 이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두려움에 묶인 종으로 살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롬 8:15-16). 그러나 아들이라는 이름은 고난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자녀는 후사, 곧 상속자(相續者, heir)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이어 말한다(롬 8:17-18).&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장자는 기업을 받을 자다. 더 나아가 이기는 자는 왕 노릇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간다. 이기는 자가 이스라엘로 불리고 장자의 기업을 받는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신과 함께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보좌는 다스림과 심판의 자리다. 사명을 완수한 자를 아버지께서 다시 부르시고, 이기는 자에게 기업을 물려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담긴 마지막 소망이다. 오늘의 고난만 보면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영광의 약속을 보면 끝까지 회개하고 믿음을 지킬 힘이 생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약속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회개의 말씀을 짐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먼저 듣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으로 보냄받은 자가 세상에 매여 살 수는 없다. 귀신이 회개를 가로막고 여러 어려움을 일으켜도 주님의 부르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처음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싸움이 시작될 때 오히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 장자의 복은 이름만 붙여 놓은 칭호가 아니다. 이겨서 기업을 받을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그 열쇠를 가지셨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세상에 파송된 아들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시려면 무엇을 이겨야 하는가? 마귀가 붙든 가장 큰 권세는 사망이다(히 2:14).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죄를 지은 자를 사망이 붙들고, 그 뒤를 음부가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사망만 잠깐 피하게 하는 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낼 분이어야 한다. 호세아는 바로 그 약속을 들려준다(호 13:14).&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호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속량은 값을 치르고 사 오는 일이다. 죄의 권세 아래 붙잡힌 사람을 그냥 놓으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구속자가 값을 치르고 건져 낸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 곧 가까운 이를 되찾는 구속자가 되셨다. 이사야도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을 선포한다(사 25:8). 호세아가 음부에서 속량하고 사망에서 구속하겠다고 한 약속은 사망을 멸하시는 주님에게서 이루어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어떻게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께 넘어왔는가? 마귀는 죄를 지은 자에게 사망의 권세를 사용한다. 예수님께도 광야에서 시험을 걸었으나 주님은 세 번의 시험을 모두 이기셨다(마 4:1-11). 그 뒤에는 거짓 고소로 주님을 죽이려 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세가 얽히고,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군중 앞에서 그분을 넘겨주었다. 바라바가 놓였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과 제자들까지 두려움 속에 그분 곁을 떠났다.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걸으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광야에서 마귀는 주님의 배고픔을 붙잡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 했으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고, 세상의 영광을 내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시험도 주님을 죄에 빠뜨리지 못했다. 사망 권세를 사용하려면 먼저 죄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에게서는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거짓 고소로 방향을 바꾸었다. 안식일 문제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주장,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운다는 말씀까지 왜곡했다. 끝내 죄 없는 분을 죽음에 넘겼으나 그 죄 없음이 도리어 마귀의 패배를 결정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다. 죄가 없는 분을 사망에 넘긴 것은 마귀가 자기 권세를 불법으로 사용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그 손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 돌아왔다. 이 영적 권세의 전환을 보아야 십자가가 왜 우리의 생명과 연결되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은 죽음을 피해서만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심으로 사망이 더는 자신을 붙들 수 없음을 드러내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십자가 곁에서 누가 주님을 지켰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빌라도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그분을 넘겨주었고, 지도자들은 거짓 고소를 멈추지 않았다. 혜택을 받은 많은 사람도 주님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 제자들까지 흩어졌으니 주님은 외로이 사명을 감당하셨다. 은혜를 입고도 위험이 닥치면 등을 돌리는 사람의 모습을 여기서 본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지켜야 할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죄 없으신 분의 죽음은 사람들의 배반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길이 되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도 요한이 영광 중에 나타나신 주님 앞에 엎드러졌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살아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계 1:17-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 계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사망에서 우리를 구속하리라고 하신 호세아의 약속이 가리키는 분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열쇠는 권세를 뜻한다. 사망도 음부도 이제 최후의 주인이 아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던져진다. 불못은 둘째 사망이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그곳에 던져진다(계 20:14-15). 지금의 음부와 최후의 불못을 하나로 뭉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에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던져지는 순서까지 보아야 한다. 주님은 그 모든 권세의 마지막을 정하실 분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를 믿는 성도는 고난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이길 수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예수님께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마 16:18).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건지러 오셨다는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 믿음으로 회개하며 끝까지 간다면 음부가 주님의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고난이 닥치면 마귀는 이제 끝이라고 속삭인다. 회개를 시작할 때는 기쁘게 나아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가로막는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때가 믿음을 버릴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회개의 길을 알게 하셨다면 그 자리에는 맡기신 사명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말고 집안과 교회 가운데 주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서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실 장자의 기업과 보좌를 바라보며 견디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북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을 떠나 바알을 따랐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돌아올 길을 보여 주셨다. 앞서 살핀 남편과 신랑의 약속도 여기서 다시 만난다. 하나님은 떠난 백성을 사 오시고 다시 혼인하시겠다고 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요 4:1-26). 소망이 없어 보였던 북이스라엘의 후손에게도 주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리셨다. 호세아서는 그래서 복음서의 복음서와 같다. 다윗의 왕, 남편과 신랑, 살리시는 이, 하나님의 아들,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가 모두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한쪽에서는 살리러 오신 주님을 말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무당과 다른 신을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만 믿고 따라야 한다. 주님의 보호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죄를 회개하며 맡기신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재의 환난과 핍박, 악한 영의 공격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굴이 아니라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끝까지 통과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주님의 사람의 소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26). 지금은 어려움 속에서도 살리시는 주님을 만나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날을 바라본다. 우리의 미래를 정하는 것은 지금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는 믿음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그분의 허락 없이는 어떤 권세도 우리 생명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다는 각오로 서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서가 보여 주는 살리시는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았다. 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치시고 찢으셨으나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돌아오라고 부르셨고, 낫게 하고 싸매며 이틀 후에 살리고 제삼일에 일으키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그 살리시는 일을 이루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다시 돌아가실 분이다. 호세아가 말한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과 출애굽기가 말한 장자는 그 이름에 담긴 파송, 귀환, 상속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보냄받았다. 고난을 피하기만 바라지 말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과 함께할 기업과 보좌의 약속이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무엇보다 주님은 죄 없이 죽으셨다가 살아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 그분이 구속자이시므로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 지금의 아픔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터널의 어둠 속에서도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살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회개하며 믿음을 지키고, 다른 신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며, 끝까지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살리시는 주님을 굳게 붙들고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아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2일(금)&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호2:19~20)_2026-10-01(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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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6-10-01T09:08:45+09:00</published>
		<updated>2026-10-02T08:52:25+09:00</updated>
		<author>
			<name>갈렙</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호2:19~2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fcfShUoxAqQ [설교핵심] 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부로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성경적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summary>
	<content type="html">&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호2:19~20)&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fcfShUoxAqQ&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fcfShUoxAqQ?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amp;nbsp;예수 그리스도를 &lt;strong&gt;영적인 신랑&lt;/strong&gt;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부로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성경적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lt;strong&gt;거룩한 처녀의 삶&lt;/strong&gt;, &lt;strong&gt;음녀와 섞이지 않는 순결함&lt;/strong&gt;, 그리고 마태복음의 &lt;strong&gt;열 처녀 비유 속 기름 준비&lt;/strong&gt;를 실천해야만 진정한 구원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성도들이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철저한 회개와 &lt;strong&gt;행함이 있는 믿음&lt;/strong&gt;을 통해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자격을 갖추도록 영적으로 깨우치는 것입니다.&lt;span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이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lt;/strong&gt;&lt;/span&gt;&lt;/p&gt; &lt;p&gt;1.&lt;strong&gt;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lt;/strong&gt;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lt;br /&gt; 2. 초림 이후 &lt;strong&gt;그리스도인&lt;/strong&gt;은 왜&lt;strong&gt; 약혼한 신부&lt;/strong&gt;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lt;br /&gt; 3. 그리스도께 드릴 &lt;strong&gt;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lt;/strong&gt;으로 준비되는가?&lt;br /&gt; 4. &lt;strong&gt;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lt;/strong&gt;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lt;br /&gt; 5. &lt;strong&gt;열 처녀&lt;/strong&gt;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lt;strong&gt;신랑의 집&lt;/strong&gt;은 어디인가?&lt;br /&gt; 6. 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lt;strong&gt;여분의 기름&lt;/strong&gt;은 무엇을 뜻하는가?&lt;br /&gt; 7.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lt;strong&gt;어떻게 기름을 준비&lt;/strong&gt;해야 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202)&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font-size:18px;line-height:1.6;color:#5a544c;margin:18px 0 8px;word-break:keep-all;&quot;&gt;(호 2:19-20)&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호와께서는 바알을 따라간 북이스라엘에게 다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약속하셨다(호 2:19-20). 한 번 품고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을 또 품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first coming)과 재림(再臨, second coming)에 비추어 보면,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영원한 신랑이 오실 때 그분의 신부가 될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혼인잔치가 끝난 것일까? 아니다.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처녀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은 어린양을 따르며 여자들(음녀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라고 말씀하셨다(고후 11:2; 계 14:4; 마 25:1-13). 그런데 이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신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혼한 성도가 신랑을 실제로 맞이하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특히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에서 과연 그들이 누구인지, 혼인잔치는 과연 어디에서 열리는지, 등불과 여분의 기름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처녀의 한 사람으로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기름을 주님의 재림시에 다른 사람에게서 빌릴 수 있는가? 혼인잔치가 열리는 문이 한 번 닫힌 뒤에도 다시 열릴 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을 받은 성도가 어떤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무엇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아야 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성경 66권 가운데,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여 주는 책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단언코 구약성경 중에서 아가서를 떠올릴 수 있다. 필자는 이 책를 깊이 다루면서 『바른 아가서 강해』(회개와천국복음연구소 발행, 2025년)라는 책을 집필한 한 바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책이 있을까? 그것은 예언서 가운데서 하나인 호세아서가 유난히 강력하다. 예레미야에는 광야에서의 신혼 때의 사랑에 대해서, 이사야에도 남편과 신부라는 용어가 나오지만,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다시 장가들겠다는 말씀을 거듭 선포하고 있다(렘 2:2; 사 54:5; 호 2:19-20). 그렇다면 이 말씀은 과연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그것은 이미 남편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B.C.931~910)이 열 지파를 이끌고 나라를 세운 기원전 931년 무렵부터, 기원전 722년인&amp;nbsp; 제19대 호세아 왕(B.C.732-722)이 멸망할 때까지 약 이백십 년을 존재하던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처음부터 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혼합된 신앙을 가졌고, 제7대 아합 왕 시대(B.C.874-853)에는 바알 숭배에 깊이 빠졌다. 남편이신 여호와의 마음에서 보면 가장 심하게 바람이 난 시대가 이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버리셔도 할 말이 없는데 주님은 버린다는 말보다 다시 품겠다는 약속을 거듭하셨다. 이 약속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우리를 알아야 한다(호 2:8, 13-17).&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 핵심은 여호와께서 5가지 지참금으로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 그리고 진실함으로 북이스라엘 백성과 장가들어 그들과 영원히 살겠다고 하셨다. 장가들겠다는 말씀을 3번씩이나 하신 여호와께서는 마지막에는 &amp;lsquo;네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amp;rsquo;고 하셨다(호 2:19-20). 죄 많은 백성에게 관계 회복의 값을 여호와께서 먼저 내놓으신 것이다. 사람의 변덕에 매인 약속이 아니라 끝까지 아내를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북왕국이 무너진 뒤에 그들이 끝내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들었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이 왕과 지도자와 제사 없이 오랫동안 지내겠지만, 언젠가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호 3:4-5). 그랬는데 정말 북이스라엘 멸망 후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은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다(요 4:4-26). 그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자리가 어디인지와 오실 메시아에 대해 물었고,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세아의 예언의 성취가 다윗 왕이 다시 무덤에서 올라와 통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통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남유다 역시 B.C.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한 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회복의 움직임을 가졌지만 그들에게 다윗 왕이 다시 세워진 적은 없었다. 호세아가 말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우두머리를 세울 일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호 1:11). 그러므로 남쪽만 참 백성이고 북쪽은 영원히 버려진 백성이라는 식으로 이 역사를 읽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두 편 모두에게 오셨고 사마리아에서도 신랑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드러내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amp;lsquo;영원히 살되&amp;rsquo;라는 호세아 선지자의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사람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초림하신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라고 말한다(딤후 4:10; 딤전 1:19-20).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의 끝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도 가볍게만 여길 수 없다(마 27:3-5; 행 5:1-11). 히브리서는 은혜를 맛보고도 약속의 안식에 이르지 못할 위험이 있음을 거듭해서 경고하고 있다(히 3:12-19, 6:4-8, 12:16-17). 하나님은 영원한 신랑이 되고자 초림하시어 신랑이 되시려 했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아버리고 그분을 떠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인간인 신부와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영원한 혼인의 완성은 재림하시는 날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날에 주님을 영원한 신랑으로 맞이하여 어린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가 들려주는 에서의 사례를 보라. 그는 한 그릇 식물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고, 뒤에 눈물을 흘리며 복을 구해도 돌이킬 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히 12:16-17).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일이 그대로 성취되지 못하는 사례가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가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지도 계속해서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초림 이후 그리스도인은 왜 약혼한 신부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신분은 대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리스도의 신부인가 그리스도의 전사인가? 우리는 여러 가지로 성도의 신분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의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칭은 과연 어떤 것인지부터 우리는 살필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필자는 그리스도인의 현재 상태를 혼인을 기다리는 약혼(約婚, betrothal)의 상태라고 말하고 싶아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후 11:2). 여기서 &amp;#39;중매한다&amp;#39;는 단어는 &amp;#39;하르모조&amp;#39;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amp;#39;결합하다. 함쩨 짜 맞추다&amp;#39;라는 뜻에서 &amp;#39;결혼시키다, 약혼시키다&amp;#39;라는 뜻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도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결혼식이 끝난 상태라면 왜 사도 바울은 그들을 그분께 드리려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약혼한 상태가 된 것이지 결혼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9:7-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19:7-9&amp;nbsp;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amp;nbsp;&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나 약혼이라도 해서 가벼운 말장난의 수준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친구가 약혼을 깨뜨리면서 법적 책임을 지는 일을 직접 지켜보았고, 그때 약혼에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예를 들어, 요셉이 마리아와 아직 함께 살기 전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조용히 끊고자 고민한 일도 약혼 관계가 엄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마 1:18-19). 그러므로 약혼과 혼인의 완성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약속한 상대가 있다고 할지라도 혼인잔치를 치르고 함께해야 결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죄(贖罪, atonement)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생명을 주는 영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신 것이다. 그날 우리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서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엡 1:13-14).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다른 사랑을 따라 살게 된다면, 우리가 이미 주님과 맺은 약혼은 깨지고 말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고 있다고 선포한다는 사실이다(계 19:7-9). 여기서 &amp;lsquo;예비하였다&amp;rsquo;는 말은 예수님의 초림을 믿은 모든 사람이 다시 오실 주님과 결혼식을 준비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믿음으로 그날을 기다리면,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오신 뒤, 지금 이 시간까지는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곧 오실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처녀로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처녀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세 종류의 처녀들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말한 정결한 처녀요, 둘째는 사도 요한이 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이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비유하신 슬기로운 처녀가 바로 그것이다(고후 11:2; 계 14:4; 마 25:2). 그런데 이러한 세 처녀의 공통분모는 신랑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아니 되고, 그날 그분을 맞이할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혼한 사람은 약혼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상대를 따라가서는 절대 안 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오늘날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하여 잘못된 견해를 전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7년 대환난 전에 교회 전체가 공중으로 올라가 칠 년 동안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을 보라.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말한다(계 19:7-9, 21:1-2, 9-10). 그러므로 세대주의자들처럼 누구든지 올라가서 칠 년 동안 공중에서 치러질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믿게 되면, 지금 약혼한 성도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정말 놓치기 쉽다.&amp;nbsp; 특히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는 그날을 준비하는 자의 차이가 얼마나 달지게 될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그리스도께 드릴 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으로 준비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결혼할 처녀들은 어떤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3가지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정결한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lt;/strong&gt;&amp;nbsp;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성도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릴 &amp;lsquo;정결한 처녀&amp;rsquo;라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고후 11:2). 개역한글에 나오는 &amp;lsquo;중매함이로다&amp;rsquo;를 통하여 성도는 이미 혼인까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힘쓰는 일은 교회를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로 바칠 수 있는 상태로 세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혼한 신부로서 성도는 결혼할 날까지 자신을 지키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amp;#39;정결한&amp;#39;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amp;#39;하그노스&amp;#39;이다. 이 단어는 &amp;#39;깨끗한&amp;#39;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amp;#39;거룩한&amp;#39;이라는 뜻이 1차적인 뜻이고, 2차적으로 &amp;#39;순결한, 정결한&amp;#39;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단지 자신의 겉을 씻어 깨끗해진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을 초월한다.&amp;nbsp;오히려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처녀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 곧 성결(聖潔, holiness)은 더러움을 씻는 것에 더하여 주님의 소유로 구별되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약혼 후 처녀는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아래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어야 한다. 구약의 레위기가 가르친 속죄와 정결(淨潔)과 성결의 흐름도 바로 이러한 맥락을 그대로 말해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레위기에서는 &amp;#39;거룩함(성결)&amp;#39;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행동으로 드러난 깨끗함과 구별된 삶이다. 그것은 이방인의 풍속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음행과 금지된 성관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안식일과 절기와 안식년을 공동체와 함께 지키는 일이었다.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의 몸과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바침이었다(레 18-27장). 순종과 바침은 실제 행동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에게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삶의 순종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성령의 깨우침을 거스르고 세상 풍속을 좇으면서 자신을 거룩한 처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할 때 그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것의 결론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영들의 제거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더러운 영이 사람의 육체 안에서 역사할 때 인간의 절제의 능력만으로 그들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행동을 잠시 억누를 수 있어도 생각 속에서 더러운 영과 성령과 하나 된 나와의 전쟁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悔改, repentance)를 통해서 더러운 영들을 제거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자백하면서 회개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함으로써,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난 후 온전한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 성도는 거룩한 삶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amp;lsquo;정결한 처녀&amp;rsquo;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흠을 없애 보라는 권면이 아니다. 먼저 주님의 속죄와 생명을 받은 후에,&amp;nbsp; 죄를 회개하며 자신을 구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정한 것을 품은 채 믿는다고 말만 되풀이해서는 신랑에게 바쳐질 처녀가 될 수 없다. 거룩함은 신랑과의 약속을 삶으로 지키는 일이며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로서 준비되어 있어야&lt;/strong&gt; 한다. 사도 요한은 시온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선&amp;nbsp; 채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을 보았다. 그들은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었고,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땅에서 구속받은 자들로서, 그들 외에는 이 노래를 배울 수 없었다(계 14:1-3). 요한이 이어서 그들의 삶을 어떠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갔기 때문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14:3-5&amp;nbsp;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amp;nbsp;&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들을 &amp;lsquo;정절이 있는 자&amp;rsquo;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원문에는 그들은 처녀를 뜻하는 &amp;#39;파르테노스&amp;#39;라고 되어 있다. 이는 성별에 따라 여자만 혼인잔치에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랑이신 어린양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신부의 순결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여자만 나온다. 하나는 태양을 입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는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불리는 큰 음녀가 나온다(계 12:1, 17, 17:1-5). 이 중에서도 어린양의 신부가 처녀인데, 이 처녀 외에 세상의 것과 짝하면 산 여자는 음녀라고 부른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녀와 함께 자신을 더럽힌다는 뜻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의 길을 같은 주인처럼 좇아가거나, 세상의 쾌락과 인기와 명예를 더 사랑하여 신랑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일을 가리킨다. 겉에서는 경건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것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강단에서는 바른 말을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자가 곧 음녀인 것이다. 누구라도 악한 영을 회개로 내보내지 않고는 그런 유혹을 지속해서 이기기가 어렵다. 자신이 처녀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더럽힘을 거절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음녀들과 더불이 더럽히지 않는 처녀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다. 신랑이 가는 곳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길을 번갈아서 좇아가는 사람을 온전한 신부라 할 수 없다. 둘째, 그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도 없는 자이다(계 14:5). 특히 말씀을 맡은 종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고도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필자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진실하게 말씀을 전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다. 거짓말 없는 입과 흠 없는 삶은 신랑을 따라가는 것이 처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십사만 사천 명을 두고서, 마지막 시대에 혈통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뽑힐 사역자들로 보는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본 이들은 땅에서 유혹을 이기고 구속받아 어린양께 속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였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4:3-4). 필자는 이 표현을 첫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본다. 또한 요한계시록 9장에 가면, 인 맞은 자들을 악한 영이 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한 사명자들로서 이긴 자가 되어 144,000석의 보좌에 앉아서 주인노릇과 왕노릇을 할 사람들이라고 해석한다(계 7:3-4, 9:4-5).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나온 것처럼 천국에 가서 확인해보니, 144,000명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을 친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한 특별한 주의 종들이었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도 세상의 욕망 때문에 그리로 돌아서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오직 어린양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은 신부라고 주장하면서 음녀의 손도 함께 잡고 가고 있다면, 그는 처녀가 아니다.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오직 어린양께 속하여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열 처녀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은 어디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lt;strong&gt;&amp;nbsp;셋째, 슬기로운 처녀로서 준비하고 있어야&lt;/strong&gt; 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1절에서 13절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직접 이야기하신 것으러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아니라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을 보면, 이들은 모두 재림하신 예수님을 신랑으로 기다리는 처녀들이었다. 모두가 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 25:1-2). 필자도 한때 이 열 명을 신부의 들러리라고 배운 적이 있다. 신부의 집에서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마중 나갔다가 신랑과 함께 돌아온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비유 전체를 보면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가 아니라,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할 당사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성도들, 곧 약혼한 신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왜 열 명의 처녀를 신부의 들러리로만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그 잔치집에 들어갔지만, 늦게 온 나머지는 &amp;lsquo;주여 주여&amp;rsquo;라고 외쳤어도 혼인잔치가 열리는 그 집(혹은 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마 25:10-12).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기에 등장하는 집 혹은 성은 신부들의 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성이 처녀들의 집이었다면, 왜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집에 못 들어갔겠는가! 그리고 이 처녀들이 신부의 들러리였다면 왜 친구의 집에 못 들어갔겠는가! 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신부들은 전부 다 혼인 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야 할 신부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성이 신부 자신의 집이었다면, 신랑이 그 문을 열어 줄 권한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아니 된다. 고로 이 집은 분명 신랑의 집인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방향을 한 번 살펴보자. 이전에 배웠던 설명대로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서 나온 경우라면, 기름을 사러 갈 때에는 자기 집 쪽으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파는 기름을 사 올 수는 없는 상황이다. 또한 이 비유에서 신랑은 들어올 신부들을 결정하는 자이고 처녀들은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고로 필자는 신부들이 신랑의 성을 향하여 왔다가, 신랑의 나옴이 늦어져서 그 성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읽는다. 문이 닫힌 뒤 신랑에게 열어 달라고 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마 25:5-12).&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이날 결혼잔치가 열리는 그 집 혹은 성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을 읽어보면, 이 신랑의 집이 새 예루살렘 성임을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신부처럼 단장한 거룩한 성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계 19:7-9, 21:1-2). 그리고 천사는 &amp;lsquo;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amp;rsquo;를 보여 주겠다면서 그 성을 보였다(계 21:9-10). 그 성 안에서 신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어린 양의 신부는 새 예루살렘 성 자체가 아니다. 돌과 성벽을 인격적인 아내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신부는 그 성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 성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랑의 성문 안으로 누가 들어갈 것인지는 성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시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마태복음 24장 끝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인이 어느 날 올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셨다. 곧이어 예비하고 있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고 하셨다(마 24:42-45). 그 질문에 이어 25장에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는 &amp;lsquo;지혜 있게 준비하는라&amp;#39;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며, 달란트의 비유는 맡은 일에 &amp;lsquo;충성하라&amp;rsquo;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달란트는 종이 자신의 주인이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했는지를 밝혀주는 비유이고, 열 처녀는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자가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알려주는 비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대하는 자세로서 &amp;lsquo;깨어 있으라&amp;rsquo;는 말씀은 잠을 한순간도 자지 말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실제로 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 다 졸면서 잤다고 했다(마 25:5). 여기서 모두가 피곤하여 잠시 잠든 것과, 오랜 기다림 끝에 먼저 죽은 성도의 상태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있다고 말했다(요 11:11-14; 살전 4:13-16). 슬기로운 처녀도 같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비유의 차이는 몸을 움직여 밤새 버텼느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늦게 온다할지라도 어느때든지 불을 밝힐 준비를 갖추고 있었느냐에 있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때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렸다(마 25:6). 영적으로 볼 때 그때는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때라는 것을 이 비유는 암시해 준다. 고로 필자는 이 외침을 마지막 때 천사장의 소리라고 생각한다(살전 4:16). 그 외침에 모두 일어나 자신의 등불을 손질한다고 하지만, 이미 준비한 것이 없는 자는 그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 어느 시대보다 살아서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날과 시각은 아무도 알 수 없다(마 24:36, 25:13). 그러므로 오래 살 것만 기대하지 말고, 지금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 성에서 진행될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참여 여부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그것은 자신의 등불 외에도 용기에 기름을 따로 가졌갔는가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을 가져갔으나 여분의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까지 담아 갔다(마 25:3-4).&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럼, &amp;#39;기름&amp;#39;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지 이 차이를 &amp;lsquo;믿음이 있고 없고&amp;rsquo;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열 사람 모두가 다 처녀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예비신부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 열 처녀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신랑을 기다리던 성도들이라고 본다. 어찌 불신자가 예수님을 신랑이라 부르며 마중 나갔겠는가?&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럼, 열 처녀들이 들고 나간 자기들의 등불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인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계 4:5).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천국에 올라가서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마태복음의 등불과 연결하여, 등불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본다. 성도에게는 이미 성령의 불이 켜져 있다. 그러나 등에 든 기름만으로 신랑이 더디 오는 긴 밤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담아 준비한 채 마중 나가야 한다. 등불과 기름을 모두 성령이라고만 하면, 슬기로운 다섯이 따로 가지고 온 그릇의 뜻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름은 사서 채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성령은 자기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amp;nbsp;&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슬기러운 처녀들이 허리춤에 차고 갔던 기름병의 기름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본문의 맥락을 통해서 이 기름이 4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lt;strong&gt;첫째, 남에게는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없었다는 점이다&lt;/strong&gt;. 신랑이 왔을 때 미련한 자들이 불이 꺼져 간다며 슬기러운 처녀들에게 그들의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자, 슬기로운 자들은 함께 쓰기에 부족하다며 직접 사라고 했다(마 25:8-9). 다른 성도의 준비를 빌려 신랑의 마중 나감 앞에 쓸 수 없다. 각자가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lt;strong&gt;둘째, 그 기름은 등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lt;/strong&gt;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lt;strong&gt;셋째, 그것은 값을 치러 사야 하는 것이었다는 점&lt;/strong&gt;이다. &amp;lsquo;파는 자에게 가서 사라&amp;rsquo;는 말에는 이미 준비한 사람들이 그것을 사서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lt;strong&gt;넷째,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것을 장만할 수 없다는 점&lt;/strong&gt;이다. 그녀들은 다 잠들었다.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깨어났을 때 그들은 신랑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육체가 죽고 영혼만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겠지만 죽은 다음에는 다음의 세계를 준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사 오라는 말을 듣고 떠나간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값을 주고 사와야 하는데 그 늦은 밤 중에 어디서 돈은 만들 수 있었겠으며, 사 올 수 있었겠는가?&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필자는 그 기름을 신랑이 신부로 알아볼 만한 삶의 증표라고 본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댓가를 지불하여 일평생 그 기름병에 기름을 채워넣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주님께 바친 시간과 눈물, 회개와 기도, 수고와 핍박을 견딘 순종등이 한 방울씩 더해져서 기름병을 채웠을 것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되풀이하면서 삶은 아무것도 주께 드리지 않는 성도라면 그 기름병에 기름은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기름이야말로 신랑을 향한 실제 헌신에 따르는 수고와 값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로 그 기름은 자기가 채운 것이기에 남에게 넘겨 줄 수 없고 남이 흘린 눈물을 나도 내 것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값을 치르고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게을러서 준비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여분의 기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인가? 필자는 마태복음 25장 2절의 &amp;lsquo;미련한 자로 있었고 슬기로운 자로 있었다&amp;rsquo;는 헬라어 미완료형에 주목한다. 그 상태가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만 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줄곧 준비의 필요를 몰랐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몰랐던 자들이다. 듣지 못해서 몰랐을 수도 있고, 들었으나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등불 외에 기름을 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그릇에 기름을 계속 채워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에 닥쳐서야 비로소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amp;lsquo;왜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아니했는가?&amp;rsquo;라는 질문도 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만 믿고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얻으면 어떤 준비함 없이도 혼인잔치에 들어간다는 말만 들은 성도는 기름그릇을 따로 마련해야 할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 늦어지자 등불이 꺼져 가는 위기가 비로소 드러나가 시작한다. 오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차이를 지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훗날 문 앞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놀랄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그릇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 예비했던 이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마 25:10). 성경은 결혼잔친에 들어간 여인들을 가리켜 &amp;lsquo;등불을 가졌던 자들&amp;rsquo;이라고만 하지 않고 &amp;lsquo;예비했던 자들&amp;rsquo;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말은 이렇게 예비하는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일찍부터 신랑을 생각하며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자가 그날 그시에 그분의 집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8e44ad;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8e44ad;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25: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때 남은 처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뒤늦게 돌아와서(아마 기름을 사오지 못했을 것이다) &amp;lsquo;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amp;rsquo;라고 했으나, 신랑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마 25:11-12). 그런데 그들은 원래 신랑을 주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고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절대 불신자가 아니다. 문이 닫히고 나면, 기름을 빌리거나 뒤늦게 값을 치러 채울 수가 없다. 살아 있을 때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밤중에 기름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준비할 시간이 죽은 다음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미련한 처녀들이 사러 간 동안 신랑이 왔고, 돌아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마 25:9-12). 죽은 다음에는 처음부터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들의 기름을 나누어 쓸 수 없다. 오늘 듣고 깨닫는 말씀이 내일의 결단으로만 남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살아서 회개하고 주께 드릴 삶이 있을 때 기름을 그릇에 채워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지금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일에 지친 밤에도 죄를 돌아보며, 눈물로 회개하고,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말씀을 따라 맡은 일을 해내는 시간이 기름을 채우고 있는가? 슬기로운 처녀는 하루 아침에 호리병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한 방울씩 모았다. 주님께서 보실 때 신부로 인정할 만한 삶의 증표가 이렇게 쌓인다. 필자는 믿음과 회개를 천국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으로, 그 믿음을 따라 살아 낸 행실을 신부의 준비를 완성하는 충분 조건으로 말한다. 구원(救援, salvation)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난 일이 아닌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기름그릇의 크기와 채운 분량은 곧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상과 지위와 신분의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본다. 기름을 많이 채운 사람과 거의 채우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같은 종류의 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성문을 통과하는 문제와 들어가서 누릴 영광의 문제는 같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믿음만 말하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린 일이 전혀 없다면, 무엇으로 신랑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어린양의 아내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계 19:7-8).&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필자는 천국의 정의와 누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지, 천국의 신분과 상급, 천년왕국과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도 준비하고 있다. 그 내용을 책으로 내면 각자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더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열 처녀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리병에 얼마나 기름이 들어 있는지 지금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을 처음 듣고 자신의 준비가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한다. 필자는 자신이 모르고 살았음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주께서 받아 주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죽은 뒤에야, 또는 신랑이 문을 닫은 뒤에야 준비하려 한다면 늦다. 지금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며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다. 기름은 옆 사람에게 달라고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필자에게 맡기신 것은 필자가 감당하고, 각자가 맡은 삶은 각자가 그분 앞에 올려 드려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주의 종들도 이 경고를 들어야 한다. 한번 믿었으니 절대로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만 전하고, 끝까지 회개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면, 그날 문 앞에서 울 성도들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줄 수 있겠는가? 주님은 말씀을 맡긴 종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마 24:45-51, 25:14-30). 필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있다. 듣는 사람은 그 가르침을 듣고 오늘 자기의 기름그릇을 확인해야 한다. 그날까지 준비할 시간이 영원히 남아 있지 않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랑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오늘의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등불이 켜졌다는 사실을 감사하되, 그 불이 신랑을 맞을 때까지 타도록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오직 어린양을 따르는 거룩한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음녀의 유혹을 끊고, 하루하루의 순종으로 그릇을 채워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그날과 그 시를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마 25:13). 바로 이 시간이 깨닫고 시작할 때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980b9;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어 재림의 혼인 잔치로 이어지며, 그날 신부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금 우리는 신랑과 약혼한 성도다. 바울의 정결한 처녀, 요한이 본 더럽히지 않은 처녀,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기로운 처녀로 그분 앞에 서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자만 신랑의 집에 들어갔다. 준비하지 못한 자가 문 앞에서야 깨달은 일을 우리는 지금 알아야 한다. 성령의 등불을 받았다는 고백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며 죄를 끊고, 어린양을 따르며, 시간과 수고와 눈물의 대가를 들여 기름 그릇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부로 부르신 사랑을 가볍게 버리지 말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신랑이 오실 때 예비한 자로 인정받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10월 01일(목)&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호세아서와 그리스도의 혼인 약속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89/267/39abfaa0fec80c2dbd750eb45a74ead7.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Midnight_Bride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89/267/83ffcd3714856c8ccb687da237e60f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Midnight_Bride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89/267/b48d92edec45628eb7dda1a296a9eaf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Midnight_Bride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89/267/c54941aebd9bbcd440735cf447ffd90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Midnight_Bride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89/267/6eefb70f8697dcc4bcce8f9ffd0726a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202)] Midnight_Bride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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