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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침묵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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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7 Jul 2026 06:09: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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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동탄명성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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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46)] 이사야의 예언(06)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사52:13~53:12)_2026-07-16(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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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46)] 이사야의 예언(06)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사52:13~53:1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vI1gza-el0s&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vI1gza-el0s?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width:100%;&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 146&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구약의 어느 선지자보다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을 넓고 깊게 예언한 선지자다. 그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과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과 고난받고 죽으실 것과 다시 높임을 받아 영광스러운 주가 되실 것과 마지막에는 재림주와 심판주로 오실 것까지 예언하였다(사 7:14, 9:6-7, 11:1-5, 52:13~53:12, 63:1-6).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읽는다는 것은 구약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얼굴과 하나님의 경륜(經綸, divine economy)을 함께 읽는 일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까지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amp;lsquo;고난받는 의로운 종&amp;rsquo;을 보여 준다. 그 종은 강포를 행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는 거짓이 없었다(사 53:9). 그런데도 그는 멸시받고 버림받고 찔리고 상하며 채찍에 맞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에 받은 응당한 형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신한 대속(代贖, substitution)의 고난이며,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고난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단지 죽음의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질병과 저주를 대신 담당한 고난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단 하나가 아니다. 첫째,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함이다. 둘째, 마귀를 인간의 자리에서 패배시키기 위함이다. 셋째, 우리의 친족 구속자(親族救贖者, kinsman-redeemer)가 되기 위함이다. 그리고 넷째,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직접 담당하실 수 없는 인간의 육체적&amp;middot;정신적 저주와 질병을 육체로 담당하기 위함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lt;strong&gt;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이미 담당하셨다면 왜 많은 성도에게 여전히 질병과 가난과 정신적 억압과 삶의 막힘이 남아 있는가?&lt;/strong&gt; 왜 &amp;ldquo;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나았다&amp;rdquo;라고 선포해도 현실에서는 병이 그대로 남는 경우가 있는가? 성경의 약속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속량(贖良, redemption)이 한 개인의 삶에 실효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핵심이 자백(自白, confession)과 회개(悔改, repentance)다.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는 행위책에 기록되고, 이 땅에서는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합법적인 권리를 얻어 사람의 몸과 혼과 환경을 공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의 값을 지불하셨지만, 사람 안에 들어온 악한 영들의 권리는 죄의 자백과 회개를 통하여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 왜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시야인지, 죄 없으신 예수님의 고난은 왜 대속적이며 자발적인지,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지, 예수님은 왜 질병뿐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는지, 율법을 어기면 왜 질병과 가난과 막힘의 저주가 임하는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속량하셨는데도 왜 성도에게 질병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왜 죄의 자백과 회개가 치유와 악한 영의 축출에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왜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시야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유대교는 이사야 53장의 &amp;lsquo;내 종&amp;rsquo;을 개인적 메시야가 아니라 집단적 이스라엘로 해석한다. 그 근거로 이사야 4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amp;ldquo;나의 종&amp;rdquo;이라고 부르신 사실을 제시한다(사 41:8-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사 41:8-9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실제로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을 민족적 이스라엘과 전혀 무관한 본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열방 가운데 멸시받고 박해받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종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모든 진술을 집단적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 종은 &amp;ldquo;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amp;rdquo;고 말해진다(사 53:9).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와 음행과 불순종을 범하였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목이 곧고 패역하며 거짓된 백성이라고 책망하였다(사 1:2-4, 렘 5:1-3). 그러므로 죄가 전혀 없는 의로운 종이라는 묘사는 범죄한 민족 전체보다 죄 없는 한 인격적 종에게 더 정확히 들어맞는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더 결정적인 증거는 신약성경의 해석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신 사건을 이사야 53장 4절의 성취라고 선언한다(마 8:16-17). 베드로는 예수께서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사야 53장을 직접 적용한다(벧전 2:22-24). 빌립 역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던 이사야 53장의 종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여 복음을 전하였다(행 8:32-35).&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53장은 이사야 자신이나 이스라엘에게 부분적으로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으나, 궁극적인 실체는 메시야 예수다. 다윗에게 주어진 &amp;ldquo;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amp;rdquo;는 시편 2편의 예언도 다윗에게 온전히 성취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시 2:7-9, 행 13:33, 히 1:5). 같은 원리로 이사야의 종도 예표(豫表, type)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實體, antitype)가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죄 없으신 예수님의 고난은 왜 대속적이며 자발적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범죄 때문에 받은 형벌이 아니다. 성경은 그분이 죄를 범하지 않았고 입에 거짓도 없었다고 증언한다(벧전 2:22). 그분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고, 폭력을 행하지 않았고,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징계와 채찍과 사망이 임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그 이유를 반복되는 &amp;lsquo;우리&amp;rsquo;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며,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였다(사 53:4-5). 여기서 대속(代贖, substitutionary atonement)의 핵심이 드러난다. 죄 없는 한 분이 죄 있는 다수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을 형벌과 저주를 담당한 것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고난은 또한 자발적(自發的, voluntary)이었다. 예수님은 붙잡힐 능력이 없어서 체포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에게 &amp;ldquo;내가 그니라&amp;rdquo;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다(요 18:3-6).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마 26:53-54). 성경을 이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강제된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이다. 아버지가 무력한 아들을 억지로 죽음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스스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깊이다. 대속은 법적인 교환이고, 자발성은 그 교환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사실을 놓치면 십자가는 단순한 순교나 정치적 희생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부당함에 희생된 한 의인의 죽음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구속(救贖, redemption)의 사건이며, 죄와 저주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린 하나님의 경륜적 사건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 &lt;strong&gt;첫 번째 이유는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함&lt;/strong&gt;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피가 없으시다(요 4:24). 그러나 율법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선언한다(레 17:11, 히 9: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혈과 육을 입으셔야만 죄를 위한 피를 흘릴 수 있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두 번째 이유는 마귀를 인간의 자리에서 패배시키기 위함&lt;/strong&gt;이다. 예수님은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사람의 자리에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히 2:9, 14).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마귀를 없애실 수도 있었지만, 마귀가 멸시하던 인간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그를 패배시키심으로 그의 교만을 가장 수치스럽게 무너뜨리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세 번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고엘 즉 우리의 친족 구속자(親族救贖者, kinsman-redeemer)가 되기 위함&lt;/strong&gt;이다. 히브리어 &amp;lsquo;고엘&amp;rsquo;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고, 팔린 친족을 속량하며, 피의 원한을 갚아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레 25:25, 룻 3:9-13).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음으로 우리의 친족이 되셨고, 우리의 잃어버린 생명과 기업을 되찾아 주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lt;strong&gt;네 번째 이유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임한 저주를 자신의 몸으로 담당하기 위함&lt;/strong&gt;이다(사 53:4-5).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질병과 채찍과 굶주림과 목마름과 육체적 통증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되셨다. 육체를 입으셔야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채찍에 맞고, 가시관에 찔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버림받는 고난을 실제로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 종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고 말한다(사 53:10). 이것은 하나님께서 고난 자체를 즐기셨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길을 기꺼이 성취하셨다는 뜻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고로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 번째 이유는 단순히 죽을 몸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몸과 혼에 임한 저주의 값을 직접 감당하고, 우리가 질병과 정신적 억압과 가난과 버림받음에서 놓임을 받을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예수님은 왜 질병뿐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53장은 특별히 질병과 연약함과 채찍을 강조한다. 마태는 이를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역에 적용하였다(마 8:16-17).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은 질병 하나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언급하였다(갈 3:13).&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여기에 나오는 &amp;#39;속량&amp;#39;(贖良, redemption)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엑사고라조&amp;rsquo;는 값을 지불하고 어떤 상태나 권세로부터 사서 끌어낸다는 뜻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값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셨다. 그 값은 자신의 몸과 피와 생명이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lt;strong&gt;예수께서 속량하신 &amp;#39;율법의 저주&amp;#39;&lt;/strong&gt;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lt;strong&gt;신명기 28장&lt;/strong&gt;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하고 오래가는 질병,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피부병, 정신 이상과 눈멂, 압제와 약탈, 자녀와 재산을 빼앗김, 굶주림과 목마름과 헐벗음이 포함되어 있다(신 28:20-35, 47-48, 58-6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저주들의 표지를 실제로 담당하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신 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분은 옷 벗김을 당하여 헐벗으셨고, 십자가에서 &amp;ldquo;내가 목마르다&amp;rdquo;고 말씀하셨으며, 모든 제자가 도망함으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다(마 26:56, 요 19:23-24, 28). 채찍에 맞아 육체의 질병과 통증의 저주를 담당했고, 사람들의 조롱과 침 뱉음과 모욕을 통하여 정신적 수치와 버림받음의 저주를 담당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율법은 나무에 달린 자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신 21:22-23). 십자기형(十字架刑, Crucifixion)은 사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사한 처형 방식이 사용되었고, 이후 헬라와 로마 시대에 십자가형이 발전된 것인데, 이러한 처형 방법이&amp;nbsp;예수 시대에 사용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攝理, providence) 안에 있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신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의 용서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의 삯인 사망뿐 아니라 율법을 어긴 인간에게 임한 질병과 가난과 헐벗음과 목마름과 정신적 억압과 삶의 막힘까지 담당하셨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율법을 어기면 왜 질병과 가난, 신기와 막힘의 저주가 임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율법에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긍정 명령과 하지 말아야 할 부정 명령이 같이 들어 있다. 유대 전통은 모세오경의 계명을 613가지로 정리하여, 하라는 계명 248가지와 하지 말라는 계명 365가지로 구분한다.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런데 신명기 27장에서는 &lt;strong&gt;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lt;/strong&gt;이라고 선언한다(신 27:26).&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신 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39;저주&amp;#39;는 단순히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어 벌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호 울타리를 벗어남으로 악한 영들이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감을 뜻한다. 우상숭배와 점술과 신접과 음행은 사람의 영과 몸을 악한 영에게 열어 주는 대표적인 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신명기 28장은 이러한 불순종의 결과로 중하고 오래가는 질병과 정신적 혼란과 압제와 가난과 자녀 문제를 연결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특히 율법의 저주에는 율법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질병과 재앙까지 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신 28:58-61).&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신 28:58-61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말씀에 순종하면 애굽에 내린 질병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amp;ldquo;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amp;rdquo;라고 계시하셨다(출 15:26).&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만 섬기면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병을 제거하며 낙태와 불임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다(출 23:24-26). 이것은 순종이 구원을 사는 공로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질병과 가난과 막힘이 있을 때 무조건 모든 원인을 죄로 단정해서도 안 되지만, 죄와 우상숭배와 악한 영의 문을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말씀에 불순종한 지점이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속량하셨는데도 왜 성도에게 질병이 남아 있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lt;strong&gt;객관적인 구속 사실&lt;/strong&gt;을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이미 속량하셨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마련된 은혜가 개인의 몸과 삶에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음식이 차려져 있어도 직접 먹지 않으면 배부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많은 성도가 &amp;ldquo;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나았다&amp;rdquo;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사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이다. 그러나 선포만으로 몸속의 악한 영들이 자동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 영들이 죄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들어왔다면, 그 죄의 권리는 다시 우리의 회개와 자백으로 제거되어야 한다(요일 1:9).&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불법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악한 영이 죄를 근거로 사람 안에 들어왔다면, 하나님은 그 영들을 그 사람의 자유의지와 회개를 무시한 채 무조건 끌어내지 아니하신다. 예수님의 대속은 나갈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지만, 개인은 그 근거를 믿음과 회개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바로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타난 인간의 범죄에 대한 결과의 차이이다. 창세기 2장은 죄의 결과로 죽음이 임한다고 선언한다(창 2:17).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의 범죄의 결과로서 뱀이 흙을 먹고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창 3:14). 이것 때문에 인간이 범죄하면 그것으로 사람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뱀과 악한 영들로 하여금 사람의 육체를 공격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게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만약 성도가 여러 세대 동안 예수를 믿었더라도 조상들의 죄와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지 않은 상태라면, 악한 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lt;/strong&gt;다만 믿는 세대가 있어서 여러 세대 동안 우상숭배를 끊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았다면 그 영들은 먹이를 얻지 못해 힘이 약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몇 대째 예수님을 믿은 경우에는 회개와 축사(逐邪, deliverance)를 시작하면 비교적 쉽게 악한 영들이 쫓겨나간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반대로 계속 제사를 지내고 무당과 점술을 찾고 음행과 혈기와 미움의 죄를 반복하고 있다면, 악한 영들은 지속적으로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몇 번 회개했다고 해서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큰 영들은 잘 안 나간다. 그러므로 내게 나타난 중한 병이 왜 회개했는데도 금방 낫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중하고 오래된 질병의 배후에는 오래 쌓인 죄와 많은 악한 영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회개의 분량을&amp;nbsp; 꾸준히 채워야 한다.&amp;nbsp;&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의 속량은 분명하다. 그리고 완전하다. 다만 문제는 십자가의 효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개인에게 적용되는 통로가 막혀 있다는 데에 있다. 믿음의 선포와 함께 죄의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자백으로 악한 영들의 권리를 제거해야만 실제 치유와 자유가 나타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왜 죄의 자백과 회개가 치유와 악한 영의 축출에 필요한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요한일서 1장 9절은 죄의 자백과 깨끗하게 됨의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일 1:9).&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자백(自白, confession)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호몰로게오&amp;rsquo;는 &amp;#39;같은 것을 말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amp;#39;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도 죄라고 인정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곧 자백인 것이다.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백이 아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리고 회개(悔改, repentance)는 단지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헬라어 &amp;lsquo;메타노이아&amp;rsquo;는 생각과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며, 다시는 같은 죄의 통로를 열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렇다면, 자백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에는 예수님의 피가 죄의 권리를 덮고 제거한다. 그러면 그 결과 악한 영은 더이상 사람 안에 머물 법적 근거를 잃게 된다. 그때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하면 악한 영이 실제로 떠나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가 충분하지 않다면 악한 영들이 버티며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회개의 분량이 차게 되면 나가라는 명령에 따라 그들은 신속히 떠나게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한편, 조상들의 죄를 내가 회개하는 것도 같은 원리에서 설명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는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출 20:5).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까지 대신 지는 것은 아니지만, 조상들이 열어 놓은 영적 통로와 그 결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여 악한 영의 권리를 끊어줄 때에 악한 영들은 떠나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리고 악한 영들이 떠나갈 때에 때로는 치유(治癒, healing)가 나타난다. 치유는 결코 선포만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대속, 개인의 믿음, 구체적인 자백, 실제적인 회개, 악한 영을 내보내는 축사, 그리고 성령의 치유가 함께 작동할 때 온전한 회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유를 행하려면 어느 한 요소만 붙들고 다른 요소를 무시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그러므로 회개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길일 뿐 아니라(마 4:17, 막 1:15), 저주를 끝내는 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서 빛 된 삶을 살고 천국의 상을 준비하기 위한 최적의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아니하여 질병과 정신적 억압과 삶의 막힘에 눌린 채 살아간다면,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위해 능동적으로 쓰임받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과 가정과 조상의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와 이름으로 악한 영을 내보내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하나 더 구별할 것이 더 있다. 모든 질병을 개인의 현재 죄 하나로 단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9:1-3).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을 분별할 때에는 개인의 죄, 조상의 우상숭배, 악한 영의 공격, 자연적 쇠약, 과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등을 모두 함께 살펴야 한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회개는 결코 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자신의 삶을 말씀 앞에 비추어 보는 일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 9:1-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치유가 더디 일어난다고 해서 곧 믿음이 없다고 정죄해서도 아니 된다. 성경에는 즉시 치유된 사람도 있고, 여러 단계에 걸쳐 회복된 사람도 있다. 벳새다의 맹인은 예수님의 첫 번째 안수 후 사람들을 나무 같은 것으로 보았고, 다시 안수받은 뒤에야 밝히 보게 되었다(막 8:22-25). 이는 하나님의 치유가 언제나 한 번의 기도와 동일한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성도는 약속을 붙들되 하나님의 주권(主權, sovereignty)과 치유의 과정도 인정해야 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막 8:22-25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회개와 축사는 의학적 치료를 부정하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였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하였다(골 4:14, 딤전 5:23). 하나님은 사람을 치유하실 때에 그 사람의 기도와 회개 그리고 축사뿐 아니라 의사와 약과 수술과 휴식도 함께 사용하실 수 있다. 영적 원인을 살피는 것과 책임 있게 치료받는 것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성도는 어느 한쪽만 절대화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 아래 모든 합당한 치료 수단을 분별하여 사용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결국 핵심은 십자가의 완전성과 적용의 책임을 함께 붙드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성도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그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차려 놓으신 은혜의 식탁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말씀을 믿고 죄를 끊고 실제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치유를 구하는 성도는 정죄와 두려움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자유를 실제로 받아 누리기 위한 믿음의 응답이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빛 가운데 내어놓을 때 예수님의 피가 깨끗하게 하며, 성령께서 몸과 혼과 생활을 새롭게 하신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네 번째 이유가 인간의 육체적&amp;middot;정신적 저주와 질병을 대신 담당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죄 없는 메시야 예수이며, 그분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한 대속적 고난이자 사랑으로 선택한 자발적 고난임을 살펴보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께서는 피 흘려 죽기 위해, 마귀를 인간의 자리에서 패배시키기 위해, 우리의 친족 구속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질병과 가난과 헐벗음과 목마름과 정신적 억압과 버림받음의 저주를 몸으로 담당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친히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은 나무에 달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는 죄 사함뿐 아니라 질병의 치유와 저주의 해방과 악한 영의 권세를 깨뜨릴 완전한 근거가 있다. 성도는 이 객관적 구속의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lt;strong&gt;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속량이 개인의 삶에 자동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왔기에, 우리도 또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그들의 권리를 제거해야 한다&lt;/strong&gt;. 선포만 반복하면서 죄의 문을 그대로 열어 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질병과 가난과 정신적 억압과 삶의 막힘이 있을 때에는 낙심하거나 자신을 정죄하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과 가문의 죄를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 우상숭배와 점술과 신접과 음행과 혈기와 미움과 탐욕의 통로가 있었다면 그러한 죄들을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 또한 성도는 몇 번 회개하고 나서 자신에게 변화가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래 쌓인 죄와 악한 영의 권리는 꾸준한 자백과 회개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가 죄의 권리를 제거하고 성령의 능력이 악한 영을 몰아낼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치유와 자유가 실제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회개와 치유의 목적은 단지 편안하게 사는 데 있지 않다.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빛 된 삶을 살아 천국의 상을 준비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은혜를 온전히 믿고, 날마다 죄를 자백하며 악한 영의 권세에서 벗어나 몸과 혼과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07월 16일(목)&lt;br /&gt; 정보배 목사&lt;br /&gt; &amp;nbsp;&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설교핵심]&lt;/p&gt; &lt;p&gt;이 설교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바탕으로&amp;nbsp;&lt;strong&gt;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네 번째 목적&lt;/strong&gt;이 우리 삶의&amp;nbsp;&lt;strong&gt;질병과 저주를 대속하기 위함&lt;/strong&gt;임을 역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예수께서 채찍에 맞고 고난을 당하신 사건이 단순한 희생을 넘어 율법을 어김으로써 인간에게 닥친&amp;nbsp;&lt;strong&gt;질병, 가난, 그리고 정신적 고통&lt;/strong&gt;이라는 모든 저주를 끊어내기 위한&amp;nbsp;&lt;strong&gt;법적 근거&lt;/strong&gt;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를 속량하셨을지라도, 저자는 성도들이&amp;nbsp;&lt;strong&gt;철저한 자백과 회개&lt;/strong&gt;를 통해 자신과 조상의 죄를 씻어내야만 몸속에 합법적으로 머무는&amp;nbsp;&lt;strong&gt;악한 영들을 몰아내고&lt;/strong&gt;&amp;nbsp;실제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신자의 삶에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amp;nbsp;&lt;strong&gt;회개라는 신앙적 응답&lt;/strong&gt;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ChatGPT Image 2026년 7월 16일 오후 08_47_142026-06-2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37d0959a8b0baed67b5ae29c4c2e7d3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0e56d2a0b43bc9d993fb012f90c5ce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59b32a61a201e530835f09cd8837f6a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d1df9b260ce2a00df06f0b12913e5a0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2d2ce865a6433dceb1a77ba18b183e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f7dbd6f56bee7396d31b11e6ae148e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8fd428ae43e354e06c8a4fa2579202f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0ec38f88a4f79a0a86985466a0454f2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d0472769fc90f903042252a35b5de80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c14543c6717ce3e7f0dde2b09eb7fe5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2dd8f9547230c6a0e866e9bcaa4513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d76586ec6430026dc41f8fa934a4b0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74fdd221365bf9c99895a1b3152335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41c7dd34b97ed1215cc6c34cd17f4d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Mechanisms_of_Divine_Redemption.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84af71d6216e5dafaa3fe461d66cea82.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인포그래픽_예수의_성육신_목적과_치유_원리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a521371dc8788ed992b03566659d554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b17becb767facc99e991ab74a2db0d0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666c39eb74b634aaa0bf16396fff112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c98f4f4ebc5d6cc82de710c0cc5efd2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dfbea598ca4c498eb296cdd22b754d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f34e1209dfdf9266c7177b7dd00a57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7c8cd5f0426b96cb0a9e0d8717900ad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919cd48bb2341bef49a6c9af06c4f8b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e877a77431419fe369ce4530ea6dca2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87bb4e830118f8d5bfe45de106da088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7da6c489e439345954a6ecd167efbac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fb23837b39727bc359855124d78329c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6)] Redemption_and_Total_Liberation.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424/262/64d8b53921542237f5a05f703a07e7ab.webp&quot; /&gt;&lt;/p&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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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item>
			<title>[기독론(145)] 이사야의 예언(05) “왜 죄없는 그분이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가?”(사52:13~53:12)_2026-07-15(수)</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2335</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기독론(145)] 이사야의 예언(05) &amp;ldquo;왜 죄없는 그분이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가?&amp;rdquo;(사52:13~53:12&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A03afI8iab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A03afI8iab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style=&quot;background:#faf7f1;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line-height:1.95;font-size:18px;padding:40px 20px 60px;word-break:keep-all;&quot;&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px;letter-spacing:.22em;color:#7a5c34;text-align:center;margin:0 0 18px;&quot;&gt;기독론 145&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font-size:30px;line-height:1.5;font-weight:700;color:#23201c;letter-spacing:-.01em;margin:0 0 8px;word-break:keep-all;&quot;&gt;왜 죄 없는 그분이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가?&lt;/p&gt; &lt;p style=&quot;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text-align:center;color:#5a544c;font-size:14px;margin:0 0 40px;&quot;&gt;동탄명성교회 &amp;middot; 정보배 목사&lt;/p&gt; &lt;div style=&quot;width:64px;height:3px;background:#7a5c34;margin:0 auto 48px;border-radius:2px;&quot;&gt;&amp;nbsp;&lt;/div&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까지는 구약성경 가운데 메시야의 고난을 가장 구체적으로 예언한 본문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단순히 죽는 분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질고를 짊어지고, 채찍에 맞고, 찔리고, 상하며, 마침내 죽임당하는 종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에게 고난받을 만한 죄가 전혀 없었다는 데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사람이 죄를 지은 뒤 그 대가로 질병과 가난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의로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벧전 2:20). 죄로 인한 고난은 응당 받아야 할 징계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전혀 다르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고, 거짓도 없으셨으며,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셨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단순히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에 맞고, 멸시와 조롱을 당하며, 헐벗고 목마르고, 온몸이 찢기는 고난까지 받으셔야 했는가?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죽음만 담당하셔도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사람에게 가져온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죄는 하늘에서 행위책에 기록되어 둘째 사망의 근거가 되며, 동시에 이 땅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침입하여 육체와 정신과 삶을 억압하는 통로가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죽음의 문제만을 해결한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은 죄의 삯인 사망을 담당하였고, 그분의 채찍과 멸시와 질고는 죄로 인해 사람에게 들어온 저주와 질병과 영적 억압을 담당하였다. 예수님의 피 역시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기능과, 죄를 자백하는 자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기능을 함께 가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의를 위한 고난은 어떻게 다른지, 예수님의 고난은 왜 대속적이며 자발적인지, 그분은 왜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과 멸시까지 받으셨는지, 죄를 지으면 왜 죽음과 악한 영들의 침입이라는 두 결과가 생기는지, 이사야 53장의 질고와 채찍은 질병 치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성결을 어떻게 다르게 이루는지, 그리고 왜 믿음의 선포만으로는 질병과 악한 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2. 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의를 위한 고난은 어떻게 다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모두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어 그 대가를 받는 고난과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죄 때문에 매를 맞으면서 오래 참는다고 해서 그 인내가 천국에서 상이나 면류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데에는 아무 칭찬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벧전 2:20).&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응당한 고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결과가 삶에 나타난다. 질병과 가난과 실패와 정신적 억압과 자녀의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 신명기 28장은 불순종이 가져오는 저주를 질병, 가난, 정신 이상, 자녀의 상실, 수고의 열매를 빼앗김 등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고난을 받으면서 자신을 의로운 고난의 사람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은 다르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악한 영의 일을 드러내다가 사람들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적극적인 고난이다. 악한 영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복음 전파자를 공격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이려 했던 것도 같은 원리다. 예수님이 그들의 명예와 종교 권력을 흔들었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반면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박해라면 끝까지 견뎌야 한다. 이 두 고난을 혼동하면 죄의 문제를 덮어 둔 채 자신을 순교자처럼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제거해야 할 저주와 악한 영의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고난의 가치는 고통의 강도나 기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는가가 중요하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고통만 견디면 마음이 완고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병상이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 고난은 돌이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고난 자체가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가 열매를 만든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받은 고난은 죄값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으며 죽임당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해서 매를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이것이 적극적인 고난이다. 죄를 숨기며 받는 고난과 진리를 전하다가 받는 고난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3. 왜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적이며 자발적인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고난은 응당한 고난이 아니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채찍과 멸시와 죽음이 임할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죄값을 대신 담당한 대속적 고난이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선택하신 자발적 고난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한다고 예언하였다. 사람들은 그분이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한 것이었다(사 53:4-5).&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핵심은 반복되는 &amp;#39;우리&amp;#39;라는 말이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가 받을 징계, 우리가 받아야 할 채찍이었다. 예수님의 몸에 일어난 모든 고난은 그분 자신의 죄와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우리 대신 그 고난을 받으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예수님은 이 고난을 피할 권리가 있으셨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불러 자신을 보호하게 할 수도 있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벧전 2:22-23).&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벧전 2:22-23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적이면서 자발적이다. 대속적이라는 말은 우리 대신 받으셨다는 뜻이고, 자발적이라는 말은 사랑으로 기꺼이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가 함께 있어야 십자가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대속이라는 말은 값을 대신 지불한다는 뜻이다. 죄인은 자기 죄의 값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 그 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사야 53장에는 &amp;#39;그가&amp;#39;와 &amp;#39;우리&amp;#39;가 반복해서 대조된다. 그가 찔렸으나 원인은 우리의 허물이었고, 그가 상했으나 원인은 우리의 죄악이었다. 그가 징계를 받았지만 평화는 우리가 누렸고, 그가 채찍에 맞았지만 나음은 우리가 받았다. 이것이 1:1로 대응되는 대속의 구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자발성은 십자가 직전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그분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모두 아셨고, 잡으러 온 자들 앞에 스스로 나아가셨다.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힘없는 희생자의 비극이 아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창조주께서 선택하신 사랑의 행동이다. 강요받은 죽음이었다면 그 사랑의 완전성이 드러날 수 없지만,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4. 예수님은 왜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과 멸시를 받으셨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창 2:17).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기 위해 죽기만 하셔도 될 것처럼 보인다. 유월절 어린양도 죽임당하면 되지, 채찍에 맞거나 조롱당할 필요는 없었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죽지 않으셨다. 그분은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고, 가시관을 쓰고, 옷 벗김을 당하고, 조롱받고, 채찍에 맞고, 목마름을 겪으셨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육체와 정신과 생활에 저주와 질병과 억압을 가져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죽음은 죄의 궁극적 결과다. 그러나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들어와 육체와 정신과 환경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으로 둘째 사망의 값을 지불하셨고, 채찍과 멸시와 헐벗음과 목마름으로 이 땅에서 사람이 받아야 할 육체적 정신적 저주의 값을 담당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고 말한 뒤, 곧바로 &amp;quot;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amp;quot;고 선언한다(벧전 2:24). 이는 십자가가 죄의 용서뿐 아니라 질병과 저주에서 벗어날 근거도 마련했다는 뜻이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는 두 층위가 있다. 하나는 죽음의 고난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기 전의 육체적 정신적 고난이다. 죽음은 사망의 값을 담당한 것이고, 채찍과 멸시와 질고는 죄로 인해 사람에게 임한 저주와 질병과 영적 억압을 담당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당하신 정신적 고난과 육체적 고난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멸시와 조롱과 침 뱉음과 버림받음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이 죄로 인해 겪는 수치와 상처를 담당한 것이다. 채찍과 가시관과 못 박힘과 갈증은 육체가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을 담당한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과 몸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저주를 대신 경험하셨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분은 부유한 왕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죽지 않으셨다. 옷이 벗겨지고, 가진 것이 나뉘고, 목마름 속에 죽으셨다. 이는 가난과 결핍과 수치의 저주까지 담당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망의 형벌만을 해결한 최소한의 사건이 아니라, 타락 이후 인간이 겪어 온 저주의 전체 영역을 짊어진 충만한 대속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예수님의 고난은 사탄과 악한 영들에게 법적 패배를 안겨 주었다. 악한 영들은 죄를 근거로 사람을 공격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죄와 저주의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그들의 권리를 무효화할 근거가 생겼다. 성도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적용할 때 악한 영들은 더 이상 합법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5. 죄를 지으면 왜 죽음과 악한 영들의 침입이라는 두 결과가 생기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죄를 지으면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하늘의 문제다. 죄가 행위책에 기록되어 심판의 근거가 된다. 둘째는 이 땅의 문제다.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들어와 육체와 정신과 삶을 억압한다. 창세기 2장은 죽음의 문제를 말하고, 창세기 3장은 뱀의 침입과 저주의 문제를 보여 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뱀에게 평생 흙을 먹으라고 명하셨다(창 3:14). 여기서 흙은 단순한 땅을 뜻하는 &amp;#39;에레츠&amp;#39;가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만든 재료를 가리키는 &amp;#39;아파르&amp;#39;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땅의 흙, 곧 &amp;#39;아파르&amp;#39;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셨다(창 2:7). 그러므로 뱀이 흙을 먹는다는 말은 뱀이 사람의 육체를 먹잇감으로 삼는 영적 실상을 포함한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죄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을 연다. 우상숭배를 하면 우상숭배의 영이 들어오고, 혈기와 분노를 반복하면 혈기와 분노의 영이 들어오며,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품으면 그 성향을 강화하는 영들이 들어온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죽인 사건은 죄가 마음속 욕망으로만 머물지 않고 악한 영의 작용과 결합하여 살인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악한 영들은 사람의 육체와 신경과 혈관과 정신을 억압한다. 그 결과 피곤함과 통증과 불면과 우울과 불안과 공포와 정신적 혼란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방해가 일어나 수고의 열매를 충분히 얻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죄가 이 땅에서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구원은 행위책의 죄만 덮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의 기록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함께, 이 땅에서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을 회개와 자백으로 내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죽음의 문제와 악한 영들의 침입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온전한 구원이 삶에 적용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하늘의 기록과 이 땅의 침입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행위책은 마지막 심판과 관련된다.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으로 품은 것이 기록되어 하나님 앞에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피가 그 죄를 덮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 이것이 죽음과 둘째 사망의 문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악한 영의 침입은 현재의 삶과 관련된다. 죄를 짓는 순간 악한 영은 그 죄를 발판으로 삼아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육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번의 죄가 반복되면 통로가 넓어지고, 악한 성향은 습관과 중독과 질병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죄를 통하여 들어온 영적 존재를 방치하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일한 혈기와 음란과 우울과 질병에 계속 묶여 살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조상들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같은 원리다. 후손이 조상의 행위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가문 안에서 반복된 우상숭배와 무속과 음행과 폭력은 악한 영들이 머무는 통로를 형성한다. 후손이 그 죄를 인정하고 끊어 내지 않으면 같은 성향과 질병과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 이것이 조상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이유다. 조상을 대신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근거로 붙어 있는 악한 영의 권리를 끊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6. 이사야 53장의 질고와 채찍은 질병 치유와 어떻게 연결되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53장 4절은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질고는 단순히 마음의 슬픔만이 아니라 육체의 질병과 연약함을 포함한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신 사건을 이사야 53장 4절의 성취로 해석하였다(마 8:16-17).&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 본문은 질병과 귀신의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열병이 떠났다고 기록한 것도 질병 뒤에 인격적인 악한 영의 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병이 발이 달려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병을 일으킨 영적 세력이 떠났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육체의 징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등과 온몸이 찢긴 것은 단순한 로마 형벌의 잔혹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죄로 인해 육체에 들어온 질병과 저주의 권세를 무너뜨릴 법적 근거를 마련한 사건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amp;quot;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이미 나았다&amp;quot;라고 선포하는 것만으로 모든 질병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속의 근거는 이미 마련되었지만, 그 효력이 개인의 삶에 적용되려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을 실제로 내보내야 한다. 십자가의 객관적 성취와 개인의 주관적 적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믿음의 선포는 필요하다. 그러나 선포는 회개와 축사를 대신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채찍은 치유의 근거이고, 회개와 자백은 그 근거를 내 삶에 적용하는 통로다. 성도는 질병을 단지 육체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죄와 악한 영의 침입 여부를 함께 살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마태복음 8장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의 실제 치유 사역에 연결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병을 말로만 위로하지 않으셨다. 손을 대어 고치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의 질고 담당이 단지 영적인 비유가 아니라 실제 육체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성경적 증거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다만 모든 질병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과로와 영양 부족과 사고로 생긴 질병도 있고, 죄와 악한 영의 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질병도 있다. 육체적 원인이 있다면 충분한 휴식과 치료가 필요하다. 동시에 반복되는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원인을 찾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면 영적 통로도 살펴야 한다. 성경적 치유는 의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원인과 보이지 않는 원인을 함께 다루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채찍은 치유의 가능성을 여는 근거다. 그러나 그 근거를 실제로 누리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권리를 끊고, 몸을 다시 죄의 도구로 내주지 않아야 한다. 치유받은 뒤 같은 죄로 돌아가면 더 악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7.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성결을 어떻게 다르게 이루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피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그 피는 하늘에서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기능을 가지며, 동시에 이 땅에서 사람을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기능을 가진다. 요한일서 1장 7절과 9절은 이 두 기능을 구별하여 보여 준다.&lt;/p&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div&gt; &lt;div style=&quot;margin:22px 0 26px;padding:18px 22px;background:#f4efe4;border-left:4px solid #7a5c34;border-radius:6px;font-size:16.5px;line-height:1.85;color:#3f382e;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weight:bold;word-break:keep-all;&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div&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속죄는 죄의 기록을 덮는 일이다. 죄인은 본래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피가 죄를 덮음으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처럼 여겨 주신다. 이것이 칭의다. 칭의는 사람이 실제로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뜻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사람의 내면과 육체에는 죄를 통하여 들어온 더러운 영들과 악한 성향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결이 필요하다. 성결은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여 악한 영을 몸과 혼에서 떼어 내고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속죄는 믿음으로 받지만, 성결은 자백과 회개를 요구한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백하지 않으면, 하늘의 행위책은 피로 덮일 수 있어도 이 땅에서 악한 영들이 주는 억압은 계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 기도는 주문이 아니라, 자신과 조상들이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악한 영들의 권리를 제거하는 영적 행위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피가 죄를 덮는 것과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역이 아니다. 하나는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이다. 이 두 사역이 함께 적용될 때 성도는 죄 사함뿐 아니라 실제적인 자유와 치유를 누리게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구약의 제사에서도 속죄와 정결은 구별되었다. 속죄 제사를 드려 죄 사함을 받은 뒤에도 부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결의 절차가 필요했다. 죄책의 제거와 실제 더러움의 제거가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피는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양심과 삶을 깨끗하게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칭의만 강조하고 성결을 무시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더러움을 방치하게 된다. 반대로 성결만 강조하고 속죄를 잊으면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깨끗해지려다가 정죄와 율법주의에 빠진다. 먼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그 은혜를 근거로 계속 죄를 자백하며 내면과 육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회개 기도문은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죄의 항목을 알려 주는 안내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어를 반복한다고 자동으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와 조상의 죄를 실제 죄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돌이키며, 그 죄와 연결된 악한 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보내야 한다. 자백과 믿음과 결단이 함께 있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8. 왜 믿음의 선포만으로는 질병과 악한 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많은 성도가 &amp;quot;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나았다&amp;quot;고 반복하여 선포한다. 이 고백 자체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선포를 백 번, 천 번 반복해도 몸속에 들어온 악한 영을 하나도 내보내지 않는다면 실제 질병은 그대로 남을 수 있다. 대속의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질병과 영적 억압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다면 먼저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한다. 자신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음행과 폭력과 혈기와 살인과 무속 행위 등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를 자백해야 한다. 출애굽기 20장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가 역사한다. 그 피는 악한 영을 사람에게서 이격시키고, 죄의 권리를 녹여 버린다. 그다음 성령의 불과 성령의 칼이 악한 영을 태우고 잘라 낸다. 피가 이격시키고 녹이는 일과, 불과 칼이 태우고 자르는 일은 구별된다. 회개와 축사는 이 두 사역을 실제로 경험하게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질병을 단지 약과 운동과 긍정적 사고만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약을 먹어도 몸에 영적 거머리들이 붙어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다면 온전한 회복이 어렵다. 육체의 치료와 함께 죄의 문을 닫고 악한 영을 내보내는 영적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신기가 있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집사와 권사가 되어도, 악한 영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다시 무속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교회가 이 문제를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는 해결받을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이 악한 영의 권세를 무너뜨릴 근거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믿음의 선포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회개와 자백과 악한 영의 축출이 뒤따라야 한다. 그때 예수님의 채찍과 피의 효력이 실제 몸과 정신과 삶에 나타난다.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을 단지 교리로 고백하는 데 머물지 말고, 그 대속의 혜택을 실제로 적용받아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선포는 진리를 입으로 동의하는 행위지만, 회개는 죄의 방향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행위다. 입으로는 나았다고 말하면서 동일한 죄를 계속 짓는다면 악한 영의 통로는 닫히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죄가 만든 법적 권리를 제거할 수 없다. 먼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축사 역시 큰 소리나 특별한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와 이름의 권세, 정확한 회개, 성령의 은사가 함께 역사해야 한다. 악한 영의 종류와 들어온 통로를 분별하고, 그 권리를 취소하며, 떠나가도록 명령해야 한다. 이후에는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빈자리를 성령으로 채워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자동적인 구원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사실은 참이지만, 그 은혜를 적용받는 과정에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 약속은 이미 주어졌지만, 약속을 붙잡고 실제로 죄를 끊으며 악한 영을 대적하는 사람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lt;/p&gt; &lt;p style=&quot;font-size:21px;line-height:1.55;font-weight:700;color:#2c261e;margin:54px 0 22px;padding-bottom:14px;border-bottom:1px solid #e5ded2;word-break:keep-all;&quot;&gt;9. 나오며&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죄 없는 예수님께서 왜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죄 때문에 받는 응당한 고난과 복음을 위하여 받는 적극적인 고난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대신 기꺼이 받으신 대속적이며 자발적인 고난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단지 죽기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채찍과 멸시와 조롱과 헐벗음과 목마름을 담당하셨다. 이는 죄의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침입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저주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은 둘째 사망의 값을 지불하였고, 그분의 채찍과 질고는 질병과 저주의 권세를 무너뜨릴 근거를 마련하였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는 행위책에 기록되고, 이 땅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침입한다는 두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늘의 죄 기록이 덮이는 칭의와, 사람 안의 악한 영이 제거되는 성결을 함께 포함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의 피는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피이며, 죄를 자백하는 자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피다. 믿음으로 속죄를 받아야 하고, 구체적인 자백과 회개를 통하여 성결을 이루어야 한다. 선포만 반복하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악한 영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질병과 억압은 계속될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정직하게 분별해야 한다. 죄로 인한 고난이라면 의로운 고난인 것처럼 포장하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악한 영이 들어온 통로를 찾아 닫아야 하며,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능력으로 그 영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육체와 정신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자신의 육체가 있을 때 복음을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 죄로 인한 쓸데없는 고난에 묶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받는 적극적인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그 고난은 천국에서 상과 면류관이 되기 때문이다.&lt;/p&gt; &lt;p style=&quot;margin:0;font-size:18px;line-height:1.95;color:#23201c;font-family:&#039;Noto Serif KR&#039;,&#039;Nanum Myeongjo&#039;,&#039;Batang&#039;,serif;text-align:justify;word-break:keep-all;&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죄 없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자발적으로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마련하신 속죄와 성결과 치유와 자유를 실제로 누리며, 자신의 몸을 의의 도구로 드려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style=&quot;margin:72px 0 0;padding-top:22px;border-top:1px solid #e5ded2;font-family:&#039;Noto Sans KR&#039;,&#039;Malgun Gothic&#039;,sans-serif;font-size:13.5px;color:#5a544c;text-align:center;line-height:1.8;&quot;&gt;2026년 07월 15일(수)&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br /&gt; 이 설교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지닌&amp;nbsp;&lt;strong&gt;대속적 성격&lt;/strong&gt;과 그 구체적인 효력을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저자 정보배 목사는 성도가 겪는 고난을 죄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 응당적 고난과 복음을 위한 적극적 고난으로 구분하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질병과 저주를 끊기 위해&amp;nbsp;&lt;strong&gt;자발적 고난&lt;/strong&gt;을 택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죄의 결과가 영원한 사망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장악하는&amp;nbsp;&lt;strong&gt;악한 영들의 침투&lt;/strong&gt;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며, 십자가의 보혈이 하늘의 행위록을 덮는 속죄를 넘어 우리 내부의&amp;nbsp;&lt;strong&gt;더러움을 씻어내는 성결&lt;/strong&gt;의 근거가 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회개와 자백을 통해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무의미한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한&amp;nbsp;&lt;strong&gt;의의 병기&lt;/strong&gt;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 목적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인포그래픽_ChatGPT Image 2026년 7월 15일 오후 09_57_452026-06-2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734cfee8baf378848c013b43735c915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2cc8475bd9878656f8f195902b9952b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c6bd77634edb1187d85b49f485c57a9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74d2b84e358915f9f6a5f30d1fe38d3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2bf31beac19b3381ce73b8123183cf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73a843d090ede15e25bf6d1a3e3c611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45c0abd7a8f2f49ec5defe2dc4af81c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ab4f49b377681f22e5d2ef868ff9d65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0a065cc5481beaade0cf7562feac114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d60b97d45f8003b73f65c2bae0f7d79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1cb67f121bf0869db7ffd6490955c6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8a30e5c018594b8e1c2341c7e29be1c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ce9efd70c2291206003127b9bc802d8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9abf366c07d18790970411a8d368b41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234e5e3e2e6e6651a06a4e5d357a989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Complete_Cross.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50ece08b8d8c89e0821cc58b1e1b1b4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예수님의_고난과_완전한_대속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6f39cb387f7b3b182cc1d9f3e751f1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Innocent_Sacrific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ccb0152e144bf624de36a74a8bd64dd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Innocent_Sacrific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d27e13c572b18a7ef7cff4ee911868b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Innocent_Sacrific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335/262/20fa2cb42927d7eccb32a4c0acc31c6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5)] The_Innocent_Sacrifice.pdf_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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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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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44)]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사9:6~7)_2026-07-14(화)</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2297</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44)]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사9:6~7)&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oeMhRmjUxEI&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oeMhRmjUxEI?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sans-serif; font-size: 10pt; line-height: 1.65; } h2 { font-size: 11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 2.8em 0 0.8em 0; padding: 0; } p { margin: 0; padding: 0; } p.title { font-weight: bold; } blockquote.scripture { margin: 22px 0 26px; padding: 18px 22px; background: var(--scrip-bg); border-left: 4px solid var(--accent); border-radius: 6px; font-size: 16.5px; line-height: 1.85; color:#854ba0; font-family: &#039;Noto Sans KR&#039;, sans-serif; word-break: keep-all; } P.sign { margin-top: 2em; line-height: 1.7; } p.date { margin-top: 1.5em; } p.author { margin: 0; } p.char-count { margin-top: 1em; font-weight: bold; } &lt;/style&gt; &lt;p class=&quot;title&quot;&gt;&amp;nbsp;&lt;/p&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분이 아니라, 홀로 한 분이신 창조주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은 모든 신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마지막 기준이다. 사람이 피조물의 정체를 다소 잘못 이해할 수는 있어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뒤바꾸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아닌 존재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순간 그 신앙은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처음부터 피조물에게 &amp;ldquo;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amp;rdquo;고 속였고, 오늘날에도 사람이나 천사나 어떤 영적 존재를 하나님처럼 높이도록 미혹한다(요 8:44).&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이단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amp;ldquo;하나님이 누구신가&amp;rdquo;라는 질문에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경을 말하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왜곡하면 결국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과 십자가의 의미가 한 줄로 연결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이사야 9장 6~7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lt;/strong&gt;다. 장차 한 아기가 태어나고 한 아들이 주어지는데, 그분은 단지 위대한 선지자나 인간 왕이 아니다. 그분의 이름은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분의 통치는 다윗의 보좌와 나라 위에 영원히 세워진다. 이 예언은 보이지 않는 한 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이는 아들과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실 것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오셔야 했는지를 미리 증언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몇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lt;strong&gt;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면서도 예수님은 왜 자신을 &amp;ldquo;나는 아버지다&amp;rdqu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피조물의 몸을 입고 죽음까지 경험하셔야 했는가?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오시는가?&lt;/strong&gt;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이사야 9장 6~7절을 중심으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이 무엇이며, 그 성육신이 속죄와 마귀의 멸망과 친족 구속의 경륜을 어떻게 성취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lt;h2&gt;2. 왜 하나님을 한 분으로 아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인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성경은 하나님을 셀 수 없는 신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유일한 창조주시며, 모든 생명과 권세의 근원이시다. 구약에서 그분은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고,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출 3:14~15). 이는 하나님이 다른 존재에게서 생명을 받거나 권세를 위임받은 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시라는 뜻이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출 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신앙의 모든 영역이 흔들린다&lt;/strong&gt;. &lt;strong&gt;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가 무너진다&lt;/strong&gt;. 사람이나 천사나 어떤 영적 존재도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주관할 수 없다. 피조물은 시간 안에서 생겨나고 변화하며 늙고 소멸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이나 재림주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성경의 첫 토대에서 이미 무너진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하나님을 여러 분으로 나누어 이해하면 구원의 주체가 흐려진다&lt;/strong&gt;. 성경은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각기 다른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분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 안에서 아들로 나타나시고, 아들 안에서 속죄를 이루시며, 성령으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신다. 이 모든 사역의 주체는 한 분 하나님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다&lt;/strong&gt;.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최고의 피조물이나 탁월한 종으로 보면 그분의 피는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할 수 없다. 반대로 예수님을 아버지와 전혀 무관한 또 다른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반복하여 선포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손상된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세상에 오신 분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영생은 막연히 신적 존재를 믿는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영생을 &amp;ldquo;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amp;rdquo;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여기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아들의 보내심이 함께 들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 두 하나님으로 갈라놓아서도 안 된다.&lt;/p&gt; &lt;blockquote.scripture&gt;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을 한 분으로 아는 것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지, 누구의 이름으로 구원받는지, 누구에게 생명과 심판의 권세가 있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성도는 피조물에 대한 호기심보다 먼저 창조주에 대한 정확한 계시를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거짓 영의 미혹을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lt;/p&gt; &lt;h2&gt;3. 이사야 9장 6절의 아기와 아들은 누구인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 9장 6절은 &lt;strong&gt;한 아기의 탄생과 한 아들의 주어짐&lt;/strong&gt;을 동시에 말한다. &amp;ldquo;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amp;rdquo;는 표현은 그분의 참된 인성과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적 기원을 함께 보여 준다. 아기는 실제로 태어난다.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시지만, 그 존재의 근원은 단지 인간에게 있지 않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 위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본문에서 &amp;ldquo;우리에게&amp;rdquo;라는 표현은 단순히 한 시대의 유다 백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아기와 아들은 죄 아래 놓인 인류를 위하여 오신다. 또한 &amp;ldquo;주신 바 되었다&amp;rdquo;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로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뜻을 가진다. 요한복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의 어깨에는 정사, 곧 통치권이 놓인다. 고대 세계에서 어깨는 책임과 권위를 상징한다. 메시야는 단지 죄인을 위로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고 심판하며 질서를 세우는 왕으로 오신다. 그분의 왕권은 다윗의 보좌를 이어받지만, 다윗보다 훨씬 크다. 다윗의 왕국은 역사 속에서 끝났지만, 이 아들의 통치와 평강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본문은 이어서 &lt;strong&gt;그분의 이름을 다섯 가지 칭호&lt;/strong&gt;로 밝힌다. &amp;ldquo;기묘자&amp;rdquo;는 인간의 지혜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분을 뜻한다. &amp;ldquo;모사&amp;rdquo;는 완전한 계획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다. &amp;ldquo;전능하신 하나님&amp;rdquo;은 그분이 피조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준다. &amp;ldquo;영존하시는 아버지&amp;rdquo;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며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amp;ldquo;평강의 왕&amp;rdquo;은 원수를 제압하고 참된 샬롬을 세우시는 통치자라는 뜻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히 &amp;ldquo;전능하신 하나님&amp;rdquo;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amp;lsquo;엘 깁보르&amp;rsquo;는 단순한 영웅이나 강한 용사를 넘어 하나님께 사용되는 칭호다. &amp;lsquo;깁보르&amp;rsquo;는 강한 자, 용사라는 뜻을 가지며, &amp;lsquo;엘&amp;rsquo;과 결합될 때 용사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이룬다. 이사야 10장 21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9장 6절의 아들은 신적 능력을 위임받은 인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amp;ldquo;영존하시는 아버지&amp;rdquo;는 히브리어로 &amp;lsquo;아비 아드&amp;rsquo;라고 할 수 있는데, 직역하면 영원의 아버지 혹은 영원함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는 아들이 시간 안에서 잠깐 존재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언한다. 동시에 그분이 자기 백성을 아버지처럼 보호하고 공급하며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결국 이사야 9장 6절의 &lt;strong&gt;아기와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lt;/strong&gt;를 가리킨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실제 아기로 태어나셨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주신 아들이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왕권을 취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의 정체는 인간 왕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원의 근원으로 불려지기 때문이다.&lt;/p&gt; &lt;h2&gt;4. 왜 아들은 &amp;lsquo;영존하시는 아버지&amp;rsquo;라고 불리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의 예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가운데 하나는&lt;strong&gt; 아들이 &amp;ldquo;영존하시는 아버지&amp;rdquo;라고 불린다&lt;/strong&gt;는 사실이다.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다른 관계적 명칭인데,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풀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의 &amp;lsquo;아버지&amp;rsquo;만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lt;/strong&gt;이다. 그런데 &lt;strong&gt;때가 차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나타나셨다. 그 순간 하늘에 계신 분은 아버지라 불리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은 아들이라 불리게&lt;/strong&gt; 되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버지와 아들은 관계적 명칭이다.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구분하여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품속에서 나와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그 관계가 역사 속에 드러났다(요 1:18).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되지만, 아버지와 무관한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세상에 도착하셨다고 말씀하셨다(요 8:42). 여기서 &amp;lsquo;나오다&amp;rsquo;는 뜻의 헬라어 &amp;lsquo;에르코마이&amp;rsquo; 계열 표현과 &amp;lsquo;오다, 도착하다&amp;rsquo;는 뜻의 &amp;lsquo;헤코&amp;rsquo;는 예수님의 오심이 아버지의 품에서 세상으로의 실제적인 나타나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분은 자신과 무관한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파송된 피조물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육신 안에 도착하신 분이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도착하였기 때문)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며,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을 온전히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께서 거하셨고,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었다(요 14:9~10). 예수님을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것은 아들의 육체적 외모가 곧 아버지의 외형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과 영광과 뜻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는 뜻이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따라서 &lt;strong&gt;&amp;ldquo;아들이 아버지다&amp;rdquo;라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amp;ldquo;아들은 아버지와 전혀 무관하다&amp;rdquo;고 분리하는 것도 잘못&lt;/strong&gt;이다. 성경의 균형은 분명하다.&lt;strong&gt;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된다. 그러나 아들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시며, 두 분은 신적 본질과 뜻과 생명에서 하나다&lt;/strong&gt;. 그래서 예수님은 &amp;ldquo;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amp;rdquo;고 말씀하셨다(요 10:30).&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이 한 분 하나님의 신비를 압축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관계적으로 구별되지만, 그분 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온전히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지 아버지를 소개하는 대리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lt;/p&gt; &lt;h2&gt;5. 예수님은 왜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으셨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여러 방식으로 드러내셨다. 죄를 사하셨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으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자신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하나님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그러나 &lt;strong&gt;복음서 어디에서도 &amp;ldquo;나는 아버지다&amp;rdquo;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성육신 이후 아버지와 아들이 실제로 구별되어 동시에 존재하셨기 때문&lt;/strong&gt;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으며,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증언하셨다. 겟세마네에서 &amp;ldquo;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amp;rdquo;라고 기도하신 사건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적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마 26:39).&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은 &lt;strong&gt;한 분 하나님이 한 장소에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다른 장소에서는 아버지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아들로 변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태론적 오류에 빠진다&lt;/strong&gt;. 성경은 아들이 땅에 계실 때도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고 증언한다. 아들이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때 아버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lt;/p&gt; &lt;p&gt;&amp;nbsp;&amp;nbsp;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독립된 두 하나님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으며,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곧 자신을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 13:20). 그분의 말과 행위는 아버지의 말과 행위였다(요 8:28, 14:24, 14:10). 예수님을 보는 것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요 12:45, 14:9).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요 8:26, 40). 예수님의 행동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요 14:10). 그렇다.&amp;nbsp;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신적 연합 속에 계신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8: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 그러므로 &lt;strong&gt;우리는 &amp;ldquo;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amp;rdquo;는 표현은 옳은 것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한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로 변하여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하신 하나님을 아들로 나타내심으로,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아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lt;/strong&gt;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신 분은 육신을 입으신 아들이다. 하나님은 본래 영이시며 죽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취하심으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다. 이를 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직접 죽었다고 말하면 성부고난설의 오류가 된다.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과 육체 안에서 고난받으셨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으신 것은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정확히 계시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왔고, 아버지께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 아들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 14:6).&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해야 하지만, 두 하나님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아들의 동시 존재를 지워서도 안 된다. 성경의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과 하나 됨을 함께 붙들도록 요구한다.&lt;/p&gt; &lt;h2&gt;6. 창세기의 &amp;lsquo;우리&amp;rsquo;는 삼위의 회의를 뜻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amp;ldquo;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amp;rdquo;&lt;/strong&gt;고 말씀하신다. &lt;strong&gt;많은 해석은 이 &amp;lsquo;우리&amp;rsquo;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협의한 표현으로 이해&lt;/strong&gt;한다. 그러나 이 본문만으로 영원 전부터 세 분의 하나님이 회의를 열어 창조를 결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바로 다음 절은 하나님이 &amp;lsquo;자기 형상&amp;rsquo;, 곧 &amp;lsquo;하나님의 형상&amp;rsquo;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단수로 말하기 때문이다(창 1:27).&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창 1:26~27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성경에는 &lt;strong&gt;하나님께서 천상 어전회의 가운데 천사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장면&lt;/strong&gt;이 여러 차례 나온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 가운데 참석한다(욥 1:6-7). 열왕기상 22장에서는 여호와께서 하늘의 만군과 더불어 아합의 심판에 관하여 말씀하신다(왕상 22:19). 이사야 6장에서도 한 분이신 주께서 하나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며 스랍들이 그분을 섬긴다. 이때 이사야는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을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라고 부른다(사 6:5). &amp;lsquo;만군&amp;rsquo;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amp;lsquo;체바오트&amp;rsquo;는 군대들, 곧 하늘의 군대를 뜻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군대의 주권자이시다. 보좌는 하나이며, 그 보좌의 주인도 한 분이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사 6:1~5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이어서 하나님은 &amp;ldquo;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amp;rdquo;라고 말씀하신다(사 6:8). &amp;lsquo;내가&amp;rsquo;는 말씀하시는 주체가 한 분임을 보여 주고, &amp;lsquo;우리&amp;rsquo;는 그분 앞에 서 있는 천상의 어전회의 천사들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조는 창세기 1장 26절의 &amp;lsquo;우리&amp;rsquo;를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그렇다고 천사들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뜻은 아니다. 창조의 실행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천상 어전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선포하실 수 있지만, 생명을 주고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는 권능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amp;lsquo;우리&amp;rsquo;가 등장해도 창조주가 여러 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해석은&lt;strong&gt; 하나님의 경륜이 창세 전부터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히 공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고,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lt;/strong&gt;. 사탄은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전지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계획을 감추셨다가 정한 때에 계시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따라서 &lt;strong&gt;창세기의 &amp;lsquo;우리&amp;rsquo;를 곧바로 세 분 하나님의 회의로 단정하기보다, 한 분 하나님과 그분의 천상 어전이라는 성경 전체의 배경 속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유일성과 천상 회의의 실제가 동시에 보존&lt;/strong&gt;된다.&lt;/p&gt; &lt;h2&gt;7. 한 분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 곧 아기이자 아들로 오셔야 했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굳이 연약한 아기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성육신은 인간의 구원을 가장 완전하게 이루고, 사탄을 가장 수치스럽게 패배시키며,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친족 구속자가 되기 위한 경륜이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하나님은 피를 흘려 죄를 속죄하기 위해&lt;/strong&gt; 아들로 오셨다. 율법은 생명이 피에 있으며 피가 죄를 속한다고 증언한다(레 17:11). 히브리서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말한다(히 9:22).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본래 살과 피가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죄인을 대신하여 피 흘리고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 했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lt;/span&gt;&lt;/blockquote&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amp;lsquo;속죄하다&amp;rsquo;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amp;lsquo;카파르&amp;rsquo;는 기본적으로 덮다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에서 죄를 가리고, 관계를 화해시키며, 용서를 이루는 의미가 발전한다. 예수님의 피는 단지 상징적인 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흘리신 속죄의 피이며, 회개하고 믿는 자의 죄를 덮고 씻어 의롭다 하시는 피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하나님은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기 위해&lt;/strong&gt; 아들로 오셨다.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그분은 죽음을 경험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여 평생 종노릇하던 자들을 놓아주셨다(히 2:14~15).&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lt;span style=&quot;color:#8e44ad;&quot;&gt;히 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lt;/span&gt;&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능력으로 사탄을 즉시 제거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사보다 잠시 못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그 인간의 몸으로 시험을 이기며,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자신을 높이며 인간을 멸시하던 타락한 천사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 패배한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심판이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친족 구속자가 되기 위해&lt;/strong&gt; 아들로 오셨다. 구약의 &amp;lsquo;고엘&amp;rsquo;은 가까운 친족으로서 빚을 갚고, 팔린 기업을 되찾으며, 억울한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를 뜻한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 준 사건은 이 친족 구속의 원리를 잘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멀리서 값을 지불하는 분으로 머물지 않으셨다.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고 인간의 가족 안으로 들어오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관념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세 가지 목적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 죄를 속죄하시고, 그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시며, 인간의 친족으로서 잃어버린 생명과 기업을 되찾아 주셨다. 성육신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체험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구속과 전쟁과 기업 회복을 동시에 이루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의 인성을 약하게 보거나 그분의 신성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참사람이 아니시라면 우리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실 수 없다. 또한 참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 죽음이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속죄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자 참사람으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셨다.&lt;/p&gt; &lt;h2&gt;8. 성령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6). 여기서 &amp;lsquo;또 다른&amp;rsquo;에 해당하는 헬라어 &amp;lsquo;알로스&amp;rsquo;는 본질이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 것을 뜻하는 &amp;lsquo;헤테로스&amp;rsquo;와 구별된다. &amp;lsquo;알로스&amp;rsquo;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과 무관한 별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역을 가지고 오시는 보혜사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4:18). 이 말씀은 부활 후 잠시 나타나실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요한복음 14~16장의 문맥은 성령의 오심을 다룬다. 예수님은 육체로 떠나시지만 성령으로 제자들 가운데 다시 오신다.&lt;/p&gt; &lt;blockquote class=&quot;scripture&quot;&gt;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lt;/blockquote&gt; &lt;p&gt;&amp;nbsp;&amp;nbsp;성령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또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권세를 실제로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과 경쟁하지 않고, 예수님의 구원을 현재화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한 분 하나님의 경륜은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때가 차매 아들 예수로 나타나 피 흘려 구속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으로 믿는 자들 안에 임하여 구원의 효력을 적용하신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세 신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대와 목적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고 역사하시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렇다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적 구별을 지워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구하셨고, 성령은 아들의 이름으로 오셨다. 이 구별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본질과 생명과 뜻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동일한 역사 안에 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예수님과 무관한 제삼의 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가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확장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참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회개를 약화시키거나, 다른 구원자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루신 구원을 증언하고 적용하시는 영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대적하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영적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 앞에서는 굴복해야 한다. 이는 인간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사탄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성령을 통해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이사야 9장 6~7절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을 살펴보았다. 이사야가 예언한 아기는 단지 뛰어난 인간 왕이 아니며, 그 아들은 하나님과 별개의 또 다른 신도 아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불리는 메시야다. 곧 구약시대에 만군의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성육신 이후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오신 아들이 관계적으로 구별되어 동시에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amp;ldquo;나는 아버지다&amp;rdqu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셨다. 그렇지만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셨고,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아버지의 말씀과 사역이었다. 성도는 이 구별과 하나 됨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창세기의 &amp;lsquo;우리&amp;rsquo;를 세 분 하나님의 회의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 6장은 한 분이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나의 보좌에 앉아 천상 어전 가운데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천사들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선포하시지만, 창조와 구원의 주체는 언제나 한 분 하나님이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피를 흘려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친족 구속자가 되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에서 나온 차선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공의를 동시에 드러낸 완전한 구원 경륜이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고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성도가 평생 기억해야 할 복음의 중심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믿는 자들 가운데 다시 오신다. 성령은 예수님과 무관한 다른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언하고 적용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예수님을 높이고, 죄를 깨닫게 하며, 회개와 순종과 영적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신격화해서는 안 되며, 사람이나 천사나 어떤 영적 존재를 구원자로 섬겨서도 안 된다. 또한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나 피조된 아들로 낮추어서도 안 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 은혜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한 분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이처럼 자신을 낮추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성도는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만을 경배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한다. 또한 그 이름으로 악한 영을 대적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만을 경배하며 그분의 구원과 승리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quot;&gt;2026년 07월 14일(화)&lt;/p&gt; &lt;p class=&quot;author&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char-count&quot;&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lt;strong&gt;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의 관점&lt;/strong&gt;에서 재해석한 정보배 목사의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이사야 9장 6절을 근거로, &lt;strong&gt;아기로 오신 예수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lt;/strong&gt;라는 실상을 강조합니다. 특히&lt;strong&gt; 양태론과 같은 이단적 오해를 경계&lt;/strong&gt;하며, &lt;strong&gt;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시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형체로 나타나셨음&lt;/strong&gt;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이유는 &lt;strong&gt;신성과 인성을 지닌 중보자로서의 독특한 위치 때문&lt;/strong&gt;이며, 이는 &lt;strong&gt;피 흘림을 통해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lt;/strong&gt;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신앙의 핵심은 &lt;strong&gt;성경 속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한 분 하나님&lt;/strong&gt;임을 정확히 아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lt;strong&gt;이단을 분별하고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다&lt;/strong&gt;고 주장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인간이 된 창조주의 희생에 감사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배할 것을 촉구하며 설교를 맺습니다.&lt;/p&gt; &lt;p class=&quot;char-cou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char-cou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char-count&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char-count&quot;&gt;[또다른 요약입니다.]&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link href=&quot;https://fonts.googleapis.com&quot; rel=&quot;preconnect&quot; /&gt; &lt;link crossorigin=&quot;&quot; href=&quot;https://fonts.gstatic.com&quot; rel=&quot;preconnect&quot; /&gt; &lt;link href=&quot;https://fonts.googleapis.com/css2?family=Nanum+Gothic:wght@400;700;800&amp;amp;display=swap&quot; rel=&quot;stylesheet&quot; /&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sans-serif; font-size: 16px; line-height: 0; color: #222222; background: #ffffff; word-break: keep-all; } .post { width: 100%; margin: 0; padding: 0; /* 게시판 좌우 여백 없음 */ } .doc-title { font-size: 2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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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한 가지를 붙들면 유대인도 품을 수 있고 오늘날 개신교인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를 놓치면 신앙은 뿌리째 흔들린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모르면 우상숭배로 굴러떨어진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사탄 마귀가 조장한 함정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진리는 교회 안에서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지 않는다. 정확히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성도들이 이단에게 뽑혀 나간다. 신천지가 들어오고 하나님의교회가 들어온다.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아기이자 아들로 예언했다. 그런데 그 아기이자 아들을 &amp;quot;영존하시는 아버지&amp;quot;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amp;quot;나는 아버지다&amp;quot;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분을 아버지라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긴장 속에 한 분 하나님의 신비가 들어 있다. 이 신비를 풀지 못하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잘못 알게 된다. 잘못 알면 양태론 이단으로 굴러떨어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을 붙들되, 하나님이 한 분이심이 왜 신앙의 근본인지, 이사야 9장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 이가 누구인지, 예수님은 왜 끝까지 나는 아버지다 말하지 않으셨는지,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인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인지, 창세기 1장의 우리라는 표현이 삼위의 회의인지 천사와의 어전 회의인지,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고백이 왜 양태론과 갈라지는지,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왜 굳이 아기이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2.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왜 &amp;#39;한 분&amp;#39;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첫 단추가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붙들어야 신앙의 방향이 바로 선다. 이것을 놓치면 처음부터 어긋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단을 판별하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단 감별사들이 있다. 그들이 이단을 정의하는 첫 번째 잣대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느냐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까지 따진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느냐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구별할 것이 있다. 이단은 피조물을 잘못 아는 것으로 갈리지 않는다. 창조주를 잘못 아는 것으로 갈린다. 예를 들어 귀신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있다. 귀신이 뱀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귀신과 뱀이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귀신을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담 이전에 살았던 인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사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잡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별별 얘기를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단이라 하지 않으신다. 피조물에 관한 견해로는 이단이 되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문제는 창조주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믿는다. 그것이 우상숭배다. 그러면 그 우상숭배를 누가 조장했는가. 악한 영이다. 사탄 마귀가 자기를 섬기라고 조장한 것이다. 하와가 속아 넘어가 엄청난 징계를 받았다. 우리도 잘못 믿으면 속아 넘어가 지옥에 간다. 마귀는 거짓말의 아비다(요8:4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마귀가 하와에게 무엇이라 했는가.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다. 그 거짓말이 지금도 흐른다. 겁 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이라 한다. 자기가 재림 예수라 한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다 알지 못한다. 전지하지 않다. 전능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다. 늙어 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찌 피조물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단에 속한 사람은 뇌를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다. 악한 영이 장악한다. 그래서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한다. 정확히 알아야만 이단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이것을 모르니 이단이 자꾸 들어와 양 떼를 뽑아 간다. 비슷하기 때문에 속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정작 이 진리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침묵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지 않는다. 구원론도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그렇게 해 놓고 천국 못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에 가서 주님께 직접 물어 그 답을 전하면 직통 계시라고 몰아붙인다. 이단으로 정죄한다. 주님께 어떻게 직접 말을 듣느냐는 것이다. 못 듣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나쁘게 만들어 버린다. 무슨 파, 무슨 파 하고 낙인을 찍는다. 회개하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면 행위 구원자라고 매도한다. 이것이 전부 사탄 마귀의 작전이다. 우리가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정죄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부터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 하셨는가. 이사야는 그 답을 정확히 기록했다. 이제 그 본문으로 들어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3. 이사야 9장 6~7절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amp;#39;영존하신 아버지&amp;#39;라 부른 이는 누구인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사야 9장 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밝히신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니라. 그러므로 6절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감동시켜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먼저 6절을 보자(사9: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주어를 정확히 보아야 한다. 지금 예언하고 있는 사람은 이사야다. 그런데 본문의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제3자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어를 제대로 잡아야 이 본문이 열린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구조가 선명해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먼저 &amp;quot;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amp;quot;이다. 여기서 아기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그 낱말은 헬라어로 옮기면 파이디온이다. 곧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직역하면 이렇다. 아이가 우리를 향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사야가 하는 말이다. 이어서 &amp;quot;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amp;quot;이다. 여기에는 전치사가 붙어 있다. 그래서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주어졌다는 뜻이 된다. 아이가 우리를 향하여 단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의 어깨 위로 단번에 있게 되었다. 정사, 곧 주권이 그 어깨에 얹혔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까지는 주어가 아이와 아들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그다음 문장에서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앞에서는 아이와 아들이 주어였는데,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 주어가 감추어져 있다. 그 감추어진 주어가 무엇인가. 3인칭 단수다. 그분이다. 그분이 그 아기이자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기로 태어나고 어깨 위에 통치권이 주어질 그 아들의 이름을, 그분이 기묘자라, 모사라, 용사이신 하나님이라, 영원함의 아버지라, 평강의 통치자라 불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신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이사야가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니다. 답은 7절에 있다. 만군의 여호와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장차 보낼 그 아기이자 아들을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번역의 문제도 짚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대목을 수동태로 읽는다. 그의 이름이 기묘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읽는다. 그러나 원문은 능동태다. 그분이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부르셨다. 정확히는 장차 부르실 것이다. 미완료 형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미 부르신 것처럼 말씀하실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제 7절을 보자(사9:7).&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원문의 골격은 이렇다. 통치의 많아짐을 위하여, 그리고 평강을 위하여 끝이 없다. 통치가 계속되고 평강이 계속된다. 그래서 무궁하다고 옮긴다. 다윗의 보좌 위로, 그의 왕국 위로 끝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공의 안에서 그의 의 안에서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탱하기 위하여 끝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못을 박는다. 군대들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것을 장차 이루실 것이다.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결론은 분명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장차 보낼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신다. 아기로 오시는 그분이 곧 영원하신 아버지로 불릴 그분이시다. 여기에 한 분 하나님의 비밀이 압축되어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4. 예수님은 왜 단 한 번도 &amp;quot;나는 아버지다&amp;quot;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하나를 물어보자.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나타나셔서, 또는 성경 어디에서 &amp;quot;내가 아버지다&amp;quot;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맞는가 틀린가. 틀렸다. 그것은 삼일체 하나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확히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단 한 번도 예수님께서 &amp;quot;나는 아버지다&amp;quot;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없다. 지금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버지다,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저기 계신다고 하신다. 왜 그런가. 그 답을 정확히 붙들어야 한 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상대적 개념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 불린다. 아들은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라 불린다. 둘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낱말 자체를 쓸 수 없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셨다. 한 분이셨는데, 그 한 분으로부터 아들이 나오셨다. 그 아들이 이 땅에 도달하셨다. 그러자 이제는 신성만 가지신 아버지와, 나타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게 되었다. 둘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 아버지는 저기 계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나오심의 실상을 요한복음 8장이 정확히 밝혀 준다. 유대인들과의 논쟁 가운데 예수님이 자신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말씀하신다(요8:4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한글 성경은 이 구절의 힘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원문에는 두 동사가 나란히 있다. 먼저 &amp;quot;나와서&amp;quot;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헬라어로 에르코마이다. 이는 어디에서부터 나왔다는 뜻이다. 그다음 &amp;quot;왔음이라&amp;quot;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헬라어로 헤코다. 이는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확히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도착했다. 있던 분이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던 분이 나와서, 곧 나오셔서 이 땅에 도착하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나오심이 곧 나타나심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이 그것을 증언한다(요1:1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만세 전부터 따로 활동하던 아들이 온 것이 아니다. 만세 전에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다. 그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때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정의하지 않으신다. 이미 아버지의 품에서 나와 따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 하시는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다(요10:30).&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나는 아버지다라고 하지 않으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다. 둘이면서 하나다. 그러나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이렇게 흐른다. 아버지와 나를 분리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알아들어야 한 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들어야 삼위일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5. 구약의 &amp;#39;여호와&amp;#39;는 아버지의 이름인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인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다. 많은 사람이 여호와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안다. 그러나 원래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여호와는 아버지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정리하면 이렇다. 구약에는 한 분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 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예수라 하셨다. 그러니 구약의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나신 이름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 아니다.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한 분 하나님이 자기 속에 감추어 두셨던 아버지의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아들로 오셨다. 그러자 둘로 존재하게 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신약에 들어와서야 여호와가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그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 이름의 뿌리를 성경이 차례로 밝혀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를 이렇게 계시하셨다(출3:1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사무엘상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사무엘상부터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구약으로 친다면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아기와 아들로 보낼 자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님 한 분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곧 그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진리를 디모데전서가 다시 못 박는다(딤전6:15).&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구약의 하나님이 쓰시던 이름이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도 이 이름을 쓰신다.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씀이 더 결정적이다(딤전6:1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 나타나신 그분이 누구신가. 아들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보여 주실 수밖에 없었다. 피 흘려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피가 없으시다(요4:2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영은 살과 피가 없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그 여호와께서 아들로 나타나 예수라 하셨다. 이름의 계보를 붙들면 한 분 하나님이 선명해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그리려는 것이다. 천주교의 그림을 보라. 삼위일체를 그린다면서 아버지는 흰 수염을 늘어뜨린 늙은 할아버지로 그린다. 아들은 조금 젊은 모습에 십자가를 든 형상으로 그린다. 위에는 비둘기를 얹어 성령이라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똑같이 그려 놓아 누가 누구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틀리게 그리면 틀렸다 할까 봐 똑같이 그린 것이다.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 열심히 만들었으나 결국 잘못 만든 것이다. 어떤 그림은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와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온 장면을 그려 놓고, 하나님에게까지 날개를 달아 놓았다. 잘못 그린 것이다. 제대로 그린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천국에 계시고, 앉아 계신 그분은 늙은 할아버지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물론 하나님이 자신을 그런 노년의 모습으로 표현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뵐 때는 예수님을 뵙는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뵙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면 무엇이라 하시겠는가. 내가 만군의 여호와니라 하신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지, 아버지만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만군의 여호와인 것을 왜 모르느냐 하신다. 이름의 실상을 붙들면 이 대답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6. 창세기 1장 26절의 &amp;#39;우리&amp;#39;는 삼위의 회의인가, 천사와의 어전 회의인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제 가장 뜨거운 본문으로 들어간다. 창세기 1장 26절이다(창1:2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온다. 주된 해석은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협의하여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셋이 회의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셋이 회의하여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급 적용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왜 소급 적용인가. 만세 전부터 아들이 나와 있었고 성령이 나와 있어서 셋이 회의를 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있다. 사탄 마귀다. 가장 먼저 지음받았다고 추정되는 사탄 마귀는 하나님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탄이 무엇이라 했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나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데, 어디 증명해 보라고 했다. 이 시험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가. 사탄이 아들을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만세 전에 셋이 회의를 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사탄이 아들을 몰랐을 리 없다. 셋이 회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우리는 무엇인가. 이것을 가장 완벽하게 풀어 주는 본문이 이사야 6장이다. 먼저 이사야가 본 환상을 보자(사6: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대략 주전 740년경으로 잡는다. 정확히는 주전 739년에 죽는다. 여기서 붙들 것이 있다. 보좌가 단수라는 것이다. 높이 들린 보좌 하나에 주께서 앉으셨다. 셋이 앉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천국의 보좌는 광장 앞에 있으며 놀랍도록 높이 들려 있다. 그 보좌에 그분이 앉으셨다. 이어서 스랍들이 등장한다(사6: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스랍은 천사의 한 종류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다. 여섯 날개는 가장 높은 계급을 뜻한다. 참고로 사탄 마귀는 네 날개였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으니 믿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실상을 확인하고 전하는 것이니 참고만 하면 된다. 높은 계급일수록 날개가 많다. 그 스랍들이 외친다(사6: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다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울린다.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리고 만군이라는 말을 붙들어야 한다. 만군은 히브리어 차바의 복수형이다. 차바는 군대를 뜻한다. 이 하늘의 군대는 두 가지를 가리킨다. 하나는 천사들이다. 다른 하나는 별들이다. 구약은 천사를 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천사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신 하나님이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하늘의 군대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천사만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이 나올 때 2차로 인간 군대가 나온다. 그것이 곧 마지막 전쟁의 전사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두 무리의 군대가 온다. 이것이 마하나임, 곧 두 무리의 군대다. 천사의 군대는 귀신을 치러 온다. 인간을 치는 것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인간이 온다. 그렇게 함께 와서 아마겟돈 전쟁을 끝낸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움직이는 실상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제 8절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온다(사6: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한 절 안에 답이 다 들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겠느냐 하신다. 내가는 1인칭 단수다. 혼자시다. 그런데 곧바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신다. 우리라고 하신다. 이 우리가 누구인가. 지금 어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곧 하늘의 군대, 천사들이다. 스랍들이 앞에서 이 장면을 정확히 해석해 준다. 보좌에 앉으신 한 분 하나님, 그 앞에 시립한 천사들의 무리다. 그러니 우리는 삼위의 회의가 아니다. 한 분 하나님과 그를 모신 천사들의 어전 회의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욥기가 이 어전 회의를 그림처럼 보여 준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 물으신다.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다고 답한다. 어전에 참석한 존재가 있다는 뜻이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에스겔을 읽어도 이 어전 회의가 나온다. 그 어전에 참석한 천사들 가운데 높은 계급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계획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은 아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두셨다. 천사도 아들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사탄 마귀도 아들을 구경한 적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미리 다 공개하지 않으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왜 감추셨는가. 아들로 내려가 사탄을 박살 내시려고 감추셨다. 비천한 사람이 천사를 무너뜨려 비참하게 만들도록 감추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는 삼위의 회의가 아니라 천사와의 어전 회의다. 이사야 6장이 그 열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7. &amp;#39;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amp;#39;는 고백은 왜 양태론 이단과 다른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한 분 하나님을 붙들면 반드시 마주치는 이단이 있다. 양태론이다. 양태론은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이 말은 맞으면서 틀리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먼저 우리가 말하는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백 퍼센트 맞다.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태론자들이 말하는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양태론은 아버지가 아들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으니 이제 아버지는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어 버렸으므로 하늘은 공석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땅에 아들만 위태롭게 남는다. 아들로 오셔서 죽어 버리면 천지 만물을 다스릴 존재가 없어진다. 그래서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니 양태론은 이단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붙든 진리는 다르다. 하나님이 한 분이셨는데 그분이 아들로 오심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셨다. 하늘에 계신 분은 아버지라 불리고, 동시에 땅에서 육체를 입으신 그분은 아들이라 불린다. 동시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다. 아버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다. 땅에 아들이 계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양태론은 여기서 더 굴러떨어진다. 성부 고난설로 간다. 아버지가 고난받았다고까지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다 옮겨 갔으니 결국 아버지가 십자가에서 고난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난받으신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이 고난받으신 것이다. 고난받으시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이미 분리되어 다른 존재로 계신다. 그러니 성부 고난설은 이단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양태론자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도 우습게 처리한다.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장면이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다. 양태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밑에 있을 때는 아들이 되어 기도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면 아버지가 되어 그 기도를 듣는다는 것이다. 한 존재가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단이다. 겟세마네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한 것은, 이미 분리되어 동시에 존재하는 두 분 사이의 실제 기도다. 왔다 갔다 하는 연기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가 기존에 배운 삼위일체 교리도 다시 짚어야 한다. 그 교리가 조금 잘못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렇게 가르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은 조심해야 할 표현이다. 물론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분리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이사야 9장 6절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잘라 버리면 그 예언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아들이 곧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없다. 구약에는 한 분이셨는데 이제 분리되어 나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릴 수는 있다. 예수님도 나는 하나님이다 말할 수 있고, 성부도 나는 하나님이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이 나는 아버지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이 미세한 차이를 붙들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헷갈린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구약 성경도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정확히 표현했다. 그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그분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를 것이라 하셨다. 그분이 아버지다라고 정의하지 않으셨다. 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아버지라 불릴 수는 있다. 그러나 아들이 나는 아버지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이미 분리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이치는 성령을 보내실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요14:1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 또 다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다른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헬라어로 헤테로스가 아니라 알로스다. 헤테로스는 콩과 팥처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알로스는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이다. 곧 같은 하나님이신데 아들로도 나타나시고 성령으로도 나타나셔서 동시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다. 그 보혜사가 예수님과 전혀 딴판인 것이 아니다. 바로 뒤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요14:1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제자들이 두려워한다. 내가 떠나면 죽는 줄 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다. 내가 다시 오겠다 하신다. 성령으로 오시겠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내가 성령으로 올 것이니 나를 다시 볼 것이라 하신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태론과 갈라지는 자리다. 양태론은 아버지를 없애 버린다. 우리는 아버지가 하늘에 계심을 붙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8. 한 분 하나님은 왜 아기이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한 분 하나님이 왜 굳이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탄을 멸하실 능력이 없어서 이 어려운 방법을 쓰신 것이 아니다. 말씀 한마디면 끝난다. 그런데도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다. 그 이유는 셋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첫째,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9:2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죄를 속하는 것은 피다. 피가 죄를 덮는다. 여기 속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파르다. 카파르는 덮는다는 뜻이다. 덮어서 화해에 이르고 용서에 이른다. 피가 죄를 덮어야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피가 없으시다. 흘릴 피가 없으시다. 그래서 사람이 되려고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다.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덮으시려고 오셨다. 죄를 덮어 우리를 죄 없다 하시려고 오셨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둘째, 사탄을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오셨다(히2: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배가 고프고 힘들고 지친다. 그래서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그러나 나중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다. 여기 관은 스테파노스, 곧 승리관이다.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승리관을 쓰신다. 하나님은 고난받으실 수 없고 죽으실 수 없다. 그런데 고난의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잔과 세례라 하신 것이다. 잔은 고난의 잔이요, 세례는 죽음의 세례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며 내 세례를 받겠느냐 하신 것이 그것이다. 이 죽음의 목적이 있다(히2:1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려고 혈과 육을 입으셨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 하던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죽으셨다. 왜 이 방법을 쓰셨는가. 사탄을 인간에게 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탄의 패배를 더 수치스럽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사탄은 자기가 인간보다 낫다고 늘 생각한다.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탄을 인간에게 지게 하셔서 박살 내신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 이름을 정확히 믿고 회개하여 귀신을 쫓아내면, 주님의 영광의 나라가 드러난다. 여기에 회개와 축사의 실상이 있다. 회개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의 피가 들어온다. 그 피가 악한 영을 몸에서 떼어 낸다. 이격시킨다. 그리고 녹인다. 그다음 성령의 은사가 임한다. 성령의 불이 그것을 태운다. 성령의 칼이 그것을 자른다. 피가 이격시키고 녹이는 일과, 불과 칼이 태우고 자르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이렇게 귀신이 쫓겨 나간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천사가, 비천한 인간 앞에서 꼼짝 못 한다. 이것이 사탄을 수치스럽게 하시려던 하나님의 작전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셋째, 기업 무를 자가 되시려고 오셨다. 룻기가 이것을 보여 준다(룻3:1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룻3: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나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있으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한다. 고엘은 그냥 구속자가 아니다. 친족 구속자다. 이것이 정확한 뜻이다. 친족이어야 대신 값을 물어 되사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친족이 되려고 오셨다. 사람이 되어 우리의 친족이 되셨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조물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식을 세우셨다. 내가 너희 생명을 주려고, 너희를 위해 죽으려고 이 땅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는 아버지다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셨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한 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들로 오셨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 영생의 정의가 여기 있다(요17: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왜 여기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붙이셨는가. 그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음을 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아버지의 말씀이다. 아버지가 그 속에 계셨기 때문이다. 신성은 같으시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셨다. 아버지가 안에 계시니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눈물이 터진다. 벌레만도 못한 죄인을 위하여 창조주가 친히 죽으러 오셨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지금까지 우리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을 일곱 가지 질문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한 분이라는 사실이 왜 근본인지 살펴보았다. 이사야 9장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 이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이 왜 나는 아버지다 하지 않으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는지 살펴보았다. 여호와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이름임을 살펴보았다. 창세기 1장의 우리가 삼위의 회의가 아니라 천사와의 어전 회의임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고백이 왜 양태론과 갈라지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왜 아기이자 아들로 오셔야만 했는지 그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신학자들이 한 분 하나님을 잘못 정리해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한 분으로도 두 분으로도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심지어 어머니 하나님까지 만들어 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어머니까지 세웠다.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이 어리석음에서 돌이켜야 한다. 한 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구약의 여호와가 곧 신약의 예수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여호와가 아들로 나타나셨음을 붙들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심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신 신비를 붙들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다라고 말할 수 없으나, 그분이 곧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니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천국에 가서 보좌에 앉으신 그분을 뵐 때, 그분이 곧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왜 한 분 하나님이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피가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덮으시려고 피를 얻으러 사람이 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탄을 인간에게 패하게 하여 박살 내시려고 낮아지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친족 구속자, 곧 고엘이 되시려고 피조물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이름을 정확히 믿고 회개하여 악한 영을 쫓아내는 자리에 서야 한다. 회개할 때 들어오는 예수님의 피가 악한 영을 이격시키고 녹이며, 성령의 불과 칼이 그것을 태우고 자른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우리를 위하여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음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만 경배하고 예수님만 찬양하며 예수님만 높여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ign&quot;&gt;2026년 07월 14일(화)&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font-family: &quot;NanumGothic&quot;, &quot;나눔고딕&quot;, sans-serif; font-size: 10.5pt; line-height: 0; color: #222; } body { width: 100%; } .main-title { font-size: 12pt; font-weight: bold; margin-bottom: 18px; } .section-title { margin-top: 0; margin-bottom: 0; font-size: 11.5pt;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 p { margin: 0 0 0 0; } .scripture { margin: 0 0 0 0;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signature { margin-top: 0; } .char-count { margin-top: 0; font-weight: bold; } &lt;/style&gt; &lt;div class=&quot;main-title&quot;&gt;&amp;nbsp;&lt;/div&gt; &lt;div class=&quot;main-title&quot;&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 인포_ChatGPT Image 2026년 7월 14일 오후 09_23_312026-06-2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272e59bbfd95fe22cbe8b93ae7ca46f3.webp&quot; /&gt;&lt;/p&gt; &lt;/div&gt; &lt;div class=&quot;main-title&quot;&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1a2771daa34e71485d18d5d2d82bc57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0c156a8fdcd39ea544aecf85fb6e247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f24d4b28690b9d0bb7c58e0e5230658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4d310e19d62f3202a1959369c5c3034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a5bd486083bf9491cb6ac15374c548d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c754c1a2ff5a070a42ab4bb257c2ee6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b5e0bf31b232885423cf5bf17cd1448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a26ee8327a179f18d725030aba02337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03c32c83d981596dc8cc1a0d8a3fff2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0be6e4895ab1052d43fd4660e7f5137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045e03e0bc2f2c60e274f2120646952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a68458f7d29ac70f4ea14cc643e08a4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4)]One_God_Incarnate.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297/262/d6d51dd41841bf899aa844ad5d39587c.webp&quot; /&gt;&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blockquote.scripture&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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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item>
			<title>[기독론(143)] 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메시야의 예표로서 다윗왕의 특징(사 11:1~5)_2026-07-13(월)</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2187</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43)] 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메시야의 예표로서 다윗왕의 특징(사 11:1~5)&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iaRtxQb04T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iaRtxQb04T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1. 들어가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서는 구약 선지서 가운데 메시야에 관한 증언을 가장 풍성하게 담고 있는 책이다. 이사야는&lt;strong&gt;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lt;/strong&gt;을 동시에 예언하였다. 그는 메시야를 &lt;strong&gt;한 분 하나님으로, 처음과 마지막으로, 유일한 구원자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다윗의 후손이자 의로운 가지로, 고난받는 종으로, 목자로, 모퉁잇돌과 반석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재림주와 심판주로&lt;/strong&gt;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남유다의 역사와 심판을 읽는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일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이사야서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이름이 있다. 그것은 &amp;#39;다윗&amp;#39;이다. 이사야는 메시야를 말할 때 &amp;#39;다윗의 보좌&amp;#39;, &amp;#39;다윗의 나라(왕국)&amp;#39;, &amp;#39;이새의 줄기&amp;#39;, &amp;#39;그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amp;#39;, &amp;#39;다윗의 장막&amp;#39;, &amp;#39;다윗의 하나님&amp;#39;, &amp;#39;내 종 다윗&amp;#39;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lt;strong&gt;다윗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 속의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윗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와 목양과 전쟁과 회개의 예표였기 때&lt;/strong&gt;문이다.&lt;/p&gt; &lt;p&gt;&amp;nbsp; 그러나 다윗은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 간음과 살인의 중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사울의 왕권을 억지로 빼앗지 않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왕직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amp;ldquo;내 마음에 맞는 사람&amp;rdquo;이라고 증언하셨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행 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lt;strong&gt;다윗은 단순한 과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떤 왕으로 오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며, 또한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되려면 어떤 성품과 믿음과 회개와 전쟁성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lt;/strong&gt;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메시야의 예표로서 다윗왕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에서 왕 노릇할 성도들의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lt;/strong&gt;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h2&gt;2. 왜 이사야는 메시야를 다윗과 연결했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가 메시야를 다윗과 연결한 이유는 &lt;strong&gt;다윗이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서 가장 선명하게 예표한 인물이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은 단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왕이었고, 사울과 달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행 13:22). 사울은 왕권을 자기 체면과 자기 자리 보존을 위해 사용했지만, 다윗은 왕권을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는 장차 오실 아기와 아들을 예언하면서, 그분이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 위에 군림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사 9:6-7). 여기서 다윗의 왕좌는 단순히 예루살렘에 있었던 정치적 왕좌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권의 자리이며, 장차 메시야가 완성하실 통치의 예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의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말씀에서 메시야는 단순한 인간 왕이 아니다. 그는 아기로 태어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들로 주어지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그분의 통치가 &amp;ldquo;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amp;rdquo; 위에 세워진다고 했다. 이는 다윗의 왕권이 메시야 왕권의 예표라는 뜻이다. 다윗의 보좌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앉으실 보좌의 그림자이며, 다윗의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나라의 모형이다.&lt;/p&gt; &lt;p&gt;&amp;nbsp; &amp;#39;다윗의 왕국&amp;#39;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온 왕국이었다. 그는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아람과 싸웠고, 이스라엘 주변의 원수들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의 목적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았다. 다윗의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평강의 질서를 세우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면서 동시에 평강을 준비한 왕이었다. 이 점에서 다윗은 장차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이사야가 다윗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추상적 구원자로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메시야가 어떤 왕으로 오실 것인지를 다윗을 통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lt;/strong&gt;. 다윗은 왕권의 예표이고, 메시야는 그 왕권의 실체다. 다윗은 그림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몸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읽을 때 다윗을 빼놓고 메시야를 이해하면 메시야의 왕권과 통치의 성격을 온전히 볼 수 없다.&lt;/p&gt; &lt;h2&gt;3. &amp;lsquo;이새의 줄기&amp;rsquo;와 &amp;lsquo;그 뿌리의 가지&amp;rsquo;는 무엇인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 11장은 다윗 왕권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새롭게 솟아날 메시야를 예언한다. 이사야는 &amp;ldquo;다윗&amp;rdquo;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다윗의 아버지인 &amp;ldquo;이새&amp;rdquo;를 언급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다윗이 이미 왕으로 드러난 뒤의 영광이 아니라, 다윗이 아직 들판에서 양을 치던 집안의 뿌리와 줄기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호테르)이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네체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dquo;줄기&amp;rdquo;는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은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다윗 왕조는 바벨론 포로를 거치면서 마치 잘려 나간 나무처럼 보였다. 왕위는 끊어진 것처럼 보였고, 다윗의 집은 초라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줄기에서 한 싹(호테르)이 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다윗 왕조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실 것임을 뜻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amp;ldquo;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amp;rdquo;이라고 했다. 여기서 &amp;ldquo;가지&amp;rdquo;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흔히 &amp;lsquo;네체르&amp;rsquo;와 연결해서 이해된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2장 23절의 &amp;ldquo;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amp;rdquo;는 말씀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네체르라는 히브리어의 음가가 연결되며, 이사야가 말한 &amp;ldquo;뿌리에서 나온 가지&amp;rdquo;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물론 마태복음 2장 23절은 구약의 특정 한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종 음가와 의미를 함께 사용하여 영적 사실을 증언한다. &lt;strong&gt;&amp;ldquo;네체르&amp;rdquo;는 잘려진 듯한 뿌리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가지&lt;/strong&gt;를 가리킨다.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렇게 오셨다. 왕궁의 화려함 속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업신여기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그러나 그분은 다윗의 뿌리에서 솟아난 참된 가지이셨다.&lt;/p&gt; &lt;p&gt;&amp;nbsp;&amp;nbsp;더 깊이 들어가면 이 표현은 &lt;strong&gt;예수님의 두 측면&lt;/strong&gt;을 동시에 보여 준다.&lt;strong&gt; &amp;ldquo;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amp;rdquo;은 예수님이 다윗 가문에서 나오신 후손&lt;/strong&gt;임을 말한다. &lt;strong&gt;&amp;ldquo;그 뿌리에서 난 가지&amp;rdquo;는 예수님이 다윗 왕조의 생명 근원과 연결되어 있음&lt;/strong&gt;을 말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amp;#39;다윗의 자손&amp;#39;이라고 부를 뿐 아니라 &amp;#39;다윗의 뿌리&amp;#39;라고도 부른다(계 5:5, 22:16). 이사야 11장 1절은 바로 그 이중적 신비를 구약적 언어로 미리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이새의 줄기와 그 뿌리의 가지는 단순한 족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lt;strong&gt;무너진 것 같은 다윗 왕권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메시야를 일으키실 것&lt;/strong&gt;이라는 약속이다. 또한 &lt;strong&gt;그 메시야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존재로는 다윗의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분임을 암시&lt;/strong&gt;한다. 이 말씀 안에는&lt;strong&gt; 성육신과 왕권과 창조주의 신비&lt;/strong&gt;가 함께 들어 있다.&lt;/p&gt; &lt;h2&gt;4. 예수님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자 뿌리이신가?&lt;/h2&gt; &lt;p&gt;&amp;nbsp;&amp;nbsp;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은 자주 &amp;ldquo;다윗의 자손&amp;rdquo;으로 불리신다. 소경들이 예수님께 &amp;ldquo;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amp;rdquo;라고 부르짖었고(마 9:27),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도 &amp;ldquo;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amp;rdquo;라고 외쳤다(마 21:9).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lt;strong&gt;혈통적으로 분명 다윗의 자손&lt;/strong&gt;이시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의 족보를 &amp;ldquo;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amp;rdquo;라고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씨의 약속과 다윗에게 주신 왕권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사람으로 오셨고, 다윗 왕권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왕이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amp;#39;다윗의 자손&amp;#39;일 뿐만 아니라 &amp;#39;다윗의 뿌리&amp;#39;라고 증언한다(계 5:5, 22:16).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후손은 나중에 오는 자다. 그러나 뿌리는 먼저 있는 자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존재로는 다윗을 있게 하신 근원이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lt;/strong&gt;&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직접 &amp;ldquo;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amp;rdquo;이라고 말씀하셨다(계 22:16).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말한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시다. 다윗이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윗을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다윗의 혈통을 따라 사람이 되어 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신비를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단지 훌륭한 다윗 왕조의 후손으로만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그렇게 제한하지 않는다. &lt;strong&gt;예수님은 다윗보다 뒤에 오셨지만 다윗보다 먼저 계셨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셨지만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시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의 자손과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론을 분명하게 세워 준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개의 또 다른 신이 아니다. 그분은 홀로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분이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셨으나, 동시에 다윗의 근원으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다. 이사야가 말한 이새의 줄기와 뿌리의 가지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윗의 뿌리와 자손이라는 말로 완성된다.&lt;/p&gt; &lt;h2&gt;5. 다윗의 보좌와 나라는 무엇을 예표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 9장은 &lt;strong&gt;메시야의 왕권을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lt;/strong&gt;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amp;#39;다윗의 씨&amp;#39;를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이 약속은 솔로몬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삼하 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았다. 그의 후반부 삶에는 우상숭배의 실패가 있었고, 그의 사후 왕국은 갈라졌다. 그러므로 사무엘하 7장의 약속은 솔로몬에게서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솔로몬을 넘어 장차 오실 다윗의 참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약속이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는 바로 이 약속을 붙들고 메시야를 예언한다. 메시야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다윗의 나라를 정의와 공의로 세우신다. 여기서 보좌는 통치와 심판의 자리다. 나라는 그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왕국은 전쟁을 통해 평강을 이루었다. 다윗은 원수들을 제압함으로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준비하였다. 이 점에서 다윗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가져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십자가에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으며(히 2:14), 부활과 승천으로 하늘의 왕권을 취하셨다. 이것이 다윗의 전쟁과 왕권이 가리킨 실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amp;#39;다윗의 보좌&amp;#39;는 천국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보좌와도 연결된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기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약속이 아니다. 이 땅에서 주님처럼 싸우고 이긴 자, 주님의 마음을 품고 충성한 자에게 주어지는 왕권의 약속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다윗의 보좌와 나라는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여 주는 예표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이기는 자의 미래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처럼 전쟁에 능한 자, 다윗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자, 다윗처럼 회개할 줄 아는 자가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길을 배우게 된다.&lt;/p&gt; &lt;h2&gt;6. 왜 하나님은 자신을 다윗의 하나님이라 하셨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이사야서에는 매우 놀라운 표현이 나온다. &lt;strong&gt;하나님께서 자신을 히스기야에게 소개하실 때 &amp;ldquo;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amp;rdquo;라고 하신다&lt;/strong&gt;.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신다.&lt;strong&gt;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을 &amp;ldquo;다윗의 하나님&amp;rdquo;으로도 말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특별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lt;/strong&gt;&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38: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이유를 &amp;ldquo;나와 내 종 다윗을 위하여&amp;rdquo;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다윗은 오래전에 죽었다. 그런데도 &lt;strong&gt;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시고, 그를 &amp;ldquo;내 종&amp;rdquo;이라 부르시며, 그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보호하겠다&lt;/strong&gt;고 하신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37:35 대저 내가 나와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왜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기억하셨는가?&lt;/p&gt; &lt;p&gt;&amp;nbsp; &lt;strong&gt;첫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거의 버림받은 채 살았고, 배다른 자신의 형들로부터 배척을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배다른 형들과는 달리 양떼를 쳐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결코 그것을 탓하지 않고 양떼를 자신의 목숨을 돌보는 삶을 산다. 왜냐하면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를 물어가면 쫓아가서 사자와 곰의 입에서 양떼를 꺼내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시켜 그로 하여금 왕을 삼게 하신 것이다.&amp;nbsp;&lt;/p&gt; &lt;p&gt;&amp;nbsp; &lt;strong&gt;둘째, 그 이유는 다윗이 비록 범죄했으나 진정 회개한 사람이었기 때문&lt;/strong&gt;이다. 다윗이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윗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사울에게 없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였다. 사울도 &amp;ldquo;내가 범죄하였나이다&amp;rdquo;라고 말했지만, 그의 고백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즉시 &amp;ldquo;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amp;rdquo;고 고백했고(삼하 12:13), 그 죄로 인해 깊이 통회하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lt;/strong&gt;&lt;/p&gt; &lt;p&gt;&amp;nbsp; 뿐만 아니라 다윗은 진정 회개한 사람이었기에 회개 이후 똑같은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 노년에 수넴 여자 아비삭이 왕을 섬겼으나 다윗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왕상 1:4). 이는 다윗의 회개가 단순한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꾼 회개였음을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왕상 1:4 이 소녀가 심히 아름다워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 &lt;strong&gt;셋째, 그 이유는 다윗은 진정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왕이었기 때문이다&lt;/strong&gt;. 그는 왕권을 자기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 자신이 심판을 받겠다고 할 만큼 백성을 사랑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자의 마음을 왕이 된 뒤에도 잃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amp;ldquo;내 종&amp;rdquo;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amp;ldquo;다윗의 하나님&amp;rdquo;이라 부르게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기뻐하셨다는 표시다. 다윗은 죄가 없어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진정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인정받았다. 그는 권세를 가졌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왕이었으나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했다. 오늘 성도도 이 길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amp;ldquo;나는 너의 하나님이다&amp;rdquo;라고 인정하실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lt;/p&gt; &lt;h2&gt;7. 다윗의 열쇠는 어떤 권세를 뜻하는가?&lt;/h2&gt; &lt;p&gt;&amp;nbsp; 그리고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lt;strong&gt;&amp;ldquo;다윗의 열쇠&amp;rdquo;를 가지신 분&lt;/strong&gt;으로 소개한다(빌 3:7). 열쇠는 &lt;strong&gt;여닫는 권한&lt;/strong&gt;을 상징한다. 문을 여는 자가 있고 닫는 자가 있다. 그러나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절대적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 표현은 &lt;strong&gt;이사야 22장 22절&lt;/strong&gt;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엘리아김에게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겠다고 하셨다(사 22:22).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하셨다. 이는 왕궁의 관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가 가지실 통치권의 예표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예수님은 바로 그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lt;/strong&gt;이다. 그분은 &lt;strong&gt;구원의 문을 여시고 닫으신다. 복음의 문을 여시고 닫으신다. 사역의 문을 여시고 닫으신다. 천국의 문을 여시고 닫으신다&lt;/strong&gt;. 그러므로 이 열쇠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lt;strong&gt;왕의 권세와 통치의 권한&lt;/strong&gt;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amp;#39;천국 열쇠&amp;#39;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하시겠다고 하셨다(마 16:18-19).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며, 하늘의 권세와 연결된 사역의 문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뜻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이 열쇠를 &amp;ldquo;다윗의 열쇠&amp;rdquo;라고 부른다. 이는 다윗의 마음과 다윗의 왕권과 다윗의 충성이 이 권세의 성격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lt;strong&gt;다윗은 자기 권세를 자기 욕심대로 쓰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께 묻고 행했으며, 백성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다윗의 열쇠는 단순한 능력의 열쇠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종에게 맡겨지는 왕적 권세&lt;/strong&gt;다.&lt;/p&gt; &lt;p&gt;&amp;nbsp; 특히 A.D.90년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있었다. 주님은 그런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의 열쇠는 큰 능력을 과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은 능력이라도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오늘 성도도 다윗의 열쇠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권세를 탐하는 마음으로는 받을 수 없다.&lt;strong&gt; 다윗의 열쇠는 다윗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맡겨진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회개할 줄 알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문을 여신다&lt;/strong&gt;.&lt;/p&gt; &lt;h2&gt;8. 천국의 왕들은 다윗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lt;/h2&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lt;strong&gt;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전형&lt;/strong&gt;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은 다윗에게서 &lt;strong&gt;왕의 특징을 배워야&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 &lt;strong&gt;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lt;/strong&gt;이다. 다윗은 왕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 그는 성전을 짓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남겼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았다는 것&lt;/strong&gt;이다. 다윗은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곤 했다. 그는 자기 경험과 군사력만으로 전쟁하지 않았다. 왕이었으나 하나님께 묻는 종이었다. 이것이 사울과 다른 점이다. 사울은 자기 판단을 앞세웠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세 번째 특징은 원수를 자기 손으로 제거하지 않는 태도&lt;/strong&gt;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으로 해하지 않았다. 그는 왕권을 억지로 빼앗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실 때를 기다렸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네 번째 특징은 백성과 부하를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lt;/strong&gt;이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자였다. 그는 사자와 곰에게서 양을 건져냈다. 왕이 된 뒤에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았다. 백성이 고통받을 때 자신과 자기 집을 치라고 호소할 만큼 백성을 사랑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 사건 이후, 자기에게 돌아온 부하 장수들을 절대로 해하지 않았다. 왕은 백성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strong&gt;&amp;nbsp;다섯 번째 특징은 전쟁에 능한 왕의 모습&lt;/strong&gt;이다. 다윗은 평화만 말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원수와 싸웠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력들을 제압했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의 영적 전쟁과 연결된다. 오늘 성도들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한다. 다윗이 원수들을 제압하여 평화를 가져왔듯이, 신약 성도도 귀신을 대적하고 내보냄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여섯 번째 특징은 진정한 회개자였다는 것&lt;/strong&gt;이다. 다윗은 죄를 숨기려고 할 때 고통을 겪었으나, 나단의 책망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는 형식적 고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마음을 찢는 회개였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였다.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능력만 가진 자가 아니라 회개할 줄 아는 자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일곱 번째 특징은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lt;/strong&gt;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사야 11장 2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야 위에 여호와의 영,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할 것을 말한다.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를 왕으로 준비시켰다. 성령이 없이는 참된 왕권도 없고, 참된 통치도 없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천국의 왕들은 다윗에게서 왕의 길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원수를 자기 혈기로 처리하지 않아야 하며, 백성을 사랑해야 하고, 영적 전쟁에 능해야 하며, 죄를 범했을 때는 진정으로 회개해야 하고,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자들이 배워야 할 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히 이사야 11장은 다윗적 왕권의 영적 성격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 왕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만 심판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 이것은 사람의 외모와 소문에 끌려다니는 왕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판단하는 왕의 모습이다.&lt;/p&gt; &lt;p class=&quot;bible&quot;&gt;&lt;strong&gt;사 11:3-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은 &lt;strong&gt;다윗에게서 시작된 왕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lt;/strong&gt;를 보여 준다. &lt;strong&gt;다윗은 원수와 싸웠지만, 완전한 공의와 정직의 왕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심판하시는 완전한 왕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예표이고, 그리스도는 실체다. 성도들은 다윗에게서 왕의 모형을 배우되,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아야&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더 나아가 &lt;strong&gt;성도들이 천국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이 아니다&lt;/strong&gt;. 다윗이 하나님께 묻고 행했듯이, 왕 노릇할 자는 주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야 한다. 다윗의 열쇠는 자기 야망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주님이 열고자 하시는 문을 열고 주님이 닫고자 하시는 문을 닫는 청지기의 권한이다. 그러므로 왕권은 충성의 결과이지 욕심의 결과가 아니다.&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gt;&amp;nbsp;&amp;nbsp;이번 시간에는 &lt;strong&gt;이사야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메시야의 예표로서 다윗왕의 특징&lt;/strong&gt;을 살펴보았다. 이사야는 다윗을 단순한 과거의 왕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보좌와 나라, 이새의 줄기와 그 뿌리의 가지, 다윗의 장막, 다윗의 하나님, 내 종 다윗이라는 표현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의 왕권과 통치와 심판과 목양을 예언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은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다. 그러나 존재로는 다윗의 뿌리이시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지만, 다윗을 있게 하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다윗 왕조의 위대한 후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메시야이며, 다윗의 보좌와 나라를 완성하시는 왕이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다윗은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예표다. 다윗은 전쟁에 능했으나 자기 욕심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사랑한 목자였고, 하나님께 묻는 왕이었으며, 원수를 자기 손으로 제거하지 않는 왕이었다. 그는 큰 죄를 지었으나 진정으로 회개했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자기 삶을 돌이켰다. 그러므로 다윗의 위대함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의 깊이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오늘 성도들도 다윗의 길을 배워야 한다.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는 단순히 구원받은 자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아야&lt;/strong&gt; 한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빚어져야 하고,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귀신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은 오늘도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자 앞에 열린 문을 두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윗처럼 말씀을 붙들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다윗처럼 회개하고, 다윗처럼 전쟁에 능한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lt;br /&gt; 2026년 07월 12일(일)&lt;/p&gt; &lt;p class=&quot;signature&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meta&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이사야서에 나타난&amp;nbsp;&lt;strong&gt;다윗 왕의 예표적 특징&lt;/strong&gt;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을 깊이 있게 통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예수님이&amp;nbsp;&lt;strong&gt;다윗의 뿌리이자 자손&lt;/strong&gt;이라는 성경적 선포를 바탕으로, 그분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amp;nbsp;&lt;strong&gt;전능자 하나님&lt;/strong&gt;인 동시에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사야 11장에 등장하는 &amp;#39;가지&amp;#39;라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게 된 영적 배경과&amp;nbsp;&lt;strong&gt;하나님 나라의 통치자&lt;/strong&gt;로서의 권위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amp;nbsp;&lt;strong&gt;다윗의 회개와 사랑&lt;/strong&gt;을 본받아,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종이라 인정받는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면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인포그래픽2026-06-2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7a51e0d50db2517cc894963a77e492f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0e9f85f00372db5e5b0a11e03a40d8c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005f82d2cdeaeb0d14a149544c9971b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40edf2ba5b04619eb36b45ef5fe6381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b0282727f89f079195c319c9000c61a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6a2ff8ce103b24725c4bfc5bbce83f6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a05e92df102195ce4bbfad3981bc743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999a51300c36e9a9c09d909506e09b6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50dc0a13e0de46d8333ef82f8aa25e0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David_the_Messianic_Blueprint.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4184a4218532d1198cbb8c186c32bb93.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왕_노릇_할_성도의_특징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57c0065c5a9d287f7ed8487967a0079f.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133dfcff397cf2664701025c4a3c265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25e326126c1de3a1fea80c23dd85c39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2487fc294d9f4ab47bdc4b118079027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5cee6bb0dd7c0e4bf5e1cef457ea138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7e0bf32eab73d3a59261893991a8b0e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10776eca903194cb166934b1cb33a2f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2746dc2424d1ad3025f930e13cdf93e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4a9ccbbb64b746e7585356f508ea02a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e36219c2fad3247565bf576d6c13b84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43)] Shadows_of_the_Eternal_King.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187/262/23b8cb60ff3902f317bb9a6094117a96.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lef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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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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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역자론(0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자로 쓸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는가?(행7:20~29)_2026-07-10(금)</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2038</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사역자론(0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자로 쓸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는가?(행7:20~29)&lt;/span&gt;&lt;/strong&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2LFwz7hUi4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2LFwz7hUi4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 0; padding: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1.85; } h1 { font-size: 18px;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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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7:22-23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에도 같은 원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받는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질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또한 그가 성품의 훈련을 받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질서 안에서 교정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아야 한다. 자질은 있는데 성품이 준비되지 않으면 위험하고, 은사는 있는데 회개가 없으면 더 위험하다. 열심은 있는데 순종이 없으면 결국 자기 의를 세우게 되고, 은사는 있는데 지도자의 점검을 거부하면 미혹의 영에게 속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릇의 조건을 분명히 말한다. 큰 집에는 여러 그릇이 있지만, 귀히 쓰임받는 그릇이 있고 천히 쓰임받는 그릇이 있다.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딤후2:20-21). 그러므로 사역의 출발점은 &amp;lsquo;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amp;rsquo;가 아니라 &amp;lsquo;내가 깨끗한 그릇인가&amp;rsquo;에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로 쓰실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시고, 오늘의 성도와 사역자가 어떻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2. 하나님은 왜 사역자를 갑자기 세우지 않으시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역자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어느 날 강단에 서고, 어느 날 안수를 받고, 어느 날 어떤 직분을 맡으면 사역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하나님은 직분보다 그릇을 먼저 보시고, 사역보다 성품을 먼저 보시며, 능력보다 순종을 먼저 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은 긴 준비 과정을 거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대표적인 사례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80세에 부름받았으니, 하나님은 아무 준비 없이 노년에 갑자기 사람을 쓰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연세가 많은 사람도 쓰신다. 나이가 많다고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는 80세에 갑자기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호받았고, 40년은 애굽 왕궁에서 자질을 준비받았으며, 다시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성품을 훈련받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모세의 80세 부르심은 &amp;lsquo;늦은 부르심&amp;rsquo;이라기보다 &amp;lsquo;완성된 준비 뒤의 부르심&amp;rsquo;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먼저 애굽의 언어와 학문과 행정과 군사적 소양을 배우게 하셨다. 또한 그에게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신앙을 심어 주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안에는 혈기와 분노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셨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오늘의 사역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것은 단지 열정이 아니다. 열정만으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은사만으로도 안 된다. 은사가 있어도 성품이 준비되지 않으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지식만으로도 안 된다. 지식이 많아도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자질과 훈련과 순종이 함께 갖추어진 사람을 쓰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을 오래 준비시키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기분과 혈기로 감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모세가 마지막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물을 내는 기적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민20:1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민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사역자에게 두려운 기준을 제시한다. 기적이 나타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성품까지 인정하신 것은 아니다. 물은 나왔지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역의 결과처럼 보이는 것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사역자는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있는지, 아니면 내 혈기와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3. 일반 사명자와 특별 사명자는 어떻게 다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든 성도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명이 같은 것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성도에게는 일반 사명이 있고, 특별 사명이 있다. 일반 사명은 모든 성도가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특별 사명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일을 위하여 특별히 보내고 준비시키신 사람에게 맡기시는 사명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일반 사명은 먼저 자기 집을 구원으로 이끄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 가정 안에 보내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먼저 믿었다면, 그것은 나 혼자만 천국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내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회개의 길을 알려 주라고 세우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간수에게 말한 것처럼, 주 예수를 믿으면 그와 그의 집이 구원받는 길이 열린다(행16:3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일반 사명은 교회를 섬기는 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도는 그 몸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교회를 섬겨야 한다. 청소든, 식사 봉사든, 중보기도든,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이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면 귀한 사명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 일반 사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종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강단에 서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선지자나 목회자나 영적 사역자로 부름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역이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은 큰 상급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0:40-4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반면 특별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준비시키시는 사람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사람으로 준비되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의 가족을 보존할 사람으로 준비되었다. 예레미야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기 위해 모태에서부터 구별되었다(렘1:5).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예수의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택함받았다(행9:15).&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특별 사명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준비시키신다. 그러나 특별 사명이 없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니다. 일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도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다. 섬김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 인내의 면류관은 유명한 사역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충성한 자에게 주어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4. 하나님은 쓰실 사람에게 어떤 자질을 준비시키시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게는 자질이 필요하다. 자질이란 맡겨진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기본 능력과 그릇의 크기를 말한다. 하나님은 아무 연장도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목수에게는 연장이 필요하고, 군사에게는 무기가 필요하며, 말씀 사역자에게는 말씀을 깨닫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에는 그 일에 맞는 자질을 준비시키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자질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반 은사, 곧 달란트다. 이것은 육적 DNA와 훈련을 통해 나타나는 재능이다. 가르치는 능력, 말하는 능력, 글 쓰는 능력, 노래하는 능력, 음식을 만드는 능력, 재물을 다루는 능력, 행정 능력, 운동 능력, 사람을 섬기는 능력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은 이런 일반 은사를 통해서도 교회를 세우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른 하나는 영적 은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영적 DNA와 같다. 영적 은사는 부모의 신앙과 기도 가운데 태어날 때부터 잠재될 수도 있고, 성령세례 때 주어질 수도 있으며, 어떤 직임을 감당하도록 안수받을 때 전이되거나 활성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은사가 사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려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를 준비시키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경우를 보자. 그는 애굽 왕궁에서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애굽 왕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시키신 것이다. 그는 애굽의 언어를 배웠고, 행정과 지혜와 정치와 군사적 소양을 배웠다. 스데반은 모세가 말과 일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한다(행7:2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사역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능력은 필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준비도 사용하신다. 말씀 사역자는 말씀을 연구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역자는 가르치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영적 사역자는 영적 세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게으름을 은혜라고 부르지 않으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받은 교육은 단지 세상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기초 소양이었다. 그가 애굽의 궁중 언어를 몰랐다면 바로 앞에서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지도력과 행정을 배우지 못했다면 수많은 백성을 이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글과 기록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율법과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여 후대에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반 은사와 영적 은사를 함께 살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오래 감당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때 생명이 살아나는지, 무엇을 통해 다른 사람이 세워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자기 분수를 아는 길이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릇의 크기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묻어 두지도 않는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그것을 땅에 묻어 두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는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쓰면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질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달란트와 은사는 모두 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5.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무엇을 배웠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첫 40년은 애굽 왕궁에서의 준비 기간이었다. 그는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바로의 명령 때문에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나일강에 던져져야 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그 아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믿음의 행동으로 해석한다(히11:2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놓였을 때, 그는 죽음에 넘겨진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굽 공주의 손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죽음에서 건져내셨고, 동시에 그를 애굽 왕궁 안으로 들여보내셨다. 장차 애굽을 상대할 사람을 애굽의 중심부에서 준비시키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왕궁에서 배운 첫 번째는 언어였다. 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애굽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랐다. 장차 바로 앞에서 말해야 할 사람, 애굽의 정치 구조를 상대해야 할 사람, 수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할 사람에게 언어는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과 글의 훈련을 받게 하셨다. 사역자는 자기 생각만 가지고는 사람을 이끌 수 없다. 하나님께 받은 내용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로 모세는 애굽의 지혜를 배웠다. 애굽은 당시 고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다. 천문, 수학, 건축, 의학, 행정, 군사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모세는 그 모든 지혜를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혜 자체를 우상화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지혜까지도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셨다. 애굽에서 배운 지혜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실 때 도구가 되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로 모세는 지도력의 기본을 배웠다. 한 민족을 이끄는 일은 감정만으로 되지 않는다. 조직을 알고, 사람을 알고, 명령 체계를 알고, 위기 속에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모세는 왕궁에서 이런 기본 소양을 배웠다. 그는 나중에 광야에서 수많은 백성을 이끌어야 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애굽 왕궁에서 그를 미리 준비시키셨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네 번째로 모세는 글과 기록의 훈련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후에 율법과 출애굽의 역사를 기록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도 기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후대에 남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모세가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는 말에는 단지 학문적 지식만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사역자로서의 준비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오늘날 말씀 사역자에게도 중요한 원리다.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원어를 볼 수 있다면 원어를 보아야 하고, 역사와 배경을 살필 수 있다면 살펴야 한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과 성도가 공부하는 것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준비된 지성도 사용하시고, 순종하는 마음도 사용하시며, 성령의 감동도 더하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애굽의 교육만으로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었다. 애굽의 학문은 도구일 뿐이었다. 그 도구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또 다른 교육을 주셨다. 그것은 어머니를 통한 신앙 교육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6. 모세는 어머니에게 어떤 신앙교육을 받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자랐지만, 그의 정체성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히브리인이었다. 이 정체성이 어떻게 그의 마음에 새겨졌을까? 하나님은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을 유모로 다시 붙여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다. 어머니는 젖만 먹인 것이 아니다. 그 아이에게 신앙을 심어 주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받은 첫 번째 신앙 교육은 &amp;lsquo;너는 히브리인이다&amp;rsquo;라는 정체성 교육이었다. 왕궁에서 자라면 자신을 애굽 사람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장성하여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을 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정체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살 수 있었지만, 자기 백성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다(행7:2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애굽은 영원한 집이 아니었다. 아무리 왕궁이 화려해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애굽은 나그네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은 가나안이었다. 이 신앙이 있었기에 모세는 애굽의 보화를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 모세는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 더 귀하다는 신앙을 배웠다. 히브리서 11장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다. 이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심겨진 신앙 교육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선택을 이끌었다(히11:24-2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amp;lsquo;상 주심을 바라봄&amp;rsquo;이다. 모세는 눈앞의 애굽 보화만 본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보았다. 이것이 신앙 교육의 핵심이다. 신앙 교육은 단지 교리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늘의 상이 더 크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잠깐 누리는 죄악의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심어 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부모와 영적 지도자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좋은 부모를 만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가 신앙을 제대로 전해 주지 못했다면, 좋은 영적 부모를 만나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성도에게 정체성을 알려 주어야 한다. 너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너는 애굽에서 영원히 살 자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는 자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너는 죄악의 낙을 따라 살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늘의 상을 받을 자라고 가르쳐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가 애굽의 학문을 배운 것은 중요했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신앙 교육이 없었다면 그는 애굽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 지식은 방향을 주지 못한다. 신앙이 방향을 준다. 지식은 힘이 될 수 있지만, 믿음은 그 힘을 어디에 쓸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지식과 신앙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세상 소양은 사역의 도구가 되고, 신앙 교육은 사역의 방향이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점에서 오늘의 사역자도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나는 이 땅이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는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나는 세상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귀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아직 사역자의 기초가 단단히 세워진 것이 아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7. 왜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 40년이 필요했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에게는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혜가 있었다. 그는 말과 일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아볼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혈기와 분노였다. 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 의협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자기 백성이 자신을 이해할 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그들이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행7:24-25). 모세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달랐다. 모세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도 달랐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아직 그를 쓰실 때가 아니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7:24-25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모세에게 미디안 광야 40년이 필요했다. 애굽 왕궁 40년이 자질의 준비였다면, 미디안 광야 40년은 성품의 훈련이었다. 왕궁에서는 말과 일을 배웠지만, 광야에서는 침묵과 기다림을 배웠다. 왕궁에서는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지만, 광야에서는 양을 돌보는 법을 배웠다. 왕궁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배웠지만, 광야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역자를 광야로 보내시는 이유가 있다. 광야는 사람을 낮춘다. 광야는 자기 힘을 빼게 한다. 광야는 사람의 박수와 인정 없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한다. 광야는 사람 안에 감추어진 혈기와 조급함과 자기 의를 드러낸다. 왕궁의 모세는 강했지만 위험했다. 광야의 모세는 약해졌지만 하나님께 쓰임받을 준비가 되어 갔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혈기와 분노는 한순간의 성격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역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문제였다. 실제로 모세는 훗날 가데스의 므리바 물 사건에서 다시 그 약점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분노하여 반석을 쳤다. 물은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는 지도자의 성품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보여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사역자에게도 미디안 광야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낮아지는 시간이 광야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명의 시간이 광야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의 어려움과 경제적 고난이 광야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에게 오해받고 버림받는 시간이 광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광야는 버림이 아니라 훈련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성품을 다듬으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모세는 40년 광야 훈련을 받았지만, 혈기와 분노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와 천국복음의 방식, 곧 예수의 피로 내 속의 악한 영을 내보내는 길을 아직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참고 눌렀지만, 뿌리까지 제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시 문제가 드러났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의 성도는 모세보다 더 큰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알고, 자백하는 회개를 알고, 악한 영을 내보내는 길을 알고 있다. 혈기와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역자는 광야 훈련만이 아니라 회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회개가 없으면 성품은 뿌리부터 바뀌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성품이 준비되지 않은 사역은 위험하다. 아무리 큰 은사가 나타나도 성품이 무너지면 그 열매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어렵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아도 혈기와 교만으로 일하면 하늘에서 계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의 성품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져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8. 오늘 사역자는 어떻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의 사역자는 모세의 생애를 통해 자신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에게는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 자질의 준비가 필요하다. 둘째, 신앙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성품의 훈련이 필요하다. 넷째, 회개를 통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특히 마지막 시대의 사역자는 영적 세계를 다루어야 하므로, 더더욱 깨끗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깨끗한 그릇이 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착하고 선한 성품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탄명성교회의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그릇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회개와 예수의 피로 내보내는 것을 포함한다. 더러운 영들이 속에 가득한 사람이 사역을 하면, 겉으로는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실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된다고 했다(딤후2:21). 여기서 핵심은 &amp;lsquo;자신을 깨끗하게 하면&amp;rsquo;이다.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다면 먼저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사역을 먼저 하려고 하지 말고, 깨끗한 그릇이 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은사를 먼저 구하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직분을 먼저 탐하기 전에 성품을 다듬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말씀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사역자는 자기 경험이나 환상이나 은사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성경 말씀으로 점검해야 한다. 영적 세계를 본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다. 귀신도 보여 줄 수 있고, 미혹의 영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령은 말씀을 거스르지 않으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 회개를 생활화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받을 때 한 번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 정결해져야 한다. 특히 사역자는 더 많이 회개해야 한다. 자신이 더럽혀지면 자신을 통해 섬김받는 사람들도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는 날마다 &amp;lsquo;주님,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 내 안에 있는 혈기와 교만과 탐욕과 음란과 미움의 영들을 내보내 주소서&amp;rsquo;라고 회개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 좋은 영적 지도자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눈의 들보를 잘 보지 못한다. 영적 사역자는 더더욱 점검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내 안에 교만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내가 본 것이 성령께로부터 온 것인지, 미혹의 영이 섞인 것은 아닌지 점검받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넷째,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특별한 은사를 받았는지 여부보다 먼저, 지금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청소하는 일, 기도하는 일, 섬기는 일, 순종하는 일, 교회를 세우는 일, 주의 종을 돕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신다. 작은 일에 불성실한 사람이 큰 일을 감당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섯째, 자기 안에 남아 있는 혈기와 분노를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위대한 종이었지만, 마지막에 혈기 문제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은 오늘 사역자에게 두려운 경고다. 하나님께 쓰임받았다고 해서 끝까지 안전한 것이 아니다. 받은 은사가 있고, 지나온 훈련이 있고, 큰 일을 감당했어도, 마지막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여섯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모세는 40세에 자기 힘으로 시작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나님은 그를 80세에 부르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늦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셨다. 오늘의 사역자도 조급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쓰실 때가 있다. 그때까지 준비하고, 배우고, 낮아지고, 회개하고, 순종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사역자는 자기 수고가 하늘에서 인정받는 수고가 되기를 구해야 한다.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해서 다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수고가 있고, 인정하지 않으시는 수고가 있다. 깨끗한 그릇으로 행한 충성과 순종은 하늘에 올라가지만, 귀신의 힘과 교만과 혈기로 행한 수고는 헛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amp;lsquo;내가 얼마나 많이 했는가&amp;rsquo;보다 &amp;lsquo;하나님께서 내 수고를 인정하시는가&amp;rsquo;를 물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로 쓰실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시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을 갑자기 세우지 않으신다. 모세는 80세에 부름받았지만, 이미 80년 동안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이었다. 애굽 왕궁의 40년은 자질과 소양을 준비하는 시간이었고, 미디안 광야의 40년은 성품과 자기 비움을 배우는 시간이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의 성도와 사역자도 이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자질이 필요하다. 일반 은사와 영적 은사가 필요하고,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품이 준비되어야 하고,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회개를 통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역자는 자신의 은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은사는 주인의 일을 위해 맡겨진 도구일 뿐이다. 달란트도 주인의 것이고, 영적 은사도 주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기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말씀의 기준 안에 머물며, 좋은 영적 지도자의 점검을 받고,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자신의 일반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자기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이 보내신 종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매우 귀하다. 특별한 사명자가 아니어도 하늘의 상급은 충분히 크다.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만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충성한 사람을 기억하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사역자는 모세의 느보산을 기억해야 한다. 모세는 위대한 종이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사건 때문에 약속의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은사보다 성품이 중요하고, 기적보다 순종이 중요하며, 결과보다 하나님의 인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사역자는 회개와 순종으로 자신을 계속 다듬어야 한다. 그리하여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2026년 07월 10(금)&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준비시키시는&amp;nbsp;&lt;strong&gt;세 가지 단계적 과정&lt;/strong&gt;을 모세와 요셉의 삶을 통해 통찰력 있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역자가 될 사람에게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amp;nbsp;&lt;strong&gt;지식과 기술 및 영적 은사라는 자질&lt;/strong&gt;을 갖추게 하시며, 이후 혹독한 광야의 시간을 통해&amp;nbsp;&lt;strong&gt;성품과 순종의 훈련&lt;/strong&gt;을 거쳐 자아를 비우게 하십니다. 특히 설교자 정보배 목사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더라도&amp;nbsp;&lt;strong&gt;혈기와 분노 같은 부정적인 성품&lt;/strong&gt;을 회개로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게 되어 그간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사역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amp;nbsp;&lt;strong&gt;영적 스승의 지도&lt;/strong&gt;&amp;nbsp;아래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amp;nbsp;&lt;strong&gt;깨끗한 그릇&lt;/strong&gt;으로 거듭날 것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핵심내용]&lt;/strong&gt;&lt;/span&gt;&lt;/p&gt; &lt;p&gt;하나님께서는 사역자를 어느 날 갑자기 세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사람은 먼저 자질을 준비시키시고, 다음에는 성품과 순종을 훈련시키시며, 때로는 좋은 영적 지도자와 환경을 통해 다듬으신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고, 애굽 왕궁에서 언어와 학문과 지도력과 군사적 소양을 배웠으며, 어머니 요게벳을 통해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앙을 배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혈기와 분노가 남아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 40년 동안 비움과 성품의 훈련을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와 사역자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자질과 은사만이 아니라, 회개로 깨끗해진 성품과 순종의 훈련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인포그래픽_[포맷변환].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f05418a2a662d12f12910eaec3ccca4e.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cefa6020d8ec975cc8d376607e5d2d2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cba2099cc0587e8bbb6d345e330c960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e40e466786acbc295cf5f8dcaf951da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50ffc0ac7395312c3e605181378146a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f77e17f17261f13a39232cdcec0859f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a44db1efcc1517505cebe86a5614e3d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ee073d7cbde86fd30e153e97252729e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b3cd494eaafd2c967f578ab5430ae0e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b32dff32a6b872fd040295028971ab4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436245357b7084f72a8ebc9cd7f6158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1fac9785818e1877c592c459d8332c4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555b668994a3e37f6091ee9bc76b5bc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Forging_the_Clean_Vesse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c3291d4685402f01cdec849495bb65a1.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하나님의_사역자가_세워지는_과정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b5f96878327113c92bc214e84b66ee96.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2914656ebc47138cf42eeeb3039407f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3dc2d74ae4e147c9e43d6fb701a2e5a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e5ed84df4642e61a61cba855599c277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9a50ab12df77fc271db6f408f6d20ed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08137f9e5317ec3ff6e2aaf38114189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4b56fea85afabd18b2db2c588bfe93e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879281081377ebd54a61dc39cccd99a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7e15c83dae949827a8c616048e2d7dd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c9f529476715789c756e69dcb495d27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0eceb808c76c9dd095bbb525182d9ed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5d057ae3acf54a495b558fcb643d827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44047e2448b37bc6a7dfa4c62dfe5a5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론(06)] Crafting_the_Divine_Vessel.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038/262/39507359aa86100c33791c396a2605bd.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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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dongtanms.kr/morning_qt/262038#comment</comments>			<pubDate>Thu, 09 Jul 2026 22:28: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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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역자론(05)] 나도 영적인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딤후1:3~6)_2026-07-08(목)</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1929</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사역자론(05)] 나도 영적인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딤후1:3~6)&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Y73JlnNsM7A&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Y73JlnNsM7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 { margin: 0; padding: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1.85; } h1 { font-size: 18px;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margin: 0 0 1.5em 0; padding: 0; } h2 { font-size: 15px; color: #38688c; font-weight: bold; margin: 0 0 0.8em 0; padding: 0; } p.body { margin: 0 0 0 0; padding: 0; } p.scripture { margin: 0 0 0 0; padding: 0;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p.footer { margin: 0; padding: 0; } &lt;/style&gt; &lt;h1&gt;1. 들어가며&lt;/h1&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람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역자로 쓰신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단순히 능력 하나를 얹어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 사람의 그릇을 다듬으신다. 자질을 보시고, 성품을 보시고, 순종을 보시고, 인내를 보신다. 그리고 그가 맡겨진 자리에서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보신다. 그러므로 은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사역자의 그릇을 말해야 한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큰 은사가 나타나면, 그 은사가 복이 되기보다 시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라고 권면했다(딤후1:6). 여기서 &amp;ldquo;불일 듯하게 하다&amp;rdquo;는 헬라어로 &amp;lsquo;아나조퓌레오&amp;rsquo;라는 말인데, 꺼져 가는 불씨를 다시 살려 타오르게 한다는 뜻을 가진다. 은사는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지켜야 하고, 훈련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또한 은사는 자기 자랑의 장식품이 아니라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영적 도구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안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려고 너에게 일깨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많은 사람이 은사를 사모한다. 그러나 은사를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그릇을 돌아보지 않으면 위험하다. 어떤 이는 산에서 기도하다가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환상과 꿈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다(딤전4:1). 그러므로 은사는 반드시 말씀으로 점검되어야 하고, 회개로 정결해져야 하며, 좋은 영적 지도자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은사만 있고 회개가 없으면 위험하고, 능력만 있고 성품이 없으면 무너질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전4:1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 하셨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사역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평신도라 할지라도 집사로서 교회를 섬기고, 자기 가족을 구원으로 이끌며, 하나님이 보내신 종을 돕는 일을 감당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자질과 훈련과 지도자의 점검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역자가 왜 다듬어져야 하며, 내게 있는 은사를 어떻게 확인하고, 은사를 어떻게 받고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2. 사역자는 왜 오래 다듬어져야 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역자는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역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능력 이전에 그릇이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능력이 와도 그 능력을 바르게 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세우실 때 오랜 시간 동안 다듬으신다. 성실한지, 충성스러운지, 온유한지, 순종적인지, 책망을 받을 수 있는지, 고난을 견딜 수 있는지를 보신다. 이러한 성품은 몇 개월의 열심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의 훈련과 시험을 통하여 빚어진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역자가 다듬어지지 않은 채 사역을 시작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가장 위험한 문제는 교만이다. 은사가 조금 나타나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으려 하고,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며, 윗사람의 책망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성령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틈탄 모습이다. 사역자는 늘 &amp;ldquo;내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amp;rdquo;를 점검해야 한다. 어제 맞게 보았다고 해서 오늘도 반드시 맞게 보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성령의 역사도 있지만 귀신의 속임도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라고 했다(딤후3:14). 이것은 사역자에게 영적 계보와 지도자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혼자 기도해서 능력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무에게도 검증받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 성령이 주신 것인지, 귀신이 보여 준 것인지, 자기 상상이 만든 것인지 분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영적 세계를 분별할 수 있는 지도자의 도움은 매우 귀하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네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역자는 세 가지 면에서 다듬어져야 한다. 첫째는 자질이다. 목회자가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 사역자가 귀신에게 눌린 자를 돕겠다고 하면서 귀신론을 알지 못하고 영적 실제를 분별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둘째는 훈련이다. 훈련의 끝은 성품이다. 사역자는 온유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며, 고난을 견뎌야 한다. 셋째는 좋은 지도자다. 좋은 지도자는 잘못된 길을 갈 때 책망해 주고, 영적 공격을 받을 때 도와주며, 사역자가 자기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도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 훈련받았고, 사자와 곰과 싸우며 담대함을 배웠고, 사울의 핍박을 견디며 인내를 배웠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지만 곧바로 왕좌에 앉히지 않으셨다. 긴 세월 동안 그릇을 다듬으셨다. 이것이 사역자의 길이다. 은사를 받는 것보다 먼저 그 은사를 감당할 성품과 그릇이 준비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3.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세 조건은 무엇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자질이다. 자질에는 두 영역이 있다. 하나는 일반 은사, 곧 달란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은사다. 달란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적 DNA와 관계가 깊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재능을 받고, 어떤 이는 음악을 잘하고, 어떤 이는 운동을 잘하며, 어떤 이는 음식을 잘 만들고, 어떤 이는 사람을 섬기는 데 탁월하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무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타고난 자질도 사역에 사용하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에는 달란트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영적 세계를 다루는 사역에는 영적 은사가 필요하다. 귀신을 분별하고, 악한 영을 제어하고, 병든 자를 돕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려면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질의 문제는 단순히 성격이나 재능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도구를 주셨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쓰임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 조건은 훈련이다. 아무리 좋은 자질이 있어도 훈련받지 않으면 위험하다. 훈련받지 않은 은사는 거칠고, 훈련받지 않은 말은 사람을 상하게 하며, 훈련받지 않은 능력은 교회를 세우기보다 흔들 수 있다. 훈련은 단지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다. 훈련은 순종을 배우는 과정이고, 성품이 다듬어지는 과정이며,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 조건은 좋은 지도자의 점검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고, 바울의 안수를 통해 은사를 받았다(딤후1:6). 은사도 영적 흐름 안에서 전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안수를 받느냐, 누구에게 배우느냐, 누구에게 점검받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는 단지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영적 세계를 분별하며, 사역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책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살아난다. 그러나 책망을 거절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길로 빠지기 쉽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전4:14 네 안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것은 예언을 통하여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네게 주어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사역자는 늘 세 가지를 점검해야 한다. &amp;ldquo;나는 이 일을 감당할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충분히 훈련받고 있는가? 나는 좋은 지도자의 점검을 받고 있는가?&amp;rdquo;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사역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자질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고, 훈련이 없으면 교만해지고, 지도자가 없으면 미혹을 분별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을 귀하게 쓰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4. 달란트와 영적 은사는 어떻게 다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달란트와 영적 은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둘은 성격이 다르다. 달란트는 일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헬라어 &amp;lsquo;탈란톤&amp;rsquo;은 원래 무게 단위와 화폐 단위를 뜻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각 사람에게 맡겨진 자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마25:15).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고,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고,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 중요한 것은 받은 양이 아니라 충성이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고, 적게 받은 자에게도 그 받은 것에 충성하기를 원하신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25:15 주인은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여기에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한다. 달란트가 작다고 해서 천국의 상급이 작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받은 양으로만 평가하지 않으시고, 받은 것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하신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을 남겼다면 칭찬을 받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둘을 남겨도 같은 칭찬을 받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다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놓치면 안 된다. 교회를 청소하는 일, 중보기도로 목회자를 돕는 일, 식탁을 섬기는 일, 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달란트의 사용이다. 영적 은사가 없어 보이는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자리에서 충성하면 섬김의 면류관과 인내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은사는 헬라어로 &amp;lsquo;카리스마&amp;rsquo;라고 한다. 이 말은 은혜를 뜻하는 &amp;lsquo;카리스&amp;rsquo;에서 온 말이다. 즉 영적 은사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 낸 자격증이 아니라 성령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아홉 가지 은사가 나온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이다(고전12:8-10). 이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재능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은사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전12:8-10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한 성령 안에서 병 고침의 은사들을 주신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방언 통역을 주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이 아홉 가지 은사는 크게 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말의 은사다. 방언, 방언 통역, 예언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행함의 은사다.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이 여기에 속한다. 능력 행함 안에는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내는 축사의 영역이 포함된다. 셋째는 앎의 은사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 분별이 여기에 속한다. 지식의 말씀은 감추어진 사실이나 과거의 문제를 알게 하는 은사이고, 지혜의 말씀은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방향을 분별하게 하는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영들 분별은 성령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를 구별하게 하는 은사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또 다른 방식으로 보면 은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꿈과 환상의 은사, 영안 열림의 은사로도 구분할 수 있다. 꿈과 환상은 영적 세계를 가슴으로 보게 하는 영역과 관계가 깊고, 영안 열림은 귀신과 천사와 영적 실체를 직접 분별하는 영역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영적 세계가 열렸다고 해서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무당 계열의 조상영이나 미혹의 영이 보여 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과 회개와 지도자의 점검이 필요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손을 통해 나타나는 은사도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빛의 은사는 보게 하는 은사와 연결되고, 불의 은사는 능력 행함과 축사와 연결된다. 피의 은사는 치유와 정결의 역사와 연결되고, 생수의 은사는 마음의 상처와 평안의 회복과 연결된다. 에너지의 은사는 쓰러뜨림 같은 현상과 관계될 수 있으나, 그것이 곧 귀신이 나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보다 열매가 중요하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12:7).&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시는 것은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5. 영적 은사는 사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은사는 사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떤 사명으로 보내셨다면, 그 사명을 감당할 도구를 함께 주신다. 사역자가 아무 도구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목수가 연장 없이 집을 지을 수 없고, 군사가 무기 없이 전쟁에 나갈 수 없듯이, 영적 사역자도 영적 도구가 필요하다. 그 도구가 곧 은사다. 그러므로 은사를 보려면 먼저 사명을 보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세 가지 경로로 올 수 있다. 첫째, 태어날 때부터 어떤 영적 자질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다. 부모나 조상 가운데 믿음과 기도의 유산이 있거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으로 보낸 경우에 그러할 수 있다. 둘째, 예수 믿고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은사가 주어질 수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말했다(행2:38). 셋째, 직임을 감당하기 위해 안수를 받을 때 그 직임에 맞는 은사가 임할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은사가 있게 된 것처럼, 영적 흐름을 통해 은사가 불붙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은사는 호기심으로 구할 것이 아니다. 영적 은사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치유의 은사를 구한다면, 병든 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섬길 각오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축사의 은사를 구한다면, 귀신에게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고난을 감당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지식의 말씀이나 영들 분별의 은사를 구한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지배하거나 겁주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명 없이 은사만 구하면 위험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쓰실 것인지에 따라 은사를 주신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치유의 은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축사의 은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중보기도와 섬김의 은사를 받는다. 모두가 같은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정확히 알고, 그 사명에 필요한 은사를 구하는 것이다. 자기 분수를 모르면 허황된 꿈을 꾸게 되고,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무시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은사는 천국에서 상급을 받기 위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천국에서 귀신을 많이 쫓아냈다는 이유만으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언을 많이 했다고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은사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도구다. 상급은 충성과 인내와 사랑과 순종과 섬김의 열매를 따라 주어진다. 그러므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은 더 두려워해야 한다. 받은 것이 많을수록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6. 은사가 나타나려면 왜 회개가 먼저인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은사가 나타나려면 회개가 먼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 안에 악한 영들이 많이 들어와 있으면 성령의 은사가 제대로 발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뱀들과 귀신들이 가득하면 그 은사가 눌려 있거나 막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은사를 받으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했다(딤후2:21). 이것이 은사의 가장 중요한 준비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될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은사의 통로를 뚫는 일이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들이 떠나가면 그동안 눌려 있던 은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영적 자질이 있지만, 우상숭배와 조상 죄와 자신의 죄로 인해 그것이 막혀 있을 수 있다. 회개하면 그것이 열리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환상으로 보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영들 분별이 열리고, 어떤 사람은 피의 은사나 치유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명과 그릇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특히 환상의 은사는 마음의 상처와도 관련이 깊다. 가슴에 상처와 독이 많이 남아 있으면 맑게 보지 못한다.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주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면 그 상처의 독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환상이 더 맑아질 수 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 그릇이 정결해지는 문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회개 없는 은사는 위험하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은사를 받으면, 속에 남아 있던 악한 영들이 그 은사를 자기 자랑과 교만과 탐욕으로 오염시킨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자기에게 붙들어 두려 하며, 돈과 명예를 탐할 수 있다. 그래서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회개해야 한다. 은사는 기름처럼 귀하지만, 그릇이 더러우면 오염된다. 성령의 선물은 정결한 그릇 안에서 안전하게 흐른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회개는 은사를 분별하게 한다. 귀신도 보여 줄 수 있고, 사탄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줄 수 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탄은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절하게 하려 했다(마4:8-9). 그러므로 보았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회개가 깊어지고 말씀이 기준이 될 때, 성령의 보여 주심과 귀신의 속임을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 사역자에게 회개가 필수인 이유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4:8-9 마귀가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하였다 네가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7. 안수와 사모함은 은사를 어떻게 불붙게 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안수를 통해 불붙을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안수함으로 디모데 안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라고 말했다(딤후1:6). 안수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영적 전이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에게 있는 은사가 제자에게 흘러갈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안수를 받느냐가 중요하다. 성령의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면 성령의 은사가 불붙을 수 있지만, 미혹된 사람에게 함부로 안수를 받으면 악한 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바울이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딤전5:22). 안수는 영적 접촉이다. 그러므로 주는 사람도 조심해야 하고, 받는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안수하면 그 사람 안의 영적 문제에 간섭하게 될 수 있고, 받는 사람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만 사모하다가 혼합될 수 있다. 그래서 안수는 말씀과 질서와 회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딤전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참여하지 말며 너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라&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사모함을 통해서도 불붙는다.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고전12:31). 여기서 &amp;ldquo;사모하라&amp;rdquo;는 말은 헬라어로 &amp;lsquo;젤루오&amp;rsquo;에서 온 표현으로, 간절히 열망하고 뜨겁게 추구한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사모함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amp;ldquo;나도 특별해지고 싶다&amp;rdquo;는 마음이 아니라, &amp;ldquo;주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사를 주십시오&amp;rdquo;라는 마음이어야 한다. 사명 없는 사모함은 위험하지만, 사명에 근거한 사모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뛰어난 길을 너희에게 보이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사모함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첫째, 자신이 맡은 직임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가르치는 자라면 말씀을 더 깊이 깨닫는 은사를 구해야 하고, 병든 자를 섬기는 자라면 치유의 기름부음을 구해야 하며, 귀신에게 눌린 자를 돕는 자라면 영들 분별과 능력 행함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둘째, 전 시간으로 헌신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은사는 장식품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이므로, 은사를 받으려면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이미 받은 작은 은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작은 불씨도 살리면 큰 불이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사모함에는 또한 순서가 있다. 먼저 주님의 뜻을 사모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뜻을 감당할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능력부터 구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사랑 없이 예언하면 사람을 누르고, 사랑 없이 축사하면 사람을 두렵게 하며, 사랑 없이 치유하면 사람을 주님이 아니라 은사자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양 떼를 사랑하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 마음이 있어야 은사가 안전하게 흐른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안수와 사모함은 함께 갈 때 강력하다. 준비된 그릇이 회개로 깨끗해지고, 좋은 지도자의 안수를 통해 불붙으며, 사명에 근거한 간구로 더 깊어질 때 은사는 살아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다. 은사를 받는 목적은 내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악한 영에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 목적이 바르면 은사는 복이 되지만, 목적이 흐려지면 은사는 시험이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8. 받은 은사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지켜야 하는가?&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받은 은사는 발전시켜야 한다. 은사는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고, 부분적으로 느껴지며, 작은 불씨처럼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작은 은사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말씀과 회개와 훈련 안에서 계속 사용하면 점차 선명해진다. 영안이 조금 열렸다면 말씀으로 점검하면서 더 맑게 보도록 훈련해야 하고, 치유나 축사의 은사가 조금 나타났다면 지도자의 점검 아래에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은사를 발전시키는 첫 번째 길은 사용이다. 쓰지 않는 은사는 약해진다. 기도만 하고 사역에 쓰지 않으면 은사는 장롱 속 연장처럼 남아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사용한다고 해서 무모하게 실험해서는 안 된다. 은사 사역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다루는 일이므로, 두려움과 겸손이 필요하다. 지도자의 점검을 받고, 결과를 살피며, 열매가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 길은 계속 회개하는 것이다. 은사를 받은 후가 더 중요하다. 은사가 나타나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그때 교만의 영, 명예욕의 영, 탐욕의 영이 틈탈 수 있다. 그래서 은사자는 더 낮아져야 한다. &amp;ldquo;나는 받은 자일 뿐이다.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amp;rdquo;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은사가 오남용될 수 있다. 은사로 사람을 세우지 않고 자기 사람을 만들거나, 교회를 세우지 않고 교회를 흔들면 매우 위험하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 길은 말씀의 기준을 붙드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기준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말씀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은사자는 원문과 성경 전체의 흐름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모르면 영적 체험을 해석하지 못하고, 체험을 절대화하면 미혹에 빠질 수 있다. 영적 은사는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네 번째 길은 좋은 지도자에게 계속 점검받는 것이다. 사역자가 혼자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이 시작된다. 영적 사역자는 자기 안에 들어온 미세한 혼합을 스스로 못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적 스승과 동역자의 점검이 필요하다. &amp;ldquo;내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내 은사 사용이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내 안에 교만과 탐욕이 들어오지 않았는가?&amp;rdquo;를 물어야 한다. 지도자의 책망을 감사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호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다섯 번째 길은 열매를 확인하는 것이다. 은사의 열매는 사람을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예언을 했는데 두려움만 남고 회개가 없으면 점검해야 한다. 치유가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천국복음에서 멀어지면 목적을 잃은 것이다. 축사를 했는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귀신 이야기만 남으면 균형을 잃은 것이다. 참된 은사는 회개를 일으키고, 말씀으로 세우며,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교회를 건축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더 나아가 은사는 사람을 등급화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보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 말의 은사가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 손에서 나타나는 은사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거룩함은 은사의 크기가 아니라 회개와 순종과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은사가 크면 사명이 큰 것이고, 사명이 크면 책임도 큰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자는 더 낮아져야 하고, 은사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성도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맞는 자리와 분량을 맡기신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받은 은사는 불처럼 다루어야 한다. 불은 따뜻하게 하고 어둠을 밝히지만, 잘못 다루면 태운다. 은사도 그러하다. 성령의 불은 귀신을 태우고 사람을 살리지만, 교만의 불은 사람을 상하게 한다. 사역자는 자신을 계속 낮추어야 하고, 은사를 사명 안에 두어야 하며, 끝까지 교회와 천국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h2&gt;9. 나오며&lt;/h2&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지금까지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훈련, 지도자의 점검, 그리고 영적 은사의 확인과 발전의 길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일꾼은 단순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듬으신 그릇이어야 한다. 자질이 있어야 하고, 훈련받아야 하며, 좋은 지도자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질 때 사역은 안전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달란트와 영적 은사는 구별해야 한다.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부모와 환경과 성품을 통해 주신 일반 은사이며, 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둘 다 귀하지만 목적이 다르다. 달란트는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충성하게 하고, 영적 은사는 영적 전쟁과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그 안에서 충성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영적 은사는 사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은사는 장식품이 아니며, 자기 자랑의 도구도 아니다. 은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귀신에게 눌린 자와 병든 자를 돕기 위한 도구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정결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사명에 근거하여 사모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받은 은사는 계속 불붙여야 한다. 작은 불씨를 방치하면 꺼질 수 있지만, 말씀과 회개와 기도와 훈련으로 다듬으면 더 강하게 타오를 수 있다. 또한 은사자는 지도자의 점검을 받아야 하고, 교만과 탐욕을 경계해야 하며, 은사의 열매가 사람을 주님께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은사는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고, 교회를 건축하는 영적 무기가 된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의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반 사명에도 충성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특별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에도 두려움으로 순종해야 한다. 무엇보다 회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받은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사명 안에서 불일 듯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은사를 자기 자랑으로 쓰지 않고 회개와 천국복음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2026년 07월 09일(목)&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정보배 목사&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footer&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사역자가&amp;nbsp;&lt;strong&gt;영적 은사&lt;/strong&gt;를 받고 발전시키기 위해 갖춰야 할 세 가지 핵심 요소인&amp;nbsp;&lt;strong&gt;자질, 훈련,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lt;/strong&gt;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amp;nbsp;&lt;strong&gt;성품의 훈련&lt;/strong&gt;과 인내를 통해 만들어지며, 특히&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lt;/strong&gt;를 통해 내면의 악한 영을 몰아내야만 비로소 은사가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은 신령한 은사가 개인의 자랑이나 유익을 위한 장식품이 아니라&amp;nbsp;&lt;strong&gt;영적 전쟁의 도구&lt;/strong&gt;임을 강조하며, 사명자는 자신의 전 시간을 드리는&amp;nbsp;&lt;strong&gt;전적인 헌신&lt;/strong&gt;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천국에서의 상급은 은사의 크기가 아니라 주어진 직분에서의&amp;nbsp;&lt;strong&gt;순종과 충성&lt;/strong&gt;에 달려 있으므로, 지도자의 올바른 점검 아래 끊임없이 자신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ChatGPT Image 2026년 7월 9일 오전 01_04_39[포맷변환].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e02bcca066d7fa9e85db65db6dc2c135.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The_Vessel_and_the_Flame.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a61d945318be92611e4052eee446bf8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The_Vessel_and_the_Flame.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f417aa59760ecede3184bcf3b490003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The_Vessel_and_the_Flame.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6e406fc693a0fcea0b0ab2f6087bca0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The_Vessel_and_the_Flame.pdf_4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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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fcd1ba22f96fa47efe48a20cf4a96df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29a907af7a2b7c93315950965b1150d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46b2ebb45033dd72c4dc3ade1b33e3d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06101bba5f85d65fa55ee8d33c22c57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d2b0f3ee5bc3af7b221373d4f6621b3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5681c3b2c3efa46fe09824ab475d88d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5)] Forging_the_Sacred_Vessel.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29/261/1fcf80fccb68d94aab5a62c993d82dc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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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역자론(03)]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으로서 첫번째 조건은?(딤전4:11~16)_2026-07-08(수)</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1909</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사역자론(03)]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으로서 첫번째 조건은?(딤전4:11~16)&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d2eA95ls78Q&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d2eA95ls78Q?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margin:0;padding:0;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NanumGothic&#039;,sans-serif;font-size:16px;line-height:1.8;color:#222;} .heading{font-size:17px;font-weight:bold;color:#38688c;margin:0;} .para{margin:0 0 1em 0;} .verse{margin:0 0 1em 0;font-weight:bold;color:#854ba0;} .date,.author{margin:0;} &lt;/style&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1. 들어가며&lt;/div&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에는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부르신다. 어떤 사람은 성도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같은 특별한 사역의 자리로 부르신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에는 분량이 있고, 분량에는 준비가 있으며, 준비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질서가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역자론의 앞선 흐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먼저 확인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둘째, 쓰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지만,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은 먼저 깨끗하게 된 그릇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의 크기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그릇의 정결함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제 세 번째로 살필 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셨다면, 그 사람은 맡겨진 일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 자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은사와 달란트요, 둘째는 성품과 순종과 자질의 훈련이요, 셋째는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 그 질서 아래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이번 말씀은 그 가운데 첫 번째 조건인 은사와 달란트를 중심으로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단지 열심을 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명하고 가르치라고 했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했으며,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다. 그리고 디모데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권면했다(딤전 4:11~1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딤전 4:11~16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에 사역자의 자격론이 압축되어 있다. 사역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하고, 동시에 자기의 가르침을 살펴야 한다.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면 은사가 더러워질 수 있고,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면 듣는 자의 구원까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와 달란트는 단순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를 살리고 교회를 세우며 천국을 준비하게 하는 영적 도구의 문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왜 은사와 달란트를 갖추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회개와 훈련과 영적 질서 안에서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2. 하나님은 왜 사람마다 다른 부르심을 주시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사람을 똑같은 모양으로 부르지 않으신다. 모든 성도에게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거룩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도록 초청받은 자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역의 직임으로 따로 부르심을 받는다.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선지자로, 어떤 이는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이는 목사와 교사로 세워진다. 이것은 사람의 욕심이나 자기 선택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사람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직임이다(엡 4:11~12).&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엡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임이 목적이 아니라 몸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특별한 사역자로 부르시는 까닭은 그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고,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부르심을 자기 영광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은 언제나 몸을 위한 것이며, 교회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위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하나님은 각 사람의 분량도 다르게 정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자기 종들에게 각각 그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 여기서 달란트는 헬라어로 탈란톤, 곧 무게와 화폐 단위를 가리키지만, 비유 안에서는 주인이 종에게 맡긴 책임과 분량을 의미한다. 그리고 &amp;ldquo;각각 그 재능대로&amp;rdquo;라는 말은 원문상 각 사람의 능력, 곧 뒤나미스에 따라 맡겼다는 뜻을 가진다(마 25:14~1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25:14~15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사역자는 남의 분량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흉내 내다가 무너질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 이상을 하려고 하면 영혼이 찢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 이하로 숨어 버리면 맡겨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역자의 지혜는 자기 분량을 정확히 알고, 그 분량 안에서 충성하는 데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가 전해 온 한 분 하나님 신앙 안에서 보면, 부르심은 여러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생명 주는 영으로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신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시대를 정하시며, 민족과 교회의 쓰임을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부르심의 출발도 하나님이요, 분량의 결정도 하나님이요, 쓰임의 완성도 하나님께 속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3. 쓰임 받기 전 왜 먼저 깨끗해져야 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사람이 자격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은사와 달란트가 아무리 많아도 그릇이 더러우면 주인의 상에 올릴 수 없다. 금그릇이 더러우면 금이라는 재료가 오히려 부끄러움이 되고, 은그릇이 더러우면 그 빛이 가려진다. 주인은 더러운 그릇에 귀한 음식을 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도 이와 같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큰 집 안에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말하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amp;ldquo;깨끗하게 하면&amp;rdquo;이라는 표현은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정결하게 하는 실제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마음속으로만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더러운 영의 통로를 끊고, 성령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딤후 2:20~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회개가 선행되지 않으면 사역은 언제든지 자기 의가 될 수 있다. 사울은 바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을 냈지만, 실제로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교회를 핍박했다. 열심이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방향이 틀리고 영이 더러우면,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열심보다 먼저 회개를 배워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구원론적으로도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구원의 여정의 출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을 덮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구원의 문에 들어선 사람은 이후에 자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예수의 피로 계속 씻김 받아야 한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요일 1:9).&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에서 귀신론적 실제가 드러난다. 죄는 단순한 기록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이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예수께서 귀신을 &amp;ldquo;더러운 영&amp;rdquo;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를 지을 때 더러운 영이 역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영은 합법적인 통로를 붙잡고 떠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자백과 회개는 단지 심리적 반성이 아니라, 예수의 피가 더러움을 씻고 악한 영의 근거를 제거하는 영적 사건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거짓 종교의 죄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십계명 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저주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회개로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출 20: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사역은 위험하다. 사역자가 자기 안의 혈기와 분노와 교만과 음란과 탐욕을 처리하지 않은 채 은사만 사용하면, 그 은사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더러운 것과 섞인 수고를 그대로 계산하지 않으신다. 천국의 집과 상급은 성령의 통치 안에서 행한 수고와 연결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자격을 논하기 전에 먼저 회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4. 하나님이 쓰시는 첫 자격은 왜 은사와 달란트인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회개로 그릇이 깨끗해졌다면, 이제 그 그릇은 맡겨진 일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첫 번째 자격은 은사와 달란트다. 이것은 인간적인 성공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실제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와 능력을 말한다. 마음은 뜨거운데 연장이 없으면 일을 오래 붙들고 있어도 열매가 적다. 밭을 갈아야 하는 사람이 호미 하나만 가지고 넓은 땅을 상대한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트랙터가 있으면 훨씬 넓은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풀을 뽑아야 하는 사람이 손으로만 뽑으면 힘들지만, 낫이나 제초기가 있으면 일의 속도와 범위가 달라진다. 은사와 달란트도 이와 같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에서 온 말이다. 그 뿌리에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가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자격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따낸 훈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amp;ldquo;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amp;rdquo;고 했다. 은사는 귀히 여기고, 불일 듯하게 하며, 전심전력으로 사용해야 할 영적 책임이다(딤전 4:14~1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딤전 4:14~15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달란트는 일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가문, 민족적 기질, 성장 과정, 교육과 훈련을 통해 나타나는 재능과 능력이다. 반면 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둘은 성격이 다르지만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타고난 기질도 쓰시고,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은사도 쓰신다. 일반 은사만 있으면 사역은 인간적 능력으로 기울기 쉽고, 영적 은사만 있다고 하면서 일반적인 자질과 성실을 무시하면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기 어렵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두 가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내게 이미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고, 앞으로 맡겨진 직임을 감당하기 위해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달란트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조직하고 세우는 능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찬양과 예술적 표현의 재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 믿음과 권세가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하다. 사역자는 자신의 직임에 필요한 도구를 알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 사모한다는 것은 욕심을 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더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구하라는 뜻이다. 은사가 없으면 맡은 일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다. 은사가 있어도 회개가 없으면 위험하고, 은사가 없어도 사역의 현장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끗한 그릇이 필요한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고전 12:3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5. 달란트는 어떻게 주어지고 어떻게 쓰이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출생과 성장 과정 속에 심어 두신 일반 은사다. 사람은 아무 배경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부모를 통해 태어나고, 가문의 흐름을 지나오며,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 능력이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글을 쓰고 말하는 능력이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조직을 세우는 능력, 사람을 이끄는 능력, 사람을 섬기고 돕는 능력이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소유권이 종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들은 맡은 것을 가지고 장사해야 했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결산을 받아야 했다. 달란트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결산의 대상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남겨야 하고, 적게 받은 사람도 받은 분량 안에서 충성해야 한다(마 25:19~21).&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달란트를 말할 때 가문과 조상의 흐름도 함께 보아야 한다. 어떤 가문에는 교육의 흐름이 있고, 어떤 가문에는 예술의 흐름이 있으며, 어떤 가문에는 상업과 조직의 흐름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상숭배와 무속과 불교와 유교 제사의 흐름도 있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흐름을 그대로 긍정하거나 그대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재료는 회개와 성령의 통치 아래에서 거룩하게 쓰임 받을 수 있고, 우상숭배를 통해 들어온 더러운 영의 통로는 반드시 회개로 끊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를 들어 노래와 춤과 예술적 감각이 어떤 사람에게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이 단순히 세상적 재능으로만 쓰이면 사람의 인기와 육체의 욕망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회개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께 드려지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도의 마음을 깨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활쏘기와 운동 능력처럼 민족의 역사 속에 축적된 기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달란트는 세상 왕국을 세우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달란트는 주인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달란트 가운데 사역자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능력이다. 사람을 살리는 사역은 결국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를 아무리 보아도 말씀으로 정리하지 못하면 성도를 안정적으로 세울 수 없다. 반대로 말은 잘하지만 영적 실제를 모르면 성도를 귀신의 속임수와 종말의 미혹에서 건져내기 어렵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달란트는 말씀의 정확성, 영적 분별, 성도의 상태를 읽는 목자의 마음과 함께 쓰여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달란트는 개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씨앗을 주셨다고 해서 열매가 저절로 익는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고 연구해야 하며, 찬양하는 사람은 훈련해야 하고, 사람을 세우는 사람은 성품을 다듬어야 한다. 달란트가 훈련 없이 사용되면 거칠어지고, 회개 없이 사용되면 오염되며, 성령의 지배 없이 사용되면 자기 확장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달란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료이되, 회개와 훈련과 순종 속에서 익어 가야 하는 맡겨진 책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6. 사역자에게 왜 가르치는 은사가 기본인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이 디모데에게 가장 강하게 부탁한 일 중 하나는 가르침이었다. &amp;ldquo;명하고 가르치라&amp;rdquo;, &amp;ldquo;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amp;rdquo;, &amp;ldquo;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amp;rdquo;는 말씀이 반복된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 헬라어 디다스코와 연결된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풀어 듣는 자가 순종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다. 사역자는 성도의 귀를 열고, 영을 깨우며, 천국을 준비하게 하는 가르침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딤전 4:11~13).&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딤전 4:11~13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가르침은 목회자의 기본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목사와 교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목자는 양을 먹여야 하고, 교사는 말씀을 풀어야 한다. 성도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왜 회개가 구원의 여정에서 계속 필요한지, 천국과 지옥의 실제가 무엇인지, 더러운 영들이 어떻게 사람을 속이는지, 말세에 하나님께서 어떤 경륜으로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 세계에 흘려보내시는지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특히 마지막 시대에는 가르침의 정확성이 생명과 직결된다. 사람들은 많은 설교를 듣지만, 무엇이 한 분 하나님 신앙인지 모를 수 있다. 예수께서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구원의 중심이 흔들린다. 믿음으로 칭의 받는 것과 회개로 실제 죄를 씻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구원의 여정을 완성으로 착각한다. 귀신의 역사를 심리 현상으로만 보거나 반대로 무분별한 신비주의로만 흐르면 성도는 영적 싸움에서 패배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교리의 정리이면서 동시에 영혼을 살리는 전쟁이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역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amp;ldquo;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amp;rdquo;라고 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말씀은 지식이 되고 만다. 말은 옳은데 삶이 틀리면 성도는 그 가르침을 신뢰하지 못한다. 은사는 나타나는데 정절과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사람은 모이지만 영혼은 병든다. 그래서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서 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은사의 토대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좋은 가르침은 성도를 깨운다. 성도는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왜 지금 회개해야 하는지, 왜 천국의 지위와 상급을 준비해야 하는지, 왜 가족을 구원해야 하는지, 왜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도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면 움직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결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가르침은 성도의 귓구멍을 영적으로 뚫어 주는 일과 같다. 닫힌 귀가 열릴 때, 성도는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다시 보게 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은사는 가장 기본적인 달란트이면서 동시에 영적 은사와 연결되어야 한다. 성경을 정확히 풀어 주는 지식, 현재 성도의 상태를 분별하는 지혜, 미래의 위험을 경고하는 영적 감각, 귀신의 속임수를 분별하는 능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단지 지적인 강의만으로는 영을 깨울 수 없고, 단지 은사 체험만으로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없다. 말씀과 성령, 교리와 영적 실제, 구원론과 귀신론과 종말론이 함께 정리되어야 참된 가르침이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7. 영적 은사는 어떻게 주어지고 왜 필요한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사역자가 맡은 직임을 감당하도록 필요한 영적 도구를 주신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방언 통역을 말한다. 이 은사들은 사람의 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세계를 다루기 위해 주어진다(고전 12:8~10).&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고전 12:8~10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영적 은사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마귀에게 속한 자를 건져내고, 병든 자를 일으키며, 속임을 분별하고, 닫힌 영을 열어 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다. 특히 귀신론을 모르면 영적 은사의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 안에는 개인의 죄를 통해 들어온 더러운 영들이 있을 수 있고,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무속과 거짓 종교를 통해 내려온 영들도 있을 수 있다. 이 영들은 성도를 죄짓게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며, 회개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므로 영들 분별함과 축사의 권세와 믿음의 은사가 필요하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첫째, 모태로부터 주어질 수 있다. 믿음의 부모와 기도의 부모를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디모데에게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던 거짓 없는 믿음의 흐름이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라고 했다. 이미 주어진 은사가 있었지만, 영적 지도자의 안수와 권면을 통해 다시 활성화되어야 했던 것이다(딤후 1:5~6).&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딤후 1:5~6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둘째, 은사는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질 수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말했다.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서 성령이 임할 때 방언과 예언과 환상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영을 깨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표지로 주어진 것이다(행 2:38).&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셋째, 은사는 직임을 감당하기 위해 주어질 수 있다. 말씀 사역자에게는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 과거의 묶임을 알고, 현재의 상태를 분별하며, 장차 다가올 영적 위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병든 자를 섬기는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와 믿음이 필요하고, 귀신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과 영들 분별함이 필요하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과 환상도 사역의 현장에서 성도를 세우기 위해 주어질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은사를 받는 일에는 위험도 따른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은사를 받으면, 은사가 자기 자랑의 근거가 되기 쉽다. 더러운 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능력이 나타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최고인 줄 착각할 수 있다. 질서를 무너뜨리고, 지도자를 거부하고, 자기 사역을 하나님 나라보다 앞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회개와 함께 가야 하고, 성품의 훈련과 함께 가야 하며, 말씀의 검증과 영적 지도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은사는 한 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근원을 좇아서는 안 된다. 무속의 신내림, 점술, 귀신의 예언과 성령의 은사는 근원이 다르다. 겉으로는 비슷한 현상이 있어도, 한쪽은 더러운 영이 사람을 묶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은 더욱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은사의 근원과 열매를 분별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8. 은사 받은 사람은 왜 지도자 아래 훈련받아야 하는가?&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은사와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훈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홀로 세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80세에 쓰임 받기까지 애굽 궁정과 미디안 광야를 지나야 했고,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종살이와 감옥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다윗도 기름부음을 받은 뒤 곧바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사울의 추격을 견디며 훈련받았다. 큰 쓰임에는 큰 훈련이 따른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훈련의 핵심은 성품과 순종과 자질이다. 은사가 나타난다고 성품이 자동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한다고 혈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예언을 한다고 교만이 죽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에게 붙여 훈련하신다. 영적 지도자는 은사를 받은 자의 방향을 잡아 주고, 잘못된 길을 갈 때 막아 주며, 그 속에 있는 악한 영의 작용을 분별하게 도와준다. 지도자가 없거나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은사자는 위험하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수께서는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지 인간 조직의 서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세계에는 질서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 질서를 통해 사람을 빚으신다. 제자가 선생을 통과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자아가 은사를 타고 올라와 사역을 망칠 수 있다(마 10:24~25).&lt;/p&gt; &lt;p class=&quot;verse&quot;&gt;마 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다. 평신도는 어떤 주의 종을 만나느냐에 따라 말씀의 깊이와 영적 분별력이 달라진다. 사역자는 어떤 스승 아래에서 훈련받느냐에 따라 쓰임의 질이 달라진다. 영적 지도자는 단지 정보를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고, 막힌 부분을 열어 주며, 때로는 책망하고, 때로는 기다려 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 사람을 세워 간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훈련받지 않은 은사는 거칠다. 훈련받지 않은 달란트는 자기중심적이다. 회개하지 않은 능력은 더 위험하다. 사역자는 자기에게 나타나는 은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자동 보증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능력만 보지 않으시고 질서와 순종과 정결함을 함께 보신다. 모세도 마지막 순간 혈기와 불순종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든 사역자에게 두려운 경고가 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은사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낮아져야 하고, 크게 쓰임 받을 사람일수록 더 강한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은사는 연장이지만, 훈련은 그 연장을 바르게 쓰는 손이다. 달란트는 재료이지만, 순종은 그 재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으로 빚는 과정이다. 영적 지도자의 질서 아래에서 회개하고 배우고 다듬어질 때, 은사와 달란트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역의 도구가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heading&quot;&gt;9. 나오며&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첫 번째 자격으로서 은사와 달란트가 왜 필요한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부르심과 분량을 알아야 한다. 그 부르심은 자기 욕망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맡겨진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사역자는 은사보다 먼저 회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깨끗하지 않은 그릇은 금그릇이라도 귀히 쓰임 받을 수 없으며, 회개하지 않은 능력은 언젠가 교만과 혼합과 무질서로 흘러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예수의 피로 씻김 받고, 자기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의 통로를 끊어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은사와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연장임을 기억해야 한다. 달란트는 출생과 가문과 훈련 속에서 주어진 일반 은사이며, 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직임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둘은 모두 주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천국의 결산 앞에서 충성의 열매로 드려져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 세계로 흘러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한 분 하나님을 바르게 증언하고, 믿음과 회개의 구원론을 정확히 전하며, 귀신의 역사를 분별하고,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천국의 지위와 상급을 준비하도록 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사와 달란트를 사모해야 하며, 동시에 좋은 영적 지도자 아래에서 성품과 순종과 자질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일꾼은 많이 나타나는 사람이 아니라 바르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받은 은사를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맡겨진 달란트를 묻어 두지 말아야 하며, 주인의 뜻을 따라 깨끗하고 충성되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회개로 깨끗해진 그릇이 되어 은사와 달란트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고 천국에서 인정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date&quot;&gt;2026년 07월 07일(화)&lt;/div&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author&quot;&gt;정보배 목사&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사역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갖춰야 할 핵심 자격으로&amp;nbsp;&lt;strong&gt;부르심에 대한 깨달음&lt;/strong&gt;,&amp;nbsp;&lt;strong&gt;철저한 회개를 통한 정결&lt;/strong&gt;, 그리고&amp;nbsp;&lt;strong&gt;은사와 달란트의 구비&lt;/strong&gt;를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개인의 선천적 재능인 일반 은사(달란트)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amp;nbsp;&lt;strong&gt;영적 은사&lt;/strong&gt;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특히 지도자에게는&amp;nbsp;&lt;strong&gt;가르치는 은사&lt;/strong&gt;가 필수적임을 역설합니다. 이러한 자격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amp;nbsp;&lt;strong&gt;영적 지도자의 훈련&lt;/strong&gt;&amp;nbsp;아래 인격과 성품이 깎이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무엇보다&amp;nbsp;&lt;strong&gt;지속적인 회개&lt;/strong&gt;로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유지해야 능력이 변질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설교는 사역의 효율을 높이는&amp;nbsp;&lt;strong&gt;영적 도구로서의 은사&lt;/strong&gt;를 사모하되, 그 기초는 반드시&amp;nbsp;&lt;strong&gt;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순종&lt;/strong&gt;&amp;nbsp;위에 놓여야 함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역자의_자격과_준비_가이드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7f786720d1eeb102e577e37bae66ecc7.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86c077a8cdb1bd92999bf68fb6a84be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fc684d6d75354554260463f7ab371f3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ee998675ec35d98135dd160fc3ce513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ce0fbeeff4e931861578d9fe44d5582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fb5e21b7496cce50b163aad1434e401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8d81f69f07585dd39bd38a31881cd2f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a742fb2ea46ae12e0be18111656dd26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fecce708c8c6366a1eab9a06335bbaf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e081f1fed719d64ae18ebf50e240899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The_Master_s_Armory.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909/261/1557005e77e72c85397cc6e29c5f632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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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dongtanms.kr/morning_qt/261909#comment</comments>			<pubDate>Wed, 08 Jul 2026 02:03:0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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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역자론(02)]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사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딤후2:20~21)_2026-07-07(화)</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1877</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 [사역자론(02)]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사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딤후2:20~21)&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tbaiOFZ7aCo&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tbaiOFZ7aCo?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 0; padding: 0; } body {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NanumGothic&#039;, sans-ser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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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하나님의 집 안에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으며,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 그런데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은 단지 재료가 좋은 그릇이 아니다. 먼저 깨끗하게 된 그릇이다(딤후 2:20~21).&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사역자론의 출발점이다. 자신이 어떤 그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으로 자신을 부르셨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의 그릇이 깨끗한지 살펴야 한다. 더러운 금그릇은 주인이 음식 담는 데 쓰지 않는다. 깨끗하지 않은 은그릇도 귀한 자리에 내놓을 수 없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은 크고 화려한 그릇이기 전에 먼저 씻겨진 그릇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 전에 왜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하나님은 성도를 어떤 일꾼으로 부르시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lt;strong&gt;첫 번째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lt;/strong&gt;이다. 이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사람은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길을 만들 수 없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였고, 생명나무의 생명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친히 일하셨다. 그분은 아들과 아기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으며,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시어 보혜사 성령으로 오셨다. 구원은 사람이 만들어 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amp;ldquo;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amp;rdquo;이라고 말한다(고전 1:2). 성도는 자기가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고,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신 사람이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성도의 기본 정체성이 드러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에 응답하며, 천국을 향해 부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끝까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초청을 거부하면 초청은 자기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먼저 메시아의 방문을 받았으나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그 특권은 교회로 넘어갔다. 그러므로 부르심에는 반드시 응답이 따라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성도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부르심은 세 가지 책임으로 구체화&lt;/strong&gt;된다. &lt;strong&gt;첫째, 성도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lt;/strong&gt;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먼저 부르셨다면, 그는 자기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워진 것이다. &lt;strong&gt;둘째, 성도는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참여해야&lt;/strong&gt;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한 지체가 받은 은혜는 몸 전체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lt;strong&gt;셋째, 성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종을 협력해야&lt;/strong&gt; 한다. 주의 종이 말씀과 기도와 복음 전파에 전념하도록 돕는 일은 평신도 일꾼에게 맡겨진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 맡겨진 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일꾼이다.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천국 백성으로 살기 위해 부름 받았고, 동시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이 기본을 모르면 평생 수고해도 하나님 앞에서 정확히 계산되지 않는 길로 갈 수 있다. 성도의 부르심은 구원받은 신분에서 출발하지만,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일반적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은 무엇이 다른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모든 성도에게 일반적인 부르심&lt;/strong&gt;이 있다면, &lt;strong&gt;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역의 부르심&lt;/strong&gt;이 있다. 이 부르심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구원의 초청과는 다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 &lt;strong&gt;바울은 바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lt;/strong&gt;이다. 그는 고린도전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을 &amp;ldquo;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amp;rdquo;이라고 소개한다(고전 1:1). 그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말은 &amp;ldquo;하나님의 뜻을 따라&amp;rdquo;이다. 사역의 부르심은 사람이 스스로 정하는 직업적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 마음먹었다고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원한다고 선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며,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역자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열정만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을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어떤 대상에게 보내셨는지, 어떤 분량의 사명을 맡기셨는지 분별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의 경우가 그렇다. 주님은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직접 만나셨지만, 그의 사명을 그 자리에서 모두 직접 설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지체를 통해 사울의 사명을 알려 주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역자가 혼자 서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역자는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몸의 질서 안에서 확인받고 연합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아나니아에게 주신 말씀은 바울의 사명을 정확히 드러낸다. 그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었다(행 9:15~16). 한 사람의 사명 안에 이방 선교와 권력자들 앞의 증언과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 전파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만큼 바울의 그릇은 컸고,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도 컸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행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그런대&amp;nbsp;&lt;strong&gt;특별한 사역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고난도 &lt;/strong&gt;따른다. 하나님께서 큰 그릇으로 빚으신 사람은 많은 사람을 품어야 하므로 쉽게 흔들리면 안 된다. 작은 일에 삐치고, 사람의 말에 넘어지고, 조금만 어려워도 떠나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오래 쓰실 수 없다. 사역자는 자기 마음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뜻을 크게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알고, 그 사명 때문에 견디며, 끝까지 중심을 지켜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때 일반 성도와 특별 사역자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은혜는 동일하게 크다. 다만 쓰임의 종류와 분량이 다를 뿐이다.&lt;strong&gt; 어떤 사람은 가정과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일꾼으로&lt;/strong&gt; 쓰임 받고, &lt;strong&gt;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명자로&lt;/strong&gt; 쓰임 받는다. &lt;strong&gt;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정확히 알고 그 부르심 안에서 충성하는 것&lt;/strong&gt;이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왜 사역자의 그릇과 분량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역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lt;strong&gt;그릇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lt;/strong&gt;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크기의 그릇이 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처럼 쓰임 받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 앞에 서고 싶어 하며, 어떤 사람은 큰 이름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릇의 모양과 크기와 쓰임을 정하는 권한이 진흙에게 있지 않고 토기장이에게 있다고 말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로마서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도 만드시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드실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롬 9:20~21).&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9:20~21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은 구원받을 기회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주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lt;strong&gt;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그러나 사역의 분량과 쓰임의 종류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lt;/strong&gt;. 누가 모세처럼 쓰임 받을지, 누가 사무엘처럼 쓰임 받을지, 누가 다윗처럼 쓰임 받을지, 누가 예레미야처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워질지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사명은 사람이 자기를 높여 얻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륜 안에서 맡겨지는 자리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 보라고 하셨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그릇이 터지자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 장면을 통해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려 주셨다(렘 18:3~8).&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렘 18:3~8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 말씀에는 개인의 사명만이 아니라 민족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도 들어 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먼저 선택하시고 메시아가 오실 통로로 삼으셨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자, 하나님은 교회를 세워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셨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다시 전 세계로 흘러가도록 특정한 민족과 교회와 사역자들을 준비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타임라인이다. 하나님은 창조와 타락, 구속과 교회 시대, 말세의 회복과 심판, 그리고 천국 입성의 길을 자신의 주권 가운데 진행하신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사역자는 자기 그릇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큰 그릇으로 지음 받았다고 교만할 일이 아니며, 작은 그릇으로 지음 받았다고 낙심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amp;#39;깨끗함&amp;#39;이고, 비교가 아니라 &amp;#39;충성&amp;#39;이다&lt;/strong&gt;.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그릇으로 빚으셨는지 알고, 그 그릇의 분량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시 돌이켜야 한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진 그릇이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다시 쓰실 수 있기 때문이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쓰임 받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lt;strong&gt;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lt;/strong&gt;이다. 이것이 이번 설교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이 사역의 방법을 먼저 배우려 한다. 설교하는 법, 기도하는 법, 조직을 세우는 법, 사람을 모으는 법, 재정을 운영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물론 이런 준비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일이 있다. 바로 그릇 자체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디모데후서 2장 20~21절은 큰 집 안에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금그릇과 은그릇은 귀하게 보이고, 나무그릇과 질그릇은 상대적으로 천하게 보인다. 그러나 주인이 쓰는 기준은 단순히 재료가 아니다.&lt;strong&gt; &amp;ldquo;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amp;rdquo;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쓰임의 조건&lt;/strong&gt;이다(딤후 2:20~21).&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amp;ldquo;깨끗하게 하면&amp;rdquo;이라는 말은 &lt;strong&gt;사역자의 내면과 영적 상태&lt;/strong&gt;를 가리킨다. 겉으로는 은사가 있어 보이고, 지식이 있어 보이며, 열심도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릇 안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면 주인이 귀한 음식을 담을 수 없다. 시궁창 냄새가 나는 그릇에 아무리 좋은 음식을 담아도 사람은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은 죄와 더러운 영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결한 통로가 되기 어렵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lt;strong&gt;사역자는 두 가지 착각을 버려야&lt;/strong&gt; 한다. &lt;strong&gt;첫째, &amp;ldquo;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나는 이미 안전하다&amp;rdquo;는 착각&lt;/strong&gt;이다. 부르심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일수록 더 정결해야 한다.&lt;strong&gt; 둘째, &amp;ldquo;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인정하신다&amp;rdquo;는 착각&lt;/strong&gt;이다. 열심이 언제나 순종은 아니다. 열심이 회개 없는 자아와 결합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도구가 될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사역자는 사역의 자리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살펴야 한다. 나의 혈기와 분노가 처리되었는지, 교만과 자기 의가 꺾였는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우상숭배의 영적 뿌리가 회개로 정리되고 있는지,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십자가 앞에 내려졌는지 살펴야 한다. 이것이 없이 사역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귀신과 자아가 섞여 사역할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깨끗한 그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하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며, 예수의 피로 씻김받는 것이다. 주인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함으로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사람이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칭의와 회개는 왜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일꾼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면 &lt;strong&gt;먼저 칭의와 회개를 구별해야&lt;/strong&gt; 한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흐름을 정확히 보면, 칭의는 구원의 여정의 출발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신다. 죄인이 실제로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덮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3:23~24). 구원은 은혜이다.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로워져서 얻는 것이 아니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고 했다(롬 3:28).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 3:30). 이것이 칭의이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칭의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가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다. 로마서 5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롬 5:1, 9). 이미 시작된 구원이 앞으로 진노하심에서 건짐받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예수의 피의 두 가지 적용을 알아야 한다. 첫째, 예수의 피는 믿는 자의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한다. 이것은 구원의 여정에 들어오게 하는 은혜이다. 둘째, 예수의 피는 자백하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실제로 씻어 깨끗하게 한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요일 1:7, 9).&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 오해하면 회개를 놓치게 된다. 회개를 놓치면 깨끗함을 놓치고, 깨끗함을 놓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제 예수의 피로 날마다 씻김받아야 한다. 하늘의 행위 책이 예수의 피로 덮이는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죄와 더러움을 자백함으로 실제로 씻어 내는 길을 걸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동탄명성교회가 전하는 회개와 천국복음의 핵심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근거를 마련하셨고,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칭의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는 회개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어야 한다. 믿음의 시작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믿음의 길은 회개와 순종으로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왜 회개하지 않은 수고는 하나님 앞에서 헛될 수 있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람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모든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활동만 보지 않으신다. 그 일을 어떤 영으로 했는지, 어떤 상태에서 했는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했는지, 자기 의와 교만으로 했는지를 보신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사역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자기 욕심과 악한 영의 역사가 섞일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울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열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 열심은 교회를 박해하는 열심이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고, 성도들을 잡아가려 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대적했다. 그때의 사울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박해하는 자였다. 열심은 있었으나 방향이 틀렸고, 종교적 확신은 있었으나 회개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하나님 앞에서 상급이 아니라 책망과 고난의 길로 이어졌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약 2:17, 26). 이것은 행위로 구원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회개와 순종의 열매를 낳는다는 뜻이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 회개의 열매가 없고, 주님을 위해 산 흔적이 없다면 그 믿음은 마지막 날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경고이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회개 없는 수고가 헛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남는다. 둘째, 죄가 남으면 더러운 영의 합법적 근거가 남는다. 셋째, 더러운 영의 역사가 남으면 사역 속에 혈기와 분노와 교만과 시기와 경쟁심이 섞인다. 넷째, 그렇게 섞인 사역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정하시기 어렵다. 하나님은 귀신과 함께 섞여 이루어진 일을 깨끗한 사역으로 계산하지 않으신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매우 두려운 영적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많은 시간을 교회에 바쳤고, 많은 봉사를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역이 회개 없이 이루어졌다면,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계산되지 않을 수 있다. 더러운 그릇으로 음식을 담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릇의 재료가 금인지 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릇 안에 더러움이 있으면 주인은 그것을 귀한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진다. 조금만 책망을 들어도 시험에 들고, 조금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떠나며, 조금만 인정받지 못해도 삐치고 원망한다. 이것은 단지 성격 문제가 아니다. 속에 처리되지 않은 죄와 더러운 영들이 반응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이것을 영적 팩트로 보아야 한다. 사람과 환경만 탓해서는 안 된다.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엇이 자기를 움직이는지 살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회개는 사역의 부수적인 장식이 아니라 사역의 기초이다.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님은 큰일을 많이 벌인 사람보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회개로 사역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사역자는 왜 평생 회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사역자는 평생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도 회개해야 하고, 믿은 후에 지은 죄도 회개해야 한다. 자신이 직접 지은 죄도 회개해야 하고,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내려온 영적 영향도 회개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사역자는 어느 순간 자기 안에 남아 있는 더러운 영의 역사 때문에 무너질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우상숭배의 죄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경고한다(출 20:5). 이것은 조상들의 죄가 아무런 영적 결과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거 전하는 귀신론은 이 지점에서 매우 실제적이다. 죄를 지을 때 더러운 영이 들어온다. 우상숭배를 하면 우상숭배의 영들이 들어오고, 거짓말을 하면 거짓의 영들이 역사하며, 음란을 범하면 음란의 영들이 틈탄다. 혈기와 분노, 교만과 시기, 불순종과 반역도 악한 영들이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더러운 영들은 불법적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합법적 근거를 통해 들어온다. 그러므로 그 근거가 회개로 처리되지 않으면 쉽게 떠나지 않는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예수의 피가 다시 중요해진다. 믿을 때 예수의 피가 하늘의 행위 책을 덮어 의롭다 하심을 받게 했지만, 그 이후에는 자백하고 회개할 때 그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며, 예수의 피로 씻김받는 영적 실제이다. 그때 더러운 영의 근거가 무너지고, 악한 영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만들어진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을 말한다(계 7:14). 또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으며,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는다고 말한다(계 22:14). 마지막 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만 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씻은 사람이다.&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계 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lt;/div&gt; &lt;div class=&quot;verse&quot;&gt;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사역자는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먼저 자기 옷을 빨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마음을 씻어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고 영적 세계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더러운 영들을 회개로 몰아내야 한다. 사역자는 안수하고, 상담하고, 사람을 만나고, 영적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다시 오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깨끗했다고 내일 자동으로 깨끗한 것은 아니다. 평생 회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또한 회개는 막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뭉뚱그려 &amp;ldquo;내가 죄인입니다&amp;rdquo;라고만 하는 것으로는 깊은 뿌리가 잘 뽑히지 않는다. 거짓말한 죄는 거짓말한 죄로, 음란한 죄는 음란한 죄로, 혈기 낸 죄는 혈기 낸 죄로, 우상숭배한 죄는 우상숭배한 죄로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한다. 조상들이 지은 죄도 우상숭배, 제사, 무속, 미신, 살인, 낙태, 음란, 도둑질, 거짓, 교만 등 구체적인 항목으로 회개해야 한다. 죄가 구체적이었으므로 회개도 구체적이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회개 기도는 사역자의 생명줄과 같다. 한 번 회개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한 번만 한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의 영도 한 번만 회개했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음란한 생각과 혈기와 교만이 반복되었다면, 그것도 반복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천 번, 삼천 번의 숫자만을 채우는 형식이 아니라, 평생 자기 속을 깨끗하게 하는 실제적인 길이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시대에는 몰라서 핑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은 여러 통로를 통해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게 하신다. 말씀을 찾고, 배우고, 적용하려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지식만 쌓아서는 안 된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경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일이 더 먼저이다. 회개하지 않은 성경 지식은 교만을 만들 수 있고, 회개하지 않은 은사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사역자는 평생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회개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일 뿐 아니라, 사역하는 동안 계속 붙들어야 할 영적 호흡이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은 날마다 씻겨진 그릇이다. 회개로 더러운 영의 근거를 제거하고, 예수의 피로 자기 속을 씻으며,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끝까지 쓰임 받을 수 &lt;/strong&gt;있다.&lt;/div&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구원으로 부르시고, 그중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역의 부르심으로 세우신다. 또한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각 사람의 그릇과 분량을 정하시며, 시대와 민족과 교회를 자신의 경륜 가운데 사용하신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든 주인의 손에 귀히 쓰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성도는 &lt;strong&gt;자신의 부르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lt;/strong&gt; 한다. 자기와 가족의 구원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하고, 교회를 세우며, 주의 종을 돕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특별한 사역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과 분량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릇을 자랑하지 말고, 그 그릇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칭의와 회개도 반드시 구별해야&lt;/strong&gt;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은혜로운 출발이다. 그러나 그 길은 회개와 순종으로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예수의 피는 믿는 자의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며, 동시에 자백하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칭의를 구원의 완성으로 오해하지 말고, 날마다 예수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lt;strong&gt;회개 없는 열심은 헛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lt;/strong&gt; 한다. 하나님은 활동의 크기만 보지 않으시고, 그릇의 상태와 영의 순결함을 보신다. 더러운 영과 자기 의가 섞인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계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봉사하기 전에, 사람을 세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회개로 씻어야 한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마지막 때의 성도는&lt;strong&gt; 회개를 생명처럼 붙들어야&lt;/strong&gt; 한다.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자기 죄로 인해 들어온 더러운 영들의 근거를 회개로 제거해야 한다. 막연한 후회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평생 회개함으로 깨끗한 그릇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사역자가 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일꾼이 되며, 천국에서 후회 없는 결산을 맞이할 수 있다.&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일꾼에게 가장 큰 복은 쓰임 받는 것만이 아니다. &lt;strong&gt;깨끗한 그릇으로 끝까지 쓰임 받는 것이 더 큰 복&lt;/strong&gt;이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부르심을 알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분량 안에서 충성하고, 무엇보다 회개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깨끗한 그릇으로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고 천국에서 빛난 옷과 상급을 얻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div&gt; &lt;div class=&quot;signature&quot;&gt;2026년 07월 06일(월)&lt;/div&gt; &lt;div class=&quot;para&quot;&gt;정보배 목사&lt;/div&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쓰임받기 위해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amp;nbsp;&lt;strong&gt;영적 자격과 사전 준비&lt;/strong&gt;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모든 성도가 각자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임을 전제하며, 특히 특별한 사명을 맡은 자들은&amp;nbsp;&lt;strong&gt;자신이 어떤 그릇으로 부름받았는지&lt;/strong&gt;를 명확히 깨닫고 그 분량에 맞게 헌신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무엇보다 본질적인 핵심은&amp;nbsp;&lt;strong&gt;철저하고 구체적인 회개&lt;/strong&gt;를 통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과거의 죄와 가문의 우상숭배로 유입된&amp;nbsp;&lt;strong&gt;악한 영들을 몰아내야만&lt;/strong&gt;&amp;nbsp;비로소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성결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회개 없는 수고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헛된 노력이 될 수 있으므로,&amp;nbsp;&lt;strong&gt;지속적인 자기 정결 작업&lt;/strong&gt;이야말로 사역의 성패와 천국의 상급을 결정짓는 가장 우선적인 과업임을 역설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인포_ChatGPT Image 2026년 7월 7일 오전 12_35_36[포맷변환].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3c9b0061398cb21b66cdbff405f5b280.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0289aed2799f86e90377cce5d99f0ff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4d4f9a3fba480e4efd1e469e1ecab84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8a0be226acce3702bc755232d149267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1926274ed0388d194a34099af604c7ad.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ede01027705e6adeb664b1ff401cdf0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 (1).pdf_6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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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쓰임받는_그릇의_조건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24f444c85503f5429c6a8b9f6405169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6466f58f8738a45a9188b442809f94a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41df9adf0c960ba1f63609a13802378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4c0027bbb9fcc1f07ced269a56095c8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c7935215aa72e4b0c38a297d1d08dfc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95e0b309a9e4851448801e1749c0ef52.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2c21575b93f1746621496a45fb742a2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2dd5afdfe393580d6015ccdfbcbbfcb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2)] The_Pure_Vessel2.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877/261/e5277ddf69493236fe25580473e740a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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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dongtanms.kr/morning_qt/261877#comment</comments>			<pubDate>Tue, 07 Jul 2026 00:10:2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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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온라인새벽기도회(26.07.06)] [사역자론(01)] 하나님의 부르심의 2가지 종류와 그 사명은 무엇인가?(벧후1:10~11)_2026-07-06(월)</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1726</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온라인새벽기도회(26.07.06)] [사역자론(01)] 하나님의 부르심의 2가지 종류와 그 사명은 무엇인가?(벧후1:10~11)&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lt;/p&gt; &lt;p&gt;https://youtu.be/7pnbq6R3bT4&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7pnbq6R3bT4?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html, body { margin-left: 0; margin-right: 0; padding-left: 0; padding-right: 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 &#039;NanumGothic&#039;, sans-serif; font-size: 14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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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부르심을 아는 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이자 사명 생활의 기초다. 부르심을 모르면 이것을 조금 하다가 저것으로 옮겨가고, 사람의 말에 흔들리며, 상황이 어려워지면 곧 물러난다. 반대로 부르심을 아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킨다. 부르심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자랑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자리와 일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그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야 흔들리지 않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사람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왜 부름받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모르면 신앙은 감정의 물결을 따라 움직인다. 은혜가 느껴질 때는 뜨겁고, 환경이 힘들어지면 식어 버린다. 누군가 칭찬하면 움직이고, 누군가 비난하면 멈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람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크게 본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롬 1:6~7). 성도라는 말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로 &amp;ldquo;성도&amp;rdquo;는 &amp;lsquo;거룩하게 구별된 자들&amp;rsquo;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자기 뜻대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는 &amp;ldquo;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받은 자&amp;rdquo;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야 한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롬 1:6~7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lt;/div&gt; &lt;p&gt;&amp;nbsp;&amp;nbsp;이 부르심을 모르면 사람은 구원도 가볍게 여기고 사명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르심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지 지상에서 복을 받게 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하고, 더 나아가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과 신분을 얻게 하려는 데에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점에서 부르심은 구원론과 종말론을 동시에 품고 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삶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도는 부르심을 굳게 하며, 회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영적 전쟁에서 이기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을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그는 돈을 벌어도 왜 버는지를 알고, 가정을 섬겨도 왜 섬기는지를 안다. 교회를 섬길 때에도 사람의 인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임을 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아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을 모르면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배우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교회의 질서도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부르심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상을 붙잡는 것이다. 참된 부르심은 반드시 준비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이라면 말씀으로 다듬으시고, 회개로 낮추시며, 사람과 상황을 통하여 순종을 훈련시키신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아는 사람은 허황된 꿈을 붙잡지 않고, 오늘 자기에게 맡겨진 순종부터 시작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참된 부르심은 또한 한 분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성도는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구약에 홀로 계셨던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로 오셨고, 그 아들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결국 예수님을 아는 데로 우리를 이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왜 부름받았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보내시고 부르시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이 땅에 보내시는지를 살펴야 한다. 육체적으로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정자와 난자가 만나 형성된다. 부모의 유전자가 자녀에게 전해지고, 그 속에는 육체의 형질과 기질과 재능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의 재능을, 어떤 사람은 음악의 재능을,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재능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동탄명성교회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경륜의 타임라인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보내신다. 먼저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때가 되면 부르신다. 보냄이 있고, 부르심이 있으며, 그다음에는 사명이 있다. 사명은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amp;ldquo;나는 무엇을 위해 보냄받았는가?&amp;rdquo;라는 질문은 곧 &amp;ldquo;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amp;rdquo;라는 질문과 연결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실 때 육체의 유전자도 사용하신다는 사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가문에서 태어나 가르침의 달란트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음악의 가문에서 태어나 찬양의 통로가 된다. 어떤 사람은 고난 많은 가정에 태어나 고난받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사명 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달란트는 재료일 뿐이다. 그 재료가 성령의 손에 붙들리고, 회개로 깨끗하게 되고, 말씀으로 방향을 잡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별히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보내실 때에는 때와 장소가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때에 부름받았다. 사무엘은 제사장 체계가 부패하고 왕정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부름받았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초림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로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개인의 재능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경륜의 시간표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필요한 말씀을 맡기시고, 그 말씀을 전할 사람을 보내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실 때 고려하시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는 시대다. 어떤 사람은 일제강점기 같은 핍박의 시대에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때 회개와 천국 복음이 필요한 시대에 보내신다. 둘째는 가정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가정, 혹은 특별한 영적 환경이 필요한 가정에 사람을 보내신다. 사무엘은 한나의 눈물의 기도 속에서 태어났다(삼상 1:11). 셋째는 민족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민족을 통하여 어떤 복음을 드러내실지를 아신다. 넷째는 성별이다. 남자로 보내실지 여자로 보내실지 역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삼상 1:1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lt;/div&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자기 부르심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거절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부르심을 알아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때부터 사명의 길로 들어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때로 꿈으로 부르신다. 요셉은 꿈을 통하여 자기의 장래 사명을 보았다. 하나님은 때로 직접 음성으로 부르신다. 모세와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이 쓰시는 종을 통하여 사람을 불러내시기도 한다. 바울이 디모데와 누가 같은 동역자들을 세운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일꾼을 깨워 세우는 통로가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일반적 부르심은 무엇인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에는 먼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일반적 부르심이 있다. 이것은 성도로 부르심받는 것이다. 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고,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도록 부름받은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일반적 부르심의 핵심은 구원이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amp;ldquo;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amp;rdquo;라고 물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amp;ldquo;주 예수를 믿으라&amp;rdquo;고 대답했다(행 16:31). 그러나 그 대답은 개인의 구원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amp;ldquo;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amp;rdquo;고 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먼저 부르시는 것은 그 사람만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그의 집을 구원하시려는 뜻도 들어 있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의 일반적 부르심 안에는 가정 구원의 사명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불러 예수 믿게 하셨다면, 나는 내 집의 선교사다. 부모와 형제와 배우자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아직 믿지 않는 가족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부르셨다는 것은 그 집에 복음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일반적 부르심은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이다. 성도는 세상과 똑같이 살도록 부르심받은 사람이 아니다. 거룩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구별됨이고, 또 하나는 깨끗함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 반복하는 속된 삶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가정 구원은 감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도와 삶의 증거와 인내가 함께 있어야 한다. 가족이 당장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의 보폭을 뒤로 늦추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빛 가운데 서야 한다. 성도가 뒤로 물러가면 가족도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가 부르심을 붙들고 전진하면 가족은 언젠가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성도는 가족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일반적 부르심은 또한 영적 전쟁을 포함한다. 성도는 단지 예배당 안에 앉아 있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죄와 싸우고, 귀신의 미혹과 싸우고,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악한 본성의 역사와 싸우도록 부름받았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역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들을 분별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삶은 악한 영에게 합법적인 자리를 내어 주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반적 부르심은 믿음, 회개, 거룩함, 영적 싸움으로 이어진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리고 일반적 부르심은 교회의 지체로 부르심받는 것이다. 성도는 홀로 구원받아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세우고, 다른 지체를 섬기며, 복음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일반적 부르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성도는 왜 자기 집과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받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부름받았을 뿐 아니라 섬기기 위해 부름받았다. 여기서 섬김은 단순히 봉사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로 &amp;ldquo;일꾼&amp;rdquo;을 뜻하는 말 가운데 &amp;lsquo;디아코노스&amp;rsquo;가 있다. 이것은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다(골 1:23). 복음의 일꾼은 복음을 듣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골 1:23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것이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성도의 섬김에는 먼저 자기 집을 위한 섬김이 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믿지 않는 가족을 억지로 끌고 오려 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회개로 성품이 바뀌고, 말이 바뀌고, 삶이 바뀔 때 가족은 그 변화를 본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통하여 가족의 마음을 여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성도는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사람의 조직을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교회를 세우는 섬김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도하는 일, 예배를 지키는 일, 성도들을 돌보는 일, 물질로 복음을 돕는 일,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는 일이 모두 포함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역자들을 세우신 목적도 분명하다. 그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엡 4:11~12). 그러므로 사역자는 성도를 자기에게 묶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한다. 성도도 사역자를 인간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가 전하는 말씀이 자신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엡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섬김에는 질서가 있다. 질서 없는 열심은 교회를 세우기보다 흔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씀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를 따라 섬길 때, 그 섬김이 하늘에 기록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드러나는 자리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가 더 귀할 때가 많고, 말보다 기도가 더 큰 섬김이 될 때도 많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을 돕는 일을 귀하게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복음에 함께 힘쓰던 여인들과 동역자들을 도와주라고 했다(빌 4:3). 이것은 하나님의 종을 인간적으로 높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을 알아보고, 그 사역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함께 짐을 지라는 뜻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빌 4:3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너에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도와주고 또한 나의 동역자들을 도와주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도 &amp;ldquo;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amp;rdquo;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 원리다. 직접 사도의 직무를 받은 사람이 아니어도, 사도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면 그 상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에게 주어진 섬김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기억되는 일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마 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특별한 사역자의 부르심은 일반 성도의 부르심과 무엇이 다른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모든 성도에게 일반적 부르심이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역자의 부르심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amp;ldquo;사도라고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amp;rdquo;고 고백했다(롬 1:1). 여기서 사도라는 부르심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부르심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도록 특별히 맡겨진 사역자의 부르심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라고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느니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특별한 부르심은 직분의 이름보다 사명의 내용이 중요하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하고 성도를 봉사의 일에 세우기 위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경륜을 전하기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했다(딤전 2:7). 그는 자기 생각을 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특별한 부르심은 이처럼 시대적 사명과 연결된다. 어떤 시대에는 믿음의 지조를 지키도록 순교자를 보내시고, 어떤 시대에는 타락한 교리를 바로잡도록 진리의 종을 보내시며, 어떤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 복음을 다시 외치도록 사역자를 보내신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딤전 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내가 이방인의 교사가 되었노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특별한 사역자의 부르심에는 시대적 메시지가 따른다. 어떤 종은 믿음을 지키는 메시지를 맡고, 어떤 종은 회개를 맡고, 어떤 종은 천국의 실상을 증거하는 일을 맡고, 어떤 종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통하여 복음을 확증하는 사명을 맡는다. 그러나 어떤 은사도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은사와 직분은 모두 천국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세우기 위한 도구다. 예수님께서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4:23). 순서는 중요하다. 기적이 중심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중심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따라서 사역자는 자기에게 나타난 은사만 자랑해서는 안 된다. 말씀 없는 은사는 위험하고, 회개 없는 능력은 오용될 수 있으며, 천국의 목적을 잃은 사역은 사람을 자기 주변에 모으는 일로 끝날 수 있다.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하고, 더욱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하며, 더욱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다.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 사역자는 말씀을 바로 전해야 하고, 회개를 외쳐야 하며,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귀신론의 영역에서도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이 왜 죄에 눌리고, 왜 가난과 질병과 막힘의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지, 왜 회개가 필요한지, 왜 예수님의 피와 이름과 성령의 능력이 실제적인 해방을 가져오는지를 가르쳐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특별한 부르심은 영적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은 사람을 미워하라고 보내심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을 분별하고, 회개와 말씀과 예수 이름의 권세로 그것들을 물리치도록 보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역자의 부르심은 진리를 가르치는 일과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일을 함께 포함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하나님은 특별한 부르심을 어떤 방식으로 알려 주시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부르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려 주신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듣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꿈으로 듣고, 어떤 사람은 직접 음성으로 듣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을 통해 듣는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람에게 깨닫게 하신다는 점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첫째, 하나님은 꿈으로&lt;/strong&gt; 알려 주신다. 구약의 요셉은 꿈을 통하여 자신의 장래 사명을 보았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절하는 장면은 단순한 개인적 성공의 꿈이 아니라, 장차 기근 속에서 가족과 민족을 살릴 사명의 예고였다. 꿈은 때로 상징으로 오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성취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 하나님은 직접 음성으로&lt;/strong&gt; 부르신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사무엘은 어릴 때 &amp;ldquo;사무엘아, 사무엘아&amp;rdquo;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두 번 부르시는 장면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연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부르신다는 표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 하나님은 참된 종을 통하여&lt;/strong&gt; 사람을 세우신다. 바울이 디모데를 세우고, 복음의 동역자들을 불러 세운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쓰시는 종을 통하여 다음 일꾼을 깨우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서다. 하나님 나라에는 영적 질서가 있다. 자기 혼자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부르심의 증거가 아니다. 말씀의 검증, 성령의 열매, 사역의 열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의 확인이 필요하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자신에게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계속 같은 방향으로 마음을 이끄시는지 보아야 한다. 둘째, 그 부르심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영혼을 살리는 방향인지 살펴야 한다. 셋째, 그 부르심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을 피하지 않는 마음이 있는지 보아야 한다. 넷째, 시간이 지나도 그 사명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지는지 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부르심을 분별할 때에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참된 부르심은 결국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세운다. 거짓된 부르심은 사람을 자기에게 묶고, 분열을 만들고, 교만을 낳는다. 참된 부르심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회개를 일으키며, 천국의 소망을 더 분명하게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아니라 열매로 검증되어야 한다. 그 열매는 말씀에 대한 순종, 인격의 변화, 영혼을 향한 사랑, 교회를 세우는 충성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은 시간이 지나며 더 선명해질 수 있다. 처음에는 희미한 감동으로 시작되지만,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며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더 분명히 보여 주신다. 어떤 사람은 청년 때 부르심을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깨달은 뒤의 순종이다. 늦게 깨달았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깨달은 뒤에는 더 이상 뒤로 물러가지 않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누구든지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말씀을 배우지 않고, 교회를 세우지 않고, 자기 이름만 높인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특별한 부르심은 특별한 대접을 받으라는 허락이 아니라 특별한 책임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부르심에 순종한 자에게 주어지는 사명과 상급은 무엇인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에는 반드시 사명이 따른다. 일반 성도에게는 구원받고, 자기 집을 구원하며, 교회와 복음의 일을 섬기는 사명이 있다. 특별한 사역자에게는 진리를 전하고, 회개를 외치며, 천국을 증거하고,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을 세우는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은 사람의 박수로 평가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평가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명의 핵심은 영혼을 살리는 데에 있다. 성도가 먼저 구원받은 것은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사역자가 말씀을 맡은 것은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들이 진리를 알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늘 &amp;ldquo;내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고 있는가?&amp;rdquo;를 물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에 순종한 자에게는 상급이 있다. 그 상급은 단순히 이 땅에서 형통하는 정도가 아니다. 천국에서 받을 신분과 기업과 면류관과도 연결된다. 성경은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원리다. 직접 모든 일을 다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 그 일에 동참하면 그 상급에 참여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늘의 상급은 공평하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일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과 동기와 충성을 함께 보신다. 어떤 사람은 큰 무대에서 말씀을 전하지만,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기도로 그 말씀의 길을 연다. 어떤 사람은 물질로 복음의 길을 돕고, 어떤 사람은 몸으로 섬기며, 어떤 사람은 눈물로 가족을 품는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역할이 작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에 충성하면 그 자리에서 상급이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상급은 사명과 연결될 뿐 아니라 신분과도 연결된다. 천국에는 분명 신분의 차이가 있다. 모두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회개했는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영적 전쟁에서 이겼는지, 얼마나 영혼을 살렸는지에 따라 하늘의 지위와 기업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앙생활은 장차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간다. 베드로후서 1장의 말씀은 바로 이 점을 말한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자는 실족하지 않는다. 그는 천국 문턱에 겨우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명은 항상 쉬운 길만은 아니다. 가정에서 홀로 믿음을 지켜야 할 때도 있고, 교회에서 묵묵히 섬겨야 할 때도 있으며, 진리를 전하다가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특별한 사역자는 더 큰 영적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심을 아는 사람은 뒤로 물러가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히 10:38~39).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lt;/p&gt; &lt;div class=&quot;bible&quot;&gt;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lt;/div&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오늘의 순종은 내일의 영광과 연결된다. 오늘의 섬김은 하늘의 기록과 연결된다. 오늘의 회개는 천국 입성과 연결된다. 오늘의 영적 싸움은 장차 받을 왕권과 연결된다. 부르심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일반적 부르심과 특별한 부르심이 있으며, 그 부르심은 사명과 상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일반적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먼저 자신이 구원받아야 하며, 자기 집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교회와 복음의 일을 섬겨야 한다.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는 말씀과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며,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부르심은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책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시대에 보내셨는지, 왜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이 말씀을 듣게 하셨는지를 깊이 물어야 한다. 그 질문 앞에서 성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성도는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고, 사역자는 맡겨진 말씀과 영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부르심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 귀가 어두워지고, 부르심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사명이 주어져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깨끗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제 성도는 자기 부르심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보내셨고, 때가 되어 부르셨으며, 이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경륜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27년 07월 06일(월)&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와&amp;nbsp;&lt;strong&gt;하나님의 두 가지 부르심&lt;/strong&gt;에 대한 영적 원리를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모든 인간이&amp;nbsp;&lt;strong&gt;일반적인 성도&lt;/strong&gt;&amp;nbsp;혹은&amp;nbsp;&lt;strong&gt;특별한 사도적 사명&lt;/strong&gt;&amp;nbsp;중 하나로 부름을 받으며, 이러한 소명은 꿈이나 음성, 혹은 영적 지도자를 통해 명확히 전달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물려받는&amp;nbsp;&lt;strong&gt;육체적 유전자&lt;/strong&gt;만큼이나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영적인 유전자(영)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각자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비로소&amp;nbsp;&lt;strong&gt;영원한 천국&lt;/strong&gt;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자신에게 맡겨진&amp;nbsp;&lt;strong&gt;구원과 전도의 사명&lt;/strong&gt;을 다하고 하나님이 세운 종을 섬김으로써&amp;nbsp;&lt;strong&gt;하늘의 상급&lt;/strong&gt;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설교의 핵심 목적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인포_ChatGPT Image 2026년 7월 4일 오전 11_39_35.pn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7a0e95e7b7d4120b4c69162ac490bd19.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5231faf3353315d7ded5f4b7cff8f3d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f123b2bd5d64805867c35995d0c8b5e5.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286c6e8791bbf3f58bf8791ea7d22a7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8df9fd02ea3efa43700289fd50346e9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d17ee815bbcaebbd979c6230de10b913.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16607938151a158f7a642cd98d349fa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c0d13e3a80a3b71de1d173adaf05e34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726/261/6e8f5beeabec77914aa2477b3728bf60.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사명자론(01)] The_Divine_Blueprint.pdf_9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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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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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_2026-07-03(금)</title>
			<link>https://dongtanms.kr/morning_qt/261584</link>
				<description>&lt;p&gt;아침묵상입니다.&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https://youtu.be/eoUn1kt1QxA&lt;/p&gt; &lt;p&gt;&lt;iframe allow=&quot;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quot; allowfullscreen=&quot;allowfullscreen&quot; class=&quot;dtmseditor-live-iframe dtmseditor-youtube-iframe&quot; frameborder=&quot;0&quot; loading=&quot;lazy&quot; src=&quot;https://www.youtube.com/embed/eoUn1kt1QxA?enablejsapi=1&quot;&gt;&lt;/iframe&gt;&lt;/p&gt; &lt;p&gt;&lt;br /&gt; &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lt;meta name=&quot;viewport&quot; content=&quot;width=device-width, initial-scale=1.0&quot;&gt; &lt;title&gt;&lt;/title&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body{margin:0;padding:0;font-family:&#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Arial,sans-serif;font-size:16px;line-height:1.75;color:#222;} .container{margin:0;padding:0;} .title{font-size:17px;font-weight:bold;color:#38688c;margin:0 0 18px 0;} .subtitle{font-size:17px;font-weight:bold;color:#38688c;margin-top:34px;margin-bottom:14px;} p{margin:0 0 13px 0;} .scripture{font-weight:bold;color:#854ba0;margin:0 0 13px 0;} .dateblock{margin-top:22px;} &lt;/style&gt; &lt;div class=&quot;container&quot;&gt; &lt;div class=&quot;title&quot;&gt;1. 들어가며&lt;/div&gt; &lt;p&gt;&amp;nbsp; 솔로몬은 이름부터 평화의 왕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의 평화, 평강을 뜻하는 &amp;lsquo;샬롬&amp;rsquo; 계열과 연결된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안에도 &amp;lsquo;살렘&amp;rsquo; 곧 평화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루살렘은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전쟁과 분쟁을 겪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다윗의 성으로 삼으시고, 장차 하늘의 성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게 하셨는가? 그것은 참된 평화가 전쟁이 없는 외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원수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때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다윗은 전쟁의 왕(정확히는 &amp;#39;전쟁에 능한 왕&amp;#39;)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원수를 물리쳤고, 하나님이 주신 왕국의 터를 세웠다. 솔로몬은 그 터 위에 세워진 평화의 왕이었다. 그는 다윗이 피 흘려 싸워 얻은 평화를 누렸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지혜로 백성을 재판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여러 면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왜냐하면 그는 평화의 왕이었고 지혜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지만 그리스도 자체는 아니었다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참된 평화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지혜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부터 뒤로 물러났으며, 성전을 건축했으나 성전이 가리키는 교회의 비밀대로 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 그런데 솔로몬이 누린 영광은 정말 눈부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영광 속에는 본받지 말아야 할 다른 모습도 있었다. 열왕기상 10장과 11장은 솔로몬에게는 은금과 말과 병거와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것들은 우연한 정보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울 왕에게는 세 가지를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17:16~17).. 그것은 곧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 말을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이 그것을 범했다고 고발한다(왕상 10:21-11:1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신 17:16~17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하며,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돌아서게 하지 말고, 은금도 지나치게 쌓지 말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을 살필 때에는 부릅 뜬 두 눈이 필요하다. 한 눈으로는 그를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 눈으로는 그에게서 드러난 인간의 실패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예표자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lt;strong&gt;솔로몬이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했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는지를 살펴보고자&lt;/strong&gt; 한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2. 솔로몬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다윗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씨를 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일차적으로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삼하 7:12~1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삼하 7:12~13 네 날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내가 그의 왕위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lt;strong&gt;첫째로 평화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했다. 다윗은 전쟁을 통해 원수를 제압했고, 솔로몬은 그 결과로 평화를 누렸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의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말한다(왕상 4:24-25).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참된 안식과 평강을 주실 것을 예표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했다. 그는 재판하는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듣는 마음과 지혜를 주셨다(왕상 3:7-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시다. 솔로몬에게는 지혜가 주어졌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이다(마 12:4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 12:42 남방 여왕이 심판 때에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로 솔로몬은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예표&lt;/strong&gt;했다(왕상 6:1-38). 그는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돌과 금과 백향목으로 된 건축물에 머물지 않는다. 그 성전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세우실 교회를 예표하기 때문이다(아가서). 그러므로 솔로몬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고대 이스라엘의 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지혜로 심판하시며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지만 실체가 아니다. 솔로몬이 예표라면 예수님은 실체다. 솔로몬의 평화는 일시적이었으나 예수님의 평화는 영원하다. 솔로몬의 지혜는 받은 지혜였으나 예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솔로몬의 성전은 무너졌으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솔로몬의 영광도 바르게 해석되고, 솔로몬의 실패도 바르게 분별된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3. 성전 건축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하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이었다. 그는 다윗이 준비한 재료와 유언을 따라 여호와의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장소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심이었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 성전의 의미는 더 깊어진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엡 1:22~2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엡 1:22~23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표한다. 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고전 3:16).&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이 물질적 건물에서 인격적 성전으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구약의 성전은 눈에 보이는 집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생명 주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의 완성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솔로몬은 이 성전을 지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큰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질문이 생긴다. 성전을 지은 사람이 과연 성전의 의미를 끝까지 알고 살았는가. 물질적 성전을 지은 사람이 참된 성전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비밀대로 살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솔로몬의 영광은 흔들리기 시작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아가서를 통해 그 성전의 영적 의미를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담겨 있다. 왕은 잃어버린 신부를 찾아오고, 신부는 왕의 사랑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며, 마침내 왕의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성숙한다. 이것은 단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찾고 세우고 성숙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가곡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아가서는 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영적 의미를 노래한 계시다. 그러나 솔로몬의 비극은 그가 이 계시를 받았음에도, 그 계시대로 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는 성전을 지었지만 자기 마음의 성전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신부의 정절을 노래했지만 자기 삶에서는 많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4. 아가서는 왜 솔로몬의 사적 연애담으로만 볼 수 없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는 겉으로 보면 사랑 노래다. 히브리어 제목은 &amp;lsquo;쉬르 하쉬림&amp;rsquo;, 곧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잠언 3,000개를 말했고 노래 1,005편을 지었다고 기록한다. 그 많은 노래들 가운데 성경 안에 남은 대표적인 노래가 아가서다(왕상 4:32).&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4:32 그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나 아가서를 단순히 솔로몬의 사적인 연애담으로만 읽으면 본문이 가진 영적 깊이를 잃어버린다. 실제 역사서에는 솔로몬의 많은 아내들이 언급되지만,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실제 왕비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또한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로 기록된다(왕상 14:2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유다의 왕이 되었으니,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사실은 중요하다. 만일 아가서가 단순히 솔로몬이 가장 사랑한 실제 왕비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여인의 이름과 그 자손의 위치가 역사서에 더 분명히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lt;strong&gt;아가서는 솔로몬의 개인적 애정사를 넘어, 성령의 감동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부 교회의 비밀을 예표적으로 담은 가곡시로 읽어야&lt;/strong&gt;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이름 자체가 솔로몬과 깊이 연결된다. 아가서의 흐름에서 &amp;lsquo;술람미&amp;rsquo;는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이해된다. 곧 솔로몬에게서 나온 짝, 솔로몬의 참된 배필을 가리킨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온 원리와도 연결된다. 아담에게 하와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듯, 솔로몬에게 술람미는 원래 잃어버렸던 참된 짝을 상징한다. 이 예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리킨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lt;strong&gt;아가서의 핵심은 &amp;ldquo;솔로몬이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가&amp;rdquo;가 아니라 &amp;ldquo;그리스도께서 어떤 신부를 찾으시는가&amp;rdquo;&lt;/strong&gt;다. 왕에게는 왕비 60명과 후궁 80명과 무수한 처녀들이 있었지만(아 6:8), &amp;ldquo;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amp;rdquo;이라고 불린 여인은 하나였다(아 6: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신부의 정절과 성숙과 동역의 차원을 보여 준다.&lt;/p&gt; &lt;p&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의 문학적 성격은 성경 안에서 이미 암시된다. 아가서는 설명문이 아니라 노래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합창이 이어지고, 꽃과 나무와 동산과 포도원과 향품과 색깔이 신학적 상징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역사적 사실 여부의 차원에서만 묶어 두면 본문이 말하려는 깊은 뜻을 놓치게 된다. &lt;strong&gt;아가서는 솔로몬의 실제 삶을 미화하려고 주어진 책이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왕의 틀을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 교회를 계시하려고 주어진 책&lt;/strong&gt;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읽는 독자는 솔로몬의 사생활을 따라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솔로몬을 넘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예표는 예표자에게 머물면 오해가 되고, 실체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계시가 된다. 놋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지만, 훗날 사람들이 놋뱀 자체를 섬기자 그것은 우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아야지, 솔로몬 자체를 이상화하면 안 된다. 아가서는 솔로몬을 높이려는 책이 아니라 &lt;strong&gt;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노래하려는 책&lt;/strong&gt;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실패를 보면서도 아가서의 계시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실패는 예표자와 실체 사이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바로 여기서 솔로몬의 실패가 더 아프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가서를 통해 한 신랑과 한 신부의 비밀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솔로몬은 실제 삶에서 한 신부만 사랑하는 길을 걷지 못했다. 그는 왕비와 후궁을 많이 두었고, 그 여인들의 신들과 요구에 마음을 내어 주었다. 그는 아가서의 신랑을 노래했지만, 그 신랑처럼 살지는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솔로몬에게서 본받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모습이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5. 솔로몬은 왕의 금지 명령 중 무엇을 어겼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타락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왕의 규례를 하나씩 어긴 결과였다. 신명기 17장은 왕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금지 명령을 말한다. 첫째, 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둘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은금을 많이 쌓지 말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왕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하는 대표적인 통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런데 열왕기상 10장과 11장은 솔로몬이 바로 이 세 가지를 모두 범했음을 보여 준다. 먼저 &lt;strong&gt;첫째로, 그는 은금을 지나치게 많이 쌓았다&lt;/strong&gt;. 열왕기상 10장은 솔로몬 시대에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금이 많았다고 말한다. 왕의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고,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도 정금이었다(왕상 10:2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0:21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고,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도 모두 순금이었다. 그 시대에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lt;/p&gt; &lt;p&gt;&amp;nbsp;&amp;nbsp;금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라면 감사함으로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금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금이 왕의 안전감이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금은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영혼이 붙들리면 우상이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둘째로 솔로몬은 말과 병거를 많이 두었다&lt;/strong&gt;. 열왕기상은 솔로몬에게 병거와 마병이 많았고, 애굽에서 말이 들어왔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단지 군사력 증강이 아니다. 신명기 왕의 규례가 특별히 &amp;ldquo;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amp;rdquo;고 경고한 부분과 연결된다.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군사력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왕상 10:26,2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0:26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었다. 왕이 그것들을 병거성들과 예루살렘 왕 곁에 두었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0:28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들여왔으며 왕의 상인들이 값을 주고 사 왔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셋째로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었다&lt;/strong&gt;. 이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에게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 있었다고 기록한다. 왕의 결혼은 단순한 사생활이 아니었다. 많은 결혼은 정치적 동맹의 수단이었고, 이방 여인들은 자기 나라의 신들을 함께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왕에게 아내를 많이 두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왕상 11: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3 그에게 왕비가 칠백 명이요 후궁이 삼백 명이었는데,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세 가지 금지 명령은 오늘의 성도에게도 그대로 영적 원리가 된다. 은금은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말과 병거는 세상의 힘과 제도와 군사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많은 아내는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할 마음이 여러 사랑으로 나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자 그대로 왕이 아니더라도 이 세 가지 시험을 받는다.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할 수 있고, 힘이 생기면 기도보다 사람의 방법을 의지할 수 있으며, 관계가 넓어지면 주님 한 분을 향한 정절이 흐려질 수 있다. 솔로몬의 실패는 고대 왕궁 안의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성도의 마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솔로몬의 실패가 분명해진다. 그는 지혜를 많이 배웠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단순하게 순종하지 못했다. 지혜의 왕이었으나 지혜의 근본인 여호와 경외에서 흔들렸다. 성전을 지은 왕이었으나 자기 마음의 성전을 지키지 못했다. 평화의 왕이었으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6. 이방 여인들은 어떻게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켰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타락을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그가 늙었을 때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했고, 그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처럼 여호와께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왕상 11: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4 솔로몬이 늙었을 때에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아 여호와께 온전하지 못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가장 무서운 단어는 &amp;ldquo;마음&amp;rdquo;이다. 솔로몬이 처음부터 성전을 버린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를 부인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조금씩 돌아섰다. &lt;strong&gt;영적 타락은 대개 이렇게 온다. 갑자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옆에 다른 사랑을 허용한다. 처음에는 정치적 필요라고 말하고, 다음에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우상에게 공간을 내어 준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과 밀곰같은 이방 신들을 따랐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을 지은 왕이면서 동시에 우상들의 산당을 세우는 왕이 되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 손으로 성전을 지은 사람이 다른 손으로 우상의 산당을 세웠다. 한 입으로 지혜를 말한 사람이 다른 삶으로 어리석음을 행했다. 한 노래로 술람미의 정절을 찬양한 사람이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의 마음을 따라갔다(왕상 11:5~8).&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5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가증한 신 밀곰을 따랐다&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7 솔로몬이 예루살렘 앞 산에 모압의 가증한 신 그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세우고 암몬 자손의 가증한 신 몰록을 위하여도 그렇게 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amp;lsquo;늙었을 때&amp;rsquo;라는 표현도 두렵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젊을 때 받은 은혜만으로 끝까지 서는 것이 아니다. 젊을 때 뜨거웠어도 늙어서 마음이 식을 수 있고, 한때 성전을 위해 헌신했어도 말년에 우상에게 공간을 내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시작의 열심보다 끝의 충성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죄를 지었지만 통회하고 돌이켰다. 솔로몬은 큰 지혜를 받았지만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다. 성도는 은사를 받은 뒤에 더 두려워해야 하고, 쓰임을 받은 뒤에 더 회개해야 하며, 열매를 맺은 뒤에 더 겸손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것이 &lt;strong&gt;솔로몬에게서 본받지 말아야 할 두 번째 모습&lt;/strong&gt;이다. 그는 &lt;strong&gt;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삶으로 지키지 못했다&lt;/strong&gt;.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일편단심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실제 삶은 일편단심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랑을 가졌으나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다. 많은 여인을 얻었으나 참된 짝의 비밀을 놓쳤다. 많은 신전을 허용했으나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는 성전의 중심을 잃어버렸다.&lt;/p&gt; &lt;p&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러나 다윗을 기억하셔서 그 나라를 솔로몬 생전에 찢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의 아들에게서도 한 지파를 남겨 두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지만 동시에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 준다. 솔로몬의 죄는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죄는 나라의 분열로 이어졌다(왕상 11:11~13).&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행하고 내 언약과 율례를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왕상 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날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으리라&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부귀와 영광만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의 부귀 속에 숨어 있던 위험을 보아야 한다. 그의 정치적 성공 뒤에 숨어 있던 영적 타협을 보아야 한다. 그의 많은 지식과 문화적 능력 속에 숨어 있던 하나님 경외의 결핍을 보아야 한다. 영적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노골적인 반역만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할 마음이 조금씩 나뉘는 것이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7. 전도서는 솔로몬의 마지막 깨달음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생애를 볼 때 우리는 한 가지 희망도 본다. &lt;strong&gt;그는 타락했지만, 전도서의 마지막 고백 속에서 인생의 결론을 말한다&lt;/strong&gt;. 전도서는 세상의 지혜와 부귀와 쾌락과 수고를 다 경험한 사람이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다. &lt;strong&gt;그는 &amp;ldquo;헛되고 헛되다&amp;rdquo;고 말한다. 이것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하나님 없이 누리는 모든 영광이 결국 헛되다는 고백&lt;/strong&gt;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많은 책을 지었고 많은 지식을 얻었으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누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해와 빛과 달과 별이 어둡기 전에, 곧 인생의 힘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전 12: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전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해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그리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전도서의 결론은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것&lt;/strong&gt;이다(전 12:13~1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전 12:13~14 일의 결론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고백은 &lt;strong&gt;솔로몬이 말년에 깨달은 마지막 진리&lt;/strong&gt;다. 그는 지혜를 얻었지만 지혜대로 살지 못했다. 그는 성전을 지었지만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섬기지 못했다. 그는 아가서를 통해 신부의 일편단심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여러 여인의 마음과 여러 신의 유혹에 흔들렸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고백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이 점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경고이면서 동시에 교훈이다. 사람은 큰 은사를 받을 수 있다. 큰 지혜를 받을 수 있다. 큰 사명을 받을 수 있다. 성전을 짓는 엄청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붙들리지 않으면, 사람은 뒤로 물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경외다.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떨 줄 아는 마음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꽃 하나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솔로몬의 영광이 하찮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생명의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영광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 준다(마 6:29).&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마 6: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lt;/p&gt; &lt;p&gt;&amp;nbsp;&amp;nbsp;결국 솔로몬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실 수 있는가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그 영광 속에서도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가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로 돌아와야 한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8. 성도는 왜 뒤로 물러가지 말고 전진해야 하는가?&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실패를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결론은 하나다. &lt;strong&gt;신앙은 뒤로 물러가는 길이 아니다. 영의 세계에는 후퇴가 없다. 뒤로 물러가면 그것은 안전한 중립이 아니라 침륜을 향한 미끄러짐이 된다&lt;/strong&gt;.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뒤로 물러가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히 10:38~39).&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혼을 얻을 자들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은 뒤로 물러갔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 시작했다. 지혜를 구했고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부귀와 군사력과 이방 여인의 유혹 앞에서 점점 뒤로 물러갔다. 처음에는 나라의 평화를 위한 결혼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지혜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배려와 포용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우상숭배가 있었다.&lt;/p&gt; &lt;p&gt;&amp;nbsp;&amp;nbsp;성도에게도 같은 시험이 온다.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진리의 수준을 낮출 것인가. 가족이 불편해한다고 회개와 천국복음의 길에서 물러날 것인가. 세상이 부담스러워한다고 영적 전쟁을 멈출 것인가.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거룩해져야 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회개해야 하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앞서 걸어가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lt;strong&gt;가족 구원의 문제도 이 원리 안에서 보아야 한다. 성도는 가족을 버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족의 불신앙에 맞추어 자신의 영적 걸음을 낮추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불신 가족을 구원하려면 먼저 믿는 자가 더 분명히 서야&lt;/strong&gt; 한다. 회개하는 삶, 변해 가는 성품, 흔들리지 않는 예배, 거짓 없는 말,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족에게 증거가 된다. 말로 설득할 수 없을 때 삶이 증언해야 하고, 삶으로도 시간이 걸릴 때 기도가 길을 열어야 한다.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집이 구원받을 길이 열리는 것은 믿는 자가 뒤로 물러가서가 아니라, 믿는 자가 먼저 생명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행 16:31).&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믿음의 길은 끌려가는 길이 아니라 이끌어 가는 길이다. 물론 성도는 교만하게 가족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리를 낮추어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내가 먼저 변화되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회개하여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내며, 내가 기도하여 가족이 언젠가 돌아올 길을 여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amp;nbsp;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했다. 이것이 성도의 방향이다(빌 3:13~14).&lt;/p&gt; &lt;p class=&quot;scripture&quot;&gt;빌 3:13~14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얻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lt;/p&gt; &lt;p&gt;&amp;nbsp;&amp;nbsp;전진하는 신앙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신앙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회개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주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받은 은혜에 머물지 말고, 아직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솔로몬의 실패는 우리에게 말한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성전을 지었다고 성전의 영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받았다고 끝까지 지혜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끝까지 신부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그리고 이 길은 혼자만의 길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전진하면 가족이 따라올 길이 열린다. 내가 뒤로 물러가면 가족도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지 않는 가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그 가족에게 맞추어 신앙을 후퇴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기도와 회개와 변화된 삶으로 끌어가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실제적 교훈이다.&lt;/p&gt; &amp;nbsp; &lt;div class=&quot;subtitle&quot;&gt;9. 나오며&lt;/div&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에게서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 왕이었고,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며 성전 건축자였다. 그러나 &lt;strong&gt;그는 자신이 받은 계시대로 끝까지 살지 못했다. 성전을 지었으나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고, 아가서를 통해 한 신부의 정절을 노래했으나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금하신 은금의 축적과 말과 병거의 의지와 많은 아내를 두는 일을 모두 범했으며, 결국 우상숭배의 길을 걷고 말았다.&lt;/strong&gt;&lt;/p&gt; &lt;p&gt;&amp;nbsp;&amp;nbsp;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만 보지 말아야 한다. 그의 실패를 보아야 한다. 큰 은사와 큰 사명과 큰 업적이 있어도 사람이 뒤로 물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성도는 신앙의 기준을 세상이나 가족이나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낮추지 말아야 한다. 사랑해야 하지만 타협하지 않아야 하며, 기다려야 하지만 후퇴하지 않아야 한다.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서는 더 회개해야 하고, 더 거룩해져야 하며, 더 변화된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된다.&lt;/p&gt; &lt;p&gt;&amp;nbsp;&amp;nbsp;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리스도의 뜻을 더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 사모하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믿음으로 가족과 이웃까지 생명의 길로 이끄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quot;dateblock&quot;&gt;2026년 07월 02일(목)&lt;/p&gt; &lt;p&gt;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핵심]&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이 설교는 구약의&amp;nbsp;&lt;strong&gt;솔로몬 왕&lt;/strong&gt;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그가 보여준&amp;nbsp;&lt;strong&gt;영적 타락과 회복&lt;/strong&gt;의 과정을 통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amp;nbsp;&lt;strong&gt;신앙의 전진성&lt;/strong&gt;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성전을 건축하고 지혜를 드러냈으나, 결국 수많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며 우상 숭배에 빠지는&amp;nbsp;&lt;strong&gt;치명적인 영적 퇴보&lt;/strong&gt;를 겪었다고 설명합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말년에 전도서를 통해&amp;nbsp;&lt;strong&gt;회개&lt;/strong&gt;함으로써 간신히 구원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며,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에서 뒤로 물러나지 말고 오직&amp;nbsp;&lt;strong&gt;천국을 향한 푯대&lt;/strong&gt;를 바라보며 전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의 변화된 삶과&amp;nbsp;&lt;strong&gt;지조 있는 믿음&lt;/strong&gt;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후손까지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됨을 일깨우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설교요약]&lt;/strong&gt;&lt;/span&gt;&lt;/p&gt; &lt;p&gt;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 왕이었다. 그는 평화의 왕이었고 지혜의 왕이었으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예표한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다. 그는 아가서를 통해 한 신랑과 한 신부의 정절과 사랑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금하신 금은의 축적, 말과 병거의 의지, 많은 아내를 두는 일을 그는 모두 범했다. 그 결과 그의 마음은 여호와에게서 돌아섰고, 그는 이방 신들을 위한 산당까지 세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셔서 그를 즉시 멸하지 않으셨고, 솔로몬은 말년에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실패를 경계해야 한다. 신앙은 가족이나 세상에 맞추어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인포그래픽_ChatGPT Image 2026년 7월 3일 오전 09_26_252026-06-21.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f882bfbb01b70a5afa41d1875a72c0b4.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781e817d060c6bfe30611ff01ce99f57.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1048e20bd04cc11eed5dc3eb73706eff.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f6129c047b550f196b612764f229328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08c2e4085f857f4eaaa70a0989c6418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a54f0910050ddd0aff8fff0be033c8b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51d4a477b2aa8ad2891f77ae2c439e16.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ff11b78a65a4201b9344ca4fc40591f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8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b2833a37776f1ab802b7a95663d48afc.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9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b73d1ab5d7b53bb20618932ebf554dea.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0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7f61823162c6fd4392a226dbafe2599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2ac24432cb3e21bed4698fd203887e0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f3ef02c679ae152be62df4c1e25ae12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135bac9014b76fc22e86cb048f920a4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a98fbd0f3e99776206ca78eea7d1a561.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hadow_and_Mirror.pdf_1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61eb088ea17e9cdf652be0a0d4dcf711.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p&gt; &lt;p&gt;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lt;/p&gt; &lt;p&gt;제목: &lt;span style=&quot;color:#c0392b;&quot;&gt;&lt;strong&gt;[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lt;/strong&gt;&lt;/span&gt;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lt;/p&gt; &lt;p&gt;&amp;nbsp;&lt;/p&gt; &lt;meta charset=&quot;UTF-8&quot;&gt; &lt;style type=&quot;text/css&quot;&gt;.sermon-title { font-size: 16px; font-weight: bold; color: #38688c; margin-top: 2em; } .sermon-body { font-size: 15px; } .sermon-verse { font-size: 15px; font-weight: bold; color: #854ba0; } &lt;/style&gt; &lt;div style=&quot;margin:0; padding:0; font-family: &#039;Nanum Gothic&#039;,&#039;나눔고딕&#039;,sans-serif; font-size: 15px; line-height: 1.8;&quot;&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1. 들어가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 솔로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amp;quot;평화&amp;quot;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옛 이름인 살렘 또한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평화를 뜻한다. 그런데 역사상 예루살렘만큼 많은 전쟁을 겪은 도시도 드물어서, 그 땅에서 일어난 전쟁이 무려 삼천 번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바람 잘 날 없던 그 땅을 하나님이 평화의 도시라 부르신 이유는 다름 아니라 다윗 때문이다. 다윗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시온 산성을 찾아내어 그곳을 예루살렘으로 삼았고, 그로 인하여 하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과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 성까지도 다윗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게 되었다. 수많은 전쟁의 상흔이 있는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도시를 끝까지 평화의 도시라 부르신 것은, 결국 그 땅의 참된 평화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될 것이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렇게 다윗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이 되었기에,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거듭 &amp;quot;다윗의 자손&amp;quot;이라 부른다. 맹인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외친 말도 &amp;quot;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amp;quot;였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스스로를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밝히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계 22:16, 계 3: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은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을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훗날 살펴볼 아가서의 신부 이미지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계 2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 또한 오늘의 성도들이 이미 영적으로 이르러 있는 곳을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선언한다 (히 12:2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정작 다윗의 친아들의 이름은 솔로몬이었다.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예표였을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의 생애가 수백 년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그려 내는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 전체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아래 정교하게 짜여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이 솔로몬에게는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는 영광스러운 모습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의 말년에 나타난 전혀 다른 모습, 곧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상 10:21-11:13).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이 어떤 왕이었으며, 그가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고, 또한 그가 어떻게 타락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2. 솔로몬은 어떤 왕이었는가?(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을 건축한 왕)&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세 가지 대표적인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그는 평화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 자체가 평화를 뜻하며, 다윗이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나라를 세운 것과 달리 솔로몬의 시대에는 큰 전쟁이 없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왕상 4:2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도 무력이 아니라 혼인 동맹을 통해 유지되었으니, 이는 뒤에서 다시 다룰 그의 많은 아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로 왕 히람과도 무력이 아니라 조약으로 화친을 맺었다 (왕상 5: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5:12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므로 히람과 솔로몬이 서로 화친하여 그 두 사람이 서로 조약을 맺었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뒷받침되었기에 성전 건축이라는 대역사를 수행할 여력도 생길 수 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둘째로 그는 지혜의 왕이었다. 성경은 그의 지혜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왕상 4:29-3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29-3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가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멀리 남방 스바 땅까지 퍼져 나갔다. 스바의 여왕이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사건이 그 증거다 (왕상 10:1). 그러나 이 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의 지혜와 동방 사람의 지혜까지 폭넓게 흡수한 것이었다. 그가 남긴 잠언과 전도서를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빼놓으면 얼마든지 세상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처세훈과 격언들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잠언은 지혜로운 말 한 마디를 이렇게 묘사한다 (잠 25: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러한 격언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처세의 지혜다. 이는 그의 지혜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혼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그의 방대한 저작을 이렇게 요약한다 (왕상 4:32-3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4:32-33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도 말한지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셋째로 그는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는 스무 살에 왕위에 올라 스물네 살이 되던 해, 곧 주전 966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칠 년 만에 완공하였으니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이 세 가지 모습, 곧 평화의 왕과 지혜의 왕과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는 정체성이야말로 솔로몬이 다윗의 참된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3. 솔로몬은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며 그 나라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삼하 7:12-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언약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으나, &amp;quot;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amp;quot;는 말씀은 솔로몬 한 사람으로는 결코 다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곧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위와 영원한 성전, 곧 교회를 세우실 것을 미리 가리키는 예언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평화롭고 지혜로운 왕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셨으니,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 2:1-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더하여졌으니, 이는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행 2:4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이처럼 다윗이라는 그림자에서 솔로몬이라는 예표로, 그리고 예표에서 그리스도라는 실체로, 마침내 실체에서 교회라는 성취로 이어지는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에베소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엡 1:22-2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여기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단지 그리스도께 속한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와 능력이 흘러넘치는 살아 있는 몸임을 보여준다. 같은 서신은 그 몸이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엡 4: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는 솔로몬 한 사람의 지혜와 영광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함께 자라 갈 때에만 이르게 되는 완성이다. 그런데 그 교회란 다름 아니라 성령이 들어와 생명을 주는 영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고린도전서는 이를 성전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시켜 준다 (고전 3:16).&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 자신도 성전을 자기 육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직접 밝히신 적이 있다 (요 2:19, 2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바로 이 구절 때문에, 구약의 성전과 성막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건물 하나를 웅장하게 세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솔로몬이 그것을 완성한 구조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몸 된 교회를 세우시는 경륜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4.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무엇을 상징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은 생전에 성전을 직접 건축하지는 못하였으나, 아들을 위하여 건축 재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대상 22: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상 22: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은 재료를 준비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버지가 준비하고 아들이 완성하는 이 구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속의 경륜을 예비하시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그 경륜을 완성하시어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성전이 완공되고 언약궤가 들어가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같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 (왕상 8:10-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장면은 훗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사건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솔로몬 자신은 봉헌 기도에서 이 성전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왕상 8:2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계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리이까&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는 이처럼 성전이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는 그릇에 불과함을 입술로는 고백하였으면서도, 정작 그 성전이 가리키는 참된 실체가 무엇인지는 끝내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서도, 정작 그 성전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 성전은 지어졌지만 그 성전이 상징하는 바, 곧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성령으로 감동하시어 아가서를 짓게 하셨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원제는 &amp;quot;쉬르 하쉬림&amp;quot;으로, &amp;quot;노래 중의 노래&amp;quot;라는 뜻을 가진 최상급 표현이다. 이는 이 책이 단순한 연가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도 가장 고귀한 노래로 취급되어야 함을 암시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물질적인 성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인격적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문학적인 작품으로 남기게 하신 것이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지만,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이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노래는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에 남겨진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워낙 뛰어났기에 하나님이 그 재능을 사용하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솔로몬은 서른 살에 성전을 완공하였으니, 아가서 역시 그 무렵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전을 건축하는 왕이라면 마땅히 그 성전이 상징하는 바를 깊이 연구하여, 왕 된 자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고 왕비 된 자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늙어서는 아내들의 말을 따라 타락하였다고 기록한다. 아내들이 각기 자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 신들을 위한 신전까지 지어주고 그것을 섬기도록 허용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타락은 서른 살 무렵, 곧 성전을 완공한 이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전을 지었다는 사명은 이루었으나, 그 성전이 가리키는 실체,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삶으로 소개하는 사명은 끝내 다하지 못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성전이 궁극적으로 가리켰던 실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간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마 27:5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곧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해석해 준다 (히 10:19-2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이 지은 물질적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그 성전이 늘 가리켜 왔던 참된 실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이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5. 아가서는 왜 가상의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아가서를 실제 역사적 기록으로 읽으면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먼저 아가서에 등장하는 지명인 바알하몬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명이다. 아가서 후반부에는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두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상징적인 지명이다 (아가 8: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가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의 여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실명으로 등장하지 않고, 오직 &amp;quot;술람미 여자&amp;quot;라는 표현으로만 불릴 뿐이다. 이 여인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점점 깨닫게 되고, 마침내 당당한 전사와도 같은 신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예루살렘의 딸들과 더불어 노래를 주고받는다 (아가 6: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가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구경하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구경하고자 하느냐&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아가서의 신랑은 신부를 향하여 레바논에서부터 함께 가자고 노래한다 (아가 4:8).&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아가 4: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며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아가서의 지리적 배경은 예루살렘 남쪽이 아니라 북쪽의 레바논 산악 지대에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정작 솔로몬의 유일하게 이름이 밝혀진 왕후 나아마는 레바논이 아니라 동쪽의 암몬 사람이었으니, 지리적으로도 아가서의 신부와 나아마는 서로 다른 인물임이 분명해진다. 만일 솔로몬의 실제 아내 중 하나가 술람미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열왕기나 역대기의 족보 기록에도 마땅히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은 다윗이 왕위 계승자를 정한 방식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다윗은 죽기 전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밧세바에게 맹세한 대로 그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았다 (왕상 1:29-3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29-30 왕이 이에 맹세하여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고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그가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다윗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 그렇다면 솔로몬도 만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면 마땅히 그 아들을 왕위에 앉혔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였으니, 이는 술람미 여인처럼 특별히 사랑받은 아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가 된다. 솔로몬에게는 왕후가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여인들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왕상 1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천 명에 가까운 여인들 가운데 실제로 첫날밤을 치른 이가 설령 백 명 정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 어디에도 왕자들 사이의 왕위 다툼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직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한 사람의 이름만 등장한다. 그 아들이 바로 르호보암이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유일하게 밝혀진 왕비 나아마다 (왕상 14:2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나아마는 암몬 사람이었으니 아가서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지역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결국 성경에서 이름이 밝혀진 왕후는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의 어머니, 곧 족보를 기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했던 나아마 한 사람뿐이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아가서는 실제 있었던 특정 왕비와의 연애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영감을 주어 짓게 하신 가상의 문학 작품, 곧 노래 중의 노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6. 솔로몬의 실제 부인들은 누구였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자신이 태어난 배경부터가 사랑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다윗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로하였던 아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삼하 12:2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처럼 사랑으로 태어난 솔로몬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평생 그러한 사랑을 나눌 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대조가 아닐 수 없다.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윗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에게는 최소한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그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삼하 3:2-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삼하 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긴 뒤에도 처와 첩을 더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다윗의 아내들은 그 이름과 자녀까지 상세히 성경에 남아 있는 셈이다. 이러한 다윗과 비교할 때, 솔로몬의 수많은 아내들의 이름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은 더욱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솔로몬에게 실제로 특별히 언급되는 부인들이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직후 애굽과 혼인 관계를 맺어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다윗 성에 머물게 하다가 훗날 별궁을 지어 그를 위해 내어 주었다 (왕상 3: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3: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인척 관계를 맺어 바로의 딸을 맞이하고 그를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이 완공되기를 기다리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었다.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과 혼인 동맹을 맺음으로써 주변 나라들은 감히 이스라엘을 넘볼 수 없었고, 그 결과 여러 나라의 왕들이 저마다 자기 딸을 솔로몬에게 바치게 되었다. 그렇게 바쳐진 여인들이 쌓여 마침내 천 명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는 애초에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시편 45편에는 두로의 딸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시 45:9, 45: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45:9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시 45:12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자들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만 시편 45편은 솔로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고라 자손이 지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이므로, 이를 근거로 두로의 딸을 솔로몬의 확정된 아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두 번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스바의 여왕이다. 스바의 여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왕상 10: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0:1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그 지혜에 감탄하여 이렇게 고백하였다 (왕상 10: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게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과의 만남 이후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민족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 아들은 훗날 아버지를 찾아 예루살렘에 왔으나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호와 신앙을 전파하였고,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사도행전에는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올라왔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등장한다 (행 8:2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 관리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가 성경 두루마리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자 빌립 집사가 나아가 복음을 가르쳐 주었고, 그는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였다. 훗날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에도 에티오피아에 살던 그 후손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대규모 이주 작전이 실제로 있었으니, 오늘날 이스라엘 안에 흑인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배경에도 이러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결국 이름과 사연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솔로몬의 아내는 첫 번째 정략결혼의 상대였던 바로의 딸과, 역사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스바의 여왕, 그리고 족보를 위해 이름이 밝혀진 나아마 정도다. 나머지 수백 명의 여인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성경에서 사라졌으니, 이는 그들과의 관계가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방증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7. 솔로몬은 무엇으로 타락하였고 어떻게 구원받았는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지켜야 할 원칙을 이미 분명하게 규정해 두었다 (신 17:16-1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신 17:16-17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는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솔로몬은 이 세 가지 명령을 모두 어겼다. 그가 해마다 거두어들인 금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왕상 10:1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0:14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육백육십육 달란트요&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또한 그는 병거와 마병을 대량으로 모아들였다 (왕상 10:26).&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0:26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자기 왕에게도 두었으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무엇보다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첩으로 맞이하였다. 성경은 그 실상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왕상 11: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1-2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나라를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전을 짓는 데는 칠 년이 걸렸지만, 자신의 왕궁을 짓는 데는 무려 십삼 년이라는 더 긴 시간을 쏟았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늙어서는 이방 아내들의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이 각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위한 산당까지 예루살렘 인근에 지어 주었다. 성경은 그가 섬기게 방치한 우상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왕상 11:5, 7).&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5,7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성전을 건축한 바로 그 왕이 우상의 신전까지 세워 준 것이니, 이는 참으로 비참한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결국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고전 10:20).&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고전 10: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솔로몬이 세워 준 산당들은 단순한 문화적 관용이 아니라 실제로 귀신을 섬기는 처소를 예루살렘 인근에 허락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직접 심판을 선언하셨다 (왕상 11:11).&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다윗을 향한 언약 때문에 그 심판은 유예되었다 (왕상 11:12-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왕상 11:12-13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나라를 온전히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하여 그의 죽음 직후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여로보암이 이끄는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오직 두 지파만이 아들 르호보암에게 남겨졌다. 그나마 나라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솔로몬은 구원받았는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전도서를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도서는 온통 &amp;quot;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amp;quot;라는 탄식으로 가득하다 (전 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세상의 지혜와 권세와 향락을 다 누려 본 그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청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한다 (전 12:1-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1-2 너는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전도서 전체의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전 12:13-1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는 죽음을 앞둔 솔로몬이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돌이켜 회개하였음을 보여주는 고백이다. 훗날 유다 왕 므낫세도 솔로몬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우상을 숭배하였으나 환난 중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신 전례가 있다 (대하 33:12-1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하 33:12-13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러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극심하게 타락하였던 솔로몬 역시 죽기 전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가 성전을 건축했던 사명 때문에, 하나님은 말년의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이키게 하셨을 것이다. 구원은 결코 그의 행위나 업적, 곧 성전을 지었다는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엡 2:8-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돌아볼 때, 그는 화려하게 살았던 영광에 비해 참으로 초라하게, 간신히 구원의 문턱을 넘은 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목회 사역 가운데 영으로 천국의 정경을 살펴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다윗은 보석으로 빛나는 왕복을 입고 있는 반면 솔로몬은 그 아버지의 뒤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이는 같은 천국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삶의 결실에 따라 받는 영광의 정도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엄중한 사실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러한 솔로몬을 예수님도 두 차례 직접 언급하셨다. 첫 번째는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다 (마 6:28-2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6:28-29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꽃 하나의 아름다움만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다 (마 12:41-42).&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마 12:41-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스스로를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솔로몬이 애굽 사람의 지혜와 동방 사람의 지혜까지 두루 터득하여 큰 지혜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 지혜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그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혜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8. 신앙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가 아내들의 신앙에 자신을 맞추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아내들에게 전하기보다, 도리어 아내들이 섬기던 우상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쪽으로 뒤로 물러났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태도를 향해 분명하게 경고한다 (히 10:38-3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같은 히브리서는 더 나아가 한 번 은혜를 맛본 자가 뒤로 물러나 타락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경고한다 (히 6:4-6).&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앙의 세계에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시며 회개하여 처음 행위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다 (계 2:4-5).&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솔로몬 역시 성전을 지을 때 품었던 첫사랑과도 같은 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서서히 식어 갔다는 점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이 책망과 동일한 원리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신앙 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빌 3:13-14).&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 원리는 목회 현장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믿지 않는 남편이 신앙이 있는 아내에게 말씀을 제대로 못 듣겠으니 좀 더 가까운 다른 교회로 옮기자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아내는 상담을 청하며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그 요청을 들어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으나, 신앙은 앞으로만 전진이 있을 뿐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그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지켜보니,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결국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부가 함께 교회 자체를 떠나 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믿음이 약한 배우자의 형편에 맞추어 신앙의 자리를 낮추고 뒤로 물러선 이들은, 이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앙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를 통해서는, 오히려 그 가정 전체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먼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아 낙심하는 이들에게도 같은 원리를 권면한다. 당신이 언제까지 이 길을 홀로 갈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고, 배우자의 걸음에 맞추어 신앙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반드시 망하는 길이라고 분명히 일러 준다. 오직 주님께서 주실 것을 바라보며 오늘도 전진하는 것만이, 결국 그 사람을 통하여 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학 시절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고향으로 내려가 함께 지낸 일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석 달 만에 아버지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여섯 달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아버지는 결국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셨다. 또한 군에서 군종병으로 복무했던 아들이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뒤, &amp;quot;아빠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다&amp;quot;고 고백하며 스스로 신앙을 갖게 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열매들은 신앙이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전진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이러한 원리는 출애굽기의 훌과 그 후손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려 할 때 홀로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훌의 손자 브살렐은, 훗날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받아 성막을 짓는 데 쓰임 받았다 (대상 2:20, 출 31:2-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대상 2:20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으며&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출 31:2-3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순교에 이른 이들의 피값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 후손 가운데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인물을 반드시 세우신다. 당장 눈앞의 형편이 나빠지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갚으심이 뒤따른다. 율법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만을 정결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레 11:9).&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레 11: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수 있나니 물에 있는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비늘은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제 기능을 하며, 뒤로 물러설 때는 오히려 몸에 걸려 상처를 낸다. 신앙도 이와 같아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표적을 향하여 좇아가는 것이 마땅하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title&quot;&gt;9. 나오며&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사도행전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 후손으로 오신 구주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행 13:22-23).&lt;/p&gt; &lt;p class=&quot;sermon-verse&quot;&gt;행 13:22-23 폐하시고 다윗을 세워 왕으로 삼으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다윗의 마음에 합한 삶과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구주는 이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 솔로몬은 다윗과 그리스도를 잇는 예표의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어떤 왕이었으며,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고, 그의 성전 건축과 아가서가 무엇을 상징하며, 그의 실제 아내들이 누구였고, 그가 어떻게 타락하였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신앙이 왜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으며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표가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스스로 범함으로써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도 함께 남긴 인물이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그는 금을 다량으로 쌓았고 말과 병거를 늘렸으며 수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그 결과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을 겪었고, 자신의 영혼도 우상숭배의 자리까지 떠내려갔다. 그러나 다윗에게 주신 언약과 그가 감당했던 성전 건축의 사명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어 말년에 돌이키게 하셨고, 그는 간신히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 이는 성도 된 자들이 결코 신앙에서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됨을 보여주는 엄중한 경고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amp;nbsp;신앙은 오직 전진해야 한다. 배우자나 가족이 믿음의 길을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형편에 맞추어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앞서 걸어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가정 전체를 붙드시고 구원으로 이끄신다. 장차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새 예루살렘의 신부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뒤로 물러섬 없이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신앙의 자리에서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amp;nbsp;&lt;/p&gt; &lt;p class=&quot;sermon-body&quot;&gt;2026년 07월 03일(금)&lt;br /&gt; 정보배 목사&lt;/p&gt; &lt;/div&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솔로몬_그리스도의_예표와_실패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8de2c177a4e7fe0939f6727ba3859457.webp&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1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a527251e3f53488767428894628c91ab.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2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e26693ba7d3c77d8ac2623ee8705bb09.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3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3dd112a01cb4917c1078109644baa72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4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fcf2de20362edc9b341a1b1965301394.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5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aee759ca0ee670bc0d262fd23d40160e.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6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081df3fa5914eebf09209fa3b7d3777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7_vora.jpg.webp&quot; src=&quot;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6776/584/261/7cf6b21bfcdbbda2af3d9bf03e5fa978.webp&quot; /&gt;&lt;/p&gt; &lt;p&gt;&lt;img alt=&quot;[기독론(139)] Solomon_s_Gilded_Shadow.pdf_8_vora.jpg.webp&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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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아침묵상</category>					<dc:creator>갈렙</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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