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6)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위대한 선언(02)(요1:1~18)_2022-06-29(수)
https://youtu.be/kn22nybEroA [혹은 https://tv.naver.com/v/27973893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서문(요1:1~18)에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학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한복음의 서문은 크게 2가지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분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 서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짧게 줄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기록해야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장차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이 어떤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에 의한 핍박이었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한 미혹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을 서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서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요한복음 1:1~3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로고스)'의 선재성과 영원성 그리고 창조성을 살펴보았고,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본성으로서 '생명'과 '빛'에 대해 다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으로서 '은혜'와 '진리(실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본성과 2가지 혜택은 요한복음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오늘도 제공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2.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 무엇을 선언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의 첫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말씀(로고스)'에 대한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선포를 통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에 못 이겨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대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자신이 이름을 계시한 바로 그분 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말씀(요10:30)과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아버지로 언급한 것(요5:18)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어찌 하나님이 두 분, 혹은 세 분이실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였고 또한 어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던 이방지역에 사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선재하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문의 첫 부분(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1~3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 태초에(시작 안에) 말씀이 있어 왔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1~2절). 즉 처음부터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모든 것들(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절). 고로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통로요 대리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아버지와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으로서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렇다.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통로였는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기 전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아들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육신을 입지 않았던 그분을 누구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교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는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는 어떻게 계셨는가?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왜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을 굳이 '로고스'('말씀')라고 표현하였던 것인가?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인격체로 나타나기 이전에 그분은 말씀으로 있었다. 말씀이 인격을 입은 후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비로소 아들이라는 존재로 탄생하셨다. 이러한 말씀의 성육신은 사실 서양 철학에서는 결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 철학에서도 우주 만물의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그들도 '로고스(말씀)'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씀'이라는 개념을 서양 철학에서 빌려왔다는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요한은 선재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굳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유대인들을 생각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창1:3). 특히 시편 기자는 하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며, 그것들의 만상(모든 군대=천사들)은 그분의 입 기운(루아흐=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잠언 8장을 통하여, 지혜라는 것이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지셨으며, 만세 전과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이미 났으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장인)가 되어 매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잠8:22~31)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오는 말씀(로고스)이 곧 창조 사역을 행하셨던 하나님과 같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물의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 2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가? 사도 요한은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이 생명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다(4~5절). 즉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은 곧 '생명'이요 '빛'인 것이다.
우선,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것인데, 이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키며(요5:26),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생명을 가리키고(요3:16), 이 생명은 '부활 생명'이라는 점에서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가리킨다(요11:25~26).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그에게 주어 있게 하셨다(요5:26).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는 본인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고전15:45),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사람들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분배됨으로 인하여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창조된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어 사도 요한은 이 생명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빛'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빛으로 나타난 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참고로 이때 물로 나타나는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에 들어오는 그 빛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했다(요1:9). 그것도 불충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 참 빛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참'(9절)이라는 헬라어 단어('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알레테스')으로서의 참 빛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것, 불완전한 것, 부분적인 것에 대한 완전함으로서 참을 의미하는 단어('알레디노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그 빛의 관계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있어 왔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은 그것을 이해하지(따라잡지, 이겨보지) 못하였다(요1:4~5). 그리고 "참 빛이 있어 왔다. 이런 그 빛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면서 지금도 각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1:9)고 했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둠'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이 땅의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아와서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므로 빛으로 나아오기를 싫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어찌하든지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요3:19~21).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빛은 예수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을 믿고 그 빛을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어둠 가운데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어둠은 빛과 결코 서로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면 그냥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또한 요한은 생명이 물로도 나타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생수(생명의 물)"라는 표현이나(요4:14),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요7:38)이 곧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과거 창세기 강해(172강)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물들 안에 '빛'과 '물'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빛도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요, 물도 역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지구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것 가운데 창조되지 아니한 2가지는 '빛'과 '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그분들을 결코 피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6. 세례 요한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파송받아 온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바로 그 선지자다(6절). 그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7~8절). 그럼, 그가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7절). 그래서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서 외쳤다. "이 분은 내가 말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은 비록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15절)" 그랬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앞선 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7.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런데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참 빛으로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땅인 유대 땅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남자)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자식들'이란 출생으로 통한 자식을 가리키는 단어 '테크논(children)'이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출생을 통한 자녀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자식 삼는 단어로서 '휘오스(son)'가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 하나님의 자식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어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들을 얻는 방법으로 더 이상 혈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또한 육체의 뜻 곧 남여의 결합으로 자식들을 얻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남자)의 씨를 통해서도 자식을 얻지 않겠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식만을 얻겠다고 하신 것이다(12~13절).
8. 이천 년 전에 왜 말씀은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는가?
드디어 2천 년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이 땅에 생겼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이 이 땅에 장막을 치셨다고 했다(14절). 여기서 '장막(성막)'이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 자신의 거주처로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요14:9).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셨던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12:44). 예수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있는 독생자와 같은 영광을 나타내게 되신 것이다(14절).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2가지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롭고 놀라운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실제)가 인간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4~18절). 여기서 '은혜'('카리스')라는 말은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알레데이아')는 거짓에 대하여 참이라는 뜻과 허상과 가짜에 대해서 진짜라는 의미의 '실제'라는 뜻,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제공된다(17절).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와 진리는 값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으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보고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18절).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만 갖고 계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직접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을 뵙고 만나고 만져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존재의 은총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까...
9. 나오며
예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첫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전에는 말씀으로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예수님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것은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하고 완전한 참 빛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그 빛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해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으며,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어도 된다. 부모가 사랑해서 혹은 남자의 씨가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님은 2가지 은총을 쉼없이 부어 주신다. 하나는 은혜와 또 하나는 진리이자 실제다. 율법은 공의와 모형으로 제공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이자 실제로 제공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문의 핵심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다.
2022년 06월 29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