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by 갈렙 posted May 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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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라틴어 이름이고 영어로는 어거스틴(Augustin)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신학자로서 카톨릭의 주교가 된 사람입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이 비슷하므로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즉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저술한 신학자입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원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BC 63년 ~ AD 14년)
폼페이우스, 쥴리어스 시저, 안토니우스로 이어지는 정치싸움에 승리하여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AD 354년에 북아프리카의 타카스테에서 태어났습니다.  
(Augustinus, AD 354~430, 오늘날 알제리의 수크 아라스 - Souk Ahras)
 
16세에 카르타고에서 공부할 때에 여자와 동거하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19세에는 키케로의 철학에 심취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그후 정욕의 포로가 되어 수많은 여자들을 전전하면서 허탄한 세월을 보내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하게되었고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기술한 책이 '고백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9년동안 몸담고 있었으며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습니다.
 
현재 개신교의 핵심교리들의 많은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근원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루터,칼빈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개념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입한 것인데
그리이스 철학자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용하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기독교 교리인 천국 개념은 그 근원이 그리이스 철학인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매개자가 되어 기독교에 유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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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론은 플라톤이 처음 창시한 형이상학 이론인데
이데아는 우리 눈으로 보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모든 사물의 본질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본질적인 이데아는 현실 세계의 인간에 대한 근원인데
본질적인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현상 세계에 인간이 실재할 수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했습니다.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자각할 수 있는데
자각하게되면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현실세계로 오면서 레테의 강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이데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플라톤이 주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부분을 기독교에 도입하고 변형시켜서 
천국의 개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대단한 사기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론들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백록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내용과 회개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백록은 모두 13개 장으로 구성된 책인데
1~10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11~13장은 시간, 영원, 창조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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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시41: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아멘 아멘
  시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시편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대상16:3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찌로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계신 분인데, 그렇다면 시간은 누가 창조한 것인가?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은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흘러가는 그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으며 시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으니 시간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시간이 흐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현존하는 영원의 탁월함 안에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앞서고, 미래의 모든 것들을 초월합니다.
  주님의 세월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 개념이므로, 그 어떤 날도 '오늘'이고 오늘은 영원입니다.
  흔히 말하는 3가지 시간인 미래,현재,과거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구분은 틀린 개념입니다.
  모든 것이 현재이니 
  지나간 것의 현재, 현존하는 것들의 현재, 장차 일어날 것들의 현재라고해야 맞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는 현재는 기억이라고 하며 (memory)
  현재를 생각하는 현재는 직관이라고 하며 (intuition)
  미래를 생각하는 현재는 예상이라고 합니다. (expectation)
  시간의 본질, 시간의 측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답도 확실한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도 잘 모르는 내용을 생각나는대로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그 책을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자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기록했는데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어찌 그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주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오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타임머신 타고 과거나 미래로 여행한다는 SF영화 '백투더퓨처' 만큼이나 황당한 가설입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며 미래는 미래이니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흘러간 과거의 일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범죄한 피조물이 있다면 
그를 범죄하기 이전의 과거로 되돌려서 과거를 오늘로 만들어 다시 살도록해서 
그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다시 기회를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에 
그 과거에 대해서는 회개하는 것만이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선한 행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무조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려한다면
이해가 안되면서 괴로워지는 시간이 지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백록'의 많은 부분은 틀린 사유에서 비롯되어 엉뚱한 가설이 도출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장 1~2절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입니다.
 
  주님의 본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안에서 무로부터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최초 하늘의 하늘은 하나님에게 속한 곳이고, 땅은 무형적이고 보이지않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형의 질료를 만드셨고
  그 무형의 질료로부터 사람들이 감탄하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물질적 하늘입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설일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긴가민가 하면서 확신없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도 잘 모르는 내용을 
마치 자신이 잘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마구 써내려간 오류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가 오늘날 기독교 교리에 미친 폐해는 실로 막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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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1. 마니교와의 논쟁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은 학문의 상아탑 속에 갇혀서 명상과 사변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신학적 논쟁을 통해 무르익어 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교회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살아 있는 신학(living theology)’이며, 기독교 신앙을 변증한 ‘변증신학(Apologetic Theology)’이다. 그의 생애에 크게 세 가지 논쟁이 일어났다. 마니교와의 논쟁, 도나티스트와의 논쟁,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이 그것입니다.

첫째는 마니교(Manichaeism)와의 논쟁(386∼395년)이다.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대부분 저술은 마니교를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적(Gnosticism) 이원론을 갖고 창조를 이해한다. 여기서 영지주의는 영적 지식(gnosis)을 통해서 구원받음을 강조하고, 영과 육을 이원론(dualism)적으로 구분 짓고, 영은 거룩하며 육은 더럽고 속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이원론으로 인해 우주와 역사를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영과 육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해하고, 창조 때부터 선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악까지도 만들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우주와 역사가 열등신(Demiourgos)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영지주의적 창조론과 통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일원론(monism)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아름다운 창조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악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이며, 악은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악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는 악을 선의 부패(privation), 타락(lackness), 결핍(absence), 상실(corruption)로 이해한다. 그는 선한 천사 루시퍼(Lucifer)가 타락함으로써 선을 상실하고 악마가 되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본성에 있어서는 악마라 할지라도 선하며 다만 선한 본성이 악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마니교에 대항한 논쟁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마니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선과 악의 싸움으로 역사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결정론(determinism) 혹은 운명론(fatalism)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결정론 혹은 운명론을 비판하며 자유의지의 역할이 한 개인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자유의지론’에서 인간이 운명의 거미줄에 걸린 인형이나 저항 의지 없이 떨어지는 돌 같은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 시에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드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의지가 자유롭지만 항상 선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2. 도나티스트와의 논쟁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은 성경책을 불태우거나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성경책을 버린 배교자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배교한 감독 펠릭스가 안수하여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감독이 된 카이리아누스의 감독 안수식을 무효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맨사리우스를 새 감독으로 성별시켰으나 그는 곧 죽고 도나투스 감독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그들을 도나티스트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도나티스트들은 성직 안수식 및 세례식과 성만찬식은 도덕적으로 성별된 거룩한 감독 및 성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비록 배교한 성직자라도 그들이 베푼 성례전은 타당성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즉 사건 자체가 타당성을 발휘하지, 어떤 인간에 의해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성직자의 도덕적 능력이나 인격에 의해 타당성이 부여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타당성이 인정됨을 믿는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의 이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만찬이나 세례는 그것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성직자가 흠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타당성을 지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효력성에 있어서는 교회 안에 들어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은혜의 효력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다시 살아난다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박해 시에 배교한 성직자들에게 세례 받은 교인들이 교회로 돌아올 때,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다만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입교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3.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운명론 혹은 결정론과 논쟁할 때는 자유의지를 강조했으나, 펠라기우스주의와 논쟁할(410∼430년) 때는 자유의지보다 예정과 은총을 더욱 강조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의 수도승이었는데 명성과 학식과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죄를 부정하고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상처를 주었고 온 인류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았기에, 어린아이는 죄가 없고 원죄의 유전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어린아이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아담의 원죄가 유전함을 강조하고, 아무리 유아라 할지라도 죄악성을 갖고 태어나기에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유아세례 제안자가 되었습니다.

본성의 부패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도 갇혀진 자유의지 상태이므로 하나님의 선택 곧 예정에 의해 인간이 구원되며, 예정된 자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구원받을 자의 예정만을 말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다. 여기서 그 불가항력으로 다가오는 은총은 부드러운 강권(a soft violence)이지, 거친 폭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는 구원에, 어떤 자는 멸망에 이중적으로 예정되었다는 주장은 어거스틴이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강조함으로써 구원 완성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선행과 공로 사상이 나온다. 곧 예정의 은총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참여와 선행적 역할을 말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어거스틴을 따름니다.

4. 시간관

어거스 틴에게 있어서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곧 수직적 시간(Kairos)뿐이다. 과거는 다만 현재의 기억이요, 미래는 현재의 기다림이다. 수평적 시간(Chronos)은 의미가 없다. 이런 시간론은 그의 ‘고백록’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시간은 내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상은 라헬을 사랑한 나머지 야곱이 14년 종살이를 수일 같이 한 것과 같다. 이런 시간관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나타남니다.


5. 신인식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신인식의 문제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철학에 영향을 받은 계시신학에 근 거하여 말하고 있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연신학적 신인식론을 강조한다. 곧 자연현상과 창조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간 이성의 사변과 의지적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인식 방법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계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가 이러한 어거스틴의 계시신학에 입각하여 그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십자가 속에서 모두 드러났는데, 십자가의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요,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온전히 알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6. 어거스틴의 역사관

우리는 앞서 어거스틴의 초기 자유의지 사상과 후기 예정과 섭리사상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도성’에서는 신의 역사 섭리와 예정 안에서의 인간의 역사적 참여와 책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인격이 사회 속에서 날마다 변화하고, 연령이 자라면서 그의 인격도 성숙하고 발전하듯이, 역사 속에 있는 인간 존재의 인격 변화와 자유의지의 역할에 따라서 역사도 발전하고 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까닭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와 계획과 예정을 말하면서도 결코 마니교적 역사결정론이나 역사운명론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역사 참여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와 인격은 역사 속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amor Dei)과 자기 사랑(amor sui)이 한 인격 속에서 싸우는 것이 ‘고백록’에 나타나 있다면, 그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배되는 하나님의 도성은 아벨-야곱-이스라엘-교회로 이어져 내려오고, 이기적 사랑으로 지배되는 세속 도성은 가인-에서-앗수르-바벨론-희랍-로마로 이어져 내려온다. 결국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해가는 원인이 기독교에 있음을(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되었으므로) 이교도들이 도전함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렇지 않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성(교회)은 세속 도성(로마)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음을 밝힘니다.

어거스틴은 희랍의 회귀사관(circulation)에 비판을 가하고, 종말(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하나님의 직선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동시에 초월적 종말론을 믿을 뿐만 아니라 신국의 내재성도 강조한다. 그는 천년왕국이 역사의 끝에 온다고 믿지 않는 무천년설주의자입니다.

곧 천년왕국이란 현재의 교회라고 보았다. 교회 속에 쭉정이의 요소도 있지만, 교회는 천국의 지상 모습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내재적 천국관이 프랑크 왕국 찰스 대제의 중세 기독교사회라는 이상적 꿈이 되었다. 800년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아 쓴 후 기독교 국가를 만드는 꿈과 망상에 사로잡혔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 4세가 독일 왕 헨리 4세와 독일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논쟁할 때, 그는 어거스틴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하였다. 곧 기독교 이상과 신앙으로 세속사회를 지배하여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려는 망상에 빠졌습니다.

7.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종교개혁자들에게 미친 영향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루터와 칼뱅, 웨슬리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루터는 어거스틴의 의인화 은총 이해를 재발견하면서 토머스 아퀴나스적 중세 스콜라주의의 선행의인화(善行義認化) 사상을 비판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의롭다하심(信仰義認化)을 얻는다는 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의 신앙의인화를 재발견한어거스틴의 은총이해를 루터뿐 아니라 칼뱅과 웨슬리도 똑같이 수용하였습니다.

둘째, 바울의 신학을 재해석한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뱅과 웨슬리는 객관적 수동적 의인화의 주입을 주장합니다. 의롭다하심은 능동적·주관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거저 옷 입혀지는 것입니다.

셋째, 루터와 칼뱅은 본성적 선함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어떤 가능성에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믿음으로만 관계회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웨슬리는 신앙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역사하는 사랑의 행위도 신적 본성 회복에 영향을 미침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은총이 신적 본성 회복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지만, 인간의 책임적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넷째, 다시 말해서 루터의 성화론(聖化論)은 의인화론(義認化論)만큼 강한 그의 신학적 핵심 주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는 웨슬리가 강하게 영향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성화론은 루터나 칼뱅보다 웨슬리에게 더욱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어거스틴이 강조한 점진적인 영적 치유의 성화 과정이 웨슬리에게서도 나타남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다섯째, 어거스틴과 웨슬리는 신앙뿐만 아니라 선행도 성화와 구원 완성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이 필수조건이라면 선행은 충분조건이다. 선행은 상급만 아니라 구원 완성(final salvation)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오직 믿음이다. 거기에 비하여 루터와 칼뱅은 오직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본다. 행함은 상급으로만 생각한다.

여섯째, 어거스틴 구원론의 신인협조적 요소가 웨슬리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처럼 인간 본성의 낙관주의(optimism of nature)에 기초하여 인간이 선행으로 구원의 과정을 출발하면(인간 50%),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은총 50%) 신인협조설(synergism)이 아니라,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 역사하면(은총 100%)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행이 응답한다는(인간 100%)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을 강조한다.

일곱째,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뱅은 지상에서의 완전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인간의 죄악성과 인간의 욕망(concupiscentia) 때문에 거부하지만, 어거스틴은 어느 정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웨슬리는 지상에서의 완전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동방교회적 전통과 웨슬리 당시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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