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26~27에 나오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천사들과의 천상회의인가_전 총대대 구약학 김정우교수 논문

by 갈렙 posted Aug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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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논문은 삼위일체의 구약적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는 창1:26~27, 3:22, 11:1에 나오는 1인칭복수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증거라고 볼 수 없고, 한 분 하나님과 그의 곁에 있는 천사들의 총회라는 것을 밝혀주는 논문입니다. 이 부분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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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에 관한 구약적인 증거

총신대 김정우 교수.jpg

 

김정우/총신대 구약학 교수

 

이 글에서 필자의 중심 관심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적 발판을 새롭게 형성해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발판을 세우기 위해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 사용된 논거들과 증빙자료 구절(proof text)들을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교의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해준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구약 성경 구절을 주석하여 이 구절들이 갖는 원래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후대의 의미와 구별해보고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후대의 의미와 새롭게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또 다른 관심은 신약시대에 몸으로 찾아오신 성자와 성자가 보낸 성령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찾아보는 데 있다. 즉 신약시대에 찾아오신 성자는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필자는 계시의 유기성을 전제하므로 이미 구약 속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과 인격이 그림자나 씨앗의 형태로 있었음을 가정하고 그들이 구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무엇보다 신약의 성자와 성령이 구약에서도 독자적인 인격성을 가지면서 신적인 통일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한다.

 

루이스 벌코프는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가운데 구약의 증거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1:26; 11:7)둘째여호와의 사자는 신적 인격()으로 묘사되었다(16:7-13; 18:1-21; 19:1-22)셋째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48:16; 63:10).

그러나 찰스 핫지는 훨씬 더 조심스럽다(Ch. Hodge 446).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그 구성요소들은 이곳저곳에서 드러날 뿐이다." 핫지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구성요소'는 벌코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벌코프가 제시하는 세 가지 논점을 살필 뿐 아니라 그가 빠뜨리고 있는 잠언 8장의 하나님의 지혜를 추가하여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는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구약이 열어주는 삼위일체 교리의 가능성 등을 생각하고자 한다.

 

 

 

I .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거의 대부분의 전통적 조직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을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이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 2627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신 본문인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1도 구약의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함께 인용되고 있다. 이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학자들은 다섯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신화의 파편

게블러(Gabler 1795, Hasel 59쪽에서 인용됨)로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현대 비평학자들은 이 창세기의 본문이 신화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근동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 이 서로 상의하여 인간을 창조하는 사상이 '우리' 라는 복수형으로 아직도 창세기의 본문 속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이 에아와 상의하고.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여러 신들이 상의한 뒤 인간을 만든다. 궁켈은 이 복수형이 P기자가 이전에 있었던 다신론적 기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반영해준다고 한다(1901:101). 그러나 문서가설의 정당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다신론을 비판하며 그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철저하게 논쟁하고 있으므로 다신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2. 위엄의 복수형(Plural of Maiesty)

카일(Keil)과 드라이버(Driver)는 '우리를 위엄(혹은 장엄)의 복수형으로 본다. 이것은 "신성 안에 있는 속성과 능력의 충만함"이다(Driver 1904:14). 히브리어와 셈어에서는 단수개념이 복수형으로 강화된다. 예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높고 강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뜻한다. 데라빔(teraphim)도 하나의 신상이지만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엄의 복수형은 명사에만 나타나고 대명사에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P.Joueon 1923:309).더구나 "만들자(asa)"라는 동사는 한 번도 위엄의 복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3. 의사표현형 복수형(Plural of Self-deliberation)

게세니우스-카우칠(#124f, n.3)와 쥬옹(Joueon #ll4e), 브로켈만(24,14a)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보며, 카수토(55)는 스스로 격려하는 형식(self-encouragement)으로 본다. 최근에는 베스터만과 몇몇 학자들이 지지한다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문법학자들은 이사야 6장 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와 사무엘하24장 14절의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 두 본문에 따르면, ''와 '우리'가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11장 7절도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사실 창세기 11장 7절은 의사표현형 복수형으로 보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런 용법은 지극히 희소하며 문맥을 볼 때 의사표현형 복수형은 창세기 3장22절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 6장 8절도 마찬가지다.

 

4. 신성의 복수형(Plural of Fullness)

(1) 바나바 서신과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여기의 복수형을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았으며 전통적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삼위일체를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복수형 속에 있다고 보았고 터툴리안은 성육한 말씀, 즉 그리스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았다(Hasel 1975:58). 구약신학자 페인(1978: 167)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설명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본문 속에 "삼위일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클라인스는 하젤을 이어, '우리를 신성 안의 복수형(plurality within the Godhead)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미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 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하게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수단으로 나타난다(욥 33:4;시104:30;겔37). 또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있으라")을 신적 인격으로 본다면 여기에서 삼위일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신성의 복수형으로 보는 이 해석은 창세기의 자연스런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왜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 삼위일체가 나와야 하는가?

 

5. 천상의 총회

필로로부터 유대인 랍비들(Bereshith Rabba viii 3-7)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복수형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즉 '천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 왔다. 즉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 있는 여러 천사들을 향하여 "우리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근에도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폰 라드, 침멀리, 베스터만 144에서 인용됨). 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 카수토는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1961: 55). 즉 이 해석은 첫째로 창세기 1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중심 사상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우리가 만들자"는 표현은 천사들과 상의하는 말투가 아니다. 또한 셋째로 만약 하나님께서 상의하는 투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상의하셨는지 더 구체적으로 시사했을 것이다(왕상 22:19;사 6:1-8; 욥 1-2장). 카수토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여러 해석 가운데 천상의 총회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하여 구약 자체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

첫째천상의 신의 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뮬렌(1980:113)은 이 개념이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페니시아,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주 일반적인 종교적 모티프였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총회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그 용어조차 서로 유사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벨론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인간창조에 대한 결정은 신들의 총회에서 질문과 응답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Enuma Elish 토판 VI, 5-8, ANET 68). 둘째구약성경 안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왕상22:19;욥1:6이하 2:1이하 38:7). 물론 구약의 천상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천상총회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스라엘에서의 천상총회 개념은 유일신앙의 틀 속에서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상의 존재들은 결코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신들이 아니며, 이들은 "야웨의 뜻에 복종하는 천상의 영물들에 불과하다"(Miller1973:70). 구약에서는 '하늘과 구름'과 같은 비유법과 '거룩한 자들, 신의 아들들, 그(하나님)를 둘러싼 자들, 야웨의 군대'와 같은 용어로 천상의 총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필자의 논문 1992:104를 보라).

셋째이사야 6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는 창세기 126절과 상당히 유사하며주님은 그룹과 스랍들이 있는 천상의 총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

넷째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가 천상의 총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27절에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명 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도 인간창조에 개입하였는가?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본문 창세기 1장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선언과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구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서 "우리가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창세기 11장 7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지만, 바로 이어 8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고 말한다이사야 6장 8절과 9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한다.

즉 창세기 1장 27절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 있는 천군천사들을 향하여 인간창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실 때 그들의 경배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 38장 4절과 7절이 이 사실을 지지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던 말할찌니라‥‥그 때에 새벽별(kokbey boqer)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beney 'elohim)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여기서 천군천사들이 "노래하며(ranan)", "기쁜 소리를 낸(rua)"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경배였다.

 

6. 정리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라는 복수형은 하나님과 천상의 총회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명백하게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한정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천군천사들의 경배를 받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창조를 주목하게 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상의 총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해서 삼위의 제 2위시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는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천지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더 '충만한 뜻(Sensusplenior)'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본문은 구약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다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본문을 통해 더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조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바로 다음에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II .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잠언 8:22-31)

전통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잠언 8장 22-31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박윤선 1972:13)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잠언 8장은 예언은 아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선지서에서 보는 예언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잠언 8장에 소개된 지혜의 본질과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선재한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혜의 성격 때문에 칼빈도 요한복음 5장 17절에 근거하여 여기의 '지혜' 는 제 2위이신 성자라고 주장'한다(「기독교강요」,1960:129-130).

그러나 잠언 8장의 지혜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때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실 신약성경이 잠언 8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와 선재한 지혜를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잠언 8장의 본문은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본문을 구약의 맥락에서 자세히 살핀 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자.

문학적 형식면에서 볼 때 본문은 창세기 1장 1∼2장 3절 그리고 2장 4절 이하와 애굽의 아포피스 책(Book of the Apophis)과 에누마엘리쉬 토판 1,1-9줄까지와 유사성을 가지며, 시편의 여러 창조시편과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찬양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창세기 1장 같은 창조의 순서에 관심을 갖기보다 모든 창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선재한 지혜에 대한 찬양' 을 다루고 있다. 잠언 8장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고 왕위에 앉히심(22∼26절)

1) 요약적 진술: 주께서 창조 전에 지혜를 낳으심(22∼23절)

(1)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2)주께서 지혜를 세우심(23절)

2) 부정적 상황 (24∼26절)

(1)물이 있기 전(24절)

(2)산이 있기 전(25절)

(3)땅이 있기 전(26절)

 

2. 지혜는 어린아이로서 주의 창조를 보고 기뻐함(27∼31절)

1) 긍정적 진술: 하늘, 바다. 땅을 만드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음(27∼29절)

(1)하늘과 궁창을 만드실 때(27절)

(2)궁창과 바다의 샘을 만드실 때(28절)

(3)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실 때(29절)

2) 주절 : 이 기간 동안 여인 지혜는 주 앞에서 놀고 인간을 기뻐함(30∼31절)

(1)지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어린아이(30상)

(2)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창조를 보고 기뻐함(30하∼31절)

 

3. 결론: 지혜자는 아들에게 교훈을 받으라고 권면함(32∼36절)

위의 구조를 보면 전체적으로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연과 둘째 연은 각각 두 개의 소절로 다시 나누어져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혜는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왕으로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 본문에서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된 중심 단어들과 그 논쟁점은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야웨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나를 가지셨으며"(22절)에서 "가졌다"(qana)는 동사가 논쟁의 핵을 이룬다. 1926년 버니(Bumey)는 히브리어 qana에 대한 연구에서 다섯 가지 의미를 제시하였다(윤영탁 1991:100에서 인용됨). "사다"(buy, 잠20:14등), 구매한 권리에 의하여 "소유하다"(own,사 1:3, "그 임자"), 구매한 방법이 아니고 "획득하다"(acquire, 출15:16;시74:2; 78:54; 잠1:5등),"낳다 (beget;신32:6; 잠8:22) · 얻다"(get, 낳아서 얻음, 창4:1), "창조하다"(create, 창14:19,2; 시139:13)등이다. 이 다섯 가지 의미 가운데 버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이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으로 보았다. "이 얻음은 사거나, 만들거나, 낳거나(아기인 경우), 마음속에서 계속 생각함으로(지혜인 경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윤영탁,100). 이 동사가 기본적으로는 얻다는 의미를 가지나, 이렇게 다양한 어감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잠언 8장 22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첫째로 아귈라, 시마크스, 데오도션(ekthsato)과 제롬(possedit), 루터, KJV, NASB, 한글개역성경은 "나를 가졌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졌다"는 번역은 "획득했다"는 번역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태초 전에 나를 가졌다"는 "하나님 안에 나를 하나의 속성이나 기능으로 가졌다"는 뜻보다 지혜를 독자적 인격으로 가지신 것이다. 즉 지혜는 이미 창조질서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창조질서 밖에 있었다. 온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이 번역을 따르면 잠언 8장 22절의 지혜와 신약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쉬워진다.

 

둘째로 70인역(ktizein), 시리아역(mtqnh), 탈굼(br'ny)은 "창조하다"로 번역하고, 현대에 와서는 RSV와 NEB(create)가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초대교회 당시(4세기) 아리우스가 이 번역에 근거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를 피조물로 보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했다(Scott 73). 최근에는 슈미트(Hans H. Schmidt 1966:150)와 올브라잇(Albright 1955:1∼12)이 이 번역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창조하다"로 번역된 세 개의 번역된 본문(창 14:19,22;시 139:13)도 "얻다, 혹은 소유하다"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윤영탁106-108을 보라).

 

세번째 가능성은 "나를 낳다"(to beget)로 보는 것이다(Irwin 1961:133-42). 본문에서'낳다"는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동사가 구약에서 출생의 맥락에서 여러 번 나타나기 때문이다(창4:1;신42:6;시139:13). 잠언 8장 역시 출생의 맥락이 두드러진다. 24절과 25절에서는 "내가 이미 났었다"(holalti)는 말로서 출생 이미지를 명백히 한다. 민수기 11장 12절에서도 잉태와 출생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hara)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나이까(yalad)." 또 신명기 32장 6절의 "우매 무지한 백성아 야웨께 이같이 보답하느랴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에서도 잉태와 출생을 통한 신인동형적 표현이 나타난다. 또한 잠언 8장 30절에 있는 아몬(amon)을 유아로 본다면 8장 22절에 있는 카나(qana)를 낳다고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만약 이 번역이 옳다면 첫번째 가능성인 가졌다의 의미가 더 명료해진다. 하나님은 어떻게 지혜를 가지셨는가그는 잉태와 출산을 통하여 지혜를 소유하였다. 즉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왔으며 하나님과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지혜는 창조 전에 이미 존재하게 되었다. 주님은 태초에 창조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지혜를 낳으셨다. 따라서 이 지혜는 주님과 연대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창조 전에 계신 존재로서 창조에 필수적인 존재이며 주님에게 소유되고 있으나 또한 사람들에게도 소유될 수 있다.

 

2. 주께서 지혜를 왕으로 세우심(23절)

다음으로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에서 세웠다는 단어 나사크(nasak)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붓다, 쏟다"는 뜻으로 금속을 주형에 부어서 만들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 하나는 "세우다, 앉히다"는 뜻으로 시편 2편 2절에서는 "왕을 세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대관식 배경이 깔려있다. 특히 시편 2편 7절에 있는 "내가 너를 낳았도다"와 평행을 이룬다. 원래는 기름붓는 환유법을 통하여 어떤 직분에 세우게 되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창조에 있어서 지혜의 역할은 본문에서 능동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으나 암시되어 있다.

 

3.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어린아이였음(30절 상)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양육받는 아이('amon)가 되어" 에서 히브리어 'amon은 크게 둘로 번역된다. 첫째로'amon은 '창조자' 혹은 '건축자', '명공(master craftsman)'으로 번역된다. 지혜를 창조자로 보면 지혜는 창조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이 입장을 지지한다(Keonig, Gesenius, BDB, Albright).이 번역은 70인역과 시리아역과 벌게이트를 따르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 7장21절과 8장 6절도 "지혜는 만물을 만든 자"라고 말하며 "그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성자"라고 한다. 필로는 로고스와 소피아의 구별을 없애고 di' hou ho kosmos edmiourgeito(de Sacerdot. 5)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와 골로새서 1장 16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는 소피아-로고스가 "만물의 띠(bond of all things)"라고 말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17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창조자로 읽는 것에 대한가장 강력한 근거는 예레미야 52장 15절에 근거한다. 한글 개역성경은 "무리의 남은 자"로 번역하고 있으나 NIV는 the rest of the craftsmen으로 번역한다. 이 본문은 '장인들' 에 대한 집합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 로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레미야 52장15절은 본문 비평상 어려움을 갖고 있다.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생략되었으며. 이 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열왕기하 25장 11절은 "무리"(hehamon)로 읽고 있다. 만약 우리가 "창조자"로 읽으려면 아가서 7장 2절처첨 "공교한 장색"들 뜻하는 'omman으로 되어야 한다(Akk., ummanu; 셈어의 장모음 아<a>는 히브리어데서 규칙적으로 장모음 오<o>로 바뀐다. 역본들은 ' amen으로 인는다. 70인역은 '치키는 자, 수탁자'를 탈굼은 "신실한, 믿을 만한"을 뜻할 수 있다).

둘채로 'amon을 "유아"로 인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Gunkel, Fichtner, Kayatz, B.Lang 등)과 여러 역본들(KJV, JPS. Moffatt)이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애가 4장 5절에 있는 복수형태는 "길리운자"로 나온다.

문맥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요약을 제시한 22절의 "나를 낳았다"(qana)와 24절에 있는"내가 이미 낳았다"(holalti)에 아주 잘 일치하고 있다. 또한 유아로 읽는 것은 30절에서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고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와 잘 어울린다. 고대 애굽의 창조론에 나타난 마아트의 역할도 본문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툼은 그의 딸이요 수(Schu)의 여동생인 테프누트(Tefnut)가 마아트(Maat)임을 공식화했다. 그는 태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 오직 마아트와 슈와 그의 자녀들만이 그와 함께 있었다"(Kaystz 1966:93∼95).이 본문에서도 마아트의 실제적인 창조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단지 태초에 놀고 있는 유아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마아트가 창조기사에 있어서 "전에 아직 멀었을 때"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나온다는 사실이다. 마아트와 슈는 전재하고 있었다. 땅이 창조되기 전에 지혜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들과 같이 있었다.

킬(Keel)이 연구한 애굽의 벽화 그림들을 보면, 마아트는 왕의 아내로서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왕도 의식적인 행동으로 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장난을 치고 있다. "잠언 8장 22∼31절에 따르면 세상의 비밀은 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 욥기28장은 세상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잠언 8장에 따르면 우주의 기초는 슬픔과 혼란스러운 우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게 즐거워하며 인생의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이다"(Keel 1947:72).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는 표현(1:l5)은 유아로 번역하는 것과 아주 잘 어울린다(계 3:14 참조). 문맥으로 볼 때에도 22-23절에 있는 첫번째 요약적 진술에 있는 출생 영상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유아로 보려면 먼저 발음을 수정하여 ' amon을 ' amun으로 읽어야 한다. 또한 유아로 볼 때는 전체적 인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즉 지혜를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에 둔 이후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영상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천지창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여인 지혜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은 잠언 1-9장에서 갖는 지혜의 권위에 일치하는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이 즐거움과 기쁨과 웃음을 활력의 상징(삼상18:7; 렘30:19; 31:4; 시104:26)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것은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 된다. 특히 "… 앞에서 기뻐한다"는 의식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고 경배하는 기쁨을 드러내어 준다.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 여인의 무리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렘 30:19) 춤출 것이다(렘 31:4). 웃음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해주기 때문에 웃는 자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은 자이다(창 21:9 참조).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이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유아'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4. 정리

잠언 8장에 나타난 지혜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지혜를 창조전에 낳아서 가지셨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를 왕자로 세우셨다. 셋째,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뻐하는 유아이다.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며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지혜의 모습 속에서 신약의 저자들은 선재하신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에 계신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이"(1:15)라고 말하면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말한다(16-l7절).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런 신약의 해석은 비록 잠언 8장 22-32절을 명백하게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본문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의 본문은 모든 만물이 만들어지기 이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태어나고 세움받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며 기뻐한 선재한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니케아신조에서 성자를 "태어나되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잠언 8장에 근거하고 있다.

 

 

 

III .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벌코프는 "야웨의 사자가 신적 인격()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는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의 정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비평학자들은 주의 사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천사"로 보거나 혹은 "한 명의 하나님 사자"로 본다. "왕과 관리들처럼 하나님은 자기 사자를 갖고 있었다"(Gunkel, Westermann 243에서 재인용). 게스터(Castor)는 주의 천사가 나타나는 중요한 본문들을 대부분 '통속설화' (Maerchen)로 보고 하나님의 사신으로 다를 뿐이다(IDB 1:128-130). 베스터만은 하나님의 사자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명의 사신"이라는 노트(R. Noth)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하나님은 사신에게 임재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함께 하셨다"고 말한다(244). 주의 사자의 신분을 좀더 높이 보는 학자들은 그를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Davidson 299; O.Procksch, "the theophany of the person of God")으로 보기도 한다. 에드몽 쟈꼽은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는 인물이 여러 곳에서 "난해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한다(Payne.167,n.5에서 인용됨). 또한 유대교에서도 "주의 사자"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으로 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초기 성경기록자들)은 그들(천사들)을 개인화하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사사기 13장 18절이나 창세기 3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거절하였다" (Jewish Encyclopaedia 1901:584)

구약성경에서 "야웨의 사자"(mal'ak yhwh)는 58회, "하나님의 사자"(mal' ak 'elohim)는 11회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일반적인 천사들(beney 'elohim, boney 'elim, qedoshim,그룹과 스랍들, 미가엘과 가브리엘 등)과 그 성격과 기능과 존재양식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 물론 이 표현은 아주 가끔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천사를 가리킬 경우가 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만난 존재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명의 천사이다(왕상 19:5). 이어서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앞에 명시된 천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왕상 19:7).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선 주의 천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이다(삼하 24:16). 그러나 이런 천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사자' 가 나타난다.

주의 사자는 족장시대와 초기 성경 기록들에 주로 나타나고 있다. 베스터만이 잘 관찰한 바와 같이(242)주의 사자는 주로 '아들의 탄생 소식' 과 '구원의 소식' 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모든 본문에 나타난 하나의 공통점은 그가 하나님과 상호 교통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거의 동격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 먼저 창세기 16장 7절에 따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야웨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여기에 나타난 야웨의 사자의 모습은 일반적인 천사나 선지자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그는 하갈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사라에게 복종할 것과 이스마엘을 낳을 것과 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주신다. 그때 하갈은 야웨의 사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13절)라고 말한다.

창세기 22장 11절에서도 야웨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15절에서는 "야웨의 사자가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라고 말한 뒤 16절로 넘어가자마자 "야웨께서 이르시기를 ..."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의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야웨의 사자는 야웨와 다른 듯 하면서도 그 역할과 속성과 기능에 있어서 너무나 유사하다.

창세기 31장 11절에서 야곱은 라반과의 논쟁에서 자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셨하다"(31:11)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13절). 우리는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 다음에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시는 "벧엘의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야곱은 후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독특한 평행법을 쓰고 있다(창 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소서"

 

이 본문은 "조상의 하나님"과 "나를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과 야곱의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지신 사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야곱 이야기와 연관하여 우리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주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야곱은 한사람과 씨름하지만 그의 이름을 물어서는 안 되었으며(28절) 그는 야곱을 축복하였고(29절) 야곱은 그가 씨름한 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30절).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호세아 선지자에 따르면 "야곱은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 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다"(호 12:3-6)고 재해석한다.

야웨의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신적 존재라는 점은 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기 3장에서도 나타난다. 본문 2절에서 "야웨의 사자가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뒤, 바로 이어 "야웨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신다(6절).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야웨의 사자와 야웨 사이에 구별이 되지 않는다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자 흑은 천사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신 것과 같다.

출애굽기 23장 20-33절에 보면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모세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한다(20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는 각각 다른 인격으로 나타난다. 이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목소리를 청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22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이름이 중첩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백성들의 "허물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있다(21절). 나아가 주님은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3절). 데이빗슨은 여기에서 "나의 사자"와 "내 얼굴의 사자"로 주님께서 소개하는 사실을 잘 주목하면서도 "구원하기 위해 드러난 야웨와 야웨 자신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298).

그러나 야웨의 사자는 단지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이라고만 볼 수 없다이 둘 사이에는 연대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33장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도 주님은 모세에게 계속하여 "내 사자가 앞서 가리라"(32:34)고 말씀하시며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겠다"(33:2)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고 말씀하신다(3절). 그러나 모세의 간청으로 주님은 다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로 말한다. 여기에 "나의 얼굴(나의 임재)"과 "내"가 평행을 이룬다. 여기의 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킨다. 이사야 63장 9절에 따르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한다. 이 구절에서는 "얼굴"과 "사자"가 연계형으로 이어졌다. 즉 주의 사자는 주님과 다르나 주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사자를 보면서 주님이 그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었다.

모세의 지도력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야웨의 군대장관"을 만난다(수5:14).그 군대장관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이스라엘 군과 마주섰다(13절). 여호수아는 그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한 명의 천사일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신다(15절). 이것은 이전에 주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사사기에서 "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삿6:11). 기드온은 처음에는 그를 몰라보고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에게 사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한다. 사명부여의 형식은 모세에게 주신 것과 동일하다(출3). 여기에서도 야웨의 사자와 주님 자신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16절, "야웨께서 이르시되"). 기드온은 손님 대접하듯이 그에게 양식을 준비해왔으나 그는 고기와 떡을 다 제물처럼 살라버렸다. 그때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 주 야웨여 내가 야웨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고 말한다(22절). 그때 "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신다(23절).

말라기에 보면 다시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3:1).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미리 보내어 그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4:5).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Vos, 88). "이 사자는 참으로 신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성례적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 주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이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과 그의 사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동질성과 구별된 인격성이 드러난다.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주님의 얼굴이며 그의 계시요 그의 임재다. 그는 하나님처럼 말씀하셨고 하나님처럼 나타났으며 하나님처럼 경배 받으셨고 하나님처럼 일인칭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는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주님의 사자였다. 주님은 그에게 "내 사자"요 "내 얼굴의 사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가 바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였다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속성과 기능과 사역을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를 충분히 가리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V.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난 수십년 사이에 출판된 대표적인 구약신학 책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성령"이 하나의 독자적인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나온 구약신학책들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달라진 현상이다 예로서 욀러(G. F. Oehler,1883), 데이빗슨(A. B. Davidson,1926), 스네이스(N. H. Snaith, 1944)등이 쓴 구약신학 책들에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이크롯트(Eichrodt,1967:46-68)는 그의 구약신학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구약신학을 다루는 학자들은 대부분 구약의 "성령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이 방치되어 있는 현상의 근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평학계의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전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비인격적인 '(바람과 힘은 상통한다)'으로 보게 된다. 이들의 사상적 밑바닥 속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 개념이 후대 교회의 산물로서 구약 자체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아이크롯트조차도 성령을 "힘과 능력정도의 차원으로 다룰 뿐이다. 침멀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야웨로부터 나오는 동적인 힘의 현상"이다(1978:101;cited from Batteau:190). 람프(Lampe) 역시 성령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의 양상"이라고 말한다(1962:626). 볼프(H.Wolff,1977;66)는 영이 "일차적으로 인식(heart)이나 욕망이 아니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힘과 의지"라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과연 구약에서 나타난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인지 아니면 인격적 존재인지를 결정하는데 있다.

 

1 .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창조의 영

1)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짜시는 하나님의 신(창 1: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은 천지창조를 요약하여 진술해준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직전의 상황을 1장 2절은 삼중적으로 제시한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먼저 "하나님의 신"이란 구가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기본적으로 "바람"과 "호흡"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구는 "하나님의 바람"(Gottessturn, Westermann 1984:106; Eichrodt, II:47,n.5), 혹은 "하나님의 호흡"(Ridderbos, B,Jongeling, Dasberg; cited from Gispen 1974:44; 최근에는 Wehnam 1987:17)으로 직역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첫장 둘째 줄부터 삼위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 혹은 영"의 개념을 허용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이란 표현이 시사해주는 영상이 어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형용사적 용법의 최상급으로 보고 "강한 바람", "폭풍"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비평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이 하나님의 신(영)이 수면을 운행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P의 창조기사가 지닌 일반적 사상구조에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다"(Eichrodt, II:47f., n.5). 이리하여 이 구는 일반적으로 "강한 바람", 혹은 "무서운 폭풍"(von Rad, 1965)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이런 입장이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Albright, Peters, H.G.May, McClellan, Orlinsky, W.H.Schmidt, E.4.Speiser). 물론 문법적으로 볼 때 이런 번역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이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Waltke,1990:268).문맥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기 때문에 2절 하반절 역시 유사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즉 태초의 바다수면에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히브리어 엘로힘을 최상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elohim)은 항상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인격적 존재로서 그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게다가 웨남이 잘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나타난다"(Wehnam,17). 구약성경에서 ruah 'elohim은 대부분 "하나님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루아흐는 호흡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 속에는 기본적으로 힘과 능력의 뉘앙스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첫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창조역사를 했는지에 대해 명시되고 있지 않으나 이 절에 사용된 동사 히브리어 rahap가 실마리를 준다. 이 동사는 오경에서 단 두 번 나타나며(Piel형)특히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Gordn,1965:484).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이 영상을 창세기 1장 2절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가 피엘형 분사로 사용된 것은 지속적인 동작으로서 빈번성, 혹은 지속성을 가리키기 위함이다(Waltke,1990:414 참조).

신명기 32장의 문맥을 좀 더 살펴보면,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주님은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고"(신32:10)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한다. 출애굽기 19장4절에서도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명기 32장10-11절과 창세기 1장 2절 사이에는 명백한 유추가 있다. 즉 독수리가 광야에서 그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 새끼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신(영)이 "혼돈과 공허로 덮인 땅과 흑암으로 덮인 깊음"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돈의 광야 길에서 보호받는 것과 창조시 혼돈의 물을 주의 영이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것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클라인의 해석은 아주 새롭다. 즉 창세기 1장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태초의 혼돈을 "창조적 능력으로서 뿐 아니라 창조의 파라다임으로"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Kline,1980:17). 클라인이 말하는 "창조의 파라다임"이란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는 파라다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클라인의 해석이 옳다면, 창세기 저자는 창세기 첫 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 사역에 밀접하게 관여하시며 온 우주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이루며 현재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드신 것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 주의 말씀과 주의 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창조사역을 이루고 있다. 워필드(B.Warfield, 189i)가 이점에 대해 잘 말해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역1985:110).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신의 인격성은 창세기 1장 2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지성과 총명과 모략의 신(사 40: 12∼17)

이사야 선지자는 40장 12-17절에서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만드신 우주의 방대함과 위엄과 주님의 섬세한 솜씨를 노래하면서 주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수사의문으로 대조하고 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릴 수 있는가, 즉 잴 수 있는가? 시인은 한번 더 묻는다. "누가 그 뼘으로 하늘을 잴 수 있는가" 그는 계속해서 "누가 땅의 티끌을 되에 담을 수 있겠는가, 누가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모았겠는가? 인간은 이 세상과 우주를 잴 수가 없다(욥 38:5).

나아가 선지자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는가?"(13절)고 묻는다. 여기에서 "지도하다"(tikken)는 동사는 앞의 12절에서 "하늘을 재다'(tikken)와 같은 동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물과 하늘을 그 손바닥과 뼘으로 재셨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측량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도 그를 지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주의 영"이 창조의 맥락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주의 영"은 바로 창조 때에 물 위를 운행하신 지성과 총명의 영이시다(창 1:2; 사 34:16; 욥 33:4). 성령은 생명을 만드시고 살게 하시는 분이며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분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지도한 적이 없다."누가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라는 후반부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모사로 일할 수 없다'것이다 옛날에는 왕에게 많은 모사가 있었다. 그들은 왕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그가 숙지해야 할 사항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의 신이 창조를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즉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온 우주를 지혜로 만드신 건축자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건축의 맥락에서 지혜의 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사역에 동참하듯이 출애굽기에서 성막 건설에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신다. "내가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리라"(출 31:2-5). 건축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성막건설에 브사렐이 나타나듯 후에 솔로몬 성전건축에서는 새로운 브사렐로 나타나며 성전건축을 위해 주님께서 특별한 지혜를 그에게 주신다(대하 2:12). 브사렐과 솔로몬의 성막과 성전건축 사역은 주의 영이 천지창조를 하는 것의 그림자이다.

 

2. 출애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구원의 영

느헤미야 9장 19-20절에 따르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등으로 밤에는 불기등으로" 인도하셨으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학개 선지자도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회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2:5).

1) 근심하시는 주의 영(이사야 63:7∼14)

이사야63장 7∼14절은 구원사에 나타난 성령 역사의 인격성을 찾는 데 좋은 출발점을 주고 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hewed)과 긍훌(rehem)과 구원의 은총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반역을 대조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의 반역은 출애굽의 여정에 있었던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결되지 않고,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로 설명된다(10절). 여기에서 "주의 성신이 근심하였다"는 표현은 성신의 인격성을 더욱 드러내준다. 성령은 단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성령은 후일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경 속에 처한 백성들은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며" 말하기를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고 탄식한다. 여기의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엔서 구원받은 사건을 성령과 연관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점은 홍해에서 올라오게 하신 다음부터 주님은 "그들 중에 성신을 두셨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다글라쉬(Daglash)가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9:20; 9:30; 슥7:12)고 말한 것처럼 선지자에게 임한 영이 아니고 출애굽과 홍해를 건널 때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다. 바로 다음 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12-13).

선지자는 끝으로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14절)고 한다. 이절은 주의 신이 친히 출애굽한 뒤 광야를 통과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비로소 안식을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2)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사야 4:2∼6)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시온에 임할 심판을 통한 구원을 예언하면서 출애굽에 나타난 불과 구름 기둥의 영상을 명백하게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는 먼저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ruah mishpat)과 소멸하는 영(ruah ba'er)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4절)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라"고 말한다(5절).

4절에 있는 "심판하는 영"은 이사야 28장 6절에서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ruah mishpat)이 된다"는 표현으로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심판하는 영"은 엄격한 공평의 원리를 따라 선악을 구분하며 악을 징계하며 나아가서 악을 처단하는 "소멸하는" 영이다. 뒤에 있는 "소멸의 영"은 앞에 있는 "심판하는 영"을 꾸며주며 철저한 심판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의 심판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로서의 심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뜻한다(Young1965:I:184).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시온의 더러움을 씻고 예루살렘의 피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은 명백하게 심판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께서 이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시온산에 임하실 것이다.

 

3. 새 창조의 영

1) 내주 하시는 주의 영(시편 51 : 10∼12)

시편 51편 10-12절은 영적인 갱신을 위한 기도로서 새로운 사람의 창조와 성령의 사역을 이어주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에서, "마음"과 "영"은 평행을 이룬다. 구약성경에서 마음과 영은 둘 다 지성, 감정, 의지를 다 포함하여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하자면 마음은 감정적인 의식활동이나 의지적인 측면보다 지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영"은 내적인 인격, 성격, 태도, 성품을 가리키며, 특히 의지적인 차원을 강조해준다. 죄는 의지력을 붕괴시키므로 시인은 "내 안에 정직한 사람의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라고 구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창조하다"(bara)라는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는 정결하고 변함없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앞의 5절에서 시인은 인간의 본성 속에 부정과 죄가 내재한다고 말했다. 이 부패는 생명이 시작하던 순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의 마음은 출생 때부터 부패하였으므로 새 창조를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울도 새마음을 얻었다(삼상 10:6,9). 후기 선지서에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새마음을 창조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겔 36:26; 11:10; 렘 32:39).

더 나아가서 시인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구한다(11절). "주의 성신(ruah qodsheka)"이란 표현은 여기와 이사야 63장 10,11절에만 나온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다른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 9:20; 9:30; 슥 7:12).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온 나라에 임한 것이 아리라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 즉 초기 사사들이나 솜씨있는 장인이나 선지자나 왕에게 임하셨다. 시편 51편 11절에서 시인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인은 왕이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령이 임하셨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면 성령이 떠나시는 것으로 믿어졌다. 사울이 범죄한 후 주의 영이 그를 떠났다. 그후부터 그는 암담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고통 가운데 빠진다. 따라서 시인은 주의 영이 계속 그에게 임재해 계시기를 구한다. 이 본문을 볼 때 성령은 인격적인 영이시며 언약의 중보자들에게 내주하셨다. 다윗왕은 범죄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다.

 

2) 새 언약의 영(에스겔 36:26.∼28)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며 새 마음, 새 영, 새 언약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다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주님은 그들에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영"은 "감각" 혹은 "성향'과 같은 것으로서 영적 생활을 이끄는 기관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방향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새 마음'과 "새 영"은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자세를 뜻한다. 새 마음은 바로 26절 하반절에서 부드러운 마음(살의 마음)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돌같은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새 창조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 즉 이스라엘의 불감증과 연관된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반역의 집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을 만드시는 새로운 창조를 하셔야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에스겔 36장 26절의 약속이 근본적으로 새 언약을 명시하고 있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36장에 나타난 회복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마음은 돌처럼 굳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그러나 아제 마음이 새로 살아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31절에 있는 핵심단어 "새로운" 언약이 여기에서는 마음과 연결된다. 주님의 새로운 활동의 결과가 마음에서 열매맺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은 자신의 신을 인간의 마음속에 두신다. 새 사람에게 주님 자신의 신("내 신")을 부어주신다(27절). 이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동기와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비로소 같은 뜻을 갖게 된다. 이 에스겔의 신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라"(30:1)고 꾸짖었다.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신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주어 범사에 그를 따르게 하실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셔서 내적인 개혁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순결과 거룩을 닮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새시대, 새백성의 모습이다. 이제 옛 본성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외적인 행동 규범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 계명의 정신에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이다. 이제 습관적으로 죄짓는 데서 벗어날 것이며 죄가 더이상 왕노릇 할 수 없다. 주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에게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새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 자체가 해결된다.

새 이스라엘에게 주실 "하나님의 신"은 단지 지혜나 총명의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새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신이시며(삼상 10:6-7)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겔36:27). 그는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시다. 이미 에스겔 11장 20절에서도 비슷한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곳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은 그동안 자기 백성에게 계속 순종을 요구하였다(레 26:3).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점철되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신을 우리 속에 두어 순종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시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연결된다. 그곳에서 선지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스겔은 주님의 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렇지만 두 선지자가 바라본 것은 동일하다. 말씀을 우리 속에 두시는 것과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둘 다 새언약의 선물이다.

 

4. 정리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정리해볼 때 주의 영은 명백한 인격성을 갖고 있으며,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주의 영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격을 가지면서도 구별된 독자적 인격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V . 총정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를 살피면서 우리는 조직신학자들의 사용한 전통적인 논거들이 기본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들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성경신학적인 해석의 견고한 발판 위에서 새롭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전에 선재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속역사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와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의 인격과 사역을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이미 구약 속에 확고한 발판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김정우/총신대신대원을 나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에서 시편을 연구하여 학위(Ph.D.)를 받았다. 총신대신대원 구약학 교수로 있으며 「시편강해1」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