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구원론의 변천사(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행2:36~41)_2017 02 17

by 갈렙 posted Feb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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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NOCFh1mjI8U
날짜 2017-02-17
본문말씀 사도행전 2:36~41(신약 19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유대교의 구원론, 초대교회의 구원론, 중세교회의 구원론, 종교개혁시대의 구원론, 성경적인 구원론

어떤 구원론이 바른 것인가? 오직 믿음인가 아니면 믿음에다가 행함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인가? 오늘은 초대교회부터, 중세시대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칼빈의 구원관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연 가장 성경적인 구원론이자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구원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예수께서 가르쳐준 구원론을 거의다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그 구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1. 들어가며

  참된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과연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도 믿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함도 있어야 하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구원론은 대부분 오직 믿음으로 얻는 "오직 믿음" 구원론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워낙 타락으로 추락하게 되자, 최근 들어와서는 행함을 강조한 구원론이 다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은 과연 교회의 역사 가운데 어떤 구원론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야 할 가장 바른 성경적인 구원론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2. 초대교회의 구원론

  초대교회의 구원론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오는 구원론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이 아니라,  사도행전과 서신서 등에서 증거하고 있는 구원론이다. 거기에 보면, 우리는 초대교회의 구원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제자들과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증거한 구원관은 어떠한 것인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초대교회는 어떤 구원을 전했을까? 그들은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고스란히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막1:15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막1:15의 평행본문 마4:17에 의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나온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가르쳐준 구원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도베드로나 사도바울 역시 회개와 믿음을 통한 천국복음을 전했다.

  그렇다면, 사도베드로는 무엇을 전하며 그 세대 가운데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을까?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전했다(행2:36~41, 행10:38~43). 마찬가지로 사도바울도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순회하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전했으며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전했다(행9:20,22,13:23,26~34,16:30~31,20:20~21). 그렇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을 전했던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전한 구원관이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로 세우심을 받고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 그의 복음전파의 내용은 그가 썼던 서신서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거기를 보면, 사도바울은 무엇보다도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야 했던 1차적 대상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을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출애굽때부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보내주실 메시야를 믿고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든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했고, 율법조항들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 자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할례를 행했고, 율법조항들은 지켰다.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방인들 중에서도 믿어 구원얻게 된 자들을 보고, 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조항을 지키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질타하였다. 왜 자신들이 매기도 힘든 율법조항을 이방인에게까지 매게하려느냐면서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니 그들에게 율법조항들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구원관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구원관과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율법의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 그것을 대부분 기록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구원론을 말할 때에, 조금 아쉬운 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기록된 인간 구원의 방법이 상대적으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구원관이 유대인들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초대교회 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대교의 잘못된 구원관 때문에, 사람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초대교회에서 멀어질수록 차츰 회개의 중요성이 약화되어갔던 것이 사실이다.

 

3. 중세시대의 구원론

  그렇다면, A.D.313년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구원관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A.D.313년 로마의 기독교공인은 사실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특히 이때에 가장 많은 기독교의 변질이 나타났다. 제국내의 태양신숭배자들(미트라교)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태양신숭배의식과 미트라교의 제사장 제도가 대거 기독교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내에도 교황과 추기경과 신부들이라는 사제계급이 생겨났으며, 고대 태양신 종교였던 바벨론의 세미라미스와 아들 담무스가 마리아와 아기예수로 둔갑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상숭배의식이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중세로마카톨릭은 의도적으로 평신도로 하여금 성경책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게하면, 자신들이 행위가 우상숭배행위인 것이 들통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오직 라틴어역본인 불가타역본만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 역본은 놀랍게도 교황제도를 용인하도록 변개한 성경구절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일반 평신도는 아예 성경을 읽지 못했고 심지어 신부들마저도 성경을 직접 읽을 기회마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시대의 구원관은 어떠했을까? 그것의 가르침은 2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또 하나는 공로(선행)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내용은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기는 하지만, 중보자인 사제들을 통해서 그것이 실현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사제들의 사죄선언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로마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해야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세례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로마카톨릭이 성경에서 벗어난 구원론을 주장하게 된 가장 큰 잘못은 공로사상을 넣은 것이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고해성사와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로란 사람이 고해성사와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에는 상처가 남아 있기에 그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공로에는 기도생활, 헌금과 구제생활, 봉사와 선행 그리고 고행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부족하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연옥이란 예수님을 믿은 자가 고해성사를 하고 세례를 받았으나 공로가 부족한 자가 죽은 다음에서 들어갈 중간 장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충분히 청결함을 입은 후에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족할 만한 공로를 쌓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주교인들은 잉여공로를 얻기 위해 많은 연보와 봉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성인들은 공로가 많아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에 남은 공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보를 하게 되면 그 성인의 남은 공로가 자신의 것이 되어, 죽는 날 연옥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부모가 연옥에 있을지라도 연보를 통해 면죄부를 사게 되면 자신의 부모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비싸더라도 면죄부를 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것이 중세시대의 구원관이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자. 중세시대의 구원은 은총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만 중간에 사제들의 중보역할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죽을 그날까지 사제에게 나아가 고해성사를 해야 했으며, 죽기 전까지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일평생 공로를 쌓기 위해 여러가지 힘겨운 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니 중세시대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4. 종교개혁시대의 구원론

  그때였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신부였던 루터(1484~1546)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도 세례를 받은 후였지만 아무리 고행성사를 해도 자신의 죄가 사함받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얼마만큼의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그는 수많은 고행의 방법을 동원하여 공로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진노가 두려워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성경을 직접 읽게되고 에라스무스가 발행한 헬라어성경을 직접 읽게 됨에 따라 그의 영적인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박사가 된 이후 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사람의 구원은 은총(사제의 선언과 세례)과 공로(선행)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됨으로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베드로성당의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또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지켜 본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면죄부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코 성당에 붙히게 된다. 이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일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된다. 그는 "독일 귀족에게 고함",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의 유수"라는 글을 통해, 참된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학을 완성해 간다. 그러나 이것들 중에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역시 "오직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론이 오늘날 전 세계교회를 또한 타락으로 몰고 가게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이어서 칼빈(1509~1564)이 등장한다. 그런데 칼빈은 루터와는 좀 달랐다. 칼빈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지에 대해 루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만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구원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기보다는 만세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구원과 멸망의 여부는 이미 만세전에 작정된 예정에 따라 되어서, 어떤 이는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며,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권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를 비롯한 전세계교회는 이러한 칼빈의 구원론 때문에 구원의 긴장의 끈을 내려놓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기초가 마련되게 되는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열심히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회개를 하는 등의 노력없이도 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본래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구원은 늘 안전하다는 것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믿음으로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예정해놓으셨기에 아무리 내가 잘못을 하거나 범죄를 한다 해도 하나님은 마침내 나를 보존하여 이끌어 천국에까지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절대주권, 만세전의 선택, 견인이라는 칼빈의 구원론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평신도였던 코른헤르트가 칼빈의 예정론과 견인교리에 제동을 걸고 나오게 된다.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작정에 의해서 된 것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마지막날 사람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기에 심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만세전에 멸망으로 예정된 자는 얼마나 억울하겠느냐는 것이다. 왜 자신에게는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지옥에 던져버릴 수 있겠느냐고 따지면 무엇이라고 답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 하나님 마음대로 누구는 천국에 보내고 누구는 지옥에 보낸다면, 그 하나님은 폭군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칼빈의 제자였던 베자가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도록 자신의 제자였던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성경을 다시 연구하다가 코른헤르트가 더 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는 그만 베자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하지만 워낙 칼빈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이 많았으니, 1618년 도르트종교회에서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만다. 다행히도 19세기에 들어와 요한 웨슬리가 나타나 수정된 알미니우스주의를 표방하여 이제는 나아지는 했지만, 그래도 칼빈주의는 여전히 전 세계를 휩쓸어 한국까지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칼빈의 이중예정과 견인교리는 성경에서 온 구원론일까?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개인구원예정이 없기 때문이요, 믿는 자라도 얼마든지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지워질 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3:5).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고전9:27에서는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오히려 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렇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장당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았지 결코 만세전에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주권하에 개인을 예정해놓으신 적이 없다. 개인예정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 개인사역예정일 뿐 개인구원예정은 없다. 아니 하나도 없다.

  그렇다. 종교개혁시대의 구원관을 정리해본다면, 그것은 "오직 믿음, 오직 예정" 구원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유난히도 믿음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회개할 필요도 없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갈 필요도 없는 이상한 구원관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니 믿는다해도 어려움이 찾아올 때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도 상관없는 구원론이 생겨버렸다. 하나님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큰 일이다. 그러다가 회개치 못하면 지옥인데, 자신의 구원을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

 

5. 성경적인 구원론

  그렇다면, 성경적인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가르쳐준 구원관이어야 한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구원의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교회 사도들이 이어받아 전한 구원관이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어야 하고, 날마다 죄를 회개하면서 이뤄가는 구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어떠한 구원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좁은 길 구원이다. 열매로서 심판받을 자처럼 준비해가는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배반하거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어도 이것은 구원의 여정의 시작일 뿐 구원은 완성은 아직 멀었음을 알고 오늘도 구원의 여정의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구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구원이다. 구원의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안도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는 구원이다. 늘 믿음의 행위가 있는 것을 살펴보아서 자신이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구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의 열매를 맺고,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사명에 충실해가면서, 천국에서 나에게 주어질 상을 바라보고 오늘도 열심히 달려가는 구원이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구원의 과정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결국에 천국에 골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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