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진목사의 마태복음강해(1~48장)_2011년

by 갈렙 posted Sep 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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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목사의

마태복음강해(1~48)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 목 차 -

마태복음강해(01)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1(1:1) 3

마태복음강해(02)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2(1:1-25) 7

마태복음강해(03)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3(1:8-25) 12

마태복음강해(04)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애굽으로의 피난(2:1-23) 18

마태복음강해(05) 애굽으로의 피난과 나사렛사람이라 칭하리라(2:31-23) 24

마태복음강해(06)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세례(3:1~17) 31

마태복음강해(07)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첫 제자들(1)(4:1-25) 37

마태복음강해(08)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첫 제자들(2)(4:1-25) 44

마태복음강해(09) 산상수훈(1) 팔복(5:1-16) 50

마태복음강해(10) 산상수훈(2) 천국과 율법의 상관관계(1)(5:17-30) 56

마태복음강해(11) 산상수훈(3) 천국과 율법의 상관관계(2)(5:31-48) 62

마태복음강해(12) 산상수훈(4)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6:1-18) 69

마태복음강해(13) 산상수훈(5) 천국백성의 재물관(6:19-34) 76

마태복음강해(14) 산상수훈(6) 천국백성의 판단과 분별력(7:1-29) 80

마태복음강해(15) 왕의 권능(1)-질병과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8:1-9:8) 85

마태복음강해(16) 왕의 권능(2) 사망과 장애까지 다스리시는 예수님(9:9-38) 91

마태복음강해(17) 12제자의 임명 및 파송(10:1-11:1) 97

마태복음강해(18)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두 갈림길(11:2-30) 103

마태복음강해(19) 바리새인의 배척-안식일 및 바알세불논쟁(1)(12:1-50) 109

마태복음강해(20) 바리새인의 배척-안식일 및 바알세불논쟁(2)(12:21-50) 112

마태복음강해(21) 천국의 7가지 비유(1)(13:1-23) 116

마태복음강해(22) 천국의 7가지 비유(2)(13:24-43) 120

마태복음강해(23) 천국의 7가지 비유(3)(13:44-58) 125

마태복음강해(24) 요한의 순교 및 오병이어와 물 위의 기적(14:1-36) 130

마태복음강해(25) 참된 정결함과 절대 믿음(15:1-39) 134

마태복음강해(26) 하늘의 표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16:1-20) 138

마태복음강해(27)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의 길(16:21~28) 145

마태복음강해(28) 그리스도의 변형되심과 게시 그리고 적용(17:1-27) 150

마태복음강해(29) 천국에서 큰 자와 용서의 범위(18:1-35) 155

마태복음강해(30) 이혼논쟁과 어린아이 그리고 영생의 길(19:1-29) 160

마태복음강해(31) 포도원품꾼의 비유와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20:1-28) 166

마태복음강해(32)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을 깨끗케 하심(21:1-22) 172

마태복음강해(33) 예수의 권위 출처 질문과 포도원 농부의 비유(21:23-46) 178

마태복음강해(34) 혼인잔치의 비유와 세금논쟁(22:1-22) 183

마태복음강해(35) 부활과 계명논쟁 및 메시야의 신분(22:23-46) 189

마태복음강해(36) 회개하지 않는 자가 받을 7가지 화(23:1-39) 196

마태복음강해(37)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1)(24:1-31) 201

마태복음강해(38)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2)(24:29-51) 209

마태복음강해(39)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3)(24:36-51) 214

마태복음강해(40) 열 처녀의 비유(25:1-13) 218

마태복음강해(41) 달란트의 비유(25:14-30) 224

마태복음강해(42)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 230

마태복음강해(43) 마리아의 도유사건과 마지막 만찬(26:1-30) 236

마태복음강해(44) 겟세마네기도와 베드로의 부인(26:31-75) 242

마태복음강해(45) 공회재판과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행보(26:57-27:10) 246

마태복음강해(46) 빌라도의 심문과 십자가의 처형(27:11-56) 251

마태복음강해(47) 예수님의 부활과 파송대명령(1)(27:58-28:20) 257

마태복음강해(48) 예수님의 부활과 파송대명령(2)(27:58-28:20) 260

 

 

 

 

 

 

 

 

 

 

 

 

 

445-160 화성시 반송동 107-8번지 제일프라자 8

대한예수교장로회 동탄명성교회 (031)613-2001

http://DongtanMS.kr



2011629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1)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1/2)

[찬 송]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1(신약1)

[키워드]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믿음, 왕통, 이삭, 솔로몬, 메시야, 약속, 족보, 신성, 인성, 다윗의 혈통,

 

1. 서론

우리에게는 4개의 복음서가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그런데 이 중에서 족보가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누가복음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이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사람의 아들(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족보가 없다. 종이나 하나님은 족보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는 예수님을 아담의 자손(62대손)이라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42대손)이자 다윗의 자손(28대손)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마태복음이 예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이자 유대인들의 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위함이다. 마태복음이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지만 특히 1차적으로는 기록할 당시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은 신약성경 중에서 구약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무려 129나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53, 간접적으로는 76,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마태는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표현을 무려 13나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므로, 시간적 순서로는 마가복음이 맨 처음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이 사복음서의의 맨 첫 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은 또한 메시야에 관한 유대주의적인 선민사항을 깨뜨리기 위험도 간간히 나온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왕으로 오시긴 오셨으나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메시야가 아닌 인류의 구속을 목적으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일부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실례로, 8장의 백부장의 하인 중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8:10-12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실제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야를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방(로마)에 대한 심판을 수행하고, 잃어버린 다윗의 왕권과 이스라엘의 옛 영화를 회복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그들의 잘못된 선민사상을 바로 잡고자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용어는 단지 4만 사용할 뿐, 천국이라는 용어를 무려 31회나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지상의 정치적인 메시야의 왕국을 꿈꾸는 그들이 잘못된 것임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메시야가 꿈꾸는 나라는 지상낙원이 아니라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으로 영토적인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 내재적이고도 초월절인 성경을 지닌 나라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마태복음의 내용구조

마태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주의해서 볼 것은 첫째, 마태복음은 시간상의 순서로 책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은 일종의 주제별 묶음책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은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된 복음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묶어서 집중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인 것이다. 즉 엄격한 시간상으로 연대기적 순서를 탈피하여,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주제와 거기에 관련된 사건들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5~7장은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강화(설교말씀)을 한 데 모아놓고 있다. 이어서 사건들이 8~9장에 걸쳐 나온다. 그러므로 연대기적으로 볼 때, 8~-9장의 기적의 사건들 중에는 연대적으로 산상수훈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제10장은 12사도를 임명하고 파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11~12장의 사건들은 10장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들이다.

둘째, 마태복음은 강화(설교말씀)와 기사(사건)부분이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소위 5대강화라고 하는 긴 강화가 5개가 있다. 산상수훈(5~7), 제자도(10), 천국의 비유(13), 천국시민의 생활자세(18), 감람산강화(24~25)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기사(기적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3. 마태복음 1장의 구조

마태복음 1장은 크게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부분은 1~17절까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둘째부분으로 18~25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첫째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1:1)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둘째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1:20,23)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다(1:3~4).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오늘은 이 중에서 마태복음 1장의 첫 부분으로서, 1~17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4.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17)

 

1)마태복음은 왜 족보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일까?(1)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왜 맨 처음 족보를 다루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분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42(14*3) 후손이자, 다윗의 28대 후손(14*2)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고, 다윗의 혈통을 이어서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원수를 멸하여 복을 받게 하고, 왕으로서 온 인류를 다스릴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2)왜 마태는 예수님을 특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라고 했을까?(1)

우리는 마태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기록한 이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 첫째로 이는 예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것은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알려주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하려고 그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이 말씀을 직역해보자.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한 책이라.” 그렇다. 왜 마태는 구약성경에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아담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구약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인 것을 독자로 하여금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어봄으로써,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은 크게 4가지다. 예언이 주어진 시간상으로 배열을 한다면, 첫째, 여자의 후손(3:15)으로 오실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의 후손(22:17~18)으로 오실 것이다. 셋째, 다윗의 후손(삼하7:12~16)으로 오실 것이다. 넷째,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7:14)이다. 이들 중에서 첫째와 넷째는 18절부터 25절까지 나오고, 둘째와 셋째는 1절부터 17절에 걸쳐 나오고 있다.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삼하7:12-16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특히 마태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처음부터 기록한 것은 유대인들을 상당히 염두해 둔 기록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믿음의 조상이자(8:37) 택함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의 시조로 보면서도,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 왕국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장 안정되게 세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둘째로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같은 존재이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과 같은 존재인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의 실제 둘째 아들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로서, 자신을 번제물로 예루살렘 모리아산 제단에 바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척이었지만 이방지역에 살고 있던 리브가를 아내로 취한 사람이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의 신부인 우리 인간들과 결혼하실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다.

또한 다윗의 실제 10번째 아들 솔로몬도 예수님의 예표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산에 성전을 지었고, 지혜의 왕으로 온 천하를 다스렸듯이, 예수께서 바로 성전인 교회를 세우고, 지혜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통치할 통치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 셋째는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르긴 따랐으나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처럼 그 혈통은 꼭 맏아들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긴 하지만, 그 혈통이 항상 맏아들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첫째아들은 이스마엘이었으나 이삭이 이어받았으며, 이삭의 첫째아들은 쌍둥이 형 에서였으나 혈통은 야곱으로 이어졌고, 야곱의 첫째아들은 르우벤이었으나 혈통은 넷째아들 유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유다의 첫째아들은 엘이었으나 넷째아들 베레스를 통해 이어졌고, 이새도 그의 첫째아들은 엘리압이었으나 실제는 8번째아들은 다윗에게 이어졌으며, 다윗도 그의 첫째아들은 암논이었으나 실제로 왕통은 10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이어졌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맏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의 혈통을 이을 만한 자가 아닐 경우에는 그 혈통이 차자에게로도 얼마든지 이관되어왔음을 통해, 메시야의 혈통이 믿음과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장자가 장자로서의 그 신분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장자의 축복이 주어졌으나, 그러한 믿음을 경홀히 여긴 자에게는 과감히 그 직책이 다른 차자에게로 넘어가게 했던 것이다(12:16-17).

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약속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선택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3:7, 4:28).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5. 결론

성경책 중에서 마태복음 1장만큼 심오한 부분이 드물다고 말할만큼 엄청난 내용들이 들어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과 순종을 배워야 할 것이며, 다윗이 하나님께 가졌던 마음 자신이 비록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기 중심에 하나님을 최고로 두고 살았던 다윗의 마음을 갖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다윗, 그는 왕이지만 또 다른 왕을 섬기고 살았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셨다. 그렇게 살았기에 그는 백성들에게 어진 임금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 왕이란 칭호를 받을만한 사람이다. 단순한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에 성막을 모셔와 그곳이 하나님의 도성이 되게 하지 않았던가! 또한 자기 왕궁보다는 하나님의 집을 더 잘 지어드리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던가!

우리는 뭐니뭐니해도 아브라함과 다윗을 많이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또한 그들의 아들들이었던 이삭과 솔로몬에게서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1176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2)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2)

[찬 송]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98장 예수님 오소서

99장 주님 앞에 떨며 서서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1~25(신약1)

[키워드]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약속, 족보, 42, 신성, 인성, 다윗의 혈통, 다말, 라합, , 밧세바, 마리아, 성령, 임마누엘, 처녀,

 

1.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로 태어나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족보상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다윗이라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가장 눈여겨 읽을 부분은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사무엘상하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인물이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이었던 이삭과 솔로몬을 통해 우리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분이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 1장부터 과 관련된 단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다윗을 제외한 그 어떤 예수님의 직계조상에게도 왕이라는 직책을 붙히지 않았지만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다윗에게 이라는 직책을 붙히고 있다. 그리고 그의 후손으로 왕이었던 자들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을 예수님이 나셨다고 말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출하러 왔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해 보더라도 예수께서 우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감추어진 비밀들과 아울러 그분의 탄생사건 가운데 감추어진 그분의 신성한 출생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 속에 감추어진 비밀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42대손이며, 다윗의 28대손이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의 조상 중에 빠진 이름들이 몇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주의해서 좀 더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마태기자는 왜 예수님의 족보를 왜 14대씩 3기로 나누었을까?(17)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를 통해 마태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것인지와 얼마나 활동하실 것인가를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역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진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굳이 14대씩 3기로 구분하여 기록하려 했을까? 그것은 ‘42’라는 숫자를 맞추고, ‘3’이라는 것을 맞추기 위함인 것으로 추정된다.

 

. 42라는 숫자의 비밀

42라는 숫자와 3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비밀을 풀려면 우선 민수기 33장과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곳에 가면 그 비밀과 힌트가 나오기 때문이다.

먼저, 민수기 33장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진을 쳤는데, 42차례 진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진친 곳이 라암셋이었고 7번째가 신광야, 10번째가 르비딤이었으며, 32번째가 가데스바네아, 42번째가 여리고 맞은편 모압평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43번째 진을 친 곳이 가나안 땅이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까지 이르는데 42번의 정거장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42번의 정거장을 거쳐 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42라는 숫자가 왜 나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데, 42는 마흔 두 달로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요, 1260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계산법대로 1달을 30일로 계산하면, 42달은 1260일이 되며, 그것을 연수로 환산하면 3년 반이라는 것이 나온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42달동안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서 이 세상의 완전수는 ‘7’이라는 숫자이므로, 이 세상의 끝날은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 42달동안 이 세상을 통치하므로 끝날 것임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 3이라는 숫자의 비밀

그리고 42대를 14대씩 3기로 나눈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14대씩 나누다 보니 3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14*3이요, 다윗부터 예수님까지는 14*2인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에도 3구분을 지은 것은 이것 자체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브라함부터 제1, 다윗부터 제2, 바벨론포로이후부터 제3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중 1는 아브라함에서 다윗출생까지의 시기로서, 이스라엘 역사의 태동 및 형성기의 족보를 말하고 있다(2~6a) 이것이 14대이다. 그리고 2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이르는 전성기 및 쇠퇴기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6b~11). 이것도 14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는 바벨론 포로 이후로부터 예수의 탄생에 이르는 회복기의 족보이다(12~16). 이것 역시 14대이다. 이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방법이 아닌가 싶다.

이 일을 위해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 중에 누락시킨 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부분에 가서는 3대를 생략하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어떤 부분에는 삼촌에서 조카로 후손이 계승되었다고 기록하고 한다. 즉 요람 이후에 웃시야 사이에 3대 왕(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생락되어 있다. 이는 요람의 처가 이세벨의 딸인데, 이로 인해 남유다가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서 3대를 버리셨음을 말해준다. 또한 여고냐에서 스알디엘로 기록됨은 중간에 시드기야가 빠진 것인데, 이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왕에 의해 세워진 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다.

 

 

2)왜 예수님의 족보에서는 유독 다윗을 이라고 기록하고 그의 자손인 수많은 왕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6)

1:6 이새는 다윗 (바로 그)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를 통해 마태는 예수님께서 왕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6).

이것은 바로 다윗이 왕이 된 것이 예수님의 계보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도는 다윗의 아들이라 불리웠을 뿐만 아니라(9:27), 부활승천후에는 다윗의 자손이자 뿌리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22:16).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과 왕이시라는 말이다.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그런데 이러한 왕의 축복선언은 사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다.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또한 야곱은 그의 12아들들 가운데 유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49:10)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러한 약속이 언제 성취되었을까? 그 최초의 사람이 바로 다윗왕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유다의 후손으로서 왕으로 책정된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성의 예표인 예루살렘을 가나안 민족인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그곳을 하나님의 도성이라 이름지었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것을 아들 솔로몬에게 부탁하지 않았던가? 또한 다윗의 시대처럼 평안하고 행복한 시대가 없었기에,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 중에서 최초의 왕이었던 다윗에게만 이라는 칭호를 붙혀준 것이다.

 

 

. 예수님의 족보에는 왜 기록되지 말았어야 할 여인들의 이름들을 기록되어 있을까?(3,5,6)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들어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부정한 여인 같지만, 전부 자기의 태를 통해 후손을 이으려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메시야의 조상의 반열에 동참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런데 이 4명의 이름을 가진 여인들은 다 똑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모두가 다 이방여인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모두가 다 재혼한 여인이라는 것이며, 셋째, 모두가 다 부정한 여인,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 라합은 가나안땅의 여리고성의 여인, 룻은 모압여인, 우리의 아내 밧세바는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방여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다말은 자신을 창녀로 변신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결국 시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낳은 재혼여인이었고, 라합은 기생의 신분으로서 여리고성의 정탐꾼으로 파견된 살몬과 재혼하였고, 룻은 여호와의 총회에 절대 못 들어오도록 규정된 경멸받던 모압여인이었지만(23:3, 1:4)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인 베들레헴사람 보아스와 재혼하였고, 밧세바는 헷사람의 아내로서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은 다음, 다윗왕의 마음에 들어 그와 재혼하였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왜 이 족보에는 사라나 리브가 같은 믿음의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부정한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족보에도 이방 죄인으로서 절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보기보다는 그들의 가진 믿음과 열망과 헌신을 받아주셔서, 어떤 이방인도 유대인들을 도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했음을 알리면서, 이방죄인이라도 얼마든지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 모두가 재혼한 여인인 것은 원래 남편이었던 마귀를 버리고 새 남편인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7:4).

그리하여, 마태복음이 오직 유대인만을 위해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10:16, 3:6)

10:16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3. 예수님의 탄생에 감추인 또 다른 비밀들(1:18~25)

우리는 이상의 예수님의 족보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구약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의 후손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한 편만을 말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에는 다른 한 면이 더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죄없는 분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요셉의 아들로 태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렇게 적고 있다.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왜 예수님은 요셉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했을까?(16)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할 죄없는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통해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도 또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유난히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직후부터 앞으로 메시야를 보낼 때에는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의 자식으로 보낼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다(3:15, 7:14)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경은 예수님을 요셉이 낳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처녀인 마리아가 낳았다고 말한다(16). 단지 요셉은 마리아의 법적 남편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의 아들이라 칭할 수는 있어도 요셉의 부성이 적용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성경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죄없는 인간이어야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할 메시야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해야 했던 것이다. 단지 여자의 태만 빌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여인이나 쓰임받을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라고 말이다.

 

 

2)왜 예수님을 남여의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했을까?(18,20)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를 위해서 성령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예수님을 기적적으로 잉태되도록 해야 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한 다음에 얼마 후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1:30-35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리고 한 10달쯤 흘렀다. 이제는 약혼한 마리아를 데려 올 무렵이 되자, 천사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꿈 속에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너와 약혼한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네 약혼녀는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태중에 잉태된 이는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려고 보낸 이로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지 않았느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음 임마누엘이라’”

 

 

4. 결론

이처럼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에는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시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제 정리해보자.

첫째, 예수님께서는 부계의 혈통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이시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죄없는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의 몸에 잉태되었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2011713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3)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3)

[찬 송]

89장 샤론의 꽃 예수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94장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1~25(신약1)

[키워드]

요셉, 마리아, 탄생, 순종, 예수, 임마누엘, 구원, 여호와, 하나님, , 속죄제물,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 요한복음

 

1.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비롭기만 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적인 출생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온 과정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성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와 하나가 된 놀라운 일,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의 조화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 그분은 인간 예수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감추어진 또다른 비밀들(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탄생하는 데에는 요셉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도 필요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한 줄기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오실 분이라는 두 줄기가 만나 하나를 이룸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서 요셉의 가문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후손(3;15)과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리라는 것 이사야의 예언(7:14)이 하나되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은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나타난 숨겨진 다른 비밀들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1)예수그리스도의 계보 속에도 또다른 숨은 비밀이 있으니, 예수님은 솔로몬 계열의 자손인 요셉이 나단 계열의 자손인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에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솔로몬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에는 다른 계보가 하나 더 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솔로몬이 아니다. 그는 나단이라는 다윗의 아들이다(3:31). 다윗이 헤브론에서 76개월동안 왕위에 있을 때까지는 그는 6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왕이 되었을 때, 그는 11명의 아들을 낳는데, 그 중에 3번째 아들이 바로 나단이다. 그러므로 나단은 다윗의 9번째 아들이자,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3번째 아들이다. 참고로, 솔로몬은 나단의 바로 밑의 동생이다(삼하5:14).

삼하5:14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요셉은 왕의 계열 즉 솔로몬의 계열의 자손이었지만(1:6~7), 누가복음에서 마리아는 일반인의 계열 즉 나단의 계열의 자손(3:31)임을 알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했지만 예수는 요셉에게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겉으로 볼 때 그분은 요셉에게서 나신 것 같지만, 실상은 마리에게서 태어나셨다(1:16).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였다.

요셉이 왕의 계열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왕의 자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편으로 평민의 계보를 잇는 마리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분은 또한 평민의 자손이기도 한 것이다.

 

 

2)예수님의 탄생은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의 합작품이었다

(1:1820,24~25, 1:26~38)

약속된 자손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기 위해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했다.

요셉으로부터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아들로 맞이할 결단이 필요했고, 마리아로부터는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 때문에 부정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니님은 왕의 자손이어야 하기 때문에 요셉이 필요했고, 또한 처녀의 몸이 있어야 했기에 또한 마리아가 필요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약혼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 가브리엘 천사는 두 사람에게 찾아가서 앞으로 진행되려 하는 일을 설명하게 된다.

 

첫째, 요셉의 순종이 필요했다.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꿈 속에 요셉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때 요셉은 고민하고 있었다(1:19). 약혼녀를 데려와야 할 시점에 보니, 그녀가 곧 아이를 임신해 출산할 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약혼녀가 잉태하였으니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돌에 맞아 죽도록 내어주는 것이다(22:23-24). 그러면 요셉은 이혼한 사람이라는 전력(불명예)를 쌓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혼한 사람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려 했던 것이다(24:1). 요셉은 그때 마리아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그녀와 파혼하는 것이었다.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그녀를) 가만히(비밀히) 끊고자 하여(파혼하고자 하여)

22:23-24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런데 파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요셉에게는 신중함이 있었다. 모든 일에 너무 빨리 행동하지 말라. 조금 천천히 하고 주님께서 들어오실 기회를 드리라. 적어도 하룻밤을 더 주님께 드리도록 하라.

그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요셉에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1:20)” 결국 어떻게 했는가? 요셉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좀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다. 약혼만 한 상태에서 결혼하기 전에 약혼녀로 하여금 임신케 만든 장본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천사의 고지대로 그는 그녀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둘째, 마리아의 순종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손인 요셉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인 마리아도 필요했다. 특별히 그는 다윗의 자손인 처녀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사실 예수님을 낳을 처녀는 3;15에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되었었다. 그 약속은 예수님이 오시기 4천년전의 약속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오실 때가 가까이 오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그 여자의 자손이 처녀여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려주셨다(7:14).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갖춘 처녀가 당시 갈릴리 나사렛동내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고향을 떠나서 요셉과 한 동네(나사렛)에서 살고 있었고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직접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파송한다. 그리고 그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터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을 것까지 가르쳐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다윗의 왕위를 받을 아이로서 그의 나라가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했다(1:30-33).

1:30-33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러자 이번에는 마리아가 또한 고민에 빠졌다. 어찌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임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1:35)” 그리고 이어서 처녀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6개월전에 이미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일도 이야기해 주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 없느니라(1:36~37).”

그러자 마리아도 그녀에게 성령께서 자신의 태를 빌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시키실 것을 받아들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8)”

 

셋째, 이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을 착상시켰다.

사실 요셉이나 마리아의 순종은 예수를 잉태함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오직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사 그렇게 잉태시켰기 때문이다(1:18,20, 1:35). 령님이 없이는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든지간에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순종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라. 우리의 순종은 의미가 별로 없으며, 단지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무언가를 성취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3)메시야의 이름이 예수임마누엘임을 통해 예수님의 잉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21,23)

 

. 메시야의 이름이 예수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비밀(21)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실 가장 처음에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지시를 받은 이는 마리아였다. 그녀는 잉태되던 그 날 천사로부터 직접적으로 그러한 지시를 받았다. 그 뒤 천사는 꿈속에 요셉에게도 찾아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는 요셉에게만 알려주었다. 이는 그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였다. 예수님에게는 자기 소유의 백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의 핵심은 구출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오시는 이유는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정치적인 구원도 아니요, 배고픔에서 건져주는 경제적인 구원도 아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죄가 없어야 하나님께서 예비한 천국에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4:8, 13;16), 예수아라는 이름으로서 당시에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지녔던 모세의 후계자는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실 분임을 알게 된다. 그 내용이 바로 히브리서 4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호와는 구원자이시다.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믿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여호와로만 아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에 무엇인가를 더해진 것이다. 이는 곧 여호와가 구원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예수님도 따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한 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사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인 것이다(1:14). 하지만 그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이 세상에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있다고 여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메시야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비밀(23)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처럼 우리는 태어나실 아기의 이름이 예수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여호와께서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임을 알 수 있지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도 그것이 확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7:14).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되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개역성경처럼 번역하여 서술식으로 이해해 왔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는가? ‘임마누엘의 원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단지 육신을 입은 시기인 것을 알려줄 뿐이지, 그분이 육신을 입기 전에는 영원전부터 홀로 계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다. 그분은 시간이 있기 전에 시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것이다. 우리가 혹시 그분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더라도 그분을 그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세례요한도 그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몰랐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신 사촌이시다. 하지만 세례요한도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엇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인 것을 말이다. 세례요한은 말했다. 그분은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말이다(1:15).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분은 한 편으로는 마리아의 아들로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지만,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일 뿐, 그분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서만 하실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하심으로 당신이 곧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고, 바다 위를 걸어오시기도 하셨고, 죽은 자의 영혼을 다시 불러올리어 살려주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더 알고 싶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요한을 통해 한 권의 책을 더 쓰도록 하셨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사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편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으며(8:58), 그분이 한 편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시지만 또한 다윗의 뿌리라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된다(5:5).

그러므로 그분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2천년전의 일일 뿐, 그분은 만세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분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으로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정확히 그분의 본질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1:1-3,14). 그분은 세상만물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또한 B.C.8세기경의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야 했을까?

그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다. 우리 인간들이 범죄해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죽어주실 희생제물을 필요로 하셨는데, 사람이 범죄했으니 사람제물이 필요했던 것이고, 대신 죽어줄 희생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피가 없다(24:39). 사람이어야 피흘릴 수 있고, 피를 흘리고 죽어야 우리가 죄가 사함받을 수 있기 때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17:11, 10:45)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3. 결론

마태복음에 나오는 부계혈통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약속의 자손이자 왕의 자손임을 우리에게 증거해준다. 한편 누가복음 3장에 나와 있는 모계혈통의 족보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도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아들을 잉태케 함으로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처녀의 태중에 임신케 하셨다는 사실을 공부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바 그분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요,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의 몸에서 탄생한 죄없는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이 예수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통해 그분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 둘째, 그분이야말로 4천년동안 이어온 약속의 자손이 되시며, 여자와 처녀의 후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우리 죄인들이 구출되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자. 그것이야말로 복음중의 복음이요, 이것이 하늘과 땅 사이에 일어난 가장 거룩한 사건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2011720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4)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애굽으로의 피난

[찬 송]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2:1~23(신약 2)

[키워드]

동방박사, 유대인의 왕, 나사렛, 유대땅 베들레헴, 미가, 떡집, 생명의 떡, 황금, 유향, 몰약

 

1. 서론

우리는 지난 3주에 걸쳐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와 그의 잉태에 관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확인했고, 이어 다윗의 자손인 마리아의 태를 통해 여인(처녀)의 자손으로 잉태되셨음을 살펴보았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솔로몬 계열 즉 왕의 계열인 요셉나단의 계열 즉 평민의 계열인 마리아가 약혼을 하게 됨으로서, 예수그리스도는 약속의 자손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시절에 관한 부분을 마태복음 2장을 통해 살펴봄으로서, 그분은 한 편으로는 모든 사람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왕으로 오신 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 평범한 서민으로 오시어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나셨음을 같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비밀

 

1)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다(B.C.6514).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그분이 태어나신 직후 마굿간에서 벌어진 사건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2가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본문은 아기 예수님이 있던 곳이 어느 여관집의 구유였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요셉이 베들레헴에 어느 집에 일정한 거처를 마련한 곳 즉 어느 집에 머물러 있었을 때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11), 둘째, 동방박사들이 태어난 그 아기께 경배했다고 말하고 하는데, 아기라는 단어가 갓난아기를 의미하는 네피오스(infant)’가 쓰인 것이 아니라 파이디온즉 어린아이(child)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2:11).

2:11 () 집에 들어가 ()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러므로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8일이 지난 후 할례를 받으시고 난 뒤, 몇 달을 지난 다음인데 적어도 2년은 되지 않은 어느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2장의 예수 탄생에 관한 기록을 통해, 마태복음은 역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누가복음의 탄생의 기록(2)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자라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예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한 마가복음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록한 요한복음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언제(시기) 어디에서(장소) 탄생하셨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를 치리하고 있던 어느 때(B.C.27~A.D.14)였는데,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B.C.8~6) 첫번째 한 호적령이 반포되는 시기였다. 그때 당시 유다땅은 헤롯대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B.C.37~4). 그리고 그 때는 봄이었다. 밤에 목자들이 양떼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철 우기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하늘의 이상한 별을 따라왔다는 동방박사들의 증언을 빌리자면, 그때 하늘에서는 별들의 이상한 행보가 있었던 시기다. 결국 천문학자들을 포함한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하여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시기가 B.C.6514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아니했다. 또한 왕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에서도 태어나지 아니하고,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의 어느 여관집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어느날 한 동네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10달 정도가 지난 어느날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천사의 고지로 인해 요셉은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자기가 못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을 각오하고s는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기를 낳기까지 그녀의 정절을 지켜주었다.

드디어 아기가 출산할 시기가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그들은 이방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지만 성경의 예언에 따라, 그 아이가 다윗가문의 아이로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144Km나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그때였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B.C.27~A.D41)가 갑자기 세금징수를 위하여 인구조사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 본적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호적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 호적신고를 하기 위해 아내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2:1-5).

2:1-5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한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적하러 고향에 오다보니 있을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집의 마굿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때에 그 아기가 태어났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아이의 탄생을 축하해주는 이가 없었다. 누가 태어났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는가? 그러자 하나님은 그때 밤에 깨어있는 사람들 즉 그 밤에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 아기의 탄생을 알려주었고 가서 경배하게 하였다. 당시 목자들은 최하류층에 속한 신분의 사람으로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죄인과 천하고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왕이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부모는 그 아기에게 할례를 행한 다음, 그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가르쳐준 대로 예수라고 지었다(2:21).

 

이처럼 하나님은 아기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당시 천하에서 가장 권력있는 자를 움직이신 것이다. 로마황제 아구스도의 욕심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황제는 천하에 호적령을 내렸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700년경에 미가라는 선지자(B.C.740-695)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태는 구약성경을 당시의 세계적으로 공용어로 번역한 70인헬라어 성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2:6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가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이 또한 그 원어적인 의미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은 베들레헴이라는 말이 바로 떡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느 공생애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다음에,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임을 말씀으로 전파하셨던 사실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가?(6:47-51).

6:47-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렇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을 예수님은 떡이라고 표현했는데, 우리가 어디 가서 그 떡을 얻을 수 있겠는가? 떡을 얻으려면 떡집에 가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떡집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2)태어나신 아기 예수께서 목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다(2:1~12)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가 얼마의 시간이 흘라가고 있었다. 요셉은 호적만 하고 그냥 자신의 고향으로 가지 아니했다. 산모를 이끌고 자신의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무리가 될 것임을 알았던 것인지는 모르나, 그는 베들레헴에 어떤 거처 즉 집을 마련해놓고 거기에서 일정기간 머물렀다. 그리고 난지 팔일만에 베들레헴에서 아기 이름을 예수라 지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마리아는 40일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정결예식까지 거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2:1을 보자.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이미 태어)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태기자는 말한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서 분봉왕이라는 사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니, 당시 유다나라의 분봉왕 헤롯(B.C.37~A.D.4)은 로마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온갖 뇌물을 주고 그 황제의 환심을 사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사람도 아닌 이두메출신의 에돔족속이었지만 유대분봉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러분은 분봉왕 헤롯이 누구인지 아는가? 그가 바로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을 짓고 있던 바로 그 헤롯대왕이다.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에게 성전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 성전은 무려 46년만(B.C.20~A.D.26)에 완공을 보게 되는데(2:20),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는 헤롯이 성전공사를 시작한지 14년째 되는 해였다(B.C.6).

그런데 보라. 그때 동방으로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인 동방에서 그의 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가, 다 와서는 그만 그 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가 당연히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 아이는 헤롯대왕의 아이나 자손일 것을 짐작하고 그리고 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커다란 잘못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왕궁에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의 왕으로 (이미)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헤롯대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소동하게 되었다. 헤롯대왕은 자기 집에 아기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고, 예루살렘 사람들자기를 구원해줄 약속된 그리스도가 혹시 진짜 태어나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가 탄생한 사실을 이방인은 진즉 알고 찾아왔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방의 박사들(, 마고스) 점섬술가들 내지는 천문학자들은 저 동방의 땅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부터 무려 805Km나 떨어진 유대 땅까지 온갖 위험을 무릎쓰고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으면 태어난 것이지, 왜 동방박사들은 자신이 이방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 먼 곳을 여러 위험을 무릎쓴채 찾아왔을까? 그들은 낮에는 쉬었을 것이고 밤에만 별을 보고 따라왔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가지고 온 예물을 통해 그들이 왜 그 먼 거리를 위험을 무릎쓰고 왔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탄생한 아기 예수께 경배하면서 무엇을 드렸는가? 그것은 3가지 예물이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그것이다. 이 예물은 훗날 헤롯대왕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자, 베들레헴을 떠나 애굽에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을 때에 무려 36개월동안 애굽에 체류하면서 세 식구가 써야 할 경비로 충당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그 예물이 상당히 고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우선 예수님의 탄생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소식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의 탄생은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밤에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을 유심히 생각해보라.

2:10-12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분의 탄생은 하늘의 왕이 그들의 백성을 위하여 오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만 경배를 받고 환영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서도 경배받으시고 환영을 받아야 마땅하다.

동방박사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짐작했을까?

그들은 천문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늘에 심어놓은 해와 달과 별들의 특별한 운행을 보고 찾아왔던 것이다(1:14).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들(와 계절들과 날들과 해들를 이루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두어서, 하루가 낮과 밤으로 나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행을 통해서 징조들(signs=표적들)과 계절들(seasons)과 날들(days=일자)과 해들(years=연한)을 나타내는 표가 되게 하셨다. 여기서 날과 계절과 해는 지구와 태양과 움직임을 통해 나타나는 것임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밤과 낮이 바뀌면서 하루가 가고, 그것이 30일을 채우면 1달이 가고, 3달을 채우면 계절이 바뀌고, 그것이 또 4(12)을 채우면 1년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의 운행 속에 한 가지를 더 두셨던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이 어떤 표적과 징조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를 구원하러 그렇게 약속한 바로 그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탄생을 유대인들만 알아서도 안 되며, 베들레헴 사람만 알아서는 안 된다.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소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에도 하늘의 별들의 징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분이 죽던 날에는 개기일식이 3시간동안 있었다는 것(27:45)다시 오실 그 때에는 해와 달과 별들에 어떤 이상한 징조가 또 있을 것(24:29-30)을 기록하고 있다.

2: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7:45 제육시(정오)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오후3)까지 계속되더니

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죽음에 일월성신에 이상한 징조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한 번 더 아주 강한 징조가 우리에게 있을 터인데, 그것은 그분이 다시 오실 그때쯤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행성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주의해야 한다. 미항공우주국의 발표를 무시하지 말라.

 

동방의 박사들은 사실 천문학의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일월성신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일들에 관한 점을 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하늘의 이상한 별들의 움직임은 그들을 완전히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그분의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안타까운 소식이 될 것임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미있는 3가지 예물을 준비했던 것이다.

첫째, 그들은 맨 처음 황금을 준비했다. 불순물이 하나도 첨가지 아니한 정제된 순수한 황금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는 죄로 오염되지 아니한 순결한 그분, 신성한 본성만을 가지신 분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경배하길 원했고, 그분에게 황금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유향을 준비했다. 우유빛 나는 향기로운 액체를 준비했다. 이것은 그분이 생애가 깨끗하고 향기로운 삶이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된 본성이 없이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동안 죄를 짓지 아니하고(즉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대로 행했던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그들은 몰약을 준비했다. 이는 죽은 자의 시체의 몸에 바르는 고가의 향수였다. 그들은 그 왕이 모든 인류를 위하 죽어야 할 사실도 알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이러한 동방박사들의 예물처럼,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가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순결한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을 믿는다.

 

그런데 보라. 이 유대인의 왕이자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소식을 듣고도 어떤 사람도 그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1:9-11)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다. 세상을 지은 조물주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구원하러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그분의 땅에 와도 그분의 백성들인 우리 인간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환영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주어도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잊지 말고 감사하자. 그분이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오시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소식을 보았고 또한 그들이 왜 왔는지도 들었다. 특히 당시 종교지자들인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그분이 예루살렘에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도 그분에게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밤에 양떼를 치면 목자들을 그리로 보냈을까?

 

 

 

4. 결론

놀랍지 않은가? 과연 누가 그분을 경배하였는가?

태어난 직후에는 유대인들 중에는 천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목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늘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자신을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바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셨다.

한편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왕도 되실 분이었기에, 하늘의 일월성신의 징조를 보고 달려온 이방인의 고위관리의 경배도 받으셨다. 그들이 바로 동방박사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관념 때문에 아기예수님은 죽음에 처할 뻔 했으며, 2살 아래의 어린 아기들만 죽어나갔다. 그래서인지 천국에 가면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서 직접 키우신다고 말하는 간증을 많이 듣게 된다. 예수님 때문에 어린 갓난아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2011727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5) 애굽으로의 피난과 나사렛사람이라 칭하리라

[찬 송]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2:13~23(신약 2)

[키워드]

법궤, 론 와이어트, 고고학, 예수님의 피, 동방박사, , 율법, 헤롯, 베들레헴, 나사렛, 호테르, 네쩨르, 가지, , 줄기, 이새,

 

1. 서론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 예수님의 왕의 족보와 예수님의 동정녀마리아의 잉태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동방박사들의 경배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어 오늘은 예수님의 애굽으로의 피난과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영상 하나를 보겠는데,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신 분이라는 고고학적 간증을 들어보시겠습니다. 이 간증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생활했던 광야와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최초로 발견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의 간증입니다.

론 와이어트는 모세가 만든 법궤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료들을 수집한 결과 그 법궤가 골고다 언덕의 예레미야동굴에 있을 것이라는 확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예레미야동굴을 답사했습니다. 2500년이 세월이 흘렀기에 지진으로 무너진 바위를 깨뜨리고 그 동굴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법궤가 있었고 천정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당시 지진으로 인해 갈라졌던 바위틈이 있었고, 그 틈새로 피가 새어들어와서 법궤위에 떨어졌고, 그 떨어진 피가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긁어다가 이스라엘의 저명한 혈액연구소에 보내 사람의 체온상태에서 48시간동안 배양액에 담가두었는데, 그 피가 살아있는 피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모든 말라버린 피는 죽은 피로서 거기에서는 어떠한 염색체도 얻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피는 살아있어서 그 피 속에서 염색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염색체의 수가 23개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염색체의 수는 총 46개인데, 22개의 상염색체로 총44개에다가, 성염색체(XY) 두 개를 합하여 46개가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 위에 떨어져 있던 피의 염색체는 총 23개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음을 고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없이 성령으로 마리아의 태 속에 잉태된 여자의 후손이자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탄생한 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애굽으로의 피난과 돌아옴

 

1)동방박사의 잘못된 판단착오로 인한 어린 아기들의 비극적인 죽음

여러분은 아기예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으로 인하여 아기 예수님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해 죄없는 2살박이 아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다.

초림의 예수님의 탄생을 이방인들이 더 사모하고 더 먼저 알았듯이 재림하시는 예수님도 이방인들이 더 사모하고 더 먼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의 조그마한 실수 때문에 아기 예수님께서 죽임당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으며, 2살 아래의 그 지경의 모든 아기들이 모두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의 징조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유대땅 어느 동네에서 나실 것인지까지는 잘 몰랐다. 그들에게는 성경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이 없었기에 분별력이 없었다. 그래서 곧장 예루살렘으로 갔다. 유대인의 왕은 왕궁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생각을 무심코 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자기나 자기의 자손이 아닌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헤롯왕은 극도로 분노했으며 결국 태어난 아기 예수를 죽일 계책을 마련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동방박사들에게 아이를 찾거든 자기가 경배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거짓말을 했다(2:7-8).

2:7-8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천사를 보냈다. 꿈 속에서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은 동방박사들은 다른 길을 통해 자신의 지방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헤롯대왕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은(기만당한) 줄 알고, 심히 분노하여 사람들을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기(남자 아기)들을 그때를 기준으로 하여 2살 아래까지 싹 다 죽여버렸다. 이로 인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31:15, 2:18).

3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라마는 베들레헴지경의 마을이며, 라헬이 죽어 묻힌 장소가 베들레헴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는데 그때 그녀가 묻힌 장소가 베들레헴이었다.

 

2)바른 인도 - 초자연적인 하늘의 이상과 기록된 성경말씀 간의 조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하늘의 이상과 기록된 성경말씀 둘 다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이방인들조차 뭔가 알아차리게 했던 하늘의 징조도 필요하고, 또한 이미 기록된 성경말씀도 필요하다. 이 둘의 조화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성경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2장을 보라. 성경을 달달달 외우고 있던 종교지도자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과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베들레헴에 갔었는가? 이처럼 지식은 자기를 높이며 교만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대부분이 지식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를 높히려 한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이용해 자기를 높이는 데 이용하지 말고, 성경말씀을 보고 그분을 높이고 경배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도 확실히 성경이 나의 인생의 표준지침서임과 성경이 불변의 진리임을 믿는다.

둘째, 더불어 우리에게는 하늘의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나치게 하늘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아는지 모른다. 그들은 꿈과 환상과 기적적인 치유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신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 이방인들에게도 나타나는 기적같은 사건의 체험, 환상, 꿈들을 결코 무시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기록된 성경말씀 외에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기꺼이 참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일 때 말이다.

하지만 하늘의 이상만을 추구하지 말라. 그것은 동방박사들의 실수처럼 인간의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마저 삼천포로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죄없는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죄없는 자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과연 그 징조가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성경을 지지해주는 것인지 살펴야 할 것이다.

 

 

 

3. 나세렛 사람이라 칭함받으리라.

 

1)애굽으로의 피난은 왜 필요했었나?

첫째, 헤롯이 아기예수를 죽이려 하니, 헤롯의 통치영역을 피해 달아나서 안전한 곳으로 가기에는 애굽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 즉시 주의 천사인 가브리엘을 요셉에게 보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의 꿈속에서 말하기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2:13)”

요셉은 즉시 순종했다. 꿈을 깨자마자 밤중이지만 일어나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다.

둘째, 이것을 통해서 구약시대의 선지자(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될 수 있었다(11:1).

그리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11:1)”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셋째, 이와같은 사실은 영적으로 모든 사람이 겪게 되는 신앙의 과정과도 흡사하다.

애굽에는 바로가 있었다. 애굽은 마귀가 통치하는 영역을 상징하고, 바로는 사탄마귀를 상징한다. 아기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 다음 다시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흡사하다.

우리 모든 인간은 이처럼 마귀의 지배에 들어갔다가 탈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하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왜 요셉의 가족은 베들레헴으로 귀한하지 않고, 나사렛에서 가서 살게 되었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났을 때(B.C.), 하나님은 죄없는 어린 아기를 죽인 헤롯대왕을 치셨다. 그는 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주의 천사 가브리엘을 시켜, 요셉에게 이스라엘 땅 안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2: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은 항상 즉시 순종했다. 그는 즉시 밤에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 안으로 들어갔다. 성경학자들은 그가 애굽으로 피신한지 36개월만이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요셉의 가족은 왜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을까?

첫째, 헤롯대왕을 이은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도 폭군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22).

요셉은 헤롯대왕이 죽었으나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매우 악한 자였고 폭군이었기 때문에 그는 유대땅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꿈에 그를 갈릴리지방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때 당시 이스라엘 땅은 헤롯대왕의 3아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헤롯안디바는 갈릴리지역과 베뢰아지역의 분봉왕으로, 헤롯아켈라오는 유다땅과 사마리아의 분봉왕으로, 헤롯빌립은 이두메지역과 요단동편지역의 분봉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보다 더 부드러운 통치자였언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던 그의 동네로 다시 가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로 인해 선지자들이 말한 바, 그가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리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될 수 있었다(23)

이에 요셉의 가족은 원래 자기가 살던 마을 즉 갈릴리의 나사렛, 자신과 마리아가 원래 살던 동네인 나사렛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에, 나사렛출신의 예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 예수님 당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 좋은 말이 아니었다. 천한 지방 출신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그의 친구 빌립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1:45-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곧 그가 천한 신분의 사람이, 천한 지방 출신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영적으로 이 말은 엄청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지만 실제는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해줌과 동시에 엄청난 핍박과 고난이 닥쳐온다해도 그분은 절대 제거될 수 없는 불사조와 같은 존재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많이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가 나사렛사람이라고 칭함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확실히 마태복음의 기자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이, 그분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먼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곳이 신약성경에 19군데 등장한다. 그리고 동네로서 나사렛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총 12회다. 나사렛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의외로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

구약성경의 예언 가운데 그분이 나사렛사람이라고 칭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 어디인지 성경학자들도 좀처럼 쉽게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 구약의 나실인이라는 제도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실인의 규정(6:1~8)을 보면, 예수님은 나실인처럼 사시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실인은 제사장의 아들처럼 출생에 의하지 않은 자라할지라도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자신을 하나님을 드려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자였는데, 그들은 최소한 3가지 규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첫째,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즙이나 포도씨나 껍질까지라도 즉 포도자체를 먹지 말 것. 둘째,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 셋째, 대제사장의 규정처럼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3가지 규정을 잘 지켰다는 성경구절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세리가 베푼 잔치 자리에 참석하여 포도주를 즐긴 분이라고 나온다. 또한 그의 첫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혼인잔치집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친구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그때에 예수님은 시체에 가까이 하시고 만지기도 하셨다.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그분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울 것이라는 말씀은 예언서(선지자)에서 찾아봐야 한다. 나도 한 때는 그 비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가, 지난 2006년 성지순례를 갔을 때, 비로소 히브리대학에 다니고 있던 한국인 가이드에게서 그 비밀을 듣게 되었다. 히브리대학의 교수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것은 나실인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언서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B.C.733년경,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인 11:1의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11:1-5 이새의 줄기(밑둥, 그루터기)에서 한 싹(호테르)이 나며(나오며, 나타나며) 그 뿌리들에서 한 가지(네쩨르)가 나서 결실할(열매를 맺을)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우리도 알다시피 봄이 되면 여러 새로운 줄기들이 나무에서 새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무에서 올라오는 줄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2가지로 부른다. 나무 줄기에서 올라오는 것을 (호테르)’라고 부르지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것은 줄기(네쩨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그분이 네쩨르(뿌리에서 나온 줄기==가지)’라는 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 나무(감람나무)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온 가지 그가 바로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바로 네쩨르’, 즉 그분이 바로 나사렛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사렛이란 뜻은 바로 예수께서 곧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바로 올라운 가지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인가 다윗의 근본이신가? 1:1에 보면,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절반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자손을 만드신 근본인 하나님으로 직접 나오신 분이시다. 즉 그분은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을 있게 만든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곧장 나오신 분이신 것이다.

 

감리교목회자 평강교회의 이동휘 목사는 네쩨르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11:1의 말씀을 현대역으로 번역하면, “다윗 왕족의 혈통은 잘라진 나무처럼 끊어질 것이지만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오듯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이다. 여호와의 성령께서 그에게 자기 백성을 다스릴 지혜와 지식과 재능을 주실 것이며 그는 여호와의 뜻을 알고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길 것이며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나무는 감람나무(올리브)를 말합니다.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온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감람나무에는 줄기에서 나온 가지뿌리에서 나온 가지가 있습니다. 줄기에서 나온 가지는 히브리어로 호테르라고 합니다. 보통 줄기와의 접촉 부위가 두툼한데, 이는 목자의 막대기로 사용됩니다. 목자는 양 떼를 인도할 때 호테르를 던져서 방향을 알려줍니다. 또한 호테르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목자는 호테르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사자나 곰 같은 맹수가 양떼를 공격하려고 달려들면 호테르로 맹수를 때려잡습니다. 목자가 호테르의 두툼한 쪽으로 맹수의 머리를 가격하면 맹수는 한방에 곧 나가떨어집니다.

한편, 뿌리에서 나온 가지네쩨르라고 합니다. ‘네쩨르는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원을 그리며 자라는데, 한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라 줍니다. 남은 한 두 개의 네쩨르어린 묘목으로 사용하는데, 이를 어린 감람나무라고 부릅니다.(128:3) ‘네쩨르는 어린 묘목을 위해 한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라서 목자의 지팡이로 사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풍습이었습니다. ‘네째르지팡이로서 허리에 차는 막대기’(호테르)보다 길었습니다. 줄기에서 나온 호테르양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목자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뿌리에서 나온 네쩨르어린 묘목’, ‘어린 감람나무로서 죽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다시 살아남은 유다지파 출신의 다윗 왕조, 곧 메시아 왕조를 상징합니다. 특히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인 메시야는 밑동이 잘릴지라도 불사조와 같이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다윗의 왕가에서 나실 예수님은 감람나무의 네쩨르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돌감람나무의 네쩨르에 비유했으며, 다윗을 참감람나무의 네쩨르에 비유했습니다. 사울은 밑둥이 잘리면 죽고 마는 돌감람나무의 네쩨르처럼 하나님이 한 번 치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밑둥이 잘리면 더 왕성히 자라나는 감람나무의 네쩨르처럼 어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의 네쩨르는 어려움을 당해도 심판을 당해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메시야의 왕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역에서 다윗 왕족의 혈통은 잘라진 나무처럼 끊어질 것이지만, 줄기에서 새 순이 돋고 뿌리에서 새 가지가 나오듯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호수아 당시, 기브온 거민들이 여리고성을 단숨에 정복한 이스라엘이 두려워 이스라엘의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죽이지만 말아 달라 부탁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의 영원한 종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성전에서 나무패며 물을 긷는 사람들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9). 그런데 사울 왕이 날로 추락하는 지지도를 만회하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는 기브온 거민들을 학살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죄를 사울의 때에 심판하지 않고 다윗의 때에 심판했습니다. 다윗 왕 시대에 연거푸 내리 3년 동안 기근이 발생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 원인이 사울 왕의 기브온 사람 학살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하 21:1)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문제 해결을 위해 소원을 묻자 사울 왕가의 남은 자손 일곱을 처형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삼하21:1-14). 다윗 왕이 그들 소원대로 시행하자 비로소 기근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가는 비록 왕가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는 돌감람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서 사울은 돌감람나무의 네쩨르로 심판을 받으면 감당할 수 없지만, 다윗은 참감람나무의 네쩨르로 심판을 받아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의 때에 이 죄를 심판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뿌리에서 자라나신 감람나무의 네쩨르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받아도, 시련을 받아도 더 왕성하게 자라는 참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감람나무는 밑둥이부터 잘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더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나셔서 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가 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역사는 감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새 가지’, ‘네쩨르의 역사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감람나무의 네쩨르로서 불사조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다윗 왕의 계보에 든 이새의 뿌리에 나오는 네쩨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1-17에서 이새가 다윗 왕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왕을 낳았다는 계보는 오직 이새뿐입니다. 오직 이새가 낳은 다윗 왕의 계보에 드는 사람만이 영원한 왕이 계보를 잇기 때문입니다. 이 계보에 드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 죽어도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이새의 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죽어도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네쩨르입니다. 네쩨르는 세상에서 비록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 앞에 유명한 자요, 죽은 자가 같으나 영원히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9-10)들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성도 여러분,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 말씀이 그 혀에 있도다.’는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시는 존귀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항상 함께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

 

한편 마태기자는 말하기를 , 예수님께서 나사렛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한 사람의 예언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 말고도 다른 선지자들도 예수님께서 뿌리에서 올라운 가지 혹은 싹이라는 사실을 예언했음을 말해준다. 그럼, 이사야 말고 누가 또 그와 비슷한 예언을 했을까? 이러한 예언들에는 예레미야의 예언스가랴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다.

4:2 그 날에 여호와의 싹(가지,=쩨마흐)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요네크=잔가지, 연한 순, 새싹)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쉐레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째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33:15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쩨마흐)을 나게 하리라

 

 

 

 

4. 결론

예수님은 자라서 나사렛사람이라 칭함을 받으셨다. 그분이 바로 네째르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분이 돌아가실 때에도 죄패에 뭐라고 기록되었는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졌다(19:19).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그분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만약 당신이 히브리어를 모른다면 다윗의 근본이신 그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바로 태어나신 분임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조와 같은 분임을 누가 과연 알고 있었을까?

201183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6)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세례

[찬 송]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0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0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3:1~17(신약 3)

[키워드]

회개, 천국, 세례요한,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 천거, 어린양, 요단강

 

1. 서론

회개와 천국, 물세례와 성령세례 및 불세례, 그리고 세례와 죄용서 그리고 의로움, 세례요한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천국과 예수님 . 우리는 오늘 마태복음 3장을 통해 어마어마한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천국은 원문으로 볼 때 하늘들의 왕국이라는 장소적이며 초월적이며 미래적이고 통치적인 개념으로 마5-7장 산상수훈과 마13장의 천국비유장에 가서 자세히 배우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 천국의 도래와 바로 예수님의 오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어야 했을까? 그리고 죄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왜 세례요한을 찾아가 굳이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 오늘은 이 2가지 질문에 답해 봄으로서 마3장을 풀어보기로 하자.

 

 

 

2. 세례요한의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세례를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1)세례요한, 그는 누구인가?

 

첫째,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원래 제사장으로 태어났지만 선지자로서 쓰임받은 자였다(1:5~23).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였다. 사가랴는 누가복음 1장에 의하면, 유대 헤롯대왕 시절에 다윗이 세운 제사장의 24반차 가운데,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다(대상24:1~19). 당시 제사장들이 약 6천명 정도 있었을 것이라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때, 사가랴는 유대산지였던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반열의 차례에 때라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그가 제비를 뽑았는데 그는 주의 성전(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때 그는 나이 많았으나 자식이 없어서 제사장직의 대가 끊어질 상황에 있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의 응답대로 그에게 아들을 주었는데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그는 날 때부터 거룩한 일을 수행하도록 지정된 제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광야에서 선지자로서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헸기 때문이다.

 

둘째,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특별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던 자로서, 예수님이 사촌형뻘 되는 자였다(1:24-38).

세례요한이 잉태된 후 6개월 뒤에 가브리엘 천사는 이제 마리아를 찾아가 하나님께서 계획을 일러주었고, 그때 또한 마리아도 잉태를 하게 되니,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태어난 사촌형이 된다.

 

셋째, 예수님은 훗날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오리라 한 바로 그 엘리야라고 소개했다(11:9,11,14).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높게 평가해 준다. 먼저 그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는 사실은 수많은 선지자들은 다 메시야가 오리라고 했지만 그는 이분이 메시야다라고 소개할 수 있는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메시야를 본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째,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말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에 죄를 넘기는 의식을 행한 자가 된다. 셋째, ‘오리라 한 엘리야라는 말은 그가 메시야 먼저 와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말라기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자임을 말해 준다(3:1, 4:5~6).

 

 

2)그는 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그는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요한의 존재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세례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는 오직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 다음, 그분의 오심을 세상에 알리고, 그분에게 인류의 죄를 전가시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던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먼저 태어난 자이다. 그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은 크게 3가지다. 이 모든 것이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들 중의 3가지였다.

 

첫째, 그는 메시야(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3:1~10).

그는 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해야 했던 자이다. 그래서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광야에 나가서 외쳤다(40: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깨끗케 했다.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예식은 세례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짜 말3:1의 말씀처럼 오리라 한 엘리야였던 것이다.

 

둘째,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이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야 했다(1:31, 33-34).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당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을 때 그리고 예수님이 죄없이 잉태되어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흠없는 제물이시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을 때,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너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 세례요한은 먼저 태어나야 했고, 먼저 사역을 시작해야 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려 할 무렵,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메시야로서 공식적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세례요한을 사용하신 것이다.

 

셋째, 그는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들을 전가하여 그로 하여금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해야 했다(1:15, 1:29)

이것은 조금 있다가 더 세부적으로 다루게 된다.

 

 

3.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였던 세례요한

 

1)그는 자신이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던 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며(겸손하게),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다. 다만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받은 소리라고 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그가 누군지를 물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며, 그 선지자도 아닙니다. 나는 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1:19~25). 그는 자신을 낮추어서 말했다. 단지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말이다.

사실 그가 부름받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메시야 때문이다. 메시야로 곧바로 자기 뒤에 오시지 않는다면 그는 필요없는 존재였다. 그는 메시야 때문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외쳤다. “곧 있으면 메시야가 나타날 것입니다. 곧 있으면 온 세상을 통치할 왕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된 우리가 그 왕을 맞이하여 그 왕이 통치하는 영역 즉 천국으로 들어가라면 반드시 회개하여 죄를 씻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정결예식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가 사용한 독특한 정결예식 방법은 바로 물세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쿰란공동체와 같은 무리들이 사용하던 정결예식의 방법으로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세례요한이 맨 처음 실행하여 그 방법이 쿰란공동체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아니면 쿰란공동체로부터 그 방법이 세례요한에게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방법은 대단히 주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는 무리들(군중들)도 있었고, 세리들도 있었으며, 군인들도 있었다(3:7-14). 그들은 진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기 위해 왔었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하는 말과 행태를 조사감찰하기 위해 온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 집단으로서 서로 앙숙이었다. 하지만 그들 속에 메시야를 모시고자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일치점이 있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말했다.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2)그는 자신은 메시야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물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나는 물러가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할 것이며, 나는 쇠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사명과 신분을 확실히 사람들에게 말할 줄 아는 겸손한 선지자였다.

3:15~17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는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부름받은 자로서 물로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보다다 훨썬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그의 뒤에 나타날 텐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주는 종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 즉 그는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알곡은 곳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분에 태워버릴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신대도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

(3:13~17)

당시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들의 죄를 회개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먼저 자복한 다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서 죄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1-2장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 않았던가? 죄도 없으셨던 그분은 왜 세례요한에게 나아와서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

 

1)예수님은 반드시 오리라 한 엘리야로부터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천거를 받아야 한다는 예언 말씀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이다(3:1, 4:5-6)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2)그분은 세례요한의 침례의식을 통해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어야 했기 때문이다(3:15, 1:29).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 하자, 세례요한은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어찌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지만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같이 행하여 모든 의를 완성시키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례요한이 어떤 선지자로서 사역을 하기까지 이스라엘에는 근 400년간의 침묵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출현한 세례요한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인줄로만 말았다. 하지만 그는 메시야가 아니었다. 메시야를 준비시켜 줄 자로서, 그의 책임은 아주 막중했다. 그 막중한 책임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의 죄를 없이하는 일에 그가 사용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겨 그로 하여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해야 했던 것이다(1:29).

 

그렇다면 세례요한, 그는 대체 누구였길래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넘길 수 있었을까?

첫째,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칭함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11).

둘째, 그는 진짜 제사장의 자격을 갖춘 자로서 인류의 죄를 없이하는 역할을 감당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1:5~23).

셋째, 그는 오리라 한 엘리야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메시야를 천거할 만한 자로서의 조건을 갖춘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며,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 온 자였다(1:15-17)

1:15~17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넷째, 마지막으로 구약의 제사법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회중의 대표가 와서 안수하면 그 회중이 지은 모든 죄가 넘어간다는 율법규정이 있기 때문이다(4:13-15)

4:13-15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마지막으로,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가 예수님에게 안수하고 난 다음날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기 때문이다(1:29).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위와 같은 5가지의 자격은 세례요한 그가 인류의 대표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자임을 말해준다.

 

 

3)앞의 이 일들로 인하여 예수님은 결국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했기 때문이다(3:16).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보라)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그가) 보시더니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에게 응답하셨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자라하셨다(3:17).

 

 

 

5. 결론

예수님은 곧 천국을 가져오는 분이다. 그분은 천국(하늘들의 왕국)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둘째하늘 공중과 이 땅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마귀가 이 땅에서도 내어쫓겨나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와서 예수님께서 가져올 새로운 세상, 하늘들의 왕국의 통치가 미칠 새로운 영역을 준비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준비하라고 세례요한을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 세례라는 정결의식을 통해 그 일을 준비하게 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충성되이 실천했다. 그에게는 종교지도자들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는 제사장이자 여자가 낳은 가장 큰 선저지였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훌륭한 자로서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켜야 했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이심을 공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그 자리는 바로 세례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이 세례의식을 통해 자신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날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세례요한으로부터는 세상 죄를 넘겨받은 하나님의 희생제물, 속죄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매우 기뻐하셨다. 인류의 죄를 영원히 속할 근거를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아버지의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보이는가?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순종하면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가지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가보자. 파이팅!

 


2011810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7)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첫 제자들1

[찬 송]

083장 나의 맘에 근심구름

0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098장 예수님 오소서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4:1~25(신약 4)

[키워드]

마귀, 시험하는 자, , 떡덩이, 성전, 뛰어내리라. 절하라. 세상만국과 그 영광, 하나님의 아들, 사람, 회개, 천국, 사람낚는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교육, 전도, 치유, 제자삼는 사역

 

1.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오실 길을 닦고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낸 세례요한의 사역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고, 그에게 인류의 죄를 전가하는 사역인 것을 배웠다.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한량없이 받았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려왔고, 이제 그가 바로 인류의 대속제물로서 사역을 감당하게 됨에 하나님께서도 음성으로 화답해 주시고 기뻐해주셨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과연 인류의 속죄제물로서 합당한 사람인지 테스트받는 광야의 시험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예수님(4:1~12)

 

1)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은 본질이 하나님이신데 왜 한낱 피조물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 4장에서는 말한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해야 할 사역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사탄을 제압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신 것이다. 만약 이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 않고 그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마귀와 부딪혔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 2번 마귀와 싸우셨다. 4장의 광야에서 한 번 있었고, 겟세마네동안에서 한 번 더 있었다. 물론 둘 다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첫 싸움에서 승리하시므로, 그의 공생애 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도래하게 하는 일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귀의 권세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쪼무래기들인 귀신들과 싸우지 않으시고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루시퍼 천사장과 싸우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승리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1: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권세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과연 사람으로서 흠없는 제물로서 합당한 분이신가를 온 천하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으며, 태초에 이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지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으로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찌 마귀같은 피조물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1:13)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피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서 흠없는 제물이 될만한가를 시험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몰아서 광야로 가게 하신 것이다.

 

사실 이때, 예수님은 무장해제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쓰실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완전히 내려놓고 순수하게 하나의 인간으로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마귀와 싸운다면 분명 예수님은 승리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흠없는 제물이 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과 권세를 완전히 해제한 다음 순수하게 인간으로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런데 보라. 예수님은 30으로 판정승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이기시므로 사람이지만 마귀를 이긴 최초의 이기는 자가 되셨다.

 

어떤 성도들은 자기가 시험에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시험은 시련을 뜻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다. 마귀가 그의 졸개인 귀신들을 시켜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짓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시험들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마귀의 밥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귀의 궈계에 넘어가놓고는 시험에 들었다고 목회자를 힘들게 하지 말라. 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수작이다. 시험이 들려고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거들랑 즉각적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라. 그것이 살 길이다.

 

 

2) 그렇다면 마귀의 입장에서 볼 때, 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죄짓게 유혹하여 예수님을 죄인 만들므로,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일3:8)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기 직전, 예수님은 일부러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매우 기뻐하시고 그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어주셨다.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이 음성을 예수님과 세례요한만 들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음성은 사탄마귀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즉시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앞으로 어떤 일을 수행할 것임도 짐작했을 것이다. 또한 세례요한의 음성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는 것도 알았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린양을 넘어뜨려 죄짓게 하여 결코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지 못하게 할 이유가 마귀에게 생긴 것이다. 결국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렇게 찾아온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죄인 만들어, 그의 성육신의 목적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것이다.

 

 

3)사탄(마귀)이 예수님(사람)을 시험하는 3가지 방법과 예수님의 대처는 어떠했는가?

 

첫째, 돌을 떡떵이로 만들어 먹으라(4:3-4).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은 그때 40일동안 밤낮으로 굶주리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고 가셨는데 그것은 그의 공생애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때 예수님은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는가? 그 금식기도가 끝날 바로 그 때였다. 가장 배고플 때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다. 먹어야 산다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사탄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이 가장 배고파할 때,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는 그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탄마귀의 시험은 단순히 먹는 문제가 그 본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이 들어 있었다.

마귀가 첫 번째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먹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인간의 가장 취약적인 부분 즉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이 가장 솟구쳐올라올 때, 예수님으로 하여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험한 진짜 이유는 예수님을 죄짓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미끼(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

 

, 묻겠다. 예수님께서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여 먹는다고 한들 그것이 예수님에게 죄가 되게 하는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와서 마실 물이 없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쳤지만 그것 때문에 그들을 광야에서 멸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 큰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부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한다고 해도 크게 죄될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탄이 그렇게 자기를 유혹하는 것에 분명 사탄의 전략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흠이없는 제물이 될만한가를 시험받고 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이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게 된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제물이 될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는 피흘릴 인간제물이 아니라 피없는 하나님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이 시험은 먹는 것에 대한 간단한 시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영역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보라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사탄은 주님은 시험하여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명함으로써 주님을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시게 하여 그분의 성육신의 목적을 무효화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신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 마귀의 시험까지 이겨낸 흠없는 속죄제물로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만약 예수님이 마귀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는 문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큰 문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마귀의 말에 순종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6:16). 이것은 영계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둘째, 자신이 시험받는 위치인 사람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위치에 서 버린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2:6-8).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러분은 무엇이 죄인 줄 아는가? 그것은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의 죄를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3장을 보라.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첫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마귀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이며 둘째, 그들이 사람의 위치를 벗어나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피조물)은 절대 하나님(창조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이라고 유혹했는가?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마귀의 말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돌을 떡덩이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가능한가? 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시험을 받고 있는데, 사탄마귀는 자꾸 예수님더러 하나님의 아들의 힘과 권세를 사용해 자신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한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이다.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자신의 필요만을 추구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마귀의 꾀임에 넘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늘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사용하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결국 마귀의 밥이 되고 만다.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국 마귀의 말에 순종한 것이 되므로 마귀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자. 마귀의 말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순종해서는 안 된다. 마귀의 말이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마귀의 말에 순종하는 순간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마귀의 첫번째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을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첫째, 하나님의 위치가 아니라 사람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결코 마귀의 말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서 이기셨다. 둘째, 기록된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대적하므로 이기셨다. 그것은 신8:3의 말씀이었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에 떡도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 사는 문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찌 배고픈 자에게 음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한 그릇의 밥보다는 그의 영혼이 죄로 물드는 것을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아시고 한 그릇의 밥을 치워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은 목숨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과 몸을 위해 입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차선의 문제이지 결코 인생의 첫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자.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4:5-7).

4:5-7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우선 우리는 마귀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영이 아닌 육신의 상태에서 예루살렘성의 성전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데리고 가서 거기에 세워 놓았다.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힘을 뛰어넘은 것이다. 마귀는 우리 인간보다 참으로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마귀는 여기서 두번째로 예수님을 유혹한다.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네가 뛰어내리는 즉시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한 번 시험해보거라.”라는 시험이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마귀가 얼마나 영리한 존재인가도 알 수 있다. 첫 번째 시험에 대해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물리치자, 마귀는 자신도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의 말을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천사장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시편 91편의 말씀이었다.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첫 번째 시험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자기 스스로 한 번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지를 한 번 시험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번 시험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는 줄 아는가? 성경에 나와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잘못행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분명 믿는 자들은 모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진짜 내가 해를 받는지 안 받는지 시험하기 위해 독을 마신다면 우리는 그시로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만약 사탄이 어떤 독을 사용해 우리를 해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멜리데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아직 그에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독사의 독을 해독시켜 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사탄이 예수님을 밀쳐서 성전꼭대기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떨어뜨렸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 예수님을 건져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험은 다르다. 사탄은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는가?

주님은 또 기록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마귀의 어떤 시험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물리쳐야 한다. 마귀도 말씀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말씀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빨리 파악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것은 말씀을 잘못 적용한 예가 된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을 가져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시험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다 엎드려 죽었지 않았던가!

 

 

셋째, 마귀에게 절하라(4:8-10).

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이제 예수님에게는 이것저것도 다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세상(우주)의 왕국과 그것들의 영광을 다 주겠다제안한다. 이것은 아마 아담에게서 빼앗은 것일 것이다(4;6).

4: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변화다. 유혹해서 넘어지지 않는다면, 제안해서라도 예수님을 넘어뜨리겠다는 계산이다. 이게 바로 사탄이 사람을 넘어지게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모든 것을 다 주어서라도 결국 죄짓게 만들고 넘어뜨리게 만들고 자기의 종되게 만들어 지옥에 끌고가겠다는 계산이다.

이처럼 오늘날 사탄은 천하만국과 그것들의 영광을 다 주어서라도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해서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들도 다 이 단계에서 거의 다 넘어간다. 사탄이 명예와 인기,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맛보게 한 다음,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그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예수님보다 그 영광에 취해 그만 주님을 놓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이 들어올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때의 답은 오직 한 가지. 그 못된 사탄을 물리쳐 버리는 것이다. 사탄을 쫓아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두 주인을 절대 섬길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지 마귀가 주는 것을 받아먹으면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엄청난 인기와 명예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 사탄의 방법에 넘어가고 있는지...

 

 

4)3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4:11)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마귀는 예수님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섬겼다.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보라.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죄를 짓고 넘어지고 하는 모든 문제는 인간의 내면적인 욕심보다는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유혹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귀와 귀신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 쉽게 죄를 짓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여 귀신이 우리를 틈타지 못하게 못하게 하라. 그리고 예수이름으로 내게 역사하는 귀신을 쫓아내어 더 이상 귀신이 우리의 삶에 발 붙히지 못하도록 하라.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이기게 되자,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사탄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가는 곳마다 쫓겨나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게 되었다. ? 귀신들의 왕 사탄마귀가 예수님에게 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귀신이 쫓겨가는 일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1/3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마8장에 가서 다시 하겠다.

 

 

 

4. 결론

사탄마귀가 예수님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는데 하물며 우리를 가만 두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사탄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그들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도록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세상의 모든 영광까지도 기꺼이 줘서라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런즉 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영적인 방비상태를 꺼두어서는 안 된다.

 

 

2011817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8)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첫 제자들(2)

[찬 송]

0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0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4:1~25(신약 4)

[키워드]

마귀, 시험하는 자, , 떡덩이, 성전, 뛰어내리라. 절하라. 세상만국과 그 영광, 하나님의 아들, 사람, 회개, 천국, 사람낚는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교육, 전도, 치유, 제자삼는 사역

 

1. 서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소리를 예수님과 세례요한만 들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소리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도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했던 말을 우리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하나님도 그것을 들었을 것이고, 마귀도 그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마귀는 예수님을 그냥 놔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옛날 아담처럼 자기의 종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죽여 없애야 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다.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다. 창조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다.

그런데 마귀는 또 다른 음성을 하나 더 듣게 된다. 그것은 세례요한의 음성이었다.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다음날,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두 가지 음성을 통해 사탄마귀는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 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없이하는 속죄제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마귀가 예수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다. 그가 흠없는 속죄제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죄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난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죄악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목적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죄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죄가 사람 스스로로 만들어낸 작품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죄는 사람이 옛 뱀 곧 마귀의 꾀임에 속아 넘어감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마귀의 말에 순종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귀 없이 죄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에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로 예수님을 꼬드겼다.

만약 진정으로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돌들로 떡덩이로 만들어 보아라.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인을 받아보아라. 그것은 성경말씀에도 나와 있다. 다시 말해 네가 성전 꼭데기에서 떨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천사를 보내 너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다 마귀가 자신의 말에 예수님이 순종하도록 속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들로서 돌들로 떡을 만드실 수 없겠는가? 그리고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린다해도 다칠 리가 있겠는가? 둘 다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 편으로는 사람이지만 본질적으로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귀에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마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를 속이려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해서 아무 분별없이 말씀을 덮썩 물면 안 된다. 지금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인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지 않는가?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을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전까지 함부로 성경말씀을 인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단들의 형태를 보라. 두 세 사람이 집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그게 올무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성전에 세워진 다음에는 산당을 제거하게 했다. 산당을 그대로 놔두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도 섬기도 우상도 섬기는 온상이 되고 말았고, 그것 때문에 남유다가 망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첫째, 우선 순위를 지켜야하고 자존심 때문에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의 양식보다는 영의 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단이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둘째, 하나님을 함부로 시험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독을 마셔서는 아니 된다. 사도 요한처럼 대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끓는 기름 가마에 그를 던져 넣었지만 사도요한은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가 기름 가마에 들어가서 자신은 절대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주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아니 된다. 설령 그러한 예가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절대 아니 된다.

 

 

 

2. 공생애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 3가지(4:12~17, 23~25)

이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셨고, 그때 물에서 올라 오실 때, 성령의 기름부음도 받으셨다. 또한 공생애동안 부딪혀야 할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한 판 승부를 벌여서 30 판정승으로 마귀 또한 이기셨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과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 때문에 거머쥔 임시적인 왕적 지위를 그의 공생애동안 사용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때부터 정말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았던 원래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시작했다.

 

첫째,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4:17).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이 외침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당신은 아는가? 마귀의 세상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하늘들의 왕국을 가져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백성들은 마귀의 종들이 되어 있었고, 이 세상도 마귀의 세상이 되어있었다. 이제 오직 하늘들의 왕국을 이 땅에도 가져오기 위해 그분이 홀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쳤다.

여러분, 하늘들의 왕이 이 세상에 왔으니 이제 마귀의 권세는 깨어지고 하늘들의 왕국이 이 세상에도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먼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 의해 이 땅 위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나가서 전하는 복음은 무슨 복음인가? 형통의 복음인가? 아니면 천국복음인가? 예수님도 분명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유하셨다. 하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형통복음이 아니라 천국복음이셨다. 그 천국복음이 진정 중요하며,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사람들로 알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기적적인 치유사역도 병행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치유사역자들은 천국복음을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다. 오직 그들은 치유복음만 증거하고, 형통복음만 증거하지,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못하고 계시는지 아는가? 천국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24:14).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 오셨으며, 그 왕을 영접하지 않는한 천국은 올 수 없음과 그분이 얼마 안 있으면 완전한 왕국을 가져올 것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당신은 과연 이 왕국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살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대부분의 사역을 왜 예루살렘에서 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자기 고향을 떠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시작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의 많은 사역은 다 이 가버나움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시고 갈릴리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을까? 그것은 흑암에 앉아있는 백성들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함이셨다(9:1-2). 그것은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9:1-2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빛이 없었다(1:9,5,8:12). 그때가지 이 세상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인 마귀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6:12).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쉼을 얻으리라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어둠의 세상주관자인 마귀는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통해 사람들의 뒤에서 사람의 마음을 조종했고, 그래서 미움, 시기, 살인, 전쟁을 읽으키게 했으며, 때로는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정신병과 간질병에 시달리게 하고, 온갖 종류의 질병에 시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어둠의 세상 주관자 즉 어둠의 마왕을 제압해야 했다. 그러므로 기꺼이 성령을 따라 광야로 가서 마귀와 한 판 붙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러면 우리도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우선순위를 지키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만을 경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경우를 보라. 얼마나 마귀의 솔깃한 말에 속고 있으며,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짓고 있는지를 보라. 이제는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13:12).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12:14). 아직도 어둠 가운데서 어두운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그것을 끊어버리라. 그래야 어둠의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을 부르셨다(4:18~22)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도 맨 처음에는 혼자서 복음은 전파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곧이어 그 사역을 계승할 사람을 찾으시고 그 일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 혼자만 그 일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 그분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또 따라서 행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 일을 맡기신 것이다. 당신의 일은 당신 혼자만 하고 끝낼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계속 계승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사람들을 지명하여 불러내시고는 그들에게 제자라 명명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사역은 예수님의 3대사역이라 일컬어지는 복음전파와 교육과 치유사역과는 별개로 행하신 것인데, 이 사역은 예수님의 3대사역의 종합편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의 3대사역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제자양육사역은 당신의 사역을 계승할 몇몇 사람에게 한정된 사역이었다. 우리 교회도, 저도 마찬가지다. 제자로 양육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과연 제자로 삼아 훈련하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똑똑하다고 그를 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었다. 부자라고 해서 제자로 삼으신 것도 아니다. 사실 부자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자들 즉 유대인의 관원이나 제사장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알고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로 삼으신 사람들은 시골 촌동네의 어부들 4명이었다.

그들은 가버나움 동네의 어부 4사람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렇다면 가버나움 동네의 수많은 어부들 중에서 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을까? 그들은 일찍이 주님께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적어도 한 안드레와 조금 많게는 2명 즉 안드레와 요한은 원래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자들이었다(1:35~42). 하지만 어느날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며,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며, 단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물로 세례를 주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사람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예수님더러 바로 그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목해서 말을 했다.

그러자 안드레와 다른 제자 1명이 예수님을 뒤따라갔다. 그때 예수님은 당신이 계신 곳을 와서 보라고 했다. 그날 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데를 가서 보았고, 그 뒤 안드레는 자기 형인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요한도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5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은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5:1~11)

그런데 이들 4명은 자기들을 첫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기의 동네로 이사올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어느 정도 듣고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스승인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누군신지를 들었으며, 그분이 계신 곳을 가서 한 번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의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해준 다음부터는 세례요한을 따르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것을 보면, 그들이 세례요한을 따랐던 것이 세례요한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였을 것으로 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자 정확히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를 원했고, 그분이 계신 곳을 가 보았지만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아직 메시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 그분이 자기의 마을까지 이사오셔서 자기들을 불러내자, 그들은 기꺼이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둘째, 주님이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오는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가 던지던 그물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으며, 요한과 야고보는 그의 부친과 품꾼과 배를 동시에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1:20).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인가?

베드로는 당시 집안의 가장이었다. 장모님께서 모시고 살고 있었고, 자신의 남동생 안드레까지 돌보고 있었다. 그가 떠나면 과연 누가 집안 사람들을 먹이고 입힐 것인가? 또한 요한과 야고보는 아버지를 도와서 생선을 잡고 예루살렘까지 납품하는 납품업체 중요관리였다. 그런데 자기들이 떠나버리면 누가 아버지를 도와줄 것인가를 생각 안 했을까?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해도 그분의 부르심에 항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빚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쓰임받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 어느날 갑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거기에 아무런 조건없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러한 운명을 찾아냈는가? 찾아냈다면 그 부르심에 순종하라. 이것이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모든 사람의 부르심에는 각자가 맡아야 할 부르심의 사명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부르심을 받은 순간에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이 자신의 부르심의 목적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마태라는 기자는 이들 4명의 부르심에 대해 얼마나 기가 막히게 표현해 놓았는지 모른다.

첫째,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다가 부름을 받았는데, 그들은 결국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으며, 둘째, 요한과 야고보는 그물을 깁다가 부름을 받았는데, 베드로와 사도바울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한 부분을 기우는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역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던 것,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을 가지고 사역하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이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던 사람었는가? 하나님의 부름에는 우리가 하고 있던 일과 직업, 우리의 전공과 우리의 은사와 달란트와 매우 관계가 깊다. 나는 국어교사로서 쓰임받아야 할 터인데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부름받을 당시의 그 사람의 상태와 아주 관련이 깊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 예수님은 천국복음만 증거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회당들에 가셔서 가르치셨고,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고치셨다(4:23, 9:35)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러서 사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찾아갔다는 말이다. 오기를 기다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오기를 기다릴 뿐 찾아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3년반동안 공생애의 주요거점으로 사용하신 장소는 물론 갈릴리였다. 당시 갈릴리에서는 200여 촌락들이 있었고, 3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 갈릴리에 있는 온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의 사역을 펼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아는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단 3마디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3대 사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육전도치유사역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첫째,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있는 회당에 가셔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당시 백성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르게 깨우쳐주셨던 것이다.

둘째, 그분은 왕국복음을 전파하셨다. 곧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터인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에 대해 전파하신 것이다. 그 왕국복음은 바로 마5~7장까지의 산상수훈에 기록되어 있으며, 13장과, 20-25장까지 계속해서 줄기차게 등장하고 있다. 5~7장의 산상수훈에서는 왕국백성의 법도가 나오며, 13장에서는 천국에 대한 정의가 나오고, 20-25장에는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나온다. 이것은 추후에 계속 공부하기로 하자.

셋째, 병들고 약한 자들, 귀신들에게 시달린 자들을 치유해주셨다. 죄를 짓고 사는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것의 하나는 질병이다. 예수님 죄로 인한 질병 때문에 시달리는 자들로부터 질병을 퇴치하셨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숨어서 역사하고 있는 귀신들을 내어쫓아내셨다. 그분은 어둠의 빛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가는 곳마다 어둠의 정체가 드러나 스스로 도망쳤던 것이다.

 

 

 

4. 결론

사탄마귀가 예수님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시도했는데 하물며 우리를 가만 두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사탄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의 유혹을 예수님처럼 물리칠 수 있도록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세상의 모든 영광까지도 기꺼이 주어서라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섰다고 생각하는 즉시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의 말씀처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영적인 방비상태를 꺼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형통복음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만방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질병에 시달린 자나 귀신에 고통받는 자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이 치유사역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천국복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가진 직업과 전공,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따르다. 여러분이 잘 할 수 있는 그 일에 충성하라. 그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본분이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라.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여러분을 지으셨으니 말이다.

 


2011824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09) 보배로운 말씀 산상수훈(1)

[찬 송]

497장 주 예수 넓은 사랑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27장 맘 가난한 사람 복이 있나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5:1~16(신약 6)

[키워드]

천국,헌법,제자,산상수훈,팔복,복되도다.,땅의소금,세상의빛

 

1. 서론

우리 성도들의 최고의 희망은 천국이다. 천국에 들어가서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우리가 과연 아버지의 집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주는 신부단장장소와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천국이었다. 예수님에 관한 4가지 복음서 가운데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천국에서 시작하고 천국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다가 천국으로 끝이 난. 특히 마28장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공부할 5~7장은 천국의 헌법이 선포된다.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13장은 천국장이라고 불리운다. 여기에 보면 천국이 사람에게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결실하게 되는지 씨뿌리는 비유와 더불어 씨를 거두어 곳간에 저장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마20~25장까지는 천국이 시작되는 혼인잔치에 대해 즉 혼인잔치에서 입게 될 세마포 옷과 혼인잔치의 실제 모습과 혼인잔치를 위한 기름등불은 과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천국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태복음에는 천국The Kingdom of Heaves라는 말이 18장에 걸쳐 총 36번 등장하고 있다. 마태복음 3장의 세례요한의 외침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17)”를 필두로 하여, 25장의 열처녀의 비유까지 총 18장에 걸쳐 천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는 장면까지 나오고 있다.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게 될 산상수훈은 바로 천국의 헌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 나는 과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오늘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삶이 천국의 헌법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자. 만약 우리가 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거나, 그러한 인격이 부족하다면 오늘부터 회개하여 천국을 침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산상수훈(5~7)

 

1)산상수훈의 위치

먼저 우리가 알 것은 마태복음은 연대기적인 방법 즉 시간차별로 기록된 성경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은 주제별 전개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은 주제별로 묶은 주제별 시리즈책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단번에 다 설교하신 것이 아니다. 1차 갈릴리 사역(A.D.27~28)중에 여러 번에 걸쳐 행해진 설교말씀을 주제별 편집 원칙에 따라 여기에 하나로 묶어놓은 일종의 설교 묶음책인 것이다. 그리고 8-9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주요한 이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11~12장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은 긴 설교(강화)와 이어서 기사(기적)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1

2

3

4

5

기사

3~4

8~9장 기적

11~12

14~17

19-23

강화

5~7장 산상수훈

10장 제자의 길

13장 천국비유

18장 천국시민

24~25장 감람산강화

다시 말해, 마태복음에는 긴 설교들이 5번이나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중 첫 번째 긴 설교가 바로 마5~7장에 수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이다.

 

그동안 우리가 공부해온 것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장 예수님의 족보와 잉태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애굽으로 도피 및 나사렛으로의 귀환

3장 세례요한의 외침과 메시야의 세례받으심

4장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초기 갈릴리 사역(4명의 제자를 부르심, 3대사역소개)

5~7장 산상수훈

 

 

2)산상수훈(山上垂訓)이란?

산상수훈이란 마5:1~2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산에 오르시어 해주신 설교말씀(The Sermon of the Mount)이라는 뜻이다. 특별히 우리가 산상수훈을 천국의 헌법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장차 도래할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들의 윤리와 생활법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윤리와 법도에 합당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국의 헌법의 핵심 키워드는 합당한가이다. 이것을 성경은 ()(디카이오쉬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보면, 5장은 천국의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구약의 율법과 비교하여 제시되고 있으며(살인,간음,이혼,맹세,보복,이웃사랑,원수사랑), 6~7장은 천국의 의의 실천적 측면(기도, 재물관, 의식주 염려금지, 비판금지)이 제시됨과 동시에 그 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3)산상수훈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5:1~2)

우선 먼저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5: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의)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그의) 입을 열어 (그들에게) 가르쳐 이르시되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으로 인해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고 귀신에게 시달리던 자들이 고침을 받게 되자, 수많은 무리들이 저 갈릴리 북쪽에서부터 저 남쪽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갈릴리 동남쪽인 요단강건너편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셨다. 그러자 자기에게 12명의 제자들이 나아왔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 산상수훈을 하신 시기가 12제자를 뽑은 다음에 한 말씀으로 나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12제자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물론 12제자들 뒤에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12제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훗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12제자들 좀 더 나아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인 제자들에게까지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이 끝나가는 싯점에 이르러서는 12제자들을 행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 예수님은 훗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모든 말씀을 지키고 따를 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다.

 

 

 

3. 팔복의 말씀(팔복강화)(5:3~12)

 

1)8가지 복인가 9가지 복인가?

예수님의 설교는 팔복으로 시작되는가 아니면 구복으로 시작되는가? 3절부터 12절까지 헬라어원전을 읽어보면, 복은 9가지. 하지만 이 말씀이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팔복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8번째 복의 연장선상에 9번째 복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도 이 말씀을 팔복이라고 정의해보기로 하자.

5:3~12에 나오는 팔복은 산상수훈의 요강으로서, 구약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인 것처럼 팔복 또한 산상수훈의 핵심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팔복말씀은 천국의 헌법의 대원칙과도 같은 말씀인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8가지 항목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가 복은 받은 자인가에 대해 그들의 내면적 상태를 표현해 주고 있다.

 

 

2)팔복의 3중구조

팔복은 똑같이 3가지 구조로 되어 있다.

먼저, 축복의 선언(복되도다, 복있도다)이 나오고, 다음으로 축복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이어 마지막으로 축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가 나온다.

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면 이렇다.

5:3 복되도다!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5:4 복되도다! 애통해하는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5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5:6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7 복되도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5:8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5:9 복되도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5:10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5:11~12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반대하여 모든 악한 말을 받는 너희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받았느니라.

 

첫째, 어떤 자들에게 천국의 복이 주어지는 것일까?

8가지 좀 더 많게는 9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영이 가난한 사람,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사람, 반대자들과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하게 대하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긍휼이 여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는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 때문에 핍박을 받거나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듣는 사람이 그들이다.

여러분은 이것들 중에서 과연 몇 가지나 해당되는가?

 

둘째, 이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일까?

우선, 이 복은 자기가 빼앗아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미래 수동태). 다시 말해, 이 복은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복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작을 행하는 주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주는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장차 받게 될 복을 보라.

먼저 이들은 언제 어디서 이러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현세에서도 주어질 수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성취는 다 이 세상이 아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심판을 받고 하늘에서 그러한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 16:27, 고전3:12-15).

그렇다면 이들이 누리게 될 복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들에게 천국이 주어지고, 위로를 받게 되고,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게 되며(37:11), 배부르게 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12:14,살후1:6-10),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받게 될 것이고,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자. 언제부턴가 번영신학이 교회에 들어온 다음부터 복의 기준이 물량주의, 성공주의로 바뀌어버렸다. 그러다보니, 물질에 있어서 복을 받지 못하거나 자녀의 복을 받지 못하거나, 건강의 복을 받지 못하면 꼭 복을 못받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제 복의 기준을 다시 세울 때가 되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복은 천국복이다.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그리고 그 때 하늘나라의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성도,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3)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과 구약의 복의 개념

, 8~9가지 복은 이 세상에 받는 복인가 아니면 주님의 재림후 있게 될 심판의 따라 하늘에서 받게 될 복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현세의 복을 말씀하지 않았을까?

첫째, 현세의 복은 장래에 받을 복의 그림자 내지는 맛보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에 받을 복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건강의 복을 주시기 위해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귀신을 내쫓아주셨다. 또한 주기도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모든 보이는 것은 진짜가 아니라 맛보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 집에 들어가서 살 사람이 모델하우스를 보고 거기서 평생 살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현세의 복은 오히려 하늘의 복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세상의 모든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라. 거의 95%가 교만하여지고 타락하지 않았던가? 현세적인 복을 받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자기자랑이 나오고, 명예 때문에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타종교까지 인정해버리는 우상숭배의 죄, 종교다원주의의 죄에 빠져버린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 현세의 복에 취해서 하늘의 복을 찾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물질을 그렇게 쓸어 모으려고 하는 것일까? 왜 명예를 좇아 무슨 무슨 회장같은 감투를 좋아하고, 방송에 출현하여 인기를 누리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추구하는가? 다 이 세상이 좋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복 때문에 눈이 멀어 하늘에서 진짜 받을 복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말자.

셋째, 현세의 복은 영원하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6장에 가서 보겠지만 솔로몬의 입은 영화로 풀 한 포기만 못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마귀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므로, 이 현세의 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마귀에게 쓰임받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복을 추구하다가 하늘의 영원한 복을 상실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4. 천국백성의 정체성(5:13~16)

그렇다면, 팔복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 자가 이 세상에 가득하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온전한 천국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 주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예수님은 그것을 크게 2가지로 딱 요약하여 말씀하신다.

5:13-16 너희는 세상(원문:)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첫째, 천국백성 때문에 세상이 더 이상 더럽게 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의 소금이라는 말의 핵심이다(5:13). 이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천국백성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둘째, 세상이 더 이상 어둠이 떠나고(범죄가 사라지고)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말의 핵심이다(5:14~16).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천국백성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 세상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를 의미하기보다는 사탄에 의해서 부패된 우주를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사탄을 세상임금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더러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가 천국백성들 때문에 더 이상 더럽게 되지 아니하고 부패되지 아니하고 깨끗하게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천국의 자녀들이 소금이기를 거부하며 다시 말해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는가? 결국 자신이 소금이기를 거부하는 천국백성들은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왜 이 세상은 지금도 살인, 방화, 전쟁, 시기, 미움, 다툼, 음란이 가득한가? 이 세상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지만 빛이기를 거부하는 자들 때문이다. 자신에게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등경 아래에 등불을 놓아두는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오히려 죄를 짓기 더 좋아하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서 더 이상 선한 행실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5. 결론

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는 복의 개념을 다시 정리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하늘의 복이며, 영원한 복이며, 천국의 복인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잠시 잠깐 얻는 기쁨과 쾌락과 재물에서 우리의 촛점을 하늘의 영원한 복으로 옮겨보자.

둘째,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보자. 우리는 먼저 땅의 소금이다. 이 땅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게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이미 부패해져버린 세상에서 어둠을 제거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사람이 되었다.

 

 

2011831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0) 산상수훈(2) 천국과 율법의 상관관계(1)

[찬 송]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411장 아 내 맘 속에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5:17~30(신약 6)

[키워드]

천국,헌법,제자,산상수훈,율법,선지자,완성,예수,서기관,바리새인,살인,간음,(),라가,미련한놈,재판관,옥리,여자,간음,지옥

 

1. 서론

오늘 우리는 산상수훈의 두번째 단락으로서 율법과 천국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산상수훈은 단 번에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 가운데서 하신 말씀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주제별로 묶어놓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5:1-12의 말씀산상수훈의 핵심요강이라 할 수 있는 팔복의 말씀이다. 그리고 13~16절까지는 천국의 백성들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천국백성들은 이 땅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소금이며, 타락한 이 세상을 비추는 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구약백성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율법말씀과 그리고 율법말씀의 파숫꾼이라 불리우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천국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말한다.

먼저 17~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밝히며, 21~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제정자이자 수여자이신 것을 밝힌다. 특히 21절부터 48절까지에는 율법규정 가운데 6가지 조항을 들어서 율법의 근본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해주신다.

이러한 율법조항으로서는 곧 살인금지규정(21~26), 간음금지규정(27~30), 이혼규정(32~32), 맹세규정(33~37), 복수규정(38~42), 이웃사랑규정(43~48)에 관한 새 기준이 실례로 제시되고 있는데, 는 율법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엄격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외부규정만 중시하여 지극히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빠져 있는 데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의 기준을 절대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킴으로서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율법규정의 준수를 행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의 모든 규정들은 단 하나도 하나님 계명과 관계되어 있는 율법말씀 즉 1계명에서 4계명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으며, 다 인간계명에 관한 규정으로서 중심은 곧 이웃사랑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차지할 수 있으며, 그 행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2. 예수님과 율법의 상관관계(5:17~20)

 

1)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율법의 본뜻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씀하신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좀 있다가 보면 알겠지만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하고는 상당히 달랐다. 그래서 혹시 오해하여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율법과 자신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여주신다.

 

모든 사람에게 그가 메시야이신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고 그들로 확실하게 인정받기 위해서(인정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율법의 관계를 무리들 특히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셔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근본목적과 의도를 까먹고 오로지 형식적이고 문구중심적인 율법행위를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만으로서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선생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여기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이루기 위해,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첫째,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둘째,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그의 3년반의 공생애를 통해 율법의 규정들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신다. 그리하여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신다.

특히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을 다 충족시키려 오셨다는 말이다. 둘째, 율법말씀에는 다 설명되어있지 않아,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율법의 숨은 뜻까지를 다 알려주시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셨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12살 때부터는 절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절기를 지키셨고, 11장의 규례처럼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정한 음식만 먹었던 것이다. 한편, 율법의 규정만으로는 해석이 어렵거나 속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말씀들은 보충설명하심으로 그 규정의 속뜻을 일러주었으니, 그 대표적인 예제가 마5장에 총 6가지가 나오고 있다.

 

 

2)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한 천국

예수님은 아셨다. 만약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데로 율법을 준수하고 살게 된다면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율법에서 말미암은 의라고 부른다.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은 토색(강제로 빼앗음)하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으며, 간음을 행하지도 아니했다. 그리고 세리처럼 거짓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돈을 추구하며 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되, 얼마나 철저하게 드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식물의 씨앗도 십일조를 드렸는데, 9개를 세고 10번째의 씨앗을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렸다고 한다. 그러니 그것을 세는 품삯이 더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일이 되면, 39가지 안식일 준수조항에 따라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니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을 때에도 안식일에 가기에 적당한 거리만큼 도망가고 도망가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의 디도장군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안식일날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다고 다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정도로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다. 천국 백성들은 그 정도의 수준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가지고 우리는 천국에 합당한 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어, 예수님은 천국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고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규정의 지극히 작은 하나이지만 그것대로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19).

 

 

3)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지옥

이어서 예수님은 율법조항들은 하나씩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의를 지녀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신다.

그것은 만약 천국의 백성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한 삶을 산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못한 삶을 산 자가 들어가게 될 지옥은 어떤 곳일까? 9장의 말씀과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요약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타는 곳이다. 아니 불로써 소금치듯 하는 곳이다.

둘째, 구더기가 있어, 사람의 살을 갉아먹고 씹어먹는 곳이다.

셋째, 물 한울을 얻을 수 없어 갈증이 영원히 해소되지 못하는 곳이다(16:24).

넷째,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16:26~27).

다섯째, 거기서 천국을 볼 수는 있으나 천국에 어떤 청원을 할 수 없는 곳이다(16:23~24, 27~31).

여섯째,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다(16:23~25,28)

일곱째, 타락한 천사의 일부가 있는 곳이다(벧후2:4). 간증에 들어보면, 하늘의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어쫓겨날 때, 뱀과 독사와 전갈들이 되었고 그들이 지옥에 있어, 지금도 지옥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간 영혼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 실례로서 예수님은 살인규정과 간음규정을 통하여, 지옥이 얼마나 가서는 안 될 곳인지를 말씀하신다(5:29~30).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신체 중 어느 부분이 우리를 죄짓게 하여 우리를 지옥에 끌고가려 한다면 차라리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제거해 버려서라도 절대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3. 천국백성에 합당한 더 나은 의로운 삶(5:21~48)

이제 21절부터 48절까지는 앞서 20절에서 언급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6개의 대립명제를 통해 언급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규정의 기준이 절대적인 차원까지, 율법준수의 기준이 내면적 자세로까지 확대되어야 함을 6가지 실례를 통해 언급하신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는 옛사람들의 가르침과 대조는 이루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은 과거로부터 전래되어 온 율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구문이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예수의 새롭게 주어지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구문이다. 이는 옛사람에게 명한 명제를 예수님께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외형적이며 방편적인 성격이 강한 율법을 보다 내면화 절대화시킴으로써 율법의 수준을 고양시키신 것이다.

 

 

1)율법 중 도덕법의 예로서 2가지 규정(5:21~30)

. 살인금지규정(5:21~26, 20:13, 5:17)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0:13 살인하지 말라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21절부터 26절까지는 이렇듯 외형적이며 결과적 규정을 담고 있는 구약 율법을 뛰어넘어 이를 절대적 내면적 차원까지 확대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새 율법(천국의 헌법)의 실례로서 살인에 대한 규정을 다룬다.

구약율법 중 십계명의 6계명에 해당하는 행위살인금지규정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이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살인죄는 그것이 실제로 행위로 실행되었을 때에만 살인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말로라도 상처를 주어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규정하신다. 왜냐하면 악의를 가지고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것은 많은 경우 살인이 노하고 미워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실제적인 행위만을 살인으로 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내적인 동인까지 살인죄로 확대적용하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살인하는 살인죄까지도 결국은 지옥형벌을 면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 중에서 라가(머리가 텅 빈 놈)’이라는 표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에 해당되며, 미련한 놈이라는 표현은 라가라는 표현보다 더 심한 욕설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육체적인 목숨만을 해치는 것만 살인이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다 살인으로 규정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까지 다 다루시고 그것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5:23~2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고드란트)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간에 불화가 있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분개하는 상태에서는 예배드리는 것보다 그들과 화해하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배 한 번 빠진 것보다는 살인죄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화가 가득한 상태에서 성전에 나아가 예배드리기보다는 오히려 형제와 화목하는 일이 더 우선시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재판관은 완전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옥리(관예)’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종들며 형벌을 집행하는 천사라고 볼 수 있고, 은 악인의 최후 형벌장소인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간음금지규정(5:27~30, 20:14, 5:18)

5:27-28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0:14 간음하지 말라

5:18 간음하지 말지니라

모세의 율법육체의 실제적인 행위를 가진 것만을 간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음욕의 마음을 품은 것까지도 간음이라고 정의하신다. 모세의 율법은 혼외의 것을 간음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

사실 간음이란 단지 십계명 중 7계명을 어긴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를 도둑질한 것이요(8계명),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욕심이기 때문에(10계명) 문제가 된다. 이것은 결국 간음이 다른 가정을 파괴하는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28절의 여자는 귀네라는 단어로서 장성한 여인 내지는 아내라는 표현으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장성한 여인이나 타인의 아내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행복의 터전인 가정을 파괴하는 간음을 예수님은 매우 크게 경계하신다. 그러한 마음이라고 품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차라리 그러한 죄 때문에 고민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잘라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5:29~30). 왜냐하면 간음한 사람이 결코 천국에는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죄짓는 것으로 언급한 은 음욕의 마음을 가지고 쳐다보는 인체의 일부, 은 남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완곡한 어법으로서 그것이 간음을 행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자신의 몸에 가장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범죄의 도구가 된다면 과감히 그것을 희생시켜서라고 죄를 짓지 말아야(간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하시고 있다. ‘실족케 하거든이라는 말의 뜻은 걸림돌이 되다에서 확대되어 죄를 범하다는 뜻도 있고, ‘믿지 못하게 하다에서 버리게 하다의 의미로 확대되기도 했으며, ‘오해하게 하다에서 더 확대되어 다치게 하다나는 뜻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요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적인 욕구를 가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식욕과 소유욕과 이성욕이 있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수님께서는 성적인 욕구가 도를 넘고 법과 울타리를 넘어 탐심과 합해지고 이웃의 가정을 해를 끼치게 될 때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여자를 처다 보았는데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들어 음욕의 마음을 가지고 여자를 쳐다본다면 그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인데 이곳을 더럽게 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천국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멸해버리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고전3:16~17).

 

 

 

2)율법 중 재판법의 예로서 4가지 규정(5:31~48)

이어 예수님께서는 재판법의 실례(이혼, 맹세, 보복, 이웃사랑)를 들어, 천국백성의 합당한 삶에 대해 더 실제적인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러한 재판법의 실례로서는 총 4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이것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기로 하자.

 

 

 

4. 결론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마태복음식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세우기 위해 왕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사탄마귀가 왕이었으니 예수님은 사탄마귀와도 한 판 붙으셔서 이기셨다. 이에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향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 어떤 자가 천국에 합당한 자이며, 천국에 합당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다. 그 핵심은 우리가 가진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는 더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 대단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지옥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며, 성령으로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율법해석은 단지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동기와 의도까지 다 헤아리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가 과연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날마다 채우시기를 바란다. 아멘.

 

 

 

201197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1) 산상수훈(3) 천국과 율법의 상관관계(2)

[찬 송]

298장 속죄하신 구세주를

295장 큰 죄에 빠진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5:17~43(신약 6)

[키워드]

천국,헌법,제자,산상수훈,살인,간음,천국,지옥,이혼,맹세,보복,원수,이웃,사랑

 

1.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산산수훈(5~7)중에서 예수님께서 율법과 천국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5:17~48)을 함께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구약백성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율법말씀과 그리고 율법의 파숫꾼이라 불리우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천국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말한다.

먼저 17~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밝히며, 21~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제정자이자 수여자이신 것을 밝힌다. 특히 21절부터 48절까지에는 율법규정 가운데 6가지 조항을 들어서 율법의 근본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해주신다.

이러한 율법조항으로서는 곧 살인금지규정(21~26), 간음금지규정(27~30), 이혼규정(32~32), 맹세규정(33~37), 복수규정(38~42), 이웃사랑규정(43~48)에 관한 새 기준이 실례로 제시되고 있는데, 는 율법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엄격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외부규정만 중시하여 지극히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빠져 있는 데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의 기준을 절대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킴으로서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율법규정의 준수를 행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2. 지난주간에 전한 말씀(정리)

 

1)율법과 예언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5:17)

특히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없애버리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5:17).

이는 먼저 첫째로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선지자의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말로서, 예수님은 오직 그가 모든 삶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는 삶이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거나 새로운 율법으로 대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옛날에 주신 계명들이 잘못 와전되고 잘못 해석되고 잘못 실천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수정),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하기(보충)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율법 중에는 예수님께서 완성해버리므로 폐지된 것도 있으니, 예를 들어 제사법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히 성취되어지므로 폐지되기에 이르며, 곧이어 성령강림 이후에는 금기법(음식법)도 폐지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오직 히브리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셨으나,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또 다른 백성(교회)으로 편입하셨기 때문이다.

 

2)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천국백성의 의()(5:18~20)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더 언급할 것은 산상수훈 가운데 율법에 관련된 부분에서 천국과 지옥에 관한 독특한 말씀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자신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으므로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특히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에는 당연히 들어가게 되고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19절 말씀을 보자.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 불리울 것이요, 누구든지 계명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 불리울 것이라.

그랬다. 당시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존재였는지 아는가? 그들은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사실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조항은 상당히 무거운 짐이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조항 613가지를 모법으로 하여 그 밑에 실천조항(자법)을 만들어서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판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해석서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쉬나혹은 탈무드가 되었다. 이것은 모세오경을 해석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서기관(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도 하였고 지옥에 보내기도 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일반 백성들인 613가지 조항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장로들의 유전까지 어찌 다 알 수 있었겠는가?

안식일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데, 과연 어떻게 지켜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인가? 특히 그 날에는 어떤 사람도 일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되는가? 그래서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랍비)이 안식일에 어디까지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 한계를 해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39가지 금지법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 말라는 것은 쉽다. 하지만 하지 말라는 조항이 어디까지 지키는 것이 맞는 것인가를 또 해석해서 가르쳐주어야 했다. 다시 말해, 조상대대로 구전으로 전하여지고 있는 것까지 다 가르쳐주어야 했다.

여자가 끈을 자기 허리에 매는 것은 죄가 안 되지만 물통을 치켜 올리려고 허리에 매면 죄가 된다. 누구나 한 글자라도 두 벽에 각이 나게 쓰거나 장부책의 두 쪽에 쓰면 두 글자를 쓰는 죄를 범하게 되며 또 모래 위에 쓰거나 기타 영구적이 아닌 일시적인 것 위에 쓰는 것은 죄가 안 된다. 유대인 집주인이 문 밖에 유대인 거지가 왔을 때 동냥을 주는 것도 한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걸으니 죄가 된다고 한다. 팔을 문지방 너머로 내밀면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하고 그때 주인이 동냥을 꺼내 들면 거지가 손을 내밀어서 그것을 받을 때는 죄가 안 된다. 즉 거지가 먼저 손을 집안으로 들이 밀면 주인이 동냥을 내서 손에 쥐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물건을 나르지 않은 결과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내용도 나온다. 안식일에 양이나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 것이나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거 물을 먹이면 괜찮지만,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병고치는 것이라 하여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고 그들은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12:11, 13:15,14:5).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3: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4: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만약 천국의 백성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한 삶을 산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처럼 산다해도 천국에는 못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계명들을 어기도록 가르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해석을 바로잡고, 천국백성이라면 지켜야 할 율법의 근본 의도와 뜻을 해석하고 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최소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으로서만 아니라 율법의 조항의 근본적인 의도를 알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아니했으니 살인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으나, 형제를 진정 미워하고 분을 낸다면 그는 이미 그 사람을 살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아서 간음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마음에 간음했다면 그는 이미 간음한 것이다.

 

 

3)구약에는 언급된 적이 없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부분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모르고 형식적으로 율법조항을 지키려 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는 더 높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 지옥은 어떤 곳일까?

9장의 말씀과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요약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타는 곳이다. 아니 불로써 소금치듯 하는 곳이다.

둘째, 구더기가 있어, 사람의 살을 갉아먹고 씹어먹는 곳이다.

셋째, 물 한울을 얻을 수 없어 갈증이 영원히 해소되지 못하는 곳이다(16:24).

넷째,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16:26~27).

다섯째, 거기서 천국을 볼 수는 있으나 천국에 어떤 청원을 할 수 없는 곳이다(16:23~24, 27~31).

여섯째,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다(16:23~25,28)

일곱째, 타락한 천사의 일부가 있는 곳이다(벧후2:4). 간증에 들어보면, 하늘의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어쫓겨날 때, 뱀과 독사와 전갈들이 되었고 그들이 지옥에 있어, 지금도 지옥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간 영혼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다.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 지옥에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 실례로서 예수님은 살인규정과 간음규정을 통하여, 지옥이 얼마나 가서는 안 될 곳인지를 말씀하신다(5:29~30).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신체 중 어느 부분이 우리를 죄짓게 하여 우리를 지옥에 끌고가려 한다면 차라리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제거해 버려서라도 절대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3. 천국백성에 합당한 더 나은 의로운 삶(5:21~48)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에 합당한 더 나은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율법조항 6가지를 들어서 설명해주신다. 6가지 조항은 앞의 2개는 도덕법의 예이며, 뒤의 4개는 재판법의 예이다. 앞의 2가지는 <금지법>이라고 한다면, 뒷의 4가지는 <수행법>에 해당된다.

 

1)율법 중 도덕법의 예로서 2가지 규정(5:21~30)

. 살인금지규정(5:21~26, 20:13)

구약율법 중 십계명의 6계명인 살인금지규정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해석하면 이렀다. 살인죄는 그것이 실제 행위로 실행되었을 때에만 성립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말로라도 상처를 준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규정하며, 그러한 살인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까지 다 다루고 심판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 간에 불화가 있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분개하는 상태에서는 예배드리는 것보다 그들과 화해하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배 한 번 빠진 것보다는 살인죄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간음금지규정(5:27~30, 20:14)

모세의 율법은 혼외의 것을 간음으로 규정한다. 모세의 율법은 육체의 실제적인 행위를 가진 것만을 간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음욕의 마음을 품은 것까지도 간음이라고 정의하신다. 사실 간음이란 단지 십계명 중 7계명을 어긴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를 탐내는 욕심이 들어갔기 때문에(10번째 계명을 어긴 것) 문제가 된다. 또한 간음자체가 다른 가정을 파괴하는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행복의 터전인 가정을 파괴하는 간음을 예수님은 매우 크게 경계하신다. 그것은 마음이라고 품지 말아야 한 것으로 규정하신다. 차라리 그러한 죄 때문에 고민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잘라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간음한 사람이 결코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요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적인 욕구를 가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식욕과 소유욕과 이성욕이 있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성적인 욕구가 도를 넘고 법과 울타리를 넘어 탐심과 합해지고 이웃의 가정을 해를 끼치게 될 때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다 여자를 처다 보았는데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들어 음욕의 마음을 가지고 여자를 바라본다면 그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인데 이곳을 더럽게 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천국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멸해버리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고전3:16~17).

 

 

2)율법 중 재판법의 예로서 4가지 규정(5:31~48)

이어 예수님께서는 재판법의 실례를 들어, 천국백성의 합당한 삶을 말씀하신다. 그것으로는 4가지 실례를 말씀하신다.

 

. 이혼규정(5:31~32, 24:1~4)

-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남용,악용금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음행의 경우다.

주님은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오직 배우자의 음행의 이유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만일 사람이 함부로 이혼하고 다른 가정을 만들면 부부가 서로 간음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언제부턴가 이스라엘 백성은 음행한 이유가 없이도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을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것은 포로귀환 이후 에스라시대에 있었다. 에스라는 다른 이방민족의 여자와 결혼하여 아내를 얻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이방여인과 헤어지도록 이혼을 권장했다(10). 그러던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이 젊은 여자와 재혼하기 위해 이혼증서를 주고 마음대로 이혼하기에 이르렀다(19:3). 이것을 서기관과 바리새들도 눈감아주었던 것 같다.

여러분은 이혼에 관한 율법규정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는가?

24:1-4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녀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그렇다. 여자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될 때였다. 여자가 음행을 했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사람과 결혼했든지가 그 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혼증서만 주면 되는 것으로 잘못 발전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일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신 것이다(율법규정). 왜냐하면 가정이란 모름지기 사람이 세운 제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그 제도를 악용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 맹세규정(5:33~37, 20:7, 19:12, 30:2, 23:23)

-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남용,악용금지). ‘그렇다’ ‘아니다라고만 말하라.

이제 말의 문제를 보자. 그들이 말하고 있던 맹세에 대한 정확한 규정은 없다. 그것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5: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23: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주님께서 여기서 보여주시는 것은 맹세를 한 것은 지켜야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악하게 이용하여, 맹세한 것은 지키고 맹세하지 않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잘못 율법이 와전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인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불경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는 것은 거기는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의 어떤 힘으로도 머리털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예는 예(그렇습니다), 아니오는 아니오(아닙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 악으로 좇아난다고 하였다.

어떠한 맹세이든 맹세하는 모든 행위를 선호하는 것이나, 남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맹세 없이도 상대방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보복규정(5:38~42, 21:24, 19:21, 24:20)

- 악한 자에게 보복하면 또 다른 보복이 있을 뿐이니, 오히려 악한 자를 더욱 더 자비를 베풀라. 그래야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구약율법규정에 동해보복법을 먼저 언급하신다. 이는 악을 행한 자를 그대로 두면 또 다시 악을 행하게 되니,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보여주어 동일하게 보복을 가하여 징계를 함으로써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라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완악해서 주신 말씀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해보복법으로 산다면 그는 틀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전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 것이다(5:48).

주님께서는 동해보복법이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신 근본 의도를 사람들이 도무지 헤아리지 못하고 적용하고 있으므로, 차라리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어떤 해를 가한 사람이 누구든지 그에게 어떠한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피해자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피해보상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해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변화를 받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대어주며,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도 벗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는 기꺼이 주며,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다음번의 언급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동해보복법으로서는 원수를 고치거나 건져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이웃사랑규정(5:43~48, 19:18)

이어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당시의 장로들의 유전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율법규정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19:18)’는 규정은 나오지만, 원수를 미워하라는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동해보복법의 연장선상에서 율법사들은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들과 박해자들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가르치신다. 누가복음에는 여기에다가 2가지 조항이 더 들어있다(6:27-28)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요. 둘째로, 우리도 장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존재기이 때문이다(5:45-47).

5:45-47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사람마다 차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에게 인사하는 자만 인사한다면 동해보복법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동해보복법과 원수사랑법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율법말씀을 알고 있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충분조건이다.

 

 

4. 결론

예수님의 율법해석은 그전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하고는 달랐다. 그들은 그 전에 어떻게 했는가를 주목했다. 그래서 유명한 랍비의 해석을 그대로 적용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도 중요했다. 그러므로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처럼 심판의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로 죄인도 만들고 의인도 만들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 해석하거나 와전된 율법조항들을 바로 잡으셨다. 그리고 그 말씀이 원래 의미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조항이나 그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던 관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그 과정도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어떤 조항을 실천에 옮겼는가 하는 그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품었느냐 안 품었느냐를 따져보고,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율법조항의 해석이 잘못되어 남용하고 있는 이혼과 맹세와 같은 규정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보복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고, 그들도 변화되어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도 천국에 들어갈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라. 아멘.

 

 

 

201197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2) 산상수훈(4)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

[찬 송]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434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6:1~18(신약 8)

[키워드]

천국,백성,경건,구제,기도,금식,외식하는자,,위선,은밀한,,상급,하나님,아버지,주기도문,이름,왕국,,시험,악한자,용서

 

1. 서론

우리는 지난 3주에 걸쳐 산상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5장에 나온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공부했다. 5:1~12절까지 나오는 팔복은 천국백성의 윤리강령을 말하는 것이고, 13~16절까지 나오는 땅의 소금세상의 빛은 천국백성의 정체성을 말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17절부터 마지막절인 48절에 걸쳐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천국의 상관관계를 다시 정돈해주시었다. 그 이유는 당시 율법을 해석해줄 뿐만 아니라 또한 과연 사람들이 율법에 저촉된 행동을 했는가를 심판하던 종교지도자들(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율법을 와전시켜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다. 거기에서 사용된 용례는 도덕법의 2가지와 재판법의 4가지를 사용했다. 살인금지조항과 간음금지조항을 먼저 바로 해석해주셨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혼과 맹세, 보복과 이웃사랑에 관한 율법조항을 해석해주면서, 그분이 율법의 제정자이셨음을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 율법을 주신 목적과 뜻을 확실히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5장에 나오는 율법의 6가지 샘플조항들을 통해, 사람이 진정 다스려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성품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천국의 백성된 사람들은 그 내면에 마음으로 짓고있는 죄까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를 내는 것(분노)와 정욕(간음)에 붙잡혀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재판의 규정들은 사람들이 완악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는 이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 이야기 다음순서로서, 종교생활의 핵심적인 3가지 조항인 구제기도금식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얼마나 잘못 사용되고 있는지를 고발하면서, 천국의 자녀된 자들은 은밀한 중에 그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2.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6:1~18)

 

1)본문의 위치 - 천국백성의 3가지 경건생활과 그 원칙(6:1~18)

6장은 크게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6:1~18)는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들에 대한 말씀이다. 즉 사람 앞에 보이려고(칭찬받고, 자신을 자랑하고, 좋게 보이려고) 행하는 사람들의 3가지 경건생활방식의 잘못 위선을 지적하면서, 3가지 경건생활이 하나님 앞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핀다. 이어 후반부(6:19~34)에 가서는 천국백성의 바른 물질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위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로운 행동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3가지 행동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구제(2~4)와 기도(5~15)와 금식(16~18)이다.

당시 사기관과 바리새인들은 3가지 것들(구제,기도,금식)로 자신을 포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람 앞에 드러내려 했다. 그런데 이 3가지 것들을 아랍사람들은 율법의 3가지 기초라고 말한다고 한다. 또한 구약의 외경 토비아에서도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해야 할 3가지 경건이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3가지 것들이 바로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도입부.

특히 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3가지 종교적인 위선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신다. 1절을 보자.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를 드러내는데 사용하는 3가지 경건생활의 방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구제’(6:2~4)기도’(6:5~15)금식’(6:16~18)이다. 그런데 이 3가지 경건생활의 방편은 곧 자기자신(자아)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자 죄된 육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성을 지닌 것들임을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3가지 경건생활을 언급하시면서 동시에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전부 다 외식하는 자들이 자기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고 포장하는 도구들로 잘 이용되는 것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저들처럼 행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그들의 3가지 경건생활의 목표가 아주 악한 것임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자신이 얼마나 경건한지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식의 수단으로 3가지 경건생활의 방편들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백성들을 그것들을 보고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들일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 했으므로, 이 땅에서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어 자기의 보상을 받아버렸기에, 천국에 들어가서는 그들에게 줄 상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의는 보이지 않게 행해야 하늘에 상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위선자들의 행한 3가지 일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로 인한 천국의 상급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주신다. 이제 그것을 배워 보도록 하자. 요약하면 만약 합당한 경건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을 사람이 알도록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백성의 합당한 경건생활의 결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은밀한 보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2)천국백성의 구제생활(6:2~4)

.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구제생활을 하고 있었나?

 

. 그러나 그들의 구제생활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6:2)

그들은 구제할 때에는 은밀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식하는 사람처럼 사람 앞에 나팔을 불어댐으로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가난 사람들에게 구제한 것은 그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로부터 이미 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이로써 그들의 구제생활에 대한 결산이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원래 연극배우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다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밖으로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마치 그러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사람의 구제생활을 경건생활의 하나로서 하나님 앞에 가서 계산되고 그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어야 했지만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이다.

 

. 천국백성의 합당한 구제생활은 어떤 것일까?(6:3~4)

6:3-4 너는 구제할 때에 (너의) 오른손(오른쪽)이 하는 것을 (너의) 왼손(왼쪽)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네게) (공개적으로:표준원문) 갚으시리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원문은 너의 오른쪽’)이 하는 일을 왼손(원문은 너의 왼쪽’)이 모르게금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 은밀하게 하라는 말이면서, 둘째, 신속하게 하라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쉬운 일일까? 주님은 구제하되 은밀하게 하라 하신다. 우리의 구제는 원래 하나님 앞에 가서 계산해야 하는데, 이 계산이 여기서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서 영광받는 것을 피하고 형제자매들의 칭찬을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제를 할 때 감추인 방식으로 그리고 가능한 빨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중에 의를 행할 때 보이지 않는 중에 계시는 천부께서 보시고 갚아주시는 것이다. 사실 천부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마다 주의하시고 그분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준 것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반드시 언제가 다 갚아주실 것이다(직설법 미래 능동태).

 

 

3)천국백성의 기도생활(6:5~15)

.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기도생활을 하고 있었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인의 시간으로 3(오전9), 6(정오), 9(오후3)는 당시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기도시간이었는데, 이 시간이 되면 어디에 있든지 기도를 해야 했다. 이때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당이나 길 어귀에 서서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기도는 엎드려서 할 수도 있고(16:22, 26:39), 무릎을 꿇고서도 할 수 있고(대하6:13, 22:41), 앉아서도 할 수 있는데(삼하7:18), 그들은 일부러 서서 기도했다. 이는 기도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음을 말해준다.

 

. 그러나 그들의 기도생활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6:5,7)

첫째,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외식적인 기도)했기 때문이다(6:5).

그래서 그들은 기도시간에 되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사거리 어귀(모퉁이)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통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서서 기도했던 것이다. 그 기도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기도였을까? 하나님 들으라고 하는 기도였을까 아니면 거기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들으라고 기도한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귀에 들려지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둘째, 이방인처럼 기도(=중언부언하는 기도)했기 때문이다(6:7).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생활을 잘 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주 길게 기도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빈 말들을 되풀이하여 기도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의 패턴이었다. 이방인들은 죽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므로, 아주 길게 해야 그들의 신이 혹시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국백성들은 죽어있는 신, 능력이 없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 천국백성의 합당한 기도생활은 어떤 것일까?(6:6~8)

6:6-8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천국백성의 합당한 기도는 어떤 기도여야 할까?

첫째,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골방기도를 드리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당시 피지배국민으로서 궁핍함에 시달리자 아무로 모르는 창고에 식량을 숨겨두고 식량을 가지러 갈 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극도로 조심해서 갔다 와야 했다. ‘골방이란 바로 식량창고를 가리키는 말이다(12:24). 고로 골방이란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 기도는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들리도록 하면 된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으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고 있으므로, ‘이방인처럼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실 것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 헛된 말, 빈 말을 되풀이하여 많이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짧고 굵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진심어린 기도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생활 가운데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좋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더 말씀하신다. 그것은 기도한 것에 대한 상도 장래에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중보기도는 이 땅에서 응답으로 주어질 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 들어갈 때에는 일종의 상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된 자는 중보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 천국백성의 합당한 기도생활의 예로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주기도문)(6:9~13)

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이와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당신의) 나라(왕국)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우리들의)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부채=오페일레마)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인도하지) 마시옵고 다만(도리어) (우리를) (악한 자:투 포네루)()서 구()하시옵소서 (왜냐하면, 이는)(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때 주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에게 합당한 기도의 예표로서 진정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이다.

첫째, 이 기도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 바로 그분에게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여.”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람의 귀에 들려지게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고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여야 하며, 많은 말아 아니라 길지도 않으며 빈 말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기도를 드리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고 하셨다.

둘째,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기도 즉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와 관련된 기도를 우선적으로 드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동전의 뒷면처럼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며 싸우는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기도생활을 한 번 살펴보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선행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까지 도래하기를 소원하며 비는 기도가 우선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만을 위한 기도가 우선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고 있다고 하셨다(6:8).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들의 필요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기도가 일종의 응답을 바라고 드리는 것이지만 또한 하늘에서도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6, 갚으리시리라).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것은 상급이 기도응답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구할 때,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에는 그것을 결정하시고서 누군가가 이 땅에서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며, 그런 다음에는 그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소돔에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을 구출해야 할 것인지를 아셨지만, 아브라함이 그것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주 예수님게서 이 땅에 오셔샤 했지만 그분은 시므온과 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얻으셔야 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셔야 했지만 120명의 기도를 기다리셨다. 기도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것은 고마운 것이다. 아주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고작 피조물과 싸워야 되겠는가? 사탄천사보다 못한 우리 인간들이 그들과 싸워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의의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둘째 내가 하나님의 뜻을 만지고 기도하며, 셋째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다. 내가 입을 열어 그분의 중심에 있는 뜻을 말하면 그분은 곧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기도가 교회로부터 나오고 많은 기도가 드려진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기 위해서 반드시 깨어져야 할 것들이 있으니 그것은 사탄의 왕국의 그 권세. 사탄의 왕국과 권세가 깨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사탄이 쳐놓은 덫 곧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오직 악한 자로부터 구출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만큼 우리의 기도의 사탄이 쳐놓은 그물을 빠져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질()과 욕정을 제어하기 어렵고 원수를 사랑하기 어려우며, 우리의 경건생활은 늘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칭찬듣기 위해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사탄이 우리 육체 속에 죄된 본성을 집어 넣어두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사탄제국의 멸망과 반비례한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사탄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가 먹어야 사는 사람인지라 일용할 양식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에 그 초점을 맞추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6:14~15)=12절의 주석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12절에 대한 주석이자 보충설명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던 자라면, 응닫 우리는 내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갈 수 없으며, 사탄을 물리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자가 과연 하늘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뻔뻔스럽게 기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을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4)천국백성의 금식생활(기도의 영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6:16~18)

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너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너의)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금식생활을 하고 있었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으로 대속죄일에 금식했다(16:29~31, 219:7). 이것은 정기금식일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금식매주 행하기도 했는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주야 금식한 것을 염두에 두고(24:15~18),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로 여겨지던 목요일과 내려오던 날로 여겨지던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다(18:12).

18:9-12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그러나 그들의 금식생활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6:16)

문제는 금식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금식을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 금식을 하고 있으므로 어찌하든지 자기가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금식할 때면 슬픈 기색을 즉 침울한 얼굴빛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자기의 얼굴을 흉하게 하여 아직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이런 금식기도는 잘못된 것이다.

왜 사람이 금식하며 기도하게 되는지 아는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첫째, 너무나 큰 문제에 직면하여 기도에 집중하다보니 밥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며 드리는 기도가 금식기도다. 영 안의 필요 때문에 몸의 필요를 한 편을 제쳐두는 것이다(24:18, 20:26). 금식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너무나 큰 근심에 눌릴 때에, 신랑이 없을 때에, 너무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에 금식하는 것이다. 둘째, 자기 자신이나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잘못을 범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겸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금식기도다(9:1-2, 35:13). 자신의 잘못이 그처럼 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 천국백성의 합당한 금식생활은 어떤 것일까?(6:17~18)

천국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상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남 앞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광고하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광고한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금식할 때 만약 일부러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면 당신은 이미 상은 결산된 것이다. 금식할 때에는 금식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일부러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고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식하며 기도할 때면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깨끗한 모습, 밝은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치장하라. 하나님은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도 하늘에 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금식하기를 원하실 때에는 금식의 장으로 나아가라(6:1).

 

 

 

3. 결론 - 경건생활인가 종교생활인가

당신의 지금의 경건생활을 살펴보라. 구제하고 있으며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러한 생활을 얼마나 많이 자주하고 있는가보다,천국백성에 합당한 경건생활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과시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들은 그 모든 행위를 사람 앞에 보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효다.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생활을 우리는 경건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경건생활을 하고 있는가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경건생활을 해야, 천국백성인 것이다.

 

 

 

2011921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3) 산상수훈(5) 천국백성의 재물관

[찬 송]

386장 만세반석 열린 곳에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6:19~34(신약 9)

[키워드]

보물,,하늘,재물,,주인,하나님,맘몬신,의식주,생존,염려,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의,내일,천국백성의재물관

1.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분은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늘의 왕자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들어 하늘에 마련된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들은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에 대한 선포요 설명이었다. 특히 4장에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의 선행조건이 회개임을 말씀하시면서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5~7장의 산상수훈에서는 천국백성의 윤리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13장에 가서 천국이 어떻게 씨가 뿌려져 확장되고 열매를 거두게 되는지를 말씀하며, 20~25장까지는 천국의 혼인잔치그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그 백성들의 조건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 말씀은 천국에 합당한 백성의 윤리인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서 천국백성의 재물관(6:19~24)에 관한 말씀과 천국백성의 삶의 우선순위(6:25~34)를 말씀하고 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6:19~34)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재물관의 측면에서 본다면, 6:19~24의 말씀은 부자의 재물관을 말하는 것이며, 6:25~34의 말씀은 가난한 자의 재물관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2. 천국백성의 합당한 재물관(6:19~24)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세상의 물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특히 이 땅에 재물을 쌓아두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천국백성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의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말씀하시며,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것을 권면하신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재물과 신앙 사이의 분명한 우선순위(24)에 대해 말씀해주신다.

 

1)재물에 대한 천국백성의 합당한 태도(6:19~20)

6:19-20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쌓기를 그치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녹이 슬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훔쳐가느리라) 20 오직 너희(자신)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녹이 슬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훔쳐가지도) 못하느니라

천국백성은 보물(보화, 재물)을 모아 땅에 쌓아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쌓아든 재물의 속성은 의복을 갉아먹는 좀과 녹(혹은 벌레)의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백성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우리자신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명령은 단호다.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은 권면이 아니다. 쌓기를 그만두라는 부정명령문이다. 더 지체하지 말고 지금 바로 보물을 땅에 쌓는 그릇된 행동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쌓아도 그것이 저축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가기 때문이다. 쌓아두게 되면 재물은 좀이 먹고 녹이 슬며(혹은 벌레가 먹고) 도둑맞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5:2-3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가장 안전한 소유의 방법은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 즉 헌금하라는 뜻일까? 공생애기간동안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한 말씀이 있다. 그것을 보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의 의미는 첫째, 궁핍한 자들 즉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6:38, 딤전6:17~18, 12:33)

딤전6:17-18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의 의미는 둘째, 그것을 헌금을 하든지, 혹은 직접 궁핍한 성도들을 돕는데 쓰던지, 아니면 선교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이다(2:45, 4:34-35, 11:29, 15:26, 4:16-17).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34-3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4:16-17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오직 자기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재물은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천국백성은 어찌하든지 가진 재물을 나눠주기를 기뻐하며, 하늘에 쌓아두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확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하는 2가지 이유들(6:21~24)

6:21-24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단일하면, 단순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 이유는 2가지다.

첫째, 재물에 대한 잘못된 시야를 갖게 되면 그 사람이 더 큰 어둠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요(6:22-23), 둘째, 결국에는 하나님보다는 재물(맘몬)을 더 사랑하고 중히 여기다가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되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6:24).

우리 인간의 특징은 두 마음을 품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마음만 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6:21).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동물들은 다 눈을 2개씩 가지고 있는데, 두 눈을 지녔지만 모두 다 한 곳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직 카멜레온만큼은 촛점을 2개로 맞출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카멜레온이 될 수 없다. 두 눈으로 한 눈으로는 재물을 향하고, 또 한 눈으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미워하게 되고, 하나를 받들면 다른 하나는 멸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백성이 되었어도 재물을 나눠주거나 돕는데 쓰지 아니하고 오직 모으고 축적하는 데에만 열심을 내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돈(맘몬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19장과 눅19장의 두 부자의 이야기(19:21, 19:8)는 그들이 재물 때문에 하나는 구원을 잃어버리고 또 한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어찌 되었는가? 19장의 부자청년은 자신의 소유를 구제하는 데에 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그는 불순종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19장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더니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2장의 성전을 청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주님께서는 재물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것을 오직 그 재물을 자기자신을 위해 땅에 쌓아두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땅에 있는 재물은 점점 없어져가는 것인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다시 받을 수 있도록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법이라는 말이며, 그것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3. 의식주에 대한 지나친 염려문제와 성도의 우선순위문제(6:25~34)

 

주님은 앞서 부자들의 올바른 재물관에 대해 말씀하셨다(5:19~24).

한 마디로, 사람에게 있어서 재물은 모으는 일보다도 재물을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물은 모아도 점점 더 없어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더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이 모아지면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잘 파악하여 효과있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가난한 성도들과 선교사업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재물이 당장은 없어진듯 보이나,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하고 안전하게 보존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또 쌓을 것이 없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이다(6:38).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1)가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의식주문제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6:25,31).

이어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재물관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6:25~34).

사실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생존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마시고 먹을까 그리고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는 가난한 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그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생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물질을 모으려고 한다. 그들의 고민은 결코 재물을 쌓아두려는 문제가 아니다. 오직 그들의 생존에 대한 것으로서, 그들은 날마다 그것들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한다(6:25)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2)의식주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4가지 이유들(6:26~32)

첫째, 한낱 공중의 새들도 기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더 잘 돌보시기 때문이다(26).

6:26 공중의 새를 보라 (그것들은) 심지도(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둘째,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자기의 키를 더 자라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27).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늘릴) 수 있겠느냐

 

셋째, 들녘에서 저 혼자 피었다가 그 다음날이면 아궁이에 던져지는 이름모를 야생화들도 솔로몬의 옷보다도 더 영화롭게 지으셨는데, 그 꽃들까지 입히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더 잘 입히실 것이기 때문이다(28~30).

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 생각하여(숙고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8절을 직역하면 그의 모든 영광 안에 있는 솔로몬조차도 이것들 하나같이 스스로를 옷을 입히지 못하였더라이다. 이 말은 당대의 모든 부귀와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솔로몬이 이처럼 정성을 다해 차려 입은 지극히 호화로운 의상조차도 들꽃 하나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지극히 미미한 피조물 하나조차에도 하나님께서 섬세한 사랑으로 돌보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은 오죽하겠느냐는 말이다.

 

넷째,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할 줄을 더 잘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32)

6:32 (모든 것들)는 다 이방인들(민족들, 열국들)(간절히)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필요한) 줄을 아시느니라

 

 

3)천국백성의 삶의 우선순위(6:33~34)

6:33-34 그런즉 너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족하기 때문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첫번째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도 당연히 채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33).

먼저는 상대적인 먼저가 아니라 절대적인 먼저라는 뜻으로, ‘첫번째로라는 뜻이다. 그리고 더하시리라라는 미래수동태로서 신적수동태다. 이는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어 천국백성은 장래의 문제에 대해 미리 염려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끝으로 언급하신다(34). 직역하면 이렇다. 왜냐하면 내일은 그 스스로 염려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할 것이므로 자신이 미리 당겨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장래 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권고이다.

 

 

4. 결론

결국 마귀가 쓰는 전략은 2가지.

부한 자들에게는 재물을 계속해서 땅에 더 쌓아두게 하는 전략을 쓰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항상 의식주를 염려하도록 하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한 자들은 재물을 쌓아두는데 힘쓰지 말고 자신의 재물을 나눠주는 데에 힘쓰고, 가난한 자들은 의식주을 얻는 데에 힘쓰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의식주를 반드시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다 속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의 재물관이다.

2011928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4) 산상수훈(6) 천국백성의 판단과 분별력

[찬 송]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7:1~29(신약 9)

[키워드]

비판, 대인관계, 원칙, 기도, 대접, 좁은 문과 좁은 길, 거짓선지자들, 아름다운 열매와 나쁜 열매, 성령의 은사들과 내적인 열매들, 듣고 행하는가(순종)

 

1. 서론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울까? 그것은 마귀에게 속해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몇몇을 천국백성으로 만드시고 열매로 거두시어 천국으로 데려가시고자 오셨다.

그분은 원래 천국에서 왕이셨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이 세상의 임금은 마귀였다(12:31, 14:30, 16:11). 이미 그때 마귀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백성의 종교인들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심판하고,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해 오신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전부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형편이었다(23:13,15).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바로 어둠이 가득한 그곳에 오신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며, 위선적이며 사람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자들이며, 거짓선지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말하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자신도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10: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때 하늘에서 온 왕 중의 왕께서 율법을 재해석해 주시었고, 율법이 말하지 아니한 인간의 내면적인 부분까지 말씀해주시므로, 과연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가를 말씀해 주시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7장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최종 심판자가 다름 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이 모든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평가가 이러했다.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왜냐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같았기 때문이라)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 마태복음 7장의 위치

마태복음 7장의 주제는 심판의 기준이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를 심판하실 텐데, 그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인지를 명확히 말씀하신 것이다.

5장에서 예수님은 천국백성의 윤리의 원리(5:1~12)천국백성의 정체성(5:13~16)을 말씀하신 다음,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율법해석을 바로 교정(5:17~48)해 주셨는데, 그것은 사람의 죄가 행위로 나타난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과 마음까지도 죄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6장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을 공개하셨다. 그들은 위선적인 자들로서 은밀한 가운데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생활(구제와 기도와 금식)하지 않고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한 외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임을 말씀하셨다(6:1~18). 그리고 이어 천국백성의 재물관과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해주셨다(6:19~34).

인간은 원래 두 눈을 가지고 있으나 한 가지 촛점을 볼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듯이 사람을 결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며, 천국백성들은 의식주와 관련된 생존의 문제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이어 이제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천국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만이 심판날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3. 천국심판의 기준(7:1~29)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2가지를 보면 된다. 그가 과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그가 지금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1)첫 번째 심판의 기준(7:1~12):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 방식대로

 

. 심판의 기준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 원리에 따라 우리를 대우하실 것이고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대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7장의 첫 번째 대지의 핵심요절은 2절과 12로서, 서두는 2절이요, 결론의 말씀은 12절이다.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남을 비판하는 그 방식대로(7:1~6)

주님께서는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 한다면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명하신다(1). 여기서 주님께서는 무조건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유익하고 지혜로운 선과 악의 구별이 아니라, 이해심이나 동정심이 전혀없이 상대방을 근거없이 헐뜯을 뿐 아니라 절대 공의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나무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않은 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려고 비판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2절에 나와 있다. 우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내가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한다는 말은 사법적인 용어이며, ‘헤아린다는 말은 경제적인 용어다. 주님은 이 2가지 용어를 거듭 사용하여 이웃을 가혹하게 대하게 되면 동일한 처우를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는 깨닫지도 회개하지도 않으면서도,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비판하는 그릇된 행위를 그치라는 말이다.

 

더불어 한 마디 더 언급하시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분별력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7:6).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남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대한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거룩하고 값비싼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면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발로 밟아버릴 것이며, 오히려 우리를 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을 분별하라는 말이다.

 

. 남을 대접하는 그 방식대로(7:7~12)

또한 하나님께서 그날에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은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 주었는가에 따라 하시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다른 사람이 실지로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 주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받을 심판에서도 그것과 똑같이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제에게 대하여 관대함으로 대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원칙이 바로 우리가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의 원리라고 동시에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형제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 관대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잘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관대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3가지나 말씀하신다. 첫째는 외식적인 기도에 대한 경계의 말씀(6:5~8)이요, 둘째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른 기도의 모범(6:9~15)이요, 셋째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도응답의 확신에 관한 말씀(7:7~12)이다.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을 통해 연거푸 하나님께 구한 것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도, 기도할 때에는 3가지 단계가 있음도 더불어 말씀하신다. 그것은 구하는(요청하는) 단계가 있고, 우리는 하나님께 요청했던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는 단계가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문을 두드리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첫 단계는 마음으로 말로 하는 것이지만, 두번째 단계와 세번째 단계는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첫번째와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지만, 두번째는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 놓고도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이 최종적으로 문을 열어주실 때 가능한 것이다. 구하는 것은 동작이 없는 것을 단지 의사의 표현이지만, 찾는 것은 행동은 있으나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요청에 반드시 응답해주시되,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이 세상의 아버지의 모습과 견주어 말씀하신다. 즉 아무리 악한 아비라 할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떡과 외관상 비슷한 돌을 줄 아비가 없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과 비슷한 뱀을 줄 아비가 전혀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기는 주시되, 좋은 것들로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청한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식에게 해로운 다른 좋은 것들로 바꾸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신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심판의 기준(7:13~29): 우리가 맺고 있는 열매를 따라

 

. 심판의 기준

주님께서는 그 날에 우리가 삶속에 맺은 열매를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말씀에 기반을 두고 행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 심판 때에 자신이 쌓은 모든 공력이 인정받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들은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예수님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 자신의 영적 스승을 두고 따라가려 할 때, 거짓선지자들을 잘 분별해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4가지 대조를 이루는 구조로 설명하신다.

첫째,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13~14)

둘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15~20)

셋째, 거짓된 제자와 참된 제자(21~23)

넷째,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24~27)

 

. 생명과 멸망에 따라(7:13~14)

천국의 백성들이 훗날 심판을 받아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처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과 둘째,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회적이지만, 좁은 길로 행하는 것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 또한 넓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 찾는 이가 적을 것이다. 당신은 과연 어떤 문과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만약 당신을 안내하는 자가 쉽고 편안한 길로 안내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선생이요 거짓선지자일 확률이 높다. 사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 자신이 맺은 열매를 따라(7:15~23)

a.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를 그들이 맺고 있는 열매를 보고 분별하면서 따라가라.

천국백성들은 자신을 인도하는 자가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으로는 약탈하는 이리들이므로, 얼핏 보기에는 그들을 알아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를 인도하는 자가 거짓선지자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멸망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인도하는 자가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주님은 그것은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거짓선지자가 인도하는 곳은 결국에는 멸망이지만, 참된 선지자인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곳은 결국에는 생명이다. 처음에는 다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갔을 때 그 길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은 정반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인도할 스승을 분별하고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을 맡길 참된 스승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실은 그들의 내적 본성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선지자가 맺은 열매는 포도와 무화과이지만, 거짓선지자가 맺는 열매는 포도처럼 생겼으나 포도가 아니라 가시나무의 열매요, 무화과처럼 생겼지만 무화과가 아니라 엉겅퀴 꽃인 것이다. 둘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주님께서 결국 못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찍어서 불어 던저넣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못된 열매맺는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 그것이 천국백성이 살 길이다.

 

b. 지도자가 맺고 있는 열매를 보되, 성령의 외적인 은사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내적인 열매들이 있는지를 보라.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인도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텐데 그들을 심판하는 기준을 정확히 제시하셨다. 그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외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느냐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했으며, 성령의 갖가지 외적인 은사들 즉 예언, 축사, 능력행함이 얼마나 많이 나타났느냐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인 열매를 따라 판단하시겠다고 하신다.

 

.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했느냐 하는 결과를 따라(7:24~27)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의 때에 어떤 사람이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 같아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광풍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힌다해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비와 홍수 그리고 광풍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시험하는 도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 같아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광풍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4. 결론

우리는 마태복음 7장을 통해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어떤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인지를 말씀해주신다. 그 말씀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남들에게 행한 방식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대로 남에게 대접을 베풀어야 한다. 남에게 관대한 자는 심판날에 가서도 관대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행한 대로 즉 우리가 맺은 열매를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하는 말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맺고 있는 열매가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내가 과연 어떤 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어떤 길에서 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나를 인도하는 인도자가 과연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좁을 길을 따라 가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스승을 따라가야 한다. 자신을 인도하는 스승이 맺고 있는 내적인 열매들이 못된 열매라면 그는 거짓선지자다. 왜냐하면 열매들은 그들의 본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불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심판날에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즉시 그대로 행하는 실천적인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20111005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5) 왕의 권능-질병과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

[찬 송]

473장 괴로움과 고통을 친히

472장 네 병든 손 내밀라고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8:1~9:8(신약 11)

[키워드]

나병환자,백부장,베들호의장모,소ㅓ기관,제자,바람과파도,귀신들린자,중풍병자,죄사함,하나님,왕의권능

 

1. 서론

우리는 지난주까지 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5시간에 걸쳐 공부했다. 그런데 보라.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곧이어 8장과 9, 2장에 걸쳐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마8-9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그 순서가 다르게 나온다. 특히 사건을 시간적으로 구성한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사건은 문둥병이 치료받는 사건 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연이어 발생한 것이 아니다. 5~7장의 산상수훈이 단 번에 주어진 말씀이 아니듯이 마8~9장의 사건들도 연이어 단 번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났던 사건을 한 곳에 집중하여 기록하였고 또한 어떤 의도에 의해서 이 순서를 정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고 실제로는 아무런 권세와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니라 말씀과 실제를 동시에 소유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므로 마태기자는 8-9장에 걸쳐 10가지 사건(이들 중 치유사건은 7가지)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고 자연만물의 통치하는 권세와 능력을 지닌 분으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말씀에 권세와 능력이 있는 바로 그러한 분이심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유해 주셨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라 명령하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 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왕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8~9장의 주제는 왕의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천국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려주기 위해서. 8~9장의 기적적인 치유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이방인도 섞여 있었으니, 가버나움의 백부장가다라지방의 귀신들린 자 둘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복음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복음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마태기자는 예수님의 탄생의 사실을 알고 경배하러 온 자가 누구였다고 소개했는가? 바로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오늘날 이방인도 믿음만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2.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신 예수님(8:1~17)

 

1)유대인의 문둥병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8:1~4)

마태기자는 치유사건 중에 가정 먼저 한 나병환자의 치유사건을 기록한다. 그는 주님께서 우선적으로 유대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15:24).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맨 처음 마태기자는 주님께서 한 유대인 나병환자를 고치셨음을 기록한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가 제사장에게 가서 고침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레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기자는 주님께서 유대인 중에서 나병환자를 주님께서 고쳐주셨고, 그가 고침받게 된 사실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주님께서 말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기록하고 있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마태는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에 걸려 도저히 스스로는 치유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려 함이며, 둘째, 당시 제사장들이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고침받을 수 없는 나병이 주 예수님으로 인해 치료받은 것을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려 함이다. 마태기자는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주님께서 그토록 유대인을 사랑하사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하는 바램을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 이제 우리도 유대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한 번 읽어보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8:3).”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8:4)”

 

 

2)중풍병에 걸린 이방인의 종을 치료하신 예수님(8:5~13)

그리고 이어 마태는 백부장의 하인(아이)을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치유사건 뒤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 보라(8:10~12).

8:10-12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으며,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3년 뒤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일한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을 보라. 그는 갈릴리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다. 갈릴리 지역의 군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갈릴리 북부지역에 위치한 레바논이나 시리아에 거주하는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이 군대의 조직에 백부장 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유대민족을 사랑하여 가버나움의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의 장로들도 그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7:2~6). 그런 그가 자신의 하인(원문: 아이)이 중풍병에 걸려 거의 죽을 무렵이 되었다. 그는 하인을 꼭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했으나 그가 병들어 죽게 될 지경이 되자, 예수님을 찾아가 그에게 간구하였다. 주여, 내 하인(아이)이 중풍병으로 집세 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다. 한편 본문은 그 문장을 의문문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가서 고쳐 주어야 한단 말이냐?”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8:8-9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지붕 아래)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지만 그는 첫째, 겸손했다. 예수님의 완곡히 거절하는 말씀에도 결코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 그는 주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자신의 하인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만 말씀만 해도 자신의 하인이 치유될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의 말은 권위가 있어서 그 밑의 군인들이나 하인들이 그의 말에 전부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다. 유대인은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과 교제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셔서 치유하지 않아도 아이가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님 앞에 내놓은 것이다. 그의 말은 이와같은 것이었다. 이방인인 제가 감히 어떻게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낫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는 남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그 권세로 인해 교만하거나 방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예수님을 분별할 줄 아는 겸손이 있었고, 그분의 권세를 신뢰하는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백부장의 사려깊은 생각에 매우 놀라워하셨다. 그를 극찬하셨다. 이스라엘에서도 그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 자체에 권세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순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권세가 과연 사람의 병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진정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3)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예수님(8:14~15)

이어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곳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일종의 전염병)에 걸려 누워 있었다. 그러자 주님은 친히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만지셨다. 그러자 열병이 즉시 떠나갔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때 열병을 꾸짖으셨다(4:3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는 주님의 치유의 기적을 맛본 그 여인은 예수님을 수종드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병을 꾸짖을 수 있을까? 분명 사람의 병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귀신들이다. 사람이 병드는 것은 귀신들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치유의 사역을 계속 담당하시면서, 질병의 배후에 어떤 영적 세력이 있다는 것과 그 병든 사람의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긴다는 것을 점차 드러내셨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같은 경우는 그 배후에 열병을 일으키게 하는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4)각종 병든 자를 치료하신 예수님(8:16)

그러자 가버나움 근방의 수많은 병은 사람들귀신들린 자들도 많이 주님께로 데려왔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리고는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러자 병든 자들 속에 있는 귀신들이 떠나가면서 병든 것이 나았다.

 

 

5)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든 자를 고치신 이유(8:17)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단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함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의 약한 것을 강하게 해 주고, 질병까지도 치료해주시어, 영육간의 온전한 건강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 예수님께서 생각해 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3. 삽입된 이야기 두 편(8:18~22)

8:18-22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사역 가운데 삽입된 이야기다. 이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각오와 결단함부로 행하는 쉬운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한 번 결단이 섰다면 주저없이 그 일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한 명은 서기관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12제자는 아니었고 당시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첫번째로 서기관의 결단이 놀랍다. 당시 그 어떤 서기관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즉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 용기와 결단이 가상하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즉 랍비로서 따라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우도 때가 되면 자기가 쉴 굴이 있으며, 공중의 새도 쉴 거처가 있어 그리 들어가 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는 자는 어떤 쉴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때로는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되겠느냐?” 그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인데도 말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도 없을 수 있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남이 끌어가는 곳에 끌려갈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예수님은 단지 가르침을 잘 전하는 선생님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제자가 되는 길이다. 그분처럼 외로움도 견뎌내야 하고 고통과 고난도 이겨내야 한다. 당신도 그럴 수 있는가?

두번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제자로서 길을 가려고 작정하고 있던 자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부친이 죽지는 않았지만 꼭 죽거나 아니면 병을 앓고 있어서 곧 운명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부친이 죽으면 먼저 그분을 장사지내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앞 날을 우리는 어떻게 미리 짐작할 수 있겠는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이 섰다면 그래서 하늘의 부르심을 직감했다면 주님을 따르는데 주저 하지 말라. 심지어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좇으라. 영이 죽은 자들도 얼마든지 육체가 죽은 자들을 장사할 수 있다. 너는 영이 살아 있는 자로서 사람을 살려야 되지 않겠는가?”

 

 

 

4. 자연만물과 귀신의 세력들을 제어하신 예수님(8:23~34)

 

1)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8:23~27)

갈릴리바다에서 거대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현상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어서일까? 얼핏 보기에 그것은 자연현상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사탄의 세력이 알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8:18,23).

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그렇다. 주님은 지금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시고자 배를 타신 것이다. 거기에는 귀신에 시달려 고통받는 자 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벌어질 일들을 직감한 사탄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주님께서 배를 타고 피곤하시어 잠을 주무시고 있을 때 그들은 바람과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라는 단어는 그냥 폭풍이 아니다. 특별히 거대한 폭풍’, ‘엄청난 파도로서 원수가 기회를 잡아 주님을 없애려고 즉 주님을 바다에 순식간에 수몰시키고 싶어서 일으킨 폭풍이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자연현상처럼 보이는 이면에 어둠의 세력들이 숨어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사실 소금기가 없는 담수호이다. 그러므로 호수라고 불러야 옳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파도가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같아서 사람들은 그 호수를 바다라고 표현했다. 갈릴리 바다(4:18), 디베랴 바다(21:1).’ 갈릴리 바다는 실제 해수면이 213m이며, 수심이 평균 61m정도 되는 거대한 호수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특이한 지형 때문에 해수면의 온도가 급상승할 때가 있었고 남동쪽에 위치한 고원으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면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곤 했다.

함께 배를 탄 12명의 제자들은 거대한 파도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었음을 예수님께 하소연했다. 그들도 배를 타고 많이 다녀보았지만 그때처럼 어마어마한 파도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파도와 폭풍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 배후에 있는 영적세력을 보았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를 향해 꾸짖으셨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12제자들은 당시 거대한 폭풍을 보고 무서워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어야 했다. 그동안 주님께서 어떤 기적들을 일으켰는가? 사람으로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그분이 자연만물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임을 직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대한 폭풍만을 볼 줄 알았지, 자기들이 타고 있는 배 안에 온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는 두려워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신다. 내가 여기 있는데, 왜 그리 발광하느냐. 좀 잠잠하라.”

 

 

2)가버나움의 건너편 가다라 지방의 이방인인 귀신들린 자 둘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8:28~34)

주님의 관심은 바다에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귀신에 시달려 아무도 제어하지 못해 사납게 날뛰고 고통받는 두 사람에게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바다를 건너 가다라지방으로 가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이 사납게 변해버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나중에 보면, 그 두 사람 속에는 귀신이 2천마리(5:11)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2천명이나 되는 귀신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도 그들을 어거할 수 없었다. 심지어 쇠고랑을 채워놓았지만 그것을 끊어버릴 정도였다.

이들은 이방인들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을 고쳐주시려고 일부러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 가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두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은 영적 지식이 인간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귀신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미리 안 것이다.

둘째, 때가 되면 자신들이 무저갱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종말의 때일 것이다.

셋째, 그렇지만 주님께서 오셨으니 자기들을 쫓겨날 것이 뻔한데, 기왕 쫓아낼 것이라면 돼지떼라도 들어가도록 선처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현은 곧 자신들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귀신들은 그 두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떼가 들어갔다. 하지만 돼지들도 귀신들 때문에 미쳐버렸다. 그래서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어버렸다.

동네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저 분을 계속 모셔두었다가는 남아나는 것이 없겠구나싶어서, 예수님더러 자기 동네를 떠나달라고 간청한다. 이는 자신들의 영혼을 살리러 온 예수님보다는 돈이 되는 돼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5. 특별한 하나의 치유 사건(9:1~8)

중풍병자 치유사건 중에서 9:1~8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은 좀 특별하다. 사실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이미 백부장의 종이 걸린 질병이었으므로 그러한 질병의 치유사실을 다시 여기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기자는 일부러 다시 어느 중풍병자의 사건을 여기에 연이어 기록했다.

마태기자는 그 치유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모든 질병은 다 죄에게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과 둘째, 동시에 예수님이 바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려주려고 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본 동네인 가버나움에 다시 오셨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왔다. 지붕을 뚫고 내렸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는데, 이번에 치유 전에 한 가지 순서를 더 집어넣으셨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셨고 그 다음에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때 사람들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들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을 어찌 사람이 할 수 있을까하면 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네 죄들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은 그냥 단순히 말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를 가져와야 하므로 더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죄들을 사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먼저 죄들사함을 선포하신 후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그 친구는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누가 죄를 사할 수 있을까? 오직 자기에게 죄지은 자들을 그 사람만 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죄를 짓는 것일까? 하나님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셨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질병들의 원인이 죄로 말미암고 있다는 것이다. 5장의 38년된 중풍병자에게도 주님께서 고침받고 돌아다니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렇다. 사람의 질병과 고통은 죄와 상관이 많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질병도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이다. 죄를 짓지 말라. 그것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중의 비결이다.

 

 

6. 결론

주님의 치유와 축사의 기적에는 주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가 적나나하게 드러난다.

그분은 첫째, 질병을 다스리시는 치료자이시다. 둘째, 질병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귀신들을 축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셋째,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아니라 바람과 풍랑 속에 숨어서 역사하는 귀신들을 보시고 그들을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넷째, 그분은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한다면 선민이건 이방인이건 가리지 않고 다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쉽게 보지 말아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면 그 즉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11012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6) 왕의 권능(2)-사망과 장애까지 다스리시는 예수님

[찬 송]

473장 괴로움과 고통을

472장 네 병든 손 내밀라고

0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9:9~38(신약 13)

[키워드]

마태, 세리와 죄인들, 금식, 회당장 야이로, 12해 혈루증 여인, 소경, 귀먹고 어눌한 자, 귀신, 3대사역, 목자없는 양, 추수할 일꾼

 

1. 서론

이번주도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사건들을 계속해서 다룬다. 하지만 이번주의 말씀들에는 속주제가 있다. 저는 그것을 은혜 혹은 긍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 그런지는 오늘 본문강해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곧이어 8장과 9, 2장에 걸쳐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한 나병환자와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치유하시는 당면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고 가버나움 일대의 병든 자와 귀신에 시달리는 자들 그리고 가다라지방의 귀신들린 자 둘을 온전케 하시고, 예수님에 머물고 있는 집의 지붕을 뚫어 달아내린 한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중간에 주님을 따르시는 한 서기관과 자신의 부친을 장사지낸후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어떤 제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배웠으며, 바람과 풍랑까지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배웠다.

그렇다. 예수님은 병들고 고통받고 신음하는 자들의 아픔을 모른 채 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치료하시고, 자연만물까지도 다스리심으로서 하늘의 왕국을 이 세상에 가져올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으며, 예수님은 가르침(산상수훈)만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실제에서도 뛰어난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즉 말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차원이 다른 분이셨던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8~9장의 사건들 중에서 뒷부분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병든 자들을 사랑하시며, 육체적인 보지 못하고(소경), 입은 있으나 귀신에 눌려 말하지 못하는 자(벙어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랑하셨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2.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9~13) -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자신의 일을 크게 보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자신의 집에서 커다란 잔치를 열었었다(5:29). 하지만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 잔치집이 예수님이 기거하던 집인지 아니면 베드로의 집이었는지 애매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잔치를 연 곳은 자신 곧 마태의 집이었다고 누가복음은 전한다. 그리고 그도 유대인이었기에, 그에게도 유대식의 이름이 있었다. 레위(5:27)’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태라고 칭했다. 그 이름은 사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자신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1)죄인을 불러내어 자신의 제자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세리 마태의 집을 지나가셨다. 그리고는 그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선다.

세리 마태는 자기를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큰 잔치를 열게 된다. 그곳에는 다른 세리들과 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들과 만찬을 즐기셨다.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접대에 참석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신 것은 그들과 극도의 친밀감과 인격적 교제를 하셨음을 의미한다.

 

 

2)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난 속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

그때였다. 예수께서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놓고 비난할 수 없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책망했다. 어찌하여 당신의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느냐(9:11)” 그때 그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해주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남을 가르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워야 할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경건함을 보이기 위해 드리는 제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긍휼(, 헤세드)을 베푸시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기는커녕 그들을 죄인들이 비난했고 함께하지도 아니했다. 그들을 왕따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자신은 병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인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이 아프다고 말하는 자들의 의사가 되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왔다.”

예수님의 보시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마음이 병들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세리라는 직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금징수자들은 이방인이었던 로마인들을 위해 충성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돈을 짜내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는 매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친구가 되어주려고 하는 자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세리와 죄인들은 긍휼히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제사드릴 수 없는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을 소외시켰고 멸시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의사였다.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만 고치시는 의사가 아니라 사람의 아픈 마음까지도 치료해주시는 참된 의사였던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라.

 

 

 

3. 요한과 바리새인의 경건방식인 금식 논쟁(9:14~17)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시던 곳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있었다.

 

1)요한의 제자들의 질문(9: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당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잡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유대인의 전통적인 금식일(월요일과 목요일)에 자신들도 금식하고 자신의 스승도 이미 감옥에 갇혀서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자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2)옛 경건방식과 새로운 왕국에 합당한 경건방식(9:15~17).

그러자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2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9:1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는 것이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혼인집에서 잔치하고 있기 때문에 혼인집의 아들들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길 날(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면)이 곧 찾아오면 그때는 금식할 것이란다. 여기서 혼인집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맏아들로서 먼저 결혼하신 후에는, 그 혼인집의 아들들인 제자들도 이어 결혼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옛 종교의 경건방식인 금식은 새로이 역동하는 복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2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사실 유대인들은 당시 전국적인 금식일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월요일과 목요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은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낡은 옷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생베조각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가리킨다. 또한 새 포도주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낡은 가죽부대유대교의 고루한 사상을 가리킨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는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 경건방식 안에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한 관리의 딸과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의 소생 및 치유사건(9:18~26).

이 사건은 유대인의 영적 상태와 구원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임과 동시에 그 사이에 이방인이 들어와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다. 특히 믿음의 옷가를 만진 여인을 치료해주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그녀가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은 배척과 냉대로부터의 치유까지 받았음을 의미한다.

 

1)한 관리의 딸의 죽음과 소생의 기적 사건(9:18~19, 23~26)

이 사람은 가버나움의 회장당인 야이로였다. ‘관리라는 말의 원문은 아르콘이다. 이는 다스리는 자, 지도자, 우두머리, 책임자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10명의 회당관리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신앙이 경건하고 덕망을 갖추고 지도력이 있는 3사람을 선출하여 회당장으로 임명하였다. 야이로는 그 3명의 회당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12살 먹은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예수님이 유대나라에 오실 당시 죽어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

하지만 회당장은 주님을 찾아와 그에게 엎드려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한다. 주님은 그를 따라간다. 중간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만나 지체하긴 했지만 주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소녀는 죽어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며, 그 소녀가 살아날 것으로 믿는 회당장 부부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시체를 뉘인 방에 들어가 달리다굼하시면서 그 소년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 그러자 그 소녀는 살아났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시고 주님께서는 지금도 달리다굼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죽어있는 자라 할지라도 살기를 바라는 자들의 믿음에 따른 보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의 치유 사건(9:20~22)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로 알려져 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질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에서 피와 땀을 닦아주던 그 여인이다. 성경에서 이 여인은 12년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왔던 여인이다. 자궁에서 출혈이 멈추는 않는 질병으로, 구약성경 15:25~27에 의하면 부정한 질병에 걸린 여인이다. 더욱 더 이 질병이 좋지 않은 것은 이 질병에 걸린 자와 접촉만 해도 그 사람이 같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수많은 의사들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인생에서 주님을 만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주님 몰래 뒤로 와서 옷가를 만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질병을 고치려 했다면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 여인은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이 예수님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그의 옷가만 접촉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옷만 더러워질 뿐 예수님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그렇게라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라. 그 여인의 그러한 강력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뽑아서 자신의 질병의 근원까지 말려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여인은 이방인의 상태를 의미한다. 12년동안이나 그 여인은 병을 고쳐보려 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12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한 절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원래 유대인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그래서 그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자신의 믿음으로 등장한 한 여인이 있었으니 이 여인이 바로 이방인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행위를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자신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치유능력을 가져간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을 일부러 찾아내었고 칭찬해주었다.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구절에 의하면, 이 여인의 병을 낫게 한 요인은 예수님의 옷가가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할렐루야. 만약 그녀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 하더라도 그녀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 여인은 돌에 맞아 죽었을른지도 모른다. ,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주소서. 아멘.

 

 

 

5. 두 맹인과 귀신들려 말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9:27~34)

 

1)이 두 사건의 의미하는 것

첫째, 이 두 사건은, 당시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이지만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과 귀신들로 인하여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유대인들을 치유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힘을 빌려 사람을 온전케 한 것으로 몰아 붙히려는 그들의 간악한 상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2가지로 병들어 있었다. 하나는 자신들의 자체에 병이 들어 있었고 또 하나는 귀신들로 인하여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육체의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그 육체가 병이 들어 있었기에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으며, 진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귀신들의 세력에 눌려 전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주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치유하시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야이신 것을 즉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자들을 고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35:5~6)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2)두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님(9:27~31)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있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비록 박학한 지식과 건강한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었던 반면,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야로 인정하는 밝은 영적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영적인 안목은 외형적인 배움의 조건과 신분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두 소경은 육체적으로 소경이었으나 소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백을 보라. “다윗의 자손이여그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부를 때다윗의 자손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했는데, 두 소경은 그 호칭을 사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3)말못하는 자(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9:32~34)

사람이 말을 못하는 것은 들을 수 없어서다. 이 사람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말못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코포스. 그 뜻은 무딘, 둔한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무디고 둔했다. 그래서 듣고도 듣지 못했고, 들어도 고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비단 자신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귀신들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어, 벙어리되고 귀먹은 자로 하여금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해 주시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안에서 귀신을 쫓아낸다고예수님을 모함하고 있다.

 

 

 

6. 예수님의 3대 사역(9:35)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갈릴리사역의 요약으로서 예수님의 3대사역을 살펴볼 수 있다.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것은 교육과 전도와 치유사역이다. 첫째, 예수님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리고는 왕국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든 것과 약한 것들을 치료하셨다.

 

 

7. 추수할 영혼들과 복음사역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필요성(9:35~38)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무리들(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에게는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참 목자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삯군목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많은 추수할 일꾼들 즉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위해 필요한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9:37-38 이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는 곧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자가 탄생하는 것은 자신이 자원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일인 것임을 상기시킨다. 추구할 일꾼들(복음사역자들)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강권적으로 파송하실 때에 되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8. 결론

오늘 우리가 공부한 내용은 한 마디로 기적을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긍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인들을 사랑하사 당시 죄인들의 대표인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새로운 왕국에 합당한 경건방식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병든 자들(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눈먼 두 소경)을 치료해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예수님(회당장 야이로의 딸), 귀신들을 쫓아 자유케 해 주신 예수님(귀신들려 귀먹고 벙어리된 자)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이처럼 긍휼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제자삼으시고), 왕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 이 모든 것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20111019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7) 12제자의 임명 및 파송

[찬 송]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

508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499장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0:1~11:1(신약 14)

[키워드]

제자, 사도, 권세, 12사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전대, 두 벌 옷, 지팡이, 평안, , 비둘기, 핍박, 고난, 영혼, 지옥, 가족, 시인,

 

1. 서론

우리는 지난 두 주간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질병을 치유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사건을 통해 그분이 바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요, 하늘의 통치자이시며,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임명하시고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들려준 교훈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이 세상 속으로 파송받은 존재임을 감당할 때(증인으로 파송받은 존재이기에), 앞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사람으로서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12제자의 임명(10:1)

 

1)언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람들을 제자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여하시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로 볼 때, A.D.28년 초쯤의 일이요,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시기는 A.D.28년 말이나 29년 초쯤이다. 그러므로 본문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닌 것을 살펴볼 수 있다. 4절에서 5절사이에는 적어도 6개월 이상의 간격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자 마태는 12제자의 부름사건을 여기에 두었을까? 그것은 9장의 끝부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귀신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들 보실 때,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들을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12제자들을 일꾼으로 삼으사 추수할 영혼들을 구원하러 가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2)무엇을 주어 보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그냥 보내시지 않았다. 그들에게 2가지 것을 주어 보냈다. 아마 그것은 안수식으로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받은 것은 첫째, 더러운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축사의 권세였고, 둘째,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치유의 권세였다. 당시 축사와 치유는 복음을 증거하는 12명의 자들에게 꼭 필요한 준비물이었으리라.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축사와 치유의 권세 이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배낭이나 전대(돈주머니), 심지어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다.

축사와 치유의 권세는 사실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것이다(9:35).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가 관심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은 전도받을 대상자들의 영적인 상태와 육체적인 상태를 잘 지켜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분명 예수의 이름으로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3)그들은 누구의 제자였는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를 불러내셨다.

 

 

 

3. 12사도의 이름과 특징(10:2~4)

1)많은 제자들에서 12사도로

한편, 마태는 예수님께서 선택한 12제자의 이름을 기록한다. 특히 12제자를 일컬어 마태는 12사도라 칭하였는데, 이는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주 많았지만 특별히 12명만을 사도라고 칭했다는 것이며, 둘째, 그들을 선택한 목적이 세상으로의 파송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사도라는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도였고,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였던 것이다. 28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 속으로 파송된 예수님의 사도들이다.

 

 

2)12사도의 특징

 

첫째, 12명이라는 숫자를 보라(19:28, 7:4).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12명만을 뽑은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계승한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19:28).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에 1,000을 곱하면, 육적 이스라엘의 구원받을 영적인 숫자 144,000명이 나온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다.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둘째, 이들의 직업과 신분을 보라.

그런데 12사도들의 직업과 신분을 살펴보라. 이들은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12사도들은 당시 사회적,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첫째, 대부분 어부들이었고 둘째, 죄인취급받는 세리(마태)였고, 셋째, 열심당원(카나나인 시몬)이었다. 넷째, 그 직업이 모호하거나 직업이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 중에는 제사장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없었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신분적으로 볼 때, 특별히 주목받을만큼의 뛰어난 경력과 지식의 소유자가 없었다.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출신 성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점은 그들은 주님의 부름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뽑을 때 그들의 출신이나 배경이나 학벌을 보지 않고 그들의 순종의 태도를 보셨다는 것이다.

 

 

 

4. 12사도의 전도사역 대상과 내용 및 전도사역자로서 가져야할 자세(10:5~15)

 

1)누구에게 전도할 것인가?(10:5~6)

주님께서는 12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게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이스라엘 민족)의 잃어버린 양(이스라엘 사람들)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이 말의 뜻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정할 때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야 복음전파가 효과적으로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복음을 전해주었을 때,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자에게 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첫번째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동안 흑암 가운데서 메시야를 기다려왔고, 그분이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다들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더라도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보다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후에 주님은 복음전파의 대상을 만민으로 확대하셨던 것이다(16:15, 28:19)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무슨 내용을 전할 것인가?(10:7~8)

천국이 도래했음은 전파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라는 것이다. 이는 세례요한도 그랬었고(3:2), 예수님도 그렇게 했었던 것이다(4:17). 우리가 전할 복음은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치유와 축사도 필요한 것이지, 치유와 축사가 복음전파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복음전파에는 반드시 치유와 축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떠나보내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 하시면서, 치유와 축사의 권세를 안수함으로 주시며 보냈던 것이다(10:1).

한편, 치유와 축사를 개인축재의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이러한 권세를 돈 받고 예수님께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다, 치유와 축사의 권세가 필요한 자들에게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것을 말씀하신다.

 

3)무엇을 준비해서 나가야 할 것인가?(10:9~10)

치유와 축사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영적인 것을 뿌렸기 때문에 육적인 것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이나 자신을 보호할 것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첫째, 여분의 돈을 가지고 가지 말 것. 둘째, 배낭에 두 벌 옷이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말 것. 셋째, 지팡이를 가지고 가지 말 것.

여행자의 기본적인 필수품은 무엇일까?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다. 이것이 무겁다면 돈을 준비해 가면 된다. 옷과 신발은 떨어지게 되면 사서 입고 신어야 하기 때문이요, 지팡이는 사나운 짐승들이나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 주님께서는 복음전도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예비해서 공급해 주실 것이고, 친히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4)그들의 영접과 배척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10:11~15)

어느 곳에 가든지 전도자들을 받아줄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성과 도시를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각 성과 도시에 전도자들을 받아줄 사람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가정에 들어가든지 반드시 그 가정을 위해 평안의 축복기도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사도들이 빌어준 평안이 그 가정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들을 배척하거나 사도들의 전도의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그 성에서 나가서 발의 먼지까지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이는 곧 그들을 이교도 취급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배척에 대한 보응을 심판날에 그들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도들에게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당당하게 행동하라. 비굴하게 굴지 말라. 그리고 각처에 주님이 예비하신 손길이 있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리야가 정처 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갔지만 그곳에는 사르밧과부가 있었고, 엘리사가 가는 길목에 수넴여인이 있어서 쉴 곳을 얻었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의 사역자들을 환대하면 거기에 합당한 복이 임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환대해 줄 것이고, 그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런 복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복음을 전파하는 종들을 환대하는 것은 복음전파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브라함이 주의 천사들을 환대하자,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게 되리는 축복의 말을 받았다(18:1~15). 이 심판의 천사들을 보호하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그의 식구까지 그 성을 빠져나오게 되었다((19:1~23). 사르밧과부가 엘리야를 도와 음식을 만들어 주었을 때, 기근이 있는 동안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던 것이다(왕상 17:8~16).

 

 

 

5. 복음전파자가 현장에서 만나게 될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10:16~39).

이어 예수님께서는 복음전파자들이 현장에서 받게 될 핍박과 고난을 언급하면서, 절대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 것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전파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받게 될 상급을 말씀하신다.

 

1)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과 당부(10:16)

예수님을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양들을 이리들(핍박자들, 복음전파자를 해치려는 세력들)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사탄의 이리가 아닌 사람의 이리떼 가운데로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다. 그들의 사탄의 세력들 즉 귀신들이라면 축사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복음사역자들은 첫째, (3장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복음이 생명이고 소중하지만 무작정 들이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핍박자들에게 다가갈 때에는 특히 지혜롭게 행동하고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이는 복음을 전파할 때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2)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할 핍박 예고 및 관련 교훈(10:17~23)

이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을 핍박할 대상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는 사람들로서 유대인들이 그들이며(17), 둘째는 (로마)총독들이며(18), 셋째는 임금들이며(18), 넷째는 이방인들일 것(18)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족(형제와 부모와 자식들)일 것(21)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핍박자들에게 끌려가고 잡혀가게 될 때에 어떻게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시에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지만 끝까지 견디어야 내야 한다고 한다.

 

 

3)핍박 가운데서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믿음의 촉구(10:24~33)

그리고 영적인 법칙으로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며,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못한 것처럼 집주인인 예수님을 핍박한 자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부르면서 핍박했는데, 그 밑에 있는 제자들이야 오죽 핍박하지 않겠는가하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코 핍박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장차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은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은 죽어도 혼을 죽이지 못하는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혼을 동시에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핍박을 당하지라도 결코 염려하지 말라. 냐하면 우리는 날아다시는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만큼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당시 참새 2마리값은 한 앗사리온이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1/16이었다. 정말로 변변찮은 값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참새 중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복음전파자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겠느냐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 때 우리가 우리 주님을 시인해야 심판날에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시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10:32~33).

 

 

4)제자들이 세상과 겪게 되는 갈등의 필연성의 강조 및 절대적 헌신의 요청(10:34~39)

주님께서 우리 가족에 오실 때, 항상 주님이 주시는 평화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원수는 멀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기 가족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10:36).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운 나중이 되면 가족이라도 죽는 데까지 자기 가족을 내어줄 것이다(10:21). 결국 우리 주님이 오신 것은 믿는 가족과 믿는 않는 가족간의 불화를 초래하게 되어 있다(10:36).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일시적인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버리고 악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둘기처럼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는 순결해야 한다.

복음이 어떤 경우에는 본문처럼 가족간의 불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때라 할지라도 가족의 화목을 선택하기보다는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부모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께 합당한 것이 아니다(10:37). 핍박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찌 주님을 따른다고 할 수 있을까?(10:38) 그리고 주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10:39).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비록 육신은 죽었으나 영혼은 절대 죽지 아니하고 주님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 불신자들과의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이다. 그 갈등과 분쟁의 대상은 꼭 이방인이나 권세자들만이 아닌 가족도 들어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6. 복음전파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받을 상급(10:40~11:1)

그렇다면 복음전파자들을 영접하여 그들을 돕는 자들은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일까? 40절을 주의해서 한 번 읽어보자.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요 곧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일하고 있는 복음사역자를 영접하는 것은 당연히 거기에 따른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되고, 의인으로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듯이,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복음전파자에게 작은 친절이라도 베푼 자는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냉수 한 그릇이라고 주면서 복음전파자를 위한 섬기는 것은 그 보상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며, 12사도들을 파송하기 전에 그들에게 말씀으로 교훈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순회사역을 위해 그고을을 떠나가신다.

 

 

 

7. 결론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선택하사 사도 칭한다. 우리 주님을 대신하여 파송받은 자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야 할 지,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한 여행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사람들을 만났을 때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막막했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12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덧붙혀 그들이 선교하러 나가야 장소인 세상이 만만치 않은 곳임을 일러 주신다. 세상에서 복음전파자들을 맞을 대상이 사탄과 귀신들이라면 축사라도 할텐데,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이용하여 복음전파자들을 방해하고 핍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는 핍박을 각오하라 하신다. 예수님도 핍박했는데 그 밑에 있는 제자들은 당연히 핍박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이 아무리 핍박을 해와도 몸만 죽일 뿐 영혼을 죽일 수 없기에,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다.

심지어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핍박할 자들은 같은 민족과 총독들과 임금들과 이방인들이지만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족이 자기를 핍박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아마 우리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자들이 가는 곳마다 미리 예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기거할 집도, 음식까지 마련해두었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자들이여, 담대하라. 기뻐하라. 그날에 상급이 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복음전파자들을 영접하고 냉수 한 그릇이라고 대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복음전파자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들을 섬기는 성도들이 된다면 그들 또한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20111026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8)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두 갈림길

[찬 송]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523장 어둔 죄악 길에서

52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1:2~30(신약 16)

[키워드]

세례요한, 천국, 여자가 낳은 자, 율법과 선지자, 메시야관, 탐식가, 술주정뱅이, 회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어린아기들,,안식

 

1. 서론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30년을 뛰어넘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던 세례요한. 그로 인하여 천거된 예수님은 진정 천국을 이 땅에 가져오게 하는 분이다. 주님은 이어 천국백성들이라면 마땅히 지녀야할 천국헌법을 선포하셨고, 그 천국이 이 땅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주셨다. 그리고 그의 사역을 이어 세상에 천국의 도래를 선포할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중에서 12사도를 임명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이 받게 될 핍박의 상황 등을 소개해주시며, 걱정하지 말라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참새보다 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보호자가 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이 보냈으니 주님의 사도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사역하되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신다.

그때였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고, 주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사역을 하기 위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보던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세례요한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가장 많은 치유와 기적을 체험한 갈릴리의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그들을 향해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세례요한의 잘못된 메시야관과 실족의 위험성(11:2~6)

세례요한의 세례사역은 예수님의 출현이후 점차 축소되다가 급기야는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당시 갈릴리 지역과 베뢰아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안디바(B.C.4~A.D.37)가 자신의 동생 헤롯빌립의 아내와 불법적으로 결혼한 것을 세례요한이 책망하자, 헤롯은 세례요한을 자신의 여름별궁이 위치한 요단강 동편의 마케루스라는 곳의 동굴감옥에 가두어버렸기 때문이다(4:12, 6:17, 14:3~4).

그때였다. 세례요한은 옥중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과연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인지를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11:5-6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는 곧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가 오셨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35:5~6, 61:1). 이는 곧 내가 오리라 한 바로 그 메시야다라는 기별이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은 세례요한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셨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다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들과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 사실들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관은 심판자적인 메시야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진정 메시야라면 왜 당신은 심판자로 일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던진 것이다.

3:11-12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적어도 헤롯안디바의 죄를 책망한 일로 말미암아 자신이 옥에 갇혀 있다고 한다면, 하늘에서 불을 내려 헤롯안디바를 심판하였어야 옳은데, 자신은 옥에 갇혀있고 헤롯안디바는 멀쩡하게 분봉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시야를 심판자로 보았으나, 예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가시적으로 불의를 척결하고 죄인을 심판하며 고난받는 의인을 고통에서 건져주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식사하며 자신의 권능으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은 맞다(5:22,27). 하지만 이 일은 마지막에 할 일이다. 주님은 어찌하든지 그 일을 뒤로 미루시고 어찌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사람을 살리는 일,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이지 당장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불의가 끝나지 않는다고 실족하지 말라. 내가 주의 뜻대로 사는데 왜 고난이 내게 닥쳐왔느냐고 실망하지 말라.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 우리는 회의에 빠질 수가 있다. 자신의 곤고한 상황은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있는 자다(11:6)” 라고 말이다.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구원할 때가 있고 심판할 때가 있는 것이다.

 

 

 

3.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11:7~15)

예수님의 답변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례요한에 대한 무리들의 평가는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례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자인가를 남은 무리들에게 설명해주신다.

1)구약에 속한 인물로서 세례요한의 위대성

첫째, 그는 구약의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하는 강한 신념의 선지자(11:7~8).

예수님은 무리들이 광야에 나간 이유가 그 선지자를 보러 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다. 그들은 분명 광야에서 흔들리고 있는 갈대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리들은 이미 그가 오리라 한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자임을 알고 광야로 갔던 것이다. 당시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있었다(3:4, 왕상1:8). 그렇지만 헤롯왕과 왕족들과 귀족들은 왕궁들에서 부드러운 옷을 입고 사치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세례요한은 결코 헤롯안비다처럼 이리 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 꾸짖었으며 회개를 외쳤을 뿐만 아니라(3:7~12), 죽음을 무릎쓰고 헤롯에게 직언을 할만큼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것이다(14:4). 그렇지만 부드러운 옷을 입은 헤롯안디바는 자기의 행위를 비난하는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어두었지만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니 어찌하지 못하다가, 그만 그의 딸 헤로디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솔하게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이고 만다. 그가 바로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는 곧 세례요한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면 메시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왜 하지 않느냐고 촉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는 구약의 일반적인 선지자보다도 더 위대한 자(11:9).

왜 그런가? 그는 선지자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이지만 오직 메시야가 오리라고 예언했던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이 분이 바로 그 메시야다라고 최종적으로 예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메시야에 대해 예언할 필요가 없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셋째, 그는 말라기의 예언을 따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도록 앞서 보냄받은 사자(3:1).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다시 말해 세례요한은 바로 앞에서 메시야를 직접적으로 소개한 바로 직전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넷째,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11:11).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여자로부터 태어난 자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자인 것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다 모세의 율법 아래에 놓인 옛시대에 살았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 옛시대의 정점에 섰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통해 새시대를 가져오게 한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국의 도래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할 수 있는 바로 그 선지자가 세례요한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는 말라기의 예언을 따라 오도록 되어 있는 예언된 바로 그 엘리야(17:12, 3:1,4:5, 1:17).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예수님은 그를 엘리야라고 평가하신다.

 

2)세례요한의 한계와 그후 믿는 자들의 제한없는 도전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요, 선지자 중의 최고의 선지자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구약에 속한 최종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구약의 예언자의 최종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 사람이 메시야다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 메시야가 죽고 부활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을 때 그 성령을 자신의 마음() 속에 모시지는 못했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천국을 전하라고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위임받지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새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고, 천국이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늘의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든 자를 고치는 권능을 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에게 이제부터 민족의 제한이 사라지게 된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그때부터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 된다.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고 자신의 생업과 가족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4. 세례요한과 예수의 사역에 반응하지 않는 완악한 세대에 대한 책망(11:16~19)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결국 회개를 외치다가 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의 평가는 이랬다. 그는 귀신이 들렸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식사초대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면서 금식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18).

그렇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과는 달랐다. 세례요한이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기꺼이 식사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고 마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비아냥거렸는지 아는가?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번역은 좋은 번역이다. 사실 번역의 원문에서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너무 많이 먹는 개걸스러운 탐식가라는 말이며, ‘포도주를 즐기는 자가 아니라 많은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는 술주정뱅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11:16-17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는 아이들이 장터에서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놀이할 때, 결혼식날 피리를 부는 흉내를 내면 친구들이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데 아무도 춤을 추지 아니하고 있는 것과 같고, 장례식날 애곡하게 되면 친구들이 가슴을 쳐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은 와서 회개하라 하였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하였고, 예수님은 와서 천국잔치에 참여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것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나중에는 예수님마저도 귀신들린 자라고 매도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비난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금욕적인 세례요한을 비난했다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두둔해야 했지만 둘 다 비난했으며, 둘 다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매도해버린 것이다.

 

 

 

5. 많은 이적에도 회개치 않는 세 마을에 대한 책망 및 심판 경고(11:20~24)

이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이 직접 가서 사역함으로 수많은 기적들과 치유사건들을 경험했던 갈릴리지역의 세 마을들 즉 고라신벳세다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자,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언하신다.

고라신벳세다가버나움은 어떤 곳인가? ‘고라신은 가버나움에서 약 3km북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베세다와 가버나움과 합해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과 능력을 베푸신 주무대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쳐주셨고(8:22~26),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가버나움은 또 어떤 곳인가? 예수님께서 집을 얻서 사신 곳으로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고(8:5~13),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으며(4:46~54),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8:14~17), 귀신들린 자(1:21~28), 중풍병자(9:1~8), 각색 병자(8:16~17)들을 고쳐주신 장소가 아니었던가?

다른 지역보다도 예수님께서 기거하셨던 가버나움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가까워 예수님의 많은 권능을 보고 체험하는 특권을 누렸던 갈릴리지방 사람들마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례요한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예수님을 탐식가 내지는 술주정뱅이정도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도시들이 훗날 두로시돈그리고 소돔이 받을 심판보다도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두로시돈은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의 도시들이다. 이 도시의 왕이었던 엘바알의 딸 이세벨이 북이스라엘의 7대왕인 아합왕과 결혼함으로, 북이스라엘은 바알의 우상숭배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의 10개의 지파를 우상으로 물들게 한 아합왕과 이세벨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성연애가 판을 치던 소돔은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심판하셨는가?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서 그 도시를 심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와서 회개하라고 했지만 기적만 좋아할 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배척하자 주님께서는 이들 3개의 도시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지를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받은 은혜에 합당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은 것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또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의 복음계시의 섭리에 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11:25~26)

이어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기적과 치유의 사건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하는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신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인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어린아기들인가?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던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어린아기들은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소유하는 사람들로서 순박한 주님의 제자들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입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7.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식으로의 초청(11:27~30)

이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들인 예수님 자신에게 맡겨주셨으니, 자신에게로 와서 인생과 종교적인 무거운 짐들을 다 벗어버리고 안식을 얻으라고 초청하신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은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지켜야 할 율법적인 관행들일 수도 있고, 사탄이 준 죄의 짐일 수도 있고, 로마의 압제에서 시달리는 고통일 수도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것 때문에 모든 권한을 다 아들에게 맡겨주셨다. 그러므로 아들은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도 있었고(9:6),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수도, 그 위를 걸어가실 수도 있었으며(14:22),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8-9).

그러므로 무슨 질병에 걸렸든지, 무슨 짐을 지고 가고 있든지 주님께로 오면 모든 짐이 벗어지고 안식이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평안한 안식으로 초청하신다. 주님께로 가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우리는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 멍에는 아버지의 뜻을 가리키며, 내 짐은 아버지의 뜻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멍에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을 준행하는 것이었다. 어떤 율법이나 종교적인 규정들에 의해 규제되거나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아버지의 뜻은 쉽고(평안하고), 아버지의 뜻은 가벼운 것이다.

 

 

 

8. 결론

은혜와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갈릴리 주변의 마을사람들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많은 혜택을 입었지만 대부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아기들과 같이 예수님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이 배웠다고, 많이 체험했다고 주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초청에 감사하면서 그분에게 나아가 죄의 짐을 부리고 그분 안에 안식해야 한다.

 

 


20111102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19) 바리새인의 배척-안식일 및 바알세불논쟁(1)

[찬 송]

079장 피난처 있으니

497주 예수 넓은 사랑

34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2:1-21(신약 18)

[키워드]

안식일, 귀신의 왕 바알세불, 심판, 니느웨, 천국의 자녀, 요나, 솔로몬

 

1. 서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하늘의 왕이신 것을 드러내심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렇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점차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으로 책잡고 심지어는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억지주장까지 펼치게 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과 활동이 결코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며, 당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결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신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분임을 드러내었지만 계속해서 표적만 찾고 구하는 그 악한 세대를 향해, 이 세대가 더욱더 더 악해질 것이며 결국 훗날 심판 때에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이라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면 저 천국에서 부모와 형제간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하신다.

오늘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벌인 안식일논쟁(12:1~21)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안식일논쟁(12:1~21)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무너뜨리고 파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책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의 비난과 예수님의 변호(12:1~8)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그의 12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지나가다가 그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는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트집잡는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과연 율법을 어긴 것일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했던 행동은 전혀 책잡힐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행한 일(삼상21:1~6)을 들어서 말씀하신다. 다윗이 그의 일행과 함께 사울에게 쫓겨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갔을 때, 다윗은 배가 아주 많이 고팠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는데, 그때 아히멜렉 제사장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물려낸 진설병(24:9)을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건네준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그러한 일 전후에 보더라도 다윗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율법을 어긴 것이었다고 말한 대목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따먹은 것은 긍휼과 자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결코 책잡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심이었다.

한편, 율법 말씀에는 사람들이 밀이삭을 추수할 때에 남의 추수밭에 들어가서는 낫을 대면 안 되지만 밀이삭을 잘라먹을 수는 있다고 되어 있다(23:25).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그러므로 제자들의 행동은 결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제자들의 행동은 과연 안식일을 어긴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이더라도 제사장들이 일을 해도 죄가 없다는 율법규정(28:8~9)에 따라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허용되는 일을 했음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성전 안은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전보다도 더 큰 이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인이므로(12:8), 그 예수님(인격적인 성전)에게 붙어있는 제자들이 행한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기본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잘못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총 39가지로 규정해놓고 거기에 걸려들기만 하면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죄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엿새동안 힘써 일하는 자에게 쉼을 허락하기 위해 안식일이 제정되지 아니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도록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주객의 전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헤아린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지 남을 정죄하고 남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삐뚫어진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2)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12:9~14)

이어 한 주간이 지나고 다시 안식일이 찾아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들어간 그 회당에 한 편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설에 의하면, 돌을 다루는 석공으로서 말라버린 오른손을 가지고 회당에서 예배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일부러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물었다.

과연 안식일인데도 병을 고쳐주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에게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선한 일로서 합당한 것임을 다른 예를 들어서 설명하신다.

첫째, 양 한 마리를 가진 가난한 사람이 그 양이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면 그 날이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그 양을 꺼내주지 않느냐 말씀하신다.

둘째, 사람이 양보다도 얼마나 더 귀중한 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신다.

그리고 이에 그 손이 오그라든 사람더러 손을 펴서 내밀라고 하신다. 그가 손을 내밀자 마른 손이 다른 왼쪽 손처럼 회복되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죽이기를 모의하되, 심지어 평소 때에는 원수처럼 여기는 헤롯당에게까지 찾아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연구하게 된다(3:6)

 

3)병든 자들을 치유한 것에 대한 함구령과 그 이유(12:15-21)

이어 예수님께서는 거기를 떠나가셨다. 그들이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다.

왜 그랬을까?

첫째, 자신을 눈에 보이는 문제의 해결자 내지는 단순한 신비한 치유자로만 알고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둘째, 사람들에게 너무나 널리 알려지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할 본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는 것을 대비함이었다.

셋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사 보낸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이 많은 분이며, 결코 다른 사람들과 다투거나 크게 소리내어 자신을 떠벌리고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사야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41:1~4, 12:18-21).

42:1-4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3. 결론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6일동안 노동하는 자들에게 안식일은 정말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날마다 들에 나가 일했던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집에 놀러와 신세를 지고 있던 나그네들에게도 안식일을 고마운 날이었다.

그렇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가지 규정을 만들어 사람들을 옭아매었고 그들을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라 죄인이 되기도 하고 아니 되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권력을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도 하고 천국에 보내기도 할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안식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알려주셨고, 그 일을 위해 당신이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우리는 안식일 논쟁에 관한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다음의 일들을 실천해보기로 하자.

첫째,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책잡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둘째, 어떤 종교적인 관행을 앞세워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정신을 가지고서 사람을 대하자.

셋째, 자신의 사역이 확장되고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고 떠벌리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내가 해야 일을 겸손히 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오직 그 사역과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20111109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0) 바리새인의 배척-안식일 및 바알세불논쟁(2)

[찬 송]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34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2:21-50(신약 18)

[키워드]

귀신의 왕 바알세불, 심판, 니느웨, 천국의 자녀, 요나, 솔로몬

 

1. 서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하늘의 왕이신 것을 드러내심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렇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점차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으로 책잡고 심지어는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억지주장까지 펼치게 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과 활동이 결코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며, 당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결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신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분임을 드러내었지만 계속해서 표적만 찾고 구하는 그 악한 세대를 향해, 그 세대가 악한 세대이지만 회개하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더욱 더 악해질 것이며 결국 훗날 심판 때에 엄중한 심판을 야기하게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그리고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이라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자만이 천국에서 부모와 형제간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하신다.

 

 

 

1. 바알세불 논쟁과 성령훼방죄(12:22~37)

안식일 논쟁에 이어 그들은 말도 안 되지만 바알세불 논쟁을 일으킨다.

어떤 한 사람이 귀신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즉시 고쳐주신다. 그러자 그가 보게 되었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들이 말하기를 혹시 이분이 바로 그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하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전해들은 바리새인들은 즉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추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방책을 강구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말을 하였다. , 어처구니가 아닌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허구를 드러내신다.

첫째, 당신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그러한 사역을 하고 있다고 논증하신다. 제일 강한 귀신들의 대상 사탄이 그 밑의 부하인 귀신들을 쫓아내면 어찌 사단의 나라가 서겠느냐고 반문하시며, 또한 당시의 바리새인의 아들들(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데 그들도 귀신들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냐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잘못 말하거나 훼방하는 것은 혹 용서될 수가 있지만 당신의 행하는 사역 가운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귀신들이 하는 짓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죄가 바로 성령훼방죄가 되는 것으로서 결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까지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경고하신다.

예를 들어, 사도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로써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으나 용서받았으며, 사도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편투표를 하였고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잡아들여 갖은 핍박을 하는 데에 일조했지만 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려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하는 행동은 사탄의 자식들이나 하는 일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2:34). 회복 불가능한 성령훼방죄, 함부로 저질러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무조건 자기가 판단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좋으면 그 사람도 좋은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무의 실과가 좋다면 그 나무도 좋은 나무임을 알듯, 당신이 행하시는 사역을 보고서 당신 자신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라고 경고하신다. 만약 나타난 결과를 보고서도 바른 판단을 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말한 것으로 인해 자신이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명백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탄마귀가 하는 일로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면 용서가 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매도할 경우에는 용서가 없고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을 열매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악하게 판단하나면 그것은 억지주장이라는 것이다.

 

 

 

2.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비유(12:38~45)

안식일논쟁과 바알세불 논쟁으로 인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럼 그동안 보여준 표적이 없었는가?

그러자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당시의 세대를 책망하시면서, 앞으로 당신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1)요나의 표적과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12:39~42)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표적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에 관한 구약시대의 완전한 예표가 바로 요나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요나가 밤낮 삼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가 물고기가 토해내는 바람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한편, 주옥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예수님 당시의 세대들에 대해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심판의 선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회개를 외치는 데도 회개치 않는 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예수님 당시의 세대들에 대해 예수님은 심판 때에는 남방여왕이었던 스바여왕이 일어나 유죄판결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남방여왕이 말씀을 듣기 원해 찾아온 솔로몬보다도 더 큰 분이 거기 있는데도 당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는 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신다.

 

 

2)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돌아갈 더 큰 비참한 고통들(12:43~45)

이어 주님은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서 회개한 다음에 그 빈 공간을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는 사람들이 받게 될 나중 고통들이 얼마나 클 것인가, 어떤 귀신이 떠나간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나갔다. 그동안 귀신은 그 어떤 사람을 자기 집으로 여기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가보니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자 아무래도 그 사람에게도 다시 가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와서 밖에서 그 사람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 안에는 비고 깨끗이 청소만 되어 있을 뿐, 그 사람 안은 비어 있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그냥 들어가면 다시 쫓겨날 것 같아 그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 명을 더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나중에 그 사람은 더 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서 주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곧이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당시의 세대가 당하게 될 고통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사람들은 더 많은 표적 보여주기를 구하지만 기존에 이미 자신이 보았던 표적을 보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구하지 아니한다면, 그들에게 다른 어떠한 표적이 주어진다 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표적이라도 그 표적 속에서 내 죄를 발견하고 주님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둘째, 회개하지 않거나 주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들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의 표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록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그 표적은 보여줄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셋째, 기존에 주어진 은혜 속에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심령에 주님의 말씀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의 심령에 더 황폐화될 수 있고, 더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발견하고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았다면 더욱 더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채워야 하겠다.

 

 

 

3. 하나님 나라의 가족 개념(12:46~50)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시면서 2가지 사실을 말씀하신다.

첫째, 육신의 혈통적인 가족이 결코 천국에서 그대로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둘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이 하늘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곧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의 가족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4. 결론

지난주부터 주어진 마12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주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이시다.

둘째, 주 예수님은 안식을 주인이시다.

셋째,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역하시는 이이시다.

넷째, 주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크신 이이시다.

다섯째, 주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우신 이이시다.

여섯째, 주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속죄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이시다.

일곱째, 주 예수님은 하늘의 가족을 만드시러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제는 마태복음 12장의 교훈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책잡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둘째, 어떤 종교적인 관행을 앞세워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정신을 가지고서 사람을 대하자.

셋째, 자신의 사역이 확장되고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자랑하고 떠벌리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내가 해야 일을 겸손히 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오직 그 사역과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넷째, 남의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나는 과연 어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다섯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열매들다. 그 열매를 통해 그 사람의 어떠함을 신중히 판단하는 사람이 되자.

여섯째, 처음에는 잘 할 수 있으나 끝까지 잘 하는 것은 어렵다. 처음보다는 더 나중이 복된 인생이 되도록 살아보자.

일곱째,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혈연적인 관계이기 때문이기보다는 과연 그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인가를 통해 맺어가도록 하자.

 

 

 

20111116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1) 천국의 7가지 비유(1)

[찬 송]

245장 저 좋은 낙원이르니

243장 저 요단강 건너편에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3:1~23(신약 20)

[키워드]

천국, 비유, 씨 뿌리는 자, 길가, 돌짝밭, 가시떨기, 옥토, 결실

 

1. 서론

오늘부터 시작되는 천국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하시는 마태복음의 5대강화 가운데 세 번째 강화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들이다.

마태복음에는 총 5대 강화(5-7장의 산상수훈, 10장의 파송장, 13장의 천국장, 18, 24-25)가 기록되어 있는데, 세 번째 강화인 본문말씀은 천국의 시작과 끝의 모습 그리고 그 특성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전해주신 말씀들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1~23절까지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24~43장까지는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 44~46절은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7~52절의 내용은 예수께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신 후, 천국에 관해 깨닫게 된 자제들에게 복음전파의 의무를 주지시시킨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하늘들의 왕국=kingdom of heavens))’이라는 단어와 비유(파라볼레, parable)’라는 단어다.

 

 

 

2. 비유의 정의와 그 목적

 

1) 비유란 무엇인가?

비유(파라볼레, parable)란 무엇인가? 비유란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파라볼레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어 쉽게 명쾌하게 설명하는 수사학적인 이야기 진행 방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50 쓰이고 있지만, 히브리서에 2번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다 공관복음서(마태 17, 마가 13, 누가18)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48 용례 모두는 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중요한 진리는 비유로 말씀하시를 매우 즐기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대로 하여금 좀 더 쉽고도 인상깊게 이해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천국을 인간의 언어로 직접 묘사하기에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팔레스틴의 친숙한 생활풍경을 소재로 천국의 특성과 그 시작과 끝의 모습을 가르치신 것이다.

 

 

2)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13:10~17)

그것은 가지 이유 때문이다(13:12, 13:35). 다시 말해 예수님께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이중적인 목적 즉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35), 감추기 위한 목적을 동시에 가지면서도, 좀 더 나아가서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는 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누구든지 가진 자는 예수님께 받아서 더 넉넉하게 갖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 누구든지 갖지 못한 자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빼앗기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셋째,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 곧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확연히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가진 자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을 가리키며, 갖지 못한 자는 그들 즉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제자들에게는 더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지만,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사건건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으려 하는 대적자들에게는 눈으로 보아도 볼 수 없고, 귀로 들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비유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이처럼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될 것임을 미리 아시고 계셨다. 그 이유를 마태기자는 이미 이사야 6:9~10에 예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그렇다. 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한 편으로는 그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도 있다. 한 편은 축복받을 사람들이고, 다른 한 편은 저주받을 사람들이다.

 

 

3) 비유를 들은 자들이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욱 잘 깨닫도록 베풀어졌던 비유가 왜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눈과 귀를 막는 작용을 하게 되었을까?

첫째,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무디어진 정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차이가 어디에 오는지 아는가? 15절에 보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에서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판가름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번째 비유는 마음밭에 관한 비유로 시작하신다.

둘째, 또한 그들의 마음이 무디어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으로부터 얻고 추구하자 하는 자신의 욕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비유가 그 형식의 내용에 있어서는 쉽지만, 비유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 천국의 특성 즉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의 의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지상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시야가 오면 열방을 즉시 심판하시고, 잃어버린 다윗의 왕권을 되찾아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구약성경에 심판주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의 상태가 이미 갖추어진 상태를 가정하에 주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는 결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은 개인적이나, 이타주의나 포용적인 관점에서 메시야와 천국을 바라지 않고, 오직 민족적이나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만 메시야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메시야는 단지 유대인들만의 메시야인가? 그리고 심판은 열방에 대한 심판 뿐이겠는가 메시야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은 포함되지 아니하겠는가? 또한 회복할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 뿐이겠는가? 아니면 신약교회인 영적인 이스라엘도 포함하겠는가? 더군다가 메시야의 궁극적인 심판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메시야가 인류구원의 사역을 완수하는 세상의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편협한 이기주의적인 차원에서만 다시 말해서 자기들을 위해서만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을 뿐, 정말 온 인류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3. 천국에 관한 비유들 - 씨뿌리는 자의 비유(13:3~9, 18~23)

 

1)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에게 주안점이 있지 않다. 씨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8:11).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 문제다. 우리는 말씀이 뿌려지는 밭이 곧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3:19)

8: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4종류의 사람 마음밭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밭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천국을 소유하기도 하고, 빼앗겨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음밭은 총 4종류가 있다. 길 가, 돌짝밭, 가시떨기가 가득한 밭, 좋은 땅(옥토)가 그것이다.

첫째, 길 가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공중의 새들 즉 악한 자인 사탄(4:15) 마귀(8:12)가 와서 말씀이 뿌려지자마자 쪼아 먹어버려, 이런 자들은 말씀을 들으나마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둘째, 흙이 얕은 돌짝밭은 씨가 싹이 나서 뿌리를 내리나 돌짝밭이기 때문에 식물을 튼튼하게 해 주고 결실하게 해 줄 태양(환난과 핍박)이지만 태양 때문에 오히려 식물의 뿌리가 말라죽는 형국을 가리킨다. 이는 처음에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믿음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하므로 잠시 견디다가도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지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면 우리가 옥토밭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환난이 박해가 일어나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하고 신앙생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핍박을 견뎌내는 자만이 천국의 그들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5:10-12).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셋째, 가시떨기가 무성한 밭은 말씀을 들어서 뿌리를 땅 속에 깊이 내리지만, 함께 자라고 있는 무성한 가시떨기 때문에 숨이 막혀 비실비실하여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 나오는 가시떨기는 사람이 신앙으로 살도록 가로막는 세상의 염려들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일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역사하심을 믿어야 하며, 세상이 주는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말아야 한다. 재물을 복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실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물이 잘 자라야 하는 데에는 무엇 때문인가? 식물은 잘 자라야 결실하여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밭은 가진 자는 10년을 신앙생활해도 결실 하나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이 있다. 이를 누가복음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8:15)”라고 설명하고 있다. 좋은 땅은 착하고 선한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착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매는 신앙인 즉 천국을 소유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트집잡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완악한 자는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둘째, 말씀을 지키어 인내함으로 결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 해서 좋은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을 지켜내야 한다. 또한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고난과 핍박(태양)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가시떨기) 즉 인기와 명예와 소유욕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결실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만을 따로 모아 놓고 설명해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을 소유해야 할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4. 결론

비유는 정말 신비한 능력이 있다. 깨닫고 아는 자는 더 깊이 많이 배우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그분은 정말 지혜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비유 속에 감추인 보화를 캐내어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천국의 도래는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를 받느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천국 말씀을 어떻게 지키어 내느냐와 어떻게 인내하여 결실하는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천국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라. 천국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자에게 천국을 분명히 기업으로 허락하실 것이다.

 

 

20111123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2) 천국의 7가지 비유(2)

[찬 송]

198장 주 예수 해변서

419장 주 날개밑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3:24~43(신약 20)

[키워드]

강화, 천국, 비유, 빅인빈부익부, 씨뿌리는 자, 마음밭, 길가, 돌짝밭, 가시떨기, 옥토(좋은 땅), 행함, 인내, 결실, 100

 

1. 서론

지난주부터 시작된 천국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하시는 마태복음의 5대강화 가운데 세 번째 강화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들 중에 2~4번째 비유들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1~23절까지는 첫 번째, 씨뿌리는 자의 비유, 24~43장까지는 두 번째, 가라지의 비유와 세 번째, 겨자씨 그리고 네 번째, 누룩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 44~46절은 다섯 번째, 감추인 보화와 여섯 번째,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7~52절의 내용은 일곱 번째, 예수께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신 후, 천국에 관해 깨닫게 된 자제들에게 복음전파의 의무를 주지시킨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천국비유 중에서 2번째 가라지의 비유와 3번째 겨자씨 비유, 4번째 누룩의 비유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

 

 

 

2. 천국의 정의와 그 특성

 

1) 천국이란 무엇인가?

천국이란 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왕이 임하여 다스리는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왕국(Kingdom)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왕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임금인 마귀를 아비로 섬기고 있었고, 하늘의 왕을 배척하고 말았다.

둘째, 그것이 지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heavens)에서 완성될 나라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지상에 저 하늘천국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을 뽑아 가시려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서 오신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이 되려면 어떤 윤리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지 마5~7장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일러주셨으며, 그것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마13장에서 말씀하고 있고, 20장부터 25장까지는 천국은 언제 도래할 것이며,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2) 천국의 특성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집단적이고도 민족적인 천국은 당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가서야 실현되고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개인이 다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천국을 소유하기도 하고 소유하지 못하게도 되는 것이다.

둘째, 메시야가 임하면 곧바로 그의 백성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추수 때까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게 하다가 데려가실 것이다.

셋째, 천국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와 누룩처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하여 점차 크고 위대하게 자라가게 될 것이다. 그 영역도 겨자씨 비유처럼 외적인 성장 내지는 확장 뿐만 아니라, 누룩의 비유처럼 내적인 성장 내지는 성숙에도 중점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같아서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살 만큼 귀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섯째, 천국은 초기부터 의인과 악인을 당장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적 천국에서는 의와 불의,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으나, 마지막 심판 때에 가서는 완전히 분리시키게 될 것이다.

 

 

 

3. 천국에 관한 4가지 비유들

1)씨뿌리는 자와 밭의 비유(13:3~9, 18~23)

우리는 지난 주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공부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은 씨 뿌리는 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씨가 뿌려지는 밭에 있다. 다시 말해 천국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상태에 따라 천국은 임하기도 하고 임하지도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야말로 천국을 가로막은 가장 나쁜 것들이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회개하라. 그리하여 마음밭을 기경하여 씨가 떨어져 싹이 나기에 합당한 마음 상태를 만들라.

우리는 지난 주에 사람의 마음밭은 4종류인데, 그 중에 3종류(길가, 돌짝밭, 가시떨기)의 마음밭에는 천국이 임하지 않음을 배웠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찾아오는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는 성도가 되자.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재리의 유혹이나 인기나 명예을 추구하지 말자. 그래야 옥토가 되고 옥토가 되어야 열매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13:24~30, 36~43)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좋은 씨(곡식, )를 자기의 밭에 뿌릴 때에 예수님의 원수인 마귀도 몰래 와서 가라지도 뿌려놓고 간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래서 예수님의 밭인 이 세상에 밀과 가라지가 같이 공존하면서 자라게 되겠지만, 추수 때에 가서 추수꾼인 천사들에 의해 확실히 분리시켜 처리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이 비유에 대해 설명해주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이신 예수님이시오, 인자의 밭은 이 세상을 가리키며(마귀의 것이 아님), ‘좋은 씨는 왕국에 속한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대적자)’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의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사실 가라지(지자니온)는 생김새와 색깔이 꼭 곡식()과 비슷하다. 성장 기간에는 밀과 닮아 보이나 그 낟알에는 독소를 품고 있는 독보리를 가리키는 명사다. 흔히 밀밭이나 보리밭에 낟알만 약간 거무스름하지 쉽게 분별하기 힘든 독보리들이 성장하게 되는데, 밀 사이에 자라고 있는 이 독보리들은 그 뿌리가 밀의 뿌리와 엉켜 있다. 그래서 나중에 이삭이 펼 때, 그 독보리의 낟알이 다른 것을 보고 농부가 그 줄기를 잡아 뽑게 되면, 옆에 있는 밀의 줄기까지 따라 뽑히게 된다. 그러므로 경험이 많은 농부들은 추수 때가지 그 독보리를 그냥 놔둔다. 하지만 추수 때에는 그것만을 먼저 거두어 불에 살라버린다.

사각형입니다.

 

이로 인해 곡식은 가라지 때문에 비좁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뿌리가 얼키고 설키곤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라지를 뽑아낼 때, 곡식도 해를 입기 때문에 가라지를 당장 뽑아내지 말라고 하고, 추수할 때까지 가만 두게 하신다. 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가라지만을 먼저 거두어 단으로 묶어 불사르게 할 것이고, 곡식은 모아 천국곳간에 들이게 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교회에도 가라지가 있다. 가라지는 밀과 비슷하다. 하지만 밀이 아니다. 추수 때가 되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들은 처음부터 마귀가 뿌린 마귀의 자식들이기 종자가 다른 식물인 것이다. 원수 마귀가 뿌린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몰래 예수님의 밭인 세상에 뿌린 씨앗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가라지도 교회의 구성원 사이에서 같이 자라고 있지만, 열매를 맺힐 시기가 되면 그들은 악한 사탄마귀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가라지들인가? 그 집의 종들이 말했다. 열매를 맺힐 때에 보니, 가라지인 것을 즉시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13:26). 주님은 가라지들이 교회에 와서 하는 일들이 2가지 있다고 말씀하신다. 곧 그것들이 가라지인 것을 스스로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것을 2가지라고 말씀하신다(13:41~42).

13:41-4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 나라(왕국)에서 모든 넘어지게(실족하게, 떨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첫째,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모든 넘어지게(실족하게, 떨어지게) 하는 일들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지게 한다. 시험들게 하는 일이다. 넘어지게 한다는 것은 확신과 결단력이 약하거나 분명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을 죄로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결국 신앙을 떠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불법을 행하는 일들이다. 이는 곧 아노미아즉 율법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밥먹듯 어기며 깨뜨리며 산다. 하나님의 법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죄를 짓는 사람들인 것이다. 특히 죄를 짓고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가라지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최후는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가? 풀무불 곧 지옥불에 던져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즉그들은 나중에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것 때문에 과거의 자기행위를 후회하면서도 극도의 절망과 비탄의 모습으로 절규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풀무불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여 처참한 심정으로 이를 갈게 될 비참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의인들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들을 가리키는데, 본 비유에서 보면,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심겨진 천국의 아들들로, 알곡을 맺는 자들이다(30). 최후 종말의 날이 찾아오면 이들은 하늘의 해와 같이 빛이 날 것이다.

 

 

3)겨자씨의 비유와 여자의 누룩(13:31~32, 33)

남자가 자기의 밭에 갖다 흩뿌린 겨자씨나 여자가 가루 세 말 속에 숨겨넣어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의 비유는 그 뜻이 비슷하다. 천국이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나 나중에는 놀랍게 확장된다는 것을 말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의 외형적인 성장을 가리키고, 누룩의 비유는 천국의 내적인 성숙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이 처음에는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완성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안식을 누릴만큼 외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누룩의 비유는 천국은 처음에는 미미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것이지만 어떤 사회 단체 속에 들어가면 그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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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2가지 비유는 부정적인 해석도 만만치 않다. 아마 2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첫째, 겨자씨의 비유에는 나무가 된다는 말과 새들이 깃들인다(둥지를 튼다)’는 말이 그렇다.

겨자는 나무가 아니다. 한 해 살이 풀 혹은 두 해 살이 풀이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들은 천국의 제1차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쪼아먹어버리는 사탄을 의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외형적으로만 성장하여 이상하게 되어버리면 사탄마귀가 장악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둘째, 누룩의 비유에는 여자라는 말과 누룩을 숨겨넣어 즉 감춰넣어 그 전체를 부풀게 했다는 말이 그렇다. 성경에서 여자는 잠언에 보면 유혹하는 자, 호리는 자요, 쾌락을 즐기도록 유혹하는 존재요, 요한계시록에는 음녀를 가리킨다. 그리고 누룩은 유월절과 같은 절기 때에 떡반죽에 절대 섞어서는 안 되는 재료로 나오며(13:7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휸(16:6), 전염성이 강한 부도덕한 행위(고전5:6) 등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누룩의 비유는 내적으로는 방탕한 음녀가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 전부를 부패시키고 만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4. 결론

천국의 도래는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를 받고 그것을 지키어 인내하는 것인가에 달려 있다. 교회에도 가라지가 있다. 그러나 심판의 때에 곡식과 가라지는 완전힌 분리되어 처리될 것이다. 천국은 처음에는 작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장되고,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한 편으로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다가는 사탄의 깃드는 교회가 될 수 있으며, 육적 영적으로 부패한 음녀에 의해 장악될 수 있다. 끊임없는 반성과 회개가 필요하며, 본질적은 측면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20111130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3) 천국의 7가지 비유(3)

[찬 송]

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37장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3:44~58(신약22)

[키워드]

천국, 비유, 농부, 보화, 진주, 상인, 그물, 의인, 악인, 제자, 천국의 서기관, 배척, 선지자, 고향, 나사렛

 

1. 서론

우리는 지지난주부터 오늘까지 3주간 천국비유를 살펴보고 있다. 천국비유는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하셨던는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5대강화 가운데 세 번째 강화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서, 오늘은 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들 중에 5~7번째 비유를 살펴볼 것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1~23절까지는 첫 번째, 씨뿌리는 자의 비유, 24~43장까지는 두 번째, 가라지의 비유와 세 번째, 겨자씨 그리고 네 번째, 누룩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 44~46절은 다섯 번째, 감추인 보화와 여섯 번째,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7~52절의 내용은 일곱 번째, 예수께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천국에 관해 깨닫게 된 자제들에게 복음전파의 의무를 주지시킨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천국비유 중에서 5번째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6번째 좋은 진주장사를 구하는 상인의 비유, 7번째 그물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 감추인 보화와 진주 장사의 비유(13:44~46)

 

1) 두 비유의 공통점

우리는 이제 두 비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보화의 비유와 진주장사의 비유는 천국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비유이며, 천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희생하더라고 꼭 얻어야 할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두 비유는 공통점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천국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보화’, ‘극히 값진 진주’). 그것이 보물이고 극히 값진 진주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라도 그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느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살 수 있다.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천국은 사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2)두 비유의 차이점

그러나 이 두 비유는 약간의 상이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그것들이 산출되는 장소가 다르다. 보화는 밭()의 산물이고, 진주는 바다에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을 좋은 것을 구하는 사람이 다르다. 첫째는 농부(소작농)이고, 둘째는 상인(도매상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유의 초점이 다르다. 보화의 비유는 보화가 주체이지만, 진주는 진주가 주체가 아니라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상인이 주체이다.

 

3)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13:44)

이 비유에서 ()’은 이 세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어느 주인이 난리를 피해서 보물상자를 자기의 밭에 숨겨놓았다. 현재 그 밭의 주인도 그것이 밭에 숨겨져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가난한 소작농이 그 밭을 일구다가 그만 그 옛날 주인이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발견한 것이다.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이 경우 그 보물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거기에 묻혀 있는 밭의 밭주인의 소유라는 사회규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밭을 살 때까지 그 보물을 다시 그대로 묻어 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 버린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소작농밭에 감추인 보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소작농은 열심히 일하다가 우연히 천국을 발견한 우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밭에 감추인 보화천국을 가리킨다. 살다보니 어느날 문득 밭에 감추인 보화인 천국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밭에 감추인 보화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지칭할 수도 있다.

 

한편,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자. 그는 비록 소작농(남의 밭을 일구어 벌어먹고 사는 농부)이었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는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처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천국을 발견한 것이다. 천국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하겠다.

 

4)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14:45)

이 비유도 앞의 비유와 대동소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앞의 비유는 천국은 보화와 같다는 말이지만, 이 비유는 천국은 장사(상인)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사(도매상인)를 우리들로 본다면 우리 인생들은 일평생 천국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비유에 나오는 진주 장사(상인)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고, 귀한 진주는 참된 성도혹은 고난을 이겨낸 성도’, ‘이기는 믿는 이들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좋은 진주를 구하러 오셨다. 그분은 좋은 진주를 얻고자 사방 팔방으로 애쓰며 돌아다닌다. 결국 좋은 진주를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상인은 극히 좋은 진주 하나를 발견하며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

 

여러분은 혹시 좋은 진주는 어떻게 생산되는지 아는가? 진주는 죽음의 바다에서 작은 모래알로 인해 상처를 입은 조개가 상처를 낸 모래알 주위에 조개의 생명즙을 분비함으로서 산출되는 것이다. 좋은 진주는 고난을 통과하여 산출되는 믿는 이들 중의 이기는 자들을 상징한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에게 좋은 진주인가? 아니면 쓸모없는 진주인가?

 

 

3. 그물비유와 제자들의 복음전파의 의무(13:47~52)

 

1) 그물 비유

그물비유는 앞에 나오는 천국의 두 번째 비유인 가라지 비유와 유사하다.

첫째, 똑같이 의인과 악인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의인은 곳간과 그릇에 담겨지지만, 악인은 천사들의 손에 의해 풀무풀에 던져지게 된다는 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앞은 농부들이 하는 일들이라면, 뒤는 어부들이 하는 일들이라는 점이다. 우리 주님은 땅과 바다를 골고루 사용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보화와 진주장사의 비유가 약간 다른 점이 있었듯이 여기에 나오는 그물의 비유도 가라지의 비유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풀무불에 던져지는 대상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풀무불에 던져지는 존재가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다. 가라지(거짓 믿는 이들)는 처음부터 가라지의 생명을 가진 것이지 곡식(참된 믿는 이들)의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물의 비유에서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저넣는다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물에 걸려든 수많은 종류의 모든 바다 생명제 중에서 나쁜 것을 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심판받을 악인은 도덕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전혀 쓸모 없는 사용가치적인 차원에서 무가치한 악인을 말하고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최후에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사람은 종은 종이지만 무익한 종이듯이 말이다(25:30).

이처럼 교회 안에는 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다. 예배당 안에는 누구나,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당시 갈릴리 호수에는 베쓰(베드로고기)나 메기, 뱀장어 등 다양한 종류의 어족이 서식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빈부과 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들어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교회는 인종과 성별, 악인과 의인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생물들을 모으는 그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심판할 때에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은 분류되어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결국 버려지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기나 뱀장어를 잡으면 그냥 버리듯이 말이다. 과연 우리들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늘 묻고 살펴봐야 하겠다.

 

 

2)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의 비유(13:51~52)

이제 예수님께서는 7가지 천국비유를 잘 알아듣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어보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천국의 7가지 비유를 잘 알아들은 사람들은 천국의 서기관천국의 율법학자들이라고 표현하신다. 그래서 앞으로 이 천국의 서기관된 자들은 집주인과 같은 자로서, 자신의 마음의 곳간(보물창고)에서 자기의 보물을 꺼내오되, 옛 것도 꺼내올 수 있어야 하고, 새 것도 꺼내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하신다. 여기서 옛 것은 율법말씀을 가리키고, 새 것은 예수님의 복음말씀천국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율법의 서기관들은 옛 것도 제대로 꺼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천국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둘 다를 꺼내올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엣 진리들과 새 진리들을 꺼내어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4.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배척과 예수님의 반응(13:53~58)

 

1) 고향으로 가시는 예수님(53~54a)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당신이 자라나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 그곳을 떠난 지 2년만이다. 예수님은 좀 전에는 가버나움의 바닷가에서 배에 앉으사 해변가에 모여있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천국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이제 고향으로 가신다. 그곳에도 천국비유를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나사렛 사람들의 배척(54b~56)

하지만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냉대했다. 아니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예전 목수의 아들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육체적인 예수님만을, 하찮은 목수의 아들로만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시야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과 지혜를 보면서도 그것을 도무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누구에게서 이것을 배웠을까 궁금해했지만, 이내 목수의 아들(6:3) 주제에 뭘 말하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고, 그의 남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으며 적어도 3명 이상의 여동생이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서 뭔가를 배웠는가? 또한 누군가에서 배워서 능력을 행하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가, 때가 되매 그것을 표현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 선입관으로 인한 불신과 완악한 마음 얼마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해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3)배척을 받아들이신 예수님과 그들의 손해(57~58)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는 어디서나 다 존경받는다는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배척이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참된 선지자다. 그래서 배척받으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향 사람들에게 손해를 불러왔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능력행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 사이에는 커다란 상관관계가 있다.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못하신 것은 그분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왜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많이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어긋나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1:6~8, 4:3).

 

 

 

5. 결론

13장의 천국비유는 오늘날의 교회생활과 비슷하다. 우리는 어디 가서 천국의 실제를 맛볼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도 마16장에서 베드로에게 음부가 해할 수 없는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고 하시면서(16:18) 또한 곧이어서는 천국열쇠를 준다(16:19)”고 하셨다. 이는 곧 교회가 천국의 실제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은 이 세상을 주님이 오셔서 천국백성을 만들어 가는 이라고 했다.

그러나 교회는 온전한 천국이 아니다. 겨자시의 비유처럼 교회가 비대해져서 공중의 악한 영들이 거주하는 처소로 돌변하는 교회도 있고, 누룩의 비유처럼 영적인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내부가 부패해서 비대해저가는 교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전부 마귀의 처소나 부패한 가르침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맛보게 해 주는 이 땅의 유일한 처소가 바로 교회. 비록 교회에 가라지도 있고, 주인되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쭉정이)도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보화가 있고 진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교회생활을 통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알곡이 되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거나, 나쁜 물고기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8:15). 외형적인 성장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내적인 부패에도 신경써야 할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 알곡(참된 믿는 이들)쭉정이(넘어지는 그리스도인들)를 가르고, 가라지(거짓 믿는 이들)와 곡식을 구분할 심판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그날을 잘 준비하는 성도가 되자.

 

 


20111207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4) 요한의 순교 및 오병이어와 물 위의 기적

[찬 송]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4:1~36(신약25)

[키워드]

헤롯 안디바, , 심판, 회개, 감정, 올무, 헤로디아, 살로메, 세례요한, 오병이어, 안드레, 빌립, 벳세다, 빈 들, 최선, 어린아이, 물 위, 갈릴리, 풍랑, 믿음, 고난, 기회, 자연, 의심, 잔잔

 

1. 서론

예수님의 배척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11장부터 15장까지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 오늘은 14-15장의 개시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수행하실 당시 갈릴리지역과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안디바의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그 원인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선구자역할을 감당했던 세례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손에 의해 순교당하는 장면, 그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신 다음 찾아온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사건 그리고 제자들을 먼저 보냈는데 그만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물 위를 걸어 오셔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3가지 큰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만약 2년의 공생애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 특히 헤롯왕에게까지 소문을 났음을 알 수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신적 권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사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도 죄를 짓게 되면 죄의식 가운데 살면서 큰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주님께 최고의 결과는 못드려도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함믿음만 있으면 어떤 거친 환경도 극복해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헤롯의 경솔한 맹세와 세례요한의 순교(14:1~12)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왕은 예수님 탄생시에 있었던 헤롯대왕(B.C.37~7년통치)이 아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왕은 헤롯대왕의 장남인 헤롯 안디바이다(B.C.4~A.D.39통치).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자마자 그는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귀신이 되어 예수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오해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자신의 생일날 경솔하게 맹세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기며 자신도 두려워하였던 세례요한을 그만 참수형을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영적 세계에 대한 무지는 미신과 오해를 낫는다.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붙어서 역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죽으면 음부와 낙원 다시 말해 천국과 지옥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나와서 활동할 수 없다. 다만 경배받기를 원하는 타락한 천사들이 죽은 사람들로 가장하여 나타날 뿐이다.

둘째, 죄짓고는 못 산다. 세례요한은 의인을 죽였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마음 속에 죄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나하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곧바로 세례요한이 살아 돌아와서 자신을 해하려 할 것이라고 겁을 먹었다. 죄 지으면 빨리 회개하라. 오래 못산다.

셋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헤롯 안디바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세례요한의 회개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일날 그만 사람에게 행한 맹세 때문에 세례요한을 감옥에서 참수시켜 소반에 담아 생일잔치의 놀이개로 사용하고 만다.

악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가? 악인은 심판은 두려워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넷째,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권력에 아부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자이다. 세례요한은 의인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악인을 향해 담대히 선포했다. 자신의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의인은 결코 평탄한 길을 가는 자가 아니다. 외롭고 고독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스스로 올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헤롯 안디바가 취한 헤로디아는 자신의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자였다. 그녀가 헤롯 빌립과 사이에게 살로메라는 딸을 두었다. 그런데 자신의 시아주버님께 시집올 때, 딸을 데리고 왔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행동을 책망한 세례요한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고, 헤롯 안디바의 생일날 의도적으로 딸로 하여금 관능적인 춤을 추게하였다. 결국 헤롯은 넘어갔고, 무슨 청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맹세하고 말았다. 결국 엄마의 말을 듣고 살로메는 세례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고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헤롯 안디바는 세례요한을 참수하는 비극을 저지른 자가 되고 말았다. 헤롯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순간적인 기분에 치우쳐 경솔하게 헛된 맹세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을 살해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성경을 보라. 가인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동생을 죽이지 않았던가?

다섯째, 악을 회개하지 않고 그냥 두면 더 큰 악을 불러온다. 악은 언제나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악이 원인이 되어 또 다른 악을 부르게 되고, 그 악이 원인이 되어 더 큰 악을 행하게 된다. 다윗의 경우를 보라. 자신의 부하의 장수의 아내를 범한 다음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충성된 부하장수마저 죽게 하지 않았던가? 악은 즉시 회개하라. 그래야 더 큰 악을 불러오지 않는다.

 

 

3. 오병이어의 기적(14:13~21)

예수님께서는 헤롯왕이 자신을 되살아난 세례요한의 분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갈릴리 북동쪽 벳세다의 빈 들로 자리를 옮기셨다. 왜냐하면 헤롯이 오해하여 예수님 자신을 박해하거나 사역을 방해하기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해야 할 원래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때로 바야흐로 유월절을 얼마 안 남겨둔 봄(3~4월경)이서 들판에는 푸른 풀밭이 가득한 때였다. 병자들을 고쳐주니, 사람들이 운집하기 시작하여, 유대인들이 저녁시간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오후 3시경에는 무려 남자만 5천명(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 포함해서 약 2만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보니 식사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벌써 오후 3시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들이 먹을 것도 없이 저렇게 있으나 마을에 들어가 무엇인가를 사먹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주님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먹이라고 했다. 그때 안드레가 어린아이로부터 오병이어를 들고 왔다. 그러자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하시고 떡을 떼어서 무리를 먹이셨는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게 하였다. 그리고 따로 떼어놓은 것도 12광주리에 남아 있었다. 당시 광주리는 휴대용 가방과 같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자신들이 먹을 음식과 잠자리에 필요한 용구를 넣어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진리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예수님께서 천국말씀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시어 영적인 갈급함도 해결해주시는 분이시지만 더불어 배고파하는 백성들의 고통도 헤아리시는 분이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날이 어두워졌다고 당신을 찾아온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은 것이다.

둘째, 벳세다 빈 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이심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절호의 찬스였다. 그때가 유월절이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살 수 있었듯이 지금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시고는, 당신의 제자된 우리들이 그들을 돌아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러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나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굶주린 자들을 돌아볼 책임이 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결코 최고의 결과가 아니라 최선의 과정을 바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고의 결과를 하도록 명령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최선을 다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도 이처럼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만족해 하시며, 당신이 친히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주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때 빌립은 계산을 했지만, 안드레는 계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폈다. 그리고 어린이아의 도시락을 가지고 주님께 가져갔다. 그랬더니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최선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무엇을 요청했는가? 비록 통에 가루가 거의 없고, 기름병에 기름이 적게 있을 지라도 먼저 떡 한 덩이를 구워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가루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했던 것이다.

다섯째, 자신에게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의 명령을 일축하려 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하여 예수님의 능력까지도 제한하려 한 것이. 그때 안드레의 수고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성과 창조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했다. 안드레는 비록 자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예수님에게 어떤 지를 물어본 것이다. 참으로 잘 하였다.

여섯째, 작은 헌신은 의외로 큰 결과를 낳게 한다.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큰 기적을 가져온다. 어린 아이와 안드레의 작은 헌신은 2만명을 먹일 수 있었다. 오병이어. 작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도시락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자, 어마어마한 창조의 기적, 배가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다. 주님께 작은 것을 나눴지만 주님은 그것을 큰 나눔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나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나눠두지 아니하고 12 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것을 다시 거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것은 귀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남았다고 함부로 땅에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14:22~36)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후 예수님은 속히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 이유는 무리가 억지로 자신을 임금 삼으려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요(6:14~15), 그럴수록(기적이 나타날수록) 자신을 낮추기 위해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4:2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후 따로 홀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육지에서 10여리 떨어진(25~35스타디온=46.km~5.6km, 1스타이온=185m) 바다 한 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유령인가 생각했지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도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는 물 위를 걸었고 이어 거센 풍랑을 보고는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주님께서 오셔서 그의 작은 믿음을 책망하시고 그를 건져내신 후에 배에 오르자 갑자기 풍랑이 잔잔케 되었다. 그리고 게네사렛 땅에 내리시어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우리는 이상의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우선 그분이 천지만물의 창조주와 통치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구원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둘째, 모든 사람은 자신의 때를 잘 분별해야 하고, 자신을 내려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이 겸손히 일할 때인데도 머리 쳐들면 그는 나중 버림받게 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날이 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위해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것이다.

셋째, 인생의 고난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난이란 절대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그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니 고난에 당당하게 맞서라.

넷째, 예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사정을 더 잘 아시고 반드시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난의 현장에 가장 적합한 시간에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분이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오히려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시겠는가? 반드시 도우러 오신다. 그것을 믿으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다섯째, 믿음은 자연을 초월하게 하는 능력이다. 베드로가 어찌하여 물 위를 걸어볼 수 있었는가? 먼저는 주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순종했다. 어떤 이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지도 아니했는데, 바다에 발을 딛으려 한다. 그러지 말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

여섯째,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 바라보면 넘어진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센 풍랑이 이는 것올 보자 그만 물에 퐁당 빠져버렸다. 그것이 자신을 덮치면 큰 일 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주님이 계시는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있지 않았는가? 그러면 주님만을 바라보라. 시선이 주님에게서 풍랑으로 이동하자, 베드로는 물 속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의심을 버리라. 의심은 환경을 타고 들어온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라. 환경을 의지하지 말라. 환경을 무시하라. 주님의 말씀만을 붙들라. 주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맞추라. 그리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서 의심하지 말라.

일곱째, 주님께서 배에 오르자 풍랑이 잔잔해졌다. 제자들이 위험에 처한 이유는 밖의 풍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배 안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밖의 풍랑이 무서운가?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를 먼저 찾아보라.

이어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의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만졌는데 나음을 다 입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그들에게 믿음이 들어갔고, 간절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11214일 수요기도회설교안

[제 목]

마태복음강해(25) 참된 정결함과 절대 믿음

[찬 송]

428장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427장 맘 가난한 사람 복이 있나니

[설교자]

정병진 목사

[말 씀]

15:1~39(신약 25)

[키워드]

종교지도자,바리새인,서기관들,오염,더러움,씻지않음,가나안여인,겸손,끈질김,기도의대상,파송받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정결법논쟁,음식물,십계명,가나안여인,이방이연,수로보니게여인,귀신,시험,연단,칠병이어,시간,장소,대상,분량,

 

1. 서론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를 들려주신 이후에 갈릴리 나사렛 사람에 의해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드디어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의해서까지 배척을 받으시게 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지역의 한 여인은 오히려 자신이 개취급받는 상황에서 겸손히 끈질기게 매달리며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치게 된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오병이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던 12제자들조차도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칠병이어의 깆거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신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이들에 의한 정결논쟁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호소 그리고 칠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 3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어떤 믿음이 기적을 낳게 되는 지, 그리고 믿음은 왜 자라야 하는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2. 종교지도자들과의 정결논쟁(15:1~20)

1)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손을 씻지 않고 먹은 음식물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 마음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바, 우리들은 항상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닌가를 살펴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정결하게 씻어내어 말하고 행동해야 하겠다.

 

2)예루살렘에서 파송받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시비 고르반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아 온 산헤드린 공의회 조사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그것을 문제삼아 치고 들어왔다.

당신은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왜냐하면 떡 먹을 때에 그들의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아니면 동등한 것이었다. 특히 외출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고, 음식물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고 장로들의 유전(미쉬나)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불결함에 대해서는 트집 잡을 줄 알았지만 진짜 자신의 마음이 더러운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3)정결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음식물과 마음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십계명의 5계명, 20;12)을 어기고 있는 그들의 실태를 고발한다. 그들은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것(선물=고르반)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고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살아왔던 것이다(고르반제도, 7:1).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를 다면서 제5계명인 부모공경은 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당하게 될 것이라는 율법규정을 말씀하면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장로들의 유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꼭 이사야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부모를 섬기는 일에 충돌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태도이나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행위다. 혹시 우리 부모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할 지라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공경의 마음과 태도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불순종은 할지라도 비공경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4)사람을 더럽히는 진짜 요인 사람으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

이어 사람을 더럽히는 진짜 요인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심지 않는 것즉 장로들의 유전은 다 나중에 심판대에 가서는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임을 언급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 소경이면서도 자신이 영적인 소경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란다.

 

5)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7가지 요소 부패한 마음의 본성 7가지

이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7가지 요소를 말씀하신다.

첫째, 악한 생. 둘째, 살인, 셋째, 간음. 넷째, 음란. 다섯째, 도둑질. 여섯째, 거짓증언. 일곱째, 비방(훼방, 신성모독).

그런데 이것들은 십계명 중에서 살인(6계명), 간음과 음란(7계명), 도둑질(8계명), 거짓증거(9계명), 비방(3계명)으로서 5개나 차지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곧 십계명을 어기게 만들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정결논쟁에 관한 결론의 말씀을 읽어보자.

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2. 예수님을 놀라게 한 가나안 여인의 절대 믿음(15:21~31)

 

1)가나안 여인의 요청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책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유대종교자들과 초반에 더 이상의 논쟁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잠시 갈릴리와 이방지역의 경계지역인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서 나아와 소리질러 도움을 청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녀는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녀는 이방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기도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자, 메시야로 시인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긍휼하심에 자신의 소원을 빌었다. 자신이 잘했으니 자신을 잘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짝에도 보잘 것 없으니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그 간절한 요청에 주님은 메물차게 거절하였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을 살리러 보내심을 받았기에 아직은 이방인의 차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았다.

첫째, 이번에는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니라 엎드렸다. 그녀의 겸손함을 볼 수 있는 데목이다.

그러자 주님의 2차적인 거절이 있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지만 그 여인은 둘째, 끈질겼다. 예수님의 말씀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아주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왜냐하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기 때문이나이다 하니

제가 신구약 성경을 읽은 가운데 이처럼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스러기는 개들 차지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2)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왜 그처럼 야박하게 대했을까?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러 오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처럼 메몰차게 대했을까?

첫째, 그녀가 진정 믿음이 있는 여인인지 시험하려 하심이었다(28).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둘째, 제자들로 하여금 누가 진정 하나님께 있는 치유와 구원과 복을 끌어당겨 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라는 것이다.

셋째, 이방인도 저처럼 매달려 도움얻기를 바라고 있는데, 하물려 유대인들은 뭐하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러 온 자신을 유대인들이 그처럼 배척하고 거절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은 곧장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그러자 절뚝발이들, 불구자들, 소경들, 벙어리들을 고쳐주신 것이다(15:29~31).

 

 

 

3. 칠병이어의 기적(15:32~39)

우리는 지난 주에 벳세다 들녘에서 일어났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어떤 분은 그것과 이 본문에 나오는 칠병이어의 기적이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오병이어 기적의 상황과 본 내용이 비슷하긴 비슷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

먼저 알 것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은 시간과 장소와 대상이 다르고, 먹은 숫자와 남은 떡의 분량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벳새다 들녘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먹인 기적이며, 그때는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었다.

하지만 이번 칠병이어의 기적오병이어의 기적이 지난 어느 날에, 데가볼리지역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먹인 기적일 뿐만 아니라, 남자만 4천명이 먹었고, 7광주리가 남았다.

 

무엇보다 더 가장 큰 차이점은 기적을 일으키도록 마중물이 되어준 음식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다. 누구의 음식이었는가? 오병이어는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다. 그런데 칠병이어는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도시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3일동안 자기를 떠나지 아니하고 들에서 잠을 청하고 따라다니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제자들에게 얼마나 가진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의 육신적인 필요에 있어서도 관심이 많으시다. 오직 영적인 문제만 중요하게 여기고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으신 것이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망각하고 또 믿음없는 말을 하지는 모른다. 어쩌면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을른지도 모른다.

15: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또한 우리는 기적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얼마 전만해도 엄청난 기적을 보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또다시 믿음없는 말을 한다. 작은 것이라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만이 더 큰 기적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기적을 많이 체험한 것이 사람이 달라지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지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신비한 이적의 체험이 완전한 믿음을 결코 보장해주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를 찾으신 것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그 사건을 통해 그 동안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를 시험해 보시려고 하신 것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기적을 보면서도 자라길 바라며, 말씀만 듣고도 자라기를 바라며, 작은 것을 보고도 자라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항상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셋째, 주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 그렇게 우리가 한 번 실천해 보자.

 

20111221() 수요기도회설교(대강절 넷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26) 하늘의 표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23장 저들 밖에 한 밤 중에

109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25장 천사들의 노래가

[말 씀] 16:1-20(신약 26)

[키워드]

표적,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요나, 천기, 누룩, 교훈, 인자, 신앙고백,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교회, 천국열쇠, 음부의 권세

 

1. 서론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의회의 조사관들에 의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는 자가 아닌가 하는 괜한 트집 때문에 그들과의 변론을 피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이동하신 것과 데가볼리지역에서 만난 이방인들을 위한 7병이어의 기적 사건 후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크게 3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1~4). 둘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에 대한 훈계(5~12). 셋째,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이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메시야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 믿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보기 바란다.

 

 

2.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16:1~4)

예수님께서는 72어의 기적 직후 무리들을 흩어보내신 다음 배에 오르사 마가단지경으로 가셨다. 그러자 그곳까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자기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1)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바리새인들사두개인들엣세네파와 더불어 신구약 중간기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3대 종파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신약성경에 아무런 설명없이 등장하는 자들이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어 파라쉬(분리하다. 구분하다. 나누다)’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들이란 뜻을 지닌 사람들이다. 율법말씀을 그대로 지키려다 보니, 현재에 살고 있는 자들은 도저히 문자 그대로 지킬 수 없기에 어덯게 하면 율법말씀을 지킬 것인가를 해석한 바로 구전율법(‘미쉬나나중에 탈무드’)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나자 형식적 경건주의자들이 다 되고 말았다. 율법말씀을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남을 비처보는 거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묘한 말로서 자신들의 삶은 항상 거룩한 것처럼 포장하였고(위선자들), 백성들은 항상 잘못을 행하는 사람처럼 만들어 백성들로부터 엄위와 사랑을 한 몸처럼 받고 있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예수님께 자신의 빈 무덤을 드렸던 아리마대 요셉은 다 이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베드로의 뒤를 이어 이방선교의 선두 주자로 쓰임받게된 사도바울은 바로 이 바리새인파에서 경건훈련을 받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약 6천명 가량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두개인들현실적 세속주의자로 불리우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3대 분파의 하나로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을 지낸 사독의 후손이라고 자신들을 이름하여 부른 것으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 계층을 형성하였던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력한 귀족계급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했다. 하지만 성경에 쓰임받은 사람 중에는 사두개파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안 나오니, 현실주의적 세속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하겠다.

이들은 너무나 율법 말씀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살려고 하다보니, 못 믿을 만한 영적인 것들은 다 빼버리고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이나 영혼 불멸을 믿지 않았으며, 영적 세계를 부인하며 성문화된 율법만을 그대로 믿고 실천했다. 또한 이들을 성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성전에서 장사를 행하며 많은 이윤을 남기었기에 대부분 부자들이었고, 이들은 또한 로마사람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2)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교묘한 질문

하지만 놀랍게도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트집잡아 죽이려는 데에는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을 낸다.

 

당신이 진정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일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요청한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기적을 뜨집잡아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그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가정하에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맘 문을 닫아놓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그렇게 요청한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말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사용하신 구어체 용법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얼마나 교묘한 질문인지.

그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셨다. 다시 말해, 저녁이나 아침의 하늘이 붉게 되었을 때 그 날의 날씨를 예상은 잘 하면서도, 예수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책망이었다.

그동안 중풍병자를 치유하고,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며, 물 위를 걸어오시고, 말씀으로 바람과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의 유대인들을 먹여 살리고, 7병이어로 4천명의 이방인들을 먹여 살린 자가 누구였단 말인가?

 

3)표적 보여 달라는 요청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행하실 표적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꼭 필요한 표적 한 가지는 꼭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4절 말씀이다.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비록 당시의 세대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때문에 악한(비윤리적인) 세대가 되어버렸고 음란한(우상을 숭배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큼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온 인류를 위해 예수님이 꼭 이뤄야할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머물다가 살아나온 것처럼, 예수님게서도 무덤에 사흘동안 계시다가 살아나실 것을 행위적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나의 회개의 메시지를 들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40일동안 재를 무릎쓰고 사람을 물론이고 짐승까지도 다 다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는데(3:7~8),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에 관한 경계(16:5~!12, 8:14~21)

예수님은 그들과 다툴 그러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분도 아니었고 그들의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셨기에 더 이상 그들의 대화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가신다. 이제 다시 배를 타고 남동쪽 이방인 지역이었던 마가단 지방에서 이제는 다시 서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가에 위치한 벳세다로 가신다.

그때 한 마디 제자들에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였다. 하지만 제자들도 급히 마가단 지역을 떠나느라 빵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배 안에서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의 빵만 남았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항상 비치해야 하는 것으로 들었다. 그러면서 그날 빵 당번은 누구였는지, 왜 그날따라 빵을 구하여 일찍 마을에 갔다오지 못했는지 서로 야단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이 그들이 빵을 가져오지 않아서 책망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질문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면, 그들의 장난에 모든 사람이 다 빠질 수밖에 없으니, 그들이 말하는 교훈을 더욱 더 주의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설명해주신다.

 

 

1)떡을 준비하지 못한 제자들의 고민

그렇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떡을 미리 준비해 놓지 못했다는 서로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이러한 변론은 무엇이 문제인 줄 아는가?

첫째, 예수님은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제자들을 나무라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고,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인지 않았던가? 그런데 며칠 지났다고 그러한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잊어버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의 빈약한 영적 분별력을 나무라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였지 그들이 빵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많은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어도 아직까지는 빈약한 영적 분별력을 지닌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2)‘누룩은 다른 사람들을 부패시키는 교묘한 가르침을 의미

성경에서 누룩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누룩은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되, 적은 양이 많은 부분을 부패시키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하고 잘못된 가르침이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침투해 들어가서 사로 잡아버리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2: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고전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고전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3)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에는 분명 교묘한 함정과 속임수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경건한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들을 그것으로 미혹하여 같이 타락시켜버리는 속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보여달라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요청도 누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종교적 형식주의, 율법적 형식주의, 외식하는 것 등을 가리키며,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세속주의, 현실안주주의, 배타주의, 기회주의, 물질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적인 경건주의와 사두개인들의 현실적 세속주의와 타협주의를 멀리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4)어떤 자들이 믿음이 적은 자들인가?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6: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자들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자기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첫째, 자신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늘 염려하는 자들둘째,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어떤 존재도 결코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4. 베드로의 신앙고백 및 교회의 설립과 권세에 관한 예언(16:13~20, 8:27~30, 9:19~21)

 

1)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견해와 제자들의 견해를 물었던 장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와 제자들의 견해를 듣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이란 장소로 이동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of Philipi) 지역은 어떤 장소인가?

팔레스틴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갈릴리 북쪽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점, 헤르몬(헐몬) 산 기슭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로 요단강의 주요 근원지이다. 이곳은 구약시대네는 행운의 바알이라는 뜻으로 바알갓이라 불리웠던 지역이다(11:17, 12:7, 13:5). 바알은 구약시대 그곳에서 예배되었으나 후에 헬라인들이 그들의 신인 판(Pan)으로 대치하여 그곳에서 숭배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라 그 마을의 이름은 파네아스(Paneas)로 불리워졌다.

헤롯대왕(B.C.4-A.D.39)은 자신에게 그곳을 준 로마황제 아구스도(2:1)’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27~A.D.14년 통치)’를 위해 대리석으로 신전을 세웠으며, 분봉왕 빌립(B.C.4-A.D.34 통치)은 후에 디베료(3:1)’ 티베리우스’(Tiberius, A.D.14~37년 통치) 황제 통치의 시대에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곳의 이름을 가이사랴로 개명하였다. ‘빌립보는 욥바와 갈멜 사이에 있던 해안에 위치한 또 다른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그곳의 이름을 지은 빌립의 이름을 따라서 붙인 것이다(8:40, 23:23).

 

 

2)예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의 경계의 끝인 북쪽 변방지역으로 이동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게네사렛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인 벳새다에서 배를 내리셨고, 북쪽으로 강을 따라 한참이나 북행하셔서 그곳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다.

예수께서 굳이 이스라엘의 경계 끝까지 가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묻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은 아무런 방해받으심이 없이 그의 제자들에 위대한 진리를 주의하여 가르치시고자 이스라엘의 경계끝까지 가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공개될 경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반발 또한 상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미리 예견하시고 자신의 사역에 불필요한 소요나 방해를 받지 않으시도록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장소를 옮기신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이나 소요를 피하시는 지혜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그 장소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장소는 바위산이자 그리고 엄청난 수원(물의 근원)이 있는 지역이다.

그 장소는 바위로 되어 있어서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과 매우 일치한 환경이었고, 헐몬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스며든 것이 바로 이 가이사랴 빌립보의 바위 산 밑에서 솟아나므로 그 물의 양도 대단하고 거기에는 파릇파릇한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생명이자 생명수이신 것을 설명하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3)예수님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평가(14)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는 말

먼저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사람이자 고난받는 종이지만 장차 부활하신 후에는 왕적 신분을 가지실 분임을 드러내신 것니다.

 

.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

오늘늘 사람들은 예수님은 뭐라고 알고 있을까? 간디와 같은 위대한 스승, 탁월한 종교지도자, 독교의 창시자, 4대성인 중의 한 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틀린 것은 아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이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을까?

 

이때, 제자들은 보고하기를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그리고 예레미야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이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들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내지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11:19)” 혹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12:24)’라고도 말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했을까?

더러 세례요한이라고 함세례요한이 죽은 뒤 부활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며, 더러 엘리야라고 함은 그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된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4:5-6)에 따른 평가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요한이었다(11:14, 17:11~12).

더러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9:1, 14:17, 1:2,16)는 측면에서 예수님도 그랬기 때문이다(19:41). 또한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에 대해 많은 예언을 하며 유다의 죄악을 통렬하게 꾸짖었던 것처럼 예수 또한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죄악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예레미야와 유사했을 것이다.

또한 더러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함은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계시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18:15)’ 뿐만 아니라 유대인 전승에 다시 오리라고 기대된 이사야(외경 에스드랒서 2:18)’ ‘에스라(외경 에스드라 214:9) 선지자들과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일을 했던 인물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예수님에 대한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평가(16)

이제 제자들과 한 3년동안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로 아느냐고 물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치고 나갔다.

당신은 바로 그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인가? 짧지만 이처럼 가장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하게 제시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베드로는 첫째, 예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오실 메시야로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라 함은 히브리어 메시야로 동일한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왕이자 제사장이자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의 지위와 권능을 이양받으신 참 구원자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님이 판의 신이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듯이 이방인들의 죽은 신들과는 대조되는 신으로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영화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고백은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5)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1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아람)’ 요한(요나)의 아들시몬(시므온, ‘들으심이란 뜻)에게 참으로 복된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감추어 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 비밀을 계시해 주지 않는다면 우둔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6)바른 신앙고백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명(18~19)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시므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역초기에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였다(3:16, 1:42). 하지만 이때 비로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네가 베드로다.”라고 하신 것이다. 너가 이제 진짜 베드로가 된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유희를 보게 된다. 반석에 대한 헬라어는 페트라이며, 그런데 예수님께서 반석과 어원이 같은 페트로스(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페트라페트로스는 똑같이 다 반석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2가지 축복을 주셨다. 요약하면 첫째, 음부의 권세가 해할 수 없는 교회를 건축하게 해 주신다(18)는 것이며, 둘째, 땅에서도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인 천국 열쇠들을 주신다(19)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자들은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도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음부의 문들이 절대 침범해 들어올 수 없는 교회가 된다 하셨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조직들은 음부의 문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인데, 교회만큼은 예외가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음부(하데스)란 곳은 어떤 곳인가? 죽은 사람들이 가는 장소요 죽은 사람들을 가둬놓은 장소이지만 사실은 타락한 천사들의 감옥이다. 그들 중의 일부가 세상으로 나와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병을 일으키거나 사고를 유발하고 이간질시키고 싸움과 전쟁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되어지만 그러한 권세가 결코 이겨볼 수 없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음부의 세력, 죽음의 세력, 귀신들의 세력이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권세가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둘째, 바른 신앙고백자들에게 이 땅에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시겠다는 말이다. 즉 이 땅에서 매고 풀면 하늘에서 동일하게 해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천국보내고 지옥보내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시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결코 천주교처럼 신부에게 사죄의 권한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곧 모든 사람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 복음듣기를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천국문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전도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이 되는 모른다.

여러분이 어느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 열쇠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거기 안에 들어가 살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천국열쇠들을 주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는 그 열쇠들을 2번 사용하였다. 첫째는 오순절날 유대인들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사용했다(2:38~42). 그리고 두 번째는 이방인 고넬의 집에서 사용했다. 그리하여 이방인 신자들도 천국에 들어가도록 그것을 사용한 것이다(10:34~4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매고 푸는 열쇠들이 바른 신앙고백자인 베드로와 같은 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 구성원들에게 주신 것임을 짚고 넘어가자.

18:17-18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5. 결론

첫째,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고 들어오지만 교묘한 속임수로 접근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은 누룩이다. 그 누룩은 작은 것이지만 온 덩어리를 부패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둘째, 예수님은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시험하려드는 그 어떤 사람들의 마음도 간파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잊지 말자.

셋째, 주님이 함께 하시면 먹는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자.

넷째,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주는 유익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고백을 잘 사용하자.

다섯째,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진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 지상에서 음부의 문들과 싸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임과 그들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인 것을 잊지 말자.

 

 

20111228() 수요기도회설교(성탄절)

[제 목] 마태복음강해(27)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의 길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 씀] 16:13-28(신약 27)

[키워드]

신앙고백,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교회, 천국열쇠, 음부의 권세, 베드로, 죽음, 부활, 사탄, 제자,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목숨, 세상, 재림, 심판, 상급

 

1. 서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가 받는 축복은 대단하다.

첫째로,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세운 주님의 교회는 음부(하데스)의 문들(권세)이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지옥의 권세가 삼킬 수 없는 유일한 세상의 기관은 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데 그것은 곧 교회다. 교회는 꼭 반석 즉 돌과 같아서 아무도 그것을 깨트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권세인가? 음부의 권세가 건드릴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말이다.

음부란 어떤 곳인가? 헬라어로는 하데스.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라는 곳이다. 이는 죽은 자들이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음부가 어떤 곳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첫째, 그곳은 고통받는 곳이다(16:23, 28).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둘째, 불꽃이 있어서 얼마나 뜨거운지 물 한 방울만 있어도 살 것같은 곳이다. 그곳은 숨쉬기조차 곤란하며 뜨거운 용광로 속과 같은 곳이다(16:24). 셋째,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이다(16:26). 한 번 거기에 빠지면 절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곳이다.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놔두지 않는 곳이 바로 음부인 것이다. 오늘날 모든 죄인들을 행해 음부의 문들이 열려있다. 음부의 문은 하나만이 아니다. 여럿이다(복수). 그러므로 꼭 타잔에 나오는 늪지대와 같은 곳이다. 움직일 수록 더 빠져들어가 결코 나올 수 없는 곳이 바로 음부인 곳이다.

그런데 음부가 집어삼킬 수 없는 유일한 기관이 이 세상에 있다. 그곳이 바로 교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곳, 교회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질 수 있었을까? 교회가 생기기 전까지 이러한 권세를 가진 자는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생기자 이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음부에 내려가셨는데, 음부가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음부를 지으신 분이셨기 때문이요, 죄가 없으므로 음부가 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음부는 오직 사망과 한 친구이다. 그런데 사망은 오직 죄있는 자만 가둘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기에 사망이 그를 붙들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예수님이 이제 믿는 자들 속에 거하시니, 믿는 자들도 사망권세와 음부의 문들이 붙들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천국열쇠를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천국열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저 세상에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열쇠. 이 열쇠가 바로 믿는 이들의 복음전파. 이 복음전파를 통해 모든 불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가 천국을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권세인가?

이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묶는다면 하늘에서 묶이게 될 것이요, 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게 되면 하늘에서 풀리는 권세다.

 

천주교에서는 이 권세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한다. 16:19절만 따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18:18~19의 말씀도 보아야 한다.

18:18-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러한 권세는 결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는 불신자들을 위해 이 열쇠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천국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이 믿는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단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최초로 들어가셨고 그후에 믿는 자들 곧 교회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 천국열쇠는 공식적으로 2번 사용하셨다. 주님께서 주신 열쇠는 천국열쇠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행2장에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사용하였다. 이 때 무려 3천명이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2:41). 두 번째는 행10장의 고넬료 집에서 사용하였다. 고넬료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즉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였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였고 복음을 들었다. 그때 그는 자기 혼자만 그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같이 들었다(10:24). 이로 인하여 베드로는 천국열쇠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장본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고, 천국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공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이다.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항상 따라다닌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사람의 일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첫 수난 예고(16:21)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게 된 후에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직후 예수님은 자신에 관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셨다. 그것은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예언이었다.

 

1)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가지 예언

예수님은 첫째,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은 원래 시온성이라 불리웠던 곳으로 예수님의 조상 다윗이 가나안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건설한 대도시다. 하지만 그 도시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이다(대하3:1). 그곳에서 예수님은 이삭처럼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질 것이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둘째, 예루살렘 가서는 거기에 있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조금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셋째,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2)누가 메시야신 예수님에게 고통을 주고 예수님을 죽이는 존재가 되는가?

그들은 통치국가인 로마 정부나 죄인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루살렘 있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누구은기? 놀랍게도 예수님에게 고통을 주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몰고 갈 존재는 유대인들이 가장 의로운 존재들만 모인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의 대표 의결기구이며, 사법기구산헤드린 공의회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모인 기구이며 단체였다. 하지만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가장 큰 해를 입히는 존재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오늘날도 주님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자가 누구인줄 아는가? 주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교회지도자들이다. 그것은 목사일 수도 있고, 평신도 지도자들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3)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메시야에 관한 2가지 면을 다 볼 줄 알아야 한다.

한 면으로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평화의 왕으로 다스릴 존재(9:11~15)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속죄양(53:4~9)이시기도 하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이면서 어린 양이신 것이다.

53:4-9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께서 이면서 어린 양이신 것은 그의 출생 때부터도 요셉(1:21)과 동방박사들(2:2)을 통해서도 알려진 것이지만, 죽음이 임박한 이제 후로부터는 정확히 더 자세히 나오게 될 것이다.

얼마 후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예수님의 죄목은 정확히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였고, 그 또는 유월절 양으로 유월절 해질 무렵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길 즉 제자도(16:22~28)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당해야 한다는 말에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는 예수님을 옆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꾸짖듯이(항변하여, 간하여, 비난하여, 말리어, 견책하여) 말했. 주님, 당신에게 자비가 있기를... 이 일은 결코 주께 미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이 책망이 곧 따른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나의 올무요 걸림돌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의 생각에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왕이지 결코 고난받은 순한 양같은 분이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만을 생각했지 세상 죄를 없이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메시야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요, 그것이 바로 사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길은 마귀의 길이요,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그 길에는 고난이 없다. 오직 영광만이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의 참 제자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지금 너는 나의 걸림돌일 뿐이다. 내가 걸아가야 할 길을 적극 만류하는 너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일 뿐이다. 그러니 너는 사탄이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

 

 

1)제자도의 3대 기본공식(16:24)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3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소극적인 제자도. 여기서 자기는 재귀대명사로서 헤아우투즉 자기자신(self)을 가리킨다. 자기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자기자신을 거절해야 한다. 금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기자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자아를 뜻한다. 자기의 의지와 뜻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계획 따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그리스도는 절대 고난받아서는 안 되고 죽임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왕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성경은 메시야는 고난받는 종인 것을 말하고 있다.

둘째,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제자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2가지 의미가 있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고통받는 도구임과 동시에 자기자신과 죄를 끝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는 자기자신을 못박는 도구로서 자기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는 도구인 것이다(2:20).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는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하는 로마의 사형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서 생겨나는 온갖 고난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헌신된 마음을 뜻한다(21:13).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셋째, 그리고 나서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은 방향을 가리킨다. 또한 진행적 현재형인 동사인 고로,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 행위가 쉼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되 한 번만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일평생 일생동안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2)주님의 제자가 받는 축복(16:25~28)

첫째,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위대한 것은 이 세상에 도무지 없다. 그것은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16:25~26).

16:25-26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둘째,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았던 사람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뒤에서는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16:27).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셋째, 그리고 살아서 예수님께서 왕국 안에서 오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16:28).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4. 결론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에는 대단한 권세가 주어진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삼키고도 남을 음부도 그 권세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음부의 끌어당기는 문들을 이기고 정반대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천국열쇠가 주어졌음을 상기하자. 이것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문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의 복음전파만이 불신자들을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예수님께서는 한 쪽면으로 보아서는 다윗의 왕국을 세울 왕이지만 또다른 한 쪽면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고난과 희생이 없는 왕국은 왕국이 아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왕국을 사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도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첫째, 자기를 부인하셨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셨으며,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명령만을 준행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요, 부활의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20120104() 수요기도회설교(신년감사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28) 그리스도의 변형되심과 계시 그리고 적용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09장 목마른 내 영혼

426장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말 씀] 17:1-27(신약 28)

[키워드]

변화산, 변형되심, 모세, 엘리야, 베드로, 세례요한, 간질, 귀신, 믿음, 기도, 금식, 성전세, 한 세겔,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1. 서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을 주님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에 제자들은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주님은 장차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왕노릇하실 때에 그분과 함께 한 사람들의 영광이 어떠한 것임을 잠깐 보여주시려고 높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려가신다.

오늘은 바로 그 높은 산에서 벌어진 일그 때 산 밑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베드로의 실수에 관한 이야기다.

 

 

 

2. 예수님의 변형 사건 및 엘리야에 관한 세 제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7:1~13)

 

1)변형산에서 변형되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에 3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가신다. 오늘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갑자기 그들 앞에서 변형이 되셨다. 그때였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예수님의 옷은 빛처럼 새하얗게 되었다.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예수님께서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원래 가지셨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마가 다락방에서 드린 대제사장적 기도를 한 번 다시 되뇌여 보자.

17:4-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예수님 앞에 나타난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3)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그들의 눈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왜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까? 구약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다니엘 등등. 하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타났을까?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다(9:31)

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9: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표준새번역)

 

3)베드로의 반응과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4~8)

베드로는 항상 앞서가려는 모습이 강하다. 베드로는 그만 놀라운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더니 그만 그것에 푹 빠져 주님께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고 말았다.

주님, 만일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장막(, 스케네)3개를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목격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한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거였다. 어찌 피조물과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히브리서를 보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종으로 수고한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하신 분이다(3:5-6).

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어디 그뿐인가? 엘리야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주의 사자와 광야의 소리일 뿐이다. 그는 결코 메시야가 동등한 레벨의 사람이 아니다(3:1, 4:5-6).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그는 메시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은 사람이다(1:26~27). 메시야가 오면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다(3:30).

1:26-27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 때였다. 하늘에서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는 그들의 얼굴을 숙인 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때였다. 주님께서 다가 오시더니,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세와 엘리야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과 다른 것들을 어찌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과 블레셋의 신들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어찌 불교와 기독교를 동일선상에 놓으려 한단 말인가? 피조물을 창조주와 한 레벨에 두지 말라. 일요일과 다른 날을 동일한 날로 치부하지 말라.

 

 

4)예수님의 함구령(9)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실 때에 주님은 3명의 제자들에게 변형산에서 보았던 것들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다. 이는 그 사실이 유포되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추대할 가능성도 있게 때문이며, 예수님의 사역(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5)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0~13)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이시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평소 때 들었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온다고 했는데, 방금 만났던 그 엘리야가 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은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올바른 것임을 말씀하셨지만, 이미 온 엘리야를 임의로 대우했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은 보고도 볼 줄 모르는 자들이 참 많다. 그래서 실수한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에라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후회하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3. 귀신들려 간질에 걸린 소년의 치유 및 제2차 수난예고(17:14~23)

 

1)산 밑에서 벌어진 일(14~18)

산에서 내려오자 산 밑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 밑에서는 어떤 귀신들려 간질하는 아이를 둔 아버지가 나머지 9명의 제자들에게 그 아이를 고쳐 달라고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한채 쩔쩔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 귀신이 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서기관들이스라엘 백성들 무리가 있었으니, 참으로 가관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머지 3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 꿇어 엎드려 주님께 간구했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주 불 속에도 넘어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마 자살하려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들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그들은 그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서기관들과 이스라엘 백성무리, 그 아이의 아비, 9명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통분히 여기시며 책망하셨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주님은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일컬어 믿음이 없는(아피스티스) 세대이며, 패역한(삐뚫어진, 비틀어진, 왜곡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잠깐 그 자리에 없자, 귀신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고,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버리자, 그 아이는 그 순간 낫게 되었다.

 

 

2)나머지 9명의 제자들의 질문(19~21)

그러자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서 다가가서 물었다. 왜 우리들은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에게 믿음이 적게 때문이다. 만약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말만큼 있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하고 말하면 옮겨질 것이고, 또 못할 것이 없을 것인데, 너희의 믿음이 적었던 것이다.”

다른 평행관주를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이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9명의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적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능력을 힘입는다. 기도할 때 천사들이 파송되기 때문이다.

 

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에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3)2번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22~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 그 이야기를 하신다.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말씀해 두시는 것이다. 그때가 되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말이다.

 

 

 

4. 성전세 납부 논쟁(17:24~27)

이에 예수님 일행은 헐몬산의 어느 지역을 떠나 가버나움 즉 그들의 주된 사역지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성전세를 거두러 다니는 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1)베드로의 섣부른 대답(24~~25절 상반절)

반 세겔 받는 자들은 성전세를 거두러 다니는 자들이다. 반 세겔은 두 드라크마다. 드라크마는 은으로 만들어진 유대인의 기본적인 주화다. 100드라크마는 1므나에 해당되며, 6,000드라크마는 1달란트에 해당된다. B.C.360년경에 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의 가격이었으며, 황소 한 마리는 5드라크마였다.

본 절에 나오는 반 세겔은 2드라크마로서, 25세부터 50세까지 유대인의 모든 남자들이 매년 내야하는 성전세였다. 일반적으로 1드라크마는 1/4세걸로 취급되었으므로 두 사람의 분량은 두 드라크나는 반 세겔인 셈이다. 성전세는 성전의 유지 및 보수 비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출애굽기 30:11~16절에 규정된 속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에는 정기적인 매년의 인두세로 발전되었다(10:32).

이는 로마법 규정에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강제적인 성격의 세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대부분의 유대인은 자발적으로 이 성전세를 내었다. 가끔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덕적으로 정죄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예수님의 나이는 33세 정도였고, 베드로의 나이는 그보다는 10살 정도 많은 나이였기에 그들은 성전세를 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성전세를 내신다고 말했던 것이다.

 

2)예수님의 답변과 베드로의 고민(25절하반절~26)

그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먼저 베드로에게 말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땅의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의 아들들이냐 아니면 타인들에게서냐?” “그야, 타인에게서지요.”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제니라.” 듣고 보니, 예수님의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는가? 그러니,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이유가 없었다. 참 난처하게 되고 말았다.

3)예수님의 해결책(27)

그러자 예수님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시며 그가 할 일을 일러주셨다.

내가 만약 성전세를 안 낸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가지고 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너는 바다로 나가 낚시를 하거라. 그러면 제일 먼저 잡혀 올라오는 고기의 입을 열어보거라. 그러면 그 입 속에 한 세겔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너와 나를 위하여 성전세를 내도록 하라.”

베드로는 곧바로 낚시를 하러 갈릴리 바다로 가야 했다. 그리고 낚시를 드리웠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설쳐가지고 입이 방정이지. 지난 번에 변화산에서도 하나님께서 나타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얼마 지났다고 벌써 까먹고 이렇게 말했단 말인가?”

베드로는 성전세를 받으러 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옳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우리 주인에게 여쭈어보고 오리이다.

그렇다. 잘 모르는 것은 물어보는 것이 상책이다. 무턱대고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기 쉽다. 믿는 자들은 무슨 문제이든지 항상 주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가서 물어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120111()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둘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29) 천국에서 큰 자와 용서의 범위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말 씀] 18:1~35(신약 29)

[키워드]

천국, 큰자, 어린아이, 겸손, 작은자, 시록, 영생, 지옥, 수호천사, 잃은 양, 범죄, 권고, 교회, 용서, 일곱 번, 만 달란트 빚진 자, 탕감, 불쌍히 여김

 

1. 서론

오늘 우리가 읽은 18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긴 설교의 4번째부분이다. A.D.29년초부터 예루살렘 입성전까지 있었던 사건 중에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은 3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1~14절까지는 천국에서 누가 큰 가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답변으로 주신 교훈이다. 둘째, 15~20절까지의 말씀은 형제의 범죄에 대한 처리책으로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1~35절까지의 말씀은 용서의 범위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단어로 줄여서 말하라면, 겸손인간존중용서와 긍휼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 3가지 이야기는 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

먼저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 자인가에 대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사용되는 가치기준이 아닌 것을 제시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 천국백성은 작은 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는 우리가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 한 어린아이를 통한 겸손과 소자에 대한 존중의 교훈(18:1~14)

 

천국에서 제일 큰 자는 누구인가?

1)이 질문이 던져지게 된 이유(18:1)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지역에서부터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베드로의 답변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어 변화산에 가실 때,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3명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엄청난 영광을 보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그 숫자에 들어가지 아니한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게 될 때,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끼리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토의를 하였지만 여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 자인지를 정확히 설명해주셨다.

 

2)예수님의 답변(18:2~5)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셨는데 크게 2가지로 답변하셨다.

첫째,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18:2-5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천국은 어떤 자가 들어갈 수 있는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자가 들어간다. 어린아이는 절대 의존의 감정과 절대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제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을 아는 자가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큰 자는 자신이 마땅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라고 여기는 자가 아니라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인정하는 자가 큰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천국에도 차등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어떻게 차등이 존재하는가 하고 말하지만, 22:14에 보면, 예루살렘 성 안에서 들어가서 살 자가 있고 성밖에서 사는 자가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리고 둘째, 이 세상에서 작은 자에 대해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경고하는 말씀을 덧붙히셨다(18:6~14)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섬기는 자들을 결코 멸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함을 이어서 언급하셨다.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들(남성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그는 차라리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 때문에 그러한 자들에게 화가 임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지체 중의 일부가 작은 자를 업신여기려 한다면 차라리 그 요인을 잘라버리는(제거하는) 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실족케 하는 요인이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잘못하면 그러한 범죄행위를 계속 행하다가 지옥의 영원한 불에 던져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를 영접하며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들이 당하는 모든 형편을 항상 보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8:10).

그러므로 작은 자 곧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섬기는 자가 하나라도 실족하게 되는 것은 결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알고, 그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도 귀히 여기시지만, 한 마리의 길잃은 양도 찾도록 찾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잃어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이다.

 

 

 

3. 범죄한 형제에 대한 처리책과 교회의 권징(18:15~20)

만일 우리의 형제 즉 믿는 식구가 나에게 범죄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 원칙은 이렇다.

첫째, 범죄한 자를 함부로 다루어 그러한 자를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둘째, 그러나 교회구성원들 즉 두 세사람의 책망을 무시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세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그들의 기도대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범죄한 형제에 대한 3단계의 처리책(18:15~17)

범죄한 형제에 대해서는 3단계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 처리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8:15-17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혼자 가서 은밀하게 그를 권고하라는 것이다. 만일 그 형제가 그것을 알아들으면 그 형제를 살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5). 이는 비록 그가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서 그가 실족하게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임을 뜻한다.

둘째, 만일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세우고 그의 잘못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는 2~3증인의 확증을 통해서만 정죄할 수 있다는 구약율법규정(19:15)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범죄자자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경우 그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알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욕하면, 증인을 동반하여 가서 그에게 권고하라는 것이다. 이는 범죄자에게 또 한 번의 회개의 기회를 주고, 이를 듣지 않을 경우 징계하기 위함이다.

셋째,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이방인이나 세리는 잘 접촉하지 않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를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자처럼 처리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 밖의 사람으로 취급해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징계를 내려도 좋다는 말이다.

 

2)범죄한 형제가 두 세 사람의 권고를 듣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18:18~20)

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진실한 구성원들 즉 2-3사람이라도 그들이 구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범죄자는 두 세 사람의 증참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구하는 것을 허락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범죄자를 두 세 사람이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단서를 하나 달았던 것이다. 내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기도가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고픈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서 그래,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 아뢰려는 바로 그 기도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권징, 참으로 신중해야 할 것이다. 과연 예수님께서도 그 기도를 하나님께 하실 만한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상의 사실은 교회의 권징조치는 결코 혼자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권징이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혹은 극단적으로 이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두 세 사람 이상의 합치된 의견과 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4.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범위(18:21~35)

예수님께서 범죄한 형제에 대해 치리를 할 때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자, 그렇다면 범죄한 형제를 얼마만큼 관대하게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신의 빚을 탕감해준 왕의 긍휼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치 않은 한 악한 종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1)범죄한 형제는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할까?(용서의 횟수)(18:21~22)

이제 베드로는 범죄한 형제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잘못을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물었다. 그때, 베드로는 아주 많이 잡아서 ‘7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는 당시 랍비들의 용서관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당시의 랍비들은 사람이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3번까지는 용서해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랍비 요세 벤 예후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한 번 과실을 범해면 용서된다. 그리고 두 번 세 번까지도 용서된다. 하지만 네 번째는 결코 용서되지 아니한다.”

 

그러자 주님은 7번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7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이는 490만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를 무한대로 용서해주라고 하셨다.

단 조건은 그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경우이다(17:3-4).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자신이 잘못한 것을 모르는 자를 용서해 줄 수도 없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죄인인지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주님은 그들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지만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에게는 용서의 아량이 베풀어질 수 없다.

 

 

2)천국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18:23~35)

이어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은 어떤 사람인지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백성은 어떤 것인지를 자신에게 범죄한 자를 용서해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다.

모든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전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나아가 자신의 삶을 회계해야 한다. 이는 채무자들이 채권자에게 채무를 청산하는 절차와 같다. 여기서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우리 죄인들을 가리킨다. 사실 인류는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진 상태라 도저히 그것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다. 그러 심판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빚을 갚으라고 명령이 내려질 것이다.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자식들과 자신의 모든 소유라도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한다.

그때 일만 달란트가 빚진 자는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가? 자비를 구했다. 시간적인 말미를 한 번만 더 달라고 요청했다.

1만 달란트가 얼마나 될까? 1만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어치. 1데나리온이 남자 성인의 하루 품삯이니, 1만 달란트는 하루동안 노동자 6천만명이 일한 값이다. 한 사람이 일한다면, 20만년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양이다. 하루의 품삯을 3만원 정도로만 치더라도, 18천억원 정도 된다. 당시 유대나라 전국에서 로마에게 1년에 바친 세금이 800달란트밖에 안 되었으니, 개인이 갚을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것이다.

이는 우리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부채임을 알 수 있다. 죄가 곧 부채로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 부채자의 빚을 적게 쳐주어서도 그의 몸과 그의 처자식과 그가 가진 모든 소유만을 그래봤자, 아무리 잘 쳐 주어도 2천 데나리온 어치밖에 안 된다. 그것이라고 내라고 하자, 채무의 기간을 조그만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주인은 얼마나 긍휼이 많은 분이셨는지, 그의 간곡한 간구에 더 큰 은혜를 베푼다. 시간적인 말미가 아니라 아예 그가 지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빚이 없는 것처럼 여겨주었다는 말이다.

그후에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노동자의 3달치 품삯) 빚진 동료를 만난다. 그것은 자신이 탕감받은 1만 달란트에 비하면, 1/60만에 지나지 않는 아주 적은 금액이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은 잔인하고 악했다. 그를 붙들더니, 그의 숨통을 조이면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그러자 그 동료가 조금만 참아주면 갚겠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만 그 동료를 감옥에 쳐 넣고 말았다. 그러자 나머지 그의 동료들이 그 동료가 하는 것을 보고는 그 사실을 임금에게 고해 버렸다.

그러자 임금은 당장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18:32-35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렇다. 자신이 어떻게 탕감받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자는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없다. 그는 옥졸들 즉 고만하는 자들인 천사들에게 붙들려 20만년동안 감옥생활을 하도록 그곳에 보내졌다. 그것도 그 빚을 다 갚기까지다.

그렇다. 하나님의 용서를 만홀히 여기고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한 배은망덕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가 들어갈 곳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뿐인 것이다.

 

기왕 자신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려면,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진심으로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 자신의 형제가 자신에게 죄지은 것을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중에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이제는 용서하며 살자. 기꺼이 마음에서부터 용서해주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를 축복하자. 이것이 천국백성의 합당한 삶이다.

 

 

20120118()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셋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0) 이혼논쟁과 어린아이 그리고 영생의 길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20장 듣는 사람마다

52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말 씀] 19:1~29(신약 31)

[키워드]

베뢰아, 이혼, 결혼, 모세, 이혼증서, 음행, 간음, 고자, 어린아이, 천국, 영생, 청년, 인간계명, 구제, 재물, 부자, 하나님의 나라, 구원, 상급, 영생, 나중됨

 

1.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가 될 수 있음을 배웠으며, 상대적으로 신앙이 약하거나 자신을 낮추는 자를 실족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죄범한 형제가 자신에게 찾아와 죄용서를 빌 경우에는 숫자에 제한없이 그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시기 전 사역을 더듬어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과 약자존중과 용서와 긍휼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갈릴리 지방을 떠나서 요단강 동편의 베뢰아 지방을 경유하여 유대지역으로 이동하셨는데, 그때 베뢰아 지방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그때였다.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파송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혼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이제 예수님은 이혼과 영생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 바리새인들의 이혼논쟁(19:1~12, 참조 막10:1~12, 9:51~56)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예수님께 질문했다. 사람이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이혼을 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이는 당시 힐렐학파의 주장이었다. 당시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힐렐학파와 샴마이학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힐렐학파는 모든 죄목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샴마이학파는 엄격한 율법주의자들로서 간음 이외에는 어떤 이유로도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답변하셨다.

첫째, 이혼은 결혼제도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맺어주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와 권위에 대한 도전행위이니만큼, 간음이외에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다만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약자인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말씀하시면서 이혼은 매우 제한적으로 간음의 경우만 해당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신생활은 부름받은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서 매우 제한적인 것이지 결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주셨다.

 

1)사람은 자의대로 이혼할 수 있는가?(19:4~6)

19: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창조하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창조하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육체)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함께 멍에매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그렇게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은 본래(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으로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한 육체를 이루는 결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임을 말씀하셨다. 부부가 되면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육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절대 둘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두 사람을 짝지어준(함께 멍에를 메게 하신) 것이므로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수고와 고통을 감당하며 공동의 보조를 맞춰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임의대로 이혼할 수 없다고 단언하신 것이다. 결혼이란 남녀간의 사람의 결합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신적기원을 갖는 것이기에, 이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둘 다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9).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그럼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주는 조건으로 이혼할 수 있다고 했는가?(19:8~9)

19: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완악한 마음)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신24:1-2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였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증서를 조건으로 이혼을 허용한 것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이혼은 본래의 창조원리에 따른 것이 아님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혼은 오직 단 한 가지 조건 즉 간음이라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없다고 못박으셨다.

24:1-2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녀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녀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의 무능력함 내지는 경제적인 어려움, 성생활의 불만족, 견해와 성격의 차이라고 하면서 이혼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증거를 써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당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은 채 여자를 버리게 되면 버림당한 여자는 다시 재혼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므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그것을 허용한 것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보호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합법적으로 이혼한 여성은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약자보호의 차원에서 이혼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혼이 될만한 사유가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것이지, 무조건 이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3)그렇다면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19:10~12)

그러자, 제자들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항변하였다. 이처럼 제자들은 결혼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며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배우자에게 충실할 때 얼마나 큰 기쁨을 얻는다는 기본진리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오직 타고난 자만이 가능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결혼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독신은 특수한 경우에 허용한 것이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닌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독신은 인간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선물인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결혼하면 배우자에게 얽매이게 된다든지 자식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허비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유 때문에 결혼하려 하지 않는 것은 잘못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독신생활은 결코 남녀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독신으로 지낼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3가지 경우를 제시하셨다. 첫째는 선천적 성불구자, 둘째는 후천적 성기능 제거자, 셋째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자의 경우가 그것이다.

 

 

2. 어린아이를 향한 예수님의 축복(19:13~15)

그때였다. 어린아이를 랍비와 같은 존경받는 사람에게 데리고 와서 안수기도를 받는 당시의 풍습을 따라,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부모들이 있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어린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19:14-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허락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왜냐하면)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왜 결혼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두 번째의 축복인지 아는가? 하나는 안식일을 허락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가정을 허락하신 축복이다.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결혼하여 태어난 어린아이(파이디온)은 천국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절대 누군가 위에서 군림하려는 것이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부모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인 것이다.

남여는 결혼을 통해 어린아이를 낳아 부모가 됨으로써 천국의 무엇인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결코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현재 명령형) 말이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 하나를 품에 안으시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친히 안수기도해 주셨다.

 

 

 

3. 영생에 관한 부자 청년과의 대화(19:16~22)

(참조 막10:17~22, 18:18~23)

그때였다.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왔다. 그는 큰 부자였다(18:23 큰 부자인고로). 괜찮은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 관원 즉 관리였던 것이다(18:18). 물론 그는 자신이 율법을 성실히 준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왔고 길에서 넙죽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의 질문은 어찌 보면 좋게 들린다. 자신은 영생을 얻을 줄 자신하고 있지만 예수님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도 좋고, 질문도 좋다.

그는 당시 제법 직업도 괜찮았고 큰 재산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율법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그는 천국도 욕심이 났다. 그래서 천국도 소유하고자, 혹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사실 속내는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이 완벽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어보고 그것을 보충하여 천국도 얻어보려고 주님께 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을 들추어내셨다. 그리고 영생은 결코 자의적 노력으로 어떤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통치를 겸손히 받아들임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욕심은 천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국을 덤으로 얻으려는 것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먼저 주님은 그가 율법도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부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을 던지셨다.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너는 어떻게 했느냐?”

그러자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무슨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은 아예 빼고, 인간계명들만을 언급하셨다. 5~10계명을 다 지키고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그러자는 그는 이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습니다(10:20, 18:21). 그러나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더 있을까요?” 그는 으시대면서 말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가 그 계명을 형식적으로는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계명에 관한 율법도 지켜오지 못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셨다(19:21).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하지만 그 청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정작 온전하지 않는 자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계명의 핵심은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을 실천해 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기 때문이.

영생은 인간계명을 잘 지킨다고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계명조차 실제로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말했어야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제가 어느 정도 좋은 직업도 갖게 되었고 돈을 벌었으며,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기에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하나님보다는 재물에 더 많은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의 재물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와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영생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을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물을 더 사랑했다. 그것을 처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청년이 영생이라는 지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청년과 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제자들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 부자와 천국의 관계 그리고 천국에서의 상급(19:23~30)

(참조 막10:23~31, 18:24~30)

 

 

1)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쉬울까?(19:23~24)

19:23-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쉬울까? 예수님의 답변은 한 마디로 매우 어렵다이다.

이 말씀은 부(물질)를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은 자들에게는 큰 경계가 되는 말씀이다.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부자는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될 2가지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부 즉 재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기 때문이요. 둘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을 맡기신 목적을 망강한 채 자신의 배만을 위해 탕진하기에 급급할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하는 천국은 미래적인 천국으로 다음 세상에서 영혼이 만나게 될 천국을 가리킨다.

 

2)그렇다면 부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부자는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재물에 있어서 부자를 가리킨다. 바로 앞의 부자청년과 같은 사람이다. 또한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형제 다섯명을 가지고 있던 그 부자를 가리킨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 부자는 부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명예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람들은 세속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누릴 것이 많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의존하기 쉽다. 반면에 결코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도 힘들 수밖에 없다.

 

3)제자들의 근심과 영생의 길(19:25~26)

그때였다. 당시 부를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큰 근심이 생기고 말았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의 통념을 깨드린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였다.

19:25-26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첫째, 그것은 사람이 어떤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조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간은 절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이나 행한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선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한 것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 제자들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제자들 자신은 재물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으니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는지에 대해 물은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더 높은 지위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들의 교만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되었다고 해서 안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덧붙히셨다(19:28-30).

19:28-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현세에=19:30, 10:30)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주님을 위하여 정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그럴수만 있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며, 그 부자청년이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자가 받게 될 복을 이렇게 말한다.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버린 것보다 백 배나 더 받게 되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주님을 위해 집,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식 그리고 전토를 버릴 수 있을까? 누가복음에서는 아내까지도(18:29)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부자청년에게로 다시 가보자. 오늘이 바로 우리에게 그 부자청년이 찾아온 그 날일 수 있다. 당신은 과연 주님의 말씀에 자신이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영생을 위해,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는가? 이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누가 감히 함부로 천국에 그렇게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천국은 결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져어도 그 믿음이 진정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인지를 이처럼 시험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결국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아무나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할 수 없으나 그분으로서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주권은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20120125()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 넷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1) 포도원품꾼의 비유와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말 씀] 20:1~28(신약 33)

[키워드]

천국, 집주인, 포도원, 품꾼, 선한 주인, 노동의 댓가, 시간, ,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 고난, 죽음,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 주의 나라, 우편, 좌편, , 세례, 세상권세자, 섬기는 자, , 인자, 섬김, 여리고, 두 소경, 믿음

 

1.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혼과 어린아이 그리고 영생에 관한 부자청년의 질문에 대해 배웠다. 이혼은 신성한 결혼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어린아이가 주님께 오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천국의 법칙을 모르는 소치이고, 재물 때문에 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은 천국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1가지의 비유와 1가지의 논쟁을 함께 배우게 될 것이다. 각 단락을 분류해보자면, 1~16절까지는 5차례에 걸쳐 고용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오고, 17~19절까지는 예수님의 세번째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20~28절까지는 모친 살로메를 앞세운 요한과 야고보의 청탁을 통해 참 제자의 덕목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섬김과 겸손이 아닐까?

 

 

 

2.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

포도원의 품꾼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다. 그리고 이 비유는 천국에 관한 비유이다. 왜냐하면 1절에 천국은 마치 ~과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왜냐하면~”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마19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천국에 관한 말씀 즉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1)포도원 품꾼의 비유, 무슨 내용인가?

포도원은 포도의 수확철이 되면 일시적으로 많은 품꾼들이 필요하다. 포도 수확절은 대개 9월경에 이루어지는데 주인은 하루 일당을 주고 고용하는 품꾼을 찾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오전6) 장터로 나갔다. 그리고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합의하여 자신의 포도원에 그들을 들여보냈다. 이들은 주인이 보기에 포도원 품꾼으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주인은 더 이상 품꾼들이 필요없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노동자의 하루시간은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로서 오전6시부터 오후6시까지 12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12시간동안 일한 품삯이 바로 1데나리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다시 장터로 나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고(원문: 일이 없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서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주인은 그들을 불쌍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약 그 날 일당을 벌지 못하면 굶주리고 있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 안으로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디카이오스, 공정하게=적절하게) 줄 것이다(4).”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은 포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주인의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오와 오후3시 또 장터에 가서 그와같이 했기 때문이다. 상당하게 줄테니 포도원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기 1시간 전에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을 찾지 못해 서있는 다른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었다. 집에 안 가고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고용되지 못하고 서 있느냐?(6a)”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고용하여 써 주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7a).”

, 생각해보라. 그들은 오후5시 무렵에 그 장터에 나온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었던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써 주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 잘할 것으로 보이지 않아, 그들을 찾으러 나온 주인들의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포도원의 주인은 품꾼으로 고용하는 기준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힘이 세며 일을 잘 할 만한 사람인지를 보지 않았다. 오직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도 또한 포도원 안으로 들어가라(7b).”

1시간 후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청지기를 시켜 자기 포도원에 고용한 품꾼들의 삯을 주게 했는데,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들까지 그들에게 품삯을 주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후5시에 들어와 1시간 일한 자들이 와서 1데나리온 즉 하루의 품삯을 받았다. 그러자 먼저 들어온 자들(이른 아침 다시 말해 오전6시부터 들어온 자들)이 자기들은 더 받을 줄을 알았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은 1데나리온씩을 주었다. 그러자 먼저 들어온 자들이 주인을 원망하여 말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동등하게 하였나이다(12)”

 

 

2)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실체는 무엇인가?

 

. 등장인물

이처럼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는 3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어떤 집주인과 장터에서 일감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 즉 품꾼들 그리고 주인의 청지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실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집주인은 하나님과 같으며,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선민 공동체인 유대인과 교회, 즉 품꾼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 품꾼 중에서도 이른 아침(오전6)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받고 포도원에서 들어가서 일했던 자들은 유대인들을 그리고 3(오전9), 6(정오), 9(오후3), 11(오후5)에 들어온 자들은 주인의 은혜에 따라 고용된 자들로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 교훈

첫째, 품삯의 계산은 포도원에 들어온 순서와 반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 관행과는 다른 특별한 것으로서, 구원이 나중 온 자들부터 주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둘째, 노동자가 일한 시간과 분량에 상관없이 전부 다 1데나리온의 품삯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먼저 주인의 눈에 띄여서 고용되었든, 아니면 나중에 고용되었든 구원이란 인간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 아침 주인의 눈에 들어 고용된 사람도 자신이 잘 나서 고용된 것만은 아니다. 그 주인이 그를 선택했기에 고용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다. 만약 주인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그리고 소위 1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자에게도 1데나리온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했던 자들이 자기들도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게 되어 주인을 원망했을 때,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20:13-15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 이 비유의 핵심(20:16)

이 비유의 핵심은 노동자에게 있지 않고 주인에게 있다.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눅19장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한 부자와 천국의 비유의 결론과 똑같다(19:30).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오후5시에 고용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이른 아침 즉 오전6시에 고용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비유의 핵심은 노동자에게 있지 않다. 노동자가 언제부터 쓰임받았느냐,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일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확을 냈느냐에 있지 않다. 몇 시간 동안 일했고 얼마나 많은 수확을 냈는가가 주인이 그들에게 품삯을 계산하는 기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들어온 자에게 분명 1데나리온을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1데나리온을 준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집주인이 그들을 불러서 고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후 5시에 들어온 자에게 1데나리온을 준 것은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아무 쓸모 없이 버려진 자들까지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에 따른 품삯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온 자들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주인을 나는 처음으로 만나봤어. 그분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정말 훌륭하신 분이다.”

즉 먼저 온 자들은 늦게 포도원에 들어왔으나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같이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의 교만을 꾸짖었다. 먼저 들어온 자들은 나중에 들어온 자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우리들은 너희들과 달라. 우리들은 맨 처음 뽑힌 사람들이야. 나는 주인의 쓰심에 제일 합당한 사람이야. 우리들은 너희들보다 건강하고 똑똑해. 너희들은 사실 쓰레기들이지. 너희들은 아무 쓸 데 없는 인생들이야. 그런데 너희들이 이곳에 들어와 같이 일하더니, 저리 가, 너희들과 함께 일하는 내가 이상하지. 저리 가. 이것들아

그들은 사실 주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높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의 보상에 원망만 해댔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맨 나중에 품삯을 주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맨 나중에 들어온 자들은 그날 품삯을 받아들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감격했을까? 그들은 사실 하루의 품삯의 1/12만 받았어야 옳은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이 오후5시까지 뽑히지 못해 고통받아야 했던 그들의 마음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려준 것이다.

 

 

 

3.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과 죽음 예고(20:17~19)

2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이어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예언하신다. 하지만 그 예언은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부활로 승화될 것임도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죽지 않고는 살아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내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내가 살아있으면 그분이 역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한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4. 혈육을 앞세운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

(20:20~24, 참조 막10:32-45, 18:31~34)

 

1)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의 요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 갈릴리에서 베뢰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을 때,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어머니를 시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국을 건설하게 되면 자신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게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본문만 보면, 이러한 청탁을 꼭 살로메가 한 것처럼 보이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청탁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도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살로메이지만 실제는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킨다는 것을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현재 중간태 2인칭 복수형어미이기 때문이다. 살로메의 청탁을 받은 예수님게서 살로메 개인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직접 대답을 하고 계신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여동생으로, 예수님의 이모되시는 살로메다(15:40, 16:1, 19:25). 다시 말해, 야고보와 요한은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이용해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이 세울 것으로 생각한 지상 나라에서 중직을 맡게 해달라고 청탁한 것이다.

 

 

2)제자들의 영적무지를 책망하신 예수님

그러자 예수님은 2가지를 말씀해주신다.

 

.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이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지를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마가복음까지 합쳐서 이야기하자면)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음의 세례를 통과함으로서 얻게 되는 것이며, 둘째, 혹시 우리가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되고 죽음의 세례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 즉 그분의 주권에 달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잔과 세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잔과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성경에 보면 잔은 고난의 잔(26:29)이라는 의미도 축복의 잔(고전10:16)이라는 의미도 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잔은 고난의 잔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받아야할 고난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잔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다.

마가복음(10:35~4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의 잔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받는 세례 즉 죽음의 세례도 언급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

10: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야고보와 요한은 잔과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 잔을 마시는 것은 축복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이며, 세례를 받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죽음을 넘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르는 것들이다.

 

둘째, 세례라는 의미도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자신은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계속적으로 언급하신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죽음의 세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라는 의미 속에 세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의 잔의 끝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곧 순교다. 그러므로 마태기자는 받는 세례까지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의 잔만 언급한 것이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의 언급 때문에 그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이들 중에서 동생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당장 고난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형 야고보는 12사도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한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12:1~2). 그리고 사도 요한도 나중에는 끓은 기름가마에 넣어져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의 영역임(23).

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보좌 좌우편에 앉을 자를 결정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비하셨든지라는 말은 완료수동태이다. 이는 곧 예비하는 행위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인 것이다.

 

. 나머지 제자들의 분히 여김(20:24~25)과 천국의 영적 진리 선포(20:25~28)

그러자 이 청탁을 보고 있던 나머지 제자들은 그 두 사람을 분히 여겼다. 나머지 10명의 제자들도 자신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었지만 감히 나서지 못했는데, 친척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2명의 제자들을 보고 격한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영적 진리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20:26-2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억압과 무력을 통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적인 통치원리가 아니라, 항상 남의 종처럼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통치원리는 겸손, 섬김, 희생, 사랑인 것이다.

 

 

 

5. 여리고성의 두 소경(20:29~34, 참조 막10:46-52, 18:35~43)

 

1)여리고성의 두 소경의 신앙고백과 청원(29~31)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성을 지나서 그곳을 떠나려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때였다. 길가에서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소경이 자기들 곁으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세웠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곁에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더 큰 소리로 주님을 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 외침에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요청도 들어 있었지만, 그들이 평소 때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앙고백도 들어 있었다. 그것은 주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2)주님의 응답과 기적적인 변화(32~34)

그러자 주님께서는 머물러 서섰고, 그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그리고는 그들의 눈을 만져주셨다.

주님께서 그들을 치유하신 방법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효과있지 않은 그들의 믿음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그들은 거지였다. 그러므로 평소 때 그들의 소원은 많은 사람들이 다리는 큰 길에서 동냥할 때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그들의 소원은 뭔가를 적선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그들의 소원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뜨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한 푼 적선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들의 눈이 떠지는 것을 소원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거들어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눈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예고로서 그들의 눈을 만져주는 것이었다. 곧이어 그들의 믿음은 최고조에 달했고 그들의 믿음은 성장했으며, 곧이어 그들은 눈을 뜨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직접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함으로 행하신 것이다. 단 조건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에다가 그들의 믿음을 거들어주는 어떤 일에 있어서 우리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20120201()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 다섯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2) 예루살렘입성과 성전을 깨끗케 하심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534장 주님 찾아 오셨네

[말 씀] 21:1~2(신약 34)

[키워드]

예루살렘입성, 유월절, 감람산, 베다니, 벳바게, 나귀새끼, 겸손, 호산나, 다윗의 자손, 선지자 예수, 매매상, 환전상, 성전, 기도의 집, 어린아기, 무화과나무, 말의 힘, 믿음의 힘

 

1. 서론

1)시간적 배경

갈릴리와 베뢰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한 바대로의 수난(受難)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특히 21-27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일주일간 즉 성 고난주간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21-23장까지는 성고난주간의 첫째날인 일요일에서 셋째날인 화요일 전반기 중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두 소경의 눈을 고치신(20:29-34)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24Km,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동안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약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悲壯)한 각오를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는 장엄한 순간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2)장소적 배경

본문에는 중요한 두 장소가 나온다. 하나는 감람산이요 또 하나는 벳바게.

먼저 감람산은 어떤 산인가? 해발 약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그리고 시온 언덕(the hilof Zion)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가 그 내용이다. 그래서 24:3에서는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 벳바게가 나온다. 마가와 누가의 평행본문에는 '벳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벳바게와 베다니가 동일한 지명(地名)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Barcley),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寄宿)하셨으므로(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즉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이며, 감람산 동편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케프르에트 투르'(Kefret Tur)가 이곳과 동일시 되고 있다.

 

3)본문의 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211절부터 22일까지. 이 부분에는 3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첫째, 1-11절까지는 유월절 5일전에 일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님의 개선적인 입성과 예루살렘에서의 평판이 기록되어 있고, 12-17절까지월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두번째의 성전청결사건율법학자들의 분노에 대해서. 그리고 이어서 18-22절까지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받음현재적인 믿음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2.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예루살렘 입성

(21:1~11, 11:1-11, 19:28-38, 12:12-19)

 

1)술렁이는 예루살렘 성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려 함이다(10:45). 그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려 함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제자들도 모르고 있고,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던 270만명의 유대인들도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절기상 유월절에 유월절양으로 죽으시기 위해 그분은 점점 더 한 걸음씩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베뢰아지역을 거쳐, 여리고를 떠나실 때 두 소경을 치유해주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로 가시는데, 그곳에는 이미 죽은 지 4일이 된 나사로가 있었던 장소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 중에서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왜 그리 소동했는지 그 배경을 밝히고 있는데 잠깐 2구절만 읽어보자.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12:17-19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270만명 정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며칠 전에 일어난 죽은지 4일된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들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예루살렘에 퍼졌고,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은 온통 예루살렘을 술렁이게 했던 것이다.

 

 

2)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

 

. 예수께서 굳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

그때였다. 온 세상에 자신이 알려지기를 꺼려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이시기 위해, 두 명의 제자들(아마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것)을 보내어, 스가랴선지자의 예언(9:9, 62:11)을 이루기 위해, 벳바게에서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새끼를 끌어 오라고 하신다. 그 새끼는 아직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순결한 나귀새끼였다(11:2). 그러자 그 동네사람들이 물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시키신대로, “이것들의 주인이 쓰실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것이다. 그 나귀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주인도 예수님이신 것을 아는가!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럼 예수님께서는 그동안에 왜 자신을 감추려 했을까? 그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방해받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고, 그동안 제자들을 훈련할 시간을 확보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더 멋지고 폼나게 말을 타고 입성하지 않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 그는 분명 왕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의 왕되심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려는 왕이심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왕이나 군대의 지휘관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 입성이 아니라, 평화과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알려주려 싶으셨던 것이다.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평화의 메시야임을 알리려 그렇게 하신 것이다.

 

2)제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한 이유

그때였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이 타실 나귀 위에 겉옷을 얹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많은 무리들이 달려 나와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길 위에 깔아드렸고,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들고 나와(12:13) 예수님을 열렬히 찬양하며 환영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이렇게 찬양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

특히 히브리어로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 원컨대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초막절에 불렀던 시편 113~118편 중에서 118:25~26을 그대로 다시 부른 것으로 메시야에 대한 기쁨과 환호의 노래이자, 자신들의 구원과 해방을 미리 기뻐하는 외침이었다.

118:25-26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호산나)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렇다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이러한 행위(겉옷과 종려나무가지, 찬양)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은 왕을 영접하거나 왕이 즉위해 말을 타고 갈 때 백성들이 행하는 최고의 존경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예수님의 생각과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과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유대인의 왕이 다스리는 유대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을 버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없애시려는 궁극적이고도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셨다.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보고 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무리들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바로 그 선지자(18:15) 예수입니다.”. 이것은 예전부터 예수님의 고향과 칭호와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의 대답이었다.

 

 

 

3. 승리의 입성을 마치신 예수님의 성전숙정 사건 및 베다니의 유숙(21:12~17, 1115~19, 1`9:45~48, 2:1~22).

 

1)성전숙정사건과 베다니의 유숙과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의 시간적인 구성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일요일은 때가 저물어서 예수님은 성안을 한 번 둘러 보신 뒤곧바로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떠나가신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는데, 그때 아침식사를 하지 않으시어 배가 고프셨다. 그래서 길가에서 이른 무화과(빠게)라고 얻을까 하려 그리 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다. 그리고 성전 안에 들어가셨는데, 성전 안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기도하는 집이 그만 종교지도자들의 상업잇속을 챙기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님은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인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어버리셨다(11:11~18). 이것이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말씀을 기록하지 않고, 주제별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배웠다. 그래서 마태는 중요한 사건과 그 의미를 바로바로 기록한 것이다.

 

2)가장 거룩한 장소이자 최후의 보루인 성전의 타락상

예루살렘의 성전 안은 가장 더러워진 공간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가 없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제사에 사용하는 희생제물(소와 양과 염소 그리고 가나한 자들을 위한 비둘기)성전세로 드려야할 동전(세겔)을 위해 로마의 화폐를 교환하는 일을 통해, 헌제자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성전의 매매상과 환전상을 둘러 엎으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돈 때문에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엘리제사장 때에는 여자문제까지 심각했다. 하지만 당시는 여자문제는 없었지만 물질의 문제는 엄청났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비둘기를 희생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허락했으나, 성전 안에서 파는 비둘기 값은 일반적인 값보다 80가 더 비쌌던 것이다.

성전은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가? 첫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56:7). 그러자 당시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7:11). 탐심으로 인해 돈이 하나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3:5)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둘째,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장소는 가장 거룩하게 보전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가장 거룩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는 성전이 가장 더렵혀진 장소가 되어 있었으며, 성전에서 일하는 자가 오히려 가장 더러운 자였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거룩한 집이라고 말하였는데, 만약 우리가 육화된 성전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된다고 했을까?(고전3:16-17)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결국 더럽혀진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다. 이후 40년이 지난 A.D.70년 성전은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지고 만다(24:1~2).

 

3)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분노

예수님은 그 와중에도 여리고성의 두 소경의 사건을 전해듣고 찾아온 소경들과 다리 저는 자들을 성전 안에서 만나 고쳐주신다.

그때였다. 성전 안에 있던 아이들어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려 호산나 찬양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상업행위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분노하고 만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했다. 이 어린아이들의 찬양소리는 참람죄에 해당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주님은 어린아이들의 찬양소리가 합당한 것임을 시8:2의 말씀을 들어 말씀하신 뒤, 다시 베다니로 나가신다.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4. 길 가의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사건과 믿음의 기도의 교훈(21:18~22, 11:12~14, 20~24)

 

1)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의 저주사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날 아침 일찍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하지 않아 시장기를 느끼셨다. 그래서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다. 하지만 이른 무화과(빠게)가 조금 있어야 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할 뿐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이유가 아직 정식 무화과(테에나)의 때가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1:13). 그때 주님께서 그 나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오랜 시기간동안)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21:19)”

그랬는데 화요일 아침에 성전에 들어오면서 보니, 그 나무는 뿌리째 말라 있었다(11:20).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께 말씀을 드렸다. 주님 어찌하여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11:22-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되어진)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뿌리채 마른 무화과나무의 상징적인 의미

주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사건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저주하신 사건으로서, 종교적 열심은 가지고 있고 실제 경건의 열매가 전혀 없는 당시 유대인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형식주의와 외식주의는 믿는 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들이 아닐 수 없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은 가장 더렵혀져 있었고, 가장 경건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타락해 있었다. 결국 무화과나무의 저주사건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성전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멸망할 것임을 암시해준다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2가지 큰 교훈을 깨닫는다. 첫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열매없는 껍데기은 결국 심판받아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딤후3:3-5).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반드시 그것을 놓치지 말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면 망하게 될 뿐임을 알아야 한다.

딤후3:3-5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3)현재적인 믿음의 기도의 탁월한 능력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말과 믿음의 기도가 얼마나 효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 교훈하셨다. 믿는 자의 말과 믿는 자의 기도는 그만큼 놀라운 기적을 가져올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다(17:6).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말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은 의심없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의심하지 않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말에는 의심이 들어있다. 산이 바다에 빠지거나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어지는 기적적인 일은 얼마나 의심없이 믿음으로 말할 수 있느냐의 차이다(1:6-7). 우리도 이제는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20120208()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 여섯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3) 예수의 권위 출처 질문과 포도원 농부의 비유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말 씀] 21:23~35(신약 35)

[키워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권위, 종교지도자들, 세리와 창기들, 하나님의 나라, 두 아들, 맏아들, 둘째아들, 회개, 순종, 포도원, 농부들, 선지자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진멸, 건축자들, 모퉁이둘,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1. 서론

21장은 고난주간의 첫째날에 있었던 사건과 둘째날 사건과 셋째날의 사건 중에서 앞 부분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21장 전반부는 성고난주간 중에서 종려주일이라 일컬어지는 일요일과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이 사건은 요11장의 나사로를 부활시킨 예수님이 스가갸서에 기록된 메시야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므로 온 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월요일에 입성하시자마자 성 안에 매매상과 환전상을 둘러 엎으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몰아내셨다. 성전청소를 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내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쳐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을 통해,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하나도 없는 이스라엘은 곧 뿌리채 말라버릴 것을 예고하셨다.

이 일 때문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릴 방책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의 권위의 출처를 문제삼으려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오히려 역질문을 던지심으로 당신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의도를 품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을 일순간에 침묵시키신다. 그리고 3가지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도 회개치 않은 그들의 완악성을 지적하신다.

3가지 비유는 이렇다. 첫째, 두 아들의 비유(21:28~32). 둘째,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21:33~46).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22:1~14).

오늘은 이들 비유들 중에서 두 아들의 비유와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2. 성전에서 일어난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 권위논쟁

(21:23~27, 11:27~33, 20:1~8)

 

1)산헤드린에서 파송받은 자들의 음모

본문(21:23~46)에서부터 마26:16절까지는 성고난주간이라 불리우는 주간에 있었던 일들 중에서 셋째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들과 교훈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21:23~39에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벌인 각종 논쟁과 그와 연관해서 주신 교훈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23~27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발생한 소위 권위논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사건과 성전청소사건 등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다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인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에게 파송한다.

 

2)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과 예수님의 역질문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를 그러한 일들을 행하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만일 주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면 곧바로 신성모독죄로 고소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주님의 행동을 지켜보는 많은 백성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어 주님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악한 계교를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례요한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그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역질문을 통해서, 그들의 허를 찌름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들의 음모를 단숨에 잠재우시고, 영적 주도권을 찾아오신 다음, 나아가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그들 스스로 시인하게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역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부터 왔는지 사람으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서 물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로서부터 왔다면 왜 종교지도자들은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느냐고 할 것 같고, 만약 사람에게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당시 사람들 모두가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세례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의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줄을 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예수님을 책잡아 넘어뜨리기 위해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혜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할 것인가?

 

3)예수님의 권위의 출처에 대한 교훈

첫째,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이미 사람의 내면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겉으로 드러난 행동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살펴아신다.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둘째, 숫자적인 부흥만이 참된 부흥의 잣대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숫자는 최대였고(제사장의 숫자만 24,000명 정도), 당시 이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는 숫자(270만명 정도)도 최대였다. 이는 아무리 뛰어난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뛰어난 영적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며, 교회의 부흥 속에서도 여전이 영적 빈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셋째, 또한 사람을 의식하는 신앙은 결국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그들의 종교적 자존심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사역을 거짓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신앙은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백성들의 입장 곧 여론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심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3.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두 아들의 비유(21:28~32)

이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1)이 비유의 내용과 예수님의 질문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정작 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명했는데,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뉘우치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이것이 비유의 내용이다.

이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의 대답했다. 둘째 아들이니이다.”

 

2)비유의 해석

여기에 나오는 두 아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로서 온갖 종교적 특권과 기득권을 향유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요한과 메시야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싫소이다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했지만 나중에 후회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둘째 아들31절에 보니, 세리들과 창기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천국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인가? 예수님의 지적처럼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유전에 따라 행동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들과 창기들은 비록 세상의 지탄을 받는 죄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3)이 비유의 교훈

첫째,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들리거나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임을 말해준다.

둘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특권이 천국에 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정한 회개와 순종을 하는 곳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셋째, 모든 인생은 다 불완전한 죄인이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느냐에 따라 그의 종착역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18:26-27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넷째,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4.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한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21:33~36, 12:1~12, 20:9~19)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악함을 지적하는 두 번째 비유이다. 이 비유는 포도원 주인과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앞서 말한 두 아들의 비유(28~32)에서 지적한 소극적인 불순종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신 선지자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아들로 비유된 독생자 예수까지 죽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죄악을 들추어내는 비유이다.

 

1)이 비유의 내용과 예수님의 질문

예수님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악함을 지적하기 포도원을 맡은 악한 소작농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한 집의 주인포도원을 만들되 경작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 포도원을 농부들(소작농)에게 세를 주고 떠났다. 열매를 수확할 무렵 주인은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의 종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그러자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농부들은 그들에게 동일하게 대우했다. 그러자 이번에 주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다. ? 자신의 아들만을 공경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아들의 유업을 차지하자고 모의한 후 주인의 아들까지도 서슴없이 죽이고는 포도원밖에 버렸다. 이것이 비유의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그러자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했다.

21: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이 비유의 해석

여기에 나오는 산울타리와 즙짜는 틀과 망대를 갖춘 포도원은 매우 좋은 완벽한 시설을 갖춘 포도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배려하신 것(5)을 상징한다.

5:1-2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악한 농부들은 농토를 일정기간 차용하여 일정한 비율의 세를 내고 농사는 짓는 소작농으로서 주인과 계약을 마친 일꾼들인 유대종교지도자들 내지는 좀 더 확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실과를 받으려고 보낸 주인의 종들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상징하고,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때 농부들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했는가? 3가지로 악행을 저질렀다. 첫째는 심히 때렸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대신 고난받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죽이고.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선지자들의 순교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셋째, ‘돌로 쳤거늘은 제사장 사가랴의 죽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인은 한 번 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낸다. 그들에게 2의 기회를 주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를 저버리고 처음과 같이 동일하게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참혹한 죄를 저지르고 만다. 한편,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밖에 버린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여 영문 밖 즉 골고다에 버린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답변대로 악한 농부들인 이스라엘 민족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진멸되고 만다.

예수님은 이어 시편118:23~24의 말씀을 들어서, 자신이 건축자들(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의 모퉁이돌(예수님)이 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2:20~22).

한편, 예수님은 돌이시다. 그런데 돌 위에 떨어지는 자들이 있고, 반대로 떨어지는 돌에 맞는 자들도 있다.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전자는 깨어지지만 후자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전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한 일반 유대인들을 상징하지만, 후자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결국은 죽이기까지 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3)이 비유의 교훈

이 비유는 결국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며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마저 죽이고 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없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서 구원받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

첫째로, 산울타리와 즙틀과 망대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지극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이 살기에 필요한 모든 환경들을 기꺼이 만들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주인이 자기의 종들에 대한 농부들의 반응을 보면서도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내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까지라도 보낸다는 것을 통해서, 타락한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한없이 악한 사람들로 변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셋째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결국 진멸과 심판이라는 것이다. 소작농들은 포도원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리하여서 얻은 소득을 약속대로 주인에게 일정한 분량을 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주인께 드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의무마저 내팽개쳐버린 것이다.

9:27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넷째로,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진 신분과 특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맺은 열매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신분과 특권만으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

다섯째로, 끝까지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배척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여 깨드려 흩어버리신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교회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20120215()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 일곱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4) 혼인잔치의 비유와 세금논쟁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276장 아버지의 이 죄인을

535장 주 예수 대문 밖에

[말 씀] 22:1~22(신약 37)

[키워드]

천국, 비유, 혼인잔치, 임금, 자기아들, 종들, 청한 사람들, 사거리, 아무나, 선인, 악인, 예복, 사환들, 바깥 어두운 데, 슬피 욺, 바리새인들, 헤롯당원들, 세금, 가이사, 하나님의 것, 놀라움

 

1. 서론

21은 지난주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성고난주간이라 일컬어지는 일주일 중에서 일요일과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 즉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과 성전을 청소하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어 위의 일 대문에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예수님을 넘어뜨릴 방책을 협의한 끝에 종교적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우두머리격인 장로들 즉 바리새인들을 파견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는데,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과연 예수님께서 누구의 권위로서 그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를 물은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러한 의도를 간파한 예수님은 역질문을 던져서 말을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일순간에 침묵시키신다.

그때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완악성을 지적하시는데, 첫째가 바로 두 아들의 비유(21:28~32)이다. 이어 예수님은 두 번째로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21:33~46)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22:1~14)를 말씀하신다.

그러자 화가 난 바리새인들이 돌아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넘어뜨릴 확실한 함정을 다시 만들어 접근해 오는 것이 과연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명 세금논쟁을 벌인 것이다.

 

 

 

2.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한 혼인잔치의 비유

(22:1~14, 14:15~24)

이 비유는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나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과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는 비유. 그것은 22:1에 나와 있다.

22:1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렇다. 다시가 말해주듯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다시 들어,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비유들이다. 2가지 비유가 함께 섞여 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이 비유의 뒷부분의 비유가 나오지 않는다.

1~10절의 전반의 비유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 초대에 불참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11~14절에는 초청에는 응하였으나 예복을 주의하지 못해 쫓겨나는 한 사람의 운명이 언급되고 있다. 즉 이 비유는 과거 유대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구속사가 이방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후자에 속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하긴 하였어도 결국 그 잔치에서 쫓겨나게 될 이방인이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이 비유의 내용

어떤 임금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그래서 혼인잔칫날이 되자 임금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 미리 초청한 자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들이 오기를 싫어했다. 그러자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미리 초청한 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잔치가 완벽하고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외면한 채, 각기 제 할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에 간다고 갔고, 한 사람은 자기의 사업하러 간다고 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 즉 장가든 사람은 오히려 임금의 종들을 잡아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임금몹시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라버렸다.

이에 임금은 이미 마련된 잔치가 청함받은 자들에게 합당치 않으니 아무나 데려오라고 시켰다. 종들은 사거리에 나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데려와 잔치자리를 채웠다. 그러자 혼인잔치에는 기대어 음식을 먹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임금이 그 잔치자리에 나왔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혼인잔치에서 손님들이 입고 있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본래 임금이 준비하여 준 옷이었건만 그 사람은 그 옷을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임금이 마련해준 옷을 입어 다 똑같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 사람은 그 겉옷을 입지 않았기에 주인의 눈에 금방 띄었던 것이다.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친구여, 당신은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소?” 그렇지만 그 손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은 시중드는 자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을 붙잡아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던지라고 명했다. 그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이 비유에 대한 해석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마지막 14에 있다.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는 초대함을 받은 자는 혹시 많을지 몰라도 택함을 입는 자들은 아주 적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으로부터 자기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함을 받은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로는 이미 그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된 애시당초 초청받은 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참여하지 않자, 둘째, 임금은 성 밖의 사거리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모두 다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미 초대장을 받은 자들과 사거리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초대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잔치에 직접 참여하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 유대인도 적게 참여할 것이고, 이방인도 적게 참여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적게 참여하는 것은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이요, 이방인도 적게 참여하는 것은 메시야의 중요성을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첫째, 자기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연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자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이미 초대된 사람들은 많게 잡으면 유대인들이요 적게 잡으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을 모셔오기 위해 데리러 간 앞선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요, 나중의 종들은 세례요한과 같은 예수님이 사역하기 직전의 선지자들이다. 그리고 임금이 노하여 보낸 군대는 심판의 도구들로 먼저는 로마의 디도장군이요, 후에는 천사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거리에서 만난 선한 자나 악한 자는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처음에는 초청받지 못했으나 초청받은 자가 합당치 않은 까닭에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로서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세리창녀을 가리키고, 2차적으로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 혼인잔치의 예복의의 옷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을 때 주어진 하늘의 의복을 가리킨다.

 

 

3)이 비유가 주는 교훈

이 비유의 교훈은 이렇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정말 크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겠다고 한 사람들을 혼인잔치 날에 오도록 자신의 종들을 보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들은 다시 보낸다. 그리고 그 잔치에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가 브리핑하도록 시켰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도 크긴 커도 끝이 있다는 것을 또한 말해준다.

하지만 청함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기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없이 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기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종들을 능욕하고 죽인 초청받은 자들을 임금은 어떻게 했는가? 군대를 보내 진멸하고 그 성 자체를 불살라버렸다. 다시 말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초청을 배척하고 거부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비와 긍휼이 베풀어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셋째, 이 세상에 살면서 아주 중요한 일이 많기는 많지만, 예수님의 혼인잔치 다시 말해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는 일만큼 긴박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했는가?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하나는 자기 밭을 샀다고 가버렸다. 또 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버렸으며,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결혼했으니 갈 수 없다고 했다.

14:18-20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다 그럴만한 이유이다. 밭을 샀으니 그 밭이 계약서와 똑같은 밭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소 다섯겨리를 샀으니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가든 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디를 가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그러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임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자리에 간다고 미리 통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틀어졌다. 임금님의 아들에 대한 시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한사코 사양했다. 결국 그들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넷째,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해 열려진 구원을 유대인들이 발로 걷어차버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는 것이다.

주인은 초대된 손님들이 청함을 받았으나 오지 않겠다고 하자,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없이 그냥 사거리를 지나가다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에는 미리 선택된 자들만 초청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제한성을 탈피하여, 범세계적이고 범민족적으로 개방될 것임을 시사해준다.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없이 확대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11:28을 보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다섯째, 구원의 대상은 선한 자이나 악한 자나 다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오늘날 사역자가 되어 전도할 때 선한 자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악한 자라도 다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인은 공공연히 도덕적으로 악한 죄를 범하여 비난받아야 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임금님은 그런 자들까지 왜 데리고 왔느냐고 자신의 종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그들도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누구나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섯째,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거리에 지나가는 행인 중에는 가난한 자도 있었을 것이요, 못배운 자도 있었을 것이요, 맹인이나 귀머거리도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은 반드시 주인이 들어올 때 준 예복을 끝까지 입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것을 소홀히 여겼다. 그러니 결국 그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일곱째,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의 옷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예복은 지나가던 행인이 집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임금이 그 잔치를 위해 미리 마련해 준 것이다. 그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稱義)의 옷이다(3:28). 그 어떠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때 자기의 옷을 입고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주인이 마련해준 예복을 잃어버린 자는 천국에 머무를 수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稱義)의 값어치와 중요성을 모르는 자는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여덟째, 천국은 모든 신분이 하나로 즉 예복입는 초대된 손님들도 귀착된다는 것이다.

그가 부자였던, 가난한 자였던, 병든 자였던, 노예였던 것과 관계없이 누구든지 예복은 똑같이 임금이 마련해준 예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산의 정도나 신분이 아무리 많고 높다 할지라도 천국에서는 그것들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똑같은 신분이다.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이다.

 

 

 

3. 바리새인 및 헤롯당원들과의 납세논쟁

(22:15~22, 12:13~17, 20:20~26).

 

1)불의한 자들의 연합

본문은 고난주간의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다. 특히 오늘 나오는 내용은 납세논쟁혹은 세금논쟁이라고 불리우는 기사다.

놀라운 사실은 평소 적대관계에 있었던 두 불의한 집단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 예순님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쪽 집단은 바리새인집단에서 보낸 자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었고, 또 한쪽 집단은 헤롯당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기름과 같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들은 야합을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은 로마의 통치와 세금징수를 반대했던 민족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선민 유대인이 어찌하여 이방 군주에게 납세를 해야 하느냐적극 반대했던 자들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가이사를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현실은 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반면에 헤롯당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은 당시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리 통치자인 헤롯왕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세리의 임무를 담당하여 세금을 징수했고, 로마의 정책을 홍보하는 친로마적 성향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은 매국노와 같은 자들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이해집단이 한 통 속이 되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2)이들이 던진 질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이 찾아와서 던진 질문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을 높이 추켜세운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자기들이 알기에는 참되고 진리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며,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님께 소신껏 대답하라고 하면서 어떻게든지 대답하면 즉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간교한 속셈이었다.

들이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 지 우리에게 말해주십시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옳지 않는 것입니까?(22:17)”

그러자 이미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려하느냐? 세금으로 낼 돈을 내게 보이라.”

그러자 바리새인들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을 가져왔다.

당시 데나리온로마의 은전(주화)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이것은 성인 남자 14세 이상, 성인여자 12세 이상에서 남녀 공히 65세까지 내야하는 로마의 인두세였다.

이 데나리온 주화의 앞면에는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 케자르의 형상이 부조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로마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Livia)의 형상이 부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면에는 존엄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케자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동전의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B.C.27~A.D.14)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케자르(A.D.14~37)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답변을 하지 않고 역질문을 던졌다.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그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대답을 하도록 주도면밀한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하나의 함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라고 대답하신다면 틀림없이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반민족주의자라고 매도함과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십계명의 1계명을 어기는 자라고 정죄하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로마정부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롯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로마황제에 대해 반역을 꾀하는 선동자로 잡아다가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대답을 하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바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합당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도 아니고,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대답을 얻지 못한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은 그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이 사건이 주는 교훈

첫째, 세상 사람들은 전에는 비록 적이었지만 이해타산에 따라 얼마든지 한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불의한 자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하나가 되곤 한다. 자신들의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은 똑같이 유대인이었지만 적대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자 금방 연합하여 예수님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둘째, 주님은 우리의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신적통찰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적대관계에 있던 그들이 어떤 속셈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를 간파하고 계셨다. 신적통찰력으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셨다.

셋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권력도 결코 하나님의 허락하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3:1).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다니엘을 보라. 그는 자기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을 왕으로 섬겼다. , 하나님 이외의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충실하게 해야 한다. 일주일의 하루를 주님 앞에 드리고는 주일성수(20:12), 모든 소득의 십분지일을 드리는 것(3:10~1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16:15)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20222() 수요기도회설교(주현절후 일곱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5) 부활과 계명논쟁 및 메시야의 신분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말 씀] 22:23~46(신약 37)

[키워드]

부활, 사두개인, 바리새인, 천사, 신령한 몸, 산 자의 하나님, 모세, 형수취수제도, 계대결혼풍습,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강령,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

 

1. 서론

우리는 지난 2주간에 걸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지켜보았다.

맨 처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 그들은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부터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청소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그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라는 예수님이 던진 역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3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드러내셨다. 두 아들의 비유, 악한 농부들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가 그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헤롯당원과 더불어 다시 예수님을 시험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둘 다 대답하면 걸리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 하면 하나님 이외의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어찌 그러한 자가 하나님의 선자가 될 수 있느냐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돈을 이방제국에 바치라고 한 매국노로 몰릴 것이 뻔하였다. 또한 바치지 말라 하면, 즉시 헤롯당원에 의해 고발되어 죽임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로마의 동전을 가져오라고 하신 뒤, 그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를 묻고 그들의 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다 놀라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오늘은 세 번째 종교지도자 그룹의 질문이 나온다.

,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다른 종교지도자의 그룹에 대답하셨을까?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셨을까? 이제는 그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

(22:23~33, 12:18~27, 20:27~40)

오늘 본문에서는 새로운 세 번째의 종교지도자 그룹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사두개인이다.

대제사장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출처에 대해 질문했고(21:23), 바리새인들헤롯당원들은 납세에 대한 질문을 했다(22:16). 이어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이름하여 부활에 관한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가지 질문을 이름하여, ‘권위출처논쟁’, ‘납세논쟁 혹은 세금논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논쟁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무엇을 질문했으며, 그들은 예수님으로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1)사두개인들이란?

신약성경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 그룹이 2 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요 또 하나는 사두개인들이다. 이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과도기에 등장한 종교지도자들 그룹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요, ‘사두개인들은 믿기 어려운 것을 다 빼고 현실적인 것만 받아들이는 그룹이었다.

이 두 그룹은 항상 적대관계에 있었다.

특히 사두개인들의 눈에 바리새인들은 아주 미련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다윗시대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들과 그들의 모든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부와 공적지위에 있어서 특출하였고 헤롯가와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구전전통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권위도 믿음과 윤리에 관한 것만 인정하였다. 또한 영혼불멸성이나 내세보상은 믿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들이나 영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본문에서도 그들에게 대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이들이 그들이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풍족한 삶에 만족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사는 것을 원하였다. 그들의 사상이 내세적이 아니라 현세적인 이유도 자신들이 누리는 현실적인 기득권 세력들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믿기 원하는 것은 내세종료가 아니라 윤리와 도덕만을 제시하는 현세종교였다.

또한 그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모세오경뿐이었다. 다시 말해, 선지서나 시가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2)사두개인들의 질문(22:24~28)

특히 오늘 그들이 질문에는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은 것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한 번 읽어보자.

22:24-28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그들은 자신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제시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한 명의 여자는 과연 부활 때의 누구의 아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구의 씨라도 낳았다면 그 형제의 아내가 될 수 있을텐데,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이 여자는 부활 때에 어느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25에 나오는 형수취수제도내지는 계대결혼풍습을 말한 것이었다.

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 제도가 생겨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만약 맏아들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기업이 누구로 가겠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기업이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둘째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맏아들의 씨가 되어 가계를 이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허락하신 기업이 후손이 없음으로 인하여 상속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이다.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에도 보아스와 결혼한 룻에게서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4:1~8, 1:5).

결국 이 질문의 핵심은 부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다. 결국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것이다.

 

 

3)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게 된 이유

그럼, 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부활관에 매우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3:7)은 숫자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계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23:8).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그러나 바리새인들31:16 32: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오경 외에 26:19, 19:25~27, 12:2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없는 상상과 억측으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 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28: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은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고 규정했다.

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4)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정리와 답변(22:29~32)

22:29-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부활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답변은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바리새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해 바리새인들의 주장과 사두개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아울러 지적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부활신앙을 교정해 주었다.

첫째,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의 주장이 우선 맞다고 하시고,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틀렸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진리에서 벗어나 잘못 이끌림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에서 결코 부활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주장은 성경도 오해한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 사두개인들은 성경(그라파이, 기록된 글이나 문서)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부활에 관한 말씀이 성경(기록된 구약성경)에 나온다는 말이다. 모세오경에는 출3:6, 32:39에 나오며, 시가서에서는 욥19:25~27에 나오며, 선지서에서는 사26:19, 12:2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또한 부활 때에는 천사처럼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까 던진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라는 말씀하셨다(3:6). 이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비록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살아있는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부활한다는 것을 이 구절로 풀이해 주셨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 하셨다. 다시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은 부활 때에는 천사처럼 영원히 죽지 않을 존재로서 부활시킬 수 있으며, 그냥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상태의 그 몸 그대로 부활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추측이다.

 

 

5)믿는 자들이 장차 입을 영광스러운 부활체(고전15:42~44)

그렇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에는 어떤 몸을 입을까? 보다 더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신약성경을 한 번 살펴보자.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렇다. 우리가 다시 부활할 때의 몸은 썩지 아니할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이요, 강한 몸이요, 신령한 몸이다. 육의 몸이 있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적인 몸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사실 성도의 부활체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낫다. 신령한 몸은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벽이 있어도 뚫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이 몸은 영원히 죽지 않을 몸이다(20:36).

그리고 부활체는 결혼은 하지 않게 된다. 왜 그러는가? 결혼제도가 천국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원래 결혼은 독식으로 사는 외로움을 해소시키고(2:20), 인류를 보존하고, 번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1:27~28)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였다(2:24). 하지만 천국은 이 지상 세계와는 달리 외로움도 없고(21:3~4),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이므로(20:36), 종족 번식의 필요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결혼제도는 더 이상 필요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은 천국을 지상의 세계와 같이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주장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반대하면서, 결국 부활이나 영적인 존재들 즉 천사들이나 영까지도 믿지 아니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율법사가 제기한 가장 큰 계명 논쟁

(22:34~40, 12:28~34, 10:25~28)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은 다 물러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은 부활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부활의 실체를 말씀해 주신 것이었다. 부활체는 천사들과 같이 결혼하지 아니하고 불멸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논쟁의 시도가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바리새인들이 보낸 한 율법사의 질문(22:34~36)

그러자 이제는 바리새인들 중에 최고의 율법사 즉 율법을 가르치는 교법사로서 그는 당시에 성경 뿐만 아니라 성경해석과 유전들 그리고 실제 민사사건들을 접해본 최고의 전문적인 율법학자였던 한 사람을 예수께 보냈다. 그리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를 묻게 했다.

그것(‘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바리새인들 중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었다.

그는 일단 예수님에게 예우를 갖추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다시 말해 율법에 나오는 여러 계명들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계명인지를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2)당시 바리새인들의 율법관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십계명의 글자의 수)가지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 하라는 계명 248(사람 몸의 지체의 수)가 보다 더 중요한 계명이고, 하지 말라고 한 365(일년의 날 수)가지의 계명이 보다 덜 중요한 계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이 613가지의 계명을 다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율법의 중요성에 따라 나누어 중요한 율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려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중요한 율법과 보다 덜 중요한 율법을 나누는 기준이 필요했다. 이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당시 율법사들도 많은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 모두에게 합당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3)예수님의 답변(22:37~40)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이 두가지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

이 답변은 6:5의 말씀19:18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십계명을 요약한 것이었다.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생각)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는 전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둘째,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와 같으니라는 말은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성질이 동등함을 말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의 핵심이여,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두가지 의무는 어떤 면에서는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4:7~21).

요일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러한 계명 즉 하나님 사랑은 십계명 중에서 1~4계명까지의 계명을 요약한 것이라면, 이웃 사랑은 십계명 중에서 5~10계명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들은 물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이웃의 개념으로 포함시켰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은 모세오경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선지서들의 요약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결국 사랑이 율법의 근본원칙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적으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근본정신이다. 따라서 사랑이 결여된 율법준수는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며 위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4.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

(22:41~46, 12:35~37, 20:41~44)

그러자 이제는 구약성경에 능통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최후의 역질문을 그들에게 던지므로 다시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달려들지 못하게 하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시편110:1을 다시 인용하여 말씀하시자 모든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무너졌다.

22:43-45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자들에게 항상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메시야로 믿었기 때문이다.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존재론적인 측면과 권위적인 측면에서 다윗보다 앞선 존재이며, 다윗이 오히려 주님이라고 호칭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야는 다윗의 주님이요,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 원수를 발아래 짓밟을 수 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혈통적으로 그리고 인성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다. 하지만 신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주인이자,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요, 가장 위대한 다윗왕으로부터 주님이라 칭송을 받을 분인 것이다(22:16, 9:6).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주로 고백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신성한 그리스도에 대항한다는 것을 이제는 틀렸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후로 그들은 자신의 지혜로 예수님을 책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은 잡아죽이게 된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20120229() 수요기도회설교(사순절 첫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6) 회개하지 않는 자가 받을 7가지 화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83장 빈들에 마른 풀 같이

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말 씀] 23:1~39(신약 39)

[키워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외식, 소경, , 상석, 보이고자, 천국문, 지옥자식, 맹세, 십일조, 탐욕, 방탕, 불법, 뱀들, 독사의 자식들, 사가랴, 예루살렘,

 

1. 서론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여러 유형의 종교지도자들의 시험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지켜보았다.

맨 처음에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시험(권위출처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의 시험(세금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시험(부활논쟁)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율법사의 질문(최고의 계명)이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의 입을 잠잠케 하고자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과연 메시야가 과연 누구의 자손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혈통적 육신적으로 볼 때 분명 다윗의 자손임에 틀림없지만, 신성한 영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임을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110:1). 그분은 한 아기와 아들이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일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이다(9:6).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 그들에게 그들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 비유로 말씀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3일 뒤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주님의 엄한 꾸짖음을 살펴볼 것이다.

 

 

 

2.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계 및 겸손과 섬김에 관한 교훈(23:1~12)

본 복음서의 저자 마태기자는 성고난주간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종교적인 의와 경건의 잣대로 비난하고 넘어뜨리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사실은 얼마나 불경건하고 불의한가를 드러내고자, 무려 35절이나 되는 긴 구절을 사용하여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책망한다.

 

1)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나?(2)

당시 서기관들(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랍비(선생)이요, 아버지요, 지도자였다(8~10).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위치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를 남용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누구든지 큰 자처럼 살려하는 자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2)그들이 앉았던 모세의 자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2)
당시 모든 회당에는 모세의 자리라는 석재로 만든 의자가 있었다. 그것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관례로 앉은 자리였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신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앉아 사람들을 재판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3)주님께서 무리들과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2가지 말씀(3~10)

첫째,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켜야 하겠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3~7).

왜냐하면, 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만 할 뿐 직접 행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행하고 있던 행위라 할지라도 실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신의 경문띠를 넓게 했으며, 옷술은 길게 하였고, 잔치에서는 늘 상석에 앉았으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았고, 시장에서는 문안받기를 즐겨 하였으며, 사람에게는 랍비(선생님)이라 칭함받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외적인 경건을 과시하려 하였고(5),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끝없는 명예욕(6)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7)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결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에다가 조상의 유전으로 인하여 율법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들이 백성들에게 말한 조상의 유전들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는 하나도 지려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둘째, 그들처럼 랍비아버지혹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8~10).

주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지나친 명예욕과 권력욕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선생은 한 분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서로 형제처럼 지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니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라 칭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도자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 뿐이니 그들은 절대 지도자라 칭함받으려 하지 말라고 하셨다.

 

4)주님께서 무리들과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11~12)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무리에게 서기관들과 비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높이려 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주님의 오신 이후에 그 겸손한 자들을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외식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한 7번의 화 선언(11:37~52)

예수님께서는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하고 그것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이제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화를 7가지로 직접적으로 선포하신다.

 

1)왜 종교지도자들을 예수님으로부터 7가지 저주를 듣게 되었을까?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율법해석 때문에 자기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째 화둘째 화이다.

둘째, 그들은 신성한 율법해석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잘못된 가치전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이 셋째 화넷째 화이다.

셋째,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들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속은 온갖 탐욕과 불법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섯째 화여섯째 화이다.

넷째, 그들은 선지자들을 위한 척하고 비석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곱째 화이다.

 

2)예수님께서 굳이 일곱 가지 화를 선언하신 이유

우리 성경에 보면, 14절은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고대 사본들에 의하면, 13절 사이에 14절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것도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14)”

만약 이 구절이 실제 있었다고 한다면, 7가지 화가 아니라 8가지 화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말씀하신 8가지 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끝마칠 때 주시는 말씀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그것을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천국이요 복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3)첫 번째 화와 두 번째 화(13~14, 15) : 율법의 잘못된 해석과 교육의 폐해

23:1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2)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 책망받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모세의 자리라는 율법의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여, 구약계시를 그롯되고 편협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따라오는 백성들마저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율법해석으로 인해 그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가로막음으로서,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모든 자들을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은 한 시대를 타락으로 이끌고 갈뿐더러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4)세 번째 화와 네 번째 화(16~24) ; 재물 때문에 전도된 가치관 교육

23:16-24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3)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4)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주님께서 또한 세 번째와 네 번째 화를 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가치관을 백성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보다는 성전에 바친 금, 제단보다는 제단 위에 올려 놓은 제물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오도했다. 그리하여 맹세에 대한 참 뜻을 변질시켜 놓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까지 방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가르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들은 재물과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다(16;14).

그들은 정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고 있었다. 사실 곤충인 하루살이나 낙타는 둘 다 부정한 것들이다. 하지만 작은 것들인 하루살이는 포도주를 먹을 때 걸러내어서 먹지 않았지만, 큰 약대는 집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주에 하루살이와 같은 곤충이 함께 섞여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망으로 걸러 먹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내라고 가르쳤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이었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리고 있었다. 본말이 전도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술과 담배는 금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큰 거짓과 사기, 뇌물과 부패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는 관행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5)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25~28) : 외식 및 탐욕과 방탕한 생활

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로 엄히 책망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외식에 대한 책망이었다.

그들은 먼저 회칠한 무덤같았다. ‘회칠한 무덤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외부에서 온 순례객들이 무덤에 접촉하지 않아 부정을 방지하게 하기 위해(19:16), 평토장한 무덤 위에 횟가루를 뿌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횟가루를 뿌려놓은 무덤은 겉으로는 실로 깨끗하고 아름답게까지 보이지만 실제 그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시체로 인해 악취가 나고 썩어 구더기가 가득히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의롭고 경건한 척하지만, 그 내면에는 외식과 불법, 탐욕(약탈)과 방탕(무절제)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나 지도자들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그것은 성막주님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성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해달의 가족으로 만들어 초라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 안에는 황금이 가득하였고, 유향에서 나오는 빛과 향기로 가득했다(25:3~7).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역시 대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의복은 입지 않았어도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광과 진리가 충만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겉은 비록 화려하지 않는다 하여도,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고결하고 거룩한 향기로 가득찬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6)일곱번째 화(29~36): 지속되고 있는 핍박과 살인행위

23:29-3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저주에 가까운 꾸지람은 하신 것은 사실 일곱 번째 화이다. 그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앞에 비싸고 아름다운 비석을 세워주면서, 우리가 그 조상의 때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그들은 예수님 당시까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도 세례요한이 죽는 데에도 돌아보지 아니했으며, 이제는 예수님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들은 그 전의 조상들과는 다르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곧 메시야까지 죽일 존재들이니만큼 어서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33)”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들은 사단의 상징이자 저주받은 동물이다(20:2, 3:14). 그들의 나중은 결국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잘못된 근성은 금새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된다.

 

 

 

4.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 및 멸망예언(23:37~39, 13:31~35)

 

1)예루살렘의 죄와 완악함에 대한 예수님이 탄식(23:37)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을 의인화하여 거듭 애절하게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살려보려고 숱한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결국 핍박하고 죽여왔던 사실에 대해 탄식하신다. 그것도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말이다. 그것은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 예루살렘을 지극한 사랑으로 품어왔지만 끝내 배척하였음을 탄식하신다. 독수리가 맹금류 같은 새들이 먹이를 찾고자 날 때에 암탉이 그 새끼를 부르며 심판 아래 놓은 예루살렘 거민들을 품고자 사랑으로 외쳤던 주님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23:38~39)

23:38-39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이 결국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와 같은 쓸모없는 곳으로 황폐하여 버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너희 집이란 성전 혹은 예루살렘 혹은 이스라엘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과 그 도시의 중심인 성전이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완전파괴됨으로써 문자 그대로 모두 성취되고 만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당신의 재림 때가 되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11:26)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임도 예언하신다. 특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의 백성들의 노랫소리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림주를 그렇게 연호할 것이다.

 

 

20120307() 수요기도회설교(사순절 둘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7)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1)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른지

179장 주 예수의 강림이

175장 신랑되신 예수께서

[말 씀] 24:1~31(신약 41)

[키워드]

성전파괴, 감람산, 종말, 주의 재림, 세상끝의 징조, 거짓그리스도, 거짓선지자, 미혹, 난리, 전쟁, 지진, 기근, 미움, 배신, 불법, 복음전파, 다니엘, 멸망의 가증한 것, 유대, 대환난, 3년반, A.D.70, 디도장군, 광야, 골방, , , 별들, 구름, 나팔, 천사들, 재림, 하늘의 권능들, 환난후재림

 

1. 서론

3년반의 공생애를 다 마치신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신다. 그때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답게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시험을 받으신다. 흠이 있는지는 확인받은 것이다. 그러나 4종류의 대표자들그룹은 그 어느 그룹도 예수님에게서 흠을 찾아내지 못한다. 1차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2차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 3차는 사두개인들, 4차는 율법사)가 그 일들을 담당했다.

그러자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육신을 입고 오셔서 말을 해도 못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버릴 것을 아시고, 그들의 완고함과 오직 높아지려는 교만을 향해 매서울 정도로 그들을 책망하신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황폐화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품으로고 했지만 한사코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지어지고 있는 성전이 파괴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들이 다시 오시게 될 주님을 맞이하면서 외치는 찬양 즉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칠 때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 24장은 마태복음의 5대강화 가운데 마지막 강화인 다섯번재 강화의 말씀으로서, 3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그러한 말씀들을을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감람산강화라고 하는데, 그 감람산 강화의 말씀은 24장에서 마25장의 3가지 비유까지 이어진다. 이 감람산 강화의 말씀은 세상 종말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아주 특별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을까?

첫째, 그것은 곧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므로 예수님의 부재시에 닥쳐올 어려운 상황에 미리 대비시키기 위함이며, 둘째,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사건임과 동시에 미래에 반복적으로 발생할 사건들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사건들을 복합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깨어서 그날을 준비케 하기 위함이다.

 

특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질문한 것을 대답하는 형식으로 주어졌는데, 2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데(23:37~39) 이어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까지 예언하시자(24;1~20,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성전파괴의 때는 언제인지, 주님의 재림 때의 징조와 종말의 때의 징조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24:3).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재림의 양상과 시기에 관련된 교훈 및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시는데, 그 말씀은 마25장의 3가지 비유로까지 이어진다.

 

 

 

2. 성전건물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언(24;1-2)

24: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1)예수님의 충격적인 선언

유대민족은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머물러 계실 것이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의 구심점인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23:38)”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주님의 말씀이 믿기지 않다는 듯 주님께 성전의 위용을 가리켜 보이려고 했다.

 

2)당시 짓고 있던 제3성전의 위용

한편, 당시 예루살렘 성전3의 성전으로 불리는 헤롯성전을 가리킨다.

이 성전은 B.C.19년에 착공되어 A.D.63년에 완성되었던 바, 82년에 걸쳐 지은 성전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의 파괴를 예언할 당시는 성전 착공 후 약 50년이 되던 때였다. 이때는 성전본체와 뜰이 이미 완공되었고, 외벽이 한창 공사중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은 더더욱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3)성전파괴 예언의 성취

예수님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석재로 지어진 웅장하고 견고한 성전건물을 바라보며, 그 외형 규모와 영광에 도취되어 있는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지 않는 성전을 무가치하며, 결국에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실제로 A.D.70년 로마의 제9대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A.D.69~79)의 아들로서 훗날 제10대 로마황제가 된 티투스(Titus)’가 이끄는 로마 군단에 의해 문자로 그대로 철저히 파괴됨으로 성취되고 만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선언하셨을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아니했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악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구약의 속죄제사가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다(7:27, 10:18).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3. 종말의 때와 징조와 관련하여 먼저 주의해야할 것들(24:3~14)

1)제자들이 던진 3가지 질문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앉으셨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나와 은밀하게 예수님께 언제 예루살렘과 성전의 완전한 파괴가 일어날 것인지와 또 주의 재림(파루시아)의 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이며, 또한 세상(시대)의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을 보라. 제자들은 그 시기에 관심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그 시기에 일어날 징조들과 함께 종말을 대비하는 제자들의 영적 각성(깨어 있어야 함)에 대해 더욱 더 역점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시기에 관해 누가 가장 궁금해 했을까?

예수님께 그 질문을 던진 자의 이름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4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였다(13:3).

 

 

2)예수님의 4가지 답변 중 첫 번째 답변

이에 예수님께서는 4가지 것들을 요약정리하여 말씀해주신다. 제자들이 질문했던 3가지와 더불어 그 이전에 먼저 제자들이 주의하고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재난(고통)의 시작의 일들로서 어떤 일들이 있는지를 먼저 말씀하면서 절대 사람들 즉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일어날 8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첫째,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나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4~5)

둘째, 계속되는 난리(전쟁)민족과 그리고 국가간의 분쟁이 계속될 것이다(6~7a). 그러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일 뿐 종말()은 아니다.

셋째, 곳곳에 기근(흉년과 굶주림)과 지진이 발생할 것이다(7b). 이것은 재난(‘오딘’=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작이다.

넷째,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미움과 박해가 있을 것이다(9)

다섯째, 교회 내부가 시험에 빠져 서로 고발하고 팔아넘기고 증오할 것이다(10).

여섯째, 거짓 선지자들의 책동으로 미혹받는 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11)

일곱째, 불법(위반)이 증가하며, 사랑(아가페)이 식어질 것이다(12). 꼭 딤후3:2-3의 말씀과 같아질 것이다.

딤후3:2-3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여덟째,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될 것이다(13~14).

 

 

 

4. 예루살렘 성전파괴의 시기에 있을 일들(24:15~28)

이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A.D.70년에 일어날 예루살렘멸망과 성전의 파괴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대부분 그 예언이 말해지던 동시대 내제는 그것이 1차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후대역사의 한 특정시기에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은 특히 세상 끝날에 있을 대환란(3년반의 시기)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예언이자 그 성취인 것이다.

 

1)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일어날 시기(15~20)

. 그 시기는 언제일까?(15)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파괴의 시기가 바로 다니엘이 말한 예언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이미 600여년전에 다니엘이 예언한 것이었다(9:27, 11:31, 12:11).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여기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황폐를 초래하는 몹시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우상과 우상숭배와 관련된 말이다.

한편, 거룩한 곳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성이나 그 안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집행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해 누가복음은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21:20)

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이 일은 1차적으로 B.C.168년경 수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8대 통치자였던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B.C.175~163)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설치하고 율법에 가증히 여기는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 예언은 2차 실행이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난 날,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성전을 점거하고,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로마황제의 깃발을 예루살렘 성전에 꽂은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이 예언은 마지막 때에 3차로 다니엘의 70이레 가운데 후3년반에 한 번 더 성취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다시 한 번 성전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살후2장에서(살후2:1~4), 사도요한은 계13(13:14~15)에서 언급하고 있다.

살후2: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나오스)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13:14-15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러나 그 일은 실제 건물로서의 성전(히에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전(나오스)인 교회를 가리키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16-18, 19-20)

24:16-18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주님께서는 그때 유대에 남아있지 말고, 신속하게 산들로 피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16). 물건이나 겉옷보다도 목숨이 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닥치면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도망하여 생명을 부지하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성은 말세를 당한 사람들에게 항상 주의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경고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A.D.69년경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당시(66년부터 공격함), 비텔리우스 황제가 죽자 그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로마로 가면서,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로마군대의 지휘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잠시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망을 풀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를 떠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에 있는 펠라(Pella)라는 곳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24:19-20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때 주님께서는 임신과 수유조차도 오히려 재앙이 될 것이라 하셨고, 도망하는 날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실제는 A.D.70년에 유대인 110만명이 학살당하는 데, 그때가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성들과 유아들도 참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A.D.7098(유월절기간)은 겨울철이 아니었다. 도망하는 날이 겨울철이라면 비와 추위 때문에 장거리 도망이 어려워지며, 안식일에는 1마일 이상 여행도 안 되기 때문에 그 날이 아니 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B.C.168년 수리라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이 예루살렘 공격을 시작한 날도 안식일이었다.

 

 

2)환난의 정도가 극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기간을 단축하실 것임(21~22)

24:21-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 A.D.70년과 후3년반에 있게 될 엄청난 대환난

A.D.70년 디도장군에 의해 성취될 환난이나 장차 다니엘의 70이레 가운데 후3년반에 당할 환난은 대환난이 될 것이다. 아니 그 날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진노의 날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환난은 후3년반의 환난이 될 것이다.

21:23-24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A.D.70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망자가 무려 110만명이나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자가 97천명이었다. 이는 그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절기를 참석하기 위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삭감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앞으로 도래할 후3년반의 그 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삭감하지 않게 된다면 그 날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을 삭감해주실 것이다. 본문의 동사가 수동태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환난의 날들을 짧게 줄여줄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후3년반의 환난 기간 직전에 휴거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상관없이 이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면, 모든 성도들 내지 후3년반에 남겨진 모든 성도들은 이 환난의 날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 누가 그 환난을 통과하게 되는가?

이 환난의 날을 통과할 자는 1차적으로 유대인들이요,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도 포함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환난의 날들을 통과할 자가 바로 모든 육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 3년반의 환난시 광야의 피난처로 피할 사람들도 있다.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환난의 날들을 삭감할 때, 12장에 의하면, 광야의 도피처로 피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12;13-14).

12:13-14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사내아이)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해를 입은 여자는 먼저 사내아이를 낳는다. 이때, 머리가 일곱이며 뿔이 열인 큰 붉은 용은 이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내아이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한다(12:6).

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그러자 용이 그 여자를 핍박하려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광야의 자기의 곳으로 피신시킨다.

 

 

3)환난의 때에 출현한 거짓 그리스도에게 절대 현혹되지 말 것(23~28)

24:23-28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이제 23절부터는 환난의 날이 도래할 당시에 있을 일들이 나온다. 환난의 날이 극에 달하자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절실히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큰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그리스도가 광야 혹은 어느 골방에 이미 와 있다고 거짓소문이 날 것이다. 하지만 광야에 있다고 해도 가지 말고, 골방들에 있다고 해도 가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오실까? 27절에 의하면,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동시적으로(순식간에), 공개적으로, 우주적으로, 가시적으로(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게금) 오실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주님은 이 모든 환난의 날이 다 지나간 후에,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강림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24:29-30, 1:7). 그런데 그때는 주검이 있고 독수리들이 그 시체를 뜯어 먹기 위해 모이는 기간이므로, 그때는 큰 전쟁, 아마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아마겟돈 전쟁(19:17~18)과 같은 큰 전쟁 후에 있을 것이다.

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5. 주의 임하심(파루시아)의 징조들(24:29~31).

 

1)주님의 임하심(오심)은 곧 파루시아(왕의 방문)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실(임하실) 때에 대한 표적에 대해 설명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임하심이라는 단어는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황제나 왕 그리고 치리자와 같은 고위급 인사들이 그들의 관할지역이나 도시에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 시대에는 황제의 방문(파루시아)를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역주민들은 방문기념주화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이 단어는 결국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였으니,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 재림에 대해 영광스러운 왕권을 가지고 있는 재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6:27-28).

16: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2)재림의 시기(29a)

24:29a 그 날 환난 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 환난의 날들 후에. 그러므로 후3년반 직전에 일부 성도들의 휴거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후3년반의 환난기간을 통과하게 될 것이고, 그 환난 후에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지상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3)재림의 징조(29b~30a)

24:29b-30a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주님의 재림 바로 직전의 징조는 천체의 대변화(벧후3:10,12). 해의 일식과 달의 월식 그리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이다. 일식 후 월식이 일어나는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모든 하늘들의 힘들)이 흔들린다고 했는데, 그것이 해와 달과 별들의 흔들림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인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곧 타락한 천사들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4)재림의 모습(30b~31)

24:30b-31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지파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그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의 재림은 공중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큰 나팔과 함께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 택하신 자들을 공중으로 모을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큰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림의 장면은 땅의 모든 족속들 이스라엘의 12지파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육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이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부활과 재림에 참여하며, 살아있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하여 이 부활의 예수님의 공중영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15:52, 살전4:16).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20120314() 수요기도회설교(사순절 셋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8)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2)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77장 오랫동안 고대하던

181장 부활승천하신 주께서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말 씀] 24:29~35(신약 42)

[키워드]

대환난, 3년반, A.D.70, 디도장군, 광야, 골방, , , 별들, 구름, 나팔, 천사들, 재림, 하늘의 권능들, 환난후재림 무화과나무, 여름, 이 세대, 그 날과 그 시각, 인자의 임함

 

1. 서론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까지는 마태복음의 5대강화 가운데 마지막 강화인 다섯번째 강화의 말씀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흔히들 감람산강화라고 말하는데, 24장에서 마2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까지 이어진다. 이 감람산 강화의 말씀은 세상 종말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아주 특별한 말씀이다.

감람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성전파괴의 때는 언제인지, 주님의 재림 때의 징조와 종말의 때의 징조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24:3).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재림의 양상과 시기에 관련된 교훈 및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신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은 재림의 양상 즉 재림의 시기와 징조와 그리고 모습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나타날 양상(24:29~31).

본문은 주님의 재림직전에 나타날 특별한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실로 놀라운 천체의 대변화가 수반될 것이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때에,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어 더불어 구름 가운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텐데, 그때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하늘로 모을 것임을 말씀하신다.

 

1)주님의 임하심(오심)은 곧 파루시아(왕의 방문)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실(임하실) 때에 대한 표적에 대해 설명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임하심이라는 단어는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황제나 왕 그리고 치리자와 같은 고위급 인사들이 그들의 관할지역이나 도시에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 시대에는 황제의 방문(파루시아)를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역주민들은 방문기념주화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이 단어는 결국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였으니,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 재림에 대해 영광스러운 왕권을 가지고 있는 재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6:27-28).

16: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2)재림의 시기(29a)

24:29a 그 날 환난 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 환난의 날들 후에. 그러므로 후3년반 직전에 일부 성도들의 휴거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후3년반의 환난기간을 통과하게 될 것이고, 그 환난 후에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지상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3)재림의 직전의 징조(29b~30a)

24:29b-30a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주님의 재림 바로 직전의 징조는 천체의 대변화(벧후3:10,12). 해의 일식과 달의 월식 그리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이다. 일식 후 월식이 일어나는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모든 하늘들의 힘들)이 흔들린다고 했는데, 그것이 해와 달과 별들의 흔들림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인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곧 타락한 천사들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4)재림의 직접적인 모습(30b~31)

24:30b-31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지파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그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의 재림은 공중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큰 나팔과 함께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 택하신 자들을 공중으로 모을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큰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림의 장면은 땅의 모든 족속들 이스라엘의 12지파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육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이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부활과 재림에 참여하며, 살아있는 자들은 홀연히 변화하여 이 부활의 예수님의 공중영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15:52, 살전4:16).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5)24:29~31의 말씀은 환란전의 휴거를 가리키는 말씀인가 아니면 지상재림전의 휴거를 가리키는 말씀인가?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24:29~31의 말씀을 환란전의 휴거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지상재림전의 휴거의 말씀으로 본다. 왜냐하면 29절에 그 날 환난 후에(원문:그 환난의 날들 후에)’라고 정확히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24:28절의 말씀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분명 예수님의 지상재림 전에 있을 아마겟돈전쟁(19:11~21)’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난전휴거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성경에 보면, 환난전휴거를 주장할만한 몇몇의 말씀들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 중 일부 즉 알곡이나 도둑이 탐낼만큼 귀한 보물내지는 첫 열매와 같은 자들을 대다수의 믿는이들보다 먼저 공중으로 휴거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 시기에 대해 어떤 이는 7년환난전이라고도 하고, 3년반전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종합해보면, 7년환난전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3년반의 기간에는 적그리스도의 핍박이 없고,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의 평화조약으로 말미암아 얼마동안 밀월이 진행될 것이라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분명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한 이레의 절반인 후3년반의 기간동안 즉 42달동안(1260)에만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다(9:27, 11:2, 13:5). 그러므로 만약 휴거가 있다면 후3년반직전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환난전휴거를 기정사실화하했을 때 나타나는 어려움들이 있다.

첫째, 환난전휴거를 주장하려면 성도들의 휴거를 두 번 이상으로 설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환난전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꼭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인 고전15:51~52의 말씀이나, 살전4:16~17의 말씀휴거의 사실에 대해 말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도 이 말씀에서 휴거가 두 번 이상 있을 것이라고 하는 암시를 발견하기 힘들다. 오히려 한 번의 부활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환난전휴거가 있다고 가정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부활을 두 번 이상 행하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과연 이러한 일이 있어날 것인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3년반의 차이로서 그렇게 두 번 부활을 행하실 수도 있겠으나 고전15:51~52의 말씀은 그때 성도들이 전부 다 부활 후 휴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렇듯 만약 우리가 환난전휴거를 기정사실화한려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가 되는 광경이 두 번 이상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휴거가 언제 일어날 것인가라는 물음에 마24:29~31의 말씀처럼 지상재림 직전에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의 기록이 틀린 곳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말이 틀렸다고 말해야 옳은가? 물론 사도바울은 12권의 신약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어서 우리는 그가 쓴 성경말씀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 있어서 충돌이 될 것 같으면,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지 결정할 때 그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지 않을 수 있다.

 

둘째, 우리가 환란전휴거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는 살후2:1~12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언제 오실 것이라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우리는 사도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쉽게 흔들리거나 미혹받지 말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2가지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배교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고, 둘째는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로서 곧 대적하는 자로서,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나오스)에 앉아 자기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이 일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주님의 파루시아(왕의 현현)와 그분 앞의 모임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지금 교회를 보라. 배교하는 일이 있는가? 또한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세우고, 그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한 일들이 없는데, 지금 당장이라고 휴거가 있을 것으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후2: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파루시아)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생각)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왜냐하면) 먼저 배교(변절)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7, 8, 9, 11, 13:1~8=적그리스도)이 나타나기 전에는(나타나지 않는 한) 그 날이 이르지(오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나오스)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2. 재림의 시기 분별에 관한 교훈(24:32~35)

재림의 시기와 관련되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될 뚜렷한 표징은 무엇일까?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재림의 시기 및 종말의 도래에 관한 확실한 표징을 소개하신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대환난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다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1)재림의 시기와 무화과나무의 비유(32~33)

24:32-33 무화과나무의(로부터) 비유를 배우라 (이미)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그리고) 잎사귀를 내면(낼 때에는) (너희가)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 다음날 성전에 들어오다가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는 그 나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1:19 이제부터 영원토록(긴 시기동안)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 무화과나무는 즉 말라버렸다.

이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은 단순히 어떤 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24:1~7, 24:32).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 관련지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무화과나무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그 무화과나무는 긴 시기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다가, 어느 때에 가서는 다시 가지가 연하여지고(이스라엘의 독립), 잎사귀를 낼 것(이스라엘의 성장)인데, 그때가 되면 인자가 그들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르렀음을 알라고 하셨다.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돋아나고 커지기 시작하면, 그때 늦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은 A.D.7098일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나라는 없어졌다. 하지만 1948415일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하였다. 무화과 나무가 싹을 낸 것이다. 그러면 여름(인류의 역사의 끝, 최후심판의 때)이 가까운 것이다.

 

 

2)재림의 임박성에 관한 교훈(34~3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다가 한 마디 더 추가하셨다.

24:34-3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원문을 직역해보면 이 모든 것들(24:4~28, 29~31절은 제외)이 다 이루어지면, 그때에야 비로소 이 세대가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 그 세대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러므로 그 세대는 재림전에 일어날 환난들과 징조들을 모두 다 겪게 될 세대를 가리킨다. 특히 32절에 나오는 무화과의 비유가 이루어지는 세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독립과 성장이 일어나는 세대가 바로 그 세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대를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 직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세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신실하여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 이 세대의 기간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이 세대 즉 한 세대의 기간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여러 가지 학설이 있어왔다. 처음에는 30이 제기되었다(1968). 그것은 제사장이 일하는 나이가 30세였기 때문이다(4:3). 그후에 40이 제기되었다(1978).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한 백성의 한 세대가 40년이었기 때문이다(14:33~34). 그후에 다시 50이 제기되었다(1988).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모든 포로들이 자유롭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토지를 판 것도 돌려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25:8~55). 이제 남은 것은 70년과 100년 혹은 120 뿐이다. 100년이나 120년을 한 세대로 보는 것은 수백년을 살던 노아시대 이전에 해당되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70이다(2018).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한 세대만에 돌아온 것이 70년이었기 때문이다(25:11,29:10). 그렇다면 산술적인 계산으로 2018년에서 7년을 빼면 2011년에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후3년반의 환난의 날들을 감해주신다면 2011년 이후가 되면 언제라도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나타날 시기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후2장의 말씀처럼 그가 나타나더라도 후3년반의 시작점 즉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분명 지금의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운 시기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비밀리에 있다고 주장하는 휴거의 시점에 대해서는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택함받은 자들도 미혹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0321() 수요기도회설교(사순절 넷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39)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3)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78장 주 예수 믿는 자여

175장 신랑되신 예수께서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른지

[말 씀] 24:36~51(신약 42)

[키워드]

재림, 휴거, 무화과나무, 여름, 이 세대, 그 날과 그 시각, 인자의 임함, 노아, 인자의 임함, 버려둠, , 멧돌질, 깨어있으라, 충성되는 지혜있는 종, 악하고 게으른 종, , , 슬피 울며 이를 갊

 

1. 서론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까지는 마태복음의 5대강화 가운데 마지막 강화인 다섯번째 강화의 말씀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흔히들 감람산강화라고 말하는데, 24장에서 마2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까지 이어진다. 이 감람산 강화의 말씀은 세상 종말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아주 특별한 말씀이다.

감람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성전파괴의 때는 언제인지, 주님의 재림 때의 징조와 종말의 때의 징조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24:3).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재림의 양상과 시기에 관련된 교훈 및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신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어느 때에 이런 일들(성전건물들의 파괴)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변부분이 있고(24:1~28), 둘째는 주의 임하심(파루시아)에 어떤 징조가 있는지에 관한 말씀이 있으며(24:29~31), 마지막으로 세상(시대)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말씀(25:32~51)이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 징조는 단 한가지다. 그것은 바로 무화과나무의 비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여름철 즉 수확철이 가까운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멸망했다가, 1948514일에 독립했다. 이미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진 것이다. 그리고 잎사귀를 내어 지금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않을 만큼의 국방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만이 아니다. 여러 열강들이 독립할 것도 함께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29-30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2차 세계대전이후 19485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시작으로 하여, 아프리카의 절반,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이집트, 리비아, 수단, 시리아, 레바논, 호주, 필리핀, 인도, 인도네시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싱가폴, 홍콩, 캐나다 80여개의 나라가 독립을 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제부터는 정신차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그 정점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2. 재림의 시기의 불예측성과 경성 및 충성의 필요성

(24:36~51, 13:32~37, 12:41~48,17:26~36)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주님의 그 때에 일어날 징조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지만 그 날과 그 시각은 절대 알 수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날과 그 시각을 예측하지 못했던 노아의 홍수 사건과 롯의 때와 같다는 것을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도적이 올 것을 알고 예비하고 깨어있는 집주인처럼 말이다. 그리고 비록 주인이 없을지라도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 주인이 맡겨준 직분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어 그렇지 않고 청지기로서 직무를 유기하고 방탕하게 산 악한 종은 심판받아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1)정확한 재림시기의 불예측성(36~41)

 

. 결론적인 말씀 - 그 날짜와 그 시간을 결코 알 수 없다(36)

24:36 그러나 그 날(날짜)과 그 때(시각, 시간)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님께서는 먼저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짜와 그 시간(시각)을 절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버지의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이다(1:7). 그 날짜와 시간은 심지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하늘의 천사들도 모를 것이며, 성자로서 제2위격을 지니신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다.

 

.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의 비유(37~39)

24:37-39 노아의 때(날들)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왜냐하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 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못하였기 때문이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이어, 예수님은 그 날짜와 그 시각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는 노아의 날들이요, 또 하나는 롯의 날들이다. 한편, 롯의 날들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다(17:28~29)

17:28-29 또 롯의 때(날들)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 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노아의 날들이나 롯의 날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사람들은 그 날에 이를 때까지 결코 그 날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그 날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식욕], 장가가고 시집간다[성욕]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람들은 동물처럼 식욕성욕에만 즉 그저 나날이 세속적인 쾌락과 현실적인 일에만 몰두할 뿐, 주님의 재림이나 심판의 메시지에 관하여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며, 안정함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영적인 복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그 날짜와 그 시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남자와 여자, 낮과 밤의 비유(40~41, 17:34)

24:40~41 그 때에 두 사람(남자)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남자)은 데려가고 한 사람(남자)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여자)은 데려가고 한 사람(여자)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17: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남자)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남자)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남자)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이어 두 남자와 두 여자의 비유는 심판주가 갑작스럽게 와서 천사들을 보내 그 중 한 명을 데려갈 것임을 말한다. 그때에는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확실히 구분될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모습과 조건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이 운명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조건 즉 영적 상태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밭에 있는 사람은 남자들을 대표하고, 방 안에서 맷돌질(방앗간)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데려감을 당하는 사건은 둘 다 낮에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밤에 잠을 자던 두 남자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17:34).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밤일 때 지구 반대쪽은 낮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믿음이 없어 그 영혼에 성령이 안 계신 자는 남겨지게 될 것이고,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천사로부터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환난전휴거설에 너무 매인 나머지, 그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운데 기도만 하고 기다리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낮에는 일해야 하고 밤에는 자야 한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충실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가면 구원받음과 버려짐의 양극으로 영원히 분리될 것이다. 우리는 극단적 종말론자들이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극단적 휴거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자신의 휴거를 너무나 기대한 나머지, 생업을 포기하고 집단생활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재림신앙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재림시기의 불예측성에 따른 성도들의 경성의 필요성(42~44): “깨어있으라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시각)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시각)에 인자가 오리라

이처럼 주님의 재림시기는 절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36~41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정확한 종말시기의 불예측성에 관한 말씀이다. 이제 42~44절까지는 예수님의 정확한 재림시기를 알지 못하는 성도가 과연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교훈한다. 그것은 우리가 정확한 재림시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그날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정확한 재림시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정신을 차리고 그 날에 주의하여 그 날을 예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무관심과 나태,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그 날을 갑작스럽게 당황하며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집 주인이라도 어느 시각에 도둑이 알지 못하므로 깨어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집중인은 결코 도둑이 몇 날 몇 시에 침입해 들어올지 잘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예비되어 있어야 한다.

한때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도둑이 올 때, 보물만을 훔쳐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과장되고 잘못된 해석이다. 하지만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도둑은 결코 예고없이 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 예수님께서는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오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항상 자기가 살아가는 현재에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처럼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마가복음에서 집주인이 언제 올른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할 문지기에 관한 다른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13:34~37)

13:34-37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그날이 뜻밖에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21:34~36).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결론적으로, 집주인이 언제 올른지 그 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는 비유와 표현으로서 성경은 5가지를 말하고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24:37, 17:26~27)

롯의 때와 같이(17:28~29)

도둑같이(살전5:2)

덫과 같이(21:34)

해산하는 여인같이(살전5:3)

 

 

3)재림시기의 불예측성에 따른 성도들의 충성스런 자세의 필요성(45~51): “충성하라

24:45-5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시각)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복이 있도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자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 (그리고)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시간)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어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인자를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에게 책망받지 않도록,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주신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말씀해주신다. 여기에 나오는 집주인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되어야 하고, 지혜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자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것은 때를 따라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자이다.

문제는 악한 종이다. 악하다는 말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당위적인 규범이나 행동에서 벗어난 상태를 총칭하는 단어이다. 이 종은 어떤 자인가? 주인이 예정된 시간보다 더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주인의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동료 종들을 심하게(혹독하게) 때리고(채찍질하고), 술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도록 유도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종은 자기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감각적 쾌락충족에 깊이 빠져 있는 상태다. 이렇게 외식적인 해위와 무절제한 태도는 악한 종의 주요 특징임에 틀림없다.

그때 어떻게 그들을 처리하시는가? 그들이 행하는 일에 응당한 처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다(51). 그들은 그때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정말 알지 못하는 날짜와 알지 못하는 시각에 오실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더 이상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게 되는 바로 그 때에 그분이 재림하실 것이다(살전5:3). 깨어 준비하고 충성되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그것만이 그날에 데려감을 받는 조건이 된다.

 

 


20120328() 수요기도회설교(사순절 다섯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0) 열 처녀의 비유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181장 부활승천하신 주께서

174장 대속하신 구주께서

175장 신랑되신 예수께서

[말 씀] 25:1~13(신약 43)

[키워드]

깨어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 열 처녀, , 등불, 슬기로운 자, 미련한 자, 여분의 기름, 신랑, 소리, 한 밤 중, 더디 오므로, 자다. 혼인잔치, , 알지

 

1. 서론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세상종말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게 될 징조에 관한 말씀과 깨어있음과 준비하고 있음 그리고 충성됨과 지혜로움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2436절부터 51절까지 나오는 본문 중에서 2가지 주님의 명령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하나는 그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4:36~44). 또 하나는 그날 더디 온다고 동료들을 학대하며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지 말고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4:45~51).

그렇다면 깨어있어야 함과 준비하고 있어야 함(24:36~44)’ 그리고 충성되어야 함과 지혜로워야 함(24:45~51)’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주님은 우선 2가지 비유를 통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열 처녀의 비유(25:1~13)’달란트의 비유(25:14~30)’.

 

이 중에서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그 날짜와 시각이 노아의 날들과 같고, 롯의 날들과 같다는 비유하신 것의 요점으로서, 깨어있어야 함과 준비하고 있어야 함에 관한 보다 더 구체적인 비유이다.

사실 24장에서는 두 남자와 두 여자 중 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둠을 당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25장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두 사람이 혼인잔치에 들어간 이유와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적나나하게 나온다.

 

 

 

2. 깨어있는 것과 준비하고 있는 것, 과연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먼저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말씀들을 다시 읽어보자.

24:36-44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먼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하셨다. 노아의 날들처럼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밭에 있는 두 남자 중 한 남자와 집에서 멧돌질하고 있는 두 여자 중 한 여자 그리고, 도둑이 언제 올 줄 모르고 그 집을 깨어있는 집주인의 비유는 다 깨어있어야 함에 대한 말씀이다. 하지만 준비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과 준비하고 있음에 관해 더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비유를 더 추가하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25장의 첫 번째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있음과 준비하고 있음에 관한 비유이기는 하나 그 초점이 이번에는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음에 있다. 열처녀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졸다가 잠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깨어있어야 했지만 신랑이 더디 오는 바람에 깨어있지 못하고 지쳐서 잠들어 버렸다. 오히려 그날을 준비하고 있던 자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신다(25:5,10).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이들은 깨어있었지만 신랑이 더디 오는 바람에 신랑을 직접 맞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 졸며 잤다. 기다리다가 지쳤고 그리고 잠이 들었다고 말한다. 특히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잠자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한다(살전4:13~16). 회당장의 12살먹은 소녀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고(9:24),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11:11~13).

살전4:13-16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1:11-1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렇다면, 왜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찍 오지 아니하고 늦게 오시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확실한 답은 베드로 사도의 서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지만 그때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에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러 가는데, 그때 준비하였던 슬기로운 자들과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의 핵심은 준비하고 있으라이다. 주님이 오심이 언제인지 예측할 수 없기에 깨어 있어야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데, 그날이 언제일까 하고 그날만을 고대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화가 될 수 있다.

 

 

 

3. 열처녀의 비유

 

1)열 처녀는 과연 어떤 자들인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불신자들인가?(1)

25:1 그 때에(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천국은 마치 (자기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여기에 나오는 신랑은 분명 예수님이시다(3:29, 9:15).

그렇다면 열 처녀는 누구인가? 그 처녀들은 신부들러리들이다. 신부를 위하여, 신부를 대신하여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는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이 처녀들이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너무 열을 올리는데,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신랑이 올 때, 과연 깨어 있었느냐 그리고 준비하고 있었느냐에 초첨이 맞춰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열 명의 들러리들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열 처녀는 분명 처녀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처녀는 곧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고후11:2).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특히 미련한 다섯 처녀도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첫째, 미련한 다섯 처녀도 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등은 그 등 안에 들어있는 기름 때문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그들도 신랑을 주님, 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고 그들이 마중 나갔던 대상은 신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도 믿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램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등은 람파다스라는 헬라어로, 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둥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다. 이 등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나 미련한 다섯 처녀나 다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는 믿는 이들의 영을 상징한다(20:27).

20:27 사람의 영혼(spiri)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더 나아가자면, 이 등(램프)외적으로 볼 때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보이는 요소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각자가 다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외적으로 볼 때 각자의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슬기로운 사람처럼 준비되어 있으나, 어떤 다른 사람들은 미련한 다섯처녀처럼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2)미련하고 슬기로움의 차이는 무엇이었나?(2~3)

25:2-3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둘 다 밤이 되어 신랑이 온다는 것을 알고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그들의 등은 등불이 타고 있었다. 왜냐하면 등 안에는 당장 그 등의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어느 정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신랑이 온다고 하는 그 날 밤, 신랑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기다리다가 열 명의 처녀들 모두가 졸았고 이어 잠들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믿는 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주님의 재림은 그들의 생각하는 날과 시각에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지쳐버렸고 이어 잠들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다. 결국, 열 명의 처녀는 믿는 이들 중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지만 차마 주님의 재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죽은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이 오실 때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함께 부활하여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주님의 공중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자도 있고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이었나?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잘 졸며 잤지만 나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에 깨어난 영혼들이 주님을 맞이하러 공중으로 갈 때, 꺼져가는 등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등에 보충할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느냐, 가지고 없었느냐의 차이. 다시 말해, 준비성의 차이인 것이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기름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분의 기름을 다른 그릇에 담아가는 준비성이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였던 것이다.

여분의 기름을 미리 준비했던 자들은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기 위해 거기에 자신이 미리 준비한 여분의 기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이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당장 신랑이 오실 것만 생각하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곧 주님을 맞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랑은 더디 왔다.

처녀들의 문제는 그들이 다 졸며 잤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의 다섯은 늦게 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등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자고 있든 깨어 활동하고 있든, 죽어있든 살아있든, 이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큼 온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13절의 최후권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성도의 영적 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그릇은 무엇을 의미하여, 기름(올리브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차적으로 볼 때, 그릇은 기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그 믿는 사람의 혼(인격)을 의미하고, 기름성령을 의미한다 하겠다. 한편, ‘기름에 대한 해석으로 어떤 이는 믿음, 어떤 이는 선한 행실, 어떤 이는 내면적 신앙의 모습인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처녀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존하여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과거에 한 번 영적인 은혜에 만족하였을 뿐 그들 내부를 성령과 새로운 은혜로 증진시키지 아니했던 것이다.

 

 

3)신랑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5~6)

25:5-6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첫째, 우리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하는 것보다 늦게 오신다(24:48, 25:5,19).

우리가 여기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디 오신다(지체하신다)는 것이다.

24장의 악한 종을 보라. 그가 왜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취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주인을 기다리다가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그의 마음 ()에 생각하기를 (나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지체할 것이라) 하여(24:48)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25:5)”라고 나와 있고, 다음주에 함께 나눌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오랜(많은 시간) 후에 그 종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25:19)”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게 올 것이다.

 

둘째, 한 밤 중에 오신다.

주님은 초저녁에 오시지 않았다. 그때 오셨더라면 미련한 다섯 처녀도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한 밤 중에 오셨다.

한 밤중이란 첫째,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가운데에 가장 캄캄한 시각을 의미한다. 기다리다 지친 시간이다. 도둑이 침입하는 시간이다. 다 졸며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이 말은 홀연히 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마 이 시대의 끝, 대환란의 끝일 것이다.

 

그리고 소리는 천사장의 소리일 것이다(살전4:16). 처녀들에 들려온 한밤중의 소리는 그들이 깨어서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을 각성하게 했으며, 등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지 확인케 하는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맞으러라는 말은 방문자를 공개적으로 환영하며 영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슬기로운 처녀들은 과연 어떻게 여분의 기름을 미리 준비하였을까?(7~9)

25:7-9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그들의) 등을 준비할새(손질할새, 정리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왜냐하면)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충분하지 않으니) 차라리 (기름)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명의 처녀들은 자다가 일어났다. 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다(살전4:14-16, 고전15:52). 그들 모두는 등을 손질했다. 그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기름을 보충해야 했다.

그때,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이 되었다. 슬기로운 자들은 처음 마중 나갈 때부터 여분의 기름을 더 들고 나갔다. 하지만 미련한 자들은 당장 신랑이 올 줄 알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나갔다.

그런데 슬기로운 자들이 가져간 여분의 기름은 돈을 주고 사서 가져온 것이지 결코 공짜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5명의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활 후에 5명의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의 등에 기름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슬기로운 자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다. 하지만 슬기로운 자들은 자신과 그들이 쓰기에 충분하지 않으니 가서 기름 파는 자들에게서 사라고 하였다. 이는 구원은 결코 남의 기름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을 빌어올 수 있어도, 성령의 내적인 충만만큼은 빌어올 수 없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사러 가야 했다. 샀는지 사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밤중에 누가 기름을 팔았겠는가? 대답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름은 값을 주고 사는 것이라는 점이다. 댓가의 지불이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아를 처리하고, 주님 때문에 핍박받고 손해보는 것 등의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5)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몇 번인가?(10~12)

25:10-12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둘 다 깨어있지 못했다. 하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오시더라도 곧바로 일어나 마중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름을 미리 댓가를 지불하여 사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문은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때를 놓치면 나중에 울고 불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혹시 나중에 준비했다고 해도 나중에 준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때가 너무 늦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구원의 기회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뿐인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 가서는 회개와 믿음, 성령의 열매맺는 삶 등을 소홀히 하다가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 것임을 말한다.

 

그때에 주님은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13:25, 1:26,31, 8:19)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오이다) 못하노라 는 말은 그들을 인정할 수 없고, 그들이 어디서 온 자들인지 시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성을 통해 갖게 되는 인격적인 앎까지 가리키는 단어다.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4. 결론

결론적으로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깨어 있어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더디 오심으로 인하여 태만과 게으름으로 인하여 어떤 파괴적인 재난이 갑자기 닥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현재 시간동안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결코 그 날짜와 시각을 예측할 수 없다. 주님은 그 날짜와 그 시각을 비밀에 붙여두셨다. 그것은 성도들도 하여금 늘 깨어있고, 그 날을 항상 준비하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01244() 수요기도회설교(종려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1) 달란트의 비유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544장 울어도 못하네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말 씀] 25:14~30(신약 43)

[키워드]

주인, 종들, 달란트, 자기 소유, 재능, 달란트, 사명, 은사, 장사, 즉시, 결산, 회계, 착함, 충성됨, 악함, 게으름, 굳은 사람, 고리대금업자, 무익한 종, 바깥 어두움, 슬피 욺, 이를 갊, 빈익빈 부익부

 

 

 

1. 서론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세상종말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게 될 징조에 관한 말씀과 깨어있음과 준비하고 있음 그리고 충성됨과 지혜로움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2436절부터 51절까지 나오는 본문 중에서 2가지 주님의 명령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하나는 그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24:36~44), 또 하나는 그날 더디 온다고 동료들을 학대하며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지 말고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4:45~51).

주님은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어야 함(24:36~44)’에 대한 예증으로서 마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25:1~13)’를 말씀하고 있으며, 충성되어야 함과 지혜로워야 함(24:45~51)’이에 대해서는 달란트의 비유(25:14~30)’로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신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열처녀의 비유(25:1~13)’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생각하는 것보다 늦게 오시기에, 그 날이 늦게 온다 하더라도 신랑을 맞이하러 나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여분의 기름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은 그 다음의 달란트의 비유로서,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말해 주인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주인이 잠시 없는 동안 주인이 맡긴 것에 대해 어떻게 행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답은 충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달란트의 비유

 

1)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의 공통점

주님이 오실 날짜와 시간은 우리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훈이 들어있는 비유가 바로 열 처녀의 비유이다. 언제라도 활활 타오르는 등(램프)과 함께 언제라도 기름이 모자라면 채워넣을 수 있는 여러분의 기름을 값주고 사서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쳐 잠든다 해도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소리에 깨어나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댓가를 지불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이 늦게 오더라도 활활 타오르는 등불이 되도록 성령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 왔다.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소명에 대해 충성됨으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비유는 똑같이 첫째,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둘째, 주님은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 마지막 때에 가면 주님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자와 쫓겨나 통곡하는 자의 두 부류로 확연히 분리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25:14-15)

25:14-15 (왜냐하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먼 나라)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자기에게 속한 것들)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그의 능력에 비례하여, 그의 분량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더니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과 같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천국의 도래에 대해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 말씀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여러 명의 종들을 두 주인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의 종들믿는 이들을 가리키며, 타국에 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맡긴 자기에게 속한 것들이란 달란트로서 주님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 부재하신 동안 성도들에게 맡기신 주의 모든 사명이나 은사를 가리킨다. 만약 그것이 사명이라고 한다면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음전파일 것이며, 그것이 은사라고 한다면, ‘직분’(목회자, 장로, 집사)으로서의 은사, 찬양과 가르침과 위로함 같은 은사, 방언말함과 예언과 치유의 영적인 은사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종들인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나도 빠지거나 예외없이 모두에게 다 사명을 주셨다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주인은 자신의 달란트를 그의 종들에게 맡기셨을까? 그것은 단순히 주인의 재산을 맡아 보전하라고 맡긴 것이 아니다. 주인은 재신의 증식을 기대하며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우리 성도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하신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이 믿는 이들에게 맡긴 사명을 발견하는 이도 있고 또한 그 사명에 충실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있어도 그 사명대로 살지 않는 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은 그이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어떤 기준으로 나눠주었을까? 각각 재능대로이다. 즉 그 자신의 능력을 따라서 나눠준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능력대로 맡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종은 5달란트를, 어떤 종은 2달란트를, 어떤 종은 1달란트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그들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었다. 이렇게 주님은 성도가 감당하기에 알맞은 달란트를 맡기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사명과 은사가 다른 사람의 그것에 비해 적든 많든,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교만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심코 1달란트 받은 자를 불쌍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양을 보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1달란트무게로는 약 34kg에 해당하며(38:25), 돈으로 치자면 6,000 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된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달란트는 노동자가 약 15~20년을 벌어야 하는 거액이었다. 결코 적게 준 것이 아니다. 20년어치의 품삯이라면 누구든지 그것을 밑전으로 하여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3)그후 종들은 어떻게 했는가?(25:16-18)

25:16-18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런데 사명과 은사를 받은 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그것으로 ’ ‘즉시장사하였던 부류가 있다.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은 자가 그들이다. 그랬더니 그들은 자기가 받은 만큼의 이익을 남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 부류는 1달란트 받은 자로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중요한 것은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은 자는 곧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인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주인이 왜 그 달란트를 맡겨 주셨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 하지만 1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뜻을 알았지만 그것을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그것을 땅에 파묻어두었다.

이는 모든 믿는 이들은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은사, 복음전파)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5달란트 받았던 종을 보라. 그 종은 주인에게서 본래 받았던 자본금 5달란트(노동자의 100년치의 품삯)과 합하여 모두 10단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갔다. 이 종은 주인의 기대와 바램을 충족시킨, 충성스러운 종이었던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사명과 은사를 주신 것도 사실을 우리가 노력하여 더 많은 열매맺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아니될 것이다.

또한 2달란트 받은 종도 이와 똑같았다. 둘 다 한결같이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인과 회계할 훗날을 생각하며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고, 자기의 은사를 묵혀두지 아니하고 극적으로 개발하는 태도로 산 결과 2배의 이윤을 남기게 된 것이다.

 

한편, 1달란트 받은 자는 달랐다. 주인이 자신에게는 1달란트를 주신 것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주인에게 등을 돌리고 그는 주인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땅 속에 그대로 묻어두었다. 그로 인해 그는 그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지는 아니했지만 단 한 푼의 이윤도 남기지 못했다. 이는 주인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러한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다. 자기가 받은 사명이나 은사 등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적 빈곤감을 느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묻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불성실한 태도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은사를 처음으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조차 잃게 되고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책망받는 원인이 될 것이다(28).

 

 

4)다시 돌아와서 결산하는 주인(25:19)

25:19 오랜(많은) (시간)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회계할새)

주인이 떠나간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주인이 돌아왔다. 주인은 종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늦게 돌아왔다. 이는 제자들의 기대보다 더 늦게 주님이 재림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주님의 늦은 재림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태와 게으름에 몰아가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그저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돌아와서는 그의 종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를 셈하였던 것이다. 이는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재시에 우리에게 맡긴 사명과 은사에 어떻게 했는가를 심판하실 것임을 암시한다(고후5:10 2:23).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5)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종들의 보고에 대한 칭찬과 상급(25:20~23)

25:20-2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작은 것들)(계속해서)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기쁨)(안으로) 참여할지어다(들어오라)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것들)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기쁨)(안으로) 참여할지어다(들어오라) 하고

앞의 두 명 즉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은 종들의 보고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였는데, 주님께서 맡겨 주신 그 달란트 때문에 많은 것을 벌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공로를 주인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자 주님은 앞의 두 명의 종들에게 먼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합당한 상급을 허락하신다. 사실 그들은 착했고 충성되었다. ‘착한 것은 그들의 성품을 가리키고, ‘충성된 것은 그들의 행위에 관련된다.

첫째, 주님은 그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들은 정말 착했다. 그들은 선했다.

그들은 정말 주인을 좋은 분으로 알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어찌 자기와 같은 부족한 종에게 수 십 년 어치의 재산을 주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주인의 뜻을 분별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자신을 믿고 맡겼으니 다시 오실 주님께서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나가서 장사했다. 그들은 주인을 아주 훌륭한 분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선함이다.

또한 그들은 충성되었다.

그들은 주인을 좋은 분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주신 그 일에도 충성되었다. 그들은 한 번만 충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충성했다. 그 종들은 한 때만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충성스러운 자세로 일했던 것이다.

 

둘째,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2가지 상급을 주셨다.

하나는 맡은 것들을 다스리게 하는 권세를 주셨고, 또 하나는 장차 주인이 누리게 될 주인의 기쁨의 잔치 안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해야할 뿐만 아니라 충성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천년왕국의 기간동안 왕노릇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실 뿐만 아니라,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된 자의 상급이다. 성도들이여, 작은 것에 충성하라. 그러면 주님께서는 큰 것도 맡겨주신다(16:10).

 

한편, 2달란트 받은 자도 5달란트 받은 자와 같았다. 그는 5달란트 받은 자에 비하면 그의 절반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적은 달란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은 작은 사명이나 은사에 대해 한탄하거나 주인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 내에서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했다.

결국 주님은 그를 5달란트를 더 남겼던 첫 번째와 종과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주신다.

 

이와같은 사실은 주인은 많은 능력을 받아 많은 이윤을 남긴 것을 고려하기보다는 맡겨진 능력으로 그에 기대되는 성실함과 충성을 다했느냐를 고려하여 칭찬하고 보상하신다는 것이다.

 

 

6)1달란트받은 종의 보고와 그에 대한 꾸중과 심판(25:24~30)

25:24-28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엄한) 사람이라 심지(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키질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키질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이 달란트의 비유의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책망받고 어두움 안으로 떨어진 1달란트받은 자이다. 비록 그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달란트를 주어졌지만, 그에게도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다. 단지 그가 달란트를 적게 받은 것은 그의 능력이 그 정도만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준다해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적게 받은 것은 그에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주인을 엄하고 나쁜 고리대금업자로 판단하고는 주인의 돈을 땅에 안전하게 파묻어놓았다가 다시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다른 종들처럼 동일한 기회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일하지 않았다. 자기가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오히려 말이 많다. 주인이 인색한 분이고 엄한 분이어서, 혹시 장사하다가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주인으로 책망받을 일이 걱정되어 안전하게 그 돈을 땅에 파묻어놓았다가 이제 드린다고 말했다. 물론 그 말은 거짓말이다.

1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심판은 이렇다.

첫째, 그는 악한 자였다. 그는 주인을 나쁘게 평가하면서도 뻔뻔스럽게 보고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나쁘게 알고 나쁘게 평가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는 악한 자였다. 주인을 휴지하나 대지 않고 코풀려는 고리대금업자 정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정말 주인을 악덕고리대금업자로 알았더라면 그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취리하는 자, 환전상이나 은행원, 8%에서 48%의 고리대금업자)에게 맡겨서 원금에 이자를 더하여 가져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악했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했다.

둘째, 그는 게으른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맡겨주신 일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외면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려고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게을렀다. 그의 속마음은 주인의 재산의 증식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인이 인정없고 냉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는 거짓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자이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주인을 미워했습니다. 나에게는 달란트를 적게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게으른 자입니다. 일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처분하여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말했어야 옳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은 잘 했고, 주인이 나쁘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는 주인을 인정머리 하나 없는 냉정한 사람으로 규정해버린다. 즉 투자는 적게 해 놓고서는 거기에서 많은 이득을 얻어보려는 인색한 영감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 인색하다 혹은 엄격하다고 말하기 전에 그분은 자체가 선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또한 후하신 분이다. 차고 넘치도록 흔들어 채워주시는 분이다. 단지 자신의 잘못을 주님께 책임을 전가하려는 얄퍅한 속임수를 하나님께 쓰지 말라.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어찌 그분 앞에서 감히 자신을 변호하고 주님을 속이려들 수 있다는 말인가? 겁을 상실한 자다.

 

그는 사실 주님의 뜻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인의 뜻을 외면했다. 주님이 시키신 일에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는지 생각해보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 처음 그대로라면 주님은 그러한 은사와 사명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꼭 악을 행해서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7)이 비유의 결론

25:29-30 (왜냐하면) 무릇 있는(가진)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가지지 못한) 자는 그 있는(가진) 것까지 (그로부터)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어두움 안으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렇다. 10달란트 받은 자에게 1달란트에 추가로 더 주어진 것처럼, 크건 작건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자에게는 자신이 마땅히 받을 보상 외에도 다른 기대치 않았던 보상까지 더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부익부 빈인빈을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을 가지고 그에게 부여된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서 지속적으로 그의 은혜가 넘쳐나며 그의 심령이 부요해질 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사명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를 하찮은 것이라고 무시하며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은사를 상실해 가며, 더 이상 영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명심하자.

1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진 악하고 게으른 종의 최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 어두움 안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 종이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기질과 가치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자기의 사명을 태만히 여기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어떤 것임을 잘 표현해준다.

결국 그가 추방당하여 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깥 어두움이다. 그곳은 곧 불못이다. 그곳은 사단이 갇히게 될 지옥을 가리킨다(20:10~15). 거기에 갇혀 그 종은 영영히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42,50, 22:13, 24:51)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3. 결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그 날을 준비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충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사역)이나 은사에 성실해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는 사명에 충성할 것을 교훈하는 비유이다. 비유의 핵심은 사명의 분량이나 은사의 많고 적음이나 혹은 이윤을 많이 남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나 은사에 얼마나 충성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도라고 한다면, 첫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고유의 사명과 어떤 종류의 은사를 받았는지를 살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둘째, 받은 사명을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아무리 큰 사명과 큰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충성하지 못하면 1달란트 받은 자처럼 책망을 받고 지옥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이 보이고 미미해 보이는 사명이나 은사라 할지라도 그 일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칭찬해주시고, 장차 도래할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혼인잔치에도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다.

 

 

2012411() 수요기도회설교(부활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2) 양과 염소의 비유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2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 전하여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말 씀] 25:31~46(신약 44)

[키워드]

인자, 자기 영광, 모든 천사들, 영광의 보좌, 모든 민족, , 염소, 오른편, 왼편, 아버지, , 창세, 나라, 상속, 선한 행실, 형제, 지극히 작은 자, 마귀, 그의 천사들, 주여, 영벌, 악인, 의인, 영생

 

1. 서론

우리는 지난 2주 동안에 2가지 특별한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마태복음 2436절부터 51절까지 기록된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주님 재림시에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깨어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함(24:36~44)과 그리고 충성되고 지혜로워야함(24:45~51)이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짜와 시간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날 더디 온다고 동료들을 학대하며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지 말고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때를 따라 맡겨진 사역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며 충성되고 지혜롭게 그 날을 대비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주님은 마25장에서 2가지 비유를 통해, 그 날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부연설명하셨다. 그것이 곧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어야 함(24:36~44)’에 대한 예증으로서 열 처녀의 비유(25:1~13)’이며, 충성되어야 함과 지혜로워야 함(24:45~51)’에 대해서는 달란트의 비유(25:14~30)’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좀 다른 측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2.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2가지 자세

한편, 열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성도들의 내적인 준비외적인 준비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첫째, 우리는 내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5:1~13).

우리는 내적으로 거듭나게 하는 영 말고도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채워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열 처녀들은 믿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가리킨다. 처녀들이 가진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20:27). 그리고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8:16, 61:1, 1:9). 그리고 그릇은 우리들 자신이다. 이것은 사람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믿는 이들의 혼(인격)을 가리킨다(9:21, 23~24). 그러므로 열 처녀가 자기의 등 안에 기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준비해가지 못했다. 그것은 댓가를 지불하고 사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은 자아를 처리하고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손해보는 것 등의 댓가를 지불함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기를 죽음에 넘기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은 점차 줄어들었고, 마침내 주님이 오실 때쯤 되니 그 기름이 달아서 없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여분의 기름이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기름이었다(16:24).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은 지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짐으로 자아는 없어지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날마다 죄의 몸을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기 않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죽음에 넘기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휴거되거나 휴거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였던 것이다.

 

둘째, 우리는 맡겨진 사명(복음전파, 사역, 직분)과 받은 성령의 은사들에 있어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5:14~30).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맡겨진 사명과 복음전파에 충성되어야 한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받은 은사들이나 맡겨진 사명의 크기나 양이 얼만큰 큰 것인가를 문제삼지 않는다. 주님은 다만 얼마나 충성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왜 자신에게 주님의 것을 맡기셨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주인의 뜻은 주인의 것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여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들을 구원해내야 한다. 주님께서 훗날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주님의 누림에 함께 동참하려면 우리는 오늘도 봉사면에서 충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가?

 

 

 

3. 민족들에 대한 심판

 

1)기본적인 사항들

본문에 등장하는 인자(31)’는 그리스도 자신으로서(16:28), 다니엘서에 언급된 대로 마지막 날에 등장하는 심판주(7:13)이자 재판장이다. 예수님도 자신을 그렇게 말씀하셨다(16:27). 그때에 그를 수종드는 천사들이 함께 대동하게 될 것이다.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런데 그 인자는 곧이어 임금임을 알 수 있으며(34), 그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34).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받은/수동태분사)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때 모든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다(32). ‘모든 민족이 주격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여드는 것이다. 이때에 모이는 자는 유대인이나 믿는 이들 즉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모든 민족(판타 타 에스네)’이다. ‘모든 민족에 대한 견해는 3가지다. 첫째, 이방인들. 둘째, 모든 불신자들. 셋째, 모든 성도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복음전파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아직까지 믿고 있지 않는 이방민족(열방민족)을 가리킨다.

이때 모든 민족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 한 부류창세로부터(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로서 인자 오른편에 들어갈 자이자, 양의 자리에 들어갈 자들의인이라 불리우며(37, 46), 한 부류저주를 받은 자들, 왼편에 있는 자들로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이다. 그런데 이때 왼편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들을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지, 악을 저지른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악행을 저지른 자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태만히 하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선행을 하지 않았던 자들이다(42~43). 그들은 고통받는 주의 형제들에게 무관심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과는 정반대되는 마음과 태도로 산 것이다.

이 모습은 당시 목자의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따로 구분하여 우리에 넣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양의 자리에 해당하는 오른편이라는 말은 명예롭거나 좋은 쪽, 은총이나 구원을 받을 쪽을 상징한다. 예수님도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2:35).

 

한편, 오른편에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37, 44).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주와 재판장으로 부르는 호칭으로서, 그들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는 주님을 몰랐거나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며, 주님에 대해 소문조차 들어보지 못한 자들일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들이 행한 선행을 6가지로 표현하는데 이는 그들이 행한 대표적인 선행 6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 행위를 그때 당시 예수님 곁에 있는 자들에게 행한 자들로서 이 내 형제들이자 지극히 작은 자들(보잘겂없는 자들)’에게 선행을 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 선행을 행한 것이 아니다. 도망다니는 유대인들이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선행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형제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첫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을 막론하고 고난받는 모든 자들. 둘째, 주님의 제자들. 셋째, 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주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3년반기간동안 고난받는 유대인들과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했던 것이다.

 

 

2)24장에 나오는 두 부류의 사람들

우리가 24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대상이 약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그 부분은 24:15~28절까지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거기에는 유대에 있는 자들’(16)이라는 표현과 안식일(20)’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염두해 두시고 하신 말씀이다.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유대인들이 해야 할 일과 믿는 이방인들다시 말해 교회가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일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4장은 종말의 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다(24:15~28)는 것이고, 믿는 이방인들인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다(24:32~51)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다(24:15~28). 그것은 첫째, 그때가 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것둘째,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해도 절대 믿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 우리가 지난 2주동안 살핀 말씀들 즉 깨어있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라는 말씀은 믿는 이방인들 즉 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달란트의 비유는 모두 믿는 이방인들 즉 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더불어 확인할 수 있다.

 

 

3)종말의 때에 있을 모든 민족들(열방, 열국)을 위한 말씀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은 주님 재림의 때에 과연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일까? 유대인들을 위해 주신 말씀인가 아니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신 말씀인가?

답은 본문에 정확히 나와 있다. 오늘 본문 말씀(25:31~46)에 보면, 이 말씀은 모든 민족(파스 호 에쓰노스=all the nation)에게 주신 말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민족이라는 글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마24장과 28장에 그대로 나온다.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불신 이방민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들에게 복음이 증거될 때 그때 끝이 온다고 했기 때문이요, 우리 믿는 교회가 받은 사명은 바로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때까지 살아있으나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위한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재림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단 두종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도망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며, 또 하나는 믿지 않는 이방 민족들이다.

예수님의 지상재림 전에 공중재림이 먼저 있을 것이다. 이 때에 모든 믿는 자들은 부활하여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먼저는 죽은 믿는 이들이 부활하여 휴거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때까지 살아있는 믿는 이들의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고 공중으로 휴거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믿는 성도들 및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게 되는데(19:11~21), 그 때에 지상에는 믿는 자들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고 오직 도망친 유대인들과 불신 이방민족만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민족불신 이방민족을 가리키므로, 이방민족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이때 그 불신 이방민족도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한 종류는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며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방인들이 있을 것이고, 또 한 종류는 믿지 않는 이방인이지만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상 재림의 때에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지상에 오시는데, 그때에 자신의 입에 있는 칼로 모든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아마겟돈에서 물리치신다고 계19장에 기록되어 있으니, 주님의 지상재림시 살아남아서 양과 염소의 심판을 받을 자는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있는 이방인으로서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않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양과 염소의 심판을 받을 대상은 적그리스도를 추종하지 않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다. 이들이 주님 앞으로 불려 나갔다. 그때 일어난 심판의 사건이 오늘 본문인 것이다.

 

참고로, 휴거되어 올라간 믿는 성도들(교회) 중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고 천년왕국의 때에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3년반의 극심한 환난의 때에 적그리스도를 피해 도망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지상재림 후에 펼쳐질 천년왕국에 제사장으로 참여할 것이다(8:20~23, 20:6).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있는 불신이방민족 중에 적그리스도를 추종하지 않는 자들 중의 일부가 양이 되어 천년왕국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4)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심판이 왜 필요할까?

그것은 주님재림 직전에 후3년반의 극심한 환난의 때에 불신 이방민족이 도망쳐서 살아 남아있는 유대인들과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교회)을 어떻게 했는지가 관건이다.

주님은 도망쳐서 살아 남아있는 유대인들과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교회)를 가리켜 본문에 내 형제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으로 주님의 형제이고,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주님의 형제들이다(40, 45).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주님은 그때에 주님의 형제들을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피해 도망치고 고난을 받는 자들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후3년반의 적그리스도 치하에서 어떤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35~36에 나와 있다.

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며 지낼 것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나그네처럼 도망다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병이 들었으나 66표가 없기 때문에 병원치료도 받지 못하고 지낼 것이며, 어떤 이들은 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불신자들 중에는 이들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갖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도와줄 자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들을 도와준 것이 예수님을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심판석상에서 그들의 증거에서 드러난다(37~39).

25:37-39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하지만 비록 적그리스도를 추종하지는 않지만 고통받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는 불신 이방인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언제 주님을 자신들이 돌아보지 아니했었느냐고 따질 것이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고통받는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나 자신이다. 이는 곧 9에서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다.

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렇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교회가 예수님의 몸인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저주를 받아 주님의 곁을 떠나 마귀와 그의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영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정말 고통받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줄 선한 이방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지 않고,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으면서도 고통받는 유대인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줄 것이다. 주님은 그 사실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복을 받을 자들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몸된 자들을 돌보아주는 그들을 위해 천지창조때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된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천년왕국이다. 그들은 그 나라에서 분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교회처럼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특권만을 얻는 것이다.

참고로, 교회(믿는 이방인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창세전에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하게 된다(1:3~5, 11)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참고로, 이들도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에는 사탄의 미혹가운데 다시 한 번 던져져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후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만이 새하늘과 새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20:7~10).

 

 

 

4. 결론

양과 염소의 심판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인류최후의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것과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된 자만 구원받는다라는 신약의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창세 이후로 헐레벌떡 천국을 예비하신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또한 마24-25장에 나오는 재림의 시기에 천 년의 오차를 가져오고 만다. 다시 말해, 24-25장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재림직전과 전후에 있을 일들에 관한 말씀인데, 본문을 인류최후의 심판으로 해석하다보면 천 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본문의 정황을 맞춰서 해석해야 하고, 단어도 본문에 나와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모든 민족예수님의 지상재림직전에 살아남아 있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 중에서 적그리스도를 추종하지 않는 이방민족임을 알 수 있다.

 

 


2012418()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둘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3) 마리아의 도유사건과 마지막 만찬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207장 귀하신 주님 계신 곳

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

449장 예수 따라가며

[말 씀] 26:1~30(신약 45)

[키워드]

4차수난예고, 산헤드린 공의회, 대제사장들, 백성의 장로들, 십자가, 유월절,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 마리아, 향유, 옥합, 예수님, 가난한 자, 가룟유다, 30, 넘겨줌, 배반, 무교절, 유월절, , 포도주, , 성만찬, , , 감람산

 

1. 서론

26장부터 27장까지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연속되는 성 고난주간에 관한 기록의 일부로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강화(5-7, 10, 13, 18, 24-25)중에 마지막 강화인 감람산 강화 이후에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전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마261-30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을 하신 화요일 말미에서부터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바로 전날인 목요일 밤까지의 행적을 집중보도하고 있는 부분이다.

 

 

 

2. 예수님의 4차수난예고 및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예수 살해 음모(26:1~5, 14:1~2, 22:1~2, 11:45~54)

26:1~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4차로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하시는 내용 및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1)예수님의 4차 수난 예고(26:1~2)

26: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배반당하리라, 넘겨지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강화 중에 마지막 강화인 감람산 강화를 다 마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4차로 당신의 수난받으실 것을 예고하신다.

그런데 3차예고와는 다른 사항이 하나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유월절이라는 단어. 예수님께서는 바로 유월절날에 죽임당하실 것이며, 유월절의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연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고전5:7).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서 팔리리라라는 단어는 파라디도미의 현재 수동태로서 반드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팔리우시는 것이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미 만세전부터 계획된 일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2)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의 살해 음모(26:3~5)

26:3-5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바로 그 때에 동시에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임시 산헤드린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원래 산헤드린 공회의 정식모임은 백성 누구나 볼 수 있는 성전 밖의 남쪽에 있는 가지트공회당에서 열렸었다. 하지만 그날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 안뜰에서 비상 회의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식모임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특별히 모인 임시적으로 비밀스러운 회합이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71명의 유대 최고재판 기구였다. 그런데 그 날은 가장 의롭게 재판해야 할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한 교활한 술책을 공모하여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전에 일어난 나사로의 부활사건예루살렘입성 사건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2가지를 결정했다.

첫째,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 없애버리자.

둘째, 그러나 2일 뒤로 다가온 이번 명절(유월절)에는 죽이지는 말자. 왜냐하면 백성들이 소요가 일어나면 안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데에 쉽게 동의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수차례의 논의 끝에 이번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 의한 폭동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의 계획과는 갑작스런 가룟유다의 제안(26:14~16)에 의해 그들의 계획은 수정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갑자기 그 명절에 십자가에 죽임당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일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3. 문둥이 시몬집에서의 마리아 도유사건과 가룟유대의 배신(26:6~16, 14:3~11, 22:3~6, 12:1~8, 참고 눅7:36~50)

 

1)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마리아의 도유사건(26:6~13)

 

.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태기자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가룟유다의 배신 앞에 기록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리지만, 주님을 배반하는 자는 돈 몇 푼에 주님을 팔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날은 종려주일 하루 전날인 토요일,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12:1).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된 눅7:36~50의 사건과는 다른 사건이다.

왜냐하면 두 사건은 시간과 장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7장의 사건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26장의 사건고난주간 전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베다니의 시몬나병환자였으나 그때에는 이미 고침받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가 격리되지 않고 함께 그 집에 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즉 베다니 나사로의 부친인지, 아니면 마르다나 마리아의 남편인지 아니면 3의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집에서 도유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은 누구인가? 그것을 행한 자는 요12장에 의하면,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였다(12:3). 그런데 그 여인이 아주 비싼 나드 향유(14:3) 한 병을 가지고 왔는데, 호리병처럼 생긴 그 주둥이를 단번에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자 그 향유가 온 몸을 따라 발까지 흘러내렸다.

 

 

. 제자들의 반응은?(26:8-9)

26:8-9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그러자 제자들이 분개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판다면 그 가치가 300데나리온 어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행위가 허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는 노동자가 1년동안 벌어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 여자가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내놓기만 해도 되는 것을 왜 깨뜨려서 다 허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12제자들마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누가 분개했으며, 왜 분개했는지 그 숨은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에는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는 다름 아닌 가룟유다였고(12:4~5), 그 목적은 돈궤를 맡은 자였기에 그것의 일부를 훔쳐가려고(착복하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12:6)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마리아의 도유사건은 진정 허비인가? 이 여인의 행한 일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26:10~13)

26:10-13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아니하기 때문이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세상)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의 도유사건은 예수님을 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표시였는데, 제자들에 의해 졸지에 천박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왜곡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여인에게 가미된 심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한 일에 대해 바른 관점을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겠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육신으로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이요. 둘째, 그 여자가 행한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예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내게 될 때, 통상 부어졌어야 할 예수님의 몸에는 향유가 부어지지 아니했다(16:1~4, 23:56, 24:3). 그러므로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의 죽을 몸에 향유를 부은 셈이었다.

주님은 그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녀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행한 것은 그 어떤 행위라도 가치없는 것이 없으며, 주님을 위해 소비되는 모든 것들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값진 것이라는 점이다(7:44~48).

7:44-48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으로 결국 예수님의 섭리를 이룬 과정에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특별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 중에서 누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는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무서워서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이 일평생 결혼자금으로 준비한 어마어마한 분량의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것이었다.

죽은 자에게 향유를 붓는 일은 유대인의 관습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무엇인가 행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좋게 평가해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허비가 아니라 가장 값진 것이었다고 평가해주신다. 이것을 잊지 말자.

그녀의 행위는 그녀가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표시였다. 그분에게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친(?)인 시몬의 나병을 치료해주셨을 뿐만 아니라(가정), 자신의 친오빠가 죽었는데 4일만에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2)가룟유다의 배신(26:14~16)

26:14-16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가장 총애를 받고 회계를 담당했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다. 주님을 돈으로 흥정하고 있다. 어찌 이런 행동을 그것도 예수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자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한 여인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모든 재산을 주님께 바치고 있는데, 한낱 은30(한 사람의 노예 몸값 = 노동자의 3~4달치 월급, 21:32)을 벌기 위해 자신의 스승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팔게 되었을까?

첫째,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돈을 벌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면 왕국을 세워서 무슨 자리 하나라도 주셔야 하는데, 말씀하시는 것은 자꾸만 당신이 죽임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근본적인 것은 마귀가 그를 붙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사단이 벌써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13:2).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 일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결정을 번복하고 산헤드린공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넘겼을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즉 겟세마네동산의 기도처에서 입맞춤으로 배반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것이요, 예언을 이루심이니, 11:12의 예언의 말씀을 이룬 것이 되었다.

21: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4. 유월절 최후만찬준비와 만찬도중 가룟유다의 배신 예고 및 성만찬 규례제정(26:17~30, 14:12~46, 22:7~23, 13:21~30, 참고, 고전11:23~34).

 

 

1)유월절 만찬 준비(26:17~19).

주님은 자신의 (카이로스)가 이른 줄 아셨다. 카이로스사람이 결단해야 할 중대한 상황이나 인간의 결정이 영향을 미치는 개별적인 기간 등의 특별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때를 지칭한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시간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특별한 때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속을 위해 희생을 결단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시켜, 유월절 식사를 준비시킨다.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면 그 집 주인이 큰 다락방을 유월절 객실로 내어줄 것이라고 하셨다(22:7~13).

아니나 다를까 그런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익명의 주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까불지 말라.

 

그런데 그 날은 유월절날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니산월 14()이 아니라, 니산월 13()이었다. 주님은 유월절 하루 전날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때 제자들은 유월절을 준비하는 데,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어린양의 고기는 준비되지 않았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도 어린양의 고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2)가룟유다의 배신 예고(26:20~25)

저물 저녁의 시간 곧 오후6시경에 주님은 유월절 음식을 드셨다. 무교병의 떡과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누가 자신을 팔게 될 것인지를 언급하셨다.

주님과 함께 떡을 먹기 위해 무교병으로 초가 섞인 스프을 찍고 있는 12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산헤드린 공의회에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죽겠지만,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사람은 존재 자체가 곧 비극이라는 속담까지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나는 아니지요?”라고 가룟유다가 말했다. 주님은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다. 그는 곧 나갔다. 다른 제자들은 그가 유월절과 관계된 어떤 문제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겟세마네동산으로 대제사장의 하속과 군인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그 속에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이다(22:3, 13:27)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러함으로 41:9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하늘에서 파송받아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그분의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된 가룟유다, 우리라고 다르겠는가?

누구든지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10:12). 주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주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3)성만찬 규례 제정과 찬미(26:26-30)

26:26-30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예수님은 그날밤 유월절 기념의식성만찬 의식으로 새롭게 제정하신다. 새 언약을 제자들과 맺으신 것이다. 그것은 그날 유월절 식사로 함께 먹던 떡과 포도주에게 새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첫째, 떡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다(6:35, 14:6).

둘째, 잔은 죄사함을 받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님의 피새 언약의 피(31:31)라고 하셨다.

이로 인해, 유월절 음식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었다.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그 식사 이후 예수님은 죽으셨기 때문에 포도주를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제자들과 함께 마시는 날까지는 다시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14-17장에 기록된 몇 가지 말씀(천국처소의 약속, 기도응답의 약속, 보혜사 성령의 약속,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사랑에 대한 교훈, 부활승천예언,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을 더 하시고, 115-118할렐찬송을 부른 다음, 감람산으로 가신다.

 

 

 

5. 결론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실 것에 대한 구약 예언을 성취하신 일이다.

둘째, 인간의 어떤 계획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헌신은 절대로 그것을 허비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가장 크고 귀한 경배의 표시이다. 하지만 세상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요 낭비로 보인다. 우리 중에 주님께 헌신하여 충성하는 성도를 왜곡시키고 뒤에서 깍아내린 일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드리지만, 주님을 배반하는 자는 주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만 채운다.

다섯째, 어디든지 엘리야시대처럼 주님께서 숨겨놓은 7천명의 주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께 쓰임받는 유일한 사람처럼 착각하지 말라.

여섯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되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댓가)을 지게 된다.

일곱째, 어떤 작고 약한 것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만 귀한 것으로 바뀐다.

여덟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전부다. 그 분은 그분의 몸과 피를 전부 다 주셨다. 그것은 그분의 생명이었다.

아홉째,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어 죄사함을 받으며, 예수님의 살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2012425()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셋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4) 겟세마네기도와 베드로의 부인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430장 주와 같이 길가는 것

216장 성자의 귀한 몸

[말 씀] 26:31~56(신약 46)

[키워드]

실족, 배반, 베드로, , 부인, 겟세마네, , 시험, , 산헤드린, 공회, 가룟유다, 입맞춤, 칼과 몽치

 

1. 서론

26장부터 27장까지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연속되는 성 고난주간에 관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강화(5-7, 10, 13, 18, 24-25) 가운데에 마지막 강화인 감람산 강화 이후에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마26:31~56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버림당할 것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린 것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고 제자들이 흩어지는 장면에 대해 함께 공부할 것이다.

 

 

 

2. 제자들의 배신과 도주 및 베드로의 부인 예고(26:31~35)

(병행문단, 14:27~31, 22:31~34, 13:36~38)

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성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출발하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나로 인하여 실족하여 넘어지리라) (왜냐하면)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날 밤에 주님은 예루살렘에 다윗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잡혀가셔서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것 때문에 실족하여 넘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지켜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그만 자기들도 잡혀갈까봐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버리게 되는 이유그들의 연약성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구약성경(13:7~9)의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을 위로하신다. 주님의 우울한 예언은 이미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그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요, 예수님은 그 예언의 길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이란 자신이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결코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실로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까지도 주님이 무능하고 약해서가 아니라 다 하나님의 예언과 섭리에 따른 결과임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더욱이 주님은 우리가 실족해 넘어진다해도 우리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갈릴리로 찾아오실 것을 예언하신다. 주님은 죽지만 부활하게 되면 다시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미리 언지를 주시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정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시고 힘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고기와 떡을 준비하여 제자들의 아침식사를 먹여주시고 있다.

그때였다. 베드로가 말한다.

26: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단 한 순간이라도) 버리지(실족하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이 밤에) (2)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비록)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이 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여 넘어질 것이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무어라 말하는가? 다른 제자들을 다 주님 때문에 혹 실족할지라도 자기자신만큼은 절대(한 순간이라도)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찌 되었는가? 실족했다. 그는 넘어졌다. 그는 주님이 잡혀가시는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따라갔지만 그날 밤에 맹세의 입술이 채 마르기도 전에 결국 3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철저하게 부인했고, 맹세했고, 나중에는 저주까지 서슴지 않았다.

참 믿음은 어떠한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다.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 아마 베드로는 자신이 수제자라는 것 때문에 더 장담했을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날 밤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이다. 왜 주님은 그 날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셨을까? 그것은 그가 앞으로 자신이 행하는 일로 실족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가 실족할까봐 안전장치를 늘 해 주시려 한다. 그러므로 자주 넘어지지 말라.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이가 아니라 우리를 세워주시는 이이시다.

 

 

 

3. 겟세마네 고뇌의 기도와 제자들의 태만(26:36~46)

(병행문단, 14:32~42, 22:39~46)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밖의 동쪽 골짜기를 지나 한적한 겟네마네 동산으로 가신다. 그리고 임박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피땀을 흘리시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신다.

이때 주님께서는 3명의 제자들만을 데리시고 가시어 기도하기 전에 그들에게 당부한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생겼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그리고 예수님은 얼굴에 땅에 대시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것은 주님께서 받아야 할 잔이 자신으로부터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십사하는 것이었으나 주님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위하는 기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분이 마시지 않고는 안 되는 잔이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참고로, 이 말씀을 하실 때, 세례로 구분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이 고난죽음이지만(10:37~39), 만을 이야기할 때에는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오는 죽음까지 포함한다(20:21-23).

20:2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의 영광의 자리 즉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없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때 3명의 제자들은 어찌하고 있었는가? 자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고, 기도하고 있으라. 마음이 원이다마는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은 그렇게 3번 기도했다. 그리고는 기도를 마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어라. 보라 그 시간이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 안으로 넘겨지게 될 것이다. (조금 있다가)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기도를 배울 수 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첫째,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기도에 성공했는지 안했는지는 기도를 끝마친 다음에 알 수 있다.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도에 성공한 것이다. 셋째, 기도에 실패하면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깨어 있지도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시험 안으로 들어갔다. 즉 그는 실족한 것이다.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고난과 죽음이 두려워 그는 주님을 부인했다. 그가 시험에 들었다는 말은 그가 마귀의 손아귀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마귀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싶은가? 기도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으면 된다.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도 주님을 부인할 날이 꼭 올 것이다.

 

 

 

4. 예수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26:47~56)

(병행문단, 14:43~50, 22:47~50, 18:3~12)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아직 계실 때에 배신자 가룟유다의 인도를 받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하수인에 의해 체포당하신다. 그때 로마의 병사들은 가지고 왔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보낸 하속들은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왔다. 마치 흉악범을 체포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때, 배신자 가룟유다의 흠흉한 입맞춤을 보라. 그의 입맞춤은 캄캄한 밤중에 예수님이 누군지 잡아가기 쉽도록 하기 위한 군호였다. 랍비여, 샬롬 그의 인사는 가증한 인사다. 사랑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주님을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를 뿐이다. 하속인들이 착오없이 일을 하라고 하는 싸인일 뿐이다.

이때 혈기찬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려 대항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칼을 꺼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다. 당시 베드로 외에도 칼을 가진 자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베드로는 왼손잡이였다.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가 잘려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붙혀주시면서 순순히 체포에 응하신다. 하지만 주님은 대명제 칼을 취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 말씀을 더 하신다.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는 것은 자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경을 이루기 위함인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12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부릴 수가 있다. 한 군단이 보병 6천명에, 기병이 120명이었으니, 12군단이라고 함은 72,000명의 보명과 1,440명의 기병과 같은 하늘의 군사들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군대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묵묵히 잡혀가신다. 왜냐하면 그래야 구약성경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죄인들에게 팔리우고 친구에게 배반당하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한다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잡혀가야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이 그때인 것을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성전에서 대낮에 공공연하게 대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지만 그들은 자신을 체포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새벽 어두운 밤에 마치 범죄자를 잡듯이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고 몰래 자신을 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결국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밝히신다.

그러자 예수님의 체포에 놀란 제자들은 각자 신속하게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만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도망치고 말았다.

믿음이 없는 자는 권력을 붙든다. 그리고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것이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을 팔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 자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의 행위라도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 아나라면 주님은 허락하지 않는다. 칼은 칼로 망할 뿐이다. 복음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을 믿는 자는 권력과 무력을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사명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무기력하게 보인다해도 그것은 결코 무기력한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때가 아니면 대낮에 활동해도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지만, 때가 되면 새벽미명에도 사건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심었으면 거둘 때가 있기 때문이다. 때를 아는 것이 능력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때를 따라 반응하라. 너무 일찍 서두르면 익지 않은 곡식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늦으면 익은 곡식도 거두지 못하고 버려지게 된다. 주님의 때를 아는 영적인 사람이 되라.

 

201252()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넷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5) 공회재판과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행보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말 씀] 26:31~27:10(신약 47)

[키워드]

대제사장 가야바, 안나스, 안뜰, 거짓증거, 인자, 신성모독, 베드로, 여종, 맹세, 저주, 부인, 가룟유다, 자살

 

1. 서론

26장부터 27장까지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연속되는 성 고난주간에 관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강화(5-7, 10, 13, 18, 24-25) 가운데에 마지막 강화인 감람산 강화 이후에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마26:31~27:10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잡혀가 산헤드린공의회에서 사형언도를 받으신 것(26:57~68)그 시간 대제사장의 집에 몰래 들어간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장면(26:69~75) 그리고 예수님의 이송과 가룟유다의 최후(27:1~10)에 대해 함께 공부할 것이다.

 

 

2. 산헤드린공의회의 심문과 사형결의(26:57~68)

(병행문단, 14:53-65, 22:54-55, 63~71, 18:12~14, 19~24)

1)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열린, 불법적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심문(57~64)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집에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신다. 당시 산헤드린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71명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최고의결기구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의결기관인 동시에 법원으로서 중앙공회지방공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공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중앙공회 즉 중앙의 산헤드린으로서 유대의 최고법원이었다. 공회의 의장은 대제사장(당시 가야바)이었으며, 죄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로마치하에는 로마의 허가에 의해서만 사형집행이 가능했다.

그런데,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공식심문을 받기 전에 그의 장인이자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에게 먼저 끌려가서 심문받으셨고, 가야바(당시 산헤드린공의회 의장)는 그의 결정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감당했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때에 베드로스승예수를 향한 걱정과 자신의 신변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어떤 결정을 받으실지 예의주시하기 위함이었다.

 

중앙법원인 산헤드린은 많은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지만 예수님의 죄를 입증할 만한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증거를 찾아도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최후수단으로서 공회가 매수한 두 사람거짓진술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죄판결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율법상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7:6).

그러자 당시에 대제사장이자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가야바가 직접 예수님을 심문하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짓는다고 말했다고 하는 두 명의 거짓진술에 대해 예수님의 의견을 묻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울 요량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가 제대로 말했으며, 장차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구름을 타고 오실 것 즉 심판주로 재림하실 분임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음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셨으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인지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 결정을 내리는 산헤드린공의회(65~66)

이에 대제사장 가야바는 끌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자기의 겉옷을 찢으면서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규정하면서 공회원들의 생각을 묻는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다 사형에 해당하다고 결의하기에 이른다(24:11~16).

그런데 원래 산헤드린공회는 유죄선고를 심문당일에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날 불법을 자행한 것이다.

 

3)예수께서 공의회원들에게 폭력과 조롱을 당하시다(67~68)

그러자 공의회원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리며 자신을 친 자가 누군지 알아맞춰 보라고 하면서 온갖 모욕과 수치를 주며 조롱한다.

 

4)영적 교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않는 자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은 결국 다 부패하고 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행한다. 그들은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자들을 보면 분노한다. 그리고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라고 준 권력을 사용해 오히려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고 조롱하다가 결국에는 죽이는 일까지 행하고 만다. 그러고도 자신은 가장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칭함받기를 원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결국 어찌 되었는가? 그 때의 산헤드린 공의회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민족 전체까지 함께 저주를 받기에 이르른다. 아니 그 나라와 민족이 흔적조차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그분을 배척하며 그분을 죽인 죄가 어디로 사라지겠는가?

참 믿음이란 주님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주님을 높이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려하지 말라. 주님이 나를 높여주시는 그 날까지 잠잠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고, 죄없는 사람도 죽이며, 잘못된 판단을 영원히 오점으로 남기게 된다. 그 결국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이다.

 

 

 

3.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그의 통곡(26:69~75)

(병행문단, 14:66~72, 22:56~62, 18:15~18, 25~27)

1)그래도 끝까지 주님의 따라가는 베드로(58, 18:15~16)

이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바깥뜰까지 들어간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는 시몬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문앞까지 간다. 그런데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문 밖에 있었다. 그때 요한은 문지키는 여자를 불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도록 한다.

 

2)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69~74a)

그러자 거기에 있던 두 명의 문을 지키는 종들의 의심의 말에 베드로는 각각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에 가서는 맹세와 함께 부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사람즉 제3자로 표현한다. 하지만 조금 후에는 곁에 섰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한 패라고 하자 베드로는 이번에는 저주로 맹세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로 부인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인했다(70), 하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며 부인했다(72). 그리고 세 번째에 가서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74).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26:34)을 아는가?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베드로는 깨어 있어야 했지만 깨어있지 못했다. 기도하라 하였지만 기도하지 못했다. 결국 베드로는 시험에 들고(실족해서 넘어지고) 말았다. 정말 자신의 입으로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아니었던가? 정말 생명걸고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장담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다가오자, 비겁하게 예수님을 배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3)자신의 비겁함에 결국 통곡하는 베드로(74b~75)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주님을 부인할 때 닭이 울었다고 전한다. 주님은 그때 베드로를 보셨다(22:61). 그러자 베드로는 몇 시간의 주님의 예언이 생각나서 대제사장의 집 밖으로 나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한편, 베드로의 이런 태도가룟유다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배신한 후 후회는 했으나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으며, 끝내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영원히 놓친 반면에(27:3~5), 베드로는 비록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철저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얻고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4)영적 교훈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의 위협이 닥치면 주님까지도 모른다고 배반할 수 있다. 참 믿음이란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선, 기도를 쌓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주님을 모른다고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우리의 고백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결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 만약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려면 기도할 기회가 있을 때에 기도하라. 주님은 베드로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에게 권면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라(26:40~41)” 하지만 그때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주님을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곡일 뿐이다.

 

 

 

4. 예수님의 이송과 가룟유다의 최후(27:1~10)

1)산헤드린공의회가 예수 사건을 총독 빌라도에게 이첩하다(1~2)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 법에 의하면, 해가 진 이후에 재판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절차상 하자가 없도록 날이 밝자마자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님에 대한 유죄판결을 공식적으로 내린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당시 실제 사형집행 권한을 가진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다.

한편,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인가? 그는 유대의 제5대 총독으로서 A.D.26~36년까지 10년동안 유대를 통치한 자다. 그의 사령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그는 실질적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행사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 자주 들렀다. 그는 후에 사마리아 대학살 사건을 일으켰으며, 전설에 의하면 이로 말미암아 비엔나로 추방당하여, 2년 후에 칼로 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날이 밝아서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그들의 적법성을 대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의회의 규정에는 첫째, 유죄판결을 회의 소집 당일에 내려서는 아니 되며, 적어도 그 다음날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었고, 둘째, 유죄판결을 내린 날에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산헤드린공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적어도 3가지의 불법을 자행했던 것이다.

 

2)가롯유다가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자살하다(3~5)

유다는 예수님께서 유죄판결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기는 했지만 그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산헤드린 공의회에 은 30을 도로 갔다주며 자신이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다고 그들에게 말한 다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의회는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고 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다가 받은 은전들을 성소에 던져넣고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

사도행전 1:18에 의하면, 그는 높은 곳에서 땅으로 떨어져 배가 터졌고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다고 전한다. 이는 그가 나무에 줄을 달아 목매아 자살했지만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그의 몸이 땅의 날카로운 부분에 부딪혀 배가 터진 것이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그 흩어진 돈을 모아다가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이방인들이 묘지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룩한 성전고에 넣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합당한 일을 했다면 어찌 그 돈을 성전고에 넣지 못하겠는가?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곧 잘못을 행한 것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3)가룟유다의 사후처리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행동이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임을 설명하다(6~10)

이 일도 성경을 응하려 함이니, 구약성경에 11:12~13과 렘18:3,32:8~14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30에 팔리는 것까지, 그 돈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값으로 쓰여지는 것까지 구약의 예언의 성취였던 것이다.

11:12-13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32:8-14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9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0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1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14 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4)영적 교훈

첫째, 사탄마귀를 따르게 되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고 만다.

당시 가장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을 대신하는 산헤드린 공회가 오히려 불법을 행하여 예수님을 유죄판결하고 사형을 결의하고 집행하고 만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둘째,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이전의 삶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의지적인 결단을 포함하는 것이라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만 하는 것은 회개(메타노에오)가 아니다. 회개와 후회는 다른 것이다. 참된 회개(메타노에오)는 의지의 변화에 이은 삶 자체의 변화까지 포함하는 의지적 결단인 것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만으로는 회개에 이를 수 없다. 가룟유다의 뉘우침(후회=메타멜로마이)는 지나간 일에 대한 감정적 후회와 생각의 변화에만 그쳤을 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으며, 그 삶 자체의 완전한 방향 전화 내지는 의지적인 결단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셋째, 주님을 배신하는 자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도 다 버림을 받는다.

주님을 배반했던 가룟유다를 보라. 그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공의회에도 동일하게 버림받았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말라. 목숨이 위험해도 주님을 시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심판 때에 주님도 우리를 시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넷째, 사탄에게 너무 자신을 내어주게 되면 회개의 기회도 잃게 된다.

가룟유다는 사탄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자다.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사탄이 생각속에 잠시 스쳐지나갈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내 속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사탄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사람은 결국 회개의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자살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섭리에 대한 정면도전이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가룟유다의 자살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헌신짝처럼 버린 불신앙의 몸짓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야할 곳으로 가고 말았다.

 

 

2012516()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여섯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6) 빌라도의 심문과 십자가의 처형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544장 울어도 못하네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시는

[말 씀] 27:11~56(신약 49)

[키워드]

총독, 빌라도, 유대인의 왕, 바라바, 전례, , 빌라도의 아내, 그리스도, 군병들, 십자가, 관정, 홍포, 골고다, 강도, 시몬, 구레네사람, 이스라엘의 왕, 어둠, 개기일식, 지진, 신포도주, 성소휘장, 부활, 백부장, 여인들

 

1. 서론

26장부터 27장까지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연속되는 성 고난주간에 관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강화(5-7, 10, 13, 18, 24-25) 가운데에 마지막 강화인 감람산 강화(24~25) 이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마27:11~56까지의 말씀은 로마총독 빌라도의 심문십자가의 처형사건을 담고 있다.

 

 

 

2. 빌라도의 심문과 비열한 사형 언도

(27:11~26, 15:2~15, 23:3~5, 13~25, 18:33~19:16)

본문은 빌라도의 예수 심문과 무리들의 요구에 영합한 빌라도의 사형선고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2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셨는데, 첫 심문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수많은 비방과 고소들을 당하면서 자기변화를 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시기심 때문에 고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그들의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사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마저도 꿈(악몽)을 통해 예수님이 의로운 자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동족인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방인이었던 빌라도의 아내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때문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백성이 원하는대로 죄수 한 사람을 특별사면하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놓아주고자 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무리들의 격렬한 요구로 인해 결국에는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고 만다.

당시 바라바는 누구였는가? 그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였으며(15:7), 그는 악명 높은 살인자였으며 강도였다(22:19). 그런데 그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즉 빌라도는 그 누구보다도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지닌 음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자였다. 하지만 구태여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과 극단적인 갈등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으며, 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군중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폭동을 우려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고 만 것이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유대군중들의 돌변한 모습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호하던 모습과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으로(21:8~9), 변질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빌라도이스라엘 백성의 태도.

먼저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자. 그는 예수를 처형시키도록 내어 주면서도 유대관습을 흉내내어 손을 씻음으로서 자신은 예수의 처형과는 무관함(책임이 없다)과 무죄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자신의 무죄를 강조한다해도 당시 최종적으로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던 그가 예수의 무죄하심을 알도도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었다는 것은 공의를 집행해야 할 자로서 직권을 배임한 처사,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이 분명하다. 즉 그는 모든 불의한 자의 대표로 예수의 처형에 관여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무죄주장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인 책임자로 규정되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저주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의 경솔한 태도를 보자. 그들은 예수를 죽인 책임을 자신과 자손들이 떠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이는 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의 모습을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예수님께서 죽고 난 다음에 요나의 예언처럼 40년 뒤인 A.D.70년 예루살렘 멸망당시 110만명이라는 엄청난 수가 학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무려 히틀러에게 600만명이나 학살당하는 가히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들의 이 경솔하고도 무책임한 말은 예언처럼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준 교훈을 요약해보자.

첫째, 정치적인 인기와 야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시기심과 질투를 가진 자는 결국 사탄의 노리개가 될 뿐만 아니라 엄청나고 중한 심판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인류역사의 가장 저주스러운 흔적을 남기고 만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무책임한 판단과 발설은 결코 없어지거나 지워지지 아니하고 그 대가가 반드시 지불된다는 것이다.

셋째, 저주받기를 자처하는 말은 함부로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자신과 후손에 대한 예언이 되어버려 그것이 결국 그들을 올무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타협을 하게 되어 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도 공명심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귀담아들어야 할 의로운 말과 계시를 버리고 귀담아듣지 않아야 할 불의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믿음이 없으면 당장의 문제에 초첨을 맞출 뿐 후대의 평가를 개의치 않는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하나님의 뜻과 계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3. 예수님의 3중고난 받으심(27:27~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자. 그분은 채찍에 맞으셨고, 조롱을 당하셨으며, 벌거벗겨진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었다.

특히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신 것은 3중적인 고난으로서,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는 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들로 인해 믿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는 것들이었다. 즉 로마군병들에게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시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로마군병들,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강도들에 의해 멸시와 천대와 능욕을 받는 정신적인 고난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서 영적인 고난까지 받으시게 된다.

 

1)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인 고난과 혜택(27:27~31, 15:16~20, 19:2~3)

 

. 육체적 고난

예수님의 육적인 고난은 로마군병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는 유대의 산헤드린공의회에서시작되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묶어 놓고 밤새도록 심문하여 쉬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빌라도의 심문과 더불어 사형언도가 내리자 예수님은 총독관저(브라이도리온, 안토니오 요새)에서 즉각적으로 로마군병으로부터 채찍질을 받으신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40에 하나 감한 태장과 더불어 가죽 끝에 납덩이가 달린 채찍으로 120대 정도를 때린다. 살은 파이고 피투성이가 된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 다음 끌고 가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아버린다. 두 손과 발목에는 대못을 박아버린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고통을 감해지도록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님은 맛보시고는 거절하신다. 왜냐하면 당신이 인류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고통을 다 받으시려 하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 예언들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난에 관한 예언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5322, 69이다.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2:14~18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성취와 혜택

그렇지만 이렇듯 예수님의 고통당하심과 십자가에서 못박히심 때문에 우리가 과연 어떠한 혜택을 받게 되었는지 아는가?

 

첫째, 그분이 육체적인 고통받으심 때문에 우리가 병에서 나음을 받게 되었다(벧전2:24, 53:5).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둘째,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저주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다(3:13, 21:22~23)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셋째, 그분이 십자가에서 헐벗고 목마르고 굶주리셨기에 또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다(고후8:9, 28:48)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28: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2)예수님이 받으신 정신적인 고난과 혜택(27:32~44)

 

. 정신적 고난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로마군병들지나가는 행인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두 행악자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신다.

총독산하 로마군병들은 온 군대(600)를 다 모은 다음,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왕이 입는 옷인 홍포를 입힌다. 그리고 왕이 들어야할 홀대신 갈대를 그 오른손에 쥐게 한다. 그리고 왕관 대신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으며 다시 홍포를 벗긴 다음 그의 옷을 입힌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는 예수님의 옷을 벗겨 제비뽑아 나눠갖는다. 온갖 수치를 다 보게 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양 옆에 두 사람의 행악자도 같이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수님이 죄인으로서 처벌받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예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그렇게 십자가에 가만히 있느냐고 모욕한다. 그때 두 행악자도 예수님을 욕한다.

죄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시어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신 것이다. 어찌 죄인이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에게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

 

. 예언

아래의 5322을 참조하라.

53:3,7~9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22:14~18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성취와 혜택

예수님의 이러한 희롱과 정신적인 고통받으심으로 인하여 대신 우리 믿는 이들은 정신이 온전해지고 죽는 그 순간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는 건강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28:28).

28: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3)예수님께서 겪으신 영적인 고난과 혜택(27:45~56)

 

. 영적인 고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가장 힘겨운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까지 외면당하시고 버림당하는 경험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3시까지 총 6시간이었다.그런데 그 중에서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3시간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구약시대 속죄일에 드려지는 두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16), 한 마리의 양은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의 버림받는 양이 하나 있었다. 무인지경에 이를 때,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진 아사셀양이 버림받아 낭떨어지에서 떨어지듯,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까지 외면당하신 것이다.

그때의 외침이 바로 가상칠언 중에서 4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다. 22:1의 말씀인데,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이다.

2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 예언(예표)

16장에 보면, 회중의 속죄제로 죽어가는 두 마리의 숫염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6:5, 6~10, 21~22). 그중에 한 마리는 성전에서 광야로 퇴출당하여 버림당하는 어린양이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어가고 있음을 예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16:6-10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16:21-22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 성취와 혜택

하지만 예수님의 버림당하심으로 인해 이로 인하여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허물어져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요일4:9~10, 2:13~18)

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 운명 직후에 일어난 일들(27:45~56)

 

1)예수님의 운명시에 일어난 기이한 이적들(51~53)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외치시면서 운명하실 때에 이적적인 2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고 있던 성전의 둘째휘장이 그만 위쪽에서부터 아래쪽까지 둘로 찢어진 것이다(51). 또 하나는 지진이 발생하여 바위들이 갈라졌는데, 그때 무덤들이 열리면서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함으로 밝혀진 것들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다(51a).

27:51a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먼저, 첫 번째 기적으로 둘째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보자. 둘째휘장은 지성소를 가리던 휘장이다(26:31~35, 40:21). 그런데 그것도 그 휘장이 위쪽으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51). 인간이 찢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휘장을 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사람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명하셨다(21:23). 오직 대제사장만이 성결한 몸으로 1년에 1차례 대속죄일에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도록 허용하셨다(16:1~2. 26:33).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보거나 죄있는 상태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경우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소의 휘장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었던 죄의 장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둘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를 이렇게 말했다.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죄를 전가받으시어 죄를 가진 몸으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으니, 자신의 몸의 찢어서 피흘리심으로 죄를 속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또한 여시게 되었다는 말이다. 죄로 막혀있던 하나님과 인간의 장막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모든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죽은 성도의 몸이 부활하다(51b~53)

27:51b-53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두 번째의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는데, 그때에 죽었던 성도의 일부가 몸으로 부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는 이때 벌어진 바위틈으로 예수님의 피가 흘러내려 예레미야 동굴에 감춰놓은 법궤의 속죄소에 그 피가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때 무덤들이 열리면서 죽었던 성도들이 몸으로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망 대신 생명이 왕노릇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성도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성도들의 부활도 이런 식으로 된다는 예표가 아니겠는가?

 

2)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의 고백 및 일부 목격자들의 명단(54~56)

한편,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군병들은 개기일식지진 등의 발생한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고백하기를 예수,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놀렸지만,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인(이방인들, 35~36)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놀랍게도 그 순간을 끝까지 지켜본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아온 자들로서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였던 살로메(예수님이 이모)였다.

누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자인가? 자신의 목숨 때문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자들인가? 끝까지 주님을 지켜본 자들인가? 믿음이 없으면 죽음이 두렵다.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다.

 

 

 

2012523()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일곱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7) 예수님의 부활과 파송대명령(1)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520장 듣는 사람마다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

505장 온 세상 위하여

[말 씀] 27:57~28:10(신약 51)

[키워드]

아리마대 요셉, 부자, 공회원, 예수님의 제자, 빌라도, 세마포, 니고데모, 향품, 침향, 새 돌무덤,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 살로메, 종교지도자들, 로마군병들, 돌문, 천사, 예수, 부활, 갈릴리, 형제들

 

1. 서론

27장 후반부와 마28장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유월절양으로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다음(장례),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셔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부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대명령(지상대명령)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를 끝으로 마태복음 강해가 끝마쳐지겠습니다.

 

 

 

2. 예수님의 장례 및 무덤의 인봉과 파숫군의 배치

(27:57~66, 15:42-47, 23:50~56, 19:38~42)

 

1)예수님의 장례(57~61)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되려고 할 무렵,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속히 무덤에 묻는다.

사무엘의 고향이었던 라마다임 소빔으로 알려진 아리마대(‘높은’) 출신의 부자(25:57)이자,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빌라도가 내어준다.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서 숨은 예수님의 제자이자 선하고 의로운 자였다(15:42-43, 23:50-51, 19:38). 그는 예수님의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시체를 나무 위에 두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려고 속히 시신을 정결한 세마포로 싸게 된다(21:22~23). 그때였다.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한 백 리트라쯤을 가지고 온다(19:39). 그들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을 바른 뒤 세마포로 싸고는, 요셉이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파두었던 동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한다. 그때에 여자들 곧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태기자는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53:9의 예언처럼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예언을 예수님께서 이루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예수님의 장례를 아리마대 요셉이 담당했을까?

그것은 첫째, 그가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요셉이 기근으로 힘들어진 야곱의 전 가족을 모신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예수님의 맞이할 자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산헤드린 공의 회원이었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묻힐 곳은 부자의 묘실이어야 했는데, 그가 바로 골고다 언덕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얼마전에 그곳에 자신의 무덤을 파 두었기 때문이다(53:9). 셋째, 이는 또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할만한 자를 숨겨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엘리야시대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천명의 사람들을 남겨두었듯이, 유대의 온 종교지도자들이 다 타락하여 빌라도의 종이 되고, 메시야를 죽이는데 앞장섰지만 끝까지 가편투표하지 않았던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하나님은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2)무덤의 인봉 및 파수꾼의 배치(62~66)

예수님을 장사하고 나자, 당시 적대세력이었던 대제사장들(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로마경비병을 시켜 3일동안 무덤을 지켰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만약 그 무덤을 지키지 않고 있다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라고 훔쳐가는 날이면, 나중의 속임수가 전의 속임수보다 더 커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자 빌라도는 로마군병 중 일부 네 사람을 파숫꾼으로 붙여준다. 그러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데리고 돌로 그 무덤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놀랍지 않은가? 만약 로마군병이 그 무덤을 지키지 아니했더라면 거짓소문을 만들어냈다고 우겨 예수님의 부활을 우스개로 만들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오히려 나서서 무덤을 지키다가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무리 악한 자의 계교가 교묘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바꾸어 선으로 이용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예수님도 사실은 생전에 자신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예고하지 않았던가!(16:21, 17:23, 20:19). 하지만 로마경비병 즉 파숫꾼의 경비는 예수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을 확증해 줄 뿐이다.

 

 

 

2.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한 천사의 부활고지 및 예수님의 직접적인 출현(28:1~10, 16:1~8, 24:1~12, 20:1~10)

 

1)두 명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음(1)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께 발라드릴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갔다.

 

2)천사가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실을 선포함(2~7)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돌문이 옮겨졌다. 군병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고, 여자들만 남았다. 그때 흰 옷 입은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전해주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 소식을 알리려고 주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요 순종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음부에 빠진 예수님을 그곳에서 건져 올려 주셨. 여기에 나오는 살아나셨다(, , 3, , , )’라는 표현은 사실 단번에 그분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뜻이지, 결코 예수님 스스로 부활했다는 뜻이 아니다 . 예수님을 사망의 진토에서 이끌어 올리신 분은 바로 성부이셨다(6:4, 8:11, 2:24,32, 3:15, 13:30).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그의 부활은 신령한 몸의 부활이었다. 둘째, 그동안 단 한 번도 완전히 정복된 적이 없는 죽음과 음부를 정복한 부활이었다. 셋째,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생명의 부활이었다. 넷째,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고 이제 그의 동생들이 탄생하게금 하는 첫 열매의 부활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전까지는 자신의 제자들을 내 제자들이라고 했으나, 이제는 내 형제들(동생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동생으로 신분이 바뀐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신으로 부르던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3)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직접 나타나심(8~10)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11제자나 베드로가 아니라, 왜 여인들에게 맨 처음에 전해졌을가?

그 이유는 첫째, 그래도 여인들이 끝까지 주님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무덤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지키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신상에 위험이 다가옴을 직감했을 때,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심지어 십자가 아래에는 요한사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들은 언제까지나 예수님 곁에 있었다. 둘째, 좀 더 깊은 뜻은 최초의 인류의 조상이었던 하와가 이룬 범죄의 결과에 대해 다시 여자로 하여금 거둬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 할 것이다(딤전2:13~15)

딤전2:13-15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3. 결론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예수님 당시 가장 예수님을 대적하던 무리들 중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들어 있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 72. 그 모임은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불법기관이었다.

하지만 그 모임의 72명의 사람들 가운데 2명은 주님께서 적법한 때에 쓰시려고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때가 이그레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비율로 본다면 0.028%에 해당된다. 하지만 비록 숫자가 적기는 해도 산헤드린 공의회 가운데에도 미리 심어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록 2명이었지만 그들은 맡겨진 중요한 일들을 성실하게 다 수행해냈다. 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다가 장례하되 자기의 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였으며, 한 사람은 향품과 침향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발라드렸던 것이다.

한편,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주님을 떠나지 말라. 주님을 떠나게 되면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의 소식은 막달라 마리아 등 여자들에게 주어졌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어져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직 베드로요한만이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조금이나마 같이 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인지 여인들의 부활의 소식은 다른 제자보다도 꼭 베드로와 요한에게 향한다. 그래서 그 두 제자만이 빈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정도다.

그렇다. 설령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아야 한다. 나중에 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믿음생활을 잘 해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2530() 수요기도회설교(부활절후일곱째주일)

[제 목] 마태복음강해(48) 예수님의 부활과 파송대명령(2)

[설교자] 정병진목사

[찬 송]

0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

508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말 씀] 27:57~28:20(신약 51)

[키워드]

대제사장들, 장로들, 파숫꾼들, 로마군병들, 거짓, 소문, 유언비어, 갈릴리, 11제자, 오백여형제, 제자, 지상최대명령, 임마누엘

 

1. 서론

27장 후반부와 마28장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유월절양으로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다음(장례),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셔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부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대명령(지상대명령)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오늘을 끝으로 마태복음 강해가 끝마쳐지겠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유대지도자들의 은폐음모와 매수된 로마파숫꾼들의 거짓 소문유포(28:11~15)

 

1)파수하던 군병들의 상황보고와 유대지도자들의 대책회의(11-12a)

여인들이 떠나자 무덤을 지키던 파숫꾼들 즉 로마군병들 중에서 몇 명은 대제사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임시 산헤드린공의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작품은 예수시체 절도설이다. 이 일은 대제사장들이 꾸며냈고, 군병들이 돈에 매수되어 퍼뜨리면서 생겨났다. 다시 말해 유언비어를 날조한 셈이다.

군병들은 대제사장을 찾아가 첫째, 천사가 나타나 무덤의 돈을 굴린 것과 둘째, 지진과 천사의 영광스러운 모습 셋째, 그리고 무엇보도다 예수의 시체가 사라진 일 등의 일체의 사건을 보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아침에 대제사장들인 장로들과 산헤드린공의회를 열어 군병들을 돈으로 매수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2)유대지도자들의 군병들에 대한 매수 및 거짓소문유포사주(12b~14)

산헤드린공의회는 군병들을 매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군병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라고 거짓소문을 퍼뜨리도록 사주한다. 만약 그 일이 총독에게 알려져 문책을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뒷 책임은 자기들이 져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자 생각해보라. 이들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어떻게 군병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도적이 누군지를 보았단 말인가? 만약 그때 보았다면 그때 붙잡아야 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그 밤에 즉시 그 사실을 보고했어야 하지 않은가? 왜 이 새벽에 보고를 하고 있는가?

둘째, 또한 시체가 없어진 이유가 도적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 3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을 이룬 것인지 그들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셋째, 만약 정말로 시체를 도적질해 간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실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을 즉시 체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넷째, 사실 시체를 도난당한 일은 로마군병들이 크게 문책받을 일이요, 참으로 군인으로 그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인데, 어찌 그 부끄러운 일을 스스로 퍼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과정에 의한 부활의 사실(2~4)을 덮어 가리우고 왜곡하기 위해 가당치도 않는 말로서 사건의 전모를 조작했던 것이다.

거짓된 사람들은 진리를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거짓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로 돌이키기 힘들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린다. 그리고 사실을 왜곡하고 심지어 거룩한 돈을 사용하여 사람들까지 매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있는가? 이 일이 지난 50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강림사건은 그들의 얼마나 거짓을 저질렀는지를 확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3)군병들의 거짓 소문 유포(15)

그러자 은전()에 매수된 군병들은 유대지도자들이 시키는 데로 밖에 나가서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어서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도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거짓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마태는 전한다.

유다가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을 배반한 것처럼 군병들 역시 많은 돈에 매수당해 양심을 팔고 있다. 그 돈은 어떤 돈인가? 하나님께서 바친 백성들의 돈이 아닌가? 가장 거룩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피땀으로 바친 백성의 헌금을 이런 일에 사용하고 있다. 군병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목격했으면서도 양심에 따라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돈에 양심이 마비되어 왜곡된 사실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고 있다.

믿음이 없으면 양심을 팔고, 돈에 사실관계까지 묻어버리고 왜곡시킨다. 그리고 거짓을 전파하는 거짓증인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물질은 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재회 및 최후지상명령

(28:16~20, 16:14~18, 24:36~49, 20:19~23)

 

1)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릴리에서의 재회(16~17)

이제 부활 후 천사들의 고지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신다. 그러자 11명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라고 일러주신 그 갈릴리의 한 산으로 간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갈릴리의 지시하신 한 산은 아마 산상수훈을 선포하던 팔복산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옥과도 같은 말씀을 전파하셨던 곳이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늘 기도하던 장소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면서 경배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의심하는 자들은 주격, 남성, 복수형이므로. 그날 갈릴리의 한 산에 모인 오백여 형제들 중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 없으면 보고도 믿지 못한다. 보고도 의심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 어떤 자들이었는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거짓된 소문에 더 짐착할 뿐 현재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2)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 지상 대명령(18~20)

 

. 하늘 안과 땅 위의 권세를 회복하신 예수님(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부활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으셨는가를 먼저 언급하신다. 그것은 하늘 안과 땅 위의 모든 권세이다. 그것도 점차 단계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단 번에받으신 것이다.

그동안 사실 둘째하늘과 땅 위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다(4:4~5). 예수님께서 그 권세를 가지고 있으셨지만 공생애기간동안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두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예수님도 순종을 통해 하늘과 땅 위의 권세를 가진 마귀의 권세를 누르심으로, 사망권세를 깨치고 음부의 구덩이에서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권세는 이제는 사람을 구원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세이다(5:20~22, 30).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이전에도 이러한 권세를 가지셨지만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구원과 심판의 권세를 행사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5:20-22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 안과 땅 위의 모든 권세단 번에 받으셨다. 이는 성부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 ‘그것이 주어졌다’)이다. 그것은 순종의 댓가(5:7~9).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주님의 최후의 명령(19)

주님의 최후의 마지막 명령(지상최대의 명령, 최후의 유언)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제자를 삼는 것(, 마세튜오/명령형, 2인칭, 복수)”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 명령으로서 동사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제자 삼으라(제자로 만들다)”이다. 나머지는 전부는 분사. 제자를 삼기 위한 수단(분사)3가지가 나온다. 그것은 계속해서 가면서(명령분사)’, ‘계속해서 세례를 주면서(현재분사)’, ‘계속해서 지키도록 가르치면서(명령분사)이다. 다시 말해 제자를 삼는 일은 계속해서 가는 것세례를 주는 것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먼저 주님은 (계속해서) ‘가면서’(2인칭, 명령분사) 제자 삼으라(만들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누가 가야 하는가? “너희(2인칭, 복수, 명령분사)”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있는 11명의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들(고전15:6)을 지칭한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이와 유사한 명령이 기록되어 있는 행1:8에 의하면, 명령을 받는 자들이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던 120명의 제자들을 땅끝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복음을 전해들은 자들이 거기까지 다 가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제자삼아야 할까?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족속(민족, 에드네)’이다. 24:14에 나오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에 나오는 그 민족이다. 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

 

이제 두 번째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세례를 주면서는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다. 그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모든 민족이다.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례는 제자를 삼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제자가 되게하려면 세례를 주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밥티죠라는 단어로 물에 잠근다는 뜻이 있고, 죄를 씻는다는 뜻이 있다. 사람에게 세례를 줄 때, 세례를 베푸는 자는 그 사람을 물에 잠근다. 이때 그는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때 또한 그의 죄가 씻겨진다. 그리고 세례를 주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도록 하는 일로 제자를 삼는 것(6:3, 12:50)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려주어야 (2:38, 22:16)을 말하고 있다.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가르치기는 가르치되, 지키도록가르치라고 말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과거에 명령했던 모든 말씀들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가르치되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은 지킬 때까지. 그들은 지킬 때까지는 계속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지키도록’(현재부정사, ‘목적의 의미)이라는 말은 그들을 가르치는 목적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들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계속적으로 말이다.

 

 

.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을 대상(20)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떠나면서 한 가지 귀중한 약속을 하신다. 언제까지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완성 때까지. 죄로 부패한 이 세상이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새로운 세상의 완성 때까지 주님은 그들과 아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보라.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지상최대의 명령을 받고 수행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의 축복은 아무에게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오직 모든 민족을 제자삼는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만이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가?

그렇다. 임마누엘의 축복은 오직 복음전파를 하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자에 주님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 그것은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다(2:1~4).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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