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차 복음사랑방모임_천국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2)_2017-04-27

by 갈렙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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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복음사랑방모임

[일시] 2017.04.27(목) 오후7시
[장소] 동탄명성교회 유아실
[제목] 천국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2)
오늘 저녁에는 지난주에 이어, 천국가는 믿음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나누며, 더불어 믿음과 죄사함의 관계, 믿음과 구원의 상관관계, 지키는 믿음에 대해 함께 공부할 것입니다.

 

제목: 천국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1:15, 24:46~47, 20:21). 회개만으로도 안 되고, 믿음만으로도 안 된다. 회개에는 지은 낱낱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죄된 본성을 회개하는 두 방면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와 더불어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회개만으로는 천국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국가기 위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

 

1) 천국가기 위한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고백(10:9~10)

.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고백(1) 베드로의 신앙고백(16;16)

.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고백(2) 도마의 신앙고백(20:28)

 

.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신앙고백

그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첫째는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뿐인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20:28). 예수께서는 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셨지만 이 세상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최종적인 제사를 드리셨다. 언제 그 일이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일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의 끝무렵의 유월절 날에 십자가 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셨다(12:5~7).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굳이 속죄제사를 통한 인류구원을 행하시려 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속죄제사가 아니면 인류를 죄로부터 구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찾아오도록 운명지워졌음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17). 그 당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하고 말았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기는 지었지만 그들에게 용서함을 받을 기회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스스로 단독적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까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가 깨지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드린 속죄제사를 믿어 죄사함 받기를 바라신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드디어 속죄제사에 착수했다. 우선 속죄제물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속죄제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기 자신이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16:28).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신 것일까?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6:23),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고 정하셨기 때문이다(17:11, 9:22). 그리고 속죄제물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12:5, 4:3,23,28).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고 증거하였으며(9:22), 그리고 사도바울은 인류의 죄값은 오직 죽음(사망)으로서만 처리된다 하였다(6:23).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야말로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하였다(벧전1:19~20).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속죄제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졌을까? 그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합당한 속죄제물로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렸다. 그래야 그는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범죄자가 제일 처음으로 할 일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제물들을 들고 성막(성전)으로 가야 한다. 이때 만일 자신이 평민이라면 양이나 염소를 들고 가면 되었다. 그리고 극빈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가지고 가면 되었다. 혹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족장이 죄를 범했다고 한다면, 그는 소를 가지고 가야 했다(4).

그렇다면, 이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처리했을까? 우선은 첫째, 자신이 직접 그 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제물에 넘겼다. 둘째, 그런 다음 자신이 직접 칼로 제물의 목을 베었다. 셋째, 그러면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았다. 넷째.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그리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다. 다섯째, 이제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죄를 지은 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을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자신이 지은 죄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바로 지은 죄를 없애는 방법이다. 이것은 일반 평민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온 백성이 함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에는 제물을 드리는 절차와 방법이 달랐다. 이때에는 첫째로, 제사장이나 회중의 대표로 선발된 자가 송아지에게 안수하여 공동체의 죄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둘째로, 제사장이나 회중의 대표자가 송아지의 목을 베었다. 셋째로, 그러면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회막(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넷째로, 둘째휘장 앞에 뿌렸으며, 휘장 앞에 있는 향단 뿔에도 발랐다. 다섯째로, 나머지 피는 가지고 밖으로 나와 번제단 밑에 쏟아버렸다. 그러면 제사장과 온 백성의 죄를 용서함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속죄일제사법이라는 것도 있었다(16). 이는 더러워진 지성소와 회막과 향단을 속죄하고,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속죄제사였다. 이때는 첫째로, 제사장이 자기를 위한 속죄제 숫송아지를 드렸다. 그리고 둘째로,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렸다. 그런데 이때에는 속죄제 염소를 2마리 드렸다. 제비를 뽑아서 하나는 회막에서 속죄제로 드렸는데, 이때 제사장은 속죄제 염소의 피를 가지고 회막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서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다. 그리고 나와서 성소에 있는 향단의 뿔에도 그 피를 발랐다. 그리고 향단 위에도 피를 뿌렸다. 그리고 나머지 속제죄 염소 하나는 아사셀(광야의 마귀)를 위해 광야에 보냈는데, 이때 제사장은 속죄제의 머리에 안수하여 온 백성의 죄를 넘긴 다음,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에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광야에 이르면, 그 속죄제를 거기에 놓고 왔다. 이는 죄를 백성으로부터 멀리 떠나 보낸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일 년에 한 번 회막과 지성소와 향단을 속죄하고,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결국 예수께서도 이러한 속죄제사법에 따라 온 인류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4:24) 결코 피흘릴 수도 없었고 죽으실 수도 없었기 때문에(9:22),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피흘려 죽기 위함인 것이다(17:11, 9:22). 성육신은 그래서 필요했다. 사람이 되어야만 피흘려 죽어서 인류의 죄값을 대속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예수께서 나이가 30살이 되셨다. 이는 제사장으로서 일할 나이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셨다. 그리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인데 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죄인도 아니시며 죄를 지은 일도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시면서 일부러 세례를 받으셨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치고 죄없는 속죄제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려 하실 때에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셨다(3:13~17,

그렇다면, 죄를 넘기는 자는 왜 세례요한이어야 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구약의 속죄제사법에 의하면 흠없는 속죄제물이 백성의 대표자에게 안수를 받아야 했다(4:15). 그러므로 예수님도 흠없는 속죄양으로서,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자로부터 죄를 전가받으셔야 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인류를 대표할 만한 사람인가? 그렇다. 당시 세례요한의 직분을 보라. 그는 당시 제사장이었던 사갸랴와 엘리샤벳의 아들로서 태어난 제사장이었다(1:5,13). 뿐만 아니라 그는 선지자 중에서 마지막 선지자였다. 메시야가 이 사람이라고 알려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리라 한 엘리야 곧 선지자의 대표자였던 것이다(11:13~14).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세례요한이야말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로 위대한 자라 말씀하셨고, 최고의 선지자라고 언급해주셨다(11:11). 그렇다. 세례요한은 인류의 대표자가 될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인류의 대표자가 되어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전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되어 죄를 없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15). 세례요한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은 자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자 말리면서, 자신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율법규정상 안수를 통해서만이 인류의 죄가 넘어갈 수 있기에 이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었다. 그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더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1:29)”고 선포하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하루 전날 세례받기 전만해도 예수님은 흠없는 한 마리의 어린양에 불과했지만, 이제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기에,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것을 알려주기 위한 시간이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350가지 이상 예언된 메시야이신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3년반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공생애를 다 마치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속죄제사를 드리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다. 그 장소가 바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바친 장소 곧 여호와의 산이었기 때문이다(22:13~14). 하나님께서 수풀에 준비해 두신 한 마리의 숫양이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레16장의 아사셀염소의 율법규정과 시편22편의 예언에 따라, 3시간동안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으며, 나머지 3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다(16:20~22, 22:1). 이는 레위기 속죄제사의 아사셀이 맞아야 했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6시간이 지났을 때 곧 유월절양에 관한 출12장의 규례에 따라(12:6), 해질 무렵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고는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하늘도 울었고 땅도 울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온 땅은 어둠이 덮었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더니 무덤 문이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있는 둘째휘장이 갈라셨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고 있던 둘째휘장이 갑자기 위에서부터 아래로까지 찢어진 것이다(27:51, 15:38, 23:45). 그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10:20, 2:14). 예수께서는 그때 인류의 속죄를 위한 모든 피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으셨다. 그리하여 인류의 죄는 그날 값을 치르게 되었다. 운명하시던 그 순간 예수께서 이렇게 외치셨다. “다 이루었다(19:30)”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류의 속죄를 위한 모든 값을 다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인류의 속죄를 위한 모든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그날 4천년간 진행되어온 메시야에 대한 속죄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모든 죄는 용서함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2)믿는 것과 죄사함받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부터 교정해야 되는가? 우선적으로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나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야 하는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죄들도 다 용서함을 받는다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살펴보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다 용서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곧 죄사함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죄사함도 동시에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으면서 사함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요일1:9, 17:3~4). 정확한 것은 이렇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4:12).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죄사함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시인해야, 주님께서도 그 시인한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겠는가? 특별히 사도 요한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지은 죄를 용서받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죄를 자백할 때에 예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게 되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 여기를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가...우리의 죄를 사하시며(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 비로소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이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을 동틀어 회개라고 표현한다. 물론 회개라는 개념이 이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바로 회개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지에 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운전의 예를 들어보겠다. 나 자신이 어디 멀리 가려고 할 때에는 보통 이동수단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가용을 이용한다. 하지만 매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 효용성이 떨어질 때에는 재정적으로 충분하다면, 대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전을 배워 자가용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운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운전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운명면허증을 따야 하는 것이다. 운전면허증이 없는 자가 운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가용으로 운전해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는 제일 처음에 운전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와 실습을 잘 해서 어느날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운전해도 좋다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신이 먼 곳으로 이동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운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원리가 죄사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우선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속죄로 인하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운전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어딘가로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듯, 내가 직접 운전해야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지은 죄를 용서함받을 수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죄사함을 받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보내실 메시야를 통한 대속의 방법을 정해주신 것이다(20:28).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법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나 군자라 할지라도 메시야를 통한 속죄의 방법 이외에 다른 속죄의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 석가모니도 안 되고, 공자도 안 된다. 무함마드도 죄를 사해줄 수 없고, 박태선이나 안상홍도 사해 줄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신천지집단을 이끌고 있는 이만희도 사해 줄 수 없으며, 안상홍의 계보를 잇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장길자도 사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하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서 보내주신 메시야만이 죄를 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단순히 예수님이라고 해서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죄를 사해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내주신다고 약속했던 메시야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었지만 죄성없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흠없는 속죄양이 되시기 때문이다(벧전1:19). 그렇다. 이 세상 사람치고는 죄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3:20). 아담의 범죄이후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몸 안에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인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 자신의 죄값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남의 죄까지 처리해 줄 수가 있겠는가?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1:29) 우리의 죄를 사해줄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이었지만 흠없는 사람이 되셨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9:6). 누가 죄를 사해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자 죄없는 사람이신 예수님뿐이다. 그렇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무함마드도 신()이 아니다. 박태선도 안상홍도, 이만희도 신()이 아니며, 마리아도 결코 신()이 아니다. 오직 만세전부터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줄 수가 있다. 그분이 대신 죽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으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누구의 도움도 죄사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용하지가 않는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다(4:12). 그러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려면 우리는 필수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을 자기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한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죄인에게는 그 다음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일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겸손히 시인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요일1:9). 생각나는 모든 죄를 다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해 통회하고 아파하면서, 주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히 씻겨준다.

 

 

3)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 이유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믿음만 가지면 천국갈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에는 3가지 이유들이 있다.

첫째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무지(無智)와 오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과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모른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도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것을 제대로 배워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믿음만 가지면 구원얻는다고 들어서 알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누가 그렇게 말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예수님의 직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는 것이다. 성경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가는 구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다가 회개가 다 필요하다고 증거한다. 둘 다가 필요한 것이다. 회개없이도 예수님만을 믿으면 천국갈 수 있는 생각을 버리라. 이러한 말씀은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구원으로 잘못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증거한 사람은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이 교리로서 완성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것 곧 이신칭의를 들을 때에 자신의 구원과 동일시하고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시해 버리고 말았다. 이신칭의와 구원, 이신칭의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것인가? 아니다. 다른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공통 분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신칭의가 곧 구원이 아니며, 이신칭의가 곧 사람을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비록 더럽고 추한 존재이지만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음으로 깨끗하게 됨을 얻는다는 뜻이다. 나는 추하고 더러우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칭의의 옷이 내게 입혀지므로 내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구원을 위한 시작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도는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의 노정에 자신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사실 죄성에 물들어 있는 사람치고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도의 구원이 시작이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자신의 죄들을 정결케하고 깨끗케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함으로 그분이 부여하신 칭의에 대한 보답을 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칭의를 입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영화의 단계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때라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원의 여정에 성화나 영화의 과정은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살아가는 듯하다. 아니다.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칭의교리에 대한 과대 해석이요, 잘못된 적용이다. 칭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점은 성도가 얻을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도바울이 말한 이신칭의받은 것을 구원으로 알고 거기에 안주해버리려는 것이다. 한 번 믿음을 가졌으면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리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복음을 믿어야 하고 또한 회개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회개하는 삶이 없이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고 있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도바울의 신학을 가지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가감하려는 매우 염려스러운 시도인 것이다.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자 아니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는 자는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안주하려 하지 말라. 혹 신앙생활하다가 바울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서로 충돌되거나 서로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그리고 나서 사도바울의 말씀을 참고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도바울도 성령을 받은 자라도 합당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한 자이기는 하나, 그가 말할 때에는 어떤 특수한 환경 속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느 시대이든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항상 진리가 되는 말씀만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충돌된다고 할 때에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내려놓고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라.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진리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항상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사도바울이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했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 주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했는지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막강한 영향 하에 있는 개신교인들은 이신칭의가 마치 구원인량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행위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회개를 하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살펴봄으로서 자신이 지금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며, 죄는 점차적으로 끊어야 한다. 어차피 천국은 죄있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은 어떻게 죄를 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볼 때에는 사도바울의 서신만을 보지 말고, 사복음서와 가장 일치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읽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신칭의를 강조하려다보니, 종교개혁자인 루터 자신도 신약성경 중에서 오직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홀대를 하였다. 하지만 사도바울이나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요소를 믿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로서 판단하셨다는 점이다(25:31~46).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를 어떻게 심판하셨는지 당신은 기억하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믿음에 따른 판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자의 삶 곧 행함이 그의 뒤를 따라왔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심판은 행함이 뒤따르지 아니한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라고 판단하실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라도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날 다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얻는다는 주장하는 자들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믿음을 가진 자는 행함이 뒤따르게 되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때, 행함이 동반되지 아니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라면 그는 회개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으려면 물론 믿음은 절대적인 요소다. 믿음없이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려면 죄의 문제도 해결받아야 하는데, 죄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은 자가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요일3:8). 왜냐하면 죄를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14:6). 하지만 자신의 입술로써, 자신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뒤를 돌아볼 때, 나의 신앙생활 속에 자신이 가진 믿음에 따른 행함의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계명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계명을 다 준수하고 있으니 자신은 자신있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계명을 다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긍휼이 임하게 되어있다. 죄를 회개하는 자를 당신의 피로 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가려는 신앙인에게 계명준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만약 나 자신이 계명을 준수치도 않는데, 자신은 앞으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로는,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교리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개신교인인 만큼 우리는 늘 종교개혁자들의 그늘 아래에 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는 중세 로마카톨릭의 반작용으로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큰 장점이지만 또한 매우 큰 약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를 생각해보라.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에 거의 무조건 반대하는 쪽에 서야 했다. 중세 로마 카톨릭는 무엇을 구원이라고 말했는가?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거기에다가 선행과 구제가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선행과 구제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구원하기에 합당한 선행이나 구제가 부족하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선행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잉여공로를 사서라도 자신의 공로를 채워야 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는 잉여공로를 가진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일명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래서 선행이나 구제같은 공로가 부족한 사람들은 헌금을 해서라도 그러한 공고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니 종교개혁자들은 한사코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너무 나가버렸다. 왜냐하면 자신이 정상적인 신앙인이라 한다면 응당 나타나야 할 믿음의 행위 즉 회개의 열매까지도 행위공로사상이라고 하여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믿음만 있으면 행함이 없어도 구원받는다고 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칼빈에 이르러서는 구원도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얻게 된다고 가르쳐버렸다. 그러니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예정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이 문제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더 설명하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개신교 교리가 되어버렸고 각 교단의 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에 오순절측에서는 믿음만 있어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지 개신교회에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온전한 회개로 받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잘못된 구원론으로 빠지게 되어버린 또 하나의 이유는 각 교회가 믿고 따라가는 개신교의 구원론 교리와 교단의 신학 때문인 것이다.

 

 

4)믿음에도 믿는 믿음과 지키는 믿음이 각각 따로 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믿음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이 가르쳐주는 믿음은 신뢰함(belief), 신념, 확신(conviction)(8:10)”이기는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신실함, 충성됨(faithfullness)(5:22)” 혹은 확고부동함, 견고함을 뜻한다. 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한 번 믿다가 흐지부지된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 때문에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고, 불이익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다. 심지어 자신이 가진 믿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신실함을 가리킨다. 당신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는가?그렇다.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계속해서 간직하는 믿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특히 믿는이라는 동사구문이 대부분 현재, 분사, 능동태구문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번 믿음으로서 완성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끝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가야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한 번 믿었다는 것으로 끝나버릴 성질 것이 아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믿었어도 만약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214:12)”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을 신뢰하는 믿음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10:21-22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어떤 환난과 핍박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가기고 있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고 어떤 환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자신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내포하고 있는 속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만약 일본천황을 숭배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고문을 당해 죽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 성도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저 일본천황을 숭배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주 예수님만 섬길 것인지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고, 그 표시로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믿음의 변절을 행한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겨버린 것이다. 핍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신사를 참배하던 자들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다. 이들은 거의 다 지옥에 떨어졌다.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믿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통해 예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인정을 했고, 우상을 향하여 절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바알숭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일제 강점기 후반에도 수많은 신자들이 있었지만 우상을 향하여 절하지 않는 성도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일제 강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쭉정이와 알곡을 가라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 넣으셨고, 알곡은 천국곳간으로 모아들이셨던 것이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진 믿음을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믿음을 끝까지 지켜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가진 믿음에 반대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천국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비록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랄 것이다. 핍박과 고난과 죽음을 면하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라. 믿음 때문에 다가오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5)성도들이여, 천국가는 믿음을 소유하라.

이제 총정리해 보자. 왜 사람들이 믿음생활을 하는데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일까? 믿음은 있지만 회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회개하지 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런 가르침을 못 들은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에 너무 집착했고 그것을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를 제쳐놓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먼저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신칭의의 사도바울의 신학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개신교의 교리와 교단의 신학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리나 교단의 신학을 성경보다 우선해서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그것으로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 많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신학을 배우기 전에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확증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에 대한 메카니즘을 제대로 파악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은 구원과 천국을 믿음과 회개로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그 구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는, 자신이 과연 십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다(5~7). 만약 내가 지금 십계명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는 지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지금 당신은 십계명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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