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제01차 모임 칼빈주의의 정체(1)_2017-05-11

by 갈렙 posted May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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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칼빈주의의 정체

 

 

 

 

 

 

1. 성경에 개인구정 예정이 있는가?

2. 성경에 개인구원 예정 사례가 있는가?

3.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며 안전한가?

4. 이중예정과 선택은 과연 성경적인가?

5. 성도의 견인교리, 진짜일까?

6. 칼빈의 예정론과 그 위험성

7. 성도의 견인과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의 위험성

8. 칼빈의 예정론과 그 허구성

 

 

 

 

 

1. 성경에 개인구원 예정이 있는가?

 

 

 

 

 

 

오늘날 목회자의 탈선과 성도들의 타락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찾아낸 결론은 그것이 잘못된 구원론에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장로교파는 대부분 칼빈의 교리를 지지하거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구원론 교리가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칼빈의 구원론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어도 회개도 하지 않고 있고, 그러다가 죽을 때 멸망으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칼빈의 구원론 교리의 중심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부터 칼빈의 예정론을 심층 분석을 해 볼 것이다. 학자와 같이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목회적 관점에서 그의 예정론교리를 조금 들여다보고자 한다.

 

 

1)성경에 과연 예정이라는 말이 있는가?

먼저, 성경에 '예정'이라는 말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성경에는 예정이라는 낱말이 나오기는 나온다(3:20, 8:29, 1:3~6).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만세전에 예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하지만 예정론이라는 교리가 교회에 들어옴에 따라 그만 잘못된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자들로 인해, 성경에 나오는 예정까지 잘못 해석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그만 예정이 개인구원 예정 쪽으로 그 촛점이 맞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정"하면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였다는 것으로 교리가 고착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2)성경에 과연 개인구원 예정이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개인구원예정이 나오는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있다고 주장은 하지만, 아쉽게도 성경에는 단 한 건의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구원을 예정받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라면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3: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개인구원에 관한 예정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자기 눈에 보기에 개인구원 예정같이 보이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보인다면 그것은 전부 개인에 대한 사역적 예정 혹은 개인의 사명적 예정일 뿐 결코 개인구원예정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에서는 버리고 야곱은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 에서는 구원에서 제외시키고 야곱은 구원하신다고 예정하시지 않고, 그들을 두 민족으로써 어떻게 쓰실 것이라고 예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성경에 나오는 예정은 공동체예정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예정이 있다고 한다면 천사와 인간에 대한 예정이거나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에 관한 예정 같은 것만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개인예정은 없고 다만 공동체 예정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한 창조주이신데, 어찌 모든 일을 예정하지 않고 시행하시겠는가? 항상 하나님은 그분의 미리 작정하심을 따라 일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작정하셨다 하더라도 개인구원예정에 관해 작정하신 것은 하나도 없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서 누군가를 예정하셨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부 다 "우리" 혹은 "그들"에 관한 공동체예정만 있을 뿐이다. 다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자.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두 존재 곧 천사와 인간에 관해서는 예정하신 것이 있다. 이 예정은 아마도 천사와 인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듯 싶다.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본다면, 천사는 만세 전에 종으로 예정하신 것이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정이 한 가지 더 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들에 관한 예정이 더 있을 뿐이다. 이러한 예정은 예수님의 비유들(21:33-43, 22:1-14, 14:15-24)과 로마서 9-11장과 엡1-3장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엡1~3장과 롬9~11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먼저, 에베소서를 보자.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천사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우시기로 예정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엡1장과 3장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바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바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늘의 상속자로 세우기로 예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분은 바로 우리 인간들을 당신의 상속자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예정도 우리 인간들에 관한 단체적인 예정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어떤 개인을 예정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정을 말할 때에는 전부 다 공동체적인 혹은 단체적인 예정만 말했다. 그러므로 예정에 관한 성경의 본문들은 항상 그 대상을 어떤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혹은 "그들을"이라는 1인칭 복수 목적격이나 3인칭 복수 목적격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구원받은 자들을 당신의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예정에 관해 말씀할 때에,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주어로 사용했던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을 우리 인간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그것은 결코 천사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바로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신 것이다. 3:6을 보라.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한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 구원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방인들도 구원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 상상해 보라.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방인들인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니 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예수님은 울타리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울타리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한 목자를 통해 구원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10:16). 하지만 단 한 건도 어떤 개인을 지칭하여 "아무개"라고 예정하신 경우는 없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적으로 어떤 이는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또 어떤 이는 버리기로 이중적으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누구는 구원하여 천국에 들여보내기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버려서 지옥에 떨어뜨리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무리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을 뿐이다. 구원받을 인간의 공동체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 예정이란 성경에 결코 나오지 않음을 알라. 다 칼빈주의자들이 과대 확장해서 잘못 만들어 낸 교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딤전2:4). 그 일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속죄의 피를 흘려 인류의 죄를 사하셨다. 그때 예수님은 결코 구원받을 자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죄악을 다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단지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 복된 소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을 결코 잔인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말라. 하나님은 결코 누구는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하시고, 마찬가지로 누구는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칼빈의 이중예정론 교리는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누구든지 구원 안으로 초청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수용과 거부 때문에 '구원''유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하나님께서 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 안으로 초청하시지만 우리가 거부하여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장차 심판 때에 그 책임을 인간들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어찌 마지막날에 우리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겠는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것을 가지고 어떤 심판하겠다고 또 사람을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게 해서 심판을 진행하시려 한다면 그분은 잔인한 하나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해놓으신 대로 집행하시고는 어찌 잘했다 혹은 잘못했다고 심판하실 수가 있겠는가? 구원의 최종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 인간에게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심판하실 자격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딤전2:4).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불순종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래서 심판날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다음 이 시간부터는 예정론의 허구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다. 이것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 계속해서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야곱과 에서가 개인예정과 이중예정의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것이 어떤 경로로 와전되었고 잘못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성경에 개인구원 예정 사례가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목회자나 평신도 할 것 없이 그리고 큰 교회나 작은교회 할 것이 온갖 죄의 열매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이들이 온갖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니 자신은 반드시 구원받았다고 믿는 잘못된 구원론 때문에 기인하고 있음이라 하겠다. 이름하여 잘못된 칼빈의 예정론의 교리가 이들의 생각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교리가 정통교리라고 하여 무턱대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비록 장로교가 믿고 따르는 칼빈의 교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그 교리가 성경적인 주장이라면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성경에 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아파도 기꺼이 그것을 도려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 그것을 주장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신학자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에 관해 칼빈선생이 이렇게 말했으니 그것은 항상 옳은 거겠지 하면서 따라갈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그것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지에 관해 우리는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만들어낸 교리를 따라갈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따라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1)하나님의 구원예정은 오직 단체적인 예정뿐이다.

우리는 지난 주에 칼빈이 그토록 주장했던 이중구원예정이라는 것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개인에 관한 구원예정은 결코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성경에는 사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말씀들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런 예정없이 일을 하시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그 예정에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만세전에 예정하신 일이 없다. 다만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공동체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전부 "우리" 혹은 "그들"에 대해 예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의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정해 놓은 것이지, 결코 누구는 구원할 것이고 누구는 버릴 것이라고 하는 개인구원과 개인유기를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만약 구원에 관한 예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체적인 예정으로서 2가지 뿐이다. 그것은 천사와 인간,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예정이다. 먼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천사와 사람이지만 이들에 관한 예정이 각각 따로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천사는 범죄한 즉시 심판하여 지옥에 멸하시기로 예정하셨지만, 인간은 혹 범죄를 했다 하더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시어 그중에 얼마는 구원하시기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1:6, 3:16).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유대인들만 구원하시려고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구원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해놓으셨다.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놓으신 것이다(3:6, 10:16). 당신이 비록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음받았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 인간은 좀 실수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당신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유대인들처럼 얼마든지 구원하기로 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주님이 마련해두신 구원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2)성경에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있는가?

그렇다면, 왜 칼빈의 예정론자들은 개인에 관한 구원을 예정해 놓으셨다고 그렇게 침을 튀겨가며 설파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몇몇 부분이 개인구원예정을 증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에서와 야곱의 경우라고 말한다. 칼빈의 예정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에서는 처음부터 버리기로 예정하시고, 야곱은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그것에 대한 근거로서 롬9:11-13을 인용한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고, 둘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할 것이고, 에서는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9:11-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2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크게 빗나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에서는 버리고 야곱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두 아들을 잉태하고 있는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25:23). 그중에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그 누구는 버리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태어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사역적인 예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나겠지만 먼저 태어난 에서가 늦게 태어난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을 미리 예지하시고 그것을 말씀해 주신 것뿐이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구원에서 버림받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혹시 이것을 예정의 차원에서 확대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사역적 부르심혹은 사역적 예정일 뿐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것은 결코 에서를 멸망으로 혹은 지옥에 보낸다는 예정이 아니다. 혹 당신은 예수께서 사복음서에서 섬기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서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20:26~27, 23:11~12). 이 말씀에 의하면 섬김을 받는 자보다는 섬기는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높으며, 둘 다 천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섬기는 자가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에 관한 것은 사역에 관한 예지요 좀 더 확대해 보면 사역에 관한 예지예정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혹 그렇게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운명적인 예정은 아니며, 그러한 안배가 있음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을 뿐이다.

 

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한 말라기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1:2-3). 이것은 아주 훗날에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미 에서와 야곱이 죽고 난 뒤, 적어도 1,600년이 지난 후에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이다. 둘이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기에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에서는 장자권과 같은 영적인 축복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이며, 야곱은 그것을 매우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12:16-17). 비록 장자의 축복을 얻는 방법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매우 사모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그만 그것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에서는 그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고 야곱이 그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6살 때 일어난 팥죽사건이었지만 그들이 70세가 되었을 때에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겠다고 미리 정해놓으신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알려주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그들의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결과를 되었음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3)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별해 놓았다는 것도 사역적인 예정일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다. 예레미야의 직무와 사역에 관한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그러한 직무와 사역을 알고도 불충성하고 훗날에 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도 구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레미야를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개인에 대한 예정이 성경에 등장하기는 하나 그것은 오로지 사역에 관한 예정일 뿐 결코 개인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나는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라고 안심하지 말라. 당신의 구원은 아직도 완성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구원은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구원은 현재진행형이지 결코 완료형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죽는 그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구원을 이뤄가기를 바란다.

 

 

 

 

 

 

3.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며 안전한가?

 

 

 

 

 

 

그렇다면 과연 성도들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칼빈주의자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성도가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을 절대 발생하기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오늘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얻은 1차적인 구원과 그 안정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내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 과연 안전한가?

구원의 안정성과 보장에 관한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다.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 한 번 믿으면 멸망받을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안전하다. 결국에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믿고 회개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과연 구원은 그렇게 주어지는 것인가?

 

 

2)구원에 안전성에 관한 성경구절들은 과연 합당한가?

이어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에 관한 안전성의 근거들로서 여러 성경구절을 언급한다. 그 중에서 우선 대표적인 성경구절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칼빈주의자들은 요5:24을 구원의 안정성에 대한 성경구절로 제시한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이구절을 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원문을 제대로 번역한 것을 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 성경은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 그래서 동사 하나만 보아도 주어가 누구이며, 언제 이 일이 이뤄질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쉽게 말해, 문장이 과거완료인지 현재진행형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던 사람들도 이미 칼빈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된 이 구절도 헬라어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데에서 생겨난 오류인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헬라어 원문에는 믿는 자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원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항상) 듣고 있고, 또 나 보내신 이를 (계속해서) 믿는(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도리어 사망으로부터 생명 안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 이 본문은 구원을 결코 완료형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현재형이나 현재진형형이다. 어떤 사람이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이 본문에 의하면,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자가 아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즉 순종하고 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일종의 선언이다.

 

둘째, 칼빈주의자들은 요10:28~29을 구원의 안정성에 대한 성경구절로 제시한다.

 

10:28-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멸망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들을 끝까지 인도하여 천국에 데려간다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그 본문을 과대해석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더욱이 문맥을 무시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누구인지를 정확히 보지도 않고 이 구절만을 딱 떼어서 구원의 안정성에 해당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영원히 멸망치 않고 주님의 손에서 보호받아서 구원이 이를 수가 있을까? 그들이 누구인지는 바로 앞구절에 나와 있다. 27절을 보라.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듣고 있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알고 있으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따르고 있느니라)

 

그렇다.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 지금도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 곧 주님의 양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이 조건은 빼버린 채, 무조건 주님의 양들은 반드시 보호받을 것이고 결국에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헬라어원문을 보라. 그러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억지 주장이요 자의적인 해석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영생을 얻으며 주님의 손으로부터 빼앗김 당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믿었던 자라 할지라도, 지금 현재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라야 한다(즉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발자취와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있지 자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주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

 

 

3)한 번 얻은 구원은 절대적으로 안전한가?

이제 당신이 성경을 본다면 앞뒤문맥을 다시 확인하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기왕이면 헬라어원문을 직역한 것을 가지고 성경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라. 한 번 복음을 듣고 한 번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다. 그러한 자들 중에 상당수가 구원에서 떨어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도행전 5장을 보라. 거기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그날 즉사해서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징계로 죽은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들이었는가? 아니다. 그들도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어서 초대교회에 합류해 들어온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 그래서 거짓말하다가 그만 그날 멸망에 이르는 성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한 번 구원얻은 자라도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증거해 준다.

또한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라(25:14~30). 이 비유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받게 될 보상과 게으르고 악한 종이 받게 될 징계에 관한 비유말씀이다. 그런데 나중에 징계받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나온다. 그는 주인의 종이 아니었는가? 아니다. 그도 주인의 종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악하고 게을렀다. 그는 주인을 나쁜 고리대금업자로 여기고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래서 주인이 그에게 맡긴 달란트를 땅에 썩혀버리고 말았다. 주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악하고 게으른 자가 쫓겨나는 장소는 어디였는가? 사실 그곳은 불타는 지옥이었다(13:42,50, 22:13, 24:51, 20:10~15). 그렇다. 주님의 종으로 쓰임받는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겨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주님의 종으로 쓰임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 비유는 잘 말해준다. 그렇다. 한 번 말씀을 듣고 적당히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계속해서 순종하는 자가 훗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결국에는 주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며,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수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4)믿음으로 얻은 구원, 잃어버릴 가능성은 없는가?

그리고 이미 회개하고 믿어서 받은 1차적인 구원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증거하는 성경본문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본문은 히브리서와 디모데전서와 요한계시록의 경우이다.

이를테면, 먼저 히브리서 6장을 보자.

 

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렇다. 하늘의 은사까지 맛본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타락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을 가져 구원의 노정에 들어왔지만 끝내 그 경주를 다 마치지 못하고 타락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또한 히10장을 보라. 거기에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는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심판과 맹렬한 지옥불이라고 경고하고 있다(10:26-27). 그렇다. 믿는 자라도 얼마든지 타락하여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안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 1차적인 구원을 받은 자라도 그가 그 후에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한편 사도바울은 그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믿음을 가졌지만 믿음에서 파선하는 자를 언급하였으며(딤전1:19~20), 말세가 되면 믿는 자들 중에서도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따라 갈 자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딤전4:1~2).

 

딤전1:19-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뿐만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께서 밧모섬에 갇혀 있는 사도바울에게도 믿음의 경주에서 탈선하는 자, 사탄마귀와 죄와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놓여있는 생명책에서 이미 기록된 성도의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시기도 하셨다(3:5).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렇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님이 마련해놓으신 속죄를 받아들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도 실패하게 되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인됨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1차적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범죄하고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18:24).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5)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1차적인 구원을 끝까지 이뤄가야 한다(2:12). 아마도 당신과 나는 지금도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죽는 그날 혹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라.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늘 귀울이고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양심의 화인을 맞아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라면 무엇보다도 주님을 정말 시인해야 할 자리에서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한 번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 구원은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정확히 알라. 당신도 구원의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힘써야 한다. 회개하라. 순종하라. 그래서 천국에서 만나자.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4. 이중예정과 선택은 과연 성경적인가?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이중예정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줄로 알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아주 많다. 하지만 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도적적인 해이는 왜 이리 깊어져만 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 이 사회의 타락의 배후에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빈교리가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은 이미 구원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큰 걱정을 안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 문제가 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회개를 시키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을 믿고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늘 태평하다. 죄를 짓고도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당장 회개하지도 않는다. 죄를 지어도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들키지 않으면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으려니 한다. 그리고 요즘에 방송에 출현하여 간증하는 분들을 자세히 보라. 여러 기독교 TV에 출연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자이지만 그것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간증이 거짓이 섞여 있고 침소봉대된 것이 있음에도 그것이 대해 죄의식이 없다.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받을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찌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인가에만 초첨을 맞추고 있으니 거짓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술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빈의 교리다. 칼빈의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교리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교리가 얼마나 사람들을 지옥 보내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오늘은 칼빈주의의 오류와 병폐 중에서 4번째 시간으로써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병폐와 그 오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란 무엇인가?

먼저,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교리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도록(천국에 들어가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이들은 버리기로(지옥에 떨어지도록) 예정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예정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사람의 행위를 보신 후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와같은 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를 때에는 이것처럼 은혜되는 교리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까지도 만세전에 예정해놓으셨다는 말에 필이 꽂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인 선택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교리이며 무서운 교리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만 넋 놓고 믿고 있다가는 지옥 떨어지기 쉽상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신 후에 누구든지 그 구원 안으로 들어오기를 지금도 바라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2)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교리의 병폐는 무엇인가?

이제,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선택교리의 병폐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선택교리가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그리고 누구는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폭군임에 틀림없다.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서는 그것은 내가 잘 결정한 것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데, 누구는 구원하기로 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결정하셨다면 하나님은 대단히 편파적인 분이며 편애하시는 불평등의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공의에 관한 부분은 내버려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라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와서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신 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정하지 않은 사람이 혹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면, 우리가 굳이 나가서 전도할 필요도 없게 된다. 작정된 대로 믿거나 작정된 대로 믿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는가? 가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다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고정된 상태라면, 우리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주님 앞에 나가려 하는 시도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손놓고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나를 꼭 믿게 할 테니까. 그리고 회개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다 회개시키실 테니까. 더욱이 굳이 믿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를 믿게금 하실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즉 회개할 기회도 놓쳐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칼빈교리는 모든 사람을 숙명론에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

여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되어버림으로 악의 조성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설령 악한 일을 했다 치더라도 그분이 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이 범죄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과 뜻대로 되어진 일이며, 누군가 버림받은 것도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이니 다 잘 된 것이다."라고 믿어야 한다. 누군가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아야 하는데 그 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잘 된 것이라고 박수치고 환호해야 하는 것일까?

일곱째,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대로만 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간을 심판대에 불러내어 재판하실 수가 없다. 구원받을 기회도 주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그를 심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서 이미 구원이 결정되고 말았는데, 어찌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말로 짜고 치고 고스톱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가!

 

 

3)하나님은 잔인하고 편파적인 분도 아니요 폭군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행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딤전2:4). 그리고 누구나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바라신다(벧후3:9, 17:30).

 

딤전2:4 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창조주하나님의 자리까지 기꺼이 버리셨던 분이다. 우리 죄값을 대신 받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대신 감당하셨던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지옥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늘도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칼빈주의자들이여, 하나님을 더 이상 나쁜 하나님이자 폭군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 그분께서는 아들로 오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더러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그렇게 명하고 있지 않으신가! 그러니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나가서 사랑의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할 일이지 결코 칼빈주의에 빠져서 넋놓고 회개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5. 성도의 견인교리, 진짜일까?

 

 

 

 

 

 

여러분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그리고 이 교리에 의하면, 더 많은 성도들이 안전하게 천국에 입성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 교리 때문에 회개하지 않다가 수많은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의 예정론 중에서 거의 결론에 해당하는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칼빈의 5대교리란 무엇인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의 예정론은 크게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전적타락(Total deprivity),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 그것이다. 흔히들 이것을 일컬어 영어앞글자만 따서 튜울립(Tulip)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5가지 교리 중에서 맨 마지막 교리가 바로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그런데 '성도의 견인'이라는 한자어를 살펴보면, 그 단어가 끌어당긴다는 의미의 '견인(牽引)'이 아니라, 굳게 참고 견딘다는 뜻의 '견인(堅忍)'인 것을 알 수 있다.

 

 

2)칼빈의 5대교리 중 성도의 견인교리란 무엇인가?

우선 성도의 견인교리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보자. 장로교의 신조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71항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력 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 받을 것이다.”

 

성도의 견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견디어 내어 결국엔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신앙이 끝까지 보존되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여 구원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이 교리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된 본성이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더욱이 사탄마귀가 있어 할 수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지옥으로 끌고가려는 마당에, 우리가 한 번 얻은 구원이 안전하다고 믿다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면 어찌하려는 것인가?

 

 

3)성도의 견인교리, 믿고 따라가도 되는가?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견인교리에 따라 성도가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멸망받을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성경에 근거한 교리인지에 대해 성경을 유심히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생각 외로 수많은 성도들은 이 교리를 무턱대고 신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대로가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국은 칼빈의 교리가 인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칼빈의 교리를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했다가는 우리의 영혼을 담보할 수가 없음을 알라.

이제 와서 보면, 성도의 견인만큼 무서운 교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은 지금도 이 교리를 사용해 수많은 성도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이 교리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줄로 알고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고 있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짓고 있는 죄가 정말 나를 지옥가게 하는 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겠지."하고 그냥 넘겨버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정말 내가 회개하려 하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강제로 회개시켜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장로교인들은 자기 자신은 이미 만세전에 선택된 것이고 때가 되어 불러주셨으니, 자신의 구원은 이미 보장되어 있고 안전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성도의 견인 교리만 믿다가 회개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가? 사실 예정론의 이 5번째 교리가 결국 성도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가장 많이 쓰임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4)성도의 견인교리가 어떻게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가?

이제는 성도의 견인교리가 왜 성도들을 지옥에 떨어뜨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으나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은 천사는 섬기는 종으로 예정하셨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후사로 예정하셨다. 하지만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만약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예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사역을 위한 예정일 뿐, 결코 그 사람의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구원은 어디에도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개하고 성령을 의지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지,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 사람이 한 번 믿어서 구원을 확신을 갖는다고 해서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이미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라 할지라도 결국 믿음에서 떠나 그 구원을 잃어버린 사례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보라.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가룟유다가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시대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다. 이들은 전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였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죄된 본성과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구원은 안전한 것이 아니다.

셋째,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지만,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구원을 향하여 인간이 반응해야 할 책임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회개도 하나님이 시키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믿을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회개도 자신이 하려고 노력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시켜주셔야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 계신다. 날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하여 믿음이 더 견고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우리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데 우리가 믿음이 견고해지지 않음을 알라. 우리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자동적으로 회개할 것이라고 믿지 말라. 신앙생활이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와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는 성령의 책망이 있을 때 즉각즉각 순종해야 한다. 회개를 뒤로 미루고 있다면 지은 죄 때문에 사탄이 침범해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예정한 어떤 사람만 구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회개하여 구원얻는데 나오기를 바라시고 있다(딤전2:4, 벧후3:9). 그러므로 믿는 일과 회개하는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줄로 착각하지 말라.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누군가가 회개하려 하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를 강제로 회개시키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회개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5)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신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피의 효능은 사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만큼 충분하다. 다만 사람이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이다.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하신다면,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쳐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10:1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7:37)" 그리고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도 이렇게 말해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1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요일4:15)"라고 말이다. 그러면 만약 그렇게 누구든지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는데 행여 성부가 계획하지 아니한 자가 와서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6)성도의 견인교리를 지지하는 성경구절이 있는가?

이제는 성경을 직시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때껏 성도의 견인교리를 성경처럼 믿고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교리는 교리일 뿐이지 결코 정확무오한 성경말씀이 아닌 것을 알라. 지금부터는 칼빈주의자들이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 말하는 성경구절을 살펴볼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인용한 성경구절은 성경말씀의 뜻을 잘못 알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며, 성경을 억지로 꿰맞추려고 한 것이다. , 그 실례들을 들어보자.

첫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 보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결국 내쫓지 않고 다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본문을 제대로 보라! 여기서 아버지께세 예수에게 주시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그들은 한 번만 주님에게 나아오는 자가 아니며, 한 번만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여기서 '내게 주시는'이라는 단어에서 '주시는'이라는 동사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아버지께서는 예수에게 사람을 주시되 계속해서 보내 주신다는 뜻이다. 또한 '내게 오는 자'라는 부분에서 '오는' 이라는 단어는 '동사, 분사, 현재, 중간태디포, 목적격, 남성, 단수'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오되, 자기자신을 위하여 계속해서 나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얻는 자는 한 번만 주님 앞으로 나와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 곧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내어쫓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다가도 주님을 믿지 않거나 주님을 따르다가도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7-28)".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한 번 주시는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주님의 손으로부터 그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하면서,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내 음성을 들으며""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에 사용된 동사가 둘 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복수'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며,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고, 영원히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뺏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을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내 양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며, 나는 그들을 아며 그들은 나를 계속해서 따르느니라"이다. 그렇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지, 결코 한 번 듣고 한 번 믿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도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부하거나 주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는 멸망받을 것이다.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다른 구절들도 다 이와 비슷한 맥락들이다. 그렇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는 현재진행형인 것이지 결코 완료형이 아니다(2:12). 사실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는 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마련해 놓으셨다(22: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시켜 이 잔치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실 뿐이다. 하지만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국 그 잔치소식을 들은 우리 자신이 결정할 몫임을 알라. 누가복음 14장을 보라. 거기에 보면, 어떤 사람은 왕의 아들의 잔치에 가겠다고 이미 약속한 상태인데도 그날 결국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밭을 사놓았는데, 그곳에 가보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는 소 다섯 쌍을 사놓았으니 그 소들을 검사하러 가보아야겠다고 하고서는 안 갔다. 보라. 이들은 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잔치에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 안으로 초청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잔치에 가지 않은 것은 그들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훗날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심판할 때에 잔치에 초대했지만 그들이 거절을 한 것이기에 그들을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사람만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지 않은 사람을 버리신다면, 하나님은 심판할 권한이 없다. 그에게 선택의 기회도 주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그를 예정해놓지 않으셨으니 지옥에 보내노라고 하면서 심판한다면 얼마나 그들이 강포한 하나님이라고 욕하겠는가?

 

 

7)칼빈교리는 엄청나게 큰 맹점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교리를 따라가지 말라. 그것을 따라가면 결국엔 지옥행이 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자는 잘 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정말 잘못 되었으면 회개시킬 것이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다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그들은 회개를 뒤로 미루고 있어나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한 번 보라. 회개는 탕자가 하는 것인가 아버지가 대신 해 주는 것인가? 회개는 하나님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자 보라. 둘째아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말이다.

 

15: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라. 누가 회개하고 있는가? 아버지인가 아들인가? 회개할 책임은 다 죄를 지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둘째아들 잘못했으니 둘째아들이 회개해야 한다. 그가 억지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려고 한 것이 죄였다. 그러니 마귀에게 홀리어 허랑방탕하게 물질을 쓰다가 결국에는 거지신세가 되었고 죽음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해야지 아버지가 회개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책임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특별히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면 즉시 자백하고 고백하라. 회개를 뒤로 미루어서는 아니 된다. 회개를 자꾸 뒤로 미루다가 회개하지 못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죽을 때에도 회개하고 죽은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과거에 예수 믿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가? 결국 죄가 없는 사람이다. 죄를 해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으면 즉시 회개를 통해서 죄에서 빠져나오라.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다. 건투를 빈다.

 

 

 

 

 

6. 칼빈의 예정론과 그 위험성

 

 

 

 

 

 

오늘날 칼빈의 예정론의 폐해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칼빈의 예정론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짓고 있는 죄악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예수믿고도 계속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는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칼빈주의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을 받아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니 이런 질문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이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견인해 주셔서, 구원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 때문에 얼마나 무서운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칼빈주의와 개신교의 신학적인 토대

칼빈주의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자란 칼빈의 예정론과 칼빈의 5대교리를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사실 칼빈은 자신의 주장을 예정론이라고 따로 부르지도 않았고 그것을 5가지 항목으로 나열하지도 않았다. 후대에 알미니우스와 논쟁하면서 칼빈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붙혀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토대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칼빈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개혁을 루터(A.D.1483~1546)가 개시했다고 한다면, 칼빈(A.D.1509~1564)은 완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2)드디어 밝혀지기 시작한 칼빈의 인성과 그의 신학

그런데 500년이 지난 오늘에 들어와 우리는 칼빈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을 했었는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만해도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었다. 칼빈하면, 종교개혁의 대부요, 우리가 믿는 개신교 신학의 근간이라고 칭송하며 믿어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부턴가 칼빈이 저지른 만행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제네바시에서 4년동안 통치하고 있었을 때에, 그는 종교국을 통해서 무려 58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들 중에서 13명은 교수형으로 죽였고, 10명은 목을 잘라 죽였으며, 35명은 화형시켜 죽였다. 인구의 숫자가 불과 13,000명에 불과했던 제네바시에서 로마카톨릭을 대적하는 종교개혁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칼빈이 그들을 죽인 이유가 단지 자신의 예정론과 사상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는 데에 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잔인하게 살인하고 고문했던 것이다. 그 당시 정치가들은 모든 권한을 칼빈에게 위임한 상태였기에 그는 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서 마녀를 사냥하듯 사람들을 사냥했던 것이다. 칼빈사상이 지배했던 스위스 전체를 볼 때, 무려 8,800명 이상이 마녀로서 재판을 받았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사람을 처형한 이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예정설을 비난하고 반대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였는데, 어떤 남자는 대로에서 피가 터질 때까지 채찍질을 한 뒤에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또한 칼빈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지크그뤼에라는 사람은 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를 구타했다는 이유로 어떤 소녀의 목을 낫으로 잘라 죽였다고 한다. 또한 칼빈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이나 신학이론에 반대하면 국사범으로 화형을 시키거나 처형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IS의 모습이 그때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인성적으로 볼 때에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했던 신학사상은 또한 어떠했을까?

 

 

3)칼빈의 책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이중예정론과 그 실체

이제 우리는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이라는 신학사상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성경에서 빗나간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특별히 이번에는 칼빈이 직접 저술한 1559년 최종판 <기독교강요>에 수록된 그의 주장을 보자. 칼빈은 자신의 예정론을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 3권의 21장에서부터 24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21장부터 24장의 제목은 이렇다. 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23장 이 교리를 겨낭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그런데 그의 예정론의 대략적인 내용은 제21장에 나오며, 칼빈의 5대교리는 22장에서 24장에 걸쳐 등장한다.

이제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칼빈의 예정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예정론을 사람들은 '이중예정론'이라고 부른다. 두 개의 갈림길을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예정론은 그가 만들어낸 최초의 작품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거스틴의 신작작정에 의한 예정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이러한 예정론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영원한 작정에 의한 선택이라는 개념을 칼빈이 어거스틴에서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1장에서 예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어떤 말을 했을까? 칼빈의 기독교강요(1559) 215절을 보자. 제목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이라고 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이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망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사실 성경에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 분명 있기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3:20). 뿐만 아니라 엡1:3~7에서도 "하나님 곧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또한 롬8:29~30에서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정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일을 무턱대고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4)칼빈의 이중예정론과 개인예정은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은 개인적으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하시기로 예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은 오직 그리스도 뿐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3:20). 기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개인예정이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즉 어떤 공동체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한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개인)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누구든지 하나님(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자 구세주로를 믿고(그분이 오실 메시야이든, 오신 메시야이든) 그분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지 아무아무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며, 그것이 진짜인지에 대해 성경이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성경에서 개인에 관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사역에 관한 예정일 뿐 한 개인에 대한 구원예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특히 칼빈은 개인에 관한 이중예정의 근거로서 롬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비유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에서와 야곱이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시려고 리브가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고 했으며,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다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사역적인 예정일 뿐 그것은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다. 그리고 롬9~11장은 민족의 사역에 관한 예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버림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바울이 에서와 야곱을 비유로 들고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일에 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버림받은 것을 에서가 버림받은 것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야곱은 구원에 관한 예정의 비유가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중에는 두 민족이 되는데,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관한 예정인 것이다. 훗날에 에서의 민족은 에돔족속이 되었고, 야곱의 민족은 이스라엘민족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에서는 야곱을 섬긴 적이 없다. 다만 1,000년 뒤에, 다윗왕의 시대에 에돔족속이 이스라엘족속을 섬긴 일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씀을 곡해하도록 적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직 에서와 야곱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기로 예정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틀린 것이다. 이 말씀은 인용의 말씀인데, 그것은 말라기 12절의 인용말씀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 25장에서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경홀히 여김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가 되었지만,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간절히 원함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12:16~17). 그리고 이것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이 주어진지 약 ,16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이다.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시거나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이 그렇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누구는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칼빈의 의 주장은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롬9장에서 계속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는데(9:30~23), 이것도 다 사람의 쓰임(사역)에 관한 말씀이지 결코 개인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예정에 관한 바른 성경적인 견해

그렇다. 개인구원에 관한 작정이나 예정은 없다.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시겠다는 사역적인 개인예정만 있을 뿐이다. 전부다 공동체적 예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또한 유기(버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도 계속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자가 유기되는 것이지, 만세전에 그를 유기하겠다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룟유다 개인을 버리기로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를 팔 자를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비록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랐다면 그는 자신이 행한 일에 관계없이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그 전제가 틀렸으며 비성경적인 주장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6)칼빈의 이중예정론이 말하는 엄청난 잘못

또한 만약 칼빈의 이중예정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크게 편협하게 보이고 폭군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절대주권을 사용하여, 그 어떠한 이유도 없이 한 사람은 영생으로 들어가게 예정해놓고 또 한 사람으로 지옥에 보내기로 결정하신 뒤에, 무조건 그것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분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을 멸하기로 예정해놓으셨다면 하나님은 폭군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도 없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어찌 그를 불러내어 심판할 수가 있겠는가? 그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만세전부터 나를 지명하여 지옥에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까? 그리고 내가 믿지도 못하고 회개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불공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대체 어디에 어떻게 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인지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할 것인지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편파적인 분이며 폭군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7)구원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다 하더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이 받고 있는 구원을 이뤄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은 잘 믿고 있고, 지금은 회개를 잘하고 있는데, 나중에 믿지 않게 되고 회개를 하지 않게 된다면 그는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및 요한계시록에서 고스란히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시작은 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얻고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겠는가?(3:5)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우리의 믿음을 날마다 확인하며 어떠한 순간에도 그 믿음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며,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구원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받게 되니 말이다(4:17, 1:15). 건투를 빈다.

 

 

 

 

7. 성도의 견인과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의 위험성

 

 

 

 

 

 

오늘날 교회를 힘들게 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 중의 하나가 교회를 타락으로 이끌고 있고, 또 하나는 이단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요소는 무엇일까? 애석하게도 전자는 칼빈주의요 후자는 삼신론적 삼위일체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개신교에서 나온 것이요, 후자는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교회에서 그 근간으로 삼고 있는 2개의 교리가 오히려 교회를 타락으로 이끌어가고 있고, 이단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들 중에서 칼빈주의의 폐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교회에게 안겨다 주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대부분 칼빈주의의 영향하에 있는데, 그의 예정론과 구원론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도 않은 채 자신을 안일하게 대처하게 만들어 결국에 구원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사실 칼빈이 만든 것은 아니다.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를 근간으로 하여 그의 이중예정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직제자였던 데오도르 베자(A.D.1519~1605)에 의해 승화되었고, 그는 더욱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발전시켜놓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타락전예정론"이라는 것이다. 그후 이것에 대항하여 알미니우스(A.D.1560~1609)가 등장하게 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칼빈의 제자였던 베자와 베자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의 교리에 대해 살펴보면서, 칼빈의 예정론 5대교리 중에서 그의 책 <기독교강요> 321장과 22장에 나오는 (5)성도의 견인 교리와 (2)무조건적 선택 교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칼빈의 이중예정론이 나오게 된 배경

먼저,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자기 자신만의 작품이 아니다. 그의 예정론의 근간은 사실 어거스틴(A.D.396~430)의 신적 작정교리에서 왔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중세구원론교리의 핵심을 연 인물이다. 그는 구원은 믿음과 교회를 통하여 얻는다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신적 작정에 의해 얻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에서 구원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공로(기부와 선행)를 통해서 얻는다는 교리로 발전했다. 그래서 중세교회시대에는 교회가 주는 세례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천주교에서는 세례교육이 가장 중요시된다. 그런데 칼빈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것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구원은 교회를 통하여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구원은 공로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좀 지나치게 나아갔다. 그래서 그의 이중예정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2)칼빈의 이중예정론이란 무엇이며 이것은 성경적인가?

그렇다면, 칼빈의 이중예정론 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세전에 성부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개인은 구원으로 예정하였고, 어떤 개인은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기독교강요> 32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있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예정을 감히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저주가 예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영생과 멸망으로 예정하신 일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아무개를 만세전에 예정했다는 교리는 잘못된 것이다. 즉 성경에서 개인예정은 결코 하나도 없으며, 오직 회개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 곧 믿음의 공동체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만 있다.

 

 

3)칼빈의 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의 탄생과정과 그 결과

그런데 칼빈이 죽자 스위스의 제네바대학을 그의 신실한 제자 데오도르 베자가 이어받았다. 그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승화발전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곧 '인간의 범죄'였다. 죄를 범해야 구원하기도 하며 멸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그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인간을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하려면 범죄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아담의 범죄도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보다 못한 평신도 코른헤르트가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시고 누구는 멸망하기로 예정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일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며, 그렇다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베자는 그의 주장을 대항하도록 대학교수이자 신실한 제자였던 알미니우스에게 반박하게 하였다. 이제 큰 사명을 받은 알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성경을 다시 조사하게 된다. 특히 예정론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구절이라고 칼빈이 주장하는 롬9장을 더 연구했다. 그런데 아뿔싸! 9장은 결코 인간 개인의 이중예정론을 뒷받침해주는 성경말씀이 아니었다. 9장은 이스라엘백성의 쓰임(사역)에 관한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칼빈이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예정하셨고, 야곱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기로 예정하고, 에서는 버리기로 예정하셨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즉 칼빈의 주장은 잘못된 해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그들을 하나는 구원으로 하나는 버리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는 사역적 예정이었던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야곱과 에서는 민족의 대표로서 이스라엘민족과 에돔족속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구원예정으로 잘못 적용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떻게 쓰임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자는 자신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을 받기도 하지만, 믿지 않고 회개하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베자는 자신의 또다른 제자였던 고마루스로 하여금 알미니우스를 반박하게 한다. 그런데 얼마 후 베자도 죽고 이어서 4년 뒤에는 알미니우스도 죽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가르침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날로 가르침들은 정리되었고, 드디어 A.D.1618년 도르트회의를 통해 일단락되게 이른다. 하지만 이 회의가 오늘날 칼빈주의만이 정통이라고 하는 교리라 정착하게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러분은 그 회의가 얼마나 억압적인 분위기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얼마나 불공평하게 내려진 결론이었는지를 공부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4)칼빈의 예정론 중 '성도의 견인' 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칼빈의 예정론의 교리가 쓰여있는 <기독교강요> 321장과 22장에 나오는 (5)성도의 견인교리와 (2)무조건적인 선택부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칼빈의 후계자들을 통해 완성된 칼빈의 예정론교리는 크게 5개항목이다. (1)전전타락,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 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혜, (5)성도의 견인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5)성도의 견인교리는 칼빈의 책 <기독교강요> 321장과 24장에 나온다. 오늘은 먼저 21장에 나오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살펴보고, 22장에 나오는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21장에 나오는 (5)성도의 견인교리 부분을 살펴보자. 칼빈은 이 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여 구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힘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함 힘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한 번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을까? 아니다. 성경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얼마나 많이 증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훗날 칼빈주의자들은 혹시 예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그가 형식적으로만 예수님을 믿었을 뿐 진정으로 믿지 않아서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성경은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구원의 노정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던 가룟유다가 구원을 잃어버렸고,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물질욕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다가 그가 즉사 당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유독히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제시한다. 특히 히6:4~810:26~31은 이러한 말씀의 대표적인 성경구절이다.

 

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딤전1:19~20의 말씀에서, 믿음에 파선한 자로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언급한다. 또한 딤전4:1에서 어떤 사람이 후일에 믿음에서 떠나서 미혹의 영과 귀신을 가르침을 따라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즉 믿음을 가진 자라도 그가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마치지 못하고 파선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구원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며 그날도 경주를 마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예수님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7:21~23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도 불법을 행함으로 버림당할 수 있음을 언급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서는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 지워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3:5). 한편 사도요한도 요한계시록 14:12에서는 성도들의 인내로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구원은 믿음과 동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믿음이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의 순례자의 여정과도 같은 것이다. 구원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고 회개했으면 이제 구원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다. 그는 반드시 구원의 경주를 끝마쳐야 한다. 그래야 죽고나서 구원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말씀은, 현재 분사 능동태 구문으로서, 구원받는 믿음은 한 번 믿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가진 자가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3:16).

 

 

5)칼빈의 예정론 중 '무조건적 선택'은 성경적인 교리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칼빈이 그의 책 <기독교강요> 322장에서 말하고 있는 (2)무조건적 선택에 관해 살펴보자. 이 책에서 칼빈은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통해서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원하기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그를 쓰시겠다고 작정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떤 자를 구원과 유기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를 구원하기로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무조건적인 선택은 어떤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라, 믿고 회개하고 끝까지 따르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한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한편, 알미니우스도 나중에는 칼빈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예지예정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 주장은 중간적인 입장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은 예지의 능력으로 사람의 믿음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해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애매한 입장이다. 분명한 것은 만세전부터 어떤 개인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불변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는 구원하기로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그가 교회의 중직자의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주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오늘은 칼빈의 예정론의 역사와 그의 두 가지 교리 (5)성도의 견인교리와 (2)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칼빈주의의 병폐와 그 위험성에 대한 마지막 시간으로서, 기독교강요 제24장에 나타난 (5)성도의 견인교리와 함께 더불어 제22장에 나오는 (3)제한 속죄와 제23장에 나오는 (1)전적인 타락과 (2)불가항력인 은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선택이 아닌 유기(버림)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타락할 것도 예정하셨는가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8. 칼빈의 예정론과 그 허구성

 

 

 

 

 

 

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얼마나 성경적일까?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하나님 제일주의요 성경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하는 성경주의 사상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무턱대로 어떤 사람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참된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간다. 그리고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 멈춘다"고 칼빈주의자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칼빈주의에 관해 쓴 책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칼빈주의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교리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과연 칼빈주의 예정론이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리들 중에서도 가장 성경적인 교리에 해당하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이 쓴 책 <기독교강요>(1559년판)에 나오는 칼빈주의 5대교리의 근원이 되는 그의 글들을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칼빈주의의 5대교리의 근간이 되는 주장들은 칼빈이 쓴 책 <기독교강요>(1559년판) 21장에서부터 24장을 보면 된다. 특별히 "칼빈주의 5대교리"라는 말은 1618년 도르트회의를 통해 비로소 결정된 것을 우선 알 필요는 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글을 가지고, 칼빈주의 예정론과 그의 5대교리를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

 

 

1)칼빈주의 예정론과 그 허구성

칼빈의 예정론이란 무엇이며 과연 이 예정론은 성경적인 주장일까? 칼빈의 예정론은 <기독교강요> 21장에 나온다. 그는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예정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정은 없다. 칼빈의 예정론을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지옥)으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어떤 개인을 영생과 멸망으로 예정해놓았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아니 한 구절도 없다. 오직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복음을 들어 믿고 회개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또한 멸망도 만세전에 누가 미리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개인을 그렇게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내팽개쳐버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개인구원예정 혹은 칼빈의 개인멸망예정은 비성경적인 주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2)칼빈의 5대교리와 그 허구성

그렇다면, 칼빈의 5대교리는 무엇이며, 5대교리는 과연 성경적인 주장일까? 먼저 1618년에 도르트회의에서 결정한 <칼빈의 5대교리>를 살펴보자. 그것은 1)전적인 타락,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 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4)성도의 견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정작 칼빈은 이렇게 목록별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문구를 만들어 낸 것 뿐이다.

 

. 전적인 타락

이제 첫 번째로, 전적인 타락의 교리에 대해 보자.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233절에서 7절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모든 사람은 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로 더럽혀져 있고, 그것은 영원한 심판을 받아 사망에 들어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류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237).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병주고 약주고 하시는 분일까? 하나님께서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사람을 죄짓도록 유혹하시고 또한 그중에 일부만을 구원하기로 작정해놓고 결국에 그들로부터 영광을 얻으시려고 환장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결코 죄의 창시자가 아님을 알라. 죄는 아담이 지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를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셨다(2:16~17).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짓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니시다. 죄를 짓도록 유혹한 실체는 에덴동산에 불법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탄마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그중에서 몇은 구원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을 얻고 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그것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맡기셨다. 뱀의 유혹을 받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도 칼빈은 인간이 죄로 타락하게 될 것까지도 다 예정해놓으셨다는 주장하였다. 심지어 칼빈은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238)"고까지 말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고 또한 미리 결정하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이끌어 갈 뿐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시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 무조건적인 선택

두 번째로,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주장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225절에 나온다. 칼빈은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과 멸망을 무조건적으로 정해놓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제2211절에서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없이 은혜를 받은 것처럼, 에서도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롬9:13을 언급했다. "그들은 아직 선악간에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어찌 이렇게까지 성경을 왜곡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칼빈은 성경을 짜집기했다. 25장을 읽어보라.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은 두 민족에 관한 쓰임이었다.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25:23). 이것은 두 민족의 사역에 관한 예정이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에도 종으로 살다가 죽든지 주인으로 살다가 죽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쓰임이 곧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더욱이 칼빈은 사람들을 속였다. 마치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9:13에 나오는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때로부터 1,60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이다(1:2~3). 또한 에서가 나중에 에돔족속이 되었는데, 그때 자신의 동생이었던 야곱민족을 섬기게 되리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지에 따라, 미리 리브가에게 말해주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인지는 에서와 야곱이 선택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에서는 장자의 권한과 축복을 경홀히 여겼고 그것 때문에 결국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야곱족속인 다윗왕을 섬기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구원을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단지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에서와 야곱의 구원을 만세전에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해놓은 것처럼 바꾸어버렸다.

그래서 칼빈의 제자 중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칼빈의 <기독강요>가 나오고 얼마 뒤의 일이다. 당시 평신도인 코른헤르트가 칼빈의 예정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냈다. 물론 이때 칼빈은 죽고 없었다. 그러자, 칼빈의 수제자였던 베자가 자신의 신실한 제자였던 알미니우스에게 코른헤르트를 반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제22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민족에 관한 사역에 관한 예지였을 뿐, 그것이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장 신실한 칼빈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반대자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의 주장이 후대에 가서는 알미니안주의가 되었다. 그렇다. 칼빈은 성경구절을 이곳저곳에서 짜집기하여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

 

. 제한 속죄

세 번째로, 제한 속죄를 보자. 제한 속죄란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주장이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 227절에서 "하나님은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셨으나, 세상 자체는 그가 예정한 대로 자멸하게 내버려두셨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짜로 제한된 소수 곧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딤전2:4)",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요일2:2)",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심은(고후5:15)", "그는 참으로 온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4:42)".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3:16)",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일부러 작게 축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불가항력적인 은총

네 번째로,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해 살펴보자.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 2314절에서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다"고 했으며, 227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인 사람을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10:28)"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빛보다 더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짓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으로 나가려면 먼저는 죄를 회개해야 되고, 그 죄를 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짓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어찌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끊으려고 할까?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부모가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왔거나, 아니면 여러 인생경험을 통해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 자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인간은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신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뒤부터는 누구든지 스스로 자신의 선택의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의 결과를 묻는 것이므로 그분의 심판은 언제나 공의롭게 되는 것이다.

 

. 성도의 견인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칼빈의 교리 가운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 교리 때문에 사람들이 죄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회개치 못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17절에 나온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힘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또한 칼빈은 제246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하고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안전하리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7절에서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칼빈은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서 요6:3739절 그리고 요10:28을 중요하게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말씀들은 한 번 믿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일까? 아니다. 왜 그런가? 먼저, 637절을 보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는 다 예수님께로 갈 것이고, 그들 중에 어느누구도 내쫓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기행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말씀하셨지, 결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도록 예수님에게로 이끄시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그들을 내어쫓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만세전에 구원얻기로 예정된 자를 예수께서 내어 쫓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은 구원얻기 위해 주님께로 계속해서 나아오는 자를 주님께서는 내어 쫓아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려고 오는 자를 예수께서 '너는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으니, 저리 가라"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얼마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얻도록 허용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만 더 보자. 10:28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들에게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받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을 주님께서 결코 빼앗기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사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멸망치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지,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멸망치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문맥을 보라. 그 앞 구절에 나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다. 영생을 얻고 멸망치 않을 사람이란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순종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인 것이다. , 얼마나 간단한 이 속임수에 우리가 속아버렸던가? 문맥을 무시하는 성경해석, 중간에 살짝 끼워넣는 문장의 교활함, 성경원문을 무시하는 해석 등이 그동안 감쪽같이 우리를 속여 왔던 것이다.

 

 

3)이제는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도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 칼빈은 신앙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도 엄청난 문제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제네바시에서 4년동안 통치하는 동안 칼빈은 무려 58명이나 되는 사람을 교수형과 참수형과 화형으로 죽였다. 대부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살인하는 자는 과연 누구에 속한다고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8:44).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경을 교묘히 짜집기하여 마치 성경이 자신의 예정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속였고, 문맥을 무시는 성경해석으로 예정론을 주입시켰으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장본인이자 폭군으로 속여 왔으며, 어떤 사람은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작정하셨다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매우 불공정한 분이자, 지독한 편견을 가진 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사람을 뒤따르려고 애쓰는 것인가?

그가 죽은지도 벌써 500년이 지났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믿고 따라야 하겠지만, 사람의 주장이나 교리는 시대의 산물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는 천주교의 행위구원론과 교회를 통한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믿음구원론과 하나님 주권구원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만 잘못되어 성경을 벗어나 버린 경우다. 이제는 우리도 알아야 한다. 그의 가르침이 결국 죄짓고 있지만 회개하지 못하게 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고 있다가 회개치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는 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었다. 정신 차릴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경을 원문그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구원의 경주를 당신도 시작할 수가 있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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