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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구원, 언제든지 취소청구 됩니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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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1월 22일 (목) 23:08:31
최종편집 : 2015년 01월 24일 (토) 13:13:12 [조회수 : 6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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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은 구원, 언제든지 취소청구 됩니다.

 

마10:22b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위의 구절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들어 와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절대 예수 밖으로 못나간다’는 뜻과 이어져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새겨질 수 없습니다.

   문맥 안에서 위의 구절을 읽기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에 겪게 되는 다양한 삶의 고통을 예수의 이름으로 견뎌내지 못하거나 극복해내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제대로 된 구원의 은총을 허락받지 못한다”는 뜻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마13장의 뿌려진 씨앗들 비유 말씀 참조). 영원한 구원의 여정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구원 취소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다 견디고 이기게 하시므로 한 번 얻은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구원교리에 따르면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성서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단6:26).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일단 구원받은 사람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산다고 해도 구원의 은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의 깊은 속,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사람의 조건에 의해 좌우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또한 하나님에 대해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도 말씀합니다(약1:17). 그러므로 일단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이미 자신이 받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죄악으로 무능한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총을 인간 쪽에서 취소한다는 것 역시 가당치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본문에 의하면 받은 구원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리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아무리 교리에 맞춰 본문을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성서본문은 의심할 수 없게도 ‘구원받은 자들이 스스로 행하는 구원 취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적 믿음에 근거하여 ‘구원 취소 불가’의 관점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구원이 작정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시므로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리적인 믿음일 뿐이지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총을 하나님 면전에서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스스로 반납할 수 있는 죄악의 존재입니다.

   바울의 구원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롬1:16). 심지어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무리 인간 쪽에서 “내가 믿는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조차도 인간 쪽에서 만들어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은혜입니다.

   이때 구원이 필요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가 섭니다. 죄악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존재라고 할지라도 ‘주는 것을 받지도 못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구원을 위한 믿음을 받는 것 외에 인간 쪽에서 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한 바울의 가르침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무능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구원으로 작정되지 못한 인간 존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게 된다는 논리가 제시됩니다. 하지만 말 못하는 언어장애인은 예외일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선언한 이 말씀이 갖는 속뜻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행함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한다거나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즉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말씀 안에 담겨 있으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즉시 현재적으로 구원이 확정된다’거나 ‘완성된 구원이 보장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도 바울의 말 중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미래시제 입니다. 바울은 명확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 의하면 ‘지금’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즉시 현재적으로 ‘지금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확정짓지 못합니다. ‘지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는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의 미래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지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해서 완벽한 구원을 확보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서의 ‘행동’을 명백하게 지적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을 완벽하게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인간 쪽에서 감당해야 할 몫을 제대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보게 됩니다(고전13:2; 빌2:12 참조).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성서에 있지도 않은 ‘행위 구원론’을 운운하면서 “행위가 필요 없는 믿음만으로의 구원”이라는 교리적 구원론을 확보해 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들은 ‘신인협력설’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비성서적 어휘를 만들어 내세우면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말하는 사람들을 원수 대하듯이 몰아세웁니다. 분명하게도 성서 어디에도 ‘신인협력설’을 운운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행위를 말하는 것은 인간 쪽의 책임문제를 거론하는 것일 뿐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거나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전혀 아닙니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회는 ‘신인협력설’을 말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복음적 신인협력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인다운 마땅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을 힘써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 용어는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인간의 선행 공로로 구원을 따낸다는 논리에서 만들어진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 쪽의 노력을 말하는 표현이 아니란 뜻입니다. 용어가 나타내려는 핵심 속뜻은 예수께서도 지적하신 대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적시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 그 자체는 완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미 허락받은 인간이 완벽한 구원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을 틀어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마23:13)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절대로 온전히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경험한 구원의 은총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완전한 구원이 되려면 활짝 열린 구원의 문 안으로 쑥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총이 완벽하게 허락될 리가 없습니다. 존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력설’은 바로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행태가 그리스도인들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받은 구원을 중간에서 포기하거나 취소청구하는 예

   그런 시각을 갖고 볼 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언제든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구원 취소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구원의 은총이 어떠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세상을 살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지 못하면” 중간에서 얼마든지, 그리고 가다말고 언제든지 이미 허락받은 구원의 은총을 죄악 된 인간이 스스로 내던지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지도 않으셨으면서 구원의 감격을 맛만 보게 하시고 멸망으로 던져버리시는 분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과연 구원의 하나님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에게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분인지, 그런 하나님을 온 인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따라서 아무리 주의 이름을 세게 부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의지하여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완벽한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죄악 된 인간 존재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하나님께 되돌리거나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등의 막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인간 자신이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반납하는 행위를 적시합니다.

   위에 제시된 마태복음의 한 구설은 인간존재가 그 동안 경험했던 구원의 은총을 중간에서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던 주후 30년경 당시에는 아직 예수로 인해 예수 따르미들이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할 만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저자가 ‘예수 당시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박해의 상황을 전제하는 표현’을 기록한 신학적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어떤 모습으로 각종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셨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체포되신 후 ‘공회’에 넘겨지셨습니다(마26:59). 그처럼 제자들도 공회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10:17). 예수께서는 매를 맞으셨습니다(27:26).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채찍으로 매를 맞을 것입니다(10:17).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심문받은 후에 이방인 총독에게 끌려가시기도 하셨습니다(27:11). 그처럼 예수 따르미들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왕으로 지칭되던 헤롯에게도 끌려가셨습니다(눅23:7). 그러므로 제자들 역시 예수께서 당하셨던 고난을 그대로 받아 그들도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마10:18).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족 간에 나타날 격렬한 반대와 핍박도 예고되었기 때문입니다(21절). 마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미쳤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셨습니다(3:21).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가족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마10:34~37참조).

   이와 같은 고난에 대해서는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와는 만난 적도 없었지만 예수께서 당하셨던 고난을 그대로 당했습니다. 바울은 사십에 한 대를 감해주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고후11:24; 신25:3). 거기에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고후11:25~26). 선교활동 후반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방인 총독들이었던 벨릭스와 베스도에게 끌려갔으며(행24장,25장참조), 헤롯에게도 끌려갔었습니다(25장,26장참조). 이때의 헤롯은 총독 벨릭스와 처남매제지간이었던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구원의 여정에서 중도탈락하지 않도록 스스로 힘써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모습에 완전히 일치하는 예수 따르미들의 모습’을 봅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시대에서 볼 때 사도들은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예수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의 모습을 본받아 살면 그것으로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완벽한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누리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예수의 제자들처럼 “[예수→제자들→자기 자신들]”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은 구원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효과만 나타날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사는 삶이 불편하거나 싫어서, 혹은 더 이상 예수의 모습을 본받아 사는 것에 대해 미련이 없어서 그 동안 부르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접고 예수 믿는 삶을 스스로 취소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단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예정에 따른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멸망으로 예정되었던 자였기에 그가 예수를 배반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유다 복음서를 정경으로 채택해야 정상입니다.

   유다 복음서에 따르면 유다의 예수 배신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배신은 지탄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신인협력으로 이루어진 신인합작의 구원사역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도 가룟 유다의 배신을 완곡하게 묘사하려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유다 복음서에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가룟 유다의 인간적인 의지에 따라 자신이 스스로 예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한 악의 권세에 조종된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입니다(요13:2,27). 하지만 그런 논리는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분명하게도 가룟 유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예수를 배신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의심할 수 없게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거나 취소, 혹은 반납했습니다(요6:71; 12:4; 13:27 참조). 그것은 조건 없이 부름 받은 구원의 은혜를 인간 쪽에서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아낌없이 내버리는 자들이 완성된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경우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내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구원으로 예정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불 수 없습니다. 만일 예정 받지 못한 내외였으므로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고 본다면 하나님은 구원으로 예정되지 못한 내외의 재산을 뺏은 뒤에 죽여 버린 형국이 되고 맙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가룟 유다 및 아니니아-삽비라 내외는 명확하게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들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이미 받았던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내던져버린 형국이기 때문에 구원의 여정에서 스스로 이탈한 것으로 보아야 적절합니다. “끝까지 견디므로 영원한 구원에 완벽하게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반열에서 벗어난 자들”임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22b 참조).

   따라서 가롯 유다를 비롯한 여러 중도 탈락자들이 주를 배신하거나 믿음생활을 포기하거나 부적절한 행태를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선례로 남게 된 것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특정의 사람들을 멸망으로 예정해 놓고 구원의 선물을 맛만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구원을 열망하는 인간존재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믿는 자다운 삶의 모습에 문제가 없도록 수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 탈락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스스로 반납하거나 취소하지 않으려면

   인간의 죄성은 구원의 은혜를 받았어도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가롯 유다 같은 짓을 저지르는 죄악을 범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선물로 받은 구원의 은총을 잃지 않도록, 기왕에 허락받은 구원의 감격을 영원에 잇댈 수 있도록 끝까지 전진함으로 중간 탈락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시킨다는 신인협력설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 반, 인간 반(하나님50%, 인간50%)의 신인협력으로 완성되는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신인협력설’이라는 주제는 성서를 통해 주장될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실천행동 명령에 잘 순종하는 중단 없는 전진만이 지금 받은 구원의 은총을 완벽하게 영원으로 잇대어 누릴 수 있는 비결임을 밝히 인지하시면서, 이미 받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취소, 또는 감히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오만방자한 죄성을 드러내는 허탈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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