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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윌버포스
1759~1833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라고 가르친다.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며, 권력을 남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사회가 갈등을 겪는 일이 줄어든다. (......) 기독교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하지만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런 일을 실현할 수 없다. 참된 기독교만이 그럴 수 있다. 겉보기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속으로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                                                                                       

 

- 윌리엄 윌버포스, [참된 기독교](1797) 중에서

18세기 영국의 명암

18세기의 영국은 힘차게 발전하는 나라였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 절대왕정의 모순 속에서 정치적 갈등의 격화를 맞고 있던 당시, 영국은 이미 17세기에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통해 근대적 정치체계를 이룩한 상태였다. 또한 18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와 국부가 증대하는 흐름이 계속 이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비록 미국의 독립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의 경쟁을 물리치고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다지며 세계 최대의 해군국가이자 무역국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밝은 빛에는 또한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과 공유지의 소멸로 농토는 소수의 대지주들에게 독점되었으며, 땅을 잃은 농민은 도시 노동자, 빈민이 되었다. 공업의 기계화가 진행되며 기술자들이 단순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렇게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하층계급이 빠르게 늘어나는 와중에 사회복지제도는 아직 없다시피 했다.

 

 

보통은 종교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위로하고 다소의 복지 서비스를 담당하건만, 당시의 영국 국교회는 계몽주의의 풍토 속에서 영적 권위를 잃었을 뿐 아니라 성직자들도 상류계급의 일원으로서 하류층에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되니 전국적으로 향락산업이 날로 번창했다.돈이 넘치는 상류층이나 당장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하류층이나, 자극적인 볼거리, 술, 도박 등에 빠져 삶의 무료함 또는 고단함을 잊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을 방문한 유럽 대륙 사람들이 “영국에는 종교가 없는 것 같다.” “영국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야만인들이다”라고 할 만치, 경제수치로만 급히 발전하는 사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회문제와 아노미 현상이 18세기 영국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은, 사회주의 등의 이념에 앞서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었다.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1759년, 영국 요크셔의 킹스톤 어폰 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윌리엄은 발트 해에서의 무역으로 부자가 된 다음 헐 시장을 두 번 역임한 유지였고, 아버지인 로버트 역시 부유한 상인이었다. 로버트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은 체구가 작고 여린 기질이었으며, 큰 병을 앓지는 않았어도 잔병치레가 많고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인 덕분에 자라나면서 별다른 고생은 겪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이후 큰아버지 집에서 한동안 지낸 다음 큰아버지의 막대한 유산까지 상속하게 되었으므로 사회에 나가기까지 도무지 돈에 궁할 일은 없었다.

 

윌버포스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윌리엄 피트. 24세에 수상이 되었으며,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냈다.

윌버포스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윌리엄 피트. 24세에 수상이 되었으며,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도의 폐지를 이끌어냈다.


 

그런 윌버포스의 성장기는 도련님다운 모습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술과 도박을 비롯한 유흥에 빠졌고, 177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학업성적이 빼어나지도, 공부에 열심이지도 않았다(어려서부터의 시력 장애 때문에 책을 오래 읽기가 힘들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는 그에게 장차 영국 역대 최연소 수상이 될 윌리엄 피트 (William Pitt, 1759~1806)를 비롯한 인재들을 사귈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씀씀이가 헤프고 방탕한 편이었지만 비열하거나 잔인하지는 않았고,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말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 무렵에는 정치가를 목표로 정하게 된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그에게 평생 놀고 먹어도 될 만큼 많은 돈을 남겨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에 또 다른 유산을 새겨두었다. 그것은 바로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를 비롯한 종교가들에 의해 18세기 초ㆍ중반부터 세력을 키워오고 있던 복음주의는 정통 국교도들의 눈에는 ‘메소시스트(methodist)’, 즉 너무 진지하고 규칙에 얽매이는 사람들이라거나 ‘광신도’로 비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윌버포스의 할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손자가 그런 이상한 신앙에 물들까 겁낸 나머지 그를 큰아버지 집에서 다시 데려오고, “앞으로 복음주의자와 상종했다가는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윌버포스도 곧 큰아버지 집에서 접한 복음주의를 잊어버렸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그 정신이 숨어서 언젠가 불길로 타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심, 새로운 인간의 탄생

1780년, 윌버포스는 21세의 나이로 킹스턴 어폰 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당시의 관행대로 매표 행위가 개입된 선거였으며, 아직 뚜렷한 정치의식이 없던 윌버포스는 당선된 후에도 흥청대는 생활을 했다. 그의 친구 피트는 그보다 한 해 늦게 하원의원이 되더니 이듬해에는 재무장관, 다시 한 해 뒤에는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든든한 ‘배경’이 일찌감치 생긴데다 윌버포스 자신도 천부적인 웅변 실력으로 정가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기에,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인생도 이제까지처럼 탄탄대로일 듯 싶었다.

 

그러나 1784년, 그는 자신의 옛 교사이자 친한 선배였던 아이작 밀너와 유럽 대륙을 여행했으며 이 때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밀너와 종교 토론을 하다가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사촌누이가 갖고 있던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영혼에 있어서 종교의 성장과 진보]를 읽고는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을 깊이 뉘우치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어정쩡한 기독교도, 어정쩡한 정치인! 이대로 살 수는 없다!’

 

1790년 29세 무렵의 윌버포스. 복음주의를 통해 회심을 경험한 그는 인생에 걸쳐 실천하게 될 두 가지의 큰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1790년 29세 무렵의 윌버포스. 복음주의를 통해 회심을 경험한 그는 인생에 걸쳐 실천하게 될 두 가지의 큰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윌버포스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복음주의 성직자 존 뉴턴.

윌버포스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복음주의 성직자 존 뉴턴.

 

 

영국으로 돌아온 윌버포스는 흥청대는 삶의 본거지였던 상류층 전용 클럽에서 탈퇴하고, 술과 도박과 극장을 끊었다. 그리고 매일 일찍 일어나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매일 일기를 쓰는 생활 습관을 들였다. 어려서 큰아버지 집에서 세례받은 복음주의 신앙이 그를 사로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복음주의자라면 대체로 윌버포스의 할아버지처럼 못마땅하게 보는 분위기였기에, 그것은 자신의 정치 경력에 해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아예 정치를 그만두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설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면서 수상이던 피트는 만류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꼭 성직자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의 천분(天分- 타고난 재질이나 직분)을 살리면서도 가능할 걸세.” 복음주의 성직자였던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역시 윌버포스가 정계에 남을 것을 권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복음을 실천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핵심 강령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사상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의 하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거듭난 삶이 시작되었다.

 

 

두 가지의 큰 목표

윌버포스가 따르게 된 복음주의 신앙은 단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보는 일을 배격하며, 영적, 실천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회심(回心)’이 중요하다. 두뇌가 아닌 가슴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정적으로 참회하며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윌버포스의 인도자였던 존 뉴턴이 지은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국내 교회에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최근 제작된 윌버포스의 생애를 다룬 영화 제목도 이 노래의 제목을 사용했다)]의 가사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나 길을 잃었었으나, 이젠 다시 찾았네. 나 눈멀었었으나, 이젠 바로 보네.”

 

복음주의는 또한 단지 교회에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본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는 것인지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늘 경건히 살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 말고도 사회의 도덕과 질서를 지키고 다른 이의 모범이 되며, 나아가 사회를 더 깨끗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일도 포함된다고 본다. 윌버포스는 자신이 바로 그런 일에 나서야 하며, 정치를 통해 그런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 과업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바로 노예제 폐지였다.

 

영국은 17세기부터 노예무역을 본격화했으며, 18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노예무역국이 되었다. 1770년의 통계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유럽 식민지로 팔려가는 노예의 절반 가량을 영국 노예선이 실어 날랐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주요 항구 도시들은 노예무역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고, 연간 수천 명의 선원 일자리와 수백 척의 선박 건조 및 유지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영국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노예무역상과 농장주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직접 하원의원 자리를 얻거나 하원의원을 매수하는 일도 다반사였기에, 당시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말은 오늘날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을 폐지하자는 말이나 다름없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게 들렸다. 그러나 누가 봐도 이것은 더러운 장사였다.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한 노예들은 좁은 선실에 짐짝처럼 던져져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쇠사슬에 묶여 대양을 횡단해야 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10퍼센트가 죽었다. 죽지 못해 살아난 나머지는 벌거벗은 채로 경매에 붙여지고, 주인이 정해지면 가족과 헤어져 뿔뿔이 농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훈련’이라는 이름의 매질과 성폭행과 가혹행위 속에 다시 30퍼센트가 죽고,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평생 짐승처럼 살 운명을 견뎌야 했다. 프랑스대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전후하던 당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인권을 갖고 태어났다는 계몽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벌어지던 일이었다.


 
“나 역시 인간, 그리고 형제가 아닙니까?” 노예무역 폐지운동에 공감한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1787년에 만든 포스터.

“나 역시 인간, 그리고 형제가 아닙니까?” 노예무역 폐지운동에 공감한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1787년에 만든 포스터.

 

한때 노예무역업에 종사하다가 노예들의 참상을 보고 회심하여 성직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존 뉴턴도 그런 경우였다. 역시 그렇게 목사가 된 제임스 램지는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힘을 써줄 정치인들을 찾았고, 1781년에 찰스 미들턴, 토머스 클랙슨, 한나 모어 등의 사람들과 뜻을 모으고 노예제 폐지 운동에 나섰다. 윌버포스는 램지 등의 활동을 처음에는 먼산 보듯 했으나, 회심한 다음에는 열심히 마음을 쏟았다. 1786년 11월에 찰스 미들턴의 편지를 받은 그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뛰어들었고, 1787년 5월에는 윌리엄 피트와 오크나무 아래 앉아서 이 문제를 논의하다가 한 번 폐지 법안을 만들어 보라는 피트의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0월 28일에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노예무역의 금지와 풍속의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놓으셨다.”

 

 

11전 12기, 노예무역 폐지의 험난한 길

윌버포스는 정치인인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 나중에는 ‘클래펌 파(Clapham Sect)’로 불리는 동지들(1792년에 손턴의 제의로 클래펌 시에 본거지를 마련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과 함께 노예제 폐지 전략을 짰다. 그들은 노예제 자체의 완전 폐지가 최종 목표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추진하기는 어렵고, 먼저 노예무역부터 폐지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결정했다.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노예무역의 실상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결과 정부 차원에서 인정된 온갖 참상을 근거로 1789년 5월 12일, 처음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하원에서 역설했다. 윌버포스는 단지 의원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 아니라, “무역을 폐지하여 추가 공급이 중단되면 노예주들이 노예를 더 아끼고 보살필 것이며, 그러면 노예들도 열심히 일하려 함으로써 생산량이 더 늘어날 것이다”는 식으로 실용적인 접근도 하며 열심히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한 차례의 나팔 소리로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클래펌 파는 더욱 증거를 모으고 법안을 다듬어서 1791년에 다시 폐지법안을 냈으나 역시 부결되었고, 1792년에는 한걸음 물러나서 ‘즉각 폐지 대신 점진적 폐지를 지향’한다고 내세운 덕에 하원에서 통과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에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후 1805년까지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무려 11번이나 좌절을 겪었다. 윌버포스와 그 동지들에 대한 비난과 위협도 그치지 않았다. 윌버포스는 몇 차례인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그의 부인이 의회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본래 튼튼한 몸이 아니었던 그의 건강도 오랜 투쟁 끝에 점점 나빠져서 척추가 휘고 만성 위장병에 폐에 지속적으로 물이 차는 등 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편을 복용했는데, 그것이 말년에는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 많던 그의 재산도 어느덧 가물어졌다. 그는 “관리만 잘 한다면 수입의 사분의 일은 좋은 일에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는 사분의 일이 아니라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운동 자금으로 내놓는 경우가 거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굴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법안 통과 실패로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격려하며 끈질기게 폐지 운동을 이어나갔다. ‘흑인들은 열등한 생물이며,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살아 있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1792년에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을 건설, 그곳에 이주해 있던 흑인 해방노예들이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도시를 마련하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폐지 운동을 벌이다 보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여론도 차차 그들의 대의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마침내 1806년 선거에서는 노예무역 폐지가 주된 쟁점이 되고, 여기서 윌버포스를 비롯한 폐지파가 압승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1807년 2월 23일,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통과된다.

 

실로 오랜 투쟁 끝의 결실이었으나 윌버포스는 아직도 만족하지 않았다. 애초에 최종 목표로 잡았던 노예제 자체의 완전 폐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823년에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고, 윌버포스는 노예제를 범죄로 규정하며 노예해방을 역설하는 팜플렛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할 수 없이 1825년에 의원직을 사퇴하고는 뒤에서 동지들을 돕는 역할에 힘썼다.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노예무역을 폐지하도록 국제적 운동을 벌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윌버포스는 병상에 누워 그 소식을 들었으며, 기쁨 속에서 사흘 뒤에 눈을 감았다.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윌버포스의 업적은 주로 노예제 폐지를 중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스스로가 일기에 썼듯 풍속(도덕)의 개혁 또한 “두 가지 큰 목표”의 하나였다. 그리고 사실 두 가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참된 기독교 국가는 노예제도와 양립할 수 없고, 당시의 무절제한 풍속 역시 용납할 수 없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 대학교(Hull College)에 서 있는 윌버포스의 기념탑. <출처: (cc) Keith D at en.wikipedia.org>

헐 대학교(Hull College)에 서 있는 윌버포스의 기념탑. <출처: (cc) Keith D at en.wikipedia.org>


 

윌버포스는 스스로 읽고 회심에 이르게 된 도드리지의 책과 같은 책을 풍속을 개량하는 목적으로 쓰고자 했으며, 1797년에 [참된 기독교](원제는 “참된 기독교에 비추어 본, 이 나라 중상류층의 자칭 기독교도들에게서 유행하는 종교체계에 대한 실천적 견해”)를 내놓았다. 이 책은 출판사로서는 판매 전망이 회의적이라 초판을 5백 부만 찍었으나, 그 해에만 5쇄를 하여 7500부를 팔았고, 이후 50년 동안 베스트셀러로 남으며 5개 국어로 번역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이 책에서 “지금의 영국은 겉보기로만 기독교 국가다”라고 일갈하며 참된 기독교 국가로 거듭날 것을 촉구했다. 복음주의적 사회도덕론을 간명하고 힘 있게 풀이한 이 책에 따르면 다만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머리로만 믿고 마음으로 믿지 않는 태도, 그리고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 미사에 참석하고 고해성사 등을 한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만” 기독교인이 된다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 믿음 또한 뜨거운 열정과 성실한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기독교도는 이기적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참된 기독교가 부흥해야 사회복지가 증진된다.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인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것은 도덕성 회복을 국가의 중요한 발전 목표로 제시하되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그것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선언이었다.

 

책의 성공과 더불어 윌버포스는 여러 단체를 세우거나 단체에 가입하여 선교 활동에서 자선 활동, 도덕성 회복 활동 등 여러 시민단체(40가지가 넘었다. 그 중에는 사상 최초의 동물보호 운동단체도 있었다.)의 활동을 지도하거나 지지했다. 클래펌 파는 역시 그 중심에 있었는데, 1787년에 국왕을 움직여서 [범죄와 부도덕에 대한 포고]를 내놓도록 했다. 당시 그것은 그냥 의례적인 말잔치가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도 많았으나, 클래펌 파는 “국왕 폐하의 포고를 실천하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그 포고령에서 언급한 대로 공직자의 비리, 향락적인 문화, 신성모독 등을 추방하자는 운동을 벌여 나가며 1789년에 뜻을 같이하는 귀족과 정치인, 성직자 등과 함께 ‘포고령 수행을 위한 협회’를 조직했다. 이는 차차 실효를 보아서, 술집의 24시간 영업이 폐지되고 관직 매매 관행이 사라졌으며 결투나 곰 놀리기 등의 잔인한 스포츠가 줄어들었다.

 

이로써 18세기의 방만했던 영국의 사회 분위기가 추슬러지고, 상류계급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 자리잡는 한편 하층계급에서는 과도한 음주나 도박에 따른 가정파괴나 범죄의 발생률이 줄었으며 성서 읽기 운동, 주일학교 보급 운동 등을 통해 문맹률이 낮아지는 성과를 보였다. 그리하여 19세기로 넘어갈 즈음에는 영국은 보다 현대적이고 계층 분화가 적은 사회, 법치주의와 공중도덕이 잘 지켜지는 사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흐름이 오직 클래펌 파와 윌버포스의 공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그런 흐름의 주도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윌버포스의 사상과 행동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았다. 윌버포스는 진보적인 운동에 많이 참여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노동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아동노동 금지법 제정에는 한몫했지만), 시민의 정치적 저항권에 대해서는 탄압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집회의 자유와 언론자유를 규제하는 ‘6대 악법’ 통과에 힘을 보탰으며, 1819년 반정부 시위 도중 11명이 목숨을 잃은 ‘피털루 학살’의 진상조사에도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윌버포스가 언제나 보수당의 방침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는데, 특히 그리스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영국의 아일랜드 전쟁에 반대한 것은 피트 수상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윌버포스와 클래펌 파는 도덕성에만 주목하면서 사회체제의 전반적 개혁이나 사회구조상의 모순 해결에는 무관심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회가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줄 수는 없고, 그 속에서 더 깨끗해지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할 뿐이라는 복음주의의 입장 때문, 그리고 당시 프랑스 혁명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유혈사태와 전통의 급진적 부정을 보며 사회의 틀을 보전하는 한에서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의 보수주의에 윌버포스가 깊이 공감한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보수적 성향은 복음주의에 경도된 한국 교회 등에서도 문제로 지적되는데, 반대로 높은 도덕주의와 열정적인 신앙이 문제를 빚는 수도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폭정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둘까보냐” 하는 식의 ‘기독교 근본주의’도 복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되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가 영국에, 아니 인류에 끼친 영향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차가운 머리로만 구원받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참된 관심과 현실적인 도움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일깨웠다. 그리고 옳은 일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오래 참고 견디며 몇 번이고 재도전하는 방식으로 마침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소금은 귀하다. 그리고 사실, 너무 많아져도 어쩌면 위험할지 모른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1. 국가인권정책기본법 발의

  2. 종교시설 방역강화...미접종자 포함 땐 수용인원의 30%까지_2021-12-17(금)

  3. 2021년 12월 13일부터 백신 안맞으면 식당·카페 못간다…어긴 손님 10만원

  4. 아프가니스탄 과 탈레반 히스토리 요약

  5.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38가지)

  6. 일반 국민과 개신교인의 동성애 인식_목회데이너연구소

  7. [코로나] 델타변이 전파력 2.5배 강해… “스테로이드 맞은 코로나

  8. 지옥이란 어떤 곳일까요?(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가르쳐주는 25가지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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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0 by 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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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36가지 증거(관련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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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3 by 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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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안한 크리스마스 캐롤 음악 | 휴식음악 | 3시간 | 조용하고 편안한 연주음악 | 아늑하고 차분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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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6 by 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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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성경 구절

  12. 가입인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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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3 by 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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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성경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

  14. [역사]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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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미국에서의 노예제 폐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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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노예제 폐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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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by 갈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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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관] 루터와 칼빈의 직업 소명론

  18. [교회사] 위그노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19. [자유] 자유가 빠지면 교회가 무너진다(대한민국을 지키는 3가지 위대한 힘_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종교의 자유)

  20. [교회사] 위그노드를 박해한 루이14세와 그의 낭트칙령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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