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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일곱 족속과 영적 의미
  

가나안-7족속.jpg


여호수아가 몰아낸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악한 일곱 기질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에 행하시는 사역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0 일곱 족속 ; ① 헷 족속 ② 아모리 족속 ③ 가나안 족속 ④ 브리스 족속 ⑤ 히위 족속 ⑥ 여부스 족속 ⑦ 기르가스 족속
  
- 수3: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 신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 민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0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 살아야 할 곳인데 가나안 족속이 선점해서 살고 있음.
  
- 레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 막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카톨릭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es)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을 일컫는 말 ;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
  
1. 헷(두려움) 족속 ; ???
  
헷 족속(Hittite)은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Heth)의 자손으로 헤브론 근처에 거주했으며 두려움과 절망의 영을 상징하며, 영혼을 거짓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낙담하도록 만들며 그로 인해서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신실치 못하게 하며, 또 땅에 속한 지혜를 가지고 믿음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적하여 논쟁하도록 만듭니다. 
  
곧 어떤 사람도 온전함에 이를 수 없으며, 누구도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낼 수 없으며, 누구도 죄와 자아와 옛 사람의 정욕을 이겨낼 수 없다고 우리에게 속삭이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낙망케 하는 두려움의 영들이 영혼으로 하여금 온전함에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도록 그들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행하는데 심지어 모든 일이 끝나고 온전함에 이를 그때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 믿음의 영은 마침내 이런 헷 족속의 영을 이기고 정복하게 됩니다.
  
⇒ 헷 족속은 구원을 예로 설명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믿음의 과정에서 여러 체험을 가지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물로 주시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이의 핵심은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나사렛의 예수란 이름을 가졌던 한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곧 믿어짐에 있습니다.)
  
이 믿음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신실한 분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여러 가지 사실들과 잘못된 가르침들에 의해 믿음에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헷 족속이 여러 두려움과 절망을 줌으로써 영적 진보를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반복적으로 약속한 언약의 땅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이르기 위해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홍해(세례, 죽음 -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에 이어 요단강에서 다시 한 번 부활을 통과해 그 땅을 밟은 것입니다.(길갈에 세운 열두 돌은 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땅에 이르렀을 때 그 땅에는 이미 그들을 대적하는 일곱 족속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가나안 땅을 상징하는 그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겠지만 우리의 경험은 젖과 꿀이 아니고 이들 일곱 족속이 상징하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경험하고 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우리에게 이런 경험을 주실까요? 이것이 이 일곱 족속을 이해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위치의 문제가 아니고 성장의 분량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이 싸움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이 싸움은 반드시 필요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위치와 본질은 그리스도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한 장성한 분량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엡4:13)
  
따라서 이 일곱 족속은 우리의 위치나 우리의 본질에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위치와 본질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그 위치에서 여러 방법을 통해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영적 성장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 안에서 이런 것들이 발견되어질 때 그것을 하나씩 극복해 감으로써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이 일곱 족속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고는 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추가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젖과 꿀’에 관한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에서 매우 흥미 있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 민16:13, 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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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장면은 고라와 그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적하는 장면에서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출애굽하여 나온 그곳을 13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들이 인용한 것은 그들이 들어가야 할 약속으로 주신 땅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젖과 꿀과 육신의 눈으로 보는 젖과 꿀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매우 큰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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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순간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다면 바울처럼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며, 삼손처럼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을지라도 그 사자를 죽여서 그 주검에서 꿀을 얻는 용사가 될 것입니다.

  
  
2. 아모리(산중 사람/ 탁월함) 족속 ;????
  
가나안 동편에 거했던 아모리 족속은 쓰고 상처를 주는 말과 판단하는 영을 상징하며, 이것저것을 판단하는 모든 것이 이 쓴 뿌리에서 나옵니다. 
  
이 쓴 영들은 아름다운 백합의 향기가 영혼에서 솟아나는 것을 방해하며 심지어 어린 양의 부드럽고 유순하며 온화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나 다른 사람 안에서나 또 친구나 적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심술궂은 영은 우리에게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도록 자극합니다. 또 사나움과 분노로써 유순함과 사랑함과 한마음이 되는 것과 선한 행동을 대적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을 경멸합니다. 
  
한 마디로 질투와 증오와 시기와 성급한 판단의 영들이 바로 아모리 족속의 영인데 여호수아 곧 예수께서 좇아내게 될 것입니다.
  
⇒ 성경에서 산은 상징적 의미에서 높은 곳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이 아모리 족속의 미혹에 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빛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사울이었던 바울처럼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은 가졌으나 곧 자신은 무엇인가 보았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리의 참된 의미인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형제들이 넘어지기 쉽습니다.(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보기는 보되 벳세다의 맹인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사람을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참 진리를 접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교만해 질 수가 없으며, 형제를 분별은 하되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가나안(낮은 땅/ 장사꾼) 족속 ; ?????
  
가나안 족속은 장사하는 영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감각과 관념과 애정을 거래합니다. 이 영은 사는 자들과 파는 자들을 영혼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과도하게 우리의 마음과 뜻을 소모시키고 또 일시적이고 무익한 것에 지나치게 우리를 관여시키도록 하여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침묵과 순전한 고요함인 어린 양의 법을 거슬려 더럽혀지게 하고 필요한 한 가지 것에서 떠나 많은 것에 빠지게 하고, 연합과 조화에서 떠나 잡다함과 불일치로 빠지게 합니다.
  
⇒ 이 족속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생활의 잡다한 것에 무익한 것에 두게 함으로써 정작 바라보아야 할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영입니다. 이를 실제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 같지만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예수께서 방문하신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준비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집중하자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절)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주님이 주신 환경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땀을 흘려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경에서도 로렌스 형제처럼 우리의 중심은 주께 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잔치를 하는데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고,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2,3절) 그러나 이때 마르다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가나안 족속의 영이 주는 것에 이끌려 주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4. 브리스(열린 마을, 시골) 족속 ; ????
  
브리스 족속은 가나안 남쪽에 거주하는 족속으로 부주의하고 헛된 안전에 속한 영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일이 완성되고 할례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중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거짓 자유에로의 문을 열어주는 영입니다. 이 영은 계속해 우리로 깨어있지 못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소홀히 하도록 하여서 거짓 안전에 머물도록 합니다. 
  
또 온갖 악한 영들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어린 양의 생명을 억압하여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과 계속적인 할례를 버리게 합니다.(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서 완전함 안에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와 자아는 계속 다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억압합니다.
  
⇒ 진리는 ‘하늘들과 땅’이라는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언제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안에 교만한 마음이 있어서 무엇을 조금 깨달으면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브리스 족속의 뜻인 열린 마을처럼 대적에게 한쪽 문을 열어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는 주께서 영원 안에서는 온전히 이루신 일이지만 그러나 한 면에서는 오늘 여전히 내게서 적용이 되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면만의 진리를 본 사람들은 실제로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까지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룬 것처럼 방심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다만 안타까운 열매를 얻게 될 뿐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를 수’(빌3:11)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은 장차 있을 그 부활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논리적 순서만 죽음이 앞설 뿐이지 동시적 사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들어가지 않고는 부활의 능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브리스 족속이 주는 헛된 안전의 미혹에 속아서 이 날마다 이루어야 할 십자가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히위(야영지, 작은 마을) 족속 ; ???
  
히위 족속은 가나안 북쪽 헐몬 산 근방에 거주했던 족속이며 말과 관념의 영으로서, 우리로 헛되고 무익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이 영들은 우리에게서 헛된 생각과 관념을 깨워서 공허한 환상으로 채우며 이를 통해 사상과 관념에 많은 생각들을 주입시키고 만들어내어서 쓸모없고 죄성 있는 담론과 논쟁을 유발하는데 이는 신성한 생명이 일어나는 것과 성장을 매우 방해합니다. 
  
그 영들은 우리를 관념으로 채우고 우리의 생명과 힘을 허황된 사색과 불필요한 논쟁에 소모하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해 우리를 변함없는 순종과 깨어있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히위의 영들 아래서 세상의 예술과 과학의 모든 것들이 나옵니다. 이 영이 하는 것은 다만 환상 안에 있는 관념과 사색을 깨워서 그것을 통해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순전한 하늘에 속한 생명을 번잡하게 하고 유혹하고 혼잡하게 합니다.
  
이 영들은 이 세상의 영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에 관한 추구가 자신들을 속여서 스스로 잘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타락 아래 서 있으며 또 영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있어서도 머릿속에 온갖 종류의 관념과 의견들로 계속해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와 환상과 신령한 것들과 관련된 깊은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관념적으로만 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우리를 온전한 죽음과 우리의 옛 본성과 세상에 속한 나쁜 관습들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 것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겸손과 영적인 가난과 순전함과 단순함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고요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무시하고 소홀히 하도록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 영적 고요함이야말로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어떤 다른 은사나 지식보다 더욱 단장하게 해줍니다.
  
⇒ 성경에서 헐몬 산은 성령이 이슬로 내리는 곳이며 그 산의 눈이 녹은 물은 이스라엘의 땅 속으로 흘러서 우물이 되어 양떼를 먹이는 생명의 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133편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2,3절)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헐몬에 온전히 있다면 우리는 온전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히위 족속처럼 헐몬에 있지 않고 근방에 거주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온갖 지식과 신학과 정보를 통해 마치 헐몬 산에 있는 것처럼 주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실제가 되지 못하고 관념을 떠돌며 그것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상처주고 판단하는 죄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된 지식을 우리가 가질 때 우리는 오히려 조용해지고 말 수가 적어지며 듣기를 좋아하고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본질이 그렇게 상품처럼 쉽게 내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서로 간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는 것처럼 몇 마디 말을 하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헐몬에 있지 않고 근방에 살 때 우리는 많은 무익한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삶의 잡다한 것에 마음을 뺏기게 한다면 히위 족속은 높은 이상은 쳐다보기는 하는데 실재는 없는 공허함 가운데 우리를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스스로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은 실지로는 헐몬 산에 있지 못하고 근방의 히위 곧 야영지요, 작은 마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6. 여부스(짓밟는, 타작마당) 족속 ; ?????
  
여부스 족속은 교만과 자만의 영을 나타내며, 이 이름은 짓밟고 경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불의 교만과 힘으로 예수의 피와 미덕을 계속 짓밟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의 마음과 사랑의 힘 위로 높여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겸비와 유순의 길을 모욕하고 경멸합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 안에 있는 진주를 밟도록 하며, 영원한 지혜의 순전함과 하나님의 귀한 것들의 가치를 무시하도록 하며, 우리를 그들의 배역 속으로 끌어들여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구속의 피를 얕보도록 하며 또 우리를 영적 교만에 빠지도록 부추겨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온전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또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예수의 생명을 소홀히 하도록 만듭니다.
  
⇒ 여부스 족속은 말 그대로 교만하며 자만한 영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역시 실재가 없는 지식을 가질 때나 자신이 속한 곳을 최고로 여길 때 나오기 쉬운 영적 태도입니다. 영적 교만처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이 교만의 근원은 자신의 실상을 전혀 보지 못하는데서 나오는데 오직 하나님의 강한 개입이 없이는 쉽게 치료가 되지 않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여부스 족속의 타작마당을 바꾸어서 그 위에다 자신의 성전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0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성전이 선 곳은 타작마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탈곡됩니다. 잡동사니는 이곳에 없습니다. 실재와 참된 것, 진짜와 단단한 것이 아닌 것은 그곳에서 다 제거됩니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껍데기와 공허한 것과 가치 없는 것은 모두 제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여부스 족속 곧 교만의 영을 깨닫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타작기에 도리깨질에 키질에 드림으로써 알곡이 될 때 바로 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7. 기르가스(진흙땅에 사는) 족속 ; ?????
  
갈릴리 동쪽에 거주했던 기르가스 족속은 육에 속한 더러운 영을 상징하는데, 우리를 땅에 속한 생명과 그것의 공허함 속으로 유혹하고 이끌고 또 육신적인 정욕 속으로 이끌어서 온건함과 절제와 순전함의 법을 거슬려 모든 일에 지나치도록 조장합니다. 
  
⇒ 기르가스 족속은 너무 현저하고 노골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곤고하고 낙망될 때 우리는 언제든지 이 기르가스 족속의 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물질적으로 풍부할 때 그것이 오히려 기르가스 족속의 먹이가 쉽게 될 수 있음을 알고 늘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영들은 우리 안에서 그것들이 완전히 진멸될 때까지 곧 우리 안에서 성령 안에 있는 예수의 부활의 권능과 또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승천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우리와 싸우게 됩니다. 
  
이 족속들이 진멸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본성 안에 있는 우리의 완전함이며, 그분께서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그 족속들을 반드시 마침내 몰아내고 영원토록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요함이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을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많이 말하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 단언컨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과 음성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 유일한 것인 위로부터 오는 내적인 기름부음을 잃게 만듭니다. 
  
실로 사람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한 권능을 주목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머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한 예수의 영과 생명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적인 생각이나 외적인 활동들로부터 오직 거룩한 예수와 하늘의 움직임에로 방향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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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예표와 성취와 완결 >
  
사람의 마음 밭 ; 일곱 족속 → 일곱 귀신 → 일곱 영(일곱 교회)
  
1. 예수님의 그림자인 여호수아는 일곱 족속을 온전히 쫓아내지 못하였음
  
2. 그림자와 예표의 실제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서 예표를 성취하심
  
- 막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 눅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일곱 영으로 일곱 교회에 충만히 채우심으로 사람을 온전히 얻으심, 마음을 온전히 얻으심.
  
- 계 1:5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계 5:7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0 일곱 영은 일곱 등불을 말하므로, 일곱 영은 일곱 교회(일곱 촛대)에 충만하신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 계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
  
0 슥3:9과 4:10에서는 일곱 개의 눈이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슥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 슥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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