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 영성훈련 필독글   

2021. 7. 16.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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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준비 조건

 - 이다윗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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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령님께서“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거라”고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그것이 옳은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인터넷에 글을 올릴까 생각을 했습니다.

Daum.net 에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카페를 이용해서 글을 올려 놓아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카페나 블로그를 만드는 사용법이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글을 올려만 놓고 일체의 광고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지 못했습니다. 광고를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사이트를 알고 들어올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의심하거나 내 생각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어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누구도 복사할 수 없도록 해 놨기 때문에 나는 단지 이곳에 책을 보관해 놓을 작정이었습니다. 게으름 때문에 책을 열심히 쓰지 않는 나 자신에게 조금의 채찍질을 가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카페에 내가 쓴 모든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사실 나는 신학교 입학 할 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다 보니 어느 새 아홉 권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부족한 나의 책을 누가 읽을까 생각을 하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책으로 출판하겠지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성령님의 권유로 일단 카페에 책들을 올려 놓게 된 것입니다.

카페에 글을 올려 놓은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아이디가 ‘무울’이라는 분의 글에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카페지만 글을 올릴 때 말고는 자주 들어가지 않았는데 교회를 가기 전에 잠깐 시간이 되어 들어가 ‘무울’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성령님께 묻는 습관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분에게 글을 써 보내라고 허락하셨고 “만약 음성을 듣기 위해 훈련을 받기 원한다면 전화로 해 드리겠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매우 사모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간절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지만 결국 듣지 못하고 지금에야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과 한 차례 전화로 대화를 나눈 후에 새벽기도 시간에 다시 한번 성령님께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님께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압축해 주셨습니다.

나는 한 동안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묻기도 했습니다. 세 가지 내용을 다 들은 후 그것을 까먹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시는 성령님께서는 “글로 옮기거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펜을 집어 주위에 있는 종이에 방금 들은 내용을 적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1.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조건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음식을 주문할 때 쓰는 대화나 다른 상업적이고 기계적인 대화가 아닙니다. 인격과 인격과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아무나 붙잡고 시간을 물어 볼 수도 있고, 약도를 물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에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나눌 수 없는 그런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담화문을 읽거나 TV에서 기자회견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대화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죄로 인한 대화의 단절

 

요즘 부부들은 대화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잃고 산다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에 금이 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부부는 반드시 인격적인 대화가 오고 가야 합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대화가 중단되거나 끊기는 것은 관계 속에 죄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처럼 관계를 끊어 놓습니다. 이사야가 ‘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았다고 언급한 내용을 기억합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의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우리 부부는 결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늘 대화가 끊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부부는 항상 진지한 대화를 나눕니다. 물론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탁소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함께 하는 부부도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는 부부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몸이 같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로님 댁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부부의 대화에 대한 내용으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서로 대화를 나누냐고 물었습니다. “교회 오는 2시간 동안 내내 대화를 나눕니다”라고 우리 부부가 얼마나 대화를 많이 나누는가의 예를 들어 말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우리는 교회 오는 1시간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해요” 라며 참으로 놀랍다는 말을 건넨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 부부는 말을 많이 합니다. 너무 이상할 정도로 말을 많이 합니다. 잠시 밖에 나갔을 때에도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차를 타고 장거리를 운전할 때도 마냥 신이 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개인적으로 성령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느라 가급적 혼자 기도하는 시간에는 건들지 않는 편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무슨 말씀을 들었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면 그 내용으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로는 참으로 아내에게 미안했던 부분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차를 타면 곧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차에서 내릴 때까지 대화를 나눴는데, 이제는 성령님과 대화를 하느라 아내와 대화할 시간이 많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아내도 성령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았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상대방을 알아 갈 때 깊은 대화가 가능해 집니다. 처음엔 겉치레적인 인사말 정도로 시작하지만 점점 깊어갈수록 대화도 깊어 갑니다.

가정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많은 부부들이 오래 살면 살수록 상대방에 대해 지겨운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수록 대화수가 줄어 듭니다. 그렇게 대화가 없어질 때 사랑이 식어지고 싸움이 잦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대화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돌아 보면 대화와 현재 상황에 비례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곧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화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담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을 때 아담은 자신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죄를 변경하기에 바쁜 대화를 나눴습니다. 노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브라함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그리했으며 요셉도 그랬습니다. 모세 역시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다윗은 궁궐 옆에 장막을 지어 놓고 그곳에 안치한 언약궤에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들이 성경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선지자가 한 명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심지어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가인조차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가인의 죄를 들춰 내셨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선처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선지자와 같은 의인의 특권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나사렛이란 보잘 것 없는 동네에 사는 마리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 큰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제사장 스가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사람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왜 이렇게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을까요? 그런데 왜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들 뿐일까요? 무엇이 달라진 것이고 무엇이 문제일까요?

 

영성훈련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점

 

영성훈련을 하면서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문제가 딱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음성을 듣는 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을치유하는 신유의 은사가 있어도 감히 목사님 앞에서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열심히 영성훈련을 통해 영적 귀가 열리고 영적 눈이 열렸지만 저들을 반겨 줄 교회는 없었습니다. 목사님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들의 영적 수준이 보통 목사님들보다 훨씬 위에 있었기 때문에 보통 목사님들의 설교에 은혜를 받기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수십년 다닌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성훈련은 훈련대로 했고 교회는 그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나가도록 철저하게 못을 박고서 사역을 해 나갔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써 얻은 은사들을 활용할 기회가 없었고 저들의 은사는 시들은 꽃잎처럼 떨어져 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영성이 깊어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영성 또한 깊어집니다. 단순히 하나님만 깊게 알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성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요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집니까? 교회를 갈라놓고 주님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일까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성경을 읽어야 영생이 있는 줄로만 알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당신도 포함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도 없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읽고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은 우리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목적을 갖고 읽습니다. 어쩌면 ‘장로인 내가 그래도 성경 통독은 한 번 해야지’ 라면서 읽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열심히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려고 읽는 지도 모릅니다. 성경퀴즈 대회에서 1등 하려고 읽는 지도 모릅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을 주님께서 간파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영생하기 위해서 읽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잘못 알고 있는것은, 성경을 만 번 읽어도 영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읽어도 영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아주 상관이 없지는 안겠지만 오히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교회가 더 소란스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천하에 못된 인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못된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한다면 놀랄만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경은 주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의로운 세마포를 입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으십시오. 하루에 한 절이라도 좋습니다. 하루에 20페이지씩 읽는다고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만 치켜 세우는 역할만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읽으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야 말겠다”

 

당신이 성경을 이러한 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면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자꾸 만나면서 사랑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만 바로 읽어도 이렇듯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즘 좋은 책들도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일단 성경만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해가 안 되고 지루한 시간도 있겠지만 당신의 영성은 점점 커져만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갈 것입니다. 단순히 대통령을 알듯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만나는 것처럼 그와 같은 만남을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한시라도 하나님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입을 열어도 “하나님” 눈을 감아도 “하나님” 눈을 뜰 때도 “하나님”만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음성을 어찌 아니 듣겠습니까? 어찌 아니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2.   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영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영(spirit)과 혼(mind)과 육(flesh)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적어도 숨을 쉬고 있을 때는 이 세 가지를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혼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혹 영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저 사람은 참 영적이다!”라고 말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

 

남이 나의 뺨을 쳤을 때 아무 생각없이 즉각적으로 상대방의 뺨을 후려치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혼(mind)이나 영(spirit)의 영역이 발달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부부싸움을 할 때 무조건 아내를 때리거나 물건을 집어 던집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 밖에 모릅니다. 성인이 되기 전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당히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 스스로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한다는것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남편들이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들 셋에 이기적인 남편 하나 해서 모두 네 명의 이기적인 사람이 그렇지 않는 엄마(아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분들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여자들은 교만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나’만 생각하는 것이지만, 교만은 ‘내가 최고’입니다. 둘 다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은 교만을 훨씬 더 악하다고 판단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자가 교만하고 모든 남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기적인 성격과 교만한 성격은 육적인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앞 뒤 안가리고 ‘나’만을 위하는 사람과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육적인 영역이 발달된 사람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육신의 오감(five senses)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오감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지 않습니까? 육적인 사람은 보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TV보는 것을 좋아할 뿐더러 컴퓨터에서 음란물을 즐겨 봅니다. 육적인 사람은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늘 음악을 듣고 삽니다. 하루 종일 음악만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지만 음악이 좋을 뿐입니다. 후각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냄새가 나면 “아휴!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면서 더럽다고 불평합니다. 여자들의 향수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냄새따라 끌려 다닙니다. 아예 자신도 향수를 쳐 바릅니다. 냄새에 죽고 냄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각은 혀를 통해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쪽으로 발달된 사람은 먹는 것을 인생의 최고 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에 수입의 많은 부분을 소비합니다. 친구를 만나도 먹습니다. 연애를 해도 먹고 교인들과 어울릴 때도 먹자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은 커피숍이나 한적한 곳에 나가 먹는 것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촉각에 예민한 사람은 남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장소가 바뀌어지면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기 선교를 나가기 참 힘듭니다.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은 짜릿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에 가서 신나게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면서 몸의 짜릿함을 만끽하려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향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모임의 천국입니다. 유흥비가 많이 책정된 나라입니다. 직장이 끝나고 곧 바로 집에 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의 경우엔, 직장이 끝나면 무조건 집부터 먼저 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른 곳을 먼저 들렸다 갑니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만나면 무조건 술부터 술부터 마십니다. 그것도 2차 3차 완전히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됩니다. 우리나라 술값으로 들어가는 액수가 세계최고라고 하니 여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인구의 25%가 교회에 나가고 불교에 나가는 사람까지 계산하면 세 명 중 한 명은 종교적인 사람인데 약국보다 여관이 더 많은 나라입니다. 관광지에 여관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관광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여관이 들어서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국의 시골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여관에서 며칠 쉬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교회를 가려고 나갔을 때 카운터에서 “손님, 물건을 모두 챙기셨나요?”라고 묻더랍니다. “네? 저는 며칠 더 있을 건데요”했더니 낮 손님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릴 물건이 없도록 처리하라고 했답니다. 낮 손님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모습입니다. 한국은 지금 육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도 변화되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저들이 영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여전히 육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결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육적인 사람은 성령님의 하시는 일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혼적인 사람

 

혼적인 사람은 지(intellect), 정(emotion), 의(volition)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지(intellect)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책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배움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물론 경험을 통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emotion)은 감정을 말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측은함을 느끼는 것은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녀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 부모를 학대하거나 자녀를 학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volition)는 의지를 말합니다. 의지는 꿈을 성취케 합니다. 의지는 불가능을 가능케 만듭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일들을 해 냅니다. 소위 위인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지정의를 잘 갖춘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엘리트’라고 합니다. 회사에서도 스카우트를 하며 가정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교회는 소위 지정의가 뛰어난 사람을 존경합니다. 물론 요즘엔 돈이면 뭣이든 해결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서 지정의를 고루 갖춘 사람이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정의를 고루 갖춘 ‘엘리트’가 가장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가장 하나님의 음성을 늦게 듣습니다. 이런 사람은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강해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금방 감정에 치우쳐 포기하고 맙니다.

영성훈련에서 가장 방해를 받는 사람이 바로 혼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여간해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내려 놔야 하는데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 놔라고 하면 제대로 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혼적인 사람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못 배우고 안 가지고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는 덜 싸웁니다. 그런데 오히려 잘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의 교회는 항상 문제 투성입니다. 이것은 다 혼적인 영역이 발달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혼적인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육적인 사람을 만나겠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어느 순간에 한 번 성령체험을 하게 되면 그 즉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혼적인 사람은 꼿꼿이 살아있는 ‘잘남’때문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하고 비어야 하는데 생생하게 살아있고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기도 힘들고 비우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강권하심으로 이들을 시험하십니다. 결국 저들에게 임한 시험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아는 체’와 ‘잘난 체’ 하다간 영원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반드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영적인 사람이 지금 내가 말한 영적인 사람과 같은 것이라면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혼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혼적인 영역이 1%라도 남아 있거나 육적인 영역이 1%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1% 정도밖에는 못 들을 것입니다. 100% 혼적인 사람은 0%밖에 못듣습니다. 100% 육적인 사람도 0%밖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혼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을 완전히 없앨 때 비로소 들려지는 것입니다. 영적일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음성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 영’에게 말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잠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로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정확하게 영혼육의 상태로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구성요소가 세 가지 영역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심에 대해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삼위일체 세 분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은 영어로 이미지(image)입니다. 이것은 겉모양을 말합니다. 어떠한 형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는 형상이 없는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런 비형제의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겉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습니다. ‘모양’은 영어로 ‘닮음’(likeness)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형상’과 같은 내용으로 받아 드리는 목사님들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형상’이 겉모양으로 보여지는 형상인 것처럼 ‘모양’은 하나님의 내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내면을 닮았다고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내면을 닮았다는 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창세기 2장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 우리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생기’는 하나님의 영을 불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몸에 들어갔더니 아담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은 Living being으로써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 같아도 죽은 사람들입니다. 영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영의 능력을 개발시키면 이 땅에서 유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영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입으로 숨을 몰아 내쉬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에스겔도 환상 중에 마른 뼈들이 ‘생기’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7-10)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영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나는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상 이런 사람들은 죽은 것입니다. 저들이 영적으로 살지 않을 때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극과 극으로 끊어진 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생기’가 없었던 아담이 아직 산 사람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고, ‘생기’가 없는 제자들이 아직 성령충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며, ‘생기’가 없는 마른 뼈들이 살과 뼈는 붙었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육신의 부모만 저들의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저들의 영적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 갑니다.

 

우리의 영혼육은 누굴 닮았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부모님 중 어떤 분을 닮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이것은 유전적인 요소로 반드시 부모님의 육체적인 형상을 닮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땐 비정상적인 탄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육체는 육신의 부모를 닮았습니다. 육체에는 혼적인 부분도 포함이 됩니다. 혼적인 부분은 ‘지정의’를 담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부모와 완전 다르게 지정의가 형성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성품은 부모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내적치유를 하다보면 쓴뿌리 판단에 대한 쓴뿌리 기대가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부모의 쓴뿌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 주정뱅이 아빠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크면 절대로 술 주정뱅이가 안 될 거야’란 쓴뿌리 판단을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술 주정뱅이의 아버지 모습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쓴뿌리 판단에 대한 쓴뿌리 기대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연구 결과입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방바닥을 손으로 닦고 매일 찬장에 있는 접시의 수를 세는 꼼꼼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꼼꼼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융통성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꼼꼼한 성격이 나올 때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부모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육적인 부분과 혼적인 부분은 육신의 부모님의 것을 닮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 영역은 누구를 닮은 것일까요? 만약에 우리의 영적인 영역도 육신의 부모를 닮는다면 불교를 믿는 부모에게는 반드시 불교 다니는 자녀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불교를 믿어도 자녀는 교회에 나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바로 영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종교를 강압적으로 어떤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육신을 그곳에 갖다 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자녀의 영적인 영역까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양대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인 부분을 우리에게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육신의 아버지와 영적 아버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의 부모이며, 영적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육적인부분과 혼적인 부분은 우리의 부모님을 닮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부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때 영적인 예배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신령’의 원본을 보면 ‘영(spirit)’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이시니’라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바람처럼 아무런 형상도 없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하나님을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 있는 부분은 오직 영적인 영역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은 영이시니’란 구절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완전히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런 분은 성경을 잘 모르는 분입니다.

엄연히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을 본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바람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바람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목사님들이 훨씬 많아서 오히려 하나님을 형상을 가진 하나님으로 표현하면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면서 마구잡이로 ‘마녀사냥’에 나서기 때문에 오늘날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병폐가 빚어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확한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고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에 대해 잘 설명한 책?

 

우리의 영의 영역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의 육신과 혼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영적인 영역입니다.

셀 수도 없이 성경에서는 ‘영(spirit)’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영’의 영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잘 알도록 해 주는 정리된 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영’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들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교회에 관한 책을 보면 여전히 제일 많은 분야갸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우리의 ‘영’이 무엇이고, 어디에 존재하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고 실제로 영적인 영역을 가지고서 체험하고 있는 분들이 극히 적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이전에 수없이 많은 서적을 접하였습니다. 개척을 준비하기 위해 7년을 집중하며 준비했기 때문에 성경연구를 심도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3일간 성경맥잡기’를 통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눈에 느끼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도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 때 제목이 “책 읽을 수 있도록 물질을 허락하소서” 였습니다. 물론 많은책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읽기 시작한 ‘논어’가 계기가 되어서 고등학교 때는 심리책을 많이 읽었고, 대학교 때는 종교서적을 많이 읽기 시작했는데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에 대해 설명한 책들의 대부분 내용은 그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느낌 정도로만 설명할 뿐 실제로 성경의 인물이 들었던 것처럼 그런 들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애매모한 식으로 설명된 책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 도움을 주기 보단 애매모호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의 본질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영(spirit)은 혼(mind)과 육(flesh)을 통제합니다. 물론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영(spirit)과 혼(mind)을 합쳐, ‘영혼’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그 만큼 영과 혼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못하고 혼용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세상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혼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mind)께 천국에 가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해답을 들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과 혼이 함께 혼용되었듯이 많은 부분에서는 영과 혼이 서로 엄격히 구별되어서 사용되고 있음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히브리서 4장 12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 그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이 구절로 볼 때 분명히 영혼육이 삼분설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히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영과 혼이 혼용되어 사용되거나 어떤 때는 영의 뜻으로 혼이 쓰여졌거나 혼의 뜻으로 영이 쓰여진 구절들이 있어서 영과 혼의 구별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교단별로 삼분설이니 이분설이니 논쟁의 주제가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쉽게 이것이 맞다고 정의를 내릴 때 상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상처를 입고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분설과 이분설을 주장하는 양 쪽 모두의 사람들도 엄연히 영과 혼과 육의 세 가지 성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단지 영과 혼을 합칠 것이냐 아니면 따로 따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의 중요성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은 혼적인 부분과 영의 부분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이해하실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예배를 영으로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영으로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기도 또한 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롬 8:16). 우리의 혼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영에게만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라디오 채널과 같아서 누구나 정확한주파수만 맞추면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혹, 어떤 분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죠?”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경배 대상이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당연히 우리가 영광을 돌릴 분이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부분은 우리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의 영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영의 느낌을 느껴야 합니다.

영의 느낌을 얻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홀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의 중요성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과 영은 다릅니다. 생각의 주체는 ‘나’이지만 들려지는 음성의 주체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영역은 무엇인가?

 

자 그렇다면, ‘우리 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적 영역을 말합니다. 그러면 ‘영적 영역’은 무엇이고 어디쯤 걸쳐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이 애매모호하고 의문을 갖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이것이다(That’s it!)”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동의할만한 학설도 없으며 의학적인 증거도 불충분합니다. 단지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과 주장과 학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로교단에서는 인간을 영혼육 삼분설로 생각하지 않고 영혼과 육으로 구분짓는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영적 영역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목사님께 영혼육에 대해서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영의 영역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 여쭤 보십시오. 충분할만한 지식을 갖고 있는 목사님을 찾기란 많이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소천하신 캐네스 해긴 목사님은 영성 분야에서 세계 최고이셨습니다. 그 분의 30권이 넘는 책들을 읽어 보면 상당히 영적 영역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분조차도 영적인 영역에 대해 깊게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체험에 의하면 그분의 말씀하신 내용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영적 영역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면 당신은 새처럼 날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만큼 영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은 큰 기쁨이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영적인 영역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그냥 단순히 “그런 것은 필요없습니다”란 말로 모든 해답을 정의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위 사람도 싫어할 것이고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별로 관심이 없어도 ‘혹시 영적인 영역이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면 어찌할까?’ 란 생각으로 한 번쯤 귀담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속사람이 곧 영적 영역이다

 

성경에 보면 ‘속사람’이란 단어가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속사람’이 바로 영적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겉사람’의 반대 개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겉사람’은 우리의 육(flesh)과 혼(mind)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며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지에 대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겉사람’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사람’은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남들이 내 ‘속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속사람’을 알지 못하며, 남편이 아내의 ‘속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녀의 ‘속사람’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는 ‘겉사람’때문이 아니라 ‘속사람’의 영역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에서 ‘속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16)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이 능력을 입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속사람은 inner man 혹은 inner being 입니다. ‘속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겉사람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겉사람의 안에 있는 속에 뭔가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의 영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겉사람과 속사람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로마서 7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속사람(영)은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지만 겉사람(육과 혼)은 죄를 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싸운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치제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우리가 하나님 곁을 떠나 이 땅에 내려 온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세상’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요소들이 우리의 육과 혼을 자극하며 사로잡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해 날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요일 2:16)

하지만 바울은 비록 우리의 겉사람이 세상의 유혹에 휩싸여 몸도 마음도 늙고 부패해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오히려 새로와질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은 완전히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적어도 겉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늙어지고 죽게 되겠지만 여전히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강건해지고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이 갖는 유익함이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당신의 속사람을 발견하기

 

당신의 속사람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속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의 속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속사람의 명령에 순응한다면 당신의 삶은 훨씬 부유한 삶이 될 것입니다. 주식이나 다른 투자를 할 때에도 당신의 속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면 손해보다는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속사람과 상의하십시오.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에도 술만 마시지 말고 속사람과 상의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할 때에도 속사람과 의논하십시오.

“어떻게 속사람을 인식할 수 있나고요?” 먼저 당신의 겉사람을 확인하십시오. 당신의 겉사람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몸으로 느끼는 육적인 영역과 함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혼적인 부분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노동일을 해도 항상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혼적인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지혜롭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혼적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를 갖습니다.

속사람을 설명할 때 대표적인 단어는 ‘생각’입니다.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혼(mind)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으로 5분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금새 생각이 떠오르지요? 분명히 당신은 5분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친구에게 다가가 “친구야, 사랑해”라고 속으로 말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말한 당신의 음성이 들립니까? 친구에게 찾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쉽게 상상이 되고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것인데도 상상하지도 못하고 음성을 듣지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훈련할 때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분들은 도무지 속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소위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상상도 가능하며 누군가에게 찾아가 말을 걸수도 있으며 상대방의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당신의 속사람 소리를 들어 볼 차례입니다. 당신의 속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고 질문을 하십시오. 물론 속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입을 열어 여러분 귀로 들리는 소리로 질문하면 안됩니다. 속으로 여러분의 영에게 물으십시오. 어때요? 잘 들리나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분명히 당신은 당신의 속사람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듣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속사람과의 대화를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에 당신의 속사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속사람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심방을 갈 때 갑자기 속에서 “사과라도 사가지고 가야지”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속사람의 음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당신 속에 있는 영의 음성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다윗은 구체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영성훈련을 했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장막에다가 안지하고서 그곳에서 날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의 능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윗의 영성을 닮아 간다면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다윗도 육신의 죄를 범했습니다. 육신이 죄를 범할 때 자칫 잘못하면 속사람까지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범할 때 정상적인 사람은 기쁨보다는 절망이 찾아옵니다. 죄책감으로 낙망하게 됩니다. 이럴 때 속사람도 낙망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영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

 

마치 다윗이 또 다른 다윗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속 사람에게 지금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성경이 다윗에 대해 잘못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겉사람과 속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영에게 명령을 내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영에게 뭔가를 지시할 수도 있으며 영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속사람(영)의 음성을 듣고, 속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성령님의 음성은 당신의 속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대부분 육신의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시작함이 옳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본이 되는 기도는 ‘성막기도’일 것입니다(내가 쓴 ‘성막기도’의 책을 참조). 성막기도를 하게 되면 분향단에서 방언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성막문에서 주님께 나아가고, 번제단에서 헌신을 약속하고, 물두멍에서 회개하고, 성소의 진설병에서 생명되신 주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을 간구하고 믿음으로 선포하며, 정금등대의 상징되신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환영하고 모셔드리면서, 분향단에서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방언기도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속죄소에 예수님의 피를 통해 그룹 사이를 지나가, 하나님의 영광만 가득한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분향단에서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혼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언이 끝나갈 무렵에 당신의 영이 극대화되어 나도 모르게 속죄소 앞에 와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당신의 기도는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간구도 없으며 찬양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영만이 주님의 영광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영의 기도 시간에 영의 눈이 떠지고 영의 귀가 열리게 됩니다. 영의 눈이 떠질 때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보게 될 것이며 여러군데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보좌 앞에 흐르는 생명수를 보게 될 것이고, 천국에 있는 거룩한 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모양과 천국의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포옹을 할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처럼 주님과 함께 여행을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영성훈련을 인도하면서 중보기도팀에게 “자신이 원하는 기도를 하지 말고 주님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신 기도로 중보기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은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 각 나라를 함께 보여 주시면서 기도할 제목을 보도록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영으로 기도할 때 그 깊이와 크기는 한계를 그을 수 없습니다. 나는 천사들 앞에서 설교도 해 봤습니다. 두 설교를 했는데 처음 설교는 두 번째 설교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설교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나를 찾아와 주셨고 이곳 저곳을 방문하도록 했으며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나는 성경에 나와 있는 부분만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도 머잖아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방언을 못한다고 해서 “오늘날 방언은 필요없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지만 실제로 방언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을 하렵니까?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조차도 당신이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으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의 문을열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성경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마음의 문을 열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풍성한 은혜가 밀려 올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문을 열 때 방언도 당신의 것이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마음껏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가막히고 놀라운 영적 경험을 당신도 사모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의 마지막으로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중’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앞서 잠깐 성막기도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만 성막기도는 집중을 위해 너무나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 주신 기도는 성막기도와 언약궤기도입니다. 성막기도는 성막구조에 따라 순서대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성막문, 번제단, 물두멍, 진설병, 정금등대, 분향단, 지성소, 속죄소, 언약궤 순으로 드려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막기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약궤기도는 언약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성막기도에 포함된 기도이긴 하지만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을 때 언약궤기도는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시키게 하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언약궤기도를 잘 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골방기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하신 기도가 바로 ‘언약궤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언약궤기도의 영광체험

 

성령님께서 몇 개 안되는 성경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어떤 기도를 행하셨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셨을 때 참으로 감동했습니다. 변형의 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서 기도를 하셨을 때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한 것처럼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하셨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 9:3)

 

베드로는 너무나 그것이 황홀하고 좋아서 초막을 짓고 이곳에 살자고 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저들의 기도에는 ‘언약궤기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저들의 기도를 기록할 때 ‘비몽사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행 22:17)

 

이 구절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 가서기도했을 때의 장면을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비몽사몽간에’란 단어가 들어 있음을 알 것입니다. 사실 ‘비몽사몽간’이라는 한글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원어로 보면 ‘엑스타시스’입니다. 여기에서 영의 ‘extasy’가 나왔는데 이것의 뜻은 ‘황홀, 무아의 경지, 환희의 절정’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trance’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입신’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기도할 때에 입신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쩌다 한번 그렇게 된 것 가지고 너무과정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을 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한 구절가지고 너무 과장되이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볼 때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불과 사복음서의 4~5군데 밖엔 다른 기록이 없는데 그렇다면 주님께서 평생을 사시면서 4~5차례밖엔 기도하지 않으셨다고 믿으시겠습니까?

성경에서 한 번 언급된 것이라면 바울의 기도의 대부분이 그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나은 것일 겁니다. 성경은 친절하게도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의 기도에서도 ‘비몽사몽간’이란 단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행 10:9-10)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이 ‘비몽사몽’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쌍벽을 이루는 리더였습니다. 두 사람 다 입신을 경험할만한 영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입신을 해 본 사람은 경험하는 것이지만, 입신할 때생각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영성훈련을 시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를 경험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했습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영성훈련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그 누구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능력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느꼈던 ‘비몽사몽’이라는 느낌은 우리 모두 체험했습니다. 느낌의 강도는 틀릴지 몰라도 입신에 가까운 기도는 항상 체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할 때 머리에 아지랑이가 올라가고, 손은탱탱 부은 느낌이 들며, 손 바닥에 불덩이를 느끼고, 온 몸에 전류가 흘러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면, 어느 샌가 육신의 감각을 잃게 됩니다. 정신은 천국을 왔다 갔다 하는데 육신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다 보면 금새 시간이 1시간 이상 지나간 것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체험했습니다.

보통 훈련자들은 2시간씩 하루에 3번 정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를 하는데도 조금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들의 영이 더 커지면서 능력의 종이 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의 성격상 나는 호되게 훈련을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도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은 너무나 좋아서 어떻게 하는지 ‘골방’을 만들고 그곳을 영광체험하는 가장 좋은 ‘나만의 장소’로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골방기도의 효과

 

내가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도록 도왔던 결정적인 요인은 ‘골방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후에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6절에 언급하신 ‘골방기도’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예수님께서는 ‘골방기도’의 위력을 아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골방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를 드렸던 적이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셨지만 정작 기도하실 때는 제자들과 떨어져서 기도하셨습니다. 오직 제자들과 함께 기도한 내용은 변형의 산에서 기도하실 때 뿐이었습니다. 변형의 산에서 기도하신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골방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6장,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참조).

예수님께서 하라 하신 ‘골방기도’를 하게 되면 가장 큰 유익은 우리의 영이 커지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기도를 하면 이상하리만큼 영의 영역이 활성화 되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혼자 있지 않는 장소는 ‘골방’이 아닙니다. 아무리 ‘골방’일고 우겨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골방’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은 아무도 근접하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 ‘골방’이 옷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골방’이 자동차 안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골방’이 기도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골방’이 교회 예배당일 수도 있습니다. ‘골방’에 대한 가장 정확한 말은, 혼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오직 골방기도만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철야기도도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틈만 나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가장 핵심은 ‘홀로’ 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홀로 하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나?

 

홀로 기도를 해 보셨습니까? 해 보니 어떻습니까? ‘기도 한 것 같지 않다’란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함께 기도하는 것에 습관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무조건 함께 합니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고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함께 철야기도를 합니다. 홀로 기도할 수 있는 곳이라곤 기도원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기 위해 항상 기도원에 올라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기도원같이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집에서 기도원 같은 곳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홀로 기도해 보십시오.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가 깨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도저히 기도의 장소를 찾지 못하신다면 야산이라도 올라 가십시오. 아니면 화장실로 괜찮습니다. 우리 부부도 화장실에서 같이 손잡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기도는 혼자 해야 영성이 커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기도의 성질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1:1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홀로 기도를 하면 쉽게 하나님과 1:1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키스할 수 있습니까?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동방의 예의지국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쁜(?) 행동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데모라면 몰라도 기도는 혼자 하는 것입니다.

 

홀로 기도할 때 지켜야 할 점

 

홀로 기도할 때 당신의 영을 확인하고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먼저 아주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우리의 영을 느끼기 위해선 가장 먼저 우리의 육신과 혼을 제거해야 합니다. 육신의 불편함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육신의 아픈 부분에 신경이 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간신히 느끼는 영의 부분이 한 순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편안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최대한 영적인 상태를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도는 육적인 기도와 혼적인 기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육적인 기도는 간구하는 기도이며, 혼적인 기도는 찬양의 기도입니다. 간구하는 것과 찬양은 우리의 육체를 이용해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영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물론 몸이 강건하여서 2시간 정도는 끄떡 없다고 한다면 간구와 찬양을 1시간 정도 해도 1시간 정도는 영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1시간 정도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기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영의 기도를 하게되면 10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1시간 이상 된 것을 느낍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의 기도를 하는 훈련자들은 대부분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기도시간을 1시간으로 생각할 때 육신의 기도와 혼적인 기도시간을 30분 정도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이것을 성막으로 비교하자면, 육신의 기도는 성막 뜰에서 행해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혼적인 기도는 성소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막 뜰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중석입니다. 부흥회 때 한 번씩 참석하는 정도의 사람들이거나 종교적 의식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성소에서는 예배를 드립니다. 이곳에는 예배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도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의식을 집행하는 제사장만이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성소 바로 앞에 놓여져 있는 물두멍에서 몸과 의복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제한이 있습니다. 이곳엔 회중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막 뜰에서는 헌신과 회개가 있습니다. 헌신과 회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막 뜰에서는 간구하는 소리만 들립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 건강을 위한 기도, 재물을 위한 기도가 들립니다. 모든 기도가 “주세요”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성소에서는 “감사합니다”란 말이 있으며 찬양과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상태만으로는 영의 영역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영의 영역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냐고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에서 모세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볼까요?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 34:34-35)

 

모세는 지성소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인 아론도 1년에 하루(속죄일인 7월 10일)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특별제사장으로서 1년 365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성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고전 3:16)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천국에 올라가면 천국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지만(계 11:19) 이 땅에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에 ‘홀로’ 성전에 거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을 피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때 나를 가장 많이 공격한 것은 마귀였습니다. 물론 귀신들입니다. 에베소서 6장의 단어를 언급하자면 ‘악한 영’입니다.

아시겠지만 마귀는 영적 존재입니다. 물론 성령님도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영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영으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마귀도 우리의 영에게 음성을 전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 전해 주실 때의 통로와 마귀가 음성을 전해 줄 때의 통로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마귀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성령님의 음성인 줄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마귀의 음성인지를 반드시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쓴 ‘하나님의 음성듣기’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조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마귀는 결코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귀는 단 한 차례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내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을 때 성령님께서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모두가 다 처음 음성을 들을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로 당신의 이름을 먼저 부르실 것입니다.

어떤 훈련자는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착각을 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일찍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40년 이상을 넘게 미국인 이름으로만 생활을 했는데 갑자기 자신의 한국 이름을 부르더란 것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이름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자신도 잊고 지냈던 한국 이름을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기억하시고 그 이름을 부르셨을까요? 그 만큼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도 성령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많이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결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음성인지 성령님의 음성인지 구분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은, 마귀는 나를 멸망시키려는 음성을 주고, 성령님은 나를 살리려는 음성을 주십니다.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 좌절, 절망, 실망, 패배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우울증에 빠지거나 절망과 낙담에 생활의 의욕을 잃고 사는 사람은 제 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음성은 항상 긍정적이십니다. 설령 내가 기도를 게을리 하거나 죄를 범했을 때에도 긍정적이십니다. 그렇다고 “잘했다. 계속 죄를 짓거라”고 말하지는 않으십니다. 늘 성령님은 그런 나를 긍정적으로 봐 주시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그걸 통해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사랑과 공의의 비율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랑만 강조하거나 공의만을 강조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사랑만 강조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렇다고 공의만 강조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잘했다. 계속 그렇게 해라”고 사랑 면을 극대화 시키거나, 아니면 “너는 죽일 놈이야.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니?”라고 공의를 극대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과 공의를 50:50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말씀을 들었을 땐 마귀의 음성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령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마귀의 음성인지를 분별하는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성경말씀을 달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면 반드시 말씀에 적합한 성경말씀을 주십니다. 하지만 마귀는 결코 성경말씀을 주지 못합니다. 마귀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는 것과 적합한 성경말씀을 주지 못한다는 것과 우리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리 내서 기도할 때 이미 마귀는 우리에게 무엇이 약점으로 작용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호해 주실 것이지만, 그래서 방언기도가 좋은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직통으로 상달되는 기도임으로 마귀가 방언기도의 뜻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정결과 거룩함을 지키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오직 영이 발달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이거나 혼적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정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결은 우리가 육적으로 짓는 죄로부터 깨끗함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사해 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보혈을 당신의 온 몸에 뿌리십시오. 당신의 가정에 뿌리십시오. 당신의 자녀들 몸에 뿌리시고 당신의 배우자에게 뿌리십시오. 당신 집의 가구에 뿌리시고 부엌이나 방에 뿌리십시오. 특별히 TV나 컴퓨터에 많이 뿌리십시오. 음란의 영이 가장 많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님의 보혈을 뿌릴 때 “주님이 보혈로 덮어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행하십시오. 방이나 기타 다른 주변에 주님의 보혈을 뿌릴 때 “예수님의 피를 뿌리노라. 더럽고 악한 영은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면서 뿌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보혈이 당신의 가정과 가족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죄를 짓고선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는 약간의 죄를 지어도 쉽게 음성 듣는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성령사역자들이 은사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잘못 사용할 때 은사가 사라지는데 아주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완전히 은사가 사라질 때는 더 이상 일어서기 힘들게 됩니다. 하지만 예전에 했던 경험을 가지고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역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죄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죄가 있으면 결코 음성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죄까지라도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례요한도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느니라”란 하나님의 선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결이 우리의 육신과 연관된 것이라면, 거룩은 우리의 혼과 연관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십계명의 처음 네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먼저 챙기는 것은 모두 거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고 오직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각오는 좀 더 거룩하게 만듭니다.

정결과 거룩의 단계를 거쳤을 때 비로서 언약궤기도의 맛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상태로는 언약궤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정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아예 집중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지금까지의 준비 조건이 다 갖춰졌다면 당신은 충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자신을 가지십시오. 분명히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요. 당신이 듣지 못해서 그 음성을 못 듣는 것이지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음성을 들려 주고 계십니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영의 음성을 들었다면 상당히 가까워진 것입니다. 당신의 영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당신 속으로 당신의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아들이(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평생에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한다”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분명히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할 것이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하다”란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들었습니까? 축하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차례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음성은 이미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음성자료입니다. 이미 당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멀리 떨어져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포악한 아버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이라도 충분히 아버지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은 당신이 이전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다를 뿐입니다. 당신 아버지의 음성은 당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지만, 성령님의 음성은 당신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아버지 음성을 들었을 때는 그 주체가 ‘당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는 음성을 들려 주는 주체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이 또 다른 차이입니다.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한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의 영은 성령님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육신의 귀로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은 성령님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당신의 영에 의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의 영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 이뤄질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이미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잘 따르고 열심히 정결과 거룩한 생활을 한다면 그 순간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겠다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녀를 외면하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 성령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에게 말입니다.

 

 

당부의 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것이 뭣이지 아십니까? ‘사모함’입니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바라는 것도 자신만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것일 겁니다. 그 사랑이 깨지거나 변해 버릴 때 죽음과 비교할 만큼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 만큼 사랑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인처럼 당신의 ‘사모함’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장미꽃을 들고 연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골방기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평생에 가장 값진 것이라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일 겁니다. 평생을 노력한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할 뿐이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어쩌면 당신은 능력을 갖기 위해서 음성을 듣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남들도 들으니까 나도 들어 봐야지 란 막연한 생각을 갖고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모함’ 없이는 결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한 시간도 살 수 없다는 고백과 심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갈망을 하나님은 보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분명히 성령의 열매가 삶에 맺혀집니다. 그 풍성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찾아 오고 그의 삶은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늘 신명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한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천국을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대화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성령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고 날마다 그리고 매 시간마다 성령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당신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출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작성자 세계성막기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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