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논쟁 (구원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

영무 이웃추가 | 2009. 4. 13. 16:41

                               

                                 자유의지 논쟁이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몇  가지 논쟁을 말한다...

 첫째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이 자유의지가 인간의 범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지막자유의지가 인간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규명하는 논쟁이다.

 

자유의지 논쟁은 5세기 경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 16세기 루터에라스무스의 논쟁 등이

특히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성경적인 입장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 가운데 하나로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가 범죄에 영향을 주었으되 인간의 타락 후 구원에는 무가치하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이다. 구원문제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미치는 영향을 중심한 논쟁을 살펴보려 한다.


 

1. 자유의지의 존재


 1)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 
 미국 하바드대학의 스킨너(R. B. Skinner)교수는 인간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었을 때 시도된

허구적 관념이 인간의 자율성이란 것이며 현대에 와서 이러한 허구성과 날조가 제거됨으로 과학적이고

참다운 인간관(人間觀)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원래부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태어나기 전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영향 아래 살면서 인간 개개인의 행동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R. B. Skinner, Beyond Freedom and Dignity, 1971, 200~201.]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행동의 원리를 환경적 영향에 종속시키는 기계적(mechanistic) 인간관은

인간의 책임성 특히 죄책(罪責)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인간관을 가진 영.미의 행동주의적

철학자들은 "완전한 공이 완전한 수평면에 놓여 있을 때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공이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한다.

[박형룡, 『박형룡박사 저작 전집Ⅲ』(서울: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170.]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에 선 슐릭은 형벌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인간의 잘못된 자율성 또는

자유의지의 남용에 대한 책임을 묻는 뜻에서가 아니고 환경의 영향에서 계속적인 범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형벌이며 다른 이에게 그러한 범죄를 짓지 못하게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M. Schlick, "When Is a Man Responsible?", A Modem Introduction to philosophy(London:1966), 55.] 

 2) 타락 전의 자유의지 존재설 

 자유의지에 관한 최초의 논쟁은 412년 이후부터 계속되었다. 이 논쟁의 당사자인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45~430)과 펠라기우스(Pelagius, 5세기초 로마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수도사)가 공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할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voluntas)와 대조하여 인간이 가진 선택의

자유(liberum arbitrium)를 의미한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는 자기 책임하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 인간은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Aurelius Augustine, Civitias Dei, ch. VI.] 인간 자신이 스스로 행동한 것에 대한 원인(causa sui)이지 환경이나 다른 누구에게

자기 죄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펠라기우스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며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선과 악의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인간 본성의 연약성에 전가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는 일을 자기들이 선택할 문제이고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또 의식적(意識的)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의지의 주체인 아담과 하와에게 지워졌다고 한다.

[헨리 디이슨 저, 권혁봉 역, 『조직신학 강론』(서울:생명의 말씀사, 1975), 415.] 

 3) 타락 후의 자유의지 존재 

 어거스틴은 타락 이후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죄의 결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이렇게 부패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악을 행할 뿐이고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의지가 본래적 의미에서 일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행함으로 저급한 수준의 칭찬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김성진, 『기독교교리사』(서울:평화사, 1981), 82.]

 

 펠라기우스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이 아담에게 있었고 이 능력은 타락 후의

아담에게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손상없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 능력은 아담의 죄로 손상되지도

않았고 마귀에 의해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후스토 L. 이형기 역, 『기독교사상사Ⅱ』(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1989), 46.] 

 

 마귀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을 만큼 마귀의 역사가 강한 것은 아니라

한다. 영을 거스리는 육의 힘이 강한 것이 사실이나 육이 영을 지배할 정도는 아님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거나 자유의지가

손상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지의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이라 한다.

 


2. 자유의지와 구원의 은총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선택과 의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자유의지 논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비교하며 논쟁의 성격을 살펴보자.

 

 1)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자기 견해를 409년에서 411년 사이에 발표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Coelestius)에 의해 명확하게 정리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에 전파되었고 어거스틴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아담의 자유의지나 그 후손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고 말한다.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본능의 능력(bonum naturae)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말한다.

[J. L. 니이브 저, 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2), 227.] 
 

 이러한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본래적 은총(Original grace) 또는 창조의 은총

(grace of creation)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은총 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의 은총

(grace of revelation) 또는 가르침의 은총(grace of teaching)을 주시는데 이 은총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통해서 또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주시는 은총이라 한다.

 

 이 은총을 사용함으로 사람들은 보다 쉽게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으나 이 은총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 한다.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Ⅱ』, 46. ] 

 

 어린이는 태어날 때 원죄에 오염되거나 성품이 부패한 상태에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세례가 구원의 방편이거나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직 세례는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지으려는 습관을 억제하도록 하고 자유의지를 바로 사용하여 스스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니이브, 『기독교교리사』, 227.]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인간의지의 선용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는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를 통해 논의되고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의 뛰어난

제자인 코엘레스티우스는 412년의 카르타고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파문을 당하였다.

펠라기우스는 416년의 밀레브(Mileve)대회와 카르고대회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최종적으로 431년의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루이스 벌콥 저, 신복윤 역, 『]기독교교리사』(서울:은성문화사, 1980), 157~158.]

 2) 어거스틴의 은총론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이 그의 엄격한 수도생활과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인격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그의 철저한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향을 받고 있다.

생애 초기에는 마니교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자기의 회심을 생각할 때 구원에

이른 것이 자기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 것을 발견하고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반박하게 되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악하다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며 어거스틴은 인간이 의지를 선용함으로 정욕을

제어할 수 있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아담은 타락 후 악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고 정욕을 제어할 능력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인간의 타락은 아담 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전적으로 타락하게 했으므로 타락 후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아있는 의지란 오직 죄를 짓는 타락한 의지 뿐이고,

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인간의지가 죄에 예속화됨에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이라 한다. 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데 이 은총은 세례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최초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에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 세례를 통해서 인간의 원죄가 제하여진다고 말한다.

[니이브, 『기독교교리사』, 232.] 

 

인간의 의지에 미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의 결과로 죄인인 인간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인간의지는 점점 더 자유롭게 해방되어 더 높은 단계의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란 죄인된 인간 의지에 미치는 감화력으로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3)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 

 어거스틴의 은총교리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움직임이 420년 경부터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일고

있었다. 431년의 에베소 회의에서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당하였음에도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절대적 예정론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겐 심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이 가져온 이러한 폐해 때문만이 아니라

프랑스남부의 고울(Gaul)지방에서 전통적 교회교리에서 벗어나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반대운동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친구이며 제자인 카시안(John Cassian)이 주관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했다. 특히 레린스의

빈센트(Vincent of Lerins)가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는 새로운 입장에 서서 다시 한 세기 동안 계속되는

논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주장을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주장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제외하고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예정교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르기 보다는 반(半)어거스틴주의(Semi Augustinianism)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수도사로서 자기들의 실상을 고찰할 때 인간심성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별히 정욕적

경향성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원죄관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인간의지의 예속화

(隸屬化), 은총의 불가항력성, 절대적 예정의 교리에 대하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교리와 서로

다름을 발견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베른하드 로제 저, 차종순 역, 『기독교교리의 역사』(서울:목양사, 1986), 180, 181.]

 

 예정론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피상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고, 전도열을 약화시키며, 숙명론적인

자포자기와 슬픔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 때문에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예지(豫知, foreknowledge) 즉 예견(豫見)된 신앙과 순종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반 펠라기우스 주의의 견해이다. [니이브, 『기독교교리사』, 236.]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타락 이후의 인간의지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관 즉 인간 의지는 완전하여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반대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말하는 자유의지론은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병과 같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 의지가 타락으로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를 자유케 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 의지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구원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은 소유하고 있는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한다. [로제, 『기독교교리의 역사』, 181.]

 

 이와 같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자유의지의 완전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편 구원으로의 불가항력적 은총을 반대한다. 은총은 인간 의지에 선행(先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카시안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균형 있게 조화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어거스틴의 공로라 할 수 있는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529년 오렌지(Orange)회의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배격되었으나 어거스틴의 주장이 그대로 수용된 것도

아니다.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주의로 이어지는 논쟁을 통해 어거스틴의 과격한 주장들이 완화되었다. 

 오렌지회의를 통해 서방교회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진 교리는 인간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先行)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결정했다. 한편 멸망으로의 예정교리가 거절되고 불가항력적 은총의 교리도 채택되지 않았다. [니이브, 『기독교교리사』, 239.]

 4)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1,000년이나 지난 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거장인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 사이에서 일어났다. 루터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 믿음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sola gratia, sola fide를 주장하자 이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고하라는 주변의 요청이 에라스무스(Deisiderius Erasmus, 1466~1536)에게 이르렀다. 에라스무스는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루터의 인간의지

무능설에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자유의지 논쟁이 다시 일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24년에 "자유의지(De libero arbitrio)"라는 책을 써서 루터의 주장에 논박을 가했다.

즉 루터가 말하는, 인간의지가 전혀 무능하다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sola gratia나 sola fide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약해지고 악을 행하게 하는 위험을 안겨주는 것이므로 이를 글로나

설교로 공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E. Gordon Rupp, ed. & tr., Luther and Erasmus:Free will and Salv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35f.]

 

 이에 대해 루터는 자기가 주장한 바 연옥설의 반대나 면죄부의 불법성에 관한 교리적 혁신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유독 하나님의 은혜나 인간의지의 노예화를 주장한 것에 대하여 반박하고 나서는 에라스무스를

비난하였다. 이렇게 발전한 논쟁은 오늘날 칼빈주의와 웨슬리안 사이에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행은총(先行恩寵)과 인간의 자유의지 논쟁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마무리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사실에 대하여는 기독교계에 별 다른

의견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아담에게 있었던 자유의지가 손상을 입었는가에 대하여는 논의가

분분하다.

 

 정통적 기독교 입장에서는 어거스틴이 인간의지의 무능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의지가 죄에 예속화 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항거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입장에 섰음에도 의지의 노예화나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하여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주장에 반대를 표명하고 나섬으로써 반(半)펠라기우스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논쟁을 통해 어거스틴의 과격한 주장이 완화되고 수정되어 타락 전의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었고, 타락 후에는 자유의지가 손상되어 구원에 이르는 종교적 선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견해를 교회에서 채택하게 된다. 타락한 다음의 아담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이 된 모든 인류는 자기 자신의

의지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한편 어거스틴의 절대예정에 관한 교리나 불가항력적 은총의 교리는 반펠라기우스논쟁을 통하여 수정되었고극단적 운명론에 기울어질 뻔했던 위험이 극복되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의 선용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계속 논의되고 있으며, 인간의 책임을 다해 힘써 전도해야 할 것이다. 이미 구원을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다해 거룩하게 살려는 도덕적 노력을 계속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딛 2:14).

작성자: 성기호목사

 

예정론의 종류 정리

 

1. 펠라기우스 주의 

 인간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서 선,악을 선택할 수 있고(성령의 역활은 배제)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2. 반 펠라기우스주의 

 인간이 의지를 가지면(소망하면) 성령께서 협력적 은혜를 주신다는 견해입니다. 

 

3. 웨슬리안 아르미니우스 주의 

 성령께서 인간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성령과 협력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견해입니다. 

 

4. 루터파(우리나라는 많지 않지만 미국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5. 개혁주의 

 믿음과 불신앙은 하나님의 성령의 결정이라는 견해입니다. 흔히 말하는 예정설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인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은 우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이 하나님의 예정된 길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자가 예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상의 글은

http://m.blog.naver.com/cantsol/40065516787에서 발췌해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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