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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소고

(A Brief Study on Martin Luther's Doctrine of Salvation)

 

 

서론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 중세교회의 구원론

.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비교

. 개신교회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비교

 

2. 마르틴 루터의 깨달음(覺悟)

.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의 의제]

.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

 

3. 마르틴 루터의 의인론

. 개신교의 다섯 가지 슬로건

. 마르틴 루터의 공헌

 

결론

 

 

 

 

서론

 

카톨릭교회의 교권과 왜곡된 성서 해석의 진흙 속에 묻혀 수 백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기독교 신앙의 보물인 '이신칭의'를 발굴한 신학자는 수도승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였다. 신앙과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인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의 토대 위에 마침내 개신교가 이룩되었고, 조직신학의 한 자리인 구원론의 뼈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의 순수성이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에 희석되어져 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루터의 순수한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의와 교회개혁의 의지는 병들어 가는 오늘의 교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 짧은 연구는 먼저 카톨릭교회의 사제로서 루터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시편과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연구함으로써 얻어진 루터의 깨우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그의 의인론(칭의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사망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강압적이고 엄격한 가정 및 학교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14세 이후로는 줄곧 집을 떠나 학업을 계속하였다. 1501년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마쳤고, 1505년에는 M.A.학위를 받았다. 이후 에어푸르트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체험으로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도사가 된 루터는 여러 가지 종교적 질문을 갖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구원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루터가 고민했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었다. 루터는 이 고민을 풀기 위해서 수도원의 모든 규율을 필요 이상으로 철저히 지켰다. 그는 완벽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의로우시고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수도사로서 갖는 루터의 최대의 관심사였다.(1

 

. 중세교회의 구원론

 

루터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세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중세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로 순종할 수 있는 어떤 도움을 주시는 데,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를 '성화케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 '후속은혜'(subsequent grace), '공동협력 은혜'(cooperating grace), '효능 은혜'(efficacious grace), 또는 '성화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프랜시스컨 수도승 신학은 죄인도 이 은혜를 받아 낼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마르틴 루터가 몸담았던 어거스틴 수도승 신학에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능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 은혜'(prevenient grace)를 부여하심으로서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일정한 공덕을 쌓도록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선 은혜란 '작용하는 은혜'(operating grace) 또는 '충족한 은혜'(sufficient grace)라고 하며, 의지를 새롭게 하고 이해를 조명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나 회개를 말하며, 이로서 죄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수용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또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수준' 또는 '일정한 공덕'이란 중세교회가 가르쳤던 '합일치 공덕'(meritum de congruo)을 말한다.(2

 

합일치 공덕이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한 일정한 수준의 행위로서 이를 불완전한 공덕 혹은 절반공덕(half-merit)이라고도 한다. 죄인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유의지 즉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는 선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성화케 하는 은혜 없이도 죄인은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회개(contrition)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한 회개(attrition)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는 아니지만 그가 주신 율법도 순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즉 성화케 하는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이기심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합일치 공덕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죄인이 행위로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카톨릭교회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신다"(To the one who does what is in him, God does not deny grace)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근원 또는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예비행위에 대한 열매이다. 먼저 인간의 일정수준의 공덕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받는다.(3

 

이제 합일치 공덕으로 인하여 부여받은 은혜를 성화 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선행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이 은혜는 인간의 영혼에로 수급된다. 이 은혜는 죄를 사하고 죄를 제거한다. 죄가 선 행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 즉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죄인은 혼자의 노력이나 수고로써가 아니라, 이제는 이 은혜 즉 성화케 하는 능력과 보조를 맞추어 전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실질적인 공덕을 쌓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죄인은 성화케 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좀 더 용이하게 실질적인 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공덕(meritum de condigno)이라고 한다. 이 지점에 이를 때에 죄인은 비로소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중세교회에서는 이를 칭의(稱義/justification)와 동등시 취급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점진성화(聖化/sanctification)의 의(/ righteousness)를 말하고 있다. 만일 이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이 성서적 교리라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실질적인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만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은혜가 아닌 보상이 될 것이다.(4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공덕만을 온 인류를 위한 충족한 행위로 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공덕은 물론 성자들의 공덕, 그리고 개개인의 공덕과 병합하여 구원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나 성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덕을 행하였으므로 이 여분의 공덕을 쌓아 둔 창고(treasury of merits)가 있다고 주장하여 면죄부 판매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5

 

카톨릭 사제들의 면죄특권은 요한복음 2023절인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면죄(indulgence)는 이미 사함 받은 죄로 인해서 받는 일시적 형벌(temporal punishment)에 대해서 교회로부터 면죄함을 받은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일시적 형벌을 통해서 치유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시적 형벌을 받는 곳이 연옥(purgatory)이다. 그러므로 연옥은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요. 완전하지 못한 것을 완전케 하고, 죄로 인한 불결을 정화하며,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다. 따라서 면죄(indulgence)는 형벌을 사하는 것이요. 연옥에서의 정화과정을 면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죄특권은 또한 교회의 영적 창고(spiritual treasury of the church)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충족, 마리아 또는 성자들의 완벽한 삶, 그리고 순교자들의 잉여공덕 창고에 근거하고 있다. 교황의 면죄특권은 바로 이 잉여공덕 창고에 쌓인 성자들의 공덕을 희사함으로써 연옥에서의 일시적 형벌을 면케 한다는 것이다.(6

 

따라서 중세교회는 인간의 행위 공덕으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강조하였고 시혜하였다. 중세교회는 수혜자가 영적 방해를 가하지 않는 한 교회의 올바른 성례는 수혜자에게 은혜를 실어온다고 말한다. 이것을 ex opere operato "베풀어진 성례에 의해서"라고 부른다. 이 말은 믿음에 관계없이 교회에 의해서 베풀어진 성례 자체로써 구원하는 은혜에 족하며, 작용하는 능력(virtus operativa)을 갖는다는 말이다.(7

 

여기서 말하는 성례전이란 성만찬(Lord's Supper), 침례(Baptism), 고해성사(Penance), 견진례(Confirmation), 혼례(Marriage), 안수례(Ordination), 그리고 종부성사(Extreme Unction)를 말한다. 중세교회는 이들 성례를 은혜를 받는 통로(channels)로 또는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성례전은 구원의 능력을 실어 오며,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 마리아의 손을 거쳐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은혜의 통로라고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열매로 인하여 고인 은혜의 저수지로부터 은혜의 유입을 받는 수로(水路)가 성례라고 말한다. 물론 성례는 행위를 수반한다. 또 성례 그 자체가 행위이다(opus operatum).(8

 

.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비교

 

이제 카톨릭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확실하게 알고, 카톨릭교회의 칭의 개념이 개신교회의 것과 어떻게 다르며, 또 앞으로 전개될 루터의 칭의 개념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개신교회의 의인론을 카톨릭교회의 것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개신교회

 

1.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받으실 만하게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시게 한다.

4.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자를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7. 죄인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된다.

8.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마치 의인처럼 취급하게 하신다.

9. 신자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드러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의 자리에 대신 서신 예수께서 의롭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

11. 칭의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에 중생과 성화(聖化)를 가져오게 하신다.

12. 죄는 칭의와 중생 후에도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남는다.

13. 신자는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 대해서 어떠한 공덕도 주장할 수 없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받으실 만하며,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신자의 선행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류의 행함의 부족을 충족시킨다.

14. 신자는 언제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서 받아 드려진다.

 

(2)카톨릭교회

 

1. 칭의는 의롭다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은혜의 유입으로 이루어진다.

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4. 인간은 자신의 실질적인 의에 의해서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생한 자만을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생 시키는 행위이다.

7. 죄인은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없고, 그의 심령 속에 부어진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있다.

8. 칭의는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9. 신자는 은혜의 성령께서 신자를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실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11. 중생케 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게 하도록 한다.

12. 칭의는 죄를 전체적으로 박멸시킨다. 오직 정욕과 연약함만이 남을 뿐이다.

13.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을 행한다.

14.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개신교회의 칭의는 무죄선언 즉 법정개념의 칭의를 말하고, 중세교회는 개신교회가 말하는 성화를 칭의 개념으로 보는 데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비교에서는 개신교회의 성화의 개념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사실상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성화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개신교회가 죄인의 소망을 하나님의 무죄선언에 두고 있고, 성화의 정도에 두지 않는다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 개신교회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비교

 

루터의 의인론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 루터가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서 발전된 개신교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잠시 살펴봄으로써,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차이점과 루터와 중세교회 또 현재의 개신교회 사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도구로 삼고자 한다.

 

개신교회에서는 칭의를 법적문제로, 성화를 우리의 상태 즉 본질 문제로 취급한다. 따라서 칭의는 위법에 따른 유죄성에 문제로, 성화는 위법의 결과인 부패성의 문제로 취급한다. 칭의는 외적, 객관적 선포에 의한 의로써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화는 내적, 개인적 만들어진(보상된) 의로써 성령은 치유자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물론 그리스도는 대속자로써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중보자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실천하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시며, 하나님의 의로움이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로 하여금 친히 원수된 인간들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덕이 전가된 의를 칭의라고 부르며,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이는 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칭의의 순간에 모든 죄가 사하여지며, 세례(침례) 가운데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입는다. 이를 초기성화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말하며, 행위가 수반되는 순종의 믿음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동의하는 것이요, 또 그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성화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무죄선언을 받고 구원함을 입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말하며 점진적으로 성화 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를 우리가 만들어진 의 또는 보상된 의라고 부르는 실질적인 의이다. 로마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구원의 길은 이러한 사실들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은 성화교리에 대한 잘못된 교리이며, 성화는 상급의 문제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서와 개신교회가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반면, 중세교회는 행위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위교리를 주장하는 중세교회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까? 행위로써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설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루터를 괴롭혔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기 위한 통로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성례였다. 죄인으로써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성례는 고해성사뿐이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든 죄과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했다. 루터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죄과를 고백하려고 하였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자주 심지어는 매일 고해하다시피 하였다. 한 때는 여섯 시간까지 죄과를 고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루터에게는 크고 작은 죄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하나라도 빼놓은 것 없이 모두 고백했느냐에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허락치 않은 한 반드시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기 마련이며, 고백하지 못한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한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루터에게는 더없이 고통이었다.

 

수도승들로써는 이러한 루터의 발버둥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Staupitz)는 루터에게,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 말고, 살인이나, 간음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중한 일로 찾아오도록 충고하였다고 한다.(9 한편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너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루터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진노의 불꽃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10

 

또 다른 루터의 고민은 설사 모든 율법의 요구 조건들을 다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내적 변화가 일어나겠는가라는 문제였다. 성화케 하는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회개(total contrition)를 할 수 있다고 중세교회는 주장하였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원하셔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상당한 정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는 그의 행위로나 태도로 볼 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실망과 좌절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11

 

이러한 루터를 돕기 위해서 스타우피츠 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계속해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도록 하였고, 교수로써, 설교가로써, 상담가로써 병든 심령들을 치료토록 하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남의 심령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민도 해결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2

 

 

2. 마르틴 루터의 깨달음(覺悟)

 

한편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으로 전근하여 철학을 강의하던 중,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Sentences of Peter the Rombard)을 강의하기 위해서 에어푸르트(Erfurt)에 다시 전근된다.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은 중세기 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성경, 교부들, 그리고 스콜라철학자들의 경구들을 주제별로 수집한 책이었다. 그는 다시 1511년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으로 전근되어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1513-1515년에 시편을 강의하게 되고, 1515-1516년에 로마서, 1516-1517년에 갈라디아서, 1518년에 다시 시편을 강의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루터는 1513-1519년에 거쳐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그의 깨달음을 "탑 속 경험"(tower experience)이라고 하는 데,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는 탑 속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3

 

종교개혁으로 인한 루터의 공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서적 의미의 재발견이다. 일반적으로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정의 즉 반드시 죄인과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정의로 그 뜻을 풀고 있었다.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로 발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써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극적인 깨달음은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14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정의로써 풀이할 때,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이었다. 중세교회는 물론 자기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진지한 의도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는 합일치 공덕과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관련을 맺고 있는 성례의 실재들의 병합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서기를 바랐다. 이것이 첫째 단계인 중세교회의 상황이었다.

 

둘째 단계는 이해의 단계이다. 시편강의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깨달은 바는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엄격한 심판의 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변화시키는 은혜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그래서 죄값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래행위가 더 이상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오직 은혜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게 한다. 물론 중세시대에도 어거스틴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이 견해는 좀 더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교리로 재천명되었다.

 

셋째 단계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성화케 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 인간을 의롭다고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15

 

은혜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탄생시켰으며, 중세교회의 성례전들이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위나 실질적인 의의 유입에 의존하는 따위의 견해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대신 오직 은혜만이 우뚝 서게 되었다.

 

.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의 의제]

 

루터의 의인론은 그가 면죄교리에 대해서 토론의 기회를 마련키 위해서 15171031 비텐베르그 대학에 있는 캐슬(Castle)교회 문에다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의제](The Ninety-five Theses)를 붙일 때만해도 아직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했다. 다만 시작에 불과하였다. 1조에서 루터는 마태복음 417절의 회개가 "신자들의 총체적 삶이 회개의 삶이며," 2조에서는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 즉 고백(confession)과 고행(satisfaction)에 대한 언급은 아니라고 믿었다. 회개는 단 한 번의 행위이기보다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임전에서 갖는 일종의 계속적인 심정이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결단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면죄교리의 잘못된 주장이나 실행을 공격하였던 것이다.(16

 

또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에 대한 해설]에서 고해성사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데 인용된 제롬의 라틴어 불가타(Latin Vulgate)의 성서 본문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태복음 417절에 대한 라틴어는 penitentiam agite 'do penance'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Erasmus)가 만든 헬라어 성경은 단순히 'be penitent(참회하는 자가 되라)'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헬라어 성경의 'Metanoeite'는 문자적으로 '회개하라(마음을 바꾸라)'라는 의미일 뿐이다.(17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면죄(indulgence)는 죄는 이미 사함 받았지만 하나님께 죄값을 치르며(satisfation), 피할 수 없는 형벌 즉 일시적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공덕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선행(선한 행위)와 함께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양의 연옥에서의 형벌은 면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면죄를 보증하는 증서가 교황의 대사에 의해서 발급되었다. 이를 면죄부라 한다. 이와 같이 교황의 면죄특권은 살아있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는 이 면죄특권이 십자군 전투에 참여한 용사들에게 적용되었고, 그 후에는 교회에 바치는 기부금에 적용을 시켰다.

 

루터가 [95개의 의제]를 캐슬교회 문(게시판) 앞에 부착한 것도 도미니컨 수도승 요한 테젤(Johann Tetzel)이 면죄부 구입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건립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키 위해서 로마당국은 성직매매를 공공연히 자행하였고, 성직을 구입한 자들은 매입자금을 충당키 위해서 면죄부 판매를 허락 받고 있었다. 테젤은 그의 설교에서 면죄부를 구입한 자는 죄사함은 물론 형벌을 면하게 된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95개조의 의제]에서 루터는 "교황 자신은 죄를 사할 수 없다"(6). "이 때문에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설교하는 자들이나 교황의 면죄부를 구입하는 사람은 모든 형벌로부터 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21). "동전이 연보함 바닥을 땡그랑하고 때리자마자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날아 오른다는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 당위성을 인정치 않고 있다"(27). "면죄부 구입으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함께 영원토록 저주를 받을 것이다"(32). "진정으로 참회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누리며, 이 축복은 면죄부 없이 주어진다"(36). 그러므로 "면죄부에 따른 구원에 의존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52)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8

 

.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

 

15171031일의 [95개조의 의제]가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바로 시정하려는 데서 그 의의를 찾는다면, 15184월 열린 하이델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승 독일 총회를 위해서 마련한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Theses for the Heidelberg Disputation)는 죄, 자유의지, 은총과 같은 신학문제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개신교 사상이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9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은 가장 건전한 생활 교리이긴 하지만 인간을 의로움에 인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1)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치명적인 죄로써 둔갑한다"(3).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매력도 없고 나빠 보이지만, 그 결국은 진실로 영생을 위한 공덕이다"(4)라고 말하고 있다.(20

 

자유의지에 대해서 중세교회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지 아니 하신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하여, 루터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한 그것은 치명적인 죄를 범할 뿐이며, 타락 후의 '자유의지'는 말뿐이다"(13)라고 주장하였다. "타락 후의 '자유의지'는 선행에 대해서 오직 실현할 수 없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지며, 악행에 대해서는 그러나 언제나 실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진다."(14). "자유의지는 무죄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남아 있을 수 없다"(15).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므로 의로움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며, 이중으로 유죄하게 된다"(16). "율법은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것을 죽이며, 욕하며, 정죄하며, 심판하며, 저주한다"(23). "행함이 많은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행함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많이 가진 자가 의로운 자이다"(25).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하지만, 결코 행하여지지 않으며, 은혜는 '이것을 믿어라'고 하지만, 즉시 모든 것이 행하여진다"(26). "그리스도의 사역은 마땅히 능동적 사역이라고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수동적이며, 행하여진 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사역 때문에 하나님께 기쁘시게 된다"(27)고 주장하고 있다.(21

 

이후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왕정회의(Diet at Worms)에 소환될 때까지 특별히 1519년 열린 요한 에크(John Eck)와의 라이프찌히(Leipzig) 토론을 통해서 얻은 바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서뿐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로마교황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종교회의에서 얻어지는 결론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들어 종교회의 자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보름스 왕정회의가 루터에게 그 자신의 저술들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라고 촉구했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엄하시고 주되신 각하께서 간략한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담담하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성서가 증거 하는 바가 아니거나,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왜냐하면, 본인은 교황도 종교회의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은 종종 과오를 범하였으며, 상호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인용한 성경말씀에 매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아무 것도 취소할 수도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려 가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 . 하나님 도우소서. 아멘.’(22

 

1520년 교황청에서 내려진 교서에서는 루터의 모든 저술들을 저주하고,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모두 취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 해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선행에 관한 논문}(The Treatises on Good Works), {로마 교황권}(The Papacy at Rome), {독일 국적의 지배계급에 보내는 호소}(An Appeal to the Ruling Class of German Nationality), {교황의 이방적 예속}(The Pagan Servitude of the Church),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와 같은 내용의 글들이 1520년에 발표되었다.(23

 

3. 마르틴 루터의 의인론

 

이제 이들 루터의 저술들을 통해서 루터의 개혁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루터의 의인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하고 제시한 바와 같이 중세교회의 구원관과 루터가 놓은 초석을 바탕으로 발전된 개신교회 사상을 먼저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루터가 즐겨 사용한 어휘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의 사상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슬로건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 개신교의 다섯 가지 슬로건

 

(1)오직 성서(Sola Scriptura)

교황이나 사도들의 전승을 성서와 동등하게 권위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또한 사제들만이 절대적이고 오류 없는 권위로써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카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그러나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임을 주장하는 슬로건이다.

 

(2)오직 은혜(Sola Gratia)

루터의 고민은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의존하는 복음의 진수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이다. 은혜의 독특성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태도와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진노하심에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스스로 취하신 태도와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3)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

그리스도만이 오직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심을 가르치는 슬로건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100% 충분하며, 죄인의 구원을 위한 공덕적 근원이다. 따라서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4)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 이는 중세교회의 공덕이나 성례전의 ex opere operato(=by the work performed)의 개념을 반박하는 슬로건이다. 이는 구원을 받는 수단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동의와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신뢰를 말한다(10:9). 따라서 오직 믿음의 실질적 원칙(material principle)은 중세교회의 사제들만의 제사장론을 배격하며, 만인 제사장론을 펼치는 슬로건이다.

 

(5)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는 슬로건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

 

이들 슬로건들은 모두가 루터의 저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어휘들이다. 특히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그의 저술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강조되고 있는 말들이다. 이들 슬로건들은 칭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동시에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하는 말들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강력한 주장이다.

 

. 마르틴 루터의 공헌

 

마르틴 루터의 공헌은 오래도록 사장되었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성서적 가르침을 재발견한데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태양을 따라서 돌던 지구를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발견하고,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152011월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다.(24 우리가 이 긴 말을 축소해서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하는데, 루터가 뜻하는 이신칭의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세교회의 구원론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 자신이 몸담았고, 또 배웠던 중세교회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보다 분명한 루터의 사상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참조 ;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 중세교회의 구원론)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합일치 공덕, 완전 공덕, 성화케 하는 은혜의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인간공로 중심의 칭의 개념을 모두 거부하였고, 믿음,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전가라는 성서 본래의 개념으로 새롭게 바꾸었다. 루터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속죄와 화해의 개념을 핵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입는 외인에 의한 의 또는 형식적인 의에 해당된다. 그리고 중세교회가 이 의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의를 채우고 보충키 위해서 성화케 하는 은혜를 부여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주장하였다. 루터는 궁극적으로 인간구원의 모든 조건을 하나님의 선물로써 즉 은혜로써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서문}에서 루터는 로마서 2장의 유대인 정죄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개념을 피력하고 있다. 바울이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2:13)라고 해놓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고 한 점에 대해서 루터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정한 마음으로 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바람 때문에 겉모양으로나 행동으로는 율법을 지키지만, 자의(自意)나 율법에 대한 사랑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25

 

그러나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지 않은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위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신령하며, 거룩한 것이기에 신령한 마음으로 또 진정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데, 인간으로써 다소나마 거리낌이나 마지못함이 없이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의 행위는 가식이며, 위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써 간주하실 수 없으며, 우리가 율법을 싫어하고 억지로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가르침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26

 

이런 맥락에서 1525년 출판된 루터의 {속박 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자유 의지론}을 쓴 후,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속박 의지론}에서 루터는 속박의지를 인간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다거나 또는 인간이 돌이나 짐승이나 또는 악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의지의 행동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과 적절하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환언하면, 인간 자신의 결정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된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완전타락설과 같이 인간은 결정적인 존재문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유의지는 전혀 자유하지 않으며, 죄악에 예속된 영구한 죄수이며, 노예라고 말하고 있다.(27 은혜가 없이는 자유의지의 능력은 전무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다. 때문에 자유의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고, 또 무엇이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다하시기 때문이다.(28 다만 인간은 구원과 저주문제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의지에나 또는 사탄의 의지의 포로이며, 죄수이며, 예속된 노예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29 이는 인간이 가식이나 위선이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모두 다 해낼 수 없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율법의 성취는 오직 인간이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율법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주시는 데, 이 믿음에서 진실로 선 행위가 나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기쁨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데, 이 성령은 율법의 요구와 우리를 동등하게 만드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진정한 욕구를 가지게 되며, 두려움이나 억지로 하지 않고, 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된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에 신령한 심령들에 의해서 사랑 받는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죄는 남게 되며, 율법에 대한 증오감이 남게 된다.(30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며, 믿음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덕에 의해서 얻어진 영을 우리에게 가져오며, 이 영은 또한 율법이 목적으로 하는 행복과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온다고 한다.(31

 

이상에서 보듯이, 믿음은 수단으로써 구원을 성취하며, 그 결과로서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루터의 이신칭의 개념에서 다분히 행위적 개념을 강조하는 중세 카톨릭교회와의 타협할 수 없는 분명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개념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구원하는 그리고 효력 있는 이용이다"라고 했고,(32 "오직 믿음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33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에서 다스린다."(34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완성한다"고 말한다.(35

 

루터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요한복음 113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써 다시 태어난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음에 처하고, 마음과 정신과 모든 능력 가운데서 사는 아주 다른 인간들로 우리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동반된다.

 

믿음은 살아있는 흔들리지 않은 확신이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믿음은 매우 확실해서 인간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이런 유의 확신은 또 그것에 대한 이런 유의 지식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며, 하나님과 또한 모든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열심을 내게 한다. 그것은 성령이 믿음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을 가진 인간은 그 같은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 쫓김이 없이 기쁘고 자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종류의 고난을 참는다.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은 마치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36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란 설교에서 이제 살펴본 바의 믿음의 단계를 "외인에 의한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며, 침례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되며, 이 의는 곧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를 믿음 그 자체로 생각한다.(37 따라서 "이 의는 근본적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실질적인 의에 대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이 상실한 원래의 의를 대신해서 주어진 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38

 

, 이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는 데까지 일치하여 더욱더 옛 아담을 몰아내신다. 왜냐하면, 외인에 의한 의는 단번에 모든 것이 부여되지 않으며, 그것은 시작이요, 발전되며,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때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한편,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 의를 형식적인 의(formal righteousness)라고 부르고 있다.(40 이 형식적인 의는 곧 믿음을 말하며, 이 의는 완전하지 못해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에는 죄의 잔존이 남게 된다. 따라서 이 의는 불완전한 의이며, 연약한 의이다.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기 위한 초보적인 단계의 의에 지나지 않는다.(41

 

,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를 두 단계로 보았고, 두 종류의 의로써 설명하였던 것이다. 1단계인 믿음의 단계는 성령의 첫 열매는 소유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아직 죄악이 남아 있는 단계이며, 불완전한 의의 단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불완전한 우리의 의를 완전한 의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을 무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42 이것이 둘째 단계의 의이다.

 

이러한 루터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칭의와 성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개혁교회 구원론의 기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루터의 제 2단계의 의인 실질적인 의는 또 "당연 의"(proper righteousness)라는 말로써 설명되고 있다. 이 의는 "우리만의 노력으로 그 의를 이루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 의인 외인의 의와 함께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43

 

루터의 제 2단계 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의를 말하고 있다. 다만 이 의를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칭의의 개념이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하는 점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루터가 말하는 이 당연 의 또는 실질 의, 또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성화의 의는 루터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첫째는 갈라디아서 5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 이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과 두려움 즉 경건의 삶이다. 이 의는 첫째 의인 외인에 의한 의의 산물이며 실제적 열매이며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이 의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다. 그리고 이 의는 옛 아담을 멀리하고 죄의 몸을 멸함으로써 첫째 의를 이루려고 한다. 이 의는 죄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자신에 대하여 근신하며, 이웃에 의로우며,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간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며, 그의 형상으로 변화한다.(46 이 의는,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를 구성하는 "마음의 믿음""하나님의 전가" 가운데 전가의 의를 말한다. 마음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의는 그 부족함을 채워 완전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전가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믿음이 의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시킨다고 한다.(47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공덕을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불완전한 우리의 의가 완전한 의로 받아드려지고 죄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신다.(48 하나님은 죄의 잔존을 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주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덮으시며 거저 용서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불경스러우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루터는 말하고 있다.(49 그리고 선 행위는 우리의 의가 믿음으로 된 의임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며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선행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인된 사실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50

결론

 

이상으로 루터의 구원론을 그가 처해있던 중세교회의 교리적 상황과 루터 자신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알아보았고, 그의 구원론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론에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발견은 암흑시기의 인류에게 크나 큰 빛과 소망이 되었으며, 인간 중심의 행위 신앙에서 신 중심의 은혜의 신앙으로 바꾸어 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루터야말로 위대한 신학자요, 개혁가였다. 그가 외친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은 중세교회로 하여금 흑암의 두터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토록 하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그의 구원론은 중세교회의 행위중심의 구원론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도록 인도했으며, 오늘날의 법정개념으로써의 칭의 개념이 인간본질의 개념인 성화의 개념과 구분되도록 가르쳤으며, 신자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구원하는 믿음의 결과로서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을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바꾸어 놓았으며,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루터에게서 무죄선언으로써의 칭의 개념을 확실하게 발견한다. 그의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은 결국 성서에 대한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성서로 돌아가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따라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그의 덕택으로 바른 구원론을 발견케 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믿음은 그 구원에 이르는 도구이며, 침례는 구원을 받는 시간이며, 구원의 목적은 선행이다. 루터는 침수를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의는 침례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했고,(51 "그리스도께서는 침례 가운데서 구원을 부여하신다"고 주장하였다.(52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두에게 완전하게 의무를 가진 종이며, 모두에게 예속된다"고 했고,(53 "그리스도인은 자신 속에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하였다.(54 이것이 바로 루터가 가르치는 구원받은 자의 참다운 모습이다.

 

루터의 믿음은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는 믿음이요, 모든 사람을 섬기는 믿음이요, 모든 고난을 참아내는 믿음이었다. 루터의 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삶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는 의인은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구하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경건하며, 모든 것에 자유하면서 그 자유를 진정으로 누릴 줄 알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왕이요, 모든 이의 종으로써 자신 속에 살지 아니하고, 이웃 속에 살면서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썩고 병들고 부패된 교회, 성직이 매매되고 면죄부가 판매되고 부도덕이 자행되던 교회에 의연하게 맞설 수 있었던 예언자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일 천만 의인이 있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그 기현상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루터의 의인론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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