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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朱基徹 1897~1944)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주현성 씨와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다.

기복은 8세 때 개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어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의 생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메어 끌려가야 하는가?”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아직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다. 그곳은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 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헛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산학교와 남강 이승훈

얼마 후 평양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금주와 금연을 선언한 뒤에 청결한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큰 형 기원이 하던 염전과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상속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을 보고 눈도 나았지만 몹시 쓸쓸한 나날을 신앙으로 달래면서 살아갔다. 그러던 차에 이기선 목사님이 소개해준 안기영씨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있지는 못했다.

큰 소망과 기대 속에서 열망하며 일어났던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실망감에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아! 이것도 아니다. 정녕 삶은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 첫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다.

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950)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 1930년 즉묵 소섭교회에서 개최된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 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기도에 매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 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엔 뜨거움이 솟아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주기철은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번째 아들 영만이와 세 번째 아들 영묵이가 태어났다.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가 있을까? 세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

그는 1926년 봄에 설립된 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주 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대개 목요일까지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랐다. 방 두 칸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재가 없어 집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생활하며 산에 가서 철야하기가 일쑤였다.

주 목사는 구봉산 바위굴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의 교육이나 재정 관리에 빈틈없이 철저했으며, 그의 사례비의 반은 교회로 되돌아왔다. 교회에서는 보릿고개 때도 점심을 지어 배고픈 사람을 먹일 정도로 구제와 선교에 힘썼다. 주 목사는 기도와 철저한 생활, 보살핌으로 어수선한 시국과 기독교계를 성경말씀으로 지키며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그래서 위임받은 지 한 해 만에 100여명의 교인이 300명으로 불어났다.

주목사가 구봉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다 늘 아내 몫으로 친정에서 주신 당 6천 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양심에 걸렸다.

초량교회(부산)

“굶어 병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 그 땅을 어떻게 끼고 있겠소? 내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권면하겠소? 나의 아내인 당신이 주인이니 내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게요. 처분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봅시다.”

남편의 말이지만, 끝없는 목회자 가정의 가난한 사람을 하다 보니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남겨두었던 어미의 마음인지라 부인은 계속 반대했다.

“여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이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굶기시거나 까막눈을 만드시겠소? 또 설사 그렇게 하신다 하여도 무슨 뜻이 있으실 것을 못 믿겠소? 당신이 그렇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신이오!”


눈물로 기도한 후 결국 절반의 땅을 처분하여 구제했다.

한편, 그는 24회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고 25회 노회에서 다시 유임. 주목사의 제의로 경남노회가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한 뒤로 경남 일대의 교회는 뜻을 같이 하기로 단단히 결속했다.

“신사 참배는 십계명 중 엄연히 제1, 2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우리는 계명을 어기고는 살 수 없음을 천명하여, 일본이 받는 신사 앞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신앙을 짓밟으려는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선 것이다.

문창교회 (마산)

문창교회는 주목사가 처음 성령을 체험을 한 곳이었다. 예배당은 크고 재정도 튼튼했으나 목회자 문제로 늘 불안한 교회였다. 시련을 겪은 지 4년이 이르도록 계속 흔들리는 문창교회는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줄 인물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다.

1933년, 암울한 기운은 점점 무겁게 조선 땅을 짓눌렀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일본은 북벌을 꿈꾸면서 조선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상처 입은 문창교회 문제를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해결하였다.

오랫동안 높은 영적 기갈에 허덕이던 교인들은 다시금 맑은 물을 얻게 되어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안갑수 사모와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려다 병이 나서 포기된 후 의신여학교 교사가 된 오정모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있는 주목사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력, 사랑, 학식이 다 구비되어 있어 나날이 그는 문창교회의 빛이 되었다.

1933년 5월 19일 돌연 안갑수 사모는 큰언니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결국 살 가망이 없게 되었다.

1933년 7월 3일, 경남 노회는 임시 노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라는 순윤설과 십계명 무용설을 주장하는 신진리파에 대한 정죄여부를 가려야만 했다. 그는 노회장으로서 신진리파의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젊은 지성인들 몇과 함께 그가 아끼던 청년들이 연루되어 있었지만, 아픈 가슴으로 7월 3일 노회에서 몇몇 사람은 면직으로, 나머지는 출교로 책벌을 단행했다.

그 후 자기를 초량교회 취임목사로 청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선배 장덕생 목사가 교리해석을 제멋대로 만들어 새 교파를 형성하고 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권징조례에 따라 그 이름을 노회 명부에서 제명해야 했다. 비록 잘못이 있다고는 해도 한 교직자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야만 하는 노회장 주목사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정말 괴로웠다.

그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평평한 바위 위에 꿇어 엎드린 그의 숨결은 그대로가 신음이었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 두 아이의 죽음, 제명, 책벌, 한국을 키질하듯 들볶는 일본, 이 땅 곳곳에 세워지는 일본의 신사. 주님을 찾는 그의 울부짖음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제단은 높은 곳에 있느니라. 제단에 오르려면 계단을 밟아야 하느니라.”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육신에 속한 애정과 욕망을 끊어내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주기철 목사는 그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린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과로에 영양실조. 십 여 일간 호되게 앓고 난 후 민망할 정도로 수척해졌다. 1934년 목사님의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자 제직들이 재혼문제를 들고 나섰다.

모두의 이야기가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고, 여러 가지 면으로 봐서 오정모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선생은 주목사를 성직자로서 존경하며 사모했으므로 그 동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음의 고비를 겪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일제히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며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주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마3:1-13)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엘리야의 권위, 예레미야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 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개가 되었습니까?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한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낱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그러나 미처 그 대목의 말을 맺기도 전에 장내를 찢을 듯한 제지의 소리가 단상을 가로질렀다.

“중지! 중지! 당장 중지!”

단상은 일경들과 목사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 모두가 일경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 그 밤을 지내고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던 몇몇 목사들에게서 일본 순회 전도 강연을 부탁받아 주목사는 한 달 이상 전도 강연 길을 떠난 후 교회도 조용해졌다.

목사님이 돌아오신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그를 청빙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 무학산으로 올라가 엎드렸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왜 남쪽 끝에 있는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조만식 선생님이 며칠 후 친히 찾아오셨다.

주기철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 장례식

산정현 교회 (평양)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식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다.

일본도 이에 맞서듯 주목사가 산정현 교회로 부임해 온 그 시디에 악명을 떨치는 군인출신의 미나미 지로를 서둘러 조선 총독으로 내보냈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 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밝히 전했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 교회 재직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산정현 교회로 부르신 뜻은 다만 한 가지, 주님이 머릿돌 되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총독부는 곧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라도 잡아 끌어내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갖가지 계책을 쓸 것입니다. 감언이설, 강제, 위협, 자신들의 법으로 온갖 방법을 휩쓸어 올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총칼이 아니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생명을 잃느냐 지키느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요 시험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심이요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소명은 이땅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조선총독으로 미나미 총독은 부임하면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때를 보일 속셈이었다.

10월 1일, 총독부는 소위 ‘황국시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 급 학교에 ‘일본천황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강제로 집집마다 가미다나를 설치시켰고 평양에는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하게 절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경죄라 하여 잡혀 갈 판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학교마다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결국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호주 선교부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남을 알아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여

미션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신사참배

한편 53회 평북노회가 2월 7일이었다. 평복 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잡이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 졸업 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주목사를 끌고 갔다.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목사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뒷일을 부탁했다.

학생들 10여명, 산정현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들인 후 2월 9일 조선의 공교로서는 처음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이다.

목사님이 감옥에 계신 동안 오정모 사모와 성도들은 철야기도를 했다. 결국 목사님은 4주 만에 풀려났다.

전국 24개 노회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식은 하루가 바쁘게 들려왔고,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있던 날, 주 목사님은 방문을 닫고 숨소리도 없이 홀로 계셨다.

오후에 되어 동료목사님들이 침통한 얼굴로 목사님의 방문을 열었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평양신학교를 짓밟은 자들이 모란봉에 세운 일본 신궁 텃밭에 평양신학교를 새로 세웠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와 서울 혁신교단은 조선 총독부에 직통으로 통하는 세력단체로 커져 산정현 교회 새벽기도 내용까지 일일이 그 친목회에 밀고 되고 있었다.

일본이 파견한 일본 기독교회 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가 총회를 앞두고 회유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평양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4개 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하여 모은 백여 명의 목사와 임원들이 성대한 환영 만찬으로 맞이한 후, 모임 장소를 산정현 교회로 정했다.

도미다는 깍듯한 태도와 싹싹한 말씨로 신사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설명을 했다. 주기철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죽을 각오한 단호함과 의연함으로 대처했다.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외우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언제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면 도미다 목사께서는 조선을 불법으로 점령한 일본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불법을 함께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도미다 목사님! 목사님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그리고 진정 조국 일본을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를 참배하라고 권고하며 다니시기보다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에게 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신앙양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일본도 한시 바삐 여호와 앞으로 돌아와 더 큰 일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무릎 꿇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한국을 떠나는 선교사들

도미다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주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 간담회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결국 도미다 목사일의 패배로 끝맺었다.

그런데 산정현 교회에서 간담회로 밤을 지새운 날 저녁, 선교부로부터 도미다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이 벌어졌고, 도미다는 4개 노회 신사 참배를 가결의 선물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은 저녁상을 받지 않았다.

도미다 목사의 한국방문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위한 선무공작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27회 총회에서 조선교회의 신사참배를 가결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고 있었다. 1938년 7월 초복더위가 땅을 절절 끓게 만들던 날, 사복 경찰 몇 명이 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쳐 영장 제시도 없이 창백해진 목사님을 무조건 끌고 나갔다.

총회가 열리기 전에 신사참배 반대 안건을 들고 나올 주인공이기에 주 목사를 묶어두기 위한 작전이었다.

시미즈가 형사는 막상 주기철 목사를 구속해 놓기는 했으나 죄목을 잡을 수가 없고 모두들 존경하는 터라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성읍 경찰서의 고등계 계장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낭하형사 밑에서 훈련받은 배만수 형사가 평양에 왔다.

배만수 형사는 의성교회를 뒤지다가 유재기 목사가 ‘기독교 청년 면려회’ 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잡아 가두며 관계된 목사들을 의성으로 끌어들였다.

이 ‘농우회’는 5년 전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유회에서 출발한 농촌계몽운동이었는데, 회장이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요,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추적한 것이다.

8월 10일, 평안남도에 있는 장로교회들이 너무나도 앞장서듯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를 들으며 의성으로 끌려갔다. 그의 도착은 고문의 시작이었다.

검도용 몽둥이가 자주 부서졌고, 앉혀놓고 짓이기는 매질이 지루해지면 천장에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비행기를 태웠다.

“아하! 아직 매운 맛을 못 보아서 입이 살았어.”

주 목사를 거꾸로 매어 달아놓고 고춧가루를 가득 푼 주전 물을 코와 입에 쏟아 부었다.

영원한 지옥불의 불붙임 같기도 했다. 극심하던 고통은 순간 끊어져 무의식 속에 빠졌고 고춧가루 물고문은 숨통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혈관도 타 붙게 만들었다.

주 목사는 감방에 있던 청년이 내미는 밥덩이를 간신히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주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마치 완전히 버림받은 자 같을 뿐이오며, 갈 곳이 아주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겠고, 희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 성찬으로 받사오니 주께서 저와 함께 하심을 확증하게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농우회 사건은 당초에 낭하 형사와 배만수 등이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약이 오른 배 형사와 낭하형사의 고문은 더 혹독해졌다. 그들은 주목사의 손톱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손톱 뿌리가 남아 있는 자리를 대나무 바늘로 쑤시고 찔렀다.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을 용서하소서.”

기절한 주목사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의식이 깨어난 주 목사를 널판자에 눕혀놓고 사지를 묶었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벗긴 뒤에, 알코올을 적신 탈지면을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었다.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배를 저며 내는 듯 했다.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의성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했고, 박학전 목사는 고문 끝에 맑은 정신을 잃고 신성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임원 기념 사진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우편이 김길창 목사

한편 평안 장로회는 “신사 참배는 교리에 배타되는 것이 아니다.”고 선언하며 9월 2일 경안노회도 정기노회도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9월 9일 총회가 열리기 전에 총노회 27개 중 과반수가 넘는 17개 노회가 신사 참배를 스스로 가결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로회 27차 총회가 9월 9일 평양의 서문 밖 예배당에 219명의 총회 참석자가 모여들었다. 참석자 219명 사이사이 경찰관이 97명이 끼어 앉아 장로회 총회가 아니라 경찰관 모임 같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선거를 하고 허둥지둥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오정모 (吳貞模 1903~1947)

주기철목사의 사모. 평양 정의학교 졸업 후 마산의 신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문창교회에 출석하다가 주기철목사를 만남

의성에서 면회를 허락한다는 전갈이 오자 오사모는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낭하형사와 배 형사는 오사모를 앉혀놓고 회유하였다.

“주 목사는 시국에 대해 아주 둔하더군요. 그러니 부인께서 면회를 하시면서 요즈음에 돌아가는 사태를 잘 설명하시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설득하세요. 아시겠습니까?”

그것 한 가지면 당장 석방입니다.

오사모는 어떻게 할까 갈등하고 있는데, 형사실 문이 열렸다. 주목사의 깍지 못한 수염 속에 얼굴은 백납 빛이었다. 안질이 도져 벌겋게 충혈 되었고, 저고리를 헐렁하여 허수아비에게 걸쳐놓은 옷처럼 보였다.

오사모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목사님 장하십니다. 조선의 교회가 다 무너져도 목사님이 견디시는 한 우리 주님의 교회는 그 자리에 건재합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자기 배 형사가 머리채를 잡아채었다.

“아니! 이런 독한 계집이 있나? 제 서방을 석방시키도록 말을 거들랬더니 무어야? 더 견디고 승리하라고! 세상에 서방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독한 여편네구만!”

“목사님, 우리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견디신 것처럼 기도하시면서 견디십시오. 모두들 잘 계시니 집안 염려는 하시지 마세요. 산정현 교회도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아무도 십계명을 어긴 사람이 없습니다.”

배 형사는 오사모를 내동댕이쳤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사모는 한없이 울었다.

“주님 용서하세요. 기차 안에서만 울고 평양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니 지금만 용서하세요.”

다음해 2월 농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검찰청으로 넘겨졌고, 검찰에서는 유재기 목사 한 사람만 기소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혐의로 석방하기로 결정을 했다.

2월 5일. 주일 아침 평양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날 예배 시간이 되자, 평양과 대동과 선교리의 3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들이 산정현 교회로 몰려들었다. 2천여 명이 집결한 자리였으나 숨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서도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잘 견디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7개월 동안 저는 5종목의 기도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가 최대 무기인 듯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그 젊음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단번에 겪는 고난은 이겨내기 쉬우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힘이 듭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처럼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은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랴!

세 번째는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나에게는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와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 자식의 의무도 중요하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의 아비가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을, 불안해하는 양떼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인도하시며,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당신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얽어맨 인정의 줄이 나를 얽어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다 하셨으니 저로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네 번째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 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리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혹여 옥중이나 사형장에서 저의 목숨이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 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시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아멘.”

눈물바다를 이룬 산정현 예배당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였다. 일본의 앞잡이로 손가락질 받던 조선 형사들까지 눈물을 머금었다.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뒤 6개월 후의 일이다. 8월 초순 어느 주일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여러 명의 형사대가 찾아와 설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주 목사는 낯빛 하나 변하는 일없이 형사 앞에 꼿꼿하게 섰다.

“당신네들은 일본 헌법에 예배의 자유가 보장된 것을 모르시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위반하고 있소.”

순간 형사들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지혜롭게 적을 공격한 것이다.

그날의 설교가 있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여섯 명의 형사들이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갑시다!”

“이번에는 무슨 명목이오? 법에도 없는 폭력을 언제까지 행사하리라 믿고 이러시오? 나는 당신네들에게 끌려갈 일을 한 적이 없소.”

“잔소리가 많다!”

부장형사가 목사의 팔을 낚아챘다. 고무신을 신은 주목사를 형사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잡아끌었다.

일본 관헌은 9월에 소집할 예수교 장로회 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을 조직한 사전 모의를 끝낸 뒤에 그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 것이다.

주 목사를 연행하자마자 지하실에 끌어다 놓은 시미즈가 형사는 주 목사님을 먼저 거꾸로 매어 달았다. 그리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풀었다. 피가 머리로 쏟아지고 눈알이 당장 빠질듯했다. 코로 입으로 들이 붓는 고춧가루 물은 뇌수를 긁어 흔들며 단숨에 숨통을 막았다. 목구멍이 찢어지고 코 속이 타는

듯했다.


일제의 고문 만행

얼마 만에 혼절,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그들은 주 목사를 천장에서 끌어내려 엎어놓고 등을 발로 밟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코로 입으로 들어갔던 고춧가루 물이 다시 조금씩 밀려나왔다.

그들은 주 목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전기 고문을 했다.

“전기 찜질을 하셨으니 이번에는 손톱 소제를 해드리지.”

대나무 바늘로 손톱을 쑤시고 발톱을 후볐다. 그때 홀연히 주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 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형사들은 얼굴을 흉측하게 찌푸렸다.

“예수한테 힘을 달라고 노래를 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주 목사는 다시 천장에 거꾸로 매어 달렸다. 그리고 코와 입으로 쏟아 붓는 고춧가루 물을 들이켰다.

“하나님 찬양… 주여, 나를 주님 곁으로 부르소서. 나의 육체가 슬프오니 내 슬픔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떼였다. 며칠 후 평양경찰서에서 산정현교회로 긴급 호출령이 떨어졌다.

경찰서로 간 교회 중진들에게 경찰서는 지시사항을 주면서 협박을 했다.

1. 교회 제직은 모두 매주일 반드시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2. 설교 또는 교회 사무는 제직들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 사람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3. 이 사항들에 관한 결정을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것.

4. 이상 세 가지 항목 중에 단 한 가지라도 불응할 때에는 당장 내일부터 교회를 폐쇄한다.

이제는 주기철 목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산정현 교회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일예배는 눈물의 예배였다.

예배를 감시하던 형사들이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성도들 개중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아가며 타협을 제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 경찰서에 갇히는 것이 낫지, 순교라면 몰라도 누가 배교에 앞장서라는 말이오? 산정현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정절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안 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한 청년회원들은 혹여 라도 제직들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할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결정되지 않자 그날 오후 형사대 십여 명이 예배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예배당에 안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말 몇 마디를 던졌을 뿐, 감히 교회 문에 못을 박지는 못했다.

10월 23일의 일이었다. 수요일예배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가던 방 장로를 갑자기 형사 서너 명이 덮쳤다.

“장로의 설교가 금지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반항이야?” 형사들은 육십을 넘긴 방 장로님의 팔을 비틀어 잡아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은 일제히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엎드려져 통곡을 터뜨렸다. 통곡이 기도요 찬송이었다.

방 장로님이 끌려간 곳은 주기철 목사님이 고문을 당하고 있던 지하실이었다.

“어이 주 목사! 당신이 잘못 가르쳐서 여기까지 잡혀 온 늙은이가 있으니 보라구.”

하면서 방 장로를 천장 지렛대에 팔목을 묶어 놓고, 다리며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형사들은 주 목사를 매어달아 놓은 채 그 앞에서 방 장로를 형틀에 묶어 놓고 미친 듯이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방 장로는 고통 중에도 주 목사님의 괴로워할 것만 염려되어 신음소리 한번 마음 놓고 쏟아놓지 못했다.

“야! 이 늙은 것이 매를 맞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야? 바른 대로 불어! 누가 신사 참배를 하지 말라고 시켰어?”

“사람이 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 따위 우상에게는 절하지 말라고 하시었소. 나를 이 자리에서 죽여 보시오. 그 외에 다른 대답이 나오겠는가.”

독이 오른 형사들은 ‘누가 더 잔인한 매질을 잘하는가.’ 경쟁하면서 양쪽에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방 장로는 일어나 걷지 못하는 주 목사를 끌어 등에 업고 감방을 향해 걸었다. 주목사를 부축한 것이 이유가 되어 기운이 남아 저렇다며 방 장로를 또 끌어다가 고문을 시켰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감방에 돌아왔다.

“장로님, 우리의 정신은 생생합니다. 더구나 주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우리의 영혼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지요. 일본 관헌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우리의 영혼만은 흠집 없이 지켜주십니다.”

주 목사는 기도하는 방 장로의 등 뒤에 대고 나직한 그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한 줄 한 줄 기도하듯 지은 ‘영문 밖의 길’ 이라는 시를 그 무렵 널리 알려진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라는 곡조에 붙여 노래를 불렀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한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경찰은 산정현 교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교회는 똘똘 뭉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평양 노회장 최 목사를 이용하여 외유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자, 경찰의 명령에 따라 임시 노회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주기철 목사를 파면시켰다.

부활주일에 평양노회 전권 위원들 9명이 강단을 차지하고 이인식 목사를 당회장으로 세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교인들은 부활주일 전날 밤부터 예배당에 모여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새웠다.

주일을 앞둔 예배당의 철야기도는 장엄함과 거룩함이었다. 주일예배 시작이 다가오자 양재연 집사가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와 ‘십자가 군병들아’를 이어서 부르며 절대로 중단하지 말자고 외쳤다.

9명의 수습위원 목사님들과 경찰 40여명이 밀어닥쳐 중지를 시키려고 악을 써댓으나 곧 찬송소리에 묻혀 버렸다. 화가 난 형사들이 교인들을 잡아 끌어내고 내동댕이치며 감옥으로 끌고 갔다. 결국 경찰은 예배당을 폐쇄시켰다.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사택도 빼앗았다.

주 목사님을 취조했던 구가 경사는 목사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주기철 목사가 국사범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주 목사님을 존경할 뻔 했소’” 라고 고백했다.

평양경찰은 일단 주기철 목사를 가석방이라는 명목으로 방면할 방침을 세웠다. 가석방의 소식을 들은 산정현 교회 교우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뻐했다.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로 가서 손수 각목을 떼어내고 들어가셨다. 먼지 앉은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님, 주님이 견디셨습니다. 주께서 이기셨습니다. 나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만나처럼 내려주시며 주께서 이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주님, 감히 질문을 해도 된다 하시면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제가 겪어야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주님, 이 흩어진 양떼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찰은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며 부흥집회로 교회재건 운동을 서둘던 한상동, 이기선 목사를 구속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수감했다. 가석방되어 집에서 기거하기 한 달여 만에 교회재건파라 이름 붙인 목사님들 21명과 주기철 목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일체 검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0년 여름 일본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22년간 조선교회의 보수적 신앙을 이끌어가며 꾸준하게 출간되던 ‘신학지남’까지 폐간시키므로 평양신학시대의 막을 강제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수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을 검거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가 검거되고 손양원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투옥되었다.

다음 해 초봄, 느닷없이 형사가 들이닥쳤다. 특별면회라고 하면서 식구들 모두 함께 데리고 갔다. 특별 면회라는 말에 노모는 솔깃하고, 광조는 그저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그런데 3층 형사실이 아닌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가족들이 보이는 앞에서 주 목사님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노모는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고 오사모는 어머님을 무릎에 안고 엎드려 숨차게 주님만 찾았다.

목사님이 기절하니 천장에서 끌어내려 이제는 고춧가루를 주전자에 풀어 그 물을 목사님의 코와 입에 붓기 시작했다. 형사는 주목사가 고문 받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노모와 오사모를 발길로 걷어차고 머리끄덩이를 끌어 내동댕이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목사님의 배가 출산 직전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붓더니 이제는 목사님의 배에 의자 둘을 엎어놓고 배를 짓눌렀다. 핏물인지 진물인지 검누런 물이 코에서 귀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모는 다시 혼절하여 늘어지셨고, 오사모는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형사들은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며 목사님을 일으켜 책상위에 앉혔다. 주목사와 오사모의 눈이 마주치자 깊은 신뢰와 아픔과 사랑으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이년아!”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형사들은 검도용 칼로 오사모를 후려치며 발길질을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살이 터지면서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밤이 깊어서야 세 식구는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노모는 정신을 잃고 어린 광조는 아버지가 당하는 고문과 어머니의 매 맞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입을 벌려 말해보려고 애쓰던 광조는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그러면 좀 더 견디자. 우리 기도하며 기다리자꾸나.”

오사모는 광조를 가슴에 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1944년 전쟁은 막바지에 달한 것 같았다. 그 간에 폐쇄된 교회가 2백여, 목회자나 장로, 집사, 평신도들을 구속 수감한 숫자가 2천여에 이르렀다. 징병제를 학병제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건물뿐 아니라 교회 건물까지 일본 군대를 주둔시켰고 교회 안에까지 ‘가미다나’를 설치했다.

4월 19일 저녁에 형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주기철이 위독하여 병감에 수용되어 있으니, 긴급 면회 바람.”

날이 밝기도 전에 형무소로 달려갔다. 간수는 면회실이 아닌 소장실로 오사모를 안내했다. “부인, 부군께서 너무 위중한데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수속을 밟아 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열흘 전에 최권능 목사님을 이렇게 밀어냈었다.

최 목사님은 옥중에서 소천하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지만 강제로 모시고 나가서 닷새만인 4월 15일 병원에서 소천하시지 않았는가. 이들은 목사님들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두 간수에게 들려오셨다. 서 있을 힘도 잃은 듯 간수들에게 몸을 의탁한 목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다 오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월계관을 들고 계신 것 보이시지요? 눈을 들고 바라보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세요. 목사님!”

목사님이 타 붙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머지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이오. 아! 어머님이 보고 싶소. 불쌍한 어머님을 내 대신 잘 모셔주시오.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여보, 나를 웅천으로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시오.”

그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사님은 쓰러졌고 간수들은 황급하게 목사님의 몸을 양편으로 붙들었다. 끌려가시던 목사님이 뒤돌아보며

“여보,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소.”

하시며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가셨다. 오사모는 그 밤을 혼자 엎드려 울었다. 일본이 무너지기 1년 4개월 전이었다.

“목사님의 유채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수속해 주십시오.”

밖에서 기다리던 백인숙 전도사와 여집사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달려와 함께 쓸어안고 흐느꼈다.

“우리 목사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기뻐하십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기뻐하십니다.”

“사모님, 어제 목사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며 마지막 외치시던 음성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무척 놀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라고 한 간수가 말해주었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

5일장, 장례일인 화요일 아침에는 눈부시도록 화창한 햇살이 쏟아졌다. 평양 고등보통학교 정문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찰관들이 몰려들었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런 행동개시도 하지 못했다. 기자묘 앞을 지나서 대성산 공동묘지, 목사님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시던 돌박산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요, 아이들의 훌륭한 아버지요, 애정을 가진 남편이요, 연약을 육신을 입은 인간 주기철. 그러나 그 인간의 애절함과 연약함을 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묵묵히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간 하나님의 종,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 명령에 겸손히 순종한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그의 순교는 산정현 교회와 오사모 가족들이 함께 한 고난 후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주님, 나를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채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 03.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 03. 23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 04.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2. 03.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 11. 05 차남 영만 출생

1922.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 01. 09 3남 영묵 출생

1925. 02. 22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 3남 영묵 병사

1929. 경남노회에서 주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 03. 05 장녀 영덕 출생

1930.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 0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18 4남 광조 출생

1933. 05. 16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 08. 부친 주현성장로 별세(향년81세)

1935. 5.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 12.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날 “일사각오” 설교

1936. 주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 07. 평양산정현교회 부임

1937. 09. 05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 02.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당함

1938. 06.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 0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 08.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1938. 08. 의성 농우회 사건에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 09. 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 02. 04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 02. 05 평양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09.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 12. 19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 03. 24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 04. 주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 여름 제4차 검속

1941. 8. 25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당함

1944. 3. 31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1944. 4. 21 오후 4시 주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1944. 4. 25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1947. 1. 27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1950. 9. 주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1990. 12. 21 주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1997. 4. 20 주목사 복권 및 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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