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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지 못하였는가? “자유의지를 가졌다”라는 것은 인간 본연의 의지가 선악 간에 강요를 당하거나, 자연의 어떤 절대적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자결능력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완전한 자결능력을 소유한 인간이라면 때마다 사정을 전체적으로 보아서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쟁점은 구원에 관한 것이었는데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하게 되면 인간 스스로가 선 즉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게 됨으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기보다는 아주 일정부분이라도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게 된다. 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면 부정하게 된다면 인간이 행하는 악행은 모든 행동의 제 1원인  곧 하나님께 돌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 된, 불순종하기 전 사람이 천진난만했을 때는 선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원하며 행할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범죄의 가능성마저 가진 완전한 자유의지였으며 사탄의 유혹을 받아 타락하게 된다.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구원을 가져올 그 어떤 영적 선에 대한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죄인이 된 인간은 저 선에 대하여 전적으로 등을 돌렸으며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능력으로는 결코 선에로 돌아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 죄인인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는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상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것은 창조 시 인간에게 반영된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고 변질 되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자유의지 역시 왜곡, 타락 되어 하나님의 선에 이를 수는 없지만 사람은 여전히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전체적으로 보아서 자기가 하고자하는 대로 의지결정을 할 수 있음이다. 또한 그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자연적인 의무들도 많이 이행할 능력이 있다. 자유가 사람의 영혼이 그 원하는 대로 의지력을 행사하는 불가침의 특권을 의미할 때, 사람은 타락 이전과 같이 지금도 자유로우며 그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으며 결코 죄를 허용은하시되 조장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제 그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구원받은 인간은 영적으로 선한 것을 자유롭게 의지하고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선만을 행하는 완전하고 변함없는 자유를 얻는 것은 영광상태에서 뿐이므로 이 땅에서 언약인은 아직도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선한 것을 완전하게 의지하지 않고 선한 것만을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악한 것까지도 의지한다.

  자유의지에 관한 위의 일련의 긴 설명으로 도출하려 한 결론은 죄인은 자유와 비록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련의 악을 원하는 자유의지를 가졌으며 은혜로 구원받은 언약인 역시 영광의 상태에서 만큼의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제는 죄인과 달리 하나님의 선까지 바랄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섭리란 만물의 위대하신 창조자 하나님께서 그의 무오류의 예지와 그의 자유로운 뜻의 불변의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들, 행동들 및 사물들, 곧 가장 큰 것들로부터 가장 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지탱하시고 지도하시고 통치하시는 원리를 말한다.

  인간의 편에서 자유의지를 말할 때 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정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자유, 혹은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결론을 아무리 도출하더라도 창세전부터 창조자의 일련의 계획이 존재하며 그 계획대로 섭리해나가신다는 더 큰 원리 앞에서 인간의 모든 삶도 그의 섭리 안에 속해져있을 수밖에 없는 데 과연 인간에게 진짜 자유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 테면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으며 성경 역시 그에 대해서 미리 기록되어 있었다. 그에게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을까?

또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고 10번이나 말씀하신다. 하나님에 의해 완악하게 된 바로에게 인간에게 있는 최소한의 자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졌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 구원협약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을 미리 준비하셨다. 이것은 예측의 수준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될 것을 아신 것이며 이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타락을 선택하지 않을 여지가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위의 세 가지 의문을 염두 해 두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관계성을 알아보자.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특징은 서론에서 충분히 논하였으며 이제 중요한 것은 더 큰 원리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만사는 제 1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방법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섭리에 의하여 제2의 원인들의 본성에 따라 발생하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때 제 2원인들의 본성은 하나님의 수단이 되는데 인간을 포함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무시하고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며, 그들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하시면서 만물에 부여한 속성을 친히 주셨으며 계속적으로 그 속성을 유지하도록 하심으로 그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과 동일하게 하심과, 하나님 자신이 동일하실 것임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특별히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있어 이 섭리의 방법은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시거나, 초월하시거나, 혹은 거슬러서 까지 자유롭게 일하신다.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삶에서 이 섭리에 대한 예를 찾아보자면 먼저 예수님 자신의 삶에 있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의 예수님의 행동은 인간의 것을 철저히 그대로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셨기에 분명히 일반 사람과 똑 같이 배가 고프셨을 테지만 기적을 사용하라는, 다시 말하자면 초월하거나 거스려서 해결하라는 사단의 유혹에 말씀만으로 대항하신다. 아니 애초에 사단의 시험에 어떤 강력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말씀으로 대응하신 자체가 참 인간이신 자신의 자유의지만 사용하심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삶속에서 분명 초월한 섭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특별히 병든 자를 고친 많은 그분의 사역에서 나타난다. 또한 물위를 걸으심이나 죽은 자를 살리심,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자연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사역하신다. 이 초월이나 거스름의 섭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 즉 백세의 노인인 아브라함의 이삭 출생이나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살아난 사건 등의 인간의 편에서 놀라운 기적으로 보이는 기사들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성경 안에서 특별히 놀랍지 않은 당연해 보이는 사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마저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섭리 속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세계에 미치지만 특별히 죄에 관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허용하심과 더불어 지혜롭고 강력하게 죄를 제한하시기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만드셨거나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특별히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하나님의 글을 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섭리한 하나님의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특별한 감화를 받으면서 기록하였기에 단어를 선택하는 데도 틀림없이 정확할 정도였지만, 그들이 자기의 능력을 자발적으로 발휘하고 억압이나 강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음이다. 즉 축자영감, 유기적 영감을 받아들이지 기계적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성경을 쓰는 중요한 과정에서도 그러했든 다른 모든 섭리에 있어 인간의 것이 철저히 무시당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확실한 경륜에 따라 그 계획에 의해 작정되어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연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건의 질서와 이유, 목적, 필연성은 대부분 하나님의 목적 속에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적(운명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일들은 그 자체의 성질로 생각해 보든지 혹은 우리의 지식과 판단으로 평가해보든지 표면적으로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서론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가롯 유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셨는가? 모든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가롯 유다도 하나님의 태초 전의 계획에 포함되어있었을 것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내 버려 둠”이었다. 그가 그의 의지대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도록 하나님은 허용하셨으며 그런 그의 의지를 통하여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이루셨던 것이다. 성경에서 가롯 유다를 예수님의 제자 “열둘 중 하나”라고 자주 언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열둘 중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반 할 것을 말한 것이며 수제자인 베드로를 포함하여 모든 제자들이 이 “열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아니더라도 요한을 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고 도망쳤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는 식으로 그를 배신한다. 아마 이때까지도 누가 “열둘 중 하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되지만 유다의 삶은 자살로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머지 제자들과 달리 이 모든 사실을 미리 아셨을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악에서 떠나도록 여러 번 촉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은 모르더라도 유다 자신이 충분히 눈치 챌 수 있는 방법으로 경고하시며, 또 마지막까지 그를 “친구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다 자신의 자유의지로는 결코 선으로 돌아서지 못하였음은 그가 제한된 자유의지를 가진 죄인이며 하나님의 전권적인 은혜가 없이는 선으로 돌아서지 못함 때문이었다. 반면 베드로의 경우 다시 예수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의 전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선으로 돌아서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의 경우에 대한 답을 하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헤스본 왕 시혼에 대한 기사(신2:30)처럼 고대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하는 표현법이다. 이것은 이미 결과가 드러난 이 후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조차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을 알게 된 모든 사실이 알고 기록한 것이다.

중요한 논지는 어떤 설교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단지 그들의 완악함을 허용만 하셨는가 아니면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는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완악하게 하실 것을 모세에게 미리 알리신다.(출4:21;7:3) 그러나 여섯 번째 재앙 이전에는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완악하게 하지 않으시며 오직 바로가 자신과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7:13-14;7:22;8:15;8:19;8:32;9:7)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후(출 9:12)에도 두 번이나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수 있었음은 중요하다 (9:34-35). 이 두 번을 더 바로가 스스로 완악하게 한 다음은 기회의 창이 닫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제는 바로 스스로 완악하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만이 오직 바로를 완악하게 하시는 것이다. (10:1,20,27;13:15;14:4,8,17)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허용하심과 동시에 실제로 완악하게 하심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의 완악함이 하나님께로 돌려지지 않을 것은 바로에게 충분히 자기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할 기회와 더불어 완악하게 하지 않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있다.

이 바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사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의 대가로 이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고 완강하게 하시고 그의 은혜를 보류하실 뿐 만 아니라 (사실 이들은 이 은혜로 말미암아 이해력에 있어서 조명을 받을 수 있었고 마음에 있어서 감화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베풀었던 은사들을 종종 다시 찾아가시고 그들을 죄악의 대상에 노출시켜버리시고 결국 이들을 이들의 욕정과 세상의 시험과 사단의 권세에 내맡겨버리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수단에 의해서도 완악하게 된다.

그렇다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졌던 아담, 하와 타락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하나님께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려고 시도해보지만 선악과가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지, 곧 그 자신을 창조한 자의 명령조차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모든 시도가 무의미함도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의지를 주신다. 모든 긍정적인 명령들(문화명령)과 더불어 부정적인 명령인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실 때에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게 하심으로 명령에 순종하도록 요구하셨다.

완전한 자연인의 타락에 있어 사탄의 유혹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고 보여 진다. 자연인이 판단이 흐려짐은 아니었지만 사탄의 유혹은 그들이 선악과를 먹게 함에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 했으며, 그 작전이 실제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때 이 모든 것을 아셨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알고 계셨지만 직접 개입하심으로 인간의 타락을 막으시기 보단, 사탄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셨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약간은 불경건한 생각이지만 사탄의 유혹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자유의지와 완전히 선한 곳에 있었던 자연인이더라도 분명히 타락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사탄의 유혹이 아닌 인간 혼자 그 타락에 관련되었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의 구원을 베푸실 여지가 있으셨을 까라는 고민을 해 본적이 있다. 그렇다고 실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사탄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에 있어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의 아비”(요8:44)인 사탄이 관여함으로 하나님의 대적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사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이 없이 인간이 완전히 혼자 범죄 하여 타락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과 의지대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은 별개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사탄이 에덴동산에 들어옴과 인간을 유혹하는 것을 허용하심으로 아담, 그리고 하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핑계거리(창3:13)는 만들어 주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과 하와의 자유행동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으며 그를 만든 장본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도 아셨지만 허용하셨으며 이 모든 일들이 생기기도 전에, 창세전에 아신 하나님께서는 구원협약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미리 마련해 주신 것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가정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모든 만물과 인간을 포함하여 천사와 사탄의 세계(영계)까지도 하나님의 섭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든 것을 지으심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도 그가 지으신 것이요 그의 계획대로 섭리하시며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봄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정 반대에 있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며, 그 섭리의 수단이 된다. 그분은 모든 제 2원인들에 대하여 그대로 사용하시거나 초월하시거나 거스르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치리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되찾은 우리들은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아담의 범죄와 죄의 경험을 가진 우리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다 해버리는 것이 자유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증명하는 존재가 되는 대신 오히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지 않을 것과 해야 할 것을 잘 구분하여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임을 증명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유하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법안에 머무르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할 수 도 있음으로 자유하다. 비록 우리에게 죄의 냄새가 남아서 죄의 유혹과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가 아직 충분히 제거되지 않았지만 그런 우리를 아시기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도와주심으로 모든 선한 것을 주장할 수 있음으로 자유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해주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죄와 분리하여 안전하게 해주시는 중앙선과도 같으며 탈선하지 않게 해주시는 기찻길과도 같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본연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섭리 안에서 그분은 때때로 우리들을 얼마 동안 여러 가지 시험을 받고 마음이 부패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 목적은 우리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요 오히려 그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부패와 속임수의 힘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자녀들은 더 겸손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더 친근히 의존하고 더 꾸준히 신뢰할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는 죄 지을 기회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의롭고 거룩한 목적들을 지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며 그 섭리가 우리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음을 안다면 하나님의 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모든 일들이 비록 당장 알 수 없을 지라도 경건한 자녀들에게 유익이 있음을 믿으며 모든 일을 위한 인간의 마음과 노력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고 그의 교회를 특별한 방법으로 돌보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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