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코람데오닷컴 편집장 김대진 목사입니다. 오는 12월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에서 ‘교회를 세우는 이신칭의는 무엇이고? 교회를 무너트리는 이신칭의는 무엇인가?’(가칭)라는 주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교수님을 강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먼저 강의를 수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이신칭의 문제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 김세윤 교수님이 계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자들 사이에서의 토론만이 아니라 목회자들과 교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신학, 성도들과 소통하는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이번에 서면 인터뷰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이신 김세윤 교수님과의 대담이 떨리는 것도 사실인데, 될 수 있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그런 언어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 신학대학교)/ CGN TV 제공 |
질문 1: 독자들은 교수님 같은 분은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시는 줄로만 알 수도 있는데, 연구 활동 이외에 교수님의 요즈음 근황에 대해서 한 말씀해주시지요.
연구와 저술에 집중하기 위해 많이 응하지 못하지만, 가끔 교회나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나 특강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사는 L. A. 지역의 평신도 들의 성경공부 반도 하나 인도 합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학회에도 참석하는데, 이번 코람데오닷컴 인터뷰의 주제와 관련되어 말씀드립니다만, 내년 11월 초에 Sweden 의 Gothenburg 에 있는 루터 신학교에서 종교개혁 500 주년 기념으로 칭의론에 대한 강의를 부탁 받아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질문 2: 바쁘신 가운데도 평신도 성경공부 반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요즈음 특히 한국교회에서 왜 ‘이신칭의’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경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믿음과 유리되어 대체로 낮은 윤리생활을 보이고 있고, 많은 한국의 교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세상의 조롱과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자, 일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교회들의 복음 선포에 근본 문제가 있지 않나 자성하게 되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약성경의 다양한 선포 양식들 중 주로 바울 식으로 선포하는데, 그것도 거의 ‘이신칭의’의 범주로만 선포합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데 그 요구는 많이 등한시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분들은 전통적인 개신교 교의학의 체계에 따라 그 동안 한국 교회들이 ‘이신칭의’의 복음만 선포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강화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부 신학적으로 깨어 있는 분들이 ‘이신칭의’와 ‘성화’는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과연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였느냐는 질문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한국 교회의 새로운 관심은 이렇게 한국 교회의 절실한 문제 또는 필요와 직관된 것이지만, 적어도 신학자들 간에는 세계 신약학계에서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 ‘새관점’을 갖자는 운동이 근 40 년 전부터 크게 일어나 그동안 격렬히 논쟁하여 온 것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내년에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하여 종교개혁을 이룬지 500 주년을 기념하게 되는 마당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은 개신교가 그 복음을 새롭게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시의 적절하다고 봅니다.
질문 3: 교수님을 비판하는 몇 몇 분들이 교수님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 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보적 칭의론이라는 용어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낯설게 들려지는 게 사실인데요. 그래서 그런지 교수님의 칭의론이 종교 개혁자들과 정통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유보적” 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교수님의 칭의론이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정말 다른가요?
제가 ‘우리는 지금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받게 될 칭의의 선취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칭의’의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된 것이다‘, 이렇게 강의하고 그것이 녹취된 후 제 칭의와 성화 라는 책으로 출판되니,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유보적 칭의론‘이라 이름 붙여 마치 제가 무슨 새로운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 같이 얘기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의 그러한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신약학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웬만한 신학적 분별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평신도들도 바울 서신들에서 금방 파악할 수 있는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바울 서신들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행위대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얼마나 자주 반복됩니까? ‘칭의’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무죄선언 됨’ , ‘의인이라 인정/칭함 받음’ 인데, 그 때 우리가 드디어 최종적으로 ‘의인’이라 판정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새로운 가르침입니까? 이것을 새로운 것, 이상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바울의 칭의론이 아니라 사실상 구원파적 칭의론,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칭의가 다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든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의 칭의는 다만 확인될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 ’한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다‘) 는 생각을 가져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또 신학의 초보생들이 배우는 신약의 종말론, 즉 ‘종말론적 유보’ (eschatological reservation)을 모르거나 그것의 구원론적 함축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신학교 1 학년 때부터 배우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출범했다” (already inaugurated), 그러나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but not yet consummated) -- 줄여서 ‘already – but not yet’)의 구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즉 하나님 나라의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보‘라는 말을 ’예약‘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유보‘나 ’예약‘이나 다 reservation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벌써‘ (already) 하나님 나라에로 들어가서 그 구원의 힘(복)을 누리지만, 아직도 우리는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노출되어 죄를 짓고 죽음의 힘 (고난들)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 (영생)은 종말에 받기로 ’예약‘되어 지금은 그것을 소망하며 믿음의 인내와 순종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8:24-25). 이렇게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적 가르침을 역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 (구원의 완성)을 이미 받고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요?“ 아마 구원파도 그런 허황된 주장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한 “실현된 종말론”’ 에 근거한 주장은 아마 극단의 신비주의 이단자들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습니다. ‘첫 열매’를 받았다는 말은 온전한 수확은 미래, 즉 종말에야 받게 된 다는 것을 뜻합니다. 종말에 받기로 ‘예약’되어있다, 또는 ‘유보’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어감이 가져오는 상이한 뉘앙쓰를 살려 말하자면, ‘예약’ 되어 있기에 지금은 그것을 소망하며, ‘유보’되어 있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완성을 위하여 ‘믿음의 순종’ (롬 1:5; 16:25) 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 2:12-13).
제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자세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학의 전통이 ‘구원의 서정’의 틀을 설정하고 ‘칭의’에 (논리적 또는 시간적으로) 이어서 ‘성화’를 거쳐 ‘영화’, 곧 구원의 완성에 도달한다고 가르친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유보’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칭의론을 무슨 ‘유보적 칭의론’이라 하면서 새롭고 이상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적어도 시간적/종말론적 평면에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올바로 이어받지 못한 것 같이 보입니다. 만약 ‘정통교회’를 자처하는 어떤 교회가 지금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첫열매를 받고 종말에 그것의 완성을 받는다는 주장을 이상히 여긴다면, 그 교회는 성경적으로 ‘정통교회’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령 로마서 8:31-39 에서 바울이 그리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 즉 하나님 아버지가 심판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하시는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가 받는 구원을 ‘칭의’의 언어로 표현하였는지 저는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탁월한 성경학자들이었던 루터나 칼빈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는 믿지 않지만,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칭의’란 앞서 말했듯이 바로 그런 심판석 앞에서 받는 구원을 칭하는 그림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모두 주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주)의 심판석 앞에 서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며 (예: 롬 14:10; 고후 5:10) 우리가 그 때 충만한 “의의 열매” (특히 사랑) 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 또는 “참소받을 일이 없는 자들”, 즉 죄 없는 (무죄한) 자들, 곧 ‘의인’들로 최종적으로 판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는데 (예: 빌 1:9-10; 2:14-16; 골 1:22-23; 살전 3:12-13; 고전 1:8도 참조), 그것이 (완성된) ‘칭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그것을 ‘두번 째 칭의’라 부르기도 하는데, 저는 그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미 (already) 선취한 칭의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칭의의 완성’은 최후의 심판에서 받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 때까지 ‘예약’/’유보’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 또는 그들의 후계자들은 ‘구원의 서정’의 틀을 설정하고 ‘칭의의 시작’ (첫열매 - 과거)과 ‘완성’ (온전한 수확- 미래), 이 두 단계들의 사이인 구원의 현재 단계를 ‘성화’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울의 구원론과 언어 사용을 살펴 보니, 종교개혁자들이 ‘성화’의 개념으로 칭의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믿음의 순종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그 의도는 옳은 것이었으나, ‘칭의’의 현재 단계에 대해 이름을 잘 못 부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 책 칭의와 성화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듯이 바울의 언어 사용에 있어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칭하는 병행적인 그림언어들 또는 범주들입니다. 이 명칭 사용에 있어 제가 종교개혁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는데, 왜 구원의 현재 단계를 ‘칭의’ 다음에 (논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따르는 ‘성화’라고 하기보다는 ‘칭의의 현재 단계’ (또는 구원을 ‘칭의’가 아닌 ‘성화’의 그림언어로 나타내고자 하면, ‘성화의 현재 단계’)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가, 그리고 믿음의 순종을 촉구하는데 더 효과적인가도 제 책에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저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이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앞서 살펴본 극단적 ‘실현된 종말론 주의자들’ 같이 우리의 구원이 지금은 그 첫열매만 주어지고 그 완성은 종말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신약의 보편적인 종말론 (‘이미 - 그러나 아직은 아님’의 구도) 를 부인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칭의’를 개신교 교의학의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만 이해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틀은 ‘칭의’는 우리가 믿음을 처음 고백할 때 다 이루어지는 구원의 단계이고, 그리고는 ‘성화’라는 구원의 다음 단계가 따른다는 이해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바울의 언어 사용에도 어긋난 것이지만, ‘칭의’를 이미 다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 최후의 심판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큰 우를 범할 뿐 아니라, 현재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요구하는대로 ‘두렵고 떨림으로” ‘의로운 삶’ (병행적 범주인 ‘성화’의 언어로 말하자면, ‘거룩한 삶’)을 살려는 노력 (즉 ‘믿음의 순종’)을 도리어 방해하는 이해입니다. 칭의론을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가르쳐 온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하여간 현재 세계 신약학계에서 옛 개신교 교의학이 ‘구원의 서정’ 의 틀 안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하려 한 것을 성경적으로 정당하다고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전통적인 교의학과 달리 설명하는 것도 사실 신약학계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화’는 유대교의 율법 지킴의 문제가 아니고 이방 세계의 우상숭배와 부도덕성의 ‘오염’ 문제가 심각한 고린도나 데살로니가의 헬라 그리스도들에게 바울이 그의 ‘칭의’ 구원론을 토착화/상황화시켜 선포한 구원론이다는 주장 외에는 말입니다).
제 칭의론에 있어 정작 새로운 것은 헛다리짚은 저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유보적 칭의론’이 아니라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그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새롭게 구원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제가 세계 학계에 (그러니까 한국 교계에도) 새롭게 제안하는 바울의 칭의론 해석입니다. ‘칭의’를 단순히 ‘무죄선언’이라는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이라는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해 한다는 것, 즉 창조주 하나님에 등지고 사단을 좇은 아담적 죄를 용서 받고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 즉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건져져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에로 이전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 1:13-14).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받는 ‘칭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언어로 이해하고, 종말에 받을 ‘칭의의 완성’을 예수께서 상속과 잔치로 그려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완성 (영생)을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재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하는 것, 즉 그의 대행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의인’으로 살기, 즉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론을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재천명으로 이해해야 그것의 구조를 옳게 파악하게 되고,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강조하는 바울의 그 많은 윤리적 가르침과 그것을 게을리하는 것에 대해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키며 발하는 그의 심각한 경고를 모두 내포하는 것으로 옳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신교 세계 전체에서 문제되는, 특히 한국 교회에서 그 폐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칭의론’의 왜곡, 즉 ‘의인의 삶 (윤리)’가 없는 ‘의인되기’ (구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통치) 복음의 구원론적 천명이라는 저의 명제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제 일 원칙으로 삼는 ‘개혁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고 도리어 비판하고 나서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그저 놀랍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질문 4: 일부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은, 유보적 칭의라는 말을 들을 때, 아직 구원 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을 사라지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수님의 칭의론에 의하면 목회자들이나 선교단체에서 강조하는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설명됩니까?
신자는 구원의 ‘첫열매’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것을 무죄선언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 그리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하게 되어 하나님과 이웃과 샬롬을 누리게 되었음을 제대로 설명하면, 구원을 단순히 추상화하여 관념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실재를 지금 여기서 체험하게 되고 그 기쁨과 감격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성령이 바로 우리 구원의 ‘첫열매’라고 부릅니다 (롬 8:23).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충만 (또는 그의 신성)에 참여하여 피조물적 한계성/결핍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고도 하고, 하나님 (의 아들)의 ‘형상을 얻는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고도 표현함).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될 때, 즉 무죄선언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될 때 우리에게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 주어집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렇게 벌써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그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또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한 “보증(금)”이라고 부릅니다 (고후 1:22; 5:5). 우리가 성령의 보호하심, 인도하심, 깨우쳐주심, 힘주심 (하나님의 통치 또는 그것을 대행하는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심 -- 은혜)을 받아 ( 즉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롬 8:12-27; 갈 5:26; 참조: 빌 2:13; 살전 3:12-13) “성령의 열매” (갈 5:22-24), 곧 “의의 열매” (빌 1:11) 을 맺게 되고 그리하여 구원의 완성에 확실히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재판장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칭의/구원의 완성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롬 8:31-39).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삼위일체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기에 확실하다는 것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에 호소하기까지 합니다 (롬 8:28-30; 고전 1:7-10 등).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칭의되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 즉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 “육신의 열매” (갈 5:19-21), 악의 열매를 맺으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갈 5:22). 고전 10 장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경고하기도 합니다 (고전 10:9-12). 곳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것을 상기시키며 (예: 롬 14:10; 고후 5:10; 살전 3:12-13), (오늘 일부 한국의 신자들같이)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자랑하며 구원을 이미 다 받은 양 경거망동하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헛되이 믿을 수 있음 (고전 15: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음 (고후 6:1), “넘어질 수 있음” (고전 10:12) 을 경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촉구합니다 (빌 2:12).
이렇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임재와 예정론/성도의 견인론에 호소하며 우리가 이미 첫열매로 받은 칭의(구원)이 종말에 확실히 완성될 것을 강력하게 확신시키면서, 동시에 행위대로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과 헛되이 믿고 타락할 수 있음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각자의 교단의 신학 전통에 따라 이 두 가르침들의 어느 한 쪽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사이의 논리적 긴장을 의식하면서, 바울이 각각의 가르침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즉 의도의 평면에서 그것들을 통합하여 그들을 함께 견지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라고 제 책 칭의와 성화 에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하였는데, 저의 칭의론이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과연 그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균형을 잃은 극단적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들의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이 진정으로 칼빈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것인지, 개혁신학의 진정한 장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성경의 엄연 (엄중)한 가르침을 방기하는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거나, 쉬운 (결국 그릇된) 전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는 사실상 구원파식 복음 선포를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와 구원을 받도록 부르실 때 그 곳에서의 잔치 (구원)만 약속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핍박받을 각오를 하라’는 가르침 (제자도의 요구)는 생략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구원의 선물만 약속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만 강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믿음의 순종’을 하라, 그러한 삶에는 손해보고 핍박받는 것이 당연히 따른다는 가르침은 생략했습니까? 예수나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누린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 또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에서 탈락하리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마 7:21-27; 갈 5:22)
분명한 것은 진정한 개혁주의적 목사들은 자신들의 교회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엄연한 가르침을 무시 하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거짓 선지자’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또는 ‘이단자’ (교리사적으로 말하자면)가 되어 주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오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헛되이 믿어 타락/탈락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며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즉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믿음의 순종’을 하여 의인으로 살도록 촉구하면서 그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교회가 후자를 등한시하면서 사도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이렇게 반쪽짜리 복음으로 왜곡하여 가르쳤기에, 스스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살려는 삶 (의인으로서의 삶)을 하지 않으면서 의인이라 자처하며 이른바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부패하여 세상의 조롱과 비난 거리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론이 신약 종말론의 세 시제들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한다는 저의 상식적 관찰을 무슨 ‘유보적 칭의론’이라 명명하며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고, 칭의가 현재의 신앙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기, 즉 윤리적 요구를 구조적으로 내포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그것에 따른 심판을 거쳐 완성된다는 바울 서신들의 가르침을 균형있게 다루는 저의 설명을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외치며 성경을 그렇게 경외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이 비판하는 것 역시 놀라운 역설입니다. 바울의 예정론/성도의 견인론과 심판/탈락에 대한 경고를 함께 견지하여, 구원의 확신도 누리면서 동시에 ‘두렵고 떨림’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제자도의 삶, 의인의 삶을 해야 한다는 저의 강조를 무슨 ‘행위 구원론’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의 성경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은 바울 서신들을 스스로 편집하여 자신들의 구미에 또는 신학 전통에 맞는 구절들만 모아 남기고, 윤리적 요구와 최후의 심판에서의 구원의 완성과 탈락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구절들은 삭제해버린 모양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존중한다는 사람들이 취할 태도이며,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칙 (sola scriptura), 교회의 관행과 전통을 성경에 의거해 항상 개혁해가야 한다는 개신교의 원칙 (semper reformanda) 를 견지한다는 개혁신학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입니까? 그리하여 성도들에게 온통 사실상 구원파식 왜곡된 ‘칭의론’을 가르쳐 비윤리적 (비의인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교회들을 부패하게 하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신학자들 (교회의 선생들), 복음 선포하고 목양하는 목사들에게 요구하는 소명입니까?
질문 5: 계속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요즈음 한국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구원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마치 한번 따낸 구원이 영구적인 계급장인 냥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믿는 듯 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교수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구원파 사람들이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신천지 사람들도 그러한가 보지요?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목사님의 비판이 아주 적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통 교회’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한국의 교회들이 그런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를 추상화시켜 신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나의 관념으로만 이해하게 하고, 그들이 이미 믿음으로 ‘칭의’ 받았으므로 다만 이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주입한다는 말입니다. ‘칭의’를 이렇게 추상화 하고 관념화 하여 회복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기, 즉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기와는 아무 관계 없이 이해하게 하니, ‘칭의’는 실존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각자가 이미 받았다고 그냥 머리로 믿고, 로마서 8:31-3; 고전 1:6-9 같은 성경의 몇 구절들만 반복하여 읽으면서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마음 속으로 다지고 또 다져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확신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말씀 마따나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지요. 이 현상은 북한의 불쌍한 우리 형제들이 김씨 왕조의 거짓 복음을 믿고 자신들이 ‘지상 낙원에 산다’고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마약을 먹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마치 천국에 사는 것 같은 환각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교회들에서 ‘칭의’를 추상화하여 그저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게 하니, 신자들이 자신들의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 마다 ‘의인’으로서 삶,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즉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실제적, 구체적 삶을 하려는 노력을 할 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많은 신자들의 삶에서 믿음은 윤리와 유리되어 있는 것이지요.
질문 6: 저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나름대로 애쓰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늘 듭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칭의론이 십자가의 은혜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 한 사람들입니다. 제 책에서 제가 우리의 구원이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로 자신을 바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우리를 깨우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도록 하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게 하며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하며 그의 주권에 순종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지어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순종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믿음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고 (엡 2:8), 우리가 맺는 ‘의의 열매’ (빌 1:11) 도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힘주심(은혜)로 맺는 것이므로 ‘성령의 열매’ (갈 5:22-24)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우리의 구원을 태초의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그리고 종말까지 지켜주심 (성도의 견인)의 구도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부터 완성까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가 제 책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 (sola gratia)이기에 진정한 구원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우리 인간의 힘 (지혜나 선행)에 조금이라도 달려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은 제한적이고 결핍된 것이므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오로지 무한하신 초월자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즉 신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위한 진정한 구원 (온전케 함, 신적 충만에 참여하게 함)이 되는 것이다’ 등을 설명하였습니다. 제 책 칭의와 성화에서 그것을 강조하느라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칭의/구원”을 두 장들에 걸쳐서 되풀이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pp. 194-212). 아마 대다수 한국 교회들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설명 할 때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 만 가리키지, 그것과 함께 신자로 하여금 그 십자가 구원의 사건 (복음)을 믿어 덕입도록 하고 ‘의의 열매’ (선행)을 맺도록 힘주시는 성령의 역사도 가리키는, 즉 삼위일체적 은혜의 복음으로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흔하지 않을 것이기에, 제가 그것을 일부러 강조하여 부연 설명 한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제 칭의론이 ‘십자가의 은혜’를 약화시킨다는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비판은 제가 동시에 ‘칭의’된 자들은 어떻게 계속 성령의 깨우쳐주심과 힘 (믿음) 주심 (곧 성령의 은혜)에 힘입어 실제로 ‘믿음의 순종’을 하여야 하는가, 그리하여 ‘의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 를 맺어야 하는가를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강조한 것을 두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의 반응/순종 없이도) ‘의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 즉 의로운 삶에 대한 바울의 (그러니까 성경의) 강력한 요구는 사실상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제가 앞 선 문단에서 설명한 것만 쓰지 않고, 그것을 쓸 때 꼭 ‘믿음의 순종’, 즉 윤리적 요구를 그것의 구조적 일부로 동반시켰으니,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바울 자신이 제일 먼저 그런 칭의론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약화시킨 셈이군요. 성경을 정확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존중하지 않고 그렇게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며, 자신들이 달가와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비판하여도 되는 것입니까? 자신들의 칭의론, 즉 의로운 삶을 요구하지 않는 구원파적 칭의론을 고수하기 위해 이렇게 바울 서신들 (성경)을 난도질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여 얻은 그들의 칭의론이 과연 성경적인 칭의론입니까?
20 세기 중후반에 세계 신약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Ernst Kaesemann 은 칭의를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주권의 전이” (Lordship-transfer/change) 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이 신자에게 칭의의 은혜의 선물(Gabe)을 주실 때는 항상 그것을 주시는 이 (Geber) 로서 그 신자에게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그 선물과 함께 오신다는 사실을 설파하면서, 칭의의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선물만 따먹으려하는 것이 전통적인 개신교 (특히 루터교)의 칭의론의 근본적 문제점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개신교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통치 (그것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믿음의 순종’과 무관한 칭의론이 되고,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싸구려 은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Kaesemann 의 이러한 탁월한 통찰에 영감을 받아 칭의론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통치) 복음과 연관시켜 해석하며 바울이 요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예수의 ‘제자도에의 부름’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라가기)의 새로운 천명으로 이해하니, ‘십자가의 은혜’를 ‘십자가 지는 삶’ 없이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불편하겠지요. 그들은 현재 의로운 삶 (십자가 지기)를 하지 않아도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자신들의 칭의론이 주는 기쁨을 제가 빼앗아 간다고 불평하겠지요. 그러나 그저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킨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기뻐하고 안주하려는 사람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싸구려 은혜’의 ‘복음’은 거짓 복음이어서 그런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거짓 복음을 반복적으로 주입하여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얻어봤자, 그것은 마약을 반복적으로 주입하여 얻는 천국적 삶에 대한 환각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 받을 때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마 7:21-23).
질문 7: 좀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저는 김세윤 교수님이 한국교회의 아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교수님이 아군인줄 알았는데 적군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저는 성경적으로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가르치려 노력하는 한국 교회들의 우군입니다. 그러나 윤리를 구조적으로 내포하지 않는 구원파적 칭의론, 그리하여 의로운 삶을 도리어 방해하는 칭의론, 즉 거짓 복음을 가르쳐 성도들을 오도하는 한국 교회들에는 적군입니다.
질문 8: 목사로서 또한 코닷의 편집장으로서 이 글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고 믿는 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끝으로 말씀해 주세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들에 이미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만, 다시 간추려봅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 칭함을 선취하였습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 받을 그 판결의 첫 열매를 받았습니다 (칭의의 과거).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 그 나라 안에 서있어야 합니다 (칭의의 현재). 즉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주심을 덕입고 그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죄 (사단)의 통치”를 받는 옛 아담적 죄인으로 살지 말고, “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인” (새 아담적 인간) 으로 살아야 합니다 (롬 6).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법 (마 22:35-40/막 12:28-34/눅 10:25-28: “하나님의 법/그리스도의 법”, 고전 9:21; 갈 6:2), 즉 이중 사랑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 마다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깨우쳐주심에 따라 사단의 뜻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변하고, 그 성령의 힘 (믿음) 주심에 힘입어 후자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상 (특히 맘몬) 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착취하지 않고 사랑하는 삶을 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 최후의 심판에서 칭의의 완성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 (신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됩니다 (롬 8:1-39; 골 1:21-23).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이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의인’의 삶을 살아 종말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누리기를 빕니다.
500 년전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여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던 중세교회를 개혁하고,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혁명적 변혁을 이루었습니다. 그 종교개혁의 후예들로서 한국 교회가 그것을 기념하는 이 뜻깊은 시점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재천명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의 칭의가 종말에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고 (‘성화’의 범주) 의로운 (‘칭의’의 범주) 백성으로 살도록 잘 가르쳐서, 오늘 중세교회같이 부패한 우리의 교회를 개혁/갱신하고, 불의, 부패, 갈등으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를 사랑과 정의와 화평이 충만한 사회로 변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에 시간을 내셔서 성실하게 답해 주신 김세윤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귀한 인터뷰 시간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사역 잘 감당하시다가 12월 한국에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김대진 wisesta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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