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오늘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한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 이름이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세배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가 아니고,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고, 이 야고보는 예수님 친 동생 야고보를 말하는데, 이 야고보란 이름은 야곱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이름이지요.
일찍이 야곱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들이 야고보서에 많이 있었는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야고보만도 약 네 명 정도가 될 겁니다. 그들 중에 야고보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친 동생으로서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이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장로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만든 전통을 잘 안 지키고 자유해 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예수님을 경건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염려를 했을 정도로 야고보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고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무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평소에 예수님께 아마 잘못한 것이 많이 생각도 나고 그래서 그 야고보가 식음을 전폐하고 말하기를 형님이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기 전엔 내가 영원히 빵을 입에 대지 않겠다 그렇게 뭐 맹세를 했다 그래요.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혼자 단식을 하고 앉아 있는 야고보, 예수님이 살아난 걸 보기 전에는 빵을 입에 대지 않겠다 맹세를 해버리고 단식하고 있는
그런 야고보를 찾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형제여, 보라 이젠 내가 살아났으니 너의 떡을 먹으라." 그렇게 말씀을 했다 그럽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은 후에 야고보에게와 예수님 나타난 사건을 들 때에 그런 말을 하거든요. 이 야고보에게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서 내가 정말 약속했던 대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빵을 입에 대라고 먹으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 그 존경받던 의인으로서 사도 야고보가 순교한 후에 그 야고보의 자리를 대신 할 만큼 아주 막강한 지도력을 가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의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려 졌습니다.
그의 무릎은 너무 오랜 시간 꿇고 기도하면서 낙타 무릎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또 결혼도 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고린도전서에 보면은 그 야고보처럼 게바처럼 나도 아내를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아예 없겠는가 할 때 이 야고보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고전8:5)
그는 심지어 유대인들이나 교회 양쪽에서 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하도 의롭고 경건하게 사니까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곧바로 달려간 것이 바로 이 야고보에게 달려가서 자기가 풀려 난 걸 이야기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두철미한 삶을 살았으나 타인들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한 자세를 유연하고 관대한 자세를 취합니다. 이게 아주 참 중요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는 관대하게 하고 남의 죄는 철두철미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잘못된 것이고.. 야고보는 자신의 삶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살지만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하지 아니하고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과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면 잘 된다"고 그렇게 아주 관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전도에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쳤는데요.
바울에게는 이방인 전도를 하도록 승인하면서 바울이 이방인 전도에 부름 받은 사실을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야고보가 권면하는 일이면 어지간하면 다 순종 할려고 하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 제 15장에서 예루살렘 총회가 모였을 때, 마치 그 회의 전체의 의장처럼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 회의를 최종적으로 주재하는 그런 모습을 엿 볼 수가 있는데, 야고보의 신학은 실천적인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열매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를 죽은 것과 별 다름이 없다.
그래서 결국은 그 열매를 보고 나무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를 죽은 것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거죠.
참 믿음 곧 살아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이 중요한 믿음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요세푸스나 유세비어스가 인정한 그 역사가 회게시푸스의 기록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얼마 전 다시 62년에서 67년경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 야고보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그 질투를 느낀 안나스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공회를 소집하고 야고보를 소환해 가지고 공회 앞에 세우고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다 라고 외치라는 그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증인처럼 세우는 장소가 있는데, 의회에 소환당하면 세워놓고는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다"고 분명히 말하면 살려 주겠다, 이렇게 말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 날 야고보는 성전의 회당에 서서 반대로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계의 심판자시요, 메시야시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에 화가 나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땅 바닥에 끌어내어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돌을 던졌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하고 비슷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는 것을 바울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겠는데, 바울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또 내게 은혜를 앎으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회의 악수를 하였으니 하는 말을 씁니다(갈2:9).
이때의 야고보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름보다도 앞서서 그 예수님 동생 야고보 이름이 더 먼저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바울의 서신을 볼 때에 야고보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 야고보서를 쓰면서 자신을 내가 이래도 예수님 동생이다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야고보 1장 1절에서 7절까지 인데요.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여기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
그러니까 이방인 전도보다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다시 말해 유대인 전도에 혼신을 쏟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기록한 처음 한 구절은 그의 권위를 느끼게 합니다.
적어도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라고 쓸 정도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야고보는 적어도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 특히 바리새인들의 믿음이 말만 하고 행위는 없는 그런 믿음이었거든요.
겉치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치레만 하는 그런 아주 유대인들을 아주 질책을 하면서 열매 있는, 행함이 있는 그런 신앙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우리에게 해당되는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오늘 형식주의에 빠지고 열매가 없다면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죠. 행함이 없고, 열매가 없고, 사랑이 없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고 죽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앉았는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의 말 하는 바를 우리가 해야 되겠지만 그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지 하려 아니하며 저희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님 곧 그 차는 경문을 늘 꾀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에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
람에게 랍비여 하는 그런 칭함을 받는 그런 것을 다 좋아한 사람들인데 그러나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아라 너희 선생은 진짜 선생 하난데 곧 그리스도지요. 또 너희는 다 형제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고 하지 말아라. 무슨 신부니 파더라고 하는 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아라. 지도자는 하난데, 무슨 선생.. 무슨 지도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곧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다 함께 섬기는 자가 돼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이지요.
야고보서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 말씀과 거의 같은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또 악한 사람을 선하게 하고 추한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하고 교만한 사람들을 겸손하게 하고 거짓된 사람을 진실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데 진리들은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리는 역사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하며 또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아무 열매가 없는 진리 그 공허한 공로는 백해무익한 것이지요.
야고보는 실천적인 열매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정말 행함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믿음, 열매가 없는 믿음은 그 믿음이 영생 얻을 만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되지 못한다는 얘길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굉장한 열심이 있는 것 같으나, 실제적으로 사랑의 열매가 없는..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믿음.. 이런 믿음은 하나님 앞에 정말 가증스럽고
위험한 그런 믿음이지요. 열매가 없는 무화가 나무가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만약에 형식과 무슨 의식만 무성하게 되고 정말 사랑의 열매가 없다고 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되 야고보가 말한 대로 행함이 있는 믿음,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 긍휼을 베푸는 믿음, 그리고 자기 입을 지켜서 경건을 연습하고 환란 날에 객과 고아를 돌아보는 그런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