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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를 일으킨 천주교 예수회(Jesuite)

 

 

우리나라 천주교인들은 영화 '명량'(鳴梁)을 감상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참고 사족: 예수회는 1500년경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프로테스탄스를

멸절시키기 위해 만든 천주교내에 단체이다.)

 

 

 

임진왜란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회 소속 첫 교황 프란치스코
 

 

 

한국과 로마 카톨릭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이고, 그 침략 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이른바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와 민족은 큰일 날 뻔했다.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

 

작전회의를 진행중인 독실한 천주교 신자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KBS에서 방송됐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극중 고니시 장군의 캡처 사진)

 

전회의 중인 고니시 장군의 뒷편 엠블럼.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마크 중 하나로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했다.

 

 

진왜란 장수 고시니가 사용한 십자가들

 

1547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서, 일본에 조총(鳥銃)을 전수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 멤버 6인 중 일인이다.

 

그리고 천주교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다.

 

콘스탄틴이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거짓 그리스도교인 로마 카톨릭(천주교)은 마틴 루터 같은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교황은 좌절했고 종교재판으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아 없애려 하던 도미니크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여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곧 루시퍼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지부를 설립하고 ‘예수회(Jesuite)’를 창설하였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냐시오>로 불린다. 그가 창립한 예수회의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못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우리나라 서강대학교도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이다.

 

임진왜란과 메이지 유신은 예수회 작품

 

그런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의 상선이 일본의 바다에 도착하여서 일본의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시스코 사비엘’ 이라는 천주교 신부가 일본 땅에 1549년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하는데. 프란시스코 사비엘은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26p~28p)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서 일본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31p)

 

조중화가 쓴 <다시쓰는 임진왜란사>는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가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 였다고 한다. (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특히 예수회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 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 땅을 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일본국민들이 서로 수군수군거렸다고 말한다. (61p)

 

 

 

 

임진왜란 장수 고시니의 군대가 사용한 군기들 기록화.

그림 하단에는 조총을 어깨에 멘 왜병 옆에 십자가 군기도 보인다.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 등지를 차지하여서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조중화는 말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바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는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비밀조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상 ‘다른 예수’ 즉 거짓 예수(적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려서 예수회를 추방시켜버렸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 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 와서 일본 땅에 쏘아대며 협박하게 하여 결국 일본을 개항시켜버렸다.

 

그리고 예수회는 메이지 유신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점령하고 일본을 부추겨 조선을 점령하게 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서는 대원군 때문에 조선의 개화가 늦어져서 망했다고 대원군을 증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을 시킨다. 한국의 교육체계가 예수회 회원들의 입맛에 맞게 교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해오던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조차 예수회의 소속임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다.

 

이미 예수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이순신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주교를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조선군을 무찌르고 있는 고니시 장군 군대.
사진 우측의 십자가 군기를 보라.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목에 걸린 큰 가시였다. 앞길을 막고 있는 큰 바위였던 것이다.

 

충무공이 바다의 요충을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비단 천에 열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 양민들의 베어진 목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제사상의 돼지머리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운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 일본 만화 '수군장~소서행장 전' 표지.

소서행장(고니시)의 투구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

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임을 표시했다.

 

어느 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 개와 함께 전령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회 사제가 종군신부로 참전한 일본 십자군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처럼 십자가 깃발 나부끼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년(1592년) 4월 13일이었다.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그토록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나라와 천주교의 최초의 접촉이 되었다.

 

왜군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가

병선 수백 척에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

군기로 십자가 깃발을 사용.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돌격하는 소서행장의 왜군

( http://ameblo.jp/constantinvs/ )

 

십자가 군기를 들고 있는 왜병들 앞에서 조총을 쏘고 있는 왜군들.

( http://ameblo.jp/constantinvs/ )

 

 

1592년 4월 13일(선조25년) 침략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하부대 18,700여 명을 실은 700여 대의 함선으로 부산항에 쳐들어 왔다. 펄럭이는 십자가 군기를 달고서 말이다! 이 나라에 7년간의 대환난이 시작된 셈이다.

 

 

독실한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인 고니시(소서행장)는 십자가 깃발을 군기로 사용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중에는 스페인 출신의 로마 카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司牧)했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조일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예수회 사제 세스페데스.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와서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약 1년간 머물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소서행장은 세스페데스 신부더러 밤마다 미사를 올리도록 하자고 말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물론 휘하 병사들도 좋아했다. 그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들이었던 것이다. 소서행장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小西行長

 

1584년에 영세를 받은 고니시는 영세명 아우구스티노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집안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버지의 세레명은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대마도 성주의 부인인 딸은 마리아였다.

 

그가 거느린 장수도 대다수가 천주교인들이었다. 구로다 나가마사,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함선의 돛대엔 화살로 십자가를 만들어 달기도 했고 돛엔 흰 십자가를 그려 넣기도 해 그들이 천주교인임을 표시했다. 십자가를 처음 본 조선병사들은 깃발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일본 십자군인 셈이었다. 그 잔학상이란 중세의 십자군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사에 보기 드문 야만적 죄악을 질렀다. 십자가 깃발 아래 귀베기, 코베기도 자행되었다.

 

임진왜란의 배후에는 천주교의 예수회가 있었다. 지금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사칭하는 로마 교황이 방한중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다. 그를 위해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광화문 광장을 바티칸 광장으로 바꾸어 주었다. 오늘 그곳에는 백만 명이 운집해 R.C 예수회 교황을 알현했다. 통탄할 일이다..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 미사에 운집한 군중

 

출저: 알이랑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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