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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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의 저술가 헤게시푸스의 언급에 야고보의 죽음이 나타난다. 그의 저술은 4세기의 교회 역사가 에우제비우스의 기록에 인용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의 신빙성은 의심받는다. 헤게시푸스는 야고보가 철두철미한 정의감 때문에 "의로운 사람"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야고보는 기도를 너무 많이 해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야고보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던져진 다음 돌과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 그리고 헤게시푸스는 야고보가 순교한 그 자리에 매장되었다고 전한다.
서기 1세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서기 62년 사두개파인 안나스의 아들 또 다른 안나스가 잠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된다. 이 때 유대지역의 로마 행정관이 사망하고 새로운 행정관이 오기 전가지 3개월 가량 안나스는 산헤드린을 소집해 사람들을 사형에 처했다. 그 때 처형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야고보는 돌에 맞아 죽었다.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야고보
예루살렘 공동체에도 분열과 주도권 싸움이 있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이상적 공동체로 보지만 그곳에도 역시 정치가 존재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정치가 존재하며 분열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예 그런 갈등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야고보가 어떻게 예루살렘교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신학적 경향과 몇가지 사건을 통해서 추론해 보았다. 비록 야고보의 신상과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지 않아서 몇가지 사건을 확대 해석할 수밖에 없지만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이 그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게 한 큰 이유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야고보의 신학은 예수님의 행동중심의 신학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오히려 바울의 그것보다 더욱 예수님의 생각과 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과 생각을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도'의 조건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지도자로서의 권위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열두번째 사도를 뽑는 일에 야고보는 후보로도 추천되지 못한다.(행1:23) 그는 사도로서의 조건조차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저 그는 예루살렘에 모인 120명의 공동체 일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몇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의 지도력은 약화되어져 갔고 예수님의 친 혈육이라는 이유와 신학적 경향 때문에 야고보의 위세는 강하여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게 된다. 그에 반해 베드로는 바벨론과 같은 로마로 가서 거기서 목회를 하게 된다.
이렇게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장악한 상태에서 베드로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이방인 선교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예루살렘교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유대주의적 경향을 지닌 야고보의 지도력을 상대적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큰 박해(행8:1)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교회는 유대파가 득세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서 유대주의적 경향을 가진 야고보도 상대적으로 지위가 올라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을 옅볼 수 있는 일이 바로 이어서 일어난다. 12장에서 한번 더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 할 때 큰 야고보가 순교하고(행12:2) 베드로가 투옥된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련의 기적적 사건을 통해서 풀려나오게 되지만 예루살렘교회에 찾아가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에게 자신이 출옥했음을 알리게 하고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행12:17) 바로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야고보가 등장하게 된다. 아마 이런 몇번의 박해 사건을 통해 야고보의 입지는 상승했고 베드로의 입지는 점점 약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와 완전히 그 지도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나 예루살렘교회의 1인자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는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1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행15, 행21)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방향과 경향이 바뀐 베드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 그는 먼저 예루살렘교회로 돌아가 그가 이방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해명해야 했다.(행11:4) 왜냐하면 대다수를 차지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파, 즉 유대계열의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했기 때문이다.(행11:2) 이미 예루살렘교회는 헬라파와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이 나뉘어서 다투고 있던 시점이었다.(행6:1) 그런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의 주도권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잡은 것처럼 보인다.(행6:5, 일곱집사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마 헬라파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곱집사 가운데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던 스데반집사의 명설교(행7장)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행8:1) 그리고 그 때 사도를 제외한 이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디아스포라하게 된다. 여기서 사도는 12명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계열에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말할 것이다. 즉 스데반처럼 성전과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가해졌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서 예루살렘교회에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 그의 생각들은 완전히 축출되고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득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은 그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워지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서 이런 신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가 그 신학적 경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베드로 역시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유대주의적 기독교의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행한 그의 설교는 여전히 다분히 유대주의적이었다.(행3:11-26) 당시 예루살렘교회에 헬라파 기독교인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적 경향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율법과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이방인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튿날 베드로의 일행이 길을 가다가 환상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율법적으로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다.(행10:13) 그 일이 세 번이나 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들린다. 베드로는 속으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곰곰히 고민한다.(10:17)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선교의 메시지와 더불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베드로는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 백부장에게 초청을 받는다.(행10:8) 그리고 그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고 그 때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하신다. 이 사건에 대해 베드로는 크게 놀란다.(행10:45)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48) 이제 베드로는 완전히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마음문을 열었고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다를바 없이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유대주의적 기독교관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의 신학적 방향을 친 이방적으로 바꾸게 한 것이다.
즉 누가의 기록과 바울의 기록, 그리고 야고보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을 구성해 보자면 야고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에게는 배타적이고,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는 율법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율법은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롬3:20)이 아니라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야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이것이 완전한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생각했던 사람이다.
만일 야고보서가 야고보나 그의 제자들이 지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야고보서의 핵심이 되는 주제 문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야고보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행동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야고보는 분명히 1:25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비록 그가 2:1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행함의 문제를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해 낼 수 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었으니 갈2장에 기록된 사건이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야고보에게서 온 일련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도착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황급히 이 유대성이 강한 이들을 보고 자리를 떠났다. 베드로는 이들의 책망이 두려웠다.(갈2:12) 이러한 사건을 통해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가 이방인을 유대인 같이 대한다는 것이다. 외식한다는 것이다.(갈2:12)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의 태도와 연계해서 볼 때 이사건에 대한 책임을 베드로의 잘못보다는 야고보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야고보를 타겟으로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베드로보다는 야고보에게서 온 일련의 사람들이 문제이다. 이들은 아마도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탁을 함께 사용한다는 율법의 어김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을 사람들인 것이다. 야고보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이방인과 함께 식탁을 사용하는 율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못마땅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이 구절을 인용하였을까? 그 내용에서 야고보의 신학적 방향이 엿보인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15:16) 야고보는 이 구절을 통하여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즉 유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겉으로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유대성을 강조한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이방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을 만난자리에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을 심하게 질책한다.(행21:21) 즉. 바울이 디아스포라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모세를 배반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앞서 행15장에서 종결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여전히 야고보와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중요한 문제였고, 예루살렘교회와 바울간의 커다란 갈등과 간극으로 남아있었다.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일관되게 기술되고 있다. 굳이 야고보서를 살펴 보지 않아도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을 알 수 있다. 첫번째 공의회인 예루살렘의 사도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이방인 선교를 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일련의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멍에와 같다고 바울을 두둔하지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행15:12) 이것으로 보아 이미 베드로의 입지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곧이어 야고보가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모인 사도와 장로와 교회는 결의하여 할례를 받지 않기로 한다. 그 때 야고보는 아모스9:11-12의 말씀을 인용한다. 그것은 이방인 선교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정확히는 이것은 이방인의 할례와는 상관이 없는 구절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완전한 믿음 가운데로 들어 갔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중이 있는 인물들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1:1-14에는 사도들의 명단과 더불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다'라고 표현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에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은 베드로였으나(행1:15, 2:14) 그 지도권은 장차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로 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행12:17, 15:13) 물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야고보가 회심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만 야고보는 율법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재해석해 냈고 그것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그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아래에서 살펴보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남동생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다.(마13:55, 막6:3) 특이한 점은 누가는 복음서에서 야고보에 대해서 어떠한 곳에도 적지 않았다. 다만 사도행전에서 일련의 사건 속에서 야고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행12:17, 15:13, 21:18) 이 인물이 아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추측한다. 일단의 학자들은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아니라 '큰 야고보'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맞는듯하다. 그리고 바울서신에서는 몇 군데에서 야고보의 이름이 나온다. 고전15:7에서 바울은 자신이 회심한 후 야고보에게 보였다고 진술하고, 갈1:19에서도 역시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보였다는 진술을 한다. 갈2:9에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약1: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쓴 편지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자간 이견이 많다. 이렇게 야고보는 비중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는 이름만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막6:3) 그러나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같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한다.(요2:12) 이렇게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말하길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요7:3) 즉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촌동네인 갈릴리를 떠나 대도시가 있는 유대지방으로 가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것을 통하여 많은 돈을 벌기를 기대했으리라. 그런데 이러한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에 해당한다. 즉 예수님의 첫번재 유월절과 초막절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마 예수님의 첫 사역 1년 가량 혹은 그 이하까지는 따라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요7:5)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이나 세상적 명예를 얻을 것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야고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에는 주된 인물 야고보가 세명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제자 2명(세배대의 아들, 알패오의 아들)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을 지낼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복음서나 사도행전, 기타 바울 서신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다. 왜 야고보는 이렇게 중요한 인물임에도 다른 서신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