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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은 어떻게 다른가?

 

 

<글/ 서재생 목사>

 

 

 

본 주제 강의에 참석하여 오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불교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는 오해합니다. 그러나 타 종교를 연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종교를 처음부터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사상과 교리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종교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은 어떻게 다른가를 기고 하고자 합니다.

 

1. 들어가는 말 : 누구나 인간(人間)이라면 한 번 정도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人生)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는데 이는 깊이 사색하지 아니하는 지성은 생각할 수 없고 성찰이 없는 생활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의 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삶에 대한 사색이 깊으면 깊을수록 진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창시자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인생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오는 고뇌의 의문을 풀고자 하는데서 출발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면목은 인간론에 총망라 된다고 보면 됩니다. 두 종교의 인간론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부터 적지 않은 차이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에서 인간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에 불교의 인간론에서 인간 이해 는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적인 현상을 전개시킨다는 연기론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통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업보 행위에 대한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수행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세계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불경은 가르칩니다. 두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론에 대한 이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불교에서의 인간(人間)의 기원

 

기독교(基督敎)가 하나님께서 우주와 일체 모든 존재를 창조(創造)한 것을 믿는 종교라면 불교는 처음부터 절대자인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의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原因)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어서 인연(因緣)으로 생겨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존재(存在)를 연기설에 의거한 오온설(五蘊設)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釋迦牟尼) 당시 인도 사회에는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종교(宗敎)가나 사상(思想)가가 등장하여 일가견을 이룸으로써, 가히 이 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라 불릴 만 했습니다. 이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흔히 정통 사상계와 일반 사상계로 구분합니다. 전통 사상계란 인도의 전통(傳統)종교인 브라만교의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적 흐름을 지칭하고. 일반 사상계란 브라만교의 권위주의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견해를 피력하는 새로운 흐름을 지칭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전통의 사상계에 대두되고 있던 일체 존재가 절대적 존재에 의해 창조(創造)되었다는 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면서 생겨난다는 인연(因緣)에 의한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연기설에서 보는 인간은 윤회하는 존재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따른 작용(행위)을 업(業)이라고 부르고, 이에 따르는 결과를 보(報)라고 부릅니다. 불경에서는 행위(업)와 과보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도 동일성을 띤다고 말합니다. 즉 선한 행위를 하면 좋은 결과를 불러오고, 악한 행위를 하면 괴로운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불경에서는 사람의 행위를 세분하여 “열 가지 악한 업과 ”,“열 가지 선한 업”을 말합니다.

 

열 가지 악한 업이란 살생, 도둑질, 그릇된 음행, 거짓말,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 추하고 악한 말, 꾸며내어 하는 말, 탐욕, 성냄, 그릇된 생각을 말합니다. 또한 열 가지 선한 업이란 십악업에 부정접두사 “부(不)”, “무(無))”를 붙여서 그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를 “생명체를 살리는”것 방생을 생각하면 됩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를 “베푸는 것 ” 보시“ 로 표현하는 것처럼 십선 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서 보듯 불교의 업(業)설에는 사회 윤리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불교의 인간론에서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든 것이 업보(業報)인연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팔정도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따르는 무리들이 중생으로 불교교단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면목은 인간론에 총망라 되었다고 보아야합니다. 불교(佛敎)교리를 기독교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 차이점을 조직신학의 분류법에 따라 분석한다면 불교는 인간론(人間論)에서 시작해서 인간론에서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론을 가장 귀중히 생각하며 교리(敎理)의 핵심(核心)으로 여깁니다. 일찍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소년시절 4대문 유관을 통해 인생 <생, 노, 병, 사>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출가해서, 고행수도를 닦은 목적은 인간의 근본(根本)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면 불교는 인간의 기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것으로 창조(創造)설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곳에서 있게 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창조자인(브라만교)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서로 관계가 되면서 단순히 자작자수(自作自受)한 것으로 인간론을 해석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인간론에서 창조자가 없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사색하는 종교입니다. 근본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에서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오온설(五蘊說)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성요소(構成要素)

 

불교(佛敎)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으로 보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육체의 물질적인 것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를 사대(四大)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대(四大)란 흔히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적 형체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창시 될 때 당시 인도의 유물론자들은 인간을 오로지 사대(四大)의 화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창시자는 인간이 외형상 물질적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근간적 부분으로서 정신적(精神的)인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에도 역시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으며, 물질적인 부분을 색(色)이라 칭했던 것처럼, 정신적(精神的)인 부분을 명(名)이라 칭했습니다. 결국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이란 정신(精神)과 물질(物質)의 결합체라고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온(五蘊)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이란 물질적인 색온(色蘊)과 정신적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인 오온(五蘊)으로 인간이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1) 오온(五蘊)

 

오온(蘊)이란 “다섯 가지가 쌓임, 모임, 집합”을 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특히 인간(人間)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구성요소를 다섯 가지의 집합(集合)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형체인 색(色)이라는 집합과 정신(精神)을 구성하는 네 가지의 집합을 일러 오온(五蘊)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의 인간론(人間論)이라고 할 수 있는 오온설이 성립되었습니다.

 

오온이란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온(色蘊)<지(地)수(水)화(火)풍(風)>과 정신적인 요소를 심리작용의 진행과정에 붙인 이름으로서 수(受)는 수동적인 감각작용이며, 상(想)은 주어진 감각에 의하여 표상을 구성하는 과정을 말하며, 행(行)은 인간의 정신작용이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의지를 말하고, 식(識)은 대상을 신식한 후 그것을 기초로 판단을 내리는 주관을 의미하는 데, 이러한 네 가지 요소가 더하여져서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인간론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찰법입니다.

 

불교(佛敎)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오온(五蘊)사상을 입으로 불러 봤을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의 모든 예배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듯, 불교인들도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 때마다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 앞부분에서 이 오온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별개의 것인 양 집착하지 말기를 촉구하며 그 구체적 내용인 오온(五蘊)도 마찬가지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색온(色蘊)

 

색온(色蘊)은 인간의 육체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의 몸을 세분하면 사대(四大), 즉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네 가지 요소가 화합하여 물질을 이룬 것이 모든 생명체의 육체란 것입니다. 색온의 네가지 요소는 실제에 있어서 각각 다음과 같은 성질을 의미합니다. 고체성(地)은 굳고 단단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만물을 실을 수 있는 흙(地)을 의미합니다. 액체성(水)은 습한 성질의 물질로 만물을 포용하는 물(水)을 의미합니다. 열(火)은 따뜻한 성질로 물질을 성숙시키는 힘을 의미합니다. 운동(風)은 움직이는 성질로 물질을 성장케 하는 바람을 뜻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적절히 화합하여 물질적인 형체를 이루는데, 이런 물질적 형체를 색온(色)이라고 부릅니다.

 

(2) 수온(受蘊)

 

수온(受蘊)이란 오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느끼는 감각기관(感覺器官)을 말하는데, 사람의 실체라 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곧 생명의 실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며, 생명의 활동을 느끼며 감지하는 기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희로애락은 바로 마음의 감정에 의해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육체 속에 정신이 있으며, 육체 속에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외부 통로가 여섯 군데 있는데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수온(受蘊)은 육근을 통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이 즐거움이나 괴로움, 고통 등의 감정을 느끼는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외부로부터 보고, 듣고, 만져보고, 그 자극에 대한 어떤 감각이나 지각이나, 인상 등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3) 상온(想蘊)

 

상온(想蘊)이란 생각하는 기관, 즉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각을 관념이라고 하는데 관념이 쌓이고 쌓여서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아 이 생각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부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고뇌라고 하는 번뇌(煩惱)망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입력되지 않은 컴퓨터의 디스크와 같이 맑고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마음에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하나하나 쌓여 진다는 것입니다. 상온(想蘊)이란 수온(受蘊)에 의한 감수 작용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表象)작용을 의미합니다. 수온(受蘊)이 감정을 느끼는 감수 작용이라면, 상온(想蘊)은 그 대상을 인식하고 마음속에 이미지를 갖는 것, 상상 또는 관념 그리고 표상(表象)하여 개념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4) 행온(行蘊)

 

행온(行蘊)이란 상온(想蘊)을 거친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 의지하고, 또는 충동적 욕구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마음을 구성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행온(行蘊)은 외부로부터 보고, 듣고, 만져본 것들이 마음속에서 감수작용, 표상작용에 의해 생긴 대상들을 의지하고 행동(行動)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식온(識薀)

 

식온(識薀)이란 감수작용, 표상작용, 행동작용에 대하여 판단이나 추리에 의해 식별(識別)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식온(識薀)은 대상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이며, 또한 어떠한 인식에 대해 판단하는 의식(意識)작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음의 작용 전체를 통괄하는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에 의한 마음의 인식(認識)작용을 다시 설명하면, 인간이 한 꽃밭을 지나가다 눈길을 끄는 꽃을 보고서 기쁨을 느꼈다면 이는 감수 작용인 <수온(受蘊)>때문이고, 그 마음에 드는 꽃을 꺾어서 자신의 집 응접실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면 표상작용인 <상온(想蘊)>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꽃을 꺾어서 집으로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행동작용을 취하려 했다면 이는 <행온(行蘊)>이고 그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여 그래도 될지 안 될지 등의 판단을 내렸다면 이는 식별작용인 <식온(識薀)>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내면에 있는 몇 단계의 정신이 유기적이면서 거의 동시적으로 활동함으로서 육체를 통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오온(五蘊)은 인간구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인간이 왜 고통의 존재(存在)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며, 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두 힘이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에 고통(苦痛)의 존재(存在)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존재는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의하여 윤회(輪廻)전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불교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인간(人間)이란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견(身見)이라고 합니다. 신견이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신견이라면 극복할 수 없지만, 신견(身見)은 유연이므로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몸에 대한 집착이 제거될 때 진여(眞如:사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본적(根本的)인 주체가 바로 법(法:진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을 별립적(別立的)으로 보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같은 영혼의 영생 따위는 있을 수 없고,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은 창조주가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그 물(物)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물체 간에서 상호작용하는 상의 상자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즉 만물이 생멸하는 것은 만물이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그 주체가 되는 힘은 업(業:행위) 번뇌라고 합니다. 업의 작용에 의하여 연기현상(생사존재)이 일어난다는 인간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불교의 인간의 생사(生死)관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이 미혹한 그 업인(業因)에 따라 삼계육도 윤회한다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창조론에 근거한 인간의 생사관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우주만유의 성립의 양상인 연기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생사관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연기란 “말미암아(緣)” “일어나 있다(起)”의 합성어로 <말미암아 일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연기론에 의하면 현재를 자기 존재의 기준으로 삼으면 현재의 존재는 과거 전생의 인연연기에 있고, 미래의 존재는 현재의 삶의 인연연기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연기설은 설 땅을 잃는 것입니다. 신체를 떠나서 정신이나 영혼이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신체를 떠나서 <호홉작용>이 있고 지각하고 감각하고 인식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무아(無我)론을 주장합니다. 무아(無我)란 주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체가 없는 자아(自我)에 집착하므로 애취(愛取), 탐(貪), 욕(慾)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연기가 되어서 생사(生死)반복된다는 것이 불교의 인간의 생사관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 윤회(輪廻)의 과정을 삼계육도(三界六道)라고 합니다.

 

1) 삼계(三界)

 

삼계(三界)란 산스크리트어로 <다투>라 하고, 계(界)로 한역된 것입니다. 계(界)라고 하면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삼계라고 하는 것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킵니다. 모든 중생이 세상에 태어나 죽고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가지 세계 즉 생물이 사는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① 욕계(欲界)

 

욕계(欲界)는 가장 아래에 있으며 음욕, 탐욕의 두 가지 욕망을 가진 생물(중생)이 사는 곳이며, 욕망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 속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의 육취(六趣: 또는 六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세계의 존재양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천계인 하늘의 신들도 육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욕계라고 합니다.

 

② 색계(色界)

 

색계(色界)는 욕계 위에 있으며 식욕, 음욕, 탐욕을 벗어난 생물이 사는 곳입니다. 여기는 절묘한 물질(色)로 이루어진 색계라고 합니다. 요컨대 욕망을 벗어난 청정한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무색계와 같이 완전히 물질을 버리고, 순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욕계와 무색계의 중간의 물질세계를 말합니다.

 

③ 무색계(無色界)

 

무색계(無色界)는 색계를 더욱 넘어선 최상의 영역이며 여기는 정신만이 존재하는 고도의 정신적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육체의 몸을 벗어나 정신적으로만 사는 세계이지만 아직도 자유(해탈)계가 아닌 어정쩡한 세계입니다.

 

2) 사생(四生)과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세계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중생은 업보(業報)에 따라서 삼계육도 윤회전생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사생(四生)과 육도윤회(六道輪廻)로 돌아다니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佛敎)의 생사관인 사생육도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사생(四生)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火生) 등 네 가지의 생으로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사생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난생(卵生)으로 알을 깨고 태어나는 동물이나 날짐승의 새, 그리고 물 가운데서 사는 고기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태생(胎生)으로 인간과 같이 네발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서 포유류 동물을 말합니다. 셋째는 습생(濕生)으로 지네, 굼벵이 같이 축축한 습기를 타고나는 곤충들입니다. 즉 모기, 파리 등을 의미합니다. 넷째는 화생(火生)으로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육도윤회(六道輪廻)

 

불교에서 생사관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소치라고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여섯 가지 세상의 업력(業力)에 따라서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간다는 사상으로서 이를 육도윤회라고 합니다. 육도윤회의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생명체(중생)들은 다음과 같이 육도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 천도(天道)는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하늘세계입니다.

 

- 인도(人道)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 아수라도(阿修羅道)는 노여움이 가득 찬 세상으로서 남의 잘못을 철저하게 따지고 들추고 규탄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 축생도(畜生道)는 네발 달린 짐승을 비롯하여 새, 고기, 벌레, 뱀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 아귀도(餓鬼道)는 지옥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을 덜 받으나 반면에 굶주림의 고통을 심하게 받는 곳입니다.

 

- 지옥도(地獄道)는 가장 고통이 심한 세상입니다. 지옥에 태어난 이들은 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현세에서의 업보(業報)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의 한 곳에서 내세를 누리며 다시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보(業報)에 따라 내세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세계는 없고, 인연이 다하면 업보에 따라 또 다시 윤회세계에서 해탈 할 때까지 삼계육도의 존재가 계속 된다는 것이 불교의 생사관입니다.

 

5. 12 연기론(緣起論)

 

12 연기론이란 인간의 생사윤회 과정을 12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인간(人間)의 기원(起源)을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창조(創造)론 내용을 말하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창조자를 부인하고 12연기론이라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그 인연(因緣)에 의하여 삼계육도로 윤회전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최초의 인간 출현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 있고 다만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연기설(緣起說)은 불교의 교리(敎理)로서 모든 존재(存在)의 본질(本質)과 현실(現實)을 파악하는 교리입니다.

 

불교(佛敎)교리의 중심사상은 인간의 탐구에서 출발되었습니다. 불교는 존재론에서 존재와 고통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인(因:원인)과 연(椽: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椽)에 의하여 생기고” “연(椽)이 다하면 멸” 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즉 12연기란 인간의 생사의 존재를 12가지 인연으로 나누어서 서로의 관계(인연)를 설명한 것입니다. 12연기의 내용은 무명(無明), 행(行),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1) 무명(無明)

 

무명(無明)은 무지란 뜻으로서, 진리에 미혹해서 사물의 도리를 옳게 알지 못하는 최초의 일념(一念), 무명일념이 일체 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는 악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명이란 맹목적 생존력과 생식욕을 지닌 본능적인 생명력으로 생의 의지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탐욕과 함께 생명자체의 유지력이며 발전력으로 모든 중생의 생명원자로서 이 종자가 세력을 가지고 잠재해 있는 한 해탈(解脫)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은 과거세계에서 모든 번뇌를 일으켜 모태에서 생명이 생기기 직전까지 일으킨 모든 번뇌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이란 인간존재의 고통스러운 삶 근원이므로 무명을 멸하면 고통도 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행(行)

 

행(行)은 행위, 동작 또는 행업(行業)의 뜻으로 무명으로 말미암아 식(識:의식)을 일으키는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즉 육체적 행위인 몸(身)과 입(口)의 두 가지 업의 정신적 행위가 인간의 몸과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行)은 전생의 근본인 번뇌에 의하여 소작(小作)된 선악의 행업을 의미합니다.

 

3) 식(識)

 

식(識)은 행업으로 말미암은 전생의 업보에 의하여 현세에 모태로 들어가는 수태(受胎)를 받은 것을 뜻합니다.

 

4) 명색(名色)

 

명색(名色)에서 명(名)은 이름만 있고 형상(形象)이 없는 정신적 작용을 뜻하고,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등 물질적 존재인 육체의 구성 원소를 뜻합니다. 이 명색은 앞의 식(識)에 의해 형성(수태)되는데 태내에서 오직 오관이 형성된 (태내의 4주정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5) 육입(六入)

 

육입(六入)이란 태중에서 눈, 코, 입, 몸, 마음의 여섯 감각기관을 말하며 점차로 완비해서 출산(出産)하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6) 촉(觸)

 

촉(觸)이란 앞의 6가지 감각기관이 외계(外界)의 대상에 대하여 서로 접촉하는 상태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느끼고, 피부로 느낌을 갖는 등의 단순한 감각작용의 접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생후 3~4세까지의 단순한 감각작용의 접촉을 말하는 것입니다.

 

7) 수(受)

 

수(受)란 감각기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즐겁고(喜), 괴롭고(悲), 좋고(樂), 언짢음(哀) 등의 감각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욕심은 많이 생기지 않은 4~14세까지를 가리킵니다.

 

8) 애(愛)

 

애(愛)는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탐하는 본능적인 욕망, 애욕(愛慾)을 일으키는 시기인 14~15세부터 시작되는 사춘기를 가리킵니다. 이때에는 여러가지 애욕을 강렬하게 느낄 뿐 아니라, 언제나 무엇을 애착하고 탐내고 갈구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충동의 시기를 말합니다.

 

9) 취(取)

 

취(取)란 성인 이후 애욕이 성장하여 <나>라는 집착에서 <내 것>이라는 집착심으로 굳어지는 아집을 말합니다. 이 시기는 자기의 사랑하는 바를 놓칠세라 집착하는 아집을 뜻합니다.

 

10) 유(有)

 

유(有)란 존재의 뜻으로 앞의 애(愛:욕망), 취(取:집착)로 말미암아 미래의 과보의 원인이 되는 업보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애(愛)와 취(取)의 번뇌(煩惱:업보)의 부름을 받아 여러가지 업보(業報)를 지어 내세의 과보를 가져올 원인을 쌓는 것을 말합니다.

 

11) 생(生)

 

생(生)이란 현재 살고 있는 형태(形態)로 위와 같은 원인(인연)으로 생존을 보유(保有)하는 것, 현재의 번뇌와 업보로 인하여 내세에 윤회육도(천계,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12) 노사(老死)

 

노사(老死)란 전생의 업보에 의해서 탄생해서 늙어서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생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윤회하는 중생의 생명원자인 번뇌를 멸하지 않으면 또 생사가 12인연 연기한다는 것이 불교의 인간론입니다.

 

결론으로 위 12연기는 즉 인간이란 어떠한 절대자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어 일어났으니까 그 조건을 없애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무명(無明), 무지(無知)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인 무명을 없애면 고(苦:존재)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고에서 벗어난 <생사윤회>가 없는 <해탈의 세계>, <무생무사의 세계>, <생사(生死) 환멸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 불교의 구원론 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말하는 고뇌로부터 해탈의 길은, 고뇌의 원인을 무명(無明)에서 발견하고 이 무명(無明)을 멸하여 명(名)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아(무명)의 집착이 윤회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남이 해탈(解脫)이며,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한 번도 생기지도 않았고 따라서 죽는다는 것도 없는 불생불멸임을 깨달아 통달한자를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생(生)기거나 사(死)가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의 세계인 열반(涅槃)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 공(空)의 상태입니다.

 

6. 동물과 미생물과 구별 되지 않는 불교의 인간론(人間論)

 

기독교(基督敎)의 6계명은 살인(殺人)하지 말라고 했지 살생(殺生)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人間)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 동물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의 1계명은 살생(殺生)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교나 브라만교에서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곧 사람이나 짐승을 같은 생명체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범신론(汎神論:만물은 다 신)이기 때문입니다. 불교(佛敎)에서 육식(肉食)을 금하는 것, 미생물의 살생을 금하는 것은 윤회(輪廻)의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쇠고기 갈비를 뜯는 것은 자기 조상의 살을 뜯는 불경한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조상 중에 한 분이 죽어 소가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도 죽이질 않습니다. 혹 사람이 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모든 존재의 구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 이렇게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포수가 산토끼를 발견하여 쫓아갔습니다. 어느덧 절속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포수는 잡아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절간인줄도 모르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옆에서 말하기를 “산토끼를 죽인 자는 죽어서 산토끼가 되고--”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다가 보니 산토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만 이 포수는 스님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스님이 깜짝 놀라면서 “왜 이러시오?“라고 했습니다. 포수가 말하기를 ”중을 죽인 자는 죽어서 중이 되고--"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하루에도 천여 명 가량 굶어 죽는 다는 비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가 많은 까닭이라고 합니다. 소가 많으면 부자로 살 것 같지만 그들의 종교사상 때문에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소에게서 사람이 나왔다고 믿기 때문에 소를 신(神)으로 모시고 대접하느라고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의 사람의 숫자와 소의 숫자가 비슷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소의 생식기에 “루-프”장치를 하여 번식을 막으려고 했지만, 힌두교 교도들의 “데모”를 만나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나라는 그릇된 종교사상 때문에 망해 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소를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고, 소가 먹는 양식을 굶은 사람에게 배불리 먹게 하고, 소고기를 먹게 하여 영양실조에서 건져낼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살생하지 말라와 기독교의 살인하지 말라는 두 종교 계명(戒名)에서 인간론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9:3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였습니다.

 

7. 기독교(基督敎)의 인간론(人間(論)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태초의 인간은 누구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太初)의 인간(人間)은 없습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우주의 생성원리와 인간의 기원을 연기설(緣起說)로 설명합니다. 연기설(緣起說)은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설입니다. 모든 존재현상은 원인이 되는 인(因)과 그 결과인 연(緣)에 의하여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존재론인 인간론입니다.

 

모든 존재현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설로 독립된 자아(自我)가 없다는 불교의 인간론을 앞에서 설명 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이 무엇인가 규명해 보고자하는 노력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앞서 불교는 연기론(緣起論)으로 인간의 기원을 찾고, 또한 진화론(進化論)주의자들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되었다고 하면서도 진화한 원숭이는 누가 만들었는가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기독교의 인간의 기원(起源)

 

성경은 인류기원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7-28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지음을 받을 때부터 짐승과 구별되었습니다. 불교(佛敎)는 짐승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상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면서(출3:14) 무에서 유를 말씀으로 창조하신(히11:3)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창조(創造)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책은 성경(聖經)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1:27, 2:7에서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그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실체의 모양 즉 사진과 같다는 말은 아니고 다만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지어 주셨다는 뜻이며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2:24)라고 말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상과 같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지 원숭이에게서 진화된 것도 아니고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곰의 후손도 아니고 불교(佛敎)와 같이 기원은 없고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연기(緣起)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정의(知情意)로 구성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특정한 육체의 모양을 지닌 유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인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또 여호와 형상을 보겠거늘”(민12:8)라고 하였는데 형상이란 어떤 유형적인 형체를 지녔다는 말이 아니고 유사한 모양이란 뜻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육신의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성과 도덕적인 속성과 불멸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류의 시조로 창조하신 아담에게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할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고 하신 것으로 보아 인간이 처음으로 지음 받을 때에는 하나님과 같이 불멸의 영원한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구성요소

 

기독교(基督敎)의 인간의 구성요소는 몸, 혼, 영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삼분설과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이분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구성요소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基督敎)적인 인간론을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교리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靈)과 육(肉)으로 된 특수한 존재로 만들어, 영육(靈肉)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인격체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불교와 같은 범신론(汎神論)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수한 존재(存在)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리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萬物)을 다스리는 존귀한 직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에 있어 이분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2) 육(肉)이란

 

불교(佛敎)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를 오온(五蘊)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온(五蘊)에서 색온(色蘊)<지, 수, 화, 풍>이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육체의 구성요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육체는 흙에서 창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육체(肉體)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인간의 육체의 기원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2:21-25). 그리하여 사람의 육체는 흙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되어 있습니다(창3:19).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나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 매일 먹지 아니하면 죽는 존재요, 죄 중에 신음하는 존재며 작은 세균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의 육체(肉體)만 따지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고 짐승처럼 땅의 것만 생각하다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빌 3:18~19). 그리하여 결국에는 죽어 땅으로 돌아가고 마는 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육체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체는 죽게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의로 지으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습니다.

 

(1) 육체(肉體)의 구성요소

 

① 마음-마음은 육체의 요소 중 비물질 부분에 속하여 시공(時空)을 초월하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 존재입니다.

 

가) 양심 : 마음 중에 가장 깨끗한 요소로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제일 완전한 것을, 선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지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지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양심이 존재합니다. 양심이 영(靈)이 될 수 없음은 양심은 지식에 따라 지배받기에 잘못된 지식으로 더러워지기도 하며(딛1:15)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주인으로 두어 섬길 수 있는(딤전4:2) 변질적인 요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에게만 피동(被動)되고 다른 무엇에게도 피동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이성 : 자기의 지식을 토대로 사물(事物)과 사건(事件)에 대해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의 요소로 자기의 지식에 따라 잘못된 것도 옳다고 비판 평가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다) 지성 : 이미 알고 있는 지식 뿐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해서도 알고자 하는 마음의 요소로 보존(保存)과 향상(向上)은 추구(追求)하나 비판(批判)과 평가는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라) 감정 : 보고 듣고 접하는 대로 느끼는 마음의 요소로 가장 저급의 요소이며 본능(本能)이라고 하기도 하는 마음입니다. 본능의 특징은 희로애락, 생애 애착 등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크게 이 네 가지가 합쳐진 것이며, 이들이 움직여 몸으로 보고 듣고 접한 것을 느끼게 하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소원하고 작정해서 다시 몸으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영(靈)일 수 없음은 구성요소의 근거에서 밝혔거니와 그래도 마음인 혼을 영이라 한다면 결국 짐승도 영(靈)을 가진 영적 존재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감성(본능)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러할 뿐 그들 나름대로의 모든 양심과 이성과 지성과 감정을 다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과 같이 발달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민22:28~30).

 

② 육체(肉體(흙))는 죽도록 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위치는 말할 수 없이 존귀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배반(불순종)으로 인류는 비참한 고통 속에 살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 아래 놓였습니다(창3:16~19).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습니다. 이는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는 영원토록 이 땅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2)라고 하였으며 다윗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라”(왕상2:2)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6:6, 12절에서 육체의 죽음은 몸 자체의 고유한 성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사망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7:24). 그러나 죄와 사망이 물질로 되어있는 몸 자체나 몸의 어떤 조직 안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성질과 습성 안에 육체의 죽음이 거주합니다.

 

불교(佛敎)는 욕망(慾望)에서 죽음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한번 태어나면 늙지 않을 수 없고, 늙으면 병들지 않을 수 없으며, 병들면 죽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화려한 임금의 수레가 필경은 부서져 썩고 말듯이 사람의 육체도 늙으면 죽는다.”는 <생, 노, 병, 사>로부터 오는 죽음에서 해방(解放)을 찾고자 출발된 종교입니다. 그가 찾은 해답은 존재와 고통(죽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진리를 깨달아 불타가 되는 것입니다.

 

3) 영(靈)이란

 

영(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르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 천사, 악령과 천사들, 별세한 사람들, 인간의 영을 지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으로 이를 이해하게 된 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과 같이 헬라철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과 함께 하는 내적 자아(자기의 영)의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① 영(靈)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 곧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 받은 단일체로서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지배받고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게도 피동이나 지배되지 않는 심신의 주격 요소로 지음 받은 범죄 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② 영(靈)에 속사람이라고 하는 이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산영이며, 심신을 향해 주권을 가진 영(靈)이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을 때는 죽은 영으로 심신에게 아무 주권도 행사할 수 없는 영이 됩니다.

 

③ 영(靈)은 불멸(不滅)의 존재이므로 영의 죽음이란 소멸(消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의 모든 활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택자에게 있어서도 그 영이 존재하지 않거나 육의 죽음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 있으나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함으로 자기의 심신을 다스릴 기능을 조금도 부여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영(靈)의 활동력은 두 가지에 의해 구속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으로 죽은 영이 되어 활동할 수 없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용할 심신이 없어 활동을 못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지배받는 면에서만 모두가 동일하지만 자기의 심신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각기 차이가 있는데, 이를 영의 장성의 척도로 삼은 것입니다.

 

⑤ 영(靈)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 받아 범죄 할 수 없는 존재이나, 인류 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즉시로 죽게 된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의 영입니다. 또한 영과 분리된 육은 서서히 죽어지게 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을 다시 살리신 것이 중생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중생시킨 인간의 영 안에 내주하시면서, 신자의 심신의 성화구원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영을 다 가지고 있으나 중생된 영만이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어 살아난 것은 영이요, 몸은 부활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죽어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난 자 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성화의 은혜에 이를 수 있습니다.

 

(1) 영(靈)의 구성요소

 

불교(佛敎)는 인간을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으로 구분하는데, 기독교(基督敎)는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으로 인간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① 영(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생령체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흙으로 육체를 지으시고 생기로(하나님의 생명력) 생령(살아서 움직이는 영)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영이 하나 되어 살아서 움직이는 영이 되었습니다. 천사는 영물이나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동물은 육체는 가지고 있으나 영이 없고, 사람은 육과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물과 다른 것입니다.

 

영혼(靈魂)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 중에는 선재설이 있고 유전설이 있으며 창조설이 있는데 기독교(基督敎)는 창조(創造)설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동물(짐승)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는 도덕이나 양심 종교가 있을 수 없고. 본능대로 생식하여 번성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靈魂)이 있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전 3:11)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성이 있는 것입니다(행17:22-29). 그래서 짐승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영혼(靈魂)은 세상적인 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靈魂)은 육체를 지을 때처럼 흙으로 하시지 아니하시고 비물질적인 생기를 직접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시36:9)고 하였고, 다윗은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라고 하였습니다.

 

② 영(靈)은 죽지 않게 되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혼(靈魂)은 죽지도 않고 죽임을 당할 것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가서 영벌을 받고 구원받은 영혼은 영생에 들어간다(마25:46)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그 결과는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라고(벧전1:9)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히10:39)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짐승과 달리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영혼이 구원받아 영생복락에 들어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불자들 중에는 인간의 마음을 영혼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마음(양심)은 지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지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양심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육체 중에 비물질 부분이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영이 될 수 없음은 양심은 지식에 따라 지배받기에 잘못된 지식으로 더러워지기도 하며(딤1:15)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주인으로 두어 섬길 수 있는(딤전4:2) 변질적 요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에게만 교통하고 다른 무엇에게도 교통 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의 인간 구성요소의 결론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구성요소는 육(肉)과 영(靈)으로 이분됩니다, 또한 영은 단일체이지만 육(肉)은 크게는 마음(정신)과 몸으로 이분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을 더 세분하면 마음도 수많은 요소로 되어있고, 몸도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이렇게 세분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靈)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영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체(肉體)에 속한 요소입니다. 인류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즉시 죽은 것은 영입니다. 영이 범죄 한 것은 아니지만 육의 범죄를 영이 주격으로서 그 책임을 지고 죽은 것입니다. 이를 영과 하나님이 끊어진 영의 사망, 영적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할 때에 다시 살아난 것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산 것을 말합니다. 이를 영의 중생이라고 합니다. 기독교(基督敎)는 불교(佛敎)와 같이 자기의 행위(行爲)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8. 나오는 말 : 지금까지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인간론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고, 인간의 구성요소는 영과 육으로 이분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은 단일체이지만, 육은 크게는 마음과 몸으로 이분할 수 있습니다. 영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은 영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에 속한 요소에 불과 합니다. 마음이 영이라면 결국 짐승도 영을 가진 영적(靈的)존재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인간론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 종교의 인간론에 있어서 다른 점입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인간의 기원론은 없고, 연기(緣起)론으로 조건(인연)이 있어서 태어나고 조건이 없어지면 죽는 것을 12인연설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존재하는 세계는 일체고라고 가르치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일체고의 존재인 윤회전생으로부터 해탈을 이루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사상이기에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간론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은 자기 마음 밖의 어느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으므로 <존재와 고통>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존재가 있으니 고통이 있고, 고통이 있으니 존재가 있으므로, 존재가 없어지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구원(救援)론인 해탈사상입니다.

 

다시 한 번 두 종교의 인간론을 결론으로 정리하자면 불교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육체(肉體)(색온 : 지, 수, 화, 풍)와 정신(精神)(수온, 상온, 행온, 식온)의 오온(五蘊)설로 설명하고 있고, 기독교(基督敎)는 육체(肉體)와 영혼(靈魂)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류시조가 범죄 하였을 때에 영적 사망이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영이 끊어진 영의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구원)할 때에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이 중생한 영 안에서 중생한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영을 다 가지고 있으나 중생된 영만이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부활(復活)한 이후의 몸은 다시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영적으로 죽어있어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구원 핵심은 심심불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불(佛)이 있으며 해탈이 있습니다. 이성철 종정스님은 초파일 법문(法問)에서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심히 부패 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요(렘17:9),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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