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71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 들어가는 말

  신약성서를 보면서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해서 이시대에 맞게끔 전해주어야 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가 중요하게 해야 할 작업중 하나는 텍스트인 신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과 텍스트가 쓰여진 사회 문화적 배경지식에 대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맞게끔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지 문화라는 말 자체에는 거대한 범위와 의미가 있어서 다루는 범위는 사회구조, 가족제도, 그 밖의 경제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한다.

 

. 사회구조

1.로마의 사회 구조

1) 자유인1)

                고대 로마 시절부터 로마 사회는 귀족 계급평민 계급이라는 두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다. 귀족 계급은 그 조상이 공화정이 창설되었을 때, 원로원 의원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이 계급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부자라도, 어떤 직책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평민 계급이었다. 처음에는 귀족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모든 관직을 차지했었으며, 평민들의 압력이 있게 되자 관직을 차지하거나 귀족 계급에 속한가문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점점 확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당시 로마에는 법적으로 원로원 계급, 기사계급, 평민계급의 세 개의 집단이 있었는데, 부는 이들 계급의 기초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기사 계급에 들어가려면 400,000세스테르티우스가 있어야 했다. 400,000세스테르티우스가 있어야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건국 초기에 이 사람들은 말 한 필을 타고 전쟁에 나갈 수 있을 만큼 부자 평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백만 세스테르티우스가 필요하였다. 이 상위 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 어떤 학자는 원로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로마 제국 인구 전체의 1%에 해당하는 2,000명을 넘지 않았으며, 기사 계급은 원로원 계급의 10분의 1 미만이었다고 추산한다. 이들은 글자 그대로 특권 계급이었다.

 

2) 노예2)

                노예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급에 속하였지만 수가 매우 많았고 신약 시대에는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해방 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해방 노예들은 그들의 전 주인에게 계속해서 매여 있었다. 자유인은 병들거나 상해를 입었을 경우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이 자신이나 가족 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해방노예들은 대개 전 주인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세기에 노예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노예의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플리니우스는 자기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였다. 일을 시킬 때 족쇄를 채우지 않았으며, 유언을 하도록 허락하였고, 요양차 프랑스 리비에라에 잇는 친구의 별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상반되는 예로 자기 노예의 혀를 자르고 그를 십자가에 매단 남자도 있었고, 마르티알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게 머리 손질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계집아이 노예를 매로 때린 한 귀족 부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1세기 중엽에는 스토아 철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노예의 신분이나 처우가 개선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사람들은 모두 운명에 지배되는 것이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세네카는 출생의 우연이나 정치적인 불운을 제외하고는 노예와 자유민 두 신분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세네카는 자기 노예들에게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도록 했으며 그들과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기도 하였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과 기독교의 전파로 로마인들은 점차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하지 않았다. 노예는 사회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였고 사회의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부분이어서, 당시 어느 누구도 이런 사회구조에 역행하여 노예제의 폐지를 논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노예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해 주라고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3) 후견제도(보호자-피보호자:Patron-Client)

                이 제도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후견인열등한 신분에 있는 예속자 사이에 호의(은혜)를 베풂(보호와 도움)과 감사(보은)의 행동(충성과 헌신)을 주고받는 행위로서, 상호 의존적 관계,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고대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사회제도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권력과 의존이라는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도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사적인 삶을 형성하는 일에도 주된 역할을 해왔다.3)

공화정 초기에는 보호자의 원조가 병에 걸렸거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지참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보호자는 그의 보호자를 위해 선거 지원을 하고, 그를 위해 힘든 일을 하며 길을 갈 때 호위해 주고,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보호자 피보호자 제도는 세습되었으며, 보호자들은 계속해서 피보호자들을 원조하였고, 이것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가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4)

 

4) 로마시민권5)

                고대 로마에서는 한 도시에 하나의 시민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1세기에는 이러한 규례가 바뀌어 이중 시민권이 인정되었다. , 자신들의 본국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도 로마 시민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로마 시민권 제도는 속국 사람에게는 로마 제국에 충성을 다하게 하는 도구(때론 돈으로 팔기도 함)로서의 정책적 일환일 뿐 아니라 하나의 법아래 있다는 의미로 제국의 통일성을 고려한 조치로서 제국의 단일성을 상징 하였다.

특히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법에 예속되어 심문 없이 매질이나 고문을 당하거나, 십자가의 형벌과 같은 잔악한 벌과 불법적 감금을 당하는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어 지방이나 주 통치자들의 판결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로마 시민인 부모나 로마시민, 로마 시민과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외국인에게서 출생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군인들에게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주었으며, 새로운 자치구가 수립될 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수여하기도 했다. 때론 노예가 자유민이 될 때로마 제국에 특별한 봉사(전쟁에 참여)를 했을 경우에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는 황제나 영향력 있는 황제의 친구에게 부탁함으로써 황제가 시민권을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여인들

                로마에서는 고대에 행해지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여자는 그대로 염두해 두지도 않았다. 인구 조사를 할 때도 여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여전히 여자들은 수로 세지 않았다. 로마의 여자들은 자기 개인적인 이름도 없었다. 그들의 이름은 단순히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의 여성 형을 갖다 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율리아(Julia)는 율리우스(Julius)에서 따온 것이다. 딸이 둘 이상 될 경우, 둘째에게는 세쿤다(Secunda, "둘째“), 셋째에게는 테르티아(Tertia, "셋째”),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로마의 제정 치하에서 여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인 자유를 만끽하였다. 많은 여자들이 그들의 남편이 죽고 난 후 물려받은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사기도, 재산을 팔기도 했으며(이런 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시절 이후에야 법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자기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글자 그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분명 여자들은 자유가 있었지만 1세기의 남자들은 여전히 여자들을 이류의 사람들로 간주하였으며, 항상 교육과 관용이 필요한 사람으로 남자 특히 남편과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가 결정되는 존재로 생각하였다.6)

 

2. 예루살렘의 사회 구조

1) 부자

   ①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

                예루살렘은 헤로데 왕조의 통치자들 아래서 왕도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이들의 화려한 궁정생활은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7) 거룩한 도시에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졌고, 헤로데는 예루살렘에서 4년간에 걸쳐 화려한 축제 경기들을 개최하였다.8)

                왕에게는 율법에 따라(17:17)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미쉬나 산헤드린에 따르면 24명 혹은 48명의 부인이 왕에게 허락 되었다. 헤롯 대왕(기원전 37-4)10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스모니아 왕가 출신의 마리암메만이 왕비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헤롯 왕궁 외에도 왕자들을 위한 소규모의 궁정과 헤롯의 형 페로라스의 궁정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궁정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9)  

                요세푸스는 헤로데의 영토를 분할 받은 상속자들의 수입을 계산하였는데, 이들의 정상적인 수입으로는 방대한 지출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호화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헤로데가 그의 왕국을 분할 할 때 감행했던 재산 몰수로 인하여 엄청난 재화가 헤로데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주전 12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에게 양도한 구브로(키프로스,cyprus)의 구리광산 때문에 그는 또 다른 수입을 얻었다. 또한 선심공세나 뇌물도 항상 통치자의 수지계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10)

 

② 자산계층 : 대상인, 토지 소유자, 세금청부업자, 대금업자11)

                왕가에 속한 사람들 다음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던 자산계층이다. 이들은 화려한 잔치를 열기를 즐겼다. 예컨대, 유월절 축제 때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하였고, 특별한 잔치 행사 때에는 예루살렘 전체 주민을 초대했다고 한다. 잔치 다음으로 여인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많았다. 게다가 귀족층들의 딸이 결혼할 때 엄청난 금액의 지참금을 주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최고 재판소이며 행정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기도 했다.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100 리트라(로마 파운드)정도의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예수의 무덤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제사장 귀족도 자산계층에 속했다. 수많은 종과 하녀들을 고용했고, 제사장의 귀족들은 성전금고에 깊이 관여했고, 후손들을 성전금고 관리인으로 임명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막대한 수입원을 가늠할 수 있다.

 

2) 빈자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사람들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구호금에 의존했던 사람들로 구별된다. 생활비를 벌수 있는 사람들은 노예와 날품팔이꾼을 들 수 있다. 노예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가노(家奴)로 일했다. 날품팔이꾼들은 노예들보다 훨씬 많았는데 예루살렘의 한 부자는 날품팔이꾼들 가운데 한 사람을 고용하여 그를 사환으로 삼아 자기가 탄 말의 고삐를 잡게 하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날품팔이꾼들은 먹여주는 것 이외에 평균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 비둘기 포수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날마다 네 마리를 잡아 두 마리는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 두 마리로 살아갔다. 비둘기 한 마리의 가격이 8분의 1데나리온이었을 경우 하루 소득은 4분의 1 데나리온이다. 소득은 극히 적은 액수였고 일거리를 구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도 있었다. 구호금으로 생활하는 주민들, 주로 율법학자들 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례비에 의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의 할당 금에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성전 금고에서 출연한 구호금에 의존하였다.12)

 

3) 사회적 계급

   ① 상층계급

      ㈀ 제사장 계급 : 신약시대 중에서도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은 신정체제였기에 제사장 계급은 가장 중요한 귀족 계급이었다. 대제사장은 몇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속죄일에 어느 피조물도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에 일 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둘째,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셋째, 자신이 상을 당한 경우에도 제사를 거행할 수 있다. 넷째, 성물을 분배할 시 가장 먼저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밖에도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퇴임 후에도 계속 대제사장직을 칭호를 유지했고 명성도 잃지 않았다. 잠시 하스몬 왕조에서 정치적, 군사적 권세를 한 번에 입는 세습직이 되었으나, 헤롯 때에 와서 전통적 특권이 무시되고 평범한 제사장 출신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제사장 계급에서 대제사장을 제하고 성전경비대장, 주간 당직 제사장들의 통솔자, 일직 제사장들의 통솔자, 성전감독자, 창고책임자의 다섯 종류 고위직이 있었다. 이들은 고위 제사장들과 고위 레위인 들로 구성된 사제귀족에 속한 사람들이 차지했다. 레위인은 제사장 가운데 하급 성직자에 속했고 제의 자체를 섬길 수는 없었고 단지 성전음악을 담당하거나 성전 문지기 역을 맡았으며 그 밖에 성전의 여러 사소한 일을 맡을 뿐이었다. 레위인도 세습이었으며 임직 연령은 30세였다.13)

 

                ㈁ 평민 귀족: 유대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되었고, 고위 제사장 그룹과 서기관 그룹과 장로 그룹의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서 장로들은 평민 귀족을 대표하는 평민 가문의 수장들이었다.14)

 

                ㈂ 서기관: 기원전 마지막 시기에 새로운 상급 계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계층이다. 1세기 유대 사회에서 70년 성전이 붕괴되기 까지 과거의 귀족 계급과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자라났다. 이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하다. 제사장 귀족뿐 아니라 평범한 제사장들과 하급성직자, 상인, 수공업자, 심지어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된 힐렐과 같은 날품팔이꾼도 있었다. 서기관들은 전문 지식을 갖춘 학자로서 사법, 행정, 교육 기관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고위 제사장들과 귀족 가문을 제하고 산헤드린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는 전적으로 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15)

 

   ② 하층계급

                예루살렘에서 사회적 하층계급이란 지배층의 권력과 특권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 천대받은 직업: 운송업자들 도둑질과 같은 직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천대를 받았다. 배달을 맡긴 물건들을 착복 받을 유혹을 받는 운송업들이었기 때문이다. 목동자신의 가축을 남의 땅 안으로 몰고 다녔을 뿐 아니라, 가축의 소산물을 착복하였기 때문에 천대받았다. 소매상인고객들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유혹받는 직업이었고, 의사부자를 우대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홀대한 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으며, 푸줏간 주인금지된 찢겨진 고기를 식용으로 몰래 판다고 의심받았다. 개똥수거자나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들은 악취로 인해 혐오감을 일으키는 직업이기에 천대받았고, 금세공, 절구석공, 직조인등은 여인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직업들이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세리의 경우 살인범과 강도와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16)

 

※ 천대받은 직업들: 나귀 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소매상인, 의사, 푸줏간 주인,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금세공업자, 아마빗 제조자, 절구석공, 행상인, 직조인, 이발사, 빨래꾼, 매혈자, 목욕탕업자, 도박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 경주진행자, 휴경년 과일장수, 세리

 

                ㈁ 유대인 노예: 당시 유대 사회에 노예들이 있었는데, 이들 유대인 노예역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무리에 속했다. 유대인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 도둑질을 한 남자의 경우, 극빈자들이 자발적으로 남자 노예가 되는 경우, 12살 미만의 여자 아이로 한정된 여자 노예의 경우가 있었다. 유대인 노예의 기간은 만6(21:5-6,15:16-17)이었고, 6년이 차기 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해방되거나 속전이 지불되었을 경우 자유를 얻었다. 여자 노예의 경우 주인이 죽거나 12세가 되면 노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방인 노예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는데 법적으로 유대인 노예는 주인집의 아들들과 동등하게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가족을 부양할 책임도 있었다.

                ㈂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민족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 노예보다도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여겨졌다. 이들은 유대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받은 후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따로 세워 유대인들과 심한 갈등 상황에 있었다. 헤롯 시대에 잠시 긴장이 완화 되었으나, 헤롯이 죽은 후 코포니우스 총독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에 성전 회당과 성소 전체에 사람의 뼛가루를 뿌려 성전을 부정하게 만듦으로 갈등이 다시 깊어졌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부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이방인들과 동등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 비합법적인 이스라엘인: 유대 사회의 비합법적인 이스라엘인들은 비합법적인 사제 자녀, 개종자(proselyte) 그리고 해방노예가 속한다. 이중에 비합법적인 사제 자녀란 한 사제가 혈통이 다르거나 결혼이 금지된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를 말한다. 개종자란 완전한 개종자와 반쪽 개종자로 나뉘는데 할례와 침례를 받고 희생제물을 바침으로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사람들을 완전한 개종자라 하고, 유일 신론을 고백하고 의식율법의 일부만 준수하는 사람들을 반쪽 개종자라 한다. 이들 중에 반쪽 개종자는 법적으로 여전히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방인 해방노예들은 유대인의 노예로 일하다가 훗날 자유인이 된 이방인 사람들을 말한다.17)

 

4) 여인들

                유대 상류 사회와 특히 율법에 신실했던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여성들이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특히 집 밖에 나설 때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용모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비천한 계급의 여인들은 상류 사회의 여인들보다 조금 개방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생계를 위해 경제적 활동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골은 도시보다 훨씬 활동이 자유로웠다. 양육, 농사일에 직접적으로 여인들이 참여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층 계급이나 시골에서 여인이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 였다. 이 당시 여인들의 공통점은 공적인 삶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과 부모 혹은 남편이 그들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부부 관계에서도 이들은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다. 특별히 유대 사회는 남편에게서만 이혼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더 심한 경우는 과부가 되어도 남편에게 얽매이는 것이었다. 남편이 남자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25:5-10, 12:18) 죽은 남편의 형제들이 형사취수혼을 거부해 주지 않으면 여인은 재혼 할 수 없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여인들은 소외를 받고 있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부인들은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18)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 가족제도

1. 가족 개념 : 가정은 초기 기독교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가장 기초적인 사회 단위이다.

로마19)

20)

- 남편, 아내, 자녀, 친척 노예

- 경제적인 상호의존

- 공동되는 종교의식에 의해서 신을 숭배하는 일과 연결되어 짐

- 절대통솔권인 부권(patria potestas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을 통해서 아내와 자녀들의 생활을 관장.

▶법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사형 및 노예로 팔수 있었

▶자녀들의 결혼 및 일생의 직업을 설

▶부권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계속

-아버지, 아내, 자녀, 며느리, 종들을 포함하는 대가족 형

-가족의 대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의식을 관장하는 제사장이므로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을 받아야 .

-가장은 가족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 율법을 지도, 가문, 지파, 민족의 전통을 보존 전수해야 했

-아내는 돈을 내고 사온 것이라 율법상 남편의 소유(20:17), 비 인격적으로 다룰수 없었.

 

1) 로마의 가족 붕괴21)

-1세기 겪은 수 차례의 내전으로 인한 가족구조의 파괴되었.
> 귀족들 중에서 많은 여자들이 과부가 되었고, 그들의 남편을 대신하여 결혼할 만한 남자들이 남자 않았다.
> 아버지 없이 버려진 아이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고 이들은 노예와 같았다.

-출생률의 감소로 이어졌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맞물려 로마인들은 자녀를 갖지 않으려고 했다. 1세기 상류층이 급격히 적어짐에 따라22) 아우쿠스투스 황제는 정책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바꾸어 보기 위해서 결혼하고, 세 아이를 둔 남자만 정치적인 관직에 오를수 있도록 하였고, 재산을 상속 받을수 있도록 하였지만, 명목상의 결혼과 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요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기, 예외조항을 만들지 않을가 없었다.

2. 결혼23)

유대

-남편에게 부여된 신부를 다스리는 힘에 정도에 기초

-가문의 정략에 의한 것
> 가장들의 뜻에 의해 맺어짐
> 관계의 기본은 남편의 지배
 ? 신부는 지참금순결성을 가지고 결혼함

* 지참금

    아내의 지참금을 투자하거나 소유지일 경우에는 그것을 적당하다고 생각될 때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혼할 경우 지참금은 아내에게 돌아갔고 아내의 간통 사실이 있을 경우 남편은 아내의 지참금 중 일부를 가질 수 있었다.
* 순결성

    혼인을 성사시켜야 할때가 되었을 때 그 딸의 처녀성을 입증하려하였다. 만약 결혼전 성관계를 가진 여자는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종신토록 더렵혀진 자로 낙인이 찍혔다. 결혼 때에 처녀성을 보장하기 위해 일부 소녀들은 열 살이나 열 한 살 때부터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서 살기도 하였다.

 

- 결혼적령기

  > 여자 : 열네살 이

  > 남자 : 스물 다섯 이

*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

    남편과 아내의 나이 차로 인해서 젊은 과부의 수가 많았다. 소녀의 나이와 상관없이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24)

-로마의 결혼 풍습과 유사함

양가의 계약이었으며, 이 계약으로 인해 두가지 경우에 효력을 나타냄.
> 약혼
    결혼을 집행하는 법적인 힘이었고, 이혼을 통해서만 파기될 수 있었다(1:18-19).
    약혼은 결혼을 집행하는 법적인 힘이었고,  약혼은 신랑이 신부의 값을 완불하거나, 일부를 내거나, 양도 증서를 건네줌으로 성사되었다.
    케투바라는 서면은 부부의 의무, 상속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 결혼
?결혼식후파라는 둥근 지붕이 있는 건물에서 행해짐.
?신부는 목욕한 후, 기름을 바르고, 특별한 예복을 입은 후, 저녁이 되어서야 친아버지의 집에서 악기를 동반한 무리들과 함께 시집을 감.
?결혼식에서 중요한 요소는 신부를 케투바가 설치된 신랑의 집에 소개하는 것.
?여기에서 7가지 축복이 부부에게 선포, 결혼 서약이 읽혀진 후 7일간 축제가 시작.25)

유대인에게 결혼은 정상적이었으므로 결혼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겨졌다.26)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3. 이혼과 재혼27)

-결혼이 정략적이었으므로 동거 이상의 의미가 없

-이혼은 배우자 어느 한편이 시작해서 결혼생활을 그만하겠다는 의사표시만 하면 이혼 성

-이혼 사유는
> 아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발견했을 때
>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더 매력을 발견했을 때
> 배우자가 간통했을 때
?형식이 거의 요구되지 않았고, 구두 및 서면으로 알리면 쌍방에 의해 이혼성

-1세기 까지 이혼의 권리를 부부모두가 가

- 유대인 남자들의 특권으로 남자가 권한이었음. (10:11-12, 5:32, 19:8).28)

-이혼의 경우 이혼 사유를 밝힌 증서를 여자에게 주어야 했는데, 이것이 악용되어 아내를 버리는 도구가 됨.

 

 

4. 자녀교육29)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결혼의 불안정으로 자녀를 갖는 문제에 대한 양면성이 나타남.
> 자녀를 두는 것은 훌륭한 시민의 의무.
> 의무이지만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한 거부감.
*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은 일찍 어른역활을 할 수밖에 없었음.
?소녀는 십대초에 결혼
?소년들은 법적으로 16세면 성인이 됨

     귀여움을 받는 삶의 단계가 아닌 빨리 그 과정을 거쳐 성숙해야 하는 치열한 시기였다.

 

공통: 3단계의 교육30)

체계에 있어서 암기가 중요했.

초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었으므로 교육수준은 높았.

-초급교육
7세가 되면 학교에 입학하여 일기와 쓰기 그리고 간단한 산수를 배움.

-중급교육
11~12세가 되면 문법 선생들로부터 고전을 공부함.

-고등교육
18세부터 에페베이라는 고등교육학교에 들어가서 웅변과 철학 군사훈련을 위한 체육교육을 받기도 함.

-피상적으로 그리스-로마교육을 따랐지만 내용은 다름

-목적 : 종교적인 것(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

-가정 : 종교교육의 중심으로,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함.

-초등학교(베스 세페르: 읽기학교, 서기관의 집)
회당에서 서기관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다.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고, 표준어로 성경을 외우고, 인용을 할수 있어야 했다. 암기가 상당히 강조

-중등학교
주전 2세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고, 13세에 시작되었으며, ’베스 미드라쉬’, ’베스 탈무드’라 하여 구전되어 온 율법을 배우는 곳으로 회당의 지원을 받아 부속 건물에서 교육이 이루어짐.

-고등교육
학자들에게 위탁되어(22:3) 받는 것으로, 성전파멸(70)이후에는 얌니앙 있는 학원에 가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학생들은 성경의 고등 해석과 랍비의 법적인 견해(탈무드)를 배웠다. 이 공부는 학생들로 하여금 랍비나 종교학자가 되게 하였고 유대의 지역 사회에서 법적인 결정권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의무적으로 무역을 공부

 

 

. 그 밖의 경제와 문화

1. 치장31)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육체의 쾌락에 관심을 집중하였기에 개인적인 치장위생에 신경을 씀
> 헬라인들은 자주목욕, 로마인들은 습관적으로 목욕함

-화장품, 염료 향유와 그 밖에 미용 도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

-탈무드에 사용에 대해 상당히 언급되고 있으며, 고고 학자들은 심지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 요새로 피신한 열심당원들도 머리 빛, 향수, 거울과 그 밖에 화장에 필요한 도구들을 가지고 갔음을 발견

 

1) 목욕32)

-공중목욕탕이 발달하였고, 로마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제도나 법률을 만드는 시절에는 사회 생활의 중심이 됨(사교중심역할).
> 이른 오후에 목욕탕에 모여 운동, 성욕을 해소,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 받는 여흥의 장소로 이용.
> 정부는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장소로 판단하여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목욕탕을 건설함.

-공중목욕탕의 활성화로인한 문제들
> 도둑의 문제
> 체질로 인한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문제 및 죽는 문제 발생.

- 그리스도인들이 목욕할 때 바른 행동과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2세기 말경, 클레멘스는 목욕도중 술취하는 사람들 비난하였고, 음욕과 음탕함이 동반되는 남녀혼탕을 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다. 남자들은 건강만을 위해 목욕, 여자들은 청결과 건강을 위해서만 목욕해야 한다고 말했다. 흥분과 쾌락을 위한 목욕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2) 머리 치장33)

-로마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몸치장을 하기 시작함

-여자
   최신의 헤어스타일로 그들의 머리를 가꾸기 위해서 전문 헤어드레서 노예들을 둠.
   1세기 유행헤어스타일 : 보석을 달기위해서 머리를 땋음.

-남자
    머리를 짧게 깎음. 바울이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으라고 권면한 것(고전11:14)은 이러한 관습이 당대에 보편적이었음을 암시함.
   멋을 내는 사람들과 문란한 사람들은 머리를 길렀다.
    대부분의 로마 남자들은 이발소에 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

-유대여자들은 땋은 머리가발로 정교한 머리 모양을 했으며, 안식일에 머리를 풀어 놓는 것을 금함. 왜냐하면 건물을 세우는 것과 건물을 헐어버리는 것에 대한 금지를 어기는 죄에 해당하였기 때문. 바울이 언급한 머리모양(고전 11:14~15)으로 짐작해보면 여자들은 보통 머리를 길게 함.

-딤전 2:9, 벧전 3:3은 여자들이 머리를 땋게 장식물로 치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관심을 보이는 것을 경고함.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면 동양사람들은 로마인들에 비해 머리를 턱수염을 기르도 했지만, 1세기에 와서 랍비들은 로마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유대인들에게 수염 자르는 것을 허락, 말끔히 다니는 유대인이 등장함.

-탈무드에는 이발사와 헤어드레서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는데 이들은 화장품도 팔고, 손톱과 발톱을 손질해 주었고, 간단한 의술을 행.

-얼굴면도와 겨드랑이 털을 뽑는 사람들도 있었.

-여자들도 면도를 하거나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을 뽑았고, 탈모용 크림을 사용.

-머리 색깔은 주로 갈색, 검정색, 금발이 있었.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3) 화장품34)

-창백한 피부색을 만드는 화장품을 여성들이 선호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흰색 분을 사용하고,효과를 얻었고, 종종 화장을 두껍게 한 사람들은 비가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일 때에는 외출하기를 자제함.

-흰색의 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도에 사는 부자들임이 부자임을 뽐내기 위한 과시용일 수 있음.

-유대 여자들도 화장품을 사용함. 부분적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눈 주위, 입술 주변에 화장을 하면 유대 지방의 건조한 기후에 민감한 부위가 마르는 것을 방지,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

 

2. 하루일과35)

-자연적인 스케줄(계획되지 않은 스케줄)에 따라 일을 함
> 해가뜨면 일어나고
> 이른 오후에 휴식을 취하고
> 오후 늦게 다시 활동
> 초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1세기에 이런 패턴의 하루 생활이 로마전역에 일반적으로 시행됨

-로마의 시인인 마르티 알리스가 기술한 로마인이 하루 생활을 토대로 재구성을 해보면
> 1시인 오전 6시부터 계산을 할경우

?하층계급에 속한 로마인들은 동틀 무렵에 부자 깨워서 보호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하루종일 보호자들을 돕는데 필요한 소량의 돈을 받는다
(살루타티오).

?법정과 그 밖의 관공서는 오전에만 일을함. 못했던 사업은 다음날에 .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오후에 가벼운 운동과 목욕을 하고 저녁식사를

?저녁식사는 오후 세시경에 함. 왜냐하면 어둠이 깔린 로마의 거리는 치안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국정 공휴일, 황제가 제정한 공휴일에는 오락과 극장쇼로 하루를 보냄.

?농장과 시골 마을은 다룰수 있었으며 파종기나 추수때 그러했.

-로마인들보다 더 늦은 시간에 저녁식사를 함.  사도행전 20:7~8에 묘사된 늦은 저녁 식사는 대부분의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3. 경제생활36)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로마시대의 생활의 중심부로 경제활동의 중심지였.

-개방적 도시 문화로 인해 각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와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하고 있었음
(이 도로와 신약에 나타난 사건은 매우 밀접한데, 아피아 가도는 사도바울이 그의 무리들과 함꼐 로마로 갈 때 사용했던 도로(28:15~16)이며, 군사적, 경제적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를 따라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임).

-속주에서의 세금을 통해서 운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우쿠스투스 황제때처럼 인구조사(2:1)를 통해 세수의 자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원했다.
> 드라뷰타
?직접세 : 땅을 소유한 자들이 내는 농산물 소득세
?인두세(17:25,22:19) :땅이 아닌 다른것에 대한 소득세
?간접세 : 소득의 정도에 따라 부과된 것으로, 이를 징수하기 위해 고용된 징수원들은 정부에 어떤 일정한 양을 내고 나머지 몫은 자신의 몫이 되었기에 간접세는 제국 내부의 부패를 도왔.  

-유대인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 이외에 소득의 10분의 3을 종교세로 냈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매년 반세겔의 성전세를 냈다(17:24~27)

-이들은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착취당했다.
> 열심당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음을 주장. 예수님을 세금의 문제로 시험을 하였음(1:13~17).

 

               

4. 오락37)

-연극
   합창단과 배우들을 위해 원형극장을 만들었고, 관람석은 계단식으로 비탈 위에 만들어졌다. 노천극장들은 대중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중에서 제일 큰 곳이었으며 공공생활의 중요한 중심이었다(19:29).

-운동경기
   종교적인 축제와 운동경기들이 병행. 운동경기에서 중요한 종목은 달리기였고, 스타디움에서 행해졌고, 중요한 경기는 권투, 격투, 5종경기가 있었으며 선수들은 모두 나체로 연습, 경기하였.

-원형극장에서 하는 행사나 서커스를 좋아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콜로세움이 유명하다. 원형 경기장에서 연극, 검투사의 싸움, 야생 동물의 쇼를 볼수 있었다. 특히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은 사회적으로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공적인 자리(연회나, 결혼식, 장례식)에서 항상 음악을 사용하였고, 고전 14:7~8은 당시 유행하던 세가지 악기인 아울로스(플루트 같은 피리), 키타라(일종의 하프), 트럼펫을 기록하고 있다. 트럼펫은 주로 전쟁에서 전령이 무엇인가 선포할 때 쓰이던 것이고 나머지 악기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인 악기였다.

-목욕탕문화와 연회문화가 있었다. 이것은 로마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단면이.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5. 식사38)

                신약 시대의 식사 문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저녁 식사였다. 헬라인들은 이 저녁 식사를 심포지움이라는 만찬으로 발전시켰는데, 음악이 곁들여지고, 초대된 손님들은 연회장이 선정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식사준비와 식사 제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중요한 사회 활동으로 만듬.
> 상류층은 저녁식사에 여러사람들을 초대함으로써 자신의 유력함을 과시하였고, 식사모임으로 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함.
>음식은 영양가보다는 보기 좋은 음식이 대부분이었고, 손님들은 의무적으로 차려진 음식을 다먹어야 했으며, 필요시 식사도중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에서 위를 비우기 위해 먹은 것을 토해내고, 다시 와서 남은 음식을 먹는 것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었다.
> 음식의 질로 손님들을 차별했는데, 주인 가까이 있는 사람에서부터 일류음식을 멀리 떨어지면서 이류음식을 제공했.

- 식사할 때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란의 한 이유가 됨(고전11:18~22).

-유대인들이 횡와식탁문화를 도입함.

-이런 문화를 이해한다고 했을 때
> 신약 성서에 나오는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수 있다. 흠정역과 개정 표준역은 그 여인이 예수님의 발 뒤에 서서 옥합을 부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침상에 기대어 누워 있을 때 가능한 모습 최후의 만찬에도 비스듬히 누운 예수님과 제자들을 상상하여 볼 수 있다.
> 공통적인 헬라어 단어는 “비스듬히 눕다”라는 단어.
?첫 번째로는 “눕다”라는 의미의 케이마이이다. ?어근 핍토(떨어지다)라는 의미에서 동사 아나핍토는 “눕다”와 같이 볼수 있다.
?동사 클리노와 이 어근이 들어간 복합동사인데 의미는 “기대다”, “비스듬히눕다”로서 눅에만 사용됨.
>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경건한 유대인 집단들은 전통적인 근동의 식사법대로 바닥에 주저 앉는 대신 로마식의 식사법을 택함.
> 헬라화의 영향은 유월절 식사를 하고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대화를 나누는데까지 미쳤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로마 사회의 식당은 식탁을 중심으로 침상 세 개가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식사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어서 횡와식탁이라고 불렀다. 이 중 주인과 가장 가깝게 비스듬히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상석이었다.

 

 

 

6. 의복39)

-분명 차이가 나지만 로마 제국의 전체에 걸쳐 많이 다르지 않았.

-남자
> 아미크투스라(겉옷으로 분류)
?로마:토가, 그리스: 히마티온
?공식적인 행사, 겨울에 보온하기 위해 입은 옷
?비싼옷이었기에 간수를 잘 해야 했음
> 인두투스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매와 목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있어 머리 위에서 뒤집어 써서 입는 옷
?로마: 투미카(튜닉), 헬라: 키톤

-여자
> 스톨라(짧은 튜닉 위에 긴 것옷)
?헤어스타일이 망가지지 않고 입고 벗을 수 있도록 어깨 부분의 솔기를 박지 않고 분리되게 함. 분리된 어깨 부분을 핀이나 브로치로 고정시킴.

-유대전통의복
> 케토넷(일종의 튜닉)
> 시믈라(케토넷위에 입은 넉넉한 외투)
> 옷의 길이를 조절하기 위해 튜닉에 허리띠를 둘렀다(12:37, 1:6)

속옷겉옷, 두루마기로 구성40)
> 속옷: 소매 없이 만들어진 두루마기와 유사하며 무릎 아래에까지 닿음.
?급히 이동해야 할 경우 속옷 끝 부분에 띠에 걸어 간편하게 했으며 띠에 돈을 넣어 두기도 했다
?.큰 동작을 할때 몸이 들어날까봐 소매를 달거나 옷을 발목까지 길게 늘어뜨림
> 사람들은 속옷만으로는 벌거벗었다고 생각, 겉옷과 같이 입었다.
?겉옷은 솔기 없이 만들어진 네모형 모직물으로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 남녀의 옷구분은 없지만 차이로 여자 옷이 더 길고 넉넉하게 만들어짐으로 몸을 감추었다.
> 가난한 사람들은 맨발로 다녔고,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샌달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7. 주거와 도시생활41)

-계층에 따라 다양한 주택에서 살았다.
> 주택의 크기와 주변환경은 인구밀도의 영향을 받았다.
> 담하나를 두고 주택과 상점이 붙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큰 공동주택에서 살았는데, 초라하게 지어지고, 보수도 엉망이었다. 왜냐하면 비싼 땅값으로 인해 투자한 재산에 대한 이익을 챙기는 주인들때문이었다.
> 화재의 위험: 화재가 일어날 경우 대재앙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소방력제도화는는 훌륭한 일이었.

-공동주택 14,000, 단독주택 1,000채 이것을 비교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공동주택에 살았음을 짐작할수 있.

-로마와 별반 다르지 않음

-비가 거의 오지 않았기 때문에
> 하층민: 대개가 평지붕으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방 한 두 개가 딸린 집에서 계속 거주함.
> 부자집:  경우 지붕은 일종의 정원 구실을 하여 식구들이 길거리에 나가지 않고도 시원한 바람을 쐬거나 일광욕을 즐겼고, 무더운 날 밤에는 사람들이 지붕에서 잠을 자기도 함.

일반적 구성 및 용도42)
> 앞마당: 가축이 사는곳
> 낮은 곳의 마루: 비올 때 자는 곳
> 높은 곳의 마루: 음식을 먹고 평소 생활하는 곳

-삶의 질
> 부자들을 제외하고 거칠고 조잡스러웠다.
> 소음과 날씨에 변화에 따라 잠을 못자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 치안의 부재로 좀도둑이 많았고,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 인구과잉으로 쓰레기와 오물이 중요한 문제
?대도시에는 잘 발달된 하수처리 시설존재
?부자집은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는 정화조 시설이 되어 있지 못함. 그래서 공중화장실이 존재함.
?공중화장실의 사용의 불편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오물을 창밖으로 버리는 현상 발생
?이론상 비가오면 하수도로 들어갔지만, 소도시에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보건문제가 심각.

 

 

                신약에 처음으로 언급된 집은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데 소와 양들이 둘러서 있는 구유에 누운 아기 앞에 무릎을 꿇는 동방박사들과 아기예수와 그의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집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셨던 집의 규모를 알수 있는 단서가 두어개 있다. 2:1~2은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집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일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이었으나, 나중에는 그 집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2:15에는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셨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의 라는 단어만으로는 예수님의 집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누웠을 정도면 상당히 큰 집이었을 것임을 틀림이 없다. 6:3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테크톤(tekton)은 나무와 돌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건축 계획과 예산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아(14:28~30) 요셉의 직업을 물려 받았을 것이다.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사도행전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집이 있었다는 언급이 몇군데 있다. 2:1~2에서 등장하는 다같이가 그리스도인 집단 전체를 가르킨 다면 그 집에는 120명 이었더 것이다(1:15). 온 집이라는 말 자체도 그 집이 상당한 규모가 큰 집이었음을 암시하는데 많은 군중들이 곧 바로 모여든 것으로 보아 이집은 그들이 나중에 만난 성전의 행각을 읨할 수도 있다(3:11,7:49은 성전을 집이라고 한다). 백부장 고넬료와 피장 시몬의 집은 그들의 권력이나 경제력을 반영한다. 베드로가 시몬의 집 지붕에 기도하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몬의 집은 유대식으로 지었을 것이다(10:9).

 

8. 예루살렘의 경제적 상황43)

                물이 부족한 산악도시인 예루살렘은 농업이 발달하기 적합하지 않았고, 따라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경제 전반을 염두에 둘 때, 단연코 농업이 가장 중요한 경제 요소였.

팔레스타인의 농

-주로 농업경제
> 헤롯통치기 이스라엘 전체 토지 면적의 3분의 2가 농업용으로 사용추정
> 팔레스타인은 경작이 가능한 비옥한 토양과 상당한 강우량으로 인해 농업이 가능했음
> 기후: 11~2월까지는 우기, 6~9월은 건기, 3~5/10월은 과도기로 소량의 비가 왔음.
> 산악지대인 강부 갈릴리의 평균 강우량은 1,100mm, 저지대 하부 갈릴리 600mm비가 왔기에 토양과 기후는 나라에서 가장 비옥하고 생산적인 지역이었음.
> 갈릴리 외에도 팔레스타인 전역이 농업용으로 개발, 지방에서는 습기를 활용하기 위해 계단식 농법도 활용
> 주요생산물 : 가장중요한 곡물, 올리브, 포도주, 과일, 야채, 향료, 나무 등
> 지역적으로
?요단강 서쪽 평야지역은 곡창지대
?이즈르엘 평원에 많은 곡물이 생산
?게네사렛호수 북쪽에 있는 고라신과 가버나움 지역을 포함 하부 갈릴리 지역의 동편 계단신 평원에 있는 아르벨 계곡은 밀 생산
?갈릴리는 올리브가 유명, 예루살렘은 올리브 경작에 적합
?유다지방, 샤론평야가 중요 포도재배지였고, 구릉지와 산악지대가 많은 갈릴리는 물만 확보할 수 있다면 포도생산지로 이상적
?게네사렛호수 북쪽 화산토양에서 상품포도가 생산
?포도주는 식량뿐만아닌 유대제의에 빠질수 없는 요소임.
> 미쉬나와 탈무드에 농업 및 무동산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농업이 차지했던 중요성을 알수 있.

예루살렘의 수공

-수공업은 예루살렘의 전형적인 산업형태이다.
> 수공업을 ’우마누트’(ummanuth): 의사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서 유대인들이 의사 직업을 수공업의 하나로 간주했다는 것도 짐작할수 있음.
> 탈무드에 말이 내려올 정도로 수공업은 당시 비교적 좋은 직업이었다.
> 많은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일 외에 수공업에 종사함.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랍비 교육을 받은 바울은 그리스어로 ’스케노포이오스’(18:3) 천막제조공, 양탄자나 천막천 직조공을 뜻함.
?탈무드에 나오는 서기관들의 직업에 제단사, 샌들 제조공, 목수, 제화공, 제혁공, 건축하 등이 속하지만 이런 직업과 달리 직조업은 천대받는 직업으로 속했는데 우선 더럽고 사기가 많고 여자들과 관련되었다는 이유가 있었다.
> 위치적으로 수공업이 발달하기 어려운 위치였지만, 수공업이 발달할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중요성으로 인해 커다란 자본이 유입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성전수입, 세금수입, 부를 축적한 대상인, 세금징수자 및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몰리는 장소로 예루살렘 주변지역에는 다양한 종류의 수공업이 발달함.

-주후 70년 이전 예루살렘은 건축업이 발전하였고, 거대한 건축사업을 좋아했던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 덕분에 예루살렘에는 여러 화려한 건축물이 세워졌고, 이로 인해 건축업과 그에 수반되는 공예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대규모 건축으로 수 많은 건축노동자들이 필요했으며, 건축물 장식을 위해 건축공예법이 활발했음을 짐작할수 있음.

-그 밖에 진설병 제조자, 흥향 제물 제조자, 성전 휘장 관리인, 금대장장이, 성전 급수 책임을 맡은 우물 감독, 성전의사, 성전이발사 등이 있었.

예루살렘의 상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 상업의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한 이유로
> 도로망 부족, 협곡으로 가로막힌 요새와 같은 지역 때문에
?요단강 동부 지역의 농산물이 통과하는 위치에 있지 못햇고, 사막의 유목민들을 위한 상업 중심지도 될수 없었음
>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을 이루는 성전으로 인해 상업이 번창할수 있었음.

-상업은 존중받는 직업: 제사장들과 대제사장 가문도 상업에 종사할 정도였음.
> 원방교역: 낙타 대상들을 통해 이루어짐.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 방 교역: 나귀가 주로 이용
?생활필수품을 조달하였는데 그중 중요한 수입품이 주민의 생존이 달린 곡물이었다. 때문에 수입의 대다수는 곡물이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곡물은 예루살렘 인근지역에서 재배
?성전용 밀가루는 유다에서 주로 공급
?대부분의 곡물은 유대인이 살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역, 특히 요단강 동부 지방에서 공급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도 곡물이 조달된 것은 예루살렘 거주민은 위한 것
?올리브,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이나 야채는 대부분 예루살렘 인근지역에서 유입

-안전한 도로망이 없어, 교역로에 도둑이 잦음.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더.

-예루살렘에서 거래하려면 시장세를 내야했음.
> 유대인들이 세금청부업을 맡았고, 세금을 무자비하게 징수하여서 악명을 .

-곡물시장, 과일시장, 가축시장, 목재시장, 노예시장이 있었고, 상거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안식일 성수규정이나 이방인과의 거래에 관한 규정들 외에도 몇 가지 특별규정이 있었다. 특히 정결하지 못한 가축이나 고기의 유입을 엄격히 감독하였고, 물가는 시골보가 훨씬 비.

-가축수입에 관련,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의 내용을 통해 기원전 2세기 초의 가축수입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예루살렘에는 세속적 가축시장과 제물용 가축시장이 있었다. 희생제물용 가축거래는 성전 과장에서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근거로 막 11:15의 보도가 뒷받침한다. 또한 레위기 규정을 따라서 가축수입을 했고,
> , 염소, 비둘기, 닭은 유다산지에서 공급
> 수소는 해안 평야와 요단강 동편에서 유입: 수입된 가축은 대다수 성전 수요를 충당하기 위함.

-가옥건축을 위해서 석재와 목재를 수입
> 재료를 주로 예루살렘 인근 지방에서 공급
> 성전건축용 목재는 주로 레바논산 삼목사용
> 유월절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희생제물을 태우기 위해 석류나무 목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
> 호화스런 성전건축에는 수입용 목재를 사

예루살렘 여

-예루살렘에 오는 여행자들에게 세금을 받음으로 예루살렘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
> 명절을 지키러 먼곳에서 예루살렘에 오는 유대인들은 일종의 세금인 제 2의 십일조를 현물이나 화폐의 형태로 가져왔고, 사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남에게 빌려주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전부 소비해야 했음
> 당시 원거래 여행은 노상강도의 위험으로 인해 여행단을 조직함.
> 예루살렘 원거리, 근거리 여행은 무엇보다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서 유발, 정치적 경제적인 유유에 의해서 이루어

 

 

9. 화폐제도44)

                신약의 화폐의 가치: , , (10:9).

()

가장 가치가 낮은 청동화폐

12:42 과부의 두 렙돈

로마 동전 앗사리온의 1/8,

고드란트의 1/2

드라크마()

데나리온과 거의 같은 가

헬라의 은전, 1/4세겔에 해

고드란트()

앗사리온의 1/4, 두렙돈 청동화폐

디드라크몬()

데나리온과 거의 동일한 가

1/4 세겔 가

앗사리온()

데나리온의1/16

세겔()

4개의 드라크마에 해당되는 은

데나리온()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의 은전

(20:1~15)=16앗사리온

셋돈(22:19을 지불할 때 사용함

스타트()

4개의 드라크마에 해당되는 은

므나(

1/60 달란트/ 100드라크마해당/ 화폐의 종류는 아님(19:11~27)

달란

6,000드라크마 혹은 60므나,

신약에서 가장 값비싼 돈의 가치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김제석, 이학조

 이름

   값어치

관련 성서구절

앗사리온

1/16데나리온

10:29; 12:6

고드란트

1/64데나리온

5:26; 12:42

렙돈

1/128데나리온

12:42; 12:59; 21:2

데나리온(또는 드라크마)

하루의 품삯

18:28; 20:2,9-10,13; 22:19; 막 6:37;12:15; 14:5; 눅 7:41; 10:35;(15:8-9); 20:24;6:7; 12:5; 계 6:6

디드라크마

2데나리온

17:24

스타테르

4데나리온

17:27

미나

1,000데나리온

19:11-27

달란트

6,000데나리온

18:24; 25:14-30

 

. 나가면서

                성서의 내용을 전해야 하는 우리는 성서의 내용을 보면서 사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서의 내용은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문화적인 접근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를 보는 독자의 입장으로 메시지를 제시할 때 그 메시지를 받는 대상이 누구였으며, 그들의 견해가 어떻게 달랐으며, 이런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관점을 어떻게 형성했는지에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소망해 본다.

 

▶ 참고자료

   -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오광만 역, 생명의 말씀사, 2001.

   - 심상법.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 요아힘 예리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1992.

   -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2005.

   - 대한성서공회연구성경. I-Pad.

   - 대한성서공회(http://www.bskorea.or.kr)

   - 정창교. 『신약의 배경』. 강의안, 2014.

 


1)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p.333-334.

2)  위의 책. pp.343-345.

3)  심상법.『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pp.146-147.

4)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342.

5)  심상법. 『신약 주해를 위한 신약 서론』.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5. pp.153-154.

6)  앨버트 벨. 『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 생명의 말씀사, 2001. pp.346-348.

7)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0.

8)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125.

9)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0.

10)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125-131.

11)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171.

12)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151-163.

13)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73-181.

14)  위의 . pp.181-182.

15)  위의 . pp.182-183.

16)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382-392.

17)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86-190.

18)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pp.450~470.

19)  벨. 위의 책. p.399

20)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p.118~119.

21)  벨. 위의 책, p.400~403

-22)  대플리니우스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의 조카요 그가 입양한 소 플리니우스에게도 자녀가 없었다. 소플리니우스가 유일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소플리니우스의 죽음은 곧 그를 낳아 준 아버지의 가계뿐만 아니라 그의 양아버지의 가계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23)  벨. 위의 책. pp.403~407.

24)  어떠한 비문의 내용을 보면 “슬프게도, 이제 내가 떠 온 내 남편은..... 정말이지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내가 일곱 살 때 그는 나를 껴안았다. 이제 내 나이 사십, 나는 죽음의 그늘하에 있다.

-25)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p.78.

-26)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120.

27)  벨. 위의 책. pp.407-411.

28)  퍼거슨, 위의 책, p.79.

29)  벨. 위의 책. pp.417-419.

30)  에버렛 퍼거슨.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pp.113~114.

31)  벨. 위의 책. p.427.

32)  벨. 위의 책. pp.428~429.

33)  벨. 위의 책. pp.430~432

34)  벨. 위의 책. pp.432~433.

35)  벨. 위의 책. pp.351~354.

36)  퍼거슨. 위의 책. pp.84-99

37)  퍼거슨. 위의 책. pp.99-110

38)  벨. 위의 책. pp.354-364.

39)  벨. 위의 책. pp.372-376.

-40)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p.115~117.

41)  벨. 위의 책. pp.365-372.

-42)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편. 『설교자를 위한 성경배경사전(신약). 기독교 목회자료 연구소, 1999. p.117.

43)  김창선. 『유대교와 헬레니즘』. 한국성서학연구소, 2011. pp.161~170.

44)  대한성서공회. I-Pad. 이해자료, 성서속위 단위.

 

신약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말씀이 주어진 당시의 정황을 먼저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란 시 ·공간적 배경을 초월하여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렇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앞에서 신약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중간기 시대의 팔레스틴의 역사와 로마 제국의 역사, 그리고 신약 시대의 유대 역사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어서 여기서는 신약 성경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은 먼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지배 국이며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실시한 로마 제국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 직 ·간접적으로 사회 문화적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도 민족적 독창성과 자치권을 어느 정도 부여 받고 있던 유대의 문화적 상황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 신약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제 측면들을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는 로마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중은 유대의 관점에서 푸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찰할 것이다.     

 

정치적 배경

 

다른 어떤 측면에서 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팔레스틴은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로마 제국 전체의 통치 구역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어 총독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로마 제국 전체의 정치 구조와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식민 통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 제국의 정치 구조 

로마는 B.C.SC부터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다가 B.C.27년 아우구스투스(Au撚stus)가 황제의 직위에 오르면서 제정(帝政)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즉 공화정 때에는 원로원이 최고 실권을 행사 했으나 제정 때에는 황제가 최고 집권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제정은 동방 국가들의 전제 군주제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황제와 원로원,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1脚인으로 구성된 평민회(平民會)가 함께 있어서 황제의 독재를 방지하는 장치가 되었다. 그러나 A.D.3C경에 가서는 로마도 동방의 전제 군주제와 거의 유사한 체제로 변했다.  한편 황제(Emperor)가 로마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이긴 하지만 황제 혼자서 넓은 제국 전체를 다 통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황제 관할 구역과 원로원 관할 구역으로 구분되었다.  황제 관할 구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예를 들어 애굽과 같이 로마 제국에 상당한 양의 식량을 공급해 주는 지역으로서 황제의 직접적인 관리와 통치를 받는 구역이다. 그리고 그 외의 지역은 대부분 총독 관할 구역으로 편성되었다. 이런 원로원 관할 지역의 경우의 총독은 원로원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맡겨진 지역의 통치를 책임지며, 그 상황을 정기적으로 원로원과 황제에게 보고해 야 했다. 한편 황제 관할 지 역 의 총독들은 각각 다양한 계충 출신의 세 부류의 총독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이들은 황제로부터 각각 분할받은 관할 지역을 다시 세분하여 자기 휘하의 소총독들에게 일임하였다. 이상과 같은 로마 제국의 정치 구조를 도표화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대집정관(Legate)은 본래 공화정 때에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집정관(Consul)이었으나 후에 황제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

② 대장관(Praetor)은 군 지휘관 출신이다.

③ 지구 사령관(Pre톤ct)은 로마 기사 계급의 지휘관이며 그에 휘하에 기사 계급 출신의 무관들이 지방사령관으로 소총독직을 수행했다. 유대 총독 빌라도도 무관 계급 출신의 소총독이었다.

① A.D.1세기경 황제 관할 지역으로서 대표적인 속주는 애굽 수리아, 갈라디아, 그리고 유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원로원 관찰 지역에는 아가야, 아시아, 비두니아. 그레데. 구브로, 마게도니아 등을 들 수 있다. A.D.1세기 이후 원로원의 세력 확대 방지를 위한 정책으로 인해 원로원 관란 구역은 축소되고 촹제 관할 구역은 확대되었다.

 

2. 팔레스틴에 대한 로마의 식민 통치

A.D.1세기 무렵 로마 제국은 대개 切여개의 속주(屬州)를 가지고 있었고 그 지역은 매우 광대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이 많은 속주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그 지역에 따라 그 지역에 맞는 정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상당한 자치권(自治權)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각 속주는 로마 제국이 파견한 총독하에 각 지방의 지도층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그들 나름의 법률을 집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치권은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을 상납하고, 징병에 응하고, 황제 숭배 의식을 준수할 때에만 허용되 었다.

이런 점에서 로마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데 있어 큰 골머리를 앓았다. 왜냐하면 유일신(唯一神)을 숭배하며 이방인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황제를 숭배케 하고 세금을징수토록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헤롯 왕가를 통하여 유대를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혜롯 왕가의 유대통치는 혜롯 안디바터 2세가 일단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던 것이 그 시초였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인 헤롯 1세는 대왕의 칭호를 얻고 팔레스틴 전 지역의 왕이 되었다. 한편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팔레스틴 지역을 나누어 분봉왕의 자격으로 통치하면서 서로 어지럼게 이합집산하여 통치하였다.  시기상으로는 B.C.犯-A.D.70년으로 대략 1세기를 넘으며 그 통치 지역 및 양상면 으로는 그때 그때 심한 차이를 보였던 이 혜롯 왕가의 팔레스틴 통치에 대해서는 본서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 경'을 참조하라. 한편 팔레스틴 지역은 황제의 관할 지역으로서 황제가 파견한 총독의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편 성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있어서 총독제의 실시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게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의 팔레스틴 정복 초창기 때부터 로마 제국을 강력히 도왔던 혜롯 가문을 통한 간접적인 팔레스틴 통치를 로마 정부가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롯이 죽고 난 후 팔레스틴 지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각각 분할 통치 되었다. 그 중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는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 사건으로 결국 아구스도 황제에게 문책되어 고울(Gaul) 지방으로 쫓겨 나게 된다. 따라서 그가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 ·지역은 헤롯 가문의 유대 통치를 반대하던 예루살렘의 바리새인과 유대인 부자들의 청원에 의해 로마 총독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었다(A.D.6년). 이렇게 해서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총독 통치와 헤롯 가문의 잔존 세력들의 분할 통치가 병행되었는데, 파견된 총독의 임무는 주로 로마 정부를 위한 세금 징수와 원주민의 동태 파악 그리고 주둔군의 관리였다. 이러한 총독 통치는 초기에는 아켈라오가 다스렸던 유대와 사마리 아 지 역 에서 만 행 해지 다가 유대 지 역 의 분봉왕들인 헤롯 안디 바와 혜롯 빌 립 이 다같이 분봉왕의 직위를 박탈당한A.D.切년 경에는 갈릴리, 베레아, 드라고닛, 수리아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세금 징수를 위한 로마 제국의 인구 조사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와 로마로부터 유대 국가의 독립을 내세우는 열심당원들에 의해 주도된 잦은 반란으로 인해 헤롯 아그립바 1세(A.D.37-설) 이후에는 로마 총독이 단독으로 팔레스틴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아그릴바 2세는 너무 어린 닻에 곧바로 아버지를 계승하여 유대 통치자가 되지 못하고 약 10년 후에 과거 헤롯 빌립이 통치하던 드라고닛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으나 유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 총독들이 계속 통치하였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된 이후 유대와 동일한 행정 구역으로 편성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헬라의 직접 통치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은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데가볼리(Decapolis)란 지역이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이 출레스틴 지역에 헬라 문화를 이식시키기 위하여 만든 지역으로서 열개의 헬라식 도시들이 동맹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도시는 힙포(HiP렌5), 가다라(Gadara), 거라사(Gerasa) 등이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以exanderjanneus, B.C.103-76 년)에 의해 잠시 유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B.C.63년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에 의해 재차 정복된 이후로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한A.D.70년 이후까지 로마의 직영 도시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이방 문화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일종의 자유 도시들이었다. 예수께서도 자주 이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셨는데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신 사건이 그곳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대표적인 이적이다 (마 4 : 25 ; 막 7'31 ; 눅 8'39). 한편 서로 어울려 팔레스틴의 지역 통치 체제를 구성했던 로마 식민 정부와 헤롯 왕가의 병행 식민체제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 때로부터 헤롯 아그립바 2세 때까지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총독과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분봉왕 및 로마 황제들을 함께 모아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로마 제국은 팔레스틴과 그 근경을 점령한 뒤 초창기에는 팔레스틴 전체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정하였으나 B.C.4년경 헤롯 대왕 사후 그의 세 아들들에게 그 땅을 분할하며 통치하도록 행정 구역을 보다 세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 구역에 대한 통치자는 계속 바뀌었으나 행정구역은 A.D.70년 이스라엘 멸망까지 계속되었다.

 

3. 유대 자치 정부 산헤드린(the Sanhedrin) 

당시 로마 제국은 많은 점령지를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에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였다. 이러한 로마의 정책에 편승한 유대인들의 자치 기관이 바로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이다. 물론 로마는 비록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총독의 권한 아래 예속시키기 위하여 자치장은 로마가 직접 임명하였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의장을 임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는데, 예수 당시 산혜드린 의장은A.D.6-10년경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코포니우스(Co멜pius)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안나스(Annas)였다(요 18 . 13). 따라서 로마 제국은 점령지를 통치함에 있어서 항상 지방 자치 정부가 처리해야 할 문제와 로마 총독, 흑은 지방 장관(Praetor)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구분해야 했는데, 특히 유대 지역의 경우에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로마 총독은 전혀 개입치 않으려 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다가 그를 헤롯 안디바(Anti탈5)에게 넘긴 것도 예수가 유대인의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고소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눅 23 : 7). 또 로마 총독은 유대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정을 감안하여 예루살렘에 파견된 로마군의 군기 위에 황제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종교 양식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유대인들의 성전 제의를 존중하여 이방인들의 성전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한 로마 제국은 모든 식민지 국가에 대해서 실시하는 징용을 유대에서 만큼은 예외로 하여 청년들을 강제 징용에서 제외 시켰는데 이는 그들이 군대에 갈 경우 반드시 황제 숭배 의식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한편 로마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유대 전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로마의 행정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그곳에는 로마의 세금 정책을 시 행하는 세관과 아울러 그 지역을 관리하는 로마군의 병력 기지가 함께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의 대표적인 로마 행정 도시로는 가버나운, 가이사랴, 여리고 등이다(눅 9'1, 9). 더욱이 가이사랴는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던 곳인데, 유대 지역의 최고 통치자로 파견된 로마 총독은 평상시 이곳에 있다가 중요한 유대인의 명절 때에만 예루살렘에 일시적으로 장소를 옮겨 총독의 업무를 수행했 다. 그러면 이런 로마 식민 체제하에서의 유대 자치 정부 역할을 맡았던 산헤드린에 대해 보다 상술하 면 다음과 같다.  

 

1) 산헤드린 공회의 기원

물론 산헤드린 공회의 역사가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에 총독 관저를 설치한 때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산헤드린은 바벨론 포로 시기 이후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고 또한 이를 계획하던 '귀족 회의'(貴族會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귀족 회의'가 셀류쿠스 왕조 통치 하에서는 셀류쿠스 왕조에게 유대 민족의 민의(民意) 를 전달하는 대표 기관으로서의 '원로 회의'(元老會議)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 '원로 회의'가 하스몬 왕조 통치하에서 비로소 '산헤드린'(Sanhedrin)이라고 불리어지는데, 이 때부터 산헤드린은 유대 전지역의 율법을 관장하는 유대 최고 자치 통치 기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 지역을 통치하면서부터 산헤드린과 헤롯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헤롯은 산헤드린에서 자기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의 세습 귀족들을 축출하고 산헤드린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정치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헤롯이 죽고 그리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유대 지역에서 추방당한 후(A.D.6년) 유대의 자치를 허용하는 로마 제국에 의해 산헤드린은 다시 그 역할이 회 복되었으며 날이 갈수록 그 위상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2)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

산헤 드린 공회 는 그 의 장인 대 제사장을 제 외 하고 70명 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 그 숫자는 최 초 모세 가 자신의 통치를 보좌하고 백성들의 소송 문제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토록 하기 위해 70인 장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45

로들을 세운 사실을 기록한 민 11 : 16에 기인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71명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집단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대제사장과 그를 보좌하는 제사장들이다. 이들 제사장들은 성전 경비 대장, 성전 창고 관리장, 그리고 대제사장을 도와 성전 예배를 돕는 제사장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숫자는 대략 10명 정 도이 다.  둘째는 원로(元老)들이다.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세습되어 온 귀족들로서 각 지파의 두령이나 장로를 가리키는데, 신약 시대에는 이들의 사회적 역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도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셋째는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당시 '랍비' 또는 '선생'이라고 불리워지던 사람들의 우두머리 들로서 유대 사회에서 신학자와 법률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백성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산헤드런 공회에서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 었다.  

 

3) 산헤드린 공회의 역할 

첫째, 산헤드린은 유대교(the Judaism)로 통일된 유대인의 의회이니 만큼 그들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유대인들의 율법의 준수 문제에 대한 종교 재판권 행사였다.  둘째, 산헤드린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유대의 유일한 자치기관이었으며 유대에 파견된 로마 총독에게 유대인의 민의를 전달하는 기구였다. 아울러 로마 제국이 유대 지역에 어떤 정책이나 의사를 전달하는 공문서를 보낼 때도, 항상 그 수신자는 산헤드린 공회였다.  셋째, 명실공히 산헤드린은 유대의 최고 통치 기관이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의 일반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가 인정하는 허용 범위 내에서만 행정을 주관하고 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의 세금 징수 문제는 그들이 관할할 수 없었으며 사형 집행도 반드시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율법의 범죄자로 규정하고서도 처형하지 못하고 그를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갔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눅 22 : 66-23 : 2). 한편 산헤드린 공회는 매년 일정한 회의 기간을 정해 두고 그 기간 동안 주요한 안건을 처리하곤 했는데 그 회의는 주로 유월절과 장막절 그리고 초막절 같은 유대인의 절기에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회의 결정 사항들을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산헤드린 공회는 전체 총회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다급한 사건이나 사소한 사건들을 수시로 처리할 수 있는 각 분과 회의를 조직했는데, 이 분과 회의의 규모는 10-20명 내외로 구성되었다. 이 분 과회의는 거의 대제사장의 뜻에 따라 운영 되었으며, 예수의 처형을 계획한 것도 바로 이 분과회의 였다(눅 22:2;요 12 : 47-53).

 

 

 

                                                          경제적 배경

정치적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로마 제국이 그 식민지의 하나인 팥레스틴 지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로마 제국 전체의 경제 상황을 다 살피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로마 제국이 제국 내의 경제상황으로서 다른 속주(屬州)들에게 필연적으로 파급되었던 몇가지 경제적 요건들만을 살펴보고 나서 바로 팔레스틴 지역의 경제 상태에 대해 살 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제국의 경제적 상황 

 

1) 교통망의 발달 

경제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교통의 발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로마(the Roman)는 일찍부터 광범위한 제국 전체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구축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도로망 구축의 일차적인 목적은 물론 군사상의 정복 전쟁 수행과 식민지역의 효과적인 통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로들이 상인들의 무역로로 활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국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 여하게 된 것이다.  로마는 B.C.2C초에 이미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였으며 로마 제국이 점점 확장해 가면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등서(東西)도로도 건설하였다. 또한 로마는 지상 도로 뿐만 아니라 해상 교통도 발달시켜 지중해 연안에 많은 항구를 새롭게 건설하였다. 이러한 항구 발달은 자연스럼게 국제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은 크게 발 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항구가 새롭게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항구가 많았다.  

 

2) 로마 화폐의 세계적 통용 

로마 제국이 세계 경제에 미친 또 하나의 큰 공헌은 로마 화폐가 오늘날의 미국 달러처럼 세계적으로 유통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화폐의 기본이 된 로마의 은화 데나리온(Denarius)은 로마, 안디옥,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 팔레스틴의 두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도 주조되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게 활용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화폐의 원활한 유통이 세계 경제를 매우 활성화시켰던 것이다. 데나리온은 헬라의 드라크마와 가치가 동 등하며, 은 한 세겔의 1/4 가치에 해당된다. 이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것이었다(마 20 : 2). 한편 데나리온 이외에도 렙돈(lepton), 고드란트(k떨rantes) 등의 로마 화폐가 유통되긴 했으나 데나리온 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3) 노예제도에 기초한 경제 구조 

고대 경제는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1차 산업 특히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제국을 이룬 로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노예제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이 안정되어 갈수록 대지주에 의한 대단위 농업 경제가 노예 인력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굳어져 갔다. 농업 경제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기본 인력은 거의 모두가 노예 인력으로 충당되었다. 노예 인력은 정복 전쟁 또는 채무에 의해서 그리고 세습에 의해서 대량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의 노예의 지위는 다른 고대 문화권은 물론 로마시대보다 후기의 다른 문화권의 노예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사회 전체의 구성원의 절반 훨씬 이상이 노예였던 로마 제국하에서는 결코 다른 문화권에서처럼 노예를 혹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귀족, 평민, 자 유시민 및 자유민, 노예 등 대략 5계충으로 구성된 로마 사회에서 노예들은 가정과 재산을 사유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졌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자유민이나 평민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노예제도 초기부터 노예들은 주인과의 계약이나 각종 제도적 장치에 의해 비교적 쉽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사건이 발생하던 제정(帝政) 초기부터는 정 적 (政離)이 성 장하는 것을 막고 특히 제 국 유지 에 필수적 인 군사력 을 유지 하기 위 하여 그리 고 병 역 의 의무가 있는 시민권을 가진 자유시민 및 자유민을 많이 육성하기 위하여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격 상시키는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2. 팔레스틴의 경제적 상황 

팔레스틴 지역은 고대로부터 농업이나 목축업을 주로 해 왔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이 지역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변하여, 농업에 비해 수공업과 상업, 무역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1) 농업 경제의 쇠퇴 

신약 시대 팔레스틴 지역의 농업 경제를 쇠하게 만든 요인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인구 증가를 들 수 있다.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한 인구는 과거 구약 시대보다 상당히 많이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거주하고 있던 디아스포라(Dias맬「a)의 유대인들이 매년 절기 때마다 예 루살렘을 방문하러 왔기 때문에 절곤 때의 인구는 평상시보다 몇배 더 많았으며 이 많은 인구를 과거의 농업과 목축업을 통해 얻는 식량으로는 다 먹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외국으로부터의 농산물 수입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농산물이 수입되자 자연스럽게 국내 농업 경제는 점차 쇠퇴해가고 말았다.  둘째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넓은 영토와 많은 노예를 바탕으로 한 로마의 농업 경제의 영향을 받아 팔레스틴 지역에서도 점차 넓은 영토를 소유한 대지주(大地主)가 나타났다. 이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소규모 농가들은 대부분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일용 노동자나 실업자로 전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대지주, 즉 부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예수께서는 비유로, 또는 직접적으로 여러 번 경고하신 적이 있다(눅 6'24, 25 ; 12 : 13-21).

 

2) 수공업의 발달 

구약 시대에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 수공업은 단지 농업과 목축업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수공업은 큰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인한 2차 산업의 필요와 아울러 헤롯 가문에 의해 진행된 여러 건축 사업 때문이었다.  특히 헬라와 로마의 문화적 유산에 심취해 있던 헤롯(Herod, TheGreat)은 유대 지역에 왕궁의 건축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그리고 항구와 망대 같은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실시했다. 활발한 건축 사업의 실시는 자연히 목수와 석공의 필요를 야기시켰고,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사회에서 냉대받던 기능공들의 사회적 위치가 많이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장려되어 온 유대 지역의 목축업은 양의 틸을 가공하는 모직업과 그 가죽을 이용하는 피혁 가공업, 그리고 그것들을 염색하는 염료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아울러 왕궁과 성전 같은 대규모의 건축 사업에 동원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품 제조업도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외에도 재단사, 철공업자, 도기 제조업자, 향료업자 등 이 시대에는 많은 수공업자들이 출현하여 수공업을 발전시켰는데, 당시에는 의사도 수공업자 그룹에 속했다.  한편 신약 시대의 대부분의 수공업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당시 예루살렘 내에는 수공 업자들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상가는 직업별로 구분되어 조합 형태(guild)를 취하기도 했다.  아울러 넓은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의 출현으로 인해 토지 경작지를 상실한 많은 농부들의 도시에로의 이주(移住)는 수공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에 당연히 수공업이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탈무드(T릴mud)에 '자기 자식에게 수공업을 배워주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강도질을 가르치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기록될 정도였다.  

 

3) 상업의 발달

팔레스틴 지역 내의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의 부족과 아울러 수공업의 발달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해외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더욱이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로서는 당시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통해 그들의 욕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지중해 전 지역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는 거상 (巨商)들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예수의 비유 가운데 달란트 비유는 바로 이들을 배경으로 주어진 것으로 추측된다(마 25 : 14-30). 이와 함께 헤롯 가문에 의해 주도된 대규모의 건축 사업은 외국 으로부터의 많은 건축 자재의 수입을 증가시켰고 또 반대로 그 무역로를 통해 팔레스틴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료가 수출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팔레스틴 지역의 무역을 담당한 중요한 곳으로는 가이사랴와 가버나움, 여리고 등이 있었는데, 가이사랴는 지중해를 본거지로 한 무역 항구였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동편의48 신약 총론

데가볼리 지역과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담당한 무역 항구였으며, 지리적으로 이 두 항구를 예루살렘과 연결시키는 곳이 바로 여리고였다. 로마 제국이 이 세 곳에 세관을 두고 군대를 주둔시킨 까닭도 이 지역들의 경제적, 지리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상업 활동은 또한 상인들의 돈을 노리는 산적들과 해적들의 출현을 야기 시켰는데, 특히 지형이 험하고 경비가 허술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연결하는 길목에는 산적들의 활동이 빈번 했다. 따라서 당시 로마 총독들과 헤롯 가문의 분봉왕들은 상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산적과 해적들의 소탕에 많은 신경을 썼다.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 이 다(눅 10 : 30-37) .

 

사회 계층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 진행된 A.D.1세기 무렵은 로마의 제정 초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로마 제국 전체는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혁을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회 구조는 전통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이에 로마 제국의 사회 계층과 유대의 사회 계충을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제국 전체의 사회 계층 

신약 성경 시대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帝政) 사회로 변하는 전환기에 있었다. 과거 원로원 (元老院)을 주축으로 하는 옛 귀족 사회가 급격히 쇠퇴하고 경제적으로 큰 부를 축적한 자들이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상승되었다.  로마 제국(the Roman Empire)의 사회 계층 구조는 대개 피라밋 형태를 이루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러한 사회 계층 구조 형태가 완전히 바꿔지는 않았다. 즉 피라밋 맨 꼭대기에는 원로원을 주축으로 하는 귀족들이 있으며 그들 밑에는 기사 계급이 있고, 그 다음에는 평민(Plebian) 계급이 있었다. 여기서 평민은 공화정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집단을 가리킨다.  그리고 피라밋의 맨 밑바닥에 해당되는 하층 계급으로는 자유시민,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그리고 노예 가 있었다.  이러한 피라밋 형태의 사회 계층 꾸조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공화정에서 제정 사회로 넘 어가면서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기사 계급과 자유 시민의 계급이 급상승됨으로써 그 분포 상황 또는 계충간의 관계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심지어 노예 출신이었다가 풀려난 자유민들이나 자유시민들이 일부 해상 무역이나 상업 부분에서 기사 계급을 몰아내고 독차지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매우 격상시켰다. 따라서 로마 사회는 계충간의 구별은 뚜렷이 있었으나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계층 상승이 가능한 개방 사회(開放社會)였다고 볼 수 있다.  

 

2. 유대지방의 사회 계층 

유대의 사회 계층 구조도 로마 제국의 사회 계층 구조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느 정도 계충간의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향이 강한 유대의 사회 계층 구조는 일단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민족 사회 구성원이 본질적으로는 평등하다는 원칙이 그 어느 사회보다 강했으나 그 역시 실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세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신약 성경을 바탕으로 신약 시대의 유대의 사회 계층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류 계급과 평민 계급 그리고 하층 계급이다.  

①상류 계급-상류 계급에는 전통적으로 유대 사회에서 세습되어온 귀족과 제사장 가문, 서기관과 랄비 같은 율법 학자들이 포함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바로 유대 사회의 대표적인 상류층이다.

그리고 로마의 경제 제도의 零향을 받아 팔레스틴 지역에서도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가 나타나는데, 이들 또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후에 유대 사회의 상류층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는 이들을 배경으로 주어진 것이 몇몇 있다(눅 20. 9-16).

② 평민 계급-이들은 흔히 유대인들로서 팔레스틴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농부, 일정한 기술을 갖고 있는 기능인,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7,1다. 아울러 당시 혜롯 가문에 의해 실시된 대규모의 건축 사업과 농장일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이 계급에 속한다.  

③하충 계급-이 사람들은 흔히 유대 사회에서 '죄인'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멸시를 받던 계층이다 (막 2 : 16, 17). 창기와 세리 그리고 순수한 혈통을 강조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사생자'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 두로인, 시돈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아울러 노예들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와 같이 노예 제도를 널리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유대 사회에서 세리를 '죄인'이라 부르며, 멸시한 이유는 그들이 정복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한다는 민족적 적대 감정 때문이었다.          

 

 

               

                                                                       

종교적 배경

신약 시대의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지중해의 패자(霜者)로서 결국 신약 성경 시대의 국제 사회의 배경을 이룬 로마 제국 전체의 종교 문화적 배경과 신약 성경 대부분의 직접적 배경이 되고 있는 팔레스틴 지역 유대인들의 당시 종교였던 유대교가 곧 그것이다.  

 

1. 로마 제국의 헬레니즘 종교 문화 

로마 제국은 본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광대한 지역이 강력한 로마 황제에 의해 통합된 것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제국이 자신들 이전의 제국으로서 보다 높은 문화를 구가했던 헬라 제국의 문화를 답습하여 소위 헬리니즘 문화를 국제 사회에 유포시켜 이것이 제국 문화의 근간이 되었으나 동시에 각 지역은 고유한 전통 문화도 상당히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 문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전제하고 각 지역 종교 문화는 제외하고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 제국의 종교로서 결국 제국 전체의 국제적 종교 문화였던 소위 헬레니즘의 전반적인 종교 문화만 개략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 제국 헬레니즘 종교 문화의 사상적 특징 

① 인본주의-절대 초월자, 또는 절대 유일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서의 신(神)의 개념이 없었다.  신들도 인간처럼 우연히 형성되고 운명에 의해 제한받는 상대적 우월자로만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들의 인식 및 가치 기준도 인간과 동일하다고 생각되었다.  

②범신론 및 다신론-자존하는 자연 그 자체가 곧 신으로서 신적 속성이 전우주에 편재하고 있다는 범 신론과 특이 한 자연 현상과 사물을 모두 신격 화하여 수많은 신들이 흔재 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신론적 사고가 팽 배 했다.  

③ 흔합주의와 관용주의-절대 유일의 신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각 민족이 섬기는 모든 신을 서로 거부없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신을 한 체제 안에 혼합시켜 가는 양상을 보였다.  ④ 현실 기복주의-세계 역사를 볼 때에 전반적으로 사후 또는 초월세계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했던 종교 문화를 가진 시대의 하나가 바로 이 헬레니즘 시대였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는 단지 현실 생활의 길흥을 예견하고 조정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50 신약 총론

 

2) 로마 제국 헬레니즘 종교의 주요 유형

 

①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의거한 만신 숭배-고대 헬라와 로마의 평민들의 신앙은 세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히 그러했듯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는 자연 만물을 신격화하여 만든, 소위 정령숭배 (animism)였다. 제우스, 곧 로마식의 쥬피터와 혜라 곧 로마식의 쥬노를 위시한 12신을 주축으로 한 이 만신 숭배 사상은 전세계 문화에서 가장 화려하고 풍부한, 심지어는 현재까지도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위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근거한 것이었다. 신들도 인간에 비해 우월한 능력은 가졌으나, 성욕과 명예욕 등 인간과 똑같은 회노애락과 운명의 제한을 가졌다고 보는 이런 종교 사상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서 이미 단순한 신화요 조잡한 사상으로 천시되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적어도 A.D.1세기 말엽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이 신화에 포함된 신들중에서 한 신을 자신들 지방의 수호신으로 삼는 풍습에 의해 이는 민간에 깊숙이 자리잡았다(행 19 : 27, 35) .

② 황제 숭배-인본주의적 다신론에 젖어있던 헬리니즘 문화권 사람들은 이미 로마 제국이 본격 적으로 황제 숭배를 조장하기 이전에도 여러 영웅들을 신격 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이 제정(帝政) 체제로 굳어진 이후 줄리어스 시이저 때부터 통치 기반 안정을 목적으로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해가며 황제 숭배 사상을 조장하자 큰 무리없이 일반인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은 물론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로마 제국의 초대 교회에 대한 대박해가 야기되었다. 이는 특히 도미티안(DomitianusA.D.81-96년) 황제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③ 밀의 종교-이 는 각종 주술과 점술 특히 신비 체 험을 조장하는 특이 한 제사의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료시킨 종교들로서 비체계적, 비공개적인 종교들이었다. 이 밀의 종교들은 당시 헬레니즘의 전반적 종교 사상이 현실적, 집단적이었음에 반하여 개인적, 초월적 특징을 강력히 가졌던 종교로서 현실 도피적, 열광주의적 종교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큰 호웅을 얻었다. 로마 시대의 밀의 종교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별다른 구분 기준을 세을 수 없으나 대략 이집트계 및 페르시아계로 나눌 수 있었 다.  ④종교적 철학 또는 철학적 종교들-실로 지식과 신념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던 이 시대에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야말로 본질은 철학이되 다만 종교성을 강하게 가진 것에 불과한 종교적 철학인지 아니면 철학적 사변이 풍부하지만 그보다는 엄연히 종교 사상인 철학적 종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종교 사상 또는 종교 .집단이 있었다. 편의대로 대략 구분하자면 이데아와 현상세계를 구분한 플 라토니즘(Plutonism), 평정과 우애에 의한 마음의 쾌락을 추구한 에피큐리아니즘(Epicurianism)또는 냉소주의 (Cynicism)와 회 의주의 (Scepticism) 등이 전자에 속하고 초대 교회 에 주요 이 단으로 큰 영 향을 끼친 영지주의(Gnosticism)와 범신론적 숙명과 이성을 강조한 스토아 사상(Stoicism)이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2. 유대교(the Judasim)의 이해 

신약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시기 또는 기록되던 시기인 대략 B.C.4-A.D.100년까지의 팔레스틴에서 신 ·구약 성경을 먼저 받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유대교의 영향이 매우 결정 적 이 었다.  단적으로 유대교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기독교의 전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이후에 비로소 창시된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신 ·구약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태초에서 종말까지 연속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 믿는 정통 신앙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유대 교는 대 략 바벨론 포수(Babylon Captirity) 이 후부터 선민 이 스라엘 이 신 약으로 성 취 확장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51

정통 구약 신앙에서 이탈하여 구약 성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으로 곡해하여 만든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간에 유대교는 신약 성경 시대 당시 체제상으로는 신약 성경의 주요무대였던 팔레 스틴의 유일한 종교였고 그 사상면에서 도 구약 사상과 거 의 유사하면서 도 매 우 섬 세 한 오류에 서 시작하여 마침내 정통 구약 신앙을 심각히 훼손한 결과 기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확장된 구약의 본질을 망각한 것은 물론 주님이 주시는 신약도 거부하는 등 신약 성경 시대 내내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바 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유대교의 정의와 기원 특히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행 서론 특별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신약 성경 시대 유대교의 제반 상황에 대해서 간략히 일고해 보기도 한다.  

 

1) 유대교의 유래와 전개

구약 시대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왕국마저 멸망하고 그에 따라 많은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B.C.S86년), 유대인들에게는 두 갈래의 종교적 선택의 기로가 놓여져 있었다. 즉 그것은 비록 지금까지 그들이 잘 지키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여호와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면 유대 민족의 고유한 생할 양식을 저버리고 이민족의 종교와 문화 속에 흡수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때에 유대인들은 전자의 입장에 서서 유대 민족으로서 그들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흩어진 곳에서 유대 공동체를 건설하여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즉 그들은 흩어져 정착하는 곳마다 공동체를 만들며 회당(會堂)을 세우고 모세 율법 교육과 아올러 여호와에 대한 예배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이 유대교의 초기 형태이다.  한편 포로 시대 이후 자기들의 고국으로 귀환하게 된 유대인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과 동시에 율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에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과거 제사장직의 회복과 함께 율법을 해석하고 일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 등 유대교의 중요한 종교 지도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교 신학 사상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비로소 구약 정통신앙과 유대교가 뚜렷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B.C.2세기 중반, 즉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로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유일신 사상(唯一神思想)과 유대 민족 중심의 구원관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종교관이 일단 확립 되 었다.  그후 유대교 내에서도 신학적 견해 차이와 유대인들의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의 차이가 맞물려 미래에서의 개인적 구원을 내세우는 분파와 현실 상태에서 유대인의 집단적 구원을 강조하는 분파간의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사두개인(thesadducees)과 바리새인들 (the Pharisees)의 갈등인데, 대제사장이나 제사장 등 중요한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 하여 많은 명예와 아울러 성전 제사에 따른 여러 가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던 사두개인들은 현실 사회에서의 정치적 해방과 독립을 통한 유대인의 집단적, 현세적 구원을 강조했다. 이와 달리 비록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긴 했지만 단순한 율법학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또한 전수하던 바리새인들은 현세의 권력과 야 합하며 그에 따른 이익을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의 구원관은 유대교를 타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고 오로지 율법 준수를 통한 내세(來世)의 개인적 구원을 주장했다. 특히 하조몬 왕조가 유대의 대제사장직을 겸임하던 시대에 바리 새인들 중에는 유대교의 세속화(世俗化)를 매우 염려하던 극단 '적인 무리들이 생겨났다. 즉 그들은 온전한 율법 생활을 위해서는 현실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사막이나 광야로 나가 오로지 율법적 생활에만 전념하는 극단적이고 금욕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들이 바로 에쎄네파(Essenes)이다. 

 

 2)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의 유대교

 

① 대제사장 제도

신약 시대 대제사장 제도의 실행 형편을 보면 구약 시대에 지켜지던 원칙들이 철저히 무너지고

정치적 권력과 결탁되어 극도의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 대제사장직은 종신직(努身職)이었고

반드시 사독 가문에서 그 임무를 맡아야 했다(대상 24'3, 6).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헤롯 가문에

의한 유대 통치가 시작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대제사장의 지위가 유대 사회에 전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헤롯 대왕은 대제사장의 권위를 축소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을 임명할 때,

자신의 통치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재력가(財力家)를 임명했다.

한편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된 총독 시대에는 그나마 명목상

종신직이었던 대제사장직은 대제사장 임명을 통해서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는 로마 총독들의

판단 아래 임기제(任期制)로 바뀌었다. 더욱이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최고 행정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산혜드린 공회의 의장이 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큰

권세를 얻는 셈이 되었다.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간에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서로 많은 뇌물을 바치는 등 그 경쟁이 치열했다.

한편 총독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대제사장이 된 사람은 그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에서 온갖 타락 행위가 자행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상인들로부터 세를 받고 성전

안에서 장사를 허용한 것이다(마 21 : 12-17 ;막 11 : 11-19).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던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들으신 것도 상인들과 대제사장과 밀약된 이익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향하여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막 11 : 15-17). 결국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에 오른 사람이기에 더이상 백성을

성결케 하며, 율법의 규례와 유대교의 전통을 보호하는 유대교의 수장(首長)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에서 단순히 정치적인 술수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속인(俗人)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약 성경에는 '대제사장들'(마 27:6;막 14 : 43 ;눅 23:4;요 19 : 6)이란 복수 명칭이

쓰였는데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대

제사장들까지도 명목상 계속해서 대제사장으로 일컫는 경우이거나 둘째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과 그를 보좌하는 제사장들을 총칭하여 가리키는 것이다.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53

한편 신약 성경의 시대의 대제사장직은 친로마 정책을 표방하고 또한 총독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지불한 안나스와 그의 집안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다. 이에 신약 성경 시대의 역대 대제사장들에 관하여는 앞 페이지의 도표를 참조하라.

 

② 성전 제사 제도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는 활발하게 행해졌다. 그것은 당시 외적인 율법 준수를 강조하던 종교 풍습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나 일반 민중들의 종교적 열정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한편 이러한 종교적 열정이 뜨거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편으로 헤롯은 포로 시대 이후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헐고 과거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다시금 건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다(B.C.20년). 그리고 10년 만에 성전의 기초 골격을 완성했다. 물론 성전이 완공된 것은 A.D.秘년이지만 예수 당시에 이미 이 성 전에서 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헤롯의 성전 건축에 의해 일부 경건파 유대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전보다 성전 제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당시 성전에서는 매일 대제사장이 거행하는 두 번의 상번제(常偏祭)와 아울러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나팔절과 같은 절기들이 지켜졌다. 특히 이러한 절기들이 지켜질 때에는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성끼 순례로 인해 솔로몬 시대 보다 더욱 큰 규모로 성전 제사가 행 해 졌다.  한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정치적 결탁과 매관 매직에 의해 성전 제의가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엣세네파에 속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전 제의를 거부하고 올바른 제의 양식의 회복과 율법 생활의 준수를 위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사해 지역에 다수 존재했던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가 대표적이다.  

 

3) 지역별 유대교 중심지인 회당(Synagogue)의 이해 

B.C.SC경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여 2000년이 훨씬 지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와 유대인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회당(會垈)은 이미 예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형 성하고 있는 곳이면 팔레스틴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디든지 건축되어 있었다. 이 회당은 각 지방별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였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성전이 복구된 후에도 거기서의 제사가 심각히 오염된 상황이 대부분이었던 바 바벨론 포수 이후 대부분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유대교도 실상 이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회당은 단일 중앙 성소인 성전의 이념은 전혀 해치지 않았다. 성전은 구약 율법에 따라 동물 희생제사가 사제들에 의하여 거행될 수 있는 유일한 성소로서 이스라엘 전민족의 공동 구심 점이었던 반면, 회당은 각 지역의 일상 예배와 교윽을 위한 유대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그 조화를 잘 이루었다. 이는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성전이 무너지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 가운데 흩어져 있을 때에 그들 나름의 여호와신앙을 고수하고 민족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회당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나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과 초대 교회의 형성 및 복음의 세계적 전파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교두보 역할을 했다. 또한 회당에서 드려지는 예배 의식은 후에 기독교 예배 의식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회당은 비록 유대교의 오류로 인해 기독교가 소유한 참 진리 를 소유하지 못하였으나 순수한 종교 형 식 의 입 장에 서 만 볼 때 에 는 역사적 으로 기 독교 교회(Church)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다.

 

① 회당의 명칭과 기원 

'회당'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고게'(777777γ? )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본래는 종교적, 세속적 목적을 불문하고 함께 모인 사람들의 모임, 또는 총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서 의미가 확대되어 유대인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 또는 건물을 지칭하게 되었다.54 신약 층론

이와 유사한 의미의 헬라어로서 '에플레시아'가 있는데, 이 단어는 주로 헬라인들이 사용했으며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 '쉬나고게'만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그 용어가 구약 율법의 상징인 '시내산'

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회당의 선구적 형태가 나타난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이지만 신약 시대와 같은 회당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애굽의 톨레미(the班olemy) 왕조가 물레스틴 지역을 통치하게 된 B.C.3C경부터이다.

당시 유대인에게 유화 정책(零和政策)을 폈던 톨레미 왕조는 그들이 건설한 도시에 유대인을 이주

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비록

팔레스틴 지역을 벗어난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회당을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그들 고유의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회당의 수는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꾸준히 종가하였다. 랍비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 당시에 예루살렘에만도 48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팔

레스틴 지역 뿐만 아니라 애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와 지중해, 심자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널리 흩어져 있는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Diaspora) 지역의 회당의 수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엄청나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② 회당의 관리(조직)

회당은 본래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따라서 그 관리들도 그 회당이 위치한 마을의 어른들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대개 율법을 깊이 연구한

바리새인들은 람비(Rabbi)가 되었다. 이에 회당의 관리들과 그들의 역할을 도표로 정리하여 보았다.

 

③ 회당의 역할

회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안식일에 유대인의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 에서는 단지 예배만 드렸으며 회생 제사는 오직 성전(Temple)에서만 드렸다. 이는 회당이 유대인들의 단일 중앙 성소인 성전의 본질과 중요성을 전혀 위반하거나 약화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조화를 이루어 유대인들의 신앙 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나누어 수행했다.  한편 회당에서는 회생 제사가 거행되지 않으므로 구약 율법에 의하여 제사의 독점적 집전자로 규정된 제사장들이나 일반 레위인들이 상주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반 지파 출신의 종교 지도자들 곧 당시 람비라 불리워지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주도에 의해 유대교의 교육 장소로 사용되 었다. 즉 회당은 오늘날의 초등 교육 기관과 같이 어린이들에 대한 기초 교육과 젊은 청년들에 대한 미쉬나(Mishnah), 흑은 탈무드(Talmud) 교육의 장소로 또 성인들에 대해 토라(Tora)나 미쉬나를 기록한 율법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회당은 이러한 종교, 교육 기능 이외에도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활용되었다. 즉 회당은 각 지방에 산재한 유대인 공동체의 자치 기관으로서 민사, 형사, 종교상의 문제를 판결하는 일종의 법정 구실을 했을 뿐만 아니라(마 10 . 17 :눅 12 . 11), 일반 백성들의 집회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회당에서는 형벌도 집행되었는데 기독교의 집사격에 해당하는 회당의 찾잔(Hazzan)이 형벌의 정도에 따라 채찍질 했다(마 10'17 : 23 : 34 ;막 13'9). 또 혹자에 따르면 회당은 정치적 집회 장소나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관과 같은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당은 유대인들의 각종 사교집회 장소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④ 회당의 건축과 내부 양식 

유대교의 구전 전승을 기록한 탈무드(Talmud)를 보면 유대인들은 회당을 건축할 때 그 마을의 시장이 서는 네모난 광장 중심지에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방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대 문헌에 의하면 그 성음의 가장 높은 곳에 회당을 건축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예루살렘 중앙 성소를 향한 유대인들의 종교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회당의 형태는 주로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모세 회막의 형태를 본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식 건축 양식을 본딴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팔레스틴 지 역에서는 주로 후자의 형태를, 기타 해외의 디아스포라지역에서는주로 전자의 형태를 따랐다. 그것은 아마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굳이 성전의 형태를 따를 필요가 없었고 디아스포라 지역의 유대인들은 회당을 통해 성전이 지닌 신성함을 맛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회당 건물은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흑은 그 지역의 유대인들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형태와 크기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흘레스틴, 시리아, 로마 지역에서는 주로 바 실리카식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독일, 러시아 지역에서는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Romaneseque)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다른 건축물들과는 달리 유대인 회당의 건물 양식은 그렇게 첩게 변하거나 발전되지 않았다. 반면에 현대 서방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은 과거와는 달리 일반 다른 건 축물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들이 많다.  한편 회당 내부의 특징 중 하나는 남녀가 서로 분리될 수 있도록 자리를 따로 만들었으며 여자들은 주로 윗충에, 남자들은 아랫충에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서는 법궤가 놓이는 자리에 회당에서는 토라 두루마리 보관소를 설치한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외에 회당의 내부 양식에 대한 세부 사실은 다음 삽화를 참조하라. 한편 다음 삽화는 A.D.2세기 경의 것으로 추측되는 팔레스틴의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 유적지를 근거로 하여 만든 회당 모형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아마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 있던 회당의 형태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⑤ 회당의 예배

유대인들은 대개 월요일, 금요일, 그리고 매 안식일과 축제일

보면 안식일과 축제일에는 예배 절차를 다 빠짐없이 행하였

생략되는 부분도 있었다. 한편 안식일 오전에 행해지는 회당예배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쉐마낭독-사회자나 혹은 성가대석에서 '들으라 이스라엘 ! 이 라는 소리 와 함께 민 15 : 37-41,

o'7-71 11 - 13-21의 세 죽복문, 즉 쉐마를 낭독함으로써 예배가 시작된다.

㉡ 대표기도-회당장이 정한 기도의 선창자(Messenger)가 기도용 법복을 두르고 회중 앞에 나와

큰 소리로 기도문을 선창하면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기도문은 18개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개

첫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낭독한다.

 

에 예배를 드렸다. 그들의 예배 내용을

으나 다른 날의 예배는 상황에 따가

 

㉢토라 봉독과 해설-3년 주기로 1회씩 봉독할 수 있도록 모세 오경을 155개 항목(Sedarim)으로

구분한 것 중 한 항목을 랍비가 봉독하고 어려운 부분을해설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일을

맡기도 했다. 한편 토라 봉독 후에는 랍비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역사서나 선지서 가운데

한 구절을 읽고 거기에 적합한 설교를 할 수도있었다(눅 4 : 20-27;행 13 : 16-41). 이때 설교자는

회당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축복 기도-예배의 마지막 절차로서 대개 제사장이아론의 축복문인 민 6 : 24-26을 선포하나

제사장이 없을 때는 평신도가 하기도 한다.

4) 유대교 분파들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대교 분파들에는 바리새파(Pharisees), 사두개파(Sadducees), 엣세네파(Essenes), 열심당(Zealots)이 있다. 이러한 유대교 분파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B.C.2세기경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특정한 종파의 구분없이 다같이 유대교라는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마카비 가문의 시리아의 셀 류쿠스(Seleucus) 왕조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 민족을 독립시킨 뒤 마카비 가문 출신이 대제사장으로서 유대 민족의 최고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각 분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각 유대교 분파들은 신학적 견해 차이도 있지만 마카비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 이어 로마 식민 통치 시대를 거쳐 오면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유대교를 보호, 고수하려는 자들과 정치적인 이권을 추구하며 외부 세계에 동화하려는 자들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반목하던 유대교 분파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일심 단결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오직 구약의 전 인류를 위한 구속주 약속과 예언의 실체로서 이를 성취 확장하여 신약을 주고자 오신 예수께서 비록 그 정도와 일부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구약의 일부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곡해란 점에서는 같은 유대교 각 분파 모두가 공히 잘못되었음을 동시에 지적하였기 때 문이 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신학적 입장까지 달리했던 유대교 각 분파들을 이해함에 있어 절대 필요한 몇 가지 핵심 사항들을 도표로 정리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 흔히 서기관(Scribe)과 헤롯 당(Herodians)을 유대교 분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록 서기관들이 유대교의 제반 측면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결코 독립된 분파는 아니었다. 서기관은 율법 필사(筆寫) 등을 주로 하는 전문 직업 기능인을, 헤롯당은 당시의 지배자였던 헤롯과 정치적 이해 관계로 얽힌 자들을 통칭하는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서기관은 대개 바리새파 출신이었으나 원칙적으로는 엣세네 출신일 수도 있고 심지어 이들 당파와 별연관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이들 두 집단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서기관 . 물론 구약 왕정 시대에도 있었으나,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 율법의 필사 및 연구 전승을 전담하며 나아가 성전. 회당 또는 각종 공공 기관 및 시설 단체에 소속하여 공문서 등을 작성한 직업 기능인들을 통칭하는 직업명이다. 그들은 문자 매체 및 인쇄술이 미약했던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으며 높은 대우도 받았다. 또한 그 기능상 종교적 측면에서는 유대교 경전인 율법 등을 연구 전승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주로 각 회당 등에 속하여 랍비 또는 율법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산혜드린 공회, 성전, 로마 식민 정부 체제의 각종 기관에 속하여 일종의 행정 관료로서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원칙상 어떤 종교 분파에 전속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으나 대개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헤롯당 . 헤롯 대왕이 로마 정부를 대신하여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자가 되었을 때부터 그의 왕조가 무너지기까지, 즉 대략 묘.C.37-A.D.껄년까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모인 자들에 대한 통 칭이다. 헤롯은 본래 이방 이두매 출신으로서 민족적 폐쇄성이 강한 유대인 통치에 늘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유대의 메시야 사상을 늘 위험시 했었다. 따라서 그를 추종한 헤롯 왕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에 도전하는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고 탄압했다.  


  1. 동탄명성교회 앱을 아이폰, 아이패드 등 iOS 계열 휴대폰에서 사용하기

  2. 동탄명성교회 모바일 홈페이지 어플리케이션

  3. [지명] 시온산 성전산 감람산의 위치와 높이

  4. No Image 22Jan
    by 갈렙
    2018/01/22 by 갈렙
    Views 522 

    귀신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주관하는가

  5. No Image 21Jan
    by 갈렙
    2018/01/21 by 갈렙
    Views 1874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의 의미들(666과 144,000...)

  6. No Image 21Jan
    by 갈렙
    2018/01/21 by 갈렙
    Views 1145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이름_미가엘 가브리엘

  7. No Image 21Jan
    by 갈렙
    2018/01/21 by 갈렙
    Views 451 

    칼빈의 5대 교리 ( W. J. 시애튼)

  8. No Image 21Jan
    by 갈렙
    2018/01/21 by 갈렙
    Views 758 

    안식일 미쉬나(Shabbat 73a)에 실린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멜라코트(Melachot)

  9. No Image 21Jan
    by 갈렙
    2018/01/21 by 갈렙
    Views 4712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10. No Image 20Jan
    by 갈렙
    2018/01/20 by 갈렙
    Views 633 

    [참고] 베리칩이 666인 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11. No Image 16Jan
    by 갈렙
    2018/01/16 by 갈렙
    Views 595 

    [다큐멘터리] 바벨론제국(느부갓네살왕)은 어떤 제국이었을까?

  12. No Image 14Jan
    by 갈렙
    2018/01/14 by 갈렙
    Views 591 

    [언어] 원어성서연구원(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13. No Image 13Jan
    by 갈렙
    2018/01/13 by 갈렙
    Views 550 

    [언어] 헬라어 공부하기

  14. 신약성경에 나오는 “영원히(forever)”, “영원토록”, “세세토록”에 대한 헬라어에 대한 바른 해석

  15. No Image 08Jan
    by 갈렙
    2018/01/08 by 갈렙
    Views 738 

    계14:10에 나오는 "세세토록"(에이스 아이오나스 아이오논)의 의미

  16. "영원히", "영원토록", "세세토록"에 대한 헬라어원문 고찰

  17. 킹제임스성경의 번역과정과 그 실체

  18. No Image 31Dec
    by 갈렙
    2017/12/31 by 갈렙
    Views 2632 

    새번역 주기도문과 새번역 사도신경 해설

  19. No Image 31Dec
    by 갈렙
    2017/12/31 by 갈렙
    Views 1351 

    새번역 주기도문과 새번역 사도신경

  20. No Image 28Dec
    by 갈렙
    2017/12/28 by 갈렙
    Views 766 

    불교와 기독교의 인간론은 어떻게 다른가?

  21. 성경 속 예수 탄생: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6가지

  22. 선행은 왜 칭의의 열매여야 하는가?

Board Pagination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48 Next
/ 48
방문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