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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5대 교리( W. J. 시애튼)

 

서론

 

 

17세기에도 하나님의 섭리로 당시 복음에서 빗나간 흐름에 대처하고자 도르트 종교 회의에서 개혁가들의 계승자들이 체계화한 위대한 기독교 진리 5개조는 이보다 반세기 먼저 작고한 제네바 개혁가의 이름과 연계가 되어졌다.

칼빈주의라는 명칭은 처음엔 반대자들 편에서 사용한 선전 방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신앙 옹호론자들은 그것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게 좋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용어가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교리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일견 불신을 받아 잊혀져 버린 듯한 칼빈주의가 생명력과 복음적 능력을 갖고 다시 발흥한 시기가 여러 번 있어 왔다. 만일 그러한 일이 지금 생기고 있다면-그렇게 생각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한번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본 논문은 바로 그 가르침을 해설하려는 것인데 필자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는 C. H. 스펄전의 그것과 같다.

"우리는 흔히 칼빈주의로 알려진 5대 교리를 믿는다. 그러나 이 교리가 동료 크리스찬의 늑골을 찔러 댈 미늘창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를 빛나게 해주는 5대 등불로 여긴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 삼위 하나님의 영광스런 언약에서 솟구쳐 올라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위대한 교리를 설명해 주는 다섯 가지의 빛나는 발산물로 여긴다."

이야기의 시작은 1610년 화란에서 비롯된다. 화란 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가 죽자 바로 그의 교시는 제자들-알미니안파-에 의해 5대 교리로 구체화되었다. 이때까지를 보면 화란 교회는 유럽의 다른 주요 개신교회들과 공동으로 벨직 및 하이델베르그(Belgic and Heidelberg Confessions of Faith)에 찬동하고 있는데, 이 둘은 종교개혁의 교의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이 주장을 변경시키려 하여 리몬스트란스(Remonstrance)-즉 항의- 형식으로 5개 조항을 작성, 화란의회에 제출하였다.

 

 

알미니안주의의 5대 교리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이는 인간이 타락의 영향을 받긴 했어도 영적 선(善)을 전혀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고자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2. 조건적 선택.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에 응답하리라고 알고 계신-즉 예지하신- 각 개인들을 축복하신다는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로 또 본래의 타락한 상태에서-물론 알미니안주의 제 1교리에 의하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닌-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을 선택하셨다.

3.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믿을 때에 한해서이다.

4.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의 제한을 받는다.

이는 성령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하기 시작할 때 실제로 거역을 당할 수 있으며,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죄인이 자진해서 생명을 받겠다고 하지 않는한 성령은 이 생명을 줄 수 없을 것이다.

5. 은혜에서 떨어짐.

이는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물론 이 체계로 보면 논리적이고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인간이 구원에 이니시에티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도 그가 져야 마땅한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가 정부에 제출되자 1618년 도르트(Dort)에서 전국 교회 회의가 소집되어 알미니우스의 교시를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게 되었다. 도르트 종교 회의는 7개월에 걸쳐 154차나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국 알미니안의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에 해설된 것과 조화시킬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종교개혁 때 명백하게 개진되었고, 프랑스 신학자 요한 칼빈이 체계화한 주장을 재확인하면서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공식화하여 알미니안 체계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머리 문자만 따서 "TULIP"이라는 단어가 되는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T:전적 부패(즉 전적 무능력)

U:무조건적 선택

L:제한된 속죄(즉 특별한 구속)

I:불가항력적 부르심

P:성도의 견인

 

이상의 것은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인간은 에덴 동산의 타락이 전적 타락이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누구를 구원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구원할 자를 정해 놓았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해 주신 것은 오로지 그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면 성령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셔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구원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결과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될 것이며, 성도들은 견인하여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상이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음이 확실하고 또 "일찌기 성도들에게 전해진 믿음" 안에서 우리 조상들이 집요하게 간직해 온 것이긴 하지만 이제부터 그것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그 믿음을 우리는 진지하게 옹호하려는 것이다. 다음에 말한 스펄전의 언급이 진실한 것임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그런고로 내가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은 무슨 진기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교리도 아니다. 나는 "칼빈주의"라는 별명이 붙어 있지만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임이 확실한 저 강력한 옛 교리를 기쁜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1.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맨 처음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은 이 체계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는 어떤 것, 즉 구원받을 자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죄에 대해 불충분하고 관대한 견해를 갖게 되면 죄인 구원에 필요한 방법에 관해서도 불완전한 견해를 갖게 되기 쉽다. 만일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타락이 단지 부분적인 것에 그친다고 믿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일부는 사람에게 돌리고, 일부는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그것으로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라일(J. C. Ryle)의 말에는 상식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된다.

"잘못된 생각과 거짓된 교리치고 그 발단이 인간 본성의 타락에 대한 불충분한 견해에 기인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질병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면 치료에 대한 견해 역시 잘못되기 마련이다. 인간 본성의 타락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면 교정수단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고, 그 타락의 치료에 대한 견해 또한 잘못되기 마련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신학자들과 도르트회의에서 개혁주의 가르침을 예의 5대 교리로 공식화한 사람들은 성경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서 인간의 자연상태는 전적 부패의 상태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인간으로선 자신의 구원을 얻는다거나 무슨 기여를 하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하였다.

그렇지만 칼빈주의자들이 전적 부패를 말할 때, 그 의미는 모든 인간이 악할대로 악하다거나, 또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동료 인간에게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거나 또는 외면적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뜻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러면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했을 때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인격 전체가 타락의 영향을 받은 상태로서 죄는 능력 전체-의지, 이해, 애정, 기타 모든 것-에 미쳐 있다. 이상은 이제 언급하게 될 하나님의 말씀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도록 가르치는 바라고 우리는 믿는다.

 

다음은 전적 부패에 대한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확인시켜 주는 성경 구절들을 뽑아 놓은 것들이다.

성경은 인간은 본래가 죽은 자라는 점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성경은 인간이 속박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이하)

 

성경은 인간이 눈멀고 귀먹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1이하)

 

성경은 우리가 가르침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한다.

(1) 출생으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2) 실상으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느니라"(창6:5)

 

이상이 인간의 자연적 상태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한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가? 속박된 자가 스스로 놓여날 수 있는가? 눈먼 자가 스스로 보거나 귀먹은 자가 스스로 들을 수 있는가? 종이 스스로 속전을 낼 수 있는가? 가르침 받을 수 없는 자가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가? 날 때부터 죄인된 자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가?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고 욥은 물은 다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욥14:4)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예레미야는 묻는다. "할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렘13:23)

부패가 전체적인 것이고, 구원을 바라거나 얻을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 또한 전체적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죽음-영적 죽음-의 그림이다.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와 같은 존재들이다. 손과 발이 속박되어 있으며 부패가 우리를 붙들고 있다. 나사로의 죽은 시체 속에 생명의 빛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 속에 수용적(受容的)인 내적 불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육적으로 죽은 자는 물론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도-기적을 행하신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구원은 바로 그 본질상 주께 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전적 부패를 인간의 본질 상태에 대한 참된 성경적 진술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에 따라 도르트 회의에서 재검토한 다음 번 교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정될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은 1689년의 침례교 신앙고백서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을 여기서 편리하게 요약하여 인용해 보겠다. 그것은 또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및 주요 고백서들에서 거의 동일한 용어로 진술되어 있다.

"생명에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그의 영원 불변하신 목적 및 그 마음의 원한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도록 선택해 놓으셨도다. 이는 단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으로 그렇게 하시게 할만한 어떤 조건이나 이유가 되는 다른 어떤 것이 피조물에게 있어서가 아니다"(3장 5조.)이렇게 침례교 고백서는 말하고 있다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교리는 당연히 전적 부패 교리에 뒤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정말로 인간이 죽어 있고, 속박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모든 상태에 대한 치료책은 인간 자신 밖에(즉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앞 장에서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그 대답은 어쩔 수 없이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남녀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다면-요한 복음대로 "거듭난다"면- 그들 스스로는 이 일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사리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반대로 많은 남녀 사람들이 "살아나지" 못한다 할 경우엔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만일 아담의 타락이 전적 타락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면, 그래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때의 결론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맹목적인 철학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도출된, 성경에 입각한, 성경이 입증해 주는, 그리고 성경에 계시된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대양(大洋) 만큼이나 광대한 것이지만 그저 몇몇 주요 성경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망망대해를 헤쳐나갈 해도와 나침반으로 삼고자 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무조건적 선택의 이야기이다. 이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하다.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이방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우상 숭배 속에 내버려두신 것을 믿기 어려워하진 않는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의 "선민"으로 택하셨을까?

그 이유를 심사숙고 할 필요는 없다. 신명기 7장 7절에 분명한 대답이 있으니까 말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함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족법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장자에서 대신 동생 야곱을 택하셨을까?

로마서 9장11절로 13절을 보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교리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였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사렙다의 한 여자에게 뿐이었으며,…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눅4:25-27)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설교하신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그를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다 기술하려면 지면이 허락지 않지만, 그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느니라"(요15:16)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롬9:21)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롬9:1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엡1:4-5) 등등 이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바 "일종의 선택"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대충 말하면 이것은 로마서 8장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는 자들을 미리 아셨다. 그래서 그들을 영원한 생명에로 "선택하셨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해 낼 수 있다.

 

1. 하나님의 예지는 한 민족과 관련해서 말하는 것이지 사람이 행한 어떤 행동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미리 아신 자들…"로 되어 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 말은 즉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들이 행하는 어떤 행동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알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미리 아셨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가 하게 될 어떤 일-즉 그의 아들을 받아들일 줄 아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거룩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3. 하나님께서는 믿을 사람을 미리 아셨다고 말하는 것도 좋지 못하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서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우리가 믿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믿은 것이다. 즉 "영생을 주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4. 다시 반복하거니와 우리가 믿음을 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미리 아셨다. 그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한 단계 더 뒤로 물러가게 만들뿐이다.

우리가 발휘할 믿음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성경은 이렇게 해답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엡2:8)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쟁론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명령하신 바를 행하는 일이다.

"더욱 힘써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이 세 번째 교리는 5대 교리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중심적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알미니안파의 공격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주의의 진리를 변호했던 신학자들은 교리를 체계화할 때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노선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제 바로 구원의 핵심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누가 구원받을 자인가?" 라는 질문을 하였었다. 그 대답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인간은 자연 상태로서는 도저히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전적 부패 또는 전적 무능력이라는 전반에 걸치는 표제 밑에 두게 된 것이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게 그들을 구원하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선택이라는 것이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 하사…"

하지만 이 선택은 스펄젼이 말한 것처럼 "구원이 나아가야 할 집을 표시"만 해줄 뿐, 택함 받은 자의 죄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하고 완전하고 만족할 만한 속죄가 요구되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은 구주가 되실 뿐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자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 아래 고난 당하시고 구세주로서 이미 정해 놓으신 구원을 성취시킨 십자가상의 죽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심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모두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는 형벌을 담당하셨고,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즉 그리스도는 누구의 형벌을 대신 지셨으며, 또 누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다.

2.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3.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어떤 일정한 수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다.

첫 번째 견해는 "보편주의자들"의 주장인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으므로,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들로서는 아주 논리적인 억측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고, 구원하셨고, 속량하셨고,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다고 하면야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알미니안"의 주장인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잠재적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이 견해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긴 했어도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여" 그로 인해 구원받을 때까지는 효력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의 속죄관은 "칼빈주의" 주장인데 그리스도는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자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이미 자기의 아낌없는 선택적 사랑을 베풀어 놓으셨던 죄인들 중 어떤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유효하게 죽으셨다는 말이다. 성자 예수는 이들 택하신 자들의 빚을 갚아 주시고, 아버지의 공의에 맞도록 그들을 속량해 주시고, 자신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 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만을 위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는 불특정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는 어떤 특정한 수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칼빈주의자의 주장인데 일반적으로 제한된 속죄 또는 특별한 구속으로 불리운다. 그리스도는 특정한 수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즉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엡1:4),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그에게 주셨던 자들"(요17:16)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를 흘려주었다고 친히 말씀하셨던 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 마지막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이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한 민족으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엡5: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여기서 성령이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뜻하는 것인가? 세상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세상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이 되기 때문에 보편주의자들의 말이 옳다. 그럴 경우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이를 다시 풀어 말하면 아담의 자손은 모두 아담 안에서 죽는다. 왜냐하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기 때문에,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손은 모두-그가 위하여 자신을 주셨던 교회- 그 안에서 살아나게 된다는 뜻이다.

왜 이런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그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를 성취하실 때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53장의 예언에서 말한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한 제물로 그 영혼을 내 놓을 때, 그 영혼의 수고로 영적인 자녀를 낳아 그의 이름을 찬양케 하실 것이며, 그는 이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실 때 만족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성경에서는 세상을 언급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구속 문제에서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세상이란 말의 사용이 세상의 남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 세상이 그를 좇았느니라"라고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 표현은 모든 종류의 사람, 즉 관습적으로 말하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다 뜻하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하였느냐? 하지 않으셨냐?

만일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 하지 않고 오직 택한 자들만 구원하시려 하였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놀라운 성공이며 우리는 바로 믿는 것이 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이와 반대로 만일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크나큰 실패이다.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빚을 갚으셨다.

누구의 빚인가? 세상의 것인가? 아니면 택하신 자의 것인가?

확실히, 만일 한 사람이 구속자로 인해 속량을 받았다면 그가 깨뜨린 율법은 보증인이 그를 위해 일하신 것으로 인해서 만족해야 한다.

 

당신께서 나의 죄짐을 벗겨 주시고,

내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댓가 없이 전부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죄 값을 두 번씩이나 요구치 않으리라.

나의「보증인」이 피 흘리시고

다시 또 내가 피 흘리게 되는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빈주의 신앙 체계 중 이 네 번째 교리 역시 앞서 살핀 세 가지 항목의 논리적 결과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셨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위해 성취해 놓으신 그 구원의 은총에로 그들을 부르실 수단을 강구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 체계는 논리적으로 완전하긴 하나 단순한 논리 체계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확고히 선 순전히 성경적인 신앙 체계이다.

그런고로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교리는 도르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작성한 사람들이 궁리해 낸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계시인 것이다.

예컨대 로마서 8장 30절을 들 수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녀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쁘게 선택한 그들을 부르셨던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무슨 뜻인가?

교회에서, 옥외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이 다 그 부르심에 유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르심에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외적인 부르심이 있고,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말이다.

외적인 부르심은 "전도자의 말씀"으로 기술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부르심은 여러 가지 다른 심령에게서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이 죄인의 영혼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르심에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인 부르심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시는"이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남자나, 여자나, 젊은이를 그의 은혜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것은 꺾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표시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속에서 거듭거듭 입증되고 있는 예를 다음의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그에게 "올" 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선택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올 때는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아니 할 것이다.

2.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

여기서 우리 주님은 사람이 저들 스스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고 간단히 말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한다.

3.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인간은 외적인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응답하여 올 자는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이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6.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7.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벧전5:10)

 

이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효과적인 부르심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뛰어난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한 강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때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다. 전도자 바울이 루디아의 귀에 전한 것은 외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에 하신 말씀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내적인 부르심이었던 것이다.

알미니안 파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거역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그런 교리는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역하며 또 본질상 거역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런고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교리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본성보다 더 큰-우리의 거역보다 더 큰- 어떤 영향력이 우리의 영혼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역사하는 큰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인간의 의지

2. 마귀의 의지

3. 하나님의 의지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승리하게 될까?

만일 우리의 구원 문제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마귀의 의지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17세기의 퓨리탄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전차를 타고 정복하신다… 그는 마음의 교만을 꺾으시고, 왕성으로서 그에게 저항하던 의지를 일으켜서 그의 은혜에 굴복하게 하신다. 그는 돌 같이 굳은 마음이 피를 흘리게 하신다. 아, 얼마나 강력한 부르심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도덕적 설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심시킬 때 도덕적으로만 설득하고 다른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때 마귀가 그들을 멸망시킬 때에 하는 것만큼 많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신 것이다.

누구의 의지가 승리할 것인가? 우리의 의지? 그러면 그것은 과연 왕성으로서 주님께 저항하지 않는가?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려하지 않는다"

그러면 마귀의 의지인가? 그렇다면 그의 의지는 항상 우리의 의지보다 강할 것이 틀림없는데 도데체 누가 구원받을까?

그러나 이것이 복음이니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그의 복음의 전차를 타고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아니, 그는 정말로 승리하신다! 그는 사탄을 이기고 또한 하잘 것 없는 인간을 이기셔서 그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찬송케 하시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이제 마지막 항목인 성도의 견인 교리를 살펴본다.

다시금 요약을 위해 침례교 고백서를 언급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이 항목에 관해 다른 역사적인 신앙 고백서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택한 자의 고귀한 믿음을 받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 안에서 영접해 들였던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혀 또한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회개 밖에 있기 때문에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될지니라…"

 

이상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9이하)

 

또 다시 도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하고 있던 모든 것이 값없이 주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복음의 가르침을 체계적인 형식으로 작은 범위 속에 망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 보자.

만일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신 것은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 하셨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죄를 위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원을 그가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자들의 심령에 계시해 나타내시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방도를 준비하실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도저히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죽으시고,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고 하면 주께서는 또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을 견인하여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효과적인 부르심 뒤에 성도의 견인이 오게 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축복된 진리에 관한 구절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것이 믿는 자의 보증이니, 곧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하며, 그는 그리스도의 것들 안에서 견인하며, 그는 "더욱 힘써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유혹에 빠질 수 있으나 주께서는 "그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어 주실"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믿는 자는 그의 구원에 관한 일들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저것을 하게 된다.

저 비길데 없이 뛰어난 구절인 로마서 8장28-39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서 신적인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칼빈주의가 간명하게 진술하는 논리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 안에서 시작하는 구원은 결국 '그가 미리 아신'자들이 영원히 그들의 구주와 연합해 있다는 그의 좌절될 수 없는 목적이 성취됨으로 끝나야 한다.

 

결 론

개략적이긴 하지만 이상이 때로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인간 개조와는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이 명확히 체계화된 교리이다.

그러나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칼빈주의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무심코 일별만 해도 그러한 견해가 공연한 것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의 백성들이 이들 은혜의 교리를 마음 깊이 간직했던 곳에서 또 간직했을 때 가장 융성하였다.

구둣방을 박차고 나가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의 열심을 생각해 본다.

케리는 견실한 칼빈주의자였으며, 침례교 선교부를 창설하는데 기여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침례교도 안드류 풀러(Andrew Fuller)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인 뿐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인 믿음 깊은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다음 말을 깊이 생각해 보라.

"나는 그때 두 가지 욕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내 자신의 성화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불러모으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그는 일기에다 기록해 놓고 있다.

현대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 중 한 사람은 칼빈주의자 죠지 화잇필드(George Whitefield)였다. 하지만 그의 칼빈주의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결코 방해하지 못하였다.

'신적인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는 죄인을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권면하였다'는 것이 그에 대한 세평(世評)이었다.

칼빈주의는 그 말을 오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로버트 머레이 맥케인(Robert Murray M`Cheyne)의 복음이었고, 저 위대한 신앙 부흥 지도자요, 중국 선교사인 안드류 보나르와 윌리암 번즈의 복음이기도 하였다.

순교자들, 개혁자들, 그리스도의 지상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이 전하다가 죽은 복음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주는 구원은 은총의 복음이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을까? 루터, 칼빈, 틴테일, 라티머, 녹스, 위샤르트, 퍼킨즈, 루더포드, 번연, 오웬, 챠놐, 굳윈, 플라벨, 왓슨, 헨리, 왓츠, 에드워즈, 화잇필드, 뉴톤, 스펄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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