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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예루살렘 선언'이 중동에 피바람 몰고오는 이유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이스라엘 의회, 67년 '예루살렘은 영원한 수도' 결의
유엔, '이스라엘 국제법 위반, 회원국 외교관 철수해야'
팔레스타인 헌법서 '수도' 규정, 라말라를 임시수도로
트럼프 이스라엘 편들기로 국제사회에서 미국 신뢰 먹칠

3000년 전 솔로몬 성전 들어선 유대인의 심장부
이슬람에선 무함마드 '승천여행' 현장인 3대 성지
기독교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거룩한 도시
역사·종교·제국주의에 팔레스타인 현대사까지 얽혀

   

아! 예루살렘.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서 바라본 구시가지의 성전산 모습. 가운데 황금빛 돔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고, 왼쪽 작은 회색 돔은 '알 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의 지붕이다. 두 곳 다 이슬람의 성지다. 두 돔 사이 공간의 뒷쪽이 유대인의 성지인 '통곡의 벽'이다 . 성전산은 3000년 전 솔로몬 왕이 건립한 제1 성전과 이후 들어선 제2 성전이 있던 곳이다.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공식 선언하면서 중동 지역에 '피바람'을 부르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유일신을 따르는 '아브라함계 3대 종교'의 공동 성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복잡하게 얽힌 역사와 외교·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모두 수도로 주장하는 곳이지만 누구의 손도 함부로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한쪽 손만 들어줄 경우 다른 쪽의 원한과 증오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5년 제정된 '예루살렘 대사관법'에 따라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대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국익과 외교적 이해관계, 이스라엘과 아랍 간 균형외교, 분쟁 예방을 위해 이를 보류하는 문서에 6개월마다 반복적으로 서명해왔다.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대사관법'은 선언적인 법에 지나지 않게 됐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를 무시하고 그만 지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형국이 됐다. 서투른 행동인지, 알고도 일부러 하는 행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신뢰만 추락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령인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관할지인 동예루살렘으로 분할돼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다. 이스라엘은 1967년 국회에서 이 도시를 ‘분리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로 규정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 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의 국회(크네세트)와 최고법원, 총리 관저 등은 모두 예루살렘에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가운데 있는 예수 무덤을 보기 위해 방문객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 예루살렘은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도 성지다. [AP=뉴시스]

 
하지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1980년 8월 20일 모든 회원국의 외교관에게 예루살렘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한 안보리 결의안 제478호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텔아비브를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수도로 여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미국대사관 이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69년간 계속된 미국의 중동 외교정책의 기조를 뒤집는 대사건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을 중재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번 선언으로 중재 자격을 의심받는 것은 물론 오히려 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형국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현재 텔아비브에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내용의 선언에 서명한 뒤 이를 내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트럼프의 이 결정은 중동에 피바람을 몰고 올 전망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과 국제사회는 그동안 이스라엘 점령지 안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해 독립시키는 ‘2국가 체제’를 통해 중동 분쟁을 종식하자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트럼프의 주장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드는 것으로 ‘2국가 체제’를 통한 평화 추구는커녕 팔레스타인인들의 제3차 인티파다(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를 유발할 가능성만 키우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87년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를 총기로 살해한 유대인이 무죄판결을 받는 등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점령이 계속되자 들고 일어나 제1차 인티파다를 일으켰다. 2000년에는 평화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매파 아리엘 샤론 전 국방장관이 무장 호위병력을 데리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에 들어간 것이 도화선이 돼 제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에 반발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7일(현지시간)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임시 행정수도 라말라에서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이 지역에 시위 진압 병력을 수백 명 추가 배치했다. 트럼프의 선언은 제3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를 부를 가능성이 키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 모든 사건은 예루살렘의 역사와 관련 있다. 예루살렘 현대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대전이 한창인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의 아래 전후 오스만튀르크를 해체하고 중동을 분할해 차지하는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을 맺었다. 협정 이름은 협상을 맡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피코와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에서 따왔다. 1917년 11월 7일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로마노프 정부의 비밀문서를 폭로하면서 내용이 드러났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원래 남시리아 지역으로 불리던 시스요르단과 트란스요르단은 물론 이라크 남부 지중해 해안의 항구와 인근 해양의 지배권까지 얻었다. 프랑스는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확보했다. 이라크와 관련한 내용은 나중에 영국이 이라크 전체를 점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러시아에는 이스탄불, 터키 해협, 아르메니아 빌라예트를 넘기기로 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면서 무산됐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현대사

예루살렘을 둘러싼 현대사

남시리아 지역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불렀다. 1921~22년 식민지 장관을 지낸 윈스턴 처칠은 이 지역을 요르단 강을 경계로 트란스요르단과 시스요르단의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제국주의적 분할이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강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의 요르단 왕국에 해당한다. 영국은 1921년 이슬람 성지 메카의 유력가문인 하심가 출신의 압둘라(1882~1951)를 트란스요르단의 에미르(이슬람 군주)로 세웠다. 압둘라는 1차대전 당시 아랍인들이 영국군의 부추김을 받고 오스만에 대항해 봉기했던 아랍반란(1916~1918)에서 활약했다. 그는 특히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불리던 영국군의 토마스 에드워드 로런스(1888~1935)중령에게 협력했고 그 대가로 영국 점령 지역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트란스요르단 에미르국은 1946년 요르단 왕국으로 독립해 압둘라는 초대 국왕 압둘라 1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1951년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했다가 팔레스타인 급진파에게 암살당했다. 요르단은 그 뒤 그의 아들인 탈랄(1909~72, 재위 1951~52)과 손자 후세인(1935~99, 재위 1952~99), 증손 압둘라 2세(55세, 1999년 이후 현재까지 재위)로 이어져 왔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1921~22년 식민지 장관을 지내면서 점령지인 팔레스타인을 시스요르단과 트란스요르단으로 분할했다. [중앙포토]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1921~22년 식민지 장관을 지내면서 점령지인 팔레스타인을 시스요르단과 트란스요르단으로 분할했다. [중앙포토]

 
시스요르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남북으로 흐르는 요르단강을 경계로 강 서쪽으로 해안까지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와 팔레스타인 자지치역(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해당한다. 영국은 지역을 시스요르단 지역도 둘로 분할해 유대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를 나란히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미 영국은 1차대전 중인 1917년 11월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의 저명한 유대인 부호 리오넬 월터 로드쉴드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들이 전쟁에 협조하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이른바 ‘밸푸어 선언(1917)이다.  

2000년 인티파다 당시 한 팔레스타인 청소년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군의 메르카바 전차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돌을 던지고 있다. [중앙포토]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리해서 각각 독립시키는 내용의 결의안 제181호를 내놨다. 아랍인 지역, 유대인 지역과는 별개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은 유엔이 관할하는 공동 구역으로 삼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역에 유대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주민과 아랍국가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분쇄하려고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인근 이집트·시리아·요르단·레바논은 물론 이라크·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수단·예멘 등 이슬람권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1949년 3월까지 계속된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다.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스라엘-아랍전쟁’ ‘제1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린다. 신생국 이스라엘의 국민은 자국을 포위한 아랍·이슬람권 국가들과 온몸으로 맞서며 독립을 지켜냈다. 이스라엘은 이를 독립전쟁으로 부르지만 팔레스타인은 ‘알 나크바’, 즉 ‘재앙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이스라엘 국기 너머로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성전산이 보인다. 오른쪽 황금 돔은 '바위의 돔'이고 왼쪽의 회색은 알아크사 모스크다. 둘 다 이슬람 성지다. [EPA=연합뉴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해 정전협정을 맺고 전투를 끝냈다. 이웃한 이집트와는 1949년 2월에, 레바논과는 3월에, 요르단과는 4월에, 시리아와는 6월에 각각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에 독립 국가를 세우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엔이 제시했던 영토에 상당수 점령지를 더하게 됐다. 다만 시스요르단,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차지했으며 가자 지구는 이집트가 통치하게 됐다. 이때 예루살렘의 분할이 시작됐다. 예루살렘 지역을 동서로 분할해 동예루살렘은 요르단 왕국이,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됐다. 영국군의 훈련으로 막강한 육상 전력을 보유했던 요르단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밀리지 않고 잘 버틴 덕분이었다.그 뒤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빼앗았다. 이집트로부터는 가자지구는 물론 원래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까지 점령했다. 그 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국교를 맺으면서 시나이 반도는 돌려줬다.  
1967년 6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츠하크 라빈, 모셰 다얀, 우지 나르키스 등 군 지휘부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다. 6일전쟁 승리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1967년 6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츠하크 라빈, 모셰 다얀, 우지 나르키스 등 군 지휘부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다. 6일전쟁 승리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팔레스타인은 1993년 이스라엘과 협상을 거쳐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지지구에 야세르 아라파트가 주도하는 자치정부를 세웠다. 2011년 유네스코 회원국이 됐으며 2012년 유엔에서 ‘표결권 없는 옵서버 국가’가 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라말라에 임시 행정수도를 두고 있다. 하지만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가자 지구는 강경파 하마스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하려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주권국가로서 독립시키고 안전을 보장한 다음에 팔레스타인의 수도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이 힘을 얻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넘어야 할 산이 한 둘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가 사위인 유대인 재러드 쿠슈너의 충고나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주장만 듣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대사관을 옮기겠다고 한 것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미국의 국익에 철저히 반하는 행동이다. 우선, 미국은 더 이상 중동평화협상 중재국으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힘들다. 어지간한 당근을 제공해도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이 걸린 예루살렘을 포기할 아랍·이슬람 지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국가 이미지는 중동은 물론 유럽과 동남아 지역에서 '유대인의 하수인' 수준으로 추락할 수 있다. 미국은 상당 기간 객관성이나 합리성, 진정성을 인정받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 소프트파워의 쇠퇴다. 이럴 경우 트럼프는 더욱 힘에 의존해 무리한 국제정책을 펼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미국의 국제적인 고립과 이미지 실추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가속도가 붙을 수도 있다.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서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지인 ‘통곡의 벽’을 방문해 유대인 전통모인 키파를 쓰고 돌벽을 마니고 있다. 트럼프의 통곡의 벽 방문은 미국 현역 대통령 가운데 처음이다. 아랍권에 오해를 부르고 중동 정세를 불안하게 할까봐 조심했다. 버락 오바마도 이곳을 찾았지만 대통령 취임 전 당선인 신분일 때였다. [AFP=연합뉴스]

 
더욱 큰 문제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역사적 가치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앙부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유서 깊은 도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으로는 ‘아브라함 종교’로 불리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3개의 유일신 종교에 '신성한 도시'라는 사실이다. 특히 전 세계 1600만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은 영원한 영혼의 고향이다. 다윗 왕이 기원전 1000년 무렵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한 뒤 예루살렘을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은 기원전 957년에 7년에 걸쳐 이 도시에 있는 ‘성전 산(Temple Mountain)’에 성전을 건설했다. 성전산은 헤브루어로 하르 하바이트, 즉 ‘하느님의 집(사원)이 있는 산’, 아랍어로는 하람 에쉬 샤리프, 즉 ‘고귀한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타종교에 관대했던 페르시아 점령 시절인 기원전 6세기에 지어져 헤로데 왕 시절인 기원전 20년에 보수된 예루살렘 제2 성전의 서쪽 벽이다. 제2 성전은 기원 70년 유대 반란을 진압한 로마군에 의해 파괴돼 서쪽 벽과 일부 돌더미만 남았다. 로마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입성까지 금지했다.

 
이 성전이 솔로몬의 제1성전이다. 바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거룩한 집’으로 부르는 곳이다. 성전 안에 모세의 십계명 석판을 보관했던 목상자인 언약궤(言約櫃)를 보관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며 출애급을 이룬 모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다. 그 당시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보관한 것이 언약궤다. 이를 보관한 솔로몬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 가장 신성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기원 70년 로마군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면서 예루살렘의 제2성전을 파괴한 역사를 그린 16세기 초 그림.

 
하지만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제1성전은 파괴됐다. 그 뒤 새로운 성전의 건축이 기원전 535년 시작돼 봉헌됐다(516년에). 당시 유대 지역은 페르시아(바사)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피정복민의 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대 군주인 키루스(고레스) 대왕은 예루살렘 제2 성전 건립을 허가했으며, 그의 후손인 다리우스(다리오) 대왕은 보수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제2성전의 흔적인 돌부스러기.

제2성전의 흔적인 돌부스러기.

그 뒤 이곳을 점령한 로마가 간접 지배를 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헤로데 1세(헤롯대왕)가 기원전 20년 무렵 성전을 보수하면서 ‘헤로데 성전’으로 불렸다. 하지만 기원후 70년 유대인들이 독립을 위해 일으킨 일련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인은 제2성전을 파괴했으며 유대인의 예루살렘 입성까지 금지했다. 제2성전은 서쪽 벽과 일부 돌더미만 남았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통곡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통곡의 벽’으로 불린다. 유대인들은 성전산에 기원전 967~기원전 586년에 서 있던 제1 성전기원전 515~기원 70년까지 서 있던 제2 성전에 이어 제3 성전이 메시아가 온 다음에 세워질 것으로 믿는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타종교에 관대했던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기원전 6세기에 지어져 기원전 20년 헤로데 왕 시절에 보수된 예루살렘 제2 성전의 서쪽 벽이다. 제2 성전은 기원 70년 유대 반란을 진압한 로마군에 의해 파괴돼 서쪽 벽과 일부 돌더미만 남았다. 로마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까지 금지했다.

그런데 이곳 성전산은 수니파 무슬림(이슬람 신자)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수니파 이슬람의 3대 성지다. 이슬람 창시자 예언자 무함마드(570년 무렵~632년)가 겪었다는 신비한 영적 체험기에 등장하는 승천장소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메카의 성스러운 모스크에서 예루살렘의 성전산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뒤 하늘나라로 승천해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만났다는 내용이다. 무슬림들은 이를 실제 세계와 영적 세계를 동시에 아우르는 내용으로 여긴다. 이슬람에서는 ‘알이스라 왈미라지(이스라와 미라지)’라고 부르는데 서구에서는 통상 ‘밤의 여행’으로 번역한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 17장 1절은 이를 “알라는 그의 종을 데리고 밤에 성스러운 예배당으로부터 우리가 정결하게 한 멀리 떨어진 예배당에까지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조짐을 눈으로 경배하도록 하여 주셨도다”라고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생전 발언과 행동,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묵인한 내용을 기록한 이슬람 경전인 ‘하디스’에는 이와 관련한 무함마드의 승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승천은 사후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생전에 다녀온 것을 가리킨다. 시기는 무함마드가 예언자로서 소명을 시작한 직후인 621년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전산에 자리 잡은 바위의 돔은 7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드 알말리크 시절에 처음 지은 이슬람 사원이다. [중앙포토]

‘이스라’는 메카에 살던 무함마드가 천마 부라크를 타고 순식간에 ‘가장 먼 모스크(아랍어로 알마스지드 아크사)’로 여행한 것을 가리킨다.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다른 예언자들의 기도를 인도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여기서 말한 ‘가장 먼 모스크’를 실제 세계의 예루살렘 성전산의 한 지점으로 여겨 나중에 이곳에 같은 이름의 알아크사 사원을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산에 있는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지키는 '알아크사 순교자 여단' 소속 팔레스타인 민병대원들이 지난 7일 마스크를 쓰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천사들에 의해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7개의 하늘나라에 다니며 7명의 예언자를 만났다. 이들 7명의 예언자는 인류의 조상 아담,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하다가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행한 세례자 요한,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으나 이집트 재상이 된 구약성서 속 인물 요셉, 노아의 조상으로 이슬람 예언자인 이드리스, 모세의 형으로 최초의 대사제장이 된 아론,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모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슬람에서도 예언자로 여긴다. 이슬람에는 무함마드가 일곱 번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만나 예배와 관련한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를 부인하는 이슬람 학자도 있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천마를 타고 순식간에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도착한 뒤 하늘로 승천했다는 장소에 들어선 알아크사 모스크. [위키피디아]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 손에 떨어진 것은 638년이다. 로마 제국 분열 이후 예루살렘은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614년 사산조 페르시아인의 손에 함락됐으며 비잔틴은 629년 예루살렘을 수복했다. 하지만 638년 새롭게 떠오르는 이슬람 세력에 넘어갔다. 그 뒤 십자군에 의해 일시 점령된 때를 제외하곤 줄곧 이슬람 세력이 지배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압달말리크 칼리프 때인 691년 성전산에 ‘바위의 돔(아랍어로 마스지드쿱밧알사크라)’라는 이슬람 사원을 지었다. 유대민족의 제2성전이 자리 잡았다가 기원 70년 로마가 파괴한 뒤로 주피터 신전이 서 있던 곳이다. 이슬람에서 마스지드는 학교가 딸린 이슬람 사원을 가리킨다. 돔형 지붕에 금박을 입혀 황금사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함마드의 승천 여행을 기록한 16세기 페르시아의 세밀화.이슬람에선 사람을 그리는 것을 꺼리지만 페르시아에선 전통화에다 일한국을 세운 몽골인들이 들고온 중국의 회화 문화를 더해 고유의 세밀화(미니어처)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림 속 일부 인물이 중국 회화에 나타나는 모습과 비슷한 이유다. [그림=위키피디아]

 
이슬람 세력은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바로 그 자리에 705년 알아크사 모스크를 처음 건설했다. 십자군 시대에 이곳을 점령한 십자군 군주들이 왕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지진으로 무너져 여러 차례 재건축됐으며 현재 건물은 1066년 들어섰다. 돔이 은색이라 은색 사원으로도 불린다. 이슬람 초기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헤지라(622년) 이후 첫 17개월 동안은 무슬림은 이곳을 향해 기도했다. 하지만 알라(하느님)가 무함마드를 통해  메카의 카바를 향해 기도하라는 계시를 내리면서 현재처럼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메디나에는 거대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유대인들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분노했다고 한다. 
 
이 두 사원을 포함한 성전산 전체는 이슬람 3대 성지다. 성전산은 형식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관할하는 동예루살렘에 속한다. 유서 깊은 구시가지가 동예루살렘에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런 곳에 산다는 것 자체로 자부심을 느낀다. 이스라엘에 의해 독립이 박탈되거나 미뤄진 상태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산, 그리고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를 지키는 일은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마지막 자존심이나 다름없다.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한 트럼프의 행동에 전 세계가 고개를 가로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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