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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광복과 교회의 재건(1945~1949)

(1) 교회의 재건 (2)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박해 ➀ 덕원수도원 사건(1949) (3) 남한교회의 재건 ➀ 남대문교회 김

 쎄이영 2018. 5. 6. 8:08
 
 
 

43. 광복과 교회의 재건(1945~1949)
 
1945년 8월15일, 한국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한반도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고 사람들은 일본의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광분하였지만 모든 것은 일시적인 감정뿐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반성없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서로가 물고 뜯는 피의 전쟁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가 북한지역을 강타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남한지역을 휘몰아치며 정치적 혼란기에서 한국은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의 연합전선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비롯하여 말레이시아, 미얀마를 점령하고 1941년 7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차지하였습니다. 12월,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령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감행하였습니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마닐라, 웨이크, 괌, 싱가포르, 홍콩, 보르네오, 뉴기니, 자바, 바타안, 코헤리도르를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독일, 일본, 이탈리아 3국동맹이 와해되고 이탈리아가 독일과 맞서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중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한 세계연합군은 독일과 일본이 완전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과 중국영토 환원에 관한 선언을 확인하고 1945년 2월, 미국이 마닐라를 탈환하였습니다. 3월, 일본영토를 공격한 미국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상륙하였고, 2개월후인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1945년 8월6일, 미국 공군은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재앙을 부르는 악의 병기 원자폭탄을 투하 하였습니다. 8월8일,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단행하여 20여일만에 동북만주와 북한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일본은 아마겟돈과 같은 가미가제(바람의 아들)식 자폭전쟁을 하며 마지막까지 승전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 일본천황이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이 순식간에 북한지역을 점령하며 38선을 긋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련군이 그려 놓은 38선을 경계로 남한지역은 미국군 하지 중장의 예하부대가 점령하는 신탁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1945년 8월26일,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지시로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을 앞세워 평남인민위원회를 조직, 5도지역에 각각의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후 조만식을 퇴각시킨후 김일성(김성주)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북한을 공산주의 지배 체제로 전환하였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또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은 1950년대 중동지역과 함께 아시아지역에서의 테스트 라인(Test-Line)이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좌편에 서고, 민주주의자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서서 치열한 우월적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 교회의 재건
 
혁신교단과 함께 서부연회를 박탈당한 감리교회는 서부연회 재건에 착수하며 송정근, 신석구, 배덕영, 이피득, 조윤승 목사등은 1946년 10월, 평양중앙교회에서 제1회 서부연회를 소집하였습니다. 남산현교회 송정근 목사를 연회장에, 원산중앙교회 이진구 목사를 부회장에, 평양 박구리교회 이피득 목사를 서기에 선출해 재건을 서둘렀습니다. 일제시대 목사직이 정직, 파면당한 교역자의 복원을 허락하였으며, 구(舊) 요한학교 6년 전과정을 졸업한 자는 신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함으로서 교역자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장로교는 1946년 9월4일,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굴욕적이고 치욕스러운 죄과를 통회하고 3일금식과 함께 통곡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개월의 근신기간을 정하여 평북 정주 옥호동 약수터에서 퇴수회를 하고, 신사참배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시녀 역할을 한 과거를 청산하려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생활에서 벗어난 성도들도 산정현교회에 회집하여 한국교회 재건을 기대하였습니다. 11월14일, 평북6개노회 교역자 200명이 참석한 “평북목사수양대회”(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반대운동에 헌신하였던 지난날을 회고하였고, 박형룡 박사가 교회재건 5원칙을 발표하였습니다.
 
➀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➁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➂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➃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➄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1938년, 27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의 주역이었던 홍택기 목사(총회장) 등 기성교회 목사들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 모두가 고생이었다는 점과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을 강조하며 5원칙에 대하여 반발하였습니다. 홍택기 목사를 비롯하여 신사참배에 동조하였던 목사들은 한치의 회개와 통회함이 없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다시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정치꾼들에 불과하였습니다. 요한웨슬리는 “우리는 사람의 잘못된 행실을 징계하지 않으면 않된다. 우리는 얼마동안 그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머물도록 해서는 않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8장17절에서 네 형제가 범죄하거든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증인을 세우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이방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북한 기독교인들은 지방정부를 수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5년 9월, 신의주 제1교회 윤하영 목사와 신의주 제2교회 한경직 목사가 평안북도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결성한 기독교 사회민주당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민주정부를 설립하여 사회개혁을 달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독교인 중심의 정치적 세력이 형성되자 소련군은 공산당원들과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사회민주당을 탄압하였습니다. 1945년 11월16일, 용암포에서 개최된 사회민주당 지부 조직대회에서 소련군은 공장직공들을 동원하여 대회장을 습격하고 간부들을 폭행하여 장로 1명이 사망하고 당 간부의 사택이 파괴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같은 공산당의 만행에 격분한 중고등학교 학생 5천여명이 가두시위와 함께 11월23일, 공산당 본부와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하자 공산당원들이 총기류를 발사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1946년 11월19일, 평양 감리교와 장로교가 주축이 된 기독교자유당이 창당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공산당의 갑작스런 검속으로 김화식, 윤창덕, 이피득 목사 등 40명이 긴급체포된 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기독교자유당사건은 서부연회의 존폐를 도래하였고 , 신석구, 현병찬 목사의 구명운동으로 다행히 송정근 목사 일행은 석방되어 서부연회는 개최가 가능하였습니다. 북한지역의 감리교 재건을 위해 성화신학교의 인준이 요구되었고 서부연회 직영으로 신학교가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부연회 신석구 연회장과 백하신, 김영철, 마경일 목사 등이 북한 비밀정보부에 연행되고 1948년 6월, 제3회 서부연회(남산현교회)와 1949년 7월9일, 제4회 서부연회(남산현교회)가 겨우 열리는 등 북한에서의 기독교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기독교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위험인자였고,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타도대상이었습니다. 즉, 무신론적 유물론과 유일론적 유신론 두 개의 원리가 한 곳에서 공존할 수 없는 양극단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사회주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1946년 9월,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 재분배와 함께 핵심산업이 국유화하였습니다.
 
(2)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박해
 
1946년 2월8일, 토지개혁을 공포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한 북한 공산당은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와 민족반역자, 5정보 이상의 지주소유토지, 성당, 사찰, 교회의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전면 몰수하였습니다. 종교토지 14,401정보 등 전체 1,000,325정보를 몰수한 북한 공산당은 부르조아 계급 타도라는 명분으로 35만명의 자유저항세력을 희생하였습니다. 1945년 10월12일, 북조선 주둔 소련25군 치스챠코프 사령관 성명서는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였습니다. 1946년 3월23일, 김일성장군 20개조 정강은 모든 인민의 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하였으며 1948년 9월8일, 북조선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지만 결국 모든 것은 회유책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 만세”는 소학교 1학년부터 정과로 암송이 필수적이었습니다. 3.1절기념예배가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나 김일성정권은 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기념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외숙인 강양욱 목사는 김일성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전국에서 수만명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별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인민위원회의 공식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2월26일, 공산당은 새벽시간 평양시내 박대선 목사와 60명의 행사위원들을 긴급 체포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3.1절 기념행사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000명이 회집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소련군과 북한군경비대가 이중으로 포위하며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그러나 20명의 적위대가 교회내부로 들어가 평양 창동교회 황은균 목사를 긴급 체포하고, 행사에 참석한 성도들과 함께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소련군은 시위대를 해산하며 연행을 중단하였습니다. 치밀한 작전은 밤에 일어났으며 황은균 목사와 김명길, 이춘생 목사 등 수십명의 성도들이 3.1운동 기념예배 강행을 이유로 체포해 갔습니다. 강양욱 목사의 배도에 격분한 반공청년학생 수십명이 3월13일, 자택을 습격하였지만 강양욱은 이미 도주한 후였고 장남과 장녀가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강양욱은 붉은 공산주의자로 변해 갔습니다. 강양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으로 김일성의 외숙이었습니다. 그는 1943년, 평양신학교 38회 졸업생으로 고정교회 담임으로 있었으나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1945년 10월, 김일성이 경쟁자인 현준혁과 그 세력을 제압하고 1인자로 부상하자 공산주의자로 사상전향하였습니다. 김일성은 강양욱을 이용해 1946년 11월28일, 북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하고 민족진영과 기독교진보주의 세력을 규합하였습니다. 북조선기독교연맹은 기독교의 박애적 원칙에 따라 인민의 애국렬과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한 건국사업에 협력하고, 민주조선 건국에 해독적 죄악과 항쟁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기독교의 발전을 위하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종국적으로 정통적인 기독교를 북한에서 완전 궤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6년 11월3일, 주일오전 11시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실시 계획을 발표하자 조선기독교연맹은 지지성명을 발표하는등 스스로도 정통기독교가 아님을 자인하였습니다. 공산당정권 창출의 기회로 삼으려는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하여 기독교는 매우 저항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기준으로 나뉘었던 한국교회는 공산당으로 인하여 다시 분열을 시작하였습니다. 공산당의 위협과 탄압속에서 한국교회는 정치적 어용단체인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며 생명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증경총회장 김익두 목사와 김응순 목사, 산동성선교사 박상순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여 이용당하는 모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전통적 보수주의 기반이 확고한 이북5도연합노희는 10월20일, 주일선거를 반대하는 공식성명을 인민위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이북5도연합노회는 김일성 정권이 주도하는 선거를 반대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의 출마 또한 반대하였습니다. 강양욱이 김일성의 사주를 받고 노회 임원들을 각개로 방문하여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김일성 정권은 선거를 강행하였습니다. 이에 평서노회는 주일성수를 엄격히 지킬 것을 성도들에게 지침하고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외에는 일절 금하되 11월3일 뿐만아니라 모든 주일의 당위성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교회지도자들은 평양신앙동지회의 이름으로 주일선거를 평일로 교체할 것을 수차례 진정하였으나 거절 당하였습니다. 김일성 정권은 11월3일, 주일, 예정대로 인민위원회 선거를 강행하였고 평서노회 72개 교회들은 주일선거에 대규모 불참하는 사태가 현실화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공산당원들은 연합회 소속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정치보위부로 체포해 고문을 가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가속화 하였습니다. 1946년, 김일성의 외조부 강양욱은 조선기독교연맹의 위원장에 박상순 목사를 추인하고 곽희정, 이웅, 신영철, 김익두, 김응순 목사를 연맹 확장에 활용하였습니다. 조선기독교연맹에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던 평양지역 이유택, 문경규, 장도신 목사와 평북 정주지역 최택규 목사, 선천지역 이OO 목사 등이 투옥되고 평양신학교 김인준 목사는 정치보위부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 김익두 목사가 조선기독교연맹에 관여하여 일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가입권유 등의 행적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임에는 분명하였습니다. 보수적 기독교인 평안도 지역교회는 공산당과 함께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공민증을 짐승의 표로 인식하며 공민증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있었습니다. 1950년 3월, 공산당 정권은 장로교 평양신학교와 감리교 성화신학교를 강제 통합하고 김인준 교장이 순교한 후 이성휘 교장까지 총살하는 등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습니다. 그후 800명의 신학생 가운데 좌익편향 사상적인 120명을 제외한 680명을 강제 퇴교시키는 등 신학교는 공산주의 열성분자들의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➀ 덕원수도원 사건(1949)
 
1949년 5월8일, 독일계 베네딕트수도원이 1909년, 한국에 설립한 “덕원수도원”은 원산의 여자수도원과 함께 북한 카돌릭교회의 영적 지주역할을 하였습니다. 독일인 신부 13명, 수도사 24명, 한국인 신부 4명, 한국인 신학생 100명이 공동체 생활중 김일성 정권이 범죄와 음모의 혐의를 적용하여 수도원을 전면 몰수하였습니다. 1948년 12월, 공산당은 덕원수도원 경리책임자 엄OO신부와 배OO수도사를 체포하였습니다. 1949년 5월8일, 덕원교구의 독일인 쟈우에로 주교, 덕원수도원장 독일인 홍 신부, 부원장 독일인 안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독일인 길 신부를 체포하였습니다. 5월10일, 노 신부와 8명의 독일인 신부, 수도사 22명, 김치호, 김종수, 김이식, 최병권 신부를 정치보위부에 투옥하였습니다. 남아있던 한국인 수도사 99명을 강제 퇴학 시키고 신학교와 수도원을 강제 몰수하였습니다. 덕원수도원을 접수한 공산당은 수도원의 성물을 훼손하고 수치스럽게 하였으며 성경을 찢어 종이로 사용하거나 불태워 버렸습니다. 공산당은 수도원이 반동적 폭동음모와 유인물 유포, 폭탄 은닉, 밀주제조를 하였다는 죄목을 걸어 몰수하였지만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강제노동과 고문 등으로 1년만에 15명이 순교하였고 남은 카톨릭 사제들도 순교자가 되거나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평양교구 주교 홍용호는 1949년 5월, 김일성 정권에 항의문을 전달하였으나 그 또한 행방불명되었습니다. 6월11일, 평양의 김필현, 최항준 신부, 12월6일, 박롱옥, 서운석, 이재호, 장두봉 신부가 체포되는 등 평양지역 모든 신부가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북한에 잔류하였던 카톨릭 사제들은 전원 체포되었고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순교하였거나 행방불명 됨으로서 사실상 북한에는 단 한명의 카톨릭 신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 직후 순교자가 되거나 행방불명된 기독교 목회자는 장로교 260명, 감리교 50명, 성결교와 침례교단 40명 등 350명에 달하였습니다. 장로 100여명이 순교하였고 여자전도사는 공산당원들에게 강제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하는 등 온갖 치욕적인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그 통계마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공존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최초의 유화정책은 종교단체를 향한 회유책이었을뿐 신앙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물사관에 집착한 공산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위협하는 독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48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식 수립되면서 기독교 탄압정책은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본격화 하였고, 6.25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잔존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말살해 버림으로서 북한 지역에는 단 한명의 진정한 기독교인과 카톨릭 교인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3) 남한교회의 재건
 
1945년 9월7일, 미국 태평양육군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5성장군)은 “조선민주주의에 고함”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여 남한지역의 미군정을 선언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이해 관계에 의한 남북한의 미소군정은 독립을 염원하는 약소국의 한계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친사회주의적 반기독교정책을 지향하는 소련군정의 북한과 친자유주의적 반공산주의와 친기독교정책을 지향하는 미국군정의 남한통치는 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도래하였습니다. 1945년 10월, 11명의 미국군정청 행정고문 가운데 3명의 한국인 목사와 3명의 한국 기독교지도자가 임명되었습니다. 12월, 인사행정처장에 정일형 목사가 선임되었고, 경무부장에 조병옥, 조선인쇄관리인에 류형기 목사, 1946년 2월14일,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의장에 이승만 장로가 선정되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즈가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고문으로 내정됨으로서 기독교인의 입각은 더욱더 강화 되었습니다.
 
북한지역 기독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해방전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남한지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선교회와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기독교 지도자와 기독 지성인들은 미군정의 적극적 협력자로서 남한 질서회복과 유지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신사참배자들과 반대자들, 그리고 친일주의자들과 반일주의자들에 대한 명확한 치리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이 미군정에 다시 참여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1945년 7월20일, 일제말기 창립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지도자들은 창립 15일만에 맞이한 해방에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탄압으로 보수주의 정통신앙인들이 대부분 와해되거나 박해를 받아 극심한 장애와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는 동안 기득권 세력은 교권장악을 서두르며 “조선기독교회”로 명칭 변경을 하였습니다. 9월8일, 새문안교회에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 김관식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김영주, 김춘배, 박용의, 함태영, 최거덕, 김종대, 송창근 목사와 감리교 김인영, 박연서, 심명섭, 변홍규, 이규갑, 박연서, 강태희, 김영섭, 방훈, 신공숙 목사 등이 남부대회 교단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후 감리교단의 불협화음으로 11월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 남부대회가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대회선거에서 김관식 대회장, 김영섭 부대회장, 김종대 서기, 정등운 부서기가 선출되었고, 강태희, 김영주, 장석영, 최거덕, 김춘배, 이규갑, 박용래, 이호빈, 유호준, 함태영, 신공숙, 이자익이 부장에 각각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선교사 내방 환영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가속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교파별로 별도의 교단재건 움직임이 본격화 하면서 1946년 5월2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남부대회를 끝으로 해체의 길로 나아 갔습니다.
 
신사참배반대로 인하여 투옥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재건은 경남노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기철, 최상림 목사가 순교한 후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 목사들이 출감하여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1945년 11월, 주남선 목사가 거창교회 담임으로 초빙되었고, 1946년 3월,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으로 월남한 한상동 목사가 재건을 서둘렀습니다. 최재화,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20명의 지도자들은 부산지역 교회 연합예배를 주관하고 신앙부흥운동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교회를 재건한 이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 보며 진정한 반성없는 교권주의자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들에 의해 해체되었던 장로교가 다시 재건의 발판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도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18일, 부산진교회에서 경남노회가 재건되어 11월3일, 제17회 노회를 개최하였고 주남선 목사가 노회장에 취임함으로서 남한지역에서는 해방후 최초의 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경남노회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소속으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에 대한 자숙기간을 설정하였습니다. 목사, 장로, 전도사는 일제히 교회를 사직할 것과 자숙기간이 종료된 후 교회는 교직자들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과 종교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할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새롭게 재건된 노회속에는 신사참배를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소속 교역자들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한 교역자들이 혼재된 가운데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청산절차없는 노회로 인하여 교회재건운동은 반쪽자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6년 6월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남부대회(장로교총회의 전신)에서 배은희 목사가 대회장에, 함태영 목사가 부대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남부총회는 총회헌법과 여자 장로직 문제에 대하여 남북통일때까지 개정을 보류한다는 것과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를 취소한다는 것,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결정하였지만 특별히 신사참배 부분이 명료하게 처리하거나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계승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통과한 것은 종래 기득권을 가진 신사참배자들의 교권장악 의도가 명백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47년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2회 남부대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동조한 1942년의 31회 총회를 계승하여 33회 총회로 개회할 것을 결의하면서 양측의 충돌은 돌이킬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남노회와 남부대회간에는 극심한 알력이 발생하였고 결국 함께 갈수 없는 교단의 분리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51인의 고려신학교 학생들은 총회에 조선신학교 신학사상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주도한 기득권세력이 해방후에 자숙은 커녕 총회를 다시 주도하는 세력이 됨으로서 일사각오정신으로 기독교 정신을 지켰던 사람들의 터전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사람들이 해방후에 설자리를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음모와 술수는 언제 어디서나 통과의례를 지니며 세습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정통성을 잃어버린 채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언제나처럼 자숙기간을 거쳤고, 충분히 통회하였으며 자신들의 죄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적어도 기득권유지와 자리에 연연해 하는 모습은 보이지 말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부와 권력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는데 급급하였고 그것은 세상의 이치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세습까지 할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감리교단은 비교적 신사참배에 대하여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이견이나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한출신만으로 구성하려던 남부대회와 달리 구 감리교단 복구자들은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후 동부, 서부, 중부 등 3개연회가 조직되었고 1946년 1월14일, 연합연회(서울정동교회)에서 감리교신학교의 복구를 가결하였으나 서울지역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복흥파 감리교단을 새롭게 결성하면서 감리교는 재건파와 복흥파로 분열되었습니다. 3년간의 분열체제는 복흥파 변홍규 목사가 재건파와 다시 연합을 합의함으로서 1949년, 김유순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 감리교회를 조직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43년 12월, 교단이 강제해산되었던 성결교회는 5만명의 성결인들에 의해 1945년 11월9일, 제1회 성결교 재흥총회가 개최되어 박현명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경성신학교를 서울신학교로 개명하여 교단직영신학교로 결정하였으며 교장에 이건 목사, 교수진에 박현명, 김유연, 김웅조, 최석모 목사를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서부교구(평안남북,황해도), 중부교구(경기,강원), 충호교구(충남북,전남북), 영남교구(경남북) 등 지역분할을 본래대로 환원하였습니다. 세례는 침례와 세례 두가지 모두를 인정하고, 교단명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습니다. 폐간되었던 활천을 복간하였고, 1947년 10월7일, 제2회 총회(경성신학교강당)에서는 1,000교회 신설 4개년계획을 확정하고, 총리제도를 총회장제도로 전환하였습니다. 성결교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이 교단의 핵심가치임을 재확인하고 신구약성경이 신앙의 표준이며 교회정치 제도의 규범이라고 명문화 하였습니다. 1942년, 재림신앙을 이유로 강제 해산되었던 대한기독교는 1946년 2월9일, 충남 부여 칠산교회에서 교단재건을 결의하고 9월 교단대화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재편하였습니다. 1947년, 경북지역교회가 대한기독교 명칭을 고집함으로서 동아기독교를 주장하는 교회들과 명칭 문제로 분열되었습니다. 동아기독교는 미국 남침례교회와의 밀접한 관련을 맺고 동아기독교에서 침례교회로 개명하였습니다. 1940년, 군인이미지를 이유로 조선구세단으로 강제 개편되었던 구세군은 1945년 10월18일, 구세군 본영과 지방군영을 재건한후 사관들과 지방관들이 황종율 정령을 서기관장으로 임명하여 조직정비와 전도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1946년 9월14일, 사관총회를 개최하여 구세군으로 환원하고 전통적인 구세군 정신과 이념계승을 재확인하였습니다. 로드 사령관이 내한하여 한국 사령관에 취임한 후 조직은 더욱더 활성화하였고 1947년, 구세군사관학교가 재개관하여 사관후보생 양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재림사상을 핵심교리로 하는 안식교 또한 1943년 12월27일, 강제 해산된후 해방을 맞이하며 교회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1945년 9월, 미군정 하지 중장은 미국정부에 선교사들의 귀환을 요청하였습니다. 1946년 8월, 감리교선교회 백커, 젠슨, 스나이더 선교사가 입국하였고, 뒤를 이어 플레처, 코엔, 램프, 아담스, 보켈, 로스, 블레어 등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습니다. 또한 의료선교사 윌슨, 린톤, 커밍, 하퍼 등 남장로교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감리교 한국선교부와 장로교 한국선교부를 각각 재건하였습니다. 캐나다연합선교회 프레이저, 스캇 선교사들도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계승하였으며, 구세군, 성공회, 침례회, 동양선교회, 안식교 소속 선교사들도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복원하였습니다. 해방후 남한지역의 선교권역에서 원활한 선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1947년 7월14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교파 선교사들이 연합선교협의회를 개최하고 교회재건에 상호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45년 11월17일, YMCA위원회를 소집하여 구자옥 총무가 취임한 후 1946년 3월, 김성실, 신의경, 홍은경 등이 YMCA연합회 재건에 노력하였고, 1947년, 조지 피취 YMCA국제위원회 위원이 파송되어 국제협력관계가 복원되었습니다. 1948년 4월, 대한기독학생전국연합회(KSCF)가 결성되어 학원선교사업이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1946년, 미군정이 대한성서공회의 복원을 지원함과 동시에 미국성서공회는 한글신약성경 54,321권을 지원하였고, 1948년, 영국성서공회는 5,170권을 각각 무상 지원하였습니다. 1948년 3월27일, 기독교서회 이사회는 남궁혁(목사) 이사장, 아펜젤러(여선교사) 부이사장를 선출하여 성경발간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합동찬송가(1949), 월간 기독교가정(1949), 어린이 잡지 새 벗(1952), 기독교대사전(1954) 등 기독교서회는 기독교서적 50여종을 출판하는 등 기독교서회 본연의 사업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일제시대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강제개편된 연희전문학교가 1945년 9월, 재산과 운영권을 환원하고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강제몰수되었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1947년, 본래대로 환원됨과 함께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46년 8월,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5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가 서울 숭실대학교로 승격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미군정이 선교사역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교육기반을 갖추려는 선교사와 기독교 단체의 움직임에 적극 동조한 것이었습니다.
 
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의 3백만부흥운동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300만부흥운동”을 전개하며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복음전파사역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회복하고 한국이 회복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구령사업을 통하여 한국의 체질개선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300만부흥운동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김치선목사는 4단계로 계획된 300만부흥운동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단계는 1945년 9월부터 1946년 3월까지로 전국 3,000교회가 1명씩 3,000부흥사원을 모집하여 3,000명 부흥회를 개최하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제히 전국부흥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2단계는 1946년 4월부터 10월까지로 1단계에서 달성한 3,000명이 자기 교회에서 10명씩 사원을 모집하여 30,000사원을 형성해 매일 새벽기도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3단계는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로 2단계에서 달성한 30,000사원이 10인씩 300,000사원을 모집하여 이를 소년단(16~20세), 청년단(21~30세), 장년단(31세~)으로 조직하여 30만 부흥대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4단계는 1947년 4월부터 10월까지 3단계에서 달성한 300,000사원이 10인씩 동지를 모집하여 3,000,000사원을 형성하여 전국 3백만 부흥대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개인전도, 특별집회, 라디오방송, 부흥음악단 파송, 부흥사 파송과 기관지 부흥 간행을 계획하였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세계적인 부흥사 밥 피얼스를 비롯하여 박재봉, 이성봉, 김인서, 배은희, 손양원 목사를 전도목사로 위임하여 300만구령운동에 전력하였습니다. 그후 대한신학교 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300만부흥운동결사대와 부흥대원들의 헌신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직후 전도대원들의 대부분이 순교하는 등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1910년, 백만인구령운동과 함께 3백만부흥운동이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김치선 목사의 꿈과 비전은 그로부터 불과 20년도 채 되기전에 300만명을 넘어서게 되고 오늘날 1천만성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꿈이 실패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➁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사회구원운동
 
한경직 목사는 1945년 10월, 윤하영과 함께 월남하여 영락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상혼으로 얼룩진 백성들에게 복음과 빵을 제공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월남후 미국 군정청 통역관과 함께 김재준, 송창근이 운영하는 조선신학교 교수직을 겸하였습니다. 목사로서 교회설립이 절실하였던 한경직은 1945년 11월 25일, 윤하영, 이재명 등 7명과 함께 이영근 집사가 경영하는 장안호텔에서 교회설립을 확정하였습니다. 12월2일, 서울 영락동 천리교 경성분소를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하여 백경보, 윤하영, 이재명, 정구환 등 27명이 “베다니전도교회”(영락교회의 전신)를 설립하였습니다. 베다니교회는 월남 피난민의 슬픔을 위로하고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갈곳없는 피난민들의 수용소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을 외면할수 없었던 베다니전도교회는 근처 대지에 천막 10동을 건립하고 574명의 교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철저한 반공사상, 절망적인 피난민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 현실을 직시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경직 목사의 탁월한 영적 감각은 1950년대 한국교회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영적 지도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영락교회는 1946년 2월, “베다니청년회”를 조직하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인철, 이창로, 김치복, 송성찬, 김규환, 정석준 등 청년남여 229명은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공산주의 반대운동에 앞장서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사상과 대척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9월, 박윤삼의 자문으로 “농아전도교회”를 설립하여 장애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준 최초의 사회적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알려진 소다의 후암동 가마쿠라 보육원을 인수한 한경직 목사는 빈곤계층의 고아들을 위해 “서울 보린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백영엽, 박학전, 이인식, 김성호, 김치복 등과 함께 “대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활용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구국운동”과 “십자군전도대”를 조직하여 사회정화운동에 이바지 하였고, 1946년 11월, 인전제1교회, 주천교회, 영등포대방교회, 인천 송도교회를 각각 설립하였습니다. 영락교회는 개척 1년만에 1,500명의 교회로 성장하였고 1947년 12월, 4,500명의 교회로 성장함으로서 한국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1948년 5월10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민의 힘으로 지도자를 선출하였습니다. 198명의 국회의원이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되었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습니다. 7월11일, 대한민국 헌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7월17일,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신헌법에 의해 7월20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지도자 선거에서 정동교회 “이승만” 장로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서 한국교회는 매우 큰 기대와 희망이 있었습니다.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2월, UN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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