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마태복음 27장 5부 - 골고다 언덕과 이삭 제사의 비밀
2020. 12. 21. 21:25
1. 골고다 언덕
1882년에 영국의 찰스 고든(Charles George Gordon) 제독은 처음으로 성묘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 장소가 아니라고 하며 새로운 장소를 제시했습니다. 고든 장군은 성경의 요한복음(19장 14절, 38-42절)에 근거해서 정원 무덤이 있는 언덕의 모습이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이곳이 골고다 언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찰스 고든 제독
그뿐 아니라 그는 또한 레위기 1:11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장사 지내진 곳으로 주장되는 장소는 성묘교회가 있는 성전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의 정원 무덤이 있는 지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의 성공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곳을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 장소이고 무덤이자 부활 장소로 지정했습니다.
골고다 언덕
레위기 1:11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모세 시절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잡을 곳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단의 북쪽에서 제물을 잡으라고 하시는지 또한 그곳이 여호와 앞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단 사방에 뿌리라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성경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행동은 분명히 특정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예수님을 그 가운데 또는 그 위에 대입하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성전이 예루살렘 거리와 함께 모두 파괴되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지만 많은 문서들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옛 예루살렘 성전은 정방향에서 시계 반대 방향 즉 북서북으로 약간 기울어져 건축되었습니다. 거의 성전이 위치한 모리아 산 능선이 형성된 방향과 비슷합니다. 제단에서 북서북 방향을 보면 골고다 언덕입니다. 이곳은 성전이 있었던 777미터 높이의 모리아 산의 정상입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인류의 속죄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 시대에 예수님께서 약 1,300여 년 후에 이곳에서 피를 흘리실 것을 예고하시며 율법에 새겨놓으셨습니다. 희생 제사와 연결되는 이 장소의 놀라운 사연은 수천 년의 시공을 건너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 피를 흘리고 사체를 태우는 제사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다음 날 종 두 명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해 3일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삭의 결박 사건이 일어날 즘에는 아브라함이 많은 실패와 의혹을 거치며 믿음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귀한 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두 말 안 하고 다음날 일찍 명령을 수행하러 떠나는 모습은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창세기 22:3).
브엘세바에서 현재의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이는 약 85Km로 3일 정도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3일 동안 걸어가면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간에 아브라함이 겪은 고통은 종종 예수님의 3일간의 죽음과 병행 비교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순간부터 삼일 후에 제단에 도착했을 때까지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죽은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3. 이삭의 결박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야기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삭의 결박(아카드)’이라는 제목으로 통용됩니다. 이 결박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예수님의 희생과 구별하게 해 줍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죽여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려 놓으실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는 외아들을 희생 제물을 바쳐야 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의 슬픔과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준다는 약속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외아들이 죽으면서 얻는 자신 아픔보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꼭 지키셔야 하시는 하나님의 문제로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꼭 지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이삭을 독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영의 자식과 육신의 자식으로 나누는 논리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명사인 ‘사랑’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든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에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메아리는 요한복음 3:16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 유명한 장면을 묘사한 거의 모든 그림에는 이삭이 초등학교 다니는 정도의 어린이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전승과 요세푸스 등에 의하면 이삭은 25-30세 정도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입니다. 늙은 할아버지가 장성한 아들의 손발을 강제로 묶을 수 없는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삭도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 제사는 이삭의 믿음 없이 진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힘없는 어린아이가 희생당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바람에 소중한 이삭의 믿음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4. 골고다 언덕의 비밀
아브라함과 이삭이 간 곳에 대한 논란도 많습니다. 이삭이 결박된 장소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창세기 22:2에 나오는 “모리아 땅에 있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한 산”이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재의 예루살렘 주변의 올리브 산과 시온 산 중간에 해발 600m에서부터 형성된 능선 (모리아 산) 밑자락에 종들을 대기시켰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래 지도와 같이 훗날 다윗의 성 즉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지가 되는 지역으로 더 올라갑니다. 당시에도 이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기에 아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 자리로는 부적합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더 올라가면 훗날 솔로몬에 의해 세워지는 성전의 자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는 해발 741m 고지로 넓은 평지가 있습니다. 이곳이 훗날 다윗이 성전 건립을 위해 돈을 주고 사게 되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다.
이 타작마당은 아주 오래된 시설로 당시에도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타작하는 장소에서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면 해발 777m의 해골을 닮은 골고다라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이 모리아 산 능선의 정상입니다. 이곳이 이삭의 결박 사건의 가장 유력한 장소입니다.
우선 성경의 모든 내용 특히 희생 제사는 전부 예수님을 향하고 있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려 합니다. 이 제사도 아무 곳에서나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정해 주신 장소에서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장소를 정해주셨을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곳은 필시 예수님과 관련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연관시켜 고민해 봐야 합니다.
훗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실 곳에서 이삭을 바치도록 하셨고 모세의 율법 이후 제물의 피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질 곳을 향하여 흘리도록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의 성스러운 의미를 ‘이삭의 결박 사건’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책임질 아들 즉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는지가 시험의 관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르셔서 그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결박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만천하에 알려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축복의 근거를 만드시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어린 양을 대신 준비해 주셔서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그 장소를 향해 계속 제사를 지내는 표본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후 수 천 년이 지나 동일한 장소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동일한 피의 제사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5. 여호와 이레
아래 구절의 ‘이레’는 ‘라아[흐]’라는 단어가 어원인데 이는 ‘알려주다. 나타나다. 알게 되다, 보이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의역하면 ‘준비된다’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King James Version에서와 같이 “I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seen: 하나님의 산에서 보일 것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22:13, 14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지 몰랐겠지만 이는 예수님 처형과 부활에 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성전과 다윗의 성이 있던 성스러운 777m의 모리아 산 정상이 모든 것의 초점이 됩니다.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희생 제사를 집행하려 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이삭이 살아났음을 히브리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6. 사라진 이삭
창세기 22: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이삭의 결박 사건 이후에 이삭의 행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난 이삭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2명의 종들만 집에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삭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이삭도 당연히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의도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창세기 24:62 그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7. 이삭의 재등장
이삭의 행적은 신부를 만날 때에 다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작가가 전체적인 관점에서 모델에 맞게 편집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편집은 작가 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이며 본문의 내용을 전혀 훼손하지 않으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비록 이삭이 죽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양을 허락하셨기에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과 믿음으로 가득 찬 피의 제사가 사실상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난 후 성경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신부를 만나는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사라지셨다가 마지막 날에 신랑으로 돌아오시는 것과 병행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제사와 예수님의 처형의 장소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어 이삭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된 장소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오시기 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에서 그곳을 바라보면서 제물의 피를 흘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삭이 신부를 만난 ‘ 브엘라해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의 의미가 느껴집니다. 성경은 한 개의 섬세하게 통합 설계된 거대한 메시지 시스템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숨겨져 있으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서 밝혀진다.
-------------------
위의 자료는 https://blog.naver.com/keys01/222181155615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