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2 01:21

삼위일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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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삼위일체론 2013/10/18 01:33

♥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삼위일체교리

삼위일체론 2013/07/27 02:22


 

삼위일체교리(2)| 신론[神論]
Great Light 조회 45 |추천 0 | 2009.01.30. 17:29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성부. 성자. 성령은 여호와이십니다.

삼위일체론 2012/10/10 02:53

<

 

출3: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여호와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성부만이 여호와라고 주장한다.
여호와는 성부에게 해당한다는 여호와의 증인의 말과는 달리
성경을 보자면 여호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에게 해당된다.

 

여호와라는 내용이 나오는 성경

출3:13-15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증인이 하루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말하고 싶지않으니 가라고 해도 끈질기게 늘어져서 그러면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나오냐고 나는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 신세계역을 피는데 그들의 책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는 안나오고 의미만 나온다고 말했다. .......

 성장와 성령이  여호와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대주면 당신의 진리가 그릇되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냐고 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고 신약에는 안나오는데 그 여호와라는 단어가 주라는 단어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말했다. 성경을 보자.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마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해석: 여기서(마3:3) 주는 예수님을 가르키고 구약 사40:3에는 여호와라고 기록되었다. 다시말해서 주의 길은 여호와의 길과 같은 것이고 여호와는 예수님(성자)이다라고 나는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또 성경구절을 찾아보자고 했다.
욜2:28-32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서 2:32절에 나오는 여호와가 예수님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사도행전2:16-21절을 찾아주었다.

 

행2:16-21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서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는데 사도행전2:21절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요엘서에 여호와라고 표현된 사도행전의 주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라고 나는 이야기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행2:21절의 주를 예수님이라고 36절은 말하고 있다.

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시다라고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성령이 여호와인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사6:1-10 사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아도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야흐웨? 체바오트)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아도나이)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6장 1절과 8절에서 나오는 아도나이여호와로 묘사되며 8절에서는 아도나이께서는 내가= 우리 로 묘사된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6: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이 백성에게 (너는)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9절에 나오는 “그가”는 문맥상 아도나이며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한글성경이 표현해도 옳은 것이다. 이 그가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가 신약에는 무어라고 되어있느냐가 중요하다.

 행28:25-27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디아 --통하여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사6:9의 “그가 한글성경은 여호와께서” 가 행28:25절에는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6:9절의 그가(여호와)라는 단어는 행28:25절의 성령과 같으므로 성령이 여호와이다라고 나는 말했다.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기본형: 프슈도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기본형: 프슈도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부가 여호와 이시고 성자가 여호와 이시고 성령이 여호와이시다.

 

요약

[성자가 여호와]

사40:3 여호와의 길---> 마3:3 주의 길

욜2:28-32 여호와의 이름---> 행2:16-21 주의 이름

36절 예수 =주와 그리스도

 

[성령이 여호와]

사6:9-10 ---> 행28:25-27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행5:3절 성령을 속이고 = 행5:4절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lamad님 http://cafe463.daum.net/_c21_/bbs_read?grpid=1QfVM&fldid=D0VS&contentval=0007J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53&regdt=20121009223518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 2012/03/10 04:24


아래 글은 재탕입니다.(전에,여기'아멘넷'에 올렸던 글입니다)
독자들께는 좀 송구스럽습니다(재탕이라서).
그렇지만,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저의 '아래' 글을 읽고서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올리는 이유는, '리마인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복적인 교육을 쇄뇌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써먹는 숫법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벌써 수천년 전부터 '반복적 학습효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자기백성 가르침의 방식'이었음을
성경은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 올립니다.
해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혜자 올림


"식은 밥도 데워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 하잖아요?
해서, 예전에 어느 카페에 올린 글 옮겨와 봅니다.

<신학 단상-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단에 대한 반동으로
정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이후 역사적 이단(교회사에 드러난 이단)의
그릇된 신관에 대한 대응으로
이 교리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이단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일신론과 양태론입니다

단일신론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키 위해 나타난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하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닌 종속적 위치에 두고자 했습니다

양태론은 구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격위를 구분짓지 않음에서 나온 이단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승천하여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혹자는 삼위일체 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합니다
그냥 성경대로 믿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세우신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별 유익이 없을까요?

초대교회, 사도후 교부시대,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들의 거짓 교훈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코자 했으며 인성도 부인코자 했습니다

삼위 간의 격위를 인정치 않음으로 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성령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부인코자 했습니다
단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여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미명 아래서 말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온 이리들의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바른 교리를 주셔서 주님의 양떼를 지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격위를 구분하면서도
한 분 하나님임을 믿을 수 있는 진리 체계가 세워지도록 하셨습니다

각각의 신격이 셋인데 어떻게 한 분이냐고 항변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시와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이성은 입을 다물어야 마땅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이성을 사로잡기에 이성이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성자와 성령의 격위를 허무는 그릇된 가르침을 펴는 자들이 있습니다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는 가르침이지요
그들이 구약의 야웨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지 않을 뿐,
이미 그들의 말은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 축이 무너지면 전부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작수발-작대기 세 개를 걸쳐세워 그 위에 무엇을 얹거나
걸고자 하는 작대기-은 하나를 빼면 쓰러집니다)

어떤이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는 안 되지만 믿는다 하면서
이상한 예를 들기도 합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수증기도 되듯이 삼위일체는 그런 것이다'
'태양은 태양 자체가 있고 열이 있고 빛이 있듯이 삼위일체도...'
'집에서는 아버지고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교회에서는 집사고...'

잘 가르치려고 해서 그렇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전부 양태론적입니다
개미가 인간을 모르듯이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이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원저자이신 성령의 조명없이는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기록인 성경에서
이끌어 낸 교리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간섭과 도움없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교리 체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성을 인정하듯이
교리도 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나온
역사적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유명하다는 이들이(난 그들이 하나님께서도
유명하다고 인정하시는지는 모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피흘려 세운 진리 체계를 그렇게 쉽게
부인하는 것에 분노와 서글픔을 느낍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
삼 위로 계시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뇨?
아들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아니뇨!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뇨?
아들이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고 하는 자들이 아니뇨!

성경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있을진저!

*십수 년 전에 정리한 글을 몇 년 전에
어느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부영학적(富養學的) 견해가 난무하는 이 즈음에...

*추가로 옮겨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언어(말과 글)란 의사전달의 수단이기에 단어 자체의 어원적 의미에
치중하다 보면 본의를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그 단어를 채용하여 문장을 통해 의미를 드려내려고 하는가
하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적에도 문장 속의 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추
적하는데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장 속의 어떤 단어의 개념(concept)은 그 문장이 정합니다
문장의 의미를 알면 어떤 단어에 대한
개념이 드러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똑 같은 단어라도 문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단어를 연결해서 의미를 드러내려는
관주읽기식의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느냐 하면
삼위일체가 가지는 한문의 어의(語意)가
자칫 우리의 사고의 폭을 제한할 수도 있겠기에 말입니다

직역하면 '세 자리 한 몸'입니다
세 분이 한 몸으로 계신다는 의미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셋 한 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 격위(Persona-페르소나)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으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세 격위로 계신 분이 '한 분'이냐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격위를 가지고 계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강조하다 보니 '삼신론'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교계에서도 삼신론 논쟁이 전에 더러 있었습니다)

셋이 한 분이다!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해하려고 들지말고 그냥 믿으라! 고 합니다
믿으면 그냥 이해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때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격위로 계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다 할 때는
이성으로서는 한계를 느낍니다(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니까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한 분'이라 할 때 '한'입니다
'한'을 수의 개념으로 대부분 접근을 합니다
우리가 숫자에 익숙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물방울 셋을 합치도 하나 이다!'
'셋을 합해도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하나 이다!'등등...
여러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다 한계가 있는 설명들입니다

이'한 분'이라는 말은 '오로지'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 격위로 계시는 하나님 외는 달리 하나님이 없다!
이것이 강조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성부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 데,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 외는 달리 하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하나님이십니다
격위로서 구별이 됩니다 인격(신격)으로도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입니다 본질이 같고 속성이 같습니다
세 격위가 동등한 하나님이십니다
똑 같은 하나님이란 말씀이지요

셋으로 계시되 하,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하나'는 수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같다'라는 의미 곧 동질이라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두 객체가 있는데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과 목적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칠 때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것에서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을런지....

아무튼 셋이 한 분 하나님이란 말에서
한 분이라는 말에 걸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면 전혀 그 '한 분'이라는 말이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수(數)나 양(量)의 개념이 아니라 질의 개념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출처: USA 아멘넷/ 지혜자 목사님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삼위일체론 2012/02/18 15:30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대답: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가장 난해한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해하여 설명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아버지도 하나님,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가 진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한 존재로서 한 분의 하나님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서술할 때 쓰였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세 명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이 용어 사용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공존하시는 세 인격체로 구성된 한 분의 하나님”보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니까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개념이 성경에 나와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 몇 성경 구절을 살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 봅니다.

1. 오직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2. 삼위일체는 세 인격으로 구성됩니다 (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구약의 구절에 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1에는 복수 명사 “엘로힘”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그리고 이사야 6:8에는 복수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과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둘 이상을 가르킵니다. 영어는 오직 두 가지 형태, 단수와 복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쌍은 2개 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세 형태가 있습니다. 즉 단수, 쌍, 그리고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의 쌍은 눈, 귀, 그리고 손과 같이 쌍을 가진 것에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과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둘 보다 많은 즉 셋 이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천부, 아들, 성령).

이사야 48:16 과 61:1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1:1을 누가복음 4:14-19과 비교하여 보세요. 마태복음 3:16-17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천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할 때, 성령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 와 고린도후서 13:14은 삼위일체 가운데 구별되는 세 인격체를 말하는 예가 됩니다.

3. 또 다른 많은 구절들도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구별합니다. 구약에서 “주 (LORD)” 는 “주 (Lord)” 와 구별됩니다 (창세기 19:24; 호세아 1:4). 전자의 주는 “아들”을 소유합니다 (시편 2:7, 12; 잠언 30:2-4). 영도 또한 “주 (LORD, 민수기 27:18)” 와 “하나님 (God, 시편 51: 10-12)” 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성자 예수님도 천부 아버지 (시편45:6-7; 히브리서 1:8-9)와 구별됩니다. 신약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언급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나 성령님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로 언급한 또 다른 구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계시는 다른 인격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각 인격체는 하나님 되십니다 (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 14; 로마서 9:5;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5. 삼위일체 내 상호 종속, 의존: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께 속합니다. 이 삼위일체 내의 관계는 각 인격의 독립된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아들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20:21; 요한일서 4:14,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6. 삼위일체 각 인격체의 역할: 하나님 아버지는 이하 열거한 일들의 궁극적인 자원 혹은 원천이 되십니다. 가) 우주 (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나) 계시 (요한계시록 1:1); 3) 구원 (요한복음 3:16-17); 4)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과업 (요한복음 5:17; 14:10).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하여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 창조와 우주 경영 (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1:3; 골로새서 1:16-17). 나) 계시 (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다) 구원 (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그의 매개체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창조와 우주 경영 (창세기 1:2; 욥 26:13; 시편 104:30). 나) 계시 (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다) 구원 (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라) 예수님의 업적 (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내셨습니다.

사실 어떤 뛰어난 묘사도 삼위일체를 적당히 표현해 내기 힘듭니다. 달걀을 예로 들자면, 달걀 껍질, 흰자, 노란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달걀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한 부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 물로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 증기, 얼음은 물의 다른 형체일 뿐이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하나님의 단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각각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모든 비유가 삼위일체의 모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비유로 온전히 묘사될 수 있겠습니까?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사실에 초점을 두도록 합니다.” (로마서 11:33-34)

What does the Bible teach about the Trinity?
http://www.gotquestions.org/Trinity-Bib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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