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논란 중심에 선 ‘구원파’, 교리 어떻길래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김진영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세월호’ 침몰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세월호를 운영하는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알려지면서, 때아닌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 논란이 일었다. 유 전 회장이 소위 ‘구원파’라는 이유 때문이다. 선장을 비롯한 일부 선원들도 구원파 신도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독교복음침례회 측은 일단 선장은 소속 교인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구원파는 한국교회에서 흔히 ‘이단’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과거 ‘오대양 사건’에 유 전 회장이 배후였다는 의혹까지 더해지면서, 구원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일각에선 구원파의 교리가 일부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교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영원 구원 보장설이 매우 극단화된 형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기독교복음침례회, 곧 구원파에 대해 “기존 개신교회가 대부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는 가르침을 펴는 것과는 달리, 이미 예수의 보혈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것을 강조한다”며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과중한 직분을 지우는 예배당 건물 위주의 유형교회를 거부하고 무형교회를 강조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교단은 주류 교단들로부터 신학적인 비판을 받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신학자는 “구원파의 구원교리에선 회개의 가치가 약화되고, 구원 이후의 범죄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곧 구원 이후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일종의 ‘영원 구원 보장설’이 매우 극단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은 ‘죄 안에서의’ 구원이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 이후의 삶은 당연히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신학자 역시 “아무리 예수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경우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도 그와 같은 것”이라며 “믿음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정통적인 구원관이다. 그러나 구원파는 예수를 믿은 이후 윤리적 삶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편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들의 구원론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사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각 사람은 율법을 지키거나 인간의 어떠한 선행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영원히 멸망치 않는 몸으로 변화하여 몸의 구원을 얻음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얻을 것을 믿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24일 기자회견에서는 “구원받으면 죄를 지어도 된다고 가르치느냐”는 질문에 “기독교에서 그런 교리를 가진 곳은 없다”고 부인했다.
▲구원파의 구원 교리에 대해 설명한 부분. ⓒ기독교복음침례회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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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도 ‘구원파적 모습’ 경계해야
문제는 이번 세월호 침몰 참사와 구원파 논란으로, 엉뚱하게 기독교 전체에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야 구원파가 기독교와 별개이지만, 밖에서는 그 같은 사실 인지가 어렵고, 또 구분의 필요조차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이 반(反) 기독교 정서가 만연한 중에는 더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 교인들의 모습에서 실제 ‘구원파’와 유사한 구원관이 나타난다는 비판도 있어,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김세윤 박사(풀러신학교)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은혜는 싸구려로 전락해 버리고,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하는 한국의 정통교회가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며 “의로운 삶이 없는 칭의론으로 인해, 본회퍼가 말했듯 싸구려(값싼) 복음과 구원파적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갑종 교수(백석대 신약학)는 “성경에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인한 구원의 안정성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예수 믿는 이들의 삶을 강조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면서 “한국교회에선 전자가 보다 강조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조현철 교수(연세대)도 최근 한 세미나에서 “자신의 범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이라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모든 범죄가 소멸되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이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독교의 기초로 여기고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 구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었다.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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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짬뽕 신학’ 때문인가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이대웅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저자 신광은 목사. ⓒ포이에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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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위기론’에 대한 여러 진단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침례교 소장 신학자 신광은 목사(열음터교회)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그 원인을 ‘빗나간 구원론’에서 찾고 있다. ‘아르뱅주의’는 전작 <메가처치 논박>을 통해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저자의 신조어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앞글자를 따 붙였다.
아르뱅주의는 간단히 말해 ‘내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절대 취소시키지 않으신다’는 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이 결합된 것. 책에서 저자는 구원의 선택권은 인간에게 있으나(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의 취소권은 하나님께 있다(칼뱅주의)는 주장으로 한국교회가 21세기형 면죄부를 발행하고 있고, 이처럼 ‘왜곡된 이신칭의와 예정론’으로 한국교회가 윤리적 실패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아르뱅주의라는 신학은 존재하지 않고 누구도 이를 정리해 발표한 적도 없지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긴장이 점점 이완되는 과정 중에 둘이 서서히 가까워지다 나중에는 아예 두 신학의 요소들 중 마음에 드는 것만을 뽑아 하나로 결합해 만들어낸 신학”이라며 “이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참여해 만들어낸 신학으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신자들에게 가하는 긴장을 제거하여, 편리하고 듣기 좋고 부담 없는 요소만을 모아 만든 대중적 취향의 신학”이라 주장하고 있다.
“현장에서 출발하여 신학적 의미를 찾는” 형태으로 연구를 진행해 온 저자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잇딴 추문의 근본적 원인을 탐구하다 이러한 구원론적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저자는 “천박한 기독교의 설교에 따르면 모든 죄는 다 똑같이 지옥에 던져질 죄로 ‘죄의 평준화’, 선인과 악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혼의 민주화’가 이뤄진다”며 “그 결과 발생한 ‘은총의 동일화’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와 결합하면서 ‘믿기만 하면 큰 죄든 작은 죄든 무조건 용서받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고, 회개를 관념화시키면서 결국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한 달 전 출간 당시 특히 평신도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으며 SNS상에서 꽤 회자된 바 있다. 이러한 현상과 아르뱅주의 등 한국교회 구원론의 문제점들에 대해 목회자 및 신학자들은 저자가 제기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동의하면서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관을 ‘무 자르듯’ 나눠야 하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표시했다.
신학자들 “문제 제기 일부 동의하나, 이신칭의 벗어나선 안 돼”
▲아르미니우스(왼쪽)와 칼뱅. ⓒ포이에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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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위기를 ‘도덕적 타락과 신학적 부패’라고 요약한 것은 김세윤 박사(풀러신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난해 한 강연에서 “보수 교회에서는 어디까지나 교리에 맞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성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복음에 힘을 없애버렸다”며 “은혜는 싸구려로 전락해 버리고, 구원파를 이단이라 하는 한국의 정통교회가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한국조직신학회장인 배경식 교수(한일장신대)는 “칼뱅의 전통이자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도, 세상을 구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비를 베푸소서’라 고백하는 것”이라며 “다른 것을 말하게 되면 기독교 복음이라 보기 힘들다”는 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배 교수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말씀은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밝은 빛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지 다른 여지를 준다면 결국 자기 자신이 구원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학으로 빠질 수 있다”며 “‘하나님,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외의 말은 비성경적”이라고 덧붙였다.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는 “사실 평신도들은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나 별 관심이 없다”면서도 “한국교회가 이신칭의면 이신칭의대로 해야 하는데 가톨릭처럼 행위를 강조하거나 공로를 주장하고, 야고보서에 나와 있듯 아예 행위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 교수는 “한국교회는 감리교회에서도 장로 제도를 사용하고 권사 제도를 장로교회에서 사용하는 등 (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믿음과 행위가 생활에서 드러나지 않으니 비판을 받고 있는데, 종교개혁 전통을 이어받되 부족한 점들은 웨슬리가 많이 강조한 성화를 받아들여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문기 교수(서울신대 역사신학)는 “성도들에게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며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해석한 관점을 가지고 목회자들은 설교를 하는데, (아르뱅주의가 제기한 구원론적 문제점은) 제가 볼 때 편한대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 것으로 보인다”며 “칼비니안 입장에서만 구원을 말하면 알미니안들이 정죄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구원의 문제는 알미니안이나 칼비니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며 “알미니안은 값싼 구원이고 칼비니안은 값비싼 구원이라거나 칼비니안만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야 되겠는가”라고도 했다. 또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보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알미니안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는 칼비니안을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며 “오늘날은 17세기 교리논쟁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바가 모두 귀한 것”이라고도 했다.
교리논쟁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주의와 싸워야 할 때
▲중세 시대의 면죄부. ⓒ포이에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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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형 교수(서울신대 조직신학)는 “현재 전 세계 기독교의 70%는 오순절 계열이지 장로교회가 아니다”며 “지금은 장로교나 루터교, 웨슬리안 등의 전통적 구분이 별 가치가 없는 상태이고, 이는 자신들만의 공동체 논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말도, 너희가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도 있다”며 “결국 성경에는 두 가지가 다 있는데, 이 중 하나만을 강조해 칼뱅주의가 됐고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세기 미국의 거대한 성결운동과 부흥운동의 근원은 웨슬리 신학이었고, 한국교회 대다수 보수 교회의 신앙 유형도 19세기 성결운동의 결과였기 때문”이라며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모두 복음주의적인 열정을 갖고 선교했고, 그 이후 들어온 신학이 한국교회를 갈라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 교수는 “한국교회는 사실 의인과 성화를 가장 중심에 놓는 보수 성결운동 하나 뿐이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아르뱅주의라는 말은 한국교회 신앙 유형에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엄청난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 시대로, 각성하고 배후의 적과 싸워야지 학파나 이단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며 “지금의 세속주의는 1960년대 자유주의 신학과는 상대도 안 되는, 포스트모던 방법론 내에서 표현된 것처럼 근원적 무신론”이라고 우려했다.
박광석 목사(일산벧엘교회)는 아르뱅주의가 지적한 바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단순히 이것 뿐만이 아니라 너무 광범위하고 깊으며, 또한 이 문제들이 보편화된 것”이라며 “이런 문제 제기들이 필요하지만, 어설프게 다룰 경우 내성만 생길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 밖에 익명을 요구한 한 신학자는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나, 신학적으로는 아르뱅주의에 공감할 수 없다”며 “이는 저자가 고안해낸 것에 불과하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차라리 칭의론 자체를 수정하자는 제의가 더 용감하고 순수한 자세로 보인다”며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은 칭의론이 아니라 기복주의화된 복음”이라고 했다.
아르뱅주의, 상투적 구호 되어버린 ‘값싼 구원’의 한국적 이해
저자인 신광은 목사도 ‘실체가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탈고 후 그가 쓴 글에서는 “아르뱅주의는 한국교회에 편만해 있는 현상이지만, 분석 텍스트도, 레퍼런스도, 과학적 증거도 없다”며 “이 ‘허수아비 논증’이 책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이고, 저 자신이 아르뱅주의라는 괴물과 직면하고 싸워왔다는 점에서 최소한 한 명의 아르뱅주의자는 존재하는 셈이라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저 자신이 아르뱅주의에 감염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자성과 고백에서부터 아르뱅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본다”며 “저는 이 괴물과 같은 논리에서 벗어나 복음의 진수와 만나고 싶고, 조국 교회가 더 이상 면죄부 판매를 그만두고 초대교회와 같은 정결하고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르뱅주의’가 본회퍼가 말한 ‘값싼 구원(싸구려 복음)’과의 차이점에 대해 “크게 다르진 않고, 이신칭의의 왜곡이라는 ‘값싼 구원’을 한국적 상황에서 다시 이해한 것”이라며 “이미 ‘값싼 구원론’이라는 말은 꽤 많이 나온 상태라 이미 ‘상투적 구호’가 돼 버렸고, 그 실체를 모른 채 비판하고 있지만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의 설교 속에 너무나 많은 ‘값싼 구원’의 요구가 있지 않은가를 담고 싶었고, 특히 ‘복음주의 4인방(옥한흠·홍정길·하용조·이동원)’을 언급한 것은 그분들이 아르뱅주의자라고 하긴 힘들더라도 기여한 바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라며 “‘값싼 구원’을 비판하는 일은 이제 상투성 때문에 식상하기도 할 뿐 아니라 21세기 한국적 상황에서 ‘값싼 은총’에 해당하는 현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지시하지 않은 채 비판만 한다면 그저 구호(slogan)에 불과할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 자신은 마치 ‘값싼 은총’에서 벗어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검토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목사는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소개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현재 존재하는 아주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나아가 하루 속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징후를 찾아내 ‘진단’함으로써, ‘처방’이 나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1970년대 이전에는 많지 않았던 ‘구원의 확신’이라는 용어가 남발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신학적으로 근거가 없는지 지적함으로써 ‘값싼 구원론’의 한국적 맥락과 실체를 규명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영접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은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의 기초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칼뱅주의적 가르침”이라며 “이렇듯 신학에 기초한 가르침들을 심각한 고민 없이 쏟아냄으로써 현재 윤리적 실패가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전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4영리’ 등에서는 ‘영접기도’가 있는데, 신학적으로 보자면 이것도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신학이나 교리가 실제 목회현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식 예수 영접과 칼뱅주의적 견인 교리를 적당히 버무려 만든 최악의 구원론”이라며 “문제는 이러한 거짓 복음이 탈신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세태의 흐름과 맞물려 소리 소문 없이 교회로 유입됐고 그것이 다시 성장주의라는 악마적 유혹과 결합해 광범위하게 유포됐는데,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이러한 ‘나쁜 신학’을 ‘좋은 신학’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눈앞의 현실이, 그 징후가 왜 일어났는지 신학을 동원해 설명하려 하고, 두 교리 사이의 논쟁에는 빠지고 싶지 않다”는 저자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중 현장에서 사용할 만한 교리나 용어들을 뽑아 복음 전도에 적용하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부정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칼뱅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호도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안에 대해 저자는 “아직 써 내진 못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아르뱅주의를 벗어버리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뼈아프게 반성하고, 입술로 고백하며, 아르뱅주의를 벗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으로의 출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새로운 구원을 위한 네 가지 지침’ 정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저자의 문제제기가 ‘메가처치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150명이 넘지 않는 작은교회로 가장 아름답고 성경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153 교회>의 내용이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