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근원과 그 역사
( 칼빈과 어거스틴의 진실)
콜린 스텐디쉬 박사
2012.03.27 22:44
1. 들어가며
A.D. 4세기 경, 기독교계는 신학적 깊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거의 모든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 차례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거의 모든 교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2. 그의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이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3.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4.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죄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죄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 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5. 자신의 죄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原罪)’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죄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죄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罪)’란 우리가 태어나는 타락한 상태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죄(罪)란 우리가 태어나는 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우리의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6. 첫 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자신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히4:15)(킹제임스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 .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히2:14~18)((킹제임스 영어성경 역).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었지만, 그분과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진 우리 인간들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궤변을 통하여 자신의 죄된 생애를 신학적으로 변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고 있으며(히2:14~18), 그분의 모본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경건하고 승리하는 생애를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21)
7.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받고 유혹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히브리서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 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전서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꾸기 위해서 한 번에 한 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원죄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8.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 “세례(영세)라고 불리우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끔직한 것이었는데,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중세기는 어린 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불에서 끝없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연옥”과 “림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전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 “유아 세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채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구교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히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존 칼빈(깔뱅)이나 존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13:3)
- 콜린 스텐디쉬 박사 -
참고로, 콜린 스텐디쉬 박사의 모든 생각과 사상은 올바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위에 쓴 글에 있어서만 참조할 것이 있으면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