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바른 구원론에서 점점 더 무엇을 빠뜨렸는가?(계3:1~6)
1.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일곱영이자 당신의 눈에 해당하는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붙들어 주시고 계실까요?(계3:1)
2.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통해서 불꽃같은 눈으로 이 땅을 속속들이 감찰하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일곱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들어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일곱 별들이라고 지칭하셨습니다(계1:20,2:1,3:1). 여기서 "일곱'이라 함은 이 세상(땅)에서의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가지 유형의 교회가 있다는 것과 주께[서는 이 유형의 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붙잡아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이후 이 땅에 주의 종들은 크게 3종류로 분류되어집니다.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목사인 교사입니다(엡4:11). 사도바울은 교회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교회에 세우신 직분을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전하는 자들과 목사인 교사를 세우셨지만, 오늘날에 복음전하는 자라는 직분은 거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여기서 '복음전하는 자'라는 개교회에 머물러 시무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그곳에 복음을 전해주어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되,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으로 직접 파송을 받아 복음전하는 자이므로 사도라는 직책도 사실상 없어졌습니다(어린양의 12사도들은 육체를 입고 계셨던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12사도들이었고,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 직분이 사라진 후 교회에 남아있는 중요한 직분은 선지자들과 목사인 교사입니다. 그런에 여기서 목사인 교사는 말씀을 가르친다는 측면에서는 교사이지만 목양하는 이들이므로 목사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란 직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들이 사라진 이후 선지자적인 직분으로 활동하는 목사를 가리키는데,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오신 메시야(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언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들은 개교회에 묶여있는 자들은 아닙니다. 어디든지 가서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을 가르치쳐야할 직분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들로서, 버가모교회에서는 발람같은 선지자가 있었고, 두아디라교회에서는 이세벨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란 예수님에 대한 것과 구원론에 관한 말씀을 전하되,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주었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고 가짜를 전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께서는 이 교회의 주의 종에게 엄한 책망을 쏟아놓으셨습니다. 계속 지금의 상태에 있게 된다면 도둑처럼 갑자기 가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아예 지워버리시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대체 이 교회의 지도자는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3. 사데교회의 지도자는 2가지 측면에서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행위가 온전함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고(계3:2),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아도(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도록 씻지 않아도) 괜찮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계3:3). 사실 사데교회를 교회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종교개혁의 시대 이후의 교회의 상황에 해당합니다(A.D.1517~). 왜냐하면 이 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명성은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 죽어있는 교회, 그대로 있다가는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위험에 처해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교회가 아닙니다. 두아디라처럼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신 예수께서는 그 교회가 죽어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의 종이 죽어 있어 온 성도가 죽어있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주의 종이, 행함이 뒤따르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계3:2). 또한 회개하지 않아도(더럽혀진 겉옷을 빨지 않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의 단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요?
4.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은 이신칭의에 의한 구원론이요, 만세전의 하나님의 작정(예정)에 따른 구원론이 그 핵심입니다. 루터는 잘못된 중세시대에 맞서 올바른 구원론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선행이나 기부 등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으며, 신부에게 바치는 고해성사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서(만인제사장)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바른 진리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위를 저주스러운 것으로 보았으니, 나중에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볼 수 없다고까지 말했으며,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히브리서와 베드로후서나 요한계시록 등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오직 바울신학 곧 이신칭의로 구원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루터의 바톤을 이어받은 칼빈도 처음에는 이신칭의의 복음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중세시대를 열었던 어거스틴의 신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작정에 의한 구원 곧 만세전의 예정에 따른 구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신학을 이어받은 데오도르 베자나 고마루스 등에 의해,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한 예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정착화되었고, 이러한 구원론은 도르트회의(A.D.1618)에서 정통으로 확정되었고, 영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A.D.1648)이 되었습니다(웨스티민스터신앙고백은 철저히 칼빈의 예정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원래 예수님께서 가르쳐진 구원론이자 사도들이 전해주었던 구원론은 어떻게 변질되었습니까?
5. 시간이 흐르자 루터의 믿음구원론과 칼빈의 예정구원론은 필연적으로 2가지를 약화시켰습니다. 첫째, 심판의 기준인 행함을 무시하기에 이르게 하였고, 둘째, 구원의 두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인 회개를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도는 없었겠지만 말이죠. 그래서 루터의 신학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행함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는 구원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사데교회에서 온전한 행위를 발견할 수 없었던 예수께서는 심판 때에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시겠다고 경고하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구원이 우리의 믿음과 회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예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다보니, 자신이 현재 믿고 있으면 자신은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것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구원은 절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도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는 상태로 변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데교회가 더럽혀진 옷을 씻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루터나 칼빈의 가르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것을 그대로 전해주었던 사도들의 가르침이어야 합니다(막1:15,마4;17, 행2:38, 20:21).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구원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자신이 믿고 회개할 때 그때 구원으로 예정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만세전에 개인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에서와 야곱 가운데 야곱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에서와 야곱은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가에 대한 예정일 뿐 개인구원예정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함으로 그분이 흘리신 피로 씻어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합시다. 구원은 가만 있어도 되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고,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7월 10일(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