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I)

by 갈렙 posted Oct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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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I)

입력 : 2016.06.09 14:11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대한 역동적 이해

 

김영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X. 칭의론 논쟁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점

 

1. 죄인의 칭의 없는 죄의 칭의: 방종한 삶에 면죄부를 주고 세속적 번영론을 부추기는 안일한 칭의론

 

 

 

1) 칭의 교리의 잘못된 수용 -나태하고 방종한 삶에 면죄부

죄와 구원에 대한 진지한 갈등과 체험 없는 신자에게 칭의 교리를 가르치게 될 때, 칭의는 나태하고 방종한 삶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이 칭의 교리를 배운 자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선한 열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올렸으나 성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명목상 신자들(nominal Christians)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처럼 구원에 대해 고민한 자들에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그 체험이 지옥에 내려간 데서 구원을 받아 낙원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들의 칭의는 새로운 삶으로 연결되어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 칭의를 단지 교인이 되는 하나의 지식 교리로만 가르칠 때, 우리의 모든 행함은 율법주의이자 인본주의로 간주되어 가톨릭의 고해성사(告解聖事)처럼 죄를 예사로 짓고 다시 용서를 받는 무절제한 삶을 방조할 위험성이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한국교회는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선한 행실의 열매 없는 쭉정이 칭의 신자들을 양산한 것이 사실이다. 10~20년 믿어 교회 생활에 익숙하고 기도도 잘하고 성경 지식도 많으나 예수를 향한 헌신과 경건이 결여되어, 세속적인 사람과 다름없이 이기적이고 성공을 위해서는 불법을 예사로 저지르고 술 취하고 방종한 삶을 사는 명목상 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고, 불법을 저지르고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명목상 신자들이다. 칭의는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구원받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구하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은총으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2) 진정한 칭의 교리는 인격적 체험으로 연결되어야

기독교 교리는 중요하다. 그런데 교리를 인격적 체험과 간증 없이 반복적으로 가르칠 때 마치 신앙의 공식인 양 신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앞서가서는 안 된다.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모순되거나 긴장을 가질 때, 겸허히 교리를 상대화하고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교리 교육을 영성 훈련과 더불어서 해야 한다. 영성 훈련 없는 칭의 교리 주입이 오늘날 한국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성화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교리적·외적 신앙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교리에 맞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교리를 공식(公式)처럼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실존적 신앙 체험에 등한시했다. 정통 교리를 인격적으로 수용하도록 가르치지 않아, 신자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신천지나 안상홍 등 이단이나 신비주의 집단에게 빼앗기고 있다. 한국의 정통교회가 행함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키고, 구원파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다를 바 없는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구원파 이단이라 하면서, 사실상 '구원파적 복음' 선포"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입력 : 2013.12.16. 18:10, 김세윤, '칭의와 성화' 세미나서 한국교회 현실 질타).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하고 칭의의 열매를 강조했다. 매일의 삶에서 자기를 쳐 복종시키고 선의 열매를 맺는 십자가 신학을 정립했다. 이에 반해서 오늘날 한국 정통교회는 이신칭의를 바로 구원으로 연결시켜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얻는다는 싸구려 구원론과, 오순절 번영신학의 영향을 받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번영의 신학, 출세를 지향하는 영광의 신학, 신앙을 성공의 도구로 착각하는 힘의 신학을 산출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신앙 교육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시하는 기도와 경건의 훈련이 결여되어 있다(김영한, "올바른 신학 갱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복협 월례회 발표문, 2016. 04. 08, 강변교회). 그 구체적인 사례가 부천 소재 신학대의 해외 유학(遊學)파 신약학 강사이자 목사가 자신의 딸을 학대 치사, 시신을 집안에 수 개월 동안 방치해 큰 충격을 남긴 것이다. 이는 신앙 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신앙 교육은 인성과 경건을 도외시하고 지식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주일학교 교육이 신앙과 인성보다는 일반 사회단체들과 다름없이 암기·지식 위주로 이루어지는 데서 빚은 사태라고 볼 수 있다. 신학 교육을 받는 이들은 신학과 성경 지식을 많이 갖게 될 뿐 신앙과 인성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 성경과 교리 지식은 많이 공급받는데 기도, 감사, 나눔, 섬김의 훈련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경건과 헌신의 태도는 많이 저하되고 있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안일한 신자들을 길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종말론적 심판 의식의 상실: 믿음 빙자 율법폐기주의의 위험성

 

1) 칭의의 복음이 싸구려 은혜로 왜곡돼

한국교회 안에서는 오늘날 칭의의 복음이 왜곡되고 있다. 정통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구호처럼 외치나 구호에만 그치고,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는다. 의로운 삶이 없는 칭의론으로 인해, "싸구려 은혜"(billige Gnade, cheap grace)와 구원파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신칭의 교리를 가볍게 여겨,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이들에게 영접기도를 해 주거나 혹은 성경 한 구절을 외우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해 주고 끝난다. 그리하여 이신칭의는 값싼 교리로 전락해 버렸다. 부흥회가 말씀을 상고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나쁜 행실을 고치는 사경회에서, 소원을 성취하고 복을 받는 만사형통 집회로 변질됐다. 부흥회가 죄와 불순종의 담을 헐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다가가는 영적 화해의 집회가 아니라, 헌금을 강요하여 복을 받게 하는 집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은혜가 싸구려 은혜의 상품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정통주의가 놓치는 점은 칭의가 갖는 종말론적 긴장이다. 칭의는 선언적이며 법정적이며 일회적이긴 하나, 여기에 우리 인간은 사물이나 로봇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이기 때문에 칭의의 은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드리는 우리의 책임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신약교회의 실존이 '이미'와 '아직도 아님'의 구조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이미'와 '아직도 아님'의 역설적 구조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칭의는 일회적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성화) 속에서 그 칭의 신분은 유지되고 있으며, 종말론적 심판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힙입어 우리가 처음 받은 칭의는 최종적으로 확정을 받는다. 새 관점 학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심판 때 새로운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의 선조들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이미 살아온 칭의의 열매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2) 칭의의 종말론적 긴장 구조 무시

한국교회 안에서는 칭의의 '종말론적 긴장 구조'가 무시되고 있다. 칭의는 구원을 미리 받았다는 선취(先取)지 완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취한 의인됨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 칭의론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로마서만 봐도 사도 바울은 3-4장에서 칭의를 설명한 후 5장에서 '이 관계에 서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성화에 대한 노력 없이 견인 교리에 대한 '일방적이고 사변적 이해'로 앙양된 잘못된 안심은 경계되어야 한다. 칭의 교리를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면 안 되고, 칭의 교리와 함께 성화 교리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바울이 권면하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의 태도는 이방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적 자기 관리이자 정비(整備)를 말한다. 욕심과 죄 죽임을 통한 헌신과 새 사람 살리기를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3) 값싼 은혜: 대가(순종)가 따르지 않는 은혜

본회퍼는 1937년의 저서 『나를 따르라』(Nachfolge)에서, 종교개혁 이후 루터의 이신칭의를 받아들인 루터교회의 안일한 칭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로 팔아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내맡기는 죄의 사유요 위로요 성만찬이다.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교회에서 털어내는 은혜를 뜻한다. 값도 없는 은혜이다. 이것은 은혜의 본질이라 한다. 은혜의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는 것이다."(Dietrich Bonhoeffer, Nachfolge, Munchen(1937), 1967(9판); 허역 역,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1979, 24)

본회퍼는 값싼 은혜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의인(義認)을 뜻하는 값없는 은혜일 수는 있어도 죄에서 떠나 돌아와 참회하는 죄인의 의인(義認)은 아니다."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교회는 보편구원론자로서 "세상은 이미 은혜에 의하여 거저 의로워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여, 세상과 다름없이 살라. 잘라 말해서 따라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Dietrich Bonhoeffer, Nachfolge, Munchen(1937), 1967(9판); 허역 역,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1979, 25.) 성윤리 해방이나 동성애를 자유라고 허용하는 교회는, 존 스토트와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죄인의 의인이 아니라 죄의 의인(義認)을 선언하는 세속주의와 타협하는 인본주의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다.

 

4) 율법폐기론 : 칭의 교리의 그릇된 결과

그릇된 칭의 교리는 율법폐기론을 불러일으키는 미혹물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지도 거룩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나는 의롭게 되었으며 구원받았다"고 여기며 "나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받았다"고 한다. 이런 칭의는 '값싼 믿음주의'(easy-believism)라고 불린다. 거듭남과 성화가 따르지 않는 칭의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이. 그릇된 칭의 교리는 율법주의(legalism)를 불러일으키는 미혹물이다. 율법주의란 믿음으로 즉시에 값없이 의롭다 해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율법적 노력과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칭의 교리 때문에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도 없고, 믿음에 근거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 결과로 칭의의 열매인 윤리와 선행이 부재한 신자들을 양산시켜 왔고, 세상 속에서 변화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비윤리적 행위로 교회는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값싼 칭의론은 부메랑(boomerang)이 되어 교회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 명목적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심히 왜곡되어 있다. 믿음은 있으나 믿음에 따라 실천하지도 성도의 삶을 살지도 않는다. 덧붙여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이런 율법폐기주의로의 왜곡(歪曲)을 정당화하고 있다. 야고보서가 가르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칭의론에 대립되는 신인협동설로 간주되어 무시되고 있다. 이런 원인들을 제거해야 한국교회 명목적 신자의 삶은 진정한 성도의 삶이 되고, 사회의 불신도 극복할 수 있다. 철저히 정직하고 공정하며 부지런히 일하되 절제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방식이다(손봉호, "한국교회, 무속적·경쟁적·차세중심주의적",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saoh@cdaily.co.kr 입력 2014.03.22 07:00 | 수정 2014.03.22. 02:09, 22일 강남포럼서 '한국교회의 윤리 문제' 강연).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는 각종 불법을 행하고도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안일한 신앙을 경고하고 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8-11). 그리고 예레미아는 모든 인간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다: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렘 32:19).

호서대 명예교수 임태수는 그리하여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으로의 구원"을 말하면서 "믿음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임태수, "믿음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 제2종교개혁연구소편, 기독교문사, 2015, 225-250.).

 

 

X. 성도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긴장(소망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

 

1) 진정한 칭의 이해는 종말론적 지평을 갖는다

종교개혁 전통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반드시 거룩한 삶을 동반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교인은 과연 그의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진정한 기독인은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된다.

종교개혁 전통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최종의 심판대 앞에서 행위에 따른 심판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5-46).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13). 종교개혁의 전통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한 행위에 의한 종말론적 심판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수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를 라이트나 던이나 김세윤처럼 현재와 미래의 두 단계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독일 튀빙겐의 복음주의 신약학자 페터 스툴마허(Peter Stuhlmacher)도 필자와 같은 입장에 서고 있다[P. Stuhlmacher, Revisiting Pauls' Doctrine of Justfication: A Challenge to the New Perspective (Downers Crover: InterVarsity, 2001), 68-69].

 

2) 진정한 구원론은 현재적 구원과 종말론적 심판의 긴장 구조를 지닌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칭의받은 자의 현재적 구원과 종말론적 심판의 차원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최덕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최덕성 칼럼]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입력 : 2015.10.23. 17:58)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안일하게 안주하여 날마다 자신의 죄와 정욕을 쳐 복종시키는 '내 속의 죄 죽이기(mortification)'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무법한 방종의 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그러한 생활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여자처럼 행세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남자 동성애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경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도 무법(無法)이나 방종(放縱)의 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날마다 순종으로 성화: 자기(옛 사람) 죽임과 자기(새 사람) 살림

필자의 스승인,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신학자 페더스(Albrecht Peters)가 칭의의 종말적 지평에 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최종의 심판 때에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다." 종교개혁은 삶의 종말적 지향을 예리하게 드러내었다. 칼빈 역시 칭의를 받은 자에게 있어서 중생에서 깨어 있는 새로운 순종의 삶을 강조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을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옛 사람 죽이기(Abtotung)과 새 사람 살리기(Lebendigmachung)이다(John Calvin, Institutio, III. 3. 3). 자기 죽이기(mortificatio)란 죄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 심판 앞에 경악하여 옛 사람의 습성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살리기(vivioficatio)란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향한 불타는 욕구 속에서 예수의 새 성품으로 옷 입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바른 칭의 교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대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진정한 구원이란, 신자들이 처음 믿음으로 받은 바 구원을 지속적인 순종과 의의 열매 맺는 삶을 통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복음으로 온 세상을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해, 온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샬롬이 이뤄지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맺음말: 성화의 열매가 없는 칭의는 싸구려요 허위(虛僞)

필자는 정통개혁교회의 신학자로서 "새 관점 학파"가 제기하는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에 함축된 동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오늘날 안일한 보수교회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화 없는 칭의론'과 '율법 폐기 구원 신앙'에 경종을 울리면서,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 신자들이 계속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믿음을 통한 칭의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최종의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의한 심판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향하여 열려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적 칭의론의 바른 이해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정통개혁교회는 칭의의 선언적·법정적 일회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처음 칭의와 심판 날의 칭의는 동일하다는 것을 피력하면서, 택한 자를 끝까지 지켜 주시는 성령의 역사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적 안정 속에 거함으로써, 이러한 종교개혁적·종말론적 심판의 긴장이 상실되면서 명목적 신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적 칭의 교리를 "안일한 기복신앙"이나 "이미 따 놓은 구원으로 안일한 신앙의 삶을 영위하는, 순종과 헌신 없는 싸구려 은혜 교리"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고 종말의 심판 때 우리에게 삶의 결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요구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 겸허히 서는 종말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순종과 성화의 열매 없는 칭의는 본회퍼가 말한 바와 같이 죄인의 칭의가 아니라 죄의 칭의가 되고, 복음은 그 전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2천 년대 들어와 한국교회가 지도자들의 비리와 대형교회 세습으로 사회적 비난을 받으면서 성장이 정체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수가 감소된 이유다. 이제 신자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덕보다는 손해를 보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직장에서 빛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는 삶이 바로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이다. 이것이 바른 칭의의 삶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하여 안다고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3-45). 칭의와 성화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좋은 나무는 최종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바른 칭의는 바른 성화를 결실한다. 그러므로 성화의 열매가 없다면 그 칭의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선한 열매 없는 칭의는 허위(虛僞)다. 좋은 행실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증언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우리 신자들은 칭의의 일회적으로 주어짐의 성격과 종말론적 완성 속에서, 오늘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부르심에 매 순간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안일한 예정 신앙'과 '성화 없는 칭의 신앙'에서 깨어나 선한 누룩이 되고 각종 세속주의 풍조, 동성애, 성매매 자유화, 급진적 이슬람이 밀려오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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