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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과연 성경적인가?

작성일 작성자 참복음
 

칼빈주의 예정론 과연 성경적인가?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가르침

 

 

 

성서적인 입장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딤전 2:4)”신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3:9)"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작정하셨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러한 작정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갈바리를 부인하게 한다.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구절에서 “누구든지(whoever)"는 어떤 사람(anyone)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계속하여 제시하시고,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과 생명을 선택하도록 요청하시는 사실과(신30:19, 수24:15, 사1:16, 계22:17), 한번 은혜를 받은 바된 믿은 사람도 떨어져 나감으로 상실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해진다.(고전9:27, 갈5:4, 히6:4~6, 10:29). 

 

 

   칼빈 무오설(無誤說)이 아닌 이상, 칼빈의 가르침이라도 성경에 비추어보아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 믿어야 하며,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서라도 성경에 일치한 것은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칼빈주의가 아닌 모든 것은 이단으로 돌리는 신학적인 사고(思考)는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칼빈의 가르침이든,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든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한 것만이 진리이다. “주의(主義)”에 얽매이는 것은 성경을 편견없이 이해하는데 최대의 장애라고 생각한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시대

 

   먼저 아르미니안주의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장본인인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한 도르트 종교회의의 역사적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아르미니우스는 종교개혁의 난류가 유럽에 소용돌이 치던 1560년 자유를 애호하던 나라 화란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린 때 그의 홀어머니와 형제들은 가톨릭 신앙을 거부한 까닭으로 그 지방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신앙을 인정한 국내 칼빈주의 유지들은 그를 칼빈주의 신앙의 본거지인 제네바에 유학시켰다. 거기서 그는 칼빈의 동료요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탁월함을 인정받으며 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사랑받는 성직자와 신학 교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이미 칼빈의 예정설이 성경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교회로부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히려 그 자신이 의심 없이 믿어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과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제한 속죄론이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신학적인 확신은, 후에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로 알려진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지금 잘못 소개되고 있는 어떤 내용들은 그  후계자들이 왜곡시켜 놓은 것도 있다.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에 동의하는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늘어나면서 당시 칼빈주의 개혁파가 주도하고 있던 화란은 일대 신학 논쟁의 와중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예정론에 관한 논쟁

 

   아르미니우스들 특별히 적대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교수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F. Gomarus)였다. 고마루스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전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얼마의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타락 전 예정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인간의 타락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되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받게 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하신 선택은 예지하신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했다. 그는 이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령을 거역하였고,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ibid., 253, 254)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사람에 의하여 저항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고 논증했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거듭하여 인용하면서,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 때문임을 밝혔다. 그는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 전 예정설이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서 무엇보다도 반대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신성모독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이, 피조물들을 이미 예정된 멸망으로 저주받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설명하는 것은 비난의 정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선하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밀드레드 와인쿱, 한영태 역,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1987-, 49)

 

 

   그의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은 그를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펠라기우스는 5세기초 영국의 수도승이었는데, 인간은 범죄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 선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했었다.

 

   물론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아르미니우슨 자신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과 일치하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음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Socinus)파라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가르침을 행함에 의한 자력구원설로 규정하고 일부교회까지 이에 포함시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적인 과오를 되풀이하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무고를 당한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주도록 국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참으로 짧았지만 경건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신학적인 능력과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은 그의 비평자들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인정을 받고 있다. 교회사의 대가인 필립 샤프도, “그는 유식하고 유능한 신학자였으며, 그이 생애를 쓰디 쓰게 만든 논쟁의 와중에서도 그는 온유함과 그리스도인다운 정신을 드러냈다.....남들에 의하여 정죄를 받았으나 그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도르트 종교회의 - 개신교 종교재판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칼빈주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논쟁을 성경적인 원칙에 의하여 해결하는 온전한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를 제출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항변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중에 소집된 국회에서 다루어진 두 주장을 종합하여 간략하게 대조시켜 보면 아래와 같다.”(와인쿱, 58. Schaff, 517~519)

 

 

아르미니안의 5개조 전제

칼빈주의 5대 강령

 

1.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심

<조건적인 선택>

 

1.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 <무조건적 선택>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임.

<보편적 속죄>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 <저항이 가능한 은혜>

 

4.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인 은혜>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 <조건적인 견인>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궁극적인 견인>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두 주장이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우선 열렬한 칼빈주의자로 중앙집권제를 주창하던 총독 마우리스 공(Maurice 公)은, 1618년 7월 졸지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정적(政敵)으로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를 주창하던 지방자치주의 국가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와 다른 유력한 아르미니우스 지지자들을 투옥하였다. 그런 다음, 서둘러 같은 해 11월 13일, 이러한 방식의 종교회의를 원치 않은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를 외면하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집한 종교회의가 도르트에서 열렸다.

 

   참석한 102명의 대표자들 가운데 18명은 칼빈주의 정부가 임명한 위원이었고, 아르미니우스파 대표의 참석은 처음부터 봉쇄되었다. 13명의 아르미니우스파 대표는 회의가 시작된 지 여러 주일 후에 죄인의 신분으로 소환되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의장이나 서기 등 모두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모든 결의는 일방적이었다. 교회 사가(史家) 필립 샤프의 말대로 “그리하여 아르미니우스파의 운명은 사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에 의하여 예정된 예정론의 예정대로 된 승리였다. 6개월 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이듬해인 1619년 5월9일 막을 내린다.

 

   결의된 내용은, 예정론의 범위를 그 전까지의 주장이었던 타락 전의 예정에서 타락 후의 예정으로 바꾸어, 타락 후 예정설을 채택한 것 외에는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하고, 아르미니안의 5개항의 건의는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하였다. 동시에 회의 폐막 4일 후인 5월 13일, 국가를 위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이던 아르미니안 정치 지도자 올덴 바르네벨트를 대역죄의 누명을 씌워 처형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로 해양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로티우스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무자비한 강압적인 배경 때문에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도르트 종교회의를 칼빈주의자들이 수행한 로마 가톨릭식의 종교재판이었다고 혹평했다. (Motley, Life and Death of Barneveld, Vol. 2, 309, cited in Schaff, 515).  그리고 수준 있는 토론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능력과 배려의 고상한 질서를 배신”하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정통을 다졌고”, “협소한 신앙고백주의를 재가(裁可)종교회의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혼탁한 분위기에서 형성된 도르트 신조를 지금까지 공적인 표준 신조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는 화란 밖에서는, 미국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기본정신과 성경의 원칙을 저버리고,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외면한 도르트 종교회의 결의사항을 아직까지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개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의 지성과 정서를 몹시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성과 지성을 갖춘 신앙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칼빈의 예정론의 역사적 배경

 

 

 

  예정론에 대한 반응

 

   이상과 같은 위압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칼빈의 예정론이 한 교파의 신조로 굳혀져 지금까지 고수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작부터 성경과 이성에 모두 무리한 논한의 불씨가 되어 왔다. 로마 가톨릭 수도승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한 후 제네바로 망명했던 의사 볼섹(Bolsec)이, 예정론은 하나님을 전제군주로 오해시키는 비성경적인 교리라는 의견을 발표하자 격노한 칼빈은 그를 투옥시킨 후 추방하여 결국 그의 옛 교회로 돌아가게 한 것은 슬픈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칼빈이 자신의 예정론을 개혁교회의 교정 신조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이 옛 신학 동지들이었던 불링거도 자제를 호소했고, 파브리도 유지될 수 없는 교리라고 반대했으며, 멜란히톤은 그것이 헬라사상인 스토아철학의 운명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인으로 고전학자였던 카스텔리오는 로마 가톨릭에서 개종한 뒤, 칼빈에게 와서 배우고 그이 신임을 사서 제네바 고등학교장까지 지냈으며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와 불어로 번역까지 한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고, 하나님의 의지를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의지로 갈라놓았다.”고 비평했다. 그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기 때문에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뿐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다른 문제도 곁들여 있었지만, 그는 결국 파면당하고 축출되었다.

   스위스의 성서주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비블리안더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여 칼빈의 예정론을 거슬렀다 하여 취리히대학의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네바 밖의 다른 개혁교회들도 칼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정부로 하여금 마지못해 자신의 견해를 수용하게 하였다.

 

 

  칼빈주의 예정론의 근원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에는 물론 인간의 이성에도 거슬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물의를 일으키고 반대를 받아온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의 근원은 어디인가? 칼빈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그러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간단히나마 서술하는 것이 예정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그 출발을 성경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예외적인 회심의 경험을 거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관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던 5세기의 교부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의 사상에 기초했다는 사실에 문제의 불씨가 있다. 다음의 명백한 진술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몇 가지 전적으로 새로운 견해를 교회 제도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중 몇 가지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절대적인 예정, 그리고 선택된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이다.”

 

 

   회심 전까지도 헬라 철학에 동양의 신비사상을 가미한 신플라톤 사상에 깊이 몰두했던 어거스틴에게서 칼빈은 예정론뿐만 아니라 영혼불멸 사상도 물려받았음을 이미 앞장에서 밝힌 바 있다. (John Calvinm Tracts and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 Vol.3, 1958, 468, 469)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神政)을 베풀고 있던 때, 자신의 예정론에 이의를 제기한 수도승 출신 의사인 볼섹과 논쟁하면서, 이를 “매우 불쾌하게 느껴, 언성을 높여 반박하고, 성서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예정론이 진실된 교회의 교리라고 변호하였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이나 권위로 성경의 진리라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종교개혁 등 개신교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과 함께 영혼불멸설을 비롯하여, 그의 그릇된 교회관의 영향을 받은 중세교회가 극에 달한 교권주의를 행사했던 불행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계몽된 이성에도 거슬리게 마련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입각한 어거스틴의 무리한 예정론은,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마저도 반감을 갖게 했다. 그들도 타락한 인간의 죄됨과 선을 행하기에 무력한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뜻을 함께 했지만, 그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은 반대했다.

   그 이유로는 그의 예정론이,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절망으로 이끌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보았다.” (J. L. 니이브, 서남동 역, 기독교 교리사(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65), 236) 그들은 “선언하기를, 은총은 누구에게나 베풀어지는 보편적인 것이며, 그리스도는 택한자 뿐만 아니라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며, 예정은 예지(豫知)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어거스틴이 그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발표했을 때 벌써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솔한 신념을 가지고 낙관주의에 빠지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의 공적을 인간적 요인으로 돌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ibid., 235)

 

 

   이러한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 때문에, 죽기 3년 전인 427년에 어거스틴은 두 권의 책까지 써서 자신의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의 교리가 빚어내고 있는 불행한 결과를 막아보려고 애썼던 역사적인 임상(臨床)의 과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렌지 종교회의와 예정론

 

   이렇듯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면서 가열되자, 당사자들은 529년 프랑스의 오렌지(오량쥬)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종결짓기로 했다. 이를 옹호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종결짓는 계기로 삼았다.

 

   이 회의에서는 어거스틴의 예정론 가운데 성경과 이성에 현저히 어긋나는 가르침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사람은 구원하시고 그 밖의 사람은 멸망 받도록 무조건 예정하셨다는 이중예정을 배제하여, 하나님께서 죄와 타락까지 예정하셨다는 오해의 여지를 없앴다. 또한 거듭난 사람이 타락하게 되는 것은 진정한 선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왜곡된 의지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딤전2:4),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하여 제한된 속죄를 반대했다. 구원을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의지 활용이나 선행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먼저 역사해야 함을 확인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인내하며 견디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드려야 한다는 등 25개조의 신조를 채택했다. 이리하여 “적절히 표현한다면, 오렌지 종교회의는 어거스틴 사상에 대한 논쟁의 종결을 표했다.” (ibid)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이처럼 비성서적이고 반이성적이어서 교회와 신앙에 아무 덕을 끼치지 못한 이중예정, 불가항력적인 은혜, 제한된 속죄 등의 주장을 종교개혁과 함께 다시 들고 나와, 도도히 흐르기 시작한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주류를, 5세기 어거스틴의 시대로 역류시킨 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을 양심적으로 반대해 온 허다한 그리스도이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그 이상의 지성적인 대화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는, “기독교는 알미니안주의를 ‘도르트 대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칼빈의 무조건적인 예정보다는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이 더 성서적인 것으로 확신되어 그중에 일부 혹은 전부를 받아들인 교회들이 적지 않다. 웨슬리의 감리교회를 비롯하여 찰스1세 이후의 성공회, 오순절교회, 루터교회, 일부 침례교회 이 모든 교회들은 엄연히 그리스도교이다. “기독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는 혹자의 말은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한 칼빈주의 장로교회 외에는 아무 교회도 정통적인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어감으로 전달된다.

 

   우리 모두가 도르트 종교회의를 지배했던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정신에서 벗어나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의 소신을 경청하고 이를 성경에 비추어 사려 깊게 판단하는 지성을 함께 계발하는 일이 참으로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 예정론의 허실(虛實)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를 제한받지 않고 집행하시는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중세 교황권에 맞서기 위해, 어차피 강조한 하나님의 의지 행사 곧 주권이 그것과 “관련이 없는 신학구조에서도 전체 체계를 지배하는 기본원리의 위치를 차지하게” (기독교 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1985, Vol. 11, 1068)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학적 위상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이 잘못 적용한 하나님의 주권은 결국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기로 (창조전에) 예정하”셨다는 타락전 예정설까지 등장시켜,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죄의 창시자로 오해시킨 것은 중대한 신학적인 과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에 무리하게 결부시킴으로써 범죄로 손상되었을지라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여, 책임 있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웨슬리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선행적(先行的)인 은총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John Wesley, Works, Ⅵ, 512;Ⅸ, 265;Letter, Ⅵ, 240)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예정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서 자녀가 되고 후사가 되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엡1:4~12, 고전2:7, 롬8:29, 행4:27~28).

 

   그런데 위의 네 성경 본문에 나타난 “예정하다” 또는 “미리 정하다”라는 표현은 모두 어느 개인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었다는 개인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타락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이에 대처하여 청조전에 세워놓으신 구원의 계획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역사적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위의 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어느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음이 자명해진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나 택하신 자들의 행사(行事)가 모두 하나님의 “미리 아심”(헬라어 prognόsis, 동사는 proginόskό) 곧 예지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졌음이 다음이 성경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롬8:29, 11:2, 벧전1:2, 20, 행2:23).

 

 

  모순된 이중예정과 제한 속죄

 

   따라서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멸망을 받는 여부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어 있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도록 예정되었다는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은 성경에도 어긋날뿐더러 하나님의 속성에도 조화되지 않는다.(딤전2:4, 딛2:11, 벧후3:9, 요3:16)

 

   칼빈의 예정론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모순에 빠져버린다.(Nichols(ed), 230). 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예정된 대로 당연히 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겔33:11, 벧후3:9, 약1:13, 요일1:5).

 

   이상의 여러 성경에 입각한 논증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Schaff, 516)는 칼빈주의 제한속죄론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크게 왜곡하는 중대한 과오이다. 필립 샤프도, “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한다.”고 지적한 뒤에, “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 요한일서 2장 2절, 디모데전서 2장 4절, 베드로후서 3장 9절 등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만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진술을 밝혔다. 최근 일부 칼빈주의 학자들이 이상의 두 세 성경 본문을 예정론의 배경에서 설명하려 하지만 모두 무리한 시도임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책임과 심판의 당위성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행2:23, 갈6:7~10, 렘6:19, 마12:36, 약2:12,13, 계22:12).  행동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선택은 의지를 행사한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알리시고 순종함으로 생명을 선택하도록 촉구하신 사실은 사람이 가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바르게 행사하라는 요청인 것이다.(신30:19, 수24:15, 사1:16,20, 계22:17).

 

   불의한 이 세상에서도 선택에 필요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정신병자나 어린 아이 등 선택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에 의한 책벌을 받지 않는다.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미리 작정해 놓으신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떻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수 있는가?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당위성을 훼손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전12:14, 마25:31~47, 행17:30,31)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딤전2:4)” 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은혜를 거역하지 말고, 의지를 바르게 행사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을 행함에 의한 자력구원을 시도하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상실할 수도 있는 구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렸던 사람도 불순종이나 나태함으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고전9:27, 갈5:4, 빌2:12, 히10:26~29) 성경에 기록된 많은 실례들은 인간의 불신과 반역, 고의적인 불경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령의 역사가 거절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63:10, 행7:51, 살전5:19, 히6:4~6, 고후6:1~2).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사상이다. 칼빈이 물려받은 바, 선택받은 은혜의 보존 여부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총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ibid., 234)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근거마저도 예정에 돌림으로써, 입증되지 아니한 논증을 다른 논리의 근거를 삼는 순환논법의 모순까지 범하고 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논리에도 어긋난다.

 

 

  사명과 역할을 위한 선택

 

   성경에 언뜻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절대적인 예정으로 생각되는 표현이나 실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의 예정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실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열거한 바,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과 포기의 실례들처럼 보이는 야곱과 에서, 애굽왕 바로, 이스라엘 민족, 진흙과 토기장이의 실례들이 전혀 다른 의를 강조하는 문맥에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인 예정의 문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절대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데 필요한 사람들의 역할과 사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남보다 의롭거나 선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 행사에 의한 것이었다(신7:7~8, 9:11,16). 이러한 선택의 목적은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한 바 치명적으로 잘못된 선민(選民)사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건 없이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도구와 통로로 쓰셔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절대적인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창12:2~3, 18:18, 22:18, 행3:25~26, 갈3:8) 곧 “아브라함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음을 얻”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창22:18, 갈3:16).

 

   그러나 그들이 이 사명을 수행하고 약속된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 조건을 이루지 못한 채 불신하고 불순종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당한 것이다.(롬9:30~32, 히4:1~3, 3:19, 신7:9~11).

 

   이처럼 잘못된 선민사상과 비성경적인 예정에 의한 선택을 믿는 결과가 모두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잘못이 될 수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거울삼아 깨달아야 할 것이다.(고전10:5~12)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불가피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음이 이미 역사에서 분명해졌다.(사49:6, 42:6, 롬9:4~6, 히3:7~19, 4:1~11).

 

 

  옹기장이와 옹기그릇의 실례들

 

   이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과 역할이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용도(用途)에 적절하게 쓰이기 위해 진흙으로 만들어지는 토기와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용도에 맞게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주권을 가진 토기장이의 실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롬9:19~24) .

 

   사도 바울 자신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택한 그릇”이었으며(행9:15), 이러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순종하며 사명에 충실한 결과였지 구원받도록 예정된 선택의 기계적인 결과가 아니었다.(딤후1:12, 4:7~8).

 

   유대인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킴으로 구원의 계획에 한 몫을 감당한 페르샤옹 고레스의 경우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즉 “너는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다.(사45:3,4). 그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통하여 구주를 탄생시킴으로 온 세상이 구원받도록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에 그릇처럼 쓰이도록 부르신 것 뿐이다.(롬9:17,18).

 

   쌍둥이 형인 에서가 장자이면서도 버림을 받은 것은 그가 예정에 의한 선택을 받지 못한 까닭이 아니라, 그의 망령되고 경견치 못한 처신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히12:16, 롬9:12~15).

 

   이상에 열거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역할이나 사명을 위하여 선택하신 “택한 그릇”으로서의 선택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Christ) 구원을 받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심에 따라(엡1:4,5),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요3:16)신 구원” 을 위한 예정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을 구속의 은혜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곧 창세전에 예정된 계획에 따라 구원받도록 선택된 백성인 것이다(벧전2:9).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예지예정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 세상의 장래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것도 미리 아신다.(사41:22~26, 44:6~8, 단2:27~29, 마24:25, 요13:19, 14:29, 행2:23, 벧후3:17) 따라서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표현했다.(롬8:29, 11:2, 벧전1:2)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계획하신 창세전의 예정과,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가 함께 작용하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이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롬8:29)다는 예지예정의 가르침은 이단의 교리가 아니라 성경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최근 일부 칼빈주의 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미리 아심”에 대한 예정론적인 해석은 또 하나의 곡해임을 자세히 읽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하심이 사람의 자유의지 행사에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은 마치 사진기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어 놓지만 그 내용을 바꾸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역사가가 지난날의 사건과 인물을 상세히 알지라도 그것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처럼 선입관이나 편견에 좌우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대하19:2)신”  공의롭고 공평한 하나님이심에 대한 확신은 구원을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신앙이다.

 

 

  요한 웨슬러의 공헌

 

   비록 예정론에 있어서, “칼빈의 전제(前提)는 어거스틴의 결론에 근거”(와인쿱, 36~37)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예정론이 초래한 모순과 부작용을 모두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들이 당면했던 그 시대의 과제와 배경을 고려할 때 더욱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실제로 칼빈 자신도 지금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많은 주장들에 대해 무척 생소할 것임에 틀림없다(ibid., 39).

 

   문제는 오히려 상황에 어긋나게 그것들을 분별없이 발전시키고 적용해온 그 이후이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에게 있다. 다행한 것은 이러한 자체 모순이 크게 시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르미니우스 사후 약 100년 뒤에 나타나 그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발전시킨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성결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칼빈주의 대부분은 아르미니안화한 칼빈주의다. 그것은 복음적이고 선교적이다.”(ibid,, 59)라는 평가에 이르렀다. 특히 “이 나라(미국)에 있는 장로교주의는 아르미니안화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오늘날 칼빈주의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The Dcbate over Divine Elction”,  H. O. Wiley, Christianity Today(Oct., 12, 1959), 와인쿱, 71쪽에 인용함)는 사실은 개인의 견해만은 아니다.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에 특정한 사람이 선택되는 것을 하나님의 예지로 돌리면서 성경적인 부름을 진지하게 취급한다”(ibid., 91). 한국계에도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의 쇄신이 참으로 필요하다. 한국의 많은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성경적인 칼빈주의자였던 아르미니우스가 반대한 베자(Bezq)나 고마루스(Gomarus)의 극단주의를 옹호해왔음을 앞서 살펴본 가혹한 비평들에서 보게 된다.

 

 

  극단적인 예정론의 폐해

 

결  론

이러한 극단주의로 치우친 예정론에 관한 신학이 쇄신되어야 할 필요를 다음에 몇 가지로 요약하면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로, 극단적인 칼빈주의는, 칼 바르트의 비평처럼, “그리스도를 그들의 선택(예정)교리에서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브로마일리의 분석에 의하면, “그들은 보다 우선적인 하나님의 작정(예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거의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그 작정(作定)들을 이루기 위한 보조로서 ‘이끌려 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지 아니한 그리스도교는 없다. “신의 작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둘째로,구원은 반드시 복음적이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그것은 “오직 은혜로” (sola gratia)와 함께 종교 개혁자들이 모처럼 성경에서 찾아낸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이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에서처럼 이 은혜가 믿음을 삼켜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었다. 이것이 선행적(先行的)은총으로, 인류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 은총에 의하여 인간들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믿음 수는 없다.”(ibid., 52)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믿음을 상충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2:8)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믿음이 사람이 의지에 상관없이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예정된 사람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은 인위적(man-made)인 신조이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에 따른 신앙이 아니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결정되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요3:16).

 

 

셋째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었다면 어떤 결과에 이르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구원뿐만 아니라 죄의 창시자도 되신다면, 인간은 왜 자신의 나쁜 행위를 고치려고 노력하는가?” “그것(예정론)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의 목적인 성결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웨슬리의 말은 경험적이다.

 

 

넷째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버리는 운명론적인 생각은 또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위협한다.

 

 

“이러한 ‘결정된 운명’(fixed fate) 신학에는 복음전도의 긴박성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에는 복음전도 계획이 없다.(왜냐하면 인간들을 도채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거르시를 반항이 되기 때문이다.)....일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빌리 그래함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초대하므로 ‘아르미니안’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가 야기하는 혼란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ibid., 63) .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라는 제목의 웨슬리의 설교는 이러한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다.

 

 

“만약 ‘선택’이 옳다면 모든 설교는 헛되다. 선택된 사람에게는 설교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필연코 구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의 목적은 그들과의 관련에서 볼 때 공허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설교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필연코 멸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정에 관한 교리가 하나님의 교리가 아님을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로 만들기 때문이다.”(ibid., 32)

 

 

   그것은 분명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는 위대한 사명을 약화시키는 신학적 요인이 될 수 있다.

 

 

다섯째, 무조건적인 예정론은 선택받은 개인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는 신학적인 근거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아무도 자신이 예정되었는지의 여부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처신에 관계없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언제나 의심스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그것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고후13:5)할 수 있는 방법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롬8:24)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마지막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신학의 극단주이는 언제나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이단 사냥’(heresy hunting)의 편협한 신학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견해 차이는 성경에 비추어 활발히 토론하고 연구함으로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라도 다음과 같은 요한 웨슬러의 정신은 여전히 유지되어야 한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것과 같은 것처럼 당신의 마음도 그러한가요?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하면 당신의 손을 내게 주시오. 견해나 용어의 차이를 무릎쓰고 우리 복음의 신앙을 위해 투쟁합시다.”(ibid., 12)

 

 

  생각하는 “상한 갈대”

 

판  단

지금까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된 예정론에 관한 비평과 변증을 상고하며, 마음으로 참여한 독자는 어떠한 이해에 이르게 되었는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결정된다고 생각하는가? 범죄한 인간은 이미 부러졌고, 하찮은 바람에도 또 다시 부러지는 “상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한 이성과 꺽인 의지를 가지고도 여전히 “생각하는 갈대가 아닌가?”  이 “상한 갈대”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하여 이슬처럼 일할 때, 놀랍게도 상한 갈대는 반응한다. 반응하고(respond), 반응할 수 있고(responsible), 또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반응하는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책임(responsibility)이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죄 때문에 독립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되기는 했어도 인간성의 흔적도 없을 만큼 파멸되지는 않았다. 죄됨에 억눌리고, 연약함에 압도되어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만 부질없는 숙명론에서 벗어나, 상하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야 한다. 상처를 드러내고 아픔을 호소해야 한다. 그리할 때, 마침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사42:2)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데 이르기를 원하”(딤전2:4)셔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영원한 예정인 것이다. 이 놀라운 변치 않는 예정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지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변치 않는 예정이 자신의 운명이 되도록 지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피해서는 안 될 숙명이 것이다. 어떤 운명을 택하겠는가?


  1. 믿음은 가졌으나 결국 구원받을 수 없게 만드는 잘못된 8가지 가르침들(히3:7~4:1)_2019-01-09(수)

  2. 예수믿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는가?(행3:19)_2018-10-21

  3. [퍼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_미국 사랑과 진리교회 벤자민 오목사

  4. [퍼옴] 칭의론에 대한 한국최고 신학박사 토론, 김영한·최덕성박사, ‘김세윤 칭의론’ 놓고 대담.

  5. [퍼옴] [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I)

  6. [퍼옴] [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

  7. [퍼옴] [김영한 칼럼]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

  8. [퍼옴] 칼빈주의 예정론 과연 성경적인가?_참복음

  9.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바른 구원론에서 점점 더 무엇을 빠뜨렸는가?(계3:1~6)_2018-07-10(화)

  10.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지옥에 갈 수 있는가?(계3:5)_2018-07-12(목)

  11. 예정론에 기대지 말고 주님의 본을 따라가자(요6:35~40)_2018-05-20

  12. 요나서는 칼빈주의의 만세전예정을 지지하고 증거하는가(요6:33~40)_2018-05-18(금)

  13. 예정론, 과연 성경으로부터 나왔을까?(롬9:10~13)-2017-10-20

  14. 믿는 자들도 타락할 수 있는가?(히6:4~8)_2017-10-15

  15. 구원은 상실되지 아니한다는 주장은 과연 성경적인가?(요3:16~21)_2017-10-13

  16. [퍼옴] 이 시대의 면죄부로 전락한 이신칭의 경고_김세윤 박영돈 비교분석

  17. [퍼옴] 순종과 회개의 열매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지 못한다_박영돈교수

  18. [퍼옴] 칭의와 성화 분리 될 수 없다_김세윤 교수

  19. [퍼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빌2:12)_데이빗 파슨목사

  20. [퍼옴] 칭의론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_고신대대학원 교의학 박영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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