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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녀의 죄들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하나님께서 그녀의 불법들을 기억하셨느니라. (계18:4-5)
R i g h t l y d i v i d i n g t h e w o r d o f t r u t h S e r i e s 6
www.cbck.org
사랑침례교회
마틴 로이드 존스·구영재 지음

20230126_163705[크기변환].jpg


목 차 1
목 차
천주교의 본질1) ······································································································ 2
종교와 복음2) ······································································································· 18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3) ······································································ 29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4) ································································ 38
그리스도를 찾은 사제5) ························································································ 50
천주교회가 주도하는 종교 통합 운동이 확산되면서 2013년 가을에는 한국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열립니다. 이런 배도의 시점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과연 천주교는 기독교와 같은가?
장로교회의 걸출한 복음주의 설교자 중 하나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천주교
체제를 가리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다릅니다. 천주교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복음입니다.
이 책자에서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구영재 선교사님 그리고 전직 카톨릭 사제였던
자켈로 박사님의 글을 통해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의 심연을 파헤치려 합니다. 천주교
를 바로 알아야 마귀의 간계를 파악하여 배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독자들에게 성령님의 조명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 ‘마귀의 간계’를 주제로 한 시리즈 설교 중 하나인 본 설교에서 20세기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 박사는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첨가시킨 로마 카톨릭 시스템의 간교함이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파고 들어와 파멸을 가져옴을 잘 보여 준다.
2) 이 글은 벨기에와 캐나다에서 30여 년간 사역하신 구영재 선교사의 글이다.
3) 이 글은 캘리포니아 주 로스오소스에 있는 ‘Fundamental Evangelistic Association’의
레이놀즈가 천주교와 연합하여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려는 빌리 그래함에 대해 <Billy
Graham, the Pope, and the Bible>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번역한 것이다.
4) 이 글은 ‘Mission to Catholics International’에서 발간한 <St. Francis: The Man
and The Myth>를 번역한 것이고 앞부분과 어거스틴 부분은 구영재 선교사의 글이다.
5) 이 글은 50명의 전직 카톨릭 사제들의 구원 간증을 담은<Far from Rome, Near
to God>에서 자켈로 박사(Dr. Joseph Zachello)의 간증을 번역한 것이다.
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천주교의 본질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6:11-12).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이제 크리스천 지성인들은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회의가 개최됩니다. 또 이 같은 일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제 우리 즉 카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어떤 측면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크리스천 정신을 놀랍게
구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 같은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볼 때 이 문제가 긴급한 문제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우리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카톨릭교도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다수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될 일들을 예상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비 카톨릭 국가인 우리나라 ― 영국 ― 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다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주시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 해 동안 로마 카톨릭 주의에 항거하는 일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실질적으로 증가하고
Roman Catholicism
천주교의 본질 3
있으며 프로테스탄트들의 부정적인 항거 노력은 별 효과가 없음이 기정사실로 드러났
습니다.
이처럼 로마 카톨릭 주의가 확산된 원인은 자기가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무지함과 무기력함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시간을
들여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으로 인해 저는 이 문제 곧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간계’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었습니까? 먼저 저는 오늘 개개인에
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카톨릭 신자이면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 신자이면서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 드리고자 하는 바는 카톨릭교도로서 크리스천인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 때문에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고 그런 체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구원받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개인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치적 측면이 매우 중요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 체제의 역사적 증거 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그 체제가 스스로를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정치적 측면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일반 성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이 관여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영적인
측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며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
자,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로마 카톨릭 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
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기독교의
믿음과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이므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16세기
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보통 배교를 가리켜 ‘기독교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어떤 이들은 “글쎄요, 지금 당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겁니까?”라
4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교 체제요, 배교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를 분명히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해서 배교
체제가 되지 않았고 기독교의 진리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거기서 이탈하여 배교
체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마귀의 온갖 간교함이
들어오며 마귀의 간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정통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통성에는 전혀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
셔서 하늘에 앉아 계심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에 관한 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적으로 정통입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이런 점에서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입장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보더라도
그들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혜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런 면에서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위와 같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아 마땅한 첨가물’ 즉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는 그 체제의 거짓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교리는 그럴듯한 위조품이며 성경이 기록한 대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다름 아닌 계 시록의 음녀입니다.
참으로 이 문제는 지극히 교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간교함’ 즉 마귀의 간계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간교함이 어떤
천주교의 본질 5
것인지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 체제의 간교함은 너무나도 커서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이런 사례를 여러 번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카톨릭교도가
이혼할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일부 고매한 카톨릭교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반문하곤 합니다.
글쎄요. 사실 그들은 이런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결코 참된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해명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궤변 체계가 이러하며 고도의 논법이 이러하므로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 대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로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 나라 ― 영국 ― 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미국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남미의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즉시 그것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비슷한 조건의 국가들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독일이나 기타 그와 비슷한 국가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장 그 체제가 국가마다 서로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동일한 로마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모두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얼마든지 자기의 색깔과 모습과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는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장시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으며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기를
변장하는 데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 ― 영국 ― 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주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또 비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미신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천주교가 관용을 베풀고 기꺼이 의견을 들어 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친근한 모습을 취하지만 다른 후진국에서는 아주 인내하지
못하며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6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체제이며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시스템이라는 저 거대한 교회와 체제는 온갖
간교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갖 불의의 속임수 가운데서
마귀의 간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즉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예언의 말씀이 이것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이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부상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기관은 이미 세상의 권력을 장악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계시록 13장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둘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 계시록 17장에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로 제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체제는 늘 이러했으며 지금도 이러하고
앞으로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실제로
이 체제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성취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회 내로 몰래 기어들어와 한때 기독교회 전체를 실질적으
로 독점했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이 체제가 천천히 간교하게 기독교회 속으로 기어들어와
자기 방식대로 일하면서 기독교 세계를 장악했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세상 권력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대 오류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과연 어떤 일을 행했을까요?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루자면
최소한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설교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저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여 주는 몇몇 중요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했는가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크게 정죄를 받는 행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새긴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이 형상들에게 경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상과 조형물과 초상화를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큰 천주교 성당에 가 보셨으
천주교의 본질 7
면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사도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 동상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면 그 발가락 중 하나가
닳아서 매끈매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희생물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과 동상과 유물에 경배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과 뼛조각과 그가 사용하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서 그것을 특별한 장소에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상숭배입니다.
2. 커다란 오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
다. 그들은 분명하게 “카톨릭 교회 밖에서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구원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 사이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 자신에게 그와 같은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 같은 주장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로마 카톨릭 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자기만이 진리를 묘사하고 진리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당연히 그와 정반대로 모든 신자의 보편적 제사장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바르게 말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성경의 종결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계시가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에다 그런 계시들을 첨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덧붙인 전통(전승 혹은 유전)도 성경과
8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취해 온 기만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
는 것들을 자기들의 전통에 첨가시켜 왔으며 바로 여기에 이 체제의 간교함이
놓여 있습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 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전체주의1)가 요구하는 그런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우리가 믿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교회는 자기가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 준 대로 그리고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주의는 획일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시스템은 공산주의가 자기 백성의 혼과 자유를 유린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히틀러가 자신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속한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실로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전체주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 권위를 가진 존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보여 주는 둘째 증거 혹은 이 문제로 인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입니다. 교황은 보통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일컬어집니다. 그들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면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영적 직계 후손이며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 즉 성부(Holy Father)라 부르며 극도의 신성 모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아버지는 단 한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밖에 없으므로 땅 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말라.” 이들은 이 같은 명백한 말씀을 어기면서 교황을 ‘성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추기경 회의에서 “권위 있게 선언한다.”라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
무오하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1870년에 교황무오설을 교리로 규정하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되었기에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 무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선언은 그리스도 그분처럼 절대 무오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이 보다시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이
말씀하듯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 밑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1) 이론상 개인적인 자유를 전혀 허용하지 않고 개인생활의 모든 측면을 정부의 권위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정부 형태
천주교의 본질 9
어느 누구에게도 바칠 수 없는 경의와 흠모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
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제사장 체제’ 즉 ‘만인 제사장
체제’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즉 사제들(Priest)2)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다 제사장 왕국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제사장(사제)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서 성직 수임을 받은 이 사람들만이 사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례 받는 물에 임하게 하려고 사제가 세례 때 사용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제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3)과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종 ‘화체설’이
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제가 주는 빵이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빵의 겉모습과 색깔은 그대로이지만
그 본질은 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화체의 기적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성사(혹은 성례전)에 관한 교리로 이어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지만 저는 이 중에서 특별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성사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서슴없이
2) 천주교의 사제는 구약의 제사장을 뜻하는 ‘priest’이다. 그들은 신약시대가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시대의 제사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사제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Father’라 부르게 하며 한국에서는 이를 신부(神父)라고 한다. 신부란 곧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타이틀이다. 그래서 본서에서
는 ‘priest’를 신부라 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제라 번역하였다.
3) 예수님은 주의 만찬에서 떡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또한 포도주를 사용한 적이 없다.
주의 만찬은 유대인들의 유월절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간에는 온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과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포도 주스를 사용하셨다. 누룩은 썩게 하는 것으로 누룩이 들어간 빵과
포도주는 결코 우리 주 예수님의 순수한 살과 피를 상징할 수 없다.
10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합니다. 사제가 물과 빵과 포도즙에 기적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 이것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며 이런 기적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것을 가리켜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세례 성사에 적용하자면 물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뿌리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혹은 천주교 성찬식4) 의 경우 신도가 빵을 취하여 먹으면 ― 주의 만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즙은 일반 성도들이 마시지 못하게 합니다. ― 그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이며 치밀한 간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주교회가 첨가한 것으로서
신약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곧 신도들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사제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면죄를 선언하고 죄들의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자들 곧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결코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로마 카톨릭 체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왔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분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지만 카톨릭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이제 넷째로 드러난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의 마리아 숭배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으며 우리 모두가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당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럽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가 있으시므로 너무 엄격하신
4) 천주교에서는 주의 만찬을 성사 즉 자기들에게 은혜를 부여하는 성례전(sacrament)으
로 여기기 때문에 성찬식이라고 하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주의 만찬이라
고 부른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부여하는
수단이 아니다.
천주교의 본질 11
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를 설명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무서우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직접 다가갈 수 없지만 다행히도
마리아가 거기 있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며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中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모 마리아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점진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무엇인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그들은 주후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정식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무염시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신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그들은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곧 마리아가 일반
사람처럼 죽어 묻힌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 예수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 주고 그녀를 부각시키며 결국 그리스도를 시야에서 가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에 이어 ‘성인’ 숭배가 추가됩니다. 카톨릭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을까
요? 자, 그들의 가르침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삶을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공덕’을
획득하여 쌓아 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넘치도록 공덕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나 내가 공덕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고 간청해서 그들이 보유한 여분의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여분의 공덕을 나누는 일’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에게 공덕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들의
공덕의 여분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공덕이
성인들에 의해 추가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이단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반적 체제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교묘히 기어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그분의 성육신, 처녀 탄생 및 다른 정통 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첨가를 통해 마귀의
간계가 들어옵니다. 언뜻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다 너무나도 잘못된 것들을 첨가하기 때문에 궁극적으
로 우리는 그 옳은 것 중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1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간계입니다.
3. 이제 저는 셋째 오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의 위치를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저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함과 충분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첫째 예로 그들이 칭의(Justification)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칭의는 교회의 흥망성쇠를 가늠하
는 시금석이며 프로테스탄트를 존재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칭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따금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칭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 주의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 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선한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로마 카톨릭 주의는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전 세계 많은 국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죄성을 지닌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을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자신의 칭의를 위해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반면에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아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 즉 똥과 같고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사람의 의에도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
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고 여러분 안에 의가 주입되어 여러분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원죄가 말소되며
동시에 이 같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로마 교회는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지 않고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위험한 이단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체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이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런 체제하에서 사람이 회개하
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제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 모든 것이
천주교의 본질 13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체제 안에서는 모든 일에서 교회와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
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며 반드시
중간에 낀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중재자가 있으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
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이처럼
그들은 중대한 칭의 교리에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천들의 생활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강조하기보다 의식과 의례를 준수하는 것을 더 강조합
니다. 천주교회는 거룩함을 추구하고 성화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체제 속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을 강조하거나 신자들
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의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키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 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해야 하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사제를 찾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미사를 통해 죄가 덮어졌고 여러분은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
므로 이제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가도 됩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 즉 아주 간단한 삶 대신에 여러분은 의식과 의례와 절기를 준수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이들이 구원의 확신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당신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이 세상 삶에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반박하는 내용이며 이것은 어느 면에서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마귀의 것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사실 마귀
외에는 비범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 만한 존재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가 말소되고 여러분
은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세례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14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덮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사역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죄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반드시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의 종말을 맞게 되면 세례 이후에 지은 죄 문제로 인해 지옥 정죄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때 과연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만이 여러분
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하면서 사제에게 특이한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러면 궁극적으로 면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문제를 거의 다 풀어 주었지
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연옥이라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죄 즉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의 친척들이
우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온갖 면죄부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촛불과 그들이 지불한 돈을 소유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내면 낼수록 연옥에서 이러한 죄들이 더 빨리 처리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속히 옮겨갈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추가 계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한 마디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그분의 공덕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배교
집단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결 론
이 모든 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카톨릭교도들은 무지 속에 갇혀 있으며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가 종종 ‘대륙의
일요일’이라는 생활 방식에 젖어들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천주교의 본질 15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 날의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체제를 따르면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이렇게 된다 해도 그리
놀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로부터 그리하지
말라는 호소를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일러 준 대로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교회에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궁극적으
로 교회가 그들의 영혼을 돌봅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마침내 그들은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잔인한 핍박을
가해 왔으며 사실 이런 핍박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렸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어느 곳에서나 그런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시간만 낭비했을까요? 과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할까요? 다른
방향에서 로마 카톨릭 주의를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 - 종교 통합을 추구하며 천주교회
를 주 예수님의 교회로 인정하는 것 - 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기뻐해야만
할까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다 같이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에 대해 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위조지폐와 같이
기독교를 위조한 체제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바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자주색 옷을 입은
여자’이며 가장 끔찍한 속임수의 극치를 이룬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가 하나님
의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 체제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무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결코 편견을 지닌 열성분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어리석
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 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습
니다. 루터의 눈이 열렸고 칼빈의 눈이 열렸으며 낙스의 눈이 열렸고 모든 개혁자들의
눈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열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성경 속에서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이 체제를 저주하며 그것에게 경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목숨을 내걸고
일어서서 이 체제와 맞서 항거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 괴물 체제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성경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체제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성경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진리를 위해 용감히 죽었습니다.
16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로
접근하려는 갖가지 시도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곧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시도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기독교 순교자들의 처형장이었
던 스미스필드(Smithfield) 근처도 가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서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브래드포드와 나머지 프로테스탄트들
이 로마 카톨릭 주의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화해의 시도를 수용한다면 그것은 곧 이 프로테스탄트 선구자들
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했어. 그들은 실수를
범했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화해론
자들의 그럴듯한 논쟁에 말려들지 말기 바랍니다.
천주교 문제가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된 것은 무선 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대중 매체에 이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매우 예의가
있고 친절하며 훌륭하고 무척이나 융통성 있게 보입니다.
그들은 종종 우리 프로테스탄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렇게 천주교의 외양을 극구 칭찬하면서 금방이라도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과거만 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목사님은 20세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가 가장 큰 교만을 부리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거만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체제가 변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우리는 절대
무오하며 교황은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코 실수를 할 수 없다.”고 이미 굳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주의의 핵심 주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체제는 자기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동일합니다. 혹시 변한 것이 있다면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실로 이 체제는 16세기에 자기가 가르쳤던 것들에다 교황의 절대 무오성
같은 교리들을 추가시켰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입니다.
천주교의 본질 17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위조품이요, 가짜 교회이며 가장 저질의
매춘부요, 세상에서 가장 마귀적인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거절하고
정죄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기독교뿐입니다. 듣기 좋게 “그리스도께
로 나오십시오.”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기독교는 단 1초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천주교도들의 숫자만 불려 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
들이 집회를 하면서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천주교회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위조품 교회에 대항해
서 맞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뿐입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
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도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신학자였으며 칼빈도 그러했고 개혁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진리의 체계를 제시하고 상세히 가르쳐
줄 때에 천주교회가 타격을 받고 그 체제 전체가 뒤흔들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카톨릭/프로테스탄트 교류 및 화해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
중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거짓된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은 거짓 체제에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분과 저의 책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똑바로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으며 성령님의 복을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께서
강력한 부흥과 함께 우리에게 임하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오직 이 같이 강력한
부흥만이 이 가증한 체제 곧 자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부르는 저 큰 음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현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깨워 주옵소서.
Religion & Gospel
18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종교와 복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죄 아래 있는 인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을 찾으면서 여전히 흑암 중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에’, ‘마지막 날들에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2; 9:26). 죄들의 용서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는 복음이 선포되었
고 ‘동트는 때가 높은 곳으로부터 인류에게 임하였다’(눅1:77-78).
세상 끝에 주어진 복음은 인류의 마지막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처음과 끝이 분명한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처음부터 끝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터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모든 일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고 말씀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고 말씀하신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누가복음 2장은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천군 천사들의
대 합창소리로 꽉 차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눅2:10).
천사가 “큰 슬픔의 종교를 너희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은 종교가 아니다. 이 복음을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키
려는 마귀의 궤계는 늘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가라지로 심겼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실 것을 헤롯에게 고했으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적 무리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
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39-40).
1984년, 로마 교황의 벨기에 방문을 앞두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단넬스 추기경이
발표한 3·18 선언 즉 “카톨릭교도는 기독교인보다 더 종교적이다.”라는 말은 우리에
종교와 복음 19
게 적어도 두 가지 진실을 제공한다. 첫째, 천주교는 기독교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 그들 중 어떤 이는 대단히 종교적이란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을 때 사실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가 종교와 상관없는 ‘복음’임을
알지 못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어느 자매가 기독교인 신랑을 만나 그 집안을 존중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가 은연중에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란
단어의 의미를 독자는 잘 음미하길 바란다(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종교(Religion)란 단어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님도 종교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전 성경을 통해 단 5번 언급된 이 단어는
종교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이 전부이다(행
26:5; 갈1:13-14; 약1:26-27). 반면에 신구약 성경에 120여 번 줄기차게 언급된
복음 즉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말씀한다.
종교는 인간을 규율의 틀에 묶어 질식 상태에까지 끌고 가서 결국 복종하게
만든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을 종교라는 감옥에 처넣고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정신을 말살하여 자유로이 생각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약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후3:17)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 종교가 복음을 대신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추구하면서 신앙의 모든 결단과 모험으로부터 도망가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의 틀을 만들고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열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 안에 머무실 수 없는 분이다. 종교는
전통과 제도와 의무를 분담해 줄 사제를 만들어 낸다. 사실 종교가 만든 규율 및
법전은 결단성 없는 자에게는 복음보다 더 편리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들 때까지 변형된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라는 우상의 고향이다.
성도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마5:18)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터를 닦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히3:1)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을 발견한 천국 백성이다. 이렇듯 광야의 소리, 물가의 복음은 종교와 상관없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는 염소들의 놀이터가 되어 하나님의 대언자
들을 늘 돌팔매질로 맞이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
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23:37)라고 탄식하셨다.
오늘날 예루살렘 시에는 여러 종교의 견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20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복음은 처음부터 종교와 무관하였다. 종교의 상징이던 예루살렘 시 바깥에 위치한
베들레헴의 구유 통에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
의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복음은 예루살렘 시 바깥에 있던 갈릴리에서 힘을 얻었다.
인간의 전통에 중독된 자들의 질문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등과 같이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규율에 매이지 아니하셨고 이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 시의 스캔들이 되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종교적 환경을
떠나 산꼭대기 변화산 위에서 변형된 자신을 보여 주셨다.
종교 안에서는 ‘나’를 부르짖지만 복음 안에서는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주님 우선주의가 생긴다. 종교는 전통
자랑, 건물 자랑, 인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dung) 즉 똥으로 보았던
것이다. 종교적 출세주의자들은 직분을 직위와 감투로 착각하고 섬기려는 자세보다
군림하려 들며 그래서 이들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방해를 받는다.
직분을 받은 자들이 종교 안에 머물 때에는 저 옛날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소명을
받았을 때 토해 낸 고백 즉 “내게 화가 있도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을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인은 자기 편리한 대로 말씀을 써먹지만, 기독교인은 말씀(그리스도)에 의해
쓰인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도 용납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도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셨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가지고 종교 놀이에 빠졌던 지도자들을
꾸짖는 곳에서는 가장 큰 분노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분께서는 종교인들의 죄악에
대해 3년 반이나 물고 늘어지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너희 눈먼 안내
자들아,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회칠한 무덤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장)
그들은 육백 가지가 넘는 율법을 지키는 데는 대단한 노력을 경주했으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한 가지 명령은 지키지 못했다(요13:34-35). 실로 그분은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했다. 그 결과
그들의 교만은 시기와 증오로 변해 결국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이 조롱하는 예수, 그분은 종교(예루살렘) 바깥으로 끌려 나가 처형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종교와 복음 21
종교는 부패한 인간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복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중에서
나온 ‘복된 소식’이다. 이 길은 ‘좁은 길’(마7:13-14)이기에 우리 주님은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눅12:32)고 위로하셨다. 외형적인 것은 점점 크고 비대해
지며 목청도 높아지는데 속은 비어가고 진리의 증언은 자취를 감춘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이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준다.
외양의 크기로 성공을 과시하고, 내가 헌신자라면 많은 사람과 돈이 필연적으로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외양의 크기와
영적 세력이 병행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을 가르치신
다(이것은 특히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자리를 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 인간은 큰 사업과 큰
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강조는 육에 속한 일이다. 낡고 중생하지
못한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육에 속한 오락과
습관 이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낙타와 하루살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21세기 초엽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될 배교(살후2:1-8)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여 사탄이 수천 년 동안 동원한 수법 즉 “대화로
풀어 보자.” 등의 감언이설에 속아 천주교와의 일치 운동에 빠진 자들 곧 하나님보다
더 선한 체하며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양들을 이끌고
이리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저들의 미소 뒤에 숨겨진
칼을 보지 못하는 소경 지도자들은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대로 ‘적응 및 타협의
명수’로 둔갑하였고1)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한국 교회는 이제 로마화 즉 바빌론화
되는 재난에 처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붕괴되는 아파트와 같을 것이다.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온 침입자 - 사탄의 에큐메니즘 세력 - 에 의해 아파트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데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 - 교단 및 개교회 - 은 자기
집 하나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결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타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은색을 검다고 힘주어 말할 때 사탄의 세력은 그를 부정적인
자, 종교적으로 완고한 자로 몰아붙인다. 그래서 때로는 검은 색을 희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자 즉 진정한 의미의 완고한 자가 논쟁에서 승리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언제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래서 비열한 인신공격은 결코
크리스천다운 행위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결코 이런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기만해 오고 있는 조직 즉 ‘한 몸에 두 혼’(종교와
정치)을 공유한 바빌론 조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 부디 이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1) F. A. Schaeffer, 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 Crossway, 1984.
2) Paolo Prodi, Papal Prince-One Body and Two Souls: The Papal Monarchy
2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바란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그 엄청난 가공할 교리들과 그 끔찍한 과거의 역사 앞에
어찌해서 다 벙어리가 되었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탄의 최대 보루인 천주교에
무지하여 하루살이 이단들은 걸러 내고 오히려 이단들의 어미요, 초대형 이단(Super
Cult)이라 할 수 있는 천주교(낙타)는 삼키는 일치 운동에 깊숙이 빠져 있다. 또
마땅히 입을 열어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이 모양 저 핑계로 입을 다물고 있어
요한복음 12장 42-43절 말씀이 진리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 치리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되
바리새인들로 인해 회당에서 쫓겨날까 염려하여 그분을 시인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
지도자가 죽어도 흩어지지 않는 이단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자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요직을 잡고 있는
이러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다.
지금이야말로 먼저 교회 안을 급히 돌아볼 때가 아닌가?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가지고 단순하고도 순전한 복음을 요란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자들 즉 스스로
지혜롭다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이제는 점검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없이 멀리 떠났고 그래서 이제는 바빌론 종교를 답습하여
저들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심지어 저들이 변한 것으로 착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한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기독교이다. 천주교와 일치 운동에 빠져
있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믿고 있는 천주교도들은 성경과
로마 카톨릭 주의 이 둘을 다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생명과 사망을
가른 것처럼 옛 대언자들의 기개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가르지 않는다면 양들은
계속해서 여전히 방황하게 될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바티칸의 베드로 광장에 바빌론 종교의 심벌인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세계 통치를 꿈꾸었던 카이사르(시이저 혹은 가이사)의 재를
담은 청동 지구본을 올려놓았다.3)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하며 지상의 세속
통치권을 주장해 온 로마 제국의 후예들은 그 재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세속 권세를
추구해 왔다.
천주교 사제 플레처(Philip Fletcher)는 그가 편집하는 천주교 기관지에서 “만일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면 그는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
다.4) 일명 이그나티우스 사제로 불렸던 스펜서 경(Hon. G. A. Spencer)은 “로마
in Early Modern Europe, Cambridge, 1988.
3) R. Krautheimer, Rome, Profile of a City, 312-1308, Princeton, 1980.14).
종교와 복음 23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그것은 마귀의 걸작품이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5) 로이드 존스(1899-1981) 박사는 그의 시리즈 설교 ‘마귀의
간계’(엡6:11)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귀의 최대 걸작품이다. …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로마 교회 즉 천주교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약 로마 교회가 변한다면 스스로 과거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로마 교회는 같은 모습으로 남는다. …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6)
또한 그는 1969년 영국복음주의협회에서 선포한 메시지에서 고린도전서 14장
8절 말씀 즉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할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7) 그는 또한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예수께 나오세요.’ 혹은 ‘그리스도께 나오세요.’라고 설교하는 기독교는
로마 종교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복음주의 전도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이
“당신은 천주교인이세요? 그렇다면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8)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고전어학자이자 영국 왕실의 헨리 8세의 주치의이며 또
완숙한 카톨릭교도로서 말년에 천주교 사제로 서품을 받았던 리나크러(Thomas
Linacre, 1460-1524)는 생전 처음 신약성경을 읽다가 그 안의 진리를 보고는 견디지
못해 그 책을 던지면서 “이 성경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9) 그는 첫눈에 로마 교회의 조직이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회의
개념과는 상반됨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로욜라 심리연구소 창설자로서 세계 천주교 심리학자 및 정신병 학자
모임의 국제 위원회 부회장이라는 요직을 겸하고 있던 전 예수회 사제 신학자
파드로사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학 논쟁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다가
거듭난 후 로마 교회를 떠났다. 이것은 1950년대 전 유럽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4) The Vicar of Christ or Antichrist, (Guild of Our Lady of Ransom, Feb.1914).
5) B. Porcelli, The Antichrist, His Portrait and History, Peters, 1943.
6) D. M. Lloyd-Jones, Roman Catholicism, Evangelical Press, London(이 책자는
본서의 앞부분에 실린 로이드 존스의 바로 그 글이다).
7) D. M. Lloyd-Jones, The Trumpet Yields an Uncertain Sound, British Evangelical
Council Audio-tape, 1969.
8) Bible League Quarterly, Oct/Dec, 1981.
9) A. Hislop, Two Babylons, Loizeaux Brothers, New Jersey, 1959/1916.
24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후에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여러 책을 집필하였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는 기독교이다. 천주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10)
지난 20년 동안 36판이나 인쇄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 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렸고11) 맥도웰도 이단들의 특성 11가지를
언급하였다.12)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들의 특성에 완전하게 부합될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대 바빌론의 신비’ 즉 천주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눈이
가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바빌론의 신비는 전 성경의 구석구석에 밝혀져 있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저 큰 도시’(계17:18)에 대하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석가들도
별수 없이 저들의 교부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둘째 바빌론 로마, 서방의 바빌론 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빌론으로 불리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역사가이자 변증학자였던 이탈리아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 추기
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빌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 예수회 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
추기경은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빌론이라 부르고 있다.”고 썼으며 루이
14세로 하여금 낭트 칙령을 번복하게 함으로 프랑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인 보쉬에(J. B. Bossuet, 1629-1704) 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나도
분명하여 바빌론에서 로마를 찾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 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빌론이 로마라고 가르쳤다.”고 시인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1890) 추기경은 1840년 로마 교회에 가담하기
전에 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 즉 매우 후미지고 으슥한 땅’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 예수회
학자 헌터(S. J. Hunter)는 그의 저서 <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빌론이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하였다.13)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로마의 특성은 바빌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14) 1970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판 천주교 성경의 계시록 14-18장에 나오는 바빌론에 대한 관주 설명은
10) Luis Padrosa, Pourquoi ai-je quitte le catholicism?, Tell, 1973.
11) W. Martin, The Kingdom of Cults, Bethany House Publishers, 1985.
12) J. McDowell & D. Stewart, Understanding the Cults, Here’s Life Publisher,
1982.
13) “Outlines of Dogmatic Theology”(Vol.1).
14) Andre Chastel, The Sack of Rome, 1527, Princeton, 1983.
종교와 복음 25
모두 그것이 로마임을 밝히고 있다.15)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
로마 교황권 제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 예수회 사제로 지낸
휀스브뢰흐(G. P. Von Honsbroch)가 지은 <사회 문명에 미친 교황권 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 제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제도로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 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 … 교황권
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하며
넓으면서도 은밀히 짜이고 고도로 마무리 된 조직이다.
또 그는 자기의 다른 저서 <교황권 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황권 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 정치 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세계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 … 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 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 자칭하지만 … 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어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다.16)
영국의 사회 철학자이며 정치 경제 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는 그의 명저 <국부론>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이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 교회는 국가 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 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
교회 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l901)은 이보다 더 단호하다.
15) Catholic Study Bible-New American Bible, Oxford, 1990/7he American Bible,
Thomas Nelson, 1990+1971/La Bible de Jerusalem, Cerf, Paris. 1973.
16) ‘Ultramontanism’ 산을 넘어가는 주의‘ - 북서 유럽의 산을 넘어가면 이탈리아가
있고 따라서 이것은 최후의 충성을 로마 교황청에 바친다는 뜻이다. 이 사상의 발전에는
재조직된 예수회의 공헌이 막대하였다.
26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로마 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즉 전제 독재국이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성경을 꿰뚫고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라
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 로마 제국주의의 영광인 세상 권력만을
추구해 온 로마 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그것은 패망한 로마 제국의 유령으로 그 무덤 위에 왕관을 쓴 채로
앉아 있다.”라고 기록하였다.17)
이 바빌론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
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 K. Clifford, 1845-1879) 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 사제로부터 피신시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
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축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18)
17) E. Paris, Vatican Against Europe, Wickliffe, London, 1988-1961.
종교와 복음 27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로마 종교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이 본질이 언젠가는 선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큰 바빌론의 신비를 오해한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복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회의 종교화 현상을 쳐다보는 것보다 슬픈 것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우상의 소굴처럼 둔갑한 오늘날의 교회 내의 장식과 강대상을 보라. 이것은
타락의 극치이자 최대의 위기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탄의 종교가 자기와 닮은
기독교에 침투한다. 그들은 기독교 용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이끌어 간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 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 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
세례’, ‘그리스도를 영접함’, ‘은사 경험’, ‘케리그마’ 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
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그들은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 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 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아 넘어간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19)
그러면서도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 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이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처럼 “과거
카톨릭과 현대의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 바티칸 공회 이후 카톨릭의
신학 사상은 개방적으로 변했다.”라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제2 바티칸 공회의 교황 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무엇이 바뀌었단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와 성인 숭배 및 전통 숭배가 해체되었는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탄의 세력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자들도 속이리라.”(마24:4-28)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새 시대(뉴에이지) 운동과 신 세계 질서
유럽 공동체의 대부 노릇을 해 온 로마 교황청은 유럽 통일뿐만 아니라 세계
18) C. H. Spurgeon, The Accursed City, VPIF, Wales.
19) A. O. Dunlap, The Cursillo Movement - Rome’s Successful Plan to Fool Sleepy
Protestants!
28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새 시대 운동과 신 세계 질서를 추진해 왔는데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세력의 조종 하에 있는 동일한 것이다. ‘질서’(Order)로
알려진 이 단어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피라미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
교회의 교단들을 부를 때 사용되는 명령 용어이다.20) 독일 튀빙겐대학 로마 카톨릭
신학부의 실천 신학 교수인 글라이나헤르(N. Gleinacher)는 마가복음 10장 24-44절
을 인용하여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 인간 사회에 남아 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21)
비오 12세 이후의 모든 교황들이 새 시대 운동(NAM)과 신 세계 질서(NWO)를
지지해 왔으며, 제2 바티칸 공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의 측근으로 로마 교황청
신학교 교수였던 전 예수회 사제 마틴(M. Martin) 박사는 최근에 자신의 저서에서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머지않아 로마
교황의 주도 하에 세계 단일 정부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였다.22)
예수회 창설자 로욜라는 생전에 로마와 파리를 자신의 꿈을 펴기 위한 거룩한
도시로 여겼는데23) 오늘날 정확하게 이 두 도시는 로욜라의 추종자들에 의해 ‘새로운
로마 제국’ 건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으며 한 몸에 두 얼굴을 가졌던 야누스의
후예들은 이제 이 도시들을 본거지로 삼아 종교와 정치권력을 가지고 새 시대
운동, 신 세계 질서를 조종하고 있다.
“외적인 종교로서의 로마 카톨릭 천주교와 법률과 권력의 국가로서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아니 근본적으로 복음과 모순이 된다.”는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의 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24) 그리고는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열심히 묻고 상고해야 한다.
20) 천주교에는 교단이 없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거기에도 교단이 많다. 그런데 그것들의
이름이 한결같이 ‘Order’를 담고 있다 Dominican Order(도미니크 파), Jesuit Order
(예수회), Franciscan Order(프란시스 파) 등.
21) Der Spiegel(50/1991).
22) M. Martin, The Keys of this Blood, Simon & Schuster, 1990.
23) A. Gough, Paris and Rome, The Gallican Church and the Ultramontane
Campaign, 1848-1853, Oxford. 1986.
24) 아돌프 하르낙, <기독교의 본질>, 삼성문화문고7, 1985.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29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의심의 여지없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지도자 두 사람을 들라면 프로테스탄트
빌리 그래함 박사와 로마 천주교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음성을 듣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로 참으로
매력적인 인품의 소유자들이다. 그래함은 지난 35년 동안 선교 부흥 집회,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집회 그리고 출판물 등을 사용하여 미국 내 선교와 국제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참으로 그가 세계적 선교 활동의 1인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새삼 논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비교적 매우 짧은 기간에 ― 그는 1978년에 교황이
되었음 ― 온 세상에 말할 수 없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되던 때부터 즉시 유명해졌고 그 이후로 수천만 카톨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교황이 된 후 역대 어느 교황보다 더 많이 여행을 했으며
그의 행적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보도되었다. 그 결과 요한 바오로 2세는 카톨릭교도가 아닌 수천만의 청취자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의 겸손한 태도와 부드럽고 자비스러운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나는 빌리 그래함이나 로마 교황을 비판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이 두 사람이 온 세상에 미친 영향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과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래함 박사나 교황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라가도 되는가?”라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새삼 물어 볼 필요도 없이 교황의 인품은 많은 이들에게 큰 매력을 준다. 1979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보도진으로부터 많은 취재 공세를 받았고 그의 행보는
연일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에 대한 대중 매체의 보도는 아마도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 보도 이후로 가장 열렬했던 것 같았다.
이에 대해 시사 주간지 <타임>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모든 종교인들은 거리에 서서 발꿈치를 치켜 올려가며 그를 보기 원했으며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를 인정하는 환성을 질렀다.
Billy Graham, the Pope, and the Bible
30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한편 <뉴스위크>는 이러한 찬사에 덧붙여서 “그가 단순히 나타난 것만으로도
온 나라가 최면술에 걸린 상태에 빠지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또한 <타임>은 “세상의
종교 지도자나 정치인 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보다 더 많은 갈채를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모든 계절과 모든 형편과 모든 신앙을
지탱하는 교회의 겸손한 슈퍼스타이다.”라고 결론을 지었다.
사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카리스마적 자질을 소유한 인물이다. 그의 품위
있는 인격, 상냥한 웃음 또 그의 겸손함, 때에 맞게 적절한 말을 적절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능력 등이 함께 작용하여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거의 모든 미국
사람들이 좋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임산부의
낙태를 반대하고 이혼을 반대하고 안락사를 반대하고 또 동성연애를 반대한 것은
성경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대목들이다. 반면에 사형
집행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 견해는 우리가 수긍할 수 없는 것들이다.
눈에 나타난 이런 외적인 것은 접어 두고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일과 및 무덤에서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가?
“로마 교회가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제2 바티칸 공회’를 열어 많은 것을
협의한 결과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도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라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못함을 증명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도 아래 천주교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태도에 있어서 표면적 변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기본 교리에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이러한 결론을 증명하는 사실은 허다하게 많다.
이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전처럼 프로테스탄트를 이단자라 부르지 않고 대신에
‘갈라져 나간 형제들’ 혹은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주의의 복음은 여전히 거짓 복음이며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성사 ― 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 ― 와
고백, 미사, 보속, 기도 예식, 유물 숭배, 메달 수여, 면죄부와 연옥,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교회의 중재자 역할, 사제 제도, 성모 마리아 숭배, 죽은 성인 숭배 등은
모두 성경 말씀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로마 교황은 시카고에 모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례 성사를 통해서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합체(合體)가
된다.
또한 워싱턴 광장에서 미사 예식을 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묵주 기도를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며 오늘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마리아의 중재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31
역할을 통해 언젠가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충만함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참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를 하신 거짓 복음이다(갈1:6-9). 그에게 아무리 큰 매력이 있다 할지라도 교황과
카톨릭 교회가 거짓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으며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하게 이 같은 거짓 복음을 거절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빌리 그래함 박사는 지난 30년 이상 온 세상의 수천만 그리스도
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 왔다. 그 역시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나도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래함 박사보다 더 친근감을 주거나 그 설교가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래함의 세계적인 복음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반갑고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에 그가 복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많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인정하고 도와주었다. 소박한 설교에서 그는 반복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라고 말하였고 보수적인 복음성가만을 불렀으며 그리스도를 각자의 구원자로 영접하
도록 초청하였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포근한 느낌을 주며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래함은 1947년에 그의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지만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거행된 부흥 집회에서야 비로소 <Hearst>라는 신문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성공적인 부흥 집회 소식을 듣고 미국의
큰 도시마다 그의 부흥 집회를 요청해 왔다.
그런데 그래함의 부흥 집회 후원자에 대하여 지역 교회들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 그래함은 자유주의 신학 계통의 집단은 절대로 집회 후원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집회에 모인 군중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교회가
후원자가 되었고 마침내 그래함 박사는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도시에서 열리는 부흥 집회든지 큰 교단의 지원이 없으면 집회를
하려 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 교회가 부흥 집회나 주최 위원회에 참가하여 경비를 보조하게
되었고 그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인도를 받게 되었다.
자신의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래함은 공산주의와 카톨릭 교회 그리고 종교통합
주의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적이 된다는 것을 서슴없이 지적했고 이 같은 것들을
경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공산주의와 카톨릭 교회와 종교통합주의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매우 쌀쌀한 어조로 “적그리스도를 WCC의 회장으로 선택할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74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열린 복음주의 회의에서
3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기자 회견 시 기자가 WCC와의 관계를 묻자 그는 “내가 아는 한 우리는 그 단체와
매우 친근한 관계라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얘기를 할 것이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1983년 그래함 박사는 WCC 사무국장 포터(Philip Potter)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일정이 겹쳐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되는 WCC 6차 총회에서 설교할 수
없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래함 박사가 부당한 교리를 내세우는 미국교회협
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CC)에 대해서도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NCC 총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그래함 박사가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갑자기 바꾸게 된 것도
이미 공개된 사실이며 이 또한 적지 않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사실 이 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자유를 존중하고 아직도 공산주의의 음모가 세상을 위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래함 박사는 전도
활동 초기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사탄이 운영하는 중개 매체가 되어 거짓말을 믿으려 하는
많은 이들을 속이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수천만 명이 그 거짓 종교인 공산주의를
환영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그래함은 공산주의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77년 공산
국가인 헝가리를 닷새 동안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미국인의 생활 방식이고 공산주의는 사탄의 역사로 믿었던 것을 나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이후로 그래함은 계속해서 공산주의 편을 드는 발언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그의 발언을 이용하여 전 세계적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했다. 또한 그래함은
공산주의자들이 돈을 대고 후원하여 198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서 기독교 복음주의의 최고 지도자로서 연설을 했고, 구소련 공산당은 곧바로 그의
연설을 ‘철의 장막 뒤에서 종교를 학대하는 도구’로서 이용했으며 공산주의의 종교
학대 행위를 숨기는 데 이용했다. 그의 발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러시아에서 종교 탄압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발언을 인용하여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모두 제거하게 되었다. 복음 전도자로서 그래함이 공산주의에 대해
태도를 바꾼 것으로 인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의 적이
되며 성경을 반대하고 교회와 신자들을 학대하는 이 공산주의 조직이 온 세상을
정복하기로 맹세한 사실을 경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참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행한 가장 기만적이고도 위험한 일은 그가 로마 카톨릭 주의와 타협을 하고 더
이상 그 체제에 대항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란 공개적 무신론주의로
어느 면에서는 그 폭이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종교통합주의는 유신론주의인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33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을 다 포함할 정도로
그 폭이 넓다.
한편 카톨릭 주의는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처녀 탄생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그분의 몸의 부활 등의
교리를 스스로 믿고 가르친다고 말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가져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주의의 역사와 지금 그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복음이 다른 복음이며 거짓 복음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같은
거짓 복음은 지금까지 수천만 명의 마음과 생각을 어둡게 만들었고 아직도 그들을
암흑 속에서 쇠사슬로 묶어 두고 있다.
그래함의 친 카톨릭 성향 및 태도는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증가해 왔다.
처음에 카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신도들에게 그래함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래함의 카톨릭에 대한 태도가 완화되자 카톨릭
교회는 그래함 집회에 대한 참가 금지를 해소했다. 그 후 카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그래함의 부흥 집회를 인정했고 특히 카톨릭교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결심할
때 그래함이 각자가 속한 교회 즉 카톨릭 교회에 돌아가 거기 머무르라고 말하자
더욱 더 그를 환영했다.
1972년 그래함 박사는 종교 통합 활동에 크게 공헌한 것과 진실되고 권위 있는
복음 전도를 한 것을 인정받아 ‘카톨릭 국제 프란시스 상’을 받게 되었다. 또 같은
해에 로마에 있는 교황청 성서학교 원장인 듈레아는 그래함의 사역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그래함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만을 설교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는
교리 문제에는 뛰어들지 않는다. 또 그래함은 카톨릭 교회의 성례식이나 카톨릭
교회 자체에 대해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카톨릭 교회에 손실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그래함은
기본적인 기독교에 대하여 설교를 할 뿐이지 프로테스탄트의 복음에 대해서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물론 암암리에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자신의 설교를
하며 예를 들어 ‘성경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 말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개인적으
로 해석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주제넘게 참견할 수 없는 일이며 사실상
그의 설교 내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카톨릭교도들은 그래함의 설교에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나, 교황 혹은
성직자 체계의 권위를 얕보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없으며 미사나 성례 등
카톨릭 의식을 반대하는 말을 전혀 들을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전하며
또한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헌신할 것만을 가르치므로 다른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어느 카톨릭교도라도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그래함의 설교에
서 찾아 볼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 그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라고 말할 것이며 노름과 음주와 담배 피우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카톨릭교도의 신앙을 반대하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34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1983년에 이르러 그래함은 복음 집회 때 회심한 사람들이 적은 ‘결신 카드’를
카톨릭 교회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올랜도에서 열린 플로리다 집회에서는 150명의
카톨릭교도들을 그 지방에서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집회에서 결신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발간되는 <The Florida Catholic> 잡지는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카톨릭교도들이 그래함의 선교 팀 일원인 마샬에 의해
특별 교육을 받았고 마샬은 그래함의 ‘성경공부 소책자’를 사용하여 결신한 자들을
돌보아 주도록 설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샬은 “그 소책자의 공부 내용이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일상적인
주제에 대한 것이므로 어떠한 교회의 신학과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 후에 나타난 보도에 의하면 650명의 카톨릭교도들이 그 집회에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는 그래함의 부흥 집회에 여러 수준의 카톨릭교도
들이 많이 모여들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사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타협자로 알려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대적으로
믿고 있는 세 가지 즉 공산주의, 카톨릭 주의 그리고 종교통합주의가 더 이상 기독교의
적이 아니고 친구라는 것을 그래함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신도들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고 있다. 그래함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협하는 이 세 가지 적을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이제 그것들은
‘마귀의 전령들’로 보이지 않고 주 예수님의 ‘빛의 천사’로 보이게 되었다.
1987년 9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캐나다의 중요 도시를 방문하는 여정의
일부로서 캐나다의 밴쿠버로 여행을 하려 했고 그래함은 바로 그 도시에서 10월에
부흥 집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밴쿠버에서는 적어도 250,000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야외 미사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방탄장치를 한 교황의 전용차를
타고 교황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길거리에 몰려들 것으로
기대되었다.
로마 카톨릭 주교 카르니는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교황은 종교통합운동과 교회
일치를 호소할 것이다.”라고 발표하였고 “일치에 대한 소망이 이번 행사에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통해 확인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래함이 밴쿠버에 도착하면 그 군중들의 수는 적을지 몰라도 수십 개 교회와
그 교회의 목사들과 여러 교회에서 온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감히 카톨릭 교회와 종교통합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겠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무도 없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극히 존경하고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다. 밴쿠버에 교황이 지나간 후에 그래함이 곧바로 도착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
게 로마 교회의 거짓 교리를 경고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현재 취하고 있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기 전에는, 지금까지 늘 해 왔듯이, 그는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35
교황을 찬양할 것이며 자신과 교황 사이에 신학적 입장에 차이가 없다는 인상을
짙게 줄 것이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국을 방문하기 바로 전에 그래함은 교황이
미국에 옴으로써 “우리나라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적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아주 짧은 기간에
교황은 세계의 도덕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나와 또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그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도덕률 고수와 온화한 인품은 종교적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샀고
그의 미국 방문은 미국인들뿐 아니라 온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라고
했다. 만일 교황이 거짓 복음을 전한다면 ― 그는 사실상 거짓 복음을 전한다
― 어떻게 교황이 순수한 영적 부흥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후에 그래함은 교황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정치가, 목양자 그리고 복음 선교사이다.”라고 하였다. 그래함은 “교황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끈다.”라고 말하였고 또 교황을 ‘현대의 가장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고
불렀다. 물론 그래함은 교황과 카톨릭 주의가 가르치는 거짓 복음에 대해서는 일언반
구도 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온
세계를 통치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전혀 경고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그래함의 많은 진술은 그래함이
속고 있음을 보여 주며 또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원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과 로마 카톨릭 교리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1983년 7월에 WCC 제6차 총회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되었고 그 집회에서는
WCC가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났
다. 밴쿠버에서의 WCC 프로그램의 한계는 너무도 넓고 또 부당하여 심지어 이교도들
의 우상 숭배를 허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우상 숭배자들의 행동을 환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래함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두 각기 찬사와 환영사를 WCC에게
보냈다. 그런데 지금 그래함과 교황이 바로 이 도시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로마 카톨릭 주의와 종교통합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 비성경적인 교제의 다리가
놓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함의 태도
변화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단일 ‘세계 음녀 교회’의 형성에 촉매제 역할을 했음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을 받는 종교 지도자 빌리 그래함 박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살려면 그들의
행동과 말이 성경 말씀과 절대적으로 모순이 될 때 결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
라.”(엡5:11)고 하였다. 그래함은 계속해서 ‘열매 없는 어둠의 일’ 즉 카톨릭 주의,
공산주의, 종교통합주의와 결탁하여 그들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36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그것들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래함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으며 그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거짓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래함과 또 다른 많은 신복음주의자들과
은사주의 지도자들처럼 그에게 ‘문안 인사하는 자’는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요이
9-11)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이다.
끝으로 이처럼 배도의 길로 내닫던 그래함의 말년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비참함은 재정적, 물질적 비참함이 아니다. 단지
그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1997년 5월 31일 토요일 그래함은, 역시 배도하여 교황을 우러러보며 종교 통합에
앞장을 서고 심리학에 기반을 둔 각종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와 TV 대담을 가졌다. 그 TV 대담에서 그래함은 극도의 영적 무지를
드러냈고 이제는 완전히 마귀의 종교통합주의의 영(靈)에 사로잡혔음을 보여 주었다.
다음은 그 대담 내용으로 이것 역시 레이놀즈의 <Foundation>(1997년 5, 6월호)에
실린 것이다.1)
슐 러: 자, 박사님, 이제는 기독교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함: 모두가 알다시피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은 전 세계의
크리스천 그룹뿐만이 아니라 크리스천 그룹이 아닌 자들로도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안다면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간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입니다. 나는 온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로 이끌 큰 부흥이 조만간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사도행전에
서 말했듯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 모슬렘 세계에서나, 불교도 세계에서나, 기독교 세계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 백성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셨으
므로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입니다. 물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마음속에서 자기들이 갖고 있지 않으나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며 자기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빛으로 돌아서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받았으며 우리와 함께 천국에 가게 됩니다.
슐 러: 무어라고요? 지금 박사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어둠 가운데 태어나서 전혀
성경을 접해 본 적이 없어도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과 혼과 삶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이 맞습니까?
그래함: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1) 유튜브에서 ‘빌리 그래함의 배도’라고 치면 이 대화 영상이 뜨는데 거기서 3분 이후의
것을 보면 된다. http://www.youtube.com/watch?v=Jf11cwLYKu0
빌리 그래함, 교황, 그리고 성경 37
야생 상태로 거하고 있는 종족들을 만났습니다. 물론 그들은 단 한 번도 성경을
보지도 못했고 성경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으며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의 사람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슐 러: (잠시 동안 말을 못한 채 얼굴에 빛을 발하며) 박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으니 참으로 흥분이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는 넓은 것이군요.
그래함 : 물론입니다
슐 러: 박사님께서는 신(Fulton Sheen) 주교와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에 대해 아시지요? 이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함 : 남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삶 자체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이 선포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며 사는가를 보게 됩니다.
저는 참으로 좋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나와 내 사역 및 슐러
당신과 당신의 사역과 로마 카톨릭 주의와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카톨릭교도들은 손을 벌려 우리를 환영했고 지금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천주교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 혹은 그룹 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눈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그래함 박사가 슐러에게 고백한 교리는 지금 이 시간 교황과 및 다른
종교통합주의자들이 외치는 거짓 복음이다. 이것은 바로 우상 숭배를 하며 성경과
은혜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가 선한 사람이면,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 신실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이다.
지난 40여 년간 로마 교회의 풍성한 지원을 받으며 종교 통합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온 빌리 그래함, 이제 그는 너무 교만하게 되어 영적으로 거의 미친 상태에
빠진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과 마음의 눈을 멀게 하셨으므로 이제
그는 마치 구약 시대 사울 왕처럼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믿는 형제 여러분,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빌리 그래함이나 교황을 따르겠는
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따르겠는가?
초대 교회 사도들이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담대히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린
다.
38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성자가 아닌 성도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이다. 먼저 ‘성자’ 혹은 ‘성인’(Saint)이란 단어로 회칠 당한 ‘성도’(Saint)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한다.
로마 종교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이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다. 그들은 구원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부터 인간들에
게 두려고 온갖 술수를 꾸며 왔다.
살아 있는 죄인인 교황이 성자 추대식이라는 기이한 의식을 통해 죽은 죄인들을
성자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지막 나팔을 불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감히
죄인인 한 인간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 성자들을 생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트남 성자를 추대해 주지
않는다고 로마 교황청에 항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은 성자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는 로마 교황청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날조된 성자들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승려)이었다가 진리를 찾아 로마 종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살아난 중>(The Monk Who Lived Again)이란 책을
펴낸 몬타노 박사는 카톨릭 도미니크 파 소속의 유능한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레스(Porres, 1579-1639)의 전기를 쓰라는 명령을 시달
받았다. 그리하여 남미 페루의 도미니크 파 소속의 포레스를 성자로 추대하기 위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전기를 써야만 했으나 한 번도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를 갖고 성자 추대에 필수적인 기적에 관한 자료를
보완해야만 했던 몬타노 박사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포레스의 전기를 꾸며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Myths of the Catholic Saints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39
그리하여 포레스는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순전히
몬타노 박사에 의해 조작된 이 성자는 오늘날 페루의 사회 정의 구현의 수호성인이
되어 있고 이 날조된 성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안에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Porres, San Martin de 란 참조 바람).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 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히고 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천주교 성자들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되었다.
볼란디스트 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는 그의 저서 <성자들의 전설>(The
Legends of the Saints)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학자인 아트워트는 <성자 사전>(The
Dictionary of Saints)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된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라고 시인하였다.
프란시스의 신화
이탈리아의 종교사에서 아시시의 프란시스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매우 겸손했고 단순했으므로
카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확실히 그는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수도승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전성기에 또 카톨릭
교회가 세속화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기에 이 보잘것없는 수도승은 가난과 단순한
삶과 어떤 신비적인 것을 가르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격동의 시기에 프란시스는 가난을 외치며 단순한 삶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명예가 훼손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프란시스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큰 욕망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런 욕망을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는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따라서 자기 아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의
품위에 걸맞은 매우 섬세한 옷과 멋있는 갑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비록 그가 젊어서는 난폭했지만 후일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40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당신들은 언젠가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볼 것이오.
성 보나벤튜어에 따르면 아시시에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마치 예언자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프란시스를 만날 때마다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시스의 발밑에 펼쳐 놓고 프란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나는 후대에 그가 전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쉽게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영구히 자리를 잡곤
한다. 실제로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그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앞서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프란시스의 전기 작가인 엥글레베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야망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옷을 재거나 자기 돈으로 먹여
살린 무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프란시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영적인
것을 기대했다. 그는 프란시스가 귀족의 대열에 낄 것을 바랐다. 사실 영광스럽게
이러한 것을 성취하는 길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1201년에 페루지아는 아시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은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1201년 11월에 프란시스는
폰테산 지오바니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포로로 잡혀 페루지아에서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매우 즐겁게 생활을 했고 그래서 그의 동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도대체 당신 미쳤소? 우리가 이렇게 감옥살이를 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런데 프란시스의 대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생각해 보고 언젠가 온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슬퍼하려야 슬퍼할 수가 없군요.”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교황청과 아플리아 지방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프란시스
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의
돈으로 산 멋있는 갑옷을 입고 그와 그의 종자는 교황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로마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떠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매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꿈은 프란시스가 야망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날 밤에 프란시스가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셀라노의 토마스는
최소한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감 파는 가게가 멋있는 무기와 안장 등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방에 앉아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었다. 프란시스가 영문을 몰라 놀라자 어떤 목소리가 들리면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41
서 그 아름다운 여인과 군인들이 모두 다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프란시스는 아마도 이 꿈이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어두움 같은 것이 그를 덮으면서 그가 내린 해석이 틀렸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 그가 스폴레토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음성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도대체 이 모습을 하고 어디에 가고 있느냐?”
“저는 지금 아플리아로 가서 전쟁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주인과 종 중 누구에게서 네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물론 주인에게서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의지하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왜 종을 따르느냐?”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프란시스는 물어보았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할 일을 계시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언젠가 내가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위대한 왕자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고 아시시의
거리를 통과하여 음악 행진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강물같이 넘쳐나는 사랑 속에 빠져들게
되어 황홀감에 젖게 되었고 꼼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고 토마스 사제는 기록한다.
그때부터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되었으며 급기야 프란시스 파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프란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를 내시며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지만
프란시스는 모든 종류의 노여움이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폭력이든지 다 증오했다.
심지어 그를 흠모하는 엥글레베르트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용감했던 프란시스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려
했고 어떤 새로운 업적을 고안해 내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
했으며 순교자가 되려 했고 끝내는 수난의 표적과 함께 죽고자 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란시스는 디도서
3장 5절과는 대조적으로 선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 했으며 ― 갈보리에서의
4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의 승리를 포함하는 ―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스스로
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글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청하노니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은 은총으로
더불어 이 편지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귀한 말씀으로
이 편지를 받으라.
크게 되고자 한 프란시스의 야망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크게 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프란시스는 스스로 기사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서까지 자신이 꿈꾸어 온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회심 후 몇 년간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자요 위대한 왕의 전령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원탁의 기사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각각 부인이 있어야 했으며 그의 부인은 ‘가난’이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꿈에 본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밖에서 그는 포베렐로 즉 ‘가난한
소자’였지만 안에서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위대한 기사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란시스의 작품 중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널리
배포시켰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 유명한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섯 개의 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절은
음악에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며 따라서 카톨릭 교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절을
아는 곳이 없다. 이 구절만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카톨릭 교회가 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프란시스의 작품을 교묘하게 편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그의 신학이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행위 신학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구원은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오게 된다. 그 예로 평화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는 없다.
그 일은 불가능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란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로마서 4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이 구절은 한마디로
그의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43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되 행위 즉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하신다. 그런데 프란시스
는 저주받을 다른 복음을 전했으니 이는 그가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구원이 오직 그 믿음만을 통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한 행위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카톨릭교도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카톨릭 신앙에 매달리자.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사제들을
공경하되 죄인일지도 모를 그 사람들(사제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성직
때문에 그들을 공경하자. 이 사제들만이 제단 위에서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몸과 피를 거룩하게 만들며 그것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이 구절의 문맥상 우리는 프란시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 즉 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를 극구 칭찬하는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어쩌면 한 번도 그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음의 글에는 미사와 사제 직에 대한 프란시스
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사제에게 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제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니 이는 그의 몸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공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를 드릴 때에 그분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력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킬 것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된다.
심지어 프란시스는 성체 즉 빵 조각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귀하고 거룩하므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들과 다른 모든 것은 귀한 것으로
존중히 여겨야 한다.
프란시스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관대해야만 하나니
이는 구제하는 것이 죄로부터 사람의 혼을 깨끗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해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준수하며 과다하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44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늘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여 사랑과 긍휼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사제에게 죄를
고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행위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선한 행위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을
감사하는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속죄
값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8-10절에서 먼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적고 그 뒤에
선한 행위의 삶을 적었던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이 점을 깨닫지 못했고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예식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프란시스는 자신이 청빈 생활을 주장했으므로 그 당시
카톨릭 교회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및 권위에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제 이 ‘가난한 소자’는 예언된 대로 전 세계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아시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며 이 사실은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을 버리면서까지 유명하게 되었음
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는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칼빈’
이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이제는 ‘말씀 메시지’ 대신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다.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45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 하에 자신들의 해석 체계를 정립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도를 죽인 자들’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대인들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도 이를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했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
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일 뿐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국가 - 교회’(State-Church)를 국가 체제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 - 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고 오직
‘교회 - 국가’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 교회의 성서로 불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 원제목은 <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 ― 이라는 역사 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 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체한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 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 만한 논리성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미화되었다.
그는 교회 국가 형태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비드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교회
- 국가 - 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게 되었다.
주후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 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편 3절을 주로 공격하
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했으며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이
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46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옛 바빌론의 ‘도시 - 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 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 - 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 <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 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 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
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 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의 영역에서
주교는 기독 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가
에서의 반란 진압 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회(고
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셋째,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한 결속 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 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의 지도 아래 흠 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 파를 향하여는 “교회
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 파를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카톨릭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 파를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하에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 W. 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 맞추어 ‘교회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해석을 이끌어
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47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 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투성이인 교회로 대체시킴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
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이 말씀해 주듯이,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창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거스틴
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 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자신들
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그 이후에는 발라
(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겨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게 하였고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고하게 살해되었다.
사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 파는 여우로, 도미니크
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e, 1330-1384)는 계속해서 갈멜 파와
어거스틴 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역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
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48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합스부르크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
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제사장(벧전2:9-10)임을 확신시
켜 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 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제사장/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 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상,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11:4)로 둔갑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에서의 출세를 위해 이미 아들까지 낳고 동거 중인 그의 내연의 처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 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 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그는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 계급에
절대 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atholic Church)의 통일성으로
삼고 ― 참고로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 교회의 특성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함, 전통’에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다 ‘성물 숭배 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1:15)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성인들의 신화: 프란시스와 어거스틴 49
바울 자신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이 무려 164회나
기록되었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 온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 교회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
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빌3:13-14) 그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
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여야 하는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는 것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 공회가 결정하고 발표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어거스틴 파에 속했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에서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살아 계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 길이다.
A Converted Catholic Priest
50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그리스도를 찾은 사제
저는 1912년 3월 22일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 베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열 살에 피아센자에 있는 로마 카톨릭 신학교에 들어가서 학창생활을 했고 그로부터
12년 뒤인 1939년 10월 22일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개월 후에
선배 사제인 로시 추기경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시카고에 새로 지은 ‘성모 카브리니’라
고 하는 이탈리아 천주교의 부주교로 임명받아 미국에 왔습니다.
저는 처음 4년 동안은 시카고에서 설교하였고 그 후에는 뉴욕에서 설교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 설교와 훈화가 성경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황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희망이요 또한 가장
염려하는 바였습니다.
1944년 2월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라디오를 켰는데 우연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목사가 설교하고 있었는데 저는 프로테스탄
트의 설교를 듣도록 허락 받지 않았으므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흥미로울 것 같아 그대로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라디오를 통해 제가 들은 그 성경 말씀 때문에 저의 과거의 신학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이
성령님을 대적하는 죄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회심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저의 마음은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의 명령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가난한 천주교인들에게 그들의 친척들의
영혼이 지옥 불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미사’라
는 이십 분 동안의 예식에서 5달러 내지 30달러의 돈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미사 때마다 저는 제단 위에 있는 못 박혀 달리신 십자가상을 바라보았는
데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며 책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간신히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거짓 약속을 주면서 그들의 돈을 도둑질
하고 있다. 너는 내 교훈을 거스르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믿는 자의 영혼은
연옥과 같은 고통스러운 장소에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찾은 사제 51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시되, 기록하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께서 이르시되, 그러하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게 하려 함이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뒤따르
리로다, 하시더라(계14:13).
나의 구속은 완전한 것이니 미사를 통해 또 다시 십자가의 희생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나의 구속 사업은 완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 그 증거이다.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만일 너희 신부들과 교황들이 ‘미사’와 ‘면죄부’로 사람들의 영혼을 연옥에서 자유하
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왜 너희는 연보를 받고자 하느냐? 만일 불구덩이에서
개가 타고 있는 것을 본다고 하면 너는 그 주인이 개를 건져내기 위해 네게
혹시 얼마의 돈을 바칠까 하고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더 이상 감히 제단 위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교황은 그리스도
의 대리자요 그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질 움직이지 않는 반석이라고 내가
설교하고 있었을 때 예전의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너도 로마에서 교황을 봤겠지? 그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과 정원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발에 입 맞추는 광경들도. 너는 진정 교황이 나를 대표한다고 믿느냐? 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러 왔다. 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겼고 또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라! 성경은 명백히 땅 위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분은 성령이라고 했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요14:26)
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람 위에 세웠다고 믿는단 말이냐? 교회를 세울 그
반석은 바로 나 그리스도이다. 만일 로마 교회가 베드로라는 사람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나의 교회가 아니다.
이 음성은 제 마음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성경은 신앙의 완전한
규범이 아니라는 것과 천주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전통과 교리가 필요하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는 성경의 교훈을 거슬러 가르치고 있다. 만일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교황을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교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무엇을
필요로 하겠느냐? 나는 이미 전통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음을 보여 주었으니
이는 어느 누구나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저는 교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께로 가는 대신에 성모 마리아나 성자들에게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52 천주교와 기독교, 어떻게 다른가?
누가 십자가에서 너를 구원하였느냐? 누가 자기의 피를 흘리며 네 빚을 갚아
주었느냐? 마리아냐, 성자들이냐, 나 예수냐? 너와 및 다른 많은 사제들은 화려한
장식품들을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단순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식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그것들을
두고 판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을 판매함으로써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기 때문이다. 결단코 나는 내 교회에서 어떤 상품의 매매도 원치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 내게 경배할 것이다. 너는 이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교인들에게 기도할 것과 나에게 가까이 나올 것만을 가르쳐라.
그 후 저는 고해성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죄를 고백할 때 저는 가슴에 십자가를 찍으며 죄를 용서하여 줄 능력이
있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죄인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와 권리를 대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소리는 저를 또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고 있다. 만일 어떤 죄인이 그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면 하나님께로 가야지 네게로 가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범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나가서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나 예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니라(마1:21).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행4:12).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저는 더 이상 로마 교회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교황과 그리스도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통과 성경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을 동시에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1944년
마침내 저는 천주교의 사제직과 천주교를 버렸고 지금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천주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언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경 바로 보기 라킨 외/ 정동수 역
그림과 도표 등으로 알기 쉬운 자료들이 컬러로 수록된 책으로, 클라렌스 라킨의 책과 부록들로 구성되어
성경 신자들에게 필요한 필수 지식을 담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는 책입니다.
세대주의(경륜)에 관한 이해를 돕는 별도의 책이 합본돼 있습니다.
구원 바로 알기 정동수
누구나 꼭 알아야 할 영혼 구원의 이유와 방법과 바른 구원에 관한 진리를 쉽게 설명한 책으로, 불신자는 물
론 구원의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은 모든 크리스천들을 위한 내용이 수록돼 있습니다. 강의 MP3포함.
천주교 시리즈 3권 우드로우, 릭 존스, 로이드 존스 외
천주교의 유래/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것으로 오인하는 분들에게 꼭 권합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해 철저히 파헤치는 책
으로 기원과 교리는 물론 장차 일어날 마지막 때의 일까지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각기 조금씩 다른 내용이
지만 세 권 중 한 권만 보셔도 그 심각성과 문제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시리즈 3권 사무엘 깁, 버튼 외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킹제임스 성경 입문서
‘역사’는 성경의 기록과 보존과정, 번역과정, 번역상의 문제와 오류 등등을 짚어 줍니다.‘ 답변서’는 100가
지 질문과 답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의 오해를 풀고 왜 오류가 없는지 밝혀 줍니다.‘ 입문서’는 길라잡이 역
할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한 이들의 생생한 체험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바로알기 알 레이시 외
알 레이시 목사의 저서와 의사인 엠알 디한 박사(율법인가, 은혜인가..의 저자) 등의 책이 합본으로 담겨 있는
책으로, 피의 성분과 성경적 원리를 통한 구원의 놀라운 섭리를 담은 책입니다. 피의 복음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으며 예수님의 피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증거합니다.
천국과 지옥 바로알기 알 레이시
알 레이시의 천국, 지옥에 관한 저서 2권 합본. 철저히 성경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이 풀립니
다. 놀라움과 두려움을 넘어 희망과 소망을 주는 동시에 전도에 대한 위급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천사와 UFO 바로알기 정동수
날개 달린 천사, 아기 천사, 여자 천사는 없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천사와 네피림, 마귀의 천사들이 땅속에
서 벌이는 음모와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해 속시원히 풀어주는 흥미로운 책.
오순절 은사운동 바로알기 유인 외
유인 목사의 저서와 부록들로 구성해 사도행전을 오해해서 생기는 은사운동의 양상과 폐해를 파헤치고 참
된 길을 알려줍니다. 체험주의 은사운동의 신비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참된 믿음을 알려 주는 책.
바르게 읽는 성경 김문수
수많은 한글과 영어 성경의 역본들을 여러 차례 읽으며 철저히 비교분석한 책입니다. 이런 비교를 통해 킹제
임스 성경의 무오성과 이를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한 흠정역이 가장 정확한 한글 성경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 신자들의 글모음 김재욱 외 9인
김문수, 김용묵, 김재근, 김재욱, 김학준, 노영기, 이은희, 정성권, 진미희, 홍승현 등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의 최종 권위로 믿는 이들이 본 사이트에 썼던 글을 중심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바
이블 빌리버들의 고뇌와 기쁨과 바른 말씀으로 얻은 증거 등 풍성한 읽을거리가 있습니다.
흠정역 한영대역 및 스터디 바이블
다른 모든 한국어 성경은 물론, 기타 킹제임스 한글 번역본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정확한 번역본 ‘흠
정역’입니다.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한영대역은 영문 원본과 대조하며 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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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032-872-1184) 및 온라인 기독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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