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대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해주셔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담당할 어떤 영역이 있기는 하는 것인가?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것을 두고서 행위구원론을 펼치는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오늘은 구원론에 관한 성경적 견해가 대체 무엇이며, 거기에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미경을 쓰고 들여다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구원론에 관한 메시지를 나눌 터인데, 그중에서 인간론과 관련지어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참된 구원론은 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아들이면서 회심하고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첫째는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준비된 후에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베풀어질 때다(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다). 그리고 둘째로, 누구든지 이 복된 메시지를 들었을 때에 이때까지 자신이 사망의 길로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 길로부터 돌이킨 후에 자신이 지었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이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이 과연 어느 선까지인지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조명하심이 함께 하기를 빈다.
2. 성경적인 구원론을 저해하는 "산데만주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 개신교회에 어느새부턴가 산데만주의가 치고 들어와 터줏대감의 자리를 차지한 지도 벌써 300년이 넘었다. 산데만주의는 1,720년 스코틀랜드의 '존 글래스'에 의해 시작된 구원론으로서 절대신앙주의를 가리킨다. 이것은 롬10:9~10에 기록된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선포에 누구나 지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단사설이다. 그런데도 산데만주의자들은 오직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죄를 탐닉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외면한 채 책망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다. 다만, 그들은 과거에 믿었던 단 번에 가진 믿음 때문에 자신은 구원받은 것이고, 그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강해설교의 대가였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이단적인 사설이며, 기독교신앙이 아니라고 질타했다.
3. 오늘날 개혁교회의 신앙은 어떠한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에 개혁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도 위와같은 산데만주의와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가진 분들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만세전 예정만을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으며,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가짜신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가르쳐준 신앙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을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 완성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 말을 지금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지금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요5:2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승천하사 하늘로 가신 예수께서는 한 번 얻은 구원일지라도 결국 죄와 사탄과 사망에 지는 자는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계3:5). 더욱이 계13:10, 14:12에 따르면, 이미 믿음을 가졌던 자라도 환난과 죽음에 직면하여서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4.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교리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근원을 찾아가 올라가가보면 우리는 2가지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에서 그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거스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또 하나는 믿음지상주의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서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부터 보자. 이것은 구원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맞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하였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 곧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롬3:23).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인류의 죄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담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오직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 되심과 그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구원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얻은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고, 죄를 짓고도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했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초청했어도 스스로가 구원의 길을 버리고 간다면,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버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기로 하고서는 약혼을 했다 하자. 그런데 이 여자가 그런 상테에서도 계속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과연 약혼한 남자와 결혼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께서 속아주어서 우리와 결혼해주시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과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계속해서 세상과 마귀를 사랑하고 그 길로 가는 자는 결국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제는 믿음지상주의를 살펴보자. 이것은 중세구원론의 핵심인 행위구원론에 반대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의 공로나 선행에 의한 구원관이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믿음만 가져도 구원을 받으며, 이미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만세전에 구원이 예정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믿음지상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시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음성을 귀기울여 듣는 인간이라면 그는 세상과 마귀로부터 돌이키게 된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구주로 섬기기로 결정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한 번 회심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는다. 고로, 구원은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회심의 회개와 자백의 회개를 통해 점차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맞기는 하지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믿음지상주의는 잘못된 신앙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으니 그런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계22:14).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관문은 회개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의의 옷을 예수님의 피로 깨끗히 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의 기저에는 어떤 것이 깔려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배경에서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가 나왔는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은 완전히 타락해 있어야 하고 전적인 무능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과정을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절대적으로 망가져 있어야 했고, 이미 망가져 있는 자는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도 없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것에 가장 합당한 성경말씀을 찾아서 대입하려 했으니, 그렇게 해서 나온 말씀이 바로 로마서 3:10이하의 말씀이다.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을 이해할 때,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있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개입하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래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아니하실 분이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롬3:10에 대한 잘못된 해설에서 비롯된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롬3:10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그것이 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의 상태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구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말씀을 살펴보자.
6. 사도바울이 말했던 "의인이 아닌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좀 더 롬3:10이하에 다한 사도바울의 이해에 접근을 해보도록 하자. 롬3:10의 말씀은 사실 롬3:9에 대한 결론을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롬3:9절부터 말씀을 살펴보자.
롬3:9-15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우선, 롬3:10이하의 말씀들은 롬3:9의 근거로 제시되는 말씀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약성경의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가져왔던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은 모든 사람은 다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이라는 뜻을 따라 가져온 구약성경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의미로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자도 없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지못하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롬3:10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롬3:11~12의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롬3:10의 말씀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롬3:10과 롬3:11~12의 말씀은 전혀 다른 구약성경에서 가져온 서로 다른 본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롬3:10의 말씀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며, 롬3:11~12의 말씀은 또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관주를 찾아본다. 대체 이 말씀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려고 말이다. 그런데 관주를 보니 롬3:10~12의 말씀은 시14:1이하와 시53:1이하에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니, 롬3:10의 말씀은 응당 시편14:1이나 혹은 시53:1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14:1이하와 시53:1이하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이 없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본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경 전도서 7:20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면서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본문으로서 전7:20의 말씀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롬3:10~11의 말씀은 또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가? 이 말씀은 시14:1이하와 시53:1에서 가져온 말씀들이다(두 개의 본문은 대동소이하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고로,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부패하여 그 행실이 가증한 자는 "어리석은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악한 자 "나발"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편14편의 말씀과 그 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시편14편의 저자는 "다윗"이다. 그런데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보라. 그것은 "나발"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다윗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없는 자를 "나발"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성경 사무엘상 25장의 나발이야기에 나온다. 마온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갈멜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옆에서 다윗도 사울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윗의 사람은 6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양떼를 지켜주었을 뿐 그 양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나발이 양털을 깎을 때가 되자, 다윗은 소년 10명을 보내 그동안 자신이 그를 선히 대한 것에 말하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발은 악한 자였다. 그는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 사는 종이 많다는데, 어디서 온 지인도 모르는 자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그런데 나발의 하인들 중 한 명이 나발의 처 아비가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즉시 떡과 고기와 건포도, 무화과 뭉치 등을 챙겨 다윗에게로 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어리석은) 자니이다(삼상25:25)" 그러자 다윗은 그녀의 말을 듣고 용서해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나발은 자기를 위해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다가 그만 자초지종을 듣더니 며칠이 못되어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14편에서 나발을 대신하여 "어리석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14:1이하의 말씀은 베풀어준 은혜도 몰라보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며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롬3:10에 나오는 죄인에 대한 설명을, 롬14:1~3에 나오는 악인의 설명을 가지고 설명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죄인들 중에는 나발과 같은 악인도 있는데, 모두를 다 악인 취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7. "죄인"과 "악인"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롬3:10에서 말하고 있는 "죄인"과 롬3:11~12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죄인과 악인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말하였다.
시1:4-6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렇다. 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고 악하게 살아가는 악인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악인들은 결코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죄인" 중에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할 수 있으나, 악인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문을 닫고 하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13:49-50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렇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악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 일어날 일도 말씀해주셨다. 그때에는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의인들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내어서 풀무불에 던져넣을 것이라고 하셨다. 심판의 날까지 자신의 악한 행위를 그치지 않는 자는 결국 풀무불(지옥불)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의인들 중에서 죄인들을 갈라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죄인들 중에는 성령의 책망하는 음성을 듣고 돌이켜 회개할 자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롬3:10의 말씀은 "죄인"에 대한 설명이요, 롬3:11~12의 말씀은 "악인"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롬3:10에 나오는 "죄인"은 다윗과 같이 죄를 지은 후에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돌이켰던 회개하는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롬3:11~12에 나오는 "악인"은 나발처럼 책망을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며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왜 누군가 악인에 대한 설명을 롬3:10에 나오는 죄인에 대한 설명으로 바꿔치기한 것인가?
그럼, 누가 관주를 잘못 기재하여, 롬3:10의 말씀이 나발과 같은 악인에 대한 설명이라고 끌어간 것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언제부터 관주가 달아졌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을 찾아가 보니, 우리나라에서 관주성경의 최초는 1911년에 신약성경을 발행할 때였다. 그것도 미국에서 1907년에 발행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에서 따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1800년대 어느 선에서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 같아 보인다.
다만,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제4판 최종본, 1559년)에 보면, 롬3:10이하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롬3:10~12을 말씀을 써놓고는 괄호 안에 (참고, 시편14:1이하, 시53:1이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칼빈이 롬3:10과 롬3:11~12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칼빈도 역시 악인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롬3:10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성경말씀에 대한 장절 표기가 칼빈시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펼쳐지기 전까지 누구도 성경에 장절을 표기하지 않았는데, 1551년에 프랑스 파리의 인쇄업자였던 스테파노스가 처음으로 신약성경에 장절표기를 시도하였고, 그 무렵에 칼빈이 그것에 대한 추천사를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이하의 말씀이 시14:1이하에 있다고 표기한 것은 칼빈이 최초가 아닌가 추측을 해 볼 뿐이다. 그런데 후대에 가면서 그러한 사실은 점차 고착화되었으니, 지금까지 발행된 모든 관주성경은 칼빈처럼 롬3:10의 말씀의 관주를 시14:1, 53:1이하의 말씀이라고 달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버젓이 말이다.
9.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절대지상주의는 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지상주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며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정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다윗처럼 죄인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롬3:11~12의 나오는 나발 곧 "악인"의 상황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인 것이다 모두가 다 악인은 아닌 것이다. 그중에는 나발과 같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악을 일삼는 악인도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은 이러한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실수였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이라도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으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올 자도 있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가르쳐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한 인간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은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앞에서 줄곧 설명했으니 생략하고, 예수께서는 과연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마12:20)에 나오는 인간이해다. 곧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은 상한 갈대처럼 꺾여진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갈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꺼져가는 심지(혹은 등불)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면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람을 막아주고 기름을 보충해 준다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가 있다. 바람인 귀신들의 공격을 차단해주고, 기름인 성령을 보내어 깨닫게 하시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있거나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해 있어서 스스로는 절대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된다고 말이다.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번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내게로 나아오라.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그리고 왜 성령께서도 "오라. 와서 원하는 자는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사람이 비록 타락은 했어도 주님의 초청에 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주님의 초청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거절할 것인가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이렇듯 선택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떻게 주님과 성령께서 구원으로 그들을 초청하고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책망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날에 주님께서 사람을 불러다가 심판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것에 대한 처벌로서 심판할 때에 그들은 어느누구도 항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타락해 있어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적어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에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11.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에 즉시 마음의 문을 열고 구원의 초청을 수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현재의 상태에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탈출하여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돌이켜 회개하여 주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다시 범죄하게 되었을 때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묻혀 지내다가 그만 회개하지 않고 불못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21:8). 그러면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계3:5).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의 성도들에게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3:19). 열심을 내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며, 회개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실 때에 속히 응답해야 한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회개한 죄인 다윗처럼 구원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죽어 악인 나발처럼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