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남긴 열매들과 우리의 과제(요6:35~40)_2017-10-29(설교영상)

by 갈렙 posted Oct 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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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SPXOViyvl8M
날짜 2017-10-29
본문말씀 요한복음 6:35~40(신약15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종교개혁의과제, 중세시대의구원론,믿음과회개의회복,예정론의등장,교회의타락,성경원문번역,문맥해석

  오늘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신부 마르틴 루터(A.D.1483~1546)가 비텐베르크 성당에다가 면죄부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 걸자, 그것이 종교개혁의 불씨로 발화되었고, 이어 루터보다 약 26년 뒤에 태어난 존 칼빈(A.D.1509~1564)의 해서 종교개혁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사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처음 종교개혁은 속죄와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원리를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한 구원이었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구원관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중세시대는 은총과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은총'이라는 오직 교회의 신부(사제)를 통한 은총으로서, 세례와 고해성사를 받을 때에 구원받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중세로마카톨릭에서는 누구든지 세례를 통해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죄와 원죄를 사함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세례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반드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고해성사를 하면, 자신이 지은 죄는 사함받지만 죄에 대한 형벌은 받아야 한다고 가르킨다. 그래서 그 형벌로서 성경을 읽거나 성지순례를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 기부를 하거나 고행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세례는 받았으나 고해성사를 하지 않거나 죄사함에 대한 형벌을 이행하지 않는 자는 연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로마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비 마련을 위해, 사람이 면죄부를 사게 되면 비록 자범죄들에 대한 형벌을 받지 않아도 죄를 사함받는다고 했다. 그러자 루터가 이것이 크게 잘못된 주장임을 들고 일어난 것이다. 자기도 신부로 세례를 받았고 고해성사를 했으며, 여러가지 선행과 구제, 기부와 고행을 해보았으나, 죄사함의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비로소 고참신부가 건네준 성경책을 읽다가 그는 속죄와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깨닫게 된 구원관 곧 시편을 통해서는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찾아내게 되었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는 자신의 선행을 통ㅎ래서 연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믿음과 회개를 통한 구원을 설파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방향은 다음 바톤을 이어받은 칼빈에 의해, 사람이 받는 구원은 회개와 믿음이 아니라, 만세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통하여 받는다고 변형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648년에는 영국성공회까지 칼빈의 만세전예정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체계화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만세전예정론은 죄를 지은 자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못했으며,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보니, 칼빈의 예정론을 받아들인 자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칼빈의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을 불러들였으며, 그것을 지켜보고있는 외부 불신자들로부터 교회가 냉대와 불신의 세력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이 그만 교회내부의 부패와 타락, 교회외부의 냉대와 불신의 열매들을 낳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부패와 타락해버린 교회를 어떻게 하면 쇄신하여 믿는 이들로 하여금 바른 구원론을 가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교회 밖에 불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서 그들을 구원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구원관을 바로잡고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론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루터가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던, 믿음과 회개를 통한 참다운 구원을 완성할 수가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셨던 바로 그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을 해석할 때 교리적 잣대로 놓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른 구원관이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구원관을 회복할 수가 있게 된다.

  먼저, 첫째로, 바른 구원론을 회복하려면 성경번역을 정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원문 그대로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들은 대부분 번역본들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한글번역본만 하여도 15종이 넘는다. 영어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과연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들이 헬라어상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다. 잘 번역을 해 놓았으려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매우 중요한 말씀들 즉 교리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말씀들마저 잘못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구원론에 관하여 잘못된 인식들을 가져다주는 오역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원래 하셨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번역본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만세전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교리의 근거로서 요한복음 5장 37절과 39절의 말씀을 내세운다. 우선 그 말씀들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만세전예정론자들을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만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있으며, 주님은 그러한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날에 살리신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만세전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들어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은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번역이 가장 잘못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이다. 혹 한글성경에 번역된 대로만 본다면, 만세전예정론이 맞는 것처럼 보일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잘못된 번역이므로 잘못된 주장이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주시고 있거나 이미 보낸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원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보내주신다는 것이요 그것을 예수께서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구를 보자. 먼저 37절의 예를 들어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문구가 잘못된 번역인 것이다. 이 문구는 개역개정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이나 다 똑같이 잘못 번역하고 있다. 더욱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표준새번역이나, 고영민박사의 원문번역주석성경이나, 허성갑목사의 직역성경에 보면, 더욱 더 확실히 오역인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것은 전부다 틀린 번역들이다. 왜냐하면 37절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사람,남성명사)"는 헬라어 원문으로 볼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현재] 보내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명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단어가 "판(All)"이라는 것인데, 이 단어는 중성 단수명사다. 다시 말해, 37절의 "주시는 자(사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시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공생애를 살고 있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지상의 사역을 잘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현재 보내주시고 있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은혜, 지혜, 성령, 권세, 능력, 이름, 용기"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더욱이 이 문장에 등장하는 것이 중성명사가 아니라 남성명사(사람)라고 하려면, "모든 것"은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스(모든 사람)"라고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 나오는 "모든 것"은 중성명사로서 "판"이다. 그러니 전세계에서 이미 출간되어있는 모든 번역본이 다 잘못된 번역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헬라어를 직역하신 천안의 합동측 박규한 목사께서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제대로 번역한 바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오고 있는 이를 나는 바깥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박규한역](요6:37)" 그렇다. 이 문장에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최소한 2군데를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주시는 자"다. 그런데 실제는 "주시고 있는(직설법 현재 능동태) 모든 것(중성 단수)"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올(헬라어로, 에르코마이) 것'이다. 이것은 "올 것"이 아니라, '도착할(다다를)(헬라오로, 헤코) 것(직설법 미래 능동태)'이다. 그러므로 요6:35~37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옳다. 이것은 만세전 구원론이 틀렸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요6:35~37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현재] 나를 향하여 오고 있는 자(사람)은 결코 [확실히]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현재] 믿고있는 자(사람)은 결코 [장차]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36 그러나 나는 너희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이미 본 채 있었지만 [지금도] 믿고 있지 않다고 말이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지금] 주시고 있는 모든 것은 나를 향하여 [확실히]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현재] 오고 있는 자(사람)는 결코 [확실히] 바깥으로 내쫓지 아니할 것이다."

  둘째로, 바른 구원론으로 나아가려면, 문장을 해석할 때 교리적 잣대를 미리 정해놓을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구원론을 나아가려면 문장해석도 주의해야 하는데, 16세 중반부터 이미 세계의 거의 모든 개신교회가 칼빈의 예정론이 교리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러니 그때에 나온 성경번역본들은 거의가 다 칼빈의 예정론에 입각하여 번역한 것이었고, 또한 설교자들도 칼빈의 예정론에 따라 성경본문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본문을 교리적으로 이용하는 자는 대부분 어떤 성경 한 구절만을 쏙 뽑아서 쓰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그러므로 바른 구원론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고, 성경의 문맥을 따라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잘못된 교리나 관점이 성경도 잘못 해석하게 만드는 것이다. 좀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요6:37의 말씀은 그 대표적인 성경해석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37절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두셨다가 그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보내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자기해석에 불과하다. 과연 성경 어느 말씀에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두셨다고 증거하고 있는가? 그러한 성경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러므로 37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와 예수님을 믿고 따라오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예수님께 모든 것을 계속해서 보내주시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잘못 번역한 채 그것을 또한 잘못 해석하는 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곡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37절의 말씀을 문맥에[ 따라 읽어보자. 그러면 누구든지 주님을 향하여 현재 나아오는 자가 결코 굶주리시도 아니할 것이며,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있는 자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미 본 채 있으면서도 그분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기 위해 그분 앞으로 나아가며 그분을 믿을 때에 구원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경적인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35~37절에 나온 것처럼, 누구든지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가 구원을 받으며,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40절을 보아도, 누구든지 아들을 현재 보고 있는 모든 자(사람)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그러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을 보고 믿으며, 그분 앞으로 나아오는 자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다운 제2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비텐베크로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또 써붙여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을 가장 바르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일이 급선무다. 제2의 종교개혁은 거기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을 해석할 때 교리적인 잣대를 우선 내려놓고, 성경이 성경으로 해석하도록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성경해석이 본문의 원뜻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 여러분에게도 앞으로 그러한 눈과 귀가 열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 주여, 어서 속히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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