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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1)  신학고전(성서신학) / Theology   
2014. 1. 5. 22:56


https://blog.naver.com/1019milk/80204833038
 

 현대에 들어 그리스도교가 점점 더 힘을 잃어가게 된 현상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한 원인을 그리스도교 교회의 도덕적인 부패와 사회참여 의식의 결여에서 찾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는 더 뿌리 깊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리의 시대에는 ‘종교’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었다. 기술문명의 발달이 우리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있으며 정신치료가 전문화된 상황 속에서 ‘종교’는 사람들에게 허구로 가득 찬 의미 없는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이와 같은 맥락을 도외시한 채 그리스도교가 단순히 외면적으로 바뀐다고 하여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경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히 도덕적 성숙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요청이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인들의 삶과 사회구조와 학문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를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신앙이 단순히 이천 년 전에 유효하였던 고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진리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어야 한다. 20세기 신학의 논의들은 바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하였다. 신학자들은 이 고민의 과정에서 성서를 재해석하고 현대의 철학 사상들과 대결하며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닐 수 있는 의의에 대해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1는 20세기 신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논문이다. 불트만은 이 논문을 통해 자신의 ‘비신화화(demythologizing)’ 이론과 ‘실존론적 성서 해석’의 의미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죄사함, 부활 등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신화가 된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을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그리스도교의 의의를 설명해 내는 것이 불트만 신학이 목표로 하는 바이다.
 

 이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는 우선 신약성서 해석에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들을 지적함으로써 ‘비신화화’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약성서가 이야기하는 인간 이해를 요약적으로 재해석한다. 특별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니는 의의가 강조되고 있다.

 이 글은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가운데 Ⅰ부 ‘신약성서의 선언을 비신화화하는 과제’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해설한 뒤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불트만의 이 논문은 분량으로 보았을 때 매우 짧지만 그 속에 불트만 사상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이 매우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논문 전체를 개괄하며 해설하는 것보다는 세부적으로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특별히 Ⅰ부에서 제시되는 ‘비신화화’ 이론은 단순히 성서 해석뿐만 아니라 신화 해석을 비롯하여 철학적 해석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Ⅱ부 ‘비신화화의 개요’의 내용은 후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서의 신화들은 현대인들에게 무의미한가?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이천년 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화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약성서는 이 우주를 천당, 지상, 지옥으로 구성되어 있는 삼층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으며 천사나 마귀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죄를 사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성찬으로 예수와 결합되어 구원에 참여한다는 주장 역시 자연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라 신화적인 언어로 이야기된다. 신약성서가 전제하고 있는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된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세계관을 공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 

불트만은 이곳에서 학위를 마치고 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다.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약성서에 기록된 세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는 무리이다. 삼층 우주론이나 초자연적인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불트만은 이러한 현대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신약성서로부터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복음의 본질을 현대적인 언어로 재서술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가 진술하는 신화적인 외피를 해석하여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이것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라고 불리는 작업이다.

 “이것은 모두 신화론적인 언어이며 각 주제의 기원은 당시 유대적 묵시 문학의 신화론과 영지주의(Gnosticism)의 구원 신화 안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한, ‘케리그마’(kerygma, 복음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인간 구원의 행위에 대한 설교)는 현대인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낡은 세대에 속한 옛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에 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와 더불어 그 복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까지도 믿고 받아들일 것을 기대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만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신약성서는 신화적 배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독립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신학은 마땅히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내는 것 즉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2

 현대인들에게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더 이상 제시할 수 없는 이유로 불트만은 두 가지를 든다. 첫째로 신약성서가 전제하는 세계관은 그리스도교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교 묵시 문학과 영지주의를 비롯한 다른 여러 신화 속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미 신약성서가 당시 근동의 여러 종교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들과 공통된 신화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신화적 세계관은 배척하면서 성서의 세계관만은 참되다고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잣대를 지닐 수가 없다.

 
 둘째로 세계관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의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과학기술이 발달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과학기술에 의존한 세계관이 이미 주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개인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고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분열증적인 생활을 하라고 요구하는 모습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마땅히 부정해야 할 세계상을 우리의 신앙과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3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상을 살아갈 때는 과학적 세계관에 근거를 두면서 신앙생활에서는 신화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세계관을 현대에 강요한다면,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신앙을 한 인간의 조작이라는 수준으로 저하시키는 일”4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있어 필요한 일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고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가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란 결코 문자적인 진리, 곧 신약성서에 쓰인 모든 문자적인 내용들이 참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신화적인 언어 뒤편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선포되고 있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다. 불트만은 성서의 진리가 문자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자 뒤편에서 성서의 참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지(人智)와 자연계의 지배가 과학과 기술을 통하여 이와 같은 정도로 발전된 오늘날, 아무도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사실 아무도 고수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3층 구조의 우주를 우리가 믿지 않는 오늘날, 사도신경에서 지옥에 ‘내려갔다’든가 하늘에 ‘올라갔다’든가 하는 말에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읽는 데 유일한 정직한 길은 신화론적 윤곽을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다고 가정하고──로부터 벗겨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취급해야 할 문제이다. 스스로 사고할 수 잇는 나이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 살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체로 재래적인 의미의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 밑 땅 속에 들어 있는 신화적 지옥이란 또한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든가 신자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만난다든가 하는 것을 대망할 수는 없다(데살로니가전서 4:15 이하).”5

 

신약성서 해석에서의 문제: 자연과학과 현대인의 자기 이해

 불트만은 더 이상 현대세계 속에 신약성서의 세계관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예들을 통해 설명한다.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별들이 단순한 천체에 불과할 뿐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마찬가지로 질병 역시도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으며, 악마적인 존재가 일으킨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마찬가지로 신약성서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성서의 신화적인 내용들을 믿을 수 없게 하였다.

 설령 성서의 내용들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도리어 성서가 말하는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단순한 인과적이고 법칙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가령 누군가는 예수의 치유활동이 신화가 아니라 플라시보 효과를 통해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예수의 신성을 뒷받침해 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의 기적을 평범한 현상들 중 하나로 만들어버린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적의 역사성을 신경착란이라든가 최면술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것으로써 변호하려는 것은 오히려 기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불과하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할 신비롭고 기이한 것에 귀인시킬 수밖에 없는 어떤 육체적 또는 심리학적 현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도록 노력할 것뿐이다. 지금은 심령학(occultism)까지도 과학의 하나로서 자임(自任)하고 있다.”6

 그러나 신약성서를 믿지 못하게 하는 더 중요한 도전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현대인의 자기 이해에서부터 제기된다.7 불트만은 당시 철학에서 퍼져 있던 ‘자연주의’와 ‘관념론’의 인간 이해를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와 비교한다. 자연주의와 관념론은 서로 상반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신약성서의 인간 이해와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 둘 중 하나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면 그가 신약성서를 납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연주의와 관념론 모두 인간을 하나의 통일적 존재로 이해한다. 자연주의는 인간을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존재로 주장하지만, 반대로 관념론은 인간의 본질이 물질과는 다른 순수한 정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해들 속에 초자연적인 힘이나 영(靈)의 개념이 개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먼저 자연주의자라면 오직 물질세계와 자연법칙의 존재만을 인정하므로 당연히 초자연적 대상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관념론은 인간의 정신이 근본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종류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인도된다는 식의 주장은 거부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들을 취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이나 ‘성례전’과 같은 교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나, 성례전에서의 빵이 영적인 힘을 가진다는 교리 모두가 믿기 어렵다.

 

 아울러 인간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 속에 들어왔다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자연주의자에게는 죽음이란 순전히 자연적 과정일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순전히 자연적 법칙의 과정으로 물질계 차원에서 설명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관념론 역시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죄는 개인의 인격적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는 식의 교리는 비이성적으로 보인다.8

 
 마찬가지로 대속과 부활이라는 교리 역시 이해될 수가 없다.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고 죽임을 당함으로서 죄를 대속해야 하며, 또 그가 부활한 뒤에 우리는 성례전을 통해 그의 힘에 참여한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많은 신화적인 생각들을 전제하고 있다. 애초부터 생물학적 죽음이 ‘죄’의 문제와 결부되고 있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뿐더러, 신적 존재의 죽음과 부활이 도대체 우리 자신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또한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그리스도가 어차피 다시 부활할 것을 알고서도 죽었다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슨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막연하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인간이 하늘로 옮겨져 빛나는 옷과 영원한 몸을 얻는다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당연시하고 받아들이기에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성서와 너무나도 다르다.


원제는 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신약성서와 신화)이다. 이 논문은 Kerygma und Mythos(케리그마와 신화)에 수록되어 있다.
루돌프 불트만, 유동식 옮김,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1986, 11쪽.
Ibid., 12쪽.
Ibid.
Ibid., 13쪽.
Ibid.
Ibid., 14쪽.
Ibid., 16쪽.
[출처] 루돌프 불트만,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1)|작성자 YOUN

 

비신화화의 필요성: 신화의 본질과 신약성서 자체로부터의 요청

 

 
 신약성서에서 신화적인 부분들은 삭제하고 비신화적인 나머지 부분만 남겨 두는 방법으로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진리를 구해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신약성서의 각 내용들은 결국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단순히 취사선택적으로 일부를 뽑아내어 믿는 방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적인 부분을 삭제한다고 할 때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신화와 비신화를 구분해야 하는지도 그리 분명하지 않은 문제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가 “결국 신화적 세계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든가 또는 전적으로 이를 배제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1라고 이야기한다.

 

 불트만은 취사선택적인 성서이해에 반대하여 ‘비신화화’의 방법을 내놓는다. 비신화화는 성서에 있는 신화 전반을 벗겨낸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을 허구적으로 취급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들을 오늘날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해 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불트만은 신화적 언어 뒤편에 있는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과제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신화 일반의 본질과 신약성서 자체로부터 설명하고 있다.

 

 불트만은 우선 신화 자체가 지닌 본질에서부터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신화란 근대 과학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신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다. 신화에서 사용되는 여러 구체적인 사물들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사실성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가령 신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이해는 신화 속에서 공간적인 거리감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신화가 “신은 하늘에 계시다.”라고 우리에게 전한다면, 이것은 신이 정말 대기권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인간의 능력과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라는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화의 본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보다 나은 말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는 인간이 그의 세계와 그의 활동과 고난의 근거 또는 제한으로써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힘 또는 세력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화는 이러한 힘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촉감할 수 있는 사물과 힘, 즉 가시적인 이 세상의 말로써 하며 또한 느낌, 동기, 가능성 등 인간 생활의 말로써 묘사한다. 예를 들면 신화는 세계의 알(卵)이라든가 세계의 나무라든가 하는 것으로써 세계의 기원을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태고의 신들의 투쟁이라는 것에 의하여 현 세계의 생태와 질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는 저 세상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신을 인간적인 것으로써 말한다.”2

 이러한 본성상 신화는 그 자체 속에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신화에서 겉으로 드러난 내용이 아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 자기 이해를 표현하고 있는가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ce)’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따라서 신화가 인간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신화를 자기 이해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불트만의 성서해석은 ‘실존론적 해석’이라 불린다. 물론 대개의 경우 불트만은 이 단어를 단순히 ‘자기 자신’ 혹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신약성서 신화론의 중요성은 그 구상적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의 이해에 있다. 참 문제는 이 실존 이해의 진부(眞否) 여하에 있다. 신앙은 이 진리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앙은 신약성서 신화론의 구상적 표현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3

  

 

 신화의 본질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 역시도 비신화화의 필요성을 그 안에 품고 있다. 신약성서는 수많은 모순적인 내용을 이야기한다. 이 모순들로 인해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성서는 그 자체만으로 일관성 있게 읽혀지지 않으며 우리는 이 모순되는 내용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자체가 이러한 비판을 초래하고 있다. 즉 그 신화론 속에 조잡한 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사는 실제로 모순된 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때는 희생으로 되고, 어떤 때는 우주적 사건으로 되어 있다. 어떤 때는 그의 인격이 ‘메시아’로 해석되고 어떤 때는 제2의 ‘아담’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천하게 된 선재적 아들(빌립보서 2:6 이하)이라는 사상과 그의 메시아성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 기사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다. ‘창조’의 교리와 ‘이 세상의 지배자’(고린도전서 2:6 이하)라든가 ‘이 세상의 신’(고린도후서 4:4), 또는 ‘이 세상의 원리’(stoikeia tou kosmou, 갈라디아서 4:3) 등의 개념과는 모순된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신앙과 이것은 천사로부터 왔다(갈라디아서 3:19 이하) 이론과는 모순된다.”4

​ 

비신화화 이전의 해석들에 대한 비판적 관점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 이론을 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성서해석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이미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신화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그 이전부터도 있었다. 하지만 정통주의 신학은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에 현대인들의 사고에 부합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으며, 자유주의 신학은 신화를 완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제거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그 속에 있는 케리그마를 제대로 발견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면 신약성서의 신화론은 어떻게 재해석될 것인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실로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은 이미 30, 40년 전에 그와 같은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오늘날 재차 같은 것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신학의 한 파탄 표지라 하겠다. 즉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화론 뿐만 아니라 케리그마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렸었다. 과연 그들이 옳았던가? 과거 20년간은 비판에서 떠나서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데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무대였다. 그러므로 신학과 교회에 대한 위험은 이러한 신약성서 신화론의 무비판적 재현이 복음의 메시지를 현대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세대의 비판적 연구를 간단히 치워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사이의 옛 투쟁은 재차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5

 자유주의 신학의 경우는 성서의 신화들을 매우 일반론적인 교훈들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신화들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면, 그 진리란 보편적이고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종교와 도덕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들이어야 했다. 가령 불트만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하르낙은 ‘하늘나라’라는 신약성서의 개념에서 신화적인 특수한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한 채 가장 기본적인 종교와 도덕의 의미만을 남겨둔다. 가령 하늘나라라는 개념에서는 ‘일상생활의 소산이 아닌 위로부터의 선물’, ‘신과의 내적 결합’, ‘인간의 모든 것이 의존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의미만이 주목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뼈대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나 도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매우 특수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신약성서는 어느 종교나 도덕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위를 하셨다는 것이 신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신약성서의 신화를 단지 신화라는 이유만으로 제거하여 보편적인 원칙들로 이를 대체하는 것은 텍스트 해석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러한 일은 성서가 선포하는 바, 곧 케리그마의 핵심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불행히도 케리그마 자체의 핵심적인 내용이 제거당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의 선포가 아니다. …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신 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첫째로 교사로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이 교훈으로 말미암아 항상 존경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격이 그의 교훈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그의 인격이야 말로 신약성서를 구원의 결정적인 사건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의 인격을 신화론적인 용어로써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신화론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케리그마 전체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6

 다음으로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훈에 관심을 두었던 하르낙의 경우와 달리, 종교사학파들은 실제적인 종교생활에 주목한다.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내용들과 교리들은 모두 2차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통해 표현된 종교생활,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결합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신화들은 바로 이 체험들을 반영하고 있다.

 
  

종교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종교사학파는 이러한 종교적 생활과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초월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세상과 구별되어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종교사학파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종교생활의 최고 실현을 이와 같은 예배 행위에서 찾았으며, 신약성서 역시 이러한 생활을 이상적으로 그린다고 생각했다. 하르낙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를 순전히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차원으로 이해하여 종교생활이라는 부분을 간과한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종교사학파는 진일보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전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적 교훈과 도덕적 이상만을 신약성서로부터 읽어내려 하였던 나머지 교회를 통해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행위를 하는 등의 순전한 종교 활동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종교사학파 역시 신약성서의 신화들을 해석하는 일에 충분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우선 그는 종교사학파가 신약성서의 초월 개념을 신비주의적으로 보았던 것에 반대하며, 이 초월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략히 지적한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사학파 역시 이전 자유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7는 점이다. 신약성서가 중요하게 기록하는 예수의 인격과 그를 통한 구원의 사건이 지니는 결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종교사학파 역시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 만약 종교사학파가 옳다면 케리그마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의미의 케리그마의 뜻을 잃는다. 여기서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이 구원의 사건으로서 선포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신화론적 용어로 서술된 이 구원의 사건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과연 신화론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문제로서 남아 있다. 과연 케리그마는 신화론을 별개로 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케리그마로서의 진리를 상실함이 없이 신화론적 용어로써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케리그마의 진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8

 

성서의 삼층 우주론 

 

 이전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사학파의 한계를 지적하며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 이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성서의 신화들을 해석하여 발견해 내어야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이해, 곧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화의 본질 자체와 신약성서 자체에 의해 이러한 비신화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발견한 인간 실존 이해가 오늘날 비신화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들의 과제는 같은 노선에서 신약성서의 이원론적 신화론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를 속박하고 있는 악마적 힘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이러한 표현 속에 놓여 잇는 인간 실존의 이해는 과연 오늘날 비신화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인간 실존을 이해할 수 있는 파악 방책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9


 이후 제시되는 내용들은 지금까지 소개한 실존론적 해석을 구체적인 신약성서의 내용들에 적용하여 그 속에 담긴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불트만은 특별히 현대의 실존철학에서 나타나는 인간 이해가 신약성서 속에도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서가 실존철학과는 구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을 주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 사건을 신약성서에서 제거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비신화화하고자 한다.

 

비신화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

 


 신화는 자연세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지닌 진실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신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이를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비신화화’라는 불트만의 작업은, 겉보기에 그 말의 어감으로 인해 마치 신화를 파괴해 버리는 것 같은 오해를 살 수 있으나, 사실은 신화의 본질을 제대로 집어내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신화를 신화로서 받아들이고 이것을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 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두 가지 국면을 지닌다. 이 이론은 신화가 오늘날 더 이상 문자 그대로 수용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지적한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내용들이 “현대인에게는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10라고 비판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신화화는 이렇듯 신약성서를 신화로 규정하고 무너뜨림으로서 동시에 신약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신화가 신화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게 된다.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가령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대한 이솝 우화를 자연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두 동물이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발목이 잡힌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으로 읽혀진다면,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진실을 전해줄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의 신화들 역시 신화로서 이해될 때에야 그 참된 의미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비신화화가 지닌 양면적인 의의로 인해 불트만 사상이 이전 신학에 대해 거둔 성과 역시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불트만은 정통주의 신학이 성서의 내용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는 점에 반대하면서 신약성서를 용기 있게 ‘신화’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로써 그는 신약성서를 문자적인 사실대로 자연과학에 근거하여 읽으려는 시도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정통주의의 해석은 신약성서의 신화적 양식을 정당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서, 오히려 신약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불트만은 정통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신약성서에 대한 기존의 하르낙 계통의 도덕주의적인 해석과 종교사학파의 신비체험 중심적인 해석 역시 비판한다. 이들은 성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상대화하는 데에만 주목하여 신약성서의 신화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보면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 책을 통해 현존재의 자기 이해가 다른 모든 존재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불트만은 신약성서 신화들의 의미 연관관계 중심에 현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자기 이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을 ‘존재론’으로 주장한 반면 불트만은 이를 ‘실존주의’로서 이해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그의 하이데거 독해가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는 무리이다. 불트만이 논문의 Ⅱ부에서 신약성서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부분들은 사실 하이데거 본래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 관건이 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결정적 사건’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비신화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신약성서의 증언들이 정당하게 고려된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실존주의 철학적인 교훈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유일무이한 구원의 사건으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Ⅱ부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불트만이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불트만이 비신화화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점에서 비신화화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만일 비신화화를 극단까지 밀고 간다면 결국 현대물리학이 인정하는 대상들 이외에는 모든 것이 실존주의적인 인간 이해라고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순수한 철학적 교훈으로 만들어 버려야 할뿐더러, 신 역시도 철학적인 의미만을 지닌 상징적인 존재로 취급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의지하며 자기 삶을 맡길 수 있는 신, 곧 인간을 고난 속에서 건져주며 언제나 사랑으로 보살피는 신의 존재는 결국 허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신앙’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키는 셈이나 다름없어 진다.

 

 
 아울러 ‘신화’와 ‘비신화’의 기준이 과연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역시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신화라고 규정하는 것들이 사실 도리어 비신화적인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성례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는 바울의 교의는 단순히 신화일 뿐인가? 고대인들은 단지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들을 신화적인 상징으로 옮겨 적어놓았을 뿐, 신화 자체는 아무런 진실도 지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혜문학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인들 역시 그들의 인간 이해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즉, 그들은 단순히 체계화된 글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거나 철학적인 탐구가 아직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신화적인 상징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보기에 ‘신화’처럼 보이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점은 그 신화들이 실질적인 그들의 경험에 다른 어떠한 종류의 철학적 설명들보다도 더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화’로 규정하는 것들이 오히려 비신화적인 진실을 가리키고 있을 수가 있다. 철학적인 해석을 통해 그 신화들을 비신화화하여 풀어내는 일이 어쩌면 신화 자체가 나타내는 진실을 가리는 작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해야 하지만, 그 신화는 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며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도 역시 비신화화의 한계와 범위를 보다 분명하게 설정하는 일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비신화화는 어디까지 이루어져야 하며, 어떠한 선에서는 멈추어 서서 신화를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불트만 자신은 이 내용을 논문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으며, 아직 나로서는 그가 다른 논문에서 이와 유사한 논의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비신화화 이론의 성패 여부는 그것이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 달려 있는 듯하다. 신학적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가 실제성을 지닌 신앙으로 남을 수 있는지, 아니면 철학적 의미 속에 용해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신화 해석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신화를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엉뚱하게 분해시키고 있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출처] 루돌프 불트만,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2)|작성자 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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