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
1) '옛 탐구'
예수라는 인물을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 첫 사람은 함부르크 대학의 동양언어학 교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이다. 그는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섬기는 자들에 대한 변증 혹은 방어"라는 글을 썼는데, 이는 자신의 사상을 위해 역사비평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선포를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신앙으로부터 구별시켰다. 예수의 선포는 오직 당시 유대 종교의 콘텍스트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늘 나라의 임박성과 부름이었다. 그러므로 라이마루스에게 예수는 유대교의 예언자 또는 묵시적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분리된 사도들의 새로운 창안일 뿐이었다.
바우르(F. C. Baur)와 헤겔(F. W. Hegel)의 제자로서 철학자이며 동시에 신학자이기도 한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는 1835/36년에 출판한 센세이셔널한 책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 전승 연구에 신화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그에게는 예수전승에 대한 신화적 접근이야말로, 미신적 초자연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해석과 합리주의 사이의 헤겔주의적 통합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요한복음이 신학적 전제에 근거하여 작성된 점과, 따라서 공관복음보다 신빙성이 덜하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혔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유주의적 연구가 가장 낙관적인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신약성서학의 방법론적 발전 때문이었다. 바로 문학비평(엄밀히 말하면 출전비평)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예수에 관한 최초의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형은 바로 하인리히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 1832-1910)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바우르는 이미 공관복음의 우월성을 주장하였고, 빌케(Gottlob Wilke)와 바이세(Christian Hermann Weisse)는 2문서설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홀츠만은 예수 연구를 위하여 마가복음과 Q에 집중하였다. 지금껏 그늘에 가려진 자료이던 마가와, 학자들이 처음 재건한 자료인 Q는 예수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가장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마가는 예수의 전기적 발전으로서 예수 생애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예수의 생애에서 마가복음 8장은 하나의 전환점으로서, 예수의 메시야 의식이 갈릴리에서 형성되었다면, 제자들에게 자신을 메시야로 보여준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였다. 한편 Q는 고스란히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서, 마가에서 구현된 전기적 틀 안에서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둘 가운데 예수의 생애를 재건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브레데(W. Wrede)의 유명한 책 『메시야 비밀』(1901)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조차 공동체 도그마의 표현임을 밝혔다.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부활절 이후의 신앙이 내적으로 비메시야적인 예수의 생애에 투사되었으며, 비역사적인 '메시야 비밀의 이론'이 마가복음의 전체 모양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두 개의 초기 자료인 Q와 마가에 의존하여, 예수의 역사와 부활절 이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예수 연구의 낙관론에 도전을 가한 것은 알버트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연구 『역사적 예수의 탐구』(1906)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그 간의 모든 역사적 예수 연구를 개관하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그들의 모든 재구성은 연구자의 눈으로 볼 때 가장 값진 윤리적 이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구 결과는 역사적으로 재건된 예수의 생애가 아니라, 예수에게 투사된 자신의 이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비판적 분석 이후에 그는 자신의 대안적 예수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이른바 '철저 종말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예수는 철저히 종말론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학계는 쉬바이처의 연구에 이르는 모든 자유주의적 연구를 가리켜, 슈바이처의 표현을 빌려서 '탐구'(Quest) 또는 '옛 탐구'(Old Quest)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의 모든 연구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연구이며, 또한 쉬바이처의 독일어 원저명이 『예수의 생애 연구사』인 점을 따라 '생애들'(Lives)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예수 연구에 대한 회의주의와 '새로운 탐구'
옛 탐구의 낙관주의적 예수 연구를 결정적으로 흔든 것은 칼 쉬미트(Karl L. Schmidt, 1919)였다. 그는 예수전승이 '작은 단위들'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 이야기의 연대기적/지리적 틀조차 마가에 의해 부차적으로 창작된 것임을 밝혔다. 이로써 단화들의 연속적 발생으로부터 예수의 생애를 읽어내려는 가능성은 뿌리까지 흔들렸다. 더욱이 그 후의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불트만(Rudolf Bultmann) 등 양식비평가들은 그 작은 단위들조차 역사적 기억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밝혔다. 심지어 예수전승의 가장 작은 단화들조차, 예수전승의 케리그마적 특성이 지배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가장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루돌프 불트만(1926)이었다. 그의 예수 연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변증법, 실존주의, 종교사 연구였다.
(1) 변증법적 신학.
그는 하나님과 세상을 대립 명제로 보았다. 이 양자는 예수의 도래와 떠남,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정점에서 만난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 행위에 대한 메시지, 즉 신약성서의 케리그마야말로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2) 실존주의 철학.
인간은 결단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성' (authenticity)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결단은 이를테면 역사적 지식과 같은 객관적 검증(Objectifiable arguments)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실존주의에서 이 결단이란,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안에 잇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실존적으로 죽고 다시 삶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린도후서 5:16에서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앎이 신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부정해 보린다.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계시자가 계시하는 것은 단지 그가 계시자라는 사실뿐이다. 이 둘은 모두 케리그마를 세운다. 이를테면,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부활절 이전의 기억을 상쇄시키는 부활절 이후의 신앙을 세울 뿐이다.
(3) 종교사 연구.
예수는 유대교에 속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무관하게 오직 부활로써만 시작하였음을, 불트만은 분명히 했다. 그 결과,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반대로 그는, 예수에 의한 부활 이전의 결단 촉구 안에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론이 암묵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하였다.(바로 이 점이 나중에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탐구'를 시작하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 결과,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고, 신학적으로 부당함을 천명하였다. 그는 복음서 자료들로부터 예수의 인간됨(personality)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예수의 생애'를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예수의 역사적 편린을 발견하든 못하든, 그것은 신학을 위해서는 하등의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 연구는 결단을 위한 무시적(無時的) 촉구의 선포자에게로 돌이켜야 할 뿐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New Quest)란 말은 기존의 '옛 탐구'와 의도적으로 대비시키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옛 탐구의 순진한 낙관주의와 한계로 말미암은 깊은 회의주의에 비하면, 새로운 탐구의 범주에 속하는 일군의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는 분명 새로운 궤도에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탐구는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semann)이 1953년 10월 20일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행한 강의 "역사적 예수의 문제"로 점화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강력히 주장하였다. 교회가 숭배하는 '그리스도'는 필경 1세기 팔레스틴에 살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은 진짜 예수로부터 기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와 예수 사이의 이 연결고리를 배제한다면 '예수'라는 말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케제만 이외에 새로운 탐구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주로 불트만의 제자들인데, 그들은 보른캄(G. Bornkamm, 1964), 에벨링(G. Ebeling, 1963), 브라운(H. Braun, 1963), 쉴레벡스(Eeward Schhillebeekx, 1974), 예레미아스(J. Jeremias, 1971) 등이다.
옛 탐구가 역사적 예수를 교회의 선포와 대립하여 이해하였다면, 불트만의 제자들 사이에서 발전한 새로운 탐구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여 십자가와 부활 안에 터를 잡은 예수의 승천과 존귀하게 됨이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 안에서 어떤 기초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들이 볼 때 지상 예수와 승천하여 존귀하게 되신 그리스도의 (이중적) 정체성이야말로 모든 최초의 문서들 안에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위한, 부활절 이전의 근거 여부에 대한 탐구는, 예수께서 인자,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등과 같은 그리스도론적 칭호를 사용하였는가의 여부와 무관하다. 오히려 이 주장은 그의 행위와 선포 안에 암시되어 있다.
옛 탐구의 방법론적 근거는, 유대교와 최초의 그리스도교로부터 기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나면, 비판적으로 검증된 최소한의 '진정한' 예수 전승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있었다. 이는 최초의 자료들에 대한 문학비평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새로운 탐구의 방법론도 예수전승 중 어느 것이 진정한가의 여부, 즉 진성의 문제에 집착한다. (물론 행위전승보다는 말씀전승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차별성의 원칙(the criterion of dissimilarity. 이 방법론은 종교사 및 전승사에 기초한다.), 다다익선의 원칙(the crterion of multiple attestation), 일관성의 원칙(the criterion of coherence), 그리고 언어학적/문학적 테스트의 원칙(특정한 말씀이 예수의 아람어권 문화에 적합한 것인가?) 등을 사용하였다.
차별성의 원칙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의 결과, 새로운 탐구는 유대교와 대립된 예수상을 발견하였다. 이미 발아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씨앗을 예수의 선포 안에서 찾으려는 신학적 의도는 이 방법론과 결합하여 예수를 유대교와 대립된 자로 보도록 이끈 것이다.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 신약성서개론」 중에서
[출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 제 1, 2 탐구 (안티와 예수의 대화) | 작성자 래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