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의 주(Kyrios)
저자 심우진
(Authors)
출처 신약논단 11(4), 2004.12, 797-807(11 pages)
(Source)
Korean New Testament Studies 11(4), 2004.12, 797-807(11 pages)
발행처 한국신약학회
(Publisher)
The New Testament Society Of Korea
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338380 심우진 (2004). 요한복음서의 주(Kyrios). 신약논단, 11(4), 797-807
신약논단 제11권 제4호(2004년 겨울) 1797~807
요한복음서의 주(Kyrios)
심우진
I. 서언
Kyrios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예수의 가장 중요한 칭호가운데 하나이다. Kyrios는 신약성서에서 하나님 (1318회), 예수(919회)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719회). Kyrios는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로서 등장하고 공관복음서에서도 Kyrios는 자주 등장한다.
Kyrios라는 칭호는 본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LXX) Kyrios는 하나님을 위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고(6156회), 이것은 신약에 나타나있는 구약인용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의 모든 칭호가운데 하나님과 예수 모두에게 적용되는 칭호는 Kyrios뿐이다. 또한 Kyrios는 주인이라는 뜻의 일반단어이기도 하다. 즉, 종교적 칭호가 아닌 세속적 의미로서의 주인(종 혹은 노예와 상반된) 이라는 일반 단어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의 Kyrios는 거의 연구되어지지 않았다. 거의 모든 요한복음서 주석서에서도 Kyrios라는 주제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배경에는 요한복음서의 Kyrios라는 주제에 대한 전통적인 선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즉, 지금까지 요한복음서 연구가들에게 일반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던 것은, 요한복음서에서 Kyrios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않고, 단지 부활기사에서만 고양된 자(Erhöhten)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요한이 Kyrios에 대해서 자신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의식적인, 의도적인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II. 도입
1. W. Bousset
부세트는 "예수가 주시다"라는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헬라화를 나타내며, 이것은 기독론의 발전단계에서 후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서의 Kyrios에 대해서 부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복음서에서 주칭호는 현저하지 않다. 이 칭호는 본래 헬라적 기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 칭호는 요한복음서에서 부활기사에만 등장하는데, 이것은 복음서기자가 이 칭호를 지상을 거니는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을 피했고, 대신 이 칭호를 부활의 예수에게 적용하려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요한서신들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서 기자가 실제적으로 이 칭호의 사용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W. Bousset, Kyrios Christos. Geschichtedes Christusglaubens von den Anfängen des Christentums bis Irenaeus(FRLANT 21), Göttingen 21921, 186-222). 이러한 부세트의 가설은 그 이후의 대부분의 요한복음서 주석서들에서 그 그림자를 뚜렷이 볼 수 있다.
2. 요한복음서 이전
요한복음서 이전에 예수가 Kyrios로 호칭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Kyrios의 아람어는 Mare'인데, 예수가 마레로 호칭되었던 흔적을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예: “마라나타" 고전 16,22;디다케 10,6; 계 22,20). 아람어 마레는 예수의 기독론적 칭호인 Kyrios의 이전 형태일 수도 있다. 또한 시편 110,1은 예수의 부활 이후의 예수의 신적인 권능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 우편에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Kyrios로, 그리고 예수도 Kyrios로 호칭되고 있다(막 12,36, 마 22,44/눅 20,42-43, 행 2,34-35, 히 1,13).
3. 바울의 Kyrios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고전 8,5-6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주칭호는 무엇보다 예수의 부활 및 그에 따른 고양된 자(Erhöhten)에 대한 경배(Verehrung)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위의 구절들이 이러한 추론을 가능케한다.
한편, Kyrios는 본래 “주인”이라는 뜻의 일반단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반적 의미의 용법으로 바울이 Kyrios를 사용하기도 한다(고 전 8,5; 갈 4,1; 롬 14,4).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극히 적은 수로 제한되어진다. 즉, 바울은 Kyrios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의성(二意性, Doppeldeutigkeit, Double-meaning), 즉 일반적 용법과 종교적 칭호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Kyrios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의성, 즉 하나님의 칭호와 예수의 칭호 사이에 있는 긴장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첫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Ocg를 자주 사용한다(36회).0ç는 Kyrios(24회) 보다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두 단어의 결합은 없다. 그 대신 Oeds와 예수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구절에서, 06ç는 아버지라는 단어와, 그리고 예수는 Kyrios라는 단어와 각각 결합한다(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cf. 1,1.3; 3,11.13). 또한 Obs가 아버지라는 단어와 결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구절에서도 Kyrios는 예수와 결합한다(“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cf. 2,15;4,1; 5,9). 또한 바울 자신의 진술 속에서 Kyrios가 단독으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대부분 예수를 지칭한다.
바울이 칠십인역에서 주가 하나님을 위한 칭호로 사용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칠십인역에서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고, 이러한 인용에서 주는 하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언급 속에서 직접 주칭호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예수를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그 대신 아버지라는 용어가 적용된다(“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cf. 갈 4,6; 롬 8,14-17). 이와 같은 하나님과 아버지, 예수와 주의 결합은 바울서신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특히 한 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한 분 주이신 예수에 대한 언급은 고전 8,5-6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와 주칭호의 결합에 대한 몇 가지 언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네 가지
결합형태:
1. dkópros muwu Inoous Xprotós
2. 6 kópros Incous Xprotós
3. dkuplos nudy 'Inoodg
4. à kóproc Inoous
• σωτήρ S] κύριος •v 결합형
4. 마가복음서의 Kyrios
마가복음서에서 주는 총 16번 사용된다. 바울과는 달리 마가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칭호로서의 주와 예수의 칭호로서의 주가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다. 예수는 스스로를 주로 호칭하고 있는 한편 (2,28;11,3), 하나님도 주로 호칭되고 있다(12,29-30). 즉, 마가복음서에서 주는하나님을 위한 칭호이자 예수를 위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분명한 예는 12,35-37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여기서 마가는 예수뿐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공히 주로 호칭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주칭호와 예수의 다른 칭호들을 비교했을 때, 주는 마가복음서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없다. 마가복음서의 등장인물들이 예수를 주로 호칭하는 경우는 드물다(7,28; 11,9).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주로 호칭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다. 저자가 직접 예수를 주로 호칭하는 경우는 한 번 있지만, 이것은 복음서 초반에 구약을 인용하면서이다(1,3). 결국 마가복음서에서는 주가 예수만을 위한 기독론적 칭호로서 등장한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부활기사에서 주칭호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칭호와 예수의 부활 사이의 연결도 마가복음서를 통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5.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의 Kyrios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 주는 자주 사용된다(77번/103번).
'하나님이 Kyrios로 자주 호칭된다(마 1,20.22 등 / 눅 1,16.28 등). 마가처럼 마태와 누가도 주를 전적으로 예수만을 위한 기독론적 칭호로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를 주로 호칭하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다른 칭호들로도 예수를 호칭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주칭호와 예수의 부활 사이의 분명한 연결을 볼 수 없다. 28,2에 사용된 주는 분명히 하나님을 가리킨다.
● 누가복음서에서는 주칭호와 예수의 부활 사이의 연결을 어느정도는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엠마오 제자들 이야기(24,13-27)에서는 기독론적 칭호들의 상승을 발견할 수 있다(나사렛 예수 - 선지자-그리스도주). 그리고 누가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주로 호칭하고 있다(24,3). 그러나 이미 수난이야기에서도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 주로 호칭되고 있고(22,33.38.49), 저자 자신도 이미 수난이야기에서 예수를 주로 호칭하고 있다(22,61).
전반적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주가 예수만을 위한 기독론적 칭호로서 등장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도 자주 주로 호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와 예수의 부활 사이의 연결도 간접적으로는 발견할 수 있으나(예: 막 12,35-37과 마태/누가의 평행구절 등), 이를 위한 저자 자신의 특별한 계획이나 관심은 발견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III. 요한복음서의 Kyrios
요한복음서에서 Kyrios는 총 53회 사용되는데, 53회 모두 예수를 지칭하고 있다(구약인용 포함 1,23; 12,41). 요한복음서의 구조를 감안하면서 그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의 사용을 보면 요한복음서 저자의 의도된 주칭호의 사용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자주 Kyrie라고 호칭된다(부활기사 이전). 그런데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Kyrios가 o' Kóptos, 즉 정관사가 붙은 독립적이면서 완전한 형태의 기독론적 칭호로 등장한다. 이것은 요한이 Kyrios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한 예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호칭되는데(20,28), 이것은 복음서 초반에 암시되어있다. 요한복음서 서막에서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언급되고(1,1.18), 세례요한이 예수를 주로 언급하는데(1,23 구약인용), 이 두 가지의 경우 하나님과 주는 모두 정관사가 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복음서 초반의 이러한 간접적인 언급이 복음서 후반에 정관사와 함께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복음서 내내 예수는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Kyrie로 호칭된다. 여기서 주는 이의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반적 의미의 존칭으로서의 주이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종교적 의미의 기독론적 칭호이다. Kyrie로 도입되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일견 일반적 의미의 존칭으로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밀접한 대사들과 결합되어있다. 즉, 요한복음서에서 Kyrie로 도입되는 문구들을 통해 독자들은 외적으로는 이야기의 진행상 일반적 의미의 용법형태를 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적 문구들을 함께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 Kyrie로 예수를 호칭하는 인물들 중에서 부정적인 인물이 없다. 그리고 Kyrie로 도입되는 대사에서 부정적인 대사가 없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은 예수를 만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예수를 Kyrie로 호칭하도록 했다. 이러한 외적의미와 내적의미의 이의성은 주칭호를 떠나 요한신학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주칭호와 관련해서는, 특히 Kyrie와 관련해서는 이의성이 일반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이의성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자신의 독특한 문학적 기법으로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복음서 전반부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주로 치유대상자 등)Kyrie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고별연설 파트(13-17장)에서는 이러한 용법을 제자들이 넘겨받는다. 고별연설에서 제자들은 자신의 대사를 대부분 Kyrie로 시작한다. 요한은 고별연설에서 제자들의 대사를 자신의 독특한 문학적 기법으로 사용한다. 제자들은 무지로부터 질문하지만(Mißverständnis), 이러한 질문들은 요한이 자신의 신학을 기술하는 도입으로서 사용한다. 즉, 제자들의 질문은 요한이 자신의 신학을 기술하는데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대부분 Kyrie로 도입된다. 결국 요한은 복음서 전반부에서 치유대상자들로 하여금, 그리고 복음서 중반부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Kyrios의 호격인 Kyrie를 사용하여 자신의 대사를 하게끔 하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게 하고, 이에 대해 Kyrios인 예수가 대답하게 하여 그 대답을 통해 요한은 자신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Kyrios는 복음서가 진행되면서 점차 상승하게 되는데, 부활기사에 이르러서 주는 완벽한 기독론적 칭호로 사용된다: “내가 주를 보았다”(20,18),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20,25), “주님이시라”(21,7). 이렇듯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서 Kyrios로 정관사와 함께 호칭된다. 제자들이,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이 예수를 정관사와 함께 Kyrios로 호칭한 적은 요한복음서에서 부활기사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자도 예수를 정관사와 함께 Kyrios로 호칭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이렇듯 요한복음서에서는 주칭호와 관련된 요한의 신학이 요한 복음서의 진행과 함께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같은 내용은 복음서가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시 요한신학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은 기독론적 칭호로서의 Kyrios에 대해서도 자신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의식적인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
IV. 그 외의 주제들
1. 친구 모티브 : 일반적 의미로서의 주라는 단어와 상반된 단어는 종, 혹은 노예이다. 이것은 요한도 알고 있었다(13,16). 그렇다면 주라고 호칭을 하는 사람은 호칭의 대상과 주-종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인가? 주칭호와 관련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요한의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를 주라고 호칭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정의한다(15,15). 즉, 요한은 주칭호와 관련된 관계문제, 즉 주로 호칭되는 자와 주로 호칭하는 자의 관계를 주-종의 관계로 보지않고, 주-친구의 관계로 제시한다.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친구의 범위이다(Kortenbeutel, Bammel의 논제).
2. 도마고백(20,28) : 도마고백의 유래는 어디로부터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도미티안 황제의 칭호와 시편 34,23. 본 논문에서는 도미티안과의 관계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다. Dominus et Deus noster라는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도마고백과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도마고백은 단수 소유대명사가 두 번 사용되는데 반해, 도미티안의 칭호는 복수 소유대명사가 한 번 사용된다. 그리고 로마황제가 주로 호칭되는 경우는 도미티안의 경우뿐만이 아니었다. 티베리우스, 네로, 베스파시안, 네르바 등 여러 황제들이 이미 Kyrios 혹은 Dominus로 호칭되었고, 이집트의 자료에 의하면 이미 아우구스투스도 Kyrios로 호칭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심지어 헤롯 대왕과 아그립빠 1세와 2세까지도 Kyrios로 호칭되고 있다는 것이다(Foerster의 연구). 그리고 이러한 이집트의 자료에 의하면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여러차례 “하나님과 주로 호칭되고 있다. 따라서 도마고백과 도미티안의 칭호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시편 34,23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연관의 증거가 부족하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과 주의 위치가 바뀌어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두 가지 유래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다. 즉, 도마고백은 도미티안의 칭호나 시편에서 직접적으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요한 자신의 신학에서 나온 요한 자신의 형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 전반에 걸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의 근접성, 그리고 종교적 전통과의 근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정치적 배경, 종교적 배경은 요한을 둘러싸고 있었던 요한의 정황이었다. 다만 요한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최고의 권위에 있었던 로마황제에게 사용되던 Kyrios를, 그리고 당시의 종교적 전통에서 최고의 권위에 있었던 하나님에게 사용되던 Kyrios(LXX)를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함으로 해서 요한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는 오직 예수였다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