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68운동과 문화혁명
서독의 68운동과 문화혁명
http://blog.naver.com/jhj7725/140041233906 조 규 희 (한국외대) Ⅰ. 들어가는 말 30 여 년이 지난 68혁명은 서구인들에겐 지난 20세기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들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기술 혁명, 대중문화의 출현 등과 함께 68혁명은 서구에서 현재까지도 - 정치적 실천이든 정신적 형태이든 - 그들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된다. 68혁명은 노동계급이 아닌, 전후 50년대 이후 급격히 그 수가 증가된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이 성장한 50년대는 냉전시대로 불려진다. 이 시기 서방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국이 앞장선 반공 캠페인에 대한 보수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모든 정치적, 문화적 논의가 금기시 되었다. 기존사회에 대한 비판적 전망이 없는, 정체된 분위기의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1960년대 성년에 도달했던 68세대, 그들은 60년대 중반 경제적 번영만을 추구하는 ’소비자 유토피아 사회‘를 거부하면서 각기 다양한 쟁점 - 제국주의 전쟁, 인종주의, 성차별, 언론의 보수화 - 을 가지고 집단적인 행동에 참여하였다.1) 그러나 60년대 대학생들의 반체제운동은 단지 외적 현실정치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투쟁은 보다 ‘전면적 저항’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비사회의 식민지화된 일상생활에서 총체적 삶의 질(質), 그 자체를 재획득하기 위한 개인의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68세대에게 단순히 불의와 착취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일상에서 개인은 이미 내재화된 사회적 금기를 통해 ‘주체적’ 삶의 체험과 인식이 불가능한 사회로 받아 들여졌다. 노동은 물론 교육제도와 사회관습 그리고 문화부문 모두 합리성이라는 통제를 받게 되면서, 개인의 독창적이고 다양한 모습들은 억압되고 소외된 것이었다. 그 렇기 때문에 68의 반(反)권위주의는 기성의 질서에 대항하는 일상에서의 문화적 반란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196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쉬베리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공동의 삶을 살고 있었고, LSD와 같이 ‘정신을 확장하는’ 약물을 실험하고 있었다. 1967년 초 장발의 “히피”들, 그들의 문화는 미국 내에서 급속하게 퍼졌으며, 반(反)문화 Gegenkultur의 출현은 베트남 전쟁과 함께 당시 미국대학에서의 정치적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학생운동의 모습을 변화시켰다.2) 서유럽에서 반문화의 지배문화에 대한 전면적 도전은 아나키스트적 행동주의의 색채를 띠고 나타났다. 뮌헨의 반문화 그룹인 ‘슈푸르 SPUR’의 회원이었던 쿤첼만 D. Kunzelmann은 20세기 초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일상(개인)영역과 정치영역이, 삶과 예술이 결합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형식들, 즉 헤프닝, 농성 토론회 Teach-In, 코뮌 설립 등의 전복의 행동을 조직하면서 반문화 운동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68의 신좌파3)가 주도했던 혁명의 개념은 전통좌파가 추구했던 정치적 혁명 개념과는 달리 개인의 의식이 조작되는 자본주의의 일상에서 개인의 의식 변화와 내적 혁명의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68은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된 ‘진정한’ 것을 개인이 직접 체험해 보고, 그 체험 위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축하려 하는 욕구의 분출로서, 전통적 삶의 형식과 예술의 틀을 벗어난 - 넓은 의미의 - 대안문화를 창출하였다. 학생운동의 정점인 68년, 연이은 반(反)비상법안, 반(反)베트남전 시위에 합세했던 선동적, 행동주의적 문화가 그 중요한 징후이다. 전통적 부르주아 예술과의 단절은 서독의 68운동을 주도했던 학생그룹인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 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이하 SDS)”의 한 그룹이 1968년 발표한 글 「의식산업의 상품으로서의 예술」4)에서 확인된다. 전통 좌파와 달리 사회의 상부구조 Überbau 즉, 문화부문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건설을 신봉했던 서독의 신좌파 지식인들은 기존의 문화, 교육체계는 물론 시민들의 의식과 공론을 형성하는 신문 등의 대중매체가 현실비판력을 상실하고 정치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확립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비판하였다. 그들이 자본주의 문화산업 Kulturindustrie의 일부로 통합된 시민문화에 맞서 비판적 대안문화(하위 문화 Subkultur, 선동문화 Agitprop-Kultur 등)를 형성하는 것을 사회변혁운동의 목표로 추구했던 것은 무엇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비판이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의식산업 Bewusstseinsindustrie으로서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은 위의 SDS 글을 비롯하여, 엔첸스베르거 H. M. Enzensberger의 ‘문학의 죽음 Tod der Literatur’ (1968) 선언5), 슈나이더 P. Schneider의 논문 「후기자본주의의 환상과 문화혁명」(1969)6), 마르쿠제 H. Marcuse의 저작 해방에 대한 시론(試論)(1969)7) 등 서독 신좌파 지식인들의 문화 혁명적 단초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 글에서 필자는 사회의 정치화과정으로 표현되는 60년대 서독사회의 정치적, 변화를 다룬 후에 서독 68운동의 사회‧문화비판점을 재구성하려한다. 물론 여기서 학생운동(문학)전반을 세밀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60년대 중반이후 서독에서 현실사회 변혁운동의 주체로 형성된 SDS를 중심으로 첫째, 기존의 사회와 시민문화에 대항하는 그들의 문화‧문학이론의 단초들과, 둘째, 그들이 새로운 과제로 내세운 ‘문화혁명’의 구체적 실천을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학생운동을 둘러싼 문학을 이해하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한다. Ⅱ. 서독의 68운동과 문화혁명 1. 60년대 말 서독사회의 정치화 ‘경 제기적’ 이라 일컫는 50년대의 경제복구시기가 지나고 60년대에 들어 서독인 들의 자기정체성 모색의 표현이라 볼 수 있는 움직임은 무엇보다 나치과거의 청산을 위한 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까지 나치 파시즘이 자행한 유태인학살이라는 독일민족의 집단적 폭력문제는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묻혀져 있었다. 이제 지식인들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과거를 드러내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의식으로 나치의 만행을 사회문제로 부상시켰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중의 하나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치러진 나치전범 아이히만 Eichmann 에 대한 소송사건이었다. 그러나 자국의 역사에 대한 잠재적 비판의식을 넘어서 서독사회의 정치적 대립이 가시화되었던 것은 66/67년 경제침체로 인해 노동자의 실업이 증가되면서였다. 경제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기민당과 사민당, 두 거대 정당은 대연정을 실시했으며, 60년대 이후 정치화된 젊은 지식인들은 진정한 ‘야당이 부재하는 의회민주주의’라는 환멸적 상황에서 정치제도권 밖의 야권(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이하 APO)을 형성하였다.8) 그러나 서독의 대학생들을 급진적 행동으로 이끌었던 것은 65년 베트남에 가해진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전쟁에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공포와 분노 속에 반전 가두시위를 벌였다. 1966년 서베를린 대학의 점거와 농성토론회에서 중심적 쟁점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학생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서독에서 두 정당의 대연정 이후 1967년 통과된 비상법안 Notstandsgesetz과 마찬가지로 모두 위협적 ‘힘에 의한 지배’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억압에 맞서야 하는 운동으로서의 68, 그것은 첫 대립은 1967년 6월 서베를린에서 일어난 한 학생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시작되었다. 67년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 왕의 서독방문 중 시위학생들과 진압경찰과의 대치상황에서 대학생 오네조르크 B. Ohnesorg 가 사복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의 무력적인 과잉 진압방식에 대해 저항하면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고, 청년 노동자들이 시위에 합세하였다. 1967년 6월 이후 학생들은 매우 빠르게 급진화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시민성을 포기하고 그룹에 가입하여 잠시 직업 혁명가가 되었다고, 당시 SDS 회원이었던 라벨 B. Rabehl 은 회상한다.9) 1968년 4월 베를린 거리에서의 네오 파시스트에 의한 두취케 R. Dutschke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래 가장 격렬한 가두투쟁을 유발하면서, 서독 학생봉기의 정점을 이루었다. 봉기의 주요 공격목표는 보수적 언론인 ‘슈프링어 Springer’ 출판사 건물이었다. 학생들의 잇단 시위에 대해 수개월 동안 슈프링어가 발행하는 대중적 일간신문 ‘빌트 Bild’지는 학생들을 동독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중상 모략하였고, 이에 격분한 6만 명의 사람들은 서독의 여러 도시에서 슈프링어 건물을 봉쇄면서 ‘언론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일 학생들의 투쟁은 프랑스와 달리 노동자들과 고립되어 있었다. 2. SDS의 사회분석과 ‘문화혁명’ 1960 년대 초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한 독일의 소수 학생들은 1960년대 말의 봉기에서 주도적 운동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출현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서독 사회의 모순에 기인하지만, 구체적 형성은 문화적, 정치적 유산에 대한 이론적 재해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독의 SDS는 1947년 함부르크에서 사민당 산하의 대학조직으로 창립되었으나 이후 사민당이 개량주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여 사민당에서 축출되었다. 중간계급 유권자들의 확보를 위해 사민당이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SDS의 주도적 회원들 - 넥트 O. Negt, 자이퍼르트 J. Seifert 등 - 은 60년대 초반 새로운 정치적 노선의 이론적 모색, 즉 마르크스주의 및 과거의 사회주의 전통의 연구 등에 집중하였다.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찾으려는 SDS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이었다. 아도르노, 호크하이머, 마르쿠제 및 벤야민의 철학적 문화 비판적 저술들이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지식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되었고, 이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글들은 이제 새로이 형성되는 지식인들의 정치의식을 결정하였다. 비판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분석도구를 결합시켜 선진 자본주의에서의 사회 경제적 착취와 심리적 억압의 연관을 밝혔다. 그리하여 SDS 안에서 소외, 억압, 착취, 해방 등의 개념은 정치, 경제 영역을 넘어서 심리 사회적이고 문화적 양상 속에서 이해되었다. 60년대 말 SDS는 현실정치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집합소로서, 서독의 장외 저항운동을 이념적으로 대변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적 이론이나 출신으로 보았을 때 동질적인 그룹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SDS는 당시 정치적으로 부상한 다양한 흐름들을 대변하는 이질적 그룹들로 구성되어 있었고10) 현실사회 분석이나 목표설정에서 볼 때 크게 보아 두 개의 그룹 - 이념적으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분파, 그리고 일체의 이념에 거리를 둔 반권위주의 분파 -으로 나눌 수 있다. 통일된 하나의 정치 강령을 따르지 않았던 두 그룹 중 68운동에 그리고 이후의 서독 좌파운동에 지속적 영향력을 지닌 그룹은 후자였다. SDS 내부에서 정치적 행동주의를 주장했던 반권위주의적 분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 요인은 무엇보다 당시 전개된 서독의 정치상황이었다. 1) SDS의 사회분석 독 일에서 국민에 대한 정부의 강제적 권한의 상징인 비상법안의 의회통과를 통해 정치화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권위적 정서가 팽배해졌는데, 헤르만트는 다음과 같이 SDS의 반권위주의적 신좌파가 갖는 정치적 문화적 함의를, 그리고 그와 연관한 전통 좌파와의 차이를 서술하였다. “냉전의 세계와 그 전체주의 이론 속에서 성장했기에,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애초부터 어떤 당 개념이든지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자신들을 무엇보다도 독립된 개인으로 보았으며, 이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교육과 자기성찰을 근간으로 한 아도르노의 민주사회구성원의 성숙 이론과 마르쿠제의 주변집단 전략에 기대고 있었다. 그들이 계획한 대부분의 대안은 그렇기 때문에 명백히 반권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그 실천은 공산주의 세포조직, 주거 코뮌 그리고 그 밖의 하위 문화적 생활공동체 형태와 같이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것에서는 새로운 개념구상보다는 일차적으로 매사에 ‘삐딱한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67/68년 이 집단의 시각에서 거의 모든 것이 ‘부르조아적 쓰레기’로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시민문학, 시민극, 47그룹, 결혼, 교수, 대학에서의 능력우선주의, 그럴 듯한 직업, 정당, 노조 그리고 현실사회주의 등이 그에 해당된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격한 감정에 내실을 갖추는 대신 우선 비판적인 부정, 안티, 원칙적 반대에 우위를 두고 있었다.“11) 68 학생운동을 주도한 반권위주의 분파는 이념상 - 당시 운동을 주도한 두취케의 글에도 나타나듯 - 원칙적으로 독단화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였다.12) 정통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측면, 즉 “문화산업”,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반권위주의 분파의 문화비판은 ‘억압되고’, ‘조작된’ 사회에 대한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을 그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소외된 인간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전복을 통하여 ‘자율적’이고, ‘참된’ 욕구와 관심에 따라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취케는 마르쿠제와 마찬가지로 조작과 억압을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중을 기능적으로 반응하는 집단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을 언제든 군사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동원, 투입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13), 현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기제로 파악하였다. ‘조작된’ 사회에 대한 반권위주의적 분파의 테제는 결국, 모든 제도와 과정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되며 지배체제는 단순히 그 구조 속으로 통합된 반대세력들만을 용인한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 신좌파에게 이제 문제는 시스템의 몇 가지 작은 결함들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권위주의 국가의 전체 생활양식에 대한 거부로 되었다.14) 이처럼 반권위주의적 분파의 사회분석에서는 문화비판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보다 우선되고 있었던 반면 SDS내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은 현 사회를 전형적인 후기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서구 산업사회의 경제적 분석을 시도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들은 사회의 문제를 ‘생산영역으로부터 소비영역으로 전이’시키려는 반권위주의적 분파와는 달리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사회 분석의 기초인 ‘적대적인 노동 관계’와 사회적 생산과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15) 이들의 특징은 레닌에 의해 발전된 ‘독점자본주의’ 분석을 후기자본주의에 적용한다는 데에 있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대변하는 이론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고도로 진행된 자본축적이 독점자본주의의 지배를 가져왔고 동시에 경제와 국가의 강력한 결합이 이루어져, 국가는 더욱 더 경제, 사회질서의 전체 구조와 맞물리게 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각기 이데올로기 분석과 경제체제 분석에 강세를 두고 있는 SDS내부의 두 분파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조작과 소비유혹이 노동자 계급의 ‘실제’ 삶을 은폐하고 있는 변화된 계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분파는 여전히 ‘사회적 문제는 계급 문제’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2) 혁명의 주체로서의 지식인 전 통적 마르크스주의 분파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해명하면서, 혁명적 요소로 노동자 계급의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반면, 반권위주의적 분파는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전통적 의미의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중’은 의식 산업과 문화 산업의 막강한 장치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에 통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동능력도 상실했다는 논거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했다.16) 그 결과 신좌파는 혁명의 주체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서 사회혁명의 객관적이고, 경제적인 조건들 대신에 혁명적 주관성 revolutionäre Subjektivität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 반권위주의적 분파에게는 지금까지 억압되었던 주관성의 혁명 및 발산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띠었는데 이들의 혁명론은 바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반체제세력에 대한 마르쿠제의 논거에 기초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 부정의 힘은 어떤 계급에서도 집중되어 있지 않다. 그 힘은 오늘날 카오스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저항이 혼재된, 정치적이자 도덕적인, 그리고 합리적이자 본능적인 힘이다. [...] 이들은 미미한, 비조직화된 저항 세력인데, 내가 보기에 이 세력이 기초로 삼고 있는 충동력과 목표설정은 기존의 체제와 화해 불가능한 모순 관계에 있다.”17) 노동자 계급이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되면서 혁명의 새로운 주체를 찾으려는 혹은 노동자 대중을 다시 혁명 운동으로 동원할 수 있는 새로운 전위 세력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은 더욱더 강화되었다. 위에서 인용된 ‘비조직화된 저항 세력’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사회에서 이미 완전히 낙오된 아웃사이더들이나 주변그룹을 의미한다. 법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아무런 지위를 갖지 못한 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회의 억압에서 비껴있는 인간들이며, “진정 다른 산업화와 현대화의 길, 진보의 인간적인 길을 밟아 나갈 einen wirklich anderen Weg der Industrialisierung und Modernisierung, einen humanen Weg des Fortschritts zu gehen”18) 역사적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동일한 맥락에서 학생들을 구체적인 사회적 ‘해방 과정’의 새로운 주체로 보았다. 학생들은 아직 노동세계와 직업시장에,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성과 원칙에 통합되지 않은 집단으로서, 직업 노동에의 종속과 그와 결부된 규율로부터 자유롭기에 지식의 자본주의적인 실제적 가치 증식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혁명 세력에 대한 마르쿠제의 구상에 기초해서 반권위주의적 분파는 자신들을 학생이라는 특수한 신분에 힘입어 억압에서 벗어나, 지적으로 억압을 통찰하고 계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혁명 운동의 ‘지적인’ 전위로 파악하였다. 그들은 우선 ‘조작된’ 욕구에 대립하는 ’진정한‘ 자신들의 욕구를 형성하고, 억압의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나아가 “의식의 해방 Befreiung des Bewußtseins”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19) 의식과 의지를 강조하는 이들 신좌파 지식인들은 문화부문을 자신들의 고유한 실천 영역으로 보았고 문화혁명에 주도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지식인의 정치적 주도권 요구를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20) 예를 들어 1968년 ’문화와 혁명‘이라는 이름의 한 SDS 그룹이 발표한 문화혁명 테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특수한 형태의 억압, 즉 의식의 억압을 염두에 둘 때, 전통적인 혁명 모델은 이제 토대에서 상부구조로 전이되어야 한다. 우선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억압의 인식을 통해 이 억압의 원인들이 제거될 수 있다.”21) 3) “문화혁명” (1968-69): 의식의 혁명 마 르크스-레닌주의에서 “문화혁명”이라는 개념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보편적 법칙성 allgemeine Gesetzmäßigkeit der sozialistischen Revolution und des sozialistischen Aufbaus”22)으로 정의된 반면, 위의 문화혁명 테제에서 나타나듯이 독일 신좌파는 이 개념을 예술의 문화산업화를 초래하는 탈정치화된, 체제 긍정적 예술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했다. 프랑스 급진 좌파 학생들의 5월 혁명 테제에는 문화혁명의 목표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시민 혁명은 사법 혁명이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경제 혁명이었다. 우리의 혁명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인용자 강조) 혁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며, 더 이상 ‘인간적인 얼굴을 한’ 이데올로기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학생과 노동자들은 혁명적 계급이며,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지양과 모든 계급의 지양이기 때문이다”23) 자 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중서부 유럽국가에서는 전체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가능케 하기 위해 장기적인 문화혁명이 필요하다는 시각은 독일의 작가이자 신좌파 지식인을 대표했던 슈나이더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리의 5월 봉기에 인상을 받아 이론적으로 경제-정치 혁명과 문화 혁명을 구분했던 슈나이더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에 의해 주도되는 경제-정치 혁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의 생산력 발전 상태에 호응하는 혁명적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말하자면, 독일 등 후기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라는 과제는 집단적 ”선전, 선동 그리고 조직 작업 Agitator, Propagandist und Organisator der Revolution“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화 혁명의 몫이라는 것이다.24) 실제 서독에서 60년대 후반 SDS가 조직한 반전운동에 연대하여 혁명적 성격을 띤 반문화의 형성에 주도적 역할은 하였던 대표적 그룹으로는 쿤첼만을 위시한 뮌헨의 반문화 그룹 SPUR를 들 수 있다. 이들 그룹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회혁명이 일상 생활에서 출발해야’한다는 상황주의자들이었다. 1950년대 말 파리에서 만들어진 상황주의 그룹은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은 이론적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복의 열정적 행동을 통해서 일상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25) 쿤첼만은 1960년대 초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날의 독일분파라 불리어 졌던 SPUR 회원들과 함께 위의 SDS 테제에서 언급된 ‘억압의 인식’을 보다 아나키스트적인 행동주의의 틀에서 시도하려 했다. 1966년 2월 서베를린과 뮌헨에 나붙었던, 베트남의 살인을 묵과한 정당들을 비난하는 포스터가 그 중의 대표적 예이다. 그들은 이러한 포스터 작업을 자신들이 주장한 ‘도발에 의한 계몽’이라는 전복적 행동의 하나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국가로 하여금 억압적 보복을 하도록 도발하는 행동을 의미했다. 즉 국가가 그러한 보복행위를 통해 표면상의 자비로움을 벗어 던지고, 지신의 진정한 억압적 본질을 드러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26) 쿤첼만이 기획한 또 다른 반문화의 시도는 지배적 질서 밖의 대안적 공동체 생활이라는 의미를 띤 코뮌의 창립이었다. 67년 1월 베를린에서는 정치적 집단행동을 위한 코뮌1이 만들어 졌고, 이들은 반권위주의적 사상의 대표작의 하나인 - 오스트리아 정신 분석가이자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슴의 기능」, 「파시즘의 대중 심리」 등의 글을 재출판하여 SDS내에서 개인의 성적 해방과 정치적 실천 사이의 연관에 대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27) 쿤첼만은 다다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후에도 다수의 프로젝트를 통해 일상에서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개인의 의식과 감성을 ‘혁명화’시키려 하였다. 전통적 예술의 경계를 벗어난 이 시기의 반문화 또는 하위문화는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립된 ‘진정한’세계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었다. 60년대 젊은이들에게서 새로운 체험을 위해, 의식의 확장을 위해 유행한 소위 여행‧약물 문화가 그것에 속한다. Ⅲ. 학생운동 시기의 문학 논의 1967-70 지 식인들의 혁명적 역할을 강조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모순에 대한 정치적 비판보다는 상부구조 비판과 문화 비판을 우위에 두었던 신좌파의 주관주의적 혁명 구상은 위에서 언급한 문화혁명적 진술들에만 담긴 것이 아니라, 문학과 작가의 사회적 기능을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들로 나타났다. 학생운동 과정에서 폭넓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현실 참여 문학에 대한 이론적 탐색들이 그것이다. 신랄하게 시민문화를 비판했던 학생운동의 문화혁명적 단계에서 엔첸스베르거는 1968년 잡지 쿠르스부흐 Kursbuch에 “문학의 죽음”, 즉 시민문학의 사회적 무용성을 밝혀냈다.28) 이를 뒤이어 예술 문학에 반대하는 같은 성격의 선언들이 이어졌다. 이 선언들은 시민 문학의 전통적인 미적 가치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정치적 문학을 요구했다. 아도르노 미학과 거리를 두고 있는 H. 마르쿠제의 정치 미학은 예술 이론의 핵심 대상이 더 이상 인공물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켰는데, 그에 의하면 오늘날 예술작품의 고유한 가치라는 것은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9) 1. 정치적 현실 참여 문학에 대한 성찰 1967-68 67/68 년 서독문학에서는 학생들의 정치적 행동과 논쟁을 통해 공공의 관심을 이끌었던 테마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졌고, ‘현실 변혁적 참여 문학 operative Literatur’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문학의 ‘사용가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학논의들은 당시 시작된 20년대와 3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 논쟁의 체계화에 힘입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창작의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30) 하지만 문학의 정치적 기능 규정을 위한 뒤따른 시도들에는 결정적인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상황과 구체적으로 연계되지 못한 채, 계급투쟁의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보니 해결책을 문학 테마나 방법의 직접적인 기능화에서만 찾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적절한 매체에 대한 질문, 어떤 집단을 목표로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 개별 문학 장르의 서로 상이하게 해석된 영향 가능성들이 논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31) 이처럼 문학의 영향력을 직접적인 선동에서 찾는 것은 자신들이 목표집단으로 설정한 노동자계급이 문화적으로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고 본 당시 좌파 지식인들의 엘리트주의적 견해에 기인하였다. 노동자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비문학적인 형식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술적 형식의 포기를 의미하였다: “선정선동을 위한 미학은 없다. 형식은 항상 목표로 설정한 영향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형식 그 자체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32) 문학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이러한 근시안적인 획일화는 첫째, 사회 체제의 ‘신속한 혁명’에 대한 젊은 지식인들의 환상이 그리고 둘째, 그들의 행동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혁명 이론에 기초한 상부구조 비판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드러내 주었다.33)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의식조작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혁명을 위한 결정적인 장애물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들의 희망에는 이를테면 ‘의식 조작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지배체제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는 특별한 지배방식이며, 따라서 그것 하나에 대한 투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조작의 덮개를 젖혀버리면 그 조작으로 인해 억압되어 왔던 대중이 실제의 적을 알아내서 이에 대항한 투쟁을 수행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리하여 의식의 혁명을 중시했던 학생운동의 정점에서 일반적으로 예술이 백안시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SDS 그룹의 글 「의식산업의 상품으로서의 예술」은 그 이후 전개된 좌파진영 내 문학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다음과 같이 시민예술을 꼬집고 있다. “문화산업에서 예술생산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오직 교환가치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 다른 말로 하면, 계몽적 기능이라는 예술작품의 객관적 내용은, 머릿속에 이윤의 극대화만을 그리고 있는 체제에서, 그리고 예술의 적절하고 일관된 수용이 바로 그것의 이해관계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그러한 체제에서는 관심 밖의 일이다.”34) 예 술은 상품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이윤지향이라는 척도에 따라 생산, 소비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결국 “문화산업”으로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자본주의 예술생산의 관행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 따라 전통적 시민미학이 거부되었으며, 더 나아가 “상부구조에서의 해방운동 eine emanzipatorische Bewegung im Überbau”35)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즉 물적 토대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혁명 모델을 상부구조로 전이시켜야 한다는 문화혁명적 요구가 제기되었다. 2. ‘문학의 죽음 Tod der Literatur’(1968): 엔첸스베르거 당 시 서독 정치체제를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고착화된 사회로 파악하고 있었던 엔첸스베르거는 1968년 쿠르스부흐에 실린 한 논문에서 바로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의 기능에 대해 되묻고 있다. 여기서 그는 모든 문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막강한 문화적 장치를 통해 정치적으로 무해한 것으로 중성화되었음을 시인하면서 ‘문학의 죽음’을 공식화했다. 물론 엔첸스베르거가 10년 뒤 안더쉬 A. Andersch 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쿠르스부흐에서 선언했던 ‘문학의 죽음’이란 말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일종의 메타퍼였다.36) 이미 백 년 전부터 사망 선고를 받은 부르주아 사회와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늘 그 위기가 거론되었지만, 바로 그 위기를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아 여전히 살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 68혁명의 정점에서 엔첸스베르거는 ’문학의 죽음‘ 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자본주의적 시장법칙에 의해 모든 문학적 산물들이 완벽하게 물화(物化)된 상태를 지적하면서 - 당시 많은 작가들이 가정하듯 - 순수문학 창작이 갖는 사회적 의미란 더 이상 증명 불가능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오늘날까지 세계문학에서는 시민 시대에 나온 작품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들 작품들이 현재 문학에서 지배하고 있는 기준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제기되는 여타의 문학 형상의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논쟁들에 대해 그리고 점증하는 자기모순들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추상 문학도 체제 옹호의 문학과 저항의 문학도, 부조리극과 기록극도 모두 부르주아 식으로 규정되어 왔다. 부르주아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지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영역이 문화다. 이런 지배의 종말이 언제일지 점치기는 힘들다.[...]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문학 예술 작품의 근본적인 사회적인 기능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37) 급진적 문화비판의 의미에서 문학의 기능과 작가의 사회적 역할을 묻고 있는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엔첸스베르거는 “독일이 정치적으로 글을 깨치는데 politischen Alphabetisierung Deutschlands”38) 기여할 수 있는 참여 문학의 실천을 요구하면서 민주적 작가의 과제로 - 예를 들어 G. 발라프의 르뽀와 같이 - 시민을 계몽시키는데 ‘유용한’ 저널리즘 작업을 거론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그 당시 그가 기대고 있었던 - 전통적 시민문학이 안주하고 있던 틀을 벗어나 작가는 기술복제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기능을 맡는다는 - 벤야민의 생산 미학을 반영하고 있다.39) 3. “미학의 정치화 Politisierung der Ästhetik”: 마르쿠제와 슈나이더 (1969) 1967 년과 1969년 사이에 마르쿠제의 글들은 신좌파의 자기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예술이론을 극단화시키면서 미적 해석에 뚜렷이 정치적 전환을 꾀하였다. 예술의 미적 자율성 개념이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영구화시킨다는, 문화의 체제옹호적 성격의 인식에서 출발한40) 그는 60년대 초 충동력과 사회41)라는 책에서 예술을 통한 본능의 해방과 더 나아가 그것의 유토피아적 계기들을 도출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미적 경험을 통한 감각의 해방은 바로 정치적 해방의 전(前) 단계로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미국 학생운동의 와중인 1969년에 마르쿠제는 파리 오월 혁명의 정신이 담겨 있는 해방에 대한 시론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앞선 충동력과 사회에서 강조된 미적 경험과 감수성에 사회적 실천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예술에서 정치로의 이행을 완결지었다.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욕구를 조작하여 인간의 ‘제 2의 본성 die zweite Natur’을 낳는다는 마르쿠제의 분석에서 볼 때 그가 감각의 혁명화(전복)를 해방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예술과 사회의 대립의 지양 그리고 이 두 영역의 상호 의존은 사회의 새로운 건설이라는 그의 비전에 잘 나타나 있다. “[...] (새로운 현실의, 글쓴이) 형태는 [...]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는 면에서 사회 내에서의 예술의 전통적 위치와 기능은 변화할 것이다. 예술은 물질적, 문화적 변혁의 생산력이 될 것이다. [...] 이것은 예술의 지양을 의미하며, 미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분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장사와 미, 착취와 만족의 상업적 통일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42) 예술의 자율적 지위의 상실과 일상적 실천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예술과 현실은 일치하게 되었다. 미학을 통해 기존의 정치로부터 인간이 해방된다는 것은 마르쿠제에게 미학의 정치화를 뜻하며, 마르쿠제의 이러한 정치적 미학은 보다 과격한 형태로 P. 슈나이더에게서 다시 등장한다. 앞서 언급된 그의 논문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상상력과 문화혁명」에서 슈나이더는 마르쿠제적 의미에서의 문화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후기 자본주의의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에서 혁명적 실천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논거를 제시하였다. 69년 발표된 위의 글에서 슈나이더는 이미 언급된 학생운동의 딜레마, 즉 대다수 민중과의 유리를 ‘억압’된 사회기층그룹인 노동자 대중의 시각에서 진단하고 있다. 예컨대 학생운동이 기존체제의 권위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였지만 수십 년 간 억압되었던 노동자 집단의 욕구가 그들의 생활 영역 및 생산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선 정작 아무런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는 무엇보다 68혁명에서 문화적 요소들의 생산적 기능이 등한시되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전면적인 발현 die totale Entfesselung der Produktionskräfte”을 통해 “모든 인간적인 감각과 능력이 완전히 불구화 die vollständige Verkrüppelung aller menschlichen Sinne und Fähigkeiten” 되는 것에 맞서 바로 문화혁명은 “이 감각과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현 die vollständige Entfesselung dieser Sinne und Fähigkeiten”시켜야 한다는 것이다.43) 이는 사적 소유의 철폐가 모든 인간적 감각과 능력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변형시킨 것인데, 여기서 슈나이더는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경제적, 정치적 혁명이 이루어지면 자동적으로 혁명의식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덧붙여 인간의 감각과 능력의 해방을 사회혁명의 일차적 과제로 끌어 올렸다. 그가 중점시한 감각적 해방을 추구하는 문화혁명의 기능은 따라서 “미술관 난동, 공원의 점거, 극장에서의 무례한 태도 ein Aufstand im Museum, ein Attentat auf den Park, eine Frechheit im Theater”44)등의 해프닝적 문화파괴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가 환상을 가두어 놓았던 일종의 게토 Ghetto를 보수하는 것 das Ghetto zu renovieren, in das der Kapitalismus die Phantasie gesperrt hatte”이 아니라, “환상이 현실로 진입하게 만들어야 die Phantasie in die Wirklichkeit zu lassen” 한다는 것이다.45) 위의 ‘게토’란 예술의 자율적 영역을 가리키고, 예술은 이 자급자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사회로 진입해야 한다는 슈나이더의 정치미학은 아도르노 미학과도 뚜렷이 선을 그었다. 슈나이더는 아도르노적 의미에서의 ‘현실 부정적’인 부르주아 예술이 지닌 유토피아적 자율성을 비판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정치미학의 토대가 되는 예술의 혁명적, 해방적 기능을 강조했다. 마르쿠제와 유사하게 그도 후기자본주의 예술에서는 결국 자본이 환상을 정복했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환상은 현실원칙을 붕괴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형식은 욕망이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은 욕망의 현실적 파괴, 즉 현실의 비참함 마저 상상력의 대상으로 삼는다”46)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환상이 단순히 상상력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영역을 정복함으로써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혁명 예술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예술의 ‘선전‧선동 기능 die agitatorische und die propagandistische Funktion’ 이다. 이 중 예술의 ‘선동’ 기능이란 인간의 능력과 욕망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동원 능력으로서, 그 핵심은 욕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표출되지 못한 욕망을 혁명에 접목시키기 위해서 이 욕망을 우선 억압상태에서 끌어내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는 노동자, 학생들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게끔 도와주고, 나아가 그들에게 정치적 활동의 길을 제시하여야 한다.47) 두 번째 기능인 ‘선전’이란 “예술 작품에 보존된 인류역사의 욕망과 동경을 다시 끄집어내 이를 마침내 실현 가능하도록 만드는 die alten, in den Kunstwerken aufbewahrten Wünsche und Sehnsüchte der Menschheitsgeschichte wieder hervorzuholen, um sie endlcih der Verwirklichung zugänglich zu machen”48) 것이다. 인류가 써 내려온 욕망의 역사가 지닌 유토피아적 모습을 발굴하고 이를 실현시킬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적 ‘선전’의 핵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나이더는 예술가의 역할이 사회의 변혁에 있다고 보고 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 Ⅳ. 68운동의 문학(화)사적 의미 68 이 제기한 것이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의 참여와 자치, 곧 민주주의의 일상화와 ‘보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점에서 68은 아직 미완의 역사이다. 68이 비판한 서구 복지사회가 감추고 있는 냉혹한 일상의 현실, 즉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대학에서 학생에 대한 교수의 권위, 시민에 대한 정부의 권리, 흑인에 대한 백인의 우위, 제3세계에 대한 선진세계의 지배,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의 지배, 남성에 대한 여성의 차별 등은 대부분 오늘날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심과 우열을 인간의 협동과 존엄으로 대체하자는 그들의 외침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68은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했던 전통 좌파와 달리 일체의 위계적 조직형태를 거부하고, 일상 영역에서의 참여와 자치를 통해 새로운 삶의 양식과 문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점에서 68은 이후 지속되고 있는 서구사회의 자율적 시민운동인 여성운동, 평화운동, 생태운동 등의 신사회운동을 배태하였다.49) 그렇다면 68운동이 내포한 문화적 의미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새로운 삶의 양식에 수반된 일상적 대안문화의 창출이다. 쿤첼만을 위시한 반문화 그룹이 주도했던 반권위주의 문화와 대안적 의미의 공동생활체인 코뮌, 젊은이들 사이에서 의식의 확장을 위해 유행한 여행‧약물 문화, 그리고 운동의 정점인 1968년 급진민주주의 정치투쟁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었던 선동문화, 예를 들어 기성질서에 대한 불만과 운동의 전망을 표현하는 포스터 등 다양한 예술작품, 그리고 반전 캠페인을 실은 다양한 잡지와 소식지들 등을 그 구체적 실천의 예로 들 수 있다. 학생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1967-69년 동안 다양하게 발전된 문학형식은 계몽적 또는 즉흥적 성격의 ‘선전‧선동문학’이었다. 선전‧선동문학은 앞에서 다룬 정치운동의 두 분파 - 반권위주의와 전통 마르크스주의라는 - 와 유사하게 다음의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그 중의 한 부류는 전통예술의 규범을 벗어난 반권위적-문화혁명적 성격을 띤 작품을 즐겨 쓴 젊은 작가와 지식인들로서 대표적으로 슈나이더, 델리우스 F.C. Delius, 카르순케 Y. Karsunke, 보른 N. Born 외에 헤르부르거 G. Herburger 등이 이에 속한다. 정치적 계몽을 강조한 다른 한 부류로는 SDS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분파와 밀접해 있었던 슈트 P. Schütt, 팀 U. Timm 그리고 휴프너 A. Hüfner등을 들 수 있다.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정치에 관심을 갖는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수많은 선동 서정시 die Agitprop-Lyrik 들이, 데겐하르트 F. J. Degenhardt, 쥐퍼크ㄹㅟㅂ D. Süverkrüp 등의 가수들이 소위 운동가요 및 세태를 풍자한 노래를 만들어 학생운동에 활력을 더하였다.50) 학생운동이 의도했던 기존 현실의 전복은 사회변혁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자기 감성의 표현, 지금까지 억압되었던 욕구와 희망의 표출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생활 양식과 의사 소통 구조의 개발 등 삶의 영역을 감성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학사적으로 68운동은 이와 같이 문학의 정당성과 사회적 기능의 문제를 새롭게 던진 것에 머물지 않고, 기록극(바이스 P. Weiss, 키프하르트 H. Kipphardt, 엔첸스베르거), 몽타쥬 등의 다큐멘타리 형식(룽에 E. Runge, 발라프 G. Wallraff), 즉흥적 가두극 Strassentheater, 저항 가요 그리고 하위문화 그룹 내의 ‘팝 Pop’형식(브링크만 R. D. Brinkmann, 비이넥 H. Bienek) 등 새로운 표현 매체들을 발굴하고 개발51)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중 팝형식 은 전통적 참여문학관의 의미에서 문학을 사회변화라는 잣대에 들이대지 않고,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문학내용과 형식들로 독자의 의식으로 파고 들어가 - 사회인습과 고정관념의 지양이라는 의미에서의 - 혁명과 자극 그리고 구체적 의식변화를 모색했던 시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처럼 새로운 예술은 마르쿠제 식으로 “일상의 미적 실천”을 통해 정치에 용해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68운동이 문학(화)사에 그은 큰 획은 문학의 정치화와 정치적, 혹은 사회적 행동의 미적 감성화 Ästhetisierung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해방은 정치적 그리고 미적 감성적 해방이었다. 그리하여 예술의 감성적인 성찰의 힘보다는 ‘제 2의 자연적인 감성의 형태’를 띤 문화산업과 상품미학의 체계가 현실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형식미의 자율성에 기초한 저항과 유토피아에 기대고 있는 전통적 자율성의 미학이 거부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45년 이후 학생운동 이전까지 문학은 미적으로 자율적이고, 정치적으로 도덕적인 토대에서 현실을 비판해 왔다면, 68운동은 이와 같은 기존의 예술관에서 나온 예술과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전도된 세상’에 대해 단순히 미적으로 저항하려 하지 않고 혁명적으로 그 현실을 해방된 세상으로 ‘뒤집으려’ 한 것이었다.52) 참고문헌 로널드 프레이저 저, 안효상 역: 1968년의 목소리. 박종철 출판사 2002. 조지 카치아파카스 저, 윤수종 역: 정치의 전복 - 1968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이후 2000. Abendroth, W./Brückner, P. u.a.: Die Linke antwortet Jürgen Habermas. Frankfurt/M 1968. Adam, W.: Sehnsucht nach Sinnlich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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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ntiautoritäre’ Kritik und Aktion der deutschen Studenten zielte auf die Universität, die Notstandsgesetze, den Faschismus, die Massenmedien und den Viet-namkrieg. Die kapitalistische Gesellschaft basierte in den Augen der 68er nicht bloß auf Ungerechtigkeit, Unterdrückung und Lüge, sondern sie riegelte das Individuum geradezu systematisch von Erfahrung und Erkenntnis ab. Auf dem Höhepunkt der deutschen Studentenbewegung entstanden daher viele neue Formen von gegenkultureller Lebens-praxis, die mit politischem Kampf in enger Verbindung standen. Als Beispiele dafür sind Kommuneprojekte, die Raubdruckbewegung und neue Formen des politischen Handelns wie Happenings und Teach-Ins zu nennen. Die vorliegende Arbeit ist ein Versuch, die kulturkritischen Ansätze der Studentenbewegung und ihre literarischen Konsequenzen zu skizzieren. Es wird zuerst die Vorgeschichte der 68er Bewegung im Hinblick auf den Strukturwandel der westdeutschen Gesellschaft dargelegt. Dann folgt die Rekonstruktion der grundlegenden Positionen der Studentenbewegung, die mit ihrem kulturrevolutionären Konzept die Literaturdiskussion bzw. -praxis jener Jahre wesentlich prägte. Das subjektivistische Revolutionskonzept der Neuen Linken betonte die revolutionäre Rolle der Intelligenz und damit den Vorrang der Kulturkritik. Das schlug sich nicht nur in kulturrevolutionären Aussagen, sondern auch in ihren Versuchen zur Neubestimmung der gesellschaftlichen Funktion von Literatur nieder. 1967/68 fanden die Reflexionen über die politisch-operative Literatur eine breitere Resonanz unter den links orientierten Studenten. Enzensberger verkündete 1968 den Tod der Literatur. In der Folge setzten sich gleichartige Erklärungen gegen die künstlerische Literatur fort. Sie bezogen Stellung gegen den traditionellen, ästhetischen Wert der bürgerlichen Literatur und forderten eine neue politische Literatur. Die politische Ästhetik der Studentenbewegung ging davon aus, dass das Kunstwerk als ein Artefakt nicht mehr der zentrale Gegenstand der ästhetischen Theorie sein könne. Dieser Verzicht auf die Kategorie des Kunstwerks führte dazu, die Literatur zu einem Organon der Revolution zu machen: durch die Entwicklung alternativer, nicht vom Kapital kontrollierter Produktions- und Vertriebsweisen und durch die Reaktivierung und Weiterentwicklung agitatorischer Formen wie Reportage, Lied und Song, Agit-Prop-Lyrik usw., was aber wiederum gewisse Ähnlichkeiten mit den spektakulären Auftritten und Texten von Avantgardisten zeigte. Die 68er Bewegung, die versuchte, Kunst und Leben bzw. Kultur und Politik neu zusammenzudenken, ver-änderte durch ihre Theorie und Praxis die bundesrepublikanische Gesellschaft nachhaltig. 키워드: 학생운동, 문화혁명, 신좌파, 주관성, 문화비판 Studentenbewegung, Kulturrevolution, Neue Linke, Subjketivität, Kulturkritik ․투고 : 2003년 7월 9일 ․심사 : 2003년 11월 10일/11일 ․게재확정 : 2003년 11월 28일 로미네(gardiner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