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그리고 이승만... 大韓民國 (4)
時間은 1930년대로 거슬어 올라간다.
1933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全 世界에 알리고 자주독립 국가로서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장으로 날아간 이 승만은 현지 주요 언론매체들과 인터뷰를 통해 조선과 만주를 불법 점령한 일본이 조선인을 불법 체포하고
학살하고 있다고 폭로해 회의 참가차 모여든 많은 나라 외교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 1933년 2월 국제연맹회의 참석차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과
주요 신문과 인터뷰 내용.
결국 日本은 만주로부터 철수하라는 국제연맹의 결정에 불복하고 1933년 2월24일
연맹을 탈퇴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조선의 독립 문제는 이때도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다. 이미 1905년 美-日간 가쯔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속국화 하기로 이미 양국간에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약육강식의 엄존한 현실을
통감한 이승만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
그러던중 다행스럽게도 초로의 이승만(58세)은 제네바에서 평생의 반려 미스 프란체스카(33세)를 만난다. 제네바 레만호수가 에 자리잡은 ‘루이’호텔 로비에서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빈 자리를 찾던중 교양과 품위있는 모녀와 합석하게 된 것이 평생의 연을 맻게 될 줄이야…
원래 이승만은 16歲에 朴氏 부인과 정혼하여 슬하에 太山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뎐중 1905년 高宗의 밀사로 미국으로 은밀히 파견되어 美대통령 데오도오 루즈벨트를 그의 휴양지까지 찿아가 어려운 면담을 했으나 대한제국의 안전을 보장 받지 못했다. 한계를 느낀 이승만은 실력을 연마하여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추구하기로 인생행로를 전환하게 된다.
美 東部로 이주해 죠지 와싱톤大 學士(1905), 하바드 석사 , 그리고 프린스턴大에서
박사(1910) 과정을 수료했다.
교육 기간중 이승만은 朴氏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큰 아들 太山 君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함께 기거하던중 디프테리아로 사망에(1906년) 이르게 된다.
代를 이을 외아들이자 장손을 잃었으니 아버지로서 슬픔이 극에 달했다.
필라델피아 뷰론 공동묘지에는 오늘날에도 太山君의 묘비가 남아 있다.
* 1906년 이승만과 朴氏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太山君은 미국으로 건너 간 후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함. 필라델피아 뷰론 공동묘지에 묻히다.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이승만은 귀국을 서두른다. 노벨평화賞 수상자이며, 약소국 조선인의 계몽을 위해 한성/서울에 YMCA를 설립 운영하고 있는 존 모트박사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YMCA 실무책임자로 부임 朝鮮의 엘리트들에게 바같 세상의 변화와 신지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이승만의 名講을 청취하기 위해 명동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부의 감시망이 이승만의 이런 행보를 그대로 둘리 없었다.
* 이승만은 절대절명의 위기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위 사진은 그렇게 이승만을 도운 사람들 이다.
1911년 드디어 우려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105인 체포사건”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기독교인 중심의 조선 지식인 105인을 강제로 체포 연행한 사건이 발생 했다. 이번에는 구실거리가 없어 모면하였지만 다음에는 불보듯 뻔한 차례였다. 설립자 ‘존 모트’ 박사가 비밀리에 이승만을 불러 제의하였다.
미국에서 YMCA 관련 회의 참석차 출국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한번의 타향살이를, 아니 조국이 독립하지 못 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길이 될지도 모를 …
출국길에 이승만은 일본에 잠시 체류하는동안 在日조선유학생들과 會合의 기회가
마련되어 그의 조국에 대한 포부와, 국제정세형편과 자주 독립의 당위성을 그야말로
獅子喉를 토해가며 유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감동시켰다.
後日 역사는 이승만의 이때 강연에 영향을 받은 많은 유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한다.
1913년,이승만은 하와이 이민 한인단으로부터 간청을 받아들여 하와이애서 이민자녀 교육을 위해 정착하기로 한다.
우리나라는 1902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민을 시작하여 1910년대에는 생활도 점차 안정되고 이제는자녀들의 교육과 정신적 성장을 염려해야 할 시기에 명성있는 이승만을 자녀 교육의 멘토로 초빙하자는 교민들의 간청이 있어 2세 교육과 정신적 자주 독립사상을 啓夢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식 韓人교육기관으로 인가 설립하는 데에도 이승만의 품격있는 덕망과 학식, 특히 그의 Havard 와 Princeton 졸업에 대한 메리트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도 위력을 발휘 했다.
하와이에서 이민 2세대 교육에 전념하면서 거류 한인단의 권익보호와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승만은 韓人同志會를 조직하고 독립자금도 모금하였다
그러던중 지도부에서 한인회 운영과 독립자금 모금, 사용에 관련 이견을 갖게 되었고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한성 감옥에서 함께 지냈던 박용만은 독립군을 양성해 일본에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도산 안창호 先生은 ‘민족 개조론’에 입각해 국민 계도를 통해 자주성과 주인정신을 고양함으로 독립을 쟁취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후속세대를 교육계몽하여 자력갱생의 실력과 외교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을 추구하자고 주장 하였다.
사실 영어에 능통하고 꾸준하게 국제정세를 파악해 온 이승만은 당시에
일본이 淸日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마침내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제는 중국을 위협하는 세계 5대 강국의 일본에
물리력으로 대결한다는 것은 전혀 승산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 정규군은 3백5십만 명을 넘어 섰으며 가장 왕성 할 때 북만주지역의
조선 독립군은 모두 3천명 수준으로 무력을 통한 독립 투쟁은 전혀 불가능 했다.
당장 上海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臨政府와 북만주를 주 활동무대로하고
있는 독립군들의 안위가 더욱 문제가 되었다.
이미 많은 독립군들이 일본 關東軍에게 잡혀 죽거나 조선족들이 학살 당하였다.
그래서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갔을 때에도 일본 식민 피지배국으로서
회의장 입장 자격은 얻지 못했으나 유명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참석차 모인
외교관들을 통해 조선의 일본 식민지배 부당성과 만주지역에서 독립군과
조선족 학살에 대한 잔학성을 널리 알렸다.
국제연맹회의 참가중에도, 연맹 창설의 주역을 담당했던 우드로 윌슨 美 대통령과
프린스턴大 은사이자, 각별한 사이로 이승만은 많은 배려를 받았다.
[출처] 대한제국 그리고 이승만... 大韓民國 (4)|작성자 ybh5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