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민족최대명절
연 날리기 행사 모습. 예부터 어린 아이들이 설날 이후 3일이 지난 다음부터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옛 기록들에 의하면 원일(元日) · 원단(元旦) · 원정(元正) · 원신(元新) · 원조(元朝) · 정조(正朝) · 세수(歲首) · 세초(歲初) · 연두(年頭) · 연수(年首) · 연시(年始)라고도 하는데 이는 대개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설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명절을 맞았다.
설의 유래
설이라는 말의 유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이에 관한 여러 의견이 있는데 삼간다는 뜻으로서, 새 해의 첫날에 일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연유했다는 견해와 ‘섦다’의 뜻에서 유래된 뜻으로,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에서 생겼을 것이라는 견해, ‘설다, 낯설다’의 의미로 새로운 시간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하여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생겼다는 견해, 한 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생겼을 것이라는 견해, 마지막으로 설이라는 말이 17세기 문헌에 ‘나이, 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 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설에 관련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설은 일제 강점기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 실효가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여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공휴일이 되었다가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다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섣달 그믐날 풍속
그믐 전날, 궁궐에서는 나희(儺戱)를 하며, 이때 신하들은 윤목(輪木)을 던지는 놀이를 한다. 15세기 말에 저술된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나희는 나례라고도 하는데,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초라니를 삼아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 보내면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와 함께 새벽에 이르러 쫓아내는 놀이로서, 잡귀를 쫓는 놀이이다. 윤목은 12면에 각각 하나씩 동물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3개를 던져, ‘사(獅)’자가 많이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의 대문과 건물 창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세화(歲畵)라고 부른다. 처용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문에 걸어 잡귀를 쫒는 풍속은 [용재총화]에 보이는데, 고려시대의 문헌인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풍속은 신라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저술된 문헌에는 이 처용이 세화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그림들의 이름과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도중에 사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도화서(圖畵署)에서 그려 올렸는데,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여, 지금 많은 그림들이 민화로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풍속은 지방의 관아에서도 있었다. 섣달 그믐날은 까치설날이리고 하여, 어린아이들은 미리 설빔으로 갈아 입고, 어른들은 서로 찾아보고 인사하는데, 이것을 과세(過歲) 또는 ‘묵은세배’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초에 바쁘기 때문에 미리 세배를 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에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한편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 진다고 하여 밤을 세우는데, 이를 수세(守歲)한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고 일찍 잔다고 한다.
운룡도(雲龍圖). 세화(歲畵)는 신년을 송축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림이다. 운룡도는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내부에 그려진 그림으로 용(龍)은 풍요로움과 희망의 상징으로 신비한 능력이 있으며, 장원급제, 만사형통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설날 아침의 풍속
조선시대 국가의 의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정월 초하루 새벽에 종묘에서 임금이 큰제사를 올린다. 날이 밝으면 궁궐에서는 왕이 왕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쪽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이어서 왕은 왕세자와 백관, 왕세자빈으로부터 조하의(朝賀儀)를 받거나 지방관들에게서 올려 온 방물과 전문 등을 받는다. 벼슬아치들은 다투어 친척과 동료들의 집에 가서 명함을 문안에 던지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을 설치하여 받기까지 하였다. 이것을 세함(歲啣)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새 옷을 갈아 입는 날은 1년에 3일뿐인데, 설날을 비롯하여 수릿날(端午)과 가위날(秋夕)이 그것이다. 이러한 명절날에 입는 옷을 특히 ‘비음’이라고 하는데, 이날 새 옷을 입는 것은 새로운 사회적 지위나 생활단계에 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통과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어른들은 설날 아침에 설비음[세장(歲粧)] 위에 예복을 차려 입고, 사당이나 대청에서 4대 조상의 신주를 내어 모시고 차례로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돌아온다. 설차례에는 떡국을 올리고 차례를 지낸 다음에 음복으로 함께 모여 비로소 떡국을 먹는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나이가 삼재에 드는 사람들은 3마리의 매를 그린 부적을 문설주에 붙인다고 하였다.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이웃의 어른들께나 친구끼리도 서로 집으로 찾아 가서 세배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이때에 서로 나누는 말들을 덕담(德談)이라고 하는데 덕담의 표현은 시제를 항상 과거형으로 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덕담의 형식이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한 축원으로 변하였다. 어린이들에게는 세배돈을 주는 풍속이 전해오며, 세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하는 음식을 세찬(歲饌), 그리고 술을 세주(歲酒)라고 한다.
설의 놀이와 연희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를 하였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이것은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설음식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 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음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설 상차림 모습.
차례 절차
(1) 재계(齋戒): 근신하고 목욕재계하며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2) 설위, 진기(設位. 陳器): 차례 지낼 곳의 위치를 정하고 기구를 배설한다.
(3) 수축(修祝): 평소에 신주가 안 계시면 지방으로, 축문을 읽을 예정이면 축문을 쓴다
(4) 척기, 구찬(滌器, 具饌): 제기를 닦고 제수를 마련해서 큰 상에 차린다.
(5) 변복취위(變服就位): 자손들이 옷을 챙겨 입고 정한 위치에 선다.
(6) 설소과주찬(設蔬果酒饌): 식어도 상관없는 제수를 먼저 차린다.
(7) 신위봉안(神位奉安): 윗대부터 차례로 교의 위에 신위를 모신다.
(8) 분향(焚香): 제주가 읍하고 끓어 앉아 향을 세 번 사르고 재배한다.
(9) 강신(降神): 제주가 읍하고 끓어 안자 집사가 강신잔에 따라 주는 술을 모사기에 세 번 나누어 모두 지우고 재배한다.
(10) 참신(參神): 제주를 비롯한 모든 남자는 재배 여자는 4배한다.
(11) 진찬(進饌): 적과 함께 식어서는 안될 모든 제수를 웃대 제상부터 차례로 올린다.
(12) 헌작, 유식(獻爵, 侑食): 제주가 주전자를 들어 윗대 고위의 잔부터 아랫대 비위의 잔까지 차례로 다르고 주부는 윗대 고위부터 아랫대 비위까지 차례로 숟가락을 떡국에 꽂고 젓가락을 골라 시접에 걸쳐 놓는다.
(13) 낙시저(落匙著): 7~8분가 조용히 시립해 서 있다가 주부가 윗대 고위부터 차례로 숟가락을 뽑고 젓가락을 내려 시접에 담는다.
(14) 사신(辭神): 모든 자손이 남자는 재배, 여자는 4배 한다.
(15) 납주(納主): 신위를 원래 자리로 모신다. 지방이 있으면 태워서 재를 향로에 담고, 축문을 읽었으면 축문도 태워 재를 향로에 담는다.
(16) 철찬(撤饌): 제례음식을 제상에서 내린다.
(17) 음복(飮福): 자손들이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조상의 유덕을 기린다.
세배 드리는 법
정월 초하룻날에 하는 새해의 첫인사이다. 설 차례를 지낸 뒤 자리를 정하여 앉는다. 조부모, 부모에게 먼저 하고 형, 누나 등 나이 차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한다. 세배를 드려야 할 어른이 먼 곳에 살고 있을 때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예절에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배하러 오는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아이들에게는 약간의 돈 또는 떡과 과일 등을 내놓는다.
● 절하는 법
<남자>
1) 공수한 자세로 선다.
2) 허리를 굽혀 공수한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손을 벌리지 않는다.)
3) 왼쪽 무릎을 먼저 꿇는다.
4) 오른쪽 무릎을 왼쪽과 가지런히 꿇는다.
5) 왼발을 아래로 오른발을 위가 되도록 발등을 포개며 뒤꿈치를 벌리고 엉덩이를 내려 깊이 앉는다.
6) 팔꿈치를 바닥에 붙이며 이마가 손등에 닿도록 조아린다(이때 엉덩이가 들리면 안된다.)
7) 머리를 들며 팔꿈치를 바닥에서 뗀다.
8) 오른쪽 무릎을 먼저 세운다.
9) 공수한 손을 바닥에서 떼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는다.
<여자>
1) 공수한 손을 풀어 양 옆으로 자연스럽게 내린다.
2) 왼쪽 무릎을 먼저 꿇는다.
3) 오른쪽 무릎을 왼쪽과 가지런히 꿇는다.
4) 오른발이 아래로 왼발이 위로 가게 발등을 포개며 뒤꿈치를 벌리고 엉덩이를 내려 깊이 앉는다.
5)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여 모아서 손끝이 밖(양 옆)을 향하게 무릎과 가지런히 바닥에 댄다(엄지를 벌리지 않는다.)
6) 윗몸을 반쯤(45°) 앞으로 숙이며 손바닥을 바닥에 댄다(이때 엉덩이가 들리지 않아야 하며, 어깨가 들려 목이 묻히지 않도록 팔꿈치를 약간 굽히는 것이 좋다.)
7) 잠시 머물러 있다가 윗몸을 일으키며 손바닥을 바닥에서 뗀다.
8) 오른쪽 무릎을 먼저 세우며 손끝을 바닥에서 뗀다.
9) 일어나면서 왼쪽 발을 오른쪽 발과 가지런히 모은다.
10) 공수하고 원자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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