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21)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가 그대로 성취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창27:1~17)_2021-06-14(월)

by 갈렙 posted Jun 14,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동영상URL https://youtu.be/VxOSac00XXs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1)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가 그대로 성취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창27:1~17)_2021-06-14(월)

https://youtu.be/VxOSac00XXs

 

1. 구약성경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구약성경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요5:3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통전적이고도 예표론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이러한 해석방법을 따라갔으니 그는 또한 통전적이고도 예표론적인 방법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그림자이자 모형이요 그리고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말씀은 그것에 대한 본체와 실체요 열매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마22:32). 또한 사도바울도 역시 이삭에 대하여 약속의 씨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으며(갈3:16), 리브가를 교회의 예표로 보았습니다(엡5:32~33).

 

2. 이삭의 장자축복사건은 어떻게 끝이 났나요?

  만약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서 축복하려던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에서와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는 정반대로 끝이 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에서만을 장자로 여겨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야곱을 에서로 알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3. 이삭의 장자축복사건은 예표론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고로 우리는 이삭의 장차축복사건도 역시 예표론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에 해당하며, "리브가"는 교회의 모형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에서축복사건 실패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비록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예표론적으로 보아야 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16살 무렵에 이미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사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본인이 그것을 사모하고 바라고 열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안개처럼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를 매우 갈망하고 또 갈망했습니다. 그리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기어코 장자권을 사 놓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그의 아버지가 우둔해진 것도 한 몫 했습니다(창27:2, 22~23). 왜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던 이삭이 그때에 눈이 잘 안보였기 때문입니다. 계산해보면, 이삭이 장자를 축복하려 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136세 때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76세였습니다. 그러니 에서는 이미 36년전에 결혼을 하여 많은 자식을 둔 상태였지만, 야곱은 아직까지 장가도 가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느날 자신의 눈이 침침해진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 자식을 축복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이 잘 안 보이게 된 것은 그 순간에만 있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이삭은 무려 44년을 아주 건강하게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표론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스스로 약하게 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해지심으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으나..."(고후13:4). 그렇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전능자이십니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할 그 순간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께서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요10:18, 18:4~6). 그래서인지 이삭도 이때만 시력이 좋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셋째,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식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창25:23)이 이뤄지기까지 무려 76년간이나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오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러다가 들키게 되면 모든 저주는 자신이 받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니 둘째아들에게 자신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야곱)에게 이르기를,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고 내 말만 듣고 가서 가져오라(창27:13)". 이 얼마나 간절한 기대이며 인내이며 열망입니까? 사실 그녀는 시집오기전, 그녀의 작은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보낸 늙은 종을 보았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누구보다도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삶이 어려울 때에는 기도할 줄 알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4. 리브가가 에서를 장자로서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의 아들들(쌍둥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리브가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신 내용이 두 아들들의 미래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창25:23). 그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기도응답은 그녀로 하여금 "야곱"이야말로 장자의 복을 받을 바로 그 아들이라고 하는 마음을 굳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리브가는 자신의 아들 에서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족속인 헷족속의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기 때문입니다(창26:34~35).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36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에서에게서 얼마나 많은 손자손녀들이 태어났겠습니까? 그러니 리브가의 마음에는 이제 남은 것은 야곱밖에 없다고 더욱 생각했을 것입니다. 

 

5. 교회의 예표인 리브가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회와 및 성도는 어떤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있나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해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2:18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하와"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요, 하와는 그리스도의 돕는 배필(교회)의 예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브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하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이 저주를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창27:13). 그런데 과연 우리들 중에 이러한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끝까지 수십년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할 자들이 또 얼마나 될까요? 결국 우리는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장자의 축복이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1년 06월 14일(월)

정병진목사

20210614_071543[크기변환].jpg

 


Articles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